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아름다운 人生»
그가 이런 자리에 지각을 하는 건 인생에서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부 모여 있었다. 태섭은 신발을 벗으며 빠르게 주변을 훑고는, 자신이 꼴찌라는 걸 알고 민망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차가 밀려서….”
“됐으니까 빨랑 앉어.”
강백호가 자기 옆자리를 팡팡 쳤다. 긴 테이블의 정중앙 자리였다. 평소 같으면 구시렁거렸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날이 아니었다. 태섭이 중앙으로 이동하는 동안 준호가 걸리적거리는 가방들을 재빠르게 안쪽으로 치워주었다.
“자, 주인공이 왔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치수가 입을 열자 금방 분위기가 묵직해졌다. 농구부 전원이 잔을 치켜들었고, 막 자리에 앉은 태섭도 허겁지겁 잔을 들어 올렸다.
“생일 축하한다, 송태섭!”
쨍, 하고 일제히 잔이 부딪쳤다.
귀국한 지는 막 사흘 째 된 참이었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태섭은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하부리그에서 뛸 기회를 얻었고, 거기서 운 좋게 정규 리그에 출전해 좋은 평가를 따냈다. 출전 시간은 단 삼 분에 불과했지만 충분했다. 그는 거기서 게임을 만들어 내는 포인트 가드로서의 역량을 적절히 발휘해 냈다.
내년 전망이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 할 수 있었다. 동창회를 빌미로 북산고교 농구부가 태섭을 불러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귀국 소식을 들은 소연이 재빠르게 전화를 돌렸고, 그의 생일 전날인 7월 30일, 이 자리가 만들어졌다. 함께 귀국한 태웅과 백호도 기꺼이 참석했다. (사실상 태웅은 원래도 참석하게 되었을 자리를 강백호의 등쌀에 떠밀려 오게 된 것처럼 앉아 있었는데 말은 안 해도 그것이 아주 조금 억울해 보였다.)
치수가 먼저 세 후배들의 NBA 진출을 축하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조금 감정이 북받친 투로 생일을 맞이한 태섭을 격려한 다음, 황급히 축사를 마무리하고 술을 들이켰다.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다음 사람에게 순서가 넘어갔고, 달재는 태섭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쑥스럽게 선물 박스를 건넸다.
“야, 뭘 이런 걸.”
태섭이 손사래를 치자 달재가 씩 웃으며 박스를 품에 안겼다.
“별거 아냐. 생일 축하해, 태섭아.”
결국 태섭은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돌아가며 축사를 주고받는 동안 분위기가 무르익고 안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축사를 건넨 것은 이한나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태섭은 잠시 철렁했다. 고교 시절 그는 그녀를 열렬히 쫓아다니며 구애한 전적이 있었고, 고등학교 3학년 중반에는 미묘한 기류도 있었지만 끝끝내 사귀지는 못했다.
한나가 답지 않게 조곤조곤한 투로 말했다.
“네가 해낼 거란 거 알고 있었어. 북산고등학교 넘버원 가드니까.”
넘버원 가드. 그것은 듣기에 평범한 별명이었지만 실은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일종의 비밀 신호였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진 듯했고, 태섭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채널에 나올 때마다 챙겨보고 있어.”
“그, 그렇게까지?”
“그럼.”
그런 다음 한나는 잔을 들어 올리며 윙크를 날렸다.
“송태섭, 고생했다!”
“고생했다!”
백호와 소연, 준호가 재빠르게 합창해 주었다. 한나의 우렁차고 쾌활한 구호는 방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맴돌던 희미한 기류를 일순 깨끗이 날려 버렸다. 준호가 하하 웃으며 말을 꺼냈다.
“결혼 준비는 잘돼가니?”
‘결혼?’
한나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대부분은 그이가 해주고 있지만, 역시 귀찮은 일이 많네요.”
태섭이 어안이 벙벙한 투로 되물었다.
“한나, 결혼해?”
“어머, 송태섭, 소식이 늦네. 올해 10월이야. 아직 청첩장은 안 나왔어.”
“아, 그래….”
갑자기 마음이 푸쉬쉬 식는 것 같았다. 때마침 비싼 안주가 나왔다.
“자, 마음껏들 먹어라.”
치수가 말했고,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맛있어요!” “맛있다.” “역시 비싼 게 최고구만.”
분위기를 띄우고자 다들 한마디씩 거들며 히죽거렸다. 하지만 안주는 정말로 맛있었다. 얼마 안 가 사람들은 옆 사람이나 맞은편 사람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본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런두런한 분위기는 태섭이 술자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지만, 아까의 일 때문인지 그는 조금 얼이 빠져있었다.
뭐랄까. 이제 와서 ‘줄곧 좋아하고 있었습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슴이 철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낮은 목소리로 대만이 말을 걸었다.
“주인공이 늦어서야 되겠냐?”
그는 내내 태섭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는데, 축사를 건네던 때를 제외하면 여태껏 말 한 번 걸지 않고 앉아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은근한 시비조로 말을 건 것이다.
“차가 막혔다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퇴근길인데 서두르지 그랬어.”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쿡쿡 쑤시는 말투였다.
하지만 반응하는 대신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웬 시비예요.”
“안 오는 줄 알았거든.”
“아, 그러셔.”
“저번엔 온대 놓고 안 왔잖아.”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어색해졌다. 태섭은 대만에게 무언가를 물어봐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일 것이다. ‘혹시 기다렸어요?’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태섭은 놀랐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벌써 2년 전도 전의 일이었다. 태섭이 유학을 떠나기 전, 대만이 막 벤치를 벗어나 대학 농구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무렵에는 단둘이 자주 여기저기 쏘다녔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확한 장르를 알지도 못하면서 포스터만 보고 무작정 표를 예매해 영화관에 가곤 했었다. 극장을 나선 다음에는 가츠동이 명물이라는 돈가스집에 앉아 평점을 매기고, 각자 이해한 영화의 내용을 복기해서 비교해 보는 것이 일종의 놀이처럼 합의돼 있었다.
이제는 어떤 영화를 봤는지조차 희미해져 버렸지만 대만과 마주 보고 앉아 서로를 트집 잡아가며 떠들던 일이 무지막지하게 재미있었던 것만큼은 기억난다. 그 무렵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한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태섭은 끝끝내 모르는 척했고, 그건 대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2년도 지난 지금, 대만이 그러한 분위기를 염두에 두는 듯한 말을 넌지시 건네 온 것이었다. 그는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있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애써 모르는 척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태도는 비겁하기보다 무상한 세월 속에서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상대에게 예의를 다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심란하기보다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일이 갑자기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잘 지냈냐?”
“그냥 그래요.”
안주를 집어 먹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형은요?”
“나? 글쎄….”
말끝을 흐리던 대만이 대답했다.
“나도 그냥저냥이다.”
“실업 농구는 회사도 다녀야 한다면서요?”
“뭐, 그렇지. 썩 즐겁진 않다.”
“흐음.”
“그래도 농구는 재밌지.”
대만이 덧붙였다.
“그건 당연하죠.”
“당연한가.”
“그렇죠.”
애매하게 붕 뜬 대화가 계속되었다. 어색한 분위기는 준호가 중간에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말을 걸 때까지 이어졌다. 대만의 주의가 건너편으로 넘어가자 태섭은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한나가 말을 건 것도 그때였다. 그녀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물었다.
“어때, 송태섭. 너 10월에 귀국할 수 있겠어?”
결혼식 이야기라는 걸 깨닫자마자 태섭은 내심 당황했지만, 표정은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재빠르게 심드렁함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허어’하고 고민하는 듯한 숨소리를 뱉으며 눈을 굴렸다.
“시간 내볼게.”
“그럼 청첩장 보낸다?”
한나가 쾌활하게 말했고, 태섭은 떠보듯 물었다.
“주소는 알고?”
“당연히 네가 말해줘야지.”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태섭은 갑자기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그렇지….”
민망함을 감추려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한나는 그의 지난 경기 얘기를 꺼냈다. 내내 하부 리그에서 뛰던 태섭은 지난 1월 딱 한 번, 갑작스럽게 발생한 팀 공석 때문에 정규 리그에 선 적이 있었다. 농구 좀 안다는 일본인치고 그 기적 같은 30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한나는 그가 치른 경기를 스포츠 잡지로 접했다. 일본도 이제는 소식이 제법 빠르다고 했다. 잡지에는 그가 어떻게 상대편 수비를 따돌렸는지, 그렇게 해서 성취해 낸 2점이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나는 TV로 봤어. 저녁 예능에서 잠깐 다뤄줬거든.”
달재가 끼어들었다.
“웬 예능 프로그램?”
태섭이 어리둥절 되물었다.
“그러게.”
달재가 민망하게 웃자 한나가 맞장구를 쳤다.
“그거 「고잉 고잉 홈」 얘기지? 나도 들었어.”
“뭐야, 송태섭 TV 출연하는 거야?”
얼핏 들린 이야기를 캐치한 강백호가 끼어들었다. 곁에 있던 치수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TV에 출연한다고?”
일순 테이블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아니에요!”
다들 잘 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치수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앞두고 있었고, 준호는 이번 주말에 가까운 동료를 따라 직장인 농구 동호회에서 열리는 약식 경기에 참석하기로 돼 있었다. 정식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그런 식으로 농구를 보러 다닌다고 했다. 달재는 가업으로 물려받은 가게를 조만간 확장할 계획이라고 했다. 놀러 오면 언제든 서비스를 주겠다면서 특유의 미소로 후후하고 웃었다.
한나는 순조롭게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태섭과 함께 미국에 줄곧 체류 중이던 태웅과 백호는 무사히 드래프트를 마치고 계약을 조율하는 과정에 있었다. 한편 정대만도 올해 리그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다음 해에는 더 괜찮은 조건을 기대해 봐도 좋을 거라고 말하는 얼굴이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갑자기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찬물을 들이켜는데 뒤쪽에 앉아 있던 병욱과 준호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안 가 불이 꺼지더니 주변이 깜깜해졌다. 아무도 당황하지 않았으므로 태섭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치챘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촛불 꽂힌 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한다, 송태섭!”
모두가 행복하게 외쳤다.
태섭은 자기 앞에 놓인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둥그런 케이크 위에는 큼지막하게 ‘HAPPY BIRTHDAY’라 쓰여 있었고 구석에는 조그맣게 농구공을 튀기는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 그 남자는 분명 자신의 실루엣일 것이었다.
“태섭 선배, NBA 진출 축하드려요!”
소연이 즐겁게 말했다.
태섭은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 못 할 감정이 들었다.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실은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중대한 비밀까지는 아니었지만, 나쁜 소식도 아니었지만, 이 분위기를 깨버릴 만큼의 폭탄 발언 역시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역시 말하지 말자. 그는 여태껏 그래왔듯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고마워요.”
약간의 뜸을 들인 후 태섭이 능청을 떨었다.
“이것 참. 빨리 활약해야겠는데.”
“그래, 이참에 사인 연습도 좀 해놓고.”
대만이 거들었다.
다들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고, 태섭도 비로소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그는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손이 차가워진 게 느껴졌지만 얼마 안 가 침착해졌다. 불 꺼진 방은 거대한 주머니처럼 그의 초조함을 통째로 감추어 주었다.
이렇게 살아온 그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후욱 하고 촛불을 불었다.
마음속 비밀이 연기와 함께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동안 수많은 손이 어둠 속에서 끝없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몇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북적북적했던 자리도 어느덧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러, 다들 슬슬 정리하는 분위기였다. 술에 적당히 취한 이들은 내일의 일정을 염두하며 하나둘 일어났고 몇몇은 자신을 데리러 와줄 지인을 기다리며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너무 마신 탓에 태섭도 꽤 취해 있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 달재나 준호였을 누군가가 그의 휴대전화로 운전 대행을 불러주었다.
송태섭은 뒷정리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들을 제외하고 그 자리에서 가장 늦게 일어난 사람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나와 보니 가게는 아직도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단체석이 마주 보고 서 있는 긴 복도를 지나자 고급스러운 매트가 깔린 현관이 나타났다. 그 앞에 한나가 서 있었다.
한나는 막 담배를 태우다 들어온 눈치였다. 가까이 다가서자 박하 향 비슷한 매캐한 냄새가 났다. 한나는 자신이 무엇을 하다 돌아왔는지 태섭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알아차린 듯, 조금 멋쩍게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한나의 예전 미소를, 그러니까 태섭이 그녀와 의미 있는 감정을 주고받던 나날을 상기시켜 주는, 이한나라는 사람의 약한 부분이 깃든 미소를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태섭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입을 연 것도 그러한 확신 때문이었다.
“있잖아….”
하지만 술김에 만들 수 있는 문장은 그게 끝이었다. 그런데도 한나는 한동안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 역시 태섭이 말을 관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기운 빠진 얼굴로 훗하고 웃었다.
“태섭아. 그때 만들었던 주문 기억 나?”
기억나다마다. 고교 선수 시절, 수세에 몰릴 때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가슴 떨려 했는지 이한나는 평생 모를 것이다. 지금도 아주 가끔이지만 손바닥을 내려다볼 때면 그때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알지. 넘버원 가드잖아.”
태섭은 아까 한나가 꺼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고, 한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넘버원 가드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잘 할 거야. 다들 그렇게 말해. 네가 앞으로도 잘 해낼 거 알아.”
한 치의 거짓이라고는 없는, 진심 어린 응원이었다.
순간 태섭은 그렇지 않다고 거칠게 항의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신의 마음속에 감추어 놓았던 불안감을 넌지시 털어놓고, 실은 그렇지만도 않다고, 자신의 상황은 네 생각보다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두 사람이 아직 같은 학교에 다니고 농구부에서 활동하고 있을 시절이었다면 그 막연한 불안감에 관하여 조금은 털어놓았을 것이다. 언젠가 산왕전을 앞두고 달리던 산책길에서 그녀와 느닷없이 마주쳤을 때처럼, 한밤중에 나누었던 그 마법 같은 대화처럼….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은 어른이었고, 태섭은 적절한 때라는 게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응. 고마워.”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고마워, 한나.”
그는 다시 한번 힘주어 중얼거렸다.
“결혼 축하해. 식은 꼭 갈게.”
이건 진심이었다.
그는 정리를 돕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는 한나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깥은 온통 습하고 무더웠다. 그렇게 취한 것 같지 않았는데 막상 걷기 시작하니 몸이 나른하고 머리가 팽팽 도는 것이 느껴졌다. 태섭은 살짝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가게 뒤편에 마련된 주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주택가 인근이라 가로등 근처를 제외하면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주차장 입구에 도착한 태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달재인지 준호인지가 불러준 운전 대행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자판기에서 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맞은편 가로등 앞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어렴풋하게 통화 내용이 들려왔다.
그는 아마도 애인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상대방이 매섭게 쏘아붙이는 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태섭이 서 있는 곳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반면 전화를 받는 쪽은 이따금 작은 목소리로 “알지.” “응.” “아는데.” “내가 전에 말했잖아.” 정도로만 대꾸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전화 중인 남자가 다름 아닌 정대만이었던 것이다.
대만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아까의 활기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반쯤 어둠에 잠긴 얼굴을 문질러가며 전화를 받는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없이 지쳐 있었고 지루해 보였다. 그렇게 남루해 보이는 모습이라니. 잠시 후 대만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애인이 있었어?’
태섭은,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조금 배신감을 느꼈고, 그러한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여자친구예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어, 뭐.”
대만은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왜요?”
“그냥.”
대만이 얼버무렸다.
“너한테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
“…….”
“넌 왜 그러고 있냐.”
“대행 불렀거든요.”
“아, 그러냐.”
한동안 두 사람은 애매한 거리를 두고 대치하듯 서 있었다. 그러다 대만이 먼저 움직였다. 태섭이 엉거주춤 옆으로 비켜서서 나란히 기대어 설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대만은 그 옆에 붙어서는 대신, 오른편에 설치된 자판기에 동전을 넣기 시작했고, 태섭은 혀를 깨물고 싶은 동시에 그의 뒤통수를 쥐어박고 싶어졌다.
“포카리?”
“에이드로 사 주세요.”
태섭이 툴툴거렸다.
대만은 음료수 버튼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아까 그 말은 거짓말이다.”
“뭐가요?”
“농구가 재미있다는 거.”
삑, 버튼을 누르자 자판기 안에서 음료수 캔이 우당탕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재미있을 때도 있어.”
태섭은 대답 대신 눈썹을 치켜올렸는데, 무슨 대답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대만이 비틀비틀 자판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음료수를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스스로도 정리가 되지 않은 것처럼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러니까 말이다,”하고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농구를 관두고 싶냐면 그건 절대 아니지만, 거기에 생활이 달렸다고 생각하니 버거울 때가 있단 거지. 뭐랄까, 복잡해지잖아. 이것저것.”
“…뭐예요, 갑자기?”
“알아듣고 있는 거냐?”
“반… 정도?”
사실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이게 위로해 줘도.”
대만이 툴툴거렸다.
“위로였어요?”
“그래.”
대만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 아까 내내 죽상으로 앉아 있었잖아.”
심장이 철렁했다.
“그런 적 없어요.”
태섭이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아니기는. 미국 얘기 나올 때마다 풀 죽었잖아.”
대만이 말했다.
“그래서 말해주는 거야.”
그러더니 대만은 느닷없이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조금씩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치수의 새 직장은 텃세가 심하기로 유명해 주변에서 많이들 걱정한다는 것, 준호가 짜증 나는 사수의 뒤처리를 하느라 매번 야근을 한다는 것, 달재의 가게에 크게 외상을 달아둔 업체 하나가 부도가 났다는 것 따위의, 여태 일본에 없었던 태섭으로서는 전혀 모르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런가 하면 정대만은 개인 성적만 좋았을 뿐 팀 자체는 성과가 부진해 올해 결국 준우승조차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 해 동안 애쓴 결과 고작 혼자만 빛나는 선수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다들 그래. 나도 보기보다 순조롭진 않아.”
그가 넌지시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초조해하지 말라고.”
어느새 태섭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대만은 정확히 보았다. 잘 감추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분명 그럴 테지만, 오늘 태섭은 내내 죽상이었다.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축하받기 껄끄러운 마음이 분명 한 구석에는 있었다. 사실은 내내 불안했다.
보이는 것만큼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미래는 기대 받는 것보다 훨씬 불투명했다. 기적처럼 팀의 공석을 꿰차고 정규 리그에 발을 디디게 됐을 때까지만 해도 꿈을 꾸는 듯했지만, 시즌이 끝나자 녹록지 않은 현실이 닥쳐왔다.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허송세월처럼 몇 달이 흘렀고 내년 드래프트는 여전히 안갯속에 싸여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그리는 미래에는 그들 자신이 꾸려나갈 건설적이고 윤택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질반질하게 느껴지는 그 삶이란 것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정당한 성취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절대 법칙처럼 느껴지는 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그러한 삶, 그러한 보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송태섭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러한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직접 말로써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오늘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은연중에 태섭의 미래를 점치고 있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NBA에 입성하게 될 것이고 오키나와 출신의 단신 포인트 가드로서 더 넓은 무대에서 새로운 활약을 선보이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다. 잘살고 있는 모두에게. 너무도 잘살고 있는 모두에게. 유감이지만 자신은 어쩌면 결국 NBA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부 리그에서도 얼마나 더 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미국은 그를 영원히 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었으므로 아직은 호승심이 남아 있었지만, 그게 언제까지일까.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만이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가 횡설수설 들려준 주변 사람들의 근황 이야기는 오늘 내내 태섭을 쫓아다녔던 초조함의 근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까지 잘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기가 뭐 그렇게 잘 나가는 것도 아니란 이야기를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꺼낼 수 있는 걸까.
손안의 휴대폰이 부웅하고 울렸다. 아마 운전 대행으로부터의 착신 메일일 것이다.
태섭은 어둠에 싸인 골목을 바라보았다. 이 근방은 졸업한 이래 몇 번이나 와본 곳으로, 따로 지도를 보지 않고도 손쉽게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막연하고 낯선 곳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골목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만 보였다. 한순간이지만 태섭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이 공포를 느낀다는 그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마침내 자신의 상처를 빌미로 빚어 온 지난한 삶의 버릇이 가까스로 무릎을 꿇는 게 느껴졌다.
“전혀 모르겠어요.”
그가 불퉁하게 말했다.
“뭐. 그런 게 인생 아니겠냐.”
대만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뭘?’
때맞추어 대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본 다음, 전화를 수신 거부해 버렸다.
“난 내일 제나랑 헤어질 거거든.”
익살스럽게 말한 다음, 가볍게 물었다.
“넌 뭘 할 거냐?”
태섭은 잠시 고민했다.
“그 집에서 가츠동 배 터지게 먹을래요.”
“그 집?”
곧이어 대만이 알아들었다.
“오, 그거 좋지.”
누구도 대놓고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만은 주말에는 시간이 빈다는 식으로 에둘러 대답했고,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후 승용차 한 대가 두 사람 앞에 멈추어 섰다. 짙게 선탠한 창이 내려가더니 립을 붉게 칠한, 날카롭고 예민한 인상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매부리였는데도 이목구비가 조화로웠고 상당히 미녀였다. 그녀가 바로 제나라는 것을 태섭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제나는 대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휙 고개를 돌리고는 앞을 노려보았다.
“참, 생일 축하한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제나를 쳐다보는 채로 대만이 말했다.
음료수 캔이 휙 태섭 쪽으로 날아왔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가 인사했고,
“네, 그럼.”
태섭이 고개를 숙였다.
제나의 차가 붕 떠나고, 남은 자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태섭은 음료수 캔을 내려다보았다. 대만이 내내 쥐고 있던 탓에 살짝 우그러졌고 미지근한 부분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몇 분 뒤 태섭의 대행 기사가 도착했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안내받은 차에 탑승한 다음, 태섭에게 안전벨트를 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보다 더 예의 바를 수가 없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침내 서서히 풍경이 바뀌었다. 사방으로 꽉 막힌 주차장과 어둠에 싸인 골목이 순식간에 뒤편으로 사라졌다. 등받이에 기댄 채 태섭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뒤늦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차가 터널 속을 쏜살같이 가로지르는 동안 캄캄해진 창문에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비추어 보였다.
어찌 됐든 결국 무엇이라도 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실패가 두려웠다. 전력을 다했는데 아무것도 성취해 내지 못하고 돌아오게 될까 봐,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들에 배반당할까 봐, 상처를 받을까 봐, 그래서 결국 외로움을 느끼게 될까 봐. 하지만 어쩌면 모두가 그렇게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는 채치수나 권준호를, 이달재나 이한나를, 그리고 정대만을 생각했다. 그들의 삶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장면에 대해 떠올려 보았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들이 별로 실패나 성공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결국 잘 해나갈 것이다. 비로소 태섭은 자신의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박수치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들은 사정을 들었더라도 개의치 않아 했을 것이다. 태섭이 결국 계약을 따내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을 실패라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해나갈 거라는 말은 그의 커리어에 달린 문제보다도 훨씬 앞에 놓인 것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 그 불투명한 굴곡을 따라 이어질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주문일 것이다. 태섭뿐 아니라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응원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이제 태섭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당장 주말에 대만과 그 집에 가서 가츠동을 먹어야 한다. 10월에는 한나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번에는 태섭 쪽에서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너라면 잘 해나갈 것이라고. 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보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터널이 끝나고 환한 간판들과 가로등 불빛이 그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 2024.07.24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부 모여 있었다. 태섭은 신발을 벗으며 빠르게 주변을 훑고는, 자신이 꼴찌라는 걸 알고 민망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차가 밀려서….”
“됐으니까 빨랑 앉어.”
강백호가 자기 옆자리를 팡팡 쳤다. 긴 테이블의 정중앙 자리였다. 평소 같으면 구시렁거렸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날이 아니었다. 태섭이 중앙으로 이동하는 동안 준호가 걸리적거리는 가방들을 재빠르게 안쪽으로 치워주었다.
“자, 주인공이 왔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치수가 입을 열자 금방 분위기가 묵직해졌다. 농구부 전원이 잔을 치켜들었고, 막 자리에 앉은 태섭도 허겁지겁 잔을 들어 올렸다.
“생일 축하한다, 송태섭!”
쨍, 하고 일제히 잔이 부딪쳤다.
귀국한 지는 막 사흘 째 된 참이었다. 올해 대학을 졸업한 태섭은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하부리그에서 뛸 기회를 얻었고, 거기서 운 좋게 정규 리그에 출전해 좋은 평가를 따냈다. 출전 시간은 단 삼 분에 불과했지만 충분했다. 그는 거기서 게임을 만들어 내는 포인트 가드로서의 역량을 적절히 발휘해 냈다.
내년 전망이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 할 수 있었다. 동창회를 빌미로 북산고교 농구부가 태섭을 불러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귀국 소식을 들은 소연이 재빠르게 전화를 돌렸고, 그의 생일 전날인 7월 30일, 이 자리가 만들어졌다. 함께 귀국한 태웅과 백호도 기꺼이 참석했다. (사실상 태웅은 원래도 참석하게 되었을 자리를 강백호의 등쌀에 떠밀려 오게 된 것처럼 앉아 있었는데 말은 안 해도 그것이 아주 조금 억울해 보였다.)
치수가 먼저 세 후배들의 NBA 진출을 축하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는 조금 감정이 북받친 투로 생일을 맞이한 태섭을 격려한 다음, 황급히 축사를 마무리하고 술을 들이켰다.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다음 사람에게 순서가 넘어갔고, 달재는 태섭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쑥스럽게 선물 박스를 건넸다.
“야, 뭘 이런 걸.”
태섭이 손사래를 치자 달재가 씩 웃으며 박스를 품에 안겼다.
“별거 아냐. 생일 축하해, 태섭아.”
결국 태섭은 애정 어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돌아가며 축사를 주고받는 동안 분위기가 무르익고 안주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축사를 건넨 것은 이한나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태섭은 잠시 철렁했다. 고교 시절 그는 그녀를 열렬히 쫓아다니며 구애한 전적이 있었고, 고등학교 3학년 중반에는 미묘한 기류도 있었지만 끝끝내 사귀지는 못했다.
한나가 답지 않게 조곤조곤한 투로 말했다.
“네가 해낼 거란 거 알고 있었어. 북산고등학교 넘버원 가드니까.”
넘버원 가드. 그것은 듣기에 평범한 별명이었지만 실은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일종의 비밀 신호였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진 듯했고, 태섭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채널에 나올 때마다 챙겨보고 있어.”
“그, 그렇게까지?”
“그럼.”
그런 다음 한나는 잔을 들어 올리며 윙크를 날렸다.
“송태섭, 고생했다!”
“고생했다!”
백호와 소연, 준호가 재빠르게 합창해 주었다. 한나의 우렁차고 쾌활한 구호는 방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맴돌던 희미한 기류를 일순 깨끗이 날려 버렸다. 준호가 하하 웃으며 말을 꺼냈다.
“결혼 준비는 잘돼가니?”
‘결혼?’
한나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대부분은 그이가 해주고 있지만, 역시 귀찮은 일이 많네요.”
태섭이 어안이 벙벙한 투로 되물었다.
“한나, 결혼해?”
“어머, 송태섭, 소식이 늦네. 올해 10월이야. 아직 청첩장은 안 나왔어.”
“아, 그래….”
갑자기 마음이 푸쉬쉬 식는 것 같았다. 때마침 비싼 안주가 나왔다.
“자, 마음껏들 먹어라.”
치수가 말했고,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맛있어요!” “맛있다.” “역시 비싼 게 최고구만.”
분위기를 띄우고자 다들 한마디씩 거들며 히죽거렸다. 하지만 안주는 정말로 맛있었다. 얼마 안 가 사람들은 옆 사람이나 맞은편 사람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본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런두런한 분위기는 태섭이 술자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지만, 아까의 일 때문인지 그는 조금 얼이 빠져있었다.
뭐랄까. 이제 와서 ‘줄곧 좋아하고 있었습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가슴이 철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였다. 낮은 목소리로 대만이 말을 걸었다.
“주인공이 늦어서야 되겠냐?”
그는 내내 태섭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는데, 축사를 건네던 때를 제외하면 여태껏 말 한 번 걸지 않고 앉아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은근한 시비조로 말을 건 것이다.
“차가 막혔다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퇴근길인데 서두르지 그랬어.”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쿡쿡 쑤시는 말투였다.
하지만 반응하는 대신 묵묵히 술잔을 기울였다.
“웬 시비예요.”
“안 오는 줄 알았거든.”
“아, 그러셔.”
“저번엔 온대 놓고 안 왔잖아.”
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갑자기 어색해졌다. 태섭은 대만에게 무언가를 물어봐야 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일 것이다. ‘혹시 기다렸어요?’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태섭은 놀랐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벌써 2년 전도 전의 일이었다. 태섭이 유학을 떠나기 전, 대만이 막 벤치를 벗어나 대학 농구 선수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 무렵에는 단둘이 자주 여기저기 쏘다녔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확한 장르를 알지도 못하면서 포스터만 보고 무작정 표를 예매해 영화관에 가곤 했었다. 극장을 나선 다음에는 가츠동이 명물이라는 돈가스집에 앉아 평점을 매기고, 각자 이해한 영화의 내용을 복기해서 비교해 보는 것이 일종의 놀이처럼 합의돼 있었다.
이제는 어떤 영화를 봤는지조차 희미해져 버렸지만 대만과 마주 보고 앉아 서로를 트집 잡아가며 떠들던 일이 무지막지하게 재미있었던 것만큼은 기억난다. 그 무렵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한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태섭은 끝끝내 모르는 척했고, 그건 대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2년도 지난 지금, 대만이 그러한 분위기를 염두에 두는 듯한 말을 넌지시 건네 온 것이었다. 그는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두 사람 사이에 있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애써 모르는 척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태도는 비겁하기보다 무상한 세월 속에서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상대에게 예의를 다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심란하기보다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일이 갑자기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잘 지냈냐?”
“그냥 그래요.”
안주를 집어 먹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형은요?”
“나? 글쎄….”
말끝을 흐리던 대만이 대답했다.
“나도 그냥저냥이다.”
“실업 농구는 회사도 다녀야 한다면서요?”
“뭐, 그렇지. 썩 즐겁진 않다.”
“흐음.”
“그래도 농구는 재밌지.”
대만이 덧붙였다.
“그건 당연하죠.”
“당연한가.”
“그렇죠.”
애매하게 붕 뜬 대화가 계속되었다. 어색한 분위기는 준호가 중간에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말을 걸 때까지 이어졌다. 대만의 주의가 건너편으로 넘어가자 태섭은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은 한나가 말을 건 것도 그때였다. 그녀가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물었다.
“어때, 송태섭. 너 10월에 귀국할 수 있겠어?”
결혼식 이야기라는 걸 깨닫자마자 태섭은 내심 당황했지만, 표정은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재빠르게 심드렁함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허어’하고 고민하는 듯한 숨소리를 뱉으며 눈을 굴렸다.
“시간 내볼게.”
“그럼 청첩장 보낸다?”
한나가 쾌활하게 말했고, 태섭은 떠보듯 물었다.
“주소는 알고?”
“당연히 네가 말해줘야지.”
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태섭은 갑자기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그렇지….”
민망함을 감추려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한나는 그의 지난 경기 얘기를 꺼냈다. 내내 하부 리그에서 뛰던 태섭은 지난 1월 딱 한 번, 갑작스럽게 발생한 팀 공석 때문에 정규 리그에 선 적이 있었다. 농구 좀 안다는 일본인치고 그 기적 같은 30초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한나는 그가 치른 경기를 스포츠 잡지로 접했다. 일본도 이제는 소식이 제법 빠르다고 했다. 잡지에는 그가 어떻게 상대편 수비를 따돌렸는지, 그렇게 해서 성취해 낸 2점이 어떤 인상을 남겼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나는 TV로 봤어. 저녁 예능에서 잠깐 다뤄줬거든.”
달재가 끼어들었다.
“웬 예능 프로그램?”
태섭이 어리둥절 되물었다.
“그러게.”
달재가 민망하게 웃자 한나가 맞장구를 쳤다.
“그거 「고잉 고잉 홈」 얘기지? 나도 들었어.”
“뭐야, 송태섭 TV 출연하는 거야?”
얼핏 들린 이야기를 캐치한 강백호가 끼어들었다. 곁에 있던 치수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TV에 출연한다고?”
일순 테이블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아니에요!”
다들 잘 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치수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앞두고 있었고, 준호는 이번 주말에 가까운 동료를 따라 직장인 농구 동호회에서 열리는 약식 경기에 참석하기로 돼 있었다. 정식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그런 식으로 농구를 보러 다닌다고 했다. 달재는 가업으로 물려받은 가게를 조만간 확장할 계획이라고 했다. 놀러 오면 언제든 서비스를 주겠다면서 특유의 미소로 후후하고 웃었다.
한나는 순조롭게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태섭과 함께 미국에 줄곧 체류 중이던 태웅과 백호는 무사히 드래프트를 마치고 계약을 조율하는 과정에 있었다. 한편 정대만도 올해 리그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다음 해에는 더 괜찮은 조건을 기대해 봐도 좋을 거라고 말하는 얼굴이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갑자기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찬물을 들이켜는데 뒤쪽에 앉아 있던 병욱과 준호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 안 가 불이 꺼지더니 주변이 깜깜해졌다. 아무도 당황하지 않았으므로 태섭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치챘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촛불 꽂힌 케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한다, 송태섭!”
모두가 행복하게 외쳤다.
태섭은 자기 앞에 놓인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둥그런 케이크 위에는 큼지막하게 ‘HAPPY BIRTHDAY’라 쓰여 있었고 구석에는 조그맣게 농구공을 튀기는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역동적인 자세를 취한 그 남자는 분명 자신의 실루엣일 것이었다.
“태섭 선배, NBA 진출 축하드려요!”
소연이 즐겁게 말했다.
태섭은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 못 할 감정이 들었다. 고마운 마음과 동시에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실은 모두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중대한 비밀까지는 아니었지만, 나쁜 소식도 아니었지만, 이 분위기를 깨버릴 만큼의 폭탄 발언 역시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역시 말하지 말자. 그는 여태껏 그래왔듯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고마워요.”
약간의 뜸을 들인 후 태섭이 능청을 떨었다.
“이것 참. 빨리 활약해야겠는데.”
“그래, 이참에 사인 연습도 좀 해놓고.”
대만이 거들었다.
다들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고, 태섭도 비로소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그는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손이 차가워진 게 느껴졌지만 얼마 안 가 침착해졌다. 불 꺼진 방은 거대한 주머니처럼 그의 초조함을 통째로 감추어 주었다.
이렇게 살아온 그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후욱 하고 촛불을 불었다.
마음속 비밀이 연기와 함께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동안 수많은 손이 어둠 속에서 끝없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몇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북적북적했던 자리도 어느덧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러, 다들 슬슬 정리하는 분위기였다. 술에 적당히 취한 이들은 내일의 일정을 염두하며 하나둘 일어났고 몇몇은 자신을 데리러 와줄 지인을 기다리며 밖으로 나갔다. 생각보다 너무 마신 탓에 태섭도 꽤 취해 있었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 달재나 준호였을 누군가가 그의 휴대전화로 운전 대행을 불러주었다.
송태섭은 뒷정리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들을 제외하고 그 자리에서 가장 늦게 일어난 사람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나와 보니 가게는 아직도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단체석이 마주 보고 서 있는 긴 복도를 지나자 고급스러운 매트가 깔린 현관이 나타났다. 그 앞에 한나가 서 있었다.
한나는 막 담배를 태우다 들어온 눈치였다. 가까이 다가서자 박하 향 비슷한 매캐한 냄새가 났다. 한나는 자신이 무엇을 하다 돌아왔는지 태섭이 눈치챘다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알아차린 듯, 조금 멋쩍게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한나의 예전 미소를, 그러니까 태섭이 그녀와 의미 있는 감정을 주고받던 나날을 상기시켜 주는, 이한나라는 사람의 약한 부분이 깃든 미소를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태섭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입을 연 것도 그러한 확신 때문이었다.
“있잖아….”
하지만 술김에 만들 수 있는 문장은 그게 끝이었다. 그런데도 한나는 한동안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 역시 태섭이 말을 관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기운 빠진 얼굴로 훗하고 웃었다.
“태섭아. 그때 만들었던 주문 기억 나?”
기억나다마다. 고교 선수 시절, 수세에 몰릴 때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가슴 떨려 했는지 이한나는 평생 모를 것이다. 지금도 아주 가끔이지만 손바닥을 내려다볼 때면 그때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알지. 넘버원 가드잖아.”
태섭은 아까 한나가 꺼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고, 한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넘버원 가드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니까 잘 할 거야. 다들 그렇게 말해. 네가 앞으로도 잘 해낼 거 알아.”
한 치의 거짓이라고는 없는, 진심 어린 응원이었다.
순간 태섭은 그렇지 않다고 거칠게 항의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신의 마음속에 감추어 놓았던 불안감을 넌지시 털어놓고, 실은 그렇지만도 않다고, 자신의 상황은 네 생각보다 그렇게 긍정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예전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두 사람이 아직 같은 학교에 다니고 농구부에서 활동하고 있을 시절이었다면 그 막연한 불안감에 관하여 조금은 털어놓았을 것이다. 언젠가 산왕전을 앞두고 달리던 산책길에서 그녀와 느닷없이 마주쳤을 때처럼, 한밤중에 나누었던 그 마법 같은 대화처럼….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은 어른이었고, 태섭은 적절한 때라는 게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응. 고마워.”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고마워, 한나.”
그는 다시 한번 힘주어 중얼거렸다.
“결혼 축하해. 식은 꼭 갈게.”
이건 진심이었다.
그는 정리를 돕기 위해 방으로 돌아가는 한나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깥은 온통 습하고 무더웠다. 그렇게 취한 것 같지 않았는데 막상 걷기 시작하니 몸이 나른하고 머리가 팽팽 도는 것이 느껴졌다. 태섭은 살짝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가게 뒤편에 마련된 주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주택가 인근이라 가로등 근처를 제외하면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주차장 입구에 도착한 태섭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달재인지 준호인지가 불러준 운전 대행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자판기에서 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맞은편 가로등 앞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와중에도 어렴풋하게 통화 내용이 들려왔다.
그는 아마도 애인과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상대방이 매섭게 쏘아붙이는 소리가 수화기를 뚫고 태섭이 서 있는 곳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반면 전화를 받는 쪽은 이따금 작은 목소리로 “알지.” “응.” “아는데.” “내가 전에 말했잖아.” 정도로만 대꾸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전화 중인 남자가 다름 아닌 정대만이었던 것이다.
대만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아까의 활기찬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반쯤 어둠에 잠긴 얼굴을 문질러가며 전화를 받는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없이 지쳐 있었고 지루해 보였다. 그렇게 남루해 보이는 모습이라니. 잠시 후 대만이 전화를 끊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애인이 있었어?’
태섭은,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조금 배신감을 느꼈고, 그러한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여자친구예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어, 뭐.”
대만은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거 물어보지 마.”
“왜요?”
“그냥.”
대만이 얼버무렸다.
“너한테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
“…….”
“…….”
“넌 왜 그러고 있냐.”
“대행 불렀거든요.”
“아, 그러냐.”
한동안 두 사람은 애매한 거리를 두고 대치하듯 서 있었다. 그러다 대만이 먼저 움직였다. 태섭이 엉거주춤 옆으로 비켜서서 나란히 기대어 설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대만은 그 옆에 붙어서는 대신, 오른편에 설치된 자판기에 동전을 넣기 시작했고, 태섭은 혀를 깨물고 싶은 동시에 그의 뒤통수를 쥐어박고 싶어졌다.
“포카리?”
“에이드로 사 주세요.”
태섭이 툴툴거렸다.
대만은 음료수 버튼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아까 그 말은 거짓말이다.”
“뭐가요?”
“농구가 재미있다는 거.”
삑, 버튼을 누르자 자판기 안에서 음료수 캔이 우당탕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재미있을 때도 있어.”
태섭은 대답 대신 눈썹을 치켜올렸는데, 무슨 대답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대만이 비틀비틀 자판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음료수를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스스로도 정리가 되지 않은 것처럼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러니까 말이다,”하고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농구를 관두고 싶냐면 그건 절대 아니지만, 거기에 생활이 달렸다고 생각하니 버거울 때가 있단 거지. 뭐랄까, 복잡해지잖아. 이것저것.”
“…뭐예요, 갑자기?”
“알아듣고 있는 거냐?”
“반… 정도?”
사실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이게 위로해 줘도.”
대만이 툴툴거렸다.
“위로였어요?”
“그래.”
대만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 아까 내내 죽상으로 앉아 있었잖아.”
심장이 철렁했다.
“그런 적 없어요.”
태섭이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아니기는. 미국 얘기 나올 때마다 풀 죽었잖아.”
대만이 말했다.
“그래서 말해주는 거야.”
그러더니 대만은 느닷없이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조금씩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치수의 새 직장은 텃세가 심하기로 유명해 주변에서 많이들 걱정한다는 것, 준호가 짜증 나는 사수의 뒤처리를 하느라 매번 야근을 한다는 것, 달재의 가게에 크게 외상을 달아둔 업체 하나가 부도가 났다는 것 따위의, 여태 일본에 없었던 태섭으로서는 전혀 모르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런가 하면 정대만은 개인 성적만 좋았을 뿐 팀 자체는 성과가 부진해 올해 결국 준우승조차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한 해 동안 애쓴 결과 고작 혼자만 빛나는 선수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다들 그래. 나도 보기보다 순조롭진 않아.”
그가 넌지시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초조해하지 말라고.”
어느새 태섭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대만은 정확히 보았다. 잘 감추었다고 생각했지만, 아마 분명 그럴 테지만, 오늘 태섭은 내내 죽상이었다.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축하받기 껄끄러운 마음이 분명 한 구석에는 있었다. 사실은 내내 불안했다.
보이는 것만큼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의 미래는 기대 받는 것보다 훨씬 불투명했다. 기적처럼 팀의 공석을 꿰차고 정규 리그에 발을 디디게 됐을 때까지만 해도 꿈을 꾸는 듯했지만, 시즌이 끝나자 녹록지 않은 현실이 닥쳐왔다.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허송세월처럼 몇 달이 흘렀고 내년 드래프트는 여전히 안갯속에 싸여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그리는 미래에는 그들 자신이 꾸려나갈 건설적이고 윤택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질반질하게 느껴지는 그 삶이란 것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정당한 성취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절대 법칙처럼 느껴지는 데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그러한 삶, 그러한 보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송태섭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러한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직접 말로써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오늘 자리에 참석한 모두가 은연중에 태섭의 미래를 점치고 있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NBA에 입성하게 될 것이고 오키나와 출신의 단신 포인트 가드로서 더 넓은 무대에서 새로운 활약을 선보이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싶었다. 잘살고 있는 모두에게. 너무도 잘살고 있는 모두에게. 유감이지만 자신은 어쩌면 결국 NBA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부 리그에서도 얼마나 더 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미국은 그를 영원히 환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환대를 기대한 건 아니었으므로 아직은 호승심이 남아 있었지만, 그게 언제까지일까.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만이 그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가 횡설수설 들려준 주변 사람들의 근황 이야기는 오늘 내내 태섭을 쫓아다녔던 초조함의 근원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까지 잘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기가 뭐 그렇게 잘 나가는 것도 아니란 이야기를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꺼낼 수 있는 걸까.
손안의 휴대폰이 부웅하고 울렸다. 아마 운전 대행으로부터의 착신 메일일 것이다.
태섭은 어둠에 싸인 골목을 바라보았다. 이 근방은 졸업한 이래 몇 번이나 와본 곳으로, 따로 지도를 보지 않고도 손쉽게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막연하고 낯선 곳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골목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모든 것이 불분명하게만 보였다. 한순간이지만 태섭은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이 공포를 느낀다는 그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 마침내 자신의 상처를 빌미로 빚어 온 지난한 삶의 버릇이 가까스로 무릎을 꿇는 게 느껴졌다.
“전혀 모르겠어요.”
그가 불퉁하게 말했다.
“뭐. 그런 게 인생 아니겠냐.”
대만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한 가지 정도는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뭘?’
때맞추어 대만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그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본 다음, 전화를 수신 거부해 버렸다.
“난 내일 제나랑 헤어질 거거든.”
익살스럽게 말한 다음, 가볍게 물었다.
“넌 뭘 할 거냐?”
태섭은 잠시 고민했다.
“그 집에서 가츠동 배 터지게 먹을래요.”
“그 집?”
곧이어 대만이 알아들었다.
“오, 그거 좋지.”
누구도 대놓고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만은 주말에는 시간이 빈다는 식으로 에둘러 대답했고,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후 승용차 한 대가 두 사람 앞에 멈추어 섰다. 짙게 선탠한 창이 내려가더니 립을 붉게 칠한, 날카롭고 예민한 인상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짝 매부리였는데도 이목구비가 조화로웠고 상당히 미녀였다. 그녀가 바로 제나라는 것을 태섭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제나는 대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휙 고개를 돌리고는 앞을 노려보았다.
“참, 생일 축하한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제나를 쳐다보는 채로 대만이 말했다.
음료수 캔이 휙 태섭 쪽으로 날아왔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가 인사했고,
“네, 그럼.”
태섭이 고개를 숙였다.
제나의 차가 붕 떠나고, 남은 자리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태섭은 음료수 캔을 내려다보았다. 대만이 내내 쥐고 있던 탓에 살짝 우그러졌고 미지근한 부분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몇 분 뒤 태섭의 대행 기사가 도착했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안내받은 차에 탑승한 다음, 태섭에게 안전벨트를 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보다 더 예의 바를 수가 없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마침내 서서히 풍경이 바뀌었다. 사방으로 꽉 막힌 주차장과 어둠에 싸인 골목이 순식간에 뒤편으로 사라졌다. 등받이에 기댄 채 태섭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뒤늦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차가 터널 속을 쏜살같이 가로지르는 동안 캄캄해진 창문에 자신의 얼굴이 그대로 비추어 보였다.
어찌 됐든 결국 무엇이라도 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는 실패가 두려웠다. 전력을 다했는데 아무것도 성취해 내지 못하고 돌아오게 될까 봐, 사랑하기로 결심한 것들에 배반당할까 봐, 상처를 받을까 봐, 그래서 결국 외로움을 느끼게 될까 봐. 하지만 어쩌면 모두가 그렇게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는 채치수나 권준호를, 이달재나 이한나를, 그리고 정대만을 생각했다. 그들의 삶이 실패하고 성공하는 장면에 대해 떠올려 보았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들이 별로 실패나 성공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결국 잘 해나갈 것이다. 비로소 태섭은 자신의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박수치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들은 사정을 들었더라도 개의치 않아 했을 것이다. 태섭이 결국 계약을 따내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을 실패라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잘 해나갈 거라는 말은 그의 커리어에 달린 문제보다도 훨씬 앞에 놓인 것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삶, 그 불투명한 굴곡을 따라 이어질 시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주문일 것이다. 태섭뿐 아니라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응원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이제 태섭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당장 주말에 대만과 그 집에 가서 가츠동을 먹어야 한다. 10월에는 한나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번에는 태섭 쪽에서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너라면 잘 해나갈 것이라고. 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려보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터널이 끝나고 환한 간판들과 가로등 불빛이 그를 사로잡는 것이었다. ■ 2024.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