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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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섭은 부동산을 빠져나왔다. 좁고 경사진 골목을 따라 내려오는 동안 해안가의 바람이 머리카락을 마구 나부끼게 만들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올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늘 송태섭은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원래 그렇게까지 일찍 일어날 생각은 아니었지만 지난 몇 년 간 몸에 들여온 습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억지로 다시 잠들려고 노력하다가 뜻대로 되질 않자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조깅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대로 바다가 보일 때까지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해왔던,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기계적이면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무척 전문적인 구석이 있는 몇 년 간의 생활 루틴이 마치 전생의 일인 양 굴려고 애썼다. 그러다 결국은 그러한 습관에 못 이겨 몇 분 정도 달리게 되었다. 아파트로 돌아왔을 땐 적당히 숨이 찬 상태였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났다. 그는 방으로 조용히 돌아갔고, 억지로 얕은 잠에 들었다가 아침 9시쯤 눈을 떴다. 엄마와 송아라는 이미 나갔는지 집이 텅 비어있었다.
최근 송태섭은 두 가지 일로 무척 바빴다. 우선 그는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귀국하고 얼마 안 있어 내린 결정이었는데, 독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집과 멀리 떨어지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그동안 불행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가끔 고함을 치며 싸우긴 했지만 여동생인 송아라와도 잘 지냈다. 그러나 집안에 있으면 가끔 속이 답답하게 얹힌 듯했고 창문이나 방문을 닫으면 주변이 지나치게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 침묵 때문에 그는 학교에서와 달리 집에서 무척 얌전하고 조용하게 행동했다.
한 번도 이런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지만 송아라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송아라는 아무 때나 두 사람의 방문을 열고 뜬금없이 말을 걸거나 걸핏하면 창문을 열어놨다가 까맣게 잊어버렸다. 태섭이 이 사실을 지적하면 그제야 “어이쿠, 죄송하네요.”하고 노래 부르듯 빈정거리는 투로 문을 닫았지만 버릇을 고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송아라가 일부러 그러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생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보기 전에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 길로 송태섭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렸고 그렇게 5년이 흘렀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는 집안을 맴돌면서 때를 기다리다 자신을 휙 낚아채던 침묵으로부터 차차 멀어졌고 결국에는 서서히 잊어버렸다. 집이 답답했었다는 감상도 그곳을 떠나 애리조나의 기숙사 생활을 하며 느낀 것이었다. 그전까지 태섭은 자신이 집을 어느 정도 불편해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랬다가 귀국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분위기가 전보다 더 강력하게 그를 조여오는 것 같았다.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겸연쩍고 죄책감이 들었다. 특히 엄마가 그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 때면 이런 감정이 더욱 강해졌다. 송태섭은 당분간의 일이 불투명하더라도 우선 집을 나와야겠다고 결심했다.
귀국한 지 일주일 만에 그는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가마쿠라에서 전철로 몇 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부동산을 돌면서 적당한 매물이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수중에 여윳돈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지가 썩 넓지는 않았다. 태섭은 집과 멀리 떨어지기를 원했지만 한편으로 여동생과 엄마가 걱정되었기 때문에 너무 멀리 나가는 건 원치 않았다. 그가 일본을 떠날 때쯤 상상을 초월하게 껑충 뛰었던 집값은 휴지 조각만도 못한 값이 되어있었다. 그런데도 역이나 시가지와 가까운 곳은 여전히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비쌌다. 좀 괜찮다 싶은 곳은 턱없이 비싼 보증금이나 사례금을 요구했다.
몇 군데 알아보던 송태섭은 생각을 바꾸어 도쿄 근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부동산 업자로부터 오히려 도쿄 외곽 구역을 알아보라는 충고를 들었던 것이다. 집값이 천정부지로 솟구칠 무렵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 기존에 놀고 있던 땅을 밀고 우후죽순 세웠다가 버블 붕괴와 함께 방치해버린 빈 아파트며 맨션이 아주 많다고 했다.
부동산 업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쿄 외곽이나 그 인근에서 놀고 있는 매물이 꽤 많았고 개중에는 주변 입지가 상당히 괜찮은 집도 있었다. 현재 태섭은 처음의 조건을 바꾸어 도쿄 부근의 방을 찾아다닐지, 아니면 좀 더 발품을 팔아 집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주변에서 보다 괜찮은 매물을 찾아볼 것인지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귀국한 지 이 주일 만에 실업 농구 구단 스카우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송아라가 건네준 ‘여자’ 번호가 한나의 새 번호인 줄로만 알고 도로 연락을 넣었던 태섭은 수화기 너머로 처음 듣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자신을 스카우터라고 소개한 여자는 예의 바르고 침착한 투로 그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저희 구단 사람들이 송태섭 선수 팬이에요.”
그런가 하면 그의 기량을 조심스럽게 칭찬하기도 했다.
“지난번에 미국으로 NCAA 경기를 보러 갈 일이 있었어요. 드리블 기술이 정말 예술이던걸요.”
그녀는 매우 신중했고 전화상으로는 스카우트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싶다고만 했다. 송태섭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전날에야 비로소 스카우트 제의를 하려고 만나자고 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로서는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츠지도 공원 맞은편에 하수처리장을 끼고 해변까지 이어지는 이차선 도로를 따라 내려오는 동안에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그는 운명에 빨려 들어가듯 카페에 도착했다.
구단 스카우터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광대뼈가 살짝 도드라진 얼굴의 키가 작고 마른 여자였는데, 가게에 들어선 송태섭을 보고 먼저 아는 체를 했다. 송태섭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스카우터는 태섭에게 언제 귀국했는지 물어보았다. 먼저 연락을 준 입장인 만큼 그의 소식을 모르고 있지 않을 텐데도 이것저것 질문했다. 애리조나주의 대학 농구 수준은 어땠는지, 기억에 남는 시합이나 선수가 있는지, 근래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물어보면서도 꼭 처음 듣는 사람처럼 그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무척 신중한 태도였다. 송태섭으로부터 별다른 일 없이 지내고 있다는 대답을 들은 다음에야 스카우터는 여태껏 보여 온 조심스러운 태도가 바로 이때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혹시 다른 데서 받은 포지션 제안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왔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막상 질문을 들으니 마음이 무척 차분했다. 송태섭은 자신이 어느 정도 마음을 굳혔음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간단히 대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송태섭은 아직 다른 데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바는 없지만, 자신은 당장 농구를 하기 위해 귀국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스카우터가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대단한 공을 들였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마지막엔 에둘러 대답했다.
“좀 쉬고 생각해 보려고요.”
스카우터는 대놓고 아쉬움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카페를 떠나기 전 태섭에게 명함을 건넸다. 완곡하지 않은 거절에서 그의 미련을 읽었다고 확신한 것 같았다. 스카우터는 나긋나긋한 투로 말했다.
“오늘 이야기 나눠서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스카우터가 떠난 뒤 송태섭은 명함을 뒤집어 보았다. 짙은 녹색의 반들반들한 명함 하단에 ‘히타치 제작소 오사카’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는 오사카에서 가나가와까지 자신을 찾아온 스카우터를 돌려보낸 거였다.
이 일을 기점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방을 보러 다니느라 집을 비울 일이 많았기 때문에 스카우터들은 부재중 메시지를 통해 태섭에게 먼저 인사를 남겼다. 그들은 시종일관 예의 바른 투로 자신이 어느 구단의 누구인지 밝힌 다음,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도쿄에 모체를 둔 사기업 지방 지사에서 설립한 구단의 스카우터들이 대부분이었다.
태섭은 얼떨떨했다. 정대만이 전화로 슬그머니 떠봤을 때부터 몇몇 구단이 자신을 눈여겨본다는 것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미국에서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는 선수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행을 결정한 정우성 선수나 다른 농구 유망주들이 잡지에 얼굴을 싣고 인터뷰를 할 때 태섭은 고작해야 애리조나주 지역 신문에나 몇 번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그나마도 단신 선수로서의 정체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꾸준히 제 몫을 하는 정도로는 미국 대학 리그에서 활약했다고 할 수 없었다. 농구의 본고장답게 미국 리그는 인재로 넘쳐났고, 인력에 아쉬울 것이 없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선수들에게 폐쇄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리그 소속 관계자들은 때로 참아주기 어려울 만큼 거만하게 굴었다. 겉으로는 호의적일지언정 그들은 타국 선수들의 장래에 명확한 한계를 그어놓았다.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의 기량도 평균치로 평가했다.
송태섭과 같은 동양인 유학생들은 대학 리그에서 몇 년 간 주전으로 뛰다가 자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태섭만 해도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는 도로 벤치 신세였다. 코트로 나갈 기회를 기다리며 다리를 떨고 있으면 꼭 고등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 무렵에는 초조한 한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약한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흘러가는 치열한 승부의 세계 한가운데 서 있다가 가장 덜 모욕적이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안전한 지대로 옮겨진 것 같았다. 전전긍긍하는 일이 줄어든 게 자신이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자존심을 다치기 싫어 상황과 거리를 두는 건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적절한 표현이라 느껴진 적은 없지만, 어쨌든 송태섭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4학년 말 벤치 신세를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그는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주전으로 NCAA와 애리조나주 컨퍼런스에서 수준 높은 경기를 경험했다. 특히 3학년 땐 상위 디비전 소속의 명문대 농구팀과 붙어 그야말로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한 적도 있었다. 고만고만한 중위권 실력으로 하위시드에 분류돼 있는 애리조나 웨스턴 대학교로서는 드물게 얻어낸 쾌거였기 때문에 이 극적인 승리를 두고 학교는 한동안 광란의 축제 분위기였다.
이 경기를 눈여겨본 구단 관계자들 덕분에 첫 신인 드래프트에서 고배를 마신 뒤에도 선택지가 남았다. 지명을 받진 못했지만 드래프트 컴바인에서 만난 감독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송태섭은 다음 해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서른다섯 번째로 지명을 받고 프리시즌 로스터(*정규시즌을 준비하는 훈련 기간에 참여하는 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비록 NBA 정규시즌 전에 방출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가진 조건들을 생각하면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다. NBA에 입성하진 못했지만 그 문턱까진 가본 선수인 것이다. 국내에선 이 정도 성적만으로도 융숭한 대접이 보장돼 있었다. 스카우트 제안을 받을 줄 아예 몰랐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급하게 귀국을 결정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동안 마음 한구석으로는 이렇게 될 거란 사실을 태섭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독립할 방을 찾겠다는 명분으로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있는 행동의 이면에는 집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욕망뿐 아니라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를 깊게 생각할 수 없도록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는 그의 오랜 습관이 감추어져 있었다.
츠지도 해안 공원 버스정류장을 지나치면서 그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자기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는 매끄러운 움직임으로 낡은 연립주택 건물을 지나쳐 야구장 맞은편 신호등 앞에 도착했다.
오늘 미팅 장소는 츠지도의 야구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코메다 체인 카페였다. 요코하마에 본거지를 둔 아키타 트레이더스 감독과 만나 대화를 나누기로 돼 있었다. 약속 장소까지 제법 거리가 있었으므로 그는 조금 더 서둘러야 했다.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전화상으로는 간단한 용무라고 들었지만 방문 목적은 보나 마나 스카우트 제의일 것이다. 그는 거절할 것이다. 당분간 농구를 할 생각일랑 없었으니까. 며칠 내내 끈질기게 연락해오던 구단의 제의를 거절할 때도 똑같이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더는 농구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듯 뱉어버렸고, 그 뒤로 그는 은근하게 화가 나 있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내 마음속을 맴돌던 회의감과 묘한 권태로움이 형태 없이 뒤섞여 있다가 곤란하고 짜증스러운 상황 속에서 폭발하듯 말로 만들어져 튀어나온 거였다. 심지어 태섭은 홧김에 뱉은 자신의 말에 조금의 반발심도 느끼지 못했다. 거절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 결연하고 침착한 나머지 그때까지 어떻게든 태섭의 마음을 돌려보려던 스카우터도 결국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데 정작 스카우터가 떠나고 온갖 데서 걸려오던 연락들이 뚝 끊어지고 나자 그 침묵이 그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구단으로 돌아간 스카우터가 업계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 소식을 전달했는지 그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그가 농구를 그만둔다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단 것만은 분명했다.
자신이 던져놓은 말이 영향력을 갖고 사람들의 기분과 상황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을 지켜보는 과정은 그를 언제나 피곤하게 만들었다. 송태섭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전화상으로는 별다른 낌새를 보이지 않았지만, 아키타 트레이더스에도 분명 태섭이 농구를 관둘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게 연락을 준 거였다. 진득하게 달라붙거나 그가 잘못 생각한 거라고 설득하려 드는 걸지도 몰랐다. 피곤한 날이 될 것이다. 몇 가지 상투적인 거절의 말을 고민하면서 태섭은 코메다 카페에 들어섰다.
창가 쪽에 앉은 남자가 딸랑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태섭은 직감적으로 그가 감독임을 알아보았다. 남자는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가까이서 보니 못해도 쉰 살은 먹은 것 같은 남자였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송태섭 씨. 애리조나 활약상은 종종 전해 들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커피는 뭐로 시키시겠어요?”
“오래 있을 건 아니라…. 차가운 차로 할게요.”
주문을 하고 나자 예상했던 것처럼 시시하고 흔해빠진 신변잡기가 시작되었다. 감독은 애리조나 지역 신문에도 실렸던 태섭의 대학교 3학년 경기 얘기를 꺼냈다. 미국만 떠들썩했던 게 아니라 한동안 일본 본토에서도 화제인 경기였다고 했다.
감독은 그 경기에 대한 소식을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자신의 오랜 친구가 NCAA 중계 채널이 지원되는 오키나와 지역에서 근무 중인데, TV로 생중계를 보곤 흥분에 차서 자신에게 전화로 얘기를 늘어놓는 것도 모자라 경기 녹화 비디오까지 보내줬다는 것이다.
감독은 그걸 몇 번이고 돌려봤다고 했다. 하위시드 리그 출신 학교가 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명문대를 아슬아슬한 점수 차로 꺾어버리는 일은 뭐가 됐던 사람을 열광시키는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농구를 그만둔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감독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치고 들어온 말에 태섭은 조금 당황했다. 마시던 차를 트레이에 내려두면서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예, 뭐.”
설득하거나 회유하는 이야기가 나올 차례였으므로 태섭은 자연스럽게 긴장했다. 그러나 감독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태섭의 반응을 통해 자신만의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의 태도가 불편하게 느껴지면서도 태섭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갈 계획은 없습니다. 당장 농구를 할 마음도 없고요.”
“그렇다면 다시 시작하실 마음은 있는 겁니까?”
‘시비 거는 건가?’
그렇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절로 그런 생각이 들 만큼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모호한 어조로 태섭이 대답했다.
“글쎄요…. 우선 두고 봐야겠죠.”
그는 명함을 쥔 채 카페를 나왔다. 일부러 주먹을 쥔 채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몇 번 정도 구겨진 명함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까 생각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이도저도 아닌 듯이 구는 자신이 혼란스러웠지만 걷는 동안 마음은 차차 차분해졌다.
집에 도착할 즈음엔 자신의 행동이 최선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에서 부스럭거리던 태섭은 맞은편 거실에 놓인 전화가 깜빡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신발을 흔들어 벗었다.
음성 메시지가 두 건 남겨져 있었다. 첫 번째 메시지는 소니 매장에서 남긴 것이었다. 동네 매장 직원은 부품 문제로 생각보다 수리 기간이 길어진 것에 심심한 사과를 덧붙이면서, 태섭이 맡긴 비디오 플레이어 수리가 끝났으니 찾으러 오라고 했다. 두 번째 메시지는 놀랍게도 정대만이 남긴 것이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정말 농구를 그만둔 거냐고 물었다.
이런 주제를 물어보는 사람치곤 꽤나 불손한 태도였다. 정대만은 태섭의 결정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다그치듯 몇 번이고 물어보더니 갑자기 풀이 죽어선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는데(“근데 너도 지나가다 형광색 머리 보면 가발인지 알아보냐?”), 정말이지 의미 없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태섭으로선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엔 저 혼자 낄낄대더니 전화하라는 말을 남기고선 대만의 음성 메시지는 뚝 끊어졌다.
횡설수설하는 메시지를 잠자코 듣던 태섭은 음성 메시지를 다시 처음부터 돌려 들었다. 그러고는 대만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네. 여보세요.”
진짜 받을 줄은 몰랐던 탓에 태섭은 내심 당황했고, 그를 감추기 위해 퉁명스레 대답했다.
“집에 있었네요? 연습 없어요?”
“송태섭?”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전화를 왜 이제 걸어? 메시지 남긴 지가 언젠데.”
“언제 남겼는데요.”
“그제 저녁에 남겼다, 인마!”
기다렸다는 뜻일까? 태섭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빴어요. 근데 진짜 왜 집에 있어요?”
“병원 때문에 일찍 나왔다.”
“병원이요?”
“어. 지난번 경기 때 무릎이 좀 이상해서… 근데 이상 없댄다.”
“아프진 않고요?”
“내가 아프면 아프다 했겠지. 그냥 움직일 때 느낌이 좀 이상했어.”
대만은 투덜대면서 자신을 떠밀었던 소매치기 얘기를 꺼냈다. 몇 주 전에 벌어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게 불길한 복선이었던 것 같다면서, 그 도둑놈 자식을 잡으면 진짜 가만 안 둘 거라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면서도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눈곱만큼도 기대하지 않는 투였다.
듣다 보니 별일은 아닌 것 같았다. 대만은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받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고 했다. 결국 자기 기분 탓이었는데 그게 더 찝찝하다면서 시종일관 투덜대는 그의 가벼운 말투가 특별히 꾸며낸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실 송태섭이 아는 정대만은 감정을 숨기는 일이 없었다. 걱정 끼치기 싫다는 생각 정도는 할지 몰라도 결국은 자신의 고통이나 흥분을 어쩔 수 없이 드러냈다. 그러니 지금도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근데 너 왜 내 질문에 대답 안 하냐. 제일 중요한 건데.”
한창 투덜대던 대만이 불쑥 말했다. 태섭은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뭐가요.”
모른 척 달아나자 직구가 날아왔다.
“너 진짜 농구 관둘 거냐.”
태섭은 숨을 들이켰다.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됐다.”
더 캐물어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만은 깔끔했다.
“근데 왜 그렇게 거절하고 다녀. 스카우트 다 걷어찼다며?”
“거…. 일이 좀 있어서요.”
“너 요즘 많이 바쁘냐?”
“한가하진 않죠.”
대만은 잠깐 말이 없었다.
침묵이 서서히 태섭을 긴장시킬 무렵 그가 불쑥 물었다.
“그래도 아무튼 복귀는 하는 거지?”
대답하기도 전에 대만이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너 국내로 복귀하면 우리 겨루는 건가?”
그가 무언가 물어보려다 황급히 주제를 틀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태섭은 대만이 원하는 대로 대화가 흘러가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우스갯소리로 맞받아쳤다.
“선배 태웅이한테 박살 나지 않았어요? 자신 있나 봐요?”
“야이씨. 너 그건 언제 들었어.”
“치수 선배한테 들었죠.”
대만은 민망한 듯 쩝 소리를 내다가 뭔가 떠오른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맞다, 그 자식이 뭐라는 줄 아냐.”
대만이 말했다.
“세계가 멸망한댄다. 그 뭐시기 예언가가 한 얘기라는데 너 들어본 적 있냐.”
물론 들어본 적이야 있었다. 그런데 그걸 정대만이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건 좀 의외였다.
“그런 소릴 믿어요?”
“모르지 그야.”
대만은 시큰둥한 투였다.
그는 세계멸망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몇 년 전부터 서점에도 관련 코너가 개설되었다는데 아마 요즘도 찾아보면 그런 코너가 있을 거라면서, 최근에는 그 얘기가 잡지 기사로까지 실렸다고 했다. 어찌나 화제인지 자기 팀원들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고 했다. 송아라도 알고 있을 거라고 했다.
오늘따라 대만이 유달리 뜬구름 잡는 소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답지 않게 아까부터 횡설수설하는 것 같았다.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던 태섭이 물었다.
“그 얘기가 진짜면 선밴 뭐 할 거예요?”
“뭘 해?”
“세계 멸망하는 날에 뭐 할 거냐고요.”
“뭐…. 경기 있음 경기 뛰고 있겠지.”
이런 질문에 가족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나는 모양이었다.
“죽기 전인데요?”
“뭐 그렇지…? 야, 너도 내일 당장 죽는다, 이러면 농구할 거 아냐?”
순간 숨이 콱 막혀왔다. 단언하는 정대만의 확신이 어딘지 태섭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이다. 그가 말을 잃은 사이 대만은 다시 저 좋을 대로 떠들어 댔다.
“아무튼 내 번호도 알았겠다, 앞으로 전화 많이 해라.”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느릿느릿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간만에 전화하고 있으니까 예전 생각난다.”
“…….”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요즘 시간 안 많냐 너?”
태섭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아뇨.”
그가 대답했다.
“전화해요. 아니, 할게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나 회식 없으면 9시엔 집에 있으니까 그쯤 해라.”
“회식을 자주 해요?”
“어…. 아직 몇 번 안 했는데. 자주 하겠지.”
전화를 끊은 뒤 태섭은 제자리에서 몇 번 마른세수를 하다가 괜히 냉장고를 확인한 다음, 저녁거리로 쓸 재료가 없자 돈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단지를 빠져나오는 동안 어두워지기 시작한 바다로부터 거센 바람이 불어왔고 가로등이 켜졌다.
아파트 안 주륜장 옆에 세워진 공중전화 부스에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수화기를 든 소년이 낄낄대며 부스에 몸을 기대는 게 보였다. 막 씻고 나와서 젖은 머리를 내린 채로 대만과 무아지경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열아홉 살의 송태섭이었다.
그는 편안한 티셔츠 차림으로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전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유학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종종 그런 차림으로 아파트 전화 부스에 서 있곤 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대만은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면 꼭 태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무렵에는 매일 같이 전화를 주고받았다. 한 번 전화가 시작되면 속수무책으로 대화가 계속되었고 끊을 타이밍을 연거푸 놓쳤지만 사실 전화를 끊고 싶지 않았던 태섭의 고의적인 부주의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한 시간쯤 통화를 하고 있으면 뺨에 닿는 수화기가 뜨뜻미지근해지고 송아라가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때로 송아라는 협탁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들기면서 혼자만 쓰는 전화냐고 꽥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친구 연락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쯤 했으면 얼른 끊으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보통 같으면 오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고 적당한 권위를 드러내며 눈을 부라렸을 것이다. 그러나 통화하는 중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면 태섭은 송아라의 등쌀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이만 끊어야겠다고 대만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래? 내일 연락해 그럼.”
대만은 늘 다음을 기약했다.
전화가 끊어지면 태섭도 내내 붙잡고 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송아라의 신경질을 한 귀로 흘리면서 방으로 들어간 다음 영어 교재를 몇 번 뒤적였지만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무감하게 팔락팔락 책을 넘기면서 방금까지 전화하며 주고받았던 가벼운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한 번은 책을 덮고 재킷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농구 코트를 지나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걷다 보면 주륜장 옆에 덩그러니 서 있는 전화 부스가 나왔다. 그는 부스로 들어가 전화 카드를 꽂았다.
수화기를 든 채 번호를 누르고 기다렸다. 불안한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얼마 안 가 방금 전까지 내내 듣던 목소리가 무심하게 응답해왔다.
“여보세요?”
“전데요.”
태섭이 퉁명스레 자신을 밝히자 대만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뭐야, 끊는다며?”
“앞에 잠깐 나왔어요.”
“앞에?”
어느새 대만은 웃고 있었다.
태섭이 눈썹을 찡그렸다.
“왜 웃어요?”
“아니…. 넌 왜 웃냐?”
“제가요?”
송태섭은 자신이 웃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아닌데요.”
“웃는 거 맞잖아.”
대만이 큭큭대자 태섭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니, 형은 왜 웃는데요?”
웃음을 눌러 참는 목소리로 면박을 줘보려던 태섭이 못 이기는 척 부스에 몸을 기댔다. 편안한 고양감이 차오르고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태섭은 수화기에 얼굴을 기울이면서 농담을 던졌다. 대만이 박장대소하자 성취감이 느껴졌다. 그 감각은 곧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힘으로 변했다. 대만이 어떤 얘기에도 웃어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아마 그땐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전화 부스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열아홉 살의 소년은 사라졌고 부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태섭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텅 빈 부스를 지나 대로변으로 빠져나왔다. 신호가 바뀌자 승용차 한 대가 빵빵대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대만이 중얼대듯 건넨 말이 떠올랐다. 고장 난 테이프가 길게 늘어지는 것처럼 그 말은 아득한 어딘가에서부터 느릿느릿 재생되고 있었다.
‘간만에 전화하고 있으니까 예전 생각난다.’
아쉬운 것처럼 대만은 말했다.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언젠가처럼 심장이 뛰고 있었다. 송태섭은 막막한 기분으로 어둑어둑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대만의 말에 반발심을 느낀 건 아니었다. 그때 그 형이랑 노는 게 재밌긴 했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떠들었으니까. 그 뒤로 전화가 길어지면 송태섭은 종종 집 앞 공중전화 부스로 나와 통화를 이어갔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때는 둘 다 들떠있었다. 서로 너무 긴장이 풀려 있어서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았다. 상대가 무슨 짓을 하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때 우린 뭘 했던 걸까?
바람이 이마를 세차게 때렸다. 태섭은 걸음을 멈췄다. 주머니 속에 쑤셔 넣은 손이 어느새 동그랗게 말려 있었다. 잠깐 앞을 쳐다보다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뛰기 시작했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났다. 단지 입구를 지나 공원 맞은편 골목에서 태섭은 방향을 꺾었고, 그 뒤로 쭉 달렸다. 어렴풋이 츠지도 상가 버스정류장이 보일 때까지 그는 쉬지 않고 뛰었다.
소니 매장은 막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쯤 셔터를 내리고 가게 불을 끄고 있는 직원이 보였다. 태섭은 매장 앞으로 달려들었다가, 문이 닫혀있는 걸 깨닫곤 손잡이를 흔들면서 직원을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
태섭은 놀란 직원이 닫았던 문을 열자마자 그 안으로 뛰쳐들다시피 했다. 갑자기 등장한 손님의 등장이 달갑지 않은 듯 직원은 난처해 보였다.
“저, 오늘 영업은 끝났는데요.”
“사려는 게 아니라….”
매장을 두리번거리던 태섭이 카운터 뒤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맡긴 거 찾으러 왔는데요.”
몇 분 뒤 가게를 빠져나온 그의 옆구리에는 수리된 비디오 플레이어가 들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택배를 열어봐야 했다. 그렇게 긴 거리를 쉬지 않고 뛰었는데도 숨이 차지 않았다. 돌아가는 일은 아주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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