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하나의 몸»
정대만이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야, 내 수건이 없다?”
송태섭은 락커룸 입구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늦은 저녁까지 계속된 연습이 끝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지만 그와 대만은 남았다. 둘이서 뒷정리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정대만은 자신의 락커를 한바탕 뒤집어엎었다. 잘못된 음식을 먹은 강아지의 입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처럼 다급하고 난잡한 몸짓으로 몇 번 팔을 움직이더니 갑자기 체념해 버렸다. 락커에서 손을 쑤욱 빼내자 반쯤 쓴 파스통이 밖으로 딸려 나왔고 파스통은 데구루루 굴러 태섭의 실내화 앞코에 부딪쳤다.
“에이씨. 아디다스 건데.”
“없어요?”
“가자 그냥.”
“안 찾아도 돼요?”
방금까지 그렇게 열렬히 뒤져놓은 주제에 대만은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꾸었다. 그런 일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듯했다. 벌써 다 잊은 사람처럼 대만이 말했다.
“어디다 떨궜나 보지. 다음에 새 거 하나 갖고 오련다.”
두 사람은 저녁으로 돈코츠 라멘 다섯 그릇을 나눠 먹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송태섭은 방문을 닫고 잠깐 그 자리에 잠자코 서 있다가 더플백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 살짝 젖은 아디다스 수건이 들어 있었다.
사용감 있는 수건의 표면은 닳아서 매끌매끌했고 가운데는 땀과 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파란색으로 ‘Adidas’라는 글씨가 프린팅 되어 있었다. 대만은 유달리 햇빛이 뜨거운 날이면 이 수건을 머리에 둘러 묶곤 했다. 쨍한 색깔의 셔츠를 받쳐 입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참견하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남들에게 신경을 뚝 끊어내고 골대만 쳐다봤다. 원할 때가 되면 주변에 완벽히 무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탁월한 슈터였다.
북산의 모두가 그렇듯 정대만에게도 남다른 유별난 점이 있었다. (사실, 모든 인간들에게는 제각각 유별난 점이 있다.) 송태섭은 인터하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그 특별함을 깨달았다. 연습 경기를 끝내고 단둘이 벤치에서 헥헥대고 있을 때였다. 송태섭은 수건으로 축축한 얼굴을 훔치다 말고 문득,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트 위는 요란했다. 다음 게임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고 소연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아이들을 정렬시키고 있었다.
송태섭은 곁에 앉아있는 대만에게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백호나 치수 선배, 하다못해 서태웅과 있을 때도 이런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평소에는 땀에 젖은 부원들 사이에 뒤섞여 있어서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땀 냄새는 소란스럽다. 땀을 흘리는 사람들은 헉헉대며 소리를 만들고 고개를 젖히거나 몸을 숙이고 물을 마시기 위해 손을 더듬거린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흘러나오는 땀은 그 모든 행동의 일부다. 냄새에도 고요한 것과 요란한 것이 있다.
대만에게는 그런 땀냄새가 나지 않았다. 송태섭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하고 직관적으로 ‘조용하다’고 생각한 거였다.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공기를 들이켜다 그런 자신의 행동을 깨닫곤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코는 이미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곁에 앉은 대만에게서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 형이 향수를 뿌린다고?’
의외였다. 아니, 의외인가. 사실 송태섭은 대만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이미지란 게 있으니까. 적어도 북산 농구부 녀석들은 대만이 향수를 뿌린다고 하면 우웩 표정을 짓거나 낄낄대며 놀려댈 것이다. 아니면 신기하단 듯 관찰할 수도 있다. 송태섭은 어느 쪽일까?
태섭은 향수를 뿌리는 남학생이었다. 멋 부리는 걸 좋아했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꾸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만의 행동이 유달리 튄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대만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가 조금 궁금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태섭의 머릿속을 아주 미약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얼마 뒤 태섭은 저녁 연습을 끝내고 락커룸으로 들어갔다가 대만의 아디다스 수건이 벤치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태섭은 무심히 수건을 지나쳤다. 락커를 정리하다 말고 별 생각도 없이 고개를 돌려 그 수건을 쳐다봤다. 그 순간, 며칠 전 그의 머릿속을 살짝 누르고 지나갔던 생각의 손자국이 느껴졌다. 태섭은 무심코 수건을 집어 들었다.
냄새를 맡으려고 얼굴을 숙이는 순간 락커룸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코트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슈팅 연습을 하던 정대만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을 때 태섭은 더플백을 맨 차림으로 멀뚱멀뚱 벤치 옆에 서 있었다.
“뭐야, 아직 안 갔어?”
“무슨 상관?”
당황한 나머지 퉁명스레 대꾸했다가 헛기침을 했다.
“이제 가려고요.”
“선배한테 말뽄새가 그게 뭐냐?”
투덜대던 대만이 픽 웃었다. 틱틱거리는 태섭의 태도가 정말로 기분 나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락커를 여는 동안 태섭은 손을 쥐었다 폈다. 반쯤 열린 더플백 안에 허겁지겁 욱여넣은 아디다스 수건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 당황해서 어쩌다 보니 집어넣은 거였다. 나쁜 짓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화들짝 놀라서 감추어 버렸다. 수건 냄새가 궁금해서 한 번 맡아본 거라고 말하면 변태짓처럼 들릴 게 뻔해서였다. 둘러댈 자신이 없어서였다.
이걸 집까지 들고 오다니. 태섭은 푸 소리를 내며 방문에 기댔다가 손에 들린 수건을 노려보았다. 내일 돌려줘야겠다. 어떻게든 변명하자. 아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향수 냄새가 궁금했을 뿐이니까.
다음 날 태섭이 농구부에 찾아갔을 때, 정대만은 락커룸을 거의 뒤엎다시피 하고 있었다. 대만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화가 난 듯 보였다.
“아니, 뭐해요 선배?”
“없어진 거 찾는다.”
태섭은 가슴이 철렁했다.
“수건요?”
대만이 고개를 들었다.
“뭔 소리하냐? 너 호식이한테 듣고 온 거 아니야?”
대만은 물건이 또 없어졌다고 했다. 이번에는 꽤 애용하던 물건이었다. 아버지가 출장 갔다가 사온 외제 자외선 차단제가 없어졌다고 했다. 반 이상 써서 더 쓸 것도 없는 데다가 아무렇게나 벗어던져두는 수건과 달리 락커룸 안에 보관하고 다녔던 거라 실수로 흘렸을 리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가 가져간 건데 대체 누구냔 말이다.
“누구 건지 모르고 쓰다가 아무 데나 놓고 잊어버린 거 아닐까요?”
“락커에 넣고 쓰던 거라니까. 누가 겁도 없이 3학년 락커를 건드리고 잊어버리겠냐.”
대만이 쯧 혀를 찼다.
“이거 이제 보니까 수건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누가 훔쳐간 거 같은데.”
송태섭은 가방을 벗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가방을 벤치에 내려둔 태섭이 대만의 등을 가볍게 쳤다.
“나중에 찾아요. 지금은 연습하고.”
대만은 얼굴을 찡그리다 곧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락커룸을 나섰다. 태섭은 식은땀이 맺힌 손으로 더플백을 자기 락커 안에 쑤셔 넣고는 락커 문을 쾅 닫았다. 나쁜 짓을 저지른 것처럼 손이 떨렸다.
그날 내내 공을 튀기며 태섭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 결국 자외선 차단제는 발견되지 않았고 대만은 이 일을 수건 때만큼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는 못했다. 연습이 끝난 뒤에도 락커룸을 한바탕 뒤지던 대만은 체육관을 나설 때까지 내내 투덜거렸다.
일은 점점 더 커졌다. 다음 날 농구부에 갔더니 대만이 자주 쓰던 파란색 물병이 사라져 있었다. 대만은 마지못한 것처럼 농구부 후배들에게 심문하는 투로 물었다.
“어제 락커룸 마지막에 쓴 사람 누구야?”
“병욱이요.”
지목을 받은 병욱이 펄쩍 뛰었다.
“저 아니에요!”
대만이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정병욱. 너 락커룸 제대로 잠갔어?”
의심받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병욱이 우물댔다.
“열쇠 받아서 잠갔어요.”
“어제 농구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체육관 썼던가?”
달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여자 배구부요.”
호기롭게 여자 배구부를 찾아간 대만은 정작 대화를 시작하자 쭈뼛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배구부 주장인 2학년 여자아이는 의심받는 게 불쾌해 처음에는 그에게 틱틱거렸지만 대만이 지나치게 억울해하자 그를 조금 한심해하면서도 경계를 풀었다.
소득은 없었다. 여자 배구부가 남자 락커룸에 드나들 이유가 없었으니까. 다만 1학년 신입부원 하나가 요즘 락커룸 뒤쪽 창문에서 음기가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쪽만 유달리 차갑고 꿉꿉하다는 것이다. 가끔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아서 창문을 열어보면 아무도 없다고, 그게 무척 기분 나쁘다고 했다.
“적당히 무시해. 유리는 오컬트 얘기에 심취해 있거든.”
귀엽다는 투로 배구부 주장이 말했다.
신입생이 발끈했다.
“정말이에요! 귀신일지도 모른다고요. 아니면 다른 여자애들이 소원을 빌려고 가져간 걸지도 몰라요.”
“여자애들이 내 물건을 왜 훔쳐가?”
대만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는 사람 물건에다 주술을 거는 거죠.”
신입생은 대만을 흘끔거리며 덧붙였다.
“특히 선배는 인기 많아 보이니까.”
여자 배구부원들과 만나고 돌아온 정대만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펼치고 곧장 코트로 달려가서 연달아 다섯 발의 슛을 폭격해 넣었다. 대만의 기분을 살피며 예민해져 있던 태섭은 그 드라마틱한 기분 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왜 이래요?”
“뭐가.”
“범인 잡았어요?”
“아니?”
대만은 히죽이며 인중을 쓱 훔치다 말고 태섭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쭉 훑었다. 그러더니 물었다.
“너 고백 몇 번 받아봤냐.”
“예?”
“몇 번 받아봤냐니까?”
태섭은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게요?”
“인기 없었나 보네.”
대만은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찬 눈으로 태섭을 바라보다 갑자기 안쓰럽다는 얼굴을 했다. 순간 태섭은 자신이 켕기는 일을 벌였다는 사실도 잊고 그를 한 대 쥐어박을 뻔했다.
대만이 살짝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하여간 여자애들 참 알 수 없단 말이야.”
손을 떠나간 공이 림을 스치며 퉁 하고 떨어졌다. 공을 주우러 가던 대만이 길게 하품하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태섭은 침이 묻어 살짝 번들대는 그의 손등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 날에도 대만의 물건이 하나 사라졌다. 그가 락커룸에 붙여두었던 메모지를 누군가 깡그리 떼어간 것이다. 다른 락커는 멀쩡한데 며칠 째 대만의 물건만 귀신 같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만은 조금 난처한 듯 보였지만 어쩔 수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여자애들이 과하네.”
태섭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여자애들요?”
“어. 너 그거 모르냐?”
대만은 요즘 여자애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주술’에 관해 설명했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물건 하나를 가져가서 정해진 시간에 주문을 걸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췄다가 몰래 돌려주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주술이 있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여자애들이 남자아이의 물건을 남몰래 가져갔다가 슬그머니 돌려놓는다는 것이다.
태섭은 어이가 없었다.
“그걸 믿어요?”
“그럼 뭐겠냐. 딴 녀석들 물건은 멀쩡하다는데.”
대만은 벌써 그 괴상한 주술을 도난 사건과 결부시켜 적당히 믿고 있었다.
“도둑이면 내 물건만 그렇게 쏠랑 훔쳐갈 리가 없잖아. 그것도 돈도 안 되는 걸로.”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태섭은 그딴 이유로 수건을 가져간 게 아닌데.
집으로 돌아온 송태섭은 수건을 꺼내어 의자에 걸어둔 다음 그것을 노려보았다. 어떤 도둑들-어쩌면 정말로 정대만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 때문에 태섭이 저 수건을 돌려줄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수건만 돌려주면 다 끝날 일이었다. 그날부터 매일 물건이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다. 연속적인 도둑질이 태섭을 원치 않는 공범으로 묶어버렸다. 이제 와서 수건만 내놓는다고 해도 겸연쩍은 의심을 피하긴 어려우리라. 별생각 없이 행동했다가 너무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것 같았다. 태섭은 잘못 디딘 얼음 위에 고립된 기분이었다. 돌아갈 곳은 너무 멀리 떠내려 갔고 사방은 온통 물로 차 있었다. 차라리 몰래 돌려놓을까.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만이 도난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그러나 다음 날 대만이 이따금씩 들고 다니는 워크맨이 사라지면서 도둑질에 대한 대만의 안일한 방관도 끝났다. 고가의 전자제품이 사라지자 대만도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송태섭은 약간의 죄책감과 진심 어린 걱정으로 교무실에 찾아가 안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농구부원들도 락커룸에 자물쇠를 달고 문단속을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교사들이 부실을 살피고 부원들을 불러다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며칠 간 체육관을 썼던 학생들도 따로 불러다 물어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지만 도난 사건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교사들은 락커마다 걸쇠를 달고 자물쇠와 열쇠를 나누어주는 것으로 이 사건을 흐지부지 종결시켰다.
“대만군, 또 물건이 사라지면 얘기하세요. 그땐 경찰을 부릅시다.”
안 선생님이 걱정스럽게 얘기하자 대만이 고개를 힘차게 주억거렸다.
“신경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안 선생님!”
어쨌든 이러한 조치가 효과는 있었던 모양인지 그 뒤로 대만의 물건이 사라지는 일이 멈췄다. 대만은 이게 다 안 선생님이 신경 써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불만스러운 듯,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별일이 다 있네.”
그러더니 크게 하품을 하곤 연습을 하러 나갔다.
정대만의 주의는 금방 다른 쪽으로 흘렀다. 여자 배구부 신입생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던 것이다. 그에게 해괴한 주술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유리라는 여자아이였다.
대만이 심각하게 말했다.
“나더러 축제에 같이 가잰다.”
“잘됐네요.”
“이러다 고백받는 거 아니냐?”
“그럼 사귀는 거죠 뭐.”
어쩐지 짜증이 난 태섭이 툴툴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저 갑니다.”
“너도 주말에 축제 올 거냐?”
“왜요?”
“왜긴 왜요야. 궁금하니까지.”
“그럼 계속 궁금해하십쇼.”
더플백을 걸친 태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더니 곧 조용해졌다. 코너를 돌아 교문 쪽으로 향하는 동안 체육관 뒤뜰에서부터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태섭이 무언가를 봤다. 체육관 창문에 새까만 무언가가 붙어있었다.
그것은 마치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혹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 몸을 기울이고 높고 좁은 창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사람 같기도 하고 기묘한 덩어리 같기도 했다. 태섭은 왔던 길을 돌아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체육관 뒤쪽으로 다가갔을 때 창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쏴아아 바람소리 말고는 들리지 않았다. 체육관 벽에 붙은 얇은 배수구에서 줄줄 물소리가 새고 있었다.
송태섭은 그것이 달라붙어 있던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방금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처럼 희미한 김이 서려 있었다. 그 너머로 남자 락커룸이 보였다. 대만의 락커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초여름에 열리는 소규모 마쓰리는 마쓰리라기보다는 야시장에 가까웠다. 어쨌든 인근 주민들의 소소한 이벤트라는 건 확실했다. 올해 친구들과 단체로 약속을 잡은 아라 때문에 태섭은 유카타를 차려입은 송아라를 책임지고 마쓰리까지 데리고 가야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시종일관 입을 삐죽 대던 아라는 마침내는 그를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마쓰리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아라는 태섭을 내버려 두고 냉큼 친구들을 따라가버렸다. 지난해보다 거하게 들어선 야시장에서 화려한 불빛이 일렁거렸고 사람들이 들뜬 얼굴로 돌바닥을 밟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맛있고 요란한 냄새가 사방팔방 풍겨져 오는 가운데 듬성듬성 걸린 등불이 야트막한 산의 신사까지 이어졌다.
태섭은 닭꼬치 하나를 들고 빠져나오다 입구에 서 있는 정대만과 딱 마주쳤다. 여자애와 있을 줄 알았는데 대만은 혼자였다.
“나 바람맞았다.”
알고 보니 대만은 삽십분도 넘게 그곳에서 데이트 신청한 여자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호를 몰라서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도 없다고 했다. 대만은 입을 삐죽이다 말고 작게 웃었다. 태섭은 그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그가 아는 대만은 제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분해하거나 화를 내는 인간이었다. 무의식 중에 그렇게 믿고 있었다. 민망함을 감추려고 웃는 그가 자신과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어느새 대만은 태섭의 닭꼬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그거 맛있냐?”
태섭은 잠깐 고민하다가 한 입 먹은 꼬치를 내밀었다.
대만은 슬슬 기약 없는 기다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태섭을 붙잡고 조금만 구경하다 가자고 졸랐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너도 좀 구경하다 가라고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쁠 건 없었다. 태섭은 결국 떼쓰는 아이에 못 이기는 보호자처럼 대만의 변덕에 따라주기로 했다.
두 사람은 야시장을 돌면서 군것질을 하다가 금붕어를 뜨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쭉 늘어진 길을 따라 천천히 안쪽으로 걷다 보니 신사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나왔다. 축제 마지막에는 신사에 동전을 던져놓고 소원을 비는 지역 풍습이 있었다.
“무슨 소원 빌려고요?”
태섭이 묻자 대만은 코웃음을 쳤다.
“내 물건 좀 돌려달라고 빌 거다 인마!”
송태섭에게 동전을 내민 대만은 먼저 배전 앞에서 짝 짝 손뼉을 부딪쳤다.
태섭은 가지런히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인 대만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붙어선 대만에게서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그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려고 뿌린 향수 냄새였다. 태섭을 죄인으로 만드는 냄새였다.
다음 순간 대만이 눈을 떴고 태섭의 시선은 오갈 데를 잃었다.
대만이 그를 쳐다봤다.
“넌 소원 안 비냐?”
“음.”
“빌고 내려와라.”
선심 쓰는 투로 대만이 태섭의 어깨를 툭툭 쳤다. 태섭은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볼일 다 본 대만은 벌써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태섭은 작아지는 대만의 등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배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에 들린 동전을 만지작거리다 통에 던져 넣고는 마지못해 손을 짝 짝 부딪쳤다.
그가 막 눈을 감고 소원을 빌려던 때였다. 배전 뒤쪽, 그러니까 산의 샛길로 빠지는 컴컴한 오솔길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나무줄기에 무언가 걸려 있었다. 그 물건이 어딘지 낯익었다.
태섭은 얼굴을 찡그렸다. 배전을 지나쳐 오솔길 쪽으로 들어서자 차갑고 축축한 공기와 음습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오솔길 안쪽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풀벌레조차 울지 않았다. 송태섭은 나무에 공중부양하듯 붙어 있는 대만의 자외선 차단제 튜브를 보았다.
저게 왜 여기에 있지?
왜
저게 붕 떠 있지?
다음 순간 오솔길 안쪽, 멀지 않은 곳에서 끄그그그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활이 목구멍을 관통한 사슴이 죽기 전에 내지르는 작은 비명 같은 소리였다. 태섭이 걸음을 멈추자 소리도 뚝 끊겼다. 안쪽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차가운 공기가 태섭의 뺨을 미끄러뜨리며 온도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태섭이 조심스럽게 나무에 뜬 자외선 차단제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사사사 소리와 함께 무언가 그를 향해 돌진했다. 태섭은 펄쩍 뛰며 뒷걸음질 쳤다가 황급히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대만은 사색이 된 채 계단을 내려오는 태섭을 보며 킬킬댔다.
“표정 좀 봐라. 무슨 귀신이라도 봤냐?”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태섭이 혼자 그곳에 돌아갔을 때, 나무에 붙어 있던 대만의 자외선 차단제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오솔길 주변은 무척 조용했다. 조금의 인기척조차 없었다.
송태섭은 나무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누군가 못을 박았던 것처럼 줄기에 깊고 좁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수액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송태섭은 체육관으로 가던 중에 오솔길에서 들려왔던 그 소리를 다시 들었다. 끄그그그. 목구멍을 긁으며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체육관 입구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는 송태섭이 체육관으로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들렸다. 끄그그그…. 그러더니 갑자기 지직거리며 드럼 소리가 들렸다.
태섭이 체육관에 들어서자 대만이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대만의 손에 흙투성이의 워크맨이 들려 있었다. 며칠 전 도난당해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바로 그 워크맨이었다.
대만은 누군가 자기 락커에 이걸 ‘돌려놓았다’고 했다.
“잘 됐네요.”
태섭이 혼란스럽게 말했다.
“근데 고장 났다.”
대만이 워크맨을 마구 흔들자 테이프가 헛돌면서 끄그그그 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악이 끊겼다 들렸다 하면서 음질 나쁜 드럼소리와 기타와 보컬의 이상한 합주가 불시에 시작되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대만은 흙투성이인 워크맨을 뒤집어 가장자리를 관통한 구멍을 보여주었다. 누군가 힘주어 송곳을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내리찍은 것처럼 보였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걸 땅에 파묻은 건지 모르겠다니까.”
대만이 툴툴거렸다.
태섭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락커룸에 들어섰다. 혹시나 싶어 창문을 살폈지만 무언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문단속이 철저해지면서 창문 안쪽에도 걸쇠가 걸려 있었다. 창문도 깨끗했다. 지문이나 입김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태섭은 얼굴을 찌푸리며 교복 셔츠 대용으로 입는 폴라 셔츠를 벗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집어넣으려고 락커를 열었을 때였다. 강렬한 흙냄새가 덤벼들듯이 태섭의 코를 찌르며 풍겨왔다. 태섭은 락커를 벌컥 열었다. 락커 안에 처음 보는 더러운 잡동사니들이 처박혀 있었다. 아니, 태섭은 그 물건들을 알아보았다. 정대만이 자주 쓰던 파란색 물병, 실내화, 볼펜과 구깃구깃 구겨진 메모지가 흙과 함께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 위에 태섭의 더플백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더플백 안에 들어있던 아디다스 수건이 사라져 있었다. 수상쩍은 무언가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이상 참견하지 말라는 듯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네가 수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자기도 알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건 바로 송태섭 너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는 나와 공범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살짝 열린 더플백에서 사라진 건 대만의 아디다스 수건뿐이었다. 그것은 송태섭의 물건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송태섭은 연습 경기를 마치자마자 혼자 체육관을 빠져나와 전철에 올랐다. 역에서 내릴 즈음에는 땅거미가 거의 다 져서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가로등이 켜졌지만 주변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 사위가 유독 고요하고 어둡게 느껴졌다.
송태섭은 계단을 따라 신사로 올라갔다. 사방에서 풀벌레가 귀청을 뜯을 듯 울고 있었다. 어디선가 규칙적인 파열음이 들려왔다. 계단을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뚜렷해졌다. 그것은 못을 박는 소리였다. 누군가 신사 안쪽에서 못을 박고 있었다.
송태섭은 잠깐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단숨에 계단을 두어 칸씩 뛰어올라 오솔길로 뛰어들었다. 뒤늦게 태섭의 존재를 의식한 그것이 황급히 소리를 멈췄지만 태섭은 이미 그를 발견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 망치를 들고 있던 남자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송태섭은 바람처럼 달려 그대로 도약했다. 공중에 붕 떠오른 다리에 온 힘을 실어 그대로 몸을 뒤틀었다. 있는 힘껏 걷어차자 도망치던 남자가 컥 소리를 내며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사람이다. 귀신같은 게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송태섭이 헐떡이며 착지하자 남자가 망치를 들고 덤벼들었다. 그를 제압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덤벼올 줄은 몰랐다. 태섭은 겁이 났다. 주먹을 휘두르면서도 태섭은 힘을 조절했다. 남자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태섭에게 덤벼들었다.
“이익, 이이이…!”
두 사람은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작은 나뭇가지들이 부러지고 흙냄새가 훅 끼쳤다. 송태섭은 익숙하게 균형을 잡았다. 태섭은 사람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러본 적이 있었다. 그는 싸움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싸움을 못한다곤 할 수 없었다.
태섭이 제압용으로 휘두른 주먹에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남자는 태섭이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싸움을 못하는 정대만보다도 실력이 형편없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는 필사적으로 태섭에게 팔을 휘둘렀다. 태섭은 망치로부터 몸을 방어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려 가드했다가, 재빨리 망치를 빼앗았다. 그다음에는 지지부진한 주먹질이 이어졌다. 송태섭은 남자를 진심으로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고 남자는 너무 약했다.
부조리한 이인극 같은 우스꽝스러운 싸움 속에서 태섭은 대만을 떠올렸다. 언젠가 태섭은 옥상 위에서 대만의 위에 올라타 주먹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신감을 느꼈고 과거와 미래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시간 감각을 상실했다. 삶에는 앞도 뒤도 없고 전진도 후퇴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절망 속에는 대만의 헐떡대는 숨소리와 신음, 희미한 철 냄새(그것은 피 냄새 거나 혹은 눈이 내리기 직전의 공기 냄새였다)만이 존재했다.
기억 속에서 헐떡이는 대만의 얼굴이 공포와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뜨겁고 묵직한 대만의 육신이 느껴졌다. 정대만은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는데, 그게 주변이 너무 차갑고 고독해서인지 아니면 송태섭이 너무 흥분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송태섭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토록 배신감을 느낀 거였다. 건너온 다리가 불 타 사라진 것처럼 과거로는 갈 수 없었다. 미래로 갈 수 있는 방향도 상실했다. 그 순간에 태섭이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의 의지로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는 정대만의 절망을 자신의 절망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히는 것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 태섭과 대만은 가장 격렬히 증오하는 완벽한 타인인 동시에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은 고통을 느끼는 완전한 한몸이었다. 그들은 하나였다. 농구와는 다른 방식의 서늘한 결속이었다.
태섭은 정신을 차렸다.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겁에 질려 끽끽대는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고 얼굴을 구분할 수 있게 되자 주먹을 들어 올리던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한밤의 신사 속에서 못을 박던 남자는 남자아이에 가까웠다. 동갑내기처럼 보였지만 태섭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남자아이는 절망에 질려 있지도 않았고 화가 나 있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혼란스러워 보였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팔을 뒤로 꺾었다. 남자아이는 훌쩍이며 순순히 제압당했다.
“제발 저희 부모님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남자아이가 흐느끼며 말했다. 태섭은 꿈에서 억지로 깨어난 사람처럼 불쾌한 기분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무에 박혀 있는 대만의 아디다스 수건을 챙겨 남자아이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이 일은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놨다. 한밤에 신사를 올라가 남의 물건에 못을 박고 저주를 거는 사람이라니. 범인이 옆학교 남자아이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정대만은 교무실에 조용히 불려 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전해 들었다. 남자아이는 대만과 같은 무석중학교를 나왔지만 대만보다 한 살 어렸고 농구부도 아니었다. 대만은 소년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기억나는 게 있는지 애써 보았지만 정말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미워서 그랬다고 남자아이는 진술했다. 들어보니 대만이 중학생 시절 오며 가며 가끔 들리는 야외 농구 코트에서 두어 번 정도 원오원 상대를 해준 아이라고 했다. 그는 대만이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서 화가 나 보복한 것이라고 했다. 몇 번이고 경기장에서 신호를 보냈지만 완전히 무시당했다고 했다. 대만이 북산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농구부를 관둔 걸 알았을 땐 자신의 신호가 정말로 싫어서 도망친 거라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모욕을 갚아주고 싶어 결단을 내린 거라고 했다.
남자아이는 혼란스럽게 말을 번복하거나 덧붙였고 눈물을 흘리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소년에게 훈방 조치를 취했다. 용감하게 범인을 잡은 태섭에게 표창장을 내리거나, 학교에서 포상을 내리는 방안에 대해 얘기가 오갔지만 태섭은 더 이상의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강력히 거부했다. 애초에 어두컴컴한 밤에 신사를 올라간 일에 대해 무어라 둘러댄단 말인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소년을 때리며 대만을 생각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역시 소년과 대만을 일치시킬 수는 없었음을, 그래서 화가 나지 않았음을,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소년을 힘주어 때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비틀린 마음으로 소년이 락커룸 창가에 붙어 대만을 들여다본 것처럼 송태섭 역시 정대만이란 인간의 창문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의 특수함을 알아채고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 자신에게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교무실에서 돌아온 대만이 장난스럽게 태섭을 툭 쳤다.
“들었다. 범인 잡은 거 너라며.”
“예, 뭐.”
대만이 신나서 히죽댔다.
“어떻게 알고 거길 다 올라갔대?”
“그냥요.”
그렇게 대답한 다음, 태섭은 덧붙였다.
“걔가 선배 물건들 제 락커에 쑤셔 박아놨더라고요.”
“뭐? 니 락커엔 왜?”
“모르죠 그야.”
태섭은 겸연쩍게 말했다.
“흙 묻어서 못 쓰겠던데 그래도 가져갈 거 있음 가져가요.”
대만은 송태섭의 락커에서 자신의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살펴보았다. 물건마다 못 박힌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니, 진짜네….”
대만은 조금 풀 죽은 투로 중얼거렸다.
“진짜 못을 박아놨네.”
“무시해요. 미신인데 뭐. 진짜 저주에 걸린 건 아니잖아요.”
태섭이 확인하듯 물었다.
“별일 없었죠?”
“별일이라….”
대만은 물건을 내려놓고 하품을 하다가 깨달은 듯 말했다.
“어쩐지 요즘 이상한 꿈을 꾸더라.”
그는 근래에 꾸던 꿈에 대해 들려주었다. 아주 기묘하고 기분 나쁜 꿈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 있어야 하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앞도 뒤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선 과거도 미래도 의미가 없었다.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도 뒤도 없고 전진도 후퇴도 없었다. 시간은 그곳에서 의미를 잃었다. 꼭 절망의 한복판처럼. 허우적거려야만 하는 고난의 시간처럼. 다만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파열음이었는데 너무 아득한 소리라 정확히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못을 박는 소리였구나.”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대만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난 또. 농구공 튀기는 소린 줄 알았지.”
대만은 그게 악몽인 줄도 몰랐다고 했다.
내일 아침에는 수건을 돌려줘야겠다고 태섭은 생각했다.
그날 밤 태섭은 꿈을 꿨다. 그는 오도 가도 못하는 물속에 다리까지 잠겨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서쪽에서부터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그래서 태섭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바다라는 사실을 알았다.
태섭을 두렵게 한 건 눈앞에 대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처럼 머리가 길게 길었지만 교복 차림이 아니라 하얀 티에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태섭은 그에게 주먹을 질러야 할지 아니면 무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증오해야 할지 그리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겐 두 가지 모습이 있었다. 극과 극의 시기가 한몸처럼 뒤엉켜 있었다.
그 순간 대만이 성큼성큼 다가와 태섭에게 고개를 숙였다. 송태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뜨거운 입술이 맞닿는 순간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멎고 시간이 멈추어 섰다. 대만의 몸은 놀랄 만큼 뜨겁고 절절 끓는 듯했다. 태섭의 뺨을 붙잡는 손가락이 달구어진 쇠처럼 강렬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열 손가락은 촉수처럼 더듬으며 태섭을 무장해제시켰다. 혀가 드나들면서 태섭의 호흡을 집어삼켰고 이빨은 서로 부딪칠 때마다 녹아내리듯 사라졌다가 이내 혓바닥을 가로막으며 오돌토돌한 존재감을 재건했다. 그는 태섭이 감추어 놓은 비밀을 목구멍에서부터 길어오르고 있었다. 꿈속의 그는 태섭이 수건을 왜 훔쳤는지 알고 있었다. 비밀을 공유하지 않고도 한몸이 되게 해주었다. 향수 냄새가 났다. 어느새 대만의 머리카락은 짧아지고 키는 훌쩍 자라 태섭의 얼굴을 잡아끌듯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이 아는 바로 그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속눈썹에 바닷물이 맺혀 있었다.
차라리 파도에 휩쓸린다면 길몽일 텐데. 그는 꿈속에서라도 죄책감에 대한 값을 치르고 싶었다. 그러나 대만은 마치 전봇대처럼 서서 파도를 막고 있었다. 태섭은 안전한 물살을 누리며 입맞춤을 받는 내내 혼란스럽게 손을 더듬거렸다. 그를 두들겨 패고 싶었다. 그를 껴안고 싶었다. 그를 밀어내고 싶었다. 그를 잡아당기고 싶었다. 자신의 말만 듣게 하고 싶었다. 영원히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게 그를 훔쳤다가 땅속에 깊게 파묻고 싶었다. 그러다 아무 일도 없던 척 사람들 틈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아니, 파묻고 싶은 건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내보일 수 있는 것 역시 송태섭 그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저주에 걸린 건 내가 아니라 대만 선배인데…. 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이런 꿈을 꾼 이상 아무렇지 않게 수건을 돌려줄 수가 없잖아. 간신히 무고해졌는데. 공범에서 벗어났는데. 그는 애초부터 수건을 돌려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조차 무시하던 욕망이 꿈속에 드러났으니 더는 무고할 수 없었다. 식은땀과 함께 태섭은 눈을 떴다.
아디다스 수건은 방 옷걸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태섭은 어둠이 눈에 익고 시간의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자리에 누워 있었다. 마침내 축축한 아랫도리와 식은땀을 흘리는 육신의 촉감이 돌아오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수건을 챙겨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풀벌레가 맹렬하게 울고 있었다. 태섭은 아파트 뒤쪽으로 난 조그만 야외 코트 뒤쪽 공터로 들어가 손으로 구덩이를 팠다. 아디다스 수건에선 흙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이미 대만의 냄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부터 냄새 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태섭은 구멍이 속에 수건을 던져넣은 다음 흙으로 덮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이 정말로 이런 짓을 할까. 아닐 거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그저 기원하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허풍일 것이다. 저주도 마찬가지다. 저주의 진짜 모습은 주먹 몇 번 휘둘렀다고 울음을 터뜨리며 부모님을 찾는 남자아이일 뿐이다. 그 녀석은 정말로 대만이 저주받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간절히 원했을 뿐이다. 자신의 소원이 절실해지기를, 그렇게 해서 이루어질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행위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저주와 주술은 한몸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에서 태어나는 것들은 욕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도 사랑도 한몸처럼 뒤엉킨 공범이다. 괴담 또한 그렇게 태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여름마다 떠돌며 사람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결국 괴담처럼 떠도는 마음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태섭은 수건을 파묻었다. 사랑하고 싶고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흙속으로 떠밀리듯 묻혔다. 이제 그는 모든 사랑 이야기의 공범이자 괴담의 일부였다. 주문을 걸지 않았으니 여름 내내 그는 이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은 저주처럼 집요하게 그를 쫓아다닐 것이다. 태섭은 뒷걸음질치듯 공터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 2023.07.08 <하나의 몸>
2023.09.07 후일담
연습 경기 중에 골 넣고 흥분한 정대만이 태섭이를 포옹하는 듯한 세리머니를 함.
깜짝 놀란 송태섭... 대만이를 거칠게 밀쳐내고 라커룸으로 도망쳐 옴.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면... 섰음...
‘정대만한테 섰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화장실 가서 구토하는 태섭이...
괴로워하며 잠 못 이루다가 결국 벌떡 일어나 야외 코트장 뒤편으로 감.
땅을 마구 파헤침. 근데 수건이 없다.
수건이 사라졌다.
영원한 저주 에이엔니 노로이... 짝사랑의 주박은 그야말로 저주... (그런데 이 부분이 진짜 에로하고 모에하다고 생각하면서 썼음. 난 호러는 코믹 혹은 에로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야, 내 수건이 없다?”
송태섭은 락커룸 입구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늦은 저녁까지 계속된 연습이 끝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지만 그와 대만은 남았다. 둘이서 뒷정리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정대만은 자신의 락커를 한바탕 뒤집어엎었다. 잘못된 음식을 먹은 강아지의 입속에 손을 집어넣는 것처럼 다급하고 난잡한 몸짓으로 몇 번 팔을 움직이더니 갑자기 체념해 버렸다. 락커에서 손을 쑤욱 빼내자 반쯤 쓴 파스통이 밖으로 딸려 나왔고 파스통은 데구루루 굴러 태섭의 실내화 앞코에 부딪쳤다.
“에이씨. 아디다스 건데.”
“없어요?”
“가자 그냥.”
“안 찾아도 돼요?”
방금까지 그렇게 열렬히 뒤져놓은 주제에 대만은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꾸었다. 그런 일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듯했다. 벌써 다 잊은 사람처럼 대만이 말했다.
“어디다 떨궜나 보지. 다음에 새 거 하나 갖고 오련다.”
두 사람은 저녁으로 돈코츠 라멘 다섯 그릇을 나눠 먹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송태섭은 방문을 닫고 잠깐 그 자리에 잠자코 서 있다가 더플백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 살짝 젖은 아디다스 수건이 들어 있었다.
사용감 있는 수건의 표면은 닳아서 매끌매끌했고 가운데는 땀과 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파란색으로 ‘Adidas’라는 글씨가 프린팅 되어 있었다. 대만은 유달리 햇빛이 뜨거운 날이면 이 수건을 머리에 둘러 묶곤 했다. 쨍한 색깔의 셔츠를 받쳐 입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참견하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남들에게 신경을 뚝 끊어내고 골대만 쳐다봤다. 원할 때가 되면 주변에 완벽히 무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탁월한 슈터였다.
북산의 모두가 그렇듯 정대만에게도 남다른 유별난 점이 있었다. (사실, 모든 인간들에게는 제각각 유별난 점이 있다.) 송태섭은 인터하이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 그 특별함을 깨달았다. 연습 경기를 끝내고 단둘이 벤치에서 헥헥대고 있을 때였다. 송태섭은 수건으로 축축한 얼굴을 훔치다 말고 문득, ‘조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트 위는 요란했다. 다음 게임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고 소연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아이들을 정렬시키고 있었다.
송태섭은 곁에 앉아있는 대만에게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백호나 치수 선배, 하다못해 서태웅과 있을 때도 이런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평소에는 땀에 젖은 부원들 사이에 뒤섞여 있어서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땀 냄새는 소란스럽다. 땀을 흘리는 사람들은 헉헉대며 소리를 만들고 고개를 젖히거나 몸을 숙이고 물을 마시기 위해 손을 더듬거린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흘러나오는 땀은 그 모든 행동의 일부다. 냄새에도 고요한 것과 요란한 것이 있다.
대만에게는 그런 땀냄새가 나지 않았다. 송태섭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하고 직관적으로 ‘조용하다’고 생각한 거였다.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공기를 들이켜다 그런 자신의 행동을 깨닫곤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코는 이미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곁에 앉은 대만에게서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이 형이 향수를 뿌린다고?’
의외였다. 아니, 의외인가. 사실 송태섭은 대만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이미지란 게 있으니까. 적어도 북산 농구부 녀석들은 대만이 향수를 뿌린다고 하면 우웩 표정을 짓거나 낄낄대며 놀려댈 것이다. 아니면 신기하단 듯 관찰할 수도 있다. 송태섭은 어느 쪽일까?
태섭은 향수를 뿌리는 남학생이었다. 멋 부리는 걸 좋아했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꾸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만의 행동이 유달리 튄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대만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가 조금 궁금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태섭의 머릿속을 아주 미약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얼마 뒤 태섭은 저녁 연습을 끝내고 락커룸으로 들어갔다가 대만의 아디다스 수건이 벤치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태섭은 무심히 수건을 지나쳤다. 락커를 정리하다 말고 별 생각도 없이 고개를 돌려 그 수건을 쳐다봤다. 그 순간, 며칠 전 그의 머릿속을 살짝 누르고 지나갔던 생각의 손자국이 느껴졌다. 태섭은 무심코 수건을 집어 들었다.
냄새를 맡으려고 얼굴을 숙이는 순간 락커룸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코트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슈팅 연습을 하던 정대만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을 때 태섭은 더플백을 맨 차림으로 멀뚱멀뚱 벤치 옆에 서 있었다.
“뭐야, 아직 안 갔어?”
“무슨 상관?”
당황한 나머지 퉁명스레 대꾸했다가 헛기침을 했다.
“이제 가려고요.”
“선배한테 말뽄새가 그게 뭐냐?”
투덜대던 대만이 픽 웃었다. 틱틱거리는 태섭의 태도가 정말로 기분 나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락커를 여는 동안 태섭은 손을 쥐었다 폈다. 반쯤 열린 더플백 안에 허겁지겁 욱여넣은 아디다스 수건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 당황해서 어쩌다 보니 집어넣은 거였다. 나쁜 짓을 하려던 것도 아니었는데 화들짝 놀라서 감추어 버렸다. 수건 냄새가 궁금해서 한 번 맡아본 거라고 말하면 변태짓처럼 들릴 게 뻔해서였다. 둘러댈 자신이 없어서였다.
이걸 집까지 들고 오다니. 태섭은 푸 소리를 내며 방문에 기댔다가 손에 들린 수건을 노려보았다. 내일 돌려줘야겠다. 어떻게든 변명하자. 아니,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향수 냄새가 궁금했을 뿐이니까.
다음 날 태섭이 농구부에 찾아갔을 때, 정대만은 락커룸을 거의 뒤엎다시피 하고 있었다. 대만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화가 난 듯 보였다.
“아니, 뭐해요 선배?”
“없어진 거 찾는다.”
태섭은 가슴이 철렁했다.
“수건요?”
대만이 고개를 들었다.
“뭔 소리하냐? 너 호식이한테 듣고 온 거 아니야?”
대만은 물건이 또 없어졌다고 했다. 이번에는 꽤 애용하던 물건이었다. 아버지가 출장 갔다가 사온 외제 자외선 차단제가 없어졌다고 했다. 반 이상 써서 더 쓸 것도 없는 데다가 아무렇게나 벗어던져두는 수건과 달리 락커룸 안에 보관하고 다녔던 거라 실수로 흘렸을 리도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가 가져간 건데 대체 누구냔 말이다.
“누구 건지 모르고 쓰다가 아무 데나 놓고 잊어버린 거 아닐까요?”
“락커에 넣고 쓰던 거라니까. 누가 겁도 없이 3학년 락커를 건드리고 잊어버리겠냐.”
대만이 쯧 혀를 찼다.
“이거 이제 보니까 수건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누가 훔쳐간 거 같은데.”
송태섭은 가방을 벗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가방을 벤치에 내려둔 태섭이 대만의 등을 가볍게 쳤다.
“나중에 찾아요. 지금은 연습하고.”
대만은 얼굴을 찡그리다 곧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락커룸을 나섰다. 태섭은 식은땀이 맺힌 손으로 더플백을 자기 락커 안에 쑤셔 넣고는 락커 문을 쾅 닫았다. 나쁜 짓을 저지른 것처럼 손이 떨렸다.
그날 내내 공을 튀기며 태섭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 결국 자외선 차단제는 발견되지 않았고 대만은 이 일을 수건 때만큼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는 못했다. 연습이 끝난 뒤에도 락커룸을 한바탕 뒤지던 대만은 체육관을 나설 때까지 내내 투덜거렸다.
일은 점점 더 커졌다. 다음 날 농구부에 갔더니 대만이 자주 쓰던 파란색 물병이 사라져 있었다. 대만은 마지못한 것처럼 농구부 후배들에게 심문하는 투로 물었다.
“어제 락커룸 마지막에 쓴 사람 누구야?”
“병욱이요.”
지목을 받은 병욱이 펄쩍 뛰었다.
“저 아니에요!”
대만이 그를 멀뚱히 쳐다봤다.
“정병욱. 너 락커룸 제대로 잠갔어?”
의심받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병욱이 우물댔다.
“열쇠 받아서 잠갔어요.”
“어제 농구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체육관 썼던가?”
달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여자 배구부요.”
호기롭게 여자 배구부를 찾아간 대만은 정작 대화를 시작하자 쭈뼛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배구부 주장인 2학년 여자아이는 의심받는 게 불쾌해 처음에는 그에게 틱틱거렸지만 대만이 지나치게 억울해하자 그를 조금 한심해하면서도 경계를 풀었다.
소득은 없었다. 여자 배구부가 남자 락커룸에 드나들 이유가 없었으니까. 다만 1학년 신입부원 하나가 요즘 락커룸 뒤쪽 창문에서 음기가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쪽만 유달리 차갑고 꿉꿉하다는 것이다. 가끔 누가 쳐다보는 것 같아서 창문을 열어보면 아무도 없다고, 그게 무척 기분 나쁘다고 했다.
“적당히 무시해. 유리는 오컬트 얘기에 심취해 있거든.”
귀엽다는 투로 배구부 주장이 말했다.
신입생이 발끈했다.
“정말이에요! 귀신일지도 모른다고요. 아니면 다른 여자애들이 소원을 빌려고 가져간 걸지도 몰라요.”
“여자애들이 내 물건을 왜 훔쳐가?”
대만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는 사람 물건에다 주술을 거는 거죠.”
신입생은 대만을 흘끔거리며 덧붙였다.
“특히 선배는 인기 많아 보이니까.”
여자 배구부원들과 만나고 돌아온 정대만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펼치고 곧장 코트로 달려가서 연달아 다섯 발의 슛을 폭격해 넣었다. 대만의 기분을 살피며 예민해져 있던 태섭은 그 드라마틱한 기분 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왜 이래요?”
“뭐가.”
“범인 잡았어요?”
“아니?”
대만은 히죽이며 인중을 쓱 훔치다 말고 태섭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쭉 훑었다. 그러더니 물었다.
“너 고백 몇 번 받아봤냐.”
“예?”
“몇 번 받아봤냐니까?”
태섭은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게요?”
“인기 없었나 보네.”
대만은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찬 눈으로 태섭을 바라보다 갑자기 안쓰럽다는 얼굴을 했다. 순간 태섭은 자신이 켕기는 일을 벌였다는 사실도 잊고 그를 한 대 쥐어박을 뻔했다.
대만이 살짝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하여간 여자애들 참 알 수 없단 말이야.”
손을 떠나간 공이 림을 스치며 퉁 하고 떨어졌다. 공을 주우러 가던 대만이 길게 하품하며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태섭은 침이 묻어 살짝 번들대는 그의 손등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다음 날에도 대만의 물건이 하나 사라졌다. 그가 락커룸에 붙여두었던 메모지를 누군가 깡그리 떼어간 것이다. 다른 락커는 멀쩡한데 며칠 째 대만의 물건만 귀신 같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만은 조금 난처한 듯 보였지만 어쩔 수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여자애들이 과하네.”
태섭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여자애들요?”
“어. 너 그거 모르냐?”
대만은 요즘 여자애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는 ‘주술’에 관해 설명했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의 물건 하나를 가져가서 정해진 시간에 주문을 걸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감췄다가 몰래 돌려주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주술이 있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여자애들이 남자아이의 물건을 남몰래 가져갔다가 슬그머니 돌려놓는다는 것이다.
태섭은 어이가 없었다.
“그걸 믿어요?”
“그럼 뭐겠냐. 딴 녀석들 물건은 멀쩡하다는데.”
대만은 벌써 그 괴상한 주술을 도난 사건과 결부시켜 적당히 믿고 있었다.
“도둑이면 내 물건만 그렇게 쏠랑 훔쳐갈 리가 없잖아. 그것도 돈도 안 되는 걸로.”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하지만 태섭은 그딴 이유로 수건을 가져간 게 아닌데.
집으로 돌아온 송태섭은 수건을 꺼내어 의자에 걸어둔 다음 그것을 노려보았다. 어떤 도둑들-어쩌면 정말로 정대만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들 때문에 태섭이 저 수건을 돌려줄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수건만 돌려주면 다 끝날 일이었다. 그날부터 매일 물건이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다. 연속적인 도둑질이 태섭을 원치 않는 공범으로 묶어버렸다. 이제 와서 수건만 내놓는다고 해도 겸연쩍은 의심을 피하긴 어려우리라. 별생각 없이 행동했다가 너무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것 같았다. 태섭은 잘못 디딘 얼음 위에 고립된 기분이었다. 돌아갈 곳은 너무 멀리 떠내려 갔고 사방은 온통 물로 차 있었다. 차라리 몰래 돌려놓을까.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만이 도난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그러나 다음 날 대만이 이따금씩 들고 다니는 워크맨이 사라지면서 도둑질에 대한 대만의 안일한 방관도 끝났다. 고가의 전자제품이 사라지자 대만도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송태섭은 약간의 죄책감과 진심 어린 걱정으로 교무실에 찾아가 안 선생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농구부원들도 락커룸에 자물쇠를 달고 문단속을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교사들이 부실을 살피고 부원들을 불러다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며칠 간 체육관을 썼던 학생들도 따로 불러다 물어보았지만 소득은 없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지만 도난 사건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결국 교사들은 락커마다 걸쇠를 달고 자물쇠와 열쇠를 나누어주는 것으로 이 사건을 흐지부지 종결시켰다.
“대만군, 또 물건이 사라지면 얘기하세요. 그땐 경찰을 부릅시다.”
안 선생님이 걱정스럽게 얘기하자 대만이 고개를 힘차게 주억거렸다.
“신경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안 선생님!”
어쨌든 이러한 조치가 효과는 있었던 모양인지 그 뒤로 대만의 물건이 사라지는 일이 멈췄다. 대만은 이게 다 안 선생님이 신경 써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불만스러운 듯,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별일이 다 있네.”
그러더니 크게 하품을 하곤 연습을 하러 나갔다.
정대만의 주의는 금방 다른 쪽으로 흘렀다. 여자 배구부 신입생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던 것이다. 그에게 해괴한 주술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유리라는 여자아이였다.
대만이 심각하게 말했다.
“나더러 축제에 같이 가잰다.”
“잘됐네요.”
“이러다 고백받는 거 아니냐?”
“그럼 사귀는 거죠 뭐.”
어쩐지 짜증이 난 태섭이 툴툴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저 갑니다.”
“너도 주말에 축제 올 거냐?”
“왜요?”
“왜긴 왜요야. 궁금하니까지.”
“그럼 계속 궁금해하십쇼.”
더플백을 걸친 태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더니 곧 조용해졌다. 코너를 돌아 교문 쪽으로 향하는 동안 체육관 뒤뜰에서부터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태섭이 무언가를 봤다. 체육관 창문에 새까만 무언가가 붙어있었다.
그것은 마치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혹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 몸을 기울이고 높고 좁은 창문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사람 같기도 하고 기묘한 덩어리 같기도 했다. 태섭은 왔던 길을 돌아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체육관 뒤쪽으로 다가갔을 때 창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귀를 기울였다. 쏴아아 바람소리 말고는 들리지 않았다. 체육관 벽에 붙은 얇은 배수구에서 줄줄 물소리가 새고 있었다.
송태섭은 그것이 달라붙어 있던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방금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처럼 희미한 김이 서려 있었다. 그 너머로 남자 락커룸이 보였다. 대만의 락커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초여름에 열리는 소규모 마쓰리는 마쓰리라기보다는 야시장에 가까웠다. 어쨌든 인근 주민들의 소소한 이벤트라는 건 확실했다. 올해 친구들과 단체로 약속을 잡은 아라 때문에 태섭은 유카타를 차려입은 송아라를 책임지고 마쓰리까지 데리고 가야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시종일관 입을 삐죽 대던 아라는 마침내는 그를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마쓰리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아라는 태섭을 내버려 두고 냉큼 친구들을 따라가버렸다. 지난해보다 거하게 들어선 야시장에서 화려한 불빛이 일렁거렸고 사람들이 들뜬 얼굴로 돌바닥을 밟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맛있고 요란한 냄새가 사방팔방 풍겨져 오는 가운데 듬성듬성 걸린 등불이 야트막한 산의 신사까지 이어졌다.
태섭은 닭꼬치 하나를 들고 빠져나오다 입구에 서 있는 정대만과 딱 마주쳤다. 여자애와 있을 줄 알았는데 대만은 혼자였다.
“나 바람맞았다.”
알고 보니 대만은 삽십분도 넘게 그곳에서 데이트 신청한 여자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번호를 몰라서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도 없다고 했다. 대만은 입을 삐죽이다 말고 작게 웃었다. 태섭은 그 모습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그가 아는 대만은 제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분해하거나 화를 내는 인간이었다. 무의식 중에 그렇게 믿고 있었다. 민망함을 감추려고 웃는 그가 자신과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어느새 대만은 태섭의 닭꼬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그거 맛있냐?”
태섭은 잠깐 고민하다가 한 입 먹은 꼬치를 내밀었다.
대만은 슬슬 기약 없는 기다림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려는 태섭을 붙잡고 조금만 구경하다 가자고 졸랐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너도 좀 구경하다 가라고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쁠 건 없었다. 태섭은 결국 떼쓰는 아이에 못 이기는 보호자처럼 대만의 변덕에 따라주기로 했다.
두 사람은 야시장을 돌면서 군것질을 하다가 금붕어를 뜨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때웠다. 쭉 늘어진 길을 따라 천천히 안쪽으로 걷다 보니 신사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나왔다. 축제 마지막에는 신사에 동전을 던져놓고 소원을 비는 지역 풍습이 있었다.
“무슨 소원 빌려고요?”
태섭이 묻자 대만은 코웃음을 쳤다.
“내 물건 좀 돌려달라고 빌 거다 인마!”
송태섭에게 동전을 내민 대만은 먼저 배전 앞에서 짝 짝 손뼉을 부딪쳤다.
태섭은 가지런히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숙인 대만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붙어선 대만에게서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그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여자아이와 데이트를 하려고 뿌린 향수 냄새였다. 태섭을 죄인으로 만드는 냄새였다.
다음 순간 대만이 눈을 떴고 태섭의 시선은 오갈 데를 잃었다.
대만이 그를 쳐다봤다.
“넌 소원 안 비냐?”
“음.”
“빌고 내려와라.”
선심 쓰는 투로 대만이 태섭의 어깨를 툭툭 쳤다. 태섭은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볼일 다 본 대만은 벌써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태섭은 작아지는 대만의 등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배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에 들린 동전을 만지작거리다 통에 던져 넣고는 마지못해 손을 짝 짝 부딪쳤다.
그가 막 눈을 감고 소원을 빌려던 때였다. 배전 뒤쪽, 그러니까 산의 샛길로 빠지는 컴컴한 오솔길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나무줄기에 무언가 걸려 있었다. 그 물건이 어딘지 낯익었다.
태섭은 얼굴을 찡그렸다. 배전을 지나쳐 오솔길 쪽으로 들어서자 차갑고 축축한 공기와 음습한 냄새가 훅 끼쳐왔다. 오솔길 안쪽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풀벌레조차 울지 않았다. 송태섭은 나무에 공중부양하듯 붙어 있는 대만의 자외선 차단제 튜브를 보았다.
저게 왜 여기에 있지?
왜
저게 붕 떠 있지?
다음 순간 오솔길 안쪽, 멀지 않은 곳에서 끄그그그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울음소리였다. 활이 목구멍을 관통한 사슴이 죽기 전에 내지르는 작은 비명 같은 소리였다. 태섭이 걸음을 멈추자 소리도 뚝 끊겼다. 안쪽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차가운 공기가 태섭의 뺨을 미끄러뜨리며 온도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느새 온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태섭이 조심스럽게 나무에 뜬 자외선 차단제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사사사 소리와 함께 무언가 그를 향해 돌진했다. 태섭은 펄쩍 뛰며 뒷걸음질 쳤다가 황급히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대만은 사색이 된 채 계단을 내려오는 태섭을 보며 킬킬댔다.
“표정 좀 봐라. 무슨 귀신이라도 봤냐?”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태섭이 혼자 그곳에 돌아갔을 때, 나무에 붙어 있던 대만의 자외선 차단제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오솔길 주변은 무척 조용했다. 조금의 인기척조차 없었다.
송태섭은 나무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누군가 못을 박았던 것처럼 줄기에 깊고 좁은 구멍이 나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수액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 송태섭은 체육관으로 가던 중에 오솔길에서 들려왔던 그 소리를 다시 들었다. 끄그그그. 목구멍을 긁으며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체육관 입구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는 송태섭이 체육관으로 다가갈수록 선명하게 들렸다. 끄그그그…. 그러더니 갑자기 지직거리며 드럼 소리가 들렸다.
태섭이 체육관에 들어서자 대만이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다. 대만의 손에 흙투성이의 워크맨이 들려 있었다. 며칠 전 도난당해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바로 그 워크맨이었다.
대만은 누군가 자기 락커에 이걸 ‘돌려놓았다’고 했다.
“잘 됐네요.”
태섭이 혼란스럽게 말했다.
“근데 고장 났다.”
대만이 워크맨을 마구 흔들자 테이프가 헛돌면서 끄그그그 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악이 끊겼다 들렸다 하면서 음질 나쁜 드럼소리와 기타와 보컬의 이상한 합주가 불시에 시작되었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대만은 흙투성이인 워크맨을 뒤집어 가장자리를 관통한 구멍을 보여주었다. 누군가 힘주어 송곳을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내리찍은 것처럼 보였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이걸 땅에 파묻은 건지 모르겠다니까.”
대만이 툴툴거렸다.
태섭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락커룸에 들어섰다. 혹시나 싶어 창문을 살폈지만 무언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문단속이 철저해지면서 창문 안쪽에도 걸쇠가 걸려 있었다. 창문도 깨끗했다. 지문이나 입김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태섭은 얼굴을 찌푸리며 교복 셔츠 대용으로 입는 폴라 셔츠를 벗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옷을 집어넣으려고 락커를 열었을 때였다. 강렬한 흙냄새가 덤벼들듯이 태섭의 코를 찌르며 풍겨왔다. 태섭은 락커를 벌컥 열었다. 락커 안에 처음 보는 더러운 잡동사니들이 처박혀 있었다. 아니, 태섭은 그 물건들을 알아보았다. 정대만이 자주 쓰던 파란색 물병, 실내화, 볼펜과 구깃구깃 구겨진 메모지가 흙과 함께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그 위에 태섭의 더플백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더플백 안에 들어있던 아디다스 수건이 사라져 있었다. 수상쩍은 무언가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이상 참견하지 말라는 듯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네가 수건을 훔쳤다는 사실을 자기도 알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건 바로 송태섭 너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는 나와 공범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살짝 열린 더플백에서 사라진 건 대만의 아디다스 수건뿐이었다. 그것은 송태섭의 물건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송태섭은 연습 경기를 마치자마자 혼자 체육관을 빠져나와 전철에 올랐다. 역에서 내릴 즈음에는 땅거미가 거의 다 져서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가로등이 켜졌지만 주변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 사위가 유독 고요하고 어둡게 느껴졌다.
송태섭은 계단을 따라 신사로 올라갔다. 사방에서 풀벌레가 귀청을 뜯을 듯 울고 있었다. 어디선가 규칙적인 파열음이 들려왔다. 계단을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뚜렷해졌다. 그것은 못을 박는 소리였다. 누군가 신사 안쪽에서 못을 박고 있었다.
송태섭은 잠깐 발걸음을 멈추었다가, 단숨에 계단을 두어 칸씩 뛰어올라 오솔길로 뛰어들었다. 뒤늦게 태섭의 존재를 의식한 그것이 황급히 소리를 멈췄지만 태섭은 이미 그를 발견했다. 후드를 뒤집어쓴 채 망치를 들고 있던 남자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송태섭은 바람처럼 달려 그대로 도약했다. 공중에 붕 떠오른 다리에 온 힘을 실어 그대로 몸을 뒤틀었다. 있는 힘껏 걷어차자 도망치던 남자가 컥 소리를 내며 앞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사람이다. 귀신같은 게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송태섭이 헐떡이며 착지하자 남자가 망치를 들고 덤벼들었다. 그를 제압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덤벼올 줄은 몰랐다. 태섭은 겁이 났다. 주먹을 휘두르면서도 태섭은 힘을 조절했다. 남자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태섭에게 덤벼들었다.
“이익, 이이이…!”
두 사람은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작은 나뭇가지들이 부러지고 흙냄새가 훅 끼쳤다. 송태섭은 익숙하게 균형을 잡았다. 태섭은 사람의 위에 올라타 주먹을 휘둘러본 적이 있었다. 그는 싸움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싸움을 못한다곤 할 수 없었다.
태섭이 제압용으로 휘두른 주먹에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남자는 태섭이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싸움을 못하는 정대만보다도 실력이 형편없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는 필사적으로 태섭에게 팔을 휘둘렀다. 태섭은 망치로부터 몸을 방어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려 가드했다가, 재빨리 망치를 빼앗았다. 그다음에는 지지부진한 주먹질이 이어졌다. 송태섭은 남자를 진심으로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고 남자는 너무 약했다.
부조리한 이인극 같은 우스꽝스러운 싸움 속에서 태섭은 대만을 떠올렸다. 언젠가 태섭은 옥상 위에서 대만의 위에 올라타 주먹질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배신감을 느꼈고 과거와 미래에 아무런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시간 감각을 상실했다. 삶에는 앞도 뒤도 없고 전진도 후퇴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절망 속에는 대만의 헐떡대는 숨소리와 신음, 희미한 철 냄새(그것은 피 냄새 거나 혹은 눈이 내리기 직전의 공기 냄새였다)만이 존재했다.
기억 속에서 헐떡이는 대만의 얼굴이 공포와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뜨겁고 묵직한 대만의 육신이 느껴졌다. 정대만은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는데, 그게 주변이 너무 차갑고 고독해서인지 아니면 송태섭이 너무 흥분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송태섭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 그토록 배신감을 느낀 거였다. 건너온 다리가 불 타 사라진 것처럼 과거로는 갈 수 없었다. 미래로 갈 수 있는 방향도 상실했다. 그 순간에 태섭이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의 의지로 한껏 드러내 보이고 있는 정대만의 절망을 자신의 절망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히는 것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다. 그 순간에 태섭과 대만은 가장 격렬히 증오하는 완벽한 타인인 동시에 같은 시간 속에서 같은 고통을 느끼는 완전한 한몸이었다. 그들은 하나였다. 농구와는 다른 방식의 서늘한 결속이었다.
태섭은 정신을 차렸다.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겁에 질려 끽끽대는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고 얼굴을 구분할 수 있게 되자 주먹을 들어 올리던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한밤의 신사 속에서 못을 박던 남자는 남자아이에 가까웠다. 동갑내기처럼 보였지만 태섭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남자아이는 절망에 질려 있지도 않았고 화가 나 있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혼란스러워 보였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팔을 뒤로 꺾었다. 남자아이는 훌쩍이며 순순히 제압당했다.
“제발 저희 부모님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남자아이가 흐느끼며 말했다. 태섭은 꿈에서 억지로 깨어난 사람처럼 불쾌한 기분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나무에 박혀 있는 대만의 아디다스 수건을 챙겨 남자아이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이 일은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놨다. 한밤에 신사를 올라가 남의 물건에 못을 박고 저주를 거는 사람이라니. 범인이 옆학교 남자아이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정대만은 교무실에 조용히 불려 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전해 들었다. 남자아이는 대만과 같은 무석중학교를 나왔지만 대만보다 한 살 어렸고 농구부도 아니었다. 대만은 소년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기억나는 게 있는지 애써 보았지만 정말로 모르는 사람이었다.
미워서 그랬다고 남자아이는 진술했다. 들어보니 대만이 중학생 시절 오며 가며 가끔 들리는 야외 농구 코트에서 두어 번 정도 원오원 상대를 해준 아이라고 했다. 그는 대만이 자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해서 화가 나 보복한 것이라고 했다. 몇 번이고 경기장에서 신호를 보냈지만 완전히 무시당했다고 했다. 대만이 북산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농구부를 관둔 걸 알았을 땐 자신의 신호가 정말로 싫어서 도망친 거라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모욕을 갚아주고 싶어 결단을 내린 거라고 했다.
남자아이는 혼란스럽게 말을 번복하거나 덧붙였고 눈물을 흘리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소년에게 훈방 조치를 취했다. 용감하게 범인을 잡은 태섭에게 표창장을 내리거나, 학교에서 포상을 내리는 방안에 대해 얘기가 오갔지만 태섭은 더 이상의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강력히 거부했다. 애초에 어두컴컴한 밤에 신사를 올라간 일에 대해 무어라 둘러댄단 말인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소년을 때리며 대만을 생각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역시 소년과 대만을 일치시킬 수는 없었음을, 그래서 화가 나지 않았음을,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소년을 힘주어 때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비틀린 마음으로 소년이 락커룸 창가에 붙어 대만을 들여다본 것처럼 송태섭 역시 정대만이란 인간의 창문 앞을 서성거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의 특수함을 알아채고 궁금해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 자신에게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교무실에서 돌아온 대만이 장난스럽게 태섭을 툭 쳤다.
“들었다. 범인 잡은 거 너라며.”
“예, 뭐.”
대만이 신나서 히죽댔다.
“어떻게 알고 거길 다 올라갔대?”
“그냥요.”
그렇게 대답한 다음, 태섭은 덧붙였다.
“걔가 선배 물건들 제 락커에 쑤셔 박아놨더라고요.”
“뭐? 니 락커엔 왜?”
“모르죠 그야.”
태섭은 겸연쩍게 말했다.
“흙 묻어서 못 쓰겠던데 그래도 가져갈 거 있음 가져가요.”
대만은 송태섭의 락커에서 자신의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살펴보았다. 물건마다 못 박힌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니, 진짜네….”
대만은 조금 풀 죽은 투로 중얼거렸다.
“진짜 못을 박아놨네.”
“무시해요. 미신인데 뭐. 진짜 저주에 걸린 건 아니잖아요.”
태섭이 확인하듯 물었다.
“별일 없었죠?”
“별일이라….”
대만은 물건을 내려놓고 하품을 하다가 깨달은 듯 말했다.
“어쩐지 요즘 이상한 꿈을 꾸더라.”
그는 근래에 꾸던 꿈에 대해 들려주었다. 아주 기묘하고 기분 나쁜 꿈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 있어야 하는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앞도 뒤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선 과거도 미래도 의미가 없었다. 서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도 뒤도 없고 전진도 후퇴도 없었다. 시간은 그곳에서 의미를 잃었다. 꼭 절망의 한복판처럼. 허우적거려야만 하는 고난의 시간처럼. 다만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파열음이었는데 너무 아득한 소리라 정확히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게 못을 박는 소리였구나.”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대만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난 또. 농구공 튀기는 소린 줄 알았지.”
대만은 그게 악몽인 줄도 몰랐다고 했다.
내일 아침에는 수건을 돌려줘야겠다고 태섭은 생각했다.
그날 밤 태섭은 꿈을 꿨다. 그는 오도 가도 못하는 물속에 다리까지 잠겨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고 서쪽에서부터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게 보였다. 그래서 태섭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바다라는 사실을 알았다.
태섭을 두렵게 한 건 눈앞에 대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처럼 머리가 길게 길었지만 교복 차림이 아니라 하얀 티에 검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태섭은 그에게 주먹을 질러야 할지 아니면 무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를 증오해야 할지 그리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겐 두 가지 모습이 있었다. 극과 극의 시기가 한몸처럼 뒤엉켜 있었다.
그 순간 대만이 성큼성큼 다가와 태섭에게 고개를 숙였다. 송태섭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뜨거운 입술이 맞닿는 순간 파도소리와 바람소리가 멎고 시간이 멈추어 섰다. 대만의 몸은 놀랄 만큼 뜨겁고 절절 끓는 듯했다. 태섭의 뺨을 붙잡는 손가락이 달구어진 쇠처럼 강렬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열 손가락은 촉수처럼 더듬으며 태섭을 무장해제시켰다. 혀가 드나들면서 태섭의 호흡을 집어삼켰고 이빨은 서로 부딪칠 때마다 녹아내리듯 사라졌다가 이내 혓바닥을 가로막으며 오돌토돌한 존재감을 재건했다. 그는 태섭이 감추어 놓은 비밀을 목구멍에서부터 길어오르고 있었다. 꿈속의 그는 태섭이 수건을 왜 훔쳤는지 알고 있었다. 비밀을 공유하지 않고도 한몸이 되게 해주었다. 향수 냄새가 났다. 어느새 대만의 머리카락은 짧아지고 키는 훌쩍 자라 태섭의 얼굴을 잡아끌듯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이 아는 바로 그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속눈썹에 바닷물이 맺혀 있었다.
차라리 파도에 휩쓸린다면 길몽일 텐데. 그는 꿈속에서라도 죄책감에 대한 값을 치르고 싶었다. 그러나 대만은 마치 전봇대처럼 서서 파도를 막고 있었다. 태섭은 안전한 물살을 누리며 입맞춤을 받는 내내 혼란스럽게 손을 더듬거렸다. 그를 두들겨 패고 싶었다. 그를 껴안고 싶었다. 그를 밀어내고 싶었다. 그를 잡아당기고 싶었다. 자신의 말만 듣게 하고 싶었다. 영원히 자신의 말을 듣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게 그를 훔쳤다가 땅속에 깊게 파묻고 싶었다. 그러다 아무 일도 없던 척 사람들 틈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아니, 파묻고 싶은 건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내보일 수 있는 것 역시 송태섭 그 자신의 마음뿐이었다.
저주에 걸린 건 내가 아니라 대만 선배인데…. 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이런 꿈을 꾼 이상 아무렇지 않게 수건을 돌려줄 수가 없잖아. 간신히 무고해졌는데. 공범에서 벗어났는데. 그는 애초부터 수건을 돌려줄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조차 무시하던 욕망이 꿈속에 드러났으니 더는 무고할 수 없었다. 식은땀과 함께 태섭은 눈을 떴다.
아디다스 수건은 방 옷걸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태섭은 어둠이 눈에 익고 시간의 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자리에 누워 있었다. 마침내 축축한 아랫도리와 식은땀을 흘리는 육신의 촉감이 돌아오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수건을 챙겨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풀벌레가 맹렬하게 울고 있었다. 태섭은 아파트 뒤쪽으로 난 조그만 야외 코트 뒤쪽 공터로 들어가 손으로 구덩이를 팠다. 아디다스 수건에선 흙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이미 대만의 냄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부터 냄새 같은 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태섭은 구멍이 속에 수건을 던져넣은 다음 흙으로 덮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이 정말로 이런 짓을 할까. 아닐 거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그저 기원하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허풍일 것이다. 저주도 마찬가지다. 저주의 진짜 모습은 주먹 몇 번 휘둘렀다고 울음을 터뜨리며 부모님을 찾는 남자아이일 뿐이다. 그 녀석은 정말로 대만이 저주받기를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간절히 원했을 뿐이다. 자신의 소원이 절실해지기를, 그렇게 해서 이루어질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행위가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저주와 주술은 한몸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에서 태어나는 것들은 욕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도 사랑도 한몸처럼 뒤엉킨 공범이다. 괴담 또한 그렇게 태어나는 건지도 모른다. 여름마다 떠돌며 사람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결국 괴담처럼 떠도는 마음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태섭은 수건을 파묻었다. 사랑하고 싶고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흙속으로 떠밀리듯 묻혔다. 이제 그는 모든 사랑 이야기의 공범이자 괴담의 일부였다. 주문을 걸지 않았으니 여름 내내 그는 이 주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은 저주처럼 집요하게 그를 쫓아다닐 것이다. 태섭은 뒷걸음질치듯 공터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 2023.07.08 <하나의 몸>
2023.09.07 후일담
연습 경기 중에 골 넣고 흥분한 정대만이 태섭이를 포옹하는 듯한 세리머니를 함.
깜짝 놀란 송태섭... 대만이를 거칠게 밀쳐내고 라커룸으로 도망쳐 옴.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면... 섰음...
‘정대만한테 섰다’는 걸 자각하는 순간 화장실 가서 구토하는 태섭이...
괴로워하며 잠 못 이루다가 결국 벌떡 일어나 야외 코트장 뒤편으로 감.
땅을 마구 파헤침. 근데 수건이 없다.
수건이 사라졌다.
영원한 저주 에이엔니 노로이... 짝사랑의 주박은 그야말로 저주... (그런데 이 부분이 진짜 에로하고 모에하다고 생각하면서 썼음. 난 호러는 코믹 혹은 에로와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