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마치며
먼저 이 책을 쓰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오랜 시간 이 글의 연재를 함께하며 감상과 응원을 남겨주신 분들입니다. 특히 길고 열렬한 감상을 남겨주셨던 농님, 그냥님, foka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포스타입에 남긴 댓글을 여러 차례 읽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제 글을 재독한 횟수보다도 훨씬 많이 읽었을 겁니다.
그 외에도 트위터로 꾸준히 감상을 남겨주셨던 ray님과 다리떠는사람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 글에 애정을 표현해 주시고, 두 차례에 걸쳐 멋진 3차 연성을 선물해 주신 뫙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도 여러 창구를 통해 감상을 남겨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저는 금방 포기해 버렸을 겁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본 직후 저는 몹시 흥분했습니다. 올해 상반기 제 인생에 벌어진 큰 사건 중 하나가 될 참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다음 날 티켓을 재예매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런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에도 똑같이 했고, 그 다음 날에도 똑같이 했습니다.
한동안 퇴근을 하고 나면 곧장 근처 영화관이나 만화방으로 달려가서 영화를 관람하거나 <슬램덩크>를 읽었습니다. 얼마 안 가 저는 이노우에 타케히코 작가가 보여주는 농구에 대한 열정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농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를 통해 인생을 깨닫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말하려 하는 작가의 열정은 저를 완전히 매료시켰습니다. <리얼>을 완독한 직후에는 직접 농구를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평생 인연도 없을 줄 알았던 대형마트 스포츠 코너로 가서 농구공을 산 다음, 한동안 주말마다 동생과 농구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죠.
정말이지 평생 상상도 안 해본 일을 그 무렵에 다 해본 것 같습니다. <슬램덩크>라는 세계 속에서 농구는 너무나도 특별해 보였습니다. 많은 트친들이 그 무렵 농구를 시작했는데, 이노우에 작가의 뜨거운 농구 사랑에 사로잡힌 건 저뿐만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송태섭과 정대만의 관계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영화를 세 번째 관람한 직후였던 것 같습니다. 1월 말이었고, 저는 흥분에 들뜬 한편으로 멍한 상태였습니다. 제게 있어 ‘장르에 입덕했다’는 것은 연성을 결심하는 일인데, 이 둘을 가지고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거든요. 그래도 두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쓰고 싶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그 후에는 뭘 하고 지낼까 상상하면서 1990년대 벌어진 주요한 사건이나 시대상, 일본 농구에 대한 자료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글을 구상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이때가 2월 초였던 것 같습니다.
포스타입에서도 짧게 밝힌 사실이지만, 『2000년 문제』는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2000년 문제, Y2k라고도 불리는 밀레니엄 버그가 무엇인지 당시의 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련한 뉴스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었죠. 밀레니엄 버그라는 것은 요컨대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전 컴퓨터는 부품 예산 문제와 데이터 처리 속도로 인해 연도를 표기할 때 뒤의 숫자 두 자리만을 표기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963을 표기할 땐, ‘63’이라는 숫자만 표기한 것이지요.
그러다 2000년이 가까워지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연도를 ‘00’이라고 표기했을 때, 시스템이 이를 1900년으로 해석할지, 2000년으로 해석할지 판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전산 시스템이 큰 혼란에 빠집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이 문제가 크게 뉴스로도 나왔고, 이 컴퓨터 버그 때문에 미국의 미사일이 잘못 발사될 거라는 둥 은행 전산 시스템의 마비로 경제적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질 거라는 둥 그로 인해 세계 종말이 올 거라는 둥 무척이나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막상 2000년 1월 1일이 되었을 때, 모두가 염려한 문제들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고작해야 비디오 가게에 100년 연체자가 나타났다는 정도일까요?). 그렇게 밀레니엄 버그는 세기말 사람들의 불안을 대표하는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해요.
그런데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기사 댓글에 누가 이렇게 써놨더라고요. 이 문제가 처음 지적되었을 때, 수많은 기업과 전문가들이 전산 시스템을 다시 점검하고 이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야 했다고요. 자기 아버지가 기술자였는데 그때 거기 있었다는 거예요. 유튜브에도 비슷한 댓글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댓글들이 잊혀지지가 않았어요. 다시 말해 1999년이 무사히 지나간 건 알게 모르게 애써 온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2000년 문제는 정말로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의 기우였을지 모르고, 또 어쩌면 정말 누군가가 열심히 애써 준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아무튼 그 일은 과거가 되었고, 지금은 2023년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믿냐에 따라 이 종말론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마치 인생 같지 않나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렴풋하게 구상하고 있을 적 이 글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박철의 등장일 것 같습니다. 박철과 야쿠자 간 벌어진 패싸움에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농구선수가 휘말려 죽게 되고 박철이 그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게 첫 장면이었네요.
공교롭게도 죽은 그 선수는 선발된 지 얼마 안 된 국가대표였기 때문에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발생한 공석을 채우기 위해 정대만이 추가로 선발됩니다. 한편 송태섭은 미국에서 꽤 활약했으나 NBA 진출은 실패하고 돌아온 상태로, 국내 경기에선 날아다니고 있단 설정이었어요. 와중에 이한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마지막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고요.
두 사람이 지난 몇 년간 드문드문 만나면서 미묘한 긴장감이 있는 사이였다는 것 말고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한나에게 프러포즈하는 걸 실패한 송태섭과, 살인 용의자로 의심받는 박철과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밝힐지 말지를 두고 갈등하는 정대만이 서로 등을 맞대고 멍하니 앉아있는 장면을 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밀레니엄 버그를 통해 쓰고 싶은 이야기가 뚜렷해졌고, 제가 박철이란 캐릭터의 존재를 지금의 정대만을 해석하는 데 있어 다소 불필요하게 여기게 되면서 이 내용은 완전히 수정되었습니다.
당시 썼던 초고와 메모를 들춰보니 맨 아래에 밑줄을 쳐두었네요. ‘농구가 너무 하고 싶다. 너와 같이 농구를 하고 싶다. 그런데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갈등의 드라마’라고 쓰여있어요. 이렇게 보니 기본 골조는 『2000년 문제』와 공유하는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이 어떻게 흘러가든 간에 이노우에 타케히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농구, 농구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 인생의 이야기만큼은 존중하면서 쓰겠다고 다짐했기 때문도 있을 겁니다. <슬램덩크>에 애정과 경의를 표하는 제 나름대로의 결심이었습니다.
무엇을 쓸지 결정한 직후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쓰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써야만 한다는 걸 직감했는데, 심지어 품도 지나치게 많이 드는 데다가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전 제 자신과 안전거리를 확보한 상태로 드라마틱하고 자극적인 중심 사건을 설정한 다음, 망설임 없이 결말까지 치고 나가는 글을 쓰는 데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2000년 문제』는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설령 애써서 쓴다고 해도 크게 인기를 끌 만한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 글을 시작한 다음에도 한동안은 무척 혼란스럽고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1화는 너무 자신이 없어서 트위터에 업로드조차 하지 않았고, 2화를 쓴 직후에는 무척 우울해하면서 3시간 동안 동네를 쏘다녔죠.
이 글의 첫 장면을 만드는 데에도 애를 먹었습니다. 일주일인가 이 주일 정도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 항상 첫 장면이 어렵더라고요. 마침내 첫 문장을 쓴 다음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이건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고, 어딘가로 나아가는 이야기였고, 그렇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며 새로운 곳을 향해 가는 장면으로 시작해야 마땅했죠. 첫 문장을 쓰면서 늘 그렇듯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고, 그 뒤로는 계속 달렸습니다. 문을 여는 그 순간부터 저 너머에 존재하는 쌍둥이 문을 닫을 생각으로 계속해서 달려왔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과 가까운 글을 쓰시는 분들은 아마 『2000년 문제』를 통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송태섭과 정대만의 미래를 그럴싸하게 확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보가 필요했는데, 회차가 진행될수록 제 나름대로 작품을 통해 이해하고 흡수한 두 사람의 모습만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살면서 축적해 온 것들─사람과 인생에 관한 가치관, 인간관계에 관한 경험, 삶에 상처받거나 위안받은 순간을 끌고 와야 했습니다. 마치 호박 속에 갇힌 모기로부터 추출한 불완전한 공룡의 DNA를 복원하기 위해 파충류와 양서류의 DNA를 섞는 과학자처럼요. 이 소설은 제가 만든 쥬라기 파크입니다.
캐릭터나 사건에 설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면 제 경험이 모자라고 제가 나이를 덜 먹은 탓입니다. 눈앞의 공룡으로부터 전혀 다른 DNA를 발견한다고 해도 부디 살짝 모르는 체해주세요. 이 글은 2023년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대부분은 계획한 대로 썼지만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장면도 있습니다. 비디오와 편지, 송태섭의 미니 바스를 지켜본 감독, 송태섭과 이한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면으로 다루는 3화는 전부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고 썼습니다. 수종과 성준도 원래는 한 캐릭터였습니다. 처음 쓸 땐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두 사람 다 좋아합니다. 특히 수종에겐 미운 정이 붙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회차는 9화입니다. 다 쓴 다음에 정말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쓰면서 가장 괴로웠던 회차는 8화입니다. 쓰고나서 너무나도 형편없었다는 생각에 우울해서 엉엉 울기까지 했던 건 10화입니다. 흥분으로 가득 차서 썼던 건 11화, 12화입니다. 가장 설레는 마음으로 쓴 건 역시 1화입니다.
이 정도 볼륨의 글을 다 써놓고 나서 쓰기엔 민망한 고백이지만, 전 지금도 송태섭과 정대만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삶의 낙차의 순간 우연찮게도 강렬한 감정을 부딪친 경험을 공유하는 아리송한 관계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겪은 일은 살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발생하는 순간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설령 서로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경험하게 되었을 일이고, 그렇게 됐다면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가져갔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어떤 관점에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점이 태섭대만의 가장 좋은 부분 아닐까요? 그야말로 인생 같지 않나요. 인생의 굴곡이란 결국 어떤 극적인 사건으로 한순간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면서 계속 흘러가는 건데, 그게 너무나도 태섭대만이에요. 이노우에 타케히코 작가가 나이를 먹었다는 게 느껴지는 관계고 그게 너무너무 좋아요. 두 사람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함께 있는 모습이 저를 위안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제가 살면서 배운 가장 좋은 것의 가치관이 반영돼 있어요.
그래서 태섭대만이 좋아요. 지금도 좋아합니다. 슬램덩크를 좋아하고, 북산을 좋아합니다. 송태섭과 정대만을 좋아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지금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마음을 가지고 이 글을 써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 제 인생의 굴곡을 지켜봐 온 소중한 친구인 미기테님, 슬램덩크를 통해 만났지만 놀라운 속도로 가까워진 릿님, 마감에 고통받아 가며 밤새 짓시를 함께한 스이카님, 1화와 2화를 연달아 올린 다음 글에 대한 자신감이 완전히 떨어져 있을 무렵 저를 북돋아 준 카노님, 글이 막힐 때마다 귀찮아하지 않고 매번 제 원고를 읽어주신 존분님, 저랑 슬램덩크 태섭대만 같이 하자고 해놓고 홀랑 커뮤나 뛰러 간, 그래 놓고선 『2000년 문제』에 들어갈 책날개 소개말은 골라준 바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마감에 허우적거리는 저를 도와 맞춤법 검사와 교정을 도와준 제 동생에게도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책에 쓰지 않은 장면, 설정들은 전부 마음대로 상상하셔도 괜찮습니다.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도 전적으로 읽는 분들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표지도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디에 도착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니까요.
다 쓴 다음에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제가 제대로 해냈을까요? 이 이야기는 마음에 잘 닿았습니까? 최선을 다했으니 누군가는 이 이야기에 위안받았기를 바라봅니다. 슬램덩크가 너무 좋아서, 송태섭과 정대만의 이야기가 계속 보고 싶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어서 썼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가을,
week
그 외에도 트위터로 꾸준히 감상을 남겨주셨던 ray님과 다리떠는사람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이 글에 애정을 표현해 주시고, 두 차례에 걸쳐 멋진 3차 연성을 선물해 주신 뫙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도 여러 창구를 통해 감상을 남겨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저는 금방 포기해 버렸을 겁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본 직후 저는 몹시 흥분했습니다. 올해 상반기 제 인생에 벌어진 큰 사건 중 하나가 될 참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다음 날 티켓을 재예매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런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다음 날에도 똑같이 했고, 그 다음 날에도 똑같이 했습니다.
한동안 퇴근을 하고 나면 곧장 근처 영화관이나 만화방으로 달려가서 영화를 관람하거나 <슬램덩크>를 읽었습니다. 얼마 안 가 저는 이노우에 타케히코 작가가 보여주는 농구에 대한 열정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농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를 통해 인생을 깨닫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말하려 하는 작가의 열정은 저를 완전히 매료시켰습니다. <리얼>을 완독한 직후에는 직접 농구를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평생 인연도 없을 줄 알았던 대형마트 스포츠 코너로 가서 농구공을 산 다음, 한동안 주말마다 동생과 농구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죠.
정말이지 평생 상상도 안 해본 일을 그 무렵에 다 해본 것 같습니다. <슬램덩크>라는 세계 속에서 농구는 너무나도 특별해 보였습니다. 많은 트친들이 그 무렵 농구를 시작했는데, 이노우에 작가의 뜨거운 농구 사랑에 사로잡힌 건 저뿐만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송태섭과 정대만의 관계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영화를 세 번째 관람한 직후였던 것 같습니다. 1월 말이었고, 저는 흥분에 들뜬 한편으로 멍한 상태였습니다. 제게 있어 ‘장르에 입덕했다’는 것은 연성을 결심하는 일인데, 이 둘을 가지고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거든요. 그래도 두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쓰고 싶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그 후에는 뭘 하고 지낼까 상상하면서 1990년대 벌어진 주요한 사건이나 시대상, 일본 농구에 대한 자료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글을 구상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이때가 2월 초였던 것 같습니다.
포스타입에서도 짧게 밝힌 사실이지만, 『2000년 문제』는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2000년 문제, Y2k라고도 불리는 밀레니엄 버그가 무엇인지 당시의 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련한 뉴스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었죠. 밀레니엄 버그라는 것은 요컨대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전 컴퓨터는 부품 예산 문제와 데이터 처리 속도로 인해 연도를 표기할 때 뒤의 숫자 두 자리만을 표기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963을 표기할 땐, ‘63’이라는 숫자만 표기한 것이지요.
그러다 2000년이 가까워지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연도를 ‘00’이라고 표기했을 때, 시스템이 이를 1900년으로 해석할지, 2000년으로 해석할지 판단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전산 시스템이 큰 혼란에 빠집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이 문제가 크게 뉴스로도 나왔고, 이 컴퓨터 버그 때문에 미국의 미사일이 잘못 발사될 거라는 둥 은행 전산 시스템의 마비로 경제적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질 거라는 둥 그로 인해 세계 종말이 올 거라는 둥 무척이나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막상 2000년 1월 1일이 되었을 때, 모두가 염려한 문제들은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고작해야 비디오 가게에 100년 연체자가 나타났다는 정도일까요?). 그렇게 밀레니엄 버그는 세기말 사람들의 불안을 대표하는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해요.
그런데 한편으로 어떤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기사 댓글에 누가 이렇게 써놨더라고요. 이 문제가 처음 지적되었을 때, 수많은 기업과 전문가들이 전산 시스템을 다시 점검하고 이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야 했다고요. 자기 아버지가 기술자였는데 그때 거기 있었다는 거예요. 유튜브에도 비슷한 댓글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댓글들이 잊혀지지가 않았어요. 다시 말해 1999년이 무사히 지나간 건 알게 모르게 애써 온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2000년 문제는 정말로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의 기우였을지 모르고, 또 어쩌면 정말 누군가가 열심히 애써 준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건 아무튼 그 일은 과거가 되었고, 지금은 2023년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믿냐에 따라 이 종말론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마치 인생 같지 않나요?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렴풋하게 구상하고 있을 적 이 글은 지금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박철의 등장일 것 같습니다. 박철과 야쿠자 간 벌어진 패싸움에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농구선수가 휘말려 죽게 되고 박철이 그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게 첫 장면이었네요.
공교롭게도 죽은 그 선수는 선발된 지 얼마 안 된 국가대표였기 때문에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발생한 공석을 채우기 위해 정대만이 추가로 선발됩니다. 한편 송태섭은 미국에서 꽤 활약했으나 NBA 진출은 실패하고 돌아온 상태로, 국내 경기에선 날아다니고 있단 설정이었어요. 와중에 이한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마지막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는 상태였고요.
두 사람이 지난 몇 년간 드문드문 만나면서 미묘한 긴장감이 있는 사이였다는 것 말고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한나에게 프러포즈하는 걸 실패한 송태섭과, 살인 용의자로 의심받는 박철과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밝힐지 말지를 두고 갈등하는 정대만이 서로 등을 맞대고 멍하니 앉아있는 장면을 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밀레니엄 버그를 통해 쓰고 싶은 이야기가 뚜렷해졌고, 제가 박철이란 캐릭터의 존재를 지금의 정대만을 해석하는 데 있어 다소 불필요하게 여기게 되면서 이 내용은 완전히 수정되었습니다.
당시 썼던 초고와 메모를 들춰보니 맨 아래에 밑줄을 쳐두었네요. ‘농구가 너무 하고 싶다. 너와 같이 농구를 하고 싶다. 그런데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갈등의 드라마’라고 쓰여있어요. 이렇게 보니 기본 골조는 『2000년 문제』와 공유하는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글이 어떻게 흘러가든 간에 이노우에 타케히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농구, 농구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그 인생의 이야기만큼은 존중하면서 쓰겠다고 다짐했기 때문도 있을 겁니다. <슬램덩크>에 애정과 경의를 표하는 제 나름대로의 결심이었습니다.
무엇을 쓸지 결정한 직후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여태까지 쓰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써야만 한다는 걸 직감했는데, 심지어 품도 지나치게 많이 드는 데다가 엄청나게 오래 걸리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전 제 자신과 안전거리를 확보한 상태로 드라마틱하고 자극적인 중심 사건을 설정한 다음, 망설임 없이 결말까지 치고 나가는 글을 쓰는 데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2000년 문제』는 전혀 그렇지 않잖아요? 설령 애써서 쓴다고 해도 크게 인기를 끌 만한 글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 글을 시작한 다음에도 한동안은 무척 혼란스럽고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1화는 너무 자신이 없어서 트위터에 업로드조차 하지 않았고, 2화를 쓴 직후에는 무척 우울해하면서 3시간 동안 동네를 쏘다녔죠.
이 글의 첫 장면을 만드는 데에도 애를 먹었습니다. 일주일인가 이 주일 정도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 항상 첫 장면이 어렵더라고요. 마침내 첫 문장을 쓴 다음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이건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고, 어딘가로 나아가는 이야기였고, 그렇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며 새로운 곳을 향해 가는 장면으로 시작해야 마땅했죠. 첫 문장을 쓰면서 늘 그렇듯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고, 그 뒤로는 계속 달렸습니다. 문을 여는 그 순간부터 저 너머에 존재하는 쌍둥이 문을 닫을 생각으로 계속해서 달려왔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과 가까운 글을 쓰시는 분들은 아마 『2000년 문제』를 통해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는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송태섭과 정대만의 미래를 그럴싸하게 확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보가 필요했는데, 회차가 진행될수록 제 나름대로 작품을 통해 이해하고 흡수한 두 사람의 모습만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살면서 축적해 온 것들─사람과 인생에 관한 가치관, 인간관계에 관한 경험, 삶에 상처받거나 위안받은 순간을 끌고 와야 했습니다. 마치 호박 속에 갇힌 모기로부터 추출한 불완전한 공룡의 DNA를 복원하기 위해 파충류와 양서류의 DNA를 섞는 과학자처럼요. 이 소설은 제가 만든 쥬라기 파크입니다.
캐릭터나 사건에 설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면 제 경험이 모자라고 제가 나이를 덜 먹은 탓입니다. 눈앞의 공룡으로부터 전혀 다른 DNA를 발견한다고 해도 부디 살짝 모르는 체해주세요. 이 글은 2023년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대부분은 계획한 대로 썼지만 즉흥적으로 만들어 낸 장면도 있습니다. 비디오와 편지, 송태섭의 미니 바스를 지켜본 감독, 송태섭과 이한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면으로 다루는 3화는 전부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고 썼습니다. 수종과 성준도 원래는 한 캐릭터였습니다. 처음 쓸 땐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두 사람 다 좋아합니다. 특히 수종에겐 미운 정이 붙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회차는 9화입니다. 다 쓴 다음에 정말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쓰면서 가장 괴로웠던 회차는 8화입니다. 쓰고나서 너무나도 형편없었다는 생각에 우울해서 엉엉 울기까지 했던 건 10화입니다. 흥분으로 가득 차서 썼던 건 11화, 12화입니다. 가장 설레는 마음으로 쓴 건 역시 1화입니다.
이 정도 볼륨의 글을 다 써놓고 나서 쓰기엔 민망한 고백이지만, 전 지금도 송태섭과 정대만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두 사람은 삶의 낙차의 순간 우연찮게도 강렬한 감정을 부딪친 경험을 공유하는 아리송한 관계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겪은 일은 살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발생하는 순간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설령 서로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경험하게 되었을 일이고, 그렇게 됐다면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가져갔으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어떤 관점에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점이 태섭대만의 가장 좋은 부분 아닐까요? 그야말로 인생 같지 않나요. 인생의 굴곡이란 결국 어떤 극적인 사건으로 한순간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면서 계속 흘러가는 건데, 그게 너무나도 태섭대만이에요. 이노우에 타케히코 작가가 나이를 먹었다는 게 느껴지는 관계고 그게 너무너무 좋아요. 두 사람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함께 있는 모습이 저를 위안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에 제가 살면서 배운 가장 좋은 것의 가치관이 반영돼 있어요.
그래서 태섭대만이 좋아요. 지금도 좋아합니다. 슬램덩크를 좋아하고, 북산을 좋아합니다. 송태섭과 정대만을 좋아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지금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마음을 가지고 이 글을 써나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 제 인생의 굴곡을 지켜봐 온 소중한 친구인 미기테님, 슬램덩크를 통해 만났지만 놀라운 속도로 가까워진 릿님, 마감에 고통받아 가며 밤새 짓시를 함께한 스이카님, 1화와 2화를 연달아 올린 다음 글에 대한 자신감이 완전히 떨어져 있을 무렵 저를 북돋아 준 카노님, 글이 막힐 때마다 귀찮아하지 않고 매번 제 원고를 읽어주신 존분님, 저랑 슬램덩크 태섭대만 같이 하자고 해놓고 홀랑 커뮤나 뛰러 간, 그래 놓고선 『2000년 문제』에 들어갈 책날개 소개말은 골라준 바야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마감에 허우적거리는 저를 도와 맞춤법 검사와 교정을 도와준 제 동생에게도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책에 쓰지 않은 장면, 설정들은 전부 마음대로 상상하셔도 괜찮습니다.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도 전적으로 읽는 분들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표지도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디에 도착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인생이니까요.
다 쓴 다음에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제가 제대로 해냈을까요? 이 이야기는 마음에 잘 닿았습니까? 최선을 다했으니 누군가는 이 이야기에 위안받았기를 바라봅니다. 슬램덩크가 너무 좋아서, 송태섭과 정대만의 이야기가 계속 보고 싶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어서 썼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가을,
wee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