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7)»
11
웬일로 송아라가 집에 와 있었다. 비디오 플레이어를 든 채 발만 꼼지락거려 신발을 벗던 태섭은 현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아라의 운동화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아라의 운동화를 집어넣으려고 신발장을 열었다가 못 보던 신발을 발견했다. 꼭 일부러 감추어 둔 것처럼 연분홍색 가죽 구두가 신발장 구석에 조용히 숨어 있었다. 앞코에 솜씨 좋게 가죽 끈을 엮은 리본이 달린 굽이 꽤 높은 구두였다.
태섭은 비디오 플레이어를 옆구리에 낀 채 곧장 거실로 향했다. 부엌은 개판이었다. 아라는 된장국을 끓이고 있었는데, 싱크대에 비스듬하게 걸쳐진 도마에서 두부를 썰고 남은 콩고물이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뭐 하냐?”
“보면 몰라?”
돌아보지도 않고 아라가 대꾸했다.
쌀쌀맞은 반응에 태섭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라는 식은 밥을 퍼담고 냉장고에서 무조림을 꺼냈다. 양손에 밥그릇과 국그릇을 들고 휙 뒤돌았다가 드디어 바닥에 떨어진 콩고물을 발견했다. 아라는 발끝을 쭉 뻗어 양말로 아무렇게나 바닥을 닦았다. 그러고는 태섭과 눈이 마주쳤다.
송태섭은 가관이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송아라는 그런 태섭의 태도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옆구리에 들린 비디오 플레이어를 발견했을 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뭐야?”
“뭐가.”
“그거 우리 집 거?”
“어. 네가 고장 내 먹은 거.”
아라는 잠깐 말이 없었다.
“고친 거야?”
“어.”
태섭이 말했다.
“다음에는 조심히 써. 고장내면 바로 나한테 고장 났다고 말을 하던가.”
송아라는 말없이 마저 식탁을 차렸다. 이인분 몫의 수저를 준비한 다음 태섭을 쳐다봤다.
“오빠도 먹을 거야?”
그제야 아라가 준비하던 상차림에 그의 몫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라가 차리고 있던 건너편 상은 태섭의 몫이 아니라 엄마 몫이었던 것이다. 귀국 후부터 드문드문 느껴오던 여동생의 쌀쌀맞은 태도가 갑자기 정면승부를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태섭은 내심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아니.”라고 대답한 다음 비디오 플레이어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연결잭을 찾기 위해 다시 거실로 나왔다.
아라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식사를 하고 있었다. 태섭이 선반에서 잭을 찾는 동안 아라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쳐다보았다.
“뭐 하려고?”
잠시 후 태섭이 고개를 들었다.
“너 여기 있던 잭 못 봤어?”
“오빠 비디오 보려고?”
“내 걸 내가 왜 보냐.”
“그러면?”
아라는 곧장 스스로 깨달은 듯했다.
“아, 그 야한 비디오.”
“야한 거 아니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라는 심드렁해 보였다.
“야한 거 볼 거면 오빠 방에서 몰래 봐. 티비 갖고 들어가던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누구 덕분에 방이 택배 상자로 미어터지게 생겼는데 그 좁은 방에 티비가 들어갈 리 없지 않은가. 아까의 일로 좀 언짢았던 태섭이 말을 무시하자 아라가 다시 말했다.
“저녁 아직이면 앉아서 먹어. 엄마 오늘 늦을 건가 봐.”
그냥 지나치려던 태섭은 마음을 바꿔 아라 맞은편에 앉았다. 아라가 밥과 국을 퍼서 상을 차렸다. 쌀쌀맞게 군 게 좀 후회된 건지 아라는 슬쩍 태섭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요즘 왜 라면만 먹어?”
“내가 라면만 먹는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엄마가 그러던데.”
태섭은 대답 대신 무를 젓가락으로 쪼갰다.
아라가 물었다.
“오빠 언제 다시 미국 들어가?”
태섭이 무를 입에 집어넣었다.
“오래 있을 거야?”
곧 아라는 짜증 난 듯했다.
“아, 진짜. 같이 못 있겠네.”
“너 남자친구 생겼어?”
둘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 표정을 구긴 송아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보란 듯이 접시를 싱크대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송태섭은 밥을 마저 먹고 일어나 한참 동안 서랍을 뒤졌다. 그는 집안 물건들이 어디 있는지 대체로 잘 기억하고 있는 편이었다. 가전제품 관련 잡동사니들은 전부 비디오를 진열하는 선반 아래쪽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서랍을 뒤지고 있으니 도통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실은 그가 찾는 연결잭이 애초부터 여기 보관돼 있기는 했는지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돌이켜보면 이 집에서 그렇게까지 많은 물건과 공간을 사용하려 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찾다가 혹시라도 상자 안에 있을까 싶어 방까지 뒤지고 돌아오니 식탁 위에 덩그러니 연결 잭이 놓여 있었다. 그새 송아라가 놓고 간 거였다. 얘는 이걸 어디서 찾은 걸까. 태섭은 굳게 닫힌 여동생의 방문을 쳐다보다 잭을 챙겨 거실로 향했다.
연도 순대로 시청하기로 하고 가장 오래된 비디오부터 고른 다음 티비와 플레이어를 연결한 후 자리에 앉았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되지 않아 느닷없이 비디오가 시작됐다. 양 팀이 마주 보고 서서 휘슬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섭은 정대만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대만은 흰색 유니폼 차림에 아식스일 게 분명한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경기 시작부터 대만은 기세 좋게 타올랐다. 상대방 하프 코트를 자기 영역인 양 왔다 갔다 하며 소리를 치는 그는 그야말로 한창 물 오른 선수의 전형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수개월 만에 벌써 프로처럼 뛰고 있었다. 잘하네. 송태섭은 턱을 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1992년 비디오니까 이때면 대만이 대학교 1학년, 갓 스무 살 때다. 통상의 농구선수들은 이십 대 중반부터 체력과 기술이 평형한 조화를 이루며 전성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뛰는 것만 보면 정대만은 벌써 전성기였다.
미국에도 지금이 자신의 전성기인 것마냥 입학 초부터 활개를 치던 선수들이 있었다. 송태섭의 전성기도 꽤 일찍 찾아온 편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불과 1년 반 남짓 흘렀을 무렵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기세를 타기 시작했다. 기세는 계속해서 이어져 대학교 3학년 주전이던 1996년 2월 초에는 그야말로 날아다녔다. 특히 그 해 여름 그의 팀은 완전히 다른 위치로 부상했다. 애리조나주에서 진행된 컨퍼런스 홈경기에서 태섭은 자신이 노련해졌음을 실감했다. 볼이 손안에 들어오면 마치 요요를 갖고 노는 것처럼 느껴졌다.
1996년은 태섭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여러모로 특별한 해였다. 애리조나주 컨퍼런스 안에선 꾸준한 상위권이었으나 매번 NCAA 문턱 앞에서 고배를 마셔오던 애리조나 웨스턴 대학 팀이 그 해 이례적으로 상위 시드 팀을 꺾고 ‘3월의 광란(March Madness)’ 티켓을 끊으며 지역 방송국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을 때였다. 비록 진출한 그다음 경기에서 미끄러지긴 했지만, 주변은 하나같이 거기까지 간 게 어디냐는 반응이었다.
랭킹에도 한차례 변화가 있었다. 2부 리그 중위권에 머무르던 태섭의 대학 팀은 중상위권까지 평가가 껑충 뛰었다. 8월 초에 진행되었던 약식 경기 일정에 디비전 1 소속 팀이 끼어든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애리조나주 공립 대학 농구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기적의 팀이라면 한번 정도는 맞붙어 볼 가치가 있어 보였으리라. 이 경기에서, 송태섭은 정우성을 다시 만난다.
산왕전 이후 첫 대면이니 5년 만의 재회였다. 정우성이 1부 리그로 진출했다는 얘기를 듣긴 했었지만 그날 만나게 될 줄은 태섭도 몰랐다. 사실 그때까지 송태섭은 우성이 다니는 대학 이름도 가물가물하던 차였다. 1부 리그 소속이긴 하지만 정우성의 대학 팀 역시 피 튀기는 NCAA의 좁은 문 앞에서 종종 미끄러지곤 했기 때문에, 일본에 있을 때처럼 풍문을 기다리는 방식으로는 소식을 접하기 어려웠다. 하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정우성이라도 미국 땅에선 어떨지 모르는 법인 데다, 은근하게 보수적인 자세를 고수하는 미국 스포츠 잡지에 매번 이름을 올리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의 소식을 기다리는 이들은 여전히 많았다. 정우성은 단독 취재를 위해 본국에서 날아온 기자 한 사람을 달고 들어왔다. 경기 전 간단한 인터뷰와 함께 몇 차례에 걸쳐 사진 찍는 것을 보았다고 태섭의 팀원 중 하나가 말해주었다. 경기가 끝난 뒤 정우성은 직접 태섭을 찾아와 약식 인터뷰를 진행할 마음이 있냐고 물었다. 우성을 따라온 기자는 태섭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생각 있으면 인터뷰할래?”
정우성은 자신을 찍으러 온 기자의 입장을 기꺼이 대변은 하겠다만, 설령 이 일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자긴 별 상관없다는 건조한 투로 말했다. ‘날 만나러 온 기자가 너한테도 관심 좀 갖더라’ 같은 거만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국적, 비슷한 처지의 입장을 수동적으로 내세우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간절하고 적극적인 호소가 아닌 만큼 거절이 어렵지도 않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정우성이 이런 녀석이던가? 섬세한 놈일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는 주변에 꽤나 심드렁한 구석이 있었다.
오히려 그런 무심한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태섭은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우성의 등 뒤로 시선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죠?”
“인터뷰 이후에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기자가 허락을 구하는 몸짓으로 카메라를 살짝 쥐었다 놓자 태섭이 조금 어색하게 대답했다.
“뭐… 필요하시면요.”
인터뷰는 정말로 약식 인터뷰였다.
“그야말로 빅매치입니다. 정우성 선수와 5년 만에 맞붙었는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우성 선수의 5년 전과 지금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까?”
“포인트 가드로서, 같은 포지션으로 전향한 정우성 선수의 여전한 강점과 새로운 강점이 있다면?”
‘정우성 팬이었군.’
미묘한 기분으로 인터뷰를 마치는데, 기자가 수첩을 집어넣다 말고 물었다.
“미국까지 와서 정말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태섭은 머뭇거렸다.
“그런가요.”
“우성 씨는 부모님을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고요. ‘아, 그렇지. 정우성도 사람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재밌지 않나요. 코트 위에 있을 땐 뭐랄까, 그런 일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고 해야 하나.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예요.”
“음, 뭐… 그 녀석도 농구 선수기 이전에 누군가의 아들이니까요.”
“태섭 씨도 힘들겠습니다. 평소 가족분들하고 자주 연락하시나요?”
“뭐, 한 달에 한두 번은….”
송아라가 먼저 연락하는 경우가 부지기수긴 했지만 그래도 월말이 되면 태섭은 엄마에게 꼬박꼬박 전화를 드렸다. 통화 시간은 몇 분 되지 않았고 이따금 대화가 부자연스럽게 끊어지는 순간이 오기도 했다. 그래도 집에 있을 때처럼 마냥 초조한 기분은 없었다.
그는 편안한 상태로 엄마와 자기 사이에 놓인 어색함을 흘려보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새로운 능력에 감탄하곤 했다. 그러다 보면 대화는 곧 보통의 가족들이 나누는 것처럼 애틋하고 부드러워졌다.
농구를 하기 위해 먼 타국으로 떠나왔지만 태섭은 오히려 엄마와 더 가까워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아니, 여태까지 온전히 느끼지 못했을 뿐 그들은 내내 이렇게 친근한 관계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모든 걸 너무 어렵게만 생각해 왔던 것 같았다. 자신이 이렇게 여유롭고 느긋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줄 태섭은 처음 알았다. 자기 안에 이런 에너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온 게 아까울 정도였다.
그것은 거리감이 주는 달콤한 자유로움이었다. 집에 있을 적에는 거실에 앉아있거나 현관에서 신발을 정리하거나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엄마의 고요한 기척이 방 안에 있으나 화장실에 있으나 반드시 느껴졌다. 엄마의 존재감은 일정한 부피를 가지고 떠돌아다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구 같았다. 집에 엄마가 있으면 태섭은 이따금 경직되곤 했다. 무어라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아마도 그는 엄마에게, 정확히는 엄마의 존재감을 구성하는 일종의 장막과 같은 공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해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버지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준섭 형도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바닷가를 걷다 말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가 엄마를 잘 지켜야 한다고. 형마저 죽은 뒤 송태섭은 남겨진 유일한 남자 가족 구성원으로서 이 가정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이양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린 그의 무의식 깊게 자리 잡은 이 생각은 한동안 태섭을 올가미처럼 조여왔다.
이러한 책임감은 집에서의 생활을 다소 비장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상황은 원하는 대로 굴러가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 삶을 건사하는 것만도 너무 벅찼다. 또래 아이들은 타지에서 전학 온 그를 못살게 굴었고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로 그를 미워하거나 배척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의식적으로 마련해 놓은 엄마와 아라의 자리가 있었다. 그 자리를 무시해야만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태섭은 죄책감을 느꼈다.
엄마가 힐난한 적 없는데도 송태섭은 꼭 호되게 야단맞은 아이처럼 그녀를 어려워했다. 엄마가 입을 다물거나 때때로 먼 곳을 쳐다볼 때마다, 생각에 잠겨 움직임을 멈추거나 환영에 사로잡힌 듯 집 한 구석에 시선을 둘 때마다 그는 엄마가 불행해 보인다고, 구체적으로는 자신이 계속 농구를 하기 때문에 엄마를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정작 엄마는 한 번도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스스로를 비난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농구를 할 때만큼은 그 기분과 완전히 분리될 수 있었다. 농구를 그만둘 수 없었고 그만 둘 마음도 없었다. 그는 점점 더 밖으로 나돌았고 고등학교 농구부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연습이나 부원들을 핑계로 저녁 늦게 귀가했다.
그랬다가 미국으로 떠나오면서 그 책임감으로부터 일정 부분 자유로워진 것이다. 집안에 맴도는 침묵과 한순간 엄마를 사로잡는 상념은 이제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다. 미국에 있는 태섭은 더는 그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없었고, 설령 할 수 없다고 한들 그것은 더는 그의 책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엄마를 둘러싸던 그 장막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자 엄마 본연의 모습이 훨씬 잘 느껴졌다. 태섭은 엄마의 기분이나 감정을 그 어느 때보다도 오해 없이 잘 느끼고 있다고 확신했다. 엄마에 대한 연민과 감사함, 죄송스러움도 더는 그를 괴롭게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을 기분 좋게 짓누르는 애정의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말을 걸어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하고 느릿느릿했지만 가끔은 태섭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태섭은 그때마다 자신이 잘해나가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의 전성기는 그렇게 왔다. 성층권에 도달한 우주선이 하나 둘 무거운 껍데기를 벗고 임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몸체만을 남긴 채 우주 공간에 진입하듯, 그의 농구가 갖는 의미가 하나 둘 떨어져 나가 마침내 농구 하나만이 남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태섭의 농구는 오로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정우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섭이 걸어오는 걸 멀뚱히 지켜보던 우성은 뒤이어 빠져나오는 기자에게 목례를 한 뒤 태섭에겐 직접 인사를 건넸다.
“너 저번보다 무거워졌네.”
“어. 몸 좀 불렸다.”
우성이 그제야 씩 웃었다.
“너네 원정 스케줄 나왔던가?”
“아직?”
“근처 오게 되면 우리 팀 사무실로 연락해. 캠퍼스 구경시켜 줄게.”
표정을 보니 진심인 듯했다. 정우성이 쾌활하게 말했다.
“너네 캠퍼스 되게 작더라.”
“어. 그래서 강의 전에 기숙사 들렀다 가도 시간 남아.”
“오. 그건 진짜 부러운데?”
태섭이 얼굴을 살짝 구긴 채 우성을 쳐다봤다. 그러나 딱히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정우성의 성격인 모양이다. 하긴 산왕전 때도 이 녀석은 밥맛으로 굴었다. 오늘 그가 코트 위에서 그저 공놀이를 하려 들었다면 태섭은 어떻게든 물 먹여줬을 것이다.
“아무튼 다음에 보자. 주전까지 하고, 너 제법인데.”
태섭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미국까지 왔으면 주전은 해야지.”
우성이 픽 웃었다.
“마음에 든다. 진짜 연락해.”
송태섭은 이후 스포츠 잡지에 실린 정우성 단독 기사를 읽었다. 예상했던 대로 마지막에 찍은 태섭의 사진은 어디에도 실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우성의 사진 귀퉁이에 조막만 하게 나온 컷이 채택된 덕분에 그를 알아본 지인들로부터 한동안 전화가 걸려왔다. 권준호는 북산의 자랑이라며 태섭을 기분 좋게 추켜 세웠고 채치수는 무뚝뚝하게 근황을 보고하다 말고 감정이 묵직한 목소리로 “잘했다.”고 했다. 이달재는 그의 사진을 오려다 카운터 벽면 쪽에 붙여두었다고 했다.
“가끔 손님들이 물어보면 미국에서 농구하는 내 친구 사진이라고 해.”
“얼굴도 안 나온 걸 가지고….”
머쓱해하자 달재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멋있잖아. 너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보는데 뭘.”
심지어는 한나한테도 전화가 왔다.
“송태섭 제법인 걸.”
그녀는 최근 영문학과로 전과를 해 고전 영시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상상도 해보지 못한 분야라 태섭은 당황했다.
“영시면, 영어로 쓴 시 말하는 거야?”
“응. 셰익스피어도 배워.”
한나는 즐거워 보였다.
“다음에 너도 한 번 읽어 봐. 꽤 재밌어.”
고전영시를 읽을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지만 그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정대만에겐 따로 연락이 없었지만 미국 유학 중인 서태웅이나 강백호 쪽도 잡지 일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듯 연락이 없었으므로 그도 나름대로 국내 리그에서 바쁘겠거니 했다. 서운한 건 아니었지만 그가 요즘 뭐 하고 살고 있는지가 궁금해지기는 했다. 그러나 따로 전화는 하지 않았다.
얼마 뒤 그는 NBA 스카우터들이 농구 유망주를 뽑기 위해 개최하는 드래프트 컴바인에 공식 초청을 받았다. 공립학교 유학생 신분으로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이 거대한 기회를 두고 그는 우쭐하기보다 무척 긴장했고, 그 때문에 다소 경직된 상태로 드래프트에 임했다. 후반부에 본격적으로 몸이 풀리지 않았더라면 다음 해 기회는 물 건너갔을 것이다.
드래프트 지명을 받으면 프리 시즌에서 뛸 수 있고, 잘하면 계약 후에 NBA에 입성할 수도 있다. 그는 어쩌면 미국 땅에서 프로가 될지도 몰랐다. 태섭은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자유로운 환경에 몸을 맡기며 일찍이 찾아온 자신의 전성기를 충실히 누렸다. 비록 첫 드래프트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반부에 뚝딱거렸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내년에 다시 기회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학을 온 뒤로 태섭은 굉장한 선수들을 많이 봐왔다. 그런 순간들은 오히려 그를 기쁘게 했다. 압박감 속에서 용솟음치는 투지와 열정을 느꼈다. 이곳에 소속되었다는 자부심과 이곳에서 낙오되고 싶지 않다는 초조함이 한 몸처럼 붙어 다니면서 그의 향상심을 자극했다.
농구는 언제나 태섭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 싸움은 매 순간 가치 있었고 그를 완전히 몰입시켰다. 그러나 코트 밖에서 그는 노련한 싸움꾼이기 이전에 ATM 앞에서 달러를 계산하다 잘못된 버튼을 누르거나, 랩을 하듯 속사포로 영어를 뱉는 강의에서 중요한 공지사항을 놓치고, 고장 난 기숙사 화장실 수도관을 고쳐달라고 항의하려면 어디에 전화해야 하는지 몰라 난처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스물두 살짜리 청년이기도 했다. 선수로서 송태섭은 네 명의 팀원을 동시에 이끌며 실시간으로 상황을 돌파해 가는 수완가였지만 코트 바깥으로 나오면 대부분의 일을 혼자 힘으로 해내는 데 익숙한 유학생일 뿐이었다.
이 격차가 서서히 그를 조여왔다. 애리조나 웨스턴 대학은 지역에서 꽤 알아주는 농구 팀을 운영하고 있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프로 선수를 배출하는 데 일조한 전례는 없었다. NBA에 가고 싶다면 이 대학을 경유해 1부 리그에서 뛰는 명문 대학교로 편입하는 쪽이 훨씬 가능성 있었다. 게다가 송태섭은 동양인이었다. 더 높은 곳을 노리려면 남들의 몇 배로 전략을 잘 짜야만 했고 태섭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그런 일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송태섭도 어디서부터 뭘 시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혼자서 백방으로 알아보고 다니는 일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에게는 전체적인 그림이 필요했는데 애리조나 웨스턴 대학 쪽은 도와줄 수 있는 것들이 마땅치 않았다.
그의 유학을 지원해 주던 재단에 연락을 취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일들이 구름처럼 뭉뚱그려진 채 마땅한 돌파구로 의식되지 못하고 태섭의 선택지에서 흘러갔다. 그는 홀로 해나가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억울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결국은 중요한 일들은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주변에 호소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코트 위에서 무아지경으로 움직이던 몸에 다시 의식이 깃들고 코트 바깥과 긴밀히 연결된 생각들이 자리를 잡았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과거와 가까운 상태로 농구를 하고 있었다. 미국에 도착하고부터 태섭은 형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농구에 몰입해야 할 이유도 더는 없었다.
그런데도 코트에 들어서면 그의 무의식은 필요한 것과 아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곤 했다. 그의 의식은 종종 낯설지는 않지만 기억에 없던 장면을 소환시켰다. 낡은 체육관, 빈 코트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누군가, 바람에 꺾이며 비스듬하게 눕는 오키나와의 풀밭, 아마도 어린아이의 것 같은─넘어져서 까져 피가 흐르는 무릎이 공을 튀기는 순간 희미하게 감지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의식 저편으로 사라졌다.
경기 중에 집중력을 흩트려 놓을 만큼 심각한 수준의 파노라마는 아니었다. 그러나 태섭은 살아가는 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기 위해 농구를 해오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 일부분을 다시 코트 위로 초대하기 시작했다는 건, 그가 어떤 난관에 봉착했음을 의미했다.
이 문제는 한동안 태섭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비록 4학년이 되자 주전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그는 다시 드래프트 컴바인에 초청을 받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전력을 다했다. 주변에 거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직접 몸으로 부딪쳤다. 결국 NBA가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을 때도 태섭은 낙담하지 않았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분하지 않으면 이제부터 뭘 하면 될까. 그즈음 그의 4학년 마지막 학기 출장 경기 일정이 잡혔다. 경기가 끝난 다음 송태섭은 근처 전화 부스에서 정우성의 대학 팀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정우성은 깜짝 놀랐다.
“어 난데, 무슨 일?”
“근처 오면 연락하라며?”
태섭이 느긋하게 말했다.
“캠퍼스 구경 안 시켜줄 거냐?”
그제야 정우성이 아! 소리를 냈다.
“아아. 그거 얘기하는구나.”
여고생마냥 소리 높여 와하학 웃어댔다.
“너 지금 어딘데?”
“어, 무슨 분홍색 쇼핑센터 앞.”
“지하철 타고 우리 캠퍼스 앞으로 와. 두 정거장이면 돼.”
캠퍼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 얼마 안 있어 매끈한 청바지 차림의 정우성이 넓은 보폭으로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는 손을 흔들면서 타이밍이 좋았다고, 오늘은 남은 일정이 없다고 했다.
“아, 근데 지금 별관은 수리 중.”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두 사람은 호의적이긴 하지만 열의는 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캠퍼스를 돌아다녔다. 우성이 다니는 사립 대학은 과연 규모가 상당했다. 체육관도 두 개나 지어져 있었고 경기용 수영장이 별관 옆에 큼지막하게 딸려 있었다. 기숙사도 태섭의 학교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는데 거의 아파트 단지처럼 보였다.
마땅히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아 여기 온 것치고는 괜찮은 구경을 했다. 우성이 자주 강의를 들으러 간다는 오래된 벽돌 건물을 통과해 나오는 것으로 캠퍼스 투어는 끝이 났다.
“너네 학교 장난 아니네. 기숙사 맞아 저거? 뭐 저렇게 커?”
우성은 훗 하고 웃었다.
“들어가 보고 싶어?”
“나 외부인인데 저기 들어갈 수 있냐?”
“아니. 나 기숙사 안 살아서 못 들어가.”
태섭이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는 눈으로 우성을 쳐다봤다.
우성이 우쭐댔다.
“내가 사는 곳이 그렇게 궁금하면 내 아파트 구경오던지.”
‘아니, 건물이 커서 들어가 보고 싶었던 거라고….’
그러나 이 뒤에 딱히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태섭은 심드렁한 얼굴을 했을 뿐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아파트를 향해 걷는 동안 두 사람 다 별로 말이 없었다. 이따금 정우성이 물고기 모형이 달린 간판을 손가락질하며 “저거 정어리지?”하고 물어보면 태섭은 “저거는 정어리지.”라고 대꾸했고 그러면 정우성이 “흐음.”하고 추임새를 넣는 것으로 대화는 매번 소강되었다.
초저녁에 가까워진 거리에 강렬한 오렌지색 햇빛이 떨어지면서 도로 위에 늘어선 표지판 그림자가 길쭉해졌다. 빵빵거리며 트럭 한 대가 옆으로 지나갔고 술 취한 노숙자가 비틀대며 지하철 역사 안으로 사라졌다. 주택가 안으로 들어서면서 정우성이 야자수가 늘어선 하얀색 아파트 건물을 가리켰다. 층마다 작은 발코니가 딸려 있는 게 보였다.
“멋있지 않아?”
“멋있네. 넌 몇 층 사는데?”
“난 2층 살지.”
아파트가 가까워지자 태섭은 야자수를 보려고 고개를 젖혔다. 그동안 정우성은 야자수가 늘어선 하얀색 아파트 건물을 지나쳐 바로 그 뒤편에 있는 파란색 빌라로 들어갔다. 태섭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황급히 그를 따라잡았다.
“너 저기 산다며.”
“응? 난 여기 사는데?”
“그럼 건물 얘긴 뭐야?”
“건물 얘기?”
“멋있냐며.”
“멋있잖아.”
‘이 자식 뭐지?’
그러거나 말거나 우성은 익숙한 행세로 계단을 뛰어올랐다.
냉큼 집 열쇠를 찾아 문을 벌컥 열자 남의 집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우성은 신발을 가지런히 벗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제자리에 조용히 운동화를 벗으면서 태섭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아파트는 무척 깨끗했다. 우성은 정리정돈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 것 같았다. 옷도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고 부엌도 깔끔했다. 태섭도 지저분하게 사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우성이 살림살이를 잘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이질적이고 놀랍게 다가왔다. 정우성은 고교 시절부터 들여온 버릇이라고 했다.
“양말 뒤집거나 속옷 제때 바구니에 안 넣어두면 현철 선배가 암바 걸었어. 그거 진짜 아파.”
고등학교 얘기가 나오자 우성은 자기 선배들 얘기를 두서없이 늘어놨다. 이야기에 적당히 집중하면서 태섭은 대충 주변을 훑어보았다. 대학생이 혼자 사는 집보다는 살짝 커 보였는데 룸메이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우성이 물었다.
“넌 선배들하고 연락해?”
안 한다고 거의 대답할 뻔했다. 최근까지도 연락 한 통 없는 정대만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다. 뒤이어 떠오른 권준호와 채치수 때문에 그 대답은 쏙 들어갔다. 그러나 태섭은 그 두 사람 하고도 자주 통화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긴 하지.”
“흐음.”
그의 대답에 흥미가 떨어진 듯 우성은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놀랍게도 우성은 요리를 할 줄 알았다. 그는 밥을 해 먹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 과정을 크게 번거롭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태섭이 여태껏 기숙사에서 어떻게 끼니를 때웠는지 듣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그랬으면 크리스가 암바 걸었을 걸.”
“크리스가 누군데.”
“미국인 현철 선배.”
파스타를 얻어먹고 나면 숙소로 돌아가봐야겠다고 태섭은 생각했다. 이곳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냉장고 구석에 박혀 있던 일본 맥주 캔이 발견되면서 얼결에 같이 술을 마시게 됐다. 분명 어디서 건데 언제 누구한테 받은 건지 우성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체중 관리를 하느라 음식 받은 걸 제때 해치우지 못하고 구석에 박아두는 경우가 있는데 맥주도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둘 다 많이 마실 생각은 아니었으므로 홀짝이는 정도로만 들이켰다. 천천히 마시며 앉아있으니 적은 양인데도 평소보다 취기가 빠르게 올랐다. 태섭은 아까보다 말이 많아졌고 우성은 점점 말이 적어지면서 무력한 말투로 맞장구를 쳐주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되자 오히려 아까보다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진 것 같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농구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우성도 나름대로 미국 생활에 고충이 많아 보였다. 특히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실은 자기도 고교 선배들하고 그렇게 자주 연락을 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요즘은 어쩔 수 없이 잊고 사는 때가 많아져 전화를 잘 걸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우성은 얼굴을 슬쩍 구긴 채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선배들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더라. 예전엔 오랜만에 전화하면 받자마자 구박했거든.”
“뭐. 다들 바쁘니까 이해하는 거지.”
“근데 나도 그렇다고 그게 엄청 서운하진 않았어.”
태섭이 심드렁하게 맥주를 홀짝였다.
“그래?”
“응.”
정우성은 잔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내년쯤엔 몇 달에 한 번 연락하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연락 안 하게 될 수도 있겠지.”
“뭐, 모든 일엔 끝이 있는 법이니까…”
가벼운 투로 말끝을 흐리던 태섭이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막연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돌아가는 길에는 우성이 버스정류장까지 나왔다. 덩그러니 표지판만 박힌 정류장 앞까지 걷고 있으니 슬슬 술이 깼다. 태섭은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우성은 시간표를 봐주겠다고 정류장 표지판을 읽고 있었다. 맞은편 가게의 전광판 마지막 글자가 정신 사납게 지직대는 걸 멀거니 쳐다보던 태섭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넌 농구 말고 다른 거 생각한 적 있어?”
우성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봤다.
“있어.”
태섭이 놀라 되물었다.
“있다고?”
“그럼 넌 없어?”
태섭은 말문이 막혀 얼떨떨해졌다.
“아니….”
“그러니까. 난 다른 것도 잘할 것 같거든.”
우성은 진지한 투로 말했다.
“벌써 파스타도 이 앞에 있는 가게 것보다 잘 만들어.”
태섭이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농구 관둘 생각을 해봤단 거야? 네가?”
“농구를 왜 관둬?”
“그야…. 다른 일 생각해 봤다며?”
정우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농구는 해야지. 난 미국 최고가 될 거거든.”
태섭이 대화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 버스가 오는 것을 본 우성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내렸다.
“잘 들어가라.”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태섭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어쩌면 아까 먹은 맥주가 잘못된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구토감은 없었지만 가슴에 무언가 얹힌 듯 답답했다.
정우성은 지난해 드래프트 지명을 받고 정식 계약을 따내 장안의 화제를 불러 모았지만 막상 NBA 입성 후에는 큰 소식 없이 조용히 시즌을 보내고 있는 상태였다. 건너 듣기로는 벤치에 있을 때가 많다고 들었다. 두 사람 모두 미국행이 마냥 꿈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우성은 정말로 상관없어 보였다. 아니, 그는 그런 일들이 농구를 계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애쓰지 않고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기술이 부족하면 갈고닦으면 그만이고, 파워가 부족하면 몸을 키우면 그만이다. 그런 난관이라면 돌파할 수 있다. 기죽지만 않는다면 늘 차선책은 있었다. 그러나 정우성과 같은 특정한 부류의 선수들이 보여주는 사고방식은 노력과 무관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런 것이야말로 재능인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농구를 해나갈 것이라고 믿는 정도가 아니라, 믿을 필요조차 없이 자기 안에 포함시키는 무의식이야말로 재능인 것이다.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을 불러일으키는 투쟁심 정도가 아니라, 더는 전만큼 잘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 그를 관두겠다는 가정조차 하지 못하는 상상력이야말로 재능인 것이다. 송태섭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할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기 몫을 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두운 차창을 바라보며 숙소로 돌아가고 있는 그는 더는 분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기분이 나빴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프리시즌 방출 후에도 송태섭은 농구를 계속했다. 투웨이 계약을 거치며 일 년 간 여러 팀을 전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졌다. 투쟁심과 열정이 전처럼 불타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전보다 생각이 많아진 것 같기도 했다. 코트 위에서 순간적으로 들이닥치는 알 수 없는 파노라마들이 그의 집중력이 쇠퇴했음을 증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코트 위를 종횡무진하던 자신의 과거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송태섭은 슬럼프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모든 게 애매한 시기였다. 일 년 동안 느릿느릿 그를 좀먹듯 닥쳐온 슬럼프가 언제 끝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음 해 정식 계약의 기회는 더 줄어들 것이다. 귀국이 선택지처럼 느껴지기 시작하자 송태섭은 슬슬 이쯤에서 만족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농구를 그만둘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그런 다음 자신의 마음이 그에 반발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답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농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구가 없어도 살 수 있기는 했다. 농구를 관둔다는 가정은 그를 파괴시킬 수 없었다. 그를 농구로 떠밀었던 모든 문제들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고 농구를 계속할 것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그의 좋고 나쁜 정도에 달려 있었다.
“자, 정대만 선수. 빠르게 올라갑니다. 앞에 비어있어요.”
브라운관 속 정대만이 순식간에 코트를 가로지른다. 라인에서 발을 빼내고 자리를 잡는 습관은 그가 가진 좋은 버릇 중 하나다. 상대편 선수들이 달려오지만 이미 공은 대만의 손을 떠나는 중이다.
“정대만, 석점! 아, 슛감 완전히 돌아왔죠.”
두 손을 모으고 입을 가리면서 태섭은 화면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정대만은 왜 이 비디오를 보내려고 했을까? 좀 더 일찍이 택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제때 미국에서 받았다고 하더라도 태섭은 이 비디오를 보며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귀국한 지금에 와서 이런 가정을 하는 것도 꽤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뛰는 거 보니 요즘은 어쩌고 있나 보고 싶어 지긴 하네.’
경기는 진다이대의 완승으로 끝났다. 다음 비디오를 고른다고 상자를 살피던 태섭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가 선선한 바람을 몰면서 신발을 벗고 있었다. 손에는 흰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아라야, 태섭아! 만두 먹자.”
활기찬 투로 엄마가 말했다.
현관으로 나온 태섭이 손을 내밀어 봉투를 건네받았다.
“웬 만두예요?”
“응. 엄마 직장 동료가.”
태섭이 미국에 가 있는 사이 전산 자격증을 딴 엄마는 불과 몇 달 전 사무직으로 직장을 옮겼다. 일전에 아라한테 전해 들은 적 있어 태섭도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곤 있었다. 이전 직장보다 대우가 좋고 사람들이 무척 친절해 요즘 엄마가 즐거워 보인다고 들었다.
과연 새 직장 덕분인지 엄마는 못 보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어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태섭이 네가 귀국한 거 알고 평소보다 많이 챙겨주시더라.”
벽을 짚은 채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으며 엄마가 큰 소리로 불렀다.
“아라야!”
태섭이 봉투를 들고 아라의 방을 지나치며 다시 불렀다.
“송아라. 나와서 만두 먹어.”
잠시 후 아라가 건조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왔다. 태섭은 아라를 흘끔거리긴 했지만 굳이 말을 걸지는 않았다.
접시를 꺼내던 엄마가 싱크대를 보고 물었다.
“저녁 아라랑 같이 먹었니?”
“예. 엄마 것도 있어요. 국도 남았고.”
“무조림은 다 먹었어.”
아라가 누구에게 말하는지 모를 투로 말했다.
“만두 많아요?”
“응, 오빠 것까지 많이 챙겨주셨어.”
아라는 대답 대신 봉투를 벗기고 만두를 꺼냈다. 식탁으로 돌아오던 엄마가 정지된 티비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섭이 끼어들었다.
“오늘 찾아왔어요. 고쳤으니까 쓰셔도 돼요.”
“수리값 많이 들었겠네.”
부스럭거리는 봉투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요란해졌다.
“얼마 안 들었어요. 그냥 부품 문제래요. 안에 뭐 하나 갈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 가져가서 고칠 걸 그랬다. 엄만 또 새로 하나 사야 될 정도인가 하고.”
“만두 먹어요.”
아라가 엄마 접시에 만두를 담아 내밀었다.
“응, 고마워.”
“오빠도.”
아라가 만두를 담은 접시를 휙 밀었다. 거세게 밀린 접시가 송태섭 앞으로 요란하게 미끄러졌다.
“살살 좀 해.”
태섭이 짜증 어린 투로 말했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투로 아라가 대꾸했다.
“태섭아, 저 상자는 뭐니?”
“고등학교 선배가 보낸 거요. 다 경기 영상이에요.”
태섭이 무심히 대답했다.
“엄마, 집에 최근에 나온 스포츠 잡지나 신문 같은 거 있어요?”
“글쎄…. 아라가 구독하는 잡지가 몇 개 있긴 한데. 아라야, 거기 스포츠 잡지도 있니?”
아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의 뜸을 들인 후 태섭에게 직접 말했다.
“미국 농구 얘기는 없어.”
“그건 상관없어. 국내 실업 농구 소식 좀 보려는 거라.”
“없어. 잘 먹었습니다.”
아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나 거칠게 일어났는지 식탁 전체가 작게 덜컹거리고 물건들이 조금씩 움직일 정도였다. 엄마 앞에서까지 신경질을 내는 아라의 태도를 용납하기 어려웠던 태섭이 잔소리를 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아라는 태섭이 그렇게 마음먹은 걸 빤히 꿰뚫어 본 것처럼 날카롭게 그를 쳐다봤다. 소리치듯 말했다.
“진짜 없다고!”
그러더니 말문을 잃은 태섭과 만두를 먹다 말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엄마를 거실에 내버려 둔 채 쿵쾅거리며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탁 하고 방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태섭은 식탁 위로 엎어진 액자 하나를 바로 세웠다. 송준섭의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였다.
“쟤 왜 저래요?”
기가 막히단 투로 태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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