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2)»
4
진녹색 연습복을 입은 열 명의 선수들이 일렬횡대로 나란히 섰다. 정대만은 뒷짐을 진 채 맨 끝에 서 있었다. 올해로 딱 마흔 살이라는 곽종배 감독은 자주색 반팔 폴라티를 입고 있었는데, 사흘 전 회식자리에서 입었던 것과 똑같았다. 곽 감독은 정대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곤 곧장 그를 지나쳐 하프라인 앞에 멈추어 섰다.
“자자, 평소대로 가자. 평소대로.”
그가 두툼한 손바닥을 부딪쳐 짝짝 소리를 냈다.
“몸 풀고 바로 연습경기 들어간다.”
“옙!”
팀원 전체가 조금 들뜬 상태로 움직였다. 오전 내내 사무업무를 보느라 좀이 쑤셨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 붙박여 있지 못하고 수시로 스트레칭을 하면서 정수기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이들은 십중팔구 실업 구단에 소속된 운동선수들뿐이다. 대만의 예전 팀원들도 사내에 있을 땐 비슷하게 행동했다.
실업 구단에서 근속하는 운동선수들의 생활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었다. 오후 열두 시가 되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숙이곤 부리나케 가방을 챙겨 일사불란하게 사무실을 떠나는 것까지 너무나 똑같았다. 그들은 점심을 먹은 다음 인근에 위치한 신덴히가시 해양 센터에 모여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사흘 전 벌어진 단체 회식자리에서 이미 팀원들과 안면을 튼 정대만은 어렵지 않게 그들과 섞여 대화를 나누었다.
“포워드 몇 년 했댔죠?”
대만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권수종이 물었다.
“3년입니다.”
“3년? 그럼 대학생 땐 포지션이 달랐어요?”
“정대만 씨 원래 슈터였어요.”
옆에서 허벅지에 세라닉 밴드를 걸고 한껏 근육을 늘이던 갈색머리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수종이는 모르겠구나. 정대만 씨 우리 세대에선 꽤 유명했는데.”
좌측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팀원이 가세했다.
물어본 당사자는 꽤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오, 상당히 잘했나 봐요. 명문고 출신이에요, 대만 씨?”
“북산고등학교 나왔습니다.”
예의바른 투였지만 동시에 자부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정작 수종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되물었다.
“북산고…. 어디지? 유명한 덴가요?”
“강호교는 아니긴 하지.”
갈색머리의 남자가 대신 대답했고, 정대만이 덧붙였다.
“안 선생님이 감독으로 계시던 곳이었죠.”
“이야, 다시 생각해도 참 재밌어? 그런 데가 산왕을 꺾었다니까 아주 전국이 뒤집어져선….”
자세를 바꾸며 팀원이 감회에 젖은 얼굴을 했다.
“그런데 그 다음 경기에서 몇 대 몇으로 졌더라….”
아마 47대 78이었을 것이다. 북산을 고통스럽게 쥐어짜는 느린 게임이었다. 패배의 고통은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아플 것도 없었지만, 길어져봤자 할 말이 있는 주제도 아니었으므로 정대만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수종을 쳐다보며 물었다.
“스페인 농구는 어때요?”
그러자 권수종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요. 여기보다 어렵기는 했던 것 같아요.”
JR 동일본 센다이 팀에는 기존에 총 열 명의 전력이 있었다. 그러다 불과 몇 주 전 원년멤버였던 슈터가 빠지면서 8번이 영구결번이 되었고, 그 뒤에 정대만이 들어왔다. 정대만은 작년 코트에서 8번 선수를 만난 적 있었다. 슛감이 좋을 땐 무지막지하게 폭격하는 선수였지만 슛을 쏠 때 나오는 특유의 버릇이 있어, 파울을 유도하거나 흐름을 끊어내기 쉽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날 정대만의 팀은 완패했지만 센다이 8번 선수는 제대로 던지지도 못했다.
개인 점수 차를 따져봤을 때 전반적으로 그날 정대만은 폼이 나쁘지 않았다. 이적 제안을 받았을 때 대만은 아마 그 경기서부터 이 팀이 자신을 주목해왔던 게 아닌가 추측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를 다시 슈터 자리로 불러들일 리가 없었다. 스몰포워드로 뛸 때에도 그는 종종 슈터들의 상태를 알아차렸고 그들과 매치업하면서 파울을 유도하곤 했다. 어쩌면 감독들도 거기서 그의 욕구를 알아차린 걸 수도 있다.
현재 JR 동일본 센다이에는 센터가 둘, 포워드와 가드가 각각 네 명씩 있었다. 센터에는 산왕공고 출신이 둘이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정대만과 세대가 달랐고 나머지 한 사람은 대만보다 고작 두 살 어렸는데 주전도 아닌 벤치 출신이라 만나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둘 다 키가 190cm가 넘는 거구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팀 에이스로 불리고 있는 것은 스몰포워드인 눈앞의 권수종이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 스페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줄곧 농구를 경험한 유학파 출신으로, 묵직하고 파워풀한 플레이를 통해 게임을 끌어나가는 재주가 있었다. 정대만의 이적이 결정되기 반 년 전에 영입된 인원이라 아직 그와 서로 붙어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북산고에도 유학파 셋이나 있지 않았어요?”
팀원 하나가 물었다.
정대만은 셋 중에 송태섭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아, 네. 후배 셋이 미국에 갔다 왔죠.”
“서태웅 선수는 이번에 계약했댔나….”
“예, 도쿄 OSG 들어갔네요.”
“도쿄 OSG? 당장 한 달 뒤면 만나겠네.”
리그가 폐막한지 겨우 일주일 지났는데도 벌써부터 출장 연습 경기가 잡힌 모양이었다. 실업단 농구 선발 대회가 9월, 올해 JBL 1999 시즌 개막이 10월 3일이니 정대만이 몸담고 있던 예전 팀 같았으면 4-5월 두 달 동안은 널널하게 휴식 기간을 잡아줬을 것이다. 보통의 팀이 다 그렇게 한다.
원래부터 이렇게 몰아붙이는 팀은 아닐 것이다. 다만 JR 동일본 센다이는 불과 반 년 사이 전력을 두 사람이나 교체했다. 정식 리그가 시작되기 전 비싼 값을 치르고 데려온 왕년 대학리그의 MVP 슈터와 작년 리그에서 제대로 써먹어 볼 기회가 없던 유학파 포워드의 힘을 어느 정도 시험해 보고 싶은 거다. 정대만은 자신이 기대 받고 있다는 사실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우선 전력을 좀 볼까.’
때마침 호각이 불렸다. 스트레칭을 하던 선수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열을 맞추어 섰다. 곽 감독이 손으로 연습경기 팀을 나누는 동안 대만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권수종 A팀.”
눈이 마주친 권수종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가 코트 좌측으로 설렁설렁 이동했다.
“정대만 B팀.”
정대만은 유니폼을 벗었다. 반대편 코트로 가 자리를 잡는 동안 권수종은 자신의 밧슈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정대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쭈.’
견제 대상으로 쳐주는 건가?
센터 서클을 사이에 놓고 두 팀이 마주 보고 섰다. 유니폼을 벗은 B팀은 전원 티셔츠 차림이었다. 양 팀의 센터와 파워포워드가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안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정대만은 이제 공을 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호각이 불리고 두 팀이 일제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공이 기름에 튄 물방울처럼 세차게 튀어 올랐다. A팀이 공을 낚아챘다. 선공권을 빼앗긴 B팀이 발 빠르게 수비 진영을 만들었다. 베이스 라인에 자리를 잡으면서 정대만은 시선으로 팀원들을 훑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라인에 걸쳐 서 있는 포워드의 파란색 운동화였다. 다음 순간 계시처럼 생각이 날아들었다.
‘저 사람 이름이 뭐더라?’
뜬금없는 타이밍… 그러나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서면으로 단체 연락처를 받았을 땐 이름은커녕 성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했는데 이 순간 팟 하고 떠오르는 게 꼭 거짓말 같았다. 공이 튀어 오르고 운동화가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머릿속에 자동화된 수십 개의 스위치가 한꺼번에 전원을 올렸다. 생각과 행동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는 어느새 반대편 하프코트에 서 있었다. 머릿속이 환하고 시야가 넓었다. 공은 아직 A팀의 손에 있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훤히 보였다. 베이스 라인을 맴돌던 B팀 포워드가 재빨리 공을 스틸하자 모든 이들이 일제히 A팀 골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정대만은 이미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달려오는 포워드는 아직 눈앞에 도착한 전력의 위치를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정대만은 불렀다.
“임학규!”
이렇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떠올려 냈다. 파란색 운동화가 끽 소리를 내며 멈추어 서는 것과 동시에 손안에 공이 도착했다. 정대만은 지체 없이 뛰어올랐다. 발바닥 전체로 바닥을 균형감 있게 밀어내면서 손끝으로 리듬을 실어 보냈다. 공의 무게가 동그랗게 느껴졌다. 손목의 스냅이 가벼웠고 시간이 멈추었다. 공이 손을 떠나자마자 정대만은 뒤돌아서 임학규와 마주 보았다. 정작 임학규는 정대만이 아닌 골대를 보고 있었다.
등 뒤로 슛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정대만이 씩 웃었다. 그제야 임학규가 대만을 마주보았다. 다가온 그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가 말했다.
“좋네요. MVP 슈터.”
대만이 기분 좋게 대답했다.
“이름으로 불러주시죠.”
임학규가 어깨를 으쓱였다.
“잘하네요, 정대만 씨.”
공격권은 다시 A팀에게 넘어갔다. A팀 가드의 손에서 농구공이 코트 바닥에 퉁겼다가 돌아왔다. 주변을 살피던 대만이 상대편과 시선이 부딪쳤다. 권수종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내 대만을 쳐다보고 있던 것 같았다.
‘뭐지?’
다음 순간 권수종이 매서운 속도로 드라이브인을 했다. 순식간에 페인트 존으로 들어온 그가 팀원 둘을 제치고 달려들었다. 골대에 매달리며 슛을 쾅 하고 꽂아 넣었다. 강력한 덩크였다. B팀에서 작게 기겁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중에 떠 있던 권수종이 손을 놓고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정대만을 돌아보았다.
잘하네. 정대만은 좀 얼떨떨했다. 기선제압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순수한 감상이 먼저 들었다. 코트 바깥에서 관전하는 입장이었더라면 이것보다는 좀 더 복잡하게 느꼈을 것이다. 조금은 질투하고 또 놀라워하면서 잰체하듯 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치게 맑고 차가운 물에는 물감이 제대로 퍼지지 않는 것처럼 감정이 새어 들어오기에는 아까부터 정신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그래서 알아차렸다. 예상보다 A팀의 호응이 미적지근했다. 팀에서 저런 덩크를 꽂아 넣어줬으면 다가가서 기특하게 머리라도 박박 쓰다듬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공은 계속 돌고 있었다. 정대만의 주의는 금방 다른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연습 경기는 B팀의 승으로 끝났다. 벗어둔 유니폼을 주워들면서 정대만은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권수종에게 말을 걸어볼까 싶었다. 그러나 팀원 둘이 그에게 다가오면서 이 가벼운 기분은 곧 연기처럼 흩어졌다. 정대만은 눈앞의 팀원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팔려 수종에게 신경을 쓰려던 건 까맣게 잊어버렸다.
“정대만 씨,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저녁 같이 드실래요?”
“오. 저야 좋죠.”
“잘 됐다. 학규 형도 오거든요.”
“어우, 대만 씨 장난 아니던데요. 어째 작년보다 더 잘 던지는 것 같아?”
단체 회식 때부터 스트레칭을 하는 동안 은은하게 남아있던 힘겨루기 같은 대화는 온데간데없었다. 초면의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대체로 대만에게 비슷하게 굴었다. 쉽게 다가와 그의 화려한 과거를 입에 올리면서 띄워주다가도 지나치게 찬사를 받는 것 같은 타이밍이 오면 갑자기 균형을 잡고 싶어 했다. 정대만 씨 우리 세대에서 유명하지. (무명고교 출신이지만.) 그 산왕을 이겼잖아. (그런데 그다음에 엄청 깨졌지 아마.)
정대만은 이 분위기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잘 모르니까 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지나치게 날 선 사람을 만나더라도 농구 한 판이면 해결이 가능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농구에 금방 매료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농구에 진심으로 부딪치는 선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에 진심으로 응하는 사람을 싫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사람을 감히 싫어할 수는 없는 거라고 정대만은 생각했다.
“대만 씨,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글쎄요… 텐동?”
“아, 그 메뉴는 차로 좀 나가야 하는데.”
“오, 저 차 끌고 왔는데.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면.”
셋이서 출입구 쪽으로 향하는데 등 뒤에서 누가 불렀다. 돌아보니 곽 감독이었다.
“대만 군, 잠시 얘기 좀 물을 수 있겠나.”
두 사람이 정대만을 쳐다보았다. 대만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별 건 아니고.”
곽 감독은 손을 내저었다.
“자네 후배 말인데. 귀국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나?”
“태웅이요?”
아닌 거 아는데도 왜인지 그 이름이 먼저 나왔다.
“아니, 그 친구 말고.”
“아. 태섭이요.”
하나도 친하지 않은 사람처럼 대답하자 곽 감독 쪽에서 어떤 기대가 반으로 줄어든 게 보였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정대만은 한 풀 꺾인 곽 감독에게 해명하는 대신 그냥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 친구 아주 귀국한 건가?”
“어…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걸…?”
“스카우터들이 닦달들을 해서 말이야.”
“오….”
‘송태섭 제법인데.’
“다음에 만나면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들어가게.”
“옙.”
체육관을 빠져나온 정대만은 팀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차를 빼기 위해 주차구역으로 들어왔다. 키를 꽂고 문을 열던 그의 시야에 풀린 신발 끈이 들어왔다. 허리를 숙이다가 덜 열린 문에 그만 몸을 꼬집히고 말았다. 쓰읍 소리가 절로 나왔다. 벌떡 몸을 일으킨 정대만이 차문을 제대로 닫곤 다시 허리를 숙였다.
“어우, 얼얼해 죽겠네.”
투덜거리며 신발 끈을 묶었다. 길쭉한 손가락을 놀려 매듭을 만들면서 대만은 오늘 직접 몸을 부딪쳐가며 느낀 이 팀의 전력과 수준에 대해 생각했다. 이곳의 센터들은 문짝만한 몸을 갖고 있었고, 순발력이 뛰어난데다가 정신력이 강했다. 포워드 쪽 전력은 기복 없이 무난하게 상향평준화 돼있었다. 그래서 아직 개성을 찾기 어려웠다. (음. 한 사람 빼고.)
가드들은 정대만을 포함해 셋이 슈터였다. 셋 다 스윙맨(*스몰 포워드와 슈팅 가드를 모두 플레이하는 선수)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슛에 특화된 정대만은 대학 시절 그랬던 것처럼 득점에 주력하게 될 것이다. 물론 포인트 가드의 역량에 따라 플레이 스타일은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었다. PG가 느긋한 타입이라면 그쪽에서 먼저 정대만이 스윙맨으로 움직여주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작 앞으로 정대만과 손발을 맞추게 될 포인트 가드라는 인간은 지난 회식 자리는 물론이고 오늘 나오지도 않았다. 개인적인 일 때문이라고 들었지만 썩 유쾌한 사정은 아닌 듯했다. 그 소식을 전할 때 팀원 대다수가 조금씩 서로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PG가 궁금했던 정대만 입장에선 꽤나 아쉬운 일이었다.
‘어쨌든 작년에 마주쳤을 땐 꽤 차분한 녀석이었지.’
뭐가 됐던 새로운 팀에서 새로운 농구를 할 때였다. 손안에서 매듭이 묶인 것을 확인한 정대만이 허리를 펼치고 일어났다. 반대편 무릎에 손을 짚고 무게를 싣던 그는 자세를 잡는 과정에서 조금 휘청거렸다.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펼치고 무릎을 문질렀다. 길쭉한 손이 무릎 위를 몇 번 더듬거리다가 물러났다. 정대만은 차 문을 열었다.
건물 너머로 슬슬 노을이 지고 있었다. 행인 하나가 아이 손을 잡고 체육관으로 들어가는 동안 앞서 가는 승용차 한 대를 따라 도요타가 느릿느릿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5
송태섭은 냉장고 문을 열고 딸기 팩을 집어넣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면서 라면스프를 흔들어 뜯었다. 부엌 테이블에는 그가 봐온 장이 엉성하게 기울어진 바구니째 놓여 있었다. 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태섭은 장 봐온 것들을 하나하나 냉장고 칸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컵누들은 오랜만이지만 그리운 맛은 아니었다. 미국에 있을 적에도 송태섭은 종종 레토르트 식품을 애용했다. 항상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애리조나의 봄여름은 지나치게 건조하고 뜨거워 러닝을 하고 있으면 목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웨스턴 대학교 농구부원들은 벤치고 주전이고 할 것 없이 훈련이 끝난 다음 AWC 레지던스홀 사이에 있는 야외 코트에서 농구를 했는데, 믿을 수 없게도 ‘아직 몸이 근질근질해서’였다.
그곳에 가지 않는 건 암묵적으로 꼬리 내린 개와 다름없다고 여겨졌다. 훈련이 끝나고 김나지움을 걸어 나오면 건조한 바람에 목이 불타는 것 같았지만 송태섭은 매번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과 섞여 레지던스홀로 향했다. 그곳에서 탈수 직전까지 농구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지나치게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먹어야만 내일이 있었다.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지만 그는 식사를 하고 체력을 보강해야만 했다.
그는 곧 조리식품과 냉동식품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래리스 감자 샐러드, 파고다 에그롤, 스토퍼 스타게티 따위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가끔은 느글거리는 속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래도 계속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달아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송태섭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그의 농구는 한계에 몰려있을 때 가장 절박해졌다. 진이 빠지는 한편으로 태섭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독이 달가웠다. 그것과 함께 있으면 농구에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보트에 매달리는 악착같음으로 애리조나의 첫 일 년을 버텼다. 벤치 신세는 반 년 만에 벗어났다.
주전 라인에 마지막으로 호명되던 날, 팀원들이 기숙사로 향하는 송태섭을 불러세웠다. 그들은 세련된 발음으로 무언가를 속사포처럼 말하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서있는 송태섭을 보고서 점점 동작을 크게 쓰기 시작했다. 송태섭은 짧은 영어로 ‘같이(with)’ ‘이 앞에(nearby)’ ‘먹다(eat)’를 알아들었다. 그제야 그는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넣으며 대답했다.
“오케이. 고.”
그날 송태섭은 팀원들과 단체로 캠퍼스 맞은편에 있는 리틀시저스에서 피자를 사 먹었다. 카운터 직원은 눈앞의 애리조나 대학팀들과 명백히 안면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로 친근하게 미소를 주고받는 몇몇은 거의 단골이나 다름없었다. 이쯤에 송태섭은 진작 눈치 채곤 있었지만 직접 확인해볼 일 없던 껄쩍지근한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이 자식들. 여태까지 나 빼고 여기 자주 왔었구나.’
그러자 죽어도 허둥대기 싫었다. 카운터 직원이 다가와 “Coke?”하고 물을 때도 그는 태연자약하게 굴었고, 보기만 해도 느글거리는 샛노란 치즈 피자를 순순히 집어들었다. 팀원들은 굴러가는 발음으로 종종 빠르게 대화했지만, 송태섭이 거기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듯 연거푸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대화에 끼워주었다.
“Good?”
그들은 이제 쉬운 단어를 사용했다. 모욕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송태섭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화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송태섭은 별 문제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Good.”
왁자지껄 헤어지는 길에 팀원들은 송태섭에게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얘기했다. 태도에서 악의나 업신여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송태섭과 함께 있는 것을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쩌면 한참 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송태섭은 연습 중에도 연습이 끝난 뒤 내기 농구를 할 때에도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송태섭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두 손을 모았다. 다리를 떨다가 벌떡 일어나서 주변을 서성거렸다. 남아있는 래리스 두 팩을 통째로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송태섭은 팩을 뜯고 감자 샐러드를 마구잡이로 속에 집어넣었다. 두 팩을 그렇게 싹싹 비웠다.
그날 새벽 여섯 시 반에 눈이 떠졌다. 이번에는 진짜 구토감 때문이었다. 그는 변기에 얼굴을 박으려고 화장실로 걸어가다가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추어 섰다. 바로 옆에서 과학반 동기가 요란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태섭은 저지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한 시간 동안 러닝을 했다. 목이 찢어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상태 속에서 송태섭은 치밀어 오르는 자신의 무언가를 서서히 주저앉혔다.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기숙사로 돌아갈 즈음에는 동이 트고 있었다. 그는 땀으로 눅눅한 저지를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로 몇 번이고 세수를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로비로 나와 전자레인지에 라자냐를 밀어 넣었다.
캠퍼스에 빛이 드리우는 동안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전자레인지에서 띵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송태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라자냐를 속에 수납하듯 쓸어 담은 다음 훈련을 나갔다. 새벽 일곱 시부터 개인 운동, 아침 아홉 시부터 팀 훈련, 교양 이론 수업이 있는 날에는 오후 두 시부터 다섯 시까지 꾸벅꾸벅 졸면서 수업을 들었다. 팀원들은 여전히 레지던스홀 인근 야외코트에서 내기 농구를 했다. 송태섭은 한 번도 그곳에 나가는 걸 빠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구토감이 들지 않았다. 그는 무엇이든 잘 먹었고,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체력이 붙고 몸이 단단해졌다. 송태섭은 다음 학년에도 주전 자리를 따냈는데, 심지어는 마지막으로 불리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성취 속에서 얼떨떨하게 고독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앞서 걷던 팀원들이 당연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 송태섭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애리조나의 대학생활이 재미있었다. 줄곧 그래왔다는 것을 어느 순간 태섭은 깨달았다. 이곳에서 자신은 말 그대로 농구밖에 할 수 없었다. 모든 걸 쏟아 부을 데가 농구밖에 없었다. 애리조나에서 그는 책임이 주어지지 않은 어린 아이처럼 자유로웠다.
컵 속에서 젓가락이 헛돌았다. 몇 젓가락 먹었다고 면은 금세 동이 났다. 송태섭은 국물을 두어 모금 마시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음식물을 싱크대에 쏟아버리고 쓰레기통에 컵을 던져 넣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송태섭은 근육량을 유지하기 위해 고열량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철저히 지켜왔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당분간 농구를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빈 거실을 대강 쓸고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자마자 책상 아래와 이불장 사이, 선반 옆에 꽉꽉 들어찬 온갖 종류의 택배 상자들이 그를 반겼다. 집을 떠나있던 지난 5년 동안 그의 방은 송아라의 잡동사니 창고로 전락했는데, 얼추 듣기로는 송아라 쪽에서 방을 달라고 졸랐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의견을 철회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자기 물건을 구석에 처박아두는 용도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일찍 귀국 의사를 밝혔더라면 어머니가 진작 방을 치워놨을 것이다. 그러나 송태섭은 불과 일주일 전 갑작스럽게 귀국 사실을 통보했고, 대학생이 된 이래로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 송아라의 부재로 인해 그의 방은 창고와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안해서 어쩌니. 엄마가 주말에 치워둘게.”
면목 없다는 듯 사과하는 엄마의 태도가 난처하게 느껴져, 송태섭은 일부러 의젓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녜요. 제 방인데 그냥 제가 치울게요.”
그러나 한동안은 개인적인 일로 정신이 없었다. 집안일이야 조금씩 거들어도 물류창고나 다름없는 방을 치울 엄두는 나지 않아 방치해둔 게 벌써 2주 전이었다. 슬슬 정말로 치우긴 치워야 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책상 밑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테이프를 뜯고 상자를 열었다. 내용물이 생리대 박스 세트라는 걸 알아보자마자 송태섭은 다시 휙 상자를 덮었다.
‘아. 송아라 진짜.’
어쩐지 부피에 비해 지나치게 가볍게 싶었다. 문제의 상자를 옆으로 슥 밀어둔 태섭이 책상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안쪽에 쑤셔 박힌 다른 박스를 꺼내려고 한 건데 이건 좀 무거워서 쉽게 딸려오지 않았다.
질질 끌어내자 속에서 물건이 서로 부딪쳐 덜컥대는 소리가 났다. 송태섭은 멈칫했다. 박스 위에 익숙한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는 상자를 완전히 밖으로 끌어낸 다음 손바닥으로 먼지를 털면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상자 위에 송장이 붙어 있고 측면에는 우체국 마크가 찍혀 있었다. 그를 당황하게 한 건 ‘보내는 사람’ 옆에 반듯하게 쓰인 정대만이라는 이름, 그리고 ‘받는 사람’ 옆에 쓰인 송태섭 자신의 이름이었다. 주소는 애리조나 웨스턴 대학 기숙사로 돼 있었다.
상자를 열어본 그는 이제 정말로 어리둥절해졌다. 수십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두꺼운 에어캡에 둘둘 싸여 있었다. 송태섭은 에어캡을 떼어내고 테이프 하나를 꺼내 뒤집어 보았다. 스티커 부분에 날짜와 함께 간단한 내용이 휘갈겨져 있었다.
[고시가야 시립 체육관 1994. 08. 11.]
나머지 테이프도 꺼내서 살펴보았다.
[다이토분카 1994.08.23], [추쿄 1994.08.26], [하쿠오 1994.09.02], [나고야 학원 1994.10.09.]… [무사시노노모리 종합 스포츠 플라자 1995.08.03.], [센슈 1995.08.08.]….
전부 정대만의 글씨였다. 이게 시합 비디오라는 걸 모를 만큼 송태섭은 둔하지 않았다.
‘왜 이걸?’
아마도 정대만이 자신에게 보내려던 국제배송 택배인 것 같은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에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게 왜 자신의 방에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송태섭은 허공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박스를 도로 있던 자리에 밀어넣고 거실로 나왔다.
귀국한지 벌써 2주가 넘게 흘렀다. 그동안 어떻게 얘기가 닿은 건지 소식을 들은 농구부 후배들에게서 종종 연락이 왔다. 채치수는 태섭 쪽에서 연락을 넣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주었다. 공항에 데리러 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얘기하면서 치수는 간단히 자신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그 똥강아지랑 9월에 맞붙게 됐다.”
“들었어요. 같은 지역이라면서요.”
“오. 준호가 알려주던가? 아님 강백호가?”
“대만 선배가 그러던데요.”
“그 자식은 꼭 어디서 주워듣고서 아는 척을 해대더군.”
치수는 상당히 괘씸하다는 투로 말했다.
“근데 걔가 전화를 다 줬단 말이야?”
“아뇨, 그건 아니고…. 선배 대신 공항에 나왔더라고요.”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채치수가 되물었다.
“뭐? 정대만이?”
태섭은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준호 선배가 부른 것 같더라고요. 어쨌든 데려다주던데요.”
“나이를 먹더니 그래도 그 녀석이 어른 노릇을 하긴 하는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치수는 딱히 감명을 받은 투는 아니었다….
하여간 저 좋을 때나 불쑥 연락을 주는 입장이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너무 늦지 않게 주워듣고 챙기는 게 묘하게 열 받는다고 투덜대던 채치수는 5월 중순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게 불과 사흘 전이었다. 반면 그날 아파트 현관 앞에서 어물거리며 다음을 기약하던 정대만에게선 장장 2주 동안 전화 한 통 없었다.
딱히 그의 연락을 기다린 건 아니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송태섭은 진작 알고 있었다. 원래부터 정대만은 말을 흘려보내듯 던지는 인간이다. 농구엔 그토록 집요하면서 나머지에는 놀랄 만큼 무심했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식의 태도가 몸에 배어있었다.
심지어는 그 무의식적 태도가 상당히 많은 이들의 호감과 공분을 동시에 산다는 것에조차 무관심했다. 정대만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때조차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남들에게 크게 관심이 없으니까. 채치수가 말하는 그의 괘씸함도 여기에 포함된다. 채치수도 송태섭만큼이나 그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는 거다.
정대만이 그런 타입이라는 게 딱히 화가 나거나 유감스러운 건 아니다. 북산고 농구부원들은 물론이고 정대만을 겪어본 인간들은 대체로 비슷한 감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냥 정대만이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라는 거다. 그걸 모르면 어떤 식으로든 감정적인 부분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이 왜 저런 걸 보내려고 했지.’
송태섭은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며 수리점 번호를 찾았다. 대체 뭐 어떻게 쓴 건지 송아라가 일 년 전 비디오 플레이어를 고장 낸 뒤로 송 가족의 비디오 플레이어는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줄곧 소파 옆에 처박혀 있었다. 이것저것 따져물을 게 점점 많아지고 있었으므로 슬슬 태섭은 진심으로 여동생의 귀가를 벼르는 중이었다.
동네 수리점 번호를 막 찾아낸 순간 전화가 울렸다. 송태섭은 수화기를 들었다.
“어.”
그 한 마디로 누군지 알아차리자마자 너무 놀라서 헛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여보세요. 저 송태섭 고등학교 선배 정대만이라고 합니다. 혹시 거기 태섭이 있나요?”
송태섭은 얼굴을 찡그렸다.
“전데요.”
“송태섭? 와, 니네 집 번호 그대로네.”
“저번에 집앞까지 데려다줘놓고 무슨 소리예요?”
“그건 그렇다.”
정대만이 키득키득 웃어댔다.
송태섭은 손을 쥐었다 폈다.
“근데 무슨 일?”
“아, 물어볼 거 있어서. 너 아주 돌아온 거야?”
“아주?”
“앞으로 쭉 일본에 있는 거냐고.”
이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모르겠는데요.”
“응?”
“안 정했어요. 왜요?”
대만은 여기서 잠깐 말을 멈췄다.
“어…. 너 탐내는 곳이 많은 것 같길래.”
‘이 형 감독한테 쪼였구만.’
“이거 설마 선배 팀에 들어오라고 돌려서 말하고 있는 건가?”
“태섭아. 안타깝지만 우리 팀 자리 다 찼다.”
“예, 불러도 안 갑니다.”
둘 다 낄낄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어디에요? 집 아닌가 봐요?”
주변 소음을 캐치한 태섭이 물었다.
“어. 지금 병원 앞이야.”
“엥, 다쳤어요?”
“아니. 정기검진 매달 하는 거 있잖아.”
정대만은 송태섭이 당연히 알아들을 거라고 확신하는 투였다.
“이상 없대서 물리치료 하고 나오는 길이야. 늘 하던 거.”
“그건 다행인데….”
잠시 고민하던 태섭이 물었다.
“새로 이사간 곳 말인데요. 근처에 병원 있는 거죠?”
“있지. 내가 그 정도도 안 알아보고 거기 들어갔겠냐.”
“걱정한 건데요.”
“오….”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지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거 오랜만에 받아보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어렴풋하게 신호등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 빵빵대며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송태섭은 수화기를 든 채 잠자코 서 있었다.
“대만 선배.”
“응?”
“물어볼 게 있는데요.”
“어.”
“저희 집에 선배가 보내려던 택배가 하나 있더라고요. 무슨 비디오밖에 안 들었던데. 이거 뭐예요?”
“택배…. 그런 거 보낸 적 없는데?”
정대만은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투였다.
“선배 대학 리그 시합 비디오 모아둔 거던데요.”
“무슨…. 아!”
대만의 목소리가 커졌다.
“너 그걸 이제 확인했단 말이야? 야, 인마. 내가 그걸 몇 년 전에 보냈는데!”
“제대로 부친 거 맞아요? 이거 저희 집에 있다고요.”
“우체국에서 부쳤거든? 주소도 니네 동생한테 물어보고 보낸 건데.”
대만은 억울하단 듯이 말했다.
“근데 그게 왜 너네 집에 있냐.”
‘낸들 알아?’
“됐어요. 이따 송아라 오면 물어볼게요. 근데 왜 보낸 거예요?”
“써놨잖아. 편지 안 읽었어?”
“편지요?”
“안에 있어. 근데 뭐라고 썼는지도 이젠 가물가물하다. 별 건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러나 박스 안에는 분명 비디오밖에 없었다. 사이에 껴있는데 내가 못 본 건가? 혼란에 빠져 생각을 더듬는 동안 정대만은 송태섭의 침묵을 더는 용건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 듯했다.
“아무튼 끊는다. 그걸 이제봐서 뭐하나 싶긴 한데… 필요 없으면 버려도 돼. 어차피 너 주려고 복사한 거라서.”
전화가 끊어지자 송태섭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짜증을 느꼈다. 어느새 손바닥이 서늘해져 있었다. 그는 방으로 돌아가 다시 박스를 꺼냈다. 그러나 편지 같은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비디오를 한쪽으로 치워놓고 안으로 접힌 부분 사이까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거실로 나와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송아라네 대학 행정실 번호를 찾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직원이 전화를 받자 송태섭은 간단하고 명확하게 자기소개를 한 뒤 송아라에게 전화를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으로부터 금방 회신을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정작 전화가 돌아온 건 저녁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송아라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의 소음이 너무 심해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오빠 뭐라고?”
“내 책상 밑에 택배 있는 거. 그거 뭐냐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송아라의 목소리가 너무 쌀쌀맞게 들려서 태섭은 내심 놀랐다.
“농구부 선배가 나한테 보내려던 거 말이야. 비디오 들어있는 상자 있잖아. 안에 뭐 더 없었어?”
“모르겠는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거세졌다. 송아라가 수화기를 떼어내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시 전화를 받은 송아라가 말했다.
“봐야 알 것 같아. 나 바쁘니까 끊는다.”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던 송태섭은 얼떨떨하게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서 있었다. 송아라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물어볼 곳을 잘못 골랐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송태섭은 오늘 정대만에게 새 번호를 묻지 않았다. 그에게는 정대만이 잊어버린 것을 물을 만큼의 의지가 없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다. 누구에게 짜증이 난 줄도 모르고 송태섭은 결국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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