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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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은 싸움에서 지기 일보직전인 개처럼 허공에 대고 여동생의 이름을 외쳐댔다. 그렇게 만들어낸 거대한 음파가 시시각각 닥쳐오는 일들을 파도처럼 밀어내기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러다 결국은 멈추어야 할 순간이 왔다. 태섭은 혼란에 빠져 현관 앞에 우두커니 멈추어 섰다. 엄마와 눈을 마주칠 자신조차 없어서 엄마가 입고 있는 자주색 스커트를 쳐다보았다. 얼음장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스커트를 입으셨네.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저런 스커트가 우리 집에 있던가?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좋을지 몰랐다. 송아라가 한꺼번에 쏟아낸 말들이 아직 마음에 완전히 자리 잡히지 않은 와중에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단 한 가지 생각은, 그의 여동생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라는 태섭이 집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독립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은연중에 느끼고는 있었지만 표면적으로 인정하거나 드러낸 적 없는 자신의 마음을 송아라는 전부 알고 있던 것이다. 그의 여동생은 거침 없이 가족을 향한 분노를 쏟아내며 감당하기 어려운 비밀들을 폭발시켜 놓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엄마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당장에 달아나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집의 둘째 아들이자 유일한 남자 가족 구성원으로서 그의 자아는 이곳에 남아 엄마를 위로하고 앞으로 벌어질지 모를 일을 수습해야 한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상황으로부터 당장 도망치고 싶다는 본성에 가까운 감정과 가족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그의 모순적인 기질이 양쪽에서 태섭을 꽉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엄마가 구두를 벗었다.
엄마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부엌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들고 있는 줄도 몰랐던 종이봉투를 의자에 내려놓고 식탁 위의 그릇을 치웠다. 싱크대에 그릇을 담가둔 다음에는 냉장고를 열어 찬물을 병째로 들이켜고 도로 문을 닫았다.
방금 일에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엄마는 너무나 침착하고 자연스러웠다. 순간 태섭은 엄마가 사실 두 사람이 다투는 것을 거의 듣지 못하고 송아라가 마지막에 소리를 지르는 대목에서 현관에 들어선 것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너무 시끄럽게 고함을 치며 다퉜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엄마는 혼란에 빠져 있는 태섭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아주 의외의 행동을 취했다. 눈썹을 내리고 미소를 지어보인 것이다. 마치 자신의 둘째 아들에게 어떤 위로를 해줘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티라미주 먹을래?”
엄마가 말했다.
“네?”
“엄마 회사 동료 분이 사주신 건데, 요즘 도쿄에서 유행하는 디저트라나봐.”
엄마는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태섭을 앞에 두고 봉투를 뒤졌다. 얼마 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조각 케이크가 식탁 위로 자태를 드러냈다. 백화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케이크였다. 축축한 빵이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 있고 꼭대기에 초콜릿처럼 보이는 갈색 가루가 눈처럼 소담하게 쌓여 있는 아주 작고 예쁜 디저트였다.
엄마는 조그만 포크를 꺼내서 맞은편에 세팅한 뒤, 태섭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투명한 플라스틱 뚜껑을 벗겨내고는 케이크 끄트머리를 잘라 입에 집어넣었다. 태섭은 너무나 당황해서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엄마는 조용히 케이크를 음미하더니 작게 만족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태섭아, 이거 정말 맛있어. 커피 맛이야. 앉아서 먹어 봐.”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땅한 행동 강령이 없었기 때문에 태섭은 결국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엄마와 마주 보고 앉았다. 엄마는 얼른 케이크를 먹어보라고 부추겼다. 태섭은 마지못해 티라미주를 조금 맛보았다. 하지만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구분되지 않았고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어때, 맛있지?”
태섭이 두렵게 입을 열었다.
“저, 아라는….”
엄마는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아마도 아홉 시 전까지 들어올 거야.”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엄마는 달리 어쩔 수 있겠냐는 것처럼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태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아까 전에 말인데요.”
막상 말하려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송아라가 했던 이야기 말인데요.”
한참 뜸을 들이는 태섭을 엄마는 아무 말 않고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태섭아. 괜찮아.”
마침내 엄마가 말했다.
“괜찮다니….”
“엄마도 알고 있어.”
방금의 말이 주는 충격이 어찌나 컸는지 태섭은 자신이 당장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생각과 감정을 비춰주는 거울이 폭발해 사방으로 산산이 흩날렸다가 시간을 되감듯 역순으로 휘리릭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가 멍청한 표정으로 얼이 빠져 있는 동안 벌써 케이크를 다 먹은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마저 치웠다.
“알고 있다고요?”
태섭이 가까스로 되물었다.
“뭘요?”
“너희들이 하는 이야기.”
엄마는 그릇을 씻으면서 조곤조곤 읊조렸다.
“태섭이 네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우리도 마냥 조용하게 살았던 건 아니거든.”
어안이 벙벙한 아들을 앞에 두고 엄마는 태평하게 손에 있는 물기를 털더니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비밀을 이야기하는 여자의 눈으로 말했다.
“엄마도 아라랑 싸운 적 있어.”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족이란 대체 뭘까. 누구보다 가깝게 붙어살고 있으면서 전혀 모르는 부분을 돌연히 드러낸다. 실은 그런 게 가족인가? 밀착된 만큼 충격을 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가족인 걸까? 아니, 어쩌면 그의 가족들이 모조리 여자이고 송태섭 혼자만 남자라서일까? 지금의 태섭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수험생이 된 아라가 주말 내내 집에서 생활하면서부터 갈등은 조금씩 표면화되었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렇다고 서로 격렬하게 다투거나 오늘과 같은 이야기를 직접 말로써 꺼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변화가 시작된 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태섭의 방을 정돈하거나 비디오 서재를 꼼꼼하게 닦을 때마다 못 견뎌하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아라의 행동을 엄마로서 눈치채지 못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아라가 대학생이 되고부터 두 모녀의 관계는 점점 눈에 띄게 불편해졌다. 어느 순간에는 송아라 자신조차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살갑게 추근거리며 말을 걸다가도 느닷없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부탁받은 일들을 완전히 무시하다가 깜빡 잊었다는 듯 굴기도 했다.
엄마도 순순히 인내하지만은 않았다. 자신의 속을 긁기 위해 일부러 방만한 짓을 반복하는 아라의 태도를 갈수록 두고 보기가 어려웠다. 결국 아라가 새벽 늦게 귀가한 어느 날, 그녀는 잠도 자지 않고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따끔하게 한 소리를 했다.
“엄마한테 불만이 있으면 확실히 해. 그런 식으로 굴지 좀 마!”
아라는 엄마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뒤 반쯤 풀린 눈으로 코웃음을 치더니 대답했다.
“이제 와서 불만은 무슨 불만.”
그녀가 키우는 두 아이들은 고집이 너무나 셌다. 태섭은 엄마를 존중하려고 제 나름 애쓰는 아들이었지만 그 노력이 지나친 탓에 서먹해져 버린 부분이 있었다. 아라는 반대였다. 화가 나면 곧바로 감정을 드러냈고 서슴지 않고 엄마와 대립하려 들었다. 어쩌면 딸의 그런 태도 때문에 그녀도 아들 앞에서보다 비교적 쉽게 화를 내게 되는 것도 같았다.
태섭도 비슷한 사정으로 송아라에게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송아라는 두 사람의 어떤 일면을 못 견뎌하는 것처럼 굴었는데 그것은 두 사람의 내면적인 문제와 연결돼 있었다. 아라는 고의적으로 두 사람을 자극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억지로 폭발시켜서 무언가를 바로잡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오히려 그렇게 해서 모든 게 망가지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태섭은 거기에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송아라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의 딸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 않았고 빌미도 주지 않았다. 비록 송아라가 엄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상태고 엄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엄마가 알고 있다는 것을 송아라 역시 빤히 느끼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두 모녀는 경계 태세를 유지하는 서로 다른 무리의 늑대들처럼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며 한 지붕 생활을 인내했다. 그러다 태섭이 집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조금씩 긴장을 풀고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얼마 가지 않아 아라의 감정이 태섭 쪽으로 옮겨 붙으면서 다시 팽팽하게 조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알고 보니 태섭은 두 사람의 신경망에 걸려든 파리 같은 신세였다. 방금의 싸움은 태섭과 아라의 싸움이면서 동시에 엄마와 아라 간에 벌어진 싸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깜빡 속은 기분이 들었고 중요한 것들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덩그러니 앉아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경쾌한 어투였다.
“자식 키우는 게 너무 힘이 드네.”
하지만 태섭으로서는 엄마의 그 능청스러움마저 갑자기 너무나 낯설게 느껴질 다름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일을 시작했다. 태섭은 택배 박스 안에 들어 있는 비디오를 차례대로 정리했고 엄마는 그릇을 마저 씻고 싱크대를 닦았다. 비디오를 다 정리한 뒤 태섭은 박스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 안 가 엄마는 분리수거를 하려고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각자 시간을 보내며 송아라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홉 시가 거의 다 되어서도 송아라는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하늘은 완전히 어둑어둑해졌다. 그쯤 되자 엄마는 현관문을 열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거나 공동현관이 내려다 보이는 창가 쪽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시금 송아라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태섭은 엄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너무 신경질적으로 튀어나오는 바람에 내뱉자마자 태섭은 깜짝 놀랐다.
“제가 찾아보고 올게요.”
방금의 말투를 수습하기 위해 말했다. 그러나 생각에 잠겨 있던 엄마는 태섭이 짜증스럽게 대꾸한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뭐라고 했니?”
뒤늦게 엄마가 물었다.
“제가 송아라 좀 찾아보고 올게요.”
“걔가 어딜 간 줄 알고.”
“걔도 생각이 있으면 멀리는 안 갔겠죠.”
송태섭은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나와 신발을 신었다. 카디건은 고등학생 때 즐겨 입던 것인데, 미국에서 돌아온 그에게는 조금 작게 느껴졌다. 특히 소매 끝이 모자라고 팔뚝이 살짝 끼었다. 전화가 울린 건 그가 막 현관을 나서려던 때였다. 거실에 있던 엄마가 일어나서 받았다. 짧게 대화를 나누더니 곧바로 태섭을 쳐다보았다. 태섭은 도로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되돌아왔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너야?”
수화기 너머에서 대만이 물었다.
“저예요.”
“금요일 잘 보내고 있냐?”
“어… 뭐. 그렇죠.”
어물어물 대답하자 대만은 잠시 말을 멈추었는데, 그 사이가 꼭 무언가 알아내려는 탐색의 침묵처럼 느껴졌다. 태섭이 다시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야만 전화하는 사이야, 우리가?”
대만은 툴툴대더니 덧붙였다.
“근데 무슨 일이 있기는 해.”
‘참 웃긴 사람이야.’
“뭔데요?”
대만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지금 어디 있을 것 같냐.”
귀를 기울였지만 수화기 너머는 조용하기만 했다. 한편으로 대만이 어디 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설마 싶었다. 진지하게 생각하려 들수록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져서 태섭은 결국 상상을 그만두었다.
대만이 독촉했다.
“어디 있을 것 같냐니까.”
“그냥 말을 해요.”
“재미없는 녀석이네, 이거.”
대만이 말했다.
“나 지금 너희 아파트 앞에 있다.”
“예?”
대만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현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 신경이 투명한 촉수처럼 뻗어 나와 복도를 굽이쳐 현관문에 가닥가닥 달라붙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반응을 기대하고 말을 걸어오는 대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지만 손은 어느새 수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계단을 날듯이 뛰어내려왔다. 공동 현관으로 나오자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매만지며 흘러갔고 사방에서 잔잔하게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대만은 정말로 거기 있었다. 주륜장 옆 전화부스 안에 기대어 서서 전화를 거는 중이었다. 그 등을 마주한 순간, 태섭은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한동안 태섭은 그가 응답 없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 갸웃대며 수화기를 내려놓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그대로 있었다. 현실감을 찾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선배.”
“어? 뭐야.”
깜짝 놀라 뒤돌아 선 대만은 태섭을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었다.
“표정 봐라. 놀랐냐?”
“내일 오는 거 아니었어요?”
“오늘 퇴근하자마자 출발했다.”
“왜요?”
알면서도 믿기지가 않아서 물었다.
“보고 싶어서.”
순간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느끼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나 겁이 날 만큼 폭발적으로 솟구치는 그 감정은 팔을 들어서 대만을 껴안으려는 순간에 황급히 자취를 감추었다. 태섭은 너무나 잘 훈련된 개처럼 자기 안의 충동적인 감정을 억눌렀는데, 거기에 자신을 내맡기는 순간 시작될지 모를 예기치 못한 일들이 두렵기도 하고 낯설기도 해서였다.
곧이어 아까까지 뭘 하려고 했는지도 떠올랐다. 자기 앞에 엉거주춤 멈추어 선 송태섭을 대만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태섭이 뺨을 긁었다.
“와줘서 기쁘기는 한데요. 제가 지금 일이 좀 있거든요.”
대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야?”
태섭은 송아라와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적당히 축약해서 들려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대만과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당장은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여동생이 집을 뛰쳐나간 지 네 시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는 사실과 본인이 막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다는 이야기를 침착하게 설명했다. 엄마가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어서 자기가 반드시 아라를 데리고 돌아오겠다고 약속까지 했다고 했다.
“그럼 찾아야지.”
대만은 별로 서운해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안 괜찮을 건 또 뭐냐. 어디 갔는지는 알아?”
“아뇨.”
뒤늦게 대만의 물음에 전제된 사실을 알아차린 태섭이 확인차 물었다.
“같이 찾아주려고요?”
“당연하지. 아는 동생인데.”
이렇게 해서 태섭과 대만은 츠지도 일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무작정 근방에서 가장 넓은 츠지도 해변 공원으로 갔다가 거하게 허탕을 친 다음에는 해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제방을 따라 500m 정도 쭉 걸으면서 해안가에 누군가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일대의 상점가는 문을 닫은 지 오래였기 때문에 그곳에도 송아라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가보았지만 불 꺼진 가게들 사이에서 자판기 불빛만이 선명하게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
상점가 쪽은 인적마저 드물었다. 이자카야도 문을 닫았고 지나다니는 취객조차 없었다. 유일하게 아직 불을 밝혀둔 우동 집에 들어가 보았지만 가게는 폐점 준비 중이었고 사장님은 오늘 저녁 장사 중에 아라와 비슷한 또래의 여자 손님은 들어온 적도 없다고 했다.
대만은 둘이 나뉘어서 찾아보자고 말했다.
“내가 역 쪽으로 쭉 걸어가면서 찾아볼 테니까, 넌 반대편에 있는 정류장까지 걸으면서 보이는 사람마다 잡고 물어봐.”
슬슬 이 모든 게 무모한 시도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태섭은 대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형, 지금 시계 차고 있어요?”
“응.”
“그럼 이십 분 뒤에 여기 가게 앞에서 봐요. 없으면 일단 포기하고 같이 돌아가요. 가만 생각해 보니 걔 친구 집에 간 것 같기도 해요.”
“그래? 친구 누구?”
태섭은 말문이 막혔다.
“그것까진 잘….”
“일단 알겠다.”
우동 가게 앞에서 찢어진 두 사람은 각자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송태섭이 도보로 십오 분 정도 떨어진 버스 정류장을 향해서 걷고 있을 무렵, 대만은 상점가를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들어섰다. 지나가는 행인이 보일 때마다 붙잡고 송아라에 대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마지막으로 물어본 상대는 아라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정도 나이가 많을 법한 또래의 여학생이었는데, 대만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이렇게 길거리를 무작정 돌아다니기보다는 동생 분이 자주 다니는 장소나 평소에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한테 전화를 걸어 봐요.”
하지만 정대만은 자신의 여동생이 아닌 송아라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심지어는 송아라의 진짜 오빠조차 그녀의 교우 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돌아다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대만은 성의 없이 고맙다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몇 분 뒤 머릿속으로 생각 하나가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대만은 다시 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몇 년 전 태섭의 대학 주소를 알려준 보답으로 아라에게 밥을 사주었던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다. 함바그와 오믈렛을 같이 팔고 늦은 시간까지 영업을 한다고 가게가 출입구 앞에 대문짝만 하게 써붙여 뒀던 것이 기억났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스카이락 간판은 기억 속보다 살짝 낡은 모습이었고 중간 부분의 알파벳을 비추는 전구가 고장이라도 난 건지 탁한 색으로 지직대고 있었다.
매장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근방에 영업 중인 괜찮은 가게가 없어서인지 제법 많은 젊은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대만은 통창이 훤히 보이는 주차장 입구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매장 끄트머리에 앉아있는 송아라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를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앞에 멈추어 서자 워크맨을 만지고 있던 송아라가 고개를 들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으로 신경질적이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고 있었는데, 순간 그 위로 송태섭의 날 선 얼굴이 스쳐갔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똑닮은 남매였다.
아라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헤드셋을 벗었다.
“대만 오빠?”
“어. 아라야. 오랜만이다.”
“오빠가 왜 여기 있어요?”
아라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일이 좀 있어서 들렀다가. 지금은 너 찾으러 왔다.”
대만이 말했다.
“너 집 나왔다며.”
아라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재미있다는 투였다.
“저희 오빠가 그래요? 저 집 나갔다고?”
어깨를 으쓱이자 아라는 코웃음을 치더니 워크맨을 중지시켰다. 대만은 맞은편에 앉았다. 때마침 다가오는 직원에게 밀크셰이크를 주문하고는 아라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내가 쏘는 거야.”
“나 단 거 안 좋아하는데.”
“저번에 여기 데리고 왔을 때 너 이거 두 잔이나 더 시킨 거 나 기억한다.”
“입맛은 변하는 거예요.”
아라는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했지만 동시에 대만이 그 거짓말을 알아차려줄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건지 송아라는 아까보다 너그러워 보였다. 대만은 아라의 경계심이 사라진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누군가 자신을 대하면서 친근하게 마음을 여는 순간이 전보다 확실하게 잘 느껴졌다. 말을 꺼내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난 네 편이다.”
그가 엄숙하게 선언했다.
“참 고맙네요.”
아라는 믿지 않았고 대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음껏 때리라고 만들어낸 뻔뻔스러운 말이었는데 그것은 대만의 특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다치지 않는 선을 능숙하게 지켜가며 일부러 비난을 유도하는 과장된 어조로 농담하는 것을 즐겼다. 한동안 발휘할 일이 없던 그러한 능력이 지금 막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오빠가 뭘 안다고 그래요?”
송아라가 누그러진 투로 말했다.
“나도 알만큼은 알지.”
“뭐래.”
직원이 다가와 두 사람 앞으로 밀크셰이크를 서빙했다.
아라는 롤리팝처럼 생긴 빨대를 쪽 빨면서 대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오빠가 그랬어요? 저 찾아달라고?”
“걱정하길래 내가 같이 찾아주겠다고 한 거야.”
“걱정을 해요?”
잠깐 눈을 굴렸다.
“화 많이 난 것 같았어요?”
“별로….”
대만은 아까의 순간을 되짚어 보았다. 저를 보고 넋이 나갔던 태섭의 얼굴이 떠오르자 절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왜 갑자기 웃어요?”
“아니, 웃긴 게 떠올라서. 말해.”
아라는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지금 몇 시냐.”
대만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래도 들어가야지. 지금이 여자애가 혼자 돌아다닐 시간이냐.”
아라가 다시 헤드셋을 끼는 시늉을 하자 대만이 황급히 만류했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두고 보겠다는 것처럼 저를 흘겨보는 아라의 눈초리에 대만은 졌다는 듯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아라는 다시 헤드셋을 내려놓고 밀크셰이크를 쪽 빨았다. 그러더니 업신여기는 투로 말했다.
“송태섭한테 집이 싫다고 했어요.”
대만이 어리둥절 대답했다.
“그러냐.”
“오빠는 형제 있어요?”
아라는 곧바로 자문자답했다.
“없을 것 같아.”
“오. 티나? 외동이야.”
“부모님하고는 사이좋아요?”
“뭐, 그렇지?”
“저는 엄마가 싫어요.”
들쑥날쑥한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대만은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아라도 딱히 유용한 호응을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만이 톱밥으로 찬 인형 마냥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황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도 같았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도 받을 수 없는 그를 앞에 두고 장작 속에서 마지막으로 타닥대는 불씨처럼 튀어나오는 감정의 찌꺼기를 입으로 내뱉는 것처럼 보였다.
“큰 오빠가 보고 싶어요.”
말을 곱씹던 대만이 물었다.
“너희 위로 형제가 더 있어?”
“저희 오빠가 말 안 해줬어요? 하긴.”
갑자기 냉소적으로 돌변한 아라가 남은 밀크셰이크를 한 번에 쭉 빨아들였다.
“너네 큰 오빠는 그러면 취직한 지 한참 됐겠네?”
“아뇨. 죽었는데요.”
대만이 어안이 벙벙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잠시 후 다시 물었다.
“최근에?”
아라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대답을 다 내놓냐는 표정을 짓더니 예전 일이라고 뭉뚱그려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너무 어릴 때 죽어서 자기는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실토했다. 방금 큰 오빠가 보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도 마음 깊이 그리워서라기보다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떠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에 가까울 뿐이라고 했다.
“큰 오빠가 있었으면 좀 나았을까 싶어서요.”
그러고는 담백하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도 뭐 그렇게까지 좋아질 것도 없긴 하지만.”
“그러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대만은 멀뚱히 앉아있었다. 대학생 시절 학우들이나 여자친구들이 종종 그를 앞에 두고 뜬금없이 자기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때인가 싶었다. 그때도 그는 지금처럼 진부하기 짝이 없는 대답을 던지며 앉아 있었다.
사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들은 대만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간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동정받고 싶어서 털어놓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아라도 전혀 종잡을 수 없는 파편적인 이야기를 던지기에 이르렀다. 얼추 조합해 보자면 송태섭이 제멋대로 굴고 허구한 날 싸움이나 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대만이 물었다.
“밀크셰이크 더 시켜줄까?”
“네.”
“야. 송아라.”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앞에 주먹을 쥔 채 머리끝까지 화가 난 송태섭이 서 있었다.
분노를 눌러 참는 듯한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아라는 공범을 보듯 대만을 곁눈질했다.
“대만 오빠랑 대화하는데.”
그러고 나서 아라는 실실 웃었는데, 이 상황이 정말로 웃겨서라기보다 자기 오빠의 반응에 살짝 겁을 먹어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웃음 같이 보였다. 그런데도 태섭은 순간 그 웃음에 울컥하고 말았다. 아라를 찾으러 다니는 동안 마음속에 꿈틀대던 분노와 걱정, 두려움과 안도의 감정이 마구잡이로 뒤엉키다 못해 폭발했다. 언젠가 자기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을 그대로 계승하는 줄도 모르고 그는 가게가 떠나가라 소리를 쳤다.
“너 지금 웃음이 나와?”
일순 매장 안의 모든 시선이 세 사람의 테이블로 집중되었다. 공교롭게도 매장에 흐르던 음악이 끝나는 바람에 사방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건너편 테이블 사람이 목을 쭉 빼는 것이 보였다. 대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나가서 이야기하자.”
스카이락을 빠져나오는 동안 송아라는 다시 기분이 저조해졌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오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고함을 쳤다. 거기서 그런 식으로 소리를 지르다니 생각이 있기는 한 거냐고 벌컥 화를 냈다. 태섭도 태섭대로 받아치기 시작했고 결국 대만이 계산을 마치고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주차장에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오빠가 돌아오고나서부터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아라는 감정이 복받친 듯했다.
“난 잘 참고 있었는데!”
“누가 들으면 너만 참는 것 같다?”
“뭐? 오빠가 참아?”
“그래!”
“오빠 귀국하고 나서 집에 붙어있던 적이 있기는 해?”
태섭은 대답하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하루종일 돌아다녔잖아. 이제는 농구도 안 하고 있으면서!”
아라는 악에 받친 듯 소리를 지르면서 태섭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그러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나이 먹고서도 변한 게 없어.”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기 시작했다.
태섭은 말문이 막혀 여동생을 쳐다보았다.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내렸다. 뒤편에 서 있던 대만이 그를 향해 눈짓했다. 주차장 맞은편에 세워진 전화 부스를 가리키더니 입모양으로 ‘기다리시는 거 아니야? 너희 어머니한테 전화드릴까?’라고 말했다.
‘그래주면 고마울 것 같아요.’
정대만이 대신 전화를 걸러 간 동안 송태섭은 여동생을 데리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두 남매는 횡단보도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해변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한동안 아라는 자기 분에 못 이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태섭은 말없이 캄캄한 수평선을 막막하게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은 드세게 불다가도 느닷없이 잠잠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순간이 그랬다. 마침내 감정을 추스른 아라가 자세를 바꾸어 웅크리고 앉았다. 침묵이 흘렀고, 태섭은 자기 동생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순간에 그 역시 준비되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지만.
한참 동안 수평선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엄마가 미웠어.”
아라는 느릿느릿 말했다.
“엄마가 최선을 다했다는 건 알아.”
“응.”
“그래도 싫었어.”
태섭은 입술을 달싹이다 대답했다.
“그래.”
“오빠도 싫었어.”
“그건 알아.”
어둠 속에서부터 파도가 끝없이 밀려왔다 사라지고 있었다.
“있잖아, 송아라.”
태섭이 천천히 말했다.
“나도 엄마가 힘들어.”
차갑고 하얀 번개가 번쩍하고 가슴을 파고드는 듯했다. 그는 자신이 뱉은 말에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한순간 세상을 밝게 비추며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던 사물들의 본성을 일깨우는 것이 번개의 역할이라면, 그 같은 고통은 태섭의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비밀스러운 감정의 정체를 일깨우기도 했다. 그는 죄책감 속에서 희미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 감정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줄곧 모른 체 해온 가족에 대한 솔직한 감정이 더는 악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나도 엄마가 힘들어.”
아라가 힘없이 대답했다.
“응.”
“나도 그럴 때가 있어.”
태섭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색해서 괜히 더 애쓰는 거야.”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어색하고 밉지만 좋아하는 마음도 진심이야.”
아라는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멋대로 뛰쳐나간 건 사과드려.”
아라는 한동안 수평선을 쏘아보며 앉아있었다. 머리카락이 나부끼며 뺨을 스치고 흘러갔다.
“말 안 해도 그럴 거였어.”
마침내 아라가 대답했다.
정대만은 전화 부스에 서서 해변을 향해 앉아있는 두 남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송아라가 일어났고 태섭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바람을 등진 채 두 남매는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대만도 부스에서 나왔다.
“얘기는 잘했어?”
“네, 뭐.”
태섭이 대답했다.
“아뇨.”
아라가 대답했다.
“뭐야?”
태섭이 살짝 열받은 목소리로 대꾸하자 아라는 만족스러워 보였다.
“엄마한테 뭐라고 했어요?”
태섭이 물었다.
“괜찮다고 했지. 둘이서 또 치고받고 싸울 정도로 팔팔하니까 걱정 말라고 전해드렸다.”
“진짜로 그렇게 말했다고요?”
“엄마가 뭐래요?”
아라가 궁금해했다.
“웃으시던데?”
대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게 못내 신경 쓰이는 듯 태섭이 대만의 눈치를 보았다. 조심스럽고 은근한 투로 물었다.
“내일 시간 괜찮아요?”
“괜찮지. 하루종일 놀 수 있어.”
대만은 별 걱정을 다한다는 투로 말했다.
“둘이 조심해서 들어가라.”
“네, 형도요.”
“오빠, 밀크셰이크 또 사주세요!”
“오냐.”
막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하는 정대만을 짧게 배웅한 다음 두 남매는 아파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라는 대만이 왜 자길 찾으러 나온 건지 뒤늦게 궁금해했다. 태섭은 어정쩡한 말로 둘러대고는 그 이상 대답해주지 않았는데, 제 오빠가 그런 식으로 군 게 하루이틀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라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들은 살짝 거리를 두고 걸었다.
“그런데 용돈은 안 주는 거야?”
“용돈? 무슨 용돈.”
“아까 준다고 했잖아.”
태섭은 기가 막혀서 말했다.
“받고 싶냐?”
“응.”
구시렁거리더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
그런 다음 아파트 앞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라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는데, 아까 대만에 대해 대충 둘러댄 게 마음이 쓰였던 태섭은 내심 긴장해 있었다. 마침내 주륜장 근처까지 왔을 때 아라가 말했다.
“말 안 한 게 있어.”
“뭔데?”
긴장해서 물었다.
“엄마한테 남자 생겼어.”
얼빠진 태섭을 두고 아라는 공동현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25
엄마의 남자친구는 새 직장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했다. 사귄 지는 세 달이 조금 안 됐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엄마 쪽에서 직접 꺼낸 적은 없지만 최근에는 향수를 뿌리거나 화장을 하기도 하고 주말에 혼자 외출을 하더니 못 보던 구두를 신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 뒤로는 종종 그 구두를 신고 출근한다고 아라는 말했다.
“엄마가 퇴근하고 자주 뭐 받아오잖아.”
충격에 빠진 태섭을 앞에 두고 아라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거 그 남자가 사주는 걸 거야.”
“좋은 건가?”
태섭은 어떤 판단을 내려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엄마 요즘 살만해 보이잖아. 그럼 된 거지.”
코웃음을 치며 아라가 대답했다.
한동안 태섭은 시시때때로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엄마가 출근을 할 때 슬쩍 문을 열고 배웅을 한 적도 있었는데, 아라의 말처럼 엄마는 옅은 립글로스를 바르고 치마 차림으로 그 구두를 꺼내 신고 있었다. 태섭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럴 때면 아라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오빠, 제발 엄마 좀 내버려 둬.”
“내버려두라니?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잖아. 나쁜 사람이면 어떡해?”
“엄마가 애야? 알아서 하겠지.”
며칠이 지나자 모든 일이 보다 명확해졌다. 그날 태섭은 저녁을 먹고 해변을 따라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못 보던 하얀 자동차 한 대가 집 앞에 멈추어 서더니 회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내렸다. 그는 막 문이 열리는 조수석 쪽으로 허겁지겁 다가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차에서 엄마가 내리는 것이 아닌가.
태섭은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두 남녀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특별히 들떠있거나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니었는데도 엄마는 행복해 보였다. 활력이 온몸을 타고 흐르고 있었고 그녀를 전과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사람처럼 엄마는 너무나 편안해 보였다.
송태섭은 갈팡질팡했다. 지난번에 본 그 회색 정장의 남자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엄마가 직접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동안 그는 엄마가 새롭게 맞이한 인생의 전환점을 두고 무언가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끙끙댔다. 하지만 결국은 송아라처럼 그 상황에 익숙해졌다. 얼마 안 가 그의 인생에 새로운 사건이 들이닥치면서 가족에 대한 고민은 저편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JBL 1999 시즌이 개막하고 이 주쯤 지났을 때였다. 송태섭은 자신의 유학 생활을 지원해 주었던 장학 재단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들은 에이전시에서 태섭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름이 귀에 익다 싶었는데 불과 일 년 전 태섭이 하부 리그를 뛰면서 반년 간 소속돼 있던 에이전시였다.
“무슨 일인데요?”
“이전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대요. 자세한 건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송태섭 씨는 아예 귀국하신 건가요?”
“아무래도…. 전화상으로는 어려운 이야기인가요?”
“아마 그런 것 같아요. 그러면 연락처를 전달드릴 테니까 직접 이야기 나눠보시겠어요?”
태섭은 재단 직원이 불러주는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 적었다. 이메일을 발송한 지 이틀 만에 답장이 도착했다. 며칠 뒤 태섭은 치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만 선배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가타부타 설명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되었다.”
치수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좀 만날 수 있어요?”
채치수는 일정을 확인하려고 잠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음 주쯤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디서 만나는 게 편하냐.”
“제가 그쪽으로 찾아갈게요.”
다음주 목요일이 되자 태섭은 백화점 지하에서 티라미주 케이크 한 판을 샀다. 그 사이 이사를 한 치수는 전철을 타고 삼십 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살고 있었다. 날씨가 맑고 청명해서 한산한 전철 안으로 민들레빛 햇볕이 들고 베이지색 좌석이 온통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태섭은 오후 네 시쯤 치수의 집에 도착했다. 채치수는 격자무늬 반팔 셔츠를 입고 안경을 낀 채 그를 맞아주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사무원처럼 보였다. 거실로 들어서자 유리 테이블 위에 엎어놓은 스포츠 잡지가 보였다.
“저, 이거.”
“오, 송태섭. 센스가 있는데.”
치수가 종이봉투를 슬쩍 열어보자 태섭이 말했다.
“티라미주에요.”
“채소연이 좋아하겠군.”
그는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차를 내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이런저런 근황을 떠들었다. 전해 들은 대로 채치수는 이번 리그를 마지막으로 은퇴가 결정돼 있었다. 이미 회사에서도 한 차례 부서를 옮기고 자격증을 따고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 직장에 큰 불만이 없었다. 부서를 옮긴 뒤 다른 분야에 대한 흥미를 순조롭게 키워나가는 중이었고 그런 와중에도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해서 농구를 좋아해 나가려고 했다.
태섭도 자기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복귀를 종용하며 찾아오는 스카우터들을 모조리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치수는 안 들어도 알겠다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하긴 채치수도 아직 리그에 몸담고 있는 신세니 들려오는 이야기를 아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태섭에게 농구를 정말로 그만둘 거냐는 질문 같은 건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프로 리그 출범을 앞두고 어수선한 긴장 상태에 놓인 국내 상황, 선수와 감독들 간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 올해 JBL 시즌에서 특별히 두드러지는 신인 선수들 이야기를 드문드문 주고받다가 북산고교 농구부 얘기까지 흘러갔다. 태섭은 느닷없이 미국에서 정우성을 만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닌데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선배는 농구 말고 다른 거 생각한 적 있어요?”
태섭이 물었다.
“없었지.”
“엥? 진짜요?”
채치수가 발끈했다.
“무슨 뜻이냐, 방금 그 대답은?”
잠시 후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난 농구가 좋았다. 생각하면 심장이 뛰었어. 다른 건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러고는 태섭을 쳐다보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냐.”
송태섭은 입술을 삐죽였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뒤진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죠.”
“그래.”
채치수는 담담히 말했다.
“모두 그런 거야.”
그렇지만 채치수는 올해로 은퇴한다. 정대만은 어울리지도 않게 슬럼프에 빠졌고, 송태섭은 귀국했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영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것을 송태섭은 너무 일찍 깨달아버렸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군. 배 안 고프냐?”
시계를 보니 벌써 여섯 시였다.
“먹고 가도 돼요?”
“날 뭘로 보는 거냐, 송태섭.”
채치수는 코웃음을 쳤다.
“손님 대접도 안 하고 돌려보낼 생각은 없어.”
치수는 집에 있는 오뎅으로 전골을 끓이기 시작했다. 중간에 손님이 왔다. 부엌에서 무를 썰고 있는 치수를 대신해 나가 보니 채소연이 하얀 봉투를 달랑대며 서 있었다. 소연은 문밖으로 나온 태섭을 보고 반색했다.
“어, 선배! 어쩐 일이에요?”
“잠깐 들렀다가…. 들어와.”
태섭은 어정쩡하게 몸을 비켜섰다.
“귀국한 건 들었는데! 들어온 지 이제 몇 개월 됐죠?”
“반년 좀 넘었어.”
채치수는 연락도 없이 들이닥친 손님의 방문에 툴툴거렸다. 하지만 두 남매는 이런 일이 익숙해 보였다. 채소연이 요 앞 마트에 들렀다 왔다면서 찬거리를 꺼냈고 채치수는 끓이던 전골에 물을 붓더니 소연이 봐온 장을 살피고 즉석으로 재료를 추가해 넣었다. 순식간에 삼인분이 뚝딱 만들어졌다.
세 사람은 둘러앉아 전골을 나누어 먹었다. 소연은 최근 보고 다니는 대학 리그 이야기를 정다운 말투로 늘어놓았다. 그녀가 다니는 대학교는 강호라고 부르기는 조금 애매했지만 스포츠 장학생 제도가 잘 마련돼 있는 덕분에 매 해 괜찮은 실력의 농구 선수가 반드시 두어 명 정도 입학하는 곳이었다.
사범대를 다니며 틈틈이 농구경기를 보러 다니는 소연은 친구들 사이에서 괴짜라고 불렸다. 하지만 선수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관객이었다. 오늘은 말을 붙이면서 음료수를 건네온 선수 하나와 대화를 텄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인기 많구만.’
어묵을 먹으며 태섭은 생각했다.
소연은 최근 시작된 JBL 이야기도 꺼냈다. 올해는 특히 대진표가 살인적이었다. 초장부터 강팀끼리 붙게 되는 바람에 피 말리는 싸움이 될 거라고 했다. 비장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즐겁게 들렸다.
“긴장해야겠다. 그렇지, 오빠?”
채치수는 코웃음을 쳤다.
“붙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야.”
“다음 주에 대만 선배 팀이 미쓰비시를 이기면, 곧바로 오빠 팀이랑 붙어요.”
소연이 들떠서 말했다.
“그러면 꼭 보러 가려고요.”
“강백호는 뭐 하고 있지?”
치수가 물었다.
“응. 요즘 아주 정신없대.”
소연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전골을 싹싹 비운 다음에는 가지고 온 티라미주 케이크를 다 같이 잘라먹었다. 소연은 치수가 예상했던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기대하는 표정으로 한 조각 더 먹어도 되냐고 묻기까지 했는데, 치수는 못마땅한 표정을 해놓고선 막상 자를 땐 큼지막하게 잘라주었다.
소연이 잠깐 편의점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태섭도 슬슬 일어나겠다는 눈치를 주었다. 채치수는 마지막 차를 내왔다. 소연이 나간 다음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 없이 적당한 침묵 속에서 차를 마셨다.
“서태웅이 다시 미국에 나간다는데, 들었나?”
치수가 말했다.
“아뇨. 다시 나간대요?”
“그렇다더군.”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강백호도 내년엔 다시 나갈 모양이야.”
“그 녀석 뛸 데는 정하고 나가는 거래요?”
그러자 치수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어디 제안이라도 들어온 것 같던데. 알아서 할 모양이다.”
태섭은 찻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렇군요.”
그로부터 한참을 침묵했다.
“주장.”
그가 말했다.
“저 어쩌면 될까요.”
“어쩌긴. 네 마음가짐에 달린 일이지.”
그렇게 대답한 다음,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나이가 몇이냐, 네가!”
태섭은 얼이 빠졌다.
“그런가요.”
“정 헷갈리면,”
치수가 덧붙였다.
“경기를 한 번쯤 보는 것도 좋겠지.”
“경기요?”
“시즌도 막 시작했으니까. 보고 나면 확실히 정할 수 있을 거다.”
“선배는 보고 정한 거예요?”
치수는 대답 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잔을 다 비운 다음 말했다.
“아니. 나는 농구에 있어서는 단 한 번도 헷갈린 적 없어.”
현관을 나서려는데 외출했던 채소연이 딱 맞추어 돌아왔다. 벌써 가는 거냐고 아쉬워하던 소연은 배웅을 하겠다고 치수와 함께 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채치수는 태섭에게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흔한 위로나 격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잘 들어가라고만 했는데, 지나치게 무뚝뚝한 나머지 꼭 쫓아내려는 사람처럼 들렸다. 태섭도 고개를 까딱여 그 인사를 대강 받았을 뿐이었다.
설렁설렁 뒤돌았다. 몇 발자국 걸었을 때였다. 송태섭이 뒤돌아 섰다. 허리를 반으로 반듯하게 접으며 몸을 숙였다.
고개를 들었을 때 채치수는 문패 앞에 서 있었다. 농구를 그만둘 운명이라고 해도 격자무늬 셔츠로는 가려지지 않는 왕성한 체격과 농구를 향한 확신이 고목처럼 선 그의 존재감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 순간 태섭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눈앞의 남자를 믿어 온 시절이 있었음을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래왔다는 것도, 그래서 자신이 오늘 이곳에 찾아온 거란 사실도 깨달았다. 이 남자의 일부분은 여전히 팀의 주장이었다.
“감사했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떠난 태섭은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현관에 서 있던 치수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소연이 물었다.
“오빠. 많이 신경 쓰여?”
“그래.”
문을 열면서 채치수가 말했다.
“그렇지만 알아서 잘할 거다. 그런 녀석이니까.”
JR 동일본 센다이 대 미쓰비시 전기 오사카전은 1999년 10월 19일 화요일에 치러졌다. 집에서 요코하마 아레나까지 전철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는데도 태섭은 앞선 업무를 처리하다가 그만 지각을 하고 말았다. 결국 중간에 전철에서 내린 그는 택시를 잡았다. 인생에서 세 번째로 잡아보는 일본 택시였다.
아레나에 도착했을 때 경기는 이미 전반전을 마무리하고 휴식 시간을 갖고 있었다. 태섭은 전광판을 확인했는데, 센다이가 12점 뒤지고 있었다. 고된 경기였는지 벤치에 앉아있는 센다이 팀 선수들은 녹초가 되어있었다. 송태섭은 팀원들 틈에서 수건을 덮은 채 고개를 숙인 대만을 발견했다. 자세 때문인지 그는 기가 죽어 보였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태섭은 객석을 빠져나와 경기장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발코니 쪽으로 올라갔다. 휘슬이 불리고 농구공이 바닥에서부터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난간 앞으로 다가가자 고전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두 팀의 싸움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캄캄한 객석과 대비되게 경기장 전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태섭은 그곳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센다이 팀은 반격을 도모하고 있었지만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미쓰비시 팀은 기세를 탄다고 강하게 치고 나가는 팀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수들 체격이 무척이나 컸고 전반적으로 볼핸들링이 뛰어나 턴 오버가 적었다. 촘촘하게 짜인 직물 같은 운영 방식을 가진 팀이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후리후리한 외국인 선수도 하나 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센터가 아니라 포인트 가드였다.
꽉 막힌 흐름을 바꿔보려는 듯 정대만이 조금 무리한 장거리슛을 시도했다.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공이 시원찮게 회전하며 짧은 포물선을 그렸다. 들어가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데, 대만도 그랬는지 던진 자세 그대로 한 팔을 들고 있는 버릇을 까맣게 잊고 멀거니 공을 지켜보고 있었다. 골대에 맞고 거칠게 튀어 오른 공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한 점 한 점이 절실한 때여서 그런지 센다이 팀원들이 일제히 “아자!”하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대만이 손뼉을 부딪치며 무어라 소리쳤다. 팀원들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송태섭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특히나 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슈터들은 경기 당일의 날씨, 공에 달라붙는 손가락 끝의 점성, 운동화 끈이 발등을 조이는 압박의 정도에서 자신만의 루틴을 찾아내곤 한다. 방금의 골이 무엇을 가져다주었는지는 몰라도 정대만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음은 확실해 보였다. 다음부터 넣는 족족 골이 들어갔다.
불현듯 고개를 번쩍 든 대만이 가늘게 뜬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순간 태섭은 그가 자신을 찾고 있나 싶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을 거였다. 정대만은 무언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부유하는 공기 속에서, 조명을 내리쬐는 천장에서, 경기장 꼭대기에서 자신을 이끌어줄 무언가를 잡아끌듯 얼굴을 찌푸리며 한 곳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러고는 무척이나 침착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부터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야투율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공은 여전히 들어가다가도 퉁겨져 나왔고 리바운드를 실패하면 순식간에 공격권을 빼앗겨 실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코트 위에서 뛰고 있던 팀원들이 어느 순간 정대만을 알아차렸다. 바로 그때 태섭이 돌려보았던 수많은 비디오의 한 장면이 눈앞에 뚜렷하게 펼쳐졌다. 전성기라 불리기 손색없던 대학생 시절의 정대만이었다.
중학교 MVP였던 열다섯 살의 얼굴이었고 산왕전에서 기적 같은 슛을 만들어낸 열여덟 살의 얼굴이기도 했다. 행복으로 충만한 자의 얼굴이었다. 영원히 철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찌푸리고 있었다. 그는 달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봐! 나는 이게 정말로 좋아. 나는 계속할 거야. 멈추지 않을 거야.
나는 이걸 하다 죽을 거야.
불꽃처럼….
“정대만!”
센다이 팀의 포인트 가드가 소리쳤을 때 정대만은 이미 골라인 좌측에 바짝 다가서 있었다. 반대편에서 쏜살같이 공이 날아왔다. 그는 곧바로 뛰어올랐다. 공은 영원할 것처럼 높게 솟구쳤다.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기척을 죽이고 모든 이들이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송태섭은 골대를 향해 갈망하듯 손을 높게 뻗은 정대만의 변화를 목격했다. 어느새 대만의 키는 줄어들어 있었고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가 난간을 붙잡은 송태섭을 돌아보았다. 아주 어린 소년이었다. 가부키 가면을 쓰고 있었고 곱슬머리였다. 이 세상 모든 폼나고 멋진 농구선수의 자리마다 자신을 데려다 놓는 야심만만한 열두 살의 송태섭이었다. 가면이 떨어지고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걸 하다 죽을 거야.’
공이 골대를 통과하면서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었다. 코트 위의 사람들이 일사불란 움직이며 고함을 내질렀다. 태섭은 숨을 내쉬었다.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가슴께를 더듬거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것처럼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좋은 시절은 지나가고, 영광은 한철이며, 온 마음을 다 내어주었던 열정은 맥없이 시간의 뒤편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반대로 그 사실은 좋은 것도 함께 가지고 왔다. 이를테면, 송준섭을 떠올릴 때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고통을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사람과 몇 번이고 다시 만난다. 어느 날은 최악의 관계가 된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사귀어 보자고 결심한다. 상상도 못 한 일을 계획하면서 입을 맞춘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택배 상자를 발견하고 어머니는 다시 누군가를 만난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고통의 시간도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볼 수 있는 시절로 남았다. 세상만사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살아갔다.
흐르는 바람의 결처럼 삶을 그려왔다. 그런 농구를 해왔다. 앞으로도 계속해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지막이 중얼거려 보았다.
“이걸 하다 죽을 거야….”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다. 황홀하게 가슴을 찌르는 듯한 깊은 안도의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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