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1)»
1
정대만은 도쿄에서 도호쿠 본선을 따라 달리는 이치노세키행 특급열차에 타고 있었다. 그는 운좋게도 일찌감치 자유석을 꿰 찼고, 자기 몸집의 두 배쯤 되는 더플백을 무릎 위에 얹어놓은 채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잠에 빠져들수록 다리가 점점 벌어지면서 가방이 앞으로 쏠리고 있었지만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내릴 역까지는 아직 세 정거장이나 남아있었다. 정대만의 목적지는 미야기현에 있는 센다이시로, 온천과 스키가 유명했고 동쪽으로는 거대한 항구를 끼고 있었다. 도쿄에서 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네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고속 신칸센으로도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JR 동일본 센다이 이적이 결정됐을 때 그의 부모님이 가장 먼저 신경 쓴 것도 바로 이 절망적인 교통편이었다.
“어떻게 왔다갔다 하려고?”
“차 있잖아요.”
“그렇게 오래 운전대 잡아본 적 없잖니.”
“에이, 운전이야 하면 그만이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그의 부모는 어디 한 번 당해보라는 투로 고소하게 웃었다.
“막상 해보면 또 다를 걸?”
부모님의 말이 맞았다. 가나가와에는 어디를 가던 차가 넘쳤고 수시로 신경 써야 할 표지판과 신호등이 있었지만, 적어도 도심에서 운전할 땐 지루하지는 않았다. 국도를 타고 몇 시간씩 달리는 일은 달랐다. 국도에는 그를 긴장시킬 만한 것들이 별로 없었다. 장시간 운전은 정대만이 막연하게 낙관하던 것 이상으로 끔찍하게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일이었고, 두 시간쯤 달렸을 무렵부터는 옆에 앉아서 농담을 떠들어줄 동승자가 간절해졌다.
철지난 엔카라도 좋으니 비슷한 장르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세트테이프라도 하나 있었다면 그토록 고역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정대만은 국도를 타는 일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바퀴달린 시간과 정신의 방을 견디는 동안 그는 두 번이나 잘못된 도로를 타서 엉뚱한 길로 빠져나왔고, 그 바람에 빙 돌면서 점점 목적지와 멀어졌다. 다섯 시간 넘게 도로 위를 달리며 터널을 지날 때마다 지직대는 라디오 캐스터의 명랑한 목소리와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은 광고음악을 듣다말고 정대만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 짓 두 번은 못한다.
그는 그 결심을 지켰다. 새로 계약할 집을 보러갈 때도 열차를 이용했고, 이삿짐의 대부분도 센터를 불러 처리했다. 주말마다 자차로 본가를 드나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어영부영 기약 없이 미뤄졌다. 본격적으로 이사 준비에 한창이던 1월 한 달 동안에는 신칸센만 이용하다가 교통비 값만 20만엔이 넘게 나왔다.
그러고 나니 수중에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안 그래도 이사 준비 때문에 물 새듯 사방팔방에서 돈이 빠져나간 탓이었다. 잔고를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덜컥 정신이 들었다. 정대만은 매표소 앞에서 깊이 갈등하다가 결국 자유석을 선택했는데, 그의 인생에서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약 오늘 운이 나빴더라면 두 시간 내내 무거운 더플백을 멘 채 서서 가야만 했을 것이다.
오늘은 새로 계약한 맨션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그는 지난 몇 년 간 간토지방에서 활동했다. 대학과 직장이 모두 집과 멀지 않은 덕분에 그의 생활반경은 꽤 오랫동안 도쿄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JR 동일본 센다이에서 이적 제안이 온 건 계약기간 상 마지막 무대였던 11월 리그를 막 마쳤을 때였다. 불과 일 년 전 정대만을 4강에서 완패시킨 적 있는 강팀으로, 이름 그대로 센다이시에 거점을 두고 있었는데, 대학프로농구와 JBL의 열렬한 팬인 회장과 이사진 덕에 실업팀 중에서는 드물게도 선수 지원이 빵빵하기로 알려져 있었다.
준-프로리그의 땅이라도 어중이떠중이 농구는 하지 않겠다고 못 박은, 그야말로 농구를 위한 농구를 하겠다는 팀에서 보낸 러브콜인 것이다. 필요하다면 센다이시에 거주지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의향까지 은근하게 내비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은 그의 기량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듯했다.
우쭐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당시 팀에서 포워드를 맡고 있던 정대만은 그들이 제안한 슈팅가드 포지션을 받아들이고 본격적으로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북산에서 슈팅가드로 반 년, 대학 팀에서 4년을 슈터로 뛰었으니 거의 3년 만에 그의 앞으로 돌아온 포지션이었다. 그는 여전히 잘할 자신이 있었다.
4월이면 정대만은 JR 동일본 여객 철도에 소속된 회사원으로서 평일 오전에는 사무업무를 보고 평일 오후와 주말에는 코트를 누비게 될 것이다. 그의 맨션은 회사에서 차로 이십분 정도 떨어진 베드타운에 있었는데, 역과 그렇게 멀지 않아서 여차하면 전철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정대만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지역구 주민들을 위해 오후 열 시까지 운영하는 체육관이 있다는 거였다. 단체 팀 연습이 없는 날에 그곳을 방문하면 언제든 슛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해는 그의 인생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정대만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생활을 앞두고 있었다. 달라지지 않은 건 그가 여전히 농구를 하고 있으며, 농구를 그만둘 미래를 상정하지 않을 만큼 여전히 농구를 좋아한다는 사실뿐이었다. 꿈에서도 그는 종종 농구를 했다.
전철이 덜컹거리며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바퀴 아래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쏜살같이 흘러갔다. 팔짱을 낀 자세 때문에 몸을 점점 앞으로 숙이던 정대만은 무릎에서 가방이 흘러내리는 것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벌떡 일어나자 무거운 더플백이 앞으로 두어 번 구르다 힘겹게 멈춰 섰다. 차량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역은 센다이, 센다이 역입니다.”
‘어우… 하마터면 못 내릴 뻔했네.’
정대만은 허겁지겁 가방을 주워 일어났다.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로 열차가 어수선한 가운데 차창 밖으로 낯선 도시의 항구가 펼쳐졌다. 급한 대로 더플백을 대강 걸치고 부산스럽게 출입문 방향을 찾던 정대만은 잠깐이지만 눈앞의 바다에 시선을 빼앗겼다. 열차가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다음 순간 누군가 뒤에서 있는 힘껏 그를 밀었다.
어어, 반사적으로 중심을 잡다 말고 승강장 사이에 발이 걸렸다. 우당탕 넘어지는 정대만에게서 더플백을 낚아챈 남자가 허겁지겁 플랫폼 밖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 저, 저. 어어, 야, 저거! 저 도둑놈!”
깽깽이발로 뛰쳐나온 정대만이 한달음에 계단을 두세 칸씩 달려 내려왔지만 소매치기는 벌써 사라진 후였다. 인파를 정신없이 휘휘 둘러보는 그를 사람들이 흘끔대며 지나갔다. 머리 위로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요란한 안내음과 함께 떠나는 열차가 만들어내는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정대만은 결국 짜증스럽게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에이씨…. 뭐야.”
더플백에 들어있던 것. 새로 산 아디다스 수건 여섯 개와 여분의 스포츠 아대, 물병 두 통, 봄가을용 실내화와 남성용 로션, 기타 잡다한 생활용품들. 도난당한 내용물을 검토해보던 정대만이 머리를 부여잡다 말고 센세키선 환승로를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2
구단에서 지원해준 맨션은 다가조역에서 도보로 십오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부동산에서 전해들은 대로 근처에 편의점이 두 군데나 있었고 곳곳에 작은 주륜장이 딸려있었다. 입지가 나쁘지 않은 덕에 적당한 유동인구가 여유로운 생활감을 만들어내는 동네였다. 멀지 않은 곳에 오래된 이발소와 썩 괜찮아 보이는 이자카야도 있었다.
주륜장 앞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지나쳐 맨션으로 들어온 정대만은 실내 슬리퍼를 찾다 말고 살림살이가 들어있는 가방을 소매치기 당했다는 기분 더러운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고 말았다.
‘운도 나쁘지. 대체 어떤 놈이야?’
그는 뜯지 않은 박스 몇 개를 정리하다 말고 금세 의욕을 잃었다. 결국 TV를 틀어놓고 새 가구 냄새가 풀풀 나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그대로 잠들락 말락 하던 순간에 전화가 울렸다. 비몽사몽 일어났다가 선반에 무릎을 한 번 더 쾅 박고 말았다. 쓰읍, 소리를 내면서 수화기를 들어 올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만아, 잘 도착했어?”
“권준호냐….”
“하하, 막 자다 깬 목소리네. 짐은 다 풀지도 않았겠구나.”
“그래도 두 박스밖에 안 남았다 인마.”
시계를 흘끔 보니 벌써 저녁시간이었다. 준호가 전화를 걸지 않았더라면 분명 밤늦은 시간에나 깨어났을 것이다.
권준호는 가끔 이런 쪽으로 타이밍이 귀신같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매번 솜씨 좋게 발휘되는 준호의 사려 깊음이었지만, 이런 타이밍이 의도되었으리라곤 꿈에도 모르는 정대만은 늘 그렇듯 태평하게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저녁 뭐 먹지.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라멘 집을 본 것 같은데.’
“대만이 너 4월부터 출근이라고 했었지?”
“엉.”
“그럼 이틀 뒤에 시간 괜찮아?”
그는 달력을 확인했다.
“목요일? 쉬지. 왜?”
“태섭이가 귀국하거든.”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던 자세가 저절로 고쳐졌다.
대만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송태섭? 걔가 갑자기 왜?”
준호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글쎄, 잠깐 들어오는 것 같던데.”
“그러냐….”
“원래는 치수가 차 끌고 나오기로 했는데 그날 일이 생겨서 못 나오게 됐거든. 넌 나올 수 있나 싶어서.”
“윽. 운전하라고?”
이건 좀 싫었다.
“센다이 공항이면 나간다.”
국내선 공항을 들먹인다는 건 그냥 안 나간단 소리였다. 준호는 능숙하게 흘려들었다.
“하네다 공항 3시야. 나올 수 있어?”
“쫌 봐줘라…. 여기서 다섯 시간은 걸린다고.”
또 국도를 타고 몇 시간씩 운전이라니 끔찍했다. 맨몸으로 가서 얼굴만 보고 오는 거라면 또 모를까. 근데 고등학교 선배들이 우르르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것도 좀 극성맞지 않나? 졸업한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정대만으로선 권준호의 호의가 놀라울 다름이었다.
“못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너 혼자 가는 거냐? 백호랑 태웅이는?”
“훈련 때문에 바쁘지.”
“걔 차 태워줄 사람 없대?”
“음, 혼자 귀국하는 것 같더라. 어머님도 바쁘다 하시고.”
그런 사정이라면 준호와 치수가 신경 쓸 만도 싶었다.
“가끔 보면 너도 참 대단하다. 졸업한 지가 언젠데 그걸 다 챙기냐.”
타박처럼 들리지만 순수한 감탄사였다. 권준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정말 안 나올 거야?”
“인마, 안 나간다니까.”
“알겠어. 피곤할 텐데 푹 쉬어.”
“엉.”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거실로 돌아왔다. TV에선 일기예보가 어렴풋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대만은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가 텅 빈 내부를 보고 다시 문을 닫았다.
‘나가서 사먹어야겠네.’
점퍼를 입는 동안 정대만은 아까 들었던 소식을 곱씹었다. 걔가 귀국이라니. 무슨 일이지? 잘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알음알음 들은 마지막 소식도 몇 달 전이라 사정을 추측하기 어려웠다. 이럴 거면 좀 더 캐볼 걸 싶었다. 그래봤자 권준호도 아는 건 거의 없는 것 같았지만.
보나마나 송태섭 쪽에서 제대로 설명해주는 게 없었을 거다. 예전부터 송태섭은 좀 그런 구석이 있었다. 보기보다 입이 무거워서 그런 얘기들은 잘 안했다.
미국 유학 건만 해도 그렇다. 장학재단 지원이 결정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반 년 전의 일이었다는데도 송태섭이 프리 스쿨을 진학하기 전까지 주변 사람들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쩐지 수험준비는 생각도 않고 마지막까지 전국대회를 노리며 윈터컵까지 출전한다 싶었다.
정대만처럼 대학 추천을 노리는 줄 알았는데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대만은 이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곤 질투심과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안 선생님을 뵐 겸 몇 달에 한 번 농구부에 들렀다가 티격태격 근황을 주고받을 때도, 졸업식 날 마주쳤을 때도 송태섭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정대만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그런 일이 결정되면 입이 근질거리지 않나? 이한나 앞에선 그렇게 속이 빤히 보이게 행동하는 녀석이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는 한나조차 송태섭이 농구로 유학을 가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자기 능력을 어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어차피 멀리 떠날 거라서 고백이고 뭐고 말 꺼낼 생각 자체가 없었나? 어쩌면 송태섭이 자기 생각과 전혀 다른 녀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한동안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정대만은 시즌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대학 동기들과 보냈고, 온갖 술자리에 불려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송태섭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4월 토너먼트 시즌 마지막 경기 날 다시 마주쳤다. 그날 정대만은 후반 경기를 풀로 뛰느라 좌석에 송태섭이 앉아있는 줄도 몰랐다.
경기가 끝난 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송태섭이 후드티 차림으로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복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어찌나 반갑던지, 은은하게 남아있던 그간의 질투심이나 서운함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눈앞의 선배가 너무 들떠보여서 그런 건지 송태섭은 살짝 머쓱해 보였다. 태섭은 대학농구 구경 좀 할 겸 요즘 짬날 때마다 근처에서 열리는 리그를 돌고 있다고 했다. 그제야 불현듯 준호로부터 얻어들었던 송태섭의 근황이 머릿속에 스쳤다.
대만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유학 준비한다지 않았냐? 어디 뭐 학교 다닌다며. 오늘 수업 없어?”
“수요일엔 원래 수업 없어요.”
“신기하네…. 프리 스쿨은 다 그래? 고등학교 4학년이라더니 무슨 대학생 같다.”
“그러는 선밴 학교에 얼굴 비추는 날이 거의 없다면서요?”
“인마 누가 그래? 그거야 연습 때문에 그렇지.”
반격할 때 짓는 특유의 표정으로 태섭이 얄밉게 웃었다.
“비시즌 때도 다르지 않다던데. 대학생들은 다 그러나?”
“야이씨, 너 그거 권준호한테 들었지. 그거 걔가 과장한 거야. 그래도 일주일에 세 번은 나가거든?”
“아, 예.”
두 사람은 잠깐 킬킬 웃어댔다. 송태섭은 어느새 주머니에서 손을 빼놓고 있었다.
“그럼 너 학교가 이 근처야?”
“아뇨, 좀 멀어요. 여기서 두 시간 정도?”
정대만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럼 너 나 보러 온 거냐?”
“뭐라는 거야. 머리 식힐 겸 대학리그 돌고 있다니까요?”
“오늘 나 만날 건 알았을 거 아냐.”
“뭐…. 그렇긴 하죠.”
송태섭은 애매하게 굴었다. 훗날 전후 사정을 따져본 정대만은 송태섭이 정말로 자기 경기를 보러 멀리서부터 찾아온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도 어쩐지 태섭이 자길 보러 여기까지 온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눈앞의 후배가 꽤 기특하고 귀여웠던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선배가 저녁 사줄까?”
송태섭은 과하게 뚱한 표정이었다.
“이겼는데 뒤풀이 안 가요?”
“이기고 또 할 텐데 뭐.”
“그럼 저 소고기요.”
“아주 그냥 털어먹어라.”
정대만은 그를 차에 태우고 시가지로 나가서 야키니꾸를 사 먹였다. 비싼 밥을 샀으니 그놈의 뜬금없는 유학계획이며 프리 스쿨 얘기를 얻어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눈치를 보며 캐묻자 송태섭은 생각보다는 쉽게, 그러나 기대한 것보다는 심드렁한 투로 2학년 윈터컵 예선을 마치고 얼마 안 있어 웬 고교농구 장학재단에서 사람이 찾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의 목표는 우수한 농구 인재를 선발해 해외 진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준비 자금부터 정착비용까지 약 이 년 가까이 되는 비용을 무상으로 지원하겠다는 야심차고 꿈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장학재단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건 송태섭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태섭을 찾아온 당시에는 설립된 지 고작 반 년 남짓 된 재단이었다고 했다.
“듣기론 제가 첫 번째 선수래요.”
“진짜냐. 선발 기준이 뭐래?”
태섭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야아, 궁금하게 그러지 말고 말 좀 해봐.”
“뭐가요. 어차피 선밴 진작 졸업해서 뽑힐 가능성 없거든요?”
“야, 넌 무슨…. 내가 거기 뽑히고 싶어서 물어보는 줄 아냐? 궁금하니까 그렇지.”
정대만은 억울하단 듯 목소릴 높였다.
“그리고 인마, 상식적으로 그 산왕이랑 지학이 있는데 너만 덜렁 뽑힐 리가 없잖아.”
“아, 그 사람들 눈엔 제가 제일 잘했나보죠.”
“에이씨. 너 이거 먹지 마. 도로 뱉어.”
“아. 진짜 치사하게.”
젓가락으로 고기를 쳐내는 시늉을 하자 태섭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찾아보시던가요?”
이거 진짜 입 안 열겠네. 장난치면서 간 좀 보려고 했는데 영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대만은 싱겁게 팔을 거뒀다.
“됐다. 많이 먹어라.”
얘기하기 싫다는데 관둬야지. 근데 그렇게 비밀로 해야 할 것까지 있나? 무슨 기밀유지 서약서라도 쓴 거 아냐? 표정에 생각이 훤히 드러나는 것도 모르고 정대만은 고기를 뒤집었다.
송태섭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글지글 끓는 불판을 응시하던 대만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인 건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가 태섭의 소스장 와사비 위에 고기를 꾹꾹 눌러 담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송태섭도 이 어이없는 꿍꿍이를 알아차렸다.
“엑, 뭐야.”
“이제 알았냐.”
뭐가 재밌다고 대만이 킬킬 웃어댔다.
질색하며 고기를 건져내는 태섭도 아까보단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와사비를 발라내면서 태섭이 정대만을 흘겨보았다.
“하여간 참….”
“내가 뭐?”
대화주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흘렀다. 태섭은 그동안 리그를 돌면서 본 대학팀들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지난해 시즌 8강이었던 다이토분카 대 도카이 경기를 보러갔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깜짝 놀랐다. 대만도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너 못 봤는데?”
“그렇겠죠. 경기 재밌더라고요.”
“야,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냐. 너 우리 팀 경기도 봤어?”
“선배 팀은 16강에서 떨어진 거 아녔어요?”
“뭔 소리야. 다음날이 우리 경기였거든?”
“아, 그러시구나.”
송태섭은 고기를 입에 털어 넣으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아는 얼굴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로 없더라고요.”
“어. 막상 해보니까 고교 농구랑 또 격차가 있더라. 당연한가?”
정대만은 대학에서 날고 기는 선수들 얘기를 해줬다. 농구인재로 발탁된 이들이 다수인 대학 리그에는 원맨팀이랄 게 없었다. 상위권을 다툴수록 팀 스포츠의 중요성이 두드러졌다. 그런데도 눈에 띄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대만은 2년 전 북산을 처참하게 꺾었던 지학의 선수 중 하나와 대학 리그에서 다시 마주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여전히 대단한 선수였지만, 그때와 달리 압도적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대만을 당황시킨 건 처음 보는 대학교 3학년 포워드였다. 그날 경기 내내 대만의 팀은 그의 기량에 눌러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우리 팀 포가로 있는 선배가 순간판단력은 되게 빠른데, 한 번 페이스를 잃으면 그게 독이거든. 나중엔 폭탄 떠넘기듯 공을 막 주더라. 후반전에선 완전 죽 쒔다.”
“선배는 아무렇게나 줘도 잘 던지던데?”
“그거야 네가 줄 때나 그런 거고….”
정대만은 심드렁한 얼굴로 마지막 고기를 불판에 얹었다.
“너랑 뛰었으면 그런 식으론 안 깨졌는데.”
“깨지는 게 아니라 이겼겠죠.”
“야, 네가 못 봐서 그래. 그놈 자식 무슨 눈 돌아간 서태웅 급이었다니까.”
“그 정돈가? 일본에 태웅이 같은 녀석이 얼마나 된다고.”
“강백호 봐라. 너 마지막 윈터컵 때 기억 안 나냐?”
“선배가 토한 건 기억나네요.”
“또 시작이네. 안 토했다니까?”
구이용 소형 화로를 끄고 남은 고기를 해치웠다. 두 사람은 그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낄낄대며 대화를 나누었다. 3학년 졸업시즌 전까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윈터컵 마지막 경기(북산은 인터하이 때보다 처참한 패배를 맛봐야했다)에 대한 회고도 처음에만 좀 조심스러웠을 뿐 나중에는 과감하게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두 사람은 이 년 전의 자신들을 그 코트 위에 복귀시켜놓은 다음, 그간 새롭게 쌓은 데이터와 경험을 토대로 색다른 전략을 구술하며 가벼운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언젠가 부장과 부주장의 신분으로 윈터컵을 준비하던 그때와 똑같았다. 이젠 사소한 연락조차 주고받지 않는 녀석과 좋든 싫든 하루의 반 이상을 붙어 다닌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진짜 많이 싸웠는데.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모든 게 너무나 오래전 일들처럼 느껴졌다. 정대만은 자신이 북산고교를 추억하는 일에 더는 아무런 회한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큼 대학 농구가 정말로 즐거웠던 것이다.
“농구 얘기하니까 농구 하고 싶다. 근처에 코트 없나? 하고 가자.”
송태섭도 마침 비슷한 감상이었던 듯했다.
“좀 걸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안 쉬어도 돼요?”
“아직 팔팔하다 인마.”
두 사람은 걸어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 뒤편의 낡은 농구코트에서 일대일을 했다. 프리 스쿨을 다니며 머리가 빠개져라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고등학교 4학년 송태섭은 고작 한 골을 넣었다. 오후 내내 리그에서 슛을 폭격하고도 기운이 남아도는 대학교 농구선수 정대만은 세 골을 연달아 넣었다.
헉헉대는 태섭을 대만이 기분 좋게 내려다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걸 걸 그랬다.”
“어째 체력이 좀 느셨습니다?”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
“영어 때문에 요즘 정신적으로 학대당하고 있어요.”
송태섭은 반나절 이상을 회화 수업을 듣는데 쓰고 있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출신이며 연령대가 다양한데도 농구 유학을 준비하는 건 자신뿐이라, 가끔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 하는 운동부 출신의 성인 학생들과 어울릴 때를 제외하곤 연습 상대를 찾기 어려운 눈치였다. 남는 시간에는 코트에서 혼자 연습을 한다고 했다. 장난기가 돈 정대만이 히죽대며 되도 않는 영어를 썼다.
“유 얼롱?”
“예?”
“혼자냐고. 유 얼롱(You alone).”
“아, 진짜 발음 좀.”
“그럼 넌 얼마나 잘하는데? 시범 좀 보여봐.”
“됐어요.”
티격태격하다가 두 판을 더 했다. 태섭은 여전히 킬킬대고 있던 대만의 빈틈을 파고들면서 빠르게 득점에 성공했지만, 그 뒤로 대학 코트를 뛰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스태미나를 쌓고 있는 눈앞의 선배를 추월할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일대일을 즐기다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송태섭을 바래다주면서 대만은 말했다.
“간만에 너 보니까 좋다, 야.”
“음.”
“연락할게.”
“예. 뭐…. 그래요.”
조수석 문을 열면서 태섭이 제법 얌전한 투로 인사했다.
“바래다줘서 고맙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냐.”
그러나 두 사람은 계속 뜸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동안 대만은 코트에 입장할 때마다 관중석을 훑으며 익숙한 얼굴을 찾아보곤 했지만, 송태섭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이렇다보니 경기가 끝났을 땐 관중석이고 송태섭이고 다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따로 연락을 할 만큼 송태섭을 자주 생각하진 못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 대수롭지 않게 흘러갔다. 태섭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듣기로는 본격적인 유학 준비며 비자 문제로 이래저래 바빠져서 다른 데 정신을 팔 수가 없는 듯했다. 일부러 짬을 내 대학 리그를 보러 다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늘 이런 식이었다. 두 사람에겐 언제나 해야 할 일들과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있었고, 관계는 끊어질 듯 말 듯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러다 한 번 만나면 그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 댔다. 송태섭과 친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사실 어떤 순간마다 대만은 송태섭과 자신의 관계를 친한 선후배로 설명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연락을 얼마나 주고받는지와 별개로 두 사람에겐 언제나 뭐라 말하기 힘든 어색한 긴장감이 있었다. 송태섭도 그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뭐 친하긴 친했지. 정대만은 그간 송태섭과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보다가 턱 끝을 긁적였다.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진짜 왜 귀국했지?’
물어본다고 솔직하게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3
공항에는 준호 선배가 나와 있었다. 집채만 한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송태섭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진짜로 나오셨네요.”
“당연하지.”
준호는 조금 미안한 얼굴이었다.
“치수는 일이 생겨서 못 나왔어.”
“엥. 나쁜 일로요?”
“그건 아니야.”
“그럼 됐죠.”
태섭은 준호가 캐리어를 끌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했다. 늦은 오후의 하네다 공항은 적당한 수준으로 붐볐다. 햇살이 푸른 창을 투과하며 돌바닥을 미지근하게 데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육중한 바퀴소리와 함께 넓은 대합실을 빠져나왔다. 전철 티켓을 끊으려고 자연스럽게 JR선으로 향하는 태섭을 권준호가 불러 세웠다.
“차 갖고 왔어!”
준호가 주차장과 이어지는 출구 쪽을 가리켰다.
“미리 차 빼겠다고 대만이가 나가있어.”
“대만 선배요?”
“하하, 처음엔 싫다고 내빼더니 그래도 선배 노릇은 해야겠다 싶었나봐.”
‘싫다고 내빼긴 했단 거군.’
정대만이 끌고 온 도요타는 버스정류장 사이에 애매한 각도로 세워져 있었다. 창문이 전부 내려가 있어서 운전석에 누가 타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오랜만에 본 정대만은 밝은 면티에 군청색 재킷 차림이었다. 왁스로 머리까지 깔끔하게 올렸다. 대만은 차창에 팔을 걸친 채 폼을 잡고 있었는데,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좀 나이 들어 보이게 옷을 입는 건 여전하단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대만은 씩 웃고 있었다.
“잘 지냈냐.”
“어쩐 일이래요?”
“너 태워다 주려고. 감동이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예, 뭐.”
의외긴 했다. 솔직히 귀국한단 소리에 관심도 없을 줄 알았다. 정대만은 자기 생각보다 좀 무심한 인간이니까. 미국에 있을 적에도 저 인간은 먼저 전화를 거는 법이 거의 없었다.
준호가 트렁크를 열고 캐리어를 싣는 동안 태섭이 뒷좌석 문을 쾅 닫자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야, 살살 쫌 닫아라.”
“죄송요.”
“…….”
“…….”
조수석 문이 열렸다.
“대만아, 뒤에서 차 좀 빼달래.”
준호가 차에 타자 대만은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틀었다. 태섭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 이동하는 동안 아직 조금 쌀쌀한 3월 중순의 바람이 태섭의 얼굴에 직격했다가 이내 흘러갔다.
차는 해안도로를 거쳐 이세하라시 방면 국도로 진입했다. 라디오에선 내내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나왔다. 그동안 크게 유행한 히트곡들인 것 같았는데 엑스 재팬 말고는 태섭이 다 처음 듣는 가수들이었다.
일본을 오래 떠나있었다는 게 실감났다. 스물두 살 대학교 3학년 첫 학기를 마친 뒤 잠깐 귀국했던 것을 제외하면 송태섭은 내내 미국에 붙박여 있었다. 비록 기숙생활을 해야 했고 생활비는 늘 쪼들렸지만, 솔직히 말해 일본에 있을 적보다 상황은 훨씬 괜찮았다. 그는 넓은 캠퍼스와 애리조나의 따뜻한 기후가 좋았고, 덩치 큰 이들과 몸을 부딪쳐가며 농구를 발전시켜나가는 일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의 멸시와 차별은 그에게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없었다. 타지 생활이 수월하지 않았던 것과 별개로 태섭은 생각보다 가족들이 그립지 않았다. 멀리 떨어지고 나니 오히려 그가 떠나온 모든 것들이 좋게 느껴질 때가 더 많았다. 한동안 꽤 진지하게 이민을 고려해봤을 정도로 송태섭은 지난 5년 동안 정말로 잘 지냈다.
가나가와현까지 5km라는 표지판을 막 지나쳤을 무렵 대만이 넌지시 물었다.
“미국은 어땠어?”
송태섭은 잠깐 생각했다.
“좋았어요.”
대만은 백미러로 그를 흘끔거렸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번엔 송태섭이 물었다.
“선배는요?”
엉뚱하게도 대만은 권준호를 쳐다봤다.
“너 얘기 안 해줬어?”
“내가 항상 네 얘길 하진 않는단다, 대만아.”
“야이씨. 어쩐지 애가 감동은커녕 시큰둥하더라니.”
대만은 흥 소리를 내면서 떵떵거렸다.
“나 얼마 전에 이적했다. 이사해서 지금은 여기 안 살아.”
내심 정대만이 여전히 도쿄에 있을 줄 알았다.
태섭이 놀라서 되물었다.
“어디서 사는데요 그럼?”
“센다이. 거기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이제 감동 좀 먹겠냐?”
‘센다이가 어디쯤이더라?’
“태섭이 데려다주고 바로 올라가는 거야, 그럼?”
“미쳤냐! 본가에서 자고 갈 거야.”
그럼 내일까진 가나가와에 있는 모양이었다. 시트에 한껏 몸을 기댄 채 태섭은 운전석 헤드를 쳐다보았다.
“내일 출근 안 해요?”
사이드 도로로 빠지느라 정신이 팔린 대만이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출근은 다다음주 수요일부터야.”
“오, 완전 푹 쉬겠네요?”
“연습해야지 무슨 소리 하냐.”
준호가 물었다.
“대만이 너 집에서 자고 가는 거면 술 마실 거니?”
“아니. 쟤 데려다줘야지.”
가나가와현에 들어서자 익숙한 건물들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내는 태섭이 떠나있던 5년 동안 새로 생긴 체인점과 맥도날드 지점을 제외하곤 달라진 게 별로 없어보였다. 그러나 바다가 보이는 동네는 조금 더 복잡스러워졌다. 해수욕장을 마주보고 있던 점포가 분점을 냈고 자전거 수리점은 반대편 역사 쪽으로 이동했다. 수리점이 있던 자리에는 소니가 들어왔다.
해수욕장과 멀지 않은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세 사람은 대로변으로 나왔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머리카락이 사방팔방 흩날렸다. 멀지 않은 곳에 나베 전문점이 있었는데 대만과 준호는 일전에 몇 번 들린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 맛있어.”
미닫이문을 열면서 준호가 말했다.
세 사람은 오렌지색 불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후덥지근한 가게에서 모츠나베를 먹었다. 술은 준호만 조금 마셨다. 삼삼한 얘기를 주고받다보니 어느덧 헤어질 때가 되어 슬슬 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집이 가까운 준호는 굳이 태워다줄 필요가 없다고 먼저 일어났다. 생각날 때 치수에게 연락이나 한 번 넣어달라면서 권준호는 바뀐 연락처를 태섭에게 적어주었다.
“둘 다 잘 들어가.”
“오냐.”
“조심히 들어가세요.”
딱히 열렬히 배웅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준호가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주차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전봇대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가로등이 켜졌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의식될 때쯤 대만이 차 문을 열었다.
“야, 타.”
태섭의 본가는 가게에서 차로 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주차공간이 협소하고 차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어서 몇 분은 더 걸어 들어가야 했다.
정대만은 트렁크를 열고 묵직한 캐리어를 꺼냈다. 태섭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대만이 시건방진 후배의 캐리어를 대신 끄는 동안 육중한 바퀴 소리가 골목 곳곳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거 너무 시끄러운 거 아니냐?”
대만이 툴툴댔다.
“뭐 어쩌겠어요.”
“니네 동네 시끄러운 거 싫어한다며.”
‘언제적 얘긴데 그걸 기억하네.’
“그럼 번쩍 들어 올리시던지?”
“팔 떨어져, 인마.”
낄낄거리던 태섭이 화제를 돌렸다.
“새로 이사 간 동네는 조용한 편?”
“엉, 여기보다 조용할 걸. 대부분 직장인이라 돌아오면 잠만 자는 동네거든.”
가까운 역과 편의점 얘길 들어보니 입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흠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근처에 라멘 집이 한 군데뿐인데 하필 그 한 군데가 양만 많고 맛은 그닥이라는 거였다. 다신 거기 안 간다고 투덜대던 정대만이 문득 송태섭을 돌아보았다.
“참, 맨션 앞에 공중전화 있더라.”
순간이지만 태섭은 머뭇거렸다.
“그래요?”
“어.”
송태섭은 긴가민가했다. 말에서 다른 의도를 찾아내려는 시도야말로 정대만과 대화할 때 가장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형 지금 예전 얘길 하고 싶은 건가?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별 생각 없어보였다. 이제 정대만은 강백호가 채치수와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실업 농구팀에 들어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공원 옆에 딸린 낡은 농구장을 지나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정대만은 (아마 준호로부터) 건너건너 전해 들었을 북산고 농구부원들 근황을 엉성하게 떠들어 댔다. 이달재는 졸업하자마자 가업을 물려받았는데 그게 음식점이었는지 그릇 가게였는지 헷갈린다고 했고, 태웅이는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국내 톱으로 꼽히는 상위권 팀과 년 단위로 계약을 끝냈는데 아무래도 계약기간이 끝나면 도로 미국행일 것 같다고 (정대만 멋대로 추측)했다.
“참, 이한나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더라.”
“예?”
돌아온 반응이 너무 떨떠름해 보였는지 대만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관심 있으면 연락해보라고.”
“뭔…. 됐어요.”
“나 한나네 번호 있어.”
“아니, 진짜 됐다고요.”
송태섭은 살짝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보다 선배는 여자친구 없어요?”
“지금은 없는데….”
“사귀어 봐요, 쫌.”
“갑자기? 야, 솔직히 네가 남의 연애사업에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냐.”
‘진짜 기막힌다.’
“예. 그 말 그대로 반사요.”
태섭은 대만에게서 캐리어를 빼앗아 들었다. 어차피 곧 집 앞이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의 집 동호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공동현관 앞에서 그는 급격하게 어색해졌다.
“들어가라.”
“예에….”
마찬가지로 싱겁게 인사하던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근데 전화번호 바뀌었겠네요, 그럼?”
“어, 바뀌었지. 줘?”
“주세요.”
자신만만하게 입을 떼다말고 정대만은 당황했다.
“엇. 뭐더라. 아씨….”
이사한 지 이틀째라 외울 시간도 없었다고 대만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다음에 줄게.”
송태섭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예, 들어가세요.”
“오냐.”
손을 몇 번 흔들다 말고 정대만이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태섭은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캐리어를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정대만은 도쿄에서 도호쿠 본선을 따라 달리는 이치노세키행 특급열차에 타고 있었다. 그는 운좋게도 일찌감치 자유석을 꿰 찼고, 자기 몸집의 두 배쯤 되는 더플백을 무릎 위에 얹어놓은 채 팔짱을 끼고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잠에 빠져들수록 다리가 점점 벌어지면서 가방이 앞으로 쏠리고 있었지만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내릴 역까지는 아직 세 정거장이나 남아있었다. 정대만의 목적지는 미야기현에 있는 센다이시로, 온천과 스키가 유명했고 동쪽으로는 거대한 항구를 끼고 있었다. 도쿄에서 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네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고속 신칸센으로도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JR 동일본 센다이 이적이 결정됐을 때 그의 부모님이 가장 먼저 신경 쓴 것도 바로 이 절망적인 교통편이었다.
“어떻게 왔다갔다 하려고?”
“차 있잖아요.”
“그렇게 오래 운전대 잡아본 적 없잖니.”
“에이, 운전이야 하면 그만이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그의 부모는 어디 한 번 당해보라는 투로 고소하게 웃었다.
“막상 해보면 또 다를 걸?”
부모님의 말이 맞았다. 가나가와에는 어디를 가던 차가 넘쳤고 수시로 신경 써야 할 표지판과 신호등이 있었지만, 적어도 도심에서 운전할 땐 지루하지는 않았다. 국도를 타고 몇 시간씩 달리는 일은 달랐다. 국도에는 그를 긴장시킬 만한 것들이 별로 없었다. 장시간 운전은 정대만이 막연하게 낙관하던 것 이상으로 끔찍하게 지루한 시간을 견디는 일이었고, 두 시간쯤 달렸을 무렵부터는 옆에 앉아서 농담을 떠들어줄 동승자가 간절해졌다.
철지난 엔카라도 좋으니 비슷한 장르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카세트테이프라도 하나 있었다면 그토록 고역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정대만은 국도를 타는 일에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바퀴달린 시간과 정신의 방을 견디는 동안 그는 두 번이나 잘못된 도로를 타서 엉뚱한 길로 빠져나왔고, 그 바람에 빙 돌면서 점점 목적지와 멀어졌다. 다섯 시간 넘게 도로 위를 달리며 터널을 지날 때마다 지직대는 라디오 캐스터의 명랑한 목소리와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은 광고음악을 듣다말고 정대만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 짓 두 번은 못한다.
그는 그 결심을 지켰다. 새로 계약할 집을 보러갈 때도 열차를 이용했고, 이삿짐의 대부분도 센터를 불러 처리했다. 주말마다 자차로 본가를 드나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어영부영 기약 없이 미뤄졌다. 본격적으로 이사 준비에 한창이던 1월 한 달 동안에는 신칸센만 이용하다가 교통비 값만 20만엔이 넘게 나왔다.
그러고 나니 수중에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안 그래도 이사 준비 때문에 물 새듯 사방팔방에서 돈이 빠져나간 탓이었다. 잔고를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덜컥 정신이 들었다. 정대만은 매표소 앞에서 깊이 갈등하다가 결국 자유석을 선택했는데, 그의 인생에서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약 오늘 운이 나빴더라면 두 시간 내내 무거운 더플백을 멘 채 서서 가야만 했을 것이다.
오늘은 새로 계약한 맨션으로 들어가는 날이었다. 그는 지난 몇 년 간 간토지방에서 활동했다. 대학과 직장이 모두 집과 멀지 않은 덕분에 그의 생활반경은 꽤 오랫동안 도쿄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JR 동일본 센다이에서 이적 제안이 온 건 계약기간 상 마지막 무대였던 11월 리그를 막 마쳤을 때였다. 불과 일 년 전 정대만을 4강에서 완패시킨 적 있는 강팀으로, 이름 그대로 센다이시에 거점을 두고 있었는데, 대학프로농구와 JBL의 열렬한 팬인 회장과 이사진 덕에 실업팀 중에서는 드물게도 선수 지원이 빵빵하기로 알려져 있었다.
준-프로리그의 땅이라도 어중이떠중이 농구는 하지 않겠다고 못 박은, 그야말로 농구를 위한 농구를 하겠다는 팀에서 보낸 러브콜인 것이다. 필요하다면 센다이시에 거주지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의향까지 은근하게 내비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그들은 그의 기량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듯했다.
우쭐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당시 팀에서 포워드를 맡고 있던 정대만은 그들이 제안한 슈팅가드 포지션을 받아들이고 본격적으로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북산에서 슈팅가드로 반 년, 대학 팀에서 4년을 슈터로 뛰었으니 거의 3년 만에 그의 앞으로 돌아온 포지션이었다. 그는 여전히 잘할 자신이 있었다.
4월이면 정대만은 JR 동일본 여객 철도에 소속된 회사원으로서 평일 오전에는 사무업무를 보고 평일 오후와 주말에는 코트를 누비게 될 것이다. 그의 맨션은 회사에서 차로 이십분 정도 떨어진 베드타운에 있었는데, 역과 그렇게 멀지 않아서 여차하면 전철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정대만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지역구 주민들을 위해 오후 열 시까지 운영하는 체육관이 있다는 거였다. 단체 팀 연습이 없는 날에 그곳을 방문하면 언제든 슛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 해는 그의 인생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정대만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생활을 앞두고 있었다. 달라지지 않은 건 그가 여전히 농구를 하고 있으며, 농구를 그만둘 미래를 상정하지 않을 만큼 여전히 농구를 좋아한다는 사실뿐이었다. 꿈에서도 그는 종종 농구를 했다.
전철이 덜컹거리며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바퀴 아래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쏜살같이 흘러갔다. 팔짱을 낀 자세 때문에 몸을 점점 앞으로 숙이던 정대만은 무릎에서 가방이 흘러내리는 것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벌떡 일어나자 무거운 더플백이 앞으로 두어 번 구르다 힘겹게 멈춰 섰다. 차량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역은 센다이, 센다이 역입니다.”
‘어우… 하마터면 못 내릴 뻔했네.’
정대만은 허겁지겁 가방을 주워 일어났다. 내릴 준비를 하는 승객들로 열차가 어수선한 가운데 차창 밖으로 낯선 도시의 항구가 펼쳐졌다. 급한 대로 더플백을 대강 걸치고 부산스럽게 출입문 방향을 찾던 정대만은 잠깐이지만 눈앞의 바다에 시선을 빼앗겼다. 열차가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다음 순간 누군가 뒤에서 있는 힘껏 그를 밀었다.
어어, 반사적으로 중심을 잡다 말고 승강장 사이에 발이 걸렸다. 우당탕 넘어지는 정대만에게서 더플백을 낚아챈 남자가 허겁지겁 플랫폼 밖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 저, 저. 어어, 야, 저거! 저 도둑놈!”
깽깽이발로 뛰쳐나온 정대만이 한달음에 계단을 두세 칸씩 달려 내려왔지만 소매치기는 벌써 사라진 후였다. 인파를 정신없이 휘휘 둘러보는 그를 사람들이 흘끔대며 지나갔다. 머리 위로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요란한 안내음과 함께 떠나는 열차가 만들어내는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정대만은 결국 짜증스럽게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에이씨…. 뭐야.”
더플백에 들어있던 것. 새로 산 아디다스 수건 여섯 개와 여분의 스포츠 아대, 물병 두 통, 봄가을용 실내화와 남성용 로션, 기타 잡다한 생활용품들. 도난당한 내용물을 검토해보던 정대만이 머리를 부여잡다 말고 센세키선 환승로를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2
구단에서 지원해준 맨션은 다가조역에서 도보로 십오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부동산에서 전해들은 대로 근처에 편의점이 두 군데나 있었고 곳곳에 작은 주륜장이 딸려있었다. 입지가 나쁘지 않은 덕에 적당한 유동인구가 여유로운 생활감을 만들어내는 동네였다. 멀지 않은 곳에 오래된 이발소와 썩 괜찮아 보이는 이자카야도 있었다.
주륜장 앞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지나쳐 맨션으로 들어온 정대만은 실내 슬리퍼를 찾다 말고 살림살이가 들어있는 가방을 소매치기 당했다는 기분 더러운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고 말았다.
‘운도 나쁘지. 대체 어떤 놈이야?’
그는 뜯지 않은 박스 몇 개를 정리하다 말고 금세 의욕을 잃었다. 결국 TV를 틀어놓고 새 가구 냄새가 풀풀 나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늘어졌다.
그대로 잠들락 말락 하던 순간에 전화가 울렸다. 비몽사몽 일어났다가 선반에 무릎을 한 번 더 쾅 박고 말았다. 쓰읍, 소리를 내면서 수화기를 들어 올리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만아, 잘 도착했어?”
“권준호냐….”
“하하, 막 자다 깬 목소리네. 짐은 다 풀지도 않았겠구나.”
“그래도 두 박스밖에 안 남았다 인마.”
시계를 흘끔 보니 벌써 저녁시간이었다. 준호가 전화를 걸지 않았더라면 분명 밤늦은 시간에나 깨어났을 것이다.
권준호는 가끔 이런 쪽으로 타이밍이 귀신같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매번 솜씨 좋게 발휘되는 준호의 사려 깊음이었지만, 이런 타이밍이 의도되었으리라곤 꿈에도 모르는 정대만은 늘 그렇듯 태평하게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저녁 뭐 먹지.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라멘 집을 본 것 같은데.’
“대만이 너 4월부터 출근이라고 했었지?”
“엉.”
“그럼 이틀 뒤에 시간 괜찮아?”
그는 달력을 확인했다.
“목요일? 쉬지. 왜?”
“태섭이가 귀국하거든.”
삐딱하게 기대어 서 있던 자세가 저절로 고쳐졌다.
대만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송태섭? 걔가 갑자기 왜?”
준호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는 눈치였다.
“글쎄, 잠깐 들어오는 것 같던데.”
“그러냐….”
“원래는 치수가 차 끌고 나오기로 했는데 그날 일이 생겨서 못 나오게 됐거든. 넌 나올 수 있나 싶어서.”
“윽. 운전하라고?”
이건 좀 싫었다.
“센다이 공항이면 나간다.”
국내선 공항을 들먹인다는 건 그냥 안 나간단 소리였다. 준호는 능숙하게 흘려들었다.
“하네다 공항 3시야. 나올 수 있어?”
“쫌 봐줘라…. 여기서 다섯 시간은 걸린다고.”
또 국도를 타고 몇 시간씩 운전이라니 끔찍했다. 맨몸으로 가서 얼굴만 보고 오는 거라면 또 모를까. 근데 고등학교 선배들이 우르르 공항으로 마중 나가는 것도 좀 극성맞지 않나? 졸업한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정대만으로선 권준호의 호의가 놀라울 다름이었다.
“못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너 혼자 가는 거냐? 백호랑 태웅이는?”
“훈련 때문에 바쁘지.”
“걔 차 태워줄 사람 없대?”
“음, 혼자 귀국하는 것 같더라. 어머님도 바쁘다 하시고.”
그런 사정이라면 준호와 치수가 신경 쓸 만도 싶었다.
“가끔 보면 너도 참 대단하다. 졸업한 지가 언젠데 그걸 다 챙기냐.”
타박처럼 들리지만 순수한 감탄사였다. 권준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정말 안 나올 거야?”
“인마, 안 나간다니까.”
“알겠어. 피곤할 텐데 푹 쉬어.”
“엉.”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거실로 돌아왔다. TV에선 일기예보가 어렴풋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대만은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가 텅 빈 내부를 보고 다시 문을 닫았다.
‘나가서 사먹어야겠네.’
점퍼를 입는 동안 정대만은 아까 들었던 소식을 곱씹었다. 걔가 귀국이라니. 무슨 일이지? 잘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알음알음 들은 마지막 소식도 몇 달 전이라 사정을 추측하기 어려웠다. 이럴 거면 좀 더 캐볼 걸 싶었다. 그래봤자 권준호도 아는 건 거의 없는 것 같았지만.
보나마나 송태섭 쪽에서 제대로 설명해주는 게 없었을 거다. 예전부터 송태섭은 좀 그런 구석이 있었다. 보기보다 입이 무거워서 그런 얘기들은 잘 안했다.
미국 유학 건만 해도 그렇다. 장학재단 지원이 결정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반 년 전의 일이었다는데도 송태섭이 프리 스쿨을 진학하기 전까지 주변 사람들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어쩐지 수험준비는 생각도 않고 마지막까지 전국대회를 노리며 윈터컵까지 출전한다 싶었다.
정대만처럼 대학 추천을 노리는 줄 알았는데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대만은 이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곤 질투심과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다. 안 선생님을 뵐 겸 몇 달에 한 번 농구부에 들렀다가 티격태격 근황을 주고받을 때도, 졸업식 날 마주쳤을 때도 송태섭은 앞으로의 일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정대만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보통 그런 일이 결정되면 입이 근질거리지 않나? 이한나 앞에선 그렇게 속이 빤히 보이게 행동하는 녀석이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는 한나조차 송태섭이 농구로 유학을 가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자기 능력을 어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어차피 멀리 떠날 거라서 고백이고 뭐고 말 꺼낼 생각 자체가 없었나? 어쩌면 송태섭이 자기 생각과 전혀 다른 녀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한동안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정대만은 시즌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대학 동기들과 보냈고, 온갖 술자리에 불려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송태섭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4월 토너먼트 시즌 마지막 경기 날 다시 마주쳤다. 그날 정대만은 후반 경기를 풀로 뛰느라 좌석에 송태섭이 앉아있는 줄도 몰랐다.
경기가 끝난 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더니 송태섭이 후드티 차림으로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복도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어찌나 반갑던지, 은은하게 남아있던 그간의 질투심이나 서운함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눈앞의 선배가 너무 들떠보여서 그런 건지 송태섭은 살짝 머쓱해 보였다. 태섭은 대학농구 구경 좀 할 겸 요즘 짬날 때마다 근처에서 열리는 리그를 돌고 있다고 했다. 그제야 불현듯 준호로부터 얻어들었던 송태섭의 근황이 머릿속에 스쳤다.
대만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유학 준비한다지 않았냐? 어디 뭐 학교 다닌다며. 오늘 수업 없어?”
“수요일엔 원래 수업 없어요.”
“신기하네…. 프리 스쿨은 다 그래? 고등학교 4학년이라더니 무슨 대학생 같다.”
“그러는 선밴 학교에 얼굴 비추는 날이 거의 없다면서요?”
“인마 누가 그래? 그거야 연습 때문에 그렇지.”
반격할 때 짓는 특유의 표정으로 태섭이 얄밉게 웃었다.
“비시즌 때도 다르지 않다던데. 대학생들은 다 그러나?”
“야이씨, 너 그거 권준호한테 들었지. 그거 걔가 과장한 거야. 그래도 일주일에 세 번은 나가거든?”
“아, 예.”
두 사람은 잠깐 킬킬 웃어댔다. 송태섭은 어느새 주머니에서 손을 빼놓고 있었다.
“그럼 너 학교가 이 근처야?”
“아뇨, 좀 멀어요. 여기서 두 시간 정도?”
정대만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럼 너 나 보러 온 거냐?”
“뭐라는 거야. 머리 식힐 겸 대학리그 돌고 있다니까요?”
“오늘 나 만날 건 알았을 거 아냐.”
“뭐…. 그렇긴 하죠.”
송태섭은 애매하게 굴었다. 훗날 전후 사정을 따져본 정대만은 송태섭이 정말로 자기 경기를 보러 멀리서부터 찾아온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런데도 어쩐지 태섭이 자길 보러 여기까지 온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눈앞의 후배가 꽤 기특하고 귀여웠던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선배가 저녁 사줄까?”
송태섭은 과하게 뚱한 표정이었다.
“이겼는데 뒤풀이 안 가요?”
“이기고 또 할 텐데 뭐.”
“그럼 저 소고기요.”
“아주 그냥 털어먹어라.”
정대만은 그를 차에 태우고 시가지로 나가서 야키니꾸를 사 먹였다. 비싼 밥을 샀으니 그놈의 뜬금없는 유학계획이며 프리 스쿨 얘기를 얻어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눈치를 보며 캐묻자 송태섭은 생각보다는 쉽게, 그러나 기대한 것보다는 심드렁한 투로 2학년 윈터컵 예선을 마치고 얼마 안 있어 웬 고교농구 장학재단에서 사람이 찾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의 목표는 우수한 농구 인재를 선발해 해외 진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준비 자금부터 정착비용까지 약 이 년 가까이 되는 비용을 무상으로 지원하겠다는 야심차고 꿈같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런 장학재단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건 송태섭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태섭을 찾아온 당시에는 설립된 지 고작 반 년 남짓 된 재단이었다고 했다.
“듣기론 제가 첫 번째 선수래요.”
“진짜냐. 선발 기준이 뭐래?”
태섭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야아, 궁금하게 그러지 말고 말 좀 해봐.”
“뭐가요. 어차피 선밴 진작 졸업해서 뽑힐 가능성 없거든요?”
“야, 넌 무슨…. 내가 거기 뽑히고 싶어서 물어보는 줄 아냐? 궁금하니까 그렇지.”
정대만은 억울하단 듯 목소릴 높였다.
“그리고 인마, 상식적으로 그 산왕이랑 지학이 있는데 너만 덜렁 뽑힐 리가 없잖아.”
“아, 그 사람들 눈엔 제가 제일 잘했나보죠.”
“에이씨. 너 이거 먹지 마. 도로 뱉어.”
“아. 진짜 치사하게.”
젓가락으로 고기를 쳐내는 시늉을 하자 태섭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찾아보시던가요?”
이거 진짜 입 안 열겠네. 장난치면서 간 좀 보려고 했는데 영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대만은 싱겁게 팔을 거뒀다.
“됐다. 많이 먹어라.”
얘기하기 싫다는데 관둬야지. 근데 그렇게 비밀로 해야 할 것까지 있나? 무슨 기밀유지 서약서라도 쓴 거 아냐? 표정에 생각이 훤히 드러나는 것도 모르고 정대만은 고기를 뒤집었다.
송태섭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술잔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글지글 끓는 불판을 응시하던 대만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인 건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가 태섭의 소스장 와사비 위에 고기를 꾹꾹 눌러 담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송태섭도 이 어이없는 꿍꿍이를 알아차렸다.
“엑, 뭐야.”
“이제 알았냐.”
뭐가 재밌다고 대만이 킬킬 웃어댔다.
질색하며 고기를 건져내는 태섭도 아까보단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와사비를 발라내면서 태섭이 정대만을 흘겨보았다.
“하여간 참….”
“내가 뭐?”
대화주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흘렀다. 태섭은 그동안 리그를 돌면서 본 대학팀들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지난해 시즌 8강이었던 다이토분카 대 도카이 경기를 보러갔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깜짝 놀랐다. 대만도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너 못 봤는데?”
“그렇겠죠. 경기 재밌더라고요.”
“야, 무슨 이런 우연이 다 있냐. 너 우리 팀 경기도 봤어?”
“선배 팀은 16강에서 떨어진 거 아녔어요?”
“뭔 소리야. 다음날이 우리 경기였거든?”
“아, 그러시구나.”
송태섭은 고기를 입에 털어 넣으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아는 얼굴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로 없더라고요.”
“어. 막상 해보니까 고교 농구랑 또 격차가 있더라. 당연한가?”
정대만은 대학에서 날고 기는 선수들 얘기를 해줬다. 농구인재로 발탁된 이들이 다수인 대학 리그에는 원맨팀이랄 게 없었다. 상위권을 다툴수록 팀 스포츠의 중요성이 두드러졌다. 그런데도 눈에 띄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대만은 2년 전 북산을 처참하게 꺾었던 지학의 선수 중 하나와 대학 리그에서 다시 마주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여전히 대단한 선수였지만, 그때와 달리 압도적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대만을 당황시킨 건 처음 보는 대학교 3학년 포워드였다. 그날 경기 내내 대만의 팀은 그의 기량에 눌러 고전을 면치 못했다.
“우리 팀 포가로 있는 선배가 순간판단력은 되게 빠른데, 한 번 페이스를 잃으면 그게 독이거든. 나중엔 폭탄 떠넘기듯 공을 막 주더라. 후반전에선 완전 죽 쒔다.”
“선배는 아무렇게나 줘도 잘 던지던데?”
“그거야 네가 줄 때나 그런 거고….”
정대만은 심드렁한 얼굴로 마지막 고기를 불판에 얹었다.
“너랑 뛰었으면 그런 식으론 안 깨졌는데.”
“깨지는 게 아니라 이겼겠죠.”
“야, 네가 못 봐서 그래. 그놈 자식 무슨 눈 돌아간 서태웅 급이었다니까.”
“그 정돈가? 일본에 태웅이 같은 녀석이 얼마나 된다고.”
“강백호 봐라. 너 마지막 윈터컵 때 기억 안 나냐?”
“선배가 토한 건 기억나네요.”
“또 시작이네. 안 토했다니까?”
구이용 소형 화로를 끄고 남은 고기를 해치웠다. 두 사람은 그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낄낄대며 대화를 나누었다. 3학년 졸업시즌 전까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윈터컵 마지막 경기(북산은 인터하이 때보다 처참한 패배를 맛봐야했다)에 대한 회고도 처음에만 좀 조심스러웠을 뿐 나중에는 과감하게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두 사람은 이 년 전의 자신들을 그 코트 위에 복귀시켜놓은 다음, 그간 새롭게 쌓은 데이터와 경험을 토대로 색다른 전략을 구술하며 가벼운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언젠가 부장과 부주장의 신분으로 윈터컵을 준비하던 그때와 똑같았다. 이젠 사소한 연락조차 주고받지 않는 녀석과 좋든 싫든 하루의 반 이상을 붙어 다닌 시절이 있었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진짜 많이 싸웠는데. 졸업한 지 얼마나 됐다고 모든 게 너무나 오래전 일들처럼 느껴졌다. 정대만은 자신이 북산고교를 추억하는 일에 더는 아무런 회한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큼 대학 농구가 정말로 즐거웠던 것이다.
“농구 얘기하니까 농구 하고 싶다. 근처에 코트 없나? 하고 가자.”
송태섭도 마침 비슷한 감상이었던 듯했다.
“좀 걸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안 쉬어도 돼요?”
“아직 팔팔하다 인마.”
두 사람은 걸어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 뒤편의 낡은 농구코트에서 일대일을 했다. 프리 스쿨을 다니며 머리가 빠개져라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 고등학교 4학년 송태섭은 고작 한 골을 넣었다. 오후 내내 리그에서 슛을 폭격하고도 기운이 남아도는 대학교 농구선수 정대만은 세 골을 연달아 넣었다.
헉헉대는 태섭을 대만이 기분 좋게 내려다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라도 걸 걸 그랬다.”
“어째 체력이 좀 느셨습니다?”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
“영어 때문에 요즘 정신적으로 학대당하고 있어요.”
송태섭은 반나절 이상을 회화 수업을 듣는데 쓰고 있었다.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출신이며 연령대가 다양한데도 농구 유학을 준비하는 건 자신뿐이라, 가끔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 하는 운동부 출신의 성인 학생들과 어울릴 때를 제외하곤 연습 상대를 찾기 어려운 눈치였다. 남는 시간에는 코트에서 혼자 연습을 한다고 했다. 장난기가 돈 정대만이 히죽대며 되도 않는 영어를 썼다.
“유 얼롱?”
“예?”
“혼자냐고. 유 얼롱(You alone).”
“아, 진짜 발음 좀.”
“그럼 넌 얼마나 잘하는데? 시범 좀 보여봐.”
“됐어요.”
티격태격하다가 두 판을 더 했다. 태섭은 여전히 킬킬대고 있던 대만의 빈틈을 파고들면서 빠르게 득점에 성공했지만, 그 뒤로 대학 코트를 뛰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스태미나를 쌓고 있는 눈앞의 선배를 추월할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딱 기분 좋을 만큼만 일대일을 즐기다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송태섭을 바래다주면서 대만은 말했다.
“간만에 너 보니까 좋다, 야.”
“음.”
“연락할게.”
“예. 뭐…. 그래요.”
조수석 문을 열면서 태섭이 제법 얌전한 투로 인사했다.
“바래다줘서 고맙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냐.”
그러나 두 사람은 계속 뜸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동안 대만은 코트에 입장할 때마다 관중석을 훑으며 익숙한 얼굴을 찾아보곤 했지만, 송태섭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이렇다보니 경기가 끝났을 땐 관중석이고 송태섭이고 다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따로 연락을 할 만큼 송태섭을 자주 생각하진 못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 대수롭지 않게 흘러갔다. 태섭도 사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듣기로는 본격적인 유학 준비며 비자 문제로 이래저래 바빠져서 다른 데 정신을 팔 수가 없는 듯했다. 일부러 짬을 내 대학 리그를 보러 다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늘 이런 식이었다. 두 사람에겐 언제나 해야 할 일들과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있었고, 관계는 끊어질 듯 말 듯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러다 한 번 만나면 그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어 댔다. 송태섭과 친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하겠지만, 사실 어떤 순간마다 대만은 송태섭과 자신의 관계를 친한 선후배로 설명해도 좋을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연락을 얼마나 주고받는지와 별개로 두 사람에겐 언제나 뭐라 말하기 힘든 어색한 긴장감이 있었다. 송태섭도 그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뭐 친하긴 친했지. 정대만은 그간 송태섭과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보다가 턱 끝을 긁적였다.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진짜 왜 귀국했지?’
물어본다고 솔직하게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3
공항에는 준호 선배가 나와 있었다. 집채만 한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를 빠져나오던 송태섭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아니, 진짜로 나오셨네요.”
“당연하지.”
준호는 조금 미안한 얼굴이었다.
“치수는 일이 생겨서 못 나왔어.”
“엥. 나쁜 일로요?”
“그건 아니야.”
“그럼 됐죠.”
태섭은 준호가 캐리어를 끌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했다. 늦은 오후의 하네다 공항은 적당한 수준으로 붐볐다. 햇살이 푸른 창을 투과하며 돌바닥을 미지근하게 데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육중한 바퀴소리와 함께 넓은 대합실을 빠져나왔다. 전철 티켓을 끊으려고 자연스럽게 JR선으로 향하는 태섭을 권준호가 불러 세웠다.
“차 갖고 왔어!”
준호가 주차장과 이어지는 출구 쪽을 가리켰다.
“미리 차 빼겠다고 대만이가 나가있어.”
“대만 선배요?”
“하하, 처음엔 싫다고 내빼더니 그래도 선배 노릇은 해야겠다 싶었나봐.”
‘싫다고 내빼긴 했단 거군.’
정대만이 끌고 온 도요타는 버스정류장 사이에 애매한 각도로 세워져 있었다. 창문이 전부 내려가 있어서 운전석에 누가 타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오랜만에 본 정대만은 밝은 면티에 군청색 재킷 차림이었다. 왁스로 머리까지 깔끔하게 올렸다. 대만은 차창에 팔을 걸친 채 폼을 잡고 있었는데,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좀 나이 들어 보이게 옷을 입는 건 여전하단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대만은 씩 웃고 있었다.
“잘 지냈냐.”
“어쩐 일이래요?”
“너 태워다 주려고. 감동이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예, 뭐.”
의외긴 했다. 솔직히 귀국한단 소리에 관심도 없을 줄 알았다. 정대만은 자기 생각보다 좀 무심한 인간이니까. 미국에 있을 적에도 저 인간은 먼저 전화를 거는 법이 거의 없었다.
준호가 트렁크를 열고 캐리어를 싣는 동안 태섭이 뒷좌석 문을 쾅 닫자 볼멘소리가 날아왔다.
“야, 살살 쫌 닫아라.”
“죄송요.”
“…….”
“…….”
조수석 문이 열렸다.
“대만아, 뒤에서 차 좀 빼달래.”
준호가 차에 타자 대만은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틀었다. 태섭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 이동하는 동안 아직 조금 쌀쌀한 3월 중순의 바람이 태섭의 얼굴에 직격했다가 이내 흘러갔다.
차는 해안도로를 거쳐 이세하라시 방면 국도로 진입했다. 라디오에선 내내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나왔다. 그동안 크게 유행한 히트곡들인 것 같았는데 엑스 재팬 말고는 태섭이 다 처음 듣는 가수들이었다.
일본을 오래 떠나있었다는 게 실감났다. 스물두 살 대학교 3학년 첫 학기를 마친 뒤 잠깐 귀국했던 것을 제외하면 송태섭은 내내 미국에 붙박여 있었다. 비록 기숙생활을 해야 했고 생활비는 늘 쪼들렸지만, 솔직히 말해 일본에 있을 적보다 상황은 훨씬 괜찮았다. 그는 넓은 캠퍼스와 애리조나의 따뜻한 기후가 좋았고, 덩치 큰 이들과 몸을 부딪쳐가며 농구를 발전시켜나가는 일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의 멸시와 차별은 그에게 새로운 충격을 줄 수 없었다. 타지 생활이 수월하지 않았던 것과 별개로 태섭은 생각보다 가족들이 그립지 않았다. 멀리 떨어지고 나니 오히려 그가 떠나온 모든 것들이 좋게 느껴질 때가 더 많았다. 한동안 꽤 진지하게 이민을 고려해봤을 정도로 송태섭은 지난 5년 동안 정말로 잘 지냈다.
가나가와현까지 5km라는 표지판을 막 지나쳤을 무렵 대만이 넌지시 물었다.
“미국은 어땠어?”
송태섭은 잠깐 생각했다.
“좋았어요.”
대만은 백미러로 그를 흘끔거렸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이번엔 송태섭이 물었다.
“선배는요?”
엉뚱하게도 대만은 권준호를 쳐다봤다.
“너 얘기 안 해줬어?”
“내가 항상 네 얘길 하진 않는단다, 대만아.”
“야이씨. 어쩐지 애가 감동은커녕 시큰둥하더라니.”
대만은 흥 소리를 내면서 떵떵거렸다.
“나 얼마 전에 이적했다. 이사해서 지금은 여기 안 살아.”
내심 정대만이 여전히 도쿄에 있을 줄 알았다.
태섭이 놀라서 되물었다.
“어디서 사는데요 그럼?”
“센다이. 거기서 여기까지 온 거야. 이제 감동 좀 먹겠냐?”
‘센다이가 어디쯤이더라?’
“태섭이 데려다주고 바로 올라가는 거야, 그럼?”
“미쳤냐! 본가에서 자고 갈 거야.”
그럼 내일까진 가나가와에 있는 모양이었다. 시트에 한껏 몸을 기댄 채 태섭은 운전석 헤드를 쳐다보았다.
“내일 출근 안 해요?”
사이드 도로로 빠지느라 정신이 팔린 대만이 반 박자 늦게 대답했다.
“출근은 다다음주 수요일부터야.”
“오, 완전 푹 쉬겠네요?”
“연습해야지 무슨 소리 하냐.”
준호가 물었다.
“대만이 너 집에서 자고 가는 거면 술 마실 거니?”
“아니. 쟤 데려다줘야지.”
가나가와현에 들어서자 익숙한 건물들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내는 태섭이 떠나있던 5년 동안 새로 생긴 체인점과 맥도날드 지점을 제외하곤 달라진 게 별로 없어보였다. 그러나 바다가 보이는 동네는 조금 더 복잡스러워졌다. 해수욕장을 마주보고 있던 점포가 분점을 냈고 자전거 수리점은 반대편 역사 쪽으로 이동했다. 수리점이 있던 자리에는 소니가 들어왔다.
해수욕장과 멀지 않은 공용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세 사람은 대로변으로 나왔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머리카락이 사방팔방 흩날렸다. 멀지 않은 곳에 나베 전문점이 있었는데 대만과 준호는 일전에 몇 번 들린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 맛있어.”
미닫이문을 열면서 준호가 말했다.
세 사람은 오렌지색 불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후덥지근한 가게에서 모츠나베를 먹었다. 술은 준호만 조금 마셨다. 삼삼한 얘기를 주고받다보니 어느덧 헤어질 때가 되어 슬슬 파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집이 가까운 준호는 굳이 태워다줄 필요가 없다고 먼저 일어났다. 생각날 때 치수에게 연락이나 한 번 넣어달라면서 권준호는 바뀐 연락처를 태섭에게 적어주었다.
“둘 다 잘 들어가.”
“오냐.”
“조심히 들어가세요.”
딱히 열렬히 배웅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준호가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주차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전봇대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고 가로등이 켜졌다. 아득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의식될 때쯤 대만이 차 문을 열었다.
“야, 타.”
태섭의 본가는 가게에서 차로 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주차공간이 협소하고 차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어서 몇 분은 더 걸어 들어가야 했다.
정대만은 트렁크를 열고 묵직한 캐리어를 꺼냈다. 태섭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대만이 시건방진 후배의 캐리어를 대신 끄는 동안 육중한 바퀴 소리가 골목 곳곳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거 너무 시끄러운 거 아니냐?”
대만이 툴툴댔다.
“뭐 어쩌겠어요.”
“니네 동네 시끄러운 거 싫어한다며.”
‘언제적 얘긴데 그걸 기억하네.’
“그럼 번쩍 들어 올리시던지?”
“팔 떨어져, 인마.”
낄낄거리던 태섭이 화제를 돌렸다.
“새로 이사 간 동네는 조용한 편?”
“엉, 여기보다 조용할 걸. 대부분 직장인이라 돌아오면 잠만 자는 동네거든.”
가까운 역과 편의점 얘길 들어보니 입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흠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근처에 라멘 집이 한 군데뿐인데 하필 그 한 군데가 양만 많고 맛은 그닥이라는 거였다. 다신 거기 안 간다고 투덜대던 정대만이 문득 송태섭을 돌아보았다.
“참, 맨션 앞에 공중전화 있더라.”
순간이지만 태섭은 머뭇거렸다.
“그래요?”
“어.”
송태섭은 긴가민가했다. 말에서 다른 의도를 찾아내려는 시도야말로 정대만과 대화할 때 가장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형 지금 예전 얘길 하고 싶은 건가?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별 생각 없어보였다. 이제 정대만은 강백호가 채치수와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실업 농구팀에 들어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공원 옆에 딸린 낡은 농구장을 지나 단지 안으로 들어왔다. 정대만은 (아마 준호로부터) 건너건너 전해 들었을 북산고 농구부원들 근황을 엉성하게 떠들어 댔다. 이달재는 졸업하자마자 가업을 물려받았는데 그게 음식점이었는지 그릇 가게였는지 헷갈린다고 했고, 태웅이는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국내 톱으로 꼽히는 상위권 팀과 년 단위로 계약을 끝냈는데 아무래도 계약기간이 끝나면 도로 미국행일 것 같다고 (정대만 멋대로 추측)했다.
“참, 이한나 남자친구랑 헤어졌다더라.”
“예?”
돌아온 반응이 너무 떨떠름해 보였는지 대만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관심 있으면 연락해보라고.”
“뭔…. 됐어요.”
“나 한나네 번호 있어.”
“아니, 진짜 됐다고요.”
송태섭은 살짝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그보다 선배는 여자친구 없어요?”
“지금은 없는데….”
“사귀어 봐요, 쫌.”
“갑자기? 야, 솔직히 네가 남의 연애사업에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냐.”
‘진짜 기막힌다.’
“예. 그 말 그대로 반사요.”
태섭은 대만에게서 캐리어를 빼앗아 들었다. 어차피 곧 집 앞이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의 집 동호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공동현관 앞에서 그는 급격하게 어색해졌다.
“들어가라.”
“예에….”
마찬가지로 싱겁게 인사하던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근데 전화번호 바뀌었겠네요, 그럼?”
“어, 바뀌었지. 줘?”
“주세요.”
자신만만하게 입을 떼다말고 정대만은 당황했다.
“엇. 뭐더라. 아씨….”
이사한 지 이틀째라 외울 시간도 없었다고 대만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다음에 줄게.”
송태섭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예, 들어가세요.”
“오냐.”
손을 몇 번 흔들다 말고 정대만이 뒤돌아섰다.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태섭은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캐리어를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