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3)»
6
기껏해야 아홉 시면 돌아올 줄 알았던 송아라는 열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귀가했다. 대체 언제쯤 돌아올까 기다리던 송태섭도 이쯤 되니 기가 막혔다. 흥얼대며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아라의 점퍼에선 술 냄새가 폴폴 풍겼다. 반면 얼굴은 취기가 좀 올랐을 뿐 멀쩡해 보였다.
“일찍 일찍 좀 다녀.”
“무슨 상관?”
송아라가 들뜬 목소리로 한없이 가볍게 대꾸했다.
본래 목적대로였다면 태섭은 아라를 식탁에 앉혀두고 마트에서 사 온 푸딩을 나눠먹으면서 근래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대학 생활은 어떤지, 친구들하곤 잘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며 그동안의 근황을 따라잡은 다음, 저 택배를 가져다 놓은 게 송아라 본인인지, 그렇다면 어떤 경위로 받게 된 것인지, 혹시 내용물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편지를 보진 않았는지 넌지시 물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밤늦은 시간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귀가한 여동생을 마주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태섭은 자신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는 송아라를 조용히 불러 세웠다.
“야, 송아라.”
“왜?”
그러나 막상 불러놓으니 할 말이 없었다.
“너 술 마셨어?”
송아라는 피곤해서 짜증이 난 듯했다.
“어. 쫌 마셨어.”
“엄마가 걱정하시잖아.”
그 말에 아라가 입을 다물고 송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한참 그렇게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방으로 돌아가면서 아라가 중얼대듯 대답했다.
“나 내년이면 대학교 졸업하거든?”
대꾸하기도 전에 면전에서 문이 쾅 닫혔다. 이번에 송태섭은 정말로 깜짝 놀랐다. 적어도 태섭에게 있어 송아라는 언제나 정답고 살가운 여동생이었다. 그가 미국에 있을 적에도 아라는 한 달에 한 번은 꼭 먼저 전화를 걸어왔고, 즐거운 목소리로 일본에서 유행하는 패션과 팝송에 대해 들려주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쌀쌀맞게 굴 건 또 뭐란 말인가. 예상치 못한 동생의 반응 때문에 머뭇대던 태섭이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문을 두들기면서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송아라.”
“…….”
“야, 송아라. 나와 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여전히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송태섭은 주머니도 없는 트레이닝복에 손을 꽂아 넣으려다 허벅지로 손바닥을 미끄러뜨렸다.
‘젠장, 이런 식으로 물어보려던 게 아닌데.’
문고리를 노려보다시피하던 태섭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나 들어간다.”
문 너머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기만 해.”
“이제야 대답하지 아주. 너 왜 내 말 무시해.”
“…….”
“진짜 들어간다. 셋.”
안쪽에서 요란하게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드르륵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선 송아라는 대놓고 귀찮단 표정이었다. 행여나 엄마가 깰까 봐 조용조용 움직이고 말하는 태섭과 달리 눈치 한 번 보지 않고 요란스럽게 구는 아라의 태도가 황당할 만큼 적대적으로 느껴졌다. 태섭은 자신을 쏘아보는 송아라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너 왜 이렇게 짜증이야?”
“뭐 물어보려고 그러는데.”
태섭은 얼굴을 찌푸렸다.
“너 내 방을 아주 창고로 만들어놨더라.”
“어. 그거 따지려고 전화까지 했던 거야?”
“그건 아니고….”
태섭은 잠깐 시선을 흘리다 되돌아왔다.
“내 방에 있는 국제 택배 말인데. 상자에 반송 도장 찍혀 있는 거. 그거 네가 갖다 둔 거 아냐?”
아라는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 해외에서 뭐 시킨 적 없는데?”
“네 거 말고 내 거 말이야. 상자에 내 이름이랑 나 다니던 학교 기숙사 주소도 적혀 있던데?”
“몰라. 엄마가 갖다 둔 거 아니야?”
“대만 선배가 너한테 주소까지 물어봤다던데.”
“엥, 대만 오빠가?”
언제든 문을 닫아버릴 심산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있던 아라가 슬그머니 손을 떼어냈다.
송태섭이 살짝 짜증 난 투로 대꾸했다.
“어.”
“기억 안 나. 그런 게 있었어?”
“있거든? 가서 보던가. 한 번 뜯은 것 같던데 네가 뜯은 거 아니면 누가 뜯었겠냐?”
아라는 송태섭을 지나쳐 익숙하게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책상 밑에 밀어둔 택배 상자의 존재를 정말 까맣게 모르는 듯 한참 동안 다른 곳을 뒤지면서 애꿎은 생필품 상자만 열어댔다. 고데기와 화장솜 묶음, 생리대 따위가 들어있는 박스를 열어젖히며 서너 번 정도 헛다리를 짚다가 겨우 문제의 택배를 발견했다.
너덜너덜한 테이프를 뜯고 상자 안의 내용물을 꺼내자 에어캡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비디오를 요리조리 훑어보던 송아라가 그제야 “아 이거.”하고 뭔가 떠올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맞다, 이게 있었네. 와. 언제적 거야.”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던 태섭이 독촉하듯 물었다.
“뭔데?”
그러거나 말거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의외의 기억을 떠올리면 들뜨는 게 어쩔 수 없는 사람 마음인 듯했다.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는 아이처럼 아라가 상자 속 물건을 뒤적이며 말했다.
“이거… 대만 오빠가 오빠한테 보내려던 깜짝 선물? 우체국에서 우리 집으로 반송시킨 건데, 대만 오빠가 다시 부치겠다고 해놓고 연락이 없어서 나도 까먹었던 거야.”
“뭐? 그걸 잊어버리면 어떡해?”
태섭이 황망하게 되물었다.
“대만 오빠가 먼저 까먹은 거다 뭐.”
다른 테이프를 휘휘 돌려보며 아라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이거 대만 오빠 아직 대학생일 때 보낸 택배일걸? 그때 주소 알려줘서 고맙다고 나한테 밥도 사줬다.”
“…….”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송아라가 고개를 들고 태섭을 쳐다봤다.
“근데 왜?”
김이 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대만이 대학을 다니던 때라면 아무리 짧게 쳐도 5년도 전의 일이었다. 뭐가 됐든 간에 그 정도 지났으면 다 끝난 일이다. 필요 없으면 버려도 된다던 정대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박스를 다시 닫아두면서 송아라가 히죽 웃었다.
“이거 야한 비디오지?”
“뭐래…. 시합 비디오거든.”
“열어봤더니 순 테이프밖에 없어서 그때도 뭔가 싶었어. 이제 알겠네. 야한 비디오구만.”
“그렇게 생각하시던가요.”
“으, 저질.”
방으로 돌아가려는 아라의 등에 대고 태섭이 지나가듯 물었다.
“안에 뭐 더 없었어?”
“뭐 찾는데?”
“아니 뭐….”
송아라가 돌아보자 태섭이 자연스럽게 시선을 흘렸다.
“카드나… 편지 같은 거?”
“테이프밖에 없었는데?”
“없음 말고.”
곁눈질로 흘끔거렸지만 아라는 거짓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애초에 송아라가 이 일을 두고 거짓말할 이유도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아라가 기지개를 켜며 길게 하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 아까 낮에 오빠 찾는 전화 왔었어.”
“누구?”
“몰라. 근데 여자야.”
“여자?”
“전화기 옆에 메모해뒀다.”
아라가 들어가고 난 다음 태섭은 메모를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아는 번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그렇다, 송태섭은 아직 한나의 번호를 어렴풋이 외우고 있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아파트 앞까지 데려다 줘놓고 느닷없이 한나네 번호를 알고 있다는 둥 연락해 보라는 둥 부추기던 정대만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번호를 바꾼 한나일 수도 있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정말로 한나 전화겠거니 싶었다. 그의 귀국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만한 여자 지인이래봐야 이한나나 채소연이 전부였던 것이다.
‘설마 이 형 또 쓸데없는 짓 한 거 아냐?’
일전에도 대만은 송태섭과 한나를 연결해 주려 시도한 적 있었다. 많은 남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당시 태섭은 한나를 대놓고 짝사랑하는 농구부원 중 하나였고,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정대만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축에 속했다. 그 무렵 그는 농구에 온통 정신이 팔려 남들의 연애 사정에 별반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윈터컵을 준비하면서부터 뭔가 달라졌다.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정대만은 왜인지 태섭의 형 노릇을 해주고 싶어 했다. 말은 안 해도 그는 인기 많은 한나를 짝사랑하는 태섭의 처지를 좀 딱하게 여기는 것 같았고, 이따금은 히죽대면서 한나와 어떻게 되어가는 중인지 장난스럽게 캐묻기도 했다.
그래도 무언가 일을 벌이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봤자 한나랑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태섭을 발견하면 의미심장한 눈으로 흘끔거리다 부원들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 정도에 불과했다. (태섭은 이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져 한나의 눈치를 살피곤 했고, 한나는 매번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행동마저도 마침내 한나가 정대만을 따로 불러 대화를 나눈 후부턴 뚝 끊기고 말았다.
송태섭은 이 방면에서 정대만이 경악스러울 만큼 둔하고 눈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티 내진 않았지만 태섭에게도 나름대로 계획이란 게 있었다. 윈터컵 본선에 진출해 4강 안에 들면 그는 이번에야말로 한나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전에는 가망도 없을 것 같았는데, 분명 인터하이 전후로 한나와 자신의 관계가 뭔가 달라졌다는 걸 태섭은 느끼고 있었다. 어쨌든 잘하면 뭔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대만은 이 방면으로도 무서울 만큼 눈치가 빠른 인간이었던 것이다. 윈터컵 예선을 앞둔 전날 저녁, 둘이서 체육관에 남아 늦게까지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수비 배치를 두고 한참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데 잠자코 생각에 잠겨있던 대만이 불쑥 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무조건 본선 진출 시켜줄게.”
태섭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흘겨보았다.
“갑자기 웬 잘난 척이에요?”
“슬슬 고백해야지.”
“예?”
“너 본선 진출하면 이한나한테 고백할 생각 아냐?”
순간 너무 놀라서 피가 차갑게 식었다. 표정을 필사적으로 감췄지만 입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대만이 그런 태섭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뭘 태연한 척하고 자빠졌냐?”
“뭔, 갑자기 무슨 소리?”
“인마, 정신 차려. 다 티 난다.”
당혹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태섭이 벌떡 일어났다.
“뭐가. 뭐가 티 나는데요, 뭐가!”
“아니…. 너 하는 거 보면 다 알지.”
이제 태섭은 허망한 표정을 감추지도 못했다.
“티 났어요?”
“아니.”
절망에 빠지려다 멈칫했다.
“그럼?”
“반쯤 찍은 건데.”
정대만은 뭐가 뿌듯한지 어느새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근데 뭐, 남자애들 속이야 빤하지. 이거 성공하면 고백해야지, 저거 해내면 데이트 신청해야지, 이러잖냐. 너도 딱 그럴 느낌이긴 했어.”
“…….”
놀라서 역류했던 피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만이 킥킥대며 태섭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귀여운 자식. 이만 가자, 라멘 사줄게.”
‘아, 진짜 한대 패고 싶다.’
어깨에 걸쳐진 팔의 무게를 느끼며 송태섭은 뚱한 표정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그럼…. 티는 안 났단 거죠?”
“응, 거의?”
“근데 왜 그렇게 말했어요?”
“뭘?”
“하는 거 보면 다 안다면서요.”
대만은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야 너 요즘 여자애들한테 고백 안 하고 다니잖아.”
안 그런 척하더니 별 걸 다 알고 있었다. 몸을 기울인 대만이 소름끼칠 만큼 낮고 간지러운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솔직히 그건 좀 찌질했다.”
갑자기 좁혀진 거리감에 태섭이 펄쩍 뛰었다. 있는 힘껏 밀쳐내자 대만이 그대로 떠밀리면서 으하하 웃어댔다.
“너도 민망하긴 민망하지?”
“어쩌라고요.”
“좋아하는 애한테 차일까 봐 다른 여자애들한테 고백하고 다니는 놈이 어딨냐? 나도 그렇겐 안 한다, 바보야!”
초등학생처럼 깐죽거리던 대만은 기어이 엉덩이를 걷어차인 뒤에야 키득대며 입을 다물었다. 송태섭은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씩씩거렸다. 죽을 맛이었다. 생각 못한 곳에서 허를 찔리는 바람에 힘이 쭉 빠져나가버린 것 같았다. 윈터컵을 앞두고 바짝 곤두서있던 게 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대만이 별생각 없었다는 걸 송태섭도 모르진 않았다. 정대만은 딱히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의 실없는 장난이 어깨에 힘을 빼준 건 사실이었다. 그게 고맙고도 짜증났다. 돌아가는 길에 송태섭은 복잡한 기분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고백하려고,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하던 거 아니라고…. 왜 그런 변명이 하고 싶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정대만은 약속을 지켰다. 그는 호언장담한 대로 윈터컵 예선전에서 묘기에 가까운 슛을 보여주었고, 부상에서 막 회복한 강백호는 코트 위를 날아다녔다. 북산고는 예선전 내내 괴물 같은 득점 속도로 밀어붙이며 다시 한번 전국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목표한 대로 풀리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지만 후회는 남았다.
그래서 장학 재단에서 사람이 찾아왔을 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미국 유학 얘길 들었을 땐 꿈같은 소리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우쭐하고 건방진 생각마저 들었다. 졌는데도 찾아오다니, 내가 그렇게 두드러졌던가? 물론 그 이유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송태섭이 선택된 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 고려돼 있었다. 그의 가정 형편 문제도 크게 작용했다.
게다가 심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반 년은 더 걸린다고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변에 얘기하기도 좀 그렇게 되었다. 모든 게 확실해지기 전까진 말할 수 없는 문제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그는 아직 완결 나지 않은 자신의 일을 동네방네 떠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학 진학 문제를 두고 골몰하느라 그 무렵엔 정대만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것 같았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건지 어쩐 건지 주변에 제대로 말도 해주지 않았다. 들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몇 군데에서 다녀간 것도 같은데 자기 성에 차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새 다른 마음을 먹은 건지 불분명하게 굴었다.
정대만이 자기 일에 빠져 만사에 무관심해진 것에 송태섭은 내심 안심했다. 만약 대만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고백은 했냐.”라고 묻는다면, 그는 자신이 세워둔 허들로부터 더는 달아날 수 없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4강 진출 여부를 제쳐두더라도 태섭은 언제든 한나에게 고백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산왕전 전에도, 산왕전을 앞둔 전날 산책로에서 벌어진 마법 같은 만남 이전에도 언제나 기회는 있었다. 그런데도 하지 못한 건 그가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 앞에선 반대로 깊은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고백에 실패할 바에야 미지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편이 나았다.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큼 옥죄며 파고드는 존 프레스를 뚫고 나간 경험은 분명 송태섭의 무언가를 바꿔놓았지만, 그렇다 해서 모든 걸 완벽히 바꾸어 놓지도 못했다. 농구가 인생은 아니었으니까. 그의 삶이 가진 밀집력과 거기서 오는 힘은 대체로 농구보다 강력했다.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만들어진 태도를 하나부터 열까지 수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학 재단의 일을 핑계로, 미국 유학 건을 핑계로 은연중에 고백을 미루던 태섭은 어느 순간부터 정말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좀처럼 타이밍이 나지 않는다는 게 더는 변명이 아니게 되면서 졸업식 전까지 모든 일이 어영부영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3학년 선배들의 졸업식이었다. 시간이 쏜살같았다.
송태섭은 졸업식에 참석했다. 그는 준호와 치수에게 할 말이 많았다. 특히 그는 채치수에게 부채감과 고마움을 안고 있었다. 주장으로 윈터컵을 이끌면서 느꼈던 심정에 대해서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간단히 편지를 써갔다. 치수에게 편지를 건네면서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 인간, 분명 자긴 안 주냐고 뭐라고 할 텐데. 그런데 정대만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만 선배는요?”
“응? 아까 누가 불러서 나가는 것 같던데.”
준호가 하하 웃었다.
“좀 있다가 들어오지 않을까?”
그러나 정대만은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그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태섭은 대만의 교복 단추 두어 개가 없어진 걸 알아차렸다.
‘아니, 저 인간… 설마?’
설마는 진짜였다. 여학생 하나가 정대만을 부른 것이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불려간 대만은 자기보다 한참 키 작은 여학생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살짝 어색하게 굴었다. 송태섭은 고백받을 게 빤한 상황을 앞두고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정대만의 행색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대만은 여학생을 어디론가 돌려보내고는 뒤이어 본인도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송태섭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여태까지 그는 정대만이 누군가에게 연애 대상으로 보일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외모가 떨어진다거나 인간적인 매력이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적어도 태섭에게 있어 정대만이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정대만은 단 한 번도 채소연과 이한나 앞에서 속절없이 뚝딱거리지 않았다. 마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예쁜 여자 앞에서 긴장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물론 대만 역시 두 사람을 향해 지나가듯 감탄을 내뱉은 적은 있었다.
“쟤네가 진짜 예쁘긴 예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뭔가 감지되진 않았다. 그는 여학생들의 주목을 받을 때 우쭐해하고 남학생들의 추앙 앞에서 민망해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일반적이고 표면적인 무언가였다. 정대만이 누군가를 위해 울고 웃는 걸 상상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를 욕망해서 그렇게 구는 건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종속되거나 굴종하기에 정대만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는 필요할 때 언제든 스스로를 위해서만 골몰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 이유로 몇 시간 동안 슛 연습을 하고 농구를 즐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송태섭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랬다. 정대만은 좋아하기엔 너무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설마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백번 양보해서 좋아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다. 그 형이 멋있긴 하니까. 그런데 고백이라니. 저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모르는 건가? 경악스러웠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여학생을 붙잡아 세우고 그만두는 편이 좋다고, 어차피 다 안 될 일이라고 말리고 싶었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당장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송태섭은 괜히 주변을 서성거리다 인파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조용한 곳으로 걷는 동안 혼란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는 퉁명스럽게 생각했다. 뭐, 그 인간이 고백 받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 그러자 침착해졌다. 태섭은 좀 놀랐던 거다. 안 그럴 것 같은 인간이 여자한테 먹힌다니까….
“오, 송태섭. 여기서 뭐 하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정대만이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송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대만의 뒤편을 확인했다.
“왜 혼자예요?”
“엉? 뭐야. 너 영걸이한테 할 말 있냐?”
“…….”
“영걸이 우리 애들하고 있다. 찾을 거면 반대 방향이야.”
송태섭이 대만의 교복에 달린 단추를 훑었다. 아까랑 달라진 게 없었다.
“너 애들하곤 인사 다 했어?”
“당연하죠. 시간이 몇 신데.”
“그렇게 늦었던가?”
대만이 속없이 웃었다.
“그래서 나 찾으러 온 거야?”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게 아주 바빠 보입니다?”
“어후, 말도 마. 왕년엔 더 했다.”
능청을 떠는 대만은 꽤나 뿌듯해 보였다.
“그러니까 너도 잘 생각해 봐.”
“뭘요?”
“제때 고백하라고.”
말문이 막혔다. 대만은 꽤나 진지한 투였다.
“원래 졸업할 때가 최고로 바쁘거든? 너 잘못하면 말도 못 붙여보고 졸업한다. 이한나 걔가 보통 인기가 많은 줄 아냐. 3학년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앤데.”
그의 표정을 본 대만이 어깨를 툭툭 쳤다.
“아무튼 가자. 다같이 사진은 찍어야지.”
운동장으로 걷는 동안 대만은 내내 한나 얘기를 늘어놓았다. 송태섭을 북돋아 주려고 작정한 것 같았지만 정말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너네 지금 나쁘지 않아. 이한나가 너 신경 많이 쓰잖아.”
‘그걸 내가 몰라서 지금 이러고 있겠냐고.’
“뭘 그렇게 찌질거리고 있냐? 여자 꼬실 줄 몰라 너? 가르쳐 줘?”
‘뭐라는 거야.’
“차여도 뭐. 그래봤자 같은 농구부인데. 누가 알겠냐? 매일 보다 보면 마음 고쳐먹을지.”
‘차여는 봤나?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는 인간이.’
“그리고 솔직히.”
“솔직히 뭐요.”
태섭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너 같이 괜찮은 녀석을 한나가 어떻게 싫어하겠냐?”
“예?”
깜짝 놀라 올려다보았다.
대만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너 진짜 괜찮은 녀석이라고.”
당황한 태섭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렇긴 하죠. 안 그랬음 대만 선배랑 잘 지냈겠어요.”
“야, 너는 진짜.”
대만이 민망한 듯 투덜거렸다.
“거기서 그 얘기가 왜 튀어나오냐? 너도 참 분위기 읽을 줄 모른다.”
태섭은 앞만 쏘아보았다.
“알아서 할게요. 당신이나 잘해요.”
“그렇게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 사귈 거다, 인마.”
“…….”
송태섭은 잠깐 말을 잃었다.
“아까…. 사귀는 거예요?”
“뭐, 대학도 근처로 가니까.”
기절초풍할 만한 사건을 두고 정대만은 일상에서 벌어진 소소하고 즐거운 일을 보고하듯 말했다.
“옆반이라 오며 가며 보긴 했거든. 지난번 쪽지시험 볼 때 신세도 좀 졌고. 나 정신없는 거 아니까 우선 가볍게 만나보자던데. 괜찮지 않냐?”
‘뭐가 괜찮아?’
“키도 작고 귀엽더라.”
‘좋아서 사귀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되는 거야?’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자주 놀러 올게.”
대만이 킬킬대며 태섭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밀쳤다.
“표정 좀 봐라. 내가 먼저 여자친구 생겼다고 질투하냐?”
태섭은 말을 돌렸다.
“대학은 어디 붙었는데요?”
“응? 진다이(*神大, 가나가와 대학 약칭). 못 들었어?”
얘기해준 적 없었다.
“가깝네.”
“그래도 면허는 따려고. 차 뽑으면 나중에 한 번 태워줄게.”
“대만아!”
산책로를 빠져나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영걸이 두 손을 흔들었다.
“농구부에서 너희 찾고 있다! 사진 찍재!”
“오냐! 야, 가자.”
큰소리로 외친 대만이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태섭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멀어지는 그의 등을 쳐다보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 삼삼오오 모인 농구부원들이 대만을 반겨주었다. 뒤따라오는 태섭을 발견한 채소연이 손을 흔들었다. 일부러 멀찍한 곳에 자리를 잡으려는 송태섭을 가만 놔두지 않고 지적한 건 한나였다. 정대만이 가세해 태섭의 팔을 붙잡았다.
“주장이 구석에 처박혀 있으면 쓰나.”
덕분에 송태섭은 대만과 한나 사이에 서게 되었다. 사진기를 든 치수의 아버지가 우렁차게 외쳤다.
“자, 찍습니다. 하나….”
대만이 일부러 태섭을 한나 쪽으로 밀어댔다.
“아, 그만 좀 해요.”
“내가 뭘?”
“둘.”
“조용히 좀 해라.”
“치수가 조용히 좀 하랜다.”
“이 인간이 진짜….”
대만이 태섭의 손목을 꽉 쥐고 속삭였다.
“앞에 봐.”
“셋.”
그 사진을 두고 미국에 갔었다. 한나와 헤어진 뒤 태섭은 그녀와 관련된 물건을 서랍장으로 치워두었고, 그 사진도 아마 그때 휩쓸렸을 것이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태섭은 언제나 그 사진 속에서 고개를 살짝 아래로 비튼 자신의 얼굴 각도가 어정쩡하다고 생각했다.
대만의 조언이 무색하게 송태섭은 자신의 졸업식 날까지 한나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졸업식 당일에는 과연 정대만의 예측대로 한나에게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같은 반, 옆 반, 후배들, 심지어는 옆동네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신라중 농구부 출신들과 대학생이 된 이름 모를 선배들까지 한나를 찾았다. 그제야 송태섭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졸업식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초조하게 한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때늦은 데이트 신청이었지만 한나는 순순히 받아주었다.
또한 대만의 예측대로, 태섭이 한나에게 거절당하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고백을 들은 한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 입술을 오므리면서 눈을 굴리더니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아.”
“지, 진짜?”
믿을 수 없을 만큼 흔쾌한 전개였다.
돌아가는 길에 한나가 물었다.
“태섭아. 너 산왕전 전날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지.”
“너 그때 산책로에서 나 만났을 때 무슨 생각했어?”
“뭐?”
잠시 당황하던 태섭이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너랑 거기서 만나다니, 진짜… 운명이라고 생각했지.”
“바보. 그때 너 혼자 뛰어나가길래 내가 찾으러 나간 거야.”
한나가 영리한 눈으로 태섭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운명 같은 게 아니라구. 내가 너 좋아했다는 거 진짜 몰랐어?”
“그랬어?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난 그것도 모르고….”
태섭이 멍하니 대답했다.
한나는 태섭을 바라보며 익살스럽게 눈썹을 찡그렸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꿈에 그려온 순간이었지만 무척이나 담백했다. 그런데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앞의 한나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살피는지 전혀 계산이 되지 않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아래를 걸으면서 한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도 조금만 일찍 고백하지 그랬어.”
한나가 깃털 같은 말투로 자연스럽게 얘기를 흘렸다.
“졸업식 땐 나 왜 안 찾았어?”
“그, 네가 너무 바빠 보여서….”
“불렀으면 갔을 거야.”
“그건… 그러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태섭이 고개를 돌려 한나의 얼굴을 확인했다.
한나는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입술을 당겨 씩 웃더니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으이구. 오래도 걸렸다, 송태섭.”
역시 여자 마음은 잘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송태섭도 알고 있었다. 세상만사에는 타이밍이란 게 있었고, 자신이 어느 정도 늦었다는 걸 태섭도 모르진 않았다. 그래도 낙관한 건 일이 잘 풀렸다고 믿고 싶어서였다. 어쨌든 수많은 경쟁자 중에 선택받은 건 자신이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이한나는 먼저 고백하지 않았다. 송태섭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빤히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경기에 대한 중압감으로 뛰쳐나간 태섭을 뒤쫓아가거나, 매직으로 손바닥에 주문을 써주었다. 졸업식 때 누구의 고백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나가 송태섭을 좋아했다는 건 거짓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을 되짚어 봐도 한나가 먼저 고백하는 건 상상되질 않았다. 한나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가능성을 완벽히 닫아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문을 활짝 열어두지도 않았다. 남의 문을 여는 한나가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 건 태섭 혼자만의 감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한나의 주변은 언제나 잘 유지되어 있었다.
한나가 사람의 감정을 똑바로 직시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남학생들이 오랫동안 한나에게 감히 고백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건 바로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마 쉽게 누군가의 시선을 끄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는 능력 중 하나였을 것이다. 타인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려 들지 않기 때문에 되려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태섭 역시 바로 그 이유로 한나에게 끌렸다. 다들 비슷했을 것이다. 대다수의 남자들이 한나를 어떻게든 감화시키고 자신과 함께 만들어갈 미래를 설득하고 싶어 했다. 쉽게 흔들 수 없는 사람이라서 좋아했을 것이다. 어떤 땐 오히려 그런 상대 앞에서 더 불타는 법이다.
태섭은 한나와 세 달 정도 사귀었다. 헤어지던 날 한나는 어떠한 유감도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계속 친구인 거다? 태섭이 너, 나 모른 척하기만 해.”
그런 게 돼? 말이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다가 겨우 가라앉았다.
태섭은 얼떨떨하게 내뱉었다.
“당연하지….”
말은 지켜졌다. 한나는 때때로 연락을 주었다. 친한 친구처럼 친근하게, 그러나 마냥 친한 관계처럼 자주 통화하지는 않았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사귀었었다는 사실이 이 관계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변화시킬 수 있다고 암시하지도 않았다.
그 잘 조율된 세련된 태도가 공연히 자존심을 건드릴 때도 있었지만, 나이를 좀 먹은 뒤에는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는 사실을 태섭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송태섭은 한나가 다른 전 남자친구들과도 비슷하게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 정도면 선방이다. 한나와 친구로 돌아갈 수 있는 이들은 그녀의 승인을 받은 사람들뿐이다. 그렇다면 송태섭도 그 신뢰에 어느 정도 정중히 보답하고 싶었다. 그는 영리하게 굴려고 애썼다. 그러는 동안 한나의 연락, 마주칠 때 오고 가는 가벼운 스킨십, 스쳐가는 농담과 언급에 맥없이 들뜨지 않게 되었다.
정대만이 문제였다. 그는 송태섭이 여전히 십 대 청소년인 줄 알고 있었다. 그의 오래된 몹쓸 버릇이었다. 걸핏하면 남들을 자기가 챙겨줘야 하는 동생쯤으로 생각했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대만은 여전히 송태섭을 좋아하는 여자아이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춘기 남자애로밖엔 생각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나에게 전화를 부추기는 정대만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목적을 달성한 다음에는 뿌듯하게 웃었을 것이다. 활짝 열린 택배 상자를 노려보던 태섭이 메모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지금 전화 줘야 할 사람이 누군데?’
만약 걸려온 번호가 정말로 대만의 입김에 못 이기는 척 전화 한 통 걸어준 한나라면 이번에야말로 정대만에게 따끔하게 한소리를 해줘야 할 때였다.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만두라고, 모든 사건이 당신이 버려도 된다고 했던 비디오테이프들보다도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라고….
상자를 닫은 그가 묵묵히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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