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미츠 «집으로 만든 집 (1)»
家で造った家
1
그 저택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어져 있었다. 두꺼운 천으로 몸을 감싼 귀부인이 의자 팔걸이에 손을 늘어뜨린 것처럼 깎아지를 듯한 백악절벽에 은근슬쩍 걸쳐 있는 아름다운 양옥이었다.
저택은 못해도 19세기 초에 지어졌을 법한 고풍스러운 외향이었다. 지붕은 두 개였는데 개중 더 높은 것이 첨탑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고 그 지붕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작은 분관을 잇는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몇 개 되지 않는 창은 창살로 나뉘었고 벽은 담쟁이덩굴로 무성했다. 외벽 군데군데가 왜가리 배설물로 거뭇하게 때가 타 있긴 했지만 벽을 타고 오르는 억센 풀에 가려져 있었으므로 흠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사실 건물은 절벽보다는 숲에 더 가깝게 지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저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발코니가 모조리 바다를 바라보는 서쪽 방향으로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택의 진짜 방향은, 적어도 그것이 정말로 바라보고자 하는 곳은 숲이 아니라 바다인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저택을 지은 사람도 그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미츠이 히사시三井寿는 어제 막 이 마을에 도착했다. 멀쑥한 회색 프록코트에 그에 비하면 검소해 보이는 크림색 크라바트 차림이었는데, 달고 다니는 몸종도 없었고 짐도 트렁크 한 개만 덜렁 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차림은 이런 외딴 마을에서 무척이나 눈에 띄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부유한 이들은 전부 도시로 떠난 지 오래였다. 거리의 대다수는 아직 구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소매가 나달나달하고 색이 다 빠져 갈색에 가까운 격자무늬 고소데(*일본의 전통 복식에서 통소매로 지은 평상복)를 입고 다녔다.
남자들은 여기저기 실이 튀어나온 잠방이를 입었고 아이를 등에 멘 여자들은 낡아 빠지고 때가 탄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그들은 각자 몫으로 떨어진 삶의 물레방아를 돌리느라 본래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이곳에선 어머니 등에 기대어 있는 갓난아기조차 나이 들어 보이는 듯했다.
미츠이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시선을 끌었다. 그는 인력거도 마차도 아닌 자동차를 타고 왔다. 뚜껑이 없는 T형 포드였는데 도시에서는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차종이었지만(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츠이는 자신이 어느 정도는 검소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이런 곳에서 그런 사실을 알아차릴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차에서 내릴 때 조금 비틀거렸다. 서른 살 좀 넘은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다 말고 반사적으로 그를 부축했다. 기사는 큼지막한 트렁크를 꺼내 발밑에 내려둔 다음 미츠이에게 삯을 받고 자동차를 몰아 마을을 떠났다. 미츠이가 그를 배웅했으므로 아마 두 사람은 본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아무튼지 간에 그는 있는 집 자식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비빌 언덕이 몇 개나 있는, 귀족 작위를 받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지체 있고 명망 높은 집안의 도련님 말이다. 미츠이 히사시 자신조차 일이 그렇게까지 꼬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악을 상정해 보았다 하더라도 이런 식은 아니었으리라.
요 근래 신경이 곤두서 있긴 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미츠이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정확히는 마을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근래 그가 다녀야 했던 곳들 중에서 비교적 으뜸인 것이다. 고즈넉한 해안선과 희고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절벽의 풍경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못해도 두 달은 머무를 생각이었는데, 미츠이의 계획을 들은 코이키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두 달이나요?”
코이키는 미츠이의 오랜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다. 몇 년 동안 친구의 여름 별장에 얹혀살면서 방문객들의 시중을 들던 사람인데, 얼마 전 늙은 아버지의 수발을 들기 위해 도시생활을 접고 이곳으로 왔다. 그녀의 아버지 대는 마을의 오랜 토박이로, 어머니를 따라 도시로 떠나기 전까지 코이키 본인도 어린 시절은 여기서 보냈다고 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주변에 괜찮은 여관 없어? 너무 비싼 것만 아니면 상관없는데.”
그렇게 대답하면서 미츠이는 거리낌 없이 문간에 몸을 기댔다. 고작 하루 묵은 것뿐인데도 벌써부터 자기 집처럼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코이키는 이 남자가 자신의 주인이 편지에서 당부를 거듭한 ‘다소 예민하고 거친 부분이 있는 손님’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여관이라면 있지만 그렇게 오래 숙박하는 손님을 받아줄지는 의문이에요.”
코이키가 대답했다.
“왜?”
“오랫동안 도련님 시중 들 형편이 되는 곳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 난 또.”
미츠이는 별 것도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거라면 문제없어. 난 그렇게 까탈스럽지 않거든. 끼니나 이부자리가 좀 싸구려라고 해서 투덜거리면 사내라고 할 수 있나.”
코이키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고, 미츠이도 그녀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코이키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미츠이는 그녀를 캐묻는 대신 내버려 두었다.
“옷 좀 빌릴게. 어제 그대로 입었다간 도련님이라고 안 받아줄까 봐 겁나거든.”
능청스럽게 미츠이가 말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흙먼지가 날리던 거리는 안개로 자욱했다. 소금기 어린 해무 때문에 이곳의 목조 건물들은 모두 새까맸고 유리창이 뿌옇게 슬어 있었다. 미츠이는 보이는 여관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방이 있냐고 물었는데, 매번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사정을 설명할 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를 외딴 바닷가 마을까지 요양을 하러 온 병치레 잦은 도련님이거나, 아니면 집안 어르신의 미움을 받아 추방당한 탕아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미츠이를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민들은 멀리서부터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막상 가까워지면 흥미 없다는 눈으로 바닥을 보며 걸었지만 지나치고 나면 등을 흘끔거리며 반드시 멈추어 서곤 했다. 미츠이도 그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거나 도로를 걷고 있으면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관을 다섯 군데나 돌았지만 결국 묵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덧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안개가 채 다 걷히지 않은 거리 위로 어렴풋한 음식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더럽고 지저분해 마지막까지 들어가고 싶지 않아 했던 여관에서마저 퇴짜를 맞자 미츠이는 무척 마음이 상했다. 그는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아까의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조급하고 사나운 목소리였다.
“사람을 바보로 아는 거냐. 이런 시골 마을에서 장사하는 주제에 손님 취급이 이렇게 박해서야.”
어쩔 수 없이 코이키의 집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해가 높게 뜨면서 마을을 삼켰던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안개는 습윤한 비밀을 갈퀴처럼 끌어안고 주춤거리며 잠시간 이 마을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츠이는 갑작스럽게 드러난 마을의 공간감에 위화감을 느끼고 구둣발로 바닥을 문질러 보았다. 그러자 잘 포장된 돌바닥이 흙속에서 번들거리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마을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도로였다. 수레 서너 대가 무리 없이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포장된 도로가 중심부까지 뱀처럼 굽이치며 뻗어 있었다.
목조 건물들은 노쇠하긴 했어도 하나같이 그 규모가 상당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이 정도 되는 규모의 마을에 그 흔한 노점 하나 없었다.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일제히 닫혀 있는 수많은 문들. 그리고 시선들. 알 수 없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창문 틈으로 그를 훔쳐보던 여자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집안으로 사라졌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미츠이의 기분은 점점 묘해졌다. 그의 신분이나 가계 사정은 애초부터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처음부터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원치 않았는지 모른다. 안개는 이제 거의 다 걷혔다. 다리 너머로 새카맣고 깊은 숲이 펼쳐졌고 서쪽으로 바다가 끝없이 이어졌다. 멀리서 지빠귀 소리가 들려왔고 파도도 더욱 높아졌다. 한낮의 생명력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으로서 명료하게 사고하고 이치와 계산이 밝을 때가 찾아온 것이다.
이 시간대에는 사물과 인간을 헷갈릴 수 없다. 태양이 세상을 축복하는 시간에는 무엇 하나 함부로 요사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 그 저택이 보인 건 바로 그때였다. 울창한 숲 너머로 삐죽 솟구쳐 올라있는 그 암청색 지붕은, 얼핏 봐도 이인관異人館(*막부 말기, 메이지 시대에서 주로 서양 사람이 거주하려고 지은 서양식 건물)이나 서양식 주택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지붕은 이런 데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못한 것이었다. 미츠이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돌이켜 보면 마을 군데군데 비슷한 양옥이 있기는 했다.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널찍한 건물도 의양풍擬洋風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 마을에도 지주가 사는 것일 수 있었다. 어쩌면 저기 보이는 저택이 그의 집인지 모른다. 미츠이는 그런 류의 사람들을 다루거나 대하는 데 능숙했으므로 저곳에 누가 사는지 자연히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코이키네로 돌아갔더니 집안이 갓 지은 쌀밥 냄새로 가득했다. 그녀는 당근과 조개를 섞어 만든 솥밥에 바짝 말린 무 졸임과 젓갈을 내놓았다. 미츠이는 이 조촐한 밥을 몇 술 뜨다 말고 물었다.
“저택에는 누가 살지?”
“어느 저택이요?”
“숲 쪽에 있는 거대한 거 말이야.”
“아아.”
코이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야, 그게?”
미츠이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예전에는 미야기가家가 살았다지요. 그 집안은 귀족인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되려 파산을 면치 못하고 어느 부유한 남작가에 얹혀살고 있는 신세라고 했어요. 저 저택도 원래는 그 남작 거였대요. 그런데 지금은 미야기가家가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어릴 적에 그 집 사람들이 다 떠났다고 했거든요.”
“지금도 살고 있어.”
뒤쪽 바닥에서 갑자기 대꾸가 들려왔다. 쪼글쪼글하다 못해 몸집이 통째로 줄어든 듯한 노인이 이불속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 그곳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던 미츠이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황급히 태연한 척을 하며 밥상머리로 몸을 돌렸다.
“그 남작이랑 같이?”
미츠이가 딴청을 피우듯 물었다.
“아니오, 도련님. 그 저택은 미야기가家의 것이에요. 오래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습죠.”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지붕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그 집을 통째로 받았거든요. 그 남작으로부터 말입죠.”
노인이 이죽거렸다.
“묵을 곳은 구하셨나요?”
코이키가 물었다. 큰 기대가 없는 투였다.
“아니. 전부 퇴짜를 놓더군. 저녁이 되기 전에 떠날 거야.”
미츠이가 대꾸했다.
“여기가 좀 그래요. 외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제야 코이키가 솔직하게 말했다.
“금방 떠나실 줄 알았어요. 오래 머무르실 줄 알았더라면 도련님을 여기까지 모셔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지금은 떠돌이 신세니까. 어디든 적당한 곳으로 가게 되겠지.”
“차편을 찾아볼게요. 역까지 꽤 걸어야 하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맡기지 말 걸 그랬군. 못 걸을 거리는 아니니까 걸어서 가지.”
미츠이가 그릇을 겹쳐 놓고 상을 물렸다.
“근처에 전화 없나? 회관에는 있을 법도 한데.”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버님, 회관에 전화가 있던가요?”
“없어.”
“내 코트는 어디에 뒀지?”
미츠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지기 전에는 떠나야겠어.”
툴툴거리며 그가 말했다.
그 사이 바람이 거세졌다. 거친 해풍이 도로를 휩쓸며 집집마다 창을 뒤흔들었다. 코이키가 배웅하겠다고 나섰지만 미츠이는 완강히 거절했다. 제대로 손님 대접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코이키는 미츠이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별장에서 일할 때 받은 건데 팔기 아까워서 가지고 있었어요.”
‘아아. 필요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미츠이는 예의를 차려 손수건을 받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코이키는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밖으로 나오자 묵직한 공기가 느껴졌다. 살짝 눅눅한 흙냄새가 바다의 짠내와 뒤엉키는 중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드문드문 먹구름이 깔려 있었다. 무심히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다. 인력거꾼이라도 찾아볼까 싶었는데 속 편한 생각이었다. 미츠이는 이제부터 도보로 기차역까지 되돌아가야 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별로 즐겁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왼쪽 무릎을 문지르며 미츠이는 혀를 찼다. 처음에는 빠르게 걸었지만 점차 동작이 느릿느릿해졌다.
결국 다리 앞에서 그는 한 번 멈추어 섰다. 묵직한 트렁크를 내려놓자 가방의 가죽끈 모양대로 빨갛게 패인 손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은 아까보다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저택의 지붕의 꼭짓점이 시야 끝에 붙잡혀 점점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츠이는 손바닥을 주무르다 말고 다시 트렁크를 집어 들었다.
오솔길로 방향을 틀자 기다렸다는 듯 예감이 달려 들었다. 대지의 냄새, 징그러울 정도로 억세고 생명력 넘치는 풀 냄새와 병들어 삭아가는 나무뿌리의 냄새가, 희고 작은 꽃이 풍기는 시고 달큼한 냄새가 끓어오르는 어둠 속으로 그의 몸이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2
숲은 냄새가 소용돌이 치는 동굴 같았다.
알 수 없는 것에 이끌리듯 발을 들여놓고서는, 미츠이는 금방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이곳은 너무도 불친절했다. 그가 오솔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축 늘어진 실처럼 게으른 곡선을 그리다 말고 무성한 풀숲으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있었다. 정수리를 가까스로 스치고 지나가던 너도밤나무의 낮은 가지들은 본격적으로 그를 위협하고 있었고, 가지는 앞으로 밀면 한순간 순순히 물러나는 듯했다가 유연한 탄성으로 휙 하고 되돌아와 그의 목덜미며 어깨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미츠이는 방향을 다시 확인했다. 지붕은 아까보다 가까워졌지만, 그저 언덕을 오르기만 해서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물방울이 정수리를 적시더니 잠시 후 빗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황급히 나무가 무성한 쪽으로 방향을 트는 동안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지대가 편평해지더니 거기서부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거기가 진짜 길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미츠이는 저택으로 향하는 포장도로를 내버려 두고 애꿎은 산길을 올라가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저택의 입구는 대체 어디로 나 있는 걸까? 마을을 좀 더 꼼꼼하게 둘러보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으리라. 뒤를 돌아보던 미츠이는 혀를 찼다. 그 자신의 미련함 때문이라기보다 상황에 대한 짜증스러움을 표출하는 데 가까웠다.
도로로 다져진 완만한 산길을 올라가는 동안 미츠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로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돌틈 사이로 잡초가 길게 뻗어 나와 있고 가지치기 되지 않는 너도밤나무들이 빽빽하게 서로 얼기설기 얽혀있었다. 가지들은 아치형 천장을 형성하면서 일종의 차양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숲보다 훨씬 어두침침했다. 그 어둠 끝에 저택이 있었다. 하인들이 쓰는 것으로 보이는 쪽문이 나 있었다.
미츠이는 건물을 빙 둘러 바다 쪽으로 빠져나왔다. 곧바로 탁 트인 풍경과 새하얀 절벽이 나타났다. 철제 울타리가 둘러진 정원 아래로 강렬한 파도 소리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푸성귀 사이로 드문드문 라일락이 피어 있긴 했지만 정원은 딱봐도 버려진 지 오래된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러한 풍경은 오히려 저택의 고전적인 모습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보기 드문 고저택이었다. 지붕 밑으로 들어온 미츠이는 코트를 털면서 정문을 살폈다. 문고리 위에는 노커가 달려 있었는데 그마저도 훌륭했다. 어찌나 섬세하게 조각되었는지 마치 고리 자신이 그러한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이 문을 드나들 사람의 자격을 직접 판단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커는 미츠이에게도 일종의 경고를 남기려는 것 같았다. 문에 가까이 다가선 그를 비추는 황동색 고리의 둥그런 부분과 섬세한 조각이 그의 얼굴을 과장되게 일그러뜨리고 사방으로 뭉개고 뒤섞으면서 손님이 아니라 침입자에 가까운 몰골로 미츠이의 신분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노커를 붙잡았다.
힘주어 문을 두드렸지만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잠자코 기다리는 동안 빗방울은 더욱 거세졌다. 미츠이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어쩌면 아무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이 살짝 열리고, 허여멀건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세요?”
여자아이는 미츠이를 의심스럽게 살피더니 덧붙였다.
“이 마을 사람은 아니네.”
“지나가던 길이야. 혹시 전화가 있다면 쓸 수 있을까 해서.”
미츠이는 보란 듯이 묵직한 트렁크를 흔들며 말했다.
“마을엔 전화가 없다고 하더라.”
“없죠, 거기는.”
여자아이는 다시 한번 미츠이의 행색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잠깐 기다려요.”
문이 닫혔다가 잠시 후 활짝 열렸다. 여자아이는 하얀 파자마 차림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저택은 미츠이가 거쳐왔던 길보다도 어두침침했다. 로비 정면에 층계참을 두고 두 번씩 꺾어지는 긴 계단이 있었다. 고풍스러운 벽지에서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고, 계단참보다 한참 높은 곳에 나 있는 길쭉한 창문 너머로 먹구름이 번쩍이고 있었다. 번개가 치는 것이리라.
미츠이는 반쯤 젖은 트렁크를 어정쩡하게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새 의자를 끌고 온 여자아이가 벽에 등받이를 붙이고는 쿠션을 밟고 올라가 가스등에 불을 붙였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집사는 어딨지?”
여자아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바닥으로 내려오자마자 옆으로 의자를 옮기더니 그쪽 가스등에도 불을 붙였다. 아까보다 로비가 조금 환해지자 여자아이는 성냥을 흔들어 껐다.
“집사는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전화 쓰고 싶다고 했죠? 전화는 2층 서쪽방에 있어요.”
“코트 벗어둘 곳은 좀 있나?”
“저기.”
여자아이가 로비 구석을 가리켰다. 벽 모서리에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반쯤 젖은 코트를 그곳에 걸었다. 여자아이가 다가와 미츠이의 손에서 트렁크를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몇 발자국 안 가 휘청거리면서 트렁크를 도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겁네….”
“이리 줘. 그냥 내가 들게.”
여자아이는 순순히 트렁크를 돌려주었다.
복도는 깊고 고독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이 낮아서 동굴처럼 소리가 울렸다. 다시 보니 여자아이는 맨발 차림이었다. 반면 미츠이가 만들어 내는 구둣발 소리는 돌바닥을 타고 사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깨워서는 안 될 무언가를 끝없이 자극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발소리는 복도의 오래된 침묵을 깨뜨리고 저택 곳곳으로 울려 퍼지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깨우고 있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하카마를 입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 남자들과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앉아 눈을 홉뜬 기모노 차림의 안주인들이 어둠 속에서 느릿느릿 삭아가다 말고 화들짝 놀라 침입자를 향해 눈동자를 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영원할 것만 같은 자신의 권력을 한껏 과시하면서, 또 한편으로 어떤 막중한 책임이라도 진 사람처럼 진지하고도 조금 서글픈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색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남작가家 사람들의 초상이었다. 그들은 앞선 사람들과 달리 서양식으로 갖추어 입은 탓에 신세대처럼 보였다. 휘장을 걸친 채 폐쇄적이고 음울한 표정으로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인간들의 면면을 구경하던 미츠이는 그제야 눈앞의 여자아이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네 주인은 어디 있지? 날 들여보냈다고 괜히 네가 꾸중을 들을까 걱정이군.”
그러자 여자아이가 휙 몸을 돌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미츠이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나는 몸종이 아니라 미야기宮城 안나예요.”
“네가? 네가 미야기라고?”
미츠이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안나는 못마땅해 보였다.
“이거 참, 미안합니다. 당연히 하인인 줄 알고….”
“됐어요.”
“설마 미야기네 따님이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보통은….”
“…….”
그러는 동안 복도가 끝났다. 계단참에는 이름 모를 서양화가 걸려 있었는데 미츠이로서는 처음 보는 그림들이었다. 안나가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미츠이는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안나는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갑자기 권태로워 보였다.
2층에 도착하자 안나는 코너 바로 옆에 붙은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었다. 이건 안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살짝 당황한 듯했다.
“문이 잠겨 있네.”
“이 방에 전화가 있는 겁니까?”
“네, 그런데 잠겼어요.”
안나는 문에 귀를 대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나요?”
“음….”
안나는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이따 열어달라고 할게요. 급해요?”
미츠이는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그럼 내려가요.”
복도로 돌아왔을 때 날씨는 아까보다 심각해져 있었다. 폭풍이 오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손님을 쫓는 것은 냉혈한이나 하는 짓이다. 창문 너머로 들리는 바람 소리가 살인적이었다. 커튼을 슬쩍 걷어 수평선 너머를 살피던 안나가 미츠이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미츠이는, 누가 봐도 이 지역에 막 도착한 것 같은 눈앞의 외지인은 밑단이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입고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날카롭고 작은 나무껍질을 단 채로 불쌍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디까지 가던 길이에요?”
안나가 물었다.
“음. 옆 마을 기차역까지?”
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날씨가 궂어서 혼자서는 못 가요. 방을 내드릴게요. 오늘은 여기서 묵어요.”
사실 그것이야말로 미츠이가 가장 바라던 선택지였다. 그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안나는 대답 대신 코웃음을 쳤다.
안나는 미츠이에게 동쪽 손님방을 내주었다. 중앙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뻗어 있는 2층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모퉁이 방이었다. 안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가구에 먼지가 살짝 쌓여 있긴 했지만 있을 건 다 갖추고 있었다. 서랍, 선반, 화장대와 거울, 협탁 위에는 아름다운 휴대용 램프가 놓였다.
침대도 엄청나게 컸다. 조금 무리하면 세 명은 누워서 잘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안나는 한 시간 뒤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로비에 걸어둔 코트는 그때 가져다주겠다고, 트렁크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에 가지고 올라가면 된다고 했다.
“쉬어요.”
그런 다음 문을 닫고 나갔다.
미츠이는 커튼을 치고 자리에 앉았다가 방을 둘러보려고 다시 일어났다. 그는 가장 먼저 서랍을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안에 남성용 나이트셔츠와 깨끗한 속옷, 누가 썼던 것처럼 둘둘 말려 있는 스카프와 커프스에 장식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추 따위가 약간의 생활감을 가지고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차례로 서랍을 열어보았다. 나머지 칸은 모두 텅 비어있었다. 다시 맨 위칸을 열어 물건을 조금 뒤적이자 옷가지 밑에서 책 한 권이 나왔다. 불과 2년 전에 유행했던 단편 소설집이었다. 미츠이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흥미 없이 몇 번 팔락거리다 도로 덮은 다음 원래 있던 자리에 잘 밀어두었다.
창가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습관처럼 미츠이가 명령조로 말했다.
경첩이 삐걱거리며 문이 열렸다. 안나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있었다.
“식사하세요.”
“여기는 하인이 없습니까?”
머쓱함을 감추려고 미츠이가 괜히 툴툴거렸다.
안나는 아까와 다른 방향으로 미츠이를 안내했다. 여긴 대체 방이 얼마나 있고 복도는 몇 개나 되는 걸까? 어느새 두 사람은 희미한 줄무늬 벽지로 도배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보이는 것 이상으로 저택은 굉장히 넓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일꾼이나 하인을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못했다. 미츠이는 앞서 걷는 안나의 등을 멀뚱멀뚱 응시했다. 안나의 등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벽이 사방으로 반죽처럼 늘어나면서 공간이 어그러지는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이자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좁고 낮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층계참 아래서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요리사는 있는 모양이군.’
그는 슬슬 이 저택을 과연 몇 명이 관리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복도 끝에 위치한 식당이 보였다. 그곳만 주황색으로 불이 밝혀져 있었다. 식당은 연회장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컸지만 실제 연회장으로 쓰기에는 살짝 모자란 규모였다. 12인용 식탁이 길쭉하게 빠져 있었고 높은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식기는 마주 보는 위치에 2인분만 놓였다.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자미네.”
뚜껑이 덮인 납작한 냄비를 열어본 안나가 중얼거렸다.
식사는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동양식과 서양식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메인 디쉬는 가자미를 매콤한 양념에 졸인 것으로, 구성은 여관에서 내놓는 정찬식으로 꾸려져 있었지만 밥 대신 빵이 나와 있었다. 고기와 건포도를 섞어 만든 짭조름하고 달콤한 성탄절 푸딩과 설탕에 절인 자두, 구운 소시지와 콩은 놀랄 만큼 맛있었다. 안나는 식성이 좋아서 정말 끝없이 먹었다. 미츠이가 식사를 마친 뒤에도 남은 자두 한 알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미츠이가 손수건으로 입을 훔치면서 말했다.
“정말로 미야기네 아가씨 맞습니까?”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정말이지 귀족의 예의범절하곤 너무나 동떨어져 있던 것이다.
“맞는데요.”
안나가 음식을 삼키며 대꾸했다.
“어른은 어디 계셔?”
미츠이가 재미있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안 계셔요.”
“그럼 지금 집에 어른이 아무도 없어?”
안나는 모호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야. 설마 저택에 너만 있는 건 아니지? 식솔들은?”
안나는 말없이 접시를 기울여 남은 양념과 감자를 쓸어먹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잠시 후 요란하게 숟가락을 던지듯 내려놓고 대답했다.
“요시노상(さん)이 주방에서 일해요. 금요일에는 시장에도 다녀오고. 가끔 심부름을 시키면 멀리 있는 도서관에도 갔다 와요.”
“요시노 말고 다른 하인들은?”
“글쎄요. 여긴 보기보다 그렇게 할 일이 많지는 않아서…. 음, 모르겠네. 일꾼은 오빠가 고용하니까.”
“오빠?”
“응. 잘 안 나오지만.”
안나는 접시를 밀고는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의자에 늘어졌다.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배부르다.”
“네 오라버니는 따로 식사하는 거야?”
미츠이가 물었다.
“네. 손님이 온 건 알고 있는데 나중에나 인사하러 내려올 거예요.”
안나는 특히 둘째 오빠가 낯을 많이 가린다고 했다.
“요즘 료짱(ちゃん)은 손님이 와도 방에서 잘 안 나오려고 해요.”
“그러냐.”
“그래도 인사는 하라고 말해둘게요.”
두 사람은 빈 그릇을 내버려 두고 로비로 나왔다. 안나는 미츠이에게 코트와 가방을 넘겨주었다. 안나가 잘 자라고 인사하자 미츠이는 내심 그녀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혼자서 길을 찾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안나는 손님을 이 넓은 저택에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미츠이가 가방을 챙기자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은 방으로 가져다 줄게요.”
“고맙다.”
“화장실은 맞은편. 욕실은 복도 끝에 있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적어서 문 밑으로 밀어두면 돼요. 아침 가져다 놓으면서 확인하고 요시노상한테 말해둘게요.”
“응.”
그런 다음 안나는 미츠이에게 성냥갑을 건넸다. 어두우면 복도나 방에 있는 가스등에 불을 붙여도 상관없다면서 방에 달린 등과 램프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내일 보자고 말한 뒤 문을 닫고 떠나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저녁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닌 것 같았다. 미츠이는 방에 시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폭풍 때문에 밖은 벌써부터 깜깜하기만 했다. 일찍 자고 싶지 않았지만 막상 침대에 앉자 머리가 추를 매달고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것처럼 묵직하게 느껴졌고 뒤늦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구두의 가죽이 두 발을 숨 막힐 듯 꽉 조여왔다.
그는 더듬더듬 구두를 벗었다. 내친김에 옷까지 갈아입은 다음 짐을 트렁크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침대로 돌아왔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어제는 몇 시간 동안 자동차에 구겨 앉아 있었고 오늘은 아침부터 여관을 찾아온 마을을 돌아다닌 데다 오후에 있던 산길의 고행은 그에게 너무나 고된 것이었다. 저택은 또 어떠한가. 이 저택은 지나치게 넓고 공허해서 쉴 새 없이 걸어야 한다.
복도는 차가운 돌로 되어 있고 창문은 죄다 뾰족한 데다 조금이라도 넓어서 빛이 잘 들게 생긴 것들은 모조리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가. 계단도 너무 많았다. 깨어난 다음에는 분명 쉽게 길을 잃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헤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어느새 미츠이는 저택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어디를 걷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리석 위에 깔린 두꺼운 카펫과 벽에 걸린 서양화로 미루어 보아 분명 저택의 어딘가인 것 같았다.
간간히 벽을 더듬거릴 때마다 액자의 오돌토돌한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미츠이를 부르고 있었다. 「히사시.」 죽기 전에 내뱉는 마지막 숨처럼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히사시….」
「여기야. 이쪽이야.」
갑자기 사방이 깜깜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어두우면 등에 불을 붙여도 상관없어요.’ 그렇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법. 그러니까 돌아가자. 어디로? 그런데 이건 누가 했던 말이지? 이건 누구의 목소리였지?
그는 눈을 떴다.
3
이른 아침 문을 열어보니 안나가 다녀갔는지 소반 위에 덮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간소한 차림이었지만 양이 많았고 아직 따뜻했다. 미츠이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뚜껑을 한 차례 털어서 뒤집은 다음 젓가락으로 밥을 잘 나눠가며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내놓았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니 그릇은 사라져 있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던 미츠이는 트렁크를 정리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날이 밝자 저택은 어제보다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안나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어제 식당으로 내려갈 때 썼던 좁은 계단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협탁과 꽃병 위에는 희뿌옇게 먼지가 앉아있었다.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물건들은 대부분 제자리에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주방도 텅 비어 있었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세 사람 분의 그릇이 뒤집어져 있었다. 미츠이가 아침에 내놓았던 빈 그릇도 거기 있었다. 요시노상은 보이지 않았다. 미츠이는 주방 뒤편과 이어지는 쪽문으로 나왔다. 수도와 우물이 있는 작은 풀밭이 있었다.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자 정원이 나왔다.
안나는 거기 있었다. 바닷가 절벽 특유의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어제보다는 부드러웠다. 안나는 축축한 풀밭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햇빛 쪽으로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미츠이는 길게 자란 풀들을 헤치고 안나에게 다가갔다. 안나는 한동안 눈을 뜨지 않고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전화 방 말인데.”
미츠이가 말했다.
“응.”
“열려 있을까? 안내 좀 해줄래?”
안나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오빠가 열어놨으려나. 료짱이랑 인사했어요?”
“아니.”
“그럼 열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인사하라고 해야겠다.”
안나는 무거워 보이는 의자를 번쩍 들어서 정문 지붕 밑으로 옮겨둔 다음 실내로 돌아왔다. 그들은 초상화의 복도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전화방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넓은 창 너머로 숲이 보이는 멋진 복도가 나왔다. 푸르고 반투명한 그림자가 목제 바닥 위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문이 두 개였는데 안나는 오른쪽이 응접실이고 왼쪽이 둘째 오빠가 묵는 방이라고 알려주었다.
“료짱. 료짱.”
안나가 문을 두드리며 보채듯이 불렀다.
“손님이야. 손님이 전화 쓰고 싶대. 문 열어줘.”
한동안은 대답이 없었다. 문을 두들기던 안나의 행동이 점점 거칠어졌다. 자신의 오빠 이름을 연달아 부르며 발로 문을 차고 고함을 치다가 마침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미츠이는 갑작스럽게 격양된 안나의 행동에 살짝 겁을 먹었다. 안나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안나가 악을 질렀다.
“문 열어! 당장 문 열란 말이야!”
마침내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마지못한 것처럼 스르르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겨우 얼굴을 내미는 정도여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광분한 여동생에게 무심히 대꾸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들려왔다.
“시끄러워, 안나.”
“료짱. 손님한테 인사해.”
언제 그랬냐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안나가 말했다.
“이따가.”
“지금 뒤에 있어.”
안나가 미츠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나와서 인사해. 손님한테 제대로 인사하라고 한 건 오빠잖아.”
“…….”
일이 이렇게 되자 미츠이가 머쓱하게 나섰다.
“실례합니다. 미츠이 히사시라고 합니다. 이제 비 때문에 잠시 신세 졌습니다. 떠나기 전에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
“료타!”
안나가 보챘다.
결국 문간에 선 남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첫인상은, 미츠이의 머릿속에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그가 어리다는 것이었다. 미야기가의 둘째 아들은 키가 작고 덥수룩하게 머리를 내려서 좀 수더분해 보였다.
미야기는 자신을 결국 문밖으로 끌어낸 자신의 여동생을 흘겨보다가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뜸을 들였다. 미츠이를 잠시 쳐다보기는 했지만 금방 시선을 피해버렸다.
“미야기 료타입니다.”
그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쉬고 계신데 괜히 방해한 건 아닐까 싶어서 미안하네요.”
“아뇨.”
미야기는 다시 머리끝을 매만졌다.
“전화방은… 열어드릴게요.”
복도를 걷는 동안 안나는 미야기에게 왜 전화방을 잠가버린 거냐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미야기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안나가 또다시 참을성을 잃고 화를 낼 기미가 보일 때만 “응.” “알까 보냐.” 정도로 짧게 대답했다. 그는 미츠이와 조금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미츠이가 안나와 대화하려 할 때는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 듯 완전히 몸을 돌리고 걸음을 빨리 했다.
미야기는 저택 열쇠를 일부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방 문을 열어준 다음 눈인사를 했다. 미츠이가 고맙다며 무심코 미야기 쪽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흠칫하며 물러난 미야기가 깜짝 놀랄 만큼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러한 행동을 들킨 것이 무척 곤란한 것처럼 그는 황급히 무표정해졌다.
“살펴가세요.”
그는 미츠이를 전화방으로 반 강제로 들여보내다시피 하고는 조용히 문을 닫아버렸다.
‘거 참 쌀쌀맞은 도련님이군.’
밖에서 높고 쾌활한 안나의 목소리, 낮고 침울한 미야기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두 사람은 전화방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미츠이는 협탁에 설치된 수화기를 든 채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사이 다시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첫 번째로 건 번호는 허탕이었다. 여관 주인은 그가 찾는 남자가 떠난 지 오래라고 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므로 미츠이는 곧바로 두 번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어떤 여자가 받았다. 그녀는 미츠이가 찾는 남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크게 화를 내더니 그가 어디 있는지 되려 미츠이에게 따져 물었다. 미츠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건 번호는 그쪽에서 받으리라는 기대조차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젊은 여자가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러고는 미츠이가 찾는 남자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했다. 지금은 술을 마시고 잠들어서 전화가 곤란하다고 했다. 대신 전달할 것이 있다면 그대로 전해주겠다고 했다. 미츠이는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왜 거기까지 갔지?”
“큰 마을로 나갔다가 차 주인에게 붙잡혔거든요. 자동차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그만 다리 밑으로 뛰어내렸답니다.”
여자가 나긋나긋 말했다.
“아아. 그렇지만 그 주인도 참 끈질기지요. 도난당한 지 일 년은 넘은 자동차라고 들었는데 말이에요.”
“수집광이라고 듣긴 했어. 공장에서 만든 게 아니야. 구주歐洲(*유럽)를 건너온 자동차거든. 그보다 넌 누군데 노리오의 부친 집에 있는 거지?”
“미야노 카페의 직원이랍니다. 시사미 하천에서 둥둥 떠내려오는 것을 제가 건져냈지요. 홋타상은 말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어요.”
여자는 후후 웃더니 말했다.
“그런데 미츠이상이시죠? 훗타상이 말이에요. 정신을 잃은 동안에도 당신 이름을 불렀답니다. 자동차를 돌려줘야 한다나요. 그렇지만 자동차는 이제 없어요.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됐어. 이제 와서 기차역으로 가봤자겠군. 머물 곳을 찾게 되면 다시 전화하지.”
미츠이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문밖은 조용해져 있었다. 미츠이가 문을 열자 안나가 앞으로 쏟아졌다. 미야기는 보이지 않았다. 머쓱하게 몸을 일으킨 안나가 자세를 갈무리했다.
“기차역으로 안 가도 돼요?”
“엿들었군. 그래, 사정이 있어. 그런데 이 마을은 별로 손님을 반기지 않던데.”
“아아.”
안나는 알만하다는 투였다.
“묵을 곳이 필요해요?”
“그래.”
“얼마나?”
이제부터 미츠이는 어떤 종류의 호의가 돌아올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대화가 기꺼워졌다. 그는 이런 종류의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별로 관심 없는 듯 굴었지만 눈은 벌써부터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글쎄. 두 달 정도?”
그의 눈이 약삭빠르게 안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 방 마음에 들어요?”
“무슨 방?”
미츠이가 시치미를 뗐다.
“어제 묵은 방 말이에요. 손님방.”
“아아. 거기….”
미츠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원래 잠자리를 별로 가리지 않아.”
“그럼 빌려줄게요.”
“뭐어?”
미츠이가 놀란 목소리로 되묻자 안나가 코웃음을 쳤다.
“입.”
그녀가 씰룩대기 시작한 미츠이의 입꼬리를 가리켰다.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자 안나는 훗 하고 웃었다.
“점심 먹기 전까지 여기 안내해 줄게요.”
안나가 말했다.
두 사람은 저택의 동쪽을 쭉 돌아다녔다. 공용 공간은 1층에, 손님들이 쓰는 공간은 2층에 있었다. 저택 동쪽은 대부분 숲으로 둘러싸여서 어디를 통해도 울창한 나무가 보였다. 반면 서쪽은 모조리 바다를 보고 있었다. 정원으로 통하는 창문을 열면 깎아지를 듯한 하얀 절벽 아래서 소용돌이치는 파도의 굉음이 들려왔다.
만약 길을 잃으면 창문 너머로 무엇이 보이는지 확인하면 된다고 안나는 말했다.
“내 방은 서쪽에 있어요.”
“네 오라버니 방과 정반대군?”
“원래는 료짱 방도 서쪽에 있었어요.”
안나가 툴툴거렸다.
“그런데 바다 근처는 시끄럽다고 옮겼어요.”
점심 무렵 아래층에서 종이 울려 식당으로 내려가보니 양식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종을 울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안나가 말한 요시노상일 것이라 미츠이는 막연히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핏물이 어린 스테이크를 잘라먹었다. 안나는 이번에도 무지막지하게 먹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쉴 새 없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쓸어 먹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하게 자기 자리를 정리하고는 턱을 괴고 미츠이를 쳐다보았다.
“왜?”
“밋짱이라고 불러야 하나?”
원하는 답을 독촉하는 어린아이처럼 안나가 짓궂은 얼굴을 했다.
“불러야 하나?”
“마음대로 해.”
미츠이가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여자한테 받은 거예요?”
안나가 손수건을 가리켰다.
“아니.”
반사적으로 대답해 놓고서 미츠이는 “아.”하고 정정했다.
“여자한테 받은 거긴 하지.”
“에. 바람둥이네.”
“아니거든?”
두 사람은 잠시 티격태격했다. 뜬금없이 서랍 첫 번째 칸에 들어있는 물건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그는 안나에게 한 번도 쓰지 않은 것 같은 남자 옷들과 약간의 장신구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지 물었다.
안나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안나는 그곳에 그런 물건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눈치였다. 저택에 누군가 온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고 최근 몇 년 동안은 손님방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소짱의 것일까?”
안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짱?”
“응. 지금은 멀리 나갔어요. 슬슬 돌아올까나?”
그렇게 말한 다음 미츠이를 기묘하리만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희 첫째 오라버니는 자주 나가는 모양이지?”
“응. 근처 섬에 별장이 있거든요. 파도가 잔잔할 때가 많지 않아서 한 번 거기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어요.”
아무튼 소짱의 물건이라면 버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안나는 말했다.
“그 외에는 마음대로 써도 괜찮아요. 밋짱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됐다고 료짱한테는 내가 말해둘게요. 료짱, 이제는 손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방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떠나려고 정리해 두었던 트렁크 짐을 하나하나 다시 풀었다. 외출복 두어 벌과 속옷, 밤중에 걸치는 가운 한 벌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옷장에 첫날 입었던 코트를 걸다 말고 가슴이 벅차올라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낡아빠진 골동품점에서나 맡을 수 있을 법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냄새마저도 아주 멋진, 이 방에 걸맞은 냄새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횡재였다. 그동안 여자들의 호의에 기대어 하룻밤 숙식을 해결하곤 했지만 이렇게 좋은 곳에서 묵은 적은 많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풀릴 거라고 미츠이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저택으로 향할 때부터 마음 한 구석으로는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을까 은근히 바라기는 했었다. 하지만 정말 현실로 이루어지리라 믿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저택에 구슬릴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안나는 지금 저택에 어른이 한 사람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럼 나중에는 돌아온다는 건가? 괜찮은 건가?’
돌이켜보면 안나는 내내 태평하기만 했다. 안나가 예의범절에 무관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그렇게 엄격한 분위기의 집안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안나는 미츠이가 생각한 것보다 저택일에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뭐, 괜찮겠지. 갑자기 내쫓기야 하겠어.’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참으로 느긋해지는 것이었다.
미츠이는 저녁 시간까지 빈둥거리면서 간소한 짐을 드문드문 자리에 정리해 두었다. 안나의 말대로 서랍 첫 번째 칸은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 내일은 노리오에게 다시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마을에 오래 머무르게 되었으니 당분간 그의 사정은 걱정 말고 당장의 일부터 해결하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여자랑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 카페 직원이랑은 어떤 사이냐고 장난스럽게 추궁을 해도 좋겠다. 묵을 곳, 먹을 곳에 대한 걱정이 완전히 해소되자 그의 마음은 빠르게 느긋해졌다.
저녁을 먹고 나자 안나는 정원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놀이들─넓적한 나무판으로 공을 쳐서 점수를 매기는 것으로 안나는 이것을 ‘크리켓’이라고 불렀다, 이 놀이를 하려면 값싼 천으로 만든 공을 쓰는 게 좋다고 했다, 멀리 치면 바다까지 날아가기 일쑤였으므로─에 대해 소개해 주었다. 혹은 테니스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파도가 높지 않은 날에는 해안까지 내려가서 뱃놀이를 할 수도 있었다. 절벽 쪽으로 나가면 작은 쪽문이 있는데 그 문을 통해 쭉 내려가다 보면 작은 해안이 나온다고 했다.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하면서 안나는 별로 열정적이지 않았다. 본인은 움직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때는 자신도 야외활동을 좋아했지만 큰 오빠가 자주 돌아오지 않고 이곳에 묵는 손님들도 정원에서 노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공을 가지고 놀거나 뱃놀이를 나간 지 오래됐다고 했다.
“그럼 내일은 내 상대를 좀 해줘.”
미츠이가 말하자 안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살피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에는 조금 뒤척였던 것 같다. 그는 잠깐 눈을 떴는데, 사방에서 풍겨오는 짙은 흙냄새와 풀 냄새 때문에 자신이 깜깜한 숲 속에 서 있는 줄 알고 흠칫 놀랐다. 곧이어 정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백한 하얀 달이 검은 바다를 가르며 은빛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저택의 돌벽이 뿜어내는 냉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꿈의 주민이 된 자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미츠이는 정원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물방울이 맺힌 키 큰 푸성귀들이 그의 얇은 가운을 적시며 휘어졌다. 눈앞이 작은 촛불로 희끄무레하게 비춘 어둠 속의 풍경처럼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미츠이는 자신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존재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가냘프고 슬픈 존재가 이 저택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가슴이 얼어붙을 만큼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한편으로 무척이나 슬프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미츠이는 그를 돕고 싶었다. 한편으로 달아나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래서 정원에 서 있던 것이 아닐까? 그는 도망치던 중이거나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나선 것인지 모른다. 방이 추웠다. 방이 너무나도 추웠다.
그는 잠결에 비척대며 일어나 장작 몇 개를 벽난로 안에 던져놓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나이트가운에 달려 있던 황동 단추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시트를 들추고 침대 아래를 손으로 훑어보아도 어디로 간 건지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밖을 두리번거리던 미츠이는 얼마 안 가 문 앞에 가지런히 차려진 아침밥을 소반 째로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4
저택에서의 나날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미츠이는 안나와 한 약속을 지켰다. 그는 거의 매일같이 정원으로 나가서 그녀와 공놀이를 했다. 크리켓보다는 테니스를 더 자주 했다. 두 사람은 거센 바닷바람을 등진 채 고함을 지르면서 정돈되지 않은 잡초투성이 정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한바탕 공을 따라 뛰다 보면 주방에서 누군가 종을 울려 점심시간을 알렸다. 그러면 두 사람은 의자와 장비를 챙겨 그 넓고 공허한 식당으로 되돌아갔다. 미츠이는 종을 울린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실 그동안 그가 이 저택에서 만난 건 고작해야 열두 살 정도 먹은 것 같은 안나와 첫날 이후로는 조금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 미야기 료타뿐이었다.
안나는 일광욕을 즐겨했다. 안나는 아침마다 정원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햇빛 쬐는 것을 좋아했다. 객식구가 된 첫날 미츠이가 스포츠를 하자고 정원으로 나왔을 때도 안나는 일찍부터 그곳으로 나와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의자 위에 늘어진 안나의 몸이 태양 아래서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츠이가 정말로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안나는 그를 발견하자 얼떨떨하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나는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미츠이를 꼼꼼하게 살피더니 이렇게 평했다.
“금방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 같아.”
“이봐, 건장한 사내한테 할 소린 아니지 않냐?”
“흠.”
의자에서 내려온 안나가 미츠이 앞에 섰다.
“그러면 오랜만에 한 게임 정도는.”
그녀는 어딘가 기운 빠진 투로 말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정원에서 크리켓을 했다. 안나는 창고에서 편평한 크리켓 배트와 낡아빠진 공을 꺼내왔다. 바다까지 공을 날려버려도 상관없다고 했다. 버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낡아빠진 공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미츠이는 한 번도 울타리 너머로 공을 넘기지 못했다. 그제야 안나는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안나는 크리켓을 소짱이 알려주었다고 했다. 이 집에서 크리켓을 가장 잘하는 것도 소짱이었다.
“소짱은 몇 번이고 저 울타리 너머로 공을 넘겼어요. 그래서 집에 공을 아주 많이 만들어 뒀어요.”
안나가 절벽 너머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바람 때문에 두 사람 모두 고함을 지르듯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공 좀 잘 던져봐!”
“잘 던지고 있거든!”
“너 방금 건방지게 말하지 않았냐?”
“아니거든!”
“맞잖아!”
공놀이를 하다 보면 점심까지는 시간이 금방 갔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안나가 방으로 돌아가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얼마 안 가 미츠이는 저택을 산책하는 새로운 취미를 찾아냈다.
무작정 복도를 걷다 보면 처음 보는 장소나 새로운 물건들이 반드시 나타났기 때문에 저택은 곧 그의 좋은 관광지가 되어주었다. 안나는 고작해야 미츠이에게 큼지막한 복도, 이 집을 연결하는 큰 줄기가 되는 길들을 소개해주었을 뿐이었지만 그것 말고도 이곳에는 어딘가로 통하는 자잘한 통로나 복도가 많이 있었다.
마치 짐승의 몸을 반으로 쪼갠 다음 그 안에 존재하는 뼈와 살점, 핏줄과 신경이 구불구불 얽힌 모양새를 본떠서 지어진 것만 같은 건물이었다. 복잡하고 난잡해 보이지만 그 나름의 규칙이 있었고 한 번 익숙해지면 금방 길을 외울 수 있었다.
정말이지 멋진 곳이었다. 이국에서 왔을 것이 분명한 대리석 조각상과 골동품들, 값비싸 보이는 도자기들이 불쑥 튀어나오는가 하면 계단의 난간, 문고리, 방문마다 멋스럽게 새겨 넣은 홈과 장식들이, 일상적으로 손을 타는 것 하나하나가 감탄스러울 만큼 집착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는 금방 이 저택에 정을 붙였다.
아침부터 점심까지는 안나와 정원에서 크리켓이나 테니스를 하고 점심을 먹은 다음에는 저택을 산책하는 일과가 이어졌다. 때로는 안나와 함께 정원에서 일광욕을 하기도 했다. 가까이서 본 안나는 첫인상과 달리 그렇게까지 창백하지 않았다. 햇빛 아래서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는 혈색이 돌고 활기차보였다. 미츠이의 많은 부분을 시원치 않게 생각하던 안나도 얼마 안 가 그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미츠이의 장점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금방 그를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미야기 료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이 주일쯤 흘렀을 때였다. 그동안 미야기는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식사도 따로 했었다. 미츠이는 그가 제대로 식사를 하기는 하는 것인지, 식당에서 드는 점심과 저녁은 언제나 지나치게 푸짐해서 아침을 가져다 놓는 조그만 소반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과연 그의 방문 앞에는 어떤 식으로 음식이 매번 차려지는지를 막연히 궁금해하곤 했다.
한 번은 미야기의 방 앞을 얼쩡거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소리 죽여 그 앞을 지나가도 안에서는 인기척 한 번 들리지 않았다. 식사가 막 끝났을 시간인데도 소반이나 빈 그릇이 나와있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불쑥 식당에 나타난 것이다.
미야기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마포 셔츠 위에 베스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 미츠이에게 건성으로 눈인사를 한 다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안나는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둘째 오빠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미야기도 미야기대로 자신의 여동생이 보여주는 무관심한 태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그는 오로지 음식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수십 가지 식기의 용도를 정확히 구분해서 사용했다.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나이프를 들고 닭고기를 들추어 보더니 “당근이네.”라고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그는 맞은편에 앉은 미츠이와 조금이라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거의 들지 않았다. 미츠이가 활기차게 말을 건네면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츠이는 마주 보고 앉은 미야기의 존재를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떠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빈 의자를 뒤늦게 발견하고서야 그가 소리 없이 식당을 빠져나간 지 오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첫째 오라버니도 저런 식이냐?”
미츠이가 툴툴대자 안나가 닭다리를 요란하게 뜯으며 말했다.
“소짱은 료짱이랑 달라서 나한테 알은 체도하고 잘 놀아줘요.”
발을 까딱이다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그건 꼭 밋짱 같네.”
만약 미야기가 미츠이만을 유난히 불편해했더라면 미츠이는 처음부터 그에게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안나의 말에 따르면 미야기는 원래부터 낯을 가리는 편인 데다 저택에 머무는 객식구들에게 다소 불친절한 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특별히 미츠이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를 향한 냉대는 이 저택을 방문했던 모든 객식구에게 공평하게 돌아갔던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미야기의 태도는 어딘지 미츠이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미츠이는 여태까지 자신을 이토록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에게 친절했다. 항상 그래왔다. 여자들은 금세 알은체를 했고 그가 하는 말에 쉽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그를 무서워하거나 경계하는 여자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한 부류의 여자들은 주의 깊게 미츠이를 관찰하다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경계를 풀고 그를 자신의 마음 앞에서 서성이는 손님 정도로는 대접해 주는 법이었다. 실은 남들보다 훨씬 예민하고 폐쇄적인 인간일수록 한 번 마음을 열면 그 상대에게 극진해지는 법이다.
그런가 하면 남자들은 어떠한가. 남자는, 남자들은, 심지어 미츠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조차 그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미츠이를 쉽게 신뢰했고 걸핏하면 자신이 벌여둔 사업이나 성과를 떠들어 대면서 그에게 존경받을 수 있기를 남몰래 바랐다. 미츠이는 자신이 수완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사실에 별로 우쭐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호의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대의 세계를 미츠이는 평소에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있어 미야기의 차갑고 폐쇄적인 태도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단지 미야기가 부끄러움을 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좋을 대로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어색하게 여기는 것 이상으로 미야기는 미츠이를 무척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츠이가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결코 마주칠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듯 철저하게 공간을 나누어 썼고 동선도 겹치지 않게 피해서 돌아다녔다.
미야기가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마주칠 일이 없는 것이라 여겼던 미츠이의 생각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느 화창한 날 오후, 미츠이는 정원으로 일광욕을 하러 나갔다가 절벽 아래서 홀로 해변을 느릿느릿 걷고 있는 미야기를 발견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햇빛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미야기는 무척 평온한 모습이었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날따라 수면이 잔잔하고 파도도 높지 않았다. 해변에는 둥그런 자갈들이 가득했고 끝에는 쪽배가 매여 있었다. 미야기는 쪽배를 탈 생각은 없는 듯했다. 느긋하게 자갈 위를 걸으면서 발끝으로 툭툭 돌을 차기도 하고 가끔 아름답게 생긴 돌을 주워 유심히 살피다가 있는 힘껏 바다 쪽으로 던지기도 했다.
미츠이는 한동안 미야기가 해변을 걷는 모습을 멀뚱멀뚱 구경했다. 날이 맑아서 수평선 너머가 드물게 깨끗이 보였다.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섬 하나가 있었다. 보아하니 일전에 안나가 말했던 소짱이 머무는 별장이 있는 섬 같았다. 최근에는 파도가 잔잔하니 조만간 소짱이 돌아올지 모른다. 미츠이는 해변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미야기는 그새 사라진 후였다.
그 무렵부터 안나와 미츠이가
1
그 저택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지어져 있었다. 두꺼운 천으로 몸을 감싼 귀부인이 의자 팔걸이에 손을 늘어뜨린 것처럼 깎아지를 듯한 백악절벽에 은근슬쩍 걸쳐 있는 아름다운 양옥이었다.
저택은 못해도 19세기 초에 지어졌을 법한 고풍스러운 외향이었다. 지붕은 두 개였는데 개중 더 높은 것이 첨탑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고 그 지붕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작은 분관을 잇는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몇 개 되지 않는 창은 창살로 나뉘었고 벽은 담쟁이덩굴로 무성했다. 외벽 군데군데가 왜가리 배설물로 거뭇하게 때가 타 있긴 했지만 벽을 타고 오르는 억센 풀에 가려져 있었으므로 흠으로 삼기는 어려웠다.
사실 건물은 절벽보다는 숲에 더 가깝게 지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저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발코니가 모조리 바다를 바라보는 서쪽 방향으로 돌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저택의 진짜 방향은, 적어도 그것이 정말로 바라보고자 하는 곳은 숲이 아니라 바다인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저택을 지은 사람도 그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미츠이 히사시三井寿는 어제 막 이 마을에 도착했다. 멀쑥한 회색 프록코트에 그에 비하면 검소해 보이는 크림색 크라바트 차림이었는데, 달고 다니는 몸종도 없었고 짐도 트렁크 한 개만 덜렁 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차림은 이런 외딴 마을에서 무척이나 눈에 띄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부유한 이들은 전부 도시로 떠난 지 오래였다. 거리의 대다수는 아직 구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소매가 나달나달하고 색이 다 빠져 갈색에 가까운 격자무늬 고소데(*일본의 전통 복식에서 통소매로 지은 평상복)를 입고 다녔다.
남자들은 여기저기 실이 튀어나온 잠방이를 입었고 아이를 등에 멘 여자들은 낡아 빠지고 때가 탄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그들은 각자 몫으로 떨어진 삶의 물레방아를 돌리느라 본래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이곳에선 어머니 등에 기대어 있는 갓난아기조차 나이 들어 보이는 듯했다.
미츠이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시선을 끌었다. 그는 인력거도 마차도 아닌 자동차를 타고 왔다. 뚜껑이 없는 T형 포드였는데 도시에서는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차종이었지만(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츠이는 자신이 어느 정도는 검소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이런 곳에서 그런 사실을 알아차릴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차에서 내릴 때 조금 비틀거렸다. 서른 살 좀 넘은 운전기사가 문을 열어주다 말고 반사적으로 그를 부축했다. 기사는 큼지막한 트렁크를 꺼내 발밑에 내려둔 다음 미츠이에게 삯을 받고 자동차를 몰아 마을을 떠났다. 미츠이가 그를 배웅했으므로 아마 두 사람은 본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아무튼지 간에 그는 있는 집 자식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비빌 언덕이 몇 개나 있는, 귀족 작위를 받았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지체 있고 명망 높은 집안의 도련님 말이다. 미츠이 히사시 자신조차 일이 그렇게까지 꼬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악을 상정해 보았다 하더라도 이런 식은 아니었으리라.
요 근래 신경이 곤두서 있긴 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미츠이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정확히는 마을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근래 그가 다녀야 했던 곳들 중에서 비교적 으뜸인 것이다. 고즈넉한 해안선과 희고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절벽의 풍경은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못해도 두 달은 머무를 생각이었는데, 미츠이의 계획을 들은 코이키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두 달이나요?”
코이키는 미츠이의 오랜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다. 몇 년 동안 친구의 여름 별장에 얹혀살면서 방문객들의 시중을 들던 사람인데, 얼마 전 늙은 아버지의 수발을 들기 위해 도시생활을 접고 이곳으로 왔다. 그녀의 아버지 대는 마을의 오랜 토박이로, 어머니를 따라 도시로 떠나기 전까지 코이키 본인도 어린 시절은 여기서 보냈다고 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주변에 괜찮은 여관 없어? 너무 비싼 것만 아니면 상관없는데.”
그렇게 대답하면서 미츠이는 거리낌 없이 문간에 몸을 기댔다. 고작 하루 묵은 것뿐인데도 벌써부터 자기 집처럼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코이키는 이 남자가 자신의 주인이 편지에서 당부를 거듭한 ‘다소 예민하고 거친 부분이 있는 손님’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여관이라면 있지만 그렇게 오래 숙박하는 손님을 받아줄지는 의문이에요.”
코이키가 대답했다.
“왜?”
“오랫동안 도련님 시중 들 형편이 되는 곳이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 난 또.”
미츠이는 별 것도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거라면 문제없어. 난 그렇게 까탈스럽지 않거든. 끼니나 이부자리가 좀 싸구려라고 해서 투덜거리면 사내라고 할 수 있나.”
코이키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고, 미츠이도 그녀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코이키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미츠이는 그녀를 캐묻는 대신 내버려 두었다.
“옷 좀 빌릴게. 어제 그대로 입었다간 도련님이라고 안 받아줄까 봐 겁나거든.”
능청스럽게 미츠이가 말했다.
이른 아침이었다. 흙먼지가 날리던 거리는 안개로 자욱했다. 소금기 어린 해무 때문에 이곳의 목조 건물들은 모두 새까맸고 유리창이 뿌옇게 슬어 있었다. 미츠이는 보이는 여관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방이 있냐고 물었는데, 매번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사정을 설명할 기회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를 외딴 바닷가 마을까지 요양을 하러 온 병치레 잦은 도련님이거나, 아니면 집안 어르신의 미움을 받아 추방당한 탕아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미츠이를 지나치게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주민들은 멀리서부터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막상 가까워지면 흥미 없다는 눈으로 바닥을 보며 걸었지만 지나치고 나면 등을 흘끔거리며 반드시 멈추어 서곤 했다. 미츠이도 그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거나 도로를 걷고 있으면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관을 다섯 군데나 돌았지만 결국 묵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어느덧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안개가 채 다 걷히지 않은 거리 위로 어렴풋한 음식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더럽고 지저분해 마지막까지 들어가고 싶지 않아 했던 여관에서마저 퇴짜를 맞자 미츠이는 무척 마음이 상했다. 그는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아까의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조급하고 사나운 목소리였다.
“사람을 바보로 아는 거냐. 이런 시골 마을에서 장사하는 주제에 손님 취급이 이렇게 박해서야.”
어쩔 수 없이 코이키의 집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해가 높게 뜨면서 마을을 삼켰던 안개가 서서히 걷혀가고 있었다. 안개는 습윤한 비밀을 갈퀴처럼 끌어안고 주춤거리며 잠시간 이 마을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츠이는 갑작스럽게 드러난 마을의 공간감에 위화감을 느끼고 구둣발로 바닥을 문질러 보았다. 그러자 잘 포장된 돌바닥이 흙속에서 번들거리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마을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도로였다. 수레 서너 대가 무리 없이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포장된 도로가 중심부까지 뱀처럼 굽이치며 뻗어 있었다.
목조 건물들은 노쇠하긴 했어도 하나같이 그 규모가 상당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이 정도 되는 규모의 마을에 그 흔한 노점 하나 없었다. 넓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일제히 닫혀 있는 수많은 문들. 그리고 시선들. 알 수 없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창문 틈으로 그를 훔쳐보던 여자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집안으로 사라졌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미츠이의 기분은 점점 묘해졌다. 그의 신분이나 가계 사정은 애초부터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처음부터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원치 않았는지 모른다. 안개는 이제 거의 다 걷혔다. 다리 너머로 새카맣고 깊은 숲이 펼쳐졌고 서쪽으로 바다가 끝없이 이어졌다. 멀리서 지빠귀 소리가 들려왔고 파도도 더욱 높아졌다. 한낮의 생명력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으로서 명료하게 사고하고 이치와 계산이 밝을 때가 찾아온 것이다.
이 시간대에는 사물과 인간을 헷갈릴 수 없다. 태양이 세상을 축복하는 시간에는 무엇 하나 함부로 요사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 그 저택이 보인 건 바로 그때였다. 울창한 숲 너머로 삐죽 솟구쳐 올라있는 그 암청색 지붕은, 얼핏 봐도 이인관異人館(*막부 말기, 메이지 시대에서 주로 서양 사람이 거주하려고 지은 서양식 건물)이나 서양식 주택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지붕은 이런 데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못한 것이었다. 미츠이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돌이켜 보면 마을 군데군데 비슷한 양옥이 있기는 했다.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널찍한 건물도 의양풍擬洋風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 마을에도 지주가 사는 것일 수 있었다. 어쩌면 저기 보이는 저택이 그의 집인지 모른다. 미츠이는 그런 류의 사람들을 다루거나 대하는 데 능숙했으므로 저곳에 누가 사는지 자연히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코이키네로 돌아갔더니 집안이 갓 지은 쌀밥 냄새로 가득했다. 그녀는 당근과 조개를 섞어 만든 솥밥에 바짝 말린 무 졸임과 젓갈을 내놓았다. 미츠이는 이 조촐한 밥을 몇 술 뜨다 말고 물었다.
“저택에는 누가 살지?”
“어느 저택이요?”
“숲 쪽에 있는 거대한 거 말이야.”
“아아.”
코이키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야, 그게?”
미츠이가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예전에는 미야기가家가 살았다지요. 그 집안은 귀족인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되려 파산을 면치 못하고 어느 부유한 남작가에 얹혀살고 있는 신세라고 했어요. 저 저택도 원래는 그 남작 거였대요. 그런데 지금은 미야기가家가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제가 어릴 적에 그 집 사람들이 다 떠났다고 했거든요.”
“지금도 살고 있어.”
뒤쪽 바닥에서 갑자기 대꾸가 들려왔다. 쪼글쪼글하다 못해 몸집이 통째로 줄어든 듯한 노인이 이불속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 그곳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던 미츠이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황급히 태연한 척을 하며 밥상머리로 몸을 돌렸다.
“그 남작이랑 같이?”
미츠이가 딴청을 피우듯 물었다.
“아니오, 도련님. 그 저택은 미야기가家의 것이에요. 오래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습죠.”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지붕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그 집을 통째로 받았거든요. 그 남작으로부터 말입죠.”
노인이 이죽거렸다.
“묵을 곳은 구하셨나요?”
코이키가 물었다. 큰 기대가 없는 투였다.
“아니. 전부 퇴짜를 놓더군. 저녁이 되기 전에 떠날 거야.”
미츠이가 대꾸했다.
“여기가 좀 그래요. 외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제야 코이키가 솔직하게 말했다.
“금방 떠나실 줄 알았어요. 오래 머무르실 줄 알았더라면 도련님을 여기까지 모셔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지금은 떠돌이 신세니까. 어디든 적당한 곳으로 가게 되겠지.”
“차편을 찾아볼게요. 역까지 꽤 걸어야 하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를 맡기지 말 걸 그랬군. 못 걸을 거리는 아니니까 걸어서 가지.”
미츠이가 그릇을 겹쳐 놓고 상을 물렸다.
“근처에 전화 없나? 회관에는 있을 법도 한데.”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버님, 회관에 전화가 있던가요?”
“없어.”
“내 코트는 어디에 뒀지?”
미츠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지기 전에는 떠나야겠어.”
툴툴거리며 그가 말했다.
그 사이 바람이 거세졌다. 거친 해풍이 도로를 휩쓸며 집집마다 창을 뒤흔들었다. 코이키가 배웅하겠다고 나섰지만 미츠이는 완강히 거절했다. 제대로 손님 대접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코이키는 미츠이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별장에서 일할 때 받은 건데 팔기 아까워서 가지고 있었어요.”
‘아아. 필요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미츠이는 예의를 차려 손수건을 받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코이키는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밖으로 나오자 묵직한 공기가 느껴졌다. 살짝 눅눅한 흙냄새가 바다의 짠내와 뒤엉키는 중이었다. 수평선 너머로 드문드문 먹구름이 깔려 있었다. 무심히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다. 인력거꾼이라도 찾아볼까 싶었는데 속 편한 생각이었다. 미츠이는 이제부터 도보로 기차역까지 되돌아가야 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별로 즐겁지 않은 여정이 될 것이다. 왼쪽 무릎을 문지르며 미츠이는 혀를 찼다. 처음에는 빠르게 걸었지만 점차 동작이 느릿느릿해졌다.
결국 다리 앞에서 그는 한 번 멈추어 섰다. 묵직한 트렁크를 내려놓자 가방의 가죽끈 모양대로 빨갛게 패인 손바닥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은 아까보다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어렴풋하게 보이는 저택의 지붕의 꼭짓점이 시야 끝에 붙잡혀 점점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미츠이는 손바닥을 주무르다 말고 다시 트렁크를 집어 들었다.
오솔길로 방향을 틀자 기다렸다는 듯 예감이 달려 들었다. 대지의 냄새, 징그러울 정도로 억세고 생명력 넘치는 풀 냄새와 병들어 삭아가는 나무뿌리의 냄새가, 희고 작은 꽃이 풍기는 시고 달큼한 냄새가 끓어오르는 어둠 속으로 그의 몸이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2
숲은 냄새가 소용돌이 치는 동굴 같았다.
알 수 없는 것에 이끌리듯 발을 들여놓고서는, 미츠이는 금방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이곳은 너무도 불친절했다. 그가 오솔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축 늘어진 실처럼 게으른 곡선을 그리다 말고 무성한 풀숲으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있었다. 정수리를 가까스로 스치고 지나가던 너도밤나무의 낮은 가지들은 본격적으로 그를 위협하고 있었고, 가지는 앞으로 밀면 한순간 순순히 물러나는 듯했다가 유연한 탄성으로 휙 하고 되돌아와 그의 목덜미며 어깨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미츠이는 방향을 다시 확인했다. 지붕은 아까보다 가까워졌지만, 그저 언덕을 오르기만 해서는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물방울이 정수리를 적시더니 잠시 후 빗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황급히 나무가 무성한 쪽으로 방향을 트는 동안 빗방울은 점점 더 거세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지대가 편평해지더니 거기서부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거기가 진짜 길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미츠이는 저택으로 향하는 포장도로를 내버려 두고 애꿎은 산길을 올라가는 중이었던 것이었다. 저택의 입구는 대체 어디로 나 있는 걸까? 마을을 좀 더 꼼꼼하게 둘러보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으리라. 뒤를 돌아보던 미츠이는 혀를 찼다. 그 자신의 미련함 때문이라기보다 상황에 대한 짜증스러움을 표출하는 데 가까웠다.
도로로 다져진 완만한 산길을 올라가는 동안 미츠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로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돌틈 사이로 잡초가 길게 뻗어 나와 있고 가지치기 되지 않는 너도밤나무들이 빽빽하게 서로 얼기설기 얽혀있었다. 가지들은 아치형 천장을 형성하면서 일종의 차양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숲보다 훨씬 어두침침했다. 그 어둠 끝에 저택이 있었다. 하인들이 쓰는 것으로 보이는 쪽문이 나 있었다.
미츠이는 건물을 빙 둘러 바다 쪽으로 빠져나왔다. 곧바로 탁 트인 풍경과 새하얀 절벽이 나타났다. 철제 울타리가 둘러진 정원 아래로 강렬한 파도 소리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푸성귀 사이로 드문드문 라일락이 피어 있긴 했지만 정원은 딱봐도 버려진 지 오래된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러한 풍경은 오히려 저택의 고전적인 모습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보기 드문 고저택이었다. 지붕 밑으로 들어온 미츠이는 코트를 털면서 정문을 살폈다. 문고리 위에는 노커가 달려 있었는데 그마저도 훌륭했다. 어찌나 섬세하게 조각되었는지 마치 고리 자신이 그러한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이 문을 드나들 사람의 자격을 직접 판단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커는 미츠이에게도 일종의 경고를 남기려는 것 같았다. 문에 가까이 다가선 그를 비추는 황동색 고리의 둥그런 부분과 섬세한 조각이 그의 얼굴을 과장되게 일그러뜨리고 사방으로 뭉개고 뒤섞으면서 손님이 아니라 침입자에 가까운 몰골로 미츠이의 신분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는 노커를 붙잡았다.
힘주어 문을 두드렸지만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잠자코 기다리는 동안 빗방울은 더욱 거세졌다. 미츠이는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렸다. 어쩌면 아무도 열어주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이 살짝 열리고, 허여멀건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세요?”
여자아이는 미츠이를 의심스럽게 살피더니 덧붙였다.
“이 마을 사람은 아니네.”
“지나가던 길이야. 혹시 전화가 있다면 쓸 수 있을까 해서.”
미츠이는 보란 듯이 묵직한 트렁크를 흔들며 말했다.
“마을엔 전화가 없다고 하더라.”
“없죠, 거기는.”
여자아이는 다시 한번 미츠이의 행색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훑었다.
“잠깐 기다려요.”
문이 닫혔다가 잠시 후 활짝 열렸다. 여자아이는 하얀 파자마 차림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저택은 미츠이가 거쳐왔던 길보다도 어두침침했다. 로비 정면에 층계참을 두고 두 번씩 꺾어지는 긴 계단이 있었다. 고풍스러운 벽지에서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고, 계단참보다 한참 높은 곳에 나 있는 길쭉한 창문 너머로 먹구름이 번쩍이고 있었다. 번개가 치는 것이리라.
미츠이는 반쯤 젖은 트렁크를 어정쩡하게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새 의자를 끌고 온 여자아이가 벽에 등받이를 붙이고는 쿠션을 밟고 올라가 가스등에 불을 붙였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집사는 어딨지?”
여자아이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바닥으로 내려오자마자 옆으로 의자를 옮기더니 그쪽 가스등에도 불을 붙였다. 아까보다 로비가 조금 환해지자 여자아이는 성냥을 흔들어 껐다.
“집사는 없어요.”
그녀가 말했다.
“전화 쓰고 싶다고 했죠? 전화는 2층 서쪽방에 있어요.”
“코트 벗어둘 곳은 좀 있나?”
“저기.”
여자아이가 로비 구석을 가리켰다. 벽 모서리에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반쯤 젖은 코트를 그곳에 걸었다. 여자아이가 다가와 미츠이의 손에서 트렁크를 빼앗다시피 가져갔다. 몇 발자국 안 가 휘청거리면서 트렁크를 도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겁네….”
“이리 줘. 그냥 내가 들게.”
여자아이는 순순히 트렁크를 돌려주었다.
복도는 깊고 고독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이 낮아서 동굴처럼 소리가 울렸다. 다시 보니 여자아이는 맨발 차림이었다. 반면 미츠이가 만들어 내는 구둣발 소리는 돌바닥을 타고 사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깨워서는 안 될 무언가를 끝없이 자극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발소리는 복도의 오래된 침묵을 깨뜨리고 저택 곳곳으로 울려 퍼지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깨우고 있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하카마를 입고 근엄한 표정을 짓는 남자들과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앉아 눈을 홉뜬 기모노 차림의 안주인들이 어둠 속에서 느릿느릿 삭아가다 말고 화들짝 놀라 침입자를 향해 눈동자를 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영원할 것만 같은 자신의 권력을 한껏 과시하면서, 또 한편으로 어떤 막중한 책임이라도 진 사람처럼 진지하고도 조금 서글픈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색다른 사람들이 나타났다. 남작가家 사람들의 초상이었다. 그들은 앞선 사람들과 달리 서양식으로 갖추어 입은 탓에 신세대처럼 보였다. 휘장을 걸친 채 폐쇄적이고 음울한 표정으로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인간들의 면면을 구경하던 미츠이는 그제야 눈앞의 여자아이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네 주인은 어디 있지? 날 들여보냈다고 괜히 네가 꾸중을 들을까 걱정이군.”
그러자 여자아이가 휙 몸을 돌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미츠이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나는 몸종이 아니라 미야기宮城 안나예요.”
“네가? 네가 미야기라고?”
미츠이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안나는 못마땅해 보였다.
“이거 참, 미안합니다. 당연히 하인인 줄 알고….”
“됐어요.”
“설마 미야기네 따님이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보통은….”
“…….”
그러는 동안 복도가 끝났다. 계단참에는 이름 모를 서양화가 걸려 있었는데 미츠이로서는 처음 보는 그림들이었다. 안나가 말없이 계단을 오르는 동안 미츠이는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안나는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갑자기 권태로워 보였다.
2층에 도착하자 안나는 코너 바로 옆에 붙은 문으로 향했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었다. 이건 안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는지 살짝 당황한 듯했다.
“문이 잠겨 있네.”
“이 방에 전화가 있는 겁니까?”
“네, 그런데 잠겼어요.”
안나는 문에 귀를 대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나요?”
“음….”
안나는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이따 열어달라고 할게요. 급해요?”
미츠이는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그럼 내려가요.”
복도로 돌아왔을 때 날씨는 아까보다 심각해져 있었다. 폭풍이 오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손님을 쫓는 것은 냉혈한이나 하는 짓이다. 창문 너머로 들리는 바람 소리가 살인적이었다. 커튼을 슬쩍 걷어 수평선 너머를 살피던 안나가 미츠이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미츠이는, 누가 봐도 이 지역에 막 도착한 것 같은 눈앞의 외지인은 밑단이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입고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날카롭고 작은 나무껍질을 단 채로 불쌍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디까지 가던 길이에요?”
안나가 물었다.
“음. 옆 마을 기차역까지?”
안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날씨가 궂어서 혼자서는 못 가요. 방을 내드릴게요. 오늘은 여기서 묵어요.”
사실 그것이야말로 미츠이가 가장 바라던 선택지였다. 그는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안나는 대답 대신 코웃음을 쳤다.
안나는 미츠이에게 동쪽 손님방을 내주었다. 중앙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뻗어 있는 2층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모퉁이 방이었다. 안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가구에 먼지가 살짝 쌓여 있긴 했지만 있을 건 다 갖추고 있었다. 서랍, 선반, 화장대와 거울, 협탁 위에는 아름다운 휴대용 램프가 놓였다.
침대도 엄청나게 컸다. 조금 무리하면 세 명은 누워서 잘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안나는 한 시간 뒤에 데리러 오겠다고 말했다. 로비에 걸어둔 코트는 그때 가져다주겠다고, 트렁크는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에 가지고 올라가면 된다고 했다.
“쉬어요.”
그런 다음 문을 닫고 나갔다.
미츠이는 커튼을 치고 자리에 앉았다가 방을 둘러보려고 다시 일어났다. 그는 가장 먼저 서랍을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안에 남성용 나이트셔츠와 깨끗한 속옷, 누가 썼던 것처럼 둘둘 말려 있는 스카프와 커프스에 장식하는 것으로 보이는 단추 따위가 약간의 생활감을 가지고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차례로 서랍을 열어보았다. 나머지 칸은 모두 텅 비어있었다. 다시 맨 위칸을 열어 물건을 조금 뒤적이자 옷가지 밑에서 책 한 권이 나왔다. 불과 2년 전에 유행했던 단편 소설집이었다. 미츠이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흥미 없이 몇 번 팔락거리다 도로 덮은 다음 원래 있던 자리에 잘 밀어두었다.
창가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습관처럼 미츠이가 명령조로 말했다.
경첩이 삐걱거리며 문이 열렸다. 안나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있었다.
“식사하세요.”
“여기는 하인이 없습니까?”
머쓱함을 감추려고 미츠이가 괜히 툴툴거렸다.
안나는 아까와 다른 방향으로 미츠이를 안내했다. 여긴 대체 방이 얼마나 있고 복도는 몇 개나 되는 걸까? 어느새 두 사람은 희미한 줄무늬 벽지로 도배된 복도를 걷고 있었다. 보이는 것 이상으로 저택은 굉장히 넓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일꾼이나 하인을 단 한 사람도 마주치지 못했다. 미츠이는 앞서 걷는 안나의 등을 멀뚱멀뚱 응시했다. 안나의 등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벽이 사방으로 반죽처럼 늘어나면서 공간이 어그러지는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이자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좁고 낮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층계참 아래서 음식 냄새가 풍겨 왔다.
‘요리사는 있는 모양이군.’
그는 슬슬 이 저택을 과연 몇 명이 관리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복도 끝에 위치한 식당이 보였다. 그곳만 주황색으로 불이 밝혀져 있었다. 식당은 연회장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컸지만 실제 연회장으로 쓰기에는 살짝 모자란 규모였다. 12인용 식탁이 길쭉하게 빠져 있었고 높은 천장에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식기는 마주 보는 위치에 2인분만 놓였다.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자미네.”
뚜껑이 덮인 납작한 냄비를 열어본 안나가 중얼거렸다.
식사는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동양식과 서양식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메인 디쉬는 가자미를 매콤한 양념에 졸인 것으로, 구성은 여관에서 내놓는 정찬식으로 꾸려져 있었지만 밥 대신 빵이 나와 있었다. 고기와 건포도를 섞어 만든 짭조름하고 달콤한 성탄절 푸딩과 설탕에 절인 자두, 구운 소시지와 콩은 놀랄 만큼 맛있었다. 안나는 식성이 좋아서 정말 끝없이 먹었다. 미츠이가 식사를 마친 뒤에도 남은 자두 한 알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미츠이가 손수건으로 입을 훔치면서 말했다.
“정말로 미야기네 아가씨 맞습니까?”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정말이지 귀족의 예의범절하곤 너무나 동떨어져 있던 것이다.
“맞는데요.”
안나가 음식을 삼키며 대꾸했다.
“어른은 어디 계셔?”
미츠이가 재미있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안 계셔요.”
“그럼 지금 집에 어른이 아무도 없어?”
안나는 모호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야. 설마 저택에 너만 있는 건 아니지? 식솔들은?”
안나는 말없이 접시를 기울여 남은 양념과 감자를 쓸어먹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잠시 후 요란하게 숟가락을 던지듯 내려놓고 대답했다.
“요시노상(さん)이 주방에서 일해요. 금요일에는 시장에도 다녀오고. 가끔 심부름을 시키면 멀리 있는 도서관에도 갔다 와요.”
“요시노 말고 다른 하인들은?”
“글쎄요. 여긴 보기보다 그렇게 할 일이 많지는 않아서…. 음, 모르겠네. 일꾼은 오빠가 고용하니까.”
“오빠?”
“응. 잘 안 나오지만.”
안나는 접시를 밀고는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의자에 늘어졌다.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배부르다.”
“네 오라버니는 따로 식사하는 거야?”
미츠이가 물었다.
“네. 손님이 온 건 알고 있는데 나중에나 인사하러 내려올 거예요.”
안나는 특히 둘째 오빠가 낯을 많이 가린다고 했다.
“요즘 료짱(ちゃん)은 손님이 와도 방에서 잘 안 나오려고 해요.”
“그러냐.”
“그래도 인사는 하라고 말해둘게요.”
두 사람은 빈 그릇을 내버려 두고 로비로 나왔다. 안나는 미츠이에게 코트와 가방을 넘겨주었다. 안나가 잘 자라고 인사하자 미츠이는 내심 그녀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버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혼자서 길을 찾을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안나는 손님을 이 넓은 저택에 혼자 내버려 둘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미츠이가 가방을 챙기자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은 방으로 가져다 줄게요.”
“고맙다.”
“화장실은 맞은편. 욕실은 복도 끝에 있어요. 필요한 거 있으면 적어서 문 밑으로 밀어두면 돼요. 아침 가져다 놓으면서 확인하고 요시노상한테 말해둘게요.”
“응.”
그런 다음 안나는 미츠이에게 성냥갑을 건넸다. 어두우면 복도나 방에 있는 가스등에 불을 붙여도 상관없다면서 방에 달린 등과 램프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내일 보자고 말한 뒤 문을 닫고 떠나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저녁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닌 것 같았다. 미츠이는 방에 시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폭풍 때문에 밖은 벌써부터 깜깜하기만 했다. 일찍 자고 싶지 않았지만 막상 침대에 앉자 머리가 추를 매달고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것처럼 묵직하게 느껴졌고 뒤늦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구두의 가죽이 두 발을 숨 막힐 듯 꽉 조여왔다.
그는 더듬더듬 구두를 벗었다. 내친김에 옷까지 갈아입은 다음 짐을 트렁크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침대로 돌아왔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어제는 몇 시간 동안 자동차에 구겨 앉아 있었고 오늘은 아침부터 여관을 찾아온 마을을 돌아다닌 데다 오후에 있던 산길의 고행은 그에게 너무나 고된 것이었다. 저택은 또 어떠한가. 이 저택은 지나치게 넓고 공허해서 쉴 새 없이 걸어야 한다.
복도는 차가운 돌로 되어 있고 창문은 죄다 뾰족한 데다 조금이라도 넓어서 빛이 잘 들게 생긴 것들은 모조리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가. 계단도 너무 많았다. 깨어난 다음에는 분명 쉽게 길을 잃을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헤매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 어느새 미츠이는 저택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어디를 걷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리석 위에 깔린 두꺼운 카펫과 벽에 걸린 서양화로 미루어 보아 분명 저택의 어딘가인 것 같았다.
간간히 벽을 더듬거릴 때마다 액자의 오돌토돌한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복도 끝에서 누군가 미츠이를 부르고 있었다. 「히사시.」 죽기 전에 내뱉는 마지막 숨처럼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히사시….」
「여기야. 이쪽이야.」
갑자기 사방이 깜깜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어두우면 등에 불을 붙여도 상관없어요.’ 그렇지, 어둠을 밝히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 법. 그러니까 돌아가자. 어디로? 그런데 이건 누가 했던 말이지? 이건 누구의 목소리였지?
그는 눈을 떴다.
3
이른 아침 문을 열어보니 안나가 다녀갔는지 소반 위에 덮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간소한 차림이었지만 양이 많았고 아직 따뜻했다. 미츠이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뚜껑을 한 차례 털어서 뒤집은 다음 젓가락으로 밥을 잘 나눠가며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내놓았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니 그릇은 사라져 있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던 미츠이는 트렁크를 정리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날이 밝자 저택은 어제보다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안나를 찾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어제 식당으로 내려갈 때 썼던 좁은 계단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협탁과 꽃병 위에는 희뿌옇게 먼지가 앉아있었다.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물건들은 대부분 제자리에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주방도 텅 비어 있었다.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세 사람 분의 그릇이 뒤집어져 있었다. 미츠이가 아침에 내놓았던 빈 그릇도 거기 있었다. 요시노상은 보이지 않았다. 미츠이는 주방 뒤편과 이어지는 쪽문으로 나왔다. 수도와 우물이 있는 작은 풀밭이 있었다.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자 정원이 나왔다.
안나는 거기 있었다. 바닷가 절벽 특유의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어제보다는 부드러웠다. 안나는 축축한 풀밭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햇빛 쪽으로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미츠이는 길게 자란 풀들을 헤치고 안나에게 다가갔다. 안나는 한동안 눈을 뜨지 않고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전화 방 말인데.”
미츠이가 말했다.
“응.”
“열려 있을까? 안내 좀 해줄래?”
안나가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오빠가 열어놨으려나. 료짱이랑 인사했어요?”
“아니.”
“그럼 열어달라고 부탁하면서 인사하라고 해야겠다.”
안나는 무거워 보이는 의자를 번쩍 들어서 정문 지붕 밑으로 옮겨둔 다음 실내로 돌아왔다. 그들은 초상화의 복도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전화방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넓은 창 너머로 숲이 보이는 멋진 복도가 나왔다. 푸르고 반투명한 그림자가 목제 바닥 위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문이 두 개였는데 안나는 오른쪽이 응접실이고 왼쪽이 둘째 오빠가 묵는 방이라고 알려주었다.
“료짱. 료짱.”
안나가 문을 두드리며 보채듯이 불렀다.
“손님이야. 손님이 전화 쓰고 싶대. 문 열어줘.”
한동안은 대답이 없었다. 문을 두들기던 안나의 행동이 점점 거칠어졌다. 자신의 오빠 이름을 연달아 부르며 발로 문을 차고 고함을 치다가 마침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미츠이는 갑작스럽게 격양된 안나의 행동에 살짝 겁을 먹었다. 안나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안나가 악을 질렀다.
“문 열어! 당장 문 열란 말이야!”
마침내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마지못한 것처럼 스르르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겨우 얼굴을 내미는 정도여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광분한 여동생에게 무심히 대꾸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들려왔다.
“시끄러워, 안나.”
“료짱. 손님한테 인사해.”
언제 그랬냐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안나가 말했다.
“이따가.”
“지금 뒤에 있어.”
안나가 미츠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빨리 나와서 인사해. 손님한테 제대로 인사하라고 한 건 오빠잖아.”
“…….”
일이 이렇게 되자 미츠이가 머쓱하게 나섰다.
“실례합니다. 미츠이 히사시라고 합니다. 이제 비 때문에 잠시 신세 졌습니다. 떠나기 전에 전화 좀 빌릴 수 있을까요.”
“…….”
“료타!”
안나가 보챘다.
결국 문간에 선 남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첫인상은, 미츠이의 머릿속에 가장 직관적으로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그가 어리다는 것이었다. 미야기가의 둘째 아들은 키가 작고 덥수룩하게 머리를 내려서 좀 수더분해 보였다.
미야기는 자신을 결국 문밖으로 끌어낸 자신의 여동생을 흘겨보다가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뜸을 들였다. 미츠이를 잠시 쳐다보기는 했지만 금방 시선을 피해버렸다.
“미야기 료타입니다.”
그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쉬고 계신데 괜히 방해한 건 아닐까 싶어서 미안하네요.”
“아뇨.”
미야기는 다시 머리끝을 매만졌다.
“전화방은… 열어드릴게요.”
복도를 걷는 동안 안나는 미야기에게 왜 전화방을 잠가버린 거냐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미야기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안나가 또다시 참을성을 잃고 화를 낼 기미가 보일 때만 “응.” “알까 보냐.” 정도로 짧게 대답했다. 그는 미츠이와 조금도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미츠이가 안나와 대화하려 할 때는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은 듯 완전히 몸을 돌리고 걸음을 빨리 했다.
미야기는 저택 열쇠를 일부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전화방 문을 열어준 다음 눈인사를 했다. 미츠이가 고맙다며 무심코 미야기 쪽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흠칫하며 물러난 미야기가 깜짝 놀랄 만큼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러한 행동을 들킨 것이 무척 곤란한 것처럼 그는 황급히 무표정해졌다.
“살펴가세요.”
그는 미츠이를 전화방으로 반 강제로 들여보내다시피 하고는 조용히 문을 닫아버렸다.
‘거 참 쌀쌀맞은 도련님이군.’
밖에서 높고 쾌활한 안나의 목소리, 낮고 침울한 미야기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두 사람은 전화방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미츠이는 협탁에 설치된 수화기를 든 채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사이 다시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첫 번째로 건 번호는 허탕이었다. 여관 주인은 그가 찾는 남자가 떠난 지 오래라고 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므로 미츠이는 곧바로 두 번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어떤 여자가 받았다. 그녀는 미츠이가 찾는 남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크게 화를 내더니 그가 어디 있는지 되려 미츠이에게 따져 물었다. 미츠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건 번호는 그쪽에서 받으리라는 기대조차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젊은 여자가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러고는 미츠이가 찾는 남자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했다. 지금은 술을 마시고 잠들어서 전화가 곤란하다고 했다. 대신 전달할 것이 있다면 그대로 전해주겠다고 했다. 미츠이는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왜 거기까지 갔지?”
“큰 마을로 나갔다가 차 주인에게 붙잡혔거든요. 자동차를 버리고 도망치다가 그만 다리 밑으로 뛰어내렸답니다.”
여자가 나긋나긋 말했다.
“아아. 그렇지만 그 주인도 참 끈질기지요. 도난당한 지 일 년은 넘은 자동차라고 들었는데 말이에요.”
“수집광이라고 듣긴 했어. 공장에서 만든 게 아니야. 구주歐洲(*유럽)를 건너온 자동차거든. 그보다 넌 누군데 노리오의 부친 집에 있는 거지?”
“미야노 카페의 직원이랍니다. 시사미 하천에서 둥둥 떠내려오는 것을 제가 건져냈지요. 홋타상은 말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어요.”
여자는 후후 웃더니 말했다.
“그런데 미츠이상이시죠? 훗타상이 말이에요. 정신을 잃은 동안에도 당신 이름을 불렀답니다. 자동차를 돌려줘야 한다나요. 그렇지만 자동차는 이제 없어요.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됐어. 이제 와서 기차역으로 가봤자겠군. 머물 곳을 찾게 되면 다시 전화하지.”
미츠이는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어느새 문밖은 조용해져 있었다. 미츠이가 문을 열자 안나가 앞으로 쏟아졌다. 미야기는 보이지 않았다. 머쓱하게 몸을 일으킨 안나가 자세를 갈무리했다.
“기차역으로 안 가도 돼요?”
“엿들었군. 그래, 사정이 있어. 그런데 이 마을은 별로 손님을 반기지 않던데.”
“아아.”
안나는 알만하다는 투였다.
“묵을 곳이 필요해요?”
“그래.”
“얼마나?”
이제부터 미츠이는 어떤 종류의 호의가 돌아올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대화가 기꺼워졌다. 그는 이런 종류의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무심한 얼굴로 앞으로 벌어질 일에 별로 관심 없는 듯 굴었지만 눈은 벌써부터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글쎄. 두 달 정도?”
그의 눈이 약삭빠르게 안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 방 마음에 들어요?”
“무슨 방?”
미츠이가 시치미를 뗐다.
“어제 묵은 방 말이에요. 손님방.”
“아아. 거기….”
미츠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난 원래 잠자리를 별로 가리지 않아.”
“그럼 빌려줄게요.”
“뭐어?”
미츠이가 놀란 목소리로 되묻자 안나가 코웃음을 쳤다.
“입.”
그녀가 씰룩대기 시작한 미츠이의 입꼬리를 가리켰다.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자 안나는 훗 하고 웃었다.
“점심 먹기 전까지 여기 안내해 줄게요.”
안나가 말했다.
두 사람은 저택의 동쪽을 쭉 돌아다녔다. 공용 공간은 1층에, 손님들이 쓰는 공간은 2층에 있었다. 저택 동쪽은 대부분 숲으로 둘러싸여서 어디를 통해도 울창한 나무가 보였다. 반면 서쪽은 모조리 바다를 보고 있었다. 정원으로 통하는 창문을 열면 깎아지를 듯한 하얀 절벽 아래서 소용돌이치는 파도의 굉음이 들려왔다.
만약 길을 잃으면 창문 너머로 무엇이 보이는지 확인하면 된다고 안나는 말했다.
“내 방은 서쪽에 있어요.”
“네 오라버니 방과 정반대군?”
“원래는 료짱 방도 서쪽에 있었어요.”
안나가 툴툴거렸다.
“그런데 바다 근처는 시끄럽다고 옮겼어요.”
점심 무렵 아래층에서 종이 울려 식당으로 내려가보니 양식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종을 울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안나가 말한 요시노상일 것이라 미츠이는 막연히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핏물이 어린 스테이크를 잘라먹었다. 안나는 이번에도 무지막지하게 먹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쉴 새 없이 게걸스럽게 음식을 쓸어 먹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하게 자기 자리를 정리하고는 턱을 괴고 미츠이를 쳐다보았다.
“왜?”
“밋짱이라고 불러야 하나?”
원하는 답을 독촉하는 어린아이처럼 안나가 짓궂은 얼굴을 했다.
“불러야 하나?”
“마음대로 해.”
미츠이가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여자한테 받은 거예요?”
안나가 손수건을 가리켰다.
“아니.”
반사적으로 대답해 놓고서 미츠이는 “아.”하고 정정했다.
“여자한테 받은 거긴 하지.”
“에. 바람둥이네.”
“아니거든?”
두 사람은 잠시 티격태격했다. 뜬금없이 서랍 첫 번째 칸에 들어있는 물건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그는 안나에게 한 번도 쓰지 않은 것 같은 남자 옷들과 약간의 장신구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지 물었다.
안나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안나는 그곳에 그런 물건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눈치였다. 저택에 누군가 온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고 최근 몇 년 동안은 손님방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소짱의 것일까?”
안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소짱?”
“응. 지금은 멀리 나갔어요. 슬슬 돌아올까나?”
그렇게 말한 다음 미츠이를 기묘하리만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희 첫째 오라버니는 자주 나가는 모양이지?”
“응. 근처 섬에 별장이 있거든요. 파도가 잔잔할 때가 많지 않아서 한 번 거기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어요.”
아무튼 소짱의 물건이라면 버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안나는 말했다.
“그 외에는 마음대로 써도 괜찮아요. 밋짱 당분간 여기서 지내게 됐다고 료짱한테는 내가 말해둘게요. 료짱, 이제는 손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방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떠나려고 정리해 두었던 트렁크 짐을 하나하나 다시 풀었다. 외출복 두어 벌과 속옷, 밤중에 걸치는 가운 한 벌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옷장에 첫날 입었던 코트를 걸다 말고 가슴이 벅차올라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낡아빠진 골동품점에서나 맡을 수 있을 법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냄새마저도 아주 멋진, 이 방에 걸맞은 냄새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횡재였다. 그동안 여자들의 호의에 기대어 하룻밤 숙식을 해결하곤 했지만 이렇게 좋은 곳에서 묵은 적은 많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풀릴 거라고 미츠이는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저택으로 향할 때부터 마음 한 구석으로는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을까 은근히 바라기는 했었다. 하지만 정말 현실로 이루어지리라 믿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저택에 구슬릴 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안나는 지금 저택에 어른이 한 사람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럼 나중에는 돌아온다는 건가? 괜찮은 건가?’
돌이켜보면 안나는 내내 태평하기만 했다. 안나가 예의범절에 무관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은 그렇게 엄격한 분위기의 집안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안나는 미츠이가 생각한 것보다 저택일에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뭐, 괜찮겠지. 갑자기 내쫓기야 하겠어.’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참으로 느긋해지는 것이었다.
미츠이는 저녁 시간까지 빈둥거리면서 간소한 짐을 드문드문 자리에 정리해 두었다. 안나의 말대로 서랍 첫 번째 칸은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 내일은 노리오에게 다시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마을에 오래 머무르게 되었으니 당분간 그의 사정은 걱정 말고 당장의 일부터 해결하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여자랑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그 카페 직원이랑은 어떤 사이냐고 장난스럽게 추궁을 해도 좋겠다. 묵을 곳, 먹을 곳에 대한 걱정이 완전히 해소되자 그의 마음은 빠르게 느긋해졌다.
저녁을 먹고 나자 안나는 정원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한 놀이들─넓적한 나무판으로 공을 쳐서 점수를 매기는 것으로 안나는 이것을 ‘크리켓’이라고 불렀다, 이 놀이를 하려면 값싼 천으로 만든 공을 쓰는 게 좋다고 했다, 멀리 치면 바다까지 날아가기 일쑤였으므로─에 대해 소개해 주었다. 혹은 테니스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파도가 높지 않은 날에는 해안까지 내려가서 뱃놀이를 할 수도 있었다. 절벽 쪽으로 나가면 작은 쪽문이 있는데 그 문을 통해 쭉 내려가다 보면 작은 해안이 나온다고 했다.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하면서 안나는 별로 열정적이지 않았다. 본인은 움직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때는 자신도 야외활동을 좋아했지만 큰 오빠가 자주 돌아오지 않고 이곳에 묵는 손님들도 정원에서 노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공을 가지고 놀거나 뱃놀이를 나간 지 오래됐다고 했다.
“그럼 내일은 내 상대를 좀 해줘.”
미츠이가 말하자 안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살피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에는 조금 뒤척였던 것 같다. 그는 잠깐 눈을 떴는데, 사방에서 풍겨오는 짙은 흙냄새와 풀 냄새 때문에 자신이 깜깜한 숲 속에 서 있는 줄 알고 흠칫 놀랐다. 곧이어 정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백한 하얀 달이 검은 바다를 가르며 은빛 상처를 만들고 있었다. 저택의 돌벽이 뿜어내는 냉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꿈의 주민이 된 자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미츠이는 정원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물방울이 맺힌 키 큰 푸성귀들이 그의 얇은 가운을 적시며 휘어졌다. 눈앞이 작은 촛불로 희끄무레하게 비춘 어둠 속의 풍경처럼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미츠이는 자신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존재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가냘프고 슬픈 존재가 이 저택 어딘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가슴이 얼어붙을 만큼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한편으로 무척이나 슬프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미츠이는 그를 돕고 싶었다. 한편으로 달아나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그래서 정원에 서 있던 것이 아닐까? 그는 도망치던 중이거나 무언가를 찾기 위해 나선 것인지 모른다. 방이 추웠다. 방이 너무나도 추웠다.
그는 잠결에 비척대며 일어나 장작 몇 개를 벽난로 안에 던져놓고는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나이트가운에 달려 있던 황동 단추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시트를 들추고 침대 아래를 손으로 훑어보아도 어디로 간 건지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밖을 두리번거리던 미츠이는 얼마 안 가 문 앞에 가지런히 차려진 아침밥을 소반 째로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4
저택에서의 나날은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았다. 미츠이는 안나와 한 약속을 지켰다. 그는 거의 매일같이 정원으로 나가서 그녀와 공놀이를 했다. 크리켓보다는 테니스를 더 자주 했다. 두 사람은 거센 바닷바람을 등진 채 고함을 지르면서 정돈되지 않은 잡초투성이 정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한바탕 공을 따라 뛰다 보면 주방에서 누군가 종을 울려 점심시간을 알렸다. 그러면 두 사람은 의자와 장비를 챙겨 그 넓고 공허한 식당으로 되돌아갔다. 미츠이는 종을 울린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실 그동안 그가 이 저택에서 만난 건 고작해야 열두 살 정도 먹은 것 같은 안나와 첫날 이후로는 조금도 모습을 비추지 않는 미야기 료타뿐이었다.
안나는 일광욕을 즐겨했다. 안나는 아침마다 정원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햇빛 쬐는 것을 좋아했다. 객식구가 된 첫날 미츠이가 스포츠를 하자고 정원으로 나왔을 때도 안나는 일찍부터 그곳으로 나와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의자 위에 늘어진 안나의 몸이 태양 아래서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츠이가 정말로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안나는 그를 발견하자 얼떨떨하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나는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미츠이를 꼼꼼하게 살피더니 이렇게 평했다.
“금방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 같아.”
“이봐, 건장한 사내한테 할 소린 아니지 않냐?”
“흠.”
의자에서 내려온 안나가 미츠이 앞에 섰다.
“그러면 오랜만에 한 게임 정도는.”
그녀는 어딘가 기운 빠진 투로 말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정원에서 크리켓을 했다. 안나는 창고에서 편평한 크리켓 배트와 낡아빠진 공을 꺼내왔다. 바다까지 공을 날려버려도 상관없다고 했다. 버려도 상관없을 정도로 낡아빠진 공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미츠이는 한 번도 울타리 너머로 공을 넘기지 못했다. 그제야 안나는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안나는 크리켓을 소짱이 알려주었다고 했다. 이 집에서 크리켓을 가장 잘하는 것도 소짱이었다.
“소짱은 몇 번이고 저 울타리 너머로 공을 넘겼어요. 그래서 집에 공을 아주 많이 만들어 뒀어요.”
안나가 절벽 너머를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바람 때문에 두 사람 모두 고함을 지르듯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공 좀 잘 던져봐!”
“잘 던지고 있거든!”
“너 방금 건방지게 말하지 않았냐?”
“아니거든!”
“맞잖아!”
공놀이를 하다 보면 점심까지는 시간이 금방 갔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안나가 방으로 돌아가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얼마 안 가 미츠이는 저택을 산책하는 새로운 취미를 찾아냈다.
무작정 복도를 걷다 보면 처음 보는 장소나 새로운 물건들이 반드시 나타났기 때문에 저택은 곧 그의 좋은 관광지가 되어주었다. 안나는 고작해야 미츠이에게 큼지막한 복도, 이 집을 연결하는 큰 줄기가 되는 길들을 소개해주었을 뿐이었지만 그것 말고도 이곳에는 어딘가로 통하는 자잘한 통로나 복도가 많이 있었다.
마치 짐승의 몸을 반으로 쪼갠 다음 그 안에 존재하는 뼈와 살점, 핏줄과 신경이 구불구불 얽힌 모양새를 본떠서 지어진 것만 같은 건물이었다. 복잡하고 난잡해 보이지만 그 나름의 규칙이 있었고 한 번 익숙해지면 금방 길을 외울 수 있었다.
정말이지 멋진 곳이었다. 이국에서 왔을 것이 분명한 대리석 조각상과 골동품들, 값비싸 보이는 도자기들이 불쑥 튀어나오는가 하면 계단의 난간, 문고리, 방문마다 멋스럽게 새겨 넣은 홈과 장식들이, 일상적으로 손을 타는 것 하나하나가 감탄스러울 만큼 집착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는 금방 이 저택에 정을 붙였다.
아침부터 점심까지는 안나와 정원에서 크리켓이나 테니스를 하고 점심을 먹은 다음에는 저택을 산책하는 일과가 이어졌다. 때로는 안나와 함께 정원에서 일광욕을 하기도 했다. 가까이서 본 안나는 첫인상과 달리 그렇게까지 창백하지 않았다. 햇빛 아래서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는 혈색이 돌고 활기차보였다. 미츠이의 많은 부분을 시원치 않게 생각하던 안나도 얼마 안 가 그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미츠이의 장점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금방 그를 어렵지 않게 생각했다.
미야기 료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이 주일쯤 흘렀을 때였다. 그동안 미야기는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식사도 따로 했었다. 미츠이는 그가 제대로 식사를 하기는 하는 것인지, 식당에서 드는 점심과 저녁은 언제나 지나치게 푸짐해서 아침을 가져다 놓는 조그만 소반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과연 그의 방문 앞에는 어떤 식으로 음식이 매번 차려지는지를 막연히 궁금해하곤 했다.
한 번은 미야기의 방 앞을 얼쩡거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소리 죽여 그 앞을 지나가도 안에서는 인기척 한 번 들리지 않았다. 식사가 막 끝났을 시간인데도 소반이나 빈 그릇이 나와있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불쑥 식당에 나타난 것이다.
미야기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마포 셔츠 위에 베스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 미츠이에게 건성으로 눈인사를 한 다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안나는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둘째 오빠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미야기도 미야기대로 자신의 여동생이 보여주는 무관심한 태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그는 오로지 음식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수십 가지 식기의 용도를 정확히 구분해서 사용했다.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나이프를 들고 닭고기를 들추어 보더니 “당근이네.”라고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그는 맞은편에 앉은 미츠이와 조금이라도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거의 들지 않았다. 미츠이가 활기차게 말을 건네면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림자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츠이는 마주 보고 앉은 미야기의 존재를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떠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빈 의자를 뒤늦게 발견하고서야 그가 소리 없이 식당을 빠져나간 지 오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첫째 오라버니도 저런 식이냐?”
미츠이가 툴툴대자 안나가 닭다리를 요란하게 뜯으며 말했다.
“소짱은 료짱이랑 달라서 나한테 알은 체도하고 잘 놀아줘요.”
발을 까딱이다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그건 꼭 밋짱 같네.”
만약 미야기가 미츠이만을 유난히 불편해했더라면 미츠이는 처음부터 그에게 남다른 주의를 기울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안나의 말에 따르면 미야기는 원래부터 낯을 가리는 편인 데다 저택에 머무는 객식구들에게 다소 불친절한 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특별히 미츠이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를 향한 냉대는 이 저택을 방문했던 모든 객식구에게 공평하게 돌아갔던 것이리라.
그렇다고 해도 미야기의 태도는 어딘지 미츠이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미츠이는 여태까지 자신을 이토록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대체로 그에게 친절했다. 항상 그래왔다. 여자들은 금세 알은체를 했고 그가 하는 말에 쉽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끔 그를 무서워하거나 경계하는 여자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한 부류의 여자들은 주의 깊게 미츠이를 관찰하다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경계를 풀고 그를 자신의 마음 앞에서 서성이는 손님 정도로는 대접해 주는 법이었다. 실은 남들보다 훨씬 예민하고 폐쇄적인 인간일수록 한 번 마음을 열면 그 상대에게 극진해지는 법이다.
그런가 하면 남자들은 어떠한가. 남자는, 남자들은, 심지어 미츠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조차 그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미츠이를 쉽게 신뢰했고 걸핏하면 자신이 벌여둔 사업이나 성과를 떠들어 대면서 그에게 존경받을 수 있기를 남몰래 바랐다. 미츠이는 자신이 수완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사실에 별로 우쭐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의 호의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을 둘러싼 환대의 세계를 미츠이는 평소에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있어 미야기의 차갑고 폐쇄적인 태도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처음에 그는 단지 미야기가 부끄러움을 타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좋을 대로 생각했던 것뿐이었다. 어색하게 여기는 것 이상으로 미야기는 미츠이를 무척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츠이가 저택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결코 마주칠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듯 철저하게 공간을 나누어 썼고 동선도 겹치지 않게 피해서 돌아다녔다.
미야기가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마주칠 일이 없는 것이라 여겼던 미츠이의 생각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어느 화창한 날 오후, 미츠이는 정원으로 일광욕을 하러 나갔다가 절벽 아래서 홀로 해변을 느릿느릿 걷고 있는 미야기를 발견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햇빛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미야기는 무척 평온한 모습이었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날따라 수면이 잔잔하고 파도도 높지 않았다. 해변에는 둥그런 자갈들이 가득했고 끝에는 쪽배가 매여 있었다. 미야기는 쪽배를 탈 생각은 없는 듯했다. 느긋하게 자갈 위를 걸으면서 발끝으로 툭툭 돌을 차기도 하고 가끔 아름답게 생긴 돌을 주워 유심히 살피다가 있는 힘껏 바다 쪽으로 던지기도 했다.
미츠이는 한동안 미야기가 해변을 걷는 모습을 멀뚱멀뚱 구경했다. 날이 맑아서 수평선 너머가 드물게 깨끗이 보였다.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섬 하나가 있었다. 보아하니 일전에 안나가 말했던 소짱이 머무는 별장이 있는 섬 같았다. 최근에는 파도가 잔잔하니 조만간 소짱이 돌아올지 모른다. 미츠이는 해변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미야기는 그새 사라진 후였다.
그 무렵부터 안나와 미츠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