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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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삼 주 후 송태섭은 정대만의 출장 경기를 보기 위해 전철을 타고 미나토구 스포츠 센터로 향했다. 센터는 케이힌선을 타고 약 한 시간 정도 가면 나오는 다마치역에 있었는데, 여태껏 여러 경기를 보러 다닌 태섭도 그 근방은 처음이었다.
경기장에 들어선 태섭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곧 이곳이 정대만의 시합 비디오에 등장한 장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객석 아래에 난 노란색 문과 비상구의 위치가 영상 속 경기장과 똑같았다.
센다이 팀은 벌써 코트 위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갈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 나왔다. 상대 팀은 전반적으로 키가 컸는데, 특히 상대 팀 센터 하나가 멀리서도 눈에 확 띌 정도로 체격이 상당했다. 상대 선수들이 들어오자 센다이 팀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났다.
두 팀은 마주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태섭은 객석에 앉는 대신 기둥 옆에 서서 경기장을 훑어보았다. 대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릎 아대를 끌어올리며 코트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이 금방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정대만은 잠깐 고개를 들어 객석 쪽을 살피는 듯했지만 태섭을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대만은 곧 자세를 추스르고 코트 중앙으로 나왔다.
경기가 시작되자 태섭은 객석에 앉았다. 그는 두 팀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상대가 골밑이 강한 팀이라는 건 금방 알아보았다. 아까 눈에 들어왔던 센터가 코트 위에서도 굉장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거대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무시무시했다. 그가 미국에서 만났던 빅맨들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이번 경기에서 센다이 팀은 여러 차례 속공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아웃 넘버(*공격팀의 인원수가 수비팀의 인원수를 상회하는 수적 우위인 상태)가 발생해도 골밑을 지키는 상대팀 센터의 기세에 눌려 우왕좌왕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상대 팀의 수비 전환이 너무 빨라서 패턴이 막히게 되면 금방 턴 오버를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거리 슛이 중요하다. 골밑을 돌파할 수 없다면 공중을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슈팅 가드로서 정대만이 그걸 모를 리는 없을 듯했다. 빠른 연계로 레이업슛을 노리던 대만은 경기가 중반부에 접어들자 장거리 슛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처음 공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태섭은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공은 탈선한 열차처럼 위태롭게 솟구쳤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골대가 거칠게 흔들렸다. 깔끔하진 않지만 첫 번째 슛은 성공이었다.
양치기 개처럼 헐레벌떡 달려온 선수 하나가 대만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대만은 손뼉을 마주치는 동안에도 골대를 쳐다보고 있다가, 공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경기의 흐름은 느릿느릿 이어졌다. 속공이 막히자 센다이 팀은 전술을 바꾸었다. 정대만은 빈 공간이 없도록 코트를 넓게 쓰면서 자리를 채우다가 오팬스 패턴을 쓸 기회가 오면 귀신 같이 움직였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태섭의 몸이 점점 앞으로 기울었다. 턱을 괴면서 코트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이 형 못 던지지 않는데?’
실업단 농구 선발 대회를 앞두고 진행되는 출장 경기였지만 두 팀 모두 어느 정도 힘을 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의례적인 연습 경기인 데다 본격적인 시즌 전에 부상을 당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분위기 속에서 정대만은 나쁘지 않게 던지고 있었다. 슬럼프라는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기복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슬럼프였구나….’
태섭은 자세를 바로 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못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텅, 소리와 함께 공이 골대를 맞고 퉁겨져 나왔다.
“리바운드, 리바운드!”
선수들이 일제히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기는 상대 팀의 승리였다. 송태섭은 비상구로 이어지는 복도로 내려와 정대만을 기다렸다. 얼마 안 가 대만이 타올로 땀을 훔치며 나타났다. 팀원들과 함께 우르르 나올 줄 알았는데 웬일로 그는 혼자였다. 벽에 기대어 있던 태섭이 몸을 일으켰다.
정대만은 곧바로 태섭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어두컴컴한 복도에 서 있는 인영을 무심히 지나치려다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동안 그는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침묵 속에서 자판기가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저 맞아요. 송태섭.”
“알아, 인마.”
정대만이 툴툴댔다.
“전에도 이런 적 있던 것 같아서 쳐다본 거야.”
대만은 금방 나오겠다면서 태섭에게 동전을 쥐어주었다.
“음료수라도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어.”
송태섭은 포카리 스웨트를 뽑아 들고 의자에 앉았다. 뒤이어 센다이 팀이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서로 몇 마디 주고받기는 했지만 다들 썩 친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태섭을 지나쳐 라커룸으로 향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선수는 정대만처럼 혼자였다. 태섭은 그를 알아보았다. 첫 골이 터지자 양치기 개처럼 쏜살같이 달려 정대만과 하이파이브를 했던 그 남자였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벤치에 앉아 있는 송태섭을 무심히 지나치는 대신, 그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뭐야?’
올려다보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관계자예요?”
“예?”
남자가 멀뚱멀뚱 태섭을 쳐다보았다.
“여기 관계자만 들어올 수 있는데 관계자냐고요.”
당황한 태섭이 눈썹을 추켜 올리며 표정을 굳히고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후배야.”
더플백을 멘 정대만이 다가왔다. 그는 태섭의 손에 들린 포카리 스웨트를 낚아챘다가 얼마 안 가 도로 돌려주었다.
“안 딴 거잖아. 여태껏 안 마시고 뭐 했냐?”
그가 투덜거렸다.
“무슨 상관이에요? 마시든 말든.”
“봤지? 버르장머리.”
대만이 보란 듯이 태섭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 후배 중에서 제일 버릇없는 놈이야, 쟤가.”
“왜 시비예요?”
태섭이 작게 볼멘소리를 했다.
남자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난 또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네. 이름은 모르겠는 후배님, 죄송합니다.”
“아니, 뭐….”
“수종아, 나 얘랑 얘기 좀 하다 들어올 테니까 감독님한테 말 좀 전해줘.”
“그러세요.”
남자가 대답했다.
수종이라고 하는 선수는 얼마 안 가 라커룸으로 사라졌다. 정대만은 태섭을 끌고 로비로 나왔다. 밝은 곳으로 나오자 대만의 얼굴이 잘 보였다. 씻고 나온 건지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태섭이 물었다.
“오늘 저 안 온 줄 알았어요?”
“온 건 알았지. 객석에 앉아있는 거 다 보였다.”
“그런 것치곤 아까 못 알아보던데요.”
“못 알아본 게 아니라….”
대만은 흠 하고 말을 끌었다. 뜬금없이 대학생 때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말이야. 내가 2학년일 때.”
대만이 앞을 보며 말했다.
“4월 토너먼트 때 네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적 있었잖아.”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멀뚱히 보고만 있자 그가 돌아보았다.
“너 그때 나 보러 온 거 맞지?”
“뭐야.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요?”
“아니, 오늘은 나 보러 온 거잖아.”
“그런데요.”
“그러니까 전에도…….”
그렇게 말하는 대만도 자신이 무슨 소릴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뭔가 설명하려던 그는 곧 어물거리며 이야기를 관두었다.
“됐다.”
“…….”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센터 앞에는 작은 정원이 딸려 있었다. 미나토구 스포츠 센터라고 큼지막하게 새겨진 비석을 지나치자 곧장 병원이 나타났다. 정대만은 여기 건물 뒤편으로 나가면 강변이 나온다고 했다.
“걸을 거지?”
태섭은 어깨를 으쓱였다.
“예, 뭐.”
두 사람은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흐린 날씨였다. 군데군데 먹구름이 껴 있었고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강변에 들어서자 희미하게 물 비린내가 올라왔다. 잘 정돈된 자갈색 벽돌길이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축축했다.
두 사람은 강변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전 경기에 대한 간단한 피드백이 오고 갔다. 정대만은 송아라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은 잘 지내고 있는 거냐고 했다. 잠시 고민하던 태섭은 송아라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대답했다.
“뭐야. 엄청 잘 지내고 있네.”
“그렇죠.”
건너편 사거리에서 차가 빵빵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밌겠네. 하루종일 전화하고 그러냐? 여동생 있는 집은 전화 때문에 싸운다던데.”
“저희 집은 안 그래요.”
그러고 보니 송아라가 누군가와 전화하는 걸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송태섭은 정대만과 한창 연락을 주고받던 시절 그 문제로 송아라와 몇 번 다툰 적이 있었다.
“집 보러 다니느라 바빴다며. 이젠 괜찮냐?”
“아, 네. 괜찮은 데를 찾아서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에요, 지금.”
“그럼 너 아주 들어오는 거네.”
태섭은 입 안에서 말을 한 번 굴리다 뱉었다.
“그렇죠.”
“농구는 언제부터 다시 하려고?”
말문이 막혔다. 태섭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대만이 멀뚱히 쳐다보았다.
“너 진짜 아주 관두려는 거 아니지?”
삐딱한 표정을 짓던 태섭은 얼마 안 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치수는 관둔다더라.”
“네?”
태섭은 깜짝 놀랐다.
“치수 선배가 왜요?”
“프로 리그가 생긴다는데. 진짠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되면 기존 리그나 팀 같은 거 싹 재정비 들어간단다. 아마 걔가 관두는 것도 그거 때문일걸.”
대만은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는 기존의 실업 팀이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다 말고 상황이 웃기지 않냐고 물었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 농구를 관둘지 말지 고민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너 왜 쉬는지 물어봐도 되냐.”
무언가 말하려던 태섭은 입을 다물었다. 귀국한 이래로 한 번도 똑바로 이야기해 본 적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농구에 대한 지금의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말로 만들어내면 간단한 문제처럼 들릴 것이었다.
약해 보이기는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건 털어놓은 다음 자신이 미처 설명해내지 못한 것들에 대해 느끼게 될 감정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까? 가슴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송태섭은 고민했다. 텁텁한 바람이 불어오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슬럼프예요.”
대만은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네가?”
“반응이 왜 그래요?”
“아니…. 왜, 잘 안 던져지냐?”
“그냥 전반적으로 다 별로예요.”
대만은 얼굴을 찌푸렸다.
“상상이 안 되네.”
그는 태섭이 미국에서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들려오는 소식이 거의 없긴 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는가. 정대만은 정우성 특집 기사 이야기를 꺼냈다. 정우성이 찍힌 단독 사진 구석에 희끄무레하게 등장한 태섭의 모습을 그는 단박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대만은 그때 느꼈던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했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듣고 있던 태섭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때는 네가 나보다 잘나가서 좀 질투 났다.”
“… 잘 나가는 줄은 어떻게 알아요? 사진 그거 얼마나 나왔다고.”
“어쨌든 그 미국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는 거잖아.”
대만이 말했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말이야. 부럽거든.”
세찬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태섭은 묵묵히 바닥을 쳐다보았다. 실토하듯 말했다.
“재밌긴 재밌었어요.”
두 사람은 강변을 쭉 돌아 시바우라 공원에 들어섰다. 길목마다 하얀 벤치와 엔틱한 다갈색 가로등이 세워져 있었다. 흐린 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건너편 길목에서 하늘색 간호사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대만은 채치수에 대한 근황을 마저 들려주었다. 그는 채치수가 요식업을 하다 쫄딱 망한 대학 동기의 폐업 준비를 돕고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요즘은 다들 그런 모양이라고 했다. 사업이 망하거나, 해고되거나, 다니던 회사가 도산하거나, 주식 투자에 실패하거나 한다는 것이다. 센다이 팀이나 다른 실업 팀도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느새 대만은 투덜대고 있었다.
“사는 게 갈수록 재미없어지는 것 같다. 뭐 이리 신경 쓸 게 많냐? 난 그냥 농구만 하고 싶은데.”
송태섭은 그 감정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형은 잘하잖아요.”
태섭이 말했다.
“그럼 뭐 하냐. 못 던지는데.”
힘 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대만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정작 말을 던진 당사자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보아하니 방금 들은 말이 그를 흡족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확인한 순간, 태섭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못 볼 걸 봤다는 것처럼 황급히 시선을 떨어뜨린 그는 뒤늦게 자신의 행동에 당황했다. 순간 대만이 귀엽다는 생각이 스쳐갔는데 그 생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였다. 이제 송태섭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어이없어하기 시작했다.
‘가끔 보면 저 선배가 진짜 웃긴 인간이긴 해.’
내심 기막혀하며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공원을 반 바퀴쯤 돌다가 센터 앞으로 돌아왔다. 대만은 본가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올라갈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는 늦은 밤에 도쿄역까지 차를 몰고 가서 야간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고속버스가 신칸센보다 훨씬 비싸더라. 넌 어디 멀리 갈 일 있으면 꼭 신칸센 타라.”
“신칸센도 비싼데요. 그냥 일반 열차 탈게요.”
퉁명스럽게 대답했는데도 뭐가 즐거운지 대만이 히죽 웃었다.
“같이 저녁 먹을래?”
금요일이라 그런지 그는 시간이 넉넉해 보였다.
“오후에 약속 있어서 안 돼요.”
“뭐야. 이제 괜찮다며?”
“그런 게 있어요.”
대만은 끙 소리를 냈다.
“알겠다. 들어가라.”
“예, 형도요.”
정대만과 헤어진 뒤 태섭은 공원을 가로질러 다마치 역사로 돌아갔다.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고 이랬다 저랬다 태도를 바꾸는 대만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플랫폼으로 내려오면서 송태섭은 아까 대만이 던진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냥 농구를 하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신경 쓸 게 많을까.’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말로 만들어서 이야기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정대만은 그런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냈다. 전부터 그랬다. 대만은 느끼고 있는 바를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직성에 풀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따금 송태섭은 정대만의 그런 점이 무척 놀라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기 감정에 솔직한 나머지 대만은 정직하게 행동하다가도 때로는 굉장히 제멋대로 굴었고, 태섭은 그의 그런 일면을 가장 가까이서 겪어 본 사람이었다. 그가 처한 상황이 교묘하게 태섭의 상황과 맞물리면 서로 의도치 않았을지 몰라도 상황은 매번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럴 때면 태섭은 여태껏 별로 궁금해하지 않고 주의 깊게 들여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문제들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만약 정대만이 먼저 슬럼프라고 고백하지 않았다면 태섭은 자신의 슬럼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태섭을 솔직하도록 부추기는 면이 있었고, 그 때문에 태섭은 종종 그에게 반발심을 느끼거나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유학 생활 도중 우울하지 않았냐고 대만이 넌지시 물어보았을 때도 그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먼저 해버린 것도 그래서였다.
송태섭은 정대만이 불편했다. 그와 다시 연락하고 지내는 일이 반갑고 즐거운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에선 점점 그런 기분이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태섭은 그가 던진 말에 속절없이 휩쓸리는 중이었다. 정대만이 손쉽게 표현한 그 자신의 아픔은 태섭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픔을 일깨웠다. 농구를 하고 싶을 뿐인데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세상 일에 휩쓸리며 견뎌왔던 지난날의 깊은 슬픔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어느새 태섭은 정말로 농구를 관둘 것인지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 무슨 소용일까? 당장 지난주에 그는 꼼꼼하게 방을 둘러보고 집구석구석을 점검한 다음 부동산을 찾아가 계약금을 치르고 인감도장까지 찍고 돌아왔다. 송태섭은 이미 자신의 앞날을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츠지도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초조한 기분을 느끼면서 태섭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이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모든 게 명확하게 느껴지다가도 아무것도 종잡을 수 없는 흐릿한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기분은 전철에서 내려 커피숍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줄곧 이어졌다. 태섭은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주먹을 쥐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결국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턱끝까지 숨이 차오를 때만큼 달렸다.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들고 숨이 뜨거워지자 머릿속에 달라붙은 무거운 생각들이 사방으로 부딪치다 못해 부스러지고 거스러미가 되어 깊은 저 어딘가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태섭은 숨을 몰아쉬며 커피숍 앞에 멈추어 섰다.
가게 입구에는 후우링이 달려 있었다. 문을 열자 후우링이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태섭은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이 든 남자가 오늘 만나기로 되어있던 감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정장 차림으로 앉아있는 사람이 그 밖에 없었던 것이다.
테이블로 다가가자 태섭을 알아본 남자가 정중히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짐작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못해도 쉰 살은 넘었을 것 같았다.
감독이 부드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송태섭 군.”
“아, 예. 안녕하세요.”
감독은 살짝 긴장한 것 같았다. 태섭은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었다. 명함에 찍힌 학교 이름이나 주소가 낯설지 않았다. 그는 오키나와에서 온 사람이었다.
“혹시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태섭이 의문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들으니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한 것도 같았다.
불현듯 태섭은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깊은 곳에 묻혀있던 기억이 끌려 나오면서 낡은 체육관에서 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눈앞의 감독은 마흔 살 남짓의 젊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송태섭의 미니 바스 시절 종종 마주쳤던 타교의 농구부 감독이었다. 오랜만에 외출한 엄마와 아라가 관전 중인 경기에서 태섭과 죽은 형을 비교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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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오키나와에서 농구부 감독을 계속해 왔다고 했다. 초등학교에서 십 년 정도 근무하다가 요즘은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코메다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키타 트레이더스 감독이 지나가듯 언급한 그 사람이기도 했다.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며 NCAA 중계를 챙겨보고, 흥분에 차서 태섭의 경기 녹화 비디오를 보내주었다는 친구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감독에게 태섭을 추천해 준 것도 그였다.
그는 태섭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하려고 온 건 아니라고 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는 말을 꽤 조심하려고 했는데, 과거의 일 때문이라기보다는 태섭이 쌓아온 그동안의 성취를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감독은 태섭을 연예인처럼 대했다. 실제로 오키나와 중학교에서 태섭은 꽤 인기가 많다고 했다.
“애들이 태섭 군 이야길 자주 합니다. 경기 비디오 좀 빌려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예에….”
달리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리자 감독이 민망한 듯 웃었다.
“이야, 제가 송태섭 군을 만난다는 걸 애들이 알았으면 사인이라도 받아오라고 성화였을 텐데.”
“그렇게 인기가 많나요, 제가?”
실감이 안 났다. 오키나와는 오랜 집 같은 곳이었지만 고등학생 때 이후로는 찾아간 적이 없어서 낡은 사진처럼 장면 장면으로만 남아 있었다. 길거리를 걷고 있으면 어느 집 아들 딸인지 금방 알아보는 동네 사람들과 끝을 모르고 자라던 옥수수밭, 예전 집에 딸려있던 대청마루,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야외 코트장이 지금도 종종 꿈속에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태섭은 자신이 그곳에서 유명인이 될 거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흥분에 차서 자신의 경기를 몇 번이고 돌려본다는 어린 학생들의 존재가 지금으로써는 잘 체감되지 않았다. 감독은 학생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태섭이 NCAA에 진출한 건 대학교 3학년 때가 유일했지만 시차도 다른 낯선 땅의 경기를 보겠다고 새벽에 몰래 일어나서 중계방송을 훔쳐본 학생들이 여럿이라고 했다.
물론 거기에는 도쿄로 상경한 태섭의 가족을 아직까지도 떠올리는 어른들과, 산왕전 소식을 듣고 경탄을 감추지 않았던 태섭의 미니바스 시절을 기억하는 학부모들, 그가 여전히 농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체육교사들이 과장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신화처럼 부풀려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송태섭은 오키나와에서 농구를 해나가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지표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농구를 관둘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독은 침착하게 말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말이죠.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건 어떤지 제안하고 싶은데요.”
그는 태섭에게 코트를 아주 떠나지는 말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그런 말을 들어도…. 감독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거 아니지 않아요?”
“그래도 뭐. 마음먹으면 금방 하죠.”
감독이 선선히 대답했다.
태섭은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을 쳐다보았다.
“당장은 잘 모르겠네요.”
두 사람은 몇 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숍을 나서기 전 감독이 말했다.
“일이 어떻게 되던 한 번은 보러 와요.”
그런 다음 잠시 머뭇거렸다. 태섭이 쳐다보자 그가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역시 마음 같아선 계속 농구를 해줬으면 하네요.”
그러고는 사투리를 감추지 못한 억양으로 덧붙였다.
“애들이 응원한답니다.”
감독과 헤어진 뒤 태섭은 대로변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태섭은 그의 일부분이 무감각해졌음을 깨달았다. 모든 게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방금 있었던 일이 모조리 꿈속에서 벌어진 사건인 듯했다. 사실 그것은 자신을 괴롭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제들로부터 불시에 거리를 두는 태섭의 오랜 방어기제였다. 오늘 연속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너무 혼란하게 작용한 나머지 직접적인 감정이나 생각들로부터 단호하게 떨어져 나온 그의 정신이 부유하기 시작한 거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깅을 하는 속도로 뛰고 있었다. 아니,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최고 속도로 뛰고 있었다. 사물이 뭉개지며 바람처럼 스쳐갔고 불빛들이 시야에서 번쩍이며 쏜살같이 뒤로 밀려났다. 그런데도 숨이 차지 않았다. 몸조차 남의 몸 같았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아득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어느새 그는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에는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태섭은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섰다.
깜빡이는 전등처럼 의식이 드문드문 끊기는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간 그는 구석에 쌓여있는 상자를 마구잡이로 뒤졌다. 소란 때문에 아라가 뛰쳐나왔지만 그마저도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라가 뒤에서 무어라 고함을 치는 것 같았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태섭은 상자 속에서 오래된 농구공을 꺼낸 다음 다시 아무렇게나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단지 뒤편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야외 코트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내렸던 탓에 군데군데 웅덩이가 져 있었다. 태섭은 농구공을 퉁기며 코트장에 들어섰다. 코팅된 바닥에서 튀어 오른 공의 공허한 소리가 코트장을 둘러싼 수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성의 없이 공을 퉁기면서 태섭은 코트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자신이 정확히 뭘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오랜 습관에 빌어 드리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자세를 낮추고 드리블링을 하면서 태섭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들춰 보았다. 화상 자리에 붙인 밴드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왜 하필 농구였을까?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처음 농구를 하던 기억은 너무 오래전이라 까마득하기만 했다. 분명한 건 자신이 농구를 시작한 게 첫째 형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준섭이 하는 건 무엇이든 근사하고 좋아 보였다.
형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형을 이기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농구가 아니었더라도 준섭이 하는 건 언제든 멋져 보였다. 농구가 오키나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종목이었다 하더라도 준섭이 다른 걸 선택했다면 송태섭 역시 농구 같은 건 시작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었다. 준섭이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죽지 않았더라면 태섭은 산왕전을 그토록 비장하게 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미국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걸 골랐다면 뭐가 좀 달랐을까? 미국으로 떠난 뒤 깔끔하게 잊고 지내왔던 오랜 질문이 어쩔 수 없이 커튼 뒤에서 걸어 나왔다. 형이라면 이런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았을까? 농구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예감에 상처받는 일 같은 건 한 번도 없었을까? 드리블된 공을 붙잡으려고 자세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발이 쭉 미끄러지더니 갑자기 시야가 위로 훅 당겨졌다.
공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태섭은 어둑어둑한 저녁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잔잔한 바람이 눈썹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태섭은 정신을 차렸다. 등이 물기로 축축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마음대로 되는 일 같은 건 없는 거야.’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슬픈 게 아니라 화가 난 거였다. 그렇다. 손에서 미끄러져 코트 바깥으로 퉁겨져 나간 저 공 때문에 송태섭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아! 그는 정말이지 화가 났다. 사실은 바닥에 고여있는 물웅덩이에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제 어떻게 사람을 자빠뜨릴지 알 수 없는 저 웅덩이의 존재를 그는 참아주기 어려웠다. 이 순간에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는 후드티의 상태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에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예전 일은 까맣게 잊고 다른 사람처럼 뒤바뀐 미니 바스 시절 감독에게도 화가 났다. 자신의 기분을 이랬다 저랬다 하게 만드는 정대만에게도 화가 났다. 분노는 끔찍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퍼졌고 지난 시간을 독가스처럼 에워쌌다.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입학 초에 저들끼리 몰려다니던 대학 팀메이트들에게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전학 간 첫날 그를 중학교 뒤뜰로 불러낸 빌어먹을 녀석들에게도 화가 났다.
먼저 죽어버린 아버지와 형에게도 화가 났다. 엄마에게 제대로 된 아들노릇을 하지 못했던 어린 날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를 원치 않은 자리에 내버려 두었던 모든 사람들, 그를 제자리에 못 박히게 만든 지난한 고통들에 태섭은 치밀어 오르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아니, 그를 정말로 분노케 하는 건 그 어떤 사건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닥쳐오는 인생을 흘려보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체념한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분노가 언제나 가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그 무시무시한 분노가 때로는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주먹을 지르게 하거나 오토바이를 몰고 내달리게 만들었다.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끔찍한 분노가 가슴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놀랍도록 차가운 분노였다. 마음을 공허하게 만드는 분노였다. 송태섭은 주먹을 꾹 쥐었다가 천천히 펼쳤다. 거센 바닷바람이 불자 풀벌레가 소리를 죽였다.
잠시 후 그는 허리를 깊게 숙여 공을 주웠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에 들어섰을 때 송아라는 복도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수화기를 든 채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아라는 신발을 벗는 태섭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찌푸렸다. 아라는 전화 상대에게 무언가를 속닥거리더니 뺨에서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타이밍 좋다? 빨리 들어와서 전화받아.”
태섭이 말없이 쳐다보자 아라가 신경질적인 투로 덧붙였다.
“오빠 전화야.”
전화를 받자 수화기 저편에서 낄낄대는 대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라야, 너무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안 들린다. 뭐라고?”
“전데요.”
태섭이 말했다.
“오, 송태섭. 볼일은 다 끝났어?”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냥? 출발 전인데 생각나서.”
대만은 들뜬 목소리였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정대만은 실업 팀 이름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태섭은 잠자코 들었다. 대만은 몇몇 팀을 짚어주면서 리그가 시작되거든 이쪽 팀 경기는 꼭 보러 가라고 충고했다. 태섭에게 필요할 거라고 두 번 세 번 강조하는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스치지 못하고 어디론가 흘러갔다.
“왜요?”
“그런 팀이 어울릴 것 같아서.”
태섭은 말을 잃었다.
무언가 따지고 싶은 것처럼 입을 벌렸을 때 대만이 말했다.
“잠시만.”
태섭은 수화기를 든 채 뻣뻣하게 굳었다. 대만은 역에 있는 것 같았다. 역사에 울려 퍼지는 플랫폼 방송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정대만은 센다이행 야간열차를 기다리면서 그에게 전화를 준 거였다.
태섭은 바닥을 쳐다보았다. 대만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졌다.
“형.”
대답이 없었다.
“선배.”
“어어. 불렀냐?”
“나 농구 안 해요.”
태섭은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 뭐라고?”
“나 농구 안 한다고요.”
정대만은 말이 없었다.
태섭이 차갑게 내뱉었다.
“저 사실 농구 그만두려고 일본 들어온 거라고요.”
그는 전화를 끊었다.
19
정대만은 도쿄역 플랫폼 기둥에 비치된 공중전화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얇은 카디건을 걸친 커플 한 쌍이 캐리어를 끌면서 부스 옆을 스쳐 지나갔다. 대만은 동전을 집어넣고 같은 번호에 전화를 걸다가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발치에는 작은 종이 박스가 놓여 있었다. 몇 달 전에 이삿짐을 싸면서 두고 간 박스였다. 생필품을 챙기고 남은 잡동사니를 쑤셔 박은 것인데 부피가 작아서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대만은 시계를 확인하고 종이박스를 집어 들었다.
“키타카미, 키타카미행 야간열차에 탑승하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그는 하나 둘 빠져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플랫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5분 뒤 키타카미행 야간열차 발차합니다. 조속히 탑승 수속을 밟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키타카미, 키타카미행 야간열차에 탑승하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대만은 다시 시계를 확인하다가 뒤이어 걷던 사람과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멈추어 섰다. 낡은 파일철과 오래된 잡지들이 앞으로 쏠려 있었다. 내용물을 정리하려고 한 손에 박스를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중심이 쏠린 박스가 앞으로 뒤집히면서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대만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면서 물건을 줍기 시작했다.
괘씸한 녀석. 그런 식으로 전화를 끊으면 어떡하냐?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면……. 도착하면 다시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정대만은 생각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에는 잘 달래 봐야겠다. 아니, 그때는 너무 늦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전화 부스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 상자를 줍고 나서 다시 걸어보자. 아직 기차가 출발하려면 좀 남았으니까 다시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다.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걸어야 했다. 일부러 받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는 거였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엿먹이겠다고 대만은 생각했다. 무슨 헛소리냐고 따져 물은 다음 방금 말을 취소하라고 윽박이라도 질러야 했다. 정대만은 동요한 상태였다. 방금의 전화로 그는 크게 동요했다. 파일철을 뒤적이던 손이 멈추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오래된 농구 잡지 틈에 무언가 껴 있었다.
한동안 쭈그린 자세로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잠시 후 정대만은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키타카미. 키타카미행…….”
예감이라는 것이 있다. 돌이켜보면 송태섭과의 관계에서는 늘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로부터 지난 8년 동안, 정대만은 아주 가느다랗고 희미하게 흐르다 사라진 무언가의 흔적을 더듬고는 했었다. 너랑 나는 가끔 좀 이상했었지. 분명 타이밍이란 게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럴 때면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의 선택지가 있었을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그가 전화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미국으로 홀연히 떠난 녀석에게 한 번쯤 연락을 해봤더라면. 택배 부친 건 잘 받았냐고, 어떻게 그런 걸 받고 연락 한 통 없을 수가 있냐고 한 번이라도 전화를 걸어봤더라면. 미국으로 떠나는 태섭을 배웅하러 나갔다면, 유학 준비 중에 뚝 전화를 끊어버린 이유를 끝까지 캐물어봤다면. 네가 가끔 날 너무 서운하게 만든다고 말이라도 한 번 해봤다면, 지금쯤 그들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방금 같은 전화 한 통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주차장으로 나온 대만은 조수석에 박스를 던져놓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정대만은 자신이 왜 돌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태섭은 한 번도 확답을 한 적 없었다. 얼버무리면서 대답을 피하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 사정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헤매고 나면 송태섭도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농구를 계속할 줄 알았다. 늘 그랬으니까. 두 사람의 관계는 늘 그런 식으로 이어져 왔으니까 말이다.
농구를 그만두는 태섭을 그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말려야지. 대만은 생각했다. 그건 엄청난 실수니까. 송태섭은 지금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어떻게 하든 간에 말려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말리겠다고 말이다.
그는 20호 국도를 타고 롯폰기 거리를 쭉 빠져나왔다. 순조롭게 수도권 도로를 타고 메이 고속도로로 진입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교통체증이 어찌나 심한지 오카다 방향 진입로부터 500m 구간까지 차량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도로가 이렇게까지 막히는 걸 지난 몇 년 간 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차창을 내려보니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 중인 것 같았다. 도로 상황을 확인하려고 진입로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운전자가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대만이 물었다.
“정신 나간 사람들이에요. 저 앞에 누워서 시위를 하고 있어요.”
운전자가 학을 떼며 말했다.
정말 미친 사람들이 아닌가. 왜 하필 이 시간에 도로에 누워서 시위를 한단 말인가. 세계가 망할 거라더니 다들 정신이 나가버린 것 아닌가? 빵빵대는 클랙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뒤가 밀리기 시작하면 여기서 오도 가도 못할 게 뻔했다. 그는 빠르게 판단했다. 잠시 후 대만은 준법 시민 정신을 내던지고 막무가내로 후진을 시작했다. 뒤에서 다가오는 차와 거의 박을 뻔한 것을 갓길로 방향을 휙 틀어 모면하자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만은 기어를 바꾸고 운전대를 꺾었다.
그 뒤로는 위험천만한 곡예에 가까운 운전을 하며 이세하라 시도 1호선으로 방향을 꺾는 데 성공했다. 컴컴하고 한적한 도로에 들어서자 그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심야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유명하단 사실만큼은 분명한 여성 탤런트가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딴 데 정신이 팔린 탓에 내용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곡을 소개하는 개요만큼은 얼핏 귀에 들려왔다.
“정말로 모든 게 끝난다면 마지막에는 뭘 하고 싶으세요?”
“저야 방송국에서 일을 하고 있겠죠.”
두 여자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여러분에게 좋은 노래 한 곡은 들려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정말로 좋은 노래예요.”
“아, 이 노래 정말 좋죠.”
삼십초 남짓의 광고가 끝나자 노래가 시작됐다. 과연 꽤 듣기 좋았다. 모든 것이 끝날 것 같더라도 계속해 나가보자는 상투적인 가사였지만 오늘은 남다르게 들렸다. 똑바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곡이었다. 이 상황에 정말이지 딱 어울리는 노래였다. 이걸 내가 아니고 송태섭 그 자식이 들어야 되는데. 운전대를 쥔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가나가와에 가까워질수록 차량이 적어지더니 에노시마 표지판을 지나친 후부터는 혼자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밟아본 건 생전 처음이었다.
그는 태섭의 아파트 근처에 차를 대고 상자를 마구 뒤진 다음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전화 부스로 들어가 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으면 집에라도 쳐들어갈 기세로 씩씩대고 있는데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은 게 누군지도 모르면서 대만이 말했다.
“야, 송태섭. 나 앞이거든.”
수화기를 쥔 손이 축축했다.
“오래 세워놓지 말고 나와라.”
전화를 끊은 그는 부스에 기대어 아파트 단지 입구를 노려보았다. 뒤늦게 차 문을 잠그지도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헤드라이트도 켜진 상태였다. 라디오에서는 요란한 록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대만은 손에 들린 종이를 혼란스럽게 노려보았다. 박스에 처박혀 있던 그것은 5년 전 자신이 비디오를 보내면서 같이 부치려고 태섭에게 썼던 바로 그 편지였다.
그로부터 삼 주 후 송태섭은 정대만의 출장 경기를 보기 위해 전철을 타고 미나토구 스포츠 센터로 향했다. 센터는 케이힌선을 타고 약 한 시간 정도 가면 나오는 다마치역에 있었는데, 여태껏 여러 경기를 보러 다닌 태섭도 그 근방은 처음이었다.
경기장에 들어선 태섭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곧 이곳이 정대만의 시합 비디오에 등장한 장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객석 아래에 난 노란색 문과 비상구의 위치가 영상 속 경기장과 똑같았다.
센다이 팀은 벌써 코트 위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얼마 안 가 갈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맞은편 복도에서 걸어 나왔다. 상대 팀은 전반적으로 키가 컸는데, 특히 상대 팀 센터 하나가 멀리서도 눈에 확 띌 정도로 체격이 상당했다. 상대 선수들이 들어오자 센다이 팀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났다.
두 팀은 마주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태섭은 객석에 앉는 대신 기둥 옆에 서서 경기장을 훑어보았다. 대만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릎 아대를 끌어올리며 코트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이 금방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정대만은 잠깐 고개를 들어 객석 쪽을 살피는 듯했지만 태섭을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대만은 곧 자세를 추스르고 코트 중앙으로 나왔다.
경기가 시작되자 태섭은 객석에 앉았다. 그는 두 팀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지만 상대가 골밑이 강한 팀이라는 건 금방 알아보았다. 아까 눈에 들어왔던 센터가 코트 위에서도 굉장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거대한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무시무시했다. 그가 미국에서 만났던 빅맨들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이번 경기에서 센다이 팀은 여러 차례 속공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아웃 넘버(*공격팀의 인원수가 수비팀의 인원수를 상회하는 수적 우위인 상태)가 발생해도 골밑을 지키는 상대팀 센터의 기세에 눌려 우왕좌왕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상대 팀의 수비 전환이 너무 빨라서 패턴이 막히게 되면 금방 턴 오버를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장거리 슛이 중요하다. 골밑을 돌파할 수 없다면 공중을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슈팅 가드로서 정대만이 그걸 모를 리는 없을 듯했다. 빠른 연계로 레이업슛을 노리던 대만은 경기가 중반부에 접어들자 장거리 슛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처음 공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순간 태섭은 숨을 죽이고 집중했다. 공은 탈선한 열차처럼 위태롭게 솟구쳤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골대가 거칠게 흔들렸다. 깔끔하진 않지만 첫 번째 슛은 성공이었다.
양치기 개처럼 헐레벌떡 달려온 선수 하나가 대만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대만은 손뼉을 마주치는 동안에도 골대를 쳐다보고 있다가, 공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경기의 흐름은 느릿느릿 이어졌다. 속공이 막히자 센다이 팀은 전술을 바꾸었다. 정대만은 빈 공간이 없도록 코트를 넓게 쓰면서 자리를 채우다가 오팬스 패턴을 쓸 기회가 오면 귀신 같이 움직였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태섭의 몸이 점점 앞으로 기울었다. 턱을 괴면서 코트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이 형 못 던지지 않는데?’
실업단 농구 선발 대회를 앞두고 진행되는 출장 경기였지만 두 팀 모두 어느 정도 힘을 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의례적인 연습 경기인 데다 본격적인 시즌 전에 부상을 당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분위기 속에서 정대만은 나쁘지 않게 던지고 있었다. 슬럼프라는 얘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기복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슬럼프였구나….’
태섭은 자세를 바로 하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못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텅, 소리와 함께 공이 골대를 맞고 퉁겨져 나왔다.
“리바운드, 리바운드!”
선수들이 일제히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기는 상대 팀의 승리였다. 송태섭은 비상구로 이어지는 복도로 내려와 정대만을 기다렸다. 얼마 안 가 대만이 타올로 땀을 훔치며 나타났다. 팀원들과 함께 우르르 나올 줄 알았는데 웬일로 그는 혼자였다. 벽에 기대어 있던 태섭이 몸을 일으켰다.
정대만은 곧바로 태섭을 알아보지는 못했다. 어두컴컴한 복도에 서 있는 인영을 무심히 지나치려다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었다. 한동안 그는 태섭을 빤히 쳐다보았다. 침묵 속에서 자판기가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저 맞아요. 송태섭.”
“알아, 인마.”
정대만이 툴툴댔다.
“전에도 이런 적 있던 것 같아서 쳐다본 거야.”
대만은 금방 나오겠다면서 태섭에게 동전을 쥐어주었다.
“음료수라도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어.”
송태섭은 포카리 스웨트를 뽑아 들고 의자에 앉았다. 뒤이어 센다이 팀이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서로 몇 마디 주고받기는 했지만 다들 썩 친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태섭을 지나쳐 라커룸으로 향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선수는 정대만처럼 혼자였다. 태섭은 그를 알아보았다. 첫 골이 터지자 양치기 개처럼 쏜살같이 달려 정대만과 하이파이브를 했던 그 남자였다.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벤치에 앉아 있는 송태섭을 무심히 지나치는 대신, 그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뭐야?’
올려다보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관계자예요?”
“예?”
남자가 멀뚱멀뚱 태섭을 쳐다보았다.
“여기 관계자만 들어올 수 있는데 관계자냐고요.”
당황한 태섭이 눈썹을 추켜 올리며 표정을 굳히고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후배야.”
더플백을 멘 정대만이 다가왔다. 그는 태섭의 손에 들린 포카리 스웨트를 낚아챘다가 얼마 안 가 도로 돌려주었다.
“안 딴 거잖아. 여태껏 안 마시고 뭐 했냐?”
그가 투덜거렸다.
“무슨 상관이에요? 마시든 말든.”
“봤지? 버르장머리.”
대만이 보란 듯이 태섭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 후배 중에서 제일 버릇없는 놈이야, 쟤가.”
“왜 시비예요?”
태섭이 작게 볼멘소리를 했다.
남자가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난 또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네. 이름은 모르겠는 후배님, 죄송합니다.”
“아니, 뭐….”
“수종아, 나 얘랑 얘기 좀 하다 들어올 테니까 감독님한테 말 좀 전해줘.”
“그러세요.”
남자가 대답했다.
수종이라고 하는 선수는 얼마 안 가 라커룸으로 사라졌다. 정대만은 태섭을 끌고 로비로 나왔다. 밝은 곳으로 나오자 대만의 얼굴이 잘 보였다. 씻고 나온 건지 머리카락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태섭이 물었다.
“오늘 저 안 온 줄 알았어요?”
“온 건 알았지. 객석에 앉아있는 거 다 보였다.”
“그런 것치곤 아까 못 알아보던데요.”
“못 알아본 게 아니라….”
대만은 흠 하고 말을 끌었다. 뜬금없이 대학생 때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말이야. 내가 2학년일 때.”
대만이 앞을 보며 말했다.
“4월 토너먼트 때 네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적 있었잖아.”
무슨 이야기를 하나 싶어 멀뚱히 보고만 있자 그가 돌아보았다.
“너 그때 나 보러 온 거 맞지?”
“뭐야.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요?”
“아니, 오늘은 나 보러 온 거잖아.”
“그런데요.”
“그러니까 전에도…….”
그렇게 말하는 대만도 자신이 무슨 소릴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뭔가 설명하려던 그는 곧 어물거리며 이야기를 관두었다.
“됐다.”
“…….”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센터 앞에는 작은 정원이 딸려 있었다. 미나토구 스포츠 센터라고 큼지막하게 새겨진 비석을 지나치자 곧장 병원이 나타났다. 정대만은 여기 건물 뒤편으로 나가면 강변이 나온다고 했다.
“걸을 거지?”
태섭은 어깨를 으쓱였다.
“예, 뭐.”
두 사람은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흐린 날씨였다. 군데군데 먹구름이 껴 있었고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강변에 들어서자 희미하게 물 비린내가 올라왔다. 잘 정돈된 자갈색 벽돌길이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축축했다.
두 사람은 강변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전 경기에 대한 간단한 피드백이 오고 갔다. 정대만은 송아라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동생은 잘 지내고 있는 거냐고 했다. 잠시 고민하던 태섭은 송아라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대답했다.
“뭐야. 엄청 잘 지내고 있네.”
“그렇죠.”
건너편 사거리에서 차가 빵빵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밌겠네. 하루종일 전화하고 그러냐? 여동생 있는 집은 전화 때문에 싸운다던데.”
“저희 집은 안 그래요.”
그러고 보니 송아라가 누군가와 전화하는 걸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송태섭은 정대만과 한창 연락을 주고받던 시절 그 문제로 송아라와 몇 번 다툰 적이 있었다.
“집 보러 다니느라 바빴다며. 이젠 괜찮냐?”
“아, 네. 괜찮은 데를 찾아서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에요, 지금.”
“그럼 너 아주 들어오는 거네.”
태섭은 입 안에서 말을 한 번 굴리다 뱉었다.
“그렇죠.”
“농구는 언제부터 다시 하려고?”
말문이 막혔다. 태섭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대만이 멀뚱히 쳐다보았다.
“너 진짜 아주 관두려는 거 아니지?”
삐딱한 표정을 짓던 태섭은 얼마 안 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치수는 관둔다더라.”
“네?”
태섭은 깜짝 놀랐다.
“치수 선배가 왜요?”
“프로 리그가 생긴다는데. 진짠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게 되면 기존 리그나 팀 같은 거 싹 재정비 들어간단다. 아마 걔가 관두는 것도 그거 때문일걸.”
대만은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는 기존의 실업 팀이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다 말고 상황이 웃기지 않냐고 물었다. 그런 일이 벌어져서 농구를 관둘지 말지 고민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너 왜 쉬는지 물어봐도 되냐.”
무언가 말하려던 태섭은 입을 다물었다. 귀국한 이래로 한 번도 똑바로 이야기해 본 적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농구에 대한 지금의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도 말로 만들어내면 간단한 문제처럼 들릴 것이었다.
약해 보이기는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건 털어놓은 다음 자신이 미처 설명해내지 못한 것들에 대해 느끼게 될 감정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까? 가슴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송태섭은 고민했다. 텁텁한 바람이 불어오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도 슬럼프예요.”
대만은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네가?”
“반응이 왜 그래요?”
“아니…. 왜, 잘 안 던져지냐?”
“그냥 전반적으로 다 별로예요.”
대만은 얼굴을 찌푸렸다.
“상상이 안 되네.”
그는 태섭이 미국에서 잘하고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들려오는 소식이 거의 없긴 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는가. 정대만은 정우성 특집 기사 이야기를 꺼냈다. 정우성이 찍힌 단독 사진 구석에 희끄무레하게 등장한 태섭의 모습을 그는 단박에 알아보았다고 했다.
대만은 그때 느꼈던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했다. 지나치게 솔직해서 듣고 있던 태섭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때는 네가 나보다 잘나가서 좀 질투 났다.”
“… 잘 나가는 줄은 어떻게 알아요? 사진 그거 얼마나 나왔다고.”
“어쨌든 그 미국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는 거잖아.”
대만이 말했다.
“지켜보는 입장에선 말이야. 부럽거든.”
세찬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태섭은 묵묵히 바닥을 쳐다보았다. 실토하듯 말했다.
“재밌긴 재밌었어요.”
두 사람은 강변을 쭉 돌아 시바우라 공원에 들어섰다. 길목마다 하얀 벤치와 엔틱한 다갈색 가로등이 세워져 있었다. 흐린 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건너편 길목에서 하늘색 간호사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천천히 걷고 있었다.
대만은 채치수에 대한 근황을 마저 들려주었다. 그는 채치수가 요식업을 하다 쫄딱 망한 대학 동기의 폐업 준비를 돕고 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요즘은 다들 그런 모양이라고 했다. 사업이 망하거나, 해고되거나, 다니던 회사가 도산하거나, 주식 투자에 실패하거나 한다는 것이다. 센다이 팀이나 다른 실업 팀도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느새 대만은 투덜대고 있었다.
“사는 게 갈수록 재미없어지는 것 같다. 뭐 이리 신경 쓸 게 많냐? 난 그냥 농구만 하고 싶은데.”
송태섭은 그 감정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형은 잘하잖아요.”
태섭이 말했다.
“그럼 뭐 하냐. 못 던지는데.”
힘 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태섭은 자기도 모르게 대만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정작 말을 던진 당사자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보아하니 방금 들은 말이 그를 흡족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 표정을 확인한 순간, 태섭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못 볼 걸 봤다는 것처럼 황급히 시선을 떨어뜨린 그는 뒤늦게 자신의 행동에 당황했다. 순간 대만이 귀엽다는 생각이 스쳐갔는데 그 생각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였다. 이제 송태섭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기 자신을 어이없어하기 시작했다.
‘가끔 보면 저 선배가 진짜 웃긴 인간이긴 해.’
내심 기막혀하며 생각했다.
두 사람은 공원을 반 바퀴쯤 돌다가 센터 앞으로 돌아왔다. 대만은 본가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올라갈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는 늦은 밤에 도쿄역까지 차를 몰고 가서 야간열차를 탈 예정이었다.
“고속버스가 신칸센보다 훨씬 비싸더라. 넌 어디 멀리 갈 일 있으면 꼭 신칸센 타라.”
“신칸센도 비싼데요. 그냥 일반 열차 탈게요.”
퉁명스럽게 대답했는데도 뭐가 즐거운지 대만이 히죽 웃었다.
“같이 저녁 먹을래?”
금요일이라 그런지 그는 시간이 넉넉해 보였다.
“오후에 약속 있어서 안 돼요.”
“뭐야. 이제 괜찮다며?”
“그런 게 있어요.”
대만은 끙 소리를 냈다.
“알겠다. 들어가라.”
“예, 형도요.”
정대만과 헤어진 뒤 태섭은 공원을 가로질러 다마치 역사로 돌아갔다.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고 이랬다 저랬다 태도를 바꾸는 대만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플랫폼으로 내려오면서 송태섭은 아까 대만이 던진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냥 농구를 하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신경 쓸 게 많을까.’
정작 자신은 단 한 번도 말로 만들어서 이야기해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정대만은 그런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냈다. 전부터 그랬다. 대만은 느끼고 있는 바를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직성에 풀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따금 송태섭은 정대만의 그런 점이 무척 놀라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기 감정에 솔직한 나머지 대만은 정직하게 행동하다가도 때로는 굉장히 제멋대로 굴었고, 태섭은 그의 그런 일면을 가장 가까이서 겪어 본 사람이었다. 그가 처한 상황이 교묘하게 태섭의 상황과 맞물리면 서로 의도치 않았을지 몰라도 상황은 매번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럴 때면 태섭은 여태껏 별로 궁금해하지 않고 주의 깊게 들여다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문제들이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만약 정대만이 먼저 슬럼프라고 고백하지 않았다면 태섭은 자신의 슬럼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태섭을 솔직하도록 부추기는 면이 있었고, 그 때문에 태섭은 종종 그에게 반발심을 느끼거나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유학 생활 도중 우울하지 않았냐고 대만이 넌지시 물어보았을 때도 그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먼저 해버린 것도 그래서였다.
송태섭은 정대만이 불편했다. 그와 다시 연락하고 지내는 일이 반갑고 즐거운 한편으로 마음 한 구석에선 점점 그런 기분이 강해지고 있었다. 지금도 태섭은 그가 던진 말에 속절없이 휩쓸리는 중이었다. 정대만이 손쉽게 표현한 그 자신의 아픔은 태섭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픔을 일깨웠다. 농구를 하고 싶을 뿐인데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세상 일에 휩쓸리며 견뎌왔던 지난날의 깊은 슬픔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어느새 태섭은 정말로 농구를 관둘 것인지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이 무슨 소용일까? 당장 지난주에 그는 꼼꼼하게 방을 둘러보고 집구석구석을 점검한 다음 부동산을 찾아가 계약금을 치르고 인감도장까지 찍고 돌아왔다. 송태섭은 이미 자신의 앞날을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츠지도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초조한 기분을 느끼면서 태섭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신이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모든 게 명확하게 느껴지다가도 아무것도 종잡을 수 없는 흐릿한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기분은 전철에서 내려 커피숍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줄곧 이어졌다. 태섭은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주먹을 쥐었다 펼치기를 반복했다. 결국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턱끝까지 숨이 차오를 때만큼 달렸다.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들고 숨이 뜨거워지자 머릿속에 달라붙은 무거운 생각들이 사방으로 부딪치다 못해 부스러지고 거스러미가 되어 깊은 저 어딘가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태섭은 숨을 몰아쉬며 커피숍 앞에 멈추어 섰다.
가게 입구에는 후우링이 달려 있었다. 문을 열자 후우링이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태섭은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나이 든 남자가 오늘 만나기로 되어있던 감독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정장 차림으로 앉아있는 사람이 그 밖에 없었던 것이다.
테이블로 다가가자 태섭을 알아본 남자가 정중히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짐작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못해도 쉰 살은 넘었을 것 같았다.
감독이 부드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송태섭 군.”
“아, 예. 안녕하세요.”
감독은 살짝 긴장한 것 같았다. 태섭은 그가 내민 명함을 받아 들었다. 명함에 찍힌 학교 이름이나 주소가 낯설지 않았다. 그는 오키나와에서 온 사람이었다.
“혹시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태섭이 의문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들으니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한 것도 같았다.
불현듯 태섭은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깊은 곳에 묻혀있던 기억이 끌려 나오면서 낡은 체육관에서 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눈앞의 감독은 마흔 살 남짓의 젊은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송태섭의 미니 바스 시절 종종 마주쳤던 타교의 농구부 감독이었다. 오랜만에 외출한 엄마와 아라가 관전 중인 경기에서 태섭과 죽은 형을 비교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18
감독은 오키나와에서 농구부 감독을 계속해 왔다고 했다. 초등학교에서 십 년 정도 근무하다가 요즘은 중학생과 고등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코메다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키타 트레이더스 감독이 지나가듯 언급한 그 사람이기도 했다.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며 NCAA 중계를 챙겨보고, 흥분에 차서 태섭의 경기 녹화 비디오를 보내주었다는 친구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감독에게 태섭을 추천해 준 것도 그였다.
그는 태섭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하려고 온 건 아니라고 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는 말을 꽤 조심하려고 했는데, 과거의 일 때문이라기보다는 태섭이 쌓아온 그동안의 성취를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감독은 태섭을 연예인처럼 대했다. 실제로 오키나와 중학교에서 태섭은 꽤 인기가 많다고 했다.
“애들이 태섭 군 이야길 자주 합니다. 경기 비디오 좀 빌려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예에….”
달리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리자 감독이 민망한 듯 웃었다.
“이야, 제가 송태섭 군을 만난다는 걸 애들이 알았으면 사인이라도 받아오라고 성화였을 텐데.”
“그렇게 인기가 많나요, 제가?”
실감이 안 났다. 오키나와는 오랜 집 같은 곳이었지만 고등학생 때 이후로는 찾아간 적이 없어서 낡은 사진처럼 장면 장면으로만 남아 있었다. 길거리를 걷고 있으면 어느 집 아들 딸인지 금방 알아보는 동네 사람들과 끝을 모르고 자라던 옥수수밭, 예전 집에 딸려있던 대청마루, 조금만 걸으면 나오는 야외 코트장이 지금도 종종 꿈속에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태섭은 자신이 그곳에서 유명인이 될 거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흥분에 차서 자신의 경기를 몇 번이고 돌려본다는 어린 학생들의 존재가 지금으로써는 잘 체감되지 않았다. 감독은 학생들 이름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태섭이 NCAA에 진출한 건 대학교 3학년 때가 유일했지만 시차도 다른 낯선 땅의 경기를 보겠다고 새벽에 몰래 일어나서 중계방송을 훔쳐본 학생들이 여럿이라고 했다.
물론 거기에는 도쿄로 상경한 태섭의 가족을 아직까지도 떠올리는 어른들과, 산왕전 소식을 듣고 경탄을 감추지 않았던 태섭의 미니바스 시절을 기억하는 학부모들, 그가 여전히 농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된 체육교사들이 과장해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신화처럼 부풀려진 탓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송태섭은 오키나와에서 농구를 해나가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지표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농구를 관둘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감독은 침착하게 말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말이죠.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건 어떤지 제안하고 싶은데요.”
그는 태섭에게 코트를 아주 떠나지는 말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그런 말을 들어도…. 감독이 그렇게 쉽게 되는 거 아니지 않아요?”
“그래도 뭐. 마음먹으면 금방 하죠.”
감독이 선선히 대답했다.
태섭은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을 쳐다보았다.
“당장은 잘 모르겠네요.”
두 사람은 몇 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숍을 나서기 전 감독이 말했다.
“일이 어떻게 되던 한 번은 보러 와요.”
그런 다음 잠시 머뭇거렸다. 태섭이 쳐다보자 그가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역시 마음 같아선 계속 농구를 해줬으면 하네요.”
그러고는 사투리를 감추지 못한 억양으로 덧붙였다.
“애들이 응원한답니다.”
감독과 헤어진 뒤 태섭은 대로변으로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태섭은 그의 일부분이 무감각해졌음을 깨달았다. 모든 게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방금 있었던 일이 모조리 꿈속에서 벌어진 사건인 듯했다. 사실 그것은 자신을 괴롭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제들로부터 불시에 거리를 두는 태섭의 오랜 방어기제였다. 오늘 연속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너무 혼란하게 작용한 나머지 직접적인 감정이나 생각들로부터 단호하게 떨어져 나온 그의 정신이 부유하기 시작한 거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깅을 하는 속도로 뛰고 있었다. 아니,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최고 속도로 뛰고 있었다. 사물이 뭉개지며 바람처럼 스쳐갔고 불빛들이 시야에서 번쩍이며 쏜살같이 뒤로 밀려났다. 그런데도 숨이 차지 않았다. 몸조차 남의 몸 같았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아득한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어느새 그는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에는 계단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태섭은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섰다.
깜빡이는 전등처럼 의식이 드문드문 끊기는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간 그는 구석에 쌓여있는 상자를 마구잡이로 뒤졌다. 소란 때문에 아라가 뛰쳐나왔지만 그마저도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라가 뒤에서 무어라 고함을 치는 것 같았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태섭은 상자 속에서 오래된 농구공을 꺼낸 다음 다시 아무렇게나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단지 뒤편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야외 코트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가 내렸던 탓에 군데군데 웅덩이가 져 있었다. 태섭은 농구공을 퉁기며 코트장에 들어섰다. 코팅된 바닥에서 튀어 오른 공의 공허한 소리가 코트장을 둘러싼 수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성의 없이 공을 퉁기면서 태섭은 코트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자신이 정확히 뭘 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오랜 습관에 빌어 드리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자세를 낮추고 드리블링을 하면서 태섭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씩 들춰 보았다. 화상 자리에 붙인 밴드를 조심스럽게 열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왜 하필 농구였을까?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처음 농구를 하던 기억은 너무 오래전이라 까마득하기만 했다. 분명한 건 자신이 농구를 시작한 게 첫째 형 때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준섭이 하는 건 무엇이든 근사하고 좋아 보였다.
형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형을 이기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농구가 아니었더라도 준섭이 하는 건 언제든 멋져 보였다. 농구가 오키나와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종목이었다 하더라도 준섭이 다른 걸 선택했다면 송태섭 역시 농구 같은 건 시작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었다. 준섭이 미완의 과제를 남기고 죽지 않았더라면 태섭은 산왕전을 그토록 비장하게 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미국에 갈 기회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걸 골랐다면 뭐가 좀 달랐을까? 미국으로 떠난 뒤 깔끔하게 잊고 지내왔던 오랜 질문이 어쩔 수 없이 커튼 뒤에서 걸어 나왔다. 형이라면 이런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았을까? 농구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예감에 상처받는 일 같은 건 한 번도 없었을까? 드리블된 공을 붙잡으려고 자세를 바꾸는 순간이었다. 발이 쭉 미끄러지더니 갑자기 시야가 위로 훅 당겨졌다.
공이 데구루루 굴러갔다. 태섭은 어둑어둑한 저녁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잔잔한 바람이 눈썹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후 태섭은 정신을 차렸다. 등이 물기로 축축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마음대로 되는 일 같은 건 없는 거야.’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슬픈 게 아니라 화가 난 거였다. 그렇다. 손에서 미끄러져 코트 바깥으로 퉁겨져 나간 저 공 때문에 송태섭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아! 그는 정말이지 화가 났다. 사실은 바닥에 고여있는 물웅덩이에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제 어떻게 사람을 자빠뜨릴지 알 수 없는 저 웅덩이의 존재를 그는 참아주기 어려웠다. 이 순간에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는 후드티의 상태도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에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예전 일은 까맣게 잊고 다른 사람처럼 뒤바뀐 미니 바스 시절 감독에게도 화가 났다. 자신의 기분을 이랬다 저랬다 하게 만드는 정대만에게도 화가 났다. 분노는 끔찍하리만큼 빠른 속도로 퍼졌고 지난 시간을 독가스처럼 에워쌌다. 손 쓸 도리가 없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입학 초에 저들끼리 몰려다니던 대학 팀메이트들에게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전학 간 첫날 그를 중학교 뒤뜰로 불러낸 빌어먹을 녀석들에게도 화가 났다.
먼저 죽어버린 아버지와 형에게도 화가 났다. 엄마에게 제대로 된 아들노릇을 하지 못했던 어린 날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를 원치 않은 자리에 내버려 두었던 모든 사람들, 그를 제자리에 못 박히게 만든 지난한 고통들에 태섭은 치밀어 오르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아니, 그를 정말로 분노케 하는 건 그 어떤 사건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닥쳐오는 인생을 흘려보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체념한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분노가 언제나 가슴 깊숙한 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그 무시무시한 분노가 때로는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주먹을 지르게 하거나 오토바이를 몰고 내달리게 만들었다.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끔찍한 분노가 가슴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놀랍도록 차가운 분노였다. 마음을 공허하게 만드는 분노였다. 송태섭은 주먹을 꾹 쥐었다가 천천히 펼쳤다. 거센 바닷바람이 불자 풀벌레가 소리를 죽였다.
잠시 후 그는 허리를 깊게 숙여 공을 주웠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에 들어섰을 때 송아라는 복도에 서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수화기를 든 채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아라는 신발을 벗는 태섭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찌푸렸다. 아라는 전화 상대에게 무언가를 속닥거리더니 뺨에서 수화기를 떨어뜨렸다.
“타이밍 좋다? 빨리 들어와서 전화받아.”
태섭이 말없이 쳐다보자 아라가 신경질적인 투로 덧붙였다.
“오빠 전화야.”
전화를 받자 수화기 저편에서 낄낄대는 대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라야, 너무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안 들린다. 뭐라고?”
“전데요.”
태섭이 말했다.
“오, 송태섭. 볼일은 다 끝났어?”
태섭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냥? 출발 전인데 생각나서.”
대만은 들뜬 목소리였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정대만은 실업 팀 이름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태섭은 잠자코 들었다. 대만은 몇몇 팀을 짚어주면서 리그가 시작되거든 이쪽 팀 경기는 꼭 보러 가라고 충고했다. 태섭에게 필요할 거라고 두 번 세 번 강조하는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스치지 못하고 어디론가 흘러갔다.
“왜요?”
“그런 팀이 어울릴 것 같아서.”
태섭은 말을 잃었다.
무언가 따지고 싶은 것처럼 입을 벌렸을 때 대만이 말했다.
“잠시만.”
태섭은 수화기를 든 채 뻣뻣하게 굳었다. 대만은 역에 있는 것 같았다. 역사에 울려 퍼지는 플랫폼 방송이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정대만은 센다이행 야간열차를 기다리면서 그에게 전화를 준 거였다.
태섭은 바닥을 쳐다보았다. 대만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아득하게 느껴졌다.
“형.”
대답이 없었다.
“선배.”
“어어. 불렀냐?”
“나 농구 안 해요.”
태섭은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어…. 뭐라고?”
“나 농구 안 한다고요.”
정대만은 말이 없었다.
태섭이 차갑게 내뱉었다.
“저 사실 농구 그만두려고 일본 들어온 거라고요.”
그는 전화를 끊었다.
19
정대만은 도쿄역 플랫폼 기둥에 비치된 공중전화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얇은 카디건을 걸친 커플 한 쌍이 캐리어를 끌면서 부스 옆을 스쳐 지나갔다. 대만은 동전을 집어넣고 같은 번호에 전화를 걸다가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발치에는 작은 종이 박스가 놓여 있었다. 몇 달 전에 이삿짐을 싸면서 두고 간 박스였다. 생필품을 챙기고 남은 잡동사니를 쑤셔 박은 것인데 부피가 작아서 미처 챙기지 못했던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대만은 시계를 확인하고 종이박스를 집어 들었다.
“키타카미, 키타카미행 야간열차에 탑승하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그는 하나 둘 빠져나가는 사람들과 함께 플랫폼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15분 뒤 키타카미행 야간열차 발차합니다. 조속히 탑승 수속을 밟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키타카미, 키타카미행 야간열차에 탑승하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대만은 다시 시계를 확인하다가 뒤이어 걷던 사람과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멈추어 섰다. 낡은 파일철과 오래된 잡지들이 앞으로 쏠려 있었다. 내용물을 정리하려고 한 손에 박스를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중심이 쏠린 박스가 앞으로 뒤집히면서 잡동사니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대만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면서 물건을 줍기 시작했다.
괘씸한 녀석. 그런 식으로 전화를 끊으면 어떡하냐?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면……. 도착하면 다시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정대만은 생각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에는 잘 달래 봐야겠다. 아니, 그때는 너무 늦을 것 같았다. 지금 당장 전화 부스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 상자를 줍고 나서 다시 걸어보자. 아직 기차가 출발하려면 좀 남았으니까 다시 전화를 걸어보는 것이다.
받을 때까지 끈질기게 걸어야 했다. 일부러 받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 포기할 수는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는 거였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엿먹이겠다고 대만은 생각했다. 무슨 헛소리냐고 따져 물은 다음 방금 말을 취소하라고 윽박이라도 질러야 했다. 정대만은 동요한 상태였다. 방금의 전화로 그는 크게 동요했다. 파일철을 뒤적이던 손이 멈추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오래된 농구 잡지 틈에 무언가 껴 있었다.
한동안 쭈그린 자세로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일어났다. 잠시 후 정대만은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키타카미. 키타카미행…….”
예감이라는 것이 있다. 돌이켜보면 송태섭과의 관계에서는 늘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로부터 지난 8년 동안, 정대만은 아주 가느다랗고 희미하게 흐르다 사라진 무언가의 흔적을 더듬고는 했었다. 너랑 나는 가끔 좀 이상했었지. 분명 타이밍이란 게 있었던 것도 같다. 그럴 때면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의 선택지가 있었을 것 같은 기분을 떨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때 그가 전화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미국으로 홀연히 떠난 녀석에게 한 번쯤 연락을 해봤더라면. 택배 부친 건 잘 받았냐고, 어떻게 그런 걸 받고 연락 한 통 없을 수가 있냐고 한 번이라도 전화를 걸어봤더라면. 미국으로 떠나는 태섭을 배웅하러 나갔다면, 유학 준비 중에 뚝 전화를 끊어버린 이유를 끝까지 캐물어봤다면. 네가 가끔 날 너무 서운하게 만든다고 말이라도 한 번 해봤다면, 지금쯤 그들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을까?
방금 같은 전화 한 통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주차장으로 나온 대만은 조수석에 박스를 던져놓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정대만은 자신이 왜 돌아가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태섭은 한 번도 확답을 한 적 없었다. 얼버무리면서 대답을 피하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 사정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적당히 헤매고 나면 송태섭도 원래 자리로 돌아와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농구를 계속할 줄 알았다. 늘 그랬으니까. 두 사람의 관계는 늘 그런 식으로 이어져 왔으니까 말이다.
농구를 그만두는 태섭을 그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말려야지. 대만은 생각했다. 그건 엄청난 실수니까. 송태섭은 지금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어떻게 하든 간에 말려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말리겠다고 말이다.
그는 20호 국도를 타고 롯폰기 거리를 쭉 빠져나왔다. 순조롭게 수도권 도로를 타고 메이 고속도로로 진입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교통체증이 어찌나 심한지 오카다 방향 진입로부터 500m 구간까지 차량이 꽉 들어차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도로가 이렇게까지 막히는 걸 지난 몇 년 간 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차창을 내려보니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 중인 것 같았다. 도로 상황을 확인하려고 진입로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운전자가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대만이 물었다.
“정신 나간 사람들이에요. 저 앞에 누워서 시위를 하고 있어요.”
운전자가 학을 떼며 말했다.
정말 미친 사람들이 아닌가. 왜 하필 이 시간에 도로에 누워서 시위를 한단 말인가. 세계가 망할 거라더니 다들 정신이 나가버린 것 아닌가? 빵빵대는 클랙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앉아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뒤가 밀리기 시작하면 여기서 오도 가도 못할 게 뻔했다. 그는 빠르게 판단했다. 잠시 후 대만은 준법 시민 정신을 내던지고 막무가내로 후진을 시작했다. 뒤에서 다가오는 차와 거의 박을 뻔한 것을 갓길로 방향을 휙 틀어 모면하자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만은 기어를 바꾸고 운전대를 꺾었다.
그 뒤로는 위험천만한 곡예에 가까운 운전을 하며 이세하라 시도 1호선으로 방향을 꺾는 데 성공했다. 컴컴하고 한적한 도로에 들어서자 그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심야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유명하단 사실만큼은 분명한 여성 탤런트가 게스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딴 데 정신이 팔린 탓에 내용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곡을 소개하는 개요만큼은 얼핏 귀에 들려왔다.
“정말로 모든 게 끝난다면 마지막에는 뭘 하고 싶으세요?”
“저야 방송국에서 일을 하고 있겠죠.”
두 여자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여러분에게 좋은 노래 한 곡은 들려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정말로 좋은 노래예요.”
“아, 이 노래 정말 좋죠.”
삼십초 남짓의 광고가 끝나자 노래가 시작됐다. 과연 꽤 듣기 좋았다. 모든 것이 끝날 것 같더라도 계속해 나가보자는 상투적인 가사였지만 오늘은 남다르게 들렸다. 똑바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곡이었다. 이 상황에 정말이지 딱 어울리는 노래였다. 이걸 내가 아니고 송태섭 그 자식이 들어야 되는데. 운전대를 쥔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가나가와에 가까워질수록 차량이 적어지더니 에노시마 표지판을 지나친 후부터는 혼자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밟아본 건 생전 처음이었다.
그는 태섭의 아파트 근처에 차를 대고 상자를 마구 뒤진 다음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전화 부스로 들어가 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으면 집에라도 쳐들어갈 기세로 씩씩대고 있는데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은 게 누군지도 모르면서 대만이 말했다.
“야, 송태섭. 나 앞이거든.”
수화기를 쥔 손이 축축했다.
“오래 세워놓지 말고 나와라.”
전화를 끊은 그는 부스에 기대어 아파트 단지 입구를 노려보았다. 뒤늦게 차 문을 잠그지도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헤드라이트도 켜진 상태였다. 라디오에서는 요란한 록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대만은 손에 들린 종이를 혼란스럽게 노려보았다. 박스에 처박혀 있던 그것은 5년 전 자신이 비디오를 보내면서 같이 부치려고 태섭에게 썼던 바로 그 편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