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열반涅槃»
농구 선수라면 누구나 그 언덕彼岸에 가보고 싶어 한다.
농구인들 사이에는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무언가에 제대로 집중해 본 사람이라면 주변의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밖의 풍경도 잘 보이지 않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운동선수들도 이 같은 일을 겪는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한 순간에는 중계석, 벤치, 관중석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누군가 야유를 퍼부어도 상관없다. 들리지 않으니까. 누군가 옷을 벗고 나체로 춤을 추고 있어도 상관없다. 보이지 않으니까. 경미한 부상이라면 통증까지도 잊는다.
몸과 정신의 분리가 벌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극한까지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그런 때, 드물게도 어떤 농구 선수들은 몸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요컨대 그들의 정신이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장소로 날아가, 또 다른 세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는 경기 중이었는데, 눈 한 번 깜빡이니 갑자기 전혀 다른 장소에 멀뚱히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경기는 이미 끝나있고, 그동안 자신의 몸은 한계를 뛰어넘어 기적적인 슛을 넣거나, 완벽히 수비를 따돌려 덩크를 꽂아 넣은 후라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진술이다.
소문에 따르면 마이클 조던도 이 언덕에 최소 2번은 다녀왔다고 한다….
조던은 1989년 동부 플레이오프 1차전 막판에 밀착 수비로 따라붙던 크레이그 일로를 따돌리고 더블 클러치로 슛을 날리던 순간, 그리고 1992년 포틀랜드와 맞붙은 챔프전 중반에 언덕을 다녀와 본 적이 있다고 비공식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1989년 8월, NBA 플레이오프 시즌이 끝난 지 3개월이 지난 여름날 셔먼의 조그만 바에 들린 조던을 지역 신문 기자가 우연히 취재한 그 짧은 인터뷰는, 그때까지만 해도 농구 선수들 사이에서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피안의 세계를 기록한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오 분 남짓의 짧은 인터뷰에서 술에 취한 조던은 기분 좋은 투로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실은 거기 다녀왔어요. 거기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알 겁니다. 일로도 알고 있을 겁니다. 다만 지난번엔 내가 그보다 먼저 거기 도착했던 거죠.” 그를 언덕으로 데려간 1989년 동부 플레이오프 1차전은 조던을 전설로 만들어준 수많은 명경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초반만 해도 슛감이 좋지 않았던 그는 종료 3초 전, 공을 받기도 전에 수비의 움직임을 읽고 방향을 틀어 미드 점퍼를 성공시킨다. 흥분에 찬 조던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그냥 그렇게 됐다”고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조던이 언급한 ‘그곳’은 훗날 다른 인터뷰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진술된다. “이번에도 거기 다녀왔습니까?” “네, 거기 있었죠.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 경기를 성공시켜서 기쁩니다.”
이후에도 NBA 세계에서 언덕에 대한 비공식적인 언급은 드문드문 지속되었다. 경기 중 순간적으로 놀라운 기지를 발휘했던 일부 선수들은 의미심장한 투로 자신이 어딘가에 있었다고 말하곤 했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개중 대다수는 고도로 집중한 자신의 상태를 은유하는 것에 가까웠고, 마이클 조던 역시 1992년을 끝으로 더는 언덕에 대해 언급하지 않게 되면서, 이 비밀스럽고 신비한 세계는 서서히 잊혀 다시금 전설로만 남게 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는 선수들은 별로 없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로 다른 세계에 도달한다던가, 새로운 장소로 순간 이동하는 건 아닐 거라고들 한다. 경기 중에 또 다른 정신세계에 도달한다니. 그런 일이 진짜로 벌어졌다간 큰일 난다. 조던 역시 일종의 강력한 은유로서 언덕을 언급한 걸 수도 있다.
아무튼지 간에 오늘날 ‘언덕을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집중력을 발휘해 탁월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는 관용구에 가까워져 있는 것이다.

 
이듬해 초여름, NBA에서 고군분투하던 송태섭은 처음으로 언덕의 세계를 경험한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 있던 플레이오프 1차전 후반, 마지막 10초를 앞둔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반 내내 고전하던 태섭의 팀은 1점 차를 남기고 악착같이 따라붙은 상태였고, 태섭은 막 센터 라인을 넘어 우측 3점 라인 앞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객석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관중들이 내지르는 고함으로 귀가 먹먹했고 전신의 근육이 한계까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서서히 멀어졌다.
송태섭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시야가 조금 높게 느껴졌달까. 마치 경기장을 비스듬하게 내려다보는 것처럼, 모든 선수가 어디로 달려갈지 훤히 다 내려다보이는 듯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는데 몸도 갑자기 가뿐해졌다. 팔다리가 절로 움직인 다음, 뒤늦게 ‘저쪽이다. 아니, 벌써 와 있구나.’ 하는 생각이 허겁지겁 뒤따라올 정도였다. 그의 몸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흐릿한 하얀색 3점 라인이 점차 선명해지고 공이 그에게 패스되던 순간이었다.
눈앞이 새하얘지면서 고요가 찾아왔다.
…….
그리고 파도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태섭은 낯선 모래사장 위에 서 있었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자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쇼난 해변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처음 보는 해변이었다. 파도 소리를 제외하면 공허할 정도로 조용했고 주변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사진으로도 본 적 없는 곳이었다. 태섭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묘하리만큼 하늘이 새카맸고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별이나 달, 구름이나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해변이 지나치게 밝았기 때문에 밤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파도가 시퍼렇게 어두웠다. 하얀 물거품을 만들며 해변으로 달려 온 파도는 너울 자국을 남기면서 끝없이 바다로 빨려 들어갔고 이곳에서 유일하다고 할 수 있을 법한 소리를 영원히 만들어 내고 있었다.
서서히 현실 감각이 되살아났다. 어리둥절한 나머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뭐야?’
태섭은 황급히 몸을 더듬거렸다. 땀을 흘린 흔적 하나 없이 전신이 보송보송했다. 심장도 고르게 뛰고 있었다.
‘경, 경기는? 나 지금 왜 여기 있지?’
그는 여전히 유니폼 차림이었다. 이번 플레이오프 시즌에 맞추어 나온 유니폼에, 등번호 7번을 단 채였다. 일주일 전 스폰서로부터 협찬받은 스포츠 아대도 왼팔에 그대로 차고 있었다.
‘설마 전부 꿈?’
그럴 리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필사의 힘으로 뛰고 있지 않았는가.
태섭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안선이 무한히 이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이곳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기….
설마 거긴가?
그 순간 버저가 울렸다.

 
관중들의 함성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태섭은 눈을 깜빡였다. 어느새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팀원들 틈에 샌드위치처럼 껴 있었다. 팀원들이 “Song! Song!” “Sooooong!!”하고 고릴라처럼 고함을 지르는 가운데 태섭은 번쩍 고개를 들어 점수판을 확인했다. 역전. 1점 차 역전이다.
이겼다. 그의 팀이 이긴 것이다.
흥분에 찬 손들이 서로를 거칠게 밀치고 정수리를 두드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어안이 벙벙한 와중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흥분한 리포터가 다가와 태섭의 이름을 연거푸 소리쳤다. 마이크를 들이밀더니 헐떡이며 물었다. “송! 송! 해냈어요. 당신이 해냈어요! 놀랍습니다. 당신의 더블클러치는 정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충격적입니다. 어떻게 움직임을 예상했나요? 존이 당신을 마크 중이었는데요. 어떻게 그를 따돌릴 생각을 한 거죠? 다 알았습니까?” 질문을 전부 소화하기까지 몇 초 간의 버벅거림이 있었다. 마침내 태섭이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그렇게 됐어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냥 하다가 됐습니다. 정말로요.”
이날 태섭의 팀은 세븐티식서스의 유망주, NBA의 이단아로 불리던 존 그리어를 꺾고 역전승의 쾌거를 거뒀다. 이 경기를 통해 단연 주목받은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평균 출전 시간 10분 남짓에 불과했던, 그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동양인 단신 포인트 가드 송태섭이었다. 작년 MVP로 선정되기까지 했던 존 그리어의 밀착 마크를 뚫고 종료 4초 전 꽂아 넣은 그의 재빠른 더블 클러치는, 그때까지 위태롭던 NBA 내 송태섭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경기가 끝나고 비디오를 돌려보았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경기 장면을 직접 확인한 태섭은 눈을 의심했다. 그가 해변으로 날아간 것은 후반전 마지막 10초. 화면 속에서 우측 3점 라인을 향해 달리는 태섭을 재빨리 존 그리어가 막아선다. 공이 패스되는 순간 상대편 선수들은 이미 골 밑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런데 잠시 후 태섭이 놀라운 반응 속도로 그 철벽같은 수비를 뚫고 날아오른 다음,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더블 클러치를 날리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끝내주는 경기 센스였다.
분명 얼빠진 채 해변을 걷고 있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는 뻥을 좀 보태서 마이크 조던의 환생이나 다름없게 움직이고 있던 것이다. (참조─마이클 조던 멀쩡히 살아있음.) 솔직히 너무 잘해서 얼떨떨할 지경이다.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줬다면 사람들이 흥분에 미쳐 날뛰던 것도 이해된다. 자기가 봐도 이건 너무 멋있었다.
‘이게 정말 나라고?’
비디오를 열심히 돌려본 덕분인지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도 같았다. 아른아른 눈앞에 뭔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게 정말로 자신의 실력이라는 게 실감이 나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태섭은… 실은 그는 마이클 조던의 환생이었던 같기도 했다. (참조─마이클 조던 멀쩡히 살아있음.)
믿을 수 없는 것을 경험한 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한동안 태섭은 이 놀라운 경험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일을 겪어본 적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팀원들에게 슬쩍 이 사건을 흘려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누구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아, 거기? 난 매일 거기서 조깅해. 코스 추천해 줘?”
“그래, 이번에 너 거기 좀 오래 올라갔다 온 것 같더라.”
“Soooog! 진짜 몰입했나 본데?”
아니, 정말로, 진짜로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거라고 강조해서 설명하자, 팀원들은 정말로 못 말리겠다는 듯 눈을 찡긋거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다음번에 가서 관광 코스 좀 짜줘.”
“우, 동양의 신비로운 농담.”
“피곤해서 헛것 본 거 아냐?”
그 언덕인가 뭔가로 불리는 정신세계가 진짜로 있는 것 같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증언은 사실상 UFO에 납치됐다가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것에 가까웠던 것이다. 얼마 안 가 태섭은 해변에 관해 설명하는 일을 그만두었고 다음 시합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내심 시즌 내내 그 기적의 순간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더는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한 해 동안 꽤 유명해진 태섭은 어느 때보다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슬램SLAM이 그의 인터뷰를 전면에 실어주는 기념비적인 사건도 벌어졌다.

 
정대만으로부터 연락이 온 건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동안에도 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몇 달에 한 번꼴로 있는 일이었고, 그마저도 근래에는 뜸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전화를 받았을 땐 꽤 의외라고 생각했다. 대만이 먼저 연락하는 일은 드물었다. 먼저 연락한다면 권준호나 채치수와 술자리를 가진 다음날이었고, 분명 그 두 사람에게 면박을 받았을 것이 역력한 티를 내며 머쓱하게 전화를 걸어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대만은 언제나 그런 일들에 약했다.
그래도 전화를 받으면 곧잘 재밌게 떠들 수 있는 상대였으므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태섭은 그가 꽤 반가웠다. 정대만은 소식을 들었다면서, 얼마 전 태섭의 활약상이 NHK 저녁 뉴스에 나왔다고 했다. 그건 굉장한 일이었다. 일본 전 국민이 태섭이 미국에서 무엇을 성취해 가고 있는지 알게 됐다는 뜻이니까.
“성공했네. 귀국하면 한턱내라.”
축하는커녕 대만은 그런 소리부터 했다.
“뭔 전화하자마자…. 안 돌아갈 거거든요?”
“뭐야. 귀화할 거냐?”
“예? 당분간 좀 바빠요.”
“흥, 유명인 행세냐.”
새삼스럽게 느끼는 바지만 정대만과 대화하는 건 좀 골때리는 부분이 있었다. 서로 작정하고 웃기려는 것도 아닌데 대화하다 보면 꽤 재미있었다. 힘들이지 않고도 대화의 긴장감이 잘 유지된다고나 할까. 적당한 타이밍에 적합한 대답이 돌아온다고나 할까. 대화를 주고받다 보면 서로가 그간 만들어 온 관계의 느긋함에 만족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분위기에는 자질구레한 얘기도 꺼낼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정대만이 특히 그걸 잘했다. 그는 전화 중에 자기 빤스에 구멍이 뚫린 얘기까지 꺼낼 수 있는 남자였다.
언덕 이야기를 꺼낸 건 그 때문이었다. 그놈의 빤스 얘기 때문에 마음이 풀어져선. 경기 얘기가 나오자 무심코 이야기를 흘리고 만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대만은 송태섭이 말하는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혹시 해변에 갔었냐?”
너무 놀란 나머지 태섭은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뭔, 뭐, 뭐, 뭐예요?”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거길 어떻게 알아요?”
건너편에서 흥, 하고 어쩐지 우쭐거리는 듯한 콧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거기 가봤거든.”
그가 말했다.
“중3 때 말이야. 현 대회 결승전에서 역전승을 했거든. 그때 갔다 왔었지. 딱 한 번이지만.”
그 시합이라면 송태섭도 알고 있었다. 정대만을 무석중의 MVP로 만들어준 그 경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 내가 본 게 헛것이 아니라고요?”
“그게 헛것이겠냐? 너 거기서 물장구 안 쳐봤어?”
거기서 물장구를 치다 돌아왔다고?
“쫌 다시 보인다, 송태섭? 거기도 다녀오고.”
정대만은 자기만 아는 얘기가 나와서 신이 난 것 같았다. 그곳 하늘이랑 바다가 이상할 정도로 새까맣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느니, 별이 떴던 것도 같고 안 떴던 것도 같은데 네가 보기엔 별이 떴던 것 같냐느니, 거기 해안선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지 않냐고 떠드는 것을 듣고 있자니 태섭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어디서 주워듣고 아는 척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냐?”
정대만은 대노했다.
“다음에 또 가게 되면 위쪽으로 쭉 걸어 올라가 봐.”
“왜요?”
“내가 한참 달리다가 모래사장에 이름 써놓고 나왔거든.”
이 인간 거기서 진짜 별걸 다 하다 왔네, 하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반년 뒤 송태섭은 다시금 언덕의 세계를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플레이오프 시즌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경기 막바지, 작은 점수 차를 앞두고 공격 기회를 얻은 태섭은 코트를 내달리다 말고 지난번과 유사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이 다시 오리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 시야가 훤히 트이더니, 생각이 몸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동작 하나하나가 부드럽고 빠르게 진행되면서 정신이 점차 붕 뜨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해변이었다.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리만큼 캄캄한 하늘과 바다, 무한한 해안선이 지난번과 똑같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모래사장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아득한 수평선이 기묘한 하늘과 맞닿아 거뭇거뭇 이어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기도 했지만 파도 소리를 제외하면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이번에 태섭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우선은 물장구부터 쳐보기로 결심하고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가까이서 내려다보니 바닷물은 너무 새까만 나머지 물보다는 잉크에 가깝게 보였다. 하지만 발을 빠뜨렸다 들어 올리면 투명한 물살이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기한 물이었다. 어쩐지 찜찜해져 금방 수영은 포기하고 해변으로 나왔다. 이런 곳에서 태평하게 물장구를 칠 수 있는 정대만의 정신머리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기를 털면서 살펴보니 모래사장 뒤편에는 낮은 제방 같은 게 설치되어 있었다. 제방 너머로 보이는 지대는 완만하게 경사가 져 있었지만 그마저도 얼마 안 가 뚝 끊겨 있었고, 그 너머는 깊고 공허한 어둠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어쩐지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 안 가 태섭은 해변 위쪽으로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대만이 남긴 이름을 찾을 생각으로 걸어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쏴아아…. 사박사박 모래를 밟는 소리가 공허한 해변에 울려 퍼졌다.
이상한 곳이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이곳에 최초로 도착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마이클 조던도 정말 여기 와 본 적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마이클 조던이니까. 그럼 그도 물장구를 치거나 해변에 이름을 남겼을까? 매직 존슨도? 래리 버드도?
그런 농구 전설들이 다녀간 곳을 두 번이나 방문한 나도 좀 대단한 녀석인 듯?
태섭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 멀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농구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다리를 길게 뻗은 채 해변에 앉아 바다를 감상하고 있는 모습이 제법 느긋해 보였다.
그 누군가는 태섭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태섭은 어느새 허겁지겁 뛰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유니폼의 모양새가 선명히 보였다. 하얀 바탕에 파란 줄무늬 유니폼이었다.
불현듯 내리꽂히는 직감이 있었다. 소년이 달고 있는 등번호가 4번이었다.
태섭은 우뚝 멈추어 섰다. 바람이 불었고,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오. 나 말고도 사람이 있었네.”
무석중학교 정대만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 어.”
태섭이 머뭇머뭇 대답했다.
“여기 거긴 거 알아요?”
흥미롭다는 듯 대만이 물었다.
“알아.”
태섭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헤에.”
“…….”
“…….”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 모르겠어요?”
대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던가?”
“…….”
“흠, 모르는 얼굴인데.”
태섭의 얼굴을 꼼꼼하게 뜯어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대만은 대수롭지 않아 보였다. 이런 이상한 곳에 홀로 앉아 있다가 갑자기 낯선 사람을 만났는데도, 심지어 그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처럼 구는데도 이런 데까지 왔으니 그런 자질구레한 것은 구태여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제 태섭은 그가 해변에서 물장구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대만은 아마 정말로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물장구를 쳤을 것이다. 저 파도 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 들어간 다음 이 수상쩍은 장소에 대한 호기심을 만끽했을 것이다. 갑자기 이곳에 도착했을 때 허둥대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고, 왜인지 분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후 태섭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대만 옆에 자리를 잡았다.
쏴아아, 파도가 두 사람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사라졌다.
“너 전에도 여기 와본 적 있어?”
“응? 아뇨. 처음인데.”
대만이 그를 쳐다봤다.
“여러 번 와 봤어요?”
태섭은 최대한 덤덤한 투로 말했다.
“어. 6개월 전 쯤에.”
“뭐야, 대단하잖아! 어느 소속인데요? 형 프로예요?”
‘형….’
태섭은 헛기침을 했다.
“유니폼 보면 알잖아.”
“엉?”
그제야 대만은 태섭에게 관심이 생긴 것 같았다. 그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거 팬 유니폼 아니었어요? 토론토 랩터스?”
태섭이 무표정하게 스윽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잠깐, 내가 아는 선수 중에는 일본인이 없는데? 신인? 올해 드래프트 된 건가? 그 랩터스에? 일본인인데 NBA에 간 거예요? 우와! 그럼 나도 가야지!”
갑자기 대만은 태섭에게 급격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마이클 조던하고 붙어봤어요?”
“조던 은퇴했는데.”
“무슨 소리예요? 지금 플레이오프 시즌인데. 시카고 불스 올해도 장난 아닌 거 몰라요?”
“진짜라고. 마이클 조던은 2003년에 은퇴했거든.”
“갑자기 2003년?”
“난 몇 년 뒤에서 온 사람이니까.”
“뭐야, 여기. 그런 설정이야?”
대만이 와하하 웃었다.
“농담이 지나친걸.”
“아니, 진짜라니까. 나도 은퇴하기 전에 한 번은 붙어보고 싶었어.”
“그럼 마이클 조던 다음은?”
“다음?”
“지금 전설은 누군데요?”
“어…. 나?”
“그렇군요.”
두 사람은 해변에 앉아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대만은 자신이 결정적인 슛을 만들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했다. 바깥에서 그는 중학교 마지막 현 대회 결승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상대는 강팀이라 손꼽히는 충전중학교로, 경기 종료까지 몇 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이번 슈팅에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어쩌면 대만의 3점 슛은 버저 비터가 될지 모른다.
그는 자신이 루즈볼을 잡은 덕분에 중요한 순간에 공격권을 따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번 경기 이기고 전국 제패한 다음 내년에는 북산고등학교에 갈 거예요.”
“아, 그러냐.”
“별로 놀라지 않네. 형, 나 강한 학교에 스카우트 제의 받았는데도 공립에 가는 거라고요.”
“그래, 그래.”
“미래에서 와서 그런가?”
심드렁한 반응이 불만스러운지 대만이 투덜댔다.
“미래에서 온 거면 나중에 나랑 만나는 모양이네. 아까 나 알아본 거 맞죠?”
“뭐…. 그렇지?”
“팀 메이트?”
“응.”
“고등학교? 대학교? 아니면 혹시 NBA?”
“글쎄.”
“선배? 후배? 아니면 친구?”
“딱 봐도 내 쪽이 선배잖아.”
태섭이 뻔뻔스럽게 말했다.
“뭐야, 후배인 쪽이 좋은데.”
대만이 입을 삐죽였다.
“허? 왜?”
“선배라고 하면 좀 껄끄럽잖아요. 차라리 내가 선배인 쪽이 편하달까.”
‘이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군.’
“NBA에 진출한 선배님한테는 존경심을 좀 보이지 그러냐?”
“아, 그건 확실히 멋있지.”
대만이 모래사장에 벌렁 드러누웠다. 쏴아아… 파도가 두 사람의 운동화 끝을 적시고 사라졌다.
“후배인 쪽이 더 좋았을 것 같아?”
“뭐…. 딱히 상관없는데. 형은 딱 봐도 선배일 것 같았어요.”
태섭이 가소롭게 그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야 후배가 선배인 나보다 먼저 NBA에 진출할 리가 없으니까.”
‘진출했는데요. 그것도 셋이나.’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한 그를 보고 있자니 예전 생각이 났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대만이 폭력배 친구들을 이끌고 고등학교 농구부로 쳐들어와 모든 것을 쑥대밭으로 만들려던 때보다도 한참 전의 일이었다. 끝끝내 누군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태섭은 오래전에 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대만이 중학교 3학년 때보다도 훨씬 전, 두 사람이 지금보다도 어렸을 때의 일이었다.
그 무렵에 벌어진 일들을 태섭은 아직도 꽤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중학교 1학년 무렵, 갓 가나가와로 이사 온 자신에게 승부를 걸어왔던 한 학년 위의 정대만이 그날 3점 슛을 몇 골이나 넣었는지 따위의 것들 말이다. 그때는 대만이 무석중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농구를 굉장히 잘한다는 것, 센스가 있다는 것, 중학교 농구부 소속일 거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중학교 현 대회를 보러 갔을 때 유심히 다른 학교 선수들을 둘러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불현듯 아주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정대만에게 줄곧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그것은 떠올리고 보니 여태껏 잊고 살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무척이나 중대한 질문이었다. 심지어는 너무도 중요한 나머지 몇 번이고 물어보려고는 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보지도 못한 채 결국 가슴 깊숙이 묻어둬야만 했던, 이제는 태섭의 오랜 비밀이 되어버린 그러한 질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것은 중학생 정대만이 아닌가.
아무래도 이곳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정신세계인 것 같았다. 그런 곳인 만큼 몇 년 전 무석중학교 정대만이 언덕을 경험하는 그 순간과, 프로 농구선수로 활동 중인 스물다섯 살 송태섭이 언덕을 경험하는 지금 이 순간이 뒤죽박죽 얽혀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아직 중학생인 정대만은, 요컨대 아직 고등학생이 되지도,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예전 일들이 차차 희미해져, 마침내 자기 식대로 왜곡되고 뒤틀린 기억을 가지고 있는 정대만으로서는 떠올리지 못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앞의 정대만은 아직 송태섭에 대한 선입견이나 구체적인 인상을 갖지 못했다.
그런 대만에게서라면, 정말로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으리라고 태섭은 확신했다.
잠시 후, 태섭은 용기를 내어 그것을 물어보았다.
일순 묘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대만은 곧바로 솔직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대답은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게 느껴지더니 시퍼레진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확 조여든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말을 골라보려고 애썼지만 머리가 텅 빈 나머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그럼….”
그 순간 버저가 울렸다.
 
 
두툼한 손들이 태섭의 머리통을 거칠게 문질러 댔다. “Song! Song! Song! Song!” 객석이 태섭의 이름을 연호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태섭은 얼빠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팀원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거칠게 밀쳐가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는 가운데 점수판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태섭은 길고 긴 정신세계로의 체험이 끝나고 자신이 코트로 복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 2점 차이로 만들어 낸 값진 승리. (그런데 본인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 그 누구도 토론토 랩터스의 승리를 예측하지 않았다. (상대가 너무 강팀이라서.) 하지만 팀은 이겨냈다. 다름 아닌 태섭의 끝내주는 버저 비터로써. (그런 슛을 쐈다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리포터가 황홀한 얼굴로 자신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는 순간 태섭은 깨달았다.
어라….
나 무슨 대화 중이었더라.
카메라 플래시가 팡 하고 터지는 순간 그간의 일들이 전부 펑 하고 날아가 버린 걸까?
“송! 송! 송! 또 당신입니다. 또 해내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이 NBA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어요.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놀랍습니다. 정말 놀라워요. 저기 객석을 보세요. 저 충격에 휩싸인 사람들을 좀 봐요. 송! 방금 그 플레이는 사전에 합의되었던 겁니까?”
조용히 좀 해 봐. 지금 기억날락 말락 하는 것도 다 날아가게 생겼다고.
“어…. 합의된 건 아니었습니다만 팀원들이 잘 받쳐준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올해 랩터스는 강합니다.”
태섭이 우물거리자 리포터는 너무나 감격한 듯 탄식하며 카메라를 향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여기, 이 작은 아시안 선수가 NBA를 휘젓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작은 랩터’입니다!”
팡, 하고 두 번째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줄곧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날 태섭의 팀은 재작년 우승팀이었던 레이커스를 꺾는 대파란을 일으켰다. 인터뷰 내내 태섭은 시종일관 어리둥절하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어딘가 화가 난 것 같기도, 초조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해서 경기의 흥분에서 채 다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크게 뜬 눈으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훔치는 태섭의 모습은 동아시아권 NBA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불과 몇 시간 만에 팀 에이전시를 통해 전 세계 각종 언론 매체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플레이오프 시즌이 채 다 마무리되기도 전부터 태섭은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바쁜 스케줄을 보내야만 했다. 어느새 그는 유명 인사가 되어있었다.
 
 
송태섭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그야말로 물이 올랐다. 그의 계약 연장은 드래프트 전부터 기정사실화 돼 있는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연봉 협상 테이블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앉을 것은 자명해 보였다. 아무리 가슴을 펴고 다니려 한들 타국에서 사는 일이란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사용하면서, 문화 차이의 벽이 존재하는 외지인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소극적인 무의식을 어느 정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그러한 태도로부터 한순간 해방된다는 게 무엇인지 태섭은 본격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동양인 헐리웃 스타들이 눈물지으며 읊조리는 수상 소감 속에 담긴 자긍심과 어리둥절한 해방감을 자신의 것 마냥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출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코트로 날아가, 장신의 선수들을 농락하면서 ‘작은 랩터’라는 별칭으로 이름을 날리는 어엿한 유명 NBA 선수였다.
하지만 그것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수많은 일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날 해변에서 있었던 일만큼은 끝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바쁜 스케줄 탓 같기도 했다. 현실 세계의 자신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경황없어지면서 저쪽 세계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너무도 빠르게 흐릿해져 버린 걸지 모른다. 뭐라도 떠올릴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해변에 막 도착한 순간부터 언덕을 빠져나오기까지의 일을 차례차례 되짚어 보기도 했다. 수기로 기록도 해보고, 녹음기를 틀어 말로써 중얼거려도 보았다. 하지만 물장구를 치거나, 모래사장을 달리던 기억까지는 남아 있어도 중학생 대만과 함께 나누었던 그 마지막 대화만큼은 정말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대체 자신이 뭘 물어보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대만이 구체적으로 뭐라고 대답해 줬던 것인지 요만큼도 기억나지 않았다.
태섭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 진짜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정말 말도 안 되게 중요한 질문이었는데. 대체 그 순간 자신은 대만에게 뭘 물어보고 싶어 했던 것일까. 대만이 거기에 대고 대체 뭐라고 대답해 줬길래 자신은 눈물이 날 만큼 충격을 받은 것일까.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대답이었는데.
이를테면,
그건 여태까지 쌓아 온 두 사람의 관계를 한순간 송두리째 뒤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아니, 더 나아가 태섭 자신의 인생에 밀접하게 연관된 무언가를 건드렸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앞으로 모든 것이 뒤바뀔 수도 있다. 대답을 들었던 그 순간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고 희열을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기뻤던가? 슬펐던가? 화가 났던가? 알 수 없었다. 다만 휘몰아치는 감정 때문에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는 것밖에는. 무엇이었을까. 대체 그는 무엇을 가슴에 묻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것을 여태껏 잊은 채 살아왔단 말인가?
궁금해서 미쳐버린 태섭은 가엾게도 매일 밤 밤잠을 설치고 헛구역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컨디션이 엉망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기는 술술 풀렸는데, 언덕에 다녀온 영향 같기도 했다. 코트에 서 있으면 무섭기보다 설렜고 강한 팀을 만날 때마다 호기로운 자신감이 치솟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낮의 일일 뿐이었다. 밤이 되면 태섭은 해갈되지 않는 끝없는 호기심으로 고통을 받아 가며 현대 의약의 도움을 받을지 말지 줄곧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하고많은 이 세상의 중생衆生에 불과한 것이었다.
 
 
번뇌煩惱가 일주일가량 지속되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송태섭은 다시 언덕에 가 보기로 결심했다.
어떻게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서, 여전히 거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리라 믿고 해변 끝까지 뛰어서 다시 정대만을 만나자.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다시금 그 중요한 질문이 떠오르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태섭은 다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이번에는 절대로 잊지 않으리.
하지만 그날이 끝이었다.
악착같이 애를 써봐도 다시는 언덕에 갈 수가 없었다.
정말 이를 악물고 발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열심히 뛰었는데도 그랬다. 시즌 중에 몇 번 정도, 갈락 말락 한 그 묘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져서인지, 아니면 기분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치기 전 팀원들의 재빠른 대응으로 코트 상황이 바뀌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전성기를 맞이한 태섭이 전보다 간절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놀라운 경기력을 보여줄 수 있게 돼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지 간에 언덕으로 넘어가기 직전 붕 떠오르는 듯한 그 묘한 기분만큼은 결코 느낄 수 없었다.
그런 와중 결국 한 해 플레이오프 시즌이 끝났다. 태섭의 팀은 결승전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강팀으로서 좋은 인상을 남겼고, 태섭은 감독으로부터 다음 계약을 암시하는 긍정적인 격려를 듣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더는 어리둥절하지 않았다. 이제 태섭은 자신의 활약상을 맨정신으로 하나하나 떠올려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법 같은 플레이는 온전히 그의 몸과 마음이 이루어낸 것이었다. 언덕을 잃고 얻어 낸 값진 성취였지만, 태섭은 여전히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플레이오프 시즌이 끝난 그해 초가을 무렵, 정대만이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거기서 타임스퀘어와 자유의 여신상같이 여타 관광객들이 보는 코스를 모조리 돈 다음 태섭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있는 뉴저지까지 내려왔다. 마중 나와줄 필요가 없다고 떵떵거렸는데, 결국에는 길을 잃고 빨리 좀 나와달라는 전화를 걸어 태섭을 귀찮게 만들었다.
몇 년 만에 본 대만은 살이 좀 빠졌고 그래서인지 전보다 키가 좀 더 커 보였다. (심지어 태섭 역시 몇 센티는 더 큰 상태였는데도!) 턱선도 날카로워진 것 같았고, 대신 살이 좀 탄 것 같았다. 아마 동네 야구 때문일 거라고 대만이 말했다.
“요즘 주말마다 밖에서 야구만 했거든.”
갑자기 웬 야구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태섭은 트렁크를 대신 들어주는 것으로 대화를 갈무리했다.
대만은 아파트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눈앞의 후배를 살펴볼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는 대놓고 태섭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이야.” 하고 연신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너 몸 많이 불렸다?”
“소식 많이 들었다더니 다 거짓말이었나 봐요?”
“인마, 사진으로 보는 거랑 실물 보는 건 다르지.”
두 사람은 대만이 짐 정리를 끝내는 대로 근방을 돌아다니면서 저녁까지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대뜸 관광지에 데려다 달라는 말부터 꺼낸 걸 보면 대만은 뉴저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태섭이 살고 있는 근방은 볼 게 없었으므로 초행인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려운 곳이었다. 아무래도 대만은 그냥 태섭이 살고 있는 곳이란 생각만으로 뉴욕에서부터 무작정 버스를 타고 여기까지 내려온 것 같았다.
“뭐 보고 싶은 거 없어요?”
“주변에 뭐 있는데?”
“졸라 비싼 쇼핑몰이랑 사람 바글바글한 해변이랑 졸라 큰 공원이요.”
“좀 스케일 큰 곳은 없냐?”
“졸라 큰 공원 있다니까요.”
“뭐야, 볼 게 진짜 그거뿐이냐?”
그야 댁이 주택지에 내려왔으니까 그렇지. 계속 툴툴대던 대만은 얼마 안 가 태섭을 군말 없이 따라다니기로 했는지 금방 조용해졌다. 뉴욕과 달리 삭막하고 어딘가 치안이 나빠 보이는 뉴저지의 풍경에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너… 저축은 하고 사는 거야?”
이런 소리나 하는 걸 보면 아직 태평한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은 에지워터에서부터 리버로드를 따라 쭉 걸어 내려갔다. 중간에 터키 음식점에 들러 쾨프테와 케밥 두 종류를 세 그릇이나 연달아 시켜 먹은 다음, 그 근방에서 버스를 타고 허드슨 카운티 공원에서 내렸다. 그곳은 태섭이 말한 ‘졸라 큰 공원’은 아니었지만 관광객들이 적고 호수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주민들이 즐겨 방문하는 곳이었다. 물고기를 잡는 오리들이 물속으로 사라질 때마다 수면이 너울 치며 연신 부드러운 파동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윤슬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막상 데려다줬더니 대만도 이곳이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미국도 꽤 하는군.”
“내일 더 큰 데 가서 바비큐나 해 먹어요.”
“좋지. 고기는 내가 쏜다.”
“오. 다 털어먹어야지.”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정대만은 살 게 있다면서 월드마트에 들리자고 했고, 거기서 간장과 식재료를 샀다. 그는 호기로운 얼굴로 전골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분명 자기가 만든 전골을 먹다 보면 조금은 마시고 싶어질 거라고 우기며 조니 워커도 한 병 샀는데, 과연 대만의 말대로 몇 시간 뒤 두 사람 모두 전골을 먹으며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대만은 근황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길어질 것 같아 물어보지 않고 넘겼던 동네 야구 얘기도 결국 튀어나왔다. 대만은 올해 초에 길을 걷다 말고 우연히 동호회 팀 대타로 들어가게 됐는데, 그때 야구에 재미를 붙여서 한동안 주말마다 시간이 빌 때면 나가서 야구를 좀 했다고 했다.
대만은 자기가 주민들과 얼마나 친해졌는지 떠들어 댔다. 뭘 얻어먹거나 아니면 한턱내게 된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참 그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가 하면 프로로 뛰고 있는 농구팀 이야기도 근근이 늘어놓았다. 그는 농구가 아직 즐겁다고 했다. 역시 그게 가장 재미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안심하라면서 살짝 풀린 눈으로 느긋하게 웃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왜인지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이제 네 얘기 좀 해 봐.”
“뭔 얘기?”
“NBA 얘기 좀 해보라고. 넌 이제 슈퍼스타잖아.”
하지만 태섭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게 끝?”
대만이 불만스럽게 되물었다.
“뭘 원하신 건지?”
“아니. 뭐, 유명한 선수들 만난 후기 같은 거 없어?”
“방금 한 건 뭔데요.”
“너무 담백하잖아. 그런 거 말고.”
아웅다웅하다가 결국에는 태섭이 치른 경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사실 분위기가 무르익은 이상 결국은 하게 되었을 이야기였다. 대만이 남은 전골을 국자로 뒤적이면서 말했다.
“역시 거기 다녀오니까 좀 다르지?”
대만은 중학교 3학년 때 그 언덕에 다녀온 이래로 긴박한 상황에서 목표에 집중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아졌다고 했다. 최근 자신이 최다 스코어러로 선정되었던 시즌 준결승전을 언급하면서 그때도 그곳에 가기 직전 생각이 많이 났다고, 결국 그곳에 가게 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 덕에 그렇게 슛감이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술잔을 쥔 채 멍하니 앉아 있던 태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요.”
슬슬 술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번 시즌 초반에 또 거기 갔었는데.”
“오. 이번엔 물장구 좀 쳤냐.”
“거기서 선배 봤어요.”
태섭은 드문드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지 간에 해변을 달리다 말고 대만을 만났던 것, 그런데 그가 지금의 모습이 아닌 중학교 3학년 때 모습이었다는 것, 함께 대화를 나누다 말고 무언가 중요한 것을 물어보고, 굉장히 중요한 대답을 듣고 돌아왔던 것은 말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고, 그래서 요즘 밤에 잠까지 설칠 정도라고, 정말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다고 했다.
“아! 진짜 중요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뭘 물어봤길래? 그냥 지금 나한테 다시 물어보지 그래?”
“지금 물어보는 건 의미 없어요. 역시 그때였어야 돼.”
“이 자식 대체 뭘 물어본 거야?”
태섭은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워했다.
“심지어 뭘 물어봤는지도 까먹었다고요.”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울적하게 웅얼거렸다.
“차라리 뭘 물어봤는지라도 기억했더라면… 그러면 이렇게까지 궁금하진 않았을 텐데….”
가만히 내려다보던 대만이 술을 홀짝였다.
“그럼 다시 들어가서 물어보지 그래.”
“이미 그런 생각으로 시즌 내내 열심히 뛰었는데 안 되던데요.”
“진짜 열심히 한 거 맞냐?”
눈앞의 바보에게 호소하는 대신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하자, 테이블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흘끔 기색을 살폈더니 대만은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뭘 생각하는지, 혹시 내가 물어본 게 뭔지 당신은 감을 잡은 건지가 궁금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얼마 안 가 대만은 뭔가를 떠올린 것 같았다.
“야, 갑자기 좀 그런 얘기긴 한데.”
“예.”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채로 태섭이 대답했다.
“경기 중에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으면, 그러니까 거기 가기 직전에 말이야.”
“예.”
“기분이 묘하지 않았냐.”
“…그랬죠.”
대만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래. 좋다? 아니, 마냥 좋다고 하기엔 조금 이상한 그 기분.”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몸은 엄청 뜨겁고. 숨은 턱 끝까지 차고. 머리는 멍한데 말이야. 몸은 저절로 마구 움직이는 게… 계속 가면 좀 붕 뜨는 기분이 들면서 어느 순간 팍하고 터지는 느낌이 들었단 말이지. 중학교 3학년 땐 말이야, 그게 극한에 달해서 눈앞이 하얘지는 것 같았어.”
대만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근데 그 기분… 역시 그때랑 좀 비슷하지 않냐?”
“…….”
“…….”
“…언제요?”
대만은 태섭을 흘겨보았다.
“설마 못 알아들었냐?”
입만 삐죽이자 그가 다시 말했다.
“난 처음 여자랑 그걸 할 때 비슷한 기분이었거든. 넌 아니냐?”
태섭은 경악했다.
“그, 그걸로 거길 또 갔었다고요?”
그럼 혹시 다음번에 해변에 가게 되면 섹스하다 날아 온 정대만이랑 만나게 되는 건가?
싫다….
“아니, 가지는 않았지만.”
대만이 머쓱하게 말했다.
“아무튼지 간에 내 가설은 이거다.”
요컨대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강도 높은 자극, 그 자극이 주는 충격이 사람의 정신을 언덕으로까지 데려가는 게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고강도의 자극이라고 해도 자꾸 느끼다 보면 결국엔 적응하게 돼 있으니까. 그러면 태섭이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뛰었는데도 다시 그곳에 가지 못한 것도 전부 설명될 수 있다.
강한 긴장감을 느끼는 상황 속에서 육신과 정신이 모두 한계에 도달할 수 있는 행위. 그를 통해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절정에 도달하게 되면, 인간의 정신은 순간적으로 차원을 뛰어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농구가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 보라는 거지.”
대만이 느긋하게 말했다.
“결론을 모르겠는데.”
“어…. 여자 친구랑 끝내주는 섹스를 해라?”
“그걸로 안 가봤다면서?”
“뭐, 난 보통 할 때 그렇게까지 집중하는 스타일이 아니거든.”
“댁 같은 변태한테 그런 전설의 장소가 다시 열려줄 리 없긴 하겠네요.”
“왜 이렇게 심통이야.”
대만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너 애인 없냐?”
말없이 술잔을 비우자 대만이 삿대질을 했다.
“설마 아직도 동정은 아니지?”
태섭이 길길이 날뛰었다.
“성희롱이에요, 그거.”
“이 자식 미쳤나. 진짜 농구만 했네, 이거.”
“성실한 거죠.”
“너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돼. 즐길 건 즐기면서 살아야지.”
갑자기 대만은 태섭이 너무나 안돼 보이는 듯했다.
“너 진짜 어떡하냐.”
‘아 진짜 한 대만 패고 싶다.’
“일단 한잔해라.”
대만이 앞에 놓인 잔을 채워주자 태섭이 격렬히 항의했다.
“저 다 마셨는데요.”
“네 주량을 내가 모르냐?”
“아, 안 마신다고요.”
마침내 태섭은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거기 둬봤자 진짜 한 모금도 안 마실 테니까 알아서 해요!”
십여 분 뒤 그들은 조니 워커 한 병을 해치웠다. 비틀거리며 부엌으로 들어간 태섭은 잠시 후 선물로 받은 고급 위스키를 꺼내왔고, 불과 삼십 분 만에 그것도 반 이상 비워버렸다. 머리가 화끈거리며 팽팽 도는 와중에도 이거 술맛이 너무 깊다고, 진짜 장난 아니라고 중얼대는 대만의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태섭은 속으로 동의했다. 역시 고급은 이름값을 한다고. 그러니까 이따 마저 다 마셔버리자고….
고주망태가 된 둘은 거기서 필름이 끊겼고,
그 상태로 섹스를 했다.
일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모를 일이었다.
정신이 좀 들었을 때는 불 꺼진 방에 들어와 있었다.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래에 깔려 있는 반나체 상태의 정대만을 보았을 땐 그냥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졌다.
동, 동정을… 정대만으로 떼다니.
내 소중한 동정(별로 안 소중했음, 방치되어 있었음.)을 정대만한테 떼이다니….
그런데 생각보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이런 게 섹스라면 앞으로도 몇 번이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격렬하게 몇 번이고 결합되었다. 하는 내내 헐떡거리고 낮게 신음하면서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대만의 모습이 태섭은 너무도 좋았다. 힘들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이렇게 혼자 내려다보고 있는 건 좀 다른 느낌을 주었다. 한순간 정대만의 모든 것이 자기 손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대만이 뜬금없이 미국 여행을 결심한 건 아마 송태섭 때문일 것이다. 한창 잘 나가고 있는 후배 녀석인 데다 꽤 친분도 있고, 마침 자기도 미국에 가고 싶었으니 잘됐다 싶었을 것이다. 하룻밤 정도는 재워달라는 도둑놈 심보로 무작정 찾아온 것일 거였다.
그런데도 그가 반가웠었다. 실은 언제나 그랬다. 통보에 가까운 전화를 받을 때마다 황당한 와중에도 내심 그가 자신을 잊지 않고 있음에 적당히 흡족했다. 대만을 애타게 기다린 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영 잊어버리고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실은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은 이렇게 불쑥 찾아와주기를, 전화 한 통 정도 걸어주기를 자신은 내내 기다리게 될 것이었다.
그 순간 태섭은 깨닫고 말았다.
아. 나 정대만 좋아했나 보다.
아……. 근데 기분이 왜 이렇게 드럽지.
설마 해변에서 물어본 것도 이런 건가?
만일 그런 거라면 별로 가고 싶지 않아….
그 순간 대만이 헐떡이며 베개에 황급히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를 꽝 얻어맞은 듯한 절정이 닥쳐왔다. 처음 경험해 보는 아득하고 압도적인 느낌이 머리 위로 쏟아지더니, 무게중심이 한순간 정수리의 조그만 끝으로 이동했다. 뭔가 밝은 핑크색 점 같은 것이 눈앞에 떠 있고 그 안으로 태섭의 존재가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는 듯했는데, 그 과정에서 엄청난 쾌락이 전신을 타고 찌릿찌릿 흘러내렸다.
발가락 사이가 크게 벌어지고 머리털이 쭈뼛 서더니 일순 정신이 붕 뜨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닌가. 고통과 쾌락 속에서 눈앞이 점차 새하얘졌다.
…….
그리고 파도 소리가 들렸다.
기묘할 정도로 새카만 하늘과 잉크처럼 보이는 바다, 물거품을 일으키는 파도와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어느새 태섭은 해변 위에 서 있었다.
격렬한 오르가슴 끝에 다시금 전설의 언덕에 도달한 것이다.
팬티와 바지부터 추스른 다음 그는 곧바로 해변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쾌락의 순간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을 빠져나가기 전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몇 분 정도 달렸을 때쯤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대만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대만은 앳된 얼굴로 호기롭게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발을 까딱이고 있었다. 하얀 유니폼에 파란 등번호를 단 채였다. 여전히 중학생이었고, 이 공간에선 영원히 그럴 것이었다. 태섭이 헐떡이며 그 앞에 멈추어 섰다.
“뭐야, 또 왔네.”
대만이 아는 체를 하며 반겨주었다.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태섭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까맣고 반들반들한 두 눈. 오 대 오로 친 가르마와 찰랑거리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걷어내면, 익숙하고도 낯선 얼굴이 남는다. 태섭이 기억하는 최초의 얼굴. 아직 어떠한 선입견이나 구체적인 인상이 씌워지지 않은, 모르는 사람인 정대만.
부드러운 너울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태섭은 깨달았다. 좋아했냐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던가, 그런 것 따위를 물어보려고 한 게 아니었다는 것을. 자신이 물어보고자 했던 건 그저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족했던, 한때의 간절한 무언가였을 뿐이란 것을.
시간의 구슬이 한 데 꿰어지는 듯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줄로 관통돼 들여다보이는 듯했다. 소란한 마음 때문에 밤잠을 지새운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어쩌면 그는 언젠가 그래왔듯 앞으로도 계속 대만과 관련된 이유로 잠을 뒤척이고 괴로워할지 모른다. 아니, 그건 아직 과거의 일일 뿐이다. 앞으로는 달라질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이 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마음속 연못에서부터 차분히,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오랜 비밀을 한 데 엮어주는, 밤마다 그를 뒤척이게 하거나 속에서 무언가를 게워 올리게 만들던 간절한 무언가를 해갈시켜주는 깨달음이었다. 오래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너무도 간절한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태섭은 그것을 물어보았고,
대만은 그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비로소 모든 마음이 평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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