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11)»
20
편지는 아마도 박스를 봉할 때 같이 넣는다는 걸 깜빡하고 책상 위에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다 엄마가 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서랍 같은 곳으로 들어가 그곳에 그대로 방치되었을 것이다. 정대만은 평소에 방을 잘 사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학교에 있을 적에도 그랬지만 특히 집에서는 책상에 앉아본 적이 드물었다.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허구한 날 농구를 하러 가거나 놀러 다니기 바빠서 서랍을 열어볼 생각조차 못했다. 편지는 오랜 세월 동안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그곳에 처박혀 있다가 느닷없이 발견되었다.
정대만은 주차장 난간에 기대어 밀봉된 편지를 뜯었다.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모서리만 조금 누렇게 뜬 봉투를 열자 언젠가 그가 썼던 편지 두어 장이 나왔다. 어느새 자동차 라디오에서 쿠보타 토시노부의 히트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학을 다닐 시절 여자친구였던 누군가가 들려주곤 했던 노래였다. 난간에서 희미하게 철 냄새가 올라왔고 나방 한 마리가 가로등 불빛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뭐냐, 이게….’
송태섭을 응원하기 위해 썼다고 생각한 편지에는 순 정대만 본인 이야기밖에 없었다. 내용이 정말 가관이었다. 처음에는 후배를 북돋는 말로 그럴싸하게 시작했지만 중간부터 복사한 비디오에 대해 하나씩 사족을 붙이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결국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이 요즘 얼마나 잘 나가고 있으며 얼마나 농구에 열정적으로 몰입해 있는지를 구구절절 늘어놓다가, 편지 말미에 이르러서야 태섭의 비디오를 좀 보내달라는 식으로 겨우 송태섭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끝을 맺었다.
‘그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슬슬 주변에 관심을 좀 가져봐라.’
뒤늦게 채치수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이제와 보니 뼈가 있는 말이었다. 먼지를 털고 보니 애물단지에 불과한 골동품을 마주했을 때처럼 눈앞의 편지가 지나치게 볼품없이 느껴졌다. 송태섭에게 이런 걸 돌려줘봤자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이런 편지를 주려고 했었다니. 과거의 자신은 정신이 나갔던 게 분명했다.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쏟아진 잡동사니 속에서 편지를 발견한 순간 정대만은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확신을 느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인 예감에 사로잡혀 도쿄역을 뛰쳐나와 가나가와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편지는 기억과 지나치게 다를뿐더러 내용마저 별 볼 일 없었다. 그를 사로잡은 확신이 전부 착각에 불과했다는 잔인한 사실이 증명되자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그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실토할 수는 없었다. 농구를 때려치우려고 일본으로 돌아왔다는 전화 한 통에 마음이 흔들린 거라고 태섭에게 고할 수는 없었다. 출발까지 몇 분 남지 않은 야간열차를 뒤로 한 채 기묘한 교통체증을 뚫고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사십 분만에 주파해 이곳에 당도한 이유가 고작 그 전화 한 통이라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때를 보여주리라고 망설임 없이 뛰쳐나왔던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체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송태섭이 농구를 관둔다 해서 정대만의 인생에 무언가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이제 와서 송태섭이 농구를 그만두든 말든 그것은 정대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아파트 공동현관이 훤히 보이는 장소에 차를 대고 서서 송태섭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은땀이 날 때처럼 손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공동현관 쪽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등 뒤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예요?”
정대만은 편지를 움켜쥔 채 뻣뻣한 자세로 몸을 돌렸다.
태섭은 큼지막한 까만 티셔츠에 낡은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었다. 여태껏 봐왔던 모습 중에서도 가장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평소 정성껏 만지던 머리도 물을 먹은 것처럼 축 쳐져 있었다. 머리를 내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대만의 눈에 태섭이 지나치게 어려 보였다.
송태섭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기차 탄 거 아니었어요?”
“누구 덕분에 못 탔다.”
잠시 후 대만이 물었다.
“진심이야?”
“뭘요.”
“농구 관두겠다는 거 진심이냐고.”
태섭은 침묵했다.
“고작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요?”
대만은 바닥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태섭을 쳐다봤다.
“그래.”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취소해.”
그제야 태섭은 대만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인지 알아차렸다. 기가 막히단 듯 얼굴을 찌푸렸다.
“싫은데요.”
“너 안 관두고 싶은 거 알아.”
“그런지 아닌지 그걸 댁이 어떻게 알아요?”
“하고 싶은 거 계속하면 안 되는 거야?”
“아니, 선배가 뭔데요?”
“그야….”
말문이 막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태섭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는 아파트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는 황급히 태섭의 진로를 막아섰다. 잠깐의 대치가 있은 후 대만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멀리서 볼 때 그는 송태섭만큼이나 굉장히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한 발 한 발을 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무게중심이 통째로 휘청대는 듯했다.
정대만은 다급함을 숨기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무뚝뚝한 몸짓으로 편지를 내밀었다.
“본가에 있는 짐 챙기다 보니 나왔다.”
태섭은 성의 없는 눈빛으로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대만을 쳐다봤다.
“뭔데요, 이게?”
“보면 모르냐? 네가 찾던 편지잖아.”
“이걸 왜 선배가 갖고 있는데요?”
“넣는다는 거 깜빡했다.”
한 마디씩 뱉을 때마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돌려준다. 가져가.”
송태섭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대만이 그의 가슴팍으로 편지를 바짝 들이밀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지금?”
“가져가라고.”
태섭이 그대로 굳어 있자 대만이 거칠게 그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었다.
“아, 무슨…. 뭐 하냐고!”
대만은 태섭이 손을 쑥 빼려는 걸 강하게 붙잡았다. 손목을 꽉 쥔 그의 손이 긴장으로 하얗게 굳어 있었다. 편지를 받지 않으려는 태섭과 어떻게든 손에 쥐어주려는 대만 사이에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이 벌어졌다. 악에 받친 듯한 몸짓이 점점 커지고 결국에는 처음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졌다. 어느새 편지는 어디로 간 건지 둘 다 서로의 멱살을 쥔 채였다.
키 차이 때문에 태섭은 뒤로 젖혀지다시피 한 자세로 공중에 반쯤 들려 있었다.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둥그런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말없이 대만을 쏘아보는 송태섭의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싸가지 없는 자식. 하여간 싸가지 없는 자식이었다. 송태섭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심사가 뒤틀렸다. 이제는 까마득하기만 한 고교 시절에도 대만은 이 표정에 못 이겨 덤벼들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이 불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라고요. 이제 와서.”
태섭이 씹어 뱉었다.
“뭐 어쩌라고요, 나한테.”
“…….”
“씨발, 나보고 어쩌라고요!”
“농구 그만두지 말라고!”
거의 동시에 대만이 고함을 쳤다.
“농구 그만두지 말라고.”
어느새 둘 다 씨큰거리고 있었다.
“왜요? 제 맘이지.”
태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 바 아니야.”
“선배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요?”
“농구 관둘 거야, 말 거야. 확실히 말해!”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태섭이 발버둥치자 대만이 멱살을 쥔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아쉽잖아!”
우악스럽게 끌어당기고 고함을 쳤다.
“아쉽잖아, 너도!”
“안 아쉬워요.”
“농구 관두는 게 안 아쉬워? 그런 놈이 미국까지 갔냐?”
“보내주니까 갔어요. 됐어요?”
“그딴 소리 들으려고 온 거 아니야.”
“그럼 뭐라고 말해야 되는데.”
태섭이 차갑게 말했다.
“댁이 그만두지 말라고 하면 아, 네. 뭐 이렇게 대답해야 되나? 그럼 여기서 꺼져줄래요?”
“넌 대체 뭐가 문제냐?”
대만이 경악스럽게 말했다.
“허. 누가 할 말을 해.”
태섭이 차갑게 조소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분에 못 이긴 대만이 거칠게 태섭을 놓아주었다. 힘이 어찌나 셌는지 태섭이 바닥에 거의 내팽겨지다시피 할 정도였다. 다음 순간 눈이 뒤집힌 송태섭이 용수철처럼 솟아올라 눈앞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대만의 몸이 통째로 휘청였다. 방금 벌어진 일을 파악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만은 맞은 부위를 손등으로 훔치다 말고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에는 주먹으로 갚는 게 도리였다. 싸움은 마른 지푸라기에 붙인 불씨처럼 순식간에 커졌다. 태섭의 주먹이 대만의 옆구리를 강타했고 대만이 태섭의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눈앞의 상대를 빌미로 몰입하기 시작한 자신만의 혼란스러운 분노였다. 두 사람은 오래전 반드시 한 번은 주고받았던 그 감정을 그대로 부딪치며 서로에게 맞섰다.
정대만은 정말이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한편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의 이유로 억울하고 두렵기도 했다. 대만은 그 어느 때보다 송태섭이 농구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송태섭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필두로 양아치들에게 둘러싸여 두들겨 맞을 때도, 키가 작다고 코트 위에서 빈번히 무시를 당할 때도 단 한 번도 농구를 그만 둘 기색을 비치지 않던 녀석이 왜 이제 와서 약한 소리를 하는 건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송태섭에게 닿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이토록 뚜렷하게 든 적은 없었다. 정대만은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내 말에는 힘이 없나?
내가 지금 당장은 농구를 못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농구를 잘했더라면, 대학생 때처럼 승승장구하며 잘 나갔더라면, 그에게 조금 더 권위가 있고 그 이유로 그의 판단과 행동이 조금 더 가치 있어 보였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 다 농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벌어진 일 같기도 했다. 동떨어진 두 종이컵을 연결하는 털실을 자른 것처럼 두 사람을 연결하는 무언가가 뚝 끊어져 버렸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눈앞의 송태섭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멀게 보였다. 그 순간 농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송태섭을, 농구를 뺀 송태섭의 나머지 부분을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그랬다. 정대만은 송태섭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언제부터 농구를 했는지, 왜 농구를 좋아하는지, 미국에 가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쩌다 농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친하게 지낼 때조차 태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짐작도 못하지 않았는가. 깊게 알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토록 가까운 마음으로 쓴 편지에서조차 순 자기 이야기뿐이다. 농구를 하는 내가 누구보다 멋있는 놈이라는 걸 알아달라는 듯 그는 편지 한 통에 전부 농구 이야기만 썼다.
다음 순간 부끄러운 깨달음이 대만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잘 보이고 싶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거다. 내심 송태섭이 자기 농구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해줬으면 해서 그 비디오들을 녹화해 보낸 거였다.
물론 송태섭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새벽에 전화를 걸어와 약한 소리를 늘어놓는 그에게 보란 듯이 의지가 되어주고 싶던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한 번도 농구에 진심이 아닌 적 없는 자신이 마찬가지로 농구에 진심이 아닌 적 없는 송태섭의 열정을 알아본 것처럼, 송태섭도 반대로 그렇게 해주리라 철썩 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때 정대만은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으로 송태섭을 고른 거나 다름없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송태섭이 그의 멱살을 붙잡아 벽으로 거칠게 밀쳤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얼마 안 가 송태섭도 대만이 싸움을 포기했다는 걸 눈치챘다. 잠시 후 멱살을 틀어쥔 태섭의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면서 진공 상태에 가까웠던 풍경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담장, 가로등, 가로수와 주륜장, 전화부스가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송태섭의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파트에서 누군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시끄러운 것을 조금도 참지 못하는 송태섭의 동네답게 두 사람이 벌이는 난리법석을 견디지 못한 주민 하나가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아냐, 이 썩을 놈들아!”
잠시 후 대만이 거칠게 송태섭을 밀치고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얼굴에 뭐가 흐르는 것 같아 손등으로 인중을 훔쳤지만 아무것도 닦이지 않았다. 대만은 바닥에 나뒹구는 편지를 주워 들었다.
“그렇게 전화 끊으면 좋냐?”
눈물을 흘리면서 그가 말했다.
21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딱히 그러자고 합의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은 단지에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뒤늦게 자신들이 벌인 소란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태섭과 대만은 아파트 단지 뒤편으로 통해 츠지도 해변 공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원이라기보다 정원에 가까울 정도로 조그마한 부지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고요한 해안가 산책로가 끝나자 불 꺼진 상점가와 좁고 어두컴컴한 골목들이 나타났다. 형광색으로 칠해진 펜스 너머로 항상 문에 굳게 닫혀 있는 츠지도 단지 관리 조합 건물 앞까지 걸어왔을 때 태섭이 물었다.
“좀 진정이 됐어요?”
대만은 벌써 눈물을 그친 지 오래였다.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뿐이지 작정하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만은 자신이 엉엉 운 것처럼 취급되는 게 좀 민망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목소리는 굉장히 못마땅한 사람처럼 흘러나왔다.
“어.”
“열차 놓쳐서 어떡해요?”
“새로 끊으면 돼.”
“돈 많네.”
대만은 또다시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하지만 태섭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대만은 기세가 꺾여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사실 태섭은 조금 전 일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자 대만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쿄역에 있어야 할 그가 자신의 전화를 받자마자 가나가와까지 차를 몰고 되돌아온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그것은 명백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송태섭은 이 상황이 잘 믿기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 그토록 영향을 받고 흔들릴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일들을 바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당장 고등학생 때만 해도 송태섭은 이한나를 통해 그런 일들을 꿈꾸지 않았는가. 누군가 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두는 일을 꿈꿔본 적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대만이 자신을 그렇게 대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지난 세월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송태섭은 이 관계가 여기서 크게 달라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정대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대만은 정말이지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사람 좋고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따금 골 때리게 웃기는 부분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생기면 무섭게 돌변하는 성질머리를 갖고 있었다. 열정적이고 활기찬 한편으로 골몰하는 문제가 생기면 놀랄 만큼 침착하고 냉정해졌다. 융통성을 발휘하며 너그럽게 굴다가도 자신이 원하는 건 어떻게든 해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사실 정대만은 태섭이 만나온 사람 중에서도 가장 평균값에 가까운 인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쉽게 열정에 취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 앞에서 열광하고 아닌 척 남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길 원하면서 동시에 남들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런 정대만이 자기 때문에 가나가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태섭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그가 그렇게 해주기를 원해서 전화를 건 것도 아니었다. 이제 어떡해야 할까?
갑자기 속이 울렁대는 것 같았다. 태섭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새 대만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여기 많이 변했네.”
대만은 체인점을 낸 점포를 알아보고 해수욕장에 있던 가게가 왜 이쪽으로 이동한 거냐고 물었다. 질문하는 말투이긴 했지만 정말로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돌아오는 대꾸가 없어도 아랑곳 않고 이번엔 자전거 수리점이 없어졌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형.”
“어.”
대만은 태섭을 돌아보는 대신 앞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라.”
“집에 무슨 일 있어요?”
“뭐?”
대만이 인상을 찌푸리며 태섭을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안 그럼 여기까지 돌아올 이유가 없잖아요.”
“너 내가 아까 말한 건 코로 들었냐?”
태섭이 아무 말 않자 대만이 말했다.
“말했잖아. 너 농구 때려치우는 거 관두게 하려고 왔다고.”
잠시 후 덧붙였다.
“그리고 아직 대답 못 들었다.”
태섭은 주머니 속에 쑤셔 박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래.”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렇지.”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럼 왜 왔어요?”
대만은 잠시 침묵했다.
“네가 신경 쓰였으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태섭이 되물었다.
“저 때문에 왔다고요, 정말로?”
“그렇다고 했잖아.”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중요해요? 형한테?”
대만은 바닥을 노려보았다.
곧이어 결심한 듯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 난 네가 친한 후배 이상으로 신경 쓰인다.”
갑자기 화면이 앞으로 쭉 당겨진 것처럼 대만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비장한 표정을 만들며 휘어지는 짙은 눈썹과 콧등, 갈라진 인중 아래로 벌어지는 입술이 카메라를 줌인한 것처럼 하나하나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갈색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송태섭을 꿰뚫는 눈이었다. 그를 환희에 차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들 운명을 품은 눈이었다.
“난 너 좋아한다. 싫으냐?”
걸음을 멈추었다.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있은 후, 마침내 태섭이 입을 열었다.
“싫은데요.”
“뭐 인마?”
대만은 곧바로 발끈했다.
“웃기시네.”
“예?”
“솔직히 하자. 너 아까 감동받았잖아.”
“주먹질하고 싸운 거에 뭔 감동?”
“말투 돌아왔네. 너 지금 도망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대만이 씩씩거리자 태섭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백받았다고 여유 부리냐, 너?”
“아니, 선배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평상시로 돌아왔다. 장난스럽게 티격태격할 때처럼 두 사람은 농담 같은 말투로 주거니 받거니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은 둘 다 바짝 곤두선 상태였다. 얼음장에 발을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처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언제 바닥으로 꺼질지 모르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백을 받아줄 분위기가 아니자 겉으로 웃고는 있지만 실은 뻣뻣하게 긴장한 대만이 어설프게 능청을 떨었고 옆에서 걷고 있는 태섭도 고스란히 그 감정에 노출되었다. 초조하고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오고 갔다. 대만은 이 분위기를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괴로워하면서 그 고통을 분노로 드러냈다.
“그만 좀 하자. 어쩌고 싶은데. 무슨 생각 중인데?”
“잘 모르겠어요.”
태섭은 혼란스러움을 감추려고 하다가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대만이 분통을 터뜨렸다.
“남자끼리라서 그래?”
“그것도 없진 않아요.”
“야, 나라고 안 어색한 줄 알아?”
“그래요?”
고백한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쳐다보자 대만이 말했다.
“그래, 인마. 너랑 뽀뽀하고 손 잡을 거 생각하면 벌써부터 막막하다.”
이젠 진짜로 속이 울렁거렸다. 태섭이 메스꺼움을 느끼며 말했다.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요.”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부드럽게 흘러갔다. 대만은 갑자기 침착해졌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하고 받아들인 사람처럼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너도 나 그렇게 싫어하지 않잖아.”
태섭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랬다. 그가 싫지 않았다.
그러나 정대만과 교제하는 자신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그들은 그럭저럭 괜찮게 사귀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했다. 정대만이 센다이 시로 돌아가고 송태섭은 도쿄에 남는다. 전화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기는 하겠지만 자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에게 교제 사실을 드러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괜한 문제로 헤어져서 다시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것보다는 지금을 유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
달라지는 게 없다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미치겠네, 진짜. 태섭아. 좀 봐주라.”
조금 전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대만이 울분을 터뜨리며 우겨댔다.
“아. 외롭잖아, 너도!”
외롭다고? 태섭이 황당하다 못해 멍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외롭다니? 대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얼마 안 가 태섭은 정신을 차렸다.
정대만은 지금 믿고 싶은 거다. 송태섭이 자기를 그토록 쉽게 거절할 리가 없다고. 사실은 본인이 외로운 거면서 송태섭이 그와 닮았고 그래서 어쩌면 서로에겐 서로가 필요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외롭다니. 그건 순전히 정대만의 희망에서 비롯된 억측에 불과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제멋대로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못된 성질머리가 드러난 것뿐이다.
그런데 송태섭은 깨닫고 말았다. 그는 내내 외로웠다.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한순간 돌변한 집안의 분위기를 일으켜 세우려던 형마저 바다에 쓸려간 다음에는 집이 무덤처럼 조용했다. 엄마는 활기차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집안을 치우고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한순간 우두커니 집 한 구석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곤 했다. 익숙했던 동네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과 그들이 겪은 불행한 사건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도쿄로 온 다음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다녔고 또래 아이들도 그런 그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훌쩍 떠난 미국에서도 그는 항상 혼자였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유유히 빠져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 위험을 감수할 만큼 마음을 쏟으면서 누군가와 하나가 되려고 한 적도 없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책임감과 죄책감으로 뒤엉킨 채 보관돼 있는 준섭과의 추억을 제외하면 그는 언제나 홀로 서 있었다. 낡은 체육관에서, 텅 빈 코트에서, 바람에 꺾이며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오키나와의 풀밭에서 그는 걷거나 눕거나 멈추어 서 있었다.
어느새 어린아이가 된 송태섭이 어딘가를 향해 달린다. 그러다 무언가에 걸려서 넘어진다. 한동안 엎드린 채 울음을 터뜨리지만 누구도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몇 번 훌쩍이다 말고 비틀비틀 일어난다. 다 까져 피가 흐르는 무릎이 보인다. 그는 상처를 받았다.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도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농구가 좋았다. 다섯이서 해야 하는 스포츠라서 어렵고도 좋았다. 살면서 마음대로 되는 몇 안 되는 것이라서 좋았다. 그러다 또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세계여서 좋았다. 가장 외로웠던 시절 정대만이 불쑥 그의 코트를 넘어 들어와 다음에 또 농구를 하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송태섭은 분명 농구를 계속했을 것이다. 정대만이 없었어도 송태섭은 어떻게든 나아갔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대만도 그럴 것이라 송태섭은 확신한다. 농구를 사랑하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기가 막힌 타이밍일까. 어떻게 남몰래 절박했던 말을 가장 필요한 순간에 던져서 그를 화들짝 들쳐 세울 수 있는 걸까. 왜 정대만이 기대하듯 밀어붙여오는 모든 통찰이 송태섭에게는 매번 유효타가 될까.
황당하리만큼 크게 뜨인 눈에 눈물이 고인 것도 모르고 송태섭은 얼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정대만이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가, 외롭다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새 주머니에서 미끄러지듯 나온 손이 덜렁거리며 양 옆에 매달려 있었다. 머리 위에서 대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해보자.”
“…….”
“잘 될 수도 있잖아.”
“…….”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괜찮을 수도 있는 거잖아.”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났다.
“너 진짜 대답 안 할 거냐.”
“아, 해요. 연애하자고요!”
고개를 번쩍 든 순간이었다. 대만이 고개를 숙여 태섭에게 입을 맞추었다. 뜨겁고 떨리는 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긴장과 두려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시야가 아득히 멀어지면서 심장이 고막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미쳐 날뛰었다.
그런데 대만이 입을 맞춘 곳은 태섭의 입술이 아니라 인중에 가까운 뺨 어드메였다. 실패한 입맞춤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머쓱해하며 떨어진 그가 고장 난 로봇처럼 굳어 있는 태섭의 얼굴을 보곤 민망한 듯 시선을 흘렸다.
“음.”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느새 송태섭은 대만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순식간에 자기 눈높이까지 끌어내리자 당황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너 뭐 하는….” 그리고 올바른 자리에 들어맞는 마지막 퍼즐 한 조각처럼 두 입술이 포개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입술을 맞댄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정답을 찾아내고 그것을 만끽하는 시간이 세상의 법칙과 동떨어진 장소에서 조용히 은빛으로 흘러갔다. 어느새 뒤로 불편하게 꺾여 있던 대만의 허리에서 힘이 빠지고 엉거주춤 들린 손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떨어져 나와 헉헉대며 숨을 터뜨렸다.
태섭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갈게요.”
“어어. 그래….”
대만이 얼떨떨한 얼굴로 태섭을 배웅했다. 송태섭은 몇 번 싱겁게 손을 흔들고는 곧바로 뒤돌았다. 돌아보지 않고 평소같이 걷는 뒷모습이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느긋할 수가 없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태섭은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의 융단이 밑창을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이런 미친. 미친, 미친, 미친, 미친, 미친!’
정대만은 송태섭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온 동네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에 서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느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웃음을 누르면서 뒤돌아 섰다. 주차장까지 걷는 동안 몸이 날아갈 듯했다. 대만은 자신의 흥분을 즐기면서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태섭의 아파트 옆에 딸려 있는 작은 야외 코트장이었다. 벤치 밑에 낡고 더러운 농구공 하나가 박혀 있었다.
송태섭은 쏜살같이 내달려 순식간에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 도착했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라가 현관문을 쾅하고 닫았다. 차갑고 육중한 철문에 등을 기대고는 있었지만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다. 손을 떨고 있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온몸이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바지를 내려다본 태섭이 자신의 신체적 흥분의 증거를 마주하곤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주저앉았다. 주머니에 이물감이 있어 꺼내보니 그놈의 편지였다.
‘무슨 사춘기 온 고삐리도 아니고….’
태섭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대만은 낡아빠진 농구공을 붙잡았다. 코트 안으로 들어와 3점 라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자세를 가다듬는 동안 공 안에 물이 차서 조금 출렁대는 무게감이 전해졌다. 잠시 후 그는 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림이 더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그는 공을 던졌다.
다음 날 정대만은 신칸센을 타고 센다이 시로 돌아갔다.
22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세계멸망의 날은 1999년 7월 24일 토요일 5시로, 당일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시민 일부가 휴거의 날을 맞아 출근을 거부하고 가까운 등산로에 모였다. 그들은 최후의 날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인사를 나누고 삶에서 저지른 실수들을 고백했다. 오사카에서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기기 위해 메일을 송신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해당 구에 설치돼 있는 모든 컴퓨터에 전체 메일을 송신했다.
사이타마현의 미나노마치에서 살고 있는 한 남자는 팬티 바람으로 달려 나와 하얀 옷가지를 불태우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는 “이제 다 끝이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라고 외쳤다. 예언의 시간인 5시가 지났을 때도 사람들은 쉽사리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과거의 예언가가 약간의 오차를 두고 미래를 오인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 사백 년도 전에 죽은 사람이니까 그 정도 오차 정도는 감안하고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늦은 밤이 되자 사람들은 슬슬 모든 일을 웃어 넘기기로 결심했다. 마지막까지 멸망이 도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이들은 몇 달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처분하고 신의 최후통첩을 기다려 온 사이비 종교 단체의 신자들이었다. 심판의 순간이 도통 도착할 기미가 없자 그들은 사건을 몸소 앞당겨 보려는 것처럼 고속도로로 차를 끌고 나와서 피켓을 들고 드러누웠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걸 부정하기 위해 거기에 드러누운 것이었다.
정대만이 도쿄역에서부터 차를 돌려 돌아가고 있을 무렵 메이 고속도로 진입로를 막아선 이 인간 바리케이드는 이미 차량 몇 대를 멈춰 세운 참이었다. 그런가 하면 라디오 방송국은 최후의 날에 걸맞은 희망적인 노래를 선곡했고, 5년 만에 분실된 편지가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밤중에 송태섭과 정대만은 교제를 결심했다. 두 사람 다 까맣게 몰랐지만 모든 일이 벌어진 그 때에 멸망의 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나쁜 일들은 끔찍하게 부풀려지고 상상력을 키우다 맥없이 모습을 감추었고 호들갑을 떨며 굉장한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던 시민들은 실망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새로운 멸망설이 도래했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꽤 신빙성이 있었다. 컴퓨터 문제 때문에 전 인류가 위험에 처할 거라는 전망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전문가들까지 가세해 이 그럴싸한 음모론을 키웠다. 세계의 컴퓨터 공학자들이 들고일어나 지금껏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컴퓨터의 시스템에 실은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는데 그 오류가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것은 바로 과거와 미래를 구분할 수 없게 설계된 컴퓨터의 기억 장치로부터 발생하는 밀레니엄 버그였다.
“알고 보니 컴퓨터가 1900년이랑 2000년을 구분 못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거예요.”
수종이 말했다.
“메모리 장치를 만드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연도를 끝에 두 자리만 기억하도록 만들었다는 거예요. 모든 컴퓨터가요. 그러면 용량 문제가 해결돼서 컴퓨터도 더 빨라지고 좋았다나? 그런데 이제 곧 2000년이잖아요. 제대로 된 연도를 인식 못 한 컴퓨터 시스템이 뒤죽박죽 연도를 자동 설정한대요. 큰일 난 거죠.”
수종은 NHK와 주간 문춘마저 이 문제를 언급했다고 했다. 1월 1일이 되는 순간 전 세계 컴퓨터들이 모조리 심각한 오류를 일으키는 바람에 각종 금융기관 전산망이 마비되고 전철들이 운행을 중지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세상은 한순간 난장판이 되고 말 것이다. 기자들과 아나운서들이 전문가들의 부정적인 전망에 따라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투로 새천년에 닥쳐올 비보를 전하고 있는 중이라고 수종은 설명했다. 이번에야말로 세상은 조금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멸망할지 몰랐다.
“그래서 넌 믿어?”
대만이 묻자 수종이 멀뚱멀뚱 대답했다.
“아뇨.”
“야, 넌 할 짓이 없냐? 농구 선수가 뭘 그렇게 잡지며 TV 프로그램을 다 챙겨 봐.”
“재밌잖아요.”
그로부터 한 달 남짓이 흐른 9월 초, 정대만은 여느 때처럼 팀원들과 함께 해양 센터에 모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실업단 농구 선발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탓에 훈련 메뉴가 갈수록 고되고 엄격해지고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센터를 나서면 팀원들은 따로 약속을 잡을 생각도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정대만의 야투율에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었다. 때로는 조금 나아진 것도 같다가도 때로는 원점 같았다. 리그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가 늘 그렇듯 한 사람분의 몫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대만은 자신이 잘 해낼 거라 믿기로 했다.
종종 송태섭과 연락을 했다. 센다이 시로 돌아간 당일에 그는 곧바로 송태섭에게 전화를 주었다. 그러고는 확인하듯이 물었다.
“나 전화 계속해도 되는 거지?”
태섭은 무뚝뚝하게 딱 잘라 말했다.
“안 되는데요.”
“오. 그러면 곤란한데.”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실실 웃어댔다.
송태섭은 방을 계약했다고 했다. 집에서 전철로 이십 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맨션이었다. 엄마와 아라가 걱정되어서 그렇게까지 멀리 갈 수는 없었다고 태섭은 말했다. 이사는 내년까지 천천히 준비할 계획이었지만 아마 그것보다 일찍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대만은 칠칠맞지 못하게 빼먹는 이삿짐이 없도록 주변을 잘 살피는 게 좋을 거라고 뻔뻔스러운 충고를 했다.
“저기요, 전 누구처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안 보낸 그런 거 없거든요.”
태섭이 항의했다.
“말 나온 김에 편지 말인데. 순 자기 자랑뿐이던데요?”
“그거 읽고 무슨 생각했어.”
대만이 은근 기대하는 투로 물었다.
“와, 정말로….”
“정말로?”
“꼴값도 이런 꼴값이.”
“넌 내려가면 죽었다.”
리그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을 무렵부터는 눈코뜰 새 없이 바빠져서 전화를 잘 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전 일본 실업단 농구 선발 대회가 시작되었다. 센다이 팀은 순조롭게 예선을 통과했다. 대진표상 도쿄 OSG와는 직접 맞붙을 일이 없어 설욕전을 치르지 못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예선 경기에 서태웅이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서태웅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도쿄 OSG는 센다이 팀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예선을 통과해서 10월에 있을 JBL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팀은 호적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한 차례 좋은 성적을 거둔 리그가 끝나고 모두 약간씩 긴장이 풀린 시기였다. 슬슬 날씨가 쌀쌀맞아져 카디건을 챙겨야겠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다. 신덴히가시 해양 센터로 손님이 찾아왔다. 상상도 못 한 손님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센다이 팀에 의도치 않게 분란의 씨앗을 던져주고 떠난 영구 결번의 주인이었다. 8번 양현우였다.
미리 연락을 준 것이 아니었는지 그를 뒤늦게 알아본 팀원 대다수가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의외로 양현우를 가장 반갑게 맞이한 것은 강성준과 대립하며 대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던, 팀에서 가장 키가 큰 산왕공고 출신의 센터였다. 오히려 그를 가장 반가워할 것 같았던 강성준은 모두가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하러 가는 동안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양현우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두리번거리자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양현우는 정대만도 무척 반가워했다.
“그로부터 일 년 만이네요. 진짜 저희 팀으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는 지난날에 대한 유감이나 회한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대만이 자신의 자리에 들어온 것을 무척 흥미롭게 생각했다.
“저희 팀 어때요? 잘 노는 것 같다가도 보기보다 안 친해서 서먹서먹한 녀석들이에요.”
“그렇더라고요.”
정대만이 웃으며 대답하자 팀원들이 그렇지 않다고 우겨댔다.
“형이랑 대만 씨는 완전 다르거든요.”
“대만 씨는 틈만 나면 다 같이 밥 먹자고 그래요.”
“형 나가고 분위기 장난 아니게 달라졌거든요. 저희 얼마 전엔 단체로 같이 술도 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너무 잘 지내는 거 아냐?”
양현우가 낄낄대며 말했다. 그때 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코트 위에 서 있던 성준이 드리블을 시작한 것이다. 잠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양현우가 대만에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 끝나고 제가 한 게임 던져봐도 되겠습니까?”
대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요.”
휴식 시간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곽 감독조차 양현우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친근하게 어깨를 툭툭 치더니 서슴없이 근황을 물었다. 양현우가 훈련이 끝나면 잠깐 체육관에서 한 게임 던지고 싶다고 하자 감독은 난처해 하기는커녕 흔쾌히 허락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직접 관리소에 연락을 넣어서 체육관 이용 시간을 삼십 분 정도 연장해 주겠다고까지 했다.
“예전 생각나네요.”
두 사람을 지켜보던 팀원 하나가 의외란 투로 말했다.
훈련은 얼마 안 가 끝이 났다. 정대만은 벤치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으며 숨을 돌렸다. 그동안 팀원들은 코트 중앙에 모여서 두 팀으로 인원을 나누었다. 양현우는 A팀에 배정되었다. 그는 사복 위에 오렌지색 연습용 유니폼을 걸치고는 공을 퉁기면서 백보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가볍게 레이업 슛을 성공시켰다. 성준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A팀이었다.
‘농구 그만둔 거 아닌가? 폼 안 죽었네.’
대만이 생각했다.
잠시 후 약식 경기가 시작되었다. 센터 체육관이 일곱 시에는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전반전과 후반전을 각각 십분 씩 진행하기로 했다. 팀원들은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했고 약식 경기란 생각 때문에 훈련 때보다 조금 힘을 뺀 채로 경기에 임했다.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경기였다. 의외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어 대만은 어느 순간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두 팀은 고만고만하게 싸웠다. 어느 한쪽이 질 것 같지 않은 비등비등한 분위기에서 느닷없이 양현우가 틈새를 치고 나왔다. 그와 동시에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운 몸짓으로 강성준이 골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텅 빈 골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양현우는 3점 라인의 좌측 방향에 서 있었다.
다음 순간 성준이 무척이나 재빠른 패스로 그의 손에 공을 배달시켰다. 양현우가 뛰어올랐고 잠시 후 공이 시원한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를 통과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갖춰온 오팬스 패턴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었다. 비로소 강성준의 고치기 힘든 습관이 어디서 왔는지 대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내 협조를 부탁했으나 도통 들어 먹히지 않던, 때로는 고의 같다가도 때로는 실수 같이 느껴져 그를 헷갈리게 했던 성준의 습관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모든 퍼즐이 짜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군.’
약식 경기는 B팀의 승리였다. 두 사람의 연계를 보고 흥분한 B팀의 권수종이 미친개처럼 날뛰면서 골대를 박살 낼 기세로 연거푸 덩크를 때려 박았기 때문이다. 팀원들은 살짝 떨떠름해하며 권수종만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이번 해에는 우승하겠네.”
살짝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짓긴 했지만 양현우는 덕분에 즐거운 게임을 했다고 수종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도 수종은 살짝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체육관을 나서면서 단체로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얼마 안 가 센다이 팀은 근처에 있는 샤브샤브 집으로 양현우를 끌고 갔다. 대만도 동행했지만 보나 마나 예전 이야기가 나올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에 자리에 썩 오래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결국 테이블에서는 대만이 끼어들기 어렵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썩 흥미를 끌지 못하는 주제가 나왔다. 정대만은 고기를 몇 점 집어먹다 말고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를 나서는데 수종이 따라 나왔다. 처음에는 배웅을 해주려나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수종 성격에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종은 속으로 귀가를 벼르고 있다가 대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냉큼 따라 나온 것이었다.
“근데 형 저번부터 왜 그렇게 조용하게 앉아 있어요?”
수종이 물었다.
“재미가 없어서.”
“형이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예요. 어울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도 좀 걸고 그래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대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수종을 쳐다봤다.
‘역시 이 자식이랑은 친해질 수가 없어.’
“형 리그 통합되면 내년에 계약 연장할 거예요?”
“아직 생각 안 해봤다. 그보다 팀이 남아있기는 한대?”
“저야 모르죠.”
“왜 물어본 거야.”
‘그러고 보니 송태섭 걘 뭐 하는 거지?’
“아무튼 저 가요.”
“들어가라.”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송태섭에 대한 생각은 계속되었다. 얘 농구 계속하는 거 맞지? 생각해 보니 가장 중요한 문제였는데 다른 고백에 그만 어영부영 묻히고 말았다. 태섭으로부터 농구를 계속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낌새 보니 안 할 것 같지는 않던데.’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할 것 같기는 했다. 직접 물어보고 확답을 받을 때까지 독촉할까 싶었지만 이미 그 문제로 주먹다짐까지 벌인 마당에 이 이상 들쑤시는 것도 조금 그런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날 너무 아름답게 결합되었다. 정대만은 이 관계의 설레는 초입을 아직 만끽하고 싶었다. 하필 세계 종말의 날에 사귀게 되었다는 예상치 못한 극적인 설정조차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맨션으로 귀가하자마자 들뜬 마음에 세상 일이 절로 끌려오듯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였다.
“주말에 혹시 내려올 수 있니?”
대만은 리그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사실은 가나가와로 내려가면 태섭을 볼 수 있으리라는 목적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 뒤로 태섭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JBL 개막 전까지 더는 도쿄로 출장을 떠날 일도 없으니 이 기회에 예상보다 일찍 태섭을 만나고 돌아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적인 스케줄을 확인한 뒤 정대만은 곧장 태섭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 일정을 통보했다.
“잘됐네요.”
태섭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뭐야, 그날 약속 있어?”
“아뇨.”
송태섭이 덧붙였다.
“통째로 비워둘게요.”
남은 저녁 시간 동안 대만은 바닥에 주저앉아 이케아에서 산 조립식 옷장과 씨름을 벌였다. 한참 동안 나사를 조였다 풀고 기둥을 이리저리 돌리고 붙여보다가 한 시간 반 만에 문 한 짝이 너덜거리는 옷장을 완성했다. 그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그 옷장을 남은 방에 집어넣었다. 안이 무너질 것 같아서 옷은 하나밖에 걸지 못했다.
23
송태섭은 독립 사실을 알렸다. 저녁을 먹은 다음 엄마와 아라를 식탁에 앉혀두고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그만 맨션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가장 걱정했던 엄마는 예상외로 무척 순순한 반응이었다. 서운해하거나 울적해하기는커녕 맨션이 어느 역에 가깝게 위치해 있는지, 방을 계약하기 전에 물이 새는 곳은 없는지, 난방은 제대로 되는지, 창틀이 낡거나 휘어져서 창문을 닫을 때 틈새로 바람이 새지는 않는지, 화장실 배수구에서 이상한 냄새가 올라오지는 않는지를 태섭이 제대로 점검했나 궁금해했다.
주변에 충분한 가로등이 있는지, 밤에 지나치게 어둡지는 않은지, 멀지 않은 곳에 파출소가 있는지도 궁금해했다. 혼자 살게 되면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정말로 괜찮겠냐고 묻다가 “내 정신 좀 봐.”하고 민망한 듯 웃었다.
“이미 혼자서 살아봤는데. 내가 너무 말이 많았지.”
“아니에요.”
반면 송아라는 무슨 연유에선지 굉장히 못마땅해했다. 그 감정을 감추려 들지도 않고 오히려 직접적으로 표출하며 태섭에게는 물론이고 엄마에게도 자신의 기분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자신이 느끼는 바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송아라의 심기불편한 태도는 태섭의 귀국 이후로 줄곧 이어져 온 것이었지만 이번 일로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린 것 같았다. 귀가하는 시간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늦어졌고 집안에서 태섭을 마주치는 일이라도 있을라치면 즉시 얼굴을 구기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쩌다 저녁 시간보다 일찍 들어오는 날에는 점퍼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났다. 엄마가 야근으로 바쁘지 않았다면 이 꼴을 다 보게 되었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제 여동생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내버려 두던 송태섭도 마침내 이런 송아라를 도무지 참아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0월 초의 어느 날, 정대만으로부터 주말에 가나가와로 내려가겠다는 전화가 걸려온 그 주에 송태섭은 송아라를 불러 세워놓고 최근의 일을 따져 묻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오빠로서의 권위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송아라가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눈치를 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사태를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저녁을 먹은 뒤 태섭은 평소처럼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려는 송아라를 불러 세우려 했다. 하지만 송아라는 태섭을 완전히 무시했다. 아라가 방문을 닫고 문을 잠그려고 하자 그때까지 자리에 서 있던 태섭이 튀어 올랐다. 포인트 가드로서의 폭발적인 힘과 스피드를 발휘해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간 그가 한 손으로 방문을 강하게 붙잡았다.
아라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항의하며 발버둥 쳤지만 송태섭이 마음먹고 힘을 쓰기 시작하자 그에게 당해내지 못했다. 송아라는 결국 방문 닫는 것을 포기했다. 복도로 나온 아라는 너무나 분하고 서러워 보였다. 특히 태섭이 한 손으로만 방문을 붙잡은 데에 반해 자신은 두 손으로 온 힘을 다해 문을 닫으려고 애써야 했고 심지어는 그렇게 했는데도 이길 수 없었다는 사실에 분을 참지 못했다. 송아라는 오빠가 남자라서 정말 싫다고 벌컥 화를 냈다.
“손 다쳤잖아. 오빠 때문에 방문 잡으려다 미끄러져서 가시 박혔어. 아파 죽겠어. 어떻게 할 거야?”
처음에 송태섭은 아라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아라는 정말로 손을 다쳤다. 보란 듯이 펼친 손바닥의 손금 부근에 큼지막한 가시 같은 것이 붙었다 떨어져 나온 흔적이 있었고 그 위로 가로로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송태섭은 아라에게 화를 내거나 따져 물을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송아라는 쌀쌀맞은 투로 신경 쓰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상처를 책임지려는 태섭의 태도가 오히려 화를 돋운 것처럼 보였다. 송아라는 한동안 절절매는 태섭을 경멸스럽게 노려보다가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얼마 안 가 엄마가 퇴근했지만 방구석에 박혀서 뭘 하는 건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다음 날 태섭은 여동생의 방문 앞으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다가 문밖에 서 있는 그의 존재를 눈치챈 건지 갑자기 소리가 뚝 멈췄다. 태섭은 헛기침을 하고는 방문을 두드렸다.
“야, 송아라.”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태섭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제는 미안하다. 다칠 줄 몰랐어.”
문 너머는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네가 요즘 술 마시고 늦게까지 다니는 게 솔직히 좀 보기 그랬어. 네가 그러고 다니는 거 엄마가 당장 몰라서 그렇지, 보시면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안 그래? 나도 걱정되고.”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늦게까지 친구들하고 몰려다니지 말고, 이번 주말에 남자친구랑 유원지라도 놀러 가. 내가 용돈 보태줄게.”
“뭐라고?”
안에서 아라가 되물었다.
“오빠가 너 용돈 보태주겠다고.”
태섭이 말했다.
잠시 후 떨어져 나가다시피 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힌 송아라가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기세 치고 송아라는 굉장히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이었다. 송태섭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필요 없어, 그까짓 것.”
아라가 말했다.
“뭐?”
“필요 없다고. 그딴 코 묻은 돈.”
태섭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 말 다 했어?”
“아니.”
그런 다음 송아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심호흡을 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아주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딴 식으로 구는 것 좀 그만해.”
“그딴 식?”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 좀 그만하라고.”
송아라가 어제오늘 있던 일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송태섭은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따져 물었다.
“내가 언제 멋대로 굴었는데?”
아라는 조소했다. 그렇게 대답할 줄 빤히 알고 있었다는 듯 자포자기하는 여동생의 태도에 태섭은 크게 마음이 상했다.
“늘 그랬잖아. 오빠는 나한테 관심이나 있어?”
“그럼 내가 방금 보인 건 관심이 아니고 참견이냐?”
“그래!”
송아라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한 적 있냐고!”
“미안해서 주려고 한 거였어.”
“그래, 나 화 풀려고 멋대로 주는 거잖아, 그 쌈짓돈도!”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냐? 기분 나쁘면 받지 말던가.”
태섭이 빈정거렸다.
“그래서 안 받는다고 했잖아!”
마침내 송아라는 폭발하고 말았다.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용암이 마침내 지층을 뚫고 산의 목구멍을 통해 모든 것을 박살 내려고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송아라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송아라는 시퍼렇게 뜬 눈으로 정말이지 태섭이 지겨워 죽겠다고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고 했다. 오빠는 엄마에게 효자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엄마가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 매섭게 비난을 퍼부었다. 태섭이 자기 좋을 대로만 행동하고 허구한 날 농구만 하고 쌈박질이나 하고 다닌다고 소리를 질렀다.
얼마 안 가 송아라의 분노는 가족 전체로 확장되었다. 송아라는 엄마도 지겹다고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랑 같이 있는 것을 가끔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아니, 송아라가 지겨운 건 이 좁아터진 집구석이었다. 집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큰 오빠의 액자를 닦고 태섭의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참아줄 수가 없다고 했다. 송태섭이 일본을 떠나 있던 지난 몇 년 동안 언제라도 그가 돌아올 것처럼 빈자리를 정돈하고 장소를 준비시키는 엄마의 성실하기보다 관성적인 행동이 집에 없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자기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송아라는 큰 오빠가 밉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다 준섭이 만든 거라는 것이다. 자기는 아빠 같은 건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기억나는 건 큰 오빠뿐이고 그와 나눈 추억이 자기 안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이렇게 비난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자신도 슬픔을 나누었으니까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송아라는 송준섭이 그렇게까지 위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 아라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 ‘위대하다’라는 표현을 썼다. 아라는 자기가 아는 준섭은 오빠나 엄마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물론 자기도 큰 오빠가 그립기는 하지만 두 사람처럼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들면 화상을 입을 것 같이 굴지는 않는다고 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럴 만큼 관대하고 대단히 책임감 있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자신에게 송준섭은 그냥 멋지고 웃기고 가끔 이기적으로 구는 오빠였을 뿐이라고 했다. 남들처럼 평범한 그런 오빠 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계속 비디오를 돌려보지 않는가. 준섭의 책임감을, 강직함을, 농구를 되새기지 않는가. 매 해 돌아오는 생일날마다, 시간이 과거를 붙들어 두려고 할 때마다, 가족들끼리 웃고 떠들어야 할 명절과 기념일마다 송준섭에게 반복해서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고장 난 비디오 플레이어를 거기 그대로 둔 거라고 아라는 말했다. 엄마가 더는 치우거나 관여할 수 없도록 태섭의 방을 창고로 전락시켜 버린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 갑자기 돌아와서는 또 자기 멋대로 굴잖아.”
아라가 차가운 분노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내가 모를 줄 알아? 오빠도 집이 불편해서 나가는 거잖아. 오빠가 엄마한테 관심도 없는 동안 나는 옆에서 엄마가 무슨 생각하고 어떻게 사는지 다 지켜봤어. 오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자끼리 단둘이 한 집에서 살면 그렇게 돼. 싫어도 그렇게 되는 거야. 집을 나가겠다고? 오빠야 좋겠지. 어디 한 번 잘 살아보시지 그래. 그놈의 농구도 계속 재밌게 하고 혼자서 잘 먹고 잘 살아 봐. 나한테 다시는 연락하지도 마!”
태섭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송아라의 어깨너머에 못 박혀 있었다. 씩씩거리며 분노로 몸을 떨던 아라도 곧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엄마가 서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도 않고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잠시 후 송아라가 울분을 참지 못하는 앓는 소리를 내더니 방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점퍼를 챙겼다. 그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태섭은 아라가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구겨 신는 것을 보고는 얼이 빠져서 말했다.
“어디 가?”
일부러 동작을 거칠고 크게 하는 아라를 의식한 엄마가 뒤로 살짝 물러났다. 송아라는 그런 엄마를 한 번 노려본 다음, 문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있는 힘껏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쫓아 나가려던 태섭은 주춤대며 멈추어 섰다. 현관을 반쯤 막고 있는 엄마의 존재가 다시금 의식된 것이다. 엄마는 이제 태섭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엄마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구두였다. 그의 어머니는 못 보던 살구색 스타킹에 신발장 안쪽에 감추어져 있던, 앞코에 솜씨 좋게 리본이 달린 그 연분홍색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송아라, 너 당장 안 돌아와?”
구두를 보며 태섭이 확신 없는 윽박을 내질렀다.
“야!”
본인 생각에도 참으로 보잘것없는 호통이었다. 준섭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편지는 아마도 박스를 봉할 때 같이 넣는다는 걸 깜빡하고 책상 위에 남겨졌을 것이다. 그러다 엄마가 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서랍 같은 곳으로 들어가 그곳에 그대로 방치되었을 것이다. 정대만은 평소에 방을 잘 사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학교에 있을 적에도 그랬지만 특히 집에서는 책상에 앉아본 적이 드물었다. 대학생이 되고부터는 허구한 날 농구를 하러 가거나 놀러 다니기 바빠서 서랍을 열어볼 생각조차 못했다. 편지는 오랜 세월 동안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그곳에 처박혀 있다가 느닷없이 발견되었다.
정대만은 주차장 난간에 기대어 밀봉된 편지를 뜯었다.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모서리만 조금 누렇게 뜬 봉투를 열자 언젠가 그가 썼던 편지 두어 장이 나왔다. 어느새 자동차 라디오에서 쿠보타 토시노부의 히트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학을 다닐 시절 여자친구였던 누군가가 들려주곤 했던 노래였다. 난간에서 희미하게 철 냄새가 올라왔고 나방 한 마리가 가로등 불빛에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는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황급히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뭐냐, 이게….’
송태섭을 응원하기 위해 썼다고 생각한 편지에는 순 정대만 본인 이야기밖에 없었다. 내용이 정말 가관이었다. 처음에는 후배를 북돋는 말로 그럴싸하게 시작했지만 중간부터 복사한 비디오에 대해 하나씩 사족을 붙이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결국 그는 한참 동안 자신이 요즘 얼마나 잘 나가고 있으며 얼마나 농구에 열정적으로 몰입해 있는지를 구구절절 늘어놓다가, 편지 말미에 이르러서야 태섭의 비디오를 좀 보내달라는 식으로 겨우 송태섭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끝을 맺었다.
‘그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슬슬 주변에 관심을 좀 가져봐라.’
뒤늦게 채치수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때는 흘려들었는데 이제와 보니 뼈가 있는 말이었다. 먼지를 털고 보니 애물단지에 불과한 골동품을 마주했을 때처럼 눈앞의 편지가 지나치게 볼품없이 느껴졌다. 송태섭에게 이런 걸 돌려줘봤자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이런 편지를 주려고 했었다니. 과거의 자신은 정신이 나갔던 게 분명했다.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쏟아진 잡동사니 속에서 편지를 발견한 순간 정대만은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설명하기 어려운 강한 확신을 느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무언가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적인 예감에 사로잡혀 도쿄역을 뛰쳐나와 가나가와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편지는 기억과 지나치게 다를뿐더러 내용마저 별 볼 일 없었다. 그를 사로잡은 확신이 전부 착각에 불과했다는 잔인한 사실이 증명되자 현실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그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실토할 수는 없었다. 농구를 때려치우려고 일본으로 돌아왔다는 전화 한 통에 마음이 흔들린 거라고 태섭에게 고할 수는 없었다. 출발까지 몇 분 남지 않은 야간열차를 뒤로 한 채 기묘한 교통체증을 뚫고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사십 분만에 주파해 이곳에 당도한 이유가 고작 그 전화 한 통이라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본때를 보여주리라고 망설임 없이 뛰쳐나왔던 기세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체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송태섭이 농구를 관둔다 해서 정대만의 인생에 무언가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이제 와서 송태섭이 농구를 그만두든 말든 그것은 정대만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아파트 공동현관이 훤히 보이는 장소에 차를 대고 서서 송태섭을 기다리고 있었다.
식은땀이 날 때처럼 손이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공동현관 쪽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등 뒤에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예요?”
정대만은 편지를 움켜쥔 채 뻣뻣한 자세로 몸을 돌렸다.
태섭은 큼지막한 까만 티셔츠에 낡은 운동화를 구겨 신고 있었다. 여태껏 봐왔던 모습 중에서도 가장 후줄근한 차림이었다. 평소 정성껏 만지던 머리도 물을 먹은 것처럼 축 쳐져 있었다. 머리를 내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대만의 눈에 태섭이 지나치게 어려 보였다.
송태섭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기차 탄 거 아니었어요?”
“누구 덕분에 못 탔다.”
잠시 후 대만이 물었다.
“진심이야?”
“뭘요.”
“농구 관두겠다는 거 진심이냐고.”
태섭은 침묵했다.
“고작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요?”
대만은 바닥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태섭을 쳐다봤다.
“그래.”
이어서 말했다.
“그러니까 취소해.”
그제야 태섭은 대만이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인지 알아차렸다. 기가 막히단 듯 얼굴을 찌푸렸다.
“싫은데요.”
“너 안 관두고 싶은 거 알아.”
“그런지 아닌지 그걸 댁이 어떻게 알아요?”
“하고 싶은 거 계속하면 안 되는 거야?”
“아니, 선배가 뭔데요?”
“그야….”
말문이 막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태섭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내고는 아파트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는 황급히 태섭의 진로를 막아섰다. 잠깐의 대치가 있은 후 대만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멀리서 볼 때 그는 송태섭만큼이나 굉장히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한 발 한 발을 뗄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무게중심이 통째로 휘청대는 듯했다.
정대만은 다급함을 숨기는 사람들이 그러듯이 무뚝뚝한 몸짓으로 편지를 내밀었다.
“본가에 있는 짐 챙기다 보니 나왔다.”
태섭은 성의 없는 눈빛으로 편지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대만을 쳐다봤다.
“뭔데요, 이게?”
“보면 모르냐? 네가 찾던 편지잖아.”
“이걸 왜 선배가 갖고 있는데요?”
“넣는다는 거 깜빡했다.”
한 마디씩 뱉을 때마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돌려준다. 가져가.”
송태섭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대만이 그의 가슴팍으로 편지를 바짝 들이밀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지금?”
“가져가라고.”
태섭이 그대로 굳어 있자 대만이 거칠게 그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었다.
“아, 무슨…. 뭐 하냐고!”
대만은 태섭이 손을 쑥 빼려는 걸 강하게 붙잡았다. 손목을 꽉 쥔 그의 손이 긴장으로 하얗게 굳어 있었다. 편지를 받지 않으려는 태섭과 어떻게든 손에 쥐어주려는 대만 사이에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이 벌어졌다. 악에 받친 듯한 몸짓이 점점 커지고 결국에는 처음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졌다. 어느새 편지는 어디로 간 건지 둘 다 서로의 멱살을 쥔 채였다.
키 차이 때문에 태섭은 뒤로 젖혀지다시피 한 자세로 공중에 반쯤 들려 있었다.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둥그런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말없이 대만을 쏘아보는 송태섭의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싸가지 없는 자식. 하여간 싸가지 없는 자식이었다. 송태섭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심사가 뒤틀렸다. 이제는 까마득하기만 한 고교 시절에도 대만은 이 표정에 못 이겨 덤벼들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이 불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라고요. 이제 와서.”
태섭이 씹어 뱉었다.
“뭐 어쩌라고요, 나한테.”
“…….”
“씨발, 나보고 어쩌라고요!”
“농구 그만두지 말라고!”
거의 동시에 대만이 고함을 쳤다.
“농구 그만두지 말라고.”
어느새 둘 다 씨큰거리고 있었다.
“왜요? 제 맘이지.”
태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 바 아니야.”
“선배 지금 무슨 소리 하는지 알아요?”
“농구 관둘 거야, 말 거야. 확실히 말해!”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냐고요!”
태섭이 발버둥치자 대만이 멱살을 쥔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아쉽잖아!”
우악스럽게 끌어당기고 고함을 쳤다.
“아쉽잖아, 너도!”
“안 아쉬워요.”
“농구 관두는 게 안 아쉬워? 그런 놈이 미국까지 갔냐?”
“보내주니까 갔어요. 됐어요?”
“그딴 소리 들으려고 온 거 아니야.”
“그럼 뭐라고 말해야 되는데.”
태섭이 차갑게 말했다.
“댁이 그만두지 말라고 하면 아, 네. 뭐 이렇게 대답해야 되나? 그럼 여기서 꺼져줄래요?”
“넌 대체 뭐가 문제냐?”
대만이 경악스럽게 말했다.
“허. 누가 할 말을 해.”
태섭이 차갑게 조소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분에 못 이긴 대만이 거칠게 태섭을 놓아주었다. 힘이 어찌나 셌는지 태섭이 바닥에 거의 내팽겨지다시피 할 정도였다. 다음 순간 눈이 뒤집힌 송태섭이 용수철처럼 솟아올라 눈앞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대만의 몸이 통째로 휘청였다. 방금 벌어진 일을 파악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만은 맞은 부위를 손등으로 훔치다 말고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에는 주먹으로 갚는 게 도리였다. 싸움은 마른 지푸라기에 붙인 불씨처럼 순식간에 커졌다. 태섭의 주먹이 대만의 옆구리를 강타했고 대만이 태섭의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건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눈앞의 상대를 빌미로 몰입하기 시작한 자신만의 혼란스러운 분노였다. 두 사람은 오래전 반드시 한 번은 주고받았던 그 감정을 그대로 부딪치며 서로에게 맞섰다.
정대만은 정말이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한편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무언가의 이유로 억울하고 두렵기도 했다. 대만은 그 어느 때보다 송태섭이 농구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송태섭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필두로 양아치들에게 둘러싸여 두들겨 맞을 때도, 키가 작다고 코트 위에서 빈번히 무시를 당할 때도 단 한 번도 농구를 그만 둘 기색을 비치지 않던 녀석이 왜 이제 와서 약한 소리를 하는 건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송태섭에게 닿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이토록 뚜렷하게 든 적은 없었다. 정대만은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내 말에는 힘이 없나?
내가 지금 당장은 농구를 못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농구를 잘했더라면, 대학생 때처럼 승승장구하며 잘 나갔더라면, 그에게 조금 더 권위가 있고 그 이유로 그의 판단과 행동이 조금 더 가치 있어 보였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 다 농구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벌어진 일 같기도 했다. 동떨어진 두 종이컵을 연결하는 털실을 자른 것처럼 두 사람을 연결하는 무언가가 뚝 끊어져 버렸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눈앞의 송태섭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멀게 보였다. 그 순간 농구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송태섭을, 농구를 뺀 송태섭의 나머지 부분을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그랬다. 정대만은 송태섭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언제부터 농구를 했는지, 왜 농구를 좋아하는지, 미국에 가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쩌다 농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친하게 지낼 때조차 태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짐작도 못하지 않았는가. 깊게 알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토록 가까운 마음으로 쓴 편지에서조차 순 자기 이야기뿐이다. 농구를 하는 내가 누구보다 멋있는 놈이라는 걸 알아달라는 듯 그는 편지 한 통에 전부 농구 이야기만 썼다.
다음 순간 부끄러운 깨달음이 대만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잘 보이고 싶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거다. 내심 송태섭이 자기 농구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해줬으면 해서 그 비디오들을 녹화해 보낸 거였다.
물론 송태섭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새벽에 전화를 걸어와 약한 소리를 늘어놓는 그에게 보란 듯이 의지가 되어주고 싶던 마음은 분명 진심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한 번도 농구에 진심이 아닌 적 없는 자신이 마찬가지로 농구에 진심이 아닌 적 없는 송태섭의 열정을 알아본 것처럼, 송태섭도 반대로 그렇게 해주리라 철썩 같이 믿었던 것이다. 그때 정대만은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으로 송태섭을 고른 거나 다름없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송태섭이 그의 멱살을 붙잡아 벽으로 거칠게 밀쳤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얼마 안 가 송태섭도 대만이 싸움을 포기했다는 걸 눈치챘다. 잠시 후 멱살을 틀어쥔 태섭의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면서 진공 상태에 가까웠던 풍경이 재건되기 시작했다. 담장, 가로등, 가로수와 주륜장, 전화부스가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송태섭의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파트에서 누군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시끄러운 것을 조금도 참지 못하는 송태섭의 동네답게 두 사람이 벌이는 난리법석을 견디지 못한 주민 하나가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아냐, 이 썩을 놈들아!”
잠시 후 대만이 거칠게 송태섭을 밀치고 비틀거리며 빠져나왔다. 얼굴에 뭐가 흐르는 것 같아 손등으로 인중을 훔쳤지만 아무것도 닦이지 않았다. 대만은 바닥에 나뒹구는 편지를 주워 들었다.
“그렇게 전화 끊으면 좋냐?”
눈물을 흘리면서 그가 말했다.
21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딱히 그러자고 합의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은 단지에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뒤늦게 자신들이 벌인 소란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태섭과 대만은 아파트 단지 뒤편으로 통해 츠지도 해변 공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원이라기보다 정원에 가까울 정도로 조그마한 부지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한 대도 다니지 않는 고요한 해안가 산책로가 끝나자 불 꺼진 상점가와 좁고 어두컴컴한 골목들이 나타났다. 형광색으로 칠해진 펜스 너머로 항상 문에 굳게 닫혀 있는 츠지도 단지 관리 조합 건물 앞까지 걸어왔을 때 태섭이 물었다.
“좀 진정이 됐어요?”
대만은 벌써 눈물을 그친 지 오래였다.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뿐이지 작정하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만은 자신이 엉엉 운 것처럼 취급되는 게 좀 민망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목소리는 굉장히 못마땅한 사람처럼 흘러나왔다.
“어.”
“열차 놓쳐서 어떡해요?”
“새로 끊으면 돼.”
“돈 많네.”
대만은 또다시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하냐?”
하지만 태섭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이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대만은 기세가 꺾여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사실 태섭은 조금 전 일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되자 대만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쿄역에 있어야 할 그가 자신의 전화를 받자마자 가나가와까지 차를 몰고 되돌아온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그것은 명백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송태섭은 이 상황이 잘 믿기지 않았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 그토록 영향을 받고 흔들릴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일들을 바라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당장 고등학생 때만 해도 송태섭은 이한나를 통해 그런 일들을 꿈꾸지 않았는가. 누군가 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를 통해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두는 일을 꿈꿔본 적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정대만이 자신을 그렇게 대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지난 세월 그와 연락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송태섭은 이 관계가 여기서 크게 달라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정대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대만은 정말이지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사람 좋고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따금 골 때리게 웃기는 부분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생기면 무섭게 돌변하는 성질머리를 갖고 있었다. 열정적이고 활기찬 한편으로 골몰하는 문제가 생기면 놀랄 만큼 침착하고 냉정해졌다. 융통성을 발휘하며 너그럽게 굴다가도 자신이 원하는 건 어떻게든 해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사실 정대만은 태섭이 만나온 사람 중에서도 가장 평균값에 가까운 인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쉽게 열정에 취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 앞에서 열광하고 아닌 척 남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길 원하면서 동시에 남들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런 정대만이 자기 때문에 가나가와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태섭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애초에 그가 그렇게 해주기를 원해서 전화를 건 것도 아니었다. 이제 어떡해야 할까?
갑자기 속이 울렁대는 것 같았다. 태섭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새 대만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여기 많이 변했네.”
대만은 체인점을 낸 점포를 알아보고 해수욕장에 있던 가게가 왜 이쪽으로 이동한 거냐고 물었다. 질문하는 말투이긴 했지만 정말로 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돌아오는 대꾸가 없어도 아랑곳 않고 이번엔 자전거 수리점이 없어졌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형.”
“어.”
대만은 태섭을 돌아보는 대신 앞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라.”
“집에 무슨 일 있어요?”
“뭐?”
대만이 인상을 찌푸리며 태섭을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안 그럼 여기까지 돌아올 이유가 없잖아요.”
“너 내가 아까 말한 건 코로 들었냐?”
태섭이 아무 말 않자 대만이 말했다.
“말했잖아. 너 농구 때려치우는 거 관두게 하려고 왔다고.”
잠시 후 덧붙였다.
“그리고 아직 대답 못 들었다.”
태섭은 주머니 속에 쑤셔 박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그래.”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렇지.”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럼 왜 왔어요?”
대만은 잠시 침묵했다.
“네가 신경 쓰였으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태섭이 되물었다.
“저 때문에 왔다고요, 정말로?”
“그렇다고 했잖아.”
마른침을 삼켰다.
“제가 중요해요? 형한테?”
대만은 바닥을 노려보았다.
곧이어 결심한 듯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 난 네가 친한 후배 이상으로 신경 쓰인다.”
갑자기 화면이 앞으로 쭉 당겨진 것처럼 대만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비장한 표정을 만들며 휘어지는 짙은 눈썹과 콧등, 갈라진 인중 아래로 벌어지는 입술이 카메라를 줌인한 것처럼 하나하나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갈색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송태섭을 꿰뚫는 눈이었다. 그를 환희에 차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들 운명을 품은 눈이었다.
“난 너 좋아한다. 싫으냐?”
걸음을 멈추었다.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있은 후, 마침내 태섭이 입을 열었다.
“싫은데요.”
“뭐 인마?”
대만은 곧바로 발끈했다.
“웃기시네.”
“예?”
“솔직히 하자. 너 아까 감동받았잖아.”
“주먹질하고 싸운 거에 뭔 감동?”
“말투 돌아왔네. 너 지금 도망치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대만이 씩씩거리자 태섭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백받았다고 여유 부리냐, 너?”
“아니, 선배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갑자기 분위기가 평상시로 돌아왔다. 장난스럽게 티격태격할 때처럼 두 사람은 농담 같은 말투로 주거니 받거니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은 둘 다 바짝 곤두선 상태였다. 얼음장에 발을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처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언제 바닥으로 꺼질지 모르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고백을 받아줄 분위기가 아니자 겉으로 웃고는 있지만 실은 뻣뻣하게 긴장한 대만이 어설프게 능청을 떨었고 옆에서 걷고 있는 태섭도 고스란히 그 감정에 노출되었다. 초조하고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오고 갔다. 대만은 이 분위기를 오래 버티지 못했다. 결국 괴로워하면서 그 고통을 분노로 드러냈다.
“그만 좀 하자. 어쩌고 싶은데. 무슨 생각 중인데?”
“잘 모르겠어요.”
태섭은 혼란스러움을 감추려고 하다가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대만이 분통을 터뜨렸다.
“남자끼리라서 그래?”
“그것도 없진 않아요.”
“야, 나라고 안 어색한 줄 알아?”
“그래요?”
고백한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쳐다보자 대만이 말했다.
“그래, 인마. 너랑 뽀뽀하고 손 잡을 거 생각하면 벌써부터 막막하다.”
이젠 진짜로 속이 울렁거렸다. 태섭이 메스꺼움을 느끼며 말했다.
“알겠으니까 그만 말해요.”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부드럽게 흘러갔다. 대만은 갑자기 침착해졌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하고 받아들인 사람처럼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너도 나 그렇게 싫어하지 않잖아.”
태섭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랬다. 그가 싫지 않았다.
그러나 정대만과 교제하는 자신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그들은 그럭저럭 괜찮게 사귀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래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했다. 정대만이 센다이 시로 돌아가고 송태섭은 도쿄에 남는다. 전화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기는 하겠지만 자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에게 교제 사실을 드러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괜한 문제로 헤어져서 다시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 것보다는 지금을 유지하는 게 낫지 않을까?
달라지는 게 없다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미치겠네, 진짜. 태섭아. 좀 봐주라.”
조금 전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대만이 울분을 터뜨리며 우겨댔다.
“아. 외롭잖아, 너도!”
외롭다고? 태섭이 황당하다 못해 멍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외롭다니? 대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얼마 안 가 태섭은 정신을 차렸다.
정대만은 지금 믿고 싶은 거다. 송태섭이 자기를 그토록 쉽게 거절할 리가 없다고. 사실은 본인이 외로운 거면서 송태섭이 그와 닮았고 그래서 어쩌면 서로에겐 서로가 필요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외롭다니. 그건 순전히 정대만의 희망에서 비롯된 억측에 불과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제멋대로 자기 생각을 밀어붙이는 못된 성질머리가 드러난 것뿐이다.
그런데 송태섭은 깨닫고 말았다. 그는 내내 외로웠다.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한순간 돌변한 집안의 분위기를 일으켜 세우려던 형마저 바다에 쓸려간 다음에는 집이 무덤처럼 조용했다. 엄마는 활기차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집안을 치우고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한순간 우두커니 집 한 구석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곤 했다. 익숙했던 동네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과 그들이 겪은 불행한 사건을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도쿄로 온 다음에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방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다녔고 또래 아이들도 그런 그에게 다가가려고 애쓰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훌쩍 떠난 미국에서도 그는 항상 혼자였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유유히 빠져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고 위험을 감수할 만큼 마음을 쏟으면서 누군가와 하나가 되려고 한 적도 없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책임감과 죄책감으로 뒤엉킨 채 보관돼 있는 준섭과의 추억을 제외하면 그는 언제나 홀로 서 있었다. 낡은 체육관에서, 텅 빈 코트에서, 바람에 꺾이며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오키나와의 풀밭에서 그는 걷거나 눕거나 멈추어 서 있었다.
어느새 어린아이가 된 송태섭이 어딘가를 향해 달린다. 그러다 무언가에 걸려서 넘어진다. 한동안 엎드린 채 울음을 터뜨리지만 누구도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몇 번 훌쩍이다 말고 비틀비틀 일어난다. 다 까져 피가 흐르는 무릎이 보인다. 그는 상처를 받았다.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도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농구가 좋았다. 다섯이서 해야 하는 스포츠라서 어렵고도 좋았다. 살면서 마음대로 되는 몇 안 되는 것이라서 좋았다. 그러다 또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세계여서 좋았다. 가장 외로웠던 시절 정대만이 불쑥 그의 코트를 넘어 들어와 다음에 또 농구를 하자고 말하지 않았더라도 송태섭은 분명 농구를 계속했을 것이다. 정대만이 없었어도 송태섭은 어떻게든 나아갔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대만도 그럴 것이라 송태섭은 확신한다. 농구를 사랑하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기가 막힌 타이밍일까. 어떻게 남몰래 절박했던 말을 가장 필요한 순간에 던져서 그를 화들짝 들쳐 세울 수 있는 걸까. 왜 정대만이 기대하듯 밀어붙여오는 모든 통찰이 송태섭에게는 매번 유효타가 될까.
황당하리만큼 크게 뜨인 눈에 눈물이 고인 것도 모르고 송태섭은 얼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정대만이 가만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가, 외롭다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새 주머니에서 미끄러지듯 나온 손이 덜렁거리며 양 옆에 매달려 있었다. 머리 위에서 대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해보자.”
“…….”
“잘 될 수도 있잖아.”
“…….”
“여태까지 했던 것처럼 괜찮을 수도 있는 거잖아.”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났다.
“너 진짜 대답 안 할 거냐.”
“아, 해요. 연애하자고요!”
고개를 번쩍 든 순간이었다. 대만이 고개를 숙여 태섭에게 입을 맞추었다. 뜨겁고 떨리는 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의 긴장과 두려움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시야가 아득히 멀어지면서 심장이 고막을 뚫고 튀어나올 것처럼 미쳐 날뛰었다.
그런데 대만이 입을 맞춘 곳은 태섭의 입술이 아니라 인중에 가까운 뺨 어드메였다. 실패한 입맞춤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머쓱해하며 떨어진 그가 고장 난 로봇처럼 굳어 있는 태섭의 얼굴을 보곤 민망한 듯 시선을 흘렸다.
“음.”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어느새 송태섭은 대만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순식간에 자기 눈높이까지 끌어내리자 당황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너 뭐 하는….” 그리고 올바른 자리에 들어맞는 마지막 퍼즐 한 조각처럼 두 입술이 포개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입술을 맞댄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정답을 찾아내고 그것을 만끽하는 시간이 세상의 법칙과 동떨어진 장소에서 조용히 은빛으로 흘러갔다. 어느새 뒤로 불편하게 꺾여 있던 대만의 허리에서 힘이 빠지고 엉거주춤 들린 손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떨어져 나와 헉헉대며 숨을 터뜨렸다.
태섭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갈게요.”
“어어. 그래….”
대만이 얼떨떨한 얼굴로 태섭을 배웅했다. 송태섭은 몇 번 싱겁게 손을 흔들고는 곧바로 뒤돌았다. 돌아보지 않고 평소같이 걷는 뒷모습이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느긋할 수가 없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태섭은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의 융단이 밑창을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이런 미친. 미친, 미친, 미친, 미친, 미친!’
정대만은 송태섭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응시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달음박질하는 소리가 온 동네를 쩌렁쩌렁 울렸다. 그 소리에 서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느새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는 손등으로 웃음을 누르면서 뒤돌아 섰다. 주차장까지 걷는 동안 몸이 날아갈 듯했다. 대만은 자신의 흥분을 즐기면서 알 수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다 말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태섭의 아파트 옆에 딸려 있는 작은 야외 코트장이었다. 벤치 밑에 낡고 더러운 농구공 하나가 박혀 있었다.
송태섭은 쏜살같이 내달려 순식간에 아파트 공동현관 앞에 도착했다. 단숨에 계단을 뛰어 올라가 현관문을 쾅하고 닫았다. 차갑고 육중한 철문에 등을 기대고는 있었지만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다. 손을 떨고 있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온몸이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바지를 내려다본 태섭이 자신의 신체적 흥분의 증거를 마주하곤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르륵 주저앉았다. 주머니에 이물감이 있어 꺼내보니 그놈의 편지였다.
‘무슨 사춘기 온 고삐리도 아니고….’
태섭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대만은 낡아빠진 농구공을 붙잡았다. 코트 안으로 들어와 3점 라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자세를 가다듬는 동안 공 안에 물이 차서 조금 출렁대는 무게감이 전해졌다. 잠시 후 그는 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림이 더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았다. 그는 공을 던졌다.
다음 날 정대만은 신칸센을 타고 센다이 시로 돌아갔다.
22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세계멸망의 날은 1999년 7월 24일 토요일 5시로, 당일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다. 시민 일부가 휴거의 날을 맞아 출근을 거부하고 가까운 등산로에 모였다. 그들은 최후의 날을 함께하는 동지로서 인사를 나누고 삶에서 저지른 실수들을 고백했다. 오사카에서 근무하는 한 공무원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남기기 위해 메일을 송신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해당 구에 설치돼 있는 모든 컴퓨터에 전체 메일을 송신했다.
사이타마현의 미나노마치에서 살고 있는 한 남자는 팬티 바람으로 달려 나와 하얀 옷가지를 불태우면서 고함을 질렀다. 그는 “이제 다 끝이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라고 외쳤다. 예언의 시간인 5시가 지났을 때도 사람들은 쉽사리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어쩌면 과거의 예언가가 약간의 오차를 두고 미래를 오인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닐까? 사백 년도 전에 죽은 사람이니까 그 정도 오차 정도는 감안하고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늦은 밤이 되자 사람들은 슬슬 모든 일을 웃어 넘기기로 결심했다. 마지막까지 멸망이 도래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이들은 몇 달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처분하고 신의 최후통첩을 기다려 온 사이비 종교 단체의 신자들이었다. 심판의 순간이 도통 도착할 기미가 없자 그들은 사건을 몸소 앞당겨 보려는 것처럼 고속도로로 차를 끌고 나와서 피켓을 들고 드러누웠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걸 부정하기 위해 거기에 드러누운 것이었다.
정대만이 도쿄역에서부터 차를 돌려 돌아가고 있을 무렵 메이 고속도로 진입로를 막아선 이 인간 바리케이드는 이미 차량 몇 대를 멈춰 세운 참이었다. 그런가 하면 라디오 방송국은 최후의 날에 걸맞은 희망적인 노래를 선곡했고, 5년 만에 분실된 편지가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밤중에 송태섭과 정대만은 교제를 결심했다. 두 사람 다 까맣게 몰랐지만 모든 일이 벌어진 그 때에 멸망의 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나쁜 일들은 끔찍하게 부풀려지고 상상력을 키우다 맥없이 모습을 감추었고 호들갑을 떨며 굉장한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렸던 시민들은 실망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새로운 멸망설이 도래했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꽤 신빙성이 있었다. 컴퓨터 문제 때문에 전 인류가 위험에 처할 거라는 전망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전문가들까지 가세해 이 그럴싸한 음모론을 키웠다. 세계의 컴퓨터 공학자들이 들고일어나 지금껏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컴퓨터의 시스템에 실은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는데 그 오류가 이제는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것은 바로 과거와 미래를 구분할 수 없게 설계된 컴퓨터의 기억 장치로부터 발생하는 밀레니엄 버그였다.
“알고 보니 컴퓨터가 1900년이랑 2000년을 구분 못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거예요.”
수종이 말했다.
“메모리 장치를 만드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연도를 끝에 두 자리만 기억하도록 만들었다는 거예요. 모든 컴퓨터가요. 그러면 용량 문제가 해결돼서 컴퓨터도 더 빨라지고 좋았다나? 그런데 이제 곧 2000년이잖아요. 제대로 된 연도를 인식 못 한 컴퓨터 시스템이 뒤죽박죽 연도를 자동 설정한대요. 큰일 난 거죠.”
수종은 NHK와 주간 문춘마저 이 문제를 언급했다고 했다. 1월 1일이 되는 순간 전 세계 컴퓨터들이 모조리 심각한 오류를 일으키는 바람에 각종 금융기관 전산망이 마비되고 전철들이 운행을 중지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세상은 한순간 난장판이 되고 말 것이다. 기자들과 아나운서들이 전문가들의 부정적인 전망에 따라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투로 새천년에 닥쳐올 비보를 전하고 있는 중이라고 수종은 설명했다. 이번에야말로 세상은 조금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멸망할지 몰랐다.
“그래서 넌 믿어?”
대만이 묻자 수종이 멀뚱멀뚱 대답했다.
“아뇨.”
“야, 넌 할 짓이 없냐? 농구 선수가 뭘 그렇게 잡지며 TV 프로그램을 다 챙겨 봐.”
“재밌잖아요.”
그로부터 한 달 남짓이 흐른 9월 초, 정대만은 여느 때처럼 팀원들과 함께 해양 센터에 모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실업단 농구 선발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탓에 훈련 메뉴가 갈수록 고되고 엄격해지고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센터를 나서면 팀원들은 따로 약속을 잡을 생각도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정대만의 야투율에는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었다. 때로는 조금 나아진 것도 같다가도 때로는 원점 같았다. 리그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그가 늘 그렇듯 한 사람분의 몫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대만은 자신이 잘 해낼 거라 믿기로 했다.
종종 송태섭과 연락을 했다. 센다이 시로 돌아간 당일에 그는 곧바로 송태섭에게 전화를 주었다. 그러고는 확인하듯이 물었다.
“나 전화 계속해도 되는 거지?”
태섭은 무뚝뚝하게 딱 잘라 말했다.
“안 되는데요.”
“오. 그러면 곤란한데.”
그런 다음 두 사람은 실실 웃어댔다.
송태섭은 방을 계약했다고 했다. 집에서 전철로 이십 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맨션이었다. 엄마와 아라가 걱정되어서 그렇게까지 멀리 갈 수는 없었다고 태섭은 말했다. 이사는 내년까지 천천히 준비할 계획이었지만 아마 그것보다 일찍 앞당겨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대만은 칠칠맞지 못하게 빼먹는 이삿짐이 없도록 주변을 잘 살피는 게 좋을 거라고 뻔뻔스러운 충고를 했다.
“저기요, 전 누구처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안 보낸 그런 거 없거든요.”
태섭이 항의했다.
“말 나온 김에 편지 말인데. 순 자기 자랑뿐이던데요?”
“그거 읽고 무슨 생각했어.”
대만이 은근 기대하는 투로 물었다.
“와, 정말로….”
“정말로?”
“꼴값도 이런 꼴값이.”
“넌 내려가면 죽었다.”
리그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을 무렵부터는 눈코뜰 새 없이 바빠져서 전화를 잘 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전 일본 실업단 농구 선발 대회가 시작되었다. 센다이 팀은 순조롭게 예선을 통과했다. 대진표상 도쿄 OSG와는 직접 맞붙을 일이 없어 설욕전을 치르지 못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예선 경기에 서태웅이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고 했다. 서태웅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도쿄 OSG는 센다이 팀과 마찬가지로 손쉽게 예선을 통과해서 10월에 있을 JBL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팀은 호적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한 차례 좋은 성적을 거둔 리그가 끝나고 모두 약간씩 긴장이 풀린 시기였다. 슬슬 날씨가 쌀쌀맞아져 카디건을 챙겨야겠다는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다. 신덴히가시 해양 센터로 손님이 찾아왔다. 상상도 못 한 손님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센다이 팀에 의도치 않게 분란의 씨앗을 던져주고 떠난 영구 결번의 주인이었다. 8번 양현우였다.
미리 연락을 준 것이 아니었는지 그를 뒤늦게 알아본 팀원 대다수가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의외로 양현우를 가장 반갑게 맞이한 것은 강성준과 대립하며 대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던, 팀에서 가장 키가 큰 산왕공고 출신의 센터였다. 오히려 그를 가장 반가워할 것 같았던 강성준은 모두가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하러 가는 동안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양현우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두리번거리자 마지못해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
양현우는 정대만도 무척 반가워했다.
“그로부터 일 년 만이네요. 진짜 저희 팀으로 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는 지난날에 대한 유감이나 회한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대만이 자신의 자리에 들어온 것을 무척 흥미롭게 생각했다.
“저희 팀 어때요? 잘 노는 것 같다가도 보기보다 안 친해서 서먹서먹한 녀석들이에요.”
“그렇더라고요.”
정대만이 웃으며 대답하자 팀원들이 그렇지 않다고 우겨댔다.
“형이랑 대만 씨는 완전 다르거든요.”
“대만 씨는 틈만 나면 다 같이 밥 먹자고 그래요.”
“형 나가고 분위기 장난 아니게 달라졌거든요. 저희 얼마 전엔 단체로 같이 술도 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너무 잘 지내는 거 아냐?”
양현우가 낄낄대며 말했다. 그때 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코트 위에 서 있던 성준이 드리블을 시작한 것이다. 잠시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양현우가 대만에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 끝나고 제가 한 게임 던져봐도 되겠습니까?”
대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요.”
휴식 시간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곽 감독조차 양현우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친근하게 어깨를 툭툭 치더니 서슴없이 근황을 물었다. 양현우가 훈련이 끝나면 잠깐 체육관에서 한 게임 던지고 싶다고 하자 감독은 난처해 하기는커녕 흔쾌히 허락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직접 관리소에 연락을 넣어서 체육관 이용 시간을 삼십 분 정도 연장해 주겠다고까지 했다.
“예전 생각나네요.”
두 사람을 지켜보던 팀원 하나가 의외란 투로 말했다.
훈련은 얼마 안 가 끝이 났다. 정대만은 벤치에 앉아 다리를 길게 뻗으며 숨을 돌렸다. 그동안 팀원들은 코트 중앙에 모여서 두 팀으로 인원을 나누었다. 양현우는 A팀에 배정되었다. 그는 사복 위에 오렌지색 연습용 유니폼을 걸치고는 공을 퉁기면서 백보드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가볍게 레이업 슛을 성공시켰다. 성준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A팀이었다.
‘농구 그만둔 거 아닌가? 폼 안 죽었네.’
대만이 생각했다.
잠시 후 약식 경기가 시작되었다. 센터 체육관이 일곱 시에는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에 전반전과 후반전을 각각 십분 씩 진행하기로 했다. 팀원들은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했고 약식 경기란 생각 때문에 훈련 때보다 조금 힘을 뺀 채로 경기에 임했다.
경쾌하고 빠른 템포의 경기였다. 의외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어 대만은 어느 순간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두 팀은 고만고만하게 싸웠다. 어느 한쪽이 질 것 같지 않은 비등비등한 분위기에서 느닷없이 양현우가 틈새를 치고 나왔다. 그와 동시에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운 몸짓으로 강성준이 골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텅 빈 골대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양현우는 3점 라인의 좌측 방향에 서 있었다.
다음 순간 성준이 무척이나 재빠른 패스로 그의 손에 공을 배달시켰다. 양현우가 뛰어올랐고 잠시 후 공이 시원한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를 통과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갖춰온 오팬스 패턴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었다. 비로소 강성준의 고치기 힘든 습관이 어디서 왔는지 대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내 협조를 부탁했으나 도통 들어 먹히지 않던, 때로는 고의 같다가도 때로는 실수 같이 느껴져 그를 헷갈리게 했던 성준의 습관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었다. 모든 퍼즐이 짜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군.’
약식 경기는 B팀의 승리였다. 두 사람의 연계를 보고 흥분한 B팀의 권수종이 미친개처럼 날뛰면서 골대를 박살 낼 기세로 연거푸 덩크를 때려 박았기 때문이다. 팀원들은 살짝 떨떠름해하며 권수종만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이번 해에는 우승하겠네.”
살짝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짓긴 했지만 양현우는 덕분에 즐거운 게임을 했다고 수종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도 수종은 살짝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당연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체육관을 나서면서 단체로 저녁을 먹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얼마 안 가 센다이 팀은 근처에 있는 샤브샤브 집으로 양현우를 끌고 갔다. 대만도 동행했지만 보나 마나 예전 이야기가 나올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에 자리에 썩 오래 앉아 있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결국 테이블에서는 대만이 끼어들기 어렵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썩 흥미를 끌지 못하는 주제가 나왔다. 정대만은 고기를 몇 점 집어먹다 말고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를 나서는데 수종이 따라 나왔다. 처음에는 배웅을 해주려나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수종 성격에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수종은 속으로 귀가를 벼르고 있다가 대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냉큼 따라 나온 것이었다.
“근데 형 저번부터 왜 그렇게 조용하게 앉아 있어요?”
수종이 물었다.
“재미가 없어서.”
“형이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예요. 어울리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말도 좀 걸고 그래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에 대만은 어이가 없다는 듯 수종을 쳐다봤다.
‘역시 이 자식이랑은 친해질 수가 없어.’
“형 리그 통합되면 내년에 계약 연장할 거예요?”
“아직 생각 안 해봤다. 그보다 팀이 남아있기는 한대?”
“저야 모르죠.”
“왜 물어본 거야.”
‘그러고 보니 송태섭 걘 뭐 하는 거지?’
“아무튼 저 가요.”
“들어가라.”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송태섭에 대한 생각은 계속되었다. 얘 농구 계속하는 거 맞지? 생각해 보니 가장 중요한 문제였는데 다른 고백에 그만 어영부영 묻히고 말았다. 태섭으로부터 농구를 계속하겠다는 확답을 받은 적이 없었다.
‘낌새 보니 안 할 것 같지는 않던데.’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할 것 같기는 했다. 직접 물어보고 확답을 받을 때까지 독촉할까 싶었지만 이미 그 문제로 주먹다짐까지 벌인 마당에 이 이상 들쑤시는 것도 조금 그런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그날 너무 아름답게 결합되었다. 정대만은 이 관계의 설레는 초입을 아직 만끽하고 싶었다. 하필 세계 종말의 날에 사귀게 되었다는 예상치 못한 극적인 설정조차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맨션으로 귀가하자마자 들뜬 마음에 세상 일이 절로 끌려오듯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였다.
“주말에 혹시 내려올 수 있니?”
대만은 리그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사실은 가나가와로 내려가면 태섭을 볼 수 있으리라는 목적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 뒤로 태섭과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JBL 개막 전까지 더는 도쿄로 출장을 떠날 일도 없으니 이 기회에 예상보다 일찍 태섭을 만나고 돌아오자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적인 스케줄을 확인한 뒤 정대만은 곧장 태섭에게 전화를 걸어 주말 일정을 통보했다.
“잘됐네요.”
태섭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뭐야, 그날 약속 있어?”
“아뇨.”
송태섭이 덧붙였다.
“통째로 비워둘게요.”
남은 저녁 시간 동안 대만은 바닥에 주저앉아 이케아에서 산 조립식 옷장과 씨름을 벌였다. 한참 동안 나사를 조였다 풀고 기둥을 이리저리 돌리고 붙여보다가 한 시간 반 만에 문 한 짝이 너덜거리는 옷장을 완성했다. 그는 엉성하기 짝이 없는 그 옷장을 남은 방에 집어넣었다. 안이 무너질 것 같아서 옷은 하나밖에 걸지 못했다.
23
송태섭은 독립 사실을 알렸다. 저녁을 먹은 다음 엄마와 아라를 식탁에 앉혀두고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그만 맨션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가장 걱정했던 엄마는 예상외로 무척 순순한 반응이었다. 서운해하거나 울적해하기는커녕 맨션이 어느 역에 가깝게 위치해 있는지, 방을 계약하기 전에 물이 새는 곳은 없는지, 난방은 제대로 되는지, 창틀이 낡거나 휘어져서 창문을 닫을 때 틈새로 바람이 새지는 않는지, 화장실 배수구에서 이상한 냄새가 올라오지는 않는지를 태섭이 제대로 점검했나 궁금해했다.
주변에 충분한 가로등이 있는지, 밤에 지나치게 어둡지는 않은지, 멀지 않은 곳에 파출소가 있는지도 궁금해했다. 혼자 살게 되면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정말로 괜찮겠냐고 묻다가 “내 정신 좀 봐.”하고 민망한 듯 웃었다.
“이미 혼자서 살아봤는데. 내가 너무 말이 많았지.”
“아니에요.”
반면 송아라는 무슨 연유에선지 굉장히 못마땅해했다. 그 감정을 감추려 들지도 않고 오히려 직접적으로 표출하며 태섭에게는 물론이고 엄마에게도 자신의 기분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자신이 느끼는 바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송아라의 심기불편한 태도는 태섭의 귀국 이후로 줄곧 이어져 온 것이었지만 이번 일로 감정이 완전히 폭발해 버린 것 같았다. 귀가하는 시간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늦어졌고 집안에서 태섭을 마주치는 일이라도 있을라치면 즉시 얼굴을 구기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쩌다 저녁 시간보다 일찍 들어오는 날에는 점퍼에서 술 냄새가 풀풀 났다. 엄마가 야근으로 바쁘지 않았다면 이 꼴을 다 보게 되었을 텐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한동안 제 여동생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내버려 두던 송태섭도 마침내 이런 송아라를 도무지 참아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0월 초의 어느 날, 정대만으로부터 주말에 가나가와로 내려가겠다는 전화가 걸려온 그 주에 송태섭은 송아라를 불러 세워놓고 최근의 일을 따져 묻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오빠로서의 권위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송아라가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눈치를 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사태를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저녁을 먹은 뒤 태섭은 평소처럼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려는 송아라를 불러 세우려 했다. 하지만 송아라는 태섭을 완전히 무시했다. 아라가 방문을 닫고 문을 잠그려고 하자 그때까지 자리에 서 있던 태섭이 튀어 올랐다. 포인트 가드로서의 폭발적인 힘과 스피드를 발휘해 쏜살같이 앞으로 날아간 그가 한 손으로 방문을 강하게 붙잡았다.
아라는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항의하며 발버둥 쳤지만 송태섭이 마음먹고 힘을 쓰기 시작하자 그에게 당해내지 못했다. 송아라는 결국 방문 닫는 것을 포기했다. 복도로 나온 아라는 너무나 분하고 서러워 보였다. 특히 태섭이 한 손으로만 방문을 붙잡은 데에 반해 자신은 두 손으로 온 힘을 다해 문을 닫으려고 애써야 했고 심지어는 그렇게 했는데도 이길 수 없었다는 사실에 분을 참지 못했다. 송아라는 오빠가 남자라서 정말 싫다고 벌컥 화를 냈다.
“손 다쳤잖아. 오빠 때문에 방문 잡으려다 미끄러져서 가시 박혔어. 아파 죽겠어. 어떻게 할 거야?”
처음에 송태섭은 아라의 말을 믿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아라는 정말로 손을 다쳤다. 보란 듯이 펼친 손바닥의 손금 부근에 큼지막한 가시 같은 것이 붙었다 떨어져 나온 흔적이 있었고 그 위로 가로로 길게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송태섭은 아라에게 화를 내거나 따져 물을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송아라는 쌀쌀맞은 투로 신경 쓰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상처를 책임지려는 태섭의 태도가 오히려 화를 돋운 것처럼 보였다. 송아라는 한동안 절절매는 태섭을 경멸스럽게 노려보다가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얼마 안 가 엄마가 퇴근했지만 방구석에 박혀서 뭘 하는 건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다음 날 태섭은 여동생의 방문 앞으로 쭈뼛쭈뼛 다가갔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다가 문밖에 서 있는 그의 존재를 눈치챈 건지 갑자기 소리가 뚝 멈췄다. 태섭은 헛기침을 하고는 방문을 두드렸다.
“야, 송아라.”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태섭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제는 미안하다. 다칠 줄 몰랐어.”
문 너머는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네가 요즘 술 마시고 늦게까지 다니는 게 솔직히 좀 보기 그랬어. 네가 그러고 다니는 거 엄마가 당장 몰라서 그렇지, 보시면 얼마나 걱정하시겠어. 안 그래? 나도 걱정되고.”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을 멈추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늦게까지 친구들하고 몰려다니지 말고, 이번 주말에 남자친구랑 유원지라도 놀러 가. 내가 용돈 보태줄게.”
“뭐라고?”
안에서 아라가 되물었다.
“오빠가 너 용돈 보태주겠다고.”
태섭이 말했다.
잠시 후 떨어져 나가다시피 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힌 송아라가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기세 치고 송아라는 굉장히 침착하고 차분한 얼굴이었다. 송태섭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필요 없어, 그까짓 것.”
아라가 말했다.
“뭐?”
“필요 없다고. 그딴 코 묻은 돈.”
태섭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 말 다 했어?”
“아니.”
그런 다음 송아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심호흡을 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아주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딴 식으로 구는 것 좀 그만해.”
“그딴 식?”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 좀 그만하라고.”
송아라가 어제오늘 있던 일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송태섭은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따져 물었다.
“내가 언제 멋대로 굴었는데?”
아라는 조소했다. 그렇게 대답할 줄 빤히 알고 있었다는 듯 자포자기하는 여동생의 태도에 태섭은 크게 마음이 상했다.
“늘 그랬잖아. 오빠는 나한테 관심이나 있어?”
“그럼 내가 방금 보인 건 관심이 아니고 참견이냐?”
“그래!”
송아라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한 적 있냐고!”
“미안해서 주려고 한 거였어.”
“그래, 나 화 풀려고 멋대로 주는 거잖아, 그 쌈짓돈도!”
“그렇게 말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냐? 기분 나쁘면 받지 말던가.”
태섭이 빈정거렸다.
“그래서 안 받는다고 했잖아!”
마침내 송아라는 폭발하고 말았다.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용암이 마침내 지층을 뚫고 산의 목구멍을 통해 모든 것을 박살 내려고 솟구쳐 오르는 것처럼 송아라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송아라는 시퍼렇게 뜬 눈으로 정말이지 태섭이 지겨워 죽겠다고 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고 했다. 오빠는 엄마에게 효자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엄마가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 매섭게 비난을 퍼부었다. 태섭이 자기 좋을 대로만 행동하고 허구한 날 농구만 하고 쌈박질이나 하고 다닌다고 소리를 질렀다.
얼마 안 가 송아라의 분노는 가족 전체로 확장되었다. 송아라는 엄마도 지겹다고 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랑 같이 있는 것을 가끔 참을 수가 없다고 했다. 아니, 송아라가 지겨운 건 이 좁아터진 집구석이었다. 집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큰 오빠의 액자를 닦고 태섭의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모습을 참아줄 수가 없다고 했다. 송태섭이 일본을 떠나 있던 지난 몇 년 동안 언제라도 그가 돌아올 것처럼 빈자리를 정돈하고 장소를 준비시키는 엄마의 성실하기보다 관성적인 행동이 집에 없는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자기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다 송아라는 큰 오빠가 밉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는 다 준섭이 만든 거라는 것이다. 자기는 아빠 같은 건 기억도 안 난다고 했다. 기억나는 건 큰 오빠뿐이고 그와 나눈 추억이 자기 안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이렇게 비난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자신도 슬픔을 나누었으니까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송아라는 송준섭이 그렇게까지 위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 아라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 ‘위대하다’라는 표현을 썼다. 아라는 자기가 아는 준섭은 오빠나 엄마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했다. 물론 자기도 큰 오빠가 그립기는 하지만 두 사람처럼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들면 화상을 입을 것 같이 굴지는 않는다고 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럴 만큼 관대하고 대단히 책임감 있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자신에게 송준섭은 그냥 멋지고 웃기고 가끔 이기적으로 구는 오빠였을 뿐이라고 했다. 남들처럼 평범한 그런 오빠 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계속 비디오를 돌려보지 않는가. 준섭의 책임감을, 강직함을, 농구를 되새기지 않는가. 매 해 돌아오는 생일날마다, 시간이 과거를 붙들어 두려고 할 때마다, 가족들끼리 웃고 떠들어야 할 명절과 기념일마다 송준섭에게 반복해서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고장 난 비디오 플레이어를 거기 그대로 둔 거라고 아라는 말했다. 엄마가 더는 치우거나 관여할 수 없도록 태섭의 방을 창고로 전락시켜 버린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연락도 없이 갑자기 돌아와서는 또 자기 멋대로 굴잖아.”
아라가 차가운 분노를 거침없이 드러냈다.
“내가 모를 줄 알아? 오빠도 집이 불편해서 나가는 거잖아. 오빠가 엄마한테 관심도 없는 동안 나는 옆에서 엄마가 무슨 생각하고 어떻게 사는지 다 지켜봤어. 오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자끼리 단둘이 한 집에서 살면 그렇게 돼. 싫어도 그렇게 되는 거야. 집을 나가겠다고? 오빠야 좋겠지. 어디 한 번 잘 살아보시지 그래. 그놈의 농구도 계속 재밌게 하고 혼자서 잘 먹고 잘 살아 봐. 나한테 다시는 연락하지도 마!”
태섭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송아라의 어깨너머에 못 박혀 있었다. 씩씩거리며 분노로 몸을 떨던 아라도 곧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엄마가 서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현관에서 신발을 벗지도 않고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잠시 후 송아라가 울분을 참지 못하는 앓는 소리를 내더니 방으로 쏜살같이 들어가 점퍼를 챙겼다. 그때까지 멍하니 서 있던 태섭은 아라가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구겨 신는 것을 보고는 얼이 빠져서 말했다.
“어디 가?”
일부러 동작을 거칠고 크게 하는 아라를 의식한 엄마가 뒤로 살짝 물러났다. 송아라는 그런 엄마를 한 번 노려본 다음, 문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있는 힘껏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쫓아 나가려던 태섭은 주춤대며 멈추어 섰다. 현관을 반쯤 막고 있는 엄마의 존재가 다시금 의식된 것이다. 엄마는 이제 태섭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엄마의 발이 눈에 들어왔다. 구두였다. 그의 어머니는 못 보던 살구색 스타킹에 신발장 안쪽에 감추어져 있던, 앞코에 솜씨 좋게 리본이 달린 그 연분홍색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송아라, 너 당장 안 돌아와?”
구두를 보며 태섭이 확신 없는 윽박을 내질렀다.
“야!”
본인 생각에도 참으로 보잘것없는 호통이었다. 준섭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