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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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다이 대 JR 동일본 센다이 약식 경기는 76:98로 이변 없는 센다이 팀의 승리였다. 그날 정대만은 다른 팀원들과 함께 신칸센을 타는 대신, 약속이 있다며 먼저 빠져나갔다가 늦은 시간에 혼자 야간 고속버스를 타고 센다이시로 돌아왔다.
이영걸은 신덴히가시 해양 센터 로비에 앉아 있었다. 7월 초였다. 강렬한 햇빛이 천장에 난 통창으로 쏟아지는 가운데 바깥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의 쏟아지는 소리가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떠밀리듯 들려오는 멋진 날이었다.
이 센터는 이름에 ‘해양’이 붙어서 수족관이나 연구소라는 오해를 자주 받았다. 실상 이곳은 대형 실내 체육관과 수영장을 운영하는 시립 체육관으로, 입구에 센터의 건설 비용 대부분을 댄 ‘해양 건설 도지마’를 기념하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지만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민들 중에서도 이 체육관 이름이 왜 하필 해양 센터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만이 로비로 나왔을 때 이영걸은 자세를 수그리고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고 있었다. 몇 달 만의 만남이었지만 대만은 그의 오랜 친구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영걸이 밝은 얼굴로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대만아, 오랜만이다.”
“어. 온다고 고생했다.”
“아냐, 그렇게 멀진 않더라고.”
졸업 후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던 영걸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일은 의외로 세일즈맨이었다.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그가 운이 좋았다고들 한다. 경제 불황이 한 세대 안에 끝나지 않을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고, 있는 일자리마저 잃기 십상인 요즘엔 프리터 생활이나 이어가면 다행이었다. 상황은 그만큼 형편없었다. 사실 대만과 같은 실업 운동인이나, 그러한 실업 팀을 운영할 만큼 형편 좋은 회사가 아닌 이상은 취직 후에도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된 지 오래였다. 허무맹랑한 세계 멸망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건 어쩌면 다들 이러한 막연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람하고 덩치가 산만 한 영걸은 처음엔 도무지 세일즈맨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몇 달 만에 마주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특유의 풍채는 공들여 모서리를 접은 종이 접기마냥 정장 안에 잘 감추어져 있었고, 그래서인지 실제로는 그렇게 몸이 쪼그라든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전과 같은 위압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영걸은 공공기관과 일부 사설 업체에 전자제품을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회사와 완만한 관계를 유지 중인 거래처를 돌면서 도쿄와 인근 대도시를 돌아다녔는데, 이번에는 어찌어찌 센다이시까지 오게 되었다. 거래처 하나가 이쪽에 공장을 만들면서 사무실을 통째로 이전했다고 했다.
때마침 영걸에게 줄 게 있었던 대만은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그 기막힌 우연을 냉큼 약속으로 만들었다. 그가 건네준 것은 10월에 있을 JBL 시즌 전 전국 실업 팀이 합을 겨루어 보는 9월 실업단 농구 선발 대회 티켓이었다. 바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꼭 보러 올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올해는 갈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고 횡설수설하던 영걸은 결국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꼭 보러 갈게.”하고 대답했다.
“난 네가 자랑스럽다, 대만아.”
“알지. 늘 고맙다, 응원해 줘서.”
“그게 뭐 어렵다고….”
영걸은 민망해하다가 낄낄거렸다.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같다. 네가 그 센다이 팀 선수라니. 작년에 졌을 때 엄청 분해했으면서.”
“그러는 너도 멀쩡한 세일즈맨 행세를 하고 있잖아. 봐라, 이게 내가 알던 이영걸이 맞냐? 처음엔 누군지도 못 알아봤다.”
“내가 와인색이 좀 잘 받기는 하지.”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로비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저녁이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대만은 곧 시합에 들어가야 했고, 영걸도 내일의 일이 있으니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시합만 좀 관전하다 가겠다는 영걸을 앞에 두고 대만은 잠깐이지만 머뭇거렸다.
“시간이 돼?”
“끝나고 바로 출발하면 아슬아슬 맞출 수 있어. 6시 기차거든.”
“그러냐.”
뒤통수를 주무르던 대만은 무심코 로비 바깥에 놓인 공중전화 부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어떤 생각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 있었다.
잠시 후 대만이 대답했다.
“알겠다. 열심히 뛸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대만은 오늘 경기에서 제대로 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지난 출장 경기를 기점으로 야투율이 점점 형편없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에는 열에 여덟 번은 실패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슛감을 완전히 잃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던지기만 해도 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의 풍경이 조금 멀어졌다고 해서 대만이 그동안 한 골도 넣지 못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활약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뒤로 그는 단 한 경기도 활약하지 못했다.
영걸은 오랫동안 그를 응원해 준 친구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만이 뛰는 시합이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그의 활약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런 영걸에게 예전만 못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오늘 대만은 경기에서 뭐라도 보여줘야 했다. 곧 있을 시합이 약식으로 진행되는 변변찮은 연습 경기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경기장으로 나온 대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센다이 팀원들이 드문드문 모여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대만은 코트 구석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중간에 수종과 눈이 마주쳤지만 수종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금방 자기만의 루틴으로 빠져들었다.
스트레칭을 하다 보니 병원 진단 결과 생각이 났다. 둘째 날 도쿄 출장 경기를 마치고 인근 대학 병원에 내원한 대만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고 요코하마 숙소로 돌아왔다. 오히려 그의 몸 상태는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쌩쌩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모든 건 마음에 달린 문제라고 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야투율뿐 아니라 다른 방면에서도 문제가 벌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출장 경기 내내 슛 찬스를 득점으로 만들지 못해 애를 먹었다가, 마지막 날에는 순간적으로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상대 선수의 고의 파울에 말려들기까지 했다. 대만의 실수는 상대 팀의 중요한 득점으로 이어졌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였다.
경기 자체는 이겼지만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 끝나고 송태섭을 만나서도 도무지 집중하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만남에서 태섭에게 다소 신경질적으로 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경기 얘기가 나오자 순간적으로 초라한 기분이 든 나머지 그 기분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짜증을 낸 거였다.
송태섭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아까 영걸과 대화하던 중에도 그랬다. 전화부스를 보는 순간 송태섭 생각부터 났다. 도쿄 출장을 다녀온 뒤로 두 사람은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원래 두 사람이 그렇게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대만은 연락이 없는 태섭이 신경 쓰였다. 그는 제 발 저린 기분으로 태섭의 연락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초조하고 기분이 나빴고, 또 조금은 우울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송태섭에게 먼저 연락하기란 쉽지 않았다.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전화를 걸어 지난번에는 자기가 성질을 부린 것 같다고 순순히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농구가 잘 되지 않아서 전보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는 태섭에게 자신이 왜 그랬는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요즘 들어 정말 별로인 자신의 농구 성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애초에 그러고 싶지 않아서 경기를 보러 가겠다는 태섭을 거절했던 것이다.
태섭이 기분 상했을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정작 그 생각에 확신은 없었다. 어쩌면 태섭은 그 순간에 좀 짜증은 났을지언정 벌써 잊었을 수도 있다. 전부터 송태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정대만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실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그는 분명 무엇인가를 실수했다. 자신의 실수에서 드문드문 흐르다 끊어졌다 다시 흐르기를 반복하는 단조로운 선율이 갑자기 뚝 멈추어 서는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정대만은 자신이 태섭을 친밀하게 여기는 것만큼 송태섭도 그럴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가,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아야 할 것 같은 순간이 오면 마음이 덜컥했다. 열심히 녹화한 비디오를 부친 지 넉 달이 다 되도록 연락 한 통 없는 태섭의 소식을 뒤늦게 애리조나주 신문 기사를 통해 읽었을 때도 그는 그런 기분을 느꼈다.
아니, 얼마 안 가 미국으로 떠날 녀석이 자신과 불현듯 연락을 뚝 끊어놓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타나 작별 인사하는 걸 들었을 때도, 졸업식에서조차 입을 다물고 있던 태섭으로부터 미국 유학이 결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대만은 그런 식으로 갑자기 주저하는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여태껏 그 기분은 찰나의 순간 심장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려놓는 정도에 불과했다. 섭섭한 감정은 농구를 하다 보면 금방 씻겨 내려갔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를 꽉 조이고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시간이 흐르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감정처럼 여길 수 있었다.
하지만 농구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주변이 산만한 요즘에는 주의를 돌릴 만한 게 마땅치 않았다.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와중에도 드문드문 송태섭 생각이 났고 그간의 일들을 자꾸만 되짚어 보게 되었다.
애초에 자기 얘길 잘 하지 않는 녀석이 아닌가. 송태섭은 미국 유학이 결정되고도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대만에게 그 사실을 통보한 녀석이다. 새벽에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놓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감쪽같은 모습으로 스포츠 신문에 모습을 비치는 녀석이다. 이제는 연락도 없이 미국에서 지내다가 느닷없이 몇 년 만에 귀국했는데 지금껏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송태섭을 알고 지낸지도 벌써 8년이 다 되어가지만 대만은 여전히 태섭의 어떤 일면을 생각하면 놀라웠다. 생각에 무심코 끌려가던 대만이 호각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코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곧 경기가 시작할 테고 그는 집중해야 했다.
대만은 고개를 들어 객석에 앉아있는 영걸을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영걸이 손을 흔들었다. 큰 몸짓은 아니었지만 행동 안에 응축되어 있는 기대감과 기쁨이 느껴졌다. 대만은 의지를 다잡았다.
그는 결국 이겨 낼 것이다. 여태껏 노력해 왔으니까.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보답받아 왔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그는 열심히 할 것이다. 영걸에게 팔을 흔들어주다가 손을 내렸다. 고개를 돌렸더니 성준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성준은 곧 대만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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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정대만은 플랫폼이 훤히 보이는 지점에 우두커니 서서 떠나는 전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철이 출발하면서 미지근한 바람을 만들었고 곧이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태섭에게 쏘아붙이듯 한 일, 경기 중에 저지른 실책, 간지럽게 욱신대는 무릎,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센다이 팀원들과 기분 나쁘게 행동하는 성준의 일들이 한 데 뒤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정말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이구만.”
수기표를 집어든 대만의 첫마디였다. 아이치 공업과의 경기는 88:102로 센다이 팀의 승리였다. 정대만은 자신의 성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득점 14점. 슈팅 실패와 턴오버를 따져보면 썩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성적이다. 객석에 앉아있던 영걸은 먼저 일어난 건지 보이지 않았다. 대만은 수기표를 내려놓고 짐을 챙겼다.
출발한 줄 알았는데 영걸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만이 나오자 멋쩍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경기 잘 봤다, 대만아.”
하지만 오늘 정대만은 형편없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나 싶어 잠자코 기다렸지만 경기에 대한 영걸의 소감은 그게 다인 것 같았다. 이영걸은 손목을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정말로 늦을 것 같아. 슬슬 가볼게.”
“오늘 컨디션이 좀 별로였다.”
불쑥 말해놓고 정대만은 민망해서 턱끝을 매만졌다.
“원래는 안 이래.”
영걸은 무슨 말인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만이 넌 실전에 강하잖아. 잘 떨지도 않고.”
“알지.”
뱉어놓고 뒤늦게 부끄러움이 찾아들었다. 멀리서 찾아온 친구 녀석에게 이게 무슨 추태냐. 정대만은 잠깐 말을 더듬거리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활기찬 목소리로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
“아쉽다. 그제 내가 뛰는 걸 네가 봤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만회하기 위해 그제 연습 경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가 막힌 패스를 받아서 슛으로 연결했는지, 요즘은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 보려고 하는지, 도쿄로 출장을 가서는 경기 중에 무엇을 해냈는지 살짝 과장해서 늘어놓았다.
정대만은 영걸이 특히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종종 회고하는 자신의 대학교 3학년 리그 결승선 이야기도 꺼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건 학생 때의 일이고 이제 그는 프로였다. 이번 리그에서는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했다. 상대 팀들은 긴장해야 할 것이다.
“응. 기대하고 있을게.”
영걸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본 다음에야 대만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다음 순간 성준과 눈이 마주쳤다. 성준은 로비를 빠져나오다 말고 대만이 영걸에게 떠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정대만을 본체만체하며 그대로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는 대만이 허세 부리는 걸 다 들었다. 정대만은 너무 민망해서 하려던 얘기를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9월에 보자.”
“응, 대만이 너도 몸 조심하고.”
그는 영걸을 보내고 잰걸음으로 센터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저녁 회식이 잡혀 있었다. 대만은 차를 끌고 나와 곧장 예약을 해놨다는 야키니쿠 집으로 향했다.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근처에 차를 대놓고 들어가니 팀원들 대부분이 앉아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퇴근한 샐러리맨들이 모여 낄낄대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하려면 평소보다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 했다.
예외적으로 오늘은 술을 마시기로 했다. 누군가 목청을 높여 “괜찮죠? 괜찮죠, 오늘은?”하고 외쳤고 또 다른 누군가가 “좀 마시자. 오늘은 좀 마셔.”하고 대답하면서 회식 테이블마다 맥주 주문이 쏟아졌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한 팀원들은 평소보다 느물거리는 태도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쉽게 내려놓고 떠들어 댔다.
대만은 테이블 맨 끝에 앉아 있었다. 맥주를 찔끔찔끔 홀짝이면서 팀원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지만 금방 흥미를 잃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이렇게 지루하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건 그의 문제인 것 같기도 했다. 재빠르게 돌아온 패스를 놓쳐버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대화 주제를 파고들거나 말을 얹으며 사람들 틈으로 섞여드는 그의 능력이 어디론가 가버린 것만 같았다.
반면에 테이블 중앙에 앉아있는 성준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성준은 능청스러운 화법으로 근래 자신에게 있었던 기가 막힌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팀원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팀원들이 가진 버릇, 최근 있었던 일, 경기 중에 주고받은 대화를 센스 있게 캐치해서 농담으로 만들었다.
평소 성준에게 맞춰주려는 면은 있을지언정 저절로 눈치를 보게끔 만드는 그의 미묘한 태도를 팀원들이 마냥 달가워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술기운에 빌어 분위기가 고조되자 성준의 사교적인 능력이 빛을 발하며 그동안에 은은하게 쌓여 온 사람들의 불만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성준에게 집중된 대화 주제가 도돌이표처럼 돌았다. 그동안에 팀원들이 고생했던 일, 예전 감독님의 근황, 누군가 키우는 개, 여자친구와 다녀온 여행 이야기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 갔다 이동했다.
끼려면 낄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술기운이 도는 걸 느끼며 대만이 미간을 눌렀다.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얼마 전에 송태섭과 강백호와 만나서 거리를 쏘다녔던 일이 떠올랐다. 근래 재미있었던 일이라곤 그거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태섭에게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다. 방을 구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릴까. 진짜 여기서 아주 지내려는 건가?
그럼 국내 리그로 돌아오는 건가? 농구를 그만둔 것 같다는 소문 말고 태섭에 대해 더 들려오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계약 이야기가 오고 갔더라도 아직 정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내년쯤일 것이다. 내년에는 송태섭과 다시 코트 위에서 만날 수도 있다.
무시무시한 드리블 능력과 스피드를 가진 미국 유학파 선수가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런 포인트 가드와 궁합이 좋을 것 같은 팀이 어디 어디더라? 몸이 점점 더 나른해지고 생각의 고리가 느슨해졌다. 어느새 정대만은 맞붙어 봤던 실업 팀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서 송태섭이 어느 팀에 들어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깐 바람을 쐬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어어, 그래요.”하고 대답했지만 대만이 드르륵 문을 닫을 즈음 테이블은 벌써 다른 주제에 정신이 팔려 그가 나가는 줄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대만은 술에 취한 걸음으로 주차장을 지나쳐 사거리 근처로 나왔다. 미야기현의 센다이시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는 종종 안개가 끼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바닷가와 꽤 거리가 있는 다가조역과 그의 맨션, 해양 센터와 인근 번화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으로 이사 온 뒤로 대만은 몸에 파고들면 차갑게 느껴지는 서늘하고 축축한 안개를 맞으면서 조깅을 하거나 슈팅 연습을 하곤 했다. 7월 초가 되자 날씨는 딱 기분 좋게 선선해졌다. 오늘도 그런 선선하고 기분 좋은 저녁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대만은 신호등 옆에 설치된 전화 부스로 들어가서 동전을 넣고 송태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뺨에 수화기를 가져다 댄 채 부스에 몸을 기대고 한참 기다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가로등과 가로수가 가깝게 붙은 탓에 거대해진 나뭇가지 그림자가 부스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받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받아?’
보고 싶은데 왜 안 받는 거야. 평소엔 잘만 받아놓고. 내가 그렇게 잘못했냐? 곧이어 잘못하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받을 수도 있지, 그래…. 입맛을 다시면서 마른세수를 하던 대만은 이번에는 영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영걸은 출장 중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오늘 경기까지 보고 가지 않았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면 누구에게 전화를 걸지. 누구한테 걸어야 하지. 다이얼 위에서 흐느적거리던 손가락이 얼마 안 가 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는 받을 것 같았다. 그 예감에 응답하듯 경쾌한 신호음이 얼마 안 가 뚝 끊어지더니 무뚝뚝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해 왔다.
“예, 여보세요.”
“어. 나다.”
대만이 말했다.
“네가 누군데.”
“짜식… 모른 체하기는.”
채치수가 발끈했다.
“술 마시고 꼬장 부리는 녀석 따위 나는 모른다. 취했으면 들어가서 얌전히 잠이나 자라, 정대만.”
“거 봐…. 나인 거 알잖아. 모른 척은 왜 하냐?”
이쯤 되자 채치수는 정말로 황당한 듯했다.
“용건 없으면 끊겠다.”
“용건이 없긴 왜 없어?”
그러나 용건은 없었다. 채치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대만은 부스에 기대어 있던 자세를 바로 잡았다. 붙잡기는 했지만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뜸을 들이던 대만은 치수에게 요즘 어떻게 살고 있냐고 물었다. 채치수는 그의 행동거지가 어이가 없는 듯했지만 잠시 후 순순히 자신의 근황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치수는 요즘 아는 사람의 폐업 정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대학 동기 사이인데 요식업을 하다 얼마 전 쫄딱 망하는 바람에 이것저것 처분해야 할 물건이 많다고 했다. 치수는 동네 자영업자들을 중계해 주면서 가게에서 쓰던 조리도구나 중고 전자제품을 처분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혹시 대만 주변에도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냐고 물었는데, 정대만은 별 고민도 없이 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겠냐….”
“그렇지. 너한테는 기대가 없긴 했다.”
“그보다 거기 옷장은 없냐? 옷장 있으면 내가 하나 살게. 나 집에 변변한 옷장이 없다.”
“라멘 집이라는 거 못 들었나. 네 생각엔 거기 옷장이 있을 것 같냐?”
“그런가….”
“그래, 얼간이 녀석 같으니라고.”
웃긴 얘기도 아닌데 힘없이 킬킬대며 대만은 다시 부스에 몸을 기댔다. 태섭이나 백호와 있을 적에도 그렇긴 했지만 북산고 녀석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시절이, 모두가 온몸을 바쳐서 농구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게 어떤 건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진심을 다해 체감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다시없을 팀이었다. 농구에 대한 열정을 뜨겁게 불태우고 부추기는 상대가 당연한 듯 옆에 있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런 녀석들과 한 팀이었다는 건 행운이었다. 전화기 위로 춤추는 나무 그림자와 남은 잔액이 표시된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야, 치수야. 넌 농구가 재미없던 적 있냐?”
대만이 곧바로 자문자답했다.
“난 없다.”
채치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안다. 넌 그런 놈이었지.”
대만의 입꼬리가 힘없이 떨려왔다.
“그래….”
‘근데 농구가 재미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냐?’
이건 말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채치수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구시렁거리는 듯했지만, 결국 질문에 대답했다.
“한 번도 재미없던 적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만사가 매번 좋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아까보다는 미미하게 너그러운 목소리였다. 채치수는 무언가 더 얘기할까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는지 화제를 돌렸다.
“난 올해까지 하고 관둔다.”
“…뭘 관둬?”
“아예 못 들었나 보군. 강백호 녀석이 얘기 안 해주던?”
“뭔 소리야. 잘 뛰던 놈이 갑자기 왜 관둬?”
“정대만,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슬슬 주변에 관심을 좀 가져봐라.”
“아니, 갑자기 왜 관두냐니까? 너까지 왜 이래. 어디 다쳤어? 그래서 그래?”
“안 다쳤다. 관두는 건 리그 끝난 다음에 얘기할 거야.”
술이 깰 듯 말 듯 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손등으로 비비면서 대만이 따지듯 말했다.
“너 그걸로 만족하냐?”
채치수는 조금 짜증이 난 듯했다.
“그래. 이만하면 됐으니까. 오래 고민한 문제다. 그만 토 달아.”
그러면서 그는 강백호가 길길이 날뛰더니 자기 집 앞까지 찾아온 얘기를 꺼냈다. 치수는 강백호를 납득시킨다고 꽤나 애를 먹은 것 같았다. 왜 자기 일을 네 녀석들에게 납득시켜야 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던 채치수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생각에 잠긴 대만에게는 큰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마침내 채치수의 목소리는 생각 뒤편에 깔린 배경소리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갑자기 뭐야. 쓸쓸하게….’
어쩐지 마음이 허했다. 그동안 대만의 주변에 농구를 그만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학 동기였던 많은 녀석들이 전업 농구 선수를 관두고 다른 길로 떠났다. 하지만 적어도 북산고 농구부 녀석들만큼은 다를 줄 알았다.
무언가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 시절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영원하게 느껴지곤 했으니까. 까마득하고 가물가물한 만큼 어떤 순간들이 도리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대만은 그 기억을 양분 삼아 앞으로의 일들을 낙관하곤 했다. 모두가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변을 일으킨 적 있다고, 죽어라 하면 안 되는 건 없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고, 그렇게 해서 그 산왕을 이겼다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해 나갈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관둔다니. 그런 경험을 해놓고, 그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만둔다고. 그럴 수가 있나? 머리로는 납득하면서도 사실 진심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채치수의 은퇴 선언이 꼭 근래 격변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무언의 예고처럼 느껴져서 대만은 어쩐지 화가 났다. 그에게도 때가 올 것만 같았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것을 의심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그 두려움에 대항하려고 말했다.
“근데 난 농구 안 그만둘 거다.”
입으로 내뱉자 의지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 누가 그만둘 것 같냐? 그런다고 내가 그만둘 것 같냐.”
하지만 곧이어 눈앞으로 농구공이 골대를 맞고 퉁겨져 오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공은 몇 번이고 골대를 맞고 퉁겨져 올랐고 그의 실수를 낚아채기 위해 수십 개의 손이 아래서 천천히 솟구쳐 올랐다. 끽소리를 내며 멈추어 서는 운동화와 왁자지껄하게 테이블에 모여 앉은 팀원들. 포카리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을 축축하게 만들었고 잠시 후 영걸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로비에 서 있었다.
대만은 어느새 눈썹 사이를 문지르며 중얼대고 있었다.
“근데 나 말이야. 요즘 하나도 폼이 안 난다.”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걸 하고 있는데 면이 안 살면 어쩌잔 거냐? 좋아하는 걸 하는데. 농구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수화기를 움켜쥔 채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머리를 짓누르며 몸을 홧홧하게 만드는 술기운이 불러온 감상에 빌어 화를 내는 건지 따지는 건지 하소연을 하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 말들을 쏟아냈다. 정대만은 채치수에게 대체 왜 농구를 관두는 거냐고 물었다.
혹시 전보다 못해서 그런 거냐고 했다. 확실히 네가 전보다 성적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나쁜 것도 아니고 선수라면 누구나 기복이 있는 건데 왜 그걸로 끙끙대는 거냐고 했다. 아니면 혹시 부동산 사기를 당했냐고 했다. 자기 주변에 주식 투자로 쫄딱 망해서 사라진 대학 동기들이 있는데 설마 너도 그런 쪽인 거냐고 했다.
아니면 혹시 너도 세계가 망한다는 얘기를 믿기라도 하는 거냐고 했다. 그렇다. 생각해 보니 납득이 됐다. 세계가 망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수종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점점 히키코모리가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길을 걷다가 죄 없는 시민들을 찌르고 방화를 저지르고 테러를 일으킨다고 했다. 있던 재산을 처분하고 휴거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도 했던 것 같다. 그는 마지막 날 뭘 하고 있을까?
‘농구하고 있겠지.’
대만은 세계가 멸망하는 게 무서웠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사실 그건 별로 무섭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무서운 건 죽기 전에 자신이 농구를 좋아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대만이 물었다. 나중에는 목소리를 높여 따지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너무 오랜 시간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을 더 떠든 뒤였다. 대만은 채치수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다가 전화기 모니터를 확인했다. 남아 있는 전화 요금 잔액이 없었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가 얼굴 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전화는 끊어진지 오래였다.
16
영걸이 다녀간 뒤로 대만은 전보다 훨씬 악착같이 연습하기 시작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자신을 보러 온 영걸에게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한동안 마음이 안 좋았다. 그는 새벽 다섯 시부터 일어나 공원을 끼고 언덕을 빙 돌아서 지역구 주민 체육관까지 조깅을 한 다음, 울타리를 타고 넘어가 체육관 외벽에 딸린 야외 코트에서 한 시간도 넘게 슛 연습을 했다. 체육관이 열릴 시간에는 출근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른 새벽에 그렇게 잠긴 울타리를 넘어가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어도 쌀쌀한 새벽 공기와 희뿌연 안갯속에서 몇 번이고 공을 던지다 보면 서서히 시야가 맑아지고 주변 사물에 빛이 깃들면서 시간에 따라 바뀌는 환경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는 자전거가 찌릉 소리를 내며 페달을 밟고 지나가면 대만도 슬슬 맨션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정말로 그만의 시간이었다. 침묵에 싸인 삭막한 공업 도시 주택가에 맴도는 고요한 분위기와 일순 공간과 유리된 듯한 감각이 공을 던지고 포물선을 응시하는 순간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을 길게 늘이다 보면 필름이라기보다 하나의 땅처럼 보이기 시작한 시간선에서 불현듯 안개와 함께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지어진 잿빛 맨션들과 단독 주택이 입체 그림책을 펼칠 때처럼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대만은 그 과정을 거꾸로 되풀이해서 포물선을 응시할 때 닥쳐오는 침묵의 순간을 돌려받고 싶었다. 그 순간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계속 공을 던지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무릎은 혼자서 연습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다리 근육은 매번 기분 좋게 조여들었고 발바닥은 그를 언제까지고 공중으로 들어 올려주었다. 하지만 몸에 이상이 없을 때조차 농구공은 몇 번이고 골대에서 튕겨져 나왔다. 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공을 볼 때마다 맥박이 불안하게 요동쳤고 그가 돌려받고자 하는 순간이 점점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년 동안 던져왔는데도 림이 너무 멀게만 보였다. 아니, 림은 오히려 그동안 더 가까워진 것도 같았다. 아니다. 어쩌면 둘 다 아닌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만은 그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정대만은 다시 자세를 잡고 똑바로 섰다. 그러고는 점프했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높게 솟아올랐다. 부드럽게 돌면서 솟구쳐 오른 공은 영원히 그곳에 매달려 있을 것처럼 느릿느릿 회전을 멈추었다가 찰나의 순간 자신이 떨어질 곳을 결정했다. 어느새 안개에 싸인 이른 아침의 공기가 걷히고 실내 체육관 지붕을 떠받치는 철제 구조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체육관 조명이 농구공의 존재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잠시 후 공이 골대를 맞고 퉁겨져 나왔다.
“리바! 리바운드!”
벤치에서 일어난 곽 감독이 손을 휘저어 포워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날쌘 양치기 개처럼 달려온 수종이 입을 헤 벌리고 공을 전광석화로 낚아챘다. 공중에서 곧바로 방향을 튼 수종이 대만에게 패스를 던졌다.
손에서 떠나보낸 지 몇 초도 안 돼서 다시 공이 돌아왔다. 대만은 주춤거렸다. 상대편으로 갈린 임학규가 파란 운동화를 앞으로 내밀면서 재빨리 그의 경로를 막아섰다. 순발력 있는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두 사람 모두 라인에 가깝게 붙어 서 있었다. 이런 순간마다 정대만은 종종 예고도 없이 3점 슛을 날리며 객석의 사기를 끌어올리곤 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선택지가 있었다. 슛? 돌파?
공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하반신에 무게 중심이 이동하려는 때였다. 대만이 마음을 바꾸었다. 스틸을 시도하기 위해 앞으로 쭉 뻗은 임학규의 팔이 슬로모션처럼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어깨를 움츠리고 팔을 뒤로 젖히면서 대만이 재빠르게 임학규를 제치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다음 순간 몸이 무언가와 부딪치고 휘슬이 불렸다.
“파울!”
퉁, 퉁 소리를 내며 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임학규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대만은 달리려던 자세 그대로 굳었는데 그 모습이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정대만은 방금 자신이 스스로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슛을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팀원들이 두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대만이 손을 내밀었다. 임학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대만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두 사람이 코트로 돌아가려는 순간 휘슬이 불렸다. 곽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감독은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했다.
“쭉 봤는데 전반적으로 오늘 다들 컨디션이 별로인 게. 곧 퇴근 시간이니까 오늘은 이만하고 들어가세요.”
어쩐지 자기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대만은 뒷짐을 진 채 오른쪽 발을 뒤로 물렸다. 고작해야 십 분 일찍 퇴근하는 거였지만 그것도 조기 퇴근이라고 팀원들은 꽤 달가운 눈치였다. 권수종은 벌써부터 가방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독이 나가자마자 수종은 쏜살같이 출구로 사라졌다.
대만도 짐을 챙겼다. 물병과 수건을 더플백에 잘 개서 넣고 일어나는데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강성준이 씩씩대며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성준과 싸우고 있는 상대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입단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왕공고 출신의 센터였다. 말다툼이 격양되자 성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대만 쪽을 잠깐 노려보기까지 했다.
소란에 이끌린 팀원들이 어느새 성준을 둘러쌌다. 팀원 하나가 그의 팔을 붙잡자 성준은 부드럽지만 완고한 태도로 손을 떨쳐내고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이마를 짚었다. 대만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차갑게 읊조리는 성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틀린 말 했나?”
“그건 아니지, 성준아.”
“형, 상황 빤히 다 아는데 그렇게 말할 거예요?”
“아아. 대만 씨. 미안해요.”
팀원 하나가 대만을 붙잡아 세웠다. 팀원은 말하지 않아도 대만의 기분을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성준 형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두 분이서 말하다 좀 의견이 벌어졌나 봐요.”
“뭘 컨디션 탓이야. 내가 못 할 말 했어?”
성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만하자. 대만 씨, 미안해요.”
“아니. 반응들이 왜 이래. 나만 느끼는 거 아닐 텐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센터가 대꾸하자 성준이 조소했다.
“정말로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런데 전 잘 모르겠거든요.”
성준이 대만을 쳐다보았다.
“뭐 얼마나 잘 던진다고 저 사람 데려오느라 현우 형이 관둬야 했던 거예요?”
센터가 침착하게 말했다.
“성준 씨. 그만합시다.”
그는 경어를 쓰면서 성준과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렇게 보일 수는 있는데 아닌 거 알잖아요. 현우는 원래 리그 문제 때문에 감독님하고 좀 복잡했었고. 우리도 당장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요.”
“무슨 소립니까?”
대만이 불쑥 물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대만이 퉁명스레 말했다.
“이 참에 좀 속 시원하게 털어놓읍시다. 그 8번 저 때문에 관둔 거 맞아요? 누군 아니라고 하고 누군 또 맞다고 하고.”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팀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지만 그들 자신도 정확히 누구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책임을 질 상대를 수색하는 듯한 눈빛이 오고 가자 성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밀치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침묵 속에서 한동안 성준이 가방을 챙기고 지퍼를 닫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성준은 신경질적인 발소리를 내면서 체육관을 빠져나가버렸다.
체육관이 조용했다. 대만이 홀로 남겨진 센터를 멀뚱히 쳐다보자, 센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복잡한 문제인데….”
“잘됐네요. 무슨 일이길래 다들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는지 좀 들어나 봅시다.”
대만이 말했다.
센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대만 씨 탓은 아닙니다. 저희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으니까 오해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야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센터는 팀 창설 첫 해부터 최근까지 슈팅 가드의 자리를 지켜 온 원년 멤버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가 바로 센다이 8번 양현우로, 최근 들어서는 성적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작년 리그에서 대만의 이전 실업 팀과 맞붙게 된 것이었다.
“뭐…. 아시겠지만 그때 현우 형이 대만 씨한테 완전히 막혔었죠.”
하필 임원진들이 관전을 와 있던 경기였다. 기존 팀들이 분리되고 프로 리그가 창설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팀의 존패를 두고 말이 많은 시기였다. 8번이 어떻게 인상에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긍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만이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팀이 분리됩니까?”
팀원들 몇몇도 처음 듣는 눈치였다. 센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예…. 저도 감독님에게 들은 거라 잘은 몰라요. 윗선에서 기존 리그 싹 밀고 프로 리그를 만든다던데요. 슈퍼 리그라던가.”
그렇다면 기존의 실업 팀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끝까지 실업 팀으로 남는다면 차차 동호회에 가까운 집단으로 굳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오래가기는 어렵다. 기업들은 결국 운영 방침을 다시 세우고 본격적으로 프로 선수를 양성하는데 투자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실 현재로서 일본의 실업 농구 팀은 사회 체육 운동 시설 및 단체 운영이라는 명목하에 운영되는 기업의 공익사업이나 다름없었다. 프로 리그 창설을 핑계로 그동안 애물단지였던 팀을 해체하는 기업들도 없진 않을 것이다. 특히 그동안 성적이 시원찮은 팀이었다면 지속될 필요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선수들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더는 사내 업무를 병행하면서 선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뀌게 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그 창설을 두고 내부에서도 말이 많다고 했다. 기존의 실업 리그를 운영해 왔던 전일본 사회인 농구 연맹이 자리를 이어갈 것인지, 통상산업성에서 떨어져 나온 사단법인 스포츠산업단체연합회가 설립을 추진 중인 새로운 농구 협회에 그 권위를 넘겨줄 것인지를 두고 윗선에서 지지부진한 기싸움이 이어지는 중이라고 했다.
8번이 은퇴를 결정한 데에는 이러한 격변기를 맞이한 일본 프로 농구 리그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망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게 센다이 센터의 주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작년 리그, 특히 정대만이 그를 정면 승부로 눌러버렸던 4강이 큰 문제처럼 다루어졌다. 그 경기에서 8번이 보여준 기량과 성적은 임원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진 알 수 없지만 감독과 스카우터가 한동안 양현우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모양새가 좋지는 않았다. 팀원들은 불똥이 튈까 봐 입을 다물었다. 은퇴가 결정되기 전까지 이러한 분위기에 직접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건 성준이 유일했다.
결국 8번의 은퇴가 결정되고 얼추 좋은 이별의 모양새를 내겠다고 영구 결번 이야기가 오고 가자 그동안 침착하게 상황을 설득해 오던 성준은 크게 화를 냈다. 그런 와중에 임원진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정대만의 이적이 결정된 거였다.
그로부터 이 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성준의 완고한 태도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항의와 개인적인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있을 것이었다. 그동안 이 문제를 두고 감독과 끈질기게 이야기를 나누긴 했을 텐데 팀원들 모두 자세한 건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대만은 생각했다.
‘어쨌든 화풀이란 소리 아냐?’
아무튼 자초지종을 들으니 그간의 일들이 어느 정도 납득은 됐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채치수가 비슷한 얘기를 얼핏 했던 것도 같다. 술에 취해 생각에 빠져들면서 중간부터는 거의 듣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마 채치수도 이런 문제 때문에 은퇴 결정을 내린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대충 그렇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센터가 말했다.
“성준이가 그래도 대만 씨한테 잘해주려고는 해요.”
대만은 황당해했다.
“그래요?”
“아닌가?”
센터가 민망하게 주변을 둘러보자 팀원 하나가 심드렁하게 말을 얹었다.
“뭐, 둘이 요즘 좀 어색하긴 했어요.”
‘좀 어색해?’
센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같이 지내다 보면 잘 풀릴 거예요. 성준이가 나쁜 애는 아니니까.”
체육관을 빠져나가면서 팀원들이 대만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일이 더 커지지 않아 마음을 놓는 한편으로 조금 피로해 보였다. 조기 퇴근이라더니 결국 평소보다 늦게 나가는 것 같다고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하자 다들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팀원들은 로비에서 인사를 나누고 센터 앞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귀가하는 동안 대만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맨션으로 돌아온 그는 샤워를 하고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팔짱을 끼고 천장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울렸다. 그는 꿈틀대며 소파에서 내려오다 말고 퍽 하고 넘어졌다.
전화를 건 사람은 놀랍게도 송태섭이었다.
“전화하셨더라고요.”
송태섭은 요즘 바빠서 대만이 남긴 메시지를 이제야 확인했다고 했다.
어쩐지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으로 대만이 물었다.
“내가 너한테 메시지를 남겼다고?”
“예…. 뭐. 목소리부터 술에 꼴아 있는 거 같긴 했어요.”
대만은 입가를 문질렀다.
“뭐라고 남겼는데?”
“왜 전화 안 받냐고 신경질 부리던데요.”
“그게 다야?”
“다죠 그럼. 뭐 더 있어야 돼요?”
“아니, 뭐….”
대만은 수화기를 든 채 자세를 바로 했다. 태섭이 말을 더 이어가지 않는 게 어쩐지 그를 초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연락은 왜 안 받았냐?”
“저 요즘 집 보러 다닌다고 했잖아요.”
태섭이 강조하듯 덧붙였다.
“진짜 바빠요, 요즘.”
솔직히 거짓말 같았다. 정대만은 송태섭이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은연중에 단정 지었다. 불쑥 찾아드는 태섭에 대한 생각으로 자기도 모르게 전화기를 바라보며 마음을 졸여야 했던 지난 시간 때문인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할 땐 언제고 괘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근데 왜 전화하신 거예요?”
태섭이 물었다.
“뭘?”
“아니, 메시지에서 열 번은 넘게 전화했다고 구시렁거리길래.”
“열 번은 아니다, 솔직히….”
말끝을 흐리던 대만이 침을 삼켰다.
“너 9월 리그 보러 올래?”
태섭은 잠깐 침묵했다.
“누가 농구 보러 가는 거 싫다면서요?”
“어…. 아냐. 아무튼, 티켓 빼놨거든.”
“시간이 될지 모르겠는데.”
태섭은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안 올 거냐?”
“잘 모르겠다니까요.”
그런 다음 침묵이 이어졌다. 사실상 태섭이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몇 초 되지 않을 것이고 여태껏 두 사람이 전화를 주고받으면서 이런 식으로 말이 끊어지는 순간이 없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만큼은 그 침묵이 무언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대만은 할 말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너…. 너 혹시 화났어?”
“예?”
“그날 경기 보러 오지 말라고 해서…. 많이 서운했냐?”
“음.”
태섭은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걸로 화를 왜 내요. 제가 선배인 줄 알아요?”
‘그럼 왜 연락을 안 했는데?’
묻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말이 맴도는 게 느껴졌다. 한 번 따져 묻기 시작하면 그는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뭘 설명해야 될까.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대만의 솔직하고 고약한 성미가 그의 입을 열어젖히고 무언가 물어보려고 들었다.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다가 황급히 재조립되었다. 어느새 대만은 그때 신경질을 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해 늘어놓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걸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전화를 피한 거였는데 막상 입으로 뱉고 나니 진실과 가장 가까워서 죄책감조차 없는 변명처럼 느껴졌다. 정대만은 자기 최근 상태가 좀 별로라서 딱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날 말인데.”
대만이 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가 사실 다리가 좀 안 좋았다.”
“예? 다쳤어요?”
“아니, 다친 건 아니고.”
태섭은 놀란 눈치였다.
“병원에서 뭐래요?”
“이상 없다고 하지. 아픈 건 아니니까.”
“그럼?”
“아니….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 던질 때 신경 쓰였었어.”
“저번에 그 소매치기 잡다가 엎어졌다는 그거예요? 증상이 뭔데요.”
태섭이 꼬치꼬치 캐묻자 대만이 음 하고 말을 끌었다.
“그냥 뛸 때 살짝 조이고 가끔 간지러운 정도야. 매번 그런 건 아니고 또 안 그럴 때도 있는데.”
대만은 근래 무릎에서 느꼈던 경미한 이상 증세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태섭은 잠자코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태섭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근데 그거 늘 그렇지 않았어요?”
생각조차 못한 대답이라 대만은 깜짝 놀랐다.
“뭐?”
“형 대학생 때요.”
송태섭은 기억도 안 나는 예전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생 때도 대만이 가끔 무릎에 그런 느낌이 온다는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는 것이다. 큰 문제가 아니라는 듯 말하고는 정말로 얼마 뒤에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는 듯 굴어서 태섭은 매번 정말 별 거 아니었나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고 했다.
듣고 보니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랬다. 농구를 다시 시작한 뒤로 대만은 종종 무릎 부상에 대한 경미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따금 살짝 저리거나 간지럽게 조여드는 느낌이 있었고 경기 중에도 종종 그런 감각이 그를 붙잡고는 했었다.
그러나 대만은 금방 그러한 일들을 잊어왔다. 무심한 습관으로 마사지나 찜질을 하면서, 다음 경기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날아다니고 활약해 가면서, 코트 안팎으로 쏟아지는 견제와 증오, 동경과 응원을 즐기면서 그는 금세 그 일들을 잊었다.
“그러게.”
대만이 중얼거렸다.
“그랬네. 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요즘은 너무 많은 것들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팀원들 간 사이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고, 무례하고 뻔뻔한 수종의 태도도 그대로였다. 성준은 여전히 대만을 껄끄러워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어색하고 낯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센다이 팀이 그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것은 조금 전 성준과 대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하고 걸쩍지근한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할뿐더러 그걸 느꼈더라도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거리를 두는 팀원들의 태도와도 연결되는 이야기였다. 정대만은 이제 받아들여야 했다. 팀원들이 딱히 나쁜 의도를 감추거나 그를 따돌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그냥 관심이 없었다. 각자의 사정으로 바빴기 때문에 다들 서로에게 신경을 끈 지 오래되었고, 어쩌다 한 번씩 팀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면 하나같이 눈앞의 문제가 자신의 삶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발을 빼는 데 익숙해져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그들의 무관심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대만을 긴장 상태로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도쿄에 있을 적에는, 그가 대학에 다닐 적에는, 적어도 대만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사람들은 쉽게 그를 좋아했고 가끔은 그에게 호감을 사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끔 하는 그의 어떤 일면을 적대했다.
낯선 공업 도시로 이적한 뒤 정대만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관심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누군가 자신을 신경 쓰거나 견제하려 들고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면서 호의를 드러내는 환경에 무감하리만큼 적응해 있었는지 서서히 깨닫는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농구로 주목받지 못한다고 느낀 건 고등학교 1학년, 그것도 농구부에 막 입부했던 때가 다였다. 그때의 초조함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 시절이 바로 등 뒤에 붙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직접 고른 곳에서, 직접 골랐기 때문에 그 선택에 마땅히 끌려와 줄 것으로 기대했던 상황이 그를 배반하기 시작하자 대만은 금세 방향을 잃었다. 그 결과 그는 고교 시절 무릎 부상을 악화시키고 일 년 넘게 코트 바깥을 떠돌았다. 스물여섯 살의 대만은 이제 그것이 자신의 노력과 무관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다.
최선을 다한 노력에 응답하지 않는 세계라니. 하지만 그의 무릎이야말로 그러한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었다. 그런 세계를 대만은 모르지 않았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가 노력한다고 상황이 항상 잘 풀리지만은 않는다는 걸, 그게 세상만사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만은 줄곧 모른 체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럴 필요성이 지금까지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무릎에 사소한 낌새만 느껴져도 불안해하다 못해 금세 그쪽으로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
마음을 편히 먹어야 했다. 의사의 말이 맞다. 그는 그저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지나치게 곤두서 있는 것뿐이었다.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농구를 하느라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하고 무심히 흘려보냈던 일들을 돌아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대만이 얼굴을 문지르며 작게 고백했다.
“송태섭. 나 슬럼프인가 보다.”
어쩌면 대만에게도 사소한 불의와 인간관계의 껄끄러움, 나와 타인이 가진 피로한 분노에 무심해지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아야만 하는 때가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미적지근한 세상의 순리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계라니. 그런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이제 와서 그 뜨겁고 차가운 세계와 이별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 같은 건 할 줄 모른다. 정대만은 그저 언제까지고 농구를 잘하고 싶을 뿐이다.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는 건 여태껏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노력하면 응답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었다. 소년만화, 통속극,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소설, 하다못해 그의 삶, 정대만을 뛰고 움직이게 만드는 그 자신의 역사에도 존재했다. 이야기, 그렇다. 이야기였다. 재능인으로서 스포츠를 한다는 건 그 이야기를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건 그의 탓만은 아니다. 이 모든 건 그가 특출나게 오만하거나 우쭐대는 인간이라서 겪는 일이 아니다.
정대만이 과연 철들 수 있을까?
“그래도 경기 보러 와. 만나서 또 밥 먹자.”
약해진 목소리로 대만이 말했다.
진다이 대 JR 동일본 센다이 약식 경기는 76:98로 이변 없는 센다이 팀의 승리였다. 그날 정대만은 다른 팀원들과 함께 신칸센을 타는 대신, 약속이 있다며 먼저 빠져나갔다가 늦은 시간에 혼자 야간 고속버스를 타고 센다이시로 돌아왔다.
이영걸은 신덴히가시 해양 센터 로비에 앉아 있었다. 7월 초였다. 강렬한 햇빛이 천장에 난 통창으로 쏟아지는 가운데 바깥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의 쏟아지는 소리가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떠밀리듯 들려오는 멋진 날이었다.
이 센터는 이름에 ‘해양’이 붙어서 수족관이나 연구소라는 오해를 자주 받았다. 실상 이곳은 대형 실내 체육관과 수영장을 운영하는 시립 체육관으로, 입구에 센터의 건설 비용 대부분을 댄 ‘해양 건설 도지마’를 기념하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지만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민들 중에서도 이 체육관 이름이 왜 하필 해양 센터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만이 로비로 나왔을 때 이영걸은 자세를 수그리고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을 읽고 있었다. 몇 달 만의 만남이었지만 대만은 그의 오랜 친구를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영걸이 밝은 얼굴로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대만아, 오랜만이다.”
“어. 온다고 고생했다.”
“아냐, 그렇게 멀진 않더라고.”
졸업 후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던 영걸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일은 의외로 세일즈맨이었다.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그가 운이 좋았다고들 한다. 경제 불황이 한 세대 안에 끝나지 않을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고, 있는 일자리마저 잃기 십상인 요즘엔 프리터 생활이나 이어가면 다행이었다. 상황은 그만큼 형편없었다. 사실 대만과 같은 실업 운동인이나, 그러한 실업 팀을 운영할 만큼 형편 좋은 회사가 아닌 이상은 취직 후에도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된 지 오래였다. 허무맹랑한 세계 멸망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건 어쩌면 다들 이러한 막연한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람하고 덩치가 산만 한 영걸은 처음엔 도무지 세일즈맨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몇 달 만에 마주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특유의 풍채는 공들여 모서리를 접은 종이 접기마냥 정장 안에 잘 감추어져 있었고, 그래서인지 실제로는 그렇게 몸이 쪼그라든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전과 같은 위압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영걸은 공공기관과 일부 사설 업체에 전자제품을 납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회사와 완만한 관계를 유지 중인 거래처를 돌면서 도쿄와 인근 대도시를 돌아다녔는데, 이번에는 어찌어찌 센다이시까지 오게 되었다. 거래처 하나가 이쪽에 공장을 만들면서 사무실을 통째로 이전했다고 했다.
때마침 영걸에게 줄 게 있었던 대만은 오랜만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그 기막힌 우연을 냉큼 약속으로 만들었다. 그가 건네준 것은 10월에 있을 JBL 시즌 전 전국 실업 팀이 합을 겨루어 보는 9월 실업단 농구 선발 대회 티켓이었다. 바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꼭 보러 올 필요는 없다고 했는데, 올해는 갈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고 횡설수설하던 영걸은 결국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꼭 보러 갈게.”하고 대답했다.
“난 네가 자랑스럽다, 대만아.”
“알지. 늘 고맙다, 응원해 줘서.”
“그게 뭐 어렵다고….”
영걸은 민망해하다가 낄낄거렸다.
“역시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같다. 네가 그 센다이 팀 선수라니. 작년에 졌을 때 엄청 분해했으면서.”
“그러는 너도 멀쩡한 세일즈맨 행세를 하고 있잖아. 봐라, 이게 내가 알던 이영걸이 맞냐? 처음엔 누군지도 못 알아봤다.”
“내가 와인색이 좀 잘 받기는 하지.”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로비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저녁이라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대만은 곧 시합에 들어가야 했고, 영걸도 내일의 일이 있으니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시합만 좀 관전하다 가겠다는 영걸을 앞에 두고 대만은 잠깐이지만 머뭇거렸다.
“시간이 돼?”
“끝나고 바로 출발하면 아슬아슬 맞출 수 있어. 6시 기차거든.”
“그러냐.”
뒤통수를 주무르던 대만은 무심코 로비 바깥에 놓인 공중전화 부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어떤 생각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 있었다.
잠시 후 대만이 대답했다.
“알겠다. 열심히 뛸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대만은 오늘 경기에서 제대로 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지난 출장 경기를 기점으로 야투율이 점점 형편없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에는 열에 여덟 번은 실패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슛감을 완전히 잃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던지기만 해도 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의 풍경이 조금 멀어졌다고 해서 대만이 그동안 한 골도 넣지 못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활약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뒤로 그는 단 한 경기도 활약하지 못했다.
영걸은 오랫동안 그를 응원해 준 친구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만이 뛰는 시합이라면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그의 활약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런 영걸에게 예전만 못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오늘 대만은 경기에서 뭐라도 보여줘야 했다. 곧 있을 시합이 약식으로 진행되는 변변찮은 연습 경기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경기장으로 나온 대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센다이 팀원들이 드문드문 모여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대만은 코트 구석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중간에 수종과 눈이 마주쳤지만 수종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더니 금방 자기만의 루틴으로 빠져들었다.
스트레칭을 하다 보니 병원 진단 결과 생각이 났다. 둘째 날 도쿄 출장 경기를 마치고 인근 대학 병원에 내원한 대만은 마찬가지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소견을 받고 요코하마 숙소로 돌아왔다. 오히려 그의 몸 상태는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쌩쌩했다. 의사들은 하나같이 모든 건 마음에 달린 문제라고 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야투율뿐 아니라 다른 방면에서도 문제가 벌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출장 경기 내내 슛 찬스를 득점으로 만들지 못해 애를 먹었다가, 마지막 날에는 순간적으로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상대 선수의 고의 파울에 말려들기까지 했다. 대만의 실수는 상대 팀의 중요한 득점으로 이어졌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였다.
경기 자체는 이겼지만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 끝나고 송태섭을 만나서도 도무지 집중하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 만남에서 태섭에게 다소 신경질적으로 굴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경기 얘기가 나오자 순간적으로 초라한 기분이 든 나머지 그 기분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짜증을 낸 거였다.
송태섭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아까 영걸과 대화하던 중에도 그랬다. 전화부스를 보는 순간 송태섭 생각부터 났다. 도쿄 출장을 다녀온 뒤로 두 사람은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원래 두 사람이 그렇게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대만은 연락이 없는 태섭이 신경 쓰였다. 그는 제 발 저린 기분으로 태섭의 연락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초조하고 기분이 나빴고, 또 조금은 우울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송태섭에게 먼저 연락하기란 쉽지 않았다.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전화를 걸어 지난번에는 자기가 성질을 부린 것 같다고 순순히 인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기가 힘들었다. 농구가 잘 되지 않아서 전보다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는 태섭에게 자신이 왜 그랬는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요즘 들어 정말 별로인 자신의 농구 성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애초에 그러고 싶지 않아서 경기를 보러 가겠다는 태섭을 거절했던 것이다.
태섭이 기분 상했을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정작 그 생각에 확신은 없었다. 어쩌면 태섭은 그 순간에 좀 짜증은 났을지언정 벌써 잊었을 수도 있다. 전부터 송태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정대만은 자신이 무언가 실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실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그는 분명 무엇인가를 실수했다. 자신의 실수에서 드문드문 흐르다 끊어졌다 다시 흐르기를 반복하는 단조로운 선율이 갑자기 뚝 멈추어 서는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처음은 아니었다. 정대만은 자신이 태섭을 친밀하게 여기는 것만큼 송태섭도 그럴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가,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아야 할 것 같은 순간이 오면 마음이 덜컥했다. 열심히 녹화한 비디오를 부친 지 넉 달이 다 되도록 연락 한 통 없는 태섭의 소식을 뒤늦게 애리조나주 신문 기사를 통해 읽었을 때도 그는 그런 기분을 느꼈다.
아니, 얼마 안 가 미국으로 떠날 녀석이 자신과 불현듯 연락을 뚝 끊어놓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타나 작별 인사하는 걸 들었을 때도, 졸업식에서조차 입을 다물고 있던 태섭으로부터 미국 유학이 결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대만은 그런 식으로 갑자기 주저하는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여태껏 그 기분은 찰나의 순간 심장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내려놓는 정도에 불과했다. 섭섭한 감정은 농구를 하다 보면 금방 씻겨 내려갔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를 꽉 조이고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시간이 흐르고 보면 별 것도 아닌 감정처럼 여길 수 있었다.
하지만 농구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주변이 산만한 요즘에는 주의를 돌릴 만한 게 마땅치 않았다.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와중에도 드문드문 송태섭 생각이 났고 그간의 일들을 자꾸만 되짚어 보게 되었다.
애초에 자기 얘길 잘 하지 않는 녀석이 아닌가. 송태섭은 미국 유학이 결정되고도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대만에게 그 사실을 통보한 녀석이다. 새벽에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놓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감쪽같은 모습으로 스포츠 신문에 모습을 비치는 녀석이다. 이제는 연락도 없이 미국에서 지내다가 느닷없이 몇 년 만에 귀국했는데 지금껏 그 이유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송태섭을 알고 지낸지도 벌써 8년이 다 되어가지만 대만은 여전히 태섭의 어떤 일면을 생각하면 놀라웠다. 생각에 무심코 끌려가던 대만이 호각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코트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곧 경기가 시작할 테고 그는 집중해야 했다.
대만은 고개를 들어 객석에 앉아있는 영걸을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영걸이 손을 흔들었다. 큰 몸짓은 아니었지만 행동 안에 응축되어 있는 기대감과 기쁨이 느껴졌다. 대만은 의지를 다잡았다.
그는 결국 이겨 낼 것이다. 여태껏 노력해 왔으니까.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보답받아 왔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그는 열심히 할 것이다. 영걸에게 팔을 흔들어주다가 손을 내렸다. 고개를 돌렸더니 성준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성준은 곧 대만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15
그때 정대만은 플랫폼이 훤히 보이는 지점에 우두커니 서서 떠나는 전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전철이 출발하면서 미지근한 바람을 만들었고 곧이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태섭에게 쏘아붙이듯 한 일, 경기 중에 저지른 실책, 간지럽게 욱신대는 무릎,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센다이 팀원들과 기분 나쁘게 행동하는 성준의 일들이 한 데 뒤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정말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엉망이구만.”
수기표를 집어든 대만의 첫마디였다. 아이치 공업과의 경기는 88:102로 센다이 팀의 승리였다. 정대만은 자신의 성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득점 14점. 슈팅 실패와 턴오버를 따져보면 썩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성적이다. 객석에 앉아있던 영걸은 먼저 일어난 건지 보이지 않았다. 대만은 수기표를 내려놓고 짐을 챙겼다.
출발한 줄 알았는데 영걸은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대만이 나오자 멋쩍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경기 잘 봤다, 대만아.”
하지만 오늘 정대만은 형편없었다. 무언가 더 말하려나 싶어 잠자코 기다렸지만 경기에 대한 영걸의 소감은 그게 다인 것 같았다. 이영걸은 손목을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정말로 늦을 것 같아. 슬슬 가볼게.”
“오늘 컨디션이 좀 별로였다.”
불쑥 말해놓고 정대만은 민망해서 턱끝을 매만졌다.
“원래는 안 이래.”
영걸은 무슨 말인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만이 넌 실전에 강하잖아. 잘 떨지도 않고.”
“알지.”
뱉어놓고 뒤늦게 부끄러움이 찾아들었다. 멀리서 찾아온 친구 녀석에게 이게 무슨 추태냐. 정대만은 잠깐 말을 더듬거리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활기찬 목소리로 능청을 떨기 시작했다.
“아쉽다. 그제 내가 뛰는 걸 네가 봤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만회하기 위해 그제 연습 경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기가 막힌 패스를 받아서 슛으로 연결했는지, 요즘은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 보려고 하는지, 도쿄로 출장을 가서는 경기 중에 무엇을 해냈는지 살짝 과장해서 늘어놓았다.
정대만은 영걸이 특히 오랫동안 잊지 못하고 지금까지도 종종 회고하는 자신의 대학교 3학년 리그 결승선 이야기도 꺼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건 학생 때의 일이고 이제 그는 프로였다. 이번 리그에서는 제대로 보여주겠다고 했다. 상대 팀들은 긴장해야 할 것이다.
“응. 기대하고 있을게.”
영걸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본 다음에야 대만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다음 순간 성준과 눈이 마주쳤다. 성준은 로비를 빠져나오다 말고 대만이 영걸에게 떠드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정대만을 본체만체하며 그대로 로비를 빠져나갔다. 그는 대만이 허세 부리는 걸 다 들었다. 정대만은 너무 민망해서 하려던 얘기를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9월에 보자.”
“응, 대만이 너도 몸 조심하고.”
그는 영걸을 보내고 잰걸음으로 센터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저녁 회식이 잡혀 있었다. 대만은 차를 끌고 나와 곧장 예약을 해놨다는 야키니쿠 집으로 향했다.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었다. 근처에 차를 대놓고 들어가니 팀원들 대부분이 앉아서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퇴근한 샐러리맨들이 모여 낄낄대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하려면 평소보다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 했다.
예외적으로 오늘은 술을 마시기로 했다. 누군가 목청을 높여 “괜찮죠? 괜찮죠, 오늘은?”하고 외쳤고 또 다른 누군가가 “좀 마시자. 오늘은 좀 마셔.”하고 대답하면서 회식 테이블마다 맥주 주문이 쏟아졌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한 팀원들은 평소보다 느물거리는 태도로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쉽게 내려놓고 떠들어 댔다.
대만은 테이블 맨 끝에 앉아 있었다. 맥주를 찔끔찔끔 홀짝이면서 팀원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했지만 금방 흥미를 잃었다.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게 이렇게 지루하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건 그의 문제인 것 같기도 했다. 재빠르게 돌아온 패스를 놓쳐버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대화 주제를 파고들거나 말을 얹으며 사람들 틈으로 섞여드는 그의 능력이 어디론가 가버린 것만 같았다.
반면에 테이블 중앙에 앉아있는 성준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성준은 능청스러운 화법으로 근래 자신에게 있었던 기가 막힌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팀원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팀원들이 가진 버릇, 최근 있었던 일, 경기 중에 주고받은 대화를 센스 있게 캐치해서 농담으로 만들었다.
평소 성준에게 맞춰주려는 면은 있을지언정 저절로 눈치를 보게끔 만드는 그의 미묘한 태도를 팀원들이 마냥 달가워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술기운에 빌어 분위기가 고조되자 성준의 사교적인 능력이 빛을 발하며 그동안에 은은하게 쌓여 온 사람들의 불만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성준에게 집중된 대화 주제가 도돌이표처럼 돌았다. 그동안에 팀원들이 고생했던 일, 예전 감독님의 근황, 누군가 키우는 개, 여자친구와 다녀온 여행 이야기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 갔다 이동했다.
끼려면 낄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술기운이 도는 걸 느끼며 대만이 미간을 눌렀다.
‘왜 이렇게 재미가 없냐….’
얼마 전에 송태섭과 강백호와 만나서 거리를 쏘다녔던 일이 떠올랐다. 근래 재미있었던 일이라곤 그거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태섭에게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다. 방을 구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릴까. 진짜 여기서 아주 지내려는 건가?
그럼 국내 리그로 돌아오는 건가? 농구를 그만둔 것 같다는 소문 말고 태섭에 대해 더 들려오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계약 이야기가 오고 갔더라도 아직 정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내년쯤일 것이다. 내년에는 송태섭과 다시 코트 위에서 만날 수도 있다.
무시무시한 드리블 능력과 스피드를 가진 미국 유학파 선수가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런 포인트 가드와 궁합이 좋을 것 같은 팀이 어디 어디더라? 몸이 점점 더 나른해지고 생각의 고리가 느슨해졌다. 어느새 정대만은 맞붙어 봤던 실업 팀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서 송태섭이 어느 팀에 들어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깐 바람을 쐬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어어, 그래요.”하고 대답했지만 대만이 드르륵 문을 닫을 즈음 테이블은 벌써 다른 주제에 정신이 팔려 그가 나가는 줄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대만은 술에 취한 걸음으로 주차장을 지나쳐 사거리 근처로 나왔다. 미야기현의 센다이시는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는 종종 안개가 끼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바닷가와 꽤 거리가 있는 다가조역과 그의 맨션, 해양 센터와 인근 번화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곳으로 이사 온 뒤로 대만은 몸에 파고들면 차갑게 느껴지는 서늘하고 축축한 안개를 맞으면서 조깅을 하거나 슈팅 연습을 하곤 했다. 7월 초가 되자 날씨는 딱 기분 좋게 선선해졌다. 오늘도 그런 선선하고 기분 좋은 저녁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대만은 신호등 옆에 설치된 전화 부스로 들어가서 동전을 넣고 송태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뺨에 수화기를 가져다 댄 채 부스에 몸을 기대고 한참 기다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가로등과 가로수가 가깝게 붙은 탓에 거대해진 나뭇가지 그림자가 부스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래도 받지 않았다.
‘뭐야…. 왜 안 받아?’
보고 싶은데 왜 안 받는 거야. 평소엔 잘만 받아놓고. 내가 그렇게 잘못했냐? 곧이어 잘못하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받을 수도 있지, 그래…. 입맛을 다시면서 마른세수를 하던 대만은 이번에는 영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영걸은 출장 중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오늘 경기까지 보고 가지 않았나.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면 누구에게 전화를 걸지. 누구한테 걸어야 하지. 다이얼 위에서 흐느적거리던 손가락이 얼마 안 가 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는 받을 것 같았다. 그 예감에 응답하듯 경쾌한 신호음이 얼마 안 가 뚝 끊어지더니 무뚝뚝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해 왔다.
“예, 여보세요.”
“어. 나다.”
대만이 말했다.
“네가 누군데.”
“짜식… 모른 체하기는.”
채치수가 발끈했다.
“술 마시고 꼬장 부리는 녀석 따위 나는 모른다. 취했으면 들어가서 얌전히 잠이나 자라, 정대만.”
“거 봐…. 나인 거 알잖아. 모른 척은 왜 하냐?”
이쯤 되자 채치수는 정말로 황당한 듯했다.
“용건 없으면 끊겠다.”
“용건이 없긴 왜 없어?”
그러나 용건은 없었다. 채치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대만은 부스에 기대어 있던 자세를 바로 잡았다. 붙잡기는 했지만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뜸을 들이던 대만은 치수에게 요즘 어떻게 살고 있냐고 물었다. 채치수는 그의 행동거지가 어이가 없는 듯했지만 잠시 후 순순히 자신의 근황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치수는 요즘 아는 사람의 폐업 정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대학 동기 사이인데 요식업을 하다 얼마 전 쫄딱 망하는 바람에 이것저것 처분해야 할 물건이 많다고 했다. 치수는 동네 자영업자들을 중계해 주면서 가게에서 쓰던 조리도구나 중고 전자제품을 처분하는 일을 돕고 있었다. 혹시 대만 주변에도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있냐고 물었는데, 정대만은 별 고민도 없이 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있겠냐….”
“그렇지. 너한테는 기대가 없긴 했다.”
“그보다 거기 옷장은 없냐? 옷장 있으면 내가 하나 살게. 나 집에 변변한 옷장이 없다.”
“라멘 집이라는 거 못 들었나. 네 생각엔 거기 옷장이 있을 것 같냐?”
“그런가….”
“그래, 얼간이 녀석 같으니라고.”
웃긴 얘기도 아닌데 힘없이 킬킬대며 대만은 다시 부스에 몸을 기댔다. 태섭이나 백호와 있을 적에도 그렇긴 했지만 북산고 녀석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시절이, 모두가 온몸을 바쳐서 농구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게 어떤 건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진심을 다해 체감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다시없을 팀이었다. 농구에 대한 열정을 뜨겁게 불태우고 부추기는 상대가 당연한 듯 옆에 있던 시절이 그리웠다. 그런 녀석들과 한 팀이었다는 건 행운이었다. 전화기 위로 춤추는 나무 그림자와 남은 잔액이 표시된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야, 치수야. 넌 농구가 재미없던 적 있냐?”
대만이 곧바로 자문자답했다.
“난 없다.”
채치수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안다. 넌 그런 놈이었지.”
대만의 입꼬리가 힘없이 떨려왔다.
“그래….”
‘근데 농구가 재미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냐?’
이건 말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채치수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구시렁거리는 듯했지만, 결국 질문에 대답했다.
“한 번도 재미없던 적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만사가 매번 좋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아까보다는 미미하게 너그러운 목소리였다. 채치수는 무언가 더 얘기할까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는지 화제를 돌렸다.
“난 올해까지 하고 관둔다.”
“…뭘 관둬?”
“아예 못 들었나 보군. 강백호 녀석이 얘기 안 해주던?”
“뭔 소리야. 잘 뛰던 놈이 갑자기 왜 관둬?”
“정대만,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그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슬슬 주변에 관심을 좀 가져봐라.”
“아니, 갑자기 왜 관두냐니까? 너까지 왜 이래. 어디 다쳤어? 그래서 그래?”
“안 다쳤다. 관두는 건 리그 끝난 다음에 얘기할 거야.”
술이 깰 듯 말 듯 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손등으로 비비면서 대만이 따지듯 말했다.
“너 그걸로 만족하냐?”
채치수는 조금 짜증이 난 듯했다.
“그래. 이만하면 됐으니까. 오래 고민한 문제다. 그만 토 달아.”
그러면서 그는 강백호가 길길이 날뛰더니 자기 집 앞까지 찾아온 얘기를 꺼냈다. 치수는 강백호를 납득시킨다고 꽤나 애를 먹은 것 같았다. 왜 자기 일을 네 녀석들에게 납득시켜야 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던 채치수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생각에 잠긴 대만에게는 큰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다. 마침내 채치수의 목소리는 생각 뒤편에 깔린 배경소리와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갑자기 뭐야. 쓸쓸하게….’
어쩐지 마음이 허했다. 그동안 대만의 주변에 농구를 그만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학 동기였던 많은 녀석들이 전업 농구 선수를 관두고 다른 길로 떠났다. 하지만 적어도 북산고 농구부 녀석들만큼은 다를 줄 알았다.
무언가 변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 시절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영원하게 느껴지곤 했으니까. 까마득하고 가물가물한 만큼 어떤 순간들이 도리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대만은 그 기억을 양분 삼아 앞으로의 일들을 낙관하곤 했다. 모두가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변을 일으킨 적 있다고, 죽어라 하면 안 되는 건 없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고, 그렇게 해서 그 산왕을 이겼다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렇게 해 나갈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관둔다니. 그런 경험을 해놓고, 그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만둔다고. 그럴 수가 있나? 머리로는 납득하면서도 사실 진심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채치수의 은퇴 선언이 꼭 근래 격변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무언의 예고처럼 느껴져서 대만은 어쩐지 화가 났다. 그에게도 때가 올 것만 같았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던 것을 의심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그 두려움에 대항하려고 말했다.
“근데 난 농구 안 그만둘 거다.”
입으로 내뱉자 의지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 누가 그만둘 것 같냐? 그런다고 내가 그만둘 것 같냐.”
하지만 곧이어 눈앞으로 농구공이 골대를 맞고 퉁겨져 오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공은 몇 번이고 골대를 맞고 퉁겨져 올랐고 그의 실수를 낚아채기 위해 수십 개의 손이 아래서 천천히 솟구쳐 올랐다. 끽소리를 내며 멈추어 서는 운동화와 왁자지껄하게 테이블에 모여 앉은 팀원들. 포카리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려 바닥을 축축하게 만들었고 잠시 후 영걸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로비에 서 있었다.
대만은 어느새 눈썹 사이를 문지르며 중얼대고 있었다.
“근데 나 말이야. 요즘 하나도 폼이 안 난다.”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걸 하고 있는데 면이 안 살면 어쩌잔 거냐? 좋아하는 걸 하는데. 농구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수화기를 움켜쥔 채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머리를 짓누르며 몸을 홧홧하게 만드는 술기운이 불러온 감상에 빌어 화를 내는 건지 따지는 건지 하소연을 하는 건지 구분되지 않는 말들을 쏟아냈다. 정대만은 채치수에게 대체 왜 농구를 관두는 거냐고 물었다.
혹시 전보다 못해서 그런 거냐고 했다. 확실히 네가 전보다 성적이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나쁜 것도 아니고 선수라면 누구나 기복이 있는 건데 왜 그걸로 끙끙대는 거냐고 했다. 아니면 혹시 부동산 사기를 당했냐고 했다. 자기 주변에 주식 투자로 쫄딱 망해서 사라진 대학 동기들이 있는데 설마 너도 그런 쪽인 거냐고 했다.
아니면 혹시 너도 세계가 망한다는 얘기를 믿기라도 하는 거냐고 했다. 그렇다. 생각해 보니 납득이 됐다. 세계가 망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수종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점점 히키코모리가 되어가고 있다고 했다. 길을 걷다가 죄 없는 시민들을 찌르고 방화를 저지르고 테러를 일으킨다고 했다. 있던 재산을 처분하고 휴거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도 했던 것 같다. 그는 마지막 날 뭘 하고 있을까?
‘농구하고 있겠지.’
대만은 세계가 멸망하는 게 무서웠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사실 그건 별로 무섭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무서운 건 죽기 전에 자신이 농구를 좋아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대만이 물었다. 나중에는 목소리를 높여 따지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너무 오랜 시간 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을 더 떠든 뒤였다. 대만은 채치수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다가 전화기 모니터를 확인했다. 남아 있는 전화 요금 잔액이 없었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가 얼굴 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전화는 끊어진지 오래였다.
16
영걸이 다녀간 뒤로 대만은 전보다 훨씬 악착같이 연습하기 시작했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자신을 보러 온 영걸에게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여준 것 같아 한동안 마음이 안 좋았다. 그는 새벽 다섯 시부터 일어나 공원을 끼고 언덕을 빙 돌아서 지역구 주민 체육관까지 조깅을 한 다음, 울타리를 타고 넘어가 체육관 외벽에 딸린 야외 코트에서 한 시간도 넘게 슛 연습을 했다. 체육관이 열릴 시간에는 출근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른 새벽에 그렇게 잠긴 울타리를 넘어가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어도 쌀쌀한 새벽 공기와 희뿌연 안갯속에서 몇 번이고 공을 던지다 보면 서서히 시야가 맑아지고 주변 사물에 빛이 깃들면서 시간에 따라 바뀌는 환경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는 자전거가 찌릉 소리를 내며 페달을 밟고 지나가면 대만도 슬슬 맨션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정말로 그만의 시간이었다. 침묵에 싸인 삭막한 공업 도시 주택가에 맴도는 고요한 분위기와 일순 공간과 유리된 듯한 감각이 공을 던지고 포물선을 응시하는 순간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을 길게 늘이다 보면 필름이라기보다 하나의 땅처럼 보이기 시작한 시간선에서 불현듯 안개와 함께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지어진 잿빛 맨션들과 단독 주택이 입체 그림책을 펼칠 때처럼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대만은 그 과정을 거꾸로 되풀이해서 포물선을 응시할 때 닥쳐오는 침묵의 순간을 돌려받고 싶었다. 그 순간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계속 공을 던지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무릎은 혼자서 연습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다리 근육은 매번 기분 좋게 조여들었고 발바닥은 그를 언제까지고 공중으로 들어 올려주었다. 하지만 몸에 이상이 없을 때조차 농구공은 몇 번이고 골대에서 튕겨져 나왔다. 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공을 볼 때마다 맥박이 불안하게 요동쳤고 그가 돌려받고자 하는 순간이 점점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년 동안 던져왔는데도 림이 너무 멀게만 보였다. 아니, 림은 오히려 그동안 더 가까워진 것도 같았다. 아니다. 어쩌면 둘 다 아닌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대만은 그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렇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정대만은 다시 자세를 잡고 똑바로 섰다. 그러고는 점프했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높게 솟아올랐다. 부드럽게 돌면서 솟구쳐 오른 공은 영원히 그곳에 매달려 있을 것처럼 느릿느릿 회전을 멈추었다가 찰나의 순간 자신이 떨어질 곳을 결정했다. 어느새 안개에 싸인 이른 아침의 공기가 걷히고 실내 체육관 지붕을 떠받치는 철제 구조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체육관 조명이 농구공의 존재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잠시 후 공이 골대를 맞고 퉁겨져 나왔다.
“리바! 리바운드!”
벤치에서 일어난 곽 감독이 손을 휘저어 포워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날쌘 양치기 개처럼 달려온 수종이 입을 헤 벌리고 공을 전광석화로 낚아챘다. 공중에서 곧바로 방향을 튼 수종이 대만에게 패스를 던졌다.
손에서 떠나보낸 지 몇 초도 안 돼서 다시 공이 돌아왔다. 대만은 주춤거렸다. 상대편으로 갈린 임학규가 파란 운동화를 앞으로 내밀면서 재빨리 그의 경로를 막아섰다. 순발력 있는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두 사람 모두 라인에 가깝게 붙어 서 있었다. 이런 순간마다 정대만은 종종 예고도 없이 3점 슛을 날리며 객석의 사기를 끌어올리곤 했다. 그에게는 여전히 선택지가 있었다. 슛? 돌파?
공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하반신에 무게 중심이 이동하려는 때였다. 대만이 마음을 바꾸었다. 스틸을 시도하기 위해 앞으로 쭉 뻗은 임학규의 팔이 슬로모션처럼 다가오는 게 보였다.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어깨를 움츠리고 팔을 뒤로 젖히면서 대만이 재빠르게 임학규를 제치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다음 순간 몸이 무언가와 부딪치고 휘슬이 불렸다.
“파울!”
퉁, 퉁 소리를 내며 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임학규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대만은 달리려던 자세 그대로 굳었는데 그 모습이 꽤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정대만은 방금 자신이 스스로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슛을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팀원들이 두 사람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대만이 손을 내밀었다. 임학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대만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두 사람이 코트로 돌아가려는 순간 휘슬이 불렸다. 곽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감독은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말했다.
“쭉 봤는데 전반적으로 오늘 다들 컨디션이 별로인 게. 곧 퇴근 시간이니까 오늘은 이만하고 들어가세요.”
어쩐지 자기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대만은 뒷짐을 진 채 오른쪽 발을 뒤로 물렸다. 고작해야 십 분 일찍 퇴근하는 거였지만 그것도 조기 퇴근이라고 팀원들은 꽤 달가운 눈치였다. 권수종은 벌써부터 가방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독이 나가자마자 수종은 쏜살같이 출구로 사라졌다.
대만도 짐을 챙겼다. 물병과 수건을 더플백에 잘 개서 넣고 일어나는데 뒤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강성준이 씩씩대며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성준과 싸우고 있는 상대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입단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왕공고 출신의 센터였다. 말다툼이 격양되자 성준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대만 쪽을 잠깐 노려보기까지 했다.
소란에 이끌린 팀원들이 어느새 성준을 둘러쌌다. 팀원 하나가 그의 팔을 붙잡자 성준은 부드럽지만 완고한 태도로 손을 떨쳐내고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이마를 짚었다. 대만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차갑게 읊조리는 성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틀린 말 했나?”
“그건 아니지, 성준아.”
“형, 상황 빤히 다 아는데 그렇게 말할 거예요?”
“아아. 대만 씨. 미안해요.”
팀원 하나가 대만을 붙잡아 세웠다. 팀원은 말하지 않아도 대만의 기분을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성준 형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두 분이서 말하다 좀 의견이 벌어졌나 봐요.”
“뭘 컨디션 탓이야. 내가 못 할 말 했어?”
성준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만하자. 대만 씨, 미안해요.”
“아니. 반응들이 왜 이래. 나만 느끼는 거 아닐 텐데.”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센터가 대꾸하자 성준이 조소했다.
“정말로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런데 전 잘 모르겠거든요.”
성준이 대만을 쳐다보았다.
“뭐 얼마나 잘 던진다고 저 사람 데려오느라 현우 형이 관둬야 했던 거예요?”
센터가 침착하게 말했다.
“성준 씨. 그만합시다.”
그는 경어를 쓰면서 성준과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렇게 보일 수는 있는데 아닌 거 알잖아요. 현우는 원래 리그 문제 때문에 감독님하고 좀 복잡했었고. 우리도 당장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모르고요.”
“무슨 소립니까?”
대만이 불쑥 물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대만이 퉁명스레 말했다.
“이 참에 좀 속 시원하게 털어놓읍시다. 그 8번 저 때문에 관둔 거 맞아요? 누군 아니라고 하고 누군 또 맞다고 하고.”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팀원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지만 그들 자신도 정확히 누구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책임을 질 상대를 수색하는 듯한 눈빛이 오고 가자 성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밀치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침묵 속에서 한동안 성준이 가방을 챙기고 지퍼를 닫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성준은 신경질적인 발소리를 내면서 체육관을 빠져나가버렸다.
체육관이 조용했다. 대만이 홀로 남겨진 센터를 멀뚱히 쳐다보자, 센터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복잡한 문제인데….”
“잘됐네요. 무슨 일이길래 다들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는지 좀 들어나 봅시다.”
대만이 말했다.
센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대만 씨 탓은 아닙니다. 저희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으니까 오해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야기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센터는 팀 창설 첫 해부터 최근까지 슈팅 가드의 자리를 지켜 온 원년 멤버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가 바로 센다이 8번 양현우로, 최근 들어서는 성적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작년 리그에서 대만의 이전 실업 팀과 맞붙게 된 것이었다.
“뭐…. 아시겠지만 그때 현우 형이 대만 씨한테 완전히 막혔었죠.”
하필 임원진들이 관전을 와 있던 경기였다. 기존 팀들이 분리되고 프로 리그가 창설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팀의 존패를 두고 말이 많은 시기였다. 8번이 어떻게 인상에 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긍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만이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팀이 분리됩니까?”
팀원들 몇몇도 처음 듣는 눈치였다. 센터가 어깨를 으쓱였다.
“예…. 저도 감독님에게 들은 거라 잘은 몰라요. 윗선에서 기존 리그 싹 밀고 프로 리그를 만든다던데요. 슈퍼 리그라던가.”
그렇다면 기존의 실업 팀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끝까지 실업 팀으로 남는다면 차차 동호회에 가까운 집단으로 굳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오래가기는 어렵다. 기업들은 결국 운영 방침을 다시 세우고 본격적으로 프로 선수를 양성하는데 투자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실 현재로서 일본의 실업 농구 팀은 사회 체육 운동 시설 및 단체 운영이라는 명목하에 운영되는 기업의 공익사업이나 다름없었다. 프로 리그 창설을 핑계로 그동안 애물단지였던 팀을 해체하는 기업들도 없진 않을 것이다. 특히 그동안 성적이 시원찮은 팀이었다면 지속될 필요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선수들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더는 사내 업무를 병행하면서 선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뀌게 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그 창설을 두고 내부에서도 말이 많다고 했다. 기존의 실업 리그를 운영해 왔던 전일본 사회인 농구 연맹이 자리를 이어갈 것인지, 통상산업성에서 떨어져 나온 사단법인 스포츠산업단체연합회가 설립을 추진 중인 새로운 농구 협회에 그 권위를 넘겨줄 것인지를 두고 윗선에서 지지부진한 기싸움이 이어지는 중이라고 했다.
8번이 은퇴를 결정한 데에는 이러한 격변기를 맞이한 일본 프로 농구 리그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전망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게 센다이 센터의 주된 의견이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작년 리그, 특히 정대만이 그를 정면 승부로 눌러버렸던 4강이 큰 문제처럼 다루어졌다. 그 경기에서 8번이 보여준 기량과 성적은 임원진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진 알 수 없지만 감독과 스카우터가 한동안 양현우와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 모양새가 좋지는 않았다. 팀원들은 불똥이 튈까 봐 입을 다물었다. 은퇴가 결정되기 전까지 이러한 분위기에 직접적으로 반감을 드러낸 건 성준이 유일했다.
결국 8번의 은퇴가 결정되고 얼추 좋은 이별의 모양새를 내겠다고 영구 결번 이야기가 오고 가자 그동안 침착하게 상황을 설득해 오던 성준은 크게 화를 냈다. 그런 와중에 임원진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정대만의 이적이 결정된 거였다.
그로부터 이 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성준의 완고한 태도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항의와 개인적인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있을 것이었다. 그동안 이 문제를 두고 감독과 끈질기게 이야기를 나누긴 했을 텐데 팀원들 모두 자세한 건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으며 대만은 생각했다.
‘어쨌든 화풀이란 소리 아냐?’
아무튼 자초지종을 들으니 그간의 일들이 어느 정도 납득은 됐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채치수가 비슷한 얘기를 얼핏 했던 것도 같다. 술에 취해 생각에 빠져들면서 중간부터는 거의 듣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마 채치수도 이런 문제 때문에 은퇴 결정을 내린다고 했던 것도 같았다. 대충 그렇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센터가 말했다.
“성준이가 그래도 대만 씨한테 잘해주려고는 해요.”
대만은 황당해했다.
“그래요?”
“아닌가?”
센터가 민망하게 주변을 둘러보자 팀원 하나가 심드렁하게 말을 얹었다.
“뭐, 둘이 요즘 좀 어색하긴 했어요.”
‘좀 어색해?’
센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같이 지내다 보면 잘 풀릴 거예요. 성준이가 나쁜 애는 아니니까.”
체육관을 빠져나가면서 팀원들이 대만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일이 더 커지지 않아 마음을 놓는 한편으로 조금 피로해 보였다. 조기 퇴근이라더니 결국 평소보다 늦게 나가는 것 같다고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하자 다들 킬킬거리며 웃어댔다. 팀원들은 로비에서 인사를 나누고 센터 앞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귀가하는 동안 대만은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맨션으로 돌아온 그는 샤워를 하고 소파에 벌렁 드러누웠다. 팔짱을 끼고 천장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전화가 울렸다. 그는 꿈틀대며 소파에서 내려오다 말고 퍽 하고 넘어졌다.
전화를 건 사람은 놀랍게도 송태섭이었다.
“전화하셨더라고요.”
송태섭은 요즘 바빠서 대만이 남긴 메시지를 이제야 확인했다고 했다.
어쩐지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으로 대만이 물었다.
“내가 너한테 메시지를 남겼다고?”
“예…. 뭐. 목소리부터 술에 꼴아 있는 거 같긴 했어요.”
대만은 입가를 문질렀다.
“뭐라고 남겼는데?”
“왜 전화 안 받냐고 신경질 부리던데요.”
“그게 다야?”
“다죠 그럼. 뭐 더 있어야 돼요?”
“아니, 뭐….”
대만은 수화기를 든 채 자세를 바로 했다. 태섭이 말을 더 이어가지 않는 게 어쩐지 그를 초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연락은 왜 안 받았냐?”
“저 요즘 집 보러 다닌다고 했잖아요.”
태섭이 강조하듯 덧붙였다.
“진짜 바빠요, 요즘.”
솔직히 거짓말 같았다. 정대만은 송태섭이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은연중에 단정 지었다. 불쑥 찾아드는 태섭에 대한 생각으로 자기도 모르게 전화기를 바라보며 마음을 졸여야 했던 지난 시간 때문인지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할 땐 언제고 괘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근데 왜 전화하신 거예요?”
태섭이 물었다.
“뭘?”
“아니, 메시지에서 열 번은 넘게 전화했다고 구시렁거리길래.”
“열 번은 아니다, 솔직히….”
말끝을 흐리던 대만이 침을 삼켰다.
“너 9월 리그 보러 올래?”
태섭은 잠깐 침묵했다.
“누가 농구 보러 가는 거 싫다면서요?”
“어…. 아냐. 아무튼, 티켓 빼놨거든.”
“시간이 될지 모르겠는데.”
태섭은 순순히 대답해주지 않았다.
“안 올 거냐?”
“잘 모르겠다니까요.”
그런 다음 침묵이 이어졌다. 사실상 태섭이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몇 초 되지 않을 것이고 여태껏 두 사람이 전화를 주고받으면서 이런 식으로 말이 끊어지는 순간이 없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만큼은 그 침묵이 무언의 응답처럼 느껴졌다. 대만은 할 말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너…. 너 혹시 화났어?”
“예?”
“그날 경기 보러 오지 말라고 해서…. 많이 서운했냐?”
“음.”
태섭은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런 걸로 화를 왜 내요. 제가 선배인 줄 알아요?”
‘그럼 왜 연락을 안 했는데?’
묻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말이 맴도는 게 느껴졌다. 한 번 따져 묻기 시작하면 그는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뭘 설명해야 될까.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대만의 솔직하고 고약한 성미가 그의 입을 열어젖히고 무언가 물어보려고 들었다.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다가 황급히 재조립되었다. 어느새 대만은 그때 신경질을 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해 늘어놓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걸 설명하고 싶지 않아서 전화를 피한 거였는데 막상 입으로 뱉고 나니 진실과 가장 가까워서 죄책감조차 없는 변명처럼 느껴졌다. 정대만은 자기 최근 상태가 좀 별로라서 딱히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날 말인데.”
대만이 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내가 사실 다리가 좀 안 좋았다.”
“예? 다쳤어요?”
“아니, 다친 건 아니고.”
태섭은 놀란 눈치였다.
“병원에서 뭐래요?”
“이상 없다고 하지. 아픈 건 아니니까.”
“그럼?”
“아니….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 던질 때 신경 쓰였었어.”
“저번에 그 소매치기 잡다가 엎어졌다는 그거예요? 증상이 뭔데요.”
태섭이 꼬치꼬치 캐묻자 대만이 음 하고 말을 끌었다.
“그냥 뛸 때 살짝 조이고 가끔 간지러운 정도야. 매번 그런 건 아니고 또 안 그럴 때도 있는데.”
대만은 근래 무릎에서 느꼈던 경미한 이상 증세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태섭은 잠자코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태섭이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근데 그거 늘 그렇지 않았어요?”
생각조차 못한 대답이라 대만은 깜짝 놀랐다.
“뭐?”
“형 대학생 때요.”
송태섭은 기억도 안 나는 예전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생 때도 대만이 가끔 무릎에 그런 느낌이 온다는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는 것이다. 큰 문제가 아니라는 듯 말하고는 정말로 얼마 뒤에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는 듯 굴어서 태섭은 매번 정말 별 거 아니었나 보다 하고 넘어갔었다고 했다.
듣고 보니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랬다. 농구를 다시 시작한 뒤로 대만은 종종 무릎 부상에 대한 경미한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따금 살짝 저리거나 간지럽게 조여드는 느낌이 있었고 경기 중에도 종종 그런 감각이 그를 붙잡고는 했었다.
그러나 대만은 금방 그러한 일들을 잊어왔다. 무심한 습관으로 마사지나 찜질을 하면서, 다음 경기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날아다니고 활약해 가면서, 코트 안팎으로 쏟아지는 견제와 증오, 동경과 응원을 즐기면서 그는 금세 그 일들을 잊었다.
“그러게.”
대만이 중얼거렸다.
“그랬네. 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요즘은 너무 많은 것들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팀원들 간 사이는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고, 무례하고 뻔뻔한 수종의 태도도 그대로였다. 성준은 여전히 대만을 껄끄러워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어색하고 낯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센다이 팀이 그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것은 조금 전 성준과 대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하고 걸쩍지근한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할뿐더러 그걸 느꼈더라도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거리를 두는 팀원들의 태도와도 연결되는 이야기였다. 정대만은 이제 받아들여야 했다. 팀원들이 딱히 나쁜 의도를 감추거나 그를 따돌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그냥 관심이 없었다. 각자의 사정으로 바빴기 때문에 다들 서로에게 신경을 끈 지 오래되었고, 어쩌다 한 번씩 팀에 묘한 분위기가 흐르면 하나같이 눈앞의 문제가 자신의 삶을 더욱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발을 빼는 데 익숙해져 있을 뿐이었다.
사실은 그들의 무관심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대만을 긴장 상태로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도쿄에 있을 적에는, 그가 대학에 다닐 적에는, 적어도 대만은 언제나 중심에 있었다. 사람들은 쉽게 그를 좋아했고 가끔은 그에게 호감을 사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끔 하는 그의 어떤 일면을 적대했다.
낯선 공업 도시로 이적한 뒤 정대만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관심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누군가 자신을 신경 쓰거나 견제하려 들고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면서 호의를 드러내는 환경에 무감하리만큼 적응해 있었는지 서서히 깨닫는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농구로 주목받지 못한다고 느낀 건 고등학교 1학년, 그것도 농구부에 막 입부했던 때가 다였다. 그때의 초조함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던가? 그러나 지금은 그 시절이 바로 등 뒤에 붙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직접 고른 곳에서, 직접 골랐기 때문에 그 선택에 마땅히 끌려와 줄 것으로 기대했던 상황이 그를 배반하기 시작하자 대만은 금세 방향을 잃었다. 그 결과 그는 고교 시절 무릎 부상을 악화시키고 일 년 넘게 코트 바깥을 떠돌았다. 스물여섯 살의 대만은 이제 그것이 자신의 노력과 무관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다.
최선을 다한 노력에 응답하지 않는 세계라니. 하지만 그의 무릎이야말로 그러한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었다. 그런 세계를 대만은 모르지 않았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가 노력한다고 상황이 항상 잘 풀리지만은 않는다는 걸, 그게 세상만사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만은 줄곧 모른 체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럴 필요성이 지금까지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무릎에 사소한 낌새만 느껴져도 불안해하다 못해 금세 그쪽으로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
마음을 편히 먹어야 했다. 의사의 말이 맞다. 그는 그저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지나치게 곤두서 있는 것뿐이었다.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농구를 하느라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하고 무심히 흘려보냈던 일들을 돌아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대만이 얼굴을 문지르며 작게 고백했다.
“송태섭. 나 슬럼프인가 보다.”
어쩌면 대만에게도 사소한 불의와 인간관계의 껄끄러움, 나와 타인이 가진 피로한 분노에 무심해지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아야만 하는 때가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미적지근한 세상의 순리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계라니. 그런 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인간이 과연 있을까? 이제 와서 그 뜨겁고 차가운 세계와 이별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 같은 건 할 줄 모른다. 정대만은 그저 언제까지고 농구를 잘하고 싶을 뿐이다.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는 건 여태껏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노력하면 응답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었다. 소년만화, 통속극,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소설, 하다못해 그의 삶, 정대만을 뛰고 움직이게 만드는 그 자신의 역사에도 존재했다. 이야기, 그렇다. 이야기였다. 재능인으로서 스포츠를 한다는 건 그 이야기를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건 그의 탓만은 아니다. 이 모든 건 그가 특출나게 오만하거나 우쭐대는 인간이라서 겪는 일이 아니다.
정대만이 과연 철들 수 있을까?
“그래도 경기 보러 와. 만나서 또 밥 먹자.”
약해진 목소리로 대만이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