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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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정대만은 경기가 주는 열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버저가 울리고 시합이 완전히 종료된 뒤에도 우두커니 서서 자리를 지켰고, 악수를 나누고 모든 선수들이 퇴장한 다음에도 체육관에 홀로 남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점수판을 확인했다. 8점 차였다. 8점 차로 이 시합은 미쓰비시 전기 오사카의 승리로 돌아갔다.
당장 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는 현실감이 없었다. 천장이 머리 바로 위로 내려앉은 듯했고 코트가 출렁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다름 아닌 만족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 기적적으로 역전승을 거머쥐고 MVP가 된 중학교 3학년 마지막 경기, 혹은 산왕전의 긴박한 버저비터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비록 이전까지는 그 경험에 기대어 승리를 쟁취했고 지금은 패배했지만 당장은 그 결과가 아쉽다거나 뼈아프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정대만은 자신이 대단한 걸 해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한 만족감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라커룸으로 돌아왔을 때 팀원들은 대부분 환복을 마치고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들은 뒤늦게 돌아온 대만에게 아는 체를 하면서 큰소리로 말했다.
“늦었네요.”
“샤워실 비어있어요.”
그들은 대만이 크게 상심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늘 정대만은 한순간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었고, 팀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열정은 승리를 성취해내지 못했을 때 훨씬 강력한 이미지로 마음에 남는 법이었다.
“잠깐 남아 있었어요. 흥분이 안 가라앉아서.”
대만이 말했다.
“아아. 그런 때 있죠.”
“오늘 열심히 뛰기는 했지.”
동조하기는 했지만 팀원들은 방금까지 대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데면데면하던 강성준만큼은 그의 고양감을 알아차렸다. 라커룸으로 들어오는 대만을 흘끔거리는가 싶더니 그가 흥분에 못 이겨 체육관에 남았다고 털어놓았을 때에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불쑥 말했다.
“이길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짧은 순간 정대만은 성준으로부터 거의 처음으로 슈터와 포인트 가드 사이에 공유하는 희미한 유대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게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다음을 생각해야죠.”
대만이 말했다.
“내년까지 연습 두 배로 합시다.”
“올해도 두 배로 한 거예요.”
다른 팀원 하나가 끼어들었다.
“진짜냐.”
대만은 투덜거렸다.
“그건 꽤 분하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은 평상시와 똑같았다. 성준은 금방 대만에게 흥미를 잃고 그가 다른 팀원들과 대화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얼마 안 가 대만도 그 나름대로 성준에게 완전히 신경을 껐다. 마치 거리에서 어쩌다 손을 스치고 지나가는 행인들처럼 말이다.
오히려 경기 중에 흥분을 공유했던 찰나의 순간이 두 사람을 일시적으로 묶어둔 것에 가까웠다. 팀 스포츠 안에서 인간관계란 참으로 미묘한 것이다. 수종은 뒤풀이에 가지 않으려고 내빼려다 오래간만에 팀원들에게 단체로 한 소리를 들었다.
“수종아. 인간적으로 시즌 중에 있는 회식은 좀 참석해라.”
“져놓고 먹는 밥은 맛있지 않은데요.”
수종이 항의했다.
“인마, 입으로 들어가면 그게 그거지. 스시나 먹자. 비싼 걸로다가.”
대만이 가볍게 면박을 주었다.
“스시요?”
“그래. 싫어?”
“고기가 더 좋은데요.”
수종의 뻔뻔스러운 바람은 곧 이루어졌다. 잠시 후 라커룸으로 들어온 곽 감독이 회식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곽 감독은 이번 경기에 대한 아쉬운 기색을 잠시 내비치는가 싶더니 쟁쟁한 팀끼리 좋은 시합을 보여주었다고 팀원들을 격려했다. 그러고는 야키니꾸 가게에 단체석 예약을 해두었다고 했다.
수종은 신나서 가방을 챙겼다. 팀원들은 가방을 들고 줄줄이 라커룸을 빠져나갔다. 대만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는 핑계로 나중에 합류하겠다고 말했는데, 실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영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복도가 한산해지자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로비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송태섭이 영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영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표정이 어디 딴 데 가 있는 사람 같았다. 시즌 중에 한 번쯤 보러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오늘 경기 시작 직전 객석을 훑어보았을 때는 자리에 없었으므로 대만은 그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뭐야, 왔었어? 어디 있었어?”
“위예요.”
“위 어디?”
“3층에 있는 발코니요.”
태섭이 눈짓으로 계단 쪽을 가리켰다.
“아아. 저기까지 올라갔냐.”
“제일 잘 보이더라고요. 각도 죽이던데요.”
그럼 다 봤겠군. 패배의 아픔보다 남은 열감에 취해 있던 대만은 뒤늦은 민망함을 느꼈다. 그러는 한편으로 부끄러워하기보다 우쭐대고 싶었다. 솔직히 오늘 자신이 멋있었다는 걸 그는 모르지 않았다.
‘뭐. 그래도 진 건 진 거지.’
“더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대만이 말했다.
“우리가 뭐가 아쉽겠어. 경기 잘 봤다, 대만아. 오늘 정말 멋있었어.”
영걸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는데 갑자기 마음이 아렸다. 방금까지 우쭐대고 싶었던 기분은 어디로 가고 느닷없이 패배에 대한 아쉬움으로 가슴이 찔리는 것만 같았다.
“다음번에는 너 내가 이긴 경기 보고 돌아가게 해 줄게.”
대만이 진지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가볍게 포옹을 나누었다. 대만은 영걸의 등을 두들겼는데, 애정을 담다 보니 점점 힘이 실렸다. 영걸이 낄낄대며 그를 거칠게 밀어냈다. 옷 속에 감추어진 영걸의 어깨는 언젠가보다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막상 두들겨 보니 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묵직했다.
“가볼게.”
“응. 들어가라.”
“들어가세요.”
대만이 영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태섭은 거의 한 마디도 않고 두 사람과 거리를 둔 채 조금 떨어져 있었다. 마침내 그가 배웅을 마치고 돌아섰을 때는 뚱한 표정으로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고 있었다.
“둘이서 무슨 얘기했냐?”
“저보고 어쩐 일이냐고 묻던데요.”
“영걸이가 많이 반가워하던?”
“엄청 반겨주시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선배는 영걸 선배한테 잘하세요.”
“뭐 인마?”
두 사람은 잠시 티격태격했다. 태섭은 오늘따라 말수가 적었다. 어딘가 침착해 보였고 장난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종종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그럼 경기는 이제 더 없는 거예요?”
“없어. 올해는 이걸로 끝난 거야.”
“진짜로 끝이에요? 완전 끝?”
“인마, 없다니까. 나도 좀 쉬어야지.”
순간 태섭이 굉장히 아쉬워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12월에 약식으로 경기가 있기는 할 거야. 보고 싶으면 올라오던가.”
저도 모르게 대만이 말했다.
“경기 더 없다면서요?”
“리그는 아니고… 현 올스타전이 그쯤이거든.”
그가 말하는 올스타전은 현 단위로 열리는 엔터테인먼트성 내전을 뜻했다. 워낙에 규모가 작고 지역에 따라 열리지 않는 곳들도 많아서 농구에 관심이 있는 주민들이나 좀 보러 가는 정도였다. 티켓도 따로 팔지 않고 경기장도 협소했기 때문에 그걸 보러 오라는 건 사실 좀 민망한 제안이었다. 대만은 다시 말했다.
“근데 연말에 잡힐 것 같거든. 시간이 안 되면 그냥 여기 있어. 전화할게.”
“며칠쯤인데요?”
“모르겠다. 작년에도 딱 12월 말에 열려서 불만이 좀 있었다던데.”
태섭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갈게요.”
“안 보러 와도 된다니까?”
“보러 갈게요.”
갑자기 태섭은 경기를 꼭 보러 가겠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별 거 없다고 말을 돌려봐도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러라고 대답한 대만은 의심스러운 듯 눈앞의 후배를 쳐다보았다. 태섭의 상태가 평소 같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너 무슨 생각해?”
“네?”
태섭은 곧 침착하게 되물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이상하기는….”
물끄러미 쳐다보자 태섭은 한순간 갈등하는 것 같았다.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머뭇대다가 자신도 도통 뭘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먹을 쥐고 말을 고르는 찰나의 순간 송태섭은 마음을 바꾸었다. 어느새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 오늘 졌잖아요.”
“졌지.”
“분했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하지.”
대만이 덧붙였다.
“근데 재미있기는 했어.”
“지금도요?”
“지금도.”
태섭은 그 대답을 오래 곱씹는 것 같았다.
미쓰비시 전기 오사카는 리그 개편 전인 JBL 1996 시즌에 우승을 거두고 재작년까지 꾸준히 순위권을 오르내리던 강팀이었다. 초장부터 이들과 맞붙는 바람에 불과 작년에는 결승까지 올라가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던 JR 동일본 센다이는 올해 16강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안고 돌아서야 했다. 도쿄 OSG에 대한 설욕전은커녕 대진표상 다음 상대인 채치수의 실업 팀과도 붙어보지 못하고 일찍이 맛본 패배였다.
그 경기는 대외적으로 대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얄궂게도 그날의 패배 이후 야투율이 남들이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가지 신기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슬럼프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남들이 볼 때 그의 성적은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오락가락하는 정도였다. 송태섭도 그렇게 말했다.
“별로 티도 안 나요. 선배가 말 안 해줬으면 저도 몰랐어요.”
고전을 면치 못하고 망설이거나 괴로워하면서 던져온 지난 몇 달간의 투쟁을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치 그의 두려움이나 고통이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다. 한때 대만을 지나치게 의식했던 강성준 정도나 그가 시원치 않다고 비꼬았을 뿐이지 실은 성준조차 정대만의 야투율이 전보다 못하다는 것을 관찰해 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와 얽혀있던 아니꼬운 감정들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었다.
이것은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우선 사측이나 임원들이 그의 이변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간 것은 좋은 일이었다. 들쭉날쭉한 야투율로 나쁜 인상을 심어주기도 전에 리그가 종료되면서 정대만은 일종의 유예기간을 갖게 되었다. 가끔 무릎의 작은 통증이나 컨디션 난조를 핑계로 엇나가곤 하는 공을 원망스럽게 쳐다보곤 했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기복을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게 되었다.
꼭 그 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대만은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전과 달리 그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이토록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팀원들 간의 거리감이나 어느 순간 잔인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던 사람들의 무관심도 더는 불편하지 않았다. 들쑥날쭉한 컨디션이 걱정될 때도 있었지만 그 문제에 심하게 사로잡히거나 다른 문제와 얽매여 생각하지도 않게 되었다.
마치 끊임없이 균형을 바로 잡아주는 묵직한 추를 얻게 된 것만 같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무언가 앞으로도 쭉 이어지리라는 것을 그는 전보다 훨씬 잘 느끼게 되었다. 스스로가 그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기적처럼 잘 던지지 못하게 되더라도 자신은 계속 농구를 하고 있을 거라고 대만은 무심히 예감했다. 계속 농구를 좋아할 준비가 되어있는 그 마음이 전처럼 비장하기보다는 담담한 하나의 사실처럼 느껴졌다.
그런 다음 성적이 차차 돌아왔다. 눈에 띄게 컨디션을 끌어올리기 시작한 12월 중순부터는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아져서 대만은 주변에 호언장담을 하고 다녔다. 심드렁하게 생각할 땐 언제고 어느새 올스타전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다시 시험해보고 싶어 했다. 가나가와와 센다이 사이에 놓인 거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보러 오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송태섭에게도 이러한 마음을 은근하게 드러냈다.
“요즘 느낌이 괜찮아.”
“잘됐네요.”
태섭이 대답했다.
“그래서 경기 스케줄이 어떻게 되는데요?”
“12월 마지막주부터 쭉 달릴 것 같다.”
그러나 연말연시까지 진행될 예정이던 미야기 현 올스타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돌연 취소되고 말았다. 밀레니엄 버그를 두고 온갖 방송과 언론이 신나게 대중의 불안을 부채질한 결과 마침내 정부까지 나서서 각종 전산 시스템을 공유하는 산업 전반에 지침을 내리기에 이른 것이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국토교통청은 JR 동일본 센다이에 1월 1일을 대비한 사내 인력을 보충하고 전문가를 통해 혹시 모를 혼란에 대비해 주길 바란다고 권고했다.
그 결과 JR 동일본 센다이를 포함한 미야기 현의 공익 사업체 전반이 올스타전을 불참할 수밖에 없어졌다. 결국 12월 셋째 주에는 경기 자체가 취소되고 말았다. 정대만은 크게 실망했다. 심지어 그는 전산센터에서 배치받은 젊고 독신인 사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차출되어 꼼짝없이 야근을 하게 될 운명에 처했다.
“실업 팀 선수도 야근을 하나, 보통?”
“저야 모르죠. 백수인데.”
“밀레니엄 버그인지 뭔지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냐.”
정대만이 허탈하게 투덜거렸다.
“하여간 올해 연말은 최악이다. 세기말에 대체 이게 무슨 난리야?”
1999년 12월 31일은 금요일이었다. 시작부터 좋은 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후 출근이었기 때문에 정대만은 일부러 늦잠을 차려고 했는데, 빠릿빠릿 움직이는 습관이 든 탓에 결국 점심이 되기도 전에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억울한 기분으로 집을 청소하고 TV를 보고 주변을 조깅하고 돌아온 다음 끼니를 때우고 저녁 7시쯤 회사로 출발했다. 평소처럼 입고 나왔다가 날씨가 너무 싸늘해서 도로 돌아와 코트를 걸쳐 입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안 그래도 엉성했던 옷장 내부가 완전히 내려앉는 불상사까지 벌어졌다.
정말이지 재수 없는 날이 아닌가. 한동안 무너진 철 막대기를 나사 사이에 걸쳐두려고 애쓰던 그는 이대로는 지각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밖으로 나왔다.
퇴근하는 회사원들 사이에서 출근을 하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대만은 저녁노을이 지고 서서히 땅거미가 올라오는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전철에서 내릴 때 개찰구에서 성준을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간단히 눈인사만 했을 뿐 더는 대화하지 않았다.
사무실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낮과 달리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야근으로 차출된 인력은 대만을 포함해 총 여섯 명이었는데, 다들 젊고 독신이거나 혼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컴퓨터 전문가로 보이는 외부인들이 전산실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전산실로 들어가자 그와 교대하기로 돼 있던 삼십 대 초반의 대리가 다가와 티백을 건넸다. 그는 결혼한 지 일 년 남짓된 신혼부부로 잘 알려져 있었고, 이번 세기말 대사건을 막기 위한 차출 인력에서 턱걸이로 제외된 운 좋은 인원 중 하나였다.
“정말 장관이지 않나요.”
전산실 컴퓨터를 분해하는 외부 인력들을 구경하다 말고 그가 말했다.
“회사는 센다이 JR들이 한 번에 튀어나가기라도 할 줄 아나 봐요.”
정대만은 그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2000년이 되는 순간 일제히 오류가 발생한 컴퓨터가 무작위로 현재 시간을 재조정한다. 그 결과 센다이에 존재하는 모든 역사에 느닷없이 안내 방송이 울리고 JR 창고에서부터 누구도 태우지 않은 열차가 일제히 출발한다. 역사마다 재조정된 발차시간이 뒤죽박죽 하기 때문에 섬세하게 조율돼 있던 철로가 마음대로 뒤바뀌고 결국 경로가 겹치는 열차끼리 거대한 추돌사고가 벌어진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야 하겠어요.”
그러면서도 대만은 자신의 상상에 살짝 질린 투였다. 그의 목소리에서 묘한 긴장을 감지한 직장 동료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위에서도 그렇게 생각해서 부르는 거겠죠. 다신 없을 광경이에요.”
그는 대만에게 비품실에 있는 간식 위치를 알려주었다. 평소에 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렇게라도 인사를 나누게 되어 좋았다고, 다음번 경기는 한 번쯤 보러 가겠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리그 마지막 경기를 옆 부서 사람이 보고 왔었는데 대만 씨 칭찬이 자자했다고 전해주었다.
“아무튼 고생해요.”
일곱 시쯤 되자 저녁을 먹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남자 사원이 돌아왔다. 건너편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무척 피곤한 얼굴이라 불쌍해 보였다. 차를 권하자 기꺼이 마시겠다고 했다.
“대만 씨, 어서 오세요.”
“얼굴이 다 죽어가십니다?”
“연말에 이게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어요.”
그는 대만이 해야 할 업무를 알려주었다. 평소 오전에 반짝 출근한 다음 일하는 시늉만 하다 체육관으로 사라지는 실업 팀 선수 정대만은 입사 한 지 반년이 넘도록 사내의 전산 시스템을 겉핥기식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훈련이 없는 날에는 남들처럼 풀타임으로 근무했지만 그때도 서류 작업을 주로 맡았지 제어 시스템을 직접 조작하는 권한을 갖지는 못했다.
사원은 계기판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어느 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현재 어디까지 왔는지, 각 역마다 지정된 발차 시간은 어떻게 확인하는지, 만약 열차가 출발할 때는 모니터에 어떻게 출력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이곳에서 직접 열차를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들이 앉아있는 이곳은 운행에 이상이 발생할 경우 모니터를 통해 곧바로 상황을 확인하고 각 역사에 연락을 취하는 상황 통제실에 가까웠다. 대만은 외워보려는 시늉을 하면서 물었다.
“이거 못 외우면 큰일 나나요?”
“글쎄요. 전문가들이 이미 일주일 전부터 한바탕 휩쓸고 갔는데, 문제가 생기면 그게 더 큰일 아니겠어요?”
동료 사원은 회의적인 얼굴이었다.
“대만 씨가 리그를 치르고 있을 때 이미 이쪽 컴퓨터는 한 번 싹 갈아엎었다고요. 보세요, 새 컴퓨터죠?”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깨끗하고 반들반들한 로고가 컴퓨터마다 붙어 있었다. 만져보니 정말로 새 컴퓨터였다.
“저희는 만약의 만약을 대비하는 인원인 거죠.”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정이 되기 전까지 사내 분위기는 어수선하기만 했다. 처음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은 점점 집중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책이나 신문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홍백전을 보겠다고 단체로 소파로 나와서 조그마한 화면의 TV를 시청하기에 이르렀다.
11시 40분쯤 되자 사람들은 다시 전산실에 모였다. 그 사이 컴퓨터 시스템을 골백번은 더 점검한 기술자들이 구석에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대만은 전면의 거대한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직장 동료들이 친절하게 알려주었던 내용들은 벌써부터 머릿속에서 분해되기 시작했고 뭐가 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나쁜 일이 벌어지면 경보가 울리겠지. 대만은 생각했다.
어느새 12시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 시민들의 공포심을 무책임하게 부추긴 언론에 불평불만을 토로하던 사내 사람들도 내심 혹시 모를 사태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전산실의 모든 인간들이 이미 운행을 종료한 지 오래인, 움직이는 기차라곤 단 한 대도 없는 JR선의 전산 모니터를 응시했다.
마침내 1월 1일이 되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리에서 컴퓨터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훌륭한 기술자들이 몇 번이고 확인해 가며 손색없이 고쳐둔 컴퓨터들은 지금이 2000년 1월 1일이라는 것을 정상적으로 인식했다. 다른 컴퓨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열차가 발차하는 일도, 갑자기 철로가 움직이며 경로를 뒤바꾸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열차 연쇄 추돌 사고 같은 게 벌어질 리가 없었다. 그제야 숨을 돌린 사람들이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누가 제 앞에서 밀레니엄 버그 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면 주먹으로 박살 내버리겠어요.”
피로함에 핏발이 선 눈으로 동료사원이 투덜거렸다.
정대만은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회사를 나왔다.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도 공기가 묘하게 텁텁하고 뜨뜻미지근했다. 대만은 얼굴을 찡그리고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다.
눈송이보다는 먼지에 가까운 진눈깨비를 따라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가 우뚝 멈추어 섰다. 전화 부스에 기대어 서 있던 태섭도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뭐야.”
대만이 얼빠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뭐냐, 너?”
태섭이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표정 봐. 웃겨 죽겠네.”
정대만은 이상한 걸 목격한 사람처럼 찌푸린 채 송태섭의 얼굴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아저씨, 정신 좀 차려보세요.”
“너…. 언제 온 거야.”
이어서 물었다.
“나보러 온 거냐?”
태섭은 그렇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곧바로 도쿄역으로 가서 승차권을 끊고 올라왔다고 했다. 도호쿠 본선을 따라 이치노세키행 야간열차를 타고 왔는데 침대에서 약간 꿉꿉한 냄새가 났다고 투덜거렸다. 회사 위치는 역사에 비치된 팸플릿 지도에서 찾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정대만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야간열차 더럽게 비싸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대만이 전화부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태섭을 그대로 품에 가두고 입을 맞추었다. 코트로 등을 감싸 안고 큼지막한 두 손으로 그의 뺨과 턱을 부드럽고 단호하게 붙잡은 다음 조심스럽게 입술을 문지르면서 파고들었다.
놀라서 뻣뻣하게 굳었던 태섭도 어느샌가 서서히 힘을 풀었다. 대만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태섭도 결국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아래로 떨어지던 손이 코트 끝자락을 슬그머니 붙잡았다.
“사랑해.”
대만이 속삭였다.
“사랑해….”
그것은 두 사람을 보다 깨끗한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이었다. 마음을 완전히 씻어주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들에 다시 기대를 걸어보게 만드는 입맞춤이었다. 그렇게 해서 눈앞의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진심으로 믿게 만드는 그러한 입맞춤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서 있었다.
“형. 근데 여기 회사 앞인데요.”
입술이 떨어지자 태섭이 작게 웅얼거렸다.
“괜찮아.”
대만이 말했다.
“키 때문에 다들 너 내 여자친구로 알 걸.”
실제로 그렇게 이야기하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건물에서 사람이 빠져나왔다. 남자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다 말고 전화 부스 안에 딱 달라붙어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키 작은 상대를 밀어붙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대만은 그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잠시 후 남자는 부스를 무심하게 지나쳐 주차장으로 향했다.
“봤지?”
“…….”
대만이 다시 입을 맞추려 했지만 이미 산통이 다 깬 태섭은 아까처럼 로맨틱한 기분에 잠겨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대만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한 대 치고는 밖으로 나왔다.
“야!”
대만이 투덜거리며 부스를 빠져나왔다. 태섭은 주먹을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얼빠져 있던 얼굴에 서서히 결심이 섰다.
송태섭은 사실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라고 했다. 이 이상 분위기에 휩쓸리기 전에 말하는 게 낫겠다고 단호하게 말하고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뭔데?”
“형.”
태섭이 얼굴을 문질렀다.
“저 다시 미국 가요.”
심호흡을 한 다음 말했다.


27
정대만은 송태섭을 차에 태웠다. 맨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다가 훤히 보이는 신사 입구에다 차를 세웠다. 센다이 바다는 가나가와 앞바다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휴양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관광객을 위해 꾸며진 해변이 거의 없었고 보이는 곳마다 큼지막한 생선 통조림 공장 같은 것들이 세워져 있었다. 부둣가에 세워둔 선박들이 시커먼 파도 위에서 출렁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신사의 토리이를 지나 지대가 높은 돌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잠자코 있던 대만이 가장 먼저 물어본 건 이것이었다.
“우리 계속 사귀는 거냐?”
태섭은 머뭇대다가 말했다.
“저는 그러고 싶은데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근데 선배가 거절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게요.”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나도 생각 좀 하자.”
언제쯤 결정된 일이냐고 묻자 태섭은 불과 일주일도 안 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작년에 계약했던 에이전시에서 다시 돌아와 줬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하부 리그를 뛰는 조건이어서 한동안 고민했다고 했다. 확답을 보낸 건 대만의 리그가 끝난 바로 다음 날이라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계속 농구를 하고 싶다고, 기회가 닿는 한 계속 흐름을 타보고 싶다고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고 싶어졌어요.”
“너 자취방은?”
“송아라한테 넘기려고요. 걔한테도 필요해 보이고.”
이미 서류 작업은 마무리되어 있었다. 아라에게도 슬쩍 언질을 줬는데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 일 때문에 태섭은 그날 리그에 지각을 하고 만 것이었다.
처음의 얼떨떨함이 가라앉고 나자 대만은 송태섭이 말도 없이 큰 결정을 한 것에 마음이 상했다. 물론 그는 태섭이 미국으로 돌아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먼저 물어보았더라도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에는 그 일 때문에 화가 나 있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송태섭을 옆에 앉혀두고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졌다. 어쩌면 마음 한 구석으로는 이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직감했는지 모른다. 귀국한 태섭을 태우러 센다이에서 출발해 하네다 공항으로 향했을 때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됐다.”
그가 진심으로 축하하며 말했다.
“미국 가서는 계속 뛰어라.”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바닥을 보며 말했다.
“고마워요.”
“너 잘할 거야.”
“알아요.”
“언제 출발해?”
“2주 뒤요.”
“알겠다. 데려다줄게.”
그런 다음 한동안 말없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컴컴한 수평선 너머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어찌나 바람이 거센지 얼굴을 들고 있으면 몸이 뒤로 조금씩 밀려나는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저 멀리서 등대의 불빛이 반짝이며 돌고 있었다.
“그때 말이야.”
대만이 말했다.
“네가 미국 가서 한동안 연락도 없다가 새벽에 갑자기 전화한 날 있잖아.”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너도 그때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준 거지.”
태섭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도 가끔 네 생각을 했다.”
“그랬어요?”
“그래, 인마.”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농구를 정말 열심히 하고 있었거든. 앞으로도 그럴 거야.”
“…….”
“그러니까 너도 열심히 해. 우리는 농구를 하는 녀석들이잖냐.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농구를 하는 게 너랑 나한텐 특히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막막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면 말이야. 계속되는 것 같다.”
“뭐가요?”
“몰라.”
대만이 중얼거렸다.
“뭔진 잘 모르겠는데 그게 계속되는 것 같거든.”
맨션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거실에 이불을 펴놓고 TV를 틀어둔 채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었다. 약속이나 한 듯 미국에 대한 이야기는 더는 꺼내지 않았다. 아닌 척하더니 태섭은 맨션 구석구석을 궁금해했다. 나중에는 대놓고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물을 마시려고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가 하얀 돌판에 끼기 시작한 새빨간 물때를 가리키면서 경악스럽게 말했다.
“좀 닦고 살아요.”
“야, 요즘 바빠서 그랬던 거야.”
항의했지만 정대만의 생활력에 대한 태섭의 불신은 커져만 갔다. 마침내 옷방에 이르렀을 때 그는 넝마짝이 된 옷장을 가리키면서 저게 뭐냐고 물었다.
“무슨 실험 중인가? 아티스트?”
“조립식이라서 그래. 조립식 모르냐, 조립식?”
“그럼 조립을 해야지 창조를 하면 어떡해요.”
한창 면박을 주던 태섭은 박스를 뒤져서 찾아낸 다섯 페이지짜리 설계도를 대강 훑어본 다음 조립식 옷장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능숙한 듯 행동했는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웠냐고 물어보자 기숙사에서 살 때 경첩들이 죄다 거지 같아서 비슷한 걸 여러 번 손 본 적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얼굴을 씻고 옷을 주워 입은 다음 밖으로 나왔다. 센다이는 늘 그렇듯 희뿌연 잿빛 안개에 싸여 있었다. 희끄무레한 공업단지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산책하다가 점심 무렵에는 차를 끌고 요크타운으로 나갔다. 1월 1일이라 대부분의 가게가 휴점인 와중에 열려 있는 가게가 딱 하나 있었다. 대만은 송태섭에게 센다이 명물이라는 규탄야끼를 사 먹였다.
“이거 맛있어요?”
태섭이 의심스럽게 묻자 대만이 능청맞게 대답했다.
“그냥 입에서 더 잘 쪼개지는 안심이라고 생각해.”
송태섭은 늦은 토요일 저녁에 가나가와로 돌아왔다. 그다음 주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지난한 서류 작업에 착수해야 했고 그 와중에 송아라의 이사 준비를 위한 작업까지 마무리해줘야 했다.
그는 아라에게 집 열쇠를 넘겨준 다음 이번에 집을 구하면서 알게 된 부동산 관계자 몇 명의 연락처를 적어주었다. 문제가 있으면 이쪽으로 연락을 넣어보라고 했다. 엄마와도 얘기가 끝난 건이지만 네가 직접 다시 한번 인사드리라고 당부했다. 아마도 가구 같은 건 엄마가 조금 도와주실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송아라는 묘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입을 삐죽대면서 물었다.
“친구 초대해도 돼?”
“알아서 해. 이제 네 집이니까.”
송태섭이 덧붙였다.
“근데 남자친구는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
여동생이 항의했지만 그는 무시했다.
그 주에는 아라를 데리고 계약한 집을 둘러보고 왔다. 집을 넘겨준다고 했을 때부터 의기소침하게 굴던 아라는 도착한 다음에도 한동안 겸연쩍은 얼굴로 방을 둘러보고 다니면서 여기저기 트집을 잡아댔다. 창문 잠금장치가 뻑뻑하다는 둥 햇볕이 잘 드는 위치냐는 둥 시종일관 툴툴거렸는데 괜히 민망해서 그러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태섭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볕이 잘 들고, 입지도 괜찮고, 역에서부터 그렇게 멀지도 않은 데다 방세도 싸다고. 대학생인 너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고 이미 두 번은 설명한 내용을 귀찮은 기색도 없이 다시 설명해 주었다.
집을 보고 나온 아라는 기분이 무척 좋아져서는 그 주 내내 태섭에게 아주 사근사근 굴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고 태섭은 생각했다.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언젠가 자신을 만나러 오키나와에서부터 츠지도까지 날아온 초등학교 미니 바스 감독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태섭은 그때 제안을 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짤막하게 전했다.
“나가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은 부스럭거리면서 수화기를 고쳐 쥐는가 싶더니 헛기침을 하며 쑥스럽게 말했다.
“괜히 말 얹은 건 아닌가 싶어서 그 뒤로 후회가 많았는데.”
그는 태섭이 농구를 다시 하게 되어서 무척 잘 됐다고, 정말로 기쁘다고 진심으로 축하했다.
“잘하는데 그만두기엔 아깝잖아요.”
그 말이 더는 자신을 상처 입히거나 분노케 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을 때, 태섭은 실은 애초부터 그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과 자신을 비교하던 감독의 얼굴과 목소리를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이제 악몽 속에서 읊조리는 어두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니라 마음에 적당한 흔적을 남기고 스쳐가는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사람들이란 늘 그런 식으로 두 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28
송태섭의 출국일은 2000년 1월 21일 금요일로, 아침 비행기였다. 출근하는 엄마를 새벽부터 깨우고 싶지 않은 데다 어차피 배웅을 나올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주 평일에는 센다이로 올라가 대만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대신 그전 주에는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두 사람은 아라의 독립을 두고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까지 기다렸지만, 엄마는 결국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했다.
“엄마도 이사 갈까?”
“왜요, 갑자기?”
“그냥.”
그렇게 말하는 엄마는 무척이나 편안해 보여서, 두 사람이 떠나고 남은 빈집에서 홀로 쓸쓸히 앉아있는 모습 같은 게 전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런 풍경을 염두하고 있던 태섭은 정말이지 깜빡 속은 기분이었다. 그 남자와의 관계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몰라도 가벼운 관계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정대만은 그 주 내내 자유훈련을 불참했다. 퇴근하자마자 쏜살같이 맨션으로 날아가 저녁부터 이른 아침까지 송태섭과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었다. 시시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다가조역 일대의 베드타운을 돌아다니면서 목소리를 낮추어 대화했다. 대만이 혹평한 가게에서 라멘을 한 그릇씩 사 먹기도 했다. 양만 많고 맛은 없는 라멘을 먹으며 태섭은 이 집이 반년 안에 망할 거라고 투덜거렸다.
저녁에는 TV를 보면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뉴스는 그 사이 한바탕 휩쓸고 간 밀레니엄 버그를 특집 코너로 다루고 있었다. 모두가 그토록 우려했으나 정작 아무런 문제 없이 지나가버린 1월 1일 새천년 대소동에 대해 소개했다.
결국 미국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는 일은 없었다. 불꺼진 차고에서부터 발차한 전철 수십 대가 단체 추돌 사고를 일으키거나 은행 전산 시스템이 마비되며 누군가의 통장 잔고가 갑자기 ‘0’으로 돌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앵커 역시 그 모든 일을 더는 버그라고 부르지 않았다. 다른 말로 ‘2000년 문제’라고 지칭했다.
“근데 우리 회사는 저거 때문에 컴퓨터를 싹 갈았거든. 기술자들도 불러오고. 아마 다른 회사들도 비슷할걸? 말은 저렇게 하지만 당일엔 진짜 난리도 아니었다. 내 건너편에서 일하는 사람은 말이야, 자기 앞에서 밀레니엄 버그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한 대 쳐버리겠다더라.”
대만은 이번 일을 그렇게 축약했다.
“무사히 지나간 것도 다 뒤에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다는 거지.”
그렇다. 모든 일이 결국 별 것 아닌 사건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그 과정이 간단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미신이 되어버린 종말론에조차 누군가는 피켓을 들고 고속도로에 드러눕고 불쌍한 회사원들은 연말연시에 야근을 하지 않았는가.
“근데 정말 아무도 모르는구만.”
“원래 세상만사가 그런 거죠.”
태섭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가끔은 야릇한 분위기에서 키스 이상의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발장난을 치면서 서로의 물건을 건드리다가 나중에는 입을 맞추면서 바지에 손을 집어넣고 어루만지며 몸을 꼭 밀착시키기도 했다.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남자랑 키스하는 상상을 하면 토가 나올 거라더니 한 번 진도를 빼기 시작하자 정대만은 눈에 띄게 흥분했다. 정말 의외의 면모라고 태섭은 생각했다.
3일간의 시간이 그렇게 쏜살같이 흘러갔다. 출국 당일 대만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났다. 옆에 누워 있는 태섭을 깨워 간단히 끼니를 해먹이고 차키를 챙겼다. 태섭이 집에서부터 들고 온 묵직한 가방들을 트렁크에 차례로 실은 다음 조수석에 태웠다.
“졸리면 더 자.”
“잠 다 깼거든요.”
한산한 새벽 국도를 타고 속도를 내며 가는데도 공항까지 얼추 네 시간 반이 걸렸다. 잠이 다 깼다는 태섭의 말은 정말이었다. 돌아가는 네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쉬지 않고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낄낄대며 떠들었다. 중간에는 핸들을 마구 치면서 고개를 젖힐 정도로 눈물 나게 웃어댔다. 그 긴 거리를 운전하는데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참 별일이 다 있었다.”
“아무래도요.”
“농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할 줄 누가 알았겠냐.”
대만이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계속 농구할 것 같지 않냐?”
“하겠죠.”
태섭은 담담히 대답했다.
“좋든 싫든 계속 만나야 돼. 농구하면.”
“알아요.”
태섭이 말했다.
“근데, 농구 안 해도 만나요.”
대만이 시원하게 웃었다.
“그래. 너랑은 그럴 것 같다.”
그쯤에 정대만은 자신에게 벌어진 변화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아차렸는데, 그것은 바로 운명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정대만은 앞으로 농구가 없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전처럼 농구를 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세상을 다 잃은 듯 분노하며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하는 얼간이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앞으로도, 그는 계속해서 농구를 할 것이다.
더는 필사적일 수 없게 될지라도 그 일을 계속할 것이다. 더는 운명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가 온다고 해도, 더는 농구가 자신의 편이 아니게 될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는 계속해서 그 일을 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일들야말로 좋은 일인지 모른다. 몇 번이고 선택하는 한 농구는 여전히 그의 일부분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한 계속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살아가면서 얻는 가장 좋은 것인지 모른다.
그러고 나서 송태섭을 생각했다.
사실 태섭과는 붙어있을 때보다 떨어져 있을 때가 훨씬 많았다. 그동안 정대만은 송태섭이 있던 없던 잘 살아왔다. 그러니까 없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 8년 간 이 관계가 그렇게 죽도록 간절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하고 싶었다.
재미있으니까. 설령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헤어지고 난 다음에도, 개같이 싸우고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된 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에 문득 그 공중전화로 돌아가 전화를 걸면 그 애가 반드시 받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 애가 거기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송태섭은 전화를 받을 테고, 그러면 두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말을 트게 될 것이고, 그러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떠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그래왔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관계를 앞으로 살면서 얼마나 만날까.’
그러니까 정대만은 송태섭과 계속하는 걸 선택한다. 어쩌면 운명처럼 보이는 모든 일들은 결국 선택의 문제였는지 모른다. 2000년 문제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에 달린 이야기인지 모른다.
두 사람은 공항에 딱 맞게 도착했다. 트렁크를 끌고 가는 동안 둘 다 차차 말이 없어졌다.
게이트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대만이 입을 열었다.
“우리 계속 사귈까.”
태섭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래요.”
“가기 전에 한 번만 안아보자.”
“아, 됐어요. 무슨….”
두 팔을 벌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태섭이 마지못해 트렁크를 쥔 손을 놓고 걸어왔다. 품으로 다가가는 발걸음이 점점 다급해지더니 그 안으로 와락 덤벼들었다.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를 꽉 끌어안았다.
“나 계속 농구할 거다.”
머리 위에서 대만이 중얼거렸다.
“알아요.”
태섭이 말했다.
“계속해요. 앞으로도.”
“너도 계속해라.”
태섭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노력할게요.”
두 사람은 떨어져 나왔다.
“이제 들어가라.”
“네, 연락할게요.”
“잘 지내고.”
“예, 형도요.”
태섭은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캐리어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
그 뒷모습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섭섭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정말로 눈물이 찔끔 나오려던 때였다.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게이트에서부터 퉁겨지듯 송태섭이 달려 나왔다.
“정대만!”
모두가 쳐다보든 말든 그에게 삿대질을 했다.
“바람피우면 죽을 줄 알아요!”
정대만은 동그랗게 눈을 뜨다 말고 으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이 술렁이든 말든 개의치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어느새 태섭은 다시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진짜 바보 아냐, 저거?”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돌아가는 길에는 라디오를 들었다.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의 라디오 캐스트가 때마침 이마이 미키의 히트곡을 소개하고 있었다. 드라마 <내일이 있으니까>의 주제곡으로, 희망적이고 씩씩한 가사를 듣고 있으면 정말로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했다. 광고가 끝나자 대만은 볼륨을 높였다. 전에 들어본 적 있는 곡이었다. 태섭에게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가나가와까지 미친 듯이 밟는 동안 흘러나왔던 그 노래였다.
이번에 대만은 제대로 가사를 들었다. 무척 좋은 노래였다. 이보다 좋은 노래가 있을 수 없었다. 국도로 들어선 그는 센다이 방향 고속 중앙선을 타고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홀로 어딘가를 향하여 꾸준히 나아갔다. ■ 2023.10.18 <2000년 문제>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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