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8)»
12
휘슬이 울리자 한 차례 정지했던 몸들이 코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센다이 팀원들이 지친 개처럼 헐떡이며 의자에 얹어둔 물병을 찾아 벌컥벌컥 들이켜는 동안 대만은 타올로 얼굴을 훔치면서 더플백을 주워 들었다. 훈련이 막 끝난 초여름의 체육관은 에어컨을 틀어놓아도 후덥지근했다.
강성준은 코트 반대편에서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대만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팀원은 놀란 듯했다. 자신을 쳐다볼 줄 몰랐던 것 같았다. 곧 가방을 뒤적이면서 다른 일에 골몰하는 척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시작했지만 대만은 이미 팀원의 의도를 눈치채고 기분이 묘해졌다.
‘또 이러네.’
아마도 대만과 성준의 사이가 껄끄러워진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도쿄 출장 경기 이후로 강성준은 대만을 대놓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중이었다. 일전에는 형식적으로라도 인사를 건넸는데 이제는 인사조차 잘 하지 않았다. 출근길에 마주쳐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면 마지못해 “예, 안녕하세요.” 하고 받아주긴 했지만 퇴근 시간이 되면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재빨리 짐을 챙겨 나가버렸다. 며칠째 이런 일이 반복되자 정대만도 슬슬 성질이 나던 차였다.
일부러 다가가 인사를 건네볼까 싶기도 했고 얘기 좀 하자고 불러 세우고 술집에 끌고 갈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대만이 성준에게 다가가려고 하면 어김없이 팀원들이 그를 주시하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팀원들이 적극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하려 드는 건 아니었다. 어떤 방면에서는 불구경하듯 무심하게 지켜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팀원들이 어느 정도는 성준의 눈치를 살피거나 그에게 주의를 기울였고 때로는 행동거지를 조심하려고 했다. 대만을 고의적으로 따돌리려고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만은 자주 어정쩡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강성준의 플레이 스타일이 그와 잘 맞지 않다는 것도 서서히 드러났다. 포인트 가드로서 성준의 판단은 매우 정확한 편이었다. 그는 쉽게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흥분할수록 경기 중에 실책을 범하기 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팀원들이 흥분하면 이름을 부르면서 주의를 환기시키려 들었고 팀원들도 그런 성준의 플레이 스타일이 익숙한 듯 움직였다.
아마도 이런 성향이 자신과 잘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대만은 생각했다. 사실 성준의 플레이 스타일은 정대만과 꽤 비슷했다. 대만 역시 팀원들이 흥분하기 쉬운 상황에서 이름을 부르며 주의를 돌리는 편이었다. 그는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거나 칭찬을 퍼붓는 전략을 즐겨 사용했다. 여태껏 거쳐 온 모든 팀에서 그러한 역할을 도맡았기 때문에 센다이 팀에서도 습관처럼 목소리를 높였다가 종종 강성준의 지시와 부딪치는 상황이 벌어지고는 했다.
그러면 팀원들은 무의식중에 익숙한 성준의 지시에 따랐다가 뒤늦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성준이 코트 위에서까지 대만에게 겸연쩍게 구는 건 아니었다. 대만에게 싫은 티를 내거나 비웃는 기색은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팀원들이 자신의 눈치를 본다는 걸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상황을 내버려 두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성준과 반드시 한 번은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슬그머니 훑어보면서 대만은 보호대를 찬 무릎을 주물렀다.
‘내참, 무슨 여고생들도 아니고.’
다리를 몇 번 스트레칭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 반대편으로 향하자 한순간 이목이 집중되었다가 시치미를 떼며 흩어졌다. 대만은 대수롭지 않게 자신에게 꽂힌 시선들을 무시하며 성큼성큼 체육관을 가로질렀다.
성준은 대만이 자기 앞에 멈추어 섰는데도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일부러 느긋하게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를 흠 하고 내려다보던 대만이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합시다.”
“얘기요?”
성준이 로션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되물었다.
“무슨 얘기요?”
“우선 패스 타이밍 말인데.”
“아아.”
성준은 이해했다는 듯 벌써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좀 더 신경 쓰죠.”
방금의 대답이 가로챈 타이밍 때문에 무언가 더 말하려던 대만은 잠깐이지만 머뭇거려야 했다.
“사인을 다시 맞추는 건? 제가 맞춰서 대기할 테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한데….”
“지난번 일이 또 벌어질 수 있잖아요.”
성준은 그 이후로도 대만이 3점 라인 좌측 방향에 서 있을 때 성급할 정도로 빠른 패스를 던지는 습관을 도통 고치질 못하고 있었다.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것 같다가도 돌발 상황이 오면 어김없이 예전 버릇이 튀어나왔다.
서태웅과 맞붙었다가 대차게 깨진 지난 출장 경기의 마지막 순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버저비터에 임박한 슛 찬스였는데, 성준이 지나치게 빠른 타이밍에 거친 패스를 던지는 바람에 그에 맞추려고 무리하던 대만은 리듬이 완전히 엉키고 말았다.
그때의 감각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 순간 대만은 막 고교 농구부에 입부했을 때처럼 지나치게 조급해져 있었고 마음 한편으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는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다. 무릎이 신경 쓰였고 금방이라도 다칠 것 같았다. 출장 경기가 끝난 뒤에도 그 감각은 한동안 계속됐다.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묘하게 무릎이 쑤시는 듯했고 계단을 오르다가도 이따금 낯선 부위가 불쑥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새로운 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인 걸 수도 있다고 했다. 나이에 비해 연골이 닳기는 했지만 농구 선수들의 무릎이야 대부분 비슷한 사정이고 대만의 경우에는 근육이 잘 받쳐주고 있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사지 꼬박꼬박 하시고요.”
그래서 대만은 그렇게 했다. 사실 그건 언제나 하고 있던 일이었다. 농구를 다시 시작하게 된 이래로 대만은 꾸준히 스트레칭을 하고 다리의 긴장을 충분히 풀어주기 위해 오랜 시간 공들여 마사지를 하곤 했다. 다시 부상을 입을까 봐 두려워서 강박적으로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하다 보니 습관이 된 것이었다.
경기 중에도 어느 순간 강하게 물입하게 되면 무릎 부상에 대한 건 잊어버렸고 그를 신경 쓰느라 경기 중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도 없었다. 무리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필요 이상으로 무리를 하게 만드는 일이 그렇게 자주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대만은 여전하게도 자신의 무릎에 대해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병원에서 이상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대만은 금방 이 일을 털어버리려고 했다. 때마침 출장 경기 후 잠깐의 휴식기를 가졌던 센다이 팀이 본격적으로 맹렬한 연습 경기에 돌입했다. 처음에 몇 번 소극적으로 움직이던 대만은 얼마 안 있어 펄펄 날아다녔다. 그는 권수종과 호각으로 다투면서 킬킬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태도로 놀라운 야투율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무릎은 전혀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자 무릎 생각 때문에 한동안 의식되지 않았던 팀 분위기가 비로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대놓고 선을 긋는 성준의 태도도 한 번 거슬리기 시작하자 가만 내버려 두기가 어려웠다.
대만은 이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이적하기 불과 몇 주전 은퇴했다는 센다이 팀의 8번 슈터와 얽혀 있는 모종의 사건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팀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지만, 성준이나 수종은 다름 아닌 정대만 때문에 8번 슈터가 쫓겨났다는 식으로 말했다.
정대만이 8번 슈터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센다이 팀의 원년 멤버였다는 것과 슛을 던질 때 포착되는 버릇이 있음에도 좋은 선수로 기억에 남았다는 것뿐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한 번 들었는데도 벌써 가물가물했다.
“알겠어요. 그럼 사인은 내일 다시 맞춰보는 걸로 하죠.”
성준이 대답했다.
대만은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번에 했던 얘기 말인데.”
“무슨 얘기요?”
그러나 성준도 이미 대만이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눈치챈 것 같았다.
“경기 전에 했던 말이요.”
“음.”
“자세한 얘길 좀 듣고 싶은데요.”
이야기를 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성준은 순순했다.
“그땐 제가 말실수를 좀 했어요. 대만 씨가 그렇게 물어보니 당황하기도 했고. 사실 뭐….”
성준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무언가 이야기하려다 재빨리 말을 바꾼 것이었다.
“다음부터는 주의할게요.”
그러나 대만으로서는 대체 무엇을 주의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 8번 선수 얘긴데.”
“곽 감독님이 말씀 안 해주시던가요?”
“따로 들은 건 없는데요.”
“하긴 그걸 또 얘기했을 것 같진 않네.”
‘왜 이래?’
연애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의 전 여자친구 몇몇은 기분 상한 티를 꼭 이런 식으로 냈고, 그럴 때마다 정대만은 그들이 화가 나거나 성질을 부린다는 사실은 금방 눈치챘지만 왜 그런 식으로밖에 드러내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예나 지금이나 빙 돌리는 화법은 질색이었다. 그때 그는 여자친구들에게 지금 기분이 상했는지,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에 기분이 상했고 자신이 뭘 해줘야 하는지 대놓고 캐묻다가 몇 번 정도 상황을 최악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그러나 팀 내 인간관계는 헤어진다고 다신 안 볼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다른 팀으로 이적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일본 프로 팀으로 취급받고 있는 상위권 실업 팀의 경우 전원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얼굴을 맞대고 겨뤄본 적이 있을 정도로 판이 좁았다. 대만은 이 상황이 낯설었다. 여태까지 그는 팀원들과 사이가 나빴던 적이 전혀 없었다.
아니, 껄끄러운 관계가 없진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구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대만은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을 대놓고 적대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데는 익숙했지만 자신을 교묘하게 배척하려는 인간과는 이렇게 대화해 본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대화를 나눠보려고 할수록 어딘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확실히 합시다. 그 8번 선수 얘긴 다 털었다 치고 경기에 집중 좀 하자고요. 전국 실업 농구 선발까지 한 달 좀 안 남았잖습니까. 10월부터는 JBL이고.”
대만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린 탓에 팀원들이 그를 흘끔거리며 행동을 멈추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만이 덧붙였다.
“피드백도 같이 좀 하고요.”
성준은 가방을 챙기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느새 팀원들이 큰 소리로 인사하며 체육관을 나서고 있었다. 성준은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가방을 고쳐 메면서 대만을 쳐다봤다.
“저도 슬슬 들어가 볼게요. 사인은 다음 주 요코하마 내려가기 전까지 다시 맞춰보고요.”
“요코하마?”
대만이 되물었다.
“출장 경기요. 애들한테 전달 못 받았어요?”
팀원들이 어제부터 뭔가 떠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로서는 제대로 전달받은 게 없었다. 대만의 표정을 살피던 성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장 어제 결정된 거긴 해요. 다음 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대학 팀 세 군데랑 붙을 거거든요. 알아두세요.”
대만은 가방을 챙겨 가장 마지막으로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기분이 나빴고 조금 피곤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체육관을 나서면서 개운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대만은 마른세수를 했다.
‘나도 성질 많이 죽었다.’
대학생 때였더라면 당장에라도 성준을 붙잡아 세우고 체육관 뒤쪽으로라도 끌고 가서 끝까지 캐물어 봤을 것이다. 직성이 풀릴 때까지 질문하고 따져보려고 들었을 것이다. 인간관계가 최악으로 흘러갈 거라는 고려는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인간관계를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최악조차 가볍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시 코트로 복귀한 지 일 년이 좀 넘었을 즈음이던 대학교 1학년 때는 농구를 완전히 못 하게 되는 일만 아니라면 나머지는 비교적 싼값에 치르는 소소한 불운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분명 있었다. 이제 그는 스물여섯 살이고, 새로운 팀에서 잘해보고 싶었다. 그는 여전히 이 일에 욕심이 있었고 농구는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근데 출장 경기 잡힌 건 왜 말 안 해줘? 어차피 다 알게 될 거.’
그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니지, 그래서 말을 안 했나?’
그는 팀원들이 자신을 불편해하는지 잠깐 되짚어 봤다. 그러나 성준의 눈치를 보기는 해도 팀원들이 그를 적대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최근의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던 대만은 금방 의지가 떨어져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는 퇴근길에 역사 근처의 소바집에 들어가 덴뿌라와 소바 네 그릇을 해치웠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니 얼마 안 있어 곽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감독은 요코하마로 출장 경기가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개중 하나가 진다이대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자네가 거기 나오지 않았나?”
“아, 예. 맞습니다. 가나가와대 나왔죠.”
“몇 년 어린 후배들하고 싸우겠군 그래.”
“이겨야죠.”
대만이 대답했다.
“대학 팀이라고 만만하게 볼 게 아냐. 연습량만 따지면 우리보다 월등하니까. 잘해야지.”
“그럼요.”
“그러고 보니 전에 말한 건 한 번 물어봤나?”
“전에요?”
대만이 어리둥절 되물었다.
“자네 후배 말이야.”
“누구…. 아. 아아, 그거요.”
감독이 지나가듯 언급했던 송태섭 스카우트 건에 대한 이야기가 뒤늦게 떠올랐다. 행간에서 떠도는 송태섭의 은퇴 얘기에 놀라 정말이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문제였다. 대만은 송태섭과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전화 내용을 곱씹었다. 농구를 그만 둘 거냐고 물었을 때 태섭은 곧장 아니라고 대답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대답이 석연치 않았던 것도 같았다. 더 캐물어 보려다 말을 아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국내 리그 얘기를 꺼냈을 때 특별히 동요하거나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없었으므로 송태섭이 농구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들었지만 이제 와 대화를 되짚어 보고 있으니 태섭이 마냥 일본에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농구를 계속할 거라면 미국으로 다시 나가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이 말했다.
“아마 다시 나갈 것 같습니다.”
“관둔다더니 그건 또 아닌가 봐?”
“그러게요.”
대만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도 그게 맞죠.”
감독과 전화를 끊은 뒤 TV를 틀어놓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본가에 연락을 넣었다. 다음 주 출장 때문에 근처로 가는데 몇 밤 자고 가겠다는 얘기를 하자 엄마가 느닷없이 반찬 고민을 하게 생겼다고 기분 좋게 투덜거렸다.
“그럼 외식하던가요. 근처에 새 레스토랑 없어요?”
눈치 없는 척 킬킬대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대만에게 잔뜩 면박을 주었다. 한창 즐겁게 잔소리를 퍼붓던 엄마는 오는 김에 집에 두고 간 이삿짐 좀 가지고 올라가라면서 대만이 잊어버린 박스 하나가 그의 방구석에 방치돼 있다는 얘기를 꺼냈다.
놓고 간 게 있던가? 사실 지금 거실 구석에도 아직까지 풀지 않은 상자 두어 개가 박혀 있었기 때문에 놓고 온 짐이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짐 정리를 마저 해야 되는데. 생각난 김에 박스를 풀고 물건을 뒤적이던 정대만은 엉성하게 몇 가지 물건을 정리 정돈하다 말고 씻고 곧장 잠이 들었다.
화요일이 되자 센다이 팀원들은 JR 동일본 지사로 출근을 하는 대신 곧장 체육관 앞에 모여 대절 버스를 탔다. 금요일 오후까지 진행되는 이번 원정에는 간토 지방 지사 소속의 실업 팀들뿐 아니라 지역 최상위권 대학 팀 세 군데와의 시합이 예정되어 있었다. 대만이 4년 간 신세를 졌던 가나가와 대학 농구 팀은 그가 졸업한 뒤에도 약간의 기복은 있었지만 꾸준히 8강 안에 들면서 간토 지방의 상위권 대학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이들은 마지막 날 붙기로 돼 있었다.
알고 있는 후배들은 졸업한 지 오래였기 때문에 이번에 만나는 선수들은 대부분 초면인 데다 그와는 적어도 서너 살은 차이가 나는 대학생들일 것이다. 깔보는 건 아니었지만 크게 긴장되지는 않았다. 대만은 잠깐 눈을 붙이려다 금방 잠들어 버렸고, 일어났을 때 버스는 벌써 다이토분카 대학 입구를 넘고 있었다.
다이토분카 팀 학생들은 이미 체육관에서 몇 차례 연습 경기를 마친 직후였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진녹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대만을 비롯한 센다이 팀원들에게 악수를 건넸다. 그들 중 몇 명은 작년 JBL에서 대만과 다른 팀원들의 경기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원래 이 팀이셨던가? 이적하신 건가요?”
대만을 알아본 선수 하나가 말을 걸었다.
“이적했죠. 몇 달 안 됐어요.”
“어쩐지. 못 보던 선수분들이 많더라고요. 한 번 개편한다더니 진짜였나 봐요.”
그러면서 상대 선수는 대만의 등 너머로 밧슈 끈을 묶고 있는 수종을 쳐다보았다.
권수종은 오늘도 팀원들로부터 살짝 떨어진 곳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혼자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팀원들도 굳이 수종을 데리고 오려고 애쓰지 않았는데, 수종과 팀원들 둘 다 그런 구도가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사이가 나쁘다기보다는 피차 서로를 적당히 무시하고 있었고 딱히 그 일이 어렵지도 않은 듯했다.
“아무튼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상대 선수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예, 저희도요.”
수종을 쳐다보고 있던 대만도 따라서 정중히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수종을 좀 챙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듯 강성준이 큰 소리로 수종의 이름을 불렀다. 듣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권수종은 곧 자리에서 순순히 일어났다. 성준은 대놓고 수종에게 조언인지 잔소린지를 했는데, 반은 장난스러웠고 그 때문에 팀원들 틈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수종은 다시 팀원들 틈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상대팀 선수와 인사를 마치고 돌아오니 팀원들은 대학 체육관이 불러온 기억 때문인지 자신이 뛰었던 예전 대학 리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최근까지 스페인에서 농구를 했던 수종은 딱히 할 말이 없는지 멀뚱멀뚱 서서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대만이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치자 수종은 곧바로 휙 고개를 돌렸다가 꽤나 반갑게 아는 척을 했다.
“형 여기 대학 나왔다면서요?”
“응? 여기 아닌데.”
“엥. 그럼요?”
“잘못 들었나 본데? 나 마지막 날 붙는 곳 나왔다.”
“마지막 날 어디요?”
“바보냐? 벌써 까먹게.”
면박을 주자 수종이 고민하듯 얼굴을 찌푸렸다.
“북산대라고 했나?”
“거긴 고등학교고.”
대만이 킬킬댔다.
“진다이대 나왔다. 진다이 알지?”
“유명하진 않은가 봐요. 처음 들어보는데.”
“이 자식이.”
경기 시간이 임박하자 다들 유니폼 차림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수종을 밀치며 낄낄대던 대만이 성준과 눈이 마주치자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잘해봅시다!”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가 싶던 성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양 팀 선수들이 정렬했다. 두 팀 모두 크게 경직된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학 농구 팀이 실업 농구 팀을 이기는 일은 그렇게까지 흔하진 않더라도 왕왕 있어왔기 때문에, 단순히 실력이나 수준 차이로 벌써부터 정해진 게임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실업 구단이 이 무렵부터 개인적으로 추진하는 대학 경기 일정은 사실상 미래에 리쿠르팅할 예비 프로 선수들의 기량을 파악하고 그들을 일찌감치 점찍어두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두 팀 모두 지나치게 필사적으로 찍어 누르려 들거나 도발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서로 뻣뻣하게 굴 이유가 없으니 실업 팀끼리 맞붙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다. 성준이 상대 팀 주장과 가볍게 인사를 했다.
“우리 작년에 한 번 봤었죠?”
“네, 그랬죠. 팀에 새로 오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그 말에 성준이 뜻 모를 웃음을 짓다가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휘슬이 울리면서 두 사람은 몇 발짝 떨어졌다.
어느새 다들 자세를 잡고 있었다. 일순 장내가 고요해지고 시선들이 한 곳에 모였다. 단숨에 공기가 팽팽해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마침내 공이 날아오르는 순간 양 팀 센터가 공중으로 붕 솟구쳤다.
큼지막한 손 두 개가 안쪽으로 공을 쳐내려고 힘겨루기를 했다. 결국 주도권을 잃은 쪽이 먼저 공중에서 팔을 떨어뜨리자 상대 팀 포워드가 좌측으로 튄 공을 낚아챘다. 다이토분카 벤치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들려왔다.
대만이 짝짝 손을 부딪치며 외쳤다.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가자!”
그러나 순식간에 선취점을 내주면서 흐름은 빠르게 넘어갔다. 분위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이토분카 팀이 강하게 밀어붙이는 바람에 점수는 어느새 12점 차로 벌어졌다. 안전하게 가려던 성준도 이쯤 되자 승부욕이 도진 듯했다.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게 훤히 보였다.
심지어 플레이 스타일이 공격적인 권수종은 하프 라인에서 두 팔을 벌리고 자세를 낮춘 채 대치 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 앞에서 상대 팀 포워드가 묵직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며 공을 튀기는 중이었다. 퉁, 퉁 소리와 함께 농구공이 튀어 오를 때마다 수종의 자세가 점점 낮아졌다.
두 사람이 주춤주춤 움직이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동물들처럼 잠깐 동작을 멈추었을 때였다. 대만이 좌측으로 빠지며 달리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공을 스틸한 수종이 볼을 퉁기며 거칠게 수비를 돌파했다. 길을 뚫어주려고 일찌감치 상대 팀에게 스크린을 걸어놓은 대만은 곧바로 다음 행동을 결정했다. 발과 손이 전혀 따로 놀면서도 일사불란 같은 목적을 수행하는 몸짓이 재빨랐다.
온몸에 피가 한계까지 도는 것 같았다. 상대 수비수의 진로를 막느라 자리를 바쁘게 바꾸는 와중에도 대만의 시선은 오픈 찬스(*수비수가 없어서 공격수가 마음대로 삼 점 슛을 할 수 있는 상황)가 들어온 센다이 센터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수종이 던진 공이 손안에 들어온 순간 대만은 곧장 반대편으로 패스를 보냈다.
수십 초 만에 핀볼처럼 이동한 공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운반되었다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물을 스치는 소리와 함께 공이 떨어졌다.
패스를 받은 센터가 달려와 대만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한껏 기가 산 얼굴로 대만이 외쳤다.
“계속 이 기세로 가보자!”
흐름은 엎치락뒤치락하며 팽팽하게 이어졌다. 후반부가 되자 성준이 직접적으로 지시를 내리면서 센다이 팀 스타일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내 목소리를 높이던 정대만과 강성준의 지시가 대놓고 부딪치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었다. 두 사람이 동일한 지시를 내릴 때도 있었지만 매번 그렇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불어난 강물처럼 휘몰아치던 경기의 흐름이 잠깐이지만 주춤대는 게 느껴졌다.
정대만은 팀원들의 반응이 평소 같지 않다는 걸 눈치챘다. 고의적으로 조성된 분위기라기보다 긴박하고 빠른 템포의 경기 속에서 드러난 팀원들이 습관이 자연스럽게 조성하는 위화감에 가까웠다.
패스가 돌지 않거나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강성준은 상황에 맞추어 볼을 분배했고 팀원들은 적절한 선에서 성준의 판단에 기대어 움직였다. 그러나 정대만은 자신이 그곳에서 단지 움직이는 팀원 중 하나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걸 정확히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북산고교 시절 정대만은 팀 전원이 한 사람 분의 전력이 되자는 다짐을 넘어 강력한 투지를 불태우던 때를 기억한다. 모두가 의지로 충만했고 서로를 동료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경쟁자로 여기는 투쟁심이 있었다. 내심 자신의 목소리가 가장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다들 한 번쯤은 해 봤으리라. 전원에겐 제각각 꺾을 수 없는 고집이 있었다. 경기 중에도 종종 그 고집끼리 부딪치면서 마찰을 빚던 기억이 생생했다.
가장 강렬한 기억은 산왕전 때였다. 그들은 제각각 가지고 있는 그 무쇠 같은 고집으로 전국 대회를 밀어붙여 결승에 도착했지만 그 앞에서 굉장한 적수를 만나고 말았다.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는 때가 오자 정대만은 비로소 대적하기 바빴던 팀원들 간 고집에 대한 관점을 새로이 하게 되었다. 그들은 항상 이기고 싶어 했다. 적수에게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달리는 서로에게서,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에게서 투쟁심을 느끼고 항상 이기고 싶어 했다.
그 투쟁심이야말로 오합지졸을 팀으로 만드는 투지이자, 무리를 와해시키고 동시에 다시 하나의 팀으로 묶는 결속의 중심이었다. 한 팀인 동시에 경쟁자가 될 수 있는 관계라는 건 얼마나 즐거운가? 나 자신과 경쟁할 수 있다는 건 고통스럽고도 즐거운 일이다.
돌이켜보면 고교 시절의 농구는 뜨거운 경쟁의 연속이었다. 산왕전에서 북산고는 한순간이지만 분명 대단한 곳에 도착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들은 산왕과, 아우성치는 승리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약함과 싸우는 경쟁자였고 그 경쟁을 위해 서로의 힘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팀이었다. 그들은 팀 스포츠를 했다. 그들은 바로 그런 농구를 했다.
정대만은 스스로를 전략적인 선수라고 평가한다. 힘들이지 않고도 찰나의 순간 코트에서 벌어지는 변수를 계산하고 뜨거운 몸짓과 목소리로 분위기를 끌고 오는 퍼포먼스는 그가 타고난 재능이자 노력의 결실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는 우연하고 유일한 판단이 때때로 경기를 완전히 뒤바꾼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한 우연은 투쟁심, 타협하려 들지 않는 고집과 이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 속에서 만들어지는 유대감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센다이 팀의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갈 구석이 없는 표면적이고 완벽한 선택이 경기의 어떤 부분을 완전히 고착시켜 버렸다.
이러한 상황을 구체적인 말로써 표현하거나 정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만은 줄곧 이 팀에 흐르는 말할 수 없는 묘한 위화감을 몸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분명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개운치 못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예전만큼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이것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려웠고 그러면 초조해졌다. 서태웅과 대치했던 연습 경기에서도 느꼈던 바로 그 초조함이었다.
휘익! 상대 팀 선수가 바닥으로 넘어지면서 휘슬이 불렸다. 수종의 네 번째 파울이었다. 한순간 전력이 주춤거렸지만 수종은 바닥에 넘어진 상대 팀 선수가 일어나는 모습을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하다 손바닥을 털면서 코트 중앙으로 돌아왔다. 성준이 그를 불러다 작게 충고를 하는 것 같았지만 대만이 보기에 수종은 절반도 열심히 듣지 않았다. 몇 번 이야기를 나누던 성준도 결국 묘하게 짜증 난 눈으로 웃다가 그를 놓아주었다.
센다이 팀의 주 스코어러가 발이 묶였으니 자연스럽게 정대만에게 볼이 돌아올 차례였다. 이를 눈치챈 다이토분카 팀 측에서 강한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만은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수종이 신경 쓰였다. 그러나 정작 하프 라인에서 위치를 지키고 있는 권수종은 별다른 타격이 없어 보였다.
성준이 퉁, 퉁 공을 튀기며 앞으로 달리다 말고 곧장 수종에게 패스를 날렸다. 그러나 전처럼 강하게 치고 나갈 수 없는 형편이 된 권수종은 수비수와 대치하다 말고 곧장 대만에게 패스를 보냈다.
볼이 다시 핀볼처럼 코트 위를 돌고 돌았다. 압박을 받고 있는 처지긴 했지만 정대만은 좀 더 강하게 치고 나가고 싶었다. 기대를 걸어준다면 반드시 응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성준은 전략적인 안전주의자처럼 굴었다. 연거푸 패스를 돌리면서 포워드인 임학규에게 슛 찬스를 유도하려고 했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정대만은 소리를 치지 않았다. 경기의 흐름이 가시적으로만 파악될 뿐 몸을 타고 흐른다는 느낌이 없었다. 이 순간 그는 필요되는 존재기는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절실히 원하지 않았고 그를 열렬히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이 느낌은 자신의 고집일까? 아니면 그저 오만일 뿐일까.
그때 강성준이 큰 소리로 외쳤다. 불과 며칠 전 대만과 새로 맞춘 사인이었다.
“헤이!”
다음 순간 대만의 손 안으로 공이 들어왔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타이밍에 들어온 볼의 촉감이 나쁘지 않았다. 곤두서 있던 대만이 잽싸게 움직였다. 그러나 생각과 몸은 이미 분리되어 있었다.
뚜껑이 열린 물통이 공중에 휙 던져질 때처럼, 슛감이 머리 위로 붕 떠올랐다가 그 형태를 산산이 무너뜨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릎 위쪽이 한순간 조여들면서 균형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던지는 순간 이것은 들어가지 않는다, 고 대만은 직감했다.
림에 맞은 볼이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다. 벤치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리바운드, 리바운드!”
대만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보호대를 감싸 쥐자 분명 병원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던, 그러나 지난 몇 주 간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무릎 위쪽이 간지럽게 조여드는 게 느껴졌다.
분명 연습 경기를 할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 감각은 뭐란 말인가. 하지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공격권이 다시 센다이 팀으로 돌아오면서 팀원들이 일사불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릎에서 시선을 뗀 대만이 빠르게 코너로 달렸다. 다시 한번 성준이 사인을 보냈다.
“헤이!”
이번에 대만은 준비되어 있었다. 성공적으로 패스를 받은 그가 공중으로 뛰어오르려던 때였다. 한순간 무릎이 강하게 조여들었다. 당황한 대만이 눈을 크게 떴다. 손끝에서 볼이 미끄러졌다. 공은 이번에도 위태롭게 포물선을 그리다 말고 림을 맞고 바깥으로 퉁겨져 나왔다.
대만은 우두커니 멈추어 섰다. 공 튀기는 소리, 벤치의 아우성이 한데 뒤섞여 마치 고장 난 테이프처럼 웅웅 늘어지기 시작했다. 팀원들이 자신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 시선도, 눈앞의 림도 갑자기 너무 멀게만 보였다.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는 자신의 땀방울을 내려다보다가 발을 뒤로 스윽 물렸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귀를 찌를 듯했다.
그 뒤에도 여러 번 슛 찬스가 돌아왔지만 대만은 도통 슛을 넣지 못했다. 수 차례의 실패 끝에 간신히 두어 골을 성공시켰지만 그마저도 림을 맞고 한 번 튀었다 운 좋게 들어간 것에 불과했다. 깔끔한 슛은 단 한 개도 넣지 못했다. 경기가 끝나고 인사를 마친 뒤 탈의실로 돌아가는 대만의 기분은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젠장….’
수건을 던지다시피 하며 라커에 등을 기댔다. 시험 삼아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무릎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약 오를 정도로 멀쩡했다. 복도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곧 있으면 팀원들이 탈의실에 들이닥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팀원들과 부대낄 기분이 아니었다. 어차피 다들 얼마 안 가 뿔뿔이 흩어져서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내다 숙소로 복귀할 것이다. 대만도 오늘은 따로 일정이 있었다. 오랜만에 본가에 들를 예정이었다.
송태섭 생각이 난 건 그때였다. 기분 전환이 필요한데 당장 같이 놀 만한 사람이 송태섭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근처니까 연락을 한다면 나와줄 법도 했다.
집에 들르는 김에 얼굴 좀 보자고 해야겠다. 마음을 정한 대만이 짐을 챙겨 라커룸을 빠져나왔다.
공중전화는 강의실 복도 끝에 비치되어 있었다. 대만은 녹색 수화기를 들어 올리고 몇 년 전에 달달 외운 나머지 지금까지도 어렵지 않게 떠오르는 태섭의 집 번호를 눌렀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고개를 돌리니 길고 시원하게 뻗은 일자형 복도와 낯선 대학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대학교를 다닐 때도 종종 강의실 복도나 교정에 비치된 전화 부스에 들어가 이렇게 송태섭에게 전화를 걸곤 했었다. 벌써 5년도 전의 일이었다. 대학교 복도 끝에서 태섭에게 전화를 걸고 있자니 꼭 그 무렵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는 잘 나갔었다. 팀원들은 기본적으로 정대만에게 호의적이었고 사람들은 선후배 가릴 것 없이 그를 좋아했다.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하루하루였다. 송태섭에게 전화를 걸던 스무 살 무렵의 그는 두려움을 몰랐다. 태섭에게 무엇이든 떠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창문으로 떨어지는 태양빛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대만은 약간 모양 빠지는 자세로 전화 부스에 서 있는 스물여섯 먹은 자신의 존재를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느꼈다. 모든 게 까마득하고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를 쥐었다 놓으면서 대만은 고개를 숙였다. 폼 안 나는 어른이 된 것 같았다.


13
송태섭이 대만의 전화를 받은 건 컵라면 물을 끓이고 있을 때였다. 전화를 끊은 태섭은 가스 전원을 끄고 얇은 재킷을 걸친 뒤 가볍게 향수를 뿌렸다.
아파트를 내려오자마자 가로등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는 키 큰 인영이 보였다. 송태섭은 걸음을 멈추었다. 초여름 저녁의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고 있었다. 대만은 가벼운 저지 차림에 더플백을 메고 있었는데, 시선이 주륜장 쪽으로 가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대만의 시선은 정확히 말해 주륜장이 아니라 그 옆의 공중전화 부스를 향해 있었다. 그 모습은 태섭에게 잠깐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게 했다. 곧이어 인기척을 느낀 대만이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주 반가운 표정이었다.
“오. 송태섭 오랜만이다?”
“어쩐 일? 회사 잘렸어요?”
너무 퉁명스레 말한 것 같아 내뱉고 조금 놀랐는데, 대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인마. 출장 경기다. 출장 경기 몰라?”
그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버릇없는 후배를 한껏 타박했다.
두 사람은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역사 쪽으로 걸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대형견의 목줄을 붙잡고 낑낑대며 두 사람 곁을 스쳐 지나갔다.
딱히 어디 가자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둘은 역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일이긴 했지만 만나서 놀 때마다 들락거리던 시내가 있었는데 가마쿠라에서 전철로 삼삼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아마 오늘도 그곳에 갈 거라고 두 사람 모두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역사에 들어서며 대만이 말했다.
“뭐 하고 놀지?”
“그것도 생각 안 하고 부른 거예요? 난 또 용건이 따로 있는 줄.”
“용건은 무슨. 그냥 심심해서 부른 거지.”
“친구도 많은 인간이 심심하다고 날 불러요?”
“뭐 어때. 친한 후배 부를 수도 있지.”
“…….”
“왜?”
“아니에요.”
전철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처음에 한 칸 떨어져 앉았던 두 사람은 점점 승객이 많아지자 자리를 옮겨 나란히 앉았다. 옆 자리의 뜨끈뜨끈한 어깨를 느끼면서 태섭은 수평선 너머로 어두컴컴해지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컵라면을 뜯어놓고 식탁에 그대로 두고 나왔다는 생각이 문득 났다. 송아라가 성질을 낼 것 같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전철에서 내려 역사를 빠져나오자 작은 번화가가 나타났다. 그제야 대만이 저녁을 먹었냐고 물었다.
“안 먹었어요.”
“땡기는 거 있어?”
“아무거나 먹어요 그냥.”
“나 국물 땡긴다.”
“전 면 땡기는데요.”
“짜식, 아무거나 먹자더니…. 라멘 먹자.”
그래놓고 정작 들어간 곳은 요시노야였다. 규동 몇 그릇을 시켜 먹고 설렁설렁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목적지도 없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태섭의 귀국 날을 마지막으로 간간이 전화 통화만 주고받았으니 장장 세 달 만의 만남이었다. 전화로는 잘만 떠들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조금만 멀리 나가도 주택가가 나왔으므로 두 사람은 일부러 번화가의 가장자리를 골라 천천히 걸어 다녔다.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대만이 쩝 입맛을 다셨다.
“여기 말고 좀 더 나가서 영화나 볼 걸 그랬다.”
“요즘 볼 것도 없어요.”
“그래? 그럼 가라오케?”
“거기 망했어요.”
대만이 깜짝 놀랐다.
“뭐? 언제?”
“그거야 모르죠.”
믿을 수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어색한 분위기에 뭐라도 할 일이 생겼다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정대만은 기어코 태섭을 끌고 가라오케가 있던 상가 앞까지 찾아갔다. 그랬더니 정말로 간판이 바뀌어 부동산 사무소가 되어 있는 건물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대만이 “거참.”하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설마 망할 줄이야.”
“요즘은 다들 여기서 안 놀더라고요.”
송태섭도 불과 며칠 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방을 알아보려고 근처에 들렀다가 가라오케점이 사라진 것을 보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유학 준비를 하던 수개월 동안 정대만과는 물론이고 달재, 한나와도 들락거리던 장소였기 때문에 바뀐 간판을 마주쳤을 때는 조금 섭섭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는 귀국한 이래로 달라지지 않은 걸 마주친 적이 별로 없었다. 몇 년 동안 일본을 떠나 있었으니 달라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어디서 노는데?”
“요코하마 쪽이나 신주쿠까지 나간다는데요?”
“그래? 내가 거기서 오는 길인데. 그냥 거기서 놀 걸 그랬다.”
대만은 한산한 거리 쪽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뭐 놀 만한 데 없냐?”
이쯤 되니 진짜 심심해서 불렀나 보다 싶었다. 번쩍대는 파칭코 간판을 지나쳐 조금 더 걷다 보니 소니 매장이 나왔다. 전시된 TV에서 <3학년 B반의 긴파치 선생>이 나오고 있었다. 잠깐 그 앞에 멈추어 서서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건조하게 낄낄거리고 있는데 대만이 불쑥 물었다.
“비디오 그거 어떻게 하기로 했냐?”
“예?”
택배 얘기인 걸 한참 뒤에야 알아들었다.
“아, 그거요….”
태섭은 화면 우측 상단에 떠 있는 TBS 로고를 쳐다보았다.
주먹을 쥐려다 손바닥을 쫘악 펼쳤다.
“버리라면서요?”
“뭐? 내가 언제.”
대만이 기막히단 얼굴로 태섭을 쳐다봤다.
“너 이 자식 그렇게 안 봤는데. 하늘 같은 선배가 준 선물을 버려?”
“아니…. 버리라고 할 땐 언제고.”
“버리고 싶으면 버려도 된댔지, 누가 버리래? 너 아주 기다렸단 듯이 버렸나 보다?”
“아. 안 버렸어요, 안 버렸어. 됐죠?”
“되긴 뭐가 돼. 그 태도가 문제인 거야, 인마.”
언제는 비디오가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썼으면서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좀 억울한 기분으로 타박을 받던 태섭이 잠깐 고민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편지 없던데요.”
“편지? 무슨 편지.”
이것 봐, 이러면서 누굴 구박하는 건지 모르겠다.
“안에 편지 있다면서요.”
그제야 대만도 기억해 낸 듯했다.
“아, 그거. 그게 왜 없어?”
“그걸 물어본다고 제가 압니까?”
내친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냐고 물어봤더니 정대만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곤란한 표정으로 눈까지 감아가며 고민했다. 그러더니 그 비디오들을 복사하는데 며칠이 걸렸는지 아냐고 느닷없이 생색을 내는 것이었다.
“딱 봐도 정성이 담겨 있지 않냐? 그걸 냅다 버릴 생각부터 하고, 너도 참 알 만 하다.”
“아니, 안 버렸다고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 녀석.”
“안 버렸다고.”
맹숭맹숭 힘 빠진 대화가 오고 갔다. 정대만은 여전히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TV속에선 사카모토 킨파치 선생이 양키 학생들에게 감동적인 설교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가 말했다.
“힘내라고 썼었던 것 같다.”
양키들이 우르르 들고일어났다. “으랴-!!”
“갑자기?”
“너 그때 우울했잖아.”
그랬나…. 그랬던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왜, 너 말이야. 웬 꼭두새벽에 전화해서는…”
그때 대만은 정말로 깜짝 놀랐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렇게까지 확신에 찬 말투는 아니었다. 되는 대로 지껄이는 것처럼 그는 이야기를 드문드문 늘어놓았다. 잘 지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쩐지 풀 죽은 목소리였단 생각이 뒤늦게 들어서 전화를 끊은 뒤에도 내내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비디오는 안부 겸 해서 보낸 거였다고 했다. 기억하기로 편지에도 그렇게 썼을 거라고 했다.
태섭은 대만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담담히 듣고 있었다. 대만의 얘기가 크게 와닿지도 않고, 전화로 주고받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던 것이다.
“아무튼. 박스 까다가 방구석에 흘린 거 아니야? 잘 좀 찾아봐.”
“됐어요. 없으면 없는 거지.”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아 진 태섭이 대꾸했다.
결국 킨파치 선생이 가르치는 녀석 중 하나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각목을 집어던지고 “이런 건 이제 그만하련다.”라고 외치면서 프로그램은 끝이 났다. 두 사람은 소니 매장을 지나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말수가 적어진 채였다. 전화를 할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딘가 어긋난 것처럼 대화가 좀 재미없었다.
이런 붕 뜬 분위기를 정대만이나 송태섭 둘 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서로가 어느 정도 지루해하고 있기는 했다. 결국 아무런 목적 없이 거리를 계속 쏘다니던 두 사람은 그들 사이로 흐르는 침묵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요란한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는 음반 매장이 나타나자마자 들어가자는 말도 없이 냉큼 가게에 들어섰다.
가게 주인이 TRF팬인 건지 매장에는 중독성 강한 유로비트의 레이브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벽면에는 큼지막하게 TRF의 <댄스 투 포지티브> 포스터까지 붙어 있었다. 매장 좌측에는 작은 서점이 있었는데, 출입구 옆에 큼지막한 잡지 가판대가 진열 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인 듯했다. 그런데 잡지 가판대 앞에 강백호가 서 있었다.
“어!”
정대만이 손가락질을 했다.
“엥?”
송태섭이 반응했다.
강백호가 휙 몸을 돌렸다.
“엉? 뭐야?”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이거 태섭 선배랑 정대만 아냐!”
정대만이 발끈했다.
“얜 선밴데 난 왜 이름이냐?”
그러거나 말거나 태섭은 반가워했다.
“강백호, 네가 여기 웬일이야?”
“약속이 있었거던. 태섭 선배는 왜 대만이랑 있어?”
“이 자식들, 듣고 있냐.”
“대만 선배가 불러서. 근데 오랜만에 왔더니 가게가 싹 다 망해서 갈 데가 없더라.”
“아아. 다들 요즘은 여기서 안 논대.”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라,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들아!”
“아, 선배 조용히 좀 해요.”
세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강백호는 아는 사람이 소개해준 여성분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요컨대 미팅 같은 걸 하고 왔다는 얘기였다. 태섭은 깜짝 놀랐다.
“뭐? 네가 미팅?”
강백호는 태섭의 유학 시절 가장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던 농구부원이었다. 동생 같다는 생각에 고교 시절부터 은근히 마음 쓰이던 녀석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인연이 이렇게까지 길게 이어질 줄 그때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강백호는 태섭이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종종 전화를 걸어와 그의 안부를 묻거나 자기 주변의 안부를 떠벌리곤 했는데, 능청맞은 목소리로 일취월장 중인 자신의 농구 실력에 우쭐대다가도 이따금 풀 죽어 있거나 초조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게 학년이 올라가고 제 밑으로 후배들이 잔뜩 생겨도 강백호는 강백호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면모에 무척 정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태섭은 마음속으로 그를 꽤 가깝게 여기는 편이었다. 강백호가 유학이 결정되고 미국으로 왔을 때는 시간을 내서 한 번 만나러 간 적도 있었다.
요컨대 강백호는 현재 북산고 출신 녀석들 중에서 태섭과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귀국한 뒤로 피차 정신이 없어 잠깐 연락이 뜸했었는데, 그 사이에 재밌는 일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팅이라니. 잘 상상이 안 됐다. 애초에 강백호에게 여자를 소개해줄 만한 주변 인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적어도 태섭이 아는 사람들 중에선 없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정대만이 잘 알고 있었다.
“자식, 시큰둥하더니… 그새 냉큼 수락했어?”
“거절했는데.”
“뭐야. 그럼 뭣하러 간 거야?”
강백호는 들고 있던 농구 잡지를 가판대에 도로 꽂아두면서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내 팬이라는데 그럼 어떡하냐. 차만 마시고 돌아가겠다고 해서 갔다 온 거지.”
듣자 하니 구단 매니지먼트 경영진 중 하나가 강백호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한 나머지 주변 자제 분들을 이래저래 연결시켜주려 든다는 것이었다. 서태웅을 능가하는 인기남이 되었다고 우쭐대던 것도 잠시였다. 마냥 거절하기에도 곤란한 상황이라서 이런 미팅도 벌써 두 번째라고 했다.
택도 없는 소릴 들었다는 듯 정대만이 코웃음을 쳤다.
“인마, 거짓말 말고. 솔직히 말해 봐, 미인이라서 나간 거지?”
“과연 돼먹지 못한 정대만다운 생각이군.”
강백호의 콧구멍에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너 아까부터 계속 이름 부른다?”
“이 천재의 팬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나간 거라니까 그러네.”
“머리 길었냐?”
“…….”
강백호의 코가 벌름거렸다.
“길었네.”
신난 정대만이 삿대질을 하며 태섭의 어깨를 퍽퍽 쳤다.
“백 퍼센트야. 이 자식 딱 걸렸어.”
“이 인간이 이젠 아무 때나 사람을 막 치고 그러네.”
그러거나 말거나 정대만은 멈추지 않고 태섭을 때리며 웃어댔다. 마침내 발끈한 강백호가 대만에게 덤벼들었고 두 사람은 가볍게 몸싸움을 벌이며 엎치락뒤치락하다 도보 가장자리에 세워진 칼라콘을 우르르 쓰러뜨리는 참사를 벌인 뒤에야 비로소 얌전해졌다. 둘 다 거칠고 위험한 장난을 끝낸 아이들처럼 씩씩대고 있었다.
내심 이 싸움을 재밌게 관전 중이던 태섭이 비로소 상황을 중재하려고 나섰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좀 해요.”
“그래, 백호야. 그만하자.”
대등하게 싸운 듯 보였지만 실은 강백호한테 아프게 맞은 부위가 너무나도 많았던 정대만이 침착한 얼굴로 휴전을 제안했다.
“내 승리군.”
강백호가 말했다.
“그래, 백호 승리야. 강백호 승.”
“내 편은 안 들어주냐?”
“하늘 같은 선배가 후배한테 아득바득 이겨먹으려 드는 거 보기 안 좋습니다?”
할 말이 없었는지 대만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불만스러워 하기는커녕 태섭에게 면박까지 받아놓고도 실실 웃는 게 정말 바보같이 보였다. 방금 태섭이 자신에게 버릇없게 군 덕분에 이 만남을 주선하면서 은연중에 기대하던 즐겁고 경쾌한 분위기가 돌아온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실실 웃는 대만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태섭도 그 사실을 알았다. 입꼬리가 비죽 올라가는 걸 느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송태섭도 벌써 웃고 있었다.
하천을 끼고 쭉 내려오는 동안 세 사람은 손쉽게 학창 시절 그때의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역 앞에 도착하니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웠는지 정대만이 강백호에게 좀 더 놀다 가라고 붙잡았다. 그건 송태섭도 환영하는 바였다. 강백호는 시간을 확인하려고 역사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세 시간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면서 두 사람을 데리고 두 정거장 밖에 안 떨어진 시가지까지 끌고 갔다.
“아까 이 부근에서 데이트하고 온 거거던.”
강백호가 끌고 간 시내의 풍경은 아까보다 훨씬 활기가 넘쳤다. 문을 연 패밀리 레스토랑과 커피숍이 많았고 가게마다 손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웬디즈와 모스 버거, ATM 기계들, 액세서리점과 이자카야도 있었다. 학창 시절 들락거리던 구 시가지의 상권이 이쪽 부근으로 옮겨온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아까 강백호가 앉아있었다던 베이지색 간판 커피숍 건물에 있는 우타히로바(*1990년대 유행했던 노래방 체인점)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노래를 불러댔다. 분위기에 취해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벌써 아홉 시가 훌쩍 넘어 가게들도 하나 둘 마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데 들어가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셋은 전철을 타고 동네 부근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역사까지 걸으며 가볍게 산책을 했는데 그동안에도 취객들마냥 서로를 밀치고 낄낄대며 걷다가 편의점 앞에 세워진 우스꽝스러운 홍보 간판을 보고 배가 찢어져라 웃어대는 등 꽤나 요란하게 굴었다.
근황 얘기를 시작한 건 그런 실없는 왁자지껄함이 어느 정도 잦아든 후부터였다. 강백호는 서태웅과 맞붙었다가 대차게 깨진 정대만의 지난 출장 경기에 대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종종 서태웅과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했다.
알고 보니 서태웅에게 조만간 세계가 멸망한다는 얘기를 들려준 것도 강백호였다. 불과 몇 달 전 동료 팀원으로부터 종말론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강백호는 무척 충격을 받은 나머지 서태웅과 전화하다 말고 그 얘기를 엄청나게 떠벌렸었다고 했다.
강백호는 흡족해 보였다.
“그걸로 아직까지 쫄고 있다니. 웃기는 녀석일세.”
반면 정대만은 어이없어했다.
“진짜로 믿고 있는 것 같던데 전화로 빨리 취소해라.”
“정대만 바보야? 이 참에 복수해야지. 꼴좋다, 서태웅 자식.”
“애초에 네가 철썩 같이 믿고 호들갑을 떨어서 그렇게 된 거잖아. 니들도 참…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걸 믿고 그러냐?”
“그런 것치고 대만 선배도 엄청 안 믿는 것도 아니던데요.”
태섭이 끼어들었다.
“뭐? 내가 언제?”
“저번에 전화로 그랬잖아요.”
“야, 그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고.”
종말론 논박은 열차에서 내린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어쩌면 세계는 유성우가 쏟아지며 끝날 수도 있고, 세계 곳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수많은 화산이 동시에 폭발해서 끝날 수도 있고, 땅이 쩍 하고 반으로 쪼개지며 끝날 수도 있었다. 예고된 종말인 만큼 전 인류가 일시에 죽는다는 결론으로밖에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 사람 모두 자연스럽게 그런 드라마틱한 결말을 가정하고 있었다.
이런 죽음은 다소 초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구석이 있어서, 적어도 무언가 하나쯤은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은연중의 믿음을 떨쳐버리기 어렵게 만든다. 정대만의 사정도 비슷했다. 그는 설령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진짜라고 해도 별로 무섭지는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특유의 그 심드렁한 말투로 아무래도 자긴 세계가 끝나기 직전까지 농구를 하고 있을 것 같다고 일전의 얘기를 똑같이 늘어놓았다.
“솔직히 폼나지 않냐, 마지막까지 농구하다 끝나는 거. 나 그때 리그 중이라 무조건 농구하고 있을 것 같은데.”
정대만은 자기 얘기에 심취한 것 같았다. 태섭을 툭툭 치며 물었다.
“야, 언제더라. 그 망한다던 날이?”
“7월이요.”
“7월? 한 달밖에 남았네.”
대만은 에이씨 하고 입맛을 다셨다.
“예언을 할 거면 3개월만 늦게 부르지. 토너먼트 시작이 10월인데.”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갈림길이 나타났다. 여기서부터는 셋 다 갈라져야 했다. 정대만은 무척이나 아쉬워하면서 헤어지기 싫은 티를 팍팍 내다가 근처까지 데려다주겠다며 강백호를 따라나섰다. 심지어는 물어보지도 않고 태섭까지 끌어들였다.
결국 세 사람이 정말로 헤어진 건 주택가 공터 앞에서였다. 놀랍게도 양호열과 백호 군단 중 한 녀석이 강백호를 마중 나와 있었다. 송태섭은 양호열을 곧바로 알아보지는 못했다. 어두컴컴한 벽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그들은 강백호를 발견하자마자 담배를 비벼 끄면서 몸을 일으켰다.
“어, 안녕하세요.”
두 사람을 알아본 호열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양호열과 함께 백호를 기다리던 나머지 한 녀석은 용팔이었다. 용팔은 그동안 키가 컸는지 기억 속 모습보다 조금 살이 빠진 듯보였지만 덩치는 그대로였다. 나머지 녀석들은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한 명은 출장 중이고 한 명은 야간 근무라서 못 왔다고 했다.
“아무튼 정대만 잘 들어가라. 태섭 선배도 안녕!”
강백호가 인사했다.
“오냐.”
“백호야, 연락해.”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미련 없이 뒤돌아 섰다.
돌아가는 길에 정대만은 편안하고 즐거운 기색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는 양호열이 강백호를 마중 나온 모습이 꽤 인상 깊었던 것 같았다. 둘이 설마 지금껏 연락하는 사이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넌 알았냐? 둘이 아직까지 연락을 다 하네.”
“그렇죠. 선배는 시간 지나면 다 멀어지는 줄 아나 봐요?”
대만은 흠 소리를 냈다.
“근데 인간관계가 다 그런 거 아니겠냐.”
“…….”
그럼 언젠간 나도 정리되는 건가? 무심코 생각이 스쳤다.
“근데 너랑 또 연락하는 거 보니까 꼭 그런 건 아닌가 보다.”
대만이 말했다.
“형, 그럼 영걸이네랑 연락 안 해요?”
태섭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
대만이 자연스레 덧붙였다.
“근데 자주는 아니지.”
특히 그가 실업 농구 팀에 들어가고 이영걸이 취직한 뒤로는 바빠서 연락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이영걸과 그 무리가 오랫동안 정대만과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는 걸 태섭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안 아쉬워요?”
대만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입가를 문질렀다.
“아쉽지….”
그건 분명 진심이었지만 열감은 없는 말이었다. 아쉬운 건 거짓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운하거나 속상한 것도 아닌 정도의 마음. 나이를 먹을수록 어쩔 수 없는 일들이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오는 가벼운 무기력함. 대만의 기저에는 바로 그러한 체념이 섞여 있었다.
이 형도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었구나. 그 순간 태섭은 대만이 마침내 자신과 비슷해졌음을 느꼈다.
“그래도 이번에 리그 티켓 나오면 보내줘야지. 영걸이 녀석, 좋아죽을 걸.”
허심탄회한 체념은 어디로 갔는지 그사이 밝은 얼굴이 된 대만이 킬킬 웃어댔다.
정류장 앞에서 두 사람은 인사했다. 태섭이 물었다.
“바로 올라가는 거예요?”
“아니. 내일 아침에 또 경기야.”
대만이 태섭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3박 4일은 요코하마에 있을 건데, 이틀 뒤에 또 집에 좀 들를 것 같다.”
“아, 그래요….”
“왜. 그때 바쁜 일 있어?”
그제야 태섭은 방금 말이 이틀 뒤에 또 만나자는 뜻이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선약이 있었다.
“그때 집 보러 가기로 했는데.”
“집?”
대만은 잠깐 멈칫했다.
“너 아예 여기 있으려고?”
어, 하고 멍청하게 입을 벌리던 대만이 곧바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럼 다음에 보자.”
“아녜요. 그냥 한 번 보려던 거라서. 그때 봐요.”
대만은 잠깐이지만 태섭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 그럼.”
그는 태섭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잘 들어가라.”
“선배도요.”
돌아서려는데 몇 발자국 안 가서 이름이 불렸다.
“야, 송태섭!”
뭔가 싶어서 퉁명스러운 얼굴로 돌아봤더니 대만이 대뜸 물었다.
“너 향수 바꿨어?”
“예?”
눈썹이 절로 꿈틀대며 치켜 올라갔다.
태섭의 반응이 못마땅해 보였는지 대만이 드물게 그의 눈치를 보며 어정쩡한 투로 해명했다.
“아니, 아까 물어보려고 했는데…. 냄새 좋았다. 트집 아니다, 이거.”
“아, 네.”
“바꾼 거 맞지?”
태섭은 얼굴을 찡그렸다.
“맞아요.”
그제야 대만은 만족한 듯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 진짜 들어가라.”
“예에.”
집으로 돌아온 송태섭은 씻고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거실 구석으로 치워두었던 택배 박스를 떠올렸다. 박스는 활짝 열려 있었고, 테이프 뭉치는 지난번에 보다 만 데부터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태섭은 두르고 있던 수건을 풀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연결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정대만의 시합 비디오는 여전히 별다른 감상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를 빌미로 생각에 잠기도록 부추기게 만들 수는 있었다. 화면을 한참 쳐다보던 태섭은 어느 순간 자신이 주먹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내 경기가 끝나고 비디오 플레이어가 테이프를 뱉어냈지만 누가 이긴 경기였는지는 기억도 안 났다. 그는 박스를 다시 거실 구석에 치워두고 방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이틀 뒤에 다시 만났다. 이번에 태섭은 향수를 뿌리지 않고 나왔는데, 아닌 척했지만 트집이 잡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는 잘 어울리는 회색 상의에 미국에서 잘 입고 다녔던 카고 팬츠를 차려입고 나왔고, 대만도 지난번과 달리 셔츠 차림이었다.
이것저것 빵빵하게 들어있는 더플백을 메고 등장한 정대만은 어딘지 평소보다 침착한 분위기였다. 태섭을 보고 웃기는 했지만 치근거리거나 능청맞게 농담을 던지지는 않았다.
“가자.”
태섭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은 영화관으로 가서 가장 가까운 시간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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