태섭대만 «2000년 문제 (4)»
7
“수종이가 뭐라고 안 해요?”
일주일 만에 벌어진 회식 자리에서 팀원이 입을 열었다. 음식이 나오고 분위기가 무르익은 때였다. 슬라이스 된 감자를 반으로 쪼개면서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정대만이 의문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말…. 아무 말 안 한 것 같은데?”
별 뜻 없이 대답한 후에야 분위기가 살짝 묘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옆에 앉은 팀원들이 그의 반응을 신경 쓰고 있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정대만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첫 연습경기에서 팀원들과 섞이지 못하고 묘하게 붕 떠있던 권수종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문젠가?’
뭔가 켕기는 일이 있는 거라면 궁금하긴 했다. 편안한 상대였다면 대놓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캐물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대만은 직감적으로 가만히 있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자초지종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쪽은 저쪽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던 것이다.
‘뭐…. 말하고 싶으면 말해주겠지.’
감자를 입에 집어넣으며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으니 팀원 하나가 다시 말을 던졌다.
“수종이가 첫날 그렇게 군 거요.”
“응? 첫날?”
대만이 고의로 비협조적으로 군다고 판단한 상대가 어물거리며 대화를 닫았다.
“그…. 아니에요.”
“덩크 꽂던 거?”
대만이 의문스럽게 되묻자 옆에 있던 팀원이 몸을 기울였다.
“음, 네. 기분 안 나쁘셨어요?”
“뭐….”
그날 자신의 슛감이 나빴으면 순간적으로 좀 약은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정대만은 그날 연습경기에서 자신이 보여준 기량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나 잘했는데? 오히려 팀원들이 상상도 못한 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이 상황이 그로서는 더 난처할 다름이다.
“엄청 잘하던데요.”
결국 이렇게밖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 팀원들은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대신 벌어진 판을 수습하려고 들었다.
“수종이가 잘나긴 했지. 유학파라 거침이 없다고 해야 하나.”
“기분 안 나쁘셨으면 다행이에요. 수종이가 원래 좀 그런 면이 있어서.”
맞은편 사람들이 익살스럽게 대화 주제를 웃어넘겼고, 옆자리에 앉은 팀원이 그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원래 그렇다라….’
젓가락질도 멈추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대만이 자연스럽게 물컵을 들어 올리면서 물었다.
“수종 씨가 몇 살이었죠?”
“76년생이던가.”
팀원 하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물셋이면 76년생이죠?”
“어. 맞는 것 같다.”
‘나보다 어리네?’
물을 마시면서 정대만은 얼추 상황을 눈치챘다. 스페인 유학파라는 독특한 이력 때문인진 몰라도 수종과 팀원들이 살갑게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영입된 지 반 년 밖에 안 된 신규 인력인 탓도 있긴 할 것이다. 엉뚱하게도 대만은 이 상황에 대한 연장자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
‘다음에 연습 끝나고 다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할까.’
이제 팀원들은 살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다수가 미혼인 데다 자취생이 많은 팀 분위기상 살림에 이것저것 훈수를 두는 이들이 많았는데, 때마침 세탁한 옷을 옷걸이에 널어서 말리는 것도 모자라 다림질조차 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몰매를 맞는 중이었다. 대화를 따라잡던 대만은 속으로 삐질댔다.
‘옷걸이에 널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러고 보니 대만 씨는 집에 옷장 있어요?”
“본가에서 갖고 오려다가 너무 무거워서 그냥 두고 왔어요.”
“엑, 그럼 옷은 어디다 보관해요?”
팀원들이 경악해서 대만을 쳐다보았다.
“그야 옷걸이에…?”
“아니 그래도 그렇지. 공간이 부족하지 않나?”
“뭐, 그때그때 세탁소에 맡겨놓는 편이니까.”
“그럼 너무 번거롭잖아요.”
“그런가? 퇴근할 때 들리면 되죠. 내일 입을 거만 찾아오면 되고….”
잠시 조용했다. 벙쪄있던 팀원들이 곧이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대만 씨 안 그렇게 봤는데 되게 특이해.”
“좀 어려운 타입일 줄 알았는데 은근 허당이다.”
“그런가요?”
대만이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팀원들이 박장대소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턱 끝을 긁던 정대만도 어느새 웃고 있었다. 팀원들은 이제 편안한 태도로 그의 생활에 요목조목 적당한 참견을 얹어댔다.
“그러지 말고 미리미리 옷장 정도는 장만해둬. 조만간 필요할 거야.”
“맞아요. 계절 바뀔 때마다 옷가지가 두 배로 늘어난다니까.”
뭣하면 이케아에서 조립식 옷장이라도 주문해보라는 얘기가 오고 가던 중에 드르륵 가게 문이 열렸다. 출입문이 훤히 보이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팀원 하나가 웃는 낯으로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신호탄처럼 하나 둘 시선이 돌아갔다. 이내 테이블에 앉아있던 팀 전원이 반색했다.
“성준 형 오셨어요?”
“응, 먹고 있었어?”
“진짜 너무 오랜만이에요.”
정대만은 몸을 틀어 테이블로 다가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서늘한 바람 냄새와 함께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그가 누군지 깨달은 대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전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긴장이 풀어져 있던 그는 무척이나 친근한 태도로 드디어 만나게 된 새 팀의 주전 포인트 가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단하게 된 정대만입니다.”
“아, 대만 씨. 얘기는 전해 들었어요. 연습 때도 장난 아니라면서요?”
남자는 그의 손을 붙잡고 두어 번 싱겁게 흔들었다.
“강성준입니다.”
손을 놓은 성준은 자연스럽게 대만을 지나쳐 팀원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대만이 테이블을 둘러보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미리 연락을 준 게 아니었는지 팀원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강성준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했다. 서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느라 분위기가 금방 어수선해졌다.
“왜 이래. 그냥 얼굴들만 좀 보러 온 거야.”
성준은 난처한 듯 즐거운 투였다. 그는 테이블 끝에 앉은 팀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면서 팀 전체를 훑어보았다.
“얼굴 봤으니까 갈게.”
“에이, 무슨 소리야.”
“형 빨리 앉아서 좀 들어요. 우동 시켜드릴까요?”
“됐다니까 그러네.”
키득대던 성준이 아까보다 여유롭고 너그러운 분위기로 대만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일 봅시다.”
대만이 눈을 깜빡이다 인사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설마 정말 가려나 싶었는데 성준은 진짜로 얼굴만 비추고 떠났다. 아쉽다는 듯이 몇 마디를 주고받던 팀원들은 금세 다른 주제를 두고 떠들기 시작했다. 의자를 제각각 옮기다 만 탓에 테이블 주변이 어수선했고 분위기는 묘하게 산만해져 있었다. 다 함께 같은 주제를 두고 열렬히 토론하던 아까와 달리 서넛씩 쪼개져 대화가 동시에 돌고 돌았다. 혼자 물을 홀짝이면서 대만은 어리둥절한 기분을 털어냈다.
‘뭐지?’
때마침 사시미가 나오면서 생각은 깊게 이어지지 않았다. 술이 부재한 단체 회식 자리가 보통 그렇듯 모임은 일찍 파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대만의 뒤통수에 대고 팀원 두어 명이 들뜬 목소리로 꽥 소리를 질렀다.
“이제 세탁소 들렀다 가는 거예요?”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웃어댔다. 정대만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벌써 문 닫았을 시간인데!”
그러자 아예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대만은 눈썹을 익살맞게 찡그렸다가 돌아섰다. 즐거운 자리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약간의 피로함을 느꼈다. 알게 모르게 신경을 잡아먹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다음 날 연습 경기에 나타난 강성준은 어제 보여줬던 묘한 태도는 어디로 간 건지 먼저 친근하게 다가와 악수를 나누었다.
“잘 부탁해요.”
대만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예, 한 번 해봅시다.”
덕분에 정대만은 회식 자리에서 느낀 기분을 금방 털어버렸다. 성준은 내내 예의바르게 굴었고, 모두의 환대를 받으며 연습 경기에 임했다. 일주일 만에 처음 손발을 맞추는 것치고 그는 대만과도 괜찮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다만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패스가 너무 빠르게 돌아오는 순간이 있었다.
특히 정대만이 3점 라인의 좌측 방향에 서 있을 때 패스가 성급할 정도로 빨랐는데, 성준의 습관인 듯싶었다. 대만은 피드백을 나누기 위해 연습이 끝나자마자 성준을 찾아갔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야기를 듣고도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음. 그래요?”
“엉, 그래서 지금 같은 속도로 패스한다면 좀 낮게 던져줬으면 좋겠는데요.”
“흠.”
성준은 타올로 얼굴을 훔치면서 대답했다.
“신경 써볼게요.”
그런 다음 스포츠백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수고했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정대만은 멀어지는 성준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피드백을 주고받기 싫어하는 타입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농구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강성준은 최소한의 열의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이주일 동안 자리를 비운 것과 연관이 있나?
다른 팀원들과 금세 거리를 좁힌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준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벽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직감적으로 대만은 뭔가 감춰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아직까진 그런 예감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여자 친구 얘기 좀 들어주면 금방 친해지던데. 저 녀석은 애인 없나?’
이것이 다소 안일한 생각이었음은 며칠에 걸쳐 서서히 밝혀졌다. 연습 게임을 뛰다 말고 똑같은 일이 반복해서 벌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대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흘 내내 좀처럼 패스 타이밍에 변화가 없자 결국 다시 강성준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말했던 패스 말인데요.”
“아, 네.”
“너무 빠르거든요.”
성준은 꼭 처음 듣는 것처럼 되물었다.
“그래요?”
“네. 이 속도가 편하면 조금만 낮게 던져주세요. 맞춰볼 테니까.”
‘이 자식, 고의로 이러네.’
짜증보다는 의문이 앞섰다. 왜 이러지? 멀뚱멀뚱 성준의 얼굴을 쳐다보던 대만이 물었다.
“혹시 피드백이 불편해요?”
“예?”
성준은 정말로 깜짝 놀랐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그렇지 않은데요.”
“그럼 같이 집중 좀 해봅시다. 곧 있으면 경기도 있는데.”
5월에는 서태웅과 맞붙게 될 것이다. 대학 리그 시절 대만은 당시 국가대표였던 서태웅과 한 번 붙어본 적이 있긴 했지만 태웅이 미국에서 돌아온 뒤로는 제대로 경기해 본 적이 없었다.
예나지금이나 서태웅은 이름을 날리는 선수였다. 국내에서 톱으로 평가받는 이들 중에서도 명성이 대단했는데, 그가 미국으로 떠났을 땐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는 선수들도 많았다는 것을 대만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개박살 나는 건 선배로서 면이 서질 않는다.
“제 후배 기세가 아주 대단하거든요.”
“예, 뭐….”
시원찮은 반응이었지만 정대만은 대수롭지 않게 분위기를 털어냈다. 그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보다 우리 팀 포인트 가드 님은 불만 없으십니까?”
어깨동무를 하자 성준이 잠깐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불만이 있겠어요? 열심히 해봅시다.”
성준이 대만의 등을 툭툭 치면서 일어났다. 대만은 멀어지는 성준을 바라보다 말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뭔가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곧이어 시작된 후반전에서 성준이 제대로 패스를 돌려주었던 것이다. 손으로 어림잡았던 자리에 기가 막히게 공이 들어왔다. 공을 받은 정대만이 순식간에 하프라인을 넘었다가, 상대팀 수비가 따라붙자마자 펀치 드리블로 방향을 휙 틀면서 슛 페이크를 넣었다.
다음 순간 오른쪽에서 같은 팀인 수종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따라붙었다. 대만이 타이밍에 맞추어 패스하자 공을 넘겨받은 권수종이 솜씨 좋게 레이업으로 연결했다. 2점이 걸린 공이 림을 깔끔하게 통과했다.
사인도 없이 진행된 것치고 연계가 괜찮았다. 수종이 코트를 넓게 써서 공간이 빈 덕이었다. 기특하다는 생각에 정대만은 권수종에게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수종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방금 진짜 좋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다음 순간이었다. 수종의 어깨를 두드리던 대만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강성준을 비롯한 팀원들이 멀거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다못해 사기를 북돋는 환호성이나 응원이라도 나와야 할 판인데 호응이 관짝에 들어간 시체만도 못했다. 대만을 제외하고 달려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권수종과 팀원들이 묘하게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던가? 갑자기 첫 경기서부터 차차 느껴왔던 위화감이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것 같았다.
호각이 불리고 연습 경기가 종료된 뒤 대만은 큰소리로 팀원들을 불러모았다.
“오늘 다같이 저녁 먹죠. 제가 쏩니다!”
팀원들은 반색했지만 흔쾌히 수락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 그런데 오늘 저 여자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전 집에 부모님이 오셔서 저녁은 좀 힘들어요.”
“저도 오늘은 조금….”
시간을 내기 힘들다는 인원이 절반을 훌쩍 넘었다. 대만이 어정쩡하게 남은 인원을 세어보는 동안 대다수가 다음을 기약하더니 슬슬 모임이 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제야 대만이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정작 이 모임 주최를 결심하게 만든 장본인은 이미 짐을 챙겨 나간 건지 보이질 않았다.
“그럼 다음주 화요일. 화요일엔 다들 시간 비워놔요.”
아직 라커룸에 남아 있는 팀원들에게 신신당부하면서 대만은 가방을 아무렇게나 걸쳐 매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행스럽게도 비상구 표시등을 지나쳐 복도를 빠져나오자마자 자판기 앞에서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있는 수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잽싸게 옆으로 따라붙자 수종이 고개를 돌리고 그를 쳐다봤다. 대만이 히죽 웃었다.
“집 가요?”
“그렇죠?”
“그럼 저녁 먹을래요?”
수종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요?”
“이 형님이 쏩니다.”
수종은 잠시 허공을 맹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요.”
수종은 자차가 있긴 했지만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었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대만이 멀리까지 나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가까운 쇼핑센터에 가자고 먼저 제안했다. 거기에 제법 맛있는 규탄야끼(*소 혀 구이)점이 있다는 거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대만이 으엑 소리를 냈다.
“거기에 그런 데가 있다고?”
“요크 타운에 은근 먹을 데 많아요.”
“진짜요? 없던데?”
“찾아보는 성의가 없으시네.”
대만이 끙 소리를 냈다.
“근데 규탄야끼 그거 먹을만해요?”
“안 먹어봤어요?”
“어릴 때 몇 번 먹어보긴 했는데… 맛있던가?”
“그냥 입에서 더 잘 쪼개지는 안심 같아요.”
두 사람은 신덴히가시 해양 센터를 빠져나와 한산한 길거리를 걸었다. 저녁 7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도 아직 하늘이 밝아서 가로등이 켜지기 전이었다. 한창 붐빌 시간대치고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국유화 문제로 시끌벅적했던 일본장기신용은행 앞에는 난해한 형상의 철제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맞은편 편의점에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파란색 간판 불빛이 반들반들한 조각상 위에 고요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권수종은 보기보다 말수가 많아 가는 내내 자기 얘기를 떠들어 댔다. 스페인 유학 시절 자취방에서 벌어졌던 에피소드나 대학 팀 시절 만난 선수들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일본과 따지고 비교하더니, 심드렁한 투로 여기 생활은 그저 그렇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대만은 시종일관 맞장구를 치면서 수종과 말까지 놓았는데, 사실 생각과 달리 지나치게 쌩쌩한 수종 때문에 그는 살짝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상태였다.
저녁을 먹고 나오면서 대만은 슬그머니 팀 얘기를 흘렸다.
“너 괜찮은 거냐?”
“뭐가요?”
“팀원들이 너 무시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원래 분위기가 이래?”
수종이 눈을 땡그랗게 뜨더니 곧이어 가자미눈을 했다.
“아뇨? 저 무시하는 거 맞는데요.”
대만이 경악했다.
“뭐? 근데 왜 그래?”
“그런 것에 하나하나 신경 쓰는 건 솔직히 미개해 보이고….”
단어 선택에 대만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수종은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전 잘하니까 상관없어요. 급 안 되는 사람들이 견제해 봤자죠. 그래봤자 팀에 필요한 사람은 저고요.”
“어…. 그러냐.”
수종이 대만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형은 의외로 잘 지내네요? 솔직히 저희 팀 사람 하나 내쫓고 분위기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들어오자마자 저처럼 될 줄 알았는데.”
내쫓아? 누굴? 그러나 되묻기도 전에 수종의 얘기가 그의 말문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하긴, 형이 잘하긴 해도 제 급은 아니니까.”
정대만은 애송이 시절에 비하면 제법 나이를 먹었고(그는 이제 스물여섯 살이었다), 지난 몇 년 간 농구 코트 위에서 이보다 더한 모욕이나 도발을 들어본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당황한 건 이곳이 코트 위가 아니라 일상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펀치를 맞은 거나 다름없었다. 정작 폭탄 발언을 던진 수종은 대만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악의가 없었다는 게 도리어 대만을 좀 열받게 했다.
“너 인마, 말을 왜 그렇게 해?”
살짝 성질을 내자 수종이 무고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뭐가요?”
“뭔 급? 너 같은 팀원끼리 대놓고 급 나누고 그러는 거 아니다.”
“아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수종은 어리둥절해 보였다. 한소리 하려던 대만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넌 진짜…. 됐다.”
‘이 자식 이거, 평소 사람들하고 말할 때도 이 모양인가?’
그렇다면 팀원들이 묘하게 수종을 거리껴 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열받지만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역사 앞에 도착할 때까지 생각에 잠겨있던 정대만이 문득 물었다.
“근데 아까 그 말 무슨 소리냐.”
“어떤 거요?”
“사람 쫓아냈다며.”
“아, 네.”
“회사에서 잘린 거야, 아니면 팀에서 계약 연장을 안 해줬다는 거야?”
“아뇨, 형 데리고 온다고 진짜 쫓아낸 거예요. 원래 있던 슈터….”
등 뒤로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땡땡거리는 차임벨 소리와 함께 어렴풋한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미지근하고 매캐한 바람이 수종의 등을 떠밀면서 대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수종은 뒤돌아 역사 쪽을 살펴보곤, 자기가 타고 갈 열차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다시 대만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얘기하려니까 기억이 안 나네. 이름 까먹었어요.”
대만은 얼빠진 표정이다가 한 템포 늦게 되물었다.
“어?”
“형, 저 2분 뒤에 열차 오거든요.”
“잠깐만. 그거 8번 얘기하는 거야? 영구결번?”
“네, 센다이 8번이요. 뭐야, 이미 알고 있네. 아무튼 내일 봐요.”
수종이 황급히 역사로 뛰어가는 걸 대만은 붙잡지 않았다. 수종이 대만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고기 맛있었어요!”
고기야 맛있었지…. 덩그러니 남은 대만이 미간을 찌푸리는 동안 차임벨 소리와 함께 다음 열차가 들어왔다. 수종은 곧 매표소 쪽으로 사라졌다.
8
팀원들은 눈치만 볼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의 입단속이 있었다기보단 그 일을 설명하는 게 자신을 나쁜 인간으로 만들까 봐 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요? 나 때문에 나간 거라던데?”
“누가 그래요?”
그 말에 대만이 머뭇거렸다.
“어? 수종이가….”
“아, 진짜. 걔는 가끔….”
팀원은 한숨을 쉬며 혀를 차더니 손을 내저었다.
“현우 형 쫓겨난 거 아니에요. 계약 기간 다 돼서 연장 안 한 거지.”
‘그 8번 이름이 현우였군.’
정대만은 작년에 만났던 센다이 8번 슈터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이겼다는 것 말고는 뚜렷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튼지 간에 기억 속에서 그는 좋은 선수였다.
문득 대만이 물었다.
“성준 씨랑 그 8번 선수가 많이 친했습니까?”
“네?”
순간적으로 팀원은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뭐, 현우 형이 원년멤버고 성준 형이 그 다음 해에 들어온 사람이라…. 둘이 친하긴 친했겠죠.”
‘말을 왜 이렇게 해? 친하면 친한 거지.’
정대만이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다섯 명의 팀원들에게 일을 캐묻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입을 맞춘 것처럼 이전 슈터가 쫓겨난 게 아니라고 일축할 뿐 제대로 자초지종을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다.
녀석들, 권수종 얘기는 물어보지 않아도 털고 싶어 하더니. 팀원들은 아니라고 했지만, 대만은 직감적으로 성준의 겸연쩍은 태도가 이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정공법으로 물어볼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사내에서도 정대만과 강성준은 부서가 갈렸고(대만은 전산센터에 배정돼 있는 반면, 성준은 경영정보처에서 일했다) 연습 경기가 끝나면 성준이 매번 인사만 마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잽싸게 달려가 붙잡으면 곧이어 팀원들이 몰려오거나 둘 중 하나를 감독이 불러내는 등 상황이 묘하게 애매해졌는데, 때로는 이게 꼭 고의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회식자리도 빈번히 불참했다.
이쯤 되니 자신을 피하고 있단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대놓고 피하는 게 아니라서 더 골치 아프게 느껴졌다. 싫은 사람 붙잡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팀워크가 좋을 리 없었다.
아니, 팀워크에 좋다 나쁘다를 따져야 한다면 ‘나쁘지는’ 않았다. 모두가 (적어도 경기에 한해서라면) 의사소통을 활발하게 주고받는 데다가 서로가 서로의 경기 스타일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개개인의 역량도 뛰어났다. 그러나 좋다가 아니라 ‘나쁘지 않다’ 정도로 평가되는 정도라면 확실히 만족스럽진 못한 것이다. 5월 연습 경기를 위해 도쿄 출장을 가기 전날에도 이 미적지근한 긴장 상태는 계속되었다.
유달리 서태웅이 반가웠던 건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기 전 자신을 만나러 온 태웅의 멀뚱멀뚱한 얼굴을 보자마자 대만은 저도 모르게 반색하며 큰소리를 냈다.
“어, 태웅아! 진짜 오랜만이다 인마.”
“예. 선배도요.”
태웅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애매모호하게 고개를 숙였다. 과하게 반가워하는 대만 때문에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만은 어깨로 태웅을 밀면서 낄낄댔다.
“못 본 새에 어깨가 더 떡 벌어진 것 같다? 짜식. 미국은 좋았냐?”
태웅은 고심했다.
“다들 선크림을 발라요.”
“뭔 선크림? 태양빛이 장난 아니야?”
“네.”
“야외에서 농구 못 할 정도로 뜨거웠냐?”
태웅은 잠시 머뭇거렸다.
“근데 그냥 했어요.”
“안 탄 거 보니까 선크림 잘 발랐나보네.”
대만은 서태웅을 센다이 팀원들 앞으로 데리고 갔다.
“야, 태웅아. 우리 팀원들이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하세요. 서태웅 선수 처음 뵙네요.”
인사를 시켜줄 줄은 몰랐던 건지 팀원들이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태웅에게 악수를 청했다. 고교 선배에게 잠깐 얼굴이나 비추러 왔던 서태웅은 졸지에 멀뚱히 서서 경기 시작도 전에 상대팀 주전 멤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기대할게요.”
“예.”
“살살 좀 부탁해요.”
“살살….”
“이야, 서태웅 선수. 저희 대학생 때 한 번 붙은 적 있는데 기억나요?”
“…….”
“야야, 서태웅. 너네 팀이 너 부른다.”
“네. 갈게요.”
몸을 돌리기 전 태웅이 대만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대만이 씩 웃었다.
“오냐. 이길 거니까 각오해라.”
태웅을 보내고 돌아오니 구석에 앉아 밧슈 끈을 묶고 있는 권수종과 팀원들과 함께 전술을 복기하는 성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만은 수종 쪽으로 걷다가, 성준을 둘러싼 팀원들이 코트 쪽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걸 보고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뒤따라 코트로 나가려던 성준이 걸음을 멈추었다. 대만이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첫 출장 경기니까 잘 해봅시다.”
성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야죠.”
‘그래도 웃긴 웃네.’
대만이 턱끝을 긁었다.
“거, 저번에 나갔다는 8번 말인데요.”
“아, 네. 현우 형이요.”
성준이 다소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저 때문에 나간 겁니까?”
성준이 빤히 쳐다보았다. 등 뒤에서 곽 감독이 큰 소리로 선수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거기 잡담 그만하고 빨리 튀어와라!”
뒤쪽을 흘끔거리던 성준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아주 아니라곤 못하겠는데.”
뭔가 말이 더 이어질 줄 알았던 정대만은 대화가 뚝 끊어지자 황당한 얼굴로 멈추어 섰다. 등 뒤에서 수종이 다가와 대만을 툭 쳤다.
“뭐 해요?”
“어? 어.”
“오늘 잘해봐요.”
끙 하고 코트 쪽을 바라보던 대만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래. 잘해보자.”
얼마 안 가 호각이 불렸다. 대만이 무릎 보호대를 끌어올렸다. 대기 시간 동안 슛 연습을 하며 데워진 몸에 리듬감이 돌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서태웅이 주변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말고 자세를 잡았다. 선수들이 유니폼을 추스르며 몸을 숙였다. 침묵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공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 두 색깔의 유니폼들이 공중으로 높게 뛰어올랐다가 떨어졌다.
경기는 평소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도쿄 OSG가 공격적으로 나온 덕분에 전반전 내내 득점 찬스가 양 팀에게 고루 돌았다. 막상 플레이가 시작되니 팀원들 손발이 척척 맞았다. 스코어링 속도가 빠른 서태웅을 의식한 건지 순식간에 연달아 세 번의 득점을 올린 권수종이 골 세리머니를 했다. 큰 소리로 “아자!” 하고 외친 팀원 하나가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듯 황급히 주변 눈치를 보며 손을 거두었다.
정대만은 께름칙한 기분을 느꼈다. 경기 중에 이런 예감이 들면 보통 빗나가지 않는다. 이런 기분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불현듯 그는 코트를 살폈다. 권수종이 종횡무진 활약 중인 가운데 공이 돌아올 때마다 팀원들이 성준의 이름을 연달아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이 초조한 기분은 대체 뭘까?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호각이 불리는 순간 대만은 벤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시선이 부딪친 강성준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거두고 등을 돌렸다.
내내 날 보고 있던 건가? 왜? 나 물어보면 안 될 걸 물어봤나? 센다이 팀원들이 저들끼리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분명 무언가가 함의돼 있었지만 정대만으로선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회식 자리에서, 텐동 음식점에서, 퇴근길에 들린 편의점에서, 코트 위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이 전부 남처럼 굴고 있었다.
후반전이 시작됐지만 점수 차는 점점 벌어지는 중이었다. 전반전에서 있었던 소소한 실점들이 전혀 만회되지 못한 채 누적되고 있었다. 몸이 풀린 서태웅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폭주 기관차였다. 코트 반대편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공을 스틸하거나 포워드를 따돌린 뒤 연달아 덩크를 꽂아 넣었다. 어느새 점수는 15점 차였고 흐름은 완전히 됴코 OSG 쪽으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왜 날 더 쓰지 않지?’
헉헉대면서 땀을 닦아내던 대만이 이어지는 생각에 멈칫했다. 여태까지 그는 핀치에 몰렸을 때 팀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선수였다. 사기적인 야투율을 보유했던 대학 선수 시절부터 내곽 능력을 발휘하며 달렸던 스몰포워드 시절 내내 그는 후반전으로 갈수록 눈에 보이는 성과로 활약해 줄 것을 기분 좋게 강요받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팀원들이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부분이 그렇냐고 묻는다면 당장 무어라 꼬집어 말하기 어려웠지만, 분명 석연찮은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에게 패스가 잘 돌지 않는다는 것? 아니다, 성준의 판단은 매번 최선이었다. 서태웅이 매번 예상보다 너무 잘해서 문제였을 뿐이다. 그럼 대체 뭘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볼을 잡은 강성준이 그대로 도쿄 팀 골라인까지 치고 들어왔고, 대만이 빠르게 상대팀 수비수에게 스크린을 걸었다.
감독들이 소리쳐 지시하기 시작했다. 수비수가 성준을 따라가려고 동선을 낭비한 덕에 대만에게 곧장 오픈 찬스가 들어왔다. 황급히 돌아오는 스크리너를 피하려고 방향을 돌리는데, 갑자기 그래선 안 된다는 직감이 그를 확 잡아당겼다. 다음 순간 강성준의 패스가 매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몸을 숙이는 찰나의 순간이 수십 개의 분침으로 쪼개진 것처럼, 생각이 시간을 압도했다. 마음을 켕기게 하는 무언가가 도사릴 땐 생각이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잡다한 상념들은 점프 타이밍을 붙잡고, 수비의 수를 간과하게 하고, 림을 좁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불안은 코트의 맞물린 틈새에서, 림의 꼭대기에서, 닳기 시작한 밧슈 바닥에서 도사리는 어떤 것이다. 정대만은 갑자기 키가 줄어든 것을 느꼈다. 걸음을 내딛는 다리는 어느새 얇고 말랑말랑해져 있었고 길어진 머리카락이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어느새 그는 북산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풋내기가 돼 있었다. 벤치에는 안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그러나 점프하는 순간에 그는 다시 스물여섯 살이었다.
패스가 너무 빨라서 리듬이 순간적으로 엉킨 것을 공중에 뜬 순간 대만은 직감했다.
바닥으로 착지하는 반동이 왼쪽 무릎을 흔들었다. 림에 맞은 공이 데구루루 굴러 그물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대만이 반 박자 늦게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발을 뒤로 슬쩍 무르자 무릎 위가 평소보다 살짝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태껏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 없는 부위였기 때문에 이런 감각이 아주 낯설었다.
‘뭐지?’
불현듯 승강장 사이에 발이 걸려 넘어지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는 무릎부터 부딪치며 넘어졌지만 문제없이 벌떡 일어나 소매치기를 잡겠다고 깽깽이 발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날의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잊고 있었다. 준호의 전화를 받으려다 선반에 부딪쳤을 때도, 차 문을 열다 접질렸을 때도, 남은 이삿짐을 옮긴다고 박스를 들어 올리면서 받침대처럼 사용할 때도 징조는 없었다.
바로 그 부위였다. 뒤늦게 고개를 들자 굴욕적인 점수 차로 종료된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찡그린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묵직한 인기척이 다가왔다. 뒤늦게 서태웅의 존재를 깨달은 대만이 화들짝 놀랐다.
“뭐냐?”
“…….”
서태웅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선배.”
“어, 엉?”
태웅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들으셨어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막 경기에서 이긴 건 서태웅인데도 그가 무척 낙심한 것처럼 보여 대만은 어리둥절했다. 무릎을 주무르려다 만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던 정대만이 자세를 바로 했다.
“뭘 들어?”
태웅은 답지 않게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다음, 대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7월에.”
“세계가 멸망하는 거요.”
“수종이가 뭐라고 안 해요?”
일주일 만에 벌어진 회식 자리에서 팀원이 입을 열었다. 음식이 나오고 분위기가 무르익은 때였다. 슬라이스 된 감자를 반으로 쪼개면서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정대만이 의문스럽게 되물었다.
“무슨 말…. 아무 말 안 한 것 같은데?”
별 뜻 없이 대답한 후에야 분위기가 살짝 묘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옆에 앉은 팀원들이 그의 반응을 신경 쓰고 있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정대만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첫 연습경기에서 팀원들과 섞이지 못하고 묘하게 붕 떠있던 권수종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문젠가?’
뭔가 켕기는 일이 있는 거라면 궁금하긴 했다. 편안한 상대였다면 대놓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캐물어 봤을 것이다. 그러나 대만은 직감적으로 가만히 있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자초지종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쪽은 저쪽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던 것이다.
‘뭐…. 말하고 싶으면 말해주겠지.’
감자를 입에 집어넣으며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으니 팀원 하나가 다시 말을 던졌다.
“수종이가 첫날 그렇게 군 거요.”
“응? 첫날?”
대만이 고의로 비협조적으로 군다고 판단한 상대가 어물거리며 대화를 닫았다.
“그…. 아니에요.”
“덩크 꽂던 거?”
대만이 의문스럽게 되묻자 옆에 있던 팀원이 몸을 기울였다.
“음, 네. 기분 안 나쁘셨어요?”
“뭐….”
그날 자신의 슛감이 나빴으면 순간적으로 좀 약은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정대만은 그날 연습경기에서 자신이 보여준 기량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나 잘했는데? 오히려 팀원들이 상상도 못한 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이 상황이 그로서는 더 난처할 다름이다.
“엄청 잘하던데요.”
결국 이렇게밖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제 팀원들은 적극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는 대신 벌어진 판을 수습하려고 들었다.
“수종이가 잘나긴 했지. 유학파라 거침이 없다고 해야 하나.”
“기분 안 나쁘셨으면 다행이에요. 수종이가 원래 좀 그런 면이 있어서.”
맞은편 사람들이 익살스럽게 대화 주제를 웃어넘겼고, 옆자리에 앉은 팀원이 그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원래 그렇다라….’
젓가락질도 멈추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대만이 자연스럽게 물컵을 들어 올리면서 물었다.
“수종 씨가 몇 살이었죠?”
“76년생이던가.”
팀원 하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물셋이면 76년생이죠?”
“어. 맞는 것 같다.”
‘나보다 어리네?’
물을 마시면서 정대만은 얼추 상황을 눈치챘다. 스페인 유학파라는 독특한 이력 때문인진 몰라도 수종과 팀원들이 살갑게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거였다. 영입된 지 반 년 밖에 안 된 신규 인력인 탓도 있긴 할 것이다. 엉뚱하게도 대만은 이 상황에 대한 연장자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
‘다음에 연습 끝나고 다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자고 할까.’
이제 팀원들은 살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대다수가 미혼인 데다 자취생이 많은 팀 분위기상 살림에 이것저것 훈수를 두는 이들이 많았는데, 때마침 세탁한 옷을 옷걸이에 널어서 말리는 것도 모자라 다림질조차 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몰매를 맞는 중이었다. 대화를 따라잡던 대만은 속으로 삐질댔다.
‘옷걸이에 널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러고 보니 대만 씨는 집에 옷장 있어요?”
“본가에서 갖고 오려다가 너무 무거워서 그냥 두고 왔어요.”
“엑, 그럼 옷은 어디다 보관해요?”
팀원들이 경악해서 대만을 쳐다보았다.
“그야 옷걸이에…?”
“아니 그래도 그렇지. 공간이 부족하지 않나?”
“뭐, 그때그때 세탁소에 맡겨놓는 편이니까.”
“그럼 너무 번거롭잖아요.”
“그런가? 퇴근할 때 들리면 되죠. 내일 입을 거만 찾아오면 되고….”
잠시 조용했다. 벙쪄있던 팀원들이 곧이어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대만 씨 안 그렇게 봤는데 되게 특이해.”
“좀 어려운 타입일 줄 알았는데 은근 허당이다.”
“그런가요?”
대만이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팀원들이 박장대소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턱 끝을 긁던 정대만도 어느새 웃고 있었다. 팀원들은 이제 편안한 태도로 그의 생활에 요목조목 적당한 참견을 얹어댔다.
“그러지 말고 미리미리 옷장 정도는 장만해둬. 조만간 필요할 거야.”
“맞아요. 계절 바뀔 때마다 옷가지가 두 배로 늘어난다니까.”
뭣하면 이케아에서 조립식 옷장이라도 주문해보라는 얘기가 오고 가던 중에 드르륵 가게 문이 열렸다. 출입문이 훤히 보이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팀원 하나가 웃는 낯으로 잠시 행동을 멈추었다. 신호탄처럼 하나 둘 시선이 돌아갔다. 이내 테이블에 앉아있던 팀 전원이 반색했다.
“성준 형 오셨어요?”
“응, 먹고 있었어?”
“진짜 너무 오랜만이에요.”
정대만은 몸을 틀어 테이블로 다가온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서늘한 바람 냄새와 함께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그가 누군지 깨달은 대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직전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긴장이 풀어져 있던 그는 무척이나 친근한 태도로 드디어 만나게 된 새 팀의 주전 포인트 가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단하게 된 정대만입니다.”
“아, 대만 씨. 얘기는 전해 들었어요. 연습 때도 장난 아니라면서요?”
남자는 그의 손을 붙잡고 두어 번 싱겁게 흔들었다.
“강성준입니다.”
손을 놓은 성준은 자연스럽게 대만을 지나쳐 팀원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대만이 테이블을 둘러보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미리 연락을 준 게 아니었는지 팀원들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강성준을 위해 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했다. 서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느라 분위기가 금방 어수선해졌다.
“왜 이래. 그냥 얼굴들만 좀 보러 온 거야.”
성준은 난처한 듯 즐거운 투였다. 그는 테이블 끝에 앉은 팀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면서 팀 전체를 훑어보았다.
“얼굴 봤으니까 갈게.”
“에이, 무슨 소리야.”
“형 빨리 앉아서 좀 들어요. 우동 시켜드릴까요?”
“됐다니까 그러네.”
키득대던 성준이 아까보다 여유롭고 너그러운 분위기로 대만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일 봅시다.”
대만이 눈을 깜빡이다 인사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설마 정말 가려나 싶었는데 성준은 진짜로 얼굴만 비추고 떠났다. 아쉽다는 듯이 몇 마디를 주고받던 팀원들은 금세 다른 주제를 두고 떠들기 시작했다. 의자를 제각각 옮기다 만 탓에 테이블 주변이 어수선했고 분위기는 묘하게 산만해져 있었다. 다 함께 같은 주제를 두고 열렬히 토론하던 아까와 달리 서넛씩 쪼개져 대화가 동시에 돌고 돌았다. 혼자 물을 홀짝이면서 대만은 어리둥절한 기분을 털어냈다.
‘뭐지?’
때마침 사시미가 나오면서 생각은 깊게 이어지지 않았다. 술이 부재한 단체 회식 자리가 보통 그렇듯 모임은 일찍 파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대만의 뒤통수에 대고 팀원 두어 명이 들뜬 목소리로 꽥 소리를 질렀다.
“이제 세탁소 들렀다 가는 거예요?”
그러고는 자기들끼리 웃어댔다. 정대만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무슨. 벌써 문 닫았을 시간인데!”
그러자 아예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대만은 눈썹을 익살맞게 찡그렸다가 돌아섰다. 즐거운 자리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약간의 피로함을 느꼈다. 알게 모르게 신경을 잡아먹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다음 날 연습 경기에 나타난 강성준은 어제 보여줬던 묘한 태도는 어디로 간 건지 먼저 친근하게 다가와 악수를 나누었다.
“잘 부탁해요.”
대만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예, 한 번 해봅시다.”
덕분에 정대만은 회식 자리에서 느낀 기분을 금방 털어버렸다. 성준은 내내 예의바르게 굴었고, 모두의 환대를 받으며 연습 경기에 임했다. 일주일 만에 처음 손발을 맞추는 것치고 그는 대만과도 괜찮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다만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패스가 너무 빠르게 돌아오는 순간이 있었다.
특히 정대만이 3점 라인의 좌측 방향에 서 있을 때 패스가 성급할 정도로 빨랐는데, 성준의 습관인 듯싶었다. 대만은 피드백을 나누기 위해 연습이 끝나자마자 성준을 찾아갔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야기를 듣고도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음. 그래요?”
“엉, 그래서 지금 같은 속도로 패스한다면 좀 낮게 던져줬으면 좋겠는데요.”
“흠.”
성준은 타올로 얼굴을 훔치면서 대답했다.
“신경 써볼게요.”
그런 다음 스포츠백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수고했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정대만은 멀어지는 성준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피드백을 주고받기 싫어하는 타입인가?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농구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강성준은 최소한의 열의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이주일 동안 자리를 비운 것과 연관이 있나?
다른 팀원들과 금세 거리를 좁힌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준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벽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직감적으로 대만은 뭔가 감춰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아직까진 그런 예감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여자 친구 얘기 좀 들어주면 금방 친해지던데. 저 녀석은 애인 없나?’
이것이 다소 안일한 생각이었음은 며칠에 걸쳐 서서히 밝혀졌다. 연습 게임을 뛰다 말고 똑같은 일이 반복해서 벌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대만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흘 내내 좀처럼 패스 타이밍에 변화가 없자 결국 다시 강성준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말했던 패스 말인데요.”
“아, 네.”
“너무 빠르거든요.”
성준은 꼭 처음 듣는 것처럼 되물었다.
“그래요?”
“네. 이 속도가 편하면 조금만 낮게 던져주세요. 맞춰볼 테니까.”
‘이 자식, 고의로 이러네.’
짜증보다는 의문이 앞섰다. 왜 이러지? 멀뚱멀뚱 성준의 얼굴을 쳐다보던 대만이 물었다.
“혹시 피드백이 불편해요?”
“예?”
성준은 정말로 깜짝 놀랐는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그렇지 않은데요.”
“그럼 같이 집중 좀 해봅시다. 곧 있으면 경기도 있는데.”
5월에는 서태웅과 맞붙게 될 것이다. 대학 리그 시절 대만은 당시 국가대표였던 서태웅과 한 번 붙어본 적이 있긴 했지만 태웅이 미국에서 돌아온 뒤로는 제대로 경기해 본 적이 없었다.
예나지금이나 서태웅은 이름을 날리는 선수였다. 국내에서 톱으로 평가받는 이들 중에서도 명성이 대단했는데, 그가 미국으로 떠났을 땐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는 선수들도 많았다는 것을 대만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개박살 나는 건 선배로서 면이 서질 않는다.
“제 후배 기세가 아주 대단하거든요.”
“예, 뭐….”
시원찮은 반응이었지만 정대만은 대수롭지 않게 분위기를 털어냈다. 그가 씩 웃으며 물었다.
“그보다 우리 팀 포인트 가드 님은 불만 없으십니까?”
어깨동무를 하자 성준이 잠깐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불만이 있겠어요? 열심히 해봅시다.”
성준이 대만의 등을 툭툭 치면서 일어났다. 대만은 멀어지는 성준을 바라보다 말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뭔가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곧이어 시작된 후반전에서 성준이 제대로 패스를 돌려주었던 것이다. 손으로 어림잡았던 자리에 기가 막히게 공이 들어왔다. 공을 받은 정대만이 순식간에 하프라인을 넘었다가, 상대팀 수비가 따라붙자마자 펀치 드리블로 방향을 휙 틀면서 슛 페이크를 넣었다.
다음 순간 오른쪽에서 같은 팀인 수종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따라붙었다. 대만이 타이밍에 맞추어 패스하자 공을 넘겨받은 권수종이 솜씨 좋게 레이업으로 연결했다. 2점이 걸린 공이 림을 깔끔하게 통과했다.
사인도 없이 진행된 것치고 연계가 괜찮았다. 수종이 코트를 넓게 써서 공간이 빈 덕이었다. 기특하다는 생각에 정대만은 권수종에게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수종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방금 진짜 좋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건 다음 순간이었다. 수종의 어깨를 두드리던 대만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강성준을 비롯한 팀원들이 멀거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다못해 사기를 북돋는 환호성이나 응원이라도 나와야 할 판인데 호응이 관짝에 들어간 시체만도 못했다. 대만을 제외하고 달려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권수종과 팀원들이 묘하게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던가? 갑자기 첫 경기서부터 차차 느껴왔던 위화감이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것 같았다.
호각이 불리고 연습 경기가 종료된 뒤 대만은 큰소리로 팀원들을 불러모았다.
“오늘 다같이 저녁 먹죠. 제가 쏩니다!”
팀원들은 반색했지만 흔쾌히 수락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 그런데 오늘 저 여자친구랑 약속이 있어서요.”
“전 집에 부모님이 오셔서 저녁은 좀 힘들어요.”
“저도 오늘은 조금….”
시간을 내기 힘들다는 인원이 절반을 훌쩍 넘었다. 대만이 어정쩡하게 남은 인원을 세어보는 동안 대다수가 다음을 기약하더니 슬슬 모임이 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제야 대만이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정작 이 모임 주최를 결심하게 만든 장본인은 이미 짐을 챙겨 나간 건지 보이질 않았다.
“그럼 다음주 화요일. 화요일엔 다들 시간 비워놔요.”
아직 라커룸에 남아 있는 팀원들에게 신신당부하면서 대만은 가방을 아무렇게나 걸쳐 매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행스럽게도 비상구 표시등을 지나쳐 복도를 빠져나오자마자 자판기 앞에서 신발 끈을 고쳐 묶고 있는 수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잽싸게 옆으로 따라붙자 수종이 고개를 돌리고 그를 쳐다봤다. 대만이 히죽 웃었다.
“집 가요?”
“그렇죠?”
“그럼 저녁 먹을래요?”
수종은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요?”
“이 형님이 쏩니다.”
수종은 잠시 허공을 맹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요.”
수종은 자차가 있긴 했지만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었고,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대만이 멀리까지 나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가까운 쇼핑센터에 가자고 먼저 제안했다. 거기에 제법 맛있는 규탄야끼(*소 혀 구이)점이 있다는 거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대만이 으엑 소리를 냈다.
“거기에 그런 데가 있다고?”
“요크 타운에 은근 먹을 데 많아요.”
“진짜요? 없던데?”
“찾아보는 성의가 없으시네.”
대만이 끙 소리를 냈다.
“근데 규탄야끼 그거 먹을만해요?”
“안 먹어봤어요?”
“어릴 때 몇 번 먹어보긴 했는데… 맛있던가?”
“그냥 입에서 더 잘 쪼개지는 안심 같아요.”
두 사람은 신덴히가시 해양 센터를 빠져나와 한산한 길거리를 걸었다. 저녁 7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는데도 아직 하늘이 밝아서 가로등이 켜지기 전이었다. 한창 붐빌 시간대치고 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국유화 문제로 시끌벅적했던 일본장기신용은행 앞에는 난해한 형상의 철제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맞은편 편의점에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파란색 간판 불빛이 반들반들한 조각상 위에 고요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권수종은 보기보다 말수가 많아 가는 내내 자기 얘기를 떠들어 댔다. 스페인 유학 시절 자취방에서 벌어졌던 에피소드나 대학 팀 시절 만난 선수들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일본과 따지고 비교하더니, 심드렁한 투로 여기 생활은 그저 그렇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대만은 시종일관 맞장구를 치면서 수종과 말까지 놓았는데, 사실 생각과 달리 지나치게 쌩쌩한 수종 때문에 그는 살짝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상태였다.
저녁을 먹고 나오면서 대만은 슬그머니 팀 얘기를 흘렸다.
“너 괜찮은 거냐?”
“뭐가요?”
“팀원들이 너 무시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원래 분위기가 이래?”
수종이 눈을 땡그랗게 뜨더니 곧이어 가자미눈을 했다.
“아뇨? 저 무시하는 거 맞는데요.”
대만이 경악했다.
“뭐? 근데 왜 그래?”
“그런 것에 하나하나 신경 쓰는 건 솔직히 미개해 보이고….”
단어 선택에 대만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수종은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전 잘하니까 상관없어요. 급 안 되는 사람들이 견제해 봤자죠. 그래봤자 팀에 필요한 사람은 저고요.”
“어…. 그러냐.”
수종이 대만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형은 의외로 잘 지내네요? 솔직히 저희 팀 사람 하나 내쫓고 분위기 안 좋았거든요. 그래서 들어오자마자 저처럼 될 줄 알았는데.”
내쫓아? 누굴? 그러나 되묻기도 전에 수종의 얘기가 그의 말문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하긴, 형이 잘하긴 해도 제 급은 아니니까.”
정대만은 애송이 시절에 비하면 제법 나이를 먹었고(그는 이제 스물여섯 살이었다), 지난 몇 년 간 농구 코트 위에서 이보다 더한 모욕이나 도발을 들어본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당황한 건 이곳이 코트 위가 아니라 일상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펀치를 맞은 거나 다름없었다. 정작 폭탄 발언을 던진 수종은 대만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다. 악의가 없었다는 게 도리어 대만을 좀 열받게 했다.
“너 인마, 말을 왜 그렇게 해?”
살짝 성질을 내자 수종이 무고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뭐가요?”
“뭔 급? 너 같은 팀원끼리 대놓고 급 나누고 그러는 거 아니다.”
“아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요.”
수종은 어리둥절해 보였다. 한소리 하려던 대만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넌 진짜…. 됐다.”
‘이 자식 이거, 평소 사람들하고 말할 때도 이 모양인가?’
그렇다면 팀원들이 묘하게 수종을 거리껴 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열받지만 그렇다고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역사 앞에 도착할 때까지 생각에 잠겨있던 정대만이 문득 물었다.
“근데 아까 그 말 무슨 소리냐.”
“어떤 거요?”
“사람 쫓아냈다며.”
“아, 네.”
“회사에서 잘린 거야, 아니면 팀에서 계약 연장을 안 해줬다는 거야?”
“아뇨, 형 데리고 온다고 진짜 쫓아낸 거예요. 원래 있던 슈터….”
등 뒤로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땡땡거리는 차임벨 소리와 함께 어렴풋한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미지근하고 매캐한 바람이 수종의 등을 떠밀면서 대만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수종은 뒤돌아 역사 쪽을 살펴보곤, 자기가 타고 갈 열차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다시 대만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얘기하려니까 기억이 안 나네. 이름 까먹었어요.”
대만은 얼빠진 표정이다가 한 템포 늦게 되물었다.
“어?”
“형, 저 2분 뒤에 열차 오거든요.”
“잠깐만. 그거 8번 얘기하는 거야? 영구결번?”
“네, 센다이 8번이요. 뭐야, 이미 알고 있네. 아무튼 내일 봐요.”
수종이 황급히 역사로 뛰어가는 걸 대만은 붙잡지 않았다. 수종이 대만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고기 맛있었어요!”
고기야 맛있었지…. 덩그러니 남은 대만이 미간을 찌푸리는 동안 차임벨 소리와 함께 다음 열차가 들어왔다. 수종은 곧 매표소 쪽으로 사라졌다.
8
팀원들은 눈치만 볼 뿐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의 입단속이 있었다기보단 그 일을 설명하는 게 자신을 나쁜 인간으로 만들까 봐 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요? 나 때문에 나간 거라던데?”
“누가 그래요?”
그 말에 대만이 머뭇거렸다.
“어? 수종이가….”
“아, 진짜. 걔는 가끔….”
팀원은 한숨을 쉬며 혀를 차더니 손을 내저었다.
“현우 형 쫓겨난 거 아니에요. 계약 기간 다 돼서 연장 안 한 거지.”
‘그 8번 이름이 현우였군.’
정대만은 작년에 만났던 센다이 8번 슈터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이겼다는 것 말고는 뚜렷하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튼지 간에 기억 속에서 그는 좋은 선수였다.
문득 대만이 물었다.
“성준 씨랑 그 8번 선수가 많이 친했습니까?”
“네?”
순간적으로 팀원은 깜짝 놀란 기색이었다.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뭐, 현우 형이 원년멤버고 성준 형이 그 다음 해에 들어온 사람이라…. 둘이 친하긴 친했겠죠.”
‘말을 왜 이렇게 해? 친하면 친한 거지.’
정대만이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그는 지금까지 다섯 명의 팀원들에게 일을 캐묻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입을 맞춘 것처럼 이전 슈터가 쫓겨난 게 아니라고 일축할 뿐 제대로 자초지종을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다.
녀석들, 권수종 얘기는 물어보지 않아도 털고 싶어 하더니. 팀원들은 아니라고 했지만, 대만은 직감적으로 성준의 겸연쩍은 태도가 이 문제와 연결돼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정공법으로 물어볼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사내에서도 정대만과 강성준은 부서가 갈렸고(대만은 전산센터에 배정돼 있는 반면, 성준은 경영정보처에서 일했다) 연습 경기가 끝나면 성준이 매번 인사만 마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잽싸게 달려가 붙잡으면 곧이어 팀원들이 몰려오거나 둘 중 하나를 감독이 불러내는 등 상황이 묘하게 애매해졌는데, 때로는 이게 꼭 고의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회식자리도 빈번히 불참했다.
이쯤 되니 자신을 피하고 있단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대놓고 피하는 게 아니라서 더 골치 아프게 느껴졌다. 싫은 사람 붙잡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팀워크가 좋을 리 없었다.
아니, 팀워크에 좋다 나쁘다를 따져야 한다면 ‘나쁘지는’ 않았다. 모두가 (적어도 경기에 한해서라면) 의사소통을 활발하게 주고받는 데다가 서로가 서로의 경기 스타일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개개인의 역량도 뛰어났다. 그러나 좋다가 아니라 ‘나쁘지 않다’ 정도로 평가되는 정도라면 확실히 만족스럽진 못한 것이다. 5월 연습 경기를 위해 도쿄 출장을 가기 전날에도 이 미적지근한 긴장 상태는 계속되었다.
유달리 서태웅이 반가웠던 건 이런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기 전 자신을 만나러 온 태웅의 멀뚱멀뚱한 얼굴을 보자마자 대만은 저도 모르게 반색하며 큰소리를 냈다.
“어, 태웅아! 진짜 오랜만이다 인마.”
“예. 선배도요.”
태웅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애매모호하게 고개를 숙였다. 과하게 반가워하는 대만 때문에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만은 어깨로 태웅을 밀면서 낄낄댔다.
“못 본 새에 어깨가 더 떡 벌어진 것 같다? 짜식. 미국은 좋았냐?”
태웅은 고심했다.
“다들 선크림을 발라요.”
“뭔 선크림? 태양빛이 장난 아니야?”
“네.”
“야외에서 농구 못 할 정도로 뜨거웠냐?”
태웅은 잠시 머뭇거렸다.
“근데 그냥 했어요.”
“안 탄 거 보니까 선크림 잘 발랐나보네.”
대만은 서태웅을 센다이 팀원들 앞으로 데리고 갔다.
“야, 태웅아. 우리 팀원들이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하세요. 서태웅 선수 처음 뵙네요.”
인사를 시켜줄 줄은 몰랐던 건지 팀원들이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태웅에게 악수를 청했다. 고교 선배에게 잠깐 얼굴이나 비추러 왔던 서태웅은 졸지에 멀뚱히 서서 경기 시작도 전에 상대팀 주전 멤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기대할게요.”
“예.”
“살살 좀 부탁해요.”
“살살….”
“이야, 서태웅 선수. 저희 대학생 때 한 번 붙은 적 있는데 기억나요?”
“…….”
“야야, 서태웅. 너네 팀이 너 부른다.”
“네. 갈게요.”
몸을 돌리기 전 태웅이 대만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대만이 씩 웃었다.
“오냐. 이길 거니까 각오해라.”
태웅을 보내고 돌아오니 구석에 앉아 밧슈 끈을 묶고 있는 권수종과 팀원들과 함께 전술을 복기하는 성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대만은 수종 쪽으로 걷다가, 성준을 둘러싼 팀원들이 코트 쪽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걸 보고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뒤따라 코트로 나가려던 성준이 걸음을 멈추었다. 대만이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첫 출장 경기니까 잘 해봅시다.”
성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야죠.”
‘그래도 웃긴 웃네.’
대만이 턱끝을 긁었다.
“거, 저번에 나갔다는 8번 말인데요.”
“아, 네. 현우 형이요.”
성준이 다소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저 때문에 나간 겁니까?”
성준이 빤히 쳐다보았다. 등 뒤에서 곽 감독이 큰 소리로 선수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거기 잡담 그만하고 빨리 튀어와라!”
뒤쪽을 흘끔거리던 성준이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아주 아니라곤 못하겠는데.”
뭔가 말이 더 이어질 줄 알았던 정대만은 대화가 뚝 끊어지자 황당한 얼굴로 멈추어 섰다. 등 뒤에서 수종이 다가와 대만을 툭 쳤다.
“뭐 해요?”
“어? 어.”
“오늘 잘해봐요.”
끙 하고 코트 쪽을 바라보던 대만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래. 잘해보자.”
얼마 안 가 호각이 불렸다. 대만이 무릎 보호대를 끌어올렸다. 대기 시간 동안 슛 연습을 하며 데워진 몸에 리듬감이 돌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하얀색 유니폼을 입은 서태웅이 주변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말고 자세를 잡았다. 선수들이 유니폼을 추스르며 몸을 숙였다. 침묵 속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공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 두 색깔의 유니폼들이 공중으로 높게 뛰어올랐다가 떨어졌다.
경기는 평소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도쿄 OSG가 공격적으로 나온 덕분에 전반전 내내 득점 찬스가 양 팀에게 고루 돌았다. 막상 플레이가 시작되니 팀원들 손발이 척척 맞았다. 스코어링 속도가 빠른 서태웅을 의식한 건지 순식간에 연달아 세 번의 득점을 올린 권수종이 골 세리머니를 했다. 큰 소리로 “아자!” 하고 외친 팀원 하나가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듯 황급히 주변 눈치를 보며 손을 거두었다.
정대만은 께름칙한 기분을 느꼈다. 경기 중에 이런 예감이 들면 보통 빗나가지 않는다. 이런 기분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불현듯 그는 코트를 살폈다. 권수종이 종횡무진 활약 중인 가운데 공이 돌아올 때마다 팀원들이 성준의 이름을 연달아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이 초조한 기분은 대체 뭘까?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호각이 불리는 순간 대만은 벤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시선이 부딪친 강성준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거두고 등을 돌렸다.
내내 날 보고 있던 건가? 왜? 나 물어보면 안 될 걸 물어봤나? 센다이 팀원들이 저들끼리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분명 무언가가 함의돼 있었지만 정대만으로선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회식 자리에서, 텐동 음식점에서, 퇴근길에 들린 편의점에서, 코트 위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이 전부 남처럼 굴고 있었다.
후반전이 시작됐지만 점수 차는 점점 벌어지는 중이었다. 전반전에서 있었던 소소한 실점들이 전혀 만회되지 못한 채 누적되고 있었다. 몸이 풀린 서태웅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폭주 기관차였다. 코트 반대편에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공을 스틸하거나 포워드를 따돌린 뒤 연달아 덩크를 꽂아 넣었다. 어느새 점수는 15점 차였고 흐름은 완전히 됴코 OSG 쪽으로 넘어간지 오래였다.
‘왜 날 더 쓰지 않지?’
헉헉대면서 땀을 닦아내던 대만이 이어지는 생각에 멈칫했다. 여태까지 그는 핀치에 몰렸을 때 팀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선수였다. 사기적인 야투율을 보유했던 대학 선수 시절부터 내곽 능력을 발휘하며 달렸던 스몰포워드 시절 내내 그는 후반전으로 갈수록 눈에 보이는 성과로 활약해 줄 것을 기분 좋게 강요받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팀원들이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부분이 그렇냐고 묻는다면 당장 무어라 꼬집어 말하기 어려웠지만, 분명 석연찮은 무언가가 있었다. 자신에게 패스가 잘 돌지 않는다는 것? 아니다, 성준의 판단은 매번 최선이었다. 서태웅이 매번 예상보다 너무 잘해서 문제였을 뿐이다. 그럼 대체 뭘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볼을 잡은 강성준이 그대로 도쿄 팀 골라인까지 치고 들어왔고, 대만이 빠르게 상대팀 수비수에게 스크린을 걸었다.
감독들이 소리쳐 지시하기 시작했다. 수비수가 성준을 따라가려고 동선을 낭비한 덕에 대만에게 곧장 오픈 찬스가 들어왔다. 황급히 돌아오는 스크리너를 피하려고 방향을 돌리는데, 갑자기 그래선 안 된다는 직감이 그를 확 잡아당겼다. 다음 순간 강성준의 패스가 매서운 속도로 내리꽂혔다.
몸을 숙이는 찰나의 순간이 수십 개의 분침으로 쪼개진 것처럼, 생각이 시간을 압도했다. 마음을 켕기게 하는 무언가가 도사릴 땐 생각이 복잡해지기 마련이다. 잡다한 상념들은 점프 타이밍을 붙잡고, 수비의 수를 간과하게 하고, 림을 좁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불안은 코트의 맞물린 틈새에서, 림의 꼭대기에서, 닳기 시작한 밧슈 바닥에서 도사리는 어떤 것이다. 정대만은 갑자기 키가 줄어든 것을 느꼈다. 걸음을 내딛는 다리는 어느새 얇고 말랑말랑해져 있었고 길어진 머리카락이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어느새 그는 북산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풋내기가 돼 있었다. 벤치에는 안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그러나 점프하는 순간에 그는 다시 스물여섯 살이었다.
패스가 너무 빨라서 리듬이 순간적으로 엉킨 것을 공중에 뜬 순간 대만은 직감했다.
바닥으로 착지하는 반동이 왼쪽 무릎을 흔들었다. 림에 맞은 공이 데구루루 굴러 그물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대만이 반 박자 늦게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발을 뒤로 슬쩍 무르자 무릎 위가 평소보다 살짝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여태껏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 없는 부위였기 때문에 이런 감각이 아주 낯설었다.
‘뭐지?’
불현듯 승강장 사이에 발이 걸려 넘어지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그는 무릎부터 부딪치며 넘어졌지만 문제없이 벌떡 일어나 소매치기를 잡겠다고 깽깽이 발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날의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잊고 있었다. 준호의 전화를 받으려다 선반에 부딪쳤을 때도, 차 문을 열다 접질렸을 때도, 남은 이삿짐을 옮긴다고 박스를 들어 올리면서 받침대처럼 사용할 때도 징조는 없었다.
바로 그 부위였다. 뒤늦게 고개를 들자 굴욕적인 점수 차로 종료된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찡그린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묵직한 인기척이 다가왔다. 뒤늦게 서태웅의 존재를 깨달은 대만이 화들짝 놀랐다.
“뭐냐?”
“…….”
서태웅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선배.”
“어, 엉?”
태웅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들으셨어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막 경기에서 이긴 건 서태웅인데도 그가 무척 낙심한 것처럼 보여 대만은 어리둥절했다. 무릎을 주무르려다 만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던 정대만이 자세를 바로 했다.
“뭘 들어?”
태웅은 답지 않게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다음, 대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7월에.”
“세계가 멸망하는 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