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섭대만 «2000년 문제 (5)»
9
“몰랐어요? 얼마 전에 잡지 기사도 나왔는데. 7월 24일에 세계 멸망하잖아요.”
세트 주문을 끝내고 돌아온 수종이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시부야 하라주쿠역 근처에 있는 맥도날드 체인점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 건물은 JR선 2번 출구를 통해 빠져나오자마자 보이는 좁은 골목 코너에 혼잡한 느낌으로 적재돼 있었는데, 맞은편에 길거리 액세서리점이 있어 신기한 옷을 입은 여자아이들이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며 귀걸이를 고르는 게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패션잡지, 메이크업과 고딕풍 치마, 형광색 윤기가 도는 가발들과 술 달린 니삭스…. 여자들의 첨단 문명이 발밑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권수종이 아무렇지 않게 세계의 종말을 얘기하는 이 상황이 무척 기묘하게 느껴졌다. 대만이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기사가 나왔다고? 언제?”
“이주일 전인가? 근데 그전부터 유명했어요. 형 진짜 몰라요?”
대만은 너무 황당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그걸, 그걸 다 알았다고?”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잖아요. 7월 24일 저녁 5시에 세계 망한다고.”
“노스트… 가 누구냐?”
수종이 손가락을 접었다.
“히틀러 나타난다고 한 거랑,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랑, 유고슬라비아 내전이랑, 또 뭐 있더라? 하여간 다 맞춰서 엄청 유명한 사람이요.”
“수종아, 너 뭔소리 하냐 지금?”
대만의 반응이 재밌었던 건지 권수종이 웃음을 참는 얼굴로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500년대 사람 중에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유명한 프랑스 예언가가 있는데, 이 사람이 예언했던 중대한 인류사적 사건들이 장장 4세기 동안 빠짐없이 백발백중이었댄다. 그런 그가 무시무시하게도 1999년을 종말의 해로 선언하고 죽어버린 탓에 그 예언이 과연 진짠지 가짠지를 두고 요즘 각종 잡지며 일간지가 아주 뜨겁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올해 시작하자마자 다들 난리였는데, 형 진짜 친구 없나보다.”
“그런 사람이 있었단 말야? 그 사람은 어떻게 그걸 다 알았지?”
감탄하느라 대만은 수종의 마지막 말을 흘려들었다.
“근데 진짜 망할까?”
“설마요. 어쨌든 믿는 사람은 많아요.”
“기사까지 나올 정도면 그렇긴 하겠다.”
“오타쿠들 때문에 그렇죠 뭐. 부동산도 난리고, 사람도 많이 죽었고. 요즘 기사들도 좀 흉흉하잖아요.”
하긴 부동산 붐이라면 정대만도 건너 건너 일부 단카이(*일본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세대)들만 떵떵거리고 나머진 다 망했다느니 하는 얘기를 들어오긴 했었다. 당장 그의 주변만 해도 부동산 투기를 한답시고 무리하게 대출을 당겨 판에 뛰어들었다가 뼈도 못 추린 대학교 선배들이 있었다.
몇 년 전 흥분에 차서 사방팔방 공동 매수를 권유해 오던 선배들 대다수가 크게 손해를 봤다고 들었다. 그나마 비빌 언덕이 있는 사람들은 부모가 경영하는 회사 밑으로 들어가거나 본가로 돌아가 프리터 생활을 이어갔지만, 일부는 진지하게 농구를 관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소식이 뚝 끊기고 말았다. 다들 뭐하고 살고 있는 건지. 어쩌면 그런 이들은 수종이 말하는 오타쿠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서태웅은 어디서 그런 얘길 주워들은 걸까? 선배를 놀리는 거냐며 잔뜩 면박만 줬는데, 기사가 실릴 정도로 유명한 얘기였다는 걸 알게 되자 대만은 조금 머쓱해졌다. 그 녀석, 의외로 그런 걸 챙겨보는 편인가…. 아니다, 보나 마나 팀원들이 알려준 거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액세서리점 앞에서 열렬한 기세로 대화를 나누는 여고생들을 멀거니 내려다보고 있는데, 수종이 불쑥 영수증을 내밀었다.
수종이 매장 벽면에 달린 마이크를 가리켰다.
“버거 나왔대요.”
“엉?”
대만이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아, 갖고 오라고….”
1층으로 내려온 정대만은 버거 세트 네 개가 켜켜이 쌓인 트레이를 받아들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내심 그는 몇 분 전 시합이 끝나는 순간에 느꼈던 미묘하게 조이는 듯한 그 감각이 다시 엄습할까 봐 살짝 긴장했지만, 무릎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상시와 똑같았다.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두면서 그는 시험 삼아 왼쪽 다리를 앞뒤로 흔들어봤다. 아주 조금의 통증도, 걸리는 듯한 느낌도 없었다. 창가를 내려다보던 수종이 콜라를 집어 들면서 고개를 쭉 뺐다.
“어, 왔다.”
하라주쿠를 구경하겠다고 일부러 경로를 빙 둘러 온 팀원들이 도착한 거였다. 팀원 중 몇몇은 도쿄는 체육관 위주로 큰 경기 때만 들락거렸지 하라주쿠 같은 본격적인 도심은 처음이라고 했다. 2층에 도착하자마자 물을 털어내는 물소들마냥 부르르 떨면서 “너무 요란스러워서 눈이 아프다” 따위의 감상을 늘어놓았다. 이미 호텔로 돌아간 건지 강성준과 몇몇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둘이서 무슨 얘기 중이었어?”
“노스트라다무스 얘기요.”
“아아. 종말론 재밌지.”
“형은 오늘 처음 들었다던데요.”
콜라를 쭉 빨면서 수종이 즐겁게 고자질을 했다. 팀원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엄청 유명한 얘기잖아요.”
“뭐…. 아주 안 들어본 건 아니고.”
대만이 어정쩡하게 말을 끌었다.
“여자애들이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은 있어요.”
대답하고 보니 정말 그런 적이 있던 것 같기도 했다. 대학교 시절 짧게 만나고 헤어졌던 여자친구들이 종종 지나가는 말로 세계가 진짜로 멸망하면 어떨 것 같냐고, 정말로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넌지시 물어보던 일들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도 같았다.
그때는 오컬트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고 흘려들었던 것 같다. 주변에 그런 소릴 늘어놓는 남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농구를 하느라 바빴고, 몇몇은 주식 투자를 한다고 바빴다. 그가 아는 남자들은 미래가 그대로 거기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91년 대출 규제가 시작되면서 부동산 시장이 더는 손쓸 도리 없이 곤두박질쳤을 때도 한동안 사람들은 이 일이 장기화될 거라곤 꿈에도 의심치 못했다.
거품처럼 끓어올랐던 부동산 시장이 붕괴하기 시작한 건 대만이 대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의 일이었지만, 그가 입학한 뒤에도 한동안 사람들은 경제가 다시 부흥할 거라 믿었다. 대만이 대학교 3학년이 될 무렵엔 주식 시장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으므로 그 믿음은 몇 달간 정말로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정대만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거시적인 일들을 잘 알지 못했다. 주식 시장이나 부동산 같은 건 귀찮은 일로만 보였다. 선배 하나의 부추김에 못 이겨 투자했던 주식이 하나 있긴 했지만 고점은커녕 끝을 모르고 떨어지기만 하자 진작 손을 턴 지 오래였다. 동기나 선배들이 하루종일 신문을 챙겨보고 거들먹거리며 어느 기업에 대해 떠들어 대는 게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졌다.
당시 대만의 관심사는 농구, 그리고 자동차와 여자친구뿐이었다. 그는 농구 연습이 끝나고 남은 시간마다 종종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나갔다. 가끔 시부야에도 놀러 갔었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그는 대다수의 여자친구들과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나이대 하는 연애들이 다 그런 법이었다.
송태섭의 여동생과 만난 건 그가 세 번째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한 달이 좀 안 됐을 무렵이었다. 송아라와는 이따금 태섭이 부재중인 때 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몇 번 정도 간단한 용건을 주고받은 적 있는 사이긴 했지만, 직접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송아라는 목소리로 만났을 땐 능청스럽고 성깔이 있는 운동부 여자애 같았는데, 막상 만나보니 생각보다 애가 좀 어두웠다. 활기차게 떠들고 행동하는 한편으로 어딘가 냉소적인 구석이 있었다. 말수가 적고 신중하지만 은근 감성에 약하고 로맨틱한 것들을 좋아하는 송태섭하고는 정반대였다. 미국으로 택배를 부치고 싶다고 전화를 걸었을 때도 송아라는 예의 그 습관 같은 말투로 “와, 오빠 정말 로맨틱하네요.”하고 실없는 감탄사나 늘어놓았다.
“그런데 뭐 보내시게요?”
“그냥 이것저것.”
아라는 흠 하고 말을 늘였다.
“주소 지금 불러도 돼요? 받아 적을 수 있어요?”
“기다려 봐.”
정대만이 황급히 메모지를 찾으며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어어. 불러줘.”
“네에. 우편번호부터 써야 돼요. 85365, S, Ave…”
“…뭐라고?”
“8, 5, 3, 6, 5. S, Ave….”
“잠깐, 에스 다음에 뭐라고?”
“A, V, E 요. 에비뉴Avenue.”
몇 번의 시도 끝에 송아라가 답답하단 듯 말했다.
“그냥 만나서 종이 째로 건네드릴게요.”
때마침 주말이라 두 사람 모두 시간이 널널했다. 대만 쪽에서 먼저 연습을 마치는 대로 아파트 앞까지 찾아가겠다고 제안을 해왔다. 약속 시간에 나온 송아라는 사복 차림으로 아파트 공중전화 옆에 멀뚱멀뚱 서 있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가오는 정대만을 먼저 알아보고 주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나인 줄은 어떻게 알았어?”
깜짝 놀란 대만이 물었다.
“오빠 가끔 저희 집 앞 왔다 갔다 하면서 저랑 몇 번 인사하고 그랬었잖아요.”
“아…. 그랬지 참.”
송아라는 대만이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주머니에 메모지를 집어넣는 걸 지켜보았다. 이 과정에서 순간 두 사람의 대화가 완벽히 끊어졌고, 아라는 몸을 돌렸다.
“그럼 저 갈게요.”
대만이 들어가려는 아라를 황급히 붙잡았다.
“뭘 그냥 들어가. 사줄게. 저녁 먹고 가.”
아라가 미심쩍은 눈으로 대만을 훑어보았다.
“웬 저녁?”
“나 때문에 나왔잖아. 맛있는 거 먹고 가라.”
아라는 의중을 살피듯 대만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그 표정이며 행색이 송태섭하고 아주 똑같았다. 조금 있다가 아라가 대답했다.
“그럼 저 스카이락(*일본의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점)이요.”
이어진 대답도 꼭 송태섭 같다고 대만은 생각했다.
두 사람은 조금 걸어서 해변 근처에 있는 2층짜리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갔다. 2층 통창으로 잿빛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송아라는 소지가 얹어진 함박 스테이크에 사이드로 치킨까지 시켰다. 정대만은 바질이 들어간 이태리식 함박 스테이크를 시켰다.
“바질 그거 맛있어요?”
“안 먹어봤어? 한 입 줘?”
“그래도 되면요.”
앉혀놓으니 점점 할 말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하긴 서먹한 남의 여동생과 무슨 얘길 더 할 수 있겠는가. 송아라 쪽에서 먼저 말을 걸기 시작한 것도 그래서인 듯싶었다. 처음에 송아라는 썩 궁금치 않은 투로 대만의 대학 생활에 대해 물어오다가, 그의 전 여자친구 얘기가 나오자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송아라의 관심을 끈 것은 정대만의 여성편력 따위가 아니라 그의 전 여자친구들이 지나가듯 언급했던 세계멸망에 관한 얘기였다. 송아라는 노스트라디온지 뭔지를 알고 있었다.
“대학생들도 그런 거 믿는구나.”
드레싱에 절여진 양배추를 포크로 쿡쿡 찌르면서 아라가 중얼거렸다.
“하긴, 얼마 전에 SPA!(*주로 20-30대 샐러리맨들을 타깃으로 한 일본 주간 잡지)에도 실렸으니까.”
대만이 귀엽다는 듯 픽 웃었다.
“너도 믿어?”
대만이 자길 비웃는다고 판단한 듯 아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라가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저도 정말로 믿는 건 아니에요.”
“근데 왜 그렇게 말했어?”
“할 말 없을 때 이 얘기하면 애들이 좋아하거든요.”
들어보니 송아라의 또래들은 물론이고 꽤 많은 이들이 세계멸망설을 진지하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서점에도 관련 책 코너가 개설됐을 정도라고 했다. 서점을 들락거릴 일이 거의 없는 대만으로선 잘 와닿지 않는 소식이었지만, 송아라가 꽤 진지한 태도로 얘기를 늘어놓았으므로 듣다 보니 정말 그런 코너가 생길 만큼 종말론에 관심 있는 인간들이 많은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5년 전이었다. 송태섭이 미국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 즈음에 대만은 여자친구를 너무 자주 사귀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무렵 그는 태섭이 사라져서 무척 심심했던 것 같다. 송태섭이 유학을 준비하던 몇 달 동안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만나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달 전, 정대만은 느닷없이 송태섭을 보러 가기로 결심한다. 뜬금없이 4월 토너먼트 경기를 보러 왔던 송태섭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취를 감추고, 대만도 나름의 일로 바빠서 태섭을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하며 살고 있을 때였다. 당시 그는 8월에 있을 간토 대학 총 리그전을 준비하면서 주일에 두 번 고시가야 시립 체육관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보통은 팀과 함께 단체로 대절 버스를 타고 움직였지만 그날은 웬 바람이 불었는지 송태섭 생각이 났다. 근처에 태섭이 다니는 프리 스쿨이 있다는 사실이 갑작스럽게 떠올랐던 것이다. 그날 대만은 연습이 끝난 뒤 혼자 전철을 타고 그를 만나러 갔다. 고작 두 정거장 거리였다. 송태섭의 수업 스케줄을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어련히 만날 수 있겠거니 싶었다.
막상 도착해 보니 프리 스쿨은 대만이 막연하게 상상하던 것보다 작고 열약했다. 여태까지 그는 학교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자연스럽게 프리 스쿨을 고등학교와 비슷하지만 규모는 좀 작은, 펑퍼짐하고 넓은 부지를 사용하는 각지고 하얀 2층짜리 건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태섭이 다닌다는 프리 스쿨은 회청색이 도는 잿빛 벽돌로 쌓아 올린 상가 빌딩을 쓰고 있었다.
학교가 아니라 수험 학원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건물 뒤편에 녹색 펜스가 쳐진 농구 코트와 테니스 코트가 딸려 있었지만 상상과 현실의 괴리로 첫인상이 나쁜 탓에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학생들은 전부 수업 중인 듯했다. 건물 안에서부터 강사들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새어 나왔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대만은 농구 코트에 들어가 공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직접 들어가 보니 코트는 야외에 있는 것치곤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림에 걸린 그물도 최근에 갈았는지 새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학생들이 우르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고, 대만은 옆구리에 공을 끼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키가 큰 정대만은 금방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학교 저지에 와이드 팬츠 차림을 하고 더플백을 대강 걸친 그는 멀리서도 이곳 학생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이목이 집중되면서 사람들이 슬쩍 그를 피하며 흘끔거렸다. 인파를 기웃대던 대만이 지나가던 여학생 하나를 붙잡아 세웠다.
“저기, 너 송태섭이라고 알아?”
“네?”
“태섭이. 송태섭!”
여학생은 너무 놀라서 그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만은 열심히 설명을 덧붙였다.
“걔가 내 후밴데 여기 다니고 있댔거든. 모르니? 키는 딱 너 만한데.”
조금 진정된 여학생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 잘 모르겠어요. 무슨 반인지 모르세요?”
“반?”
“중학생 반인지, 고등학생 반인지….”
“걔 졸업했는데. 대학생 반은 없어?”
‘아니지. 걔가 대학을 들어간 건 아니니까. 그럼 고등학생 반인가?’
“대학생 반은 없는데….”
‘없다고? 그럼 여기가 아닌가?’
대만이 좀 멍청한 얼굴로 머뭇거리자 여학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냅다 인사를 했다. 붙잡기도 전에 쌩하고 달아났다.
‘왁스 바르고 올 걸 그랬나?’
뒤통수를 긁적이며 그는 생각했다.
두리번거리던 대만은 이번엔 딱 봐도 태섭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를 붙잡았다.
“저기. 너 송태섭이라고 혹시 아냐?”
“예?”
마찬가지로 남학생은 정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송태섭을 알고 있었다.
“어, 태섭이 지금 수업 들을 텐데… 요.”
“그래? 언제 끝나는데?”
“한 교시 남았을 거예요.”
운이 좋았다. 대만이 히죽대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동안 남학생은 그에게서 느꼈던 첫인상의 위압감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 듯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들어가서 불러드릴까요?”
“됐어. 기다리다 보면 나오겠지.”
코트로 돌아온 대만은 백보드를 향해 공을 던졌다. 림을 스치지도 않고 깔끔하게 들어가는 슛을 당연한 듯이 바라보다가 설렁설렁 공을 주우러 갔다. 해가 기울고 사방에서 매미 소리가 들렸다.
강의를 끝마친 송태섭이 밖으로 나왔을 때 대만은 저지를 벗고 반팔 차림으로 3점 슛을 던지고 있었다. 어쩐 일로 코트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본 태섭은 그게 대만이라는 걸 알아차리자마자 얼떨떨하게 큰 소리를 냈다.
“뭐예요?”
“이제 나와?”
정대만은 공을 주워 옆구리에 끼고 태섭을 돌아보았다.
“너 만나기 진짜 힘들다.”
“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
태섭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그럼 아까 내내 농구공 튀기던 게 선배예요?”
“들렸냐?”
“당연하죠.”
대만은 더플백을 걸치면서 벤치에 벗어놓은 저지를 챙겼다. 농구공을 태섭에게 휙 던졌다.
“야, 배고프다. 라멘 먹으러 가자.”
농구공을 받고도 태섭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보였다. 대만이 킬킬 웃었다.
“라멘 먹으러 가자고.”
“제가 사는 거예요?”
“그래주면 쌍큐고.”
“아 진짜 발음 좀….”
그날은 대만이 태섭에게 라멘을 얻어먹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설렁설렁 전철역으로 걸어가는 동안 여름밤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송태섭은 겨울쯤에 출국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영어점수를 올려놓고 면접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농구는?”
“그것도 해야죠.”
“너 미국까지 가는데 점프슛은 좀 어떻게 해야 되지 않겠냐?”
“알거든요.”
“하루에 200개씩만 쏴봐.”
“진짜 말 쉽게 한다.”
대답은 이렇게 해도 마음만 먹으면 정말로 200개씩 쏴댈 녀석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대만이 씩 웃었다.
“가끔 슛폼 좀 봐줄까?”
“예?”
태섭이 바보처럼 되물었다.
“그래도 돼요?”
아마 태섭이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럴 시간이 되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만은 이해하지 못하고 넘겨짚었다. 가볍고 흔쾌한 투로 대답했다.
“안 될 건 또 뭐야.”
이 뒤에 송태섭이 구체적으로 뭐라고 했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썩 싫은 눈치가 아니었던 건 기억하고 있다. 다음이 있을 것처럼 대화가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다. 언제 찾아올 건지, 언제 시간이 비는지 서로 합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고 해도 어영부영 잊혀질 가벼운 것에 불과했다.
정대만이 정말로 다시 프리 스쿨 앞으로 찾아왔을 때 송태섭은 진심으로 깜짝 놀란 듯했다. 주머니에 손을 쑤셔 박은 채 태연한 척 굴었지만 얼떨떨한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다 드러났다. 그날부터 대만은 고시가야 체육관에서 연습을 하는 요일마다 따로 전철을 타고 송태섭을 만나러 갔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그때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 즈음에는 모든 일이 잘 풀렸다. 벤치 신세를 각오하고 들어간 대학 농구부에서 몇 달 만에 주전 자리를 따낸 것도 모자라 이듬해 4월 토너먼트에서 제대로 활약한 덕분에 정대만은 다가오는 8월 리그에서 유망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한 성취가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대만은 쉽게 허둥대지 않았다. 어쩌다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도 단숨에 웃어넘겨버렸다. 지갑을 잃어버리거나, 차 키를 흘리거나, 지나가다 가볍게 시비가 걸리는 일들 따위는 한 시간도 안 돼서 잊어버렸다. 분명 그를 시기하거나 적대하는 이들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여유로웠다. 몇 달 전 느닷없이 자신을 보러 왔던 후배의 프리 스쿨 앞까지 찾아가 매번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점프슛 자세를 봐주면서 송태섭의 건방진 말투나 행동거지에 일일이 토를 달다가 입씨름을 벌이는 일이 즐거웠고, 같이 저녁을 먹을 상대가 생겼다는 사실도 꽤 마음에 들었다. 생각 없이 어울리기에 송태섭만큼 적격인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쯤에 깨달았던 것 같다. 그는 심심할 때마다 송태섭을 찾아댔다.
일이 이렇게 되자 송태섭 쪽에서도 꽤 적극적으로 굴었다. 대만이 찾아오기로 돼있는 요일에 수업이 비게 되면 태섭은 전날 저녁에 꼭 전화를 주었다. 아쉬울 땐 따로 만나자고 종종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행동반경은 차차 넓어졌다. 슛 연습이 끝나는 대로 프리 스쿨 근처의 프차이즈와 식당을 전전하던 두 사람은 시내 쇼핑가를 돌면서 군것질을 하거나 가끔씩 영화를 보고, 편의점 음식을 도장 깨기 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기 시작했다.
비가 내려서 농구 코트에 나갈 수 없는 날에는 전화 통화를 했다. 한 번 통화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가수와 여배우, 대학 농구와 NBA…. 화제를 가릴 것 없이 떠들었다. 서로의 일과를 그 어느 때보다 훤히 꿰고 있던 시절이었다. 8월 리그가 끝나고 대만이 태섭의 프리 스쿨을 들락거릴 명분이 사라진 뒤에도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그때는 송태섭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바쁜 유학 준비생을 불러냈다는 자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준호로부터 송태섭이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땐 몇 달을 그렇게 홀랑 보낸 뒤였다. 그제야 자신이 송태섭을 방해한 건 아닌가 싶었다. 슬슬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한 겨울의 초입이었다. 둘이서 점프슛 200개를 달성하고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대만이 슬그머니 물었다.
“너 이래도 괜찮냐?”
송태섭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가요?”
“너 지금 나랑 이래도 괜찮냐고.”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송태섭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는데.”
옆으로 차가 부웅 지나갔다. 팽팽한 긴장감이 찾아들었지만 대만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확히 무엇을 변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가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권준호한테 들었다. 너 시험 있다며. 곧 아니야? 공부는 하고 있는 거지?”
“시험?”
송태섭의 표정은 빠르게 변했다. 처음에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어지는 대만의 말을 듣고선 이내 실망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빵이 오븐을 여는 순간 폭삭 꺼지는 것처럼 결국 평소의 표정으로 되돌아왔을 때, 송태섭은 주머니에서 꺼낸 손으로 주먹을 쥐고 있었다.
“갑자기 웬 잔소리? 알아서 하니까 신경 꺼요.”
“잔소리는 무슨, 걱정되니까 그렇지 인마.”
정대만이 과장되게 툴툴댔다.
“그러다 너 시험 떨어지고 유학 취소되면 나 면목 없다.”
송태섭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입을 다문 채 밤바다의 파도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가드레일을 끼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가장자리에 물이 고인 야외 코트를 지나자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대만이 공동현관 앞에서 인사를 하려던 때였다. 태섭이 뒤를 돌면서 말했다.
“선배 말이 맞네요. 한동안 만나지 맙시다. 공부 좀 하게.”
대만은 크게 당황했다.
“어…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
그는 송태섭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송태섭이 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 질문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관계가 잠정적인 중단 상태를 맞게 될 거라는 예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잘 들어가고.”
그가 어정쩡하게 인사했다.
송태섭은 싱거운 태도로 인사를 받았다. 그러고는 곧 계단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저녁마다 걸려오던 전화 통화가 뚝 끊겼다. 대만은 몇 번 정도 태섭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볼까 했다. 뒤늦게 떠오른 질문을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꼴랑 질문 하나 하자고 공부 중인 녀석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미안한 일인 것 같았다. 다음에 마주쳤을 때 물어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우연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만이 막연하게 예측했던 그 우연은 그로부터 어영부영 몇 주가 흐르고 그의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져 정말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때에 적절히 이루어졌다. 몇 주 만에 동네 로손을 들렸다가 계산대 앞에서 송태섭을 마주친 정대만은 반가운 듯 크게 “어!”소리를 냈다가, 썩 유쾌하지 않았던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곤 헛기침을 했다.
그는 태섭의 눈치를 봤다. 만약 송태섭이 조금이라도 불쾌해하거나 어색한 듯 굴면 그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인사하고 먼저 가게를 나가버릴 셈이었다. 그러나 송태섭은 예상치 못한 만남에 살짝 당황했을 뿐 오히려 대만이 무의식 중에 상상했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심지어는 먼저 말까지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어…. 안녕.”
‘이제 괜찮은 건가?’
“저 시험 끝났어요.”
“그… 래. 잘 봤어?”
태섭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나가자는 듯 바깥을 가리켰다.
몇 주 만에 확연히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은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송태섭은 유학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전화하려고 했는데 시험이 끝나자마자 곧장 입학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면접 준비를 하느라 바빠서 미처 하지 못했다고 했다. 송태섭은 몇 주 전 아파트 공동 현관 앞에서 자신이 왜 그렇게 굴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 뜸을 들이더니, 결심한 듯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했다.
“연습 봐준 거요. 대학 가서 잘 써먹을게요.”
“…….”
태섭이 반응을 살피려고 흘끔 올려다봤을 때, 대만은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뭐예요, 그 표정은?”
“뭐가.”
“불만 있어요? 사람이 모처럼 고맙다고 하는데.”
“내가? 너한테 불만 같은 게 있겠냐?”
갑자기 자신이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대만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됐지?”
태섭이 불만스럽게 구시렁댔다.
“뭐가 됐단 거야….”
“유학 가면 거기 양키들 다 발라버리는 거다.”
대만이 말했다.
“너 3점 슛 한 번 실패할 때마다 달아둘 거야.”
“저 PG인데요?”
“알 바냐? 누가 봐준 건데. 실수하면 죽는다.”
송태섭이 기가 막힌 얼굴로 눈썹을 짝짝이로 만들거나 말거나 대만은 좋을 대로 떠들어 댔다. 그는 일이 잘 풀려서 NBA에 진출하게 되면 조던 사인을 받아달라고 했다. 나이키에서 운동화 협찬이라도 받게 되면 몇 켤레 더 얻어다 자기 앞으로 한 켤레만 보내달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미국 대학 농구를 제패하게 되면 인터뷰를 할 때 꼭 자기 이름을 대라면서, 특히 ‘3점 슛을 가르쳐준 캡-멋진 선배’에게 감사 인사 전하는 걸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렇게 떠들다 보니 무언가 들끓던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지나치게 들뜨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이 내려앉은 듯 무거운 건 왜였을까. 결국 대만은 과장스러운 화법을 관뒀다. 그가 뜸을 들이다 말했다.
“하여간 가서 잘해라.”
태섭은 시선을 흘렸다.
“당연하죠.”
대만이 힘주어 말했다.
“잘할 거야, 너.”
바닥을 내려다보던 태섭이 시선을 들어 대만을 흘끔거렸다.
“그래야죠.”
얼마 뒤 송태섭은 출국했다. 대만은 리그 일정이 겹쳐 배웅하지 못했다. 한참 나중에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 이달재, 채치수와 강백호가 배웅을 나갔다고 전해 들었다. 언제 한 번 잘 도착했냐 전화를 넣어야겠다고 대만은 생각했지만, 매번 생각으로 그쳤다. 아마 태섭의 사정도 썩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지난 몇 달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연락이 뚝 끊어졌다.
‘인간관계가 보통 다 그렇지.’
정대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한때 친근했지만 차차 멀어져 버린 관계를 많이 갖고 있었다. 그런 관계들은 마치 대기권에 도달한 로켓이 분리되는 것처럼 때가 되면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단절에는 고통과 슬픔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고, 그래서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가끔씩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송태섭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가 아직 벤치 신세인지 아니면 주전이 되었는지, 그렇다면 리그를 뛰는지, 일본에서 나름 한가락 했던 녀석이 미국에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인간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준호조차 모른다고 했다.
어련히 잘 지내고 있겠거니 했다. 원래 그런 녀석이니까 말이다. 대만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들리는 소식도 없는 녀석을 생각하기엔 그에게도 다음 리그가 있었고, 리그가 끝나면 그다음 게임이, 그 게임이 끝나면 그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하루하루 충만했기에 송태섭도 비슷하게 살고 있으리라 어렴풋이 확신했다. 농구를 한다는 건 그런 거니까. 그래서 반 년 만에 뜬금없이 걸려온 국제 전화를 받았을 때, 대만은 정말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밤 11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던 대만은 처음에 전화벨 소리를 듣고도 꿈인 줄 알았다. 전화가 끊어지기 일보 직전의 순간인데도 그는 늦장을 부렸다. 상대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그렇게 굴진 않았을 것이다.
대만이 잠결에 살짝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전데요.”
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어어. 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요?”
반 년 만에 듣는 태섭의 목소리는 여전하게도 싹수가 없었다. 수화기를 고쳐 쥐며 정대만은 횡설수설했다.
“나야 잘 지내지. 얼마 전에 리그 끝나고 회식하고… 간만에 술 좀 마시고. 난 너 죽은 줄 알았다. 좀 어때? 권준호한테라도 연락 좀 하지. 다들 너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본단다. 영어는 좀 늘었냐? 아무거나 말해봐. 좀 있어 보이는 걸로.”
한참 가만히 듣던 태섭이 불쑥 물었다.
“취했어요?”
대만이 자세를 바로 했다.
“안 마셨는데?”
“근데 왜 그래요.”
“뭐가.”
“제정신이 아닌데?”
원래 이쯤에 두 사람은 웃기 시작한다. 일종의 놀이 혹은 콩트 같은 것으로, 서로에게 주거니 받거니 면박을 던지다 보면 어느 순간 낄낄대며 웃음이 터지는 것이다. 대만은 태섭이 웃을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수화기 너머는 조용하기만 했다. 숨죽여 입꼬리를 올리던 대만이 묘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무심코 물었다.
“무슨 일 있냐?”
송태섭이 부스럭거렸다.
“없어요, 그런 거.”
“목소리가 죽었는데?”
“없다고요.”
불 꺼진 거실 TV에서 화이트 노이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브라운관을 통해 마룻바닥으로 쏟아지는 불빛을 멀거니 바라보다 등을 돌려 신발장에 기댔다.
‘짜식, 자존심 상하나 보네.’
잠깐이지만 그는 말을 골라보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타고난 성질대로 정직하게 굴었다.
“지금 밤 11시다 인마. 밤에 전화하는 놈치고 안 심란한 녀석 못 봤다.”
정대만이 말했다.
“잘 안 풀릴 때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쫄고 그러냐?”
“여기 새벽 6신데요.”
대만이 조용히 웃었다.
“왜 전화했어?”
“누구 말대로 죽은 줄 알고 있을까 봐 그랬죠.”
태섭이 괜히 툴툴댔다. 대만은 한쪽 무릎을 세우며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까보다 분위기가 누그러져 있었다. 두 사람에게 익숙한 분위기였다.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송태섭이 불쑥 말했다.
“뭐가?”
“가서 잘하라고 한 거요.”
잠시 침묵이 있었다.
“송태섭, 너 대체 거기서 얼마나 못하고 있는 거냐…?”
“못한다곤 안 했는데.”
“그게 그 뜻이지.”
수회기 너머에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통화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안내음이 길게 울렸다. 중간에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나더니 얼마 안 가 송태섭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가요. 컨디션 잘 챙기시고.”
태섭이 빠르게 인사했다.
“농구하는 꼴은 좀 오래 보고 싶으니까.”
대만이 다급하게 말했다.
“거기 아직 새벽 여섯 시라며?”
전화가 뚝 끊어졌다. 정대만은 황당한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다보았다.
잘 못 지내고 있단 얘기나 하려고 오밤중에 전화를 줄 녀석이 아닌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우스운 일화라면 또 모를까. 남의 잠은 다 깨워놓고 몇 분 만에 전화를 뚝 끊어버릴 건 뭐란 말인가.
언젠가 송태섭이 그의 대학 리그 경기를 보러 찾아왔을 때와 비슷한 상황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처음에 태섭은 좀 울적해 보였다.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짓고 불량한 태도로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폼을 잡고 있었지만, 정대만은 송태섭이 오히려 그렇게 굴 때면 약해 보인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때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그는 송태섭이 너무나 반가워서 대화를 하는 동안에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지만 일이 정리된 뒤에는 희미하게 묘한 낌새를 느꼈다. 송태섭이 자신에게 약한 소리를 한 것 같단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며칠 동안 그는 태섭의 전화를 곱씹었다.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자 그에 대해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특히 송태섭이 마지막에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대학을 가서도 계속해서 농구를 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이 태섭에게 어떤 감상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정대만은 송태섭에게 지난 안부를 전해 보기로 했다. 그동안의 시합 비디오를 보고 싶다고 대학 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근 리그를 찍은 것도 상관없고 작년 경기여도 상관없다고 했다. 이런 부탁을 한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대학 행정 사정상 개인적인 용도로 기록물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퇴짜를 맞았다. 이번에 그는 가급적이면 자신이 뛰었던 경기 영상을 전부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갑자기 왜? 리그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감독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투로 말했다.
“좀 필요해서요. 금방 돌려드릴게요.”
“글쎄다. 외부 반출은 분실 위험이 있어서 어지간하면 어려울 텐데….”
“정말 안 됩니까? 잠깐 대여하는 것도 안 돼요?”
감독이 의욕 없이 어물거렸다.
“물어는 볼게. 그래도 기대는 마라.”
저녁이 되기 전 대만은 옷을 챙겨 입고 나와 비디오 공테이프를 한 박스 샀다. 그러고는 차를 몰아 대학으로 향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의 늦은 점심이었다. 감독은 부재중이었고 연락도 받지 않았다. 대만은 무작정 행정실로 찾아가서 그동안의 경기 테이프를 빌려달라고 했다. 행정 사무실에 앉아있던 여자 직원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감독이 예상했던 답변을 그대로 늘어놓았다.
“외부 반출 시 분실 위험이 있어서 개인적인 용도로 비디오를 대여해 드리긴 어려워요.”
‘고등학교 다닐 땐 다 해줬는데.’
“농구부인데도 안 됩니까?”
“교내 대여는 가능한데.”
대만은 잠시 생각했다.
“그럼 교내 대여라도 할게요.”
서랍을 열고 파일철을 뒤적이던 직원이 잠시 후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신청서 작성해서 갖고 와주시겠어요.”
대만이 돌아오자 직원이 작은 열쇠를 챙겨 일어났다. 행정실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복도 끝에 있는 사실상 창고에 가까워 보이는 열람실로 들어갔다. 양쪽으로 빽빽하게 늘어선 수많은 기록물들이 유리문으로 된 서재 안에서 천천히 삭아가는 고요한 공간이었다. 여자 직원은 자물쇠가 걸린 서재 앞에서 잠시 꼼지락대다가, 문이 열리자 대만의 신청서를 왔다 갔다 읽으면서 박스에 캠코더 비디오를 쓸어 담았다.
수십 개가 훌쩍 넘는 비디오를 차례차례 담고 있으니 박스가 점점 무거워졌다. 대만이 직원의 손에서 기울어지기 시작한 박스를 빼앗아 들었다. 직원이 머쓱한 듯 머리카락을 넘기며 그를 흘끔거렸다.
“감사합니다.”
“이거 언제까지 돌려줘야 되나요?”
“오늘 저녁 6시 전까지요.”
대만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6시?”
“제가 그때 퇴근하거든요.”
“아아….”
대만이 테이프 더미를 뒤적이며 물었다.
“내일 주말인데 이거 내일도 빌릴 수 있어요?”
“가능한데 주말엔 4시까지 반납하셔야 돼요.”
“알겠습니다.”
대만은 걸을 때마다 덜컥대는 소리가 나는 묵직한 상자를 들고 시청각실로 향했다. 공테이프 박스를 뜯고 그 옆에 비디오가 담긴 상자를 내려놓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그는 얼른 작업에 착수했다. 캠코더로 경기 테이프를 재생시킨 다음 카메라의 출력 단자를 TV에 꽂고 비디오 플레이어에는 공테이프를 집어넣었다.
아주 지루한 작업이었다. 영상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작은 화면을 쳐다보면서 제대로 녹화가 되고 있는지 TV 화면을 감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녹화해야 할 수십 개의 영상이 있었다. 우선 녹화가 끝나면 제대로 녹화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비디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빨리 감기로 돌려봐야 했다. 다섯 번째 비디오테이프를 점검하다 말고 정대만은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진짜 별짓을 다 한다.’
보통 같았으면 중간쯤 때려치우고 돌아갔을 것이다. 혹은 딱 몇 개만 골라서 녹화하자고 타협하거나. 그러나 그는 이상한 각성 상태였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정신을 붕 뜨게 만들고 지루한 작업을 인내하는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힘이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솟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데도 내내 가슴이 뛰었다.
그는 들떠 있었다. 송태섭이 전화를 줬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고 기뻤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서 약한 소리를 늘어놓을 상대로 자신을 골랐다는 게 그를 의기양양하게 만들었다. 연락이 뚝 끊어져서 전부 끝난 줄 알았는데 지난 몇 달 동안 매일 같이 전화를 주고받은 사실을 송태섭 역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다. 분명 그래서 전화를 준 거였다. 정대만만 그 일을 생각해 왔던 게 아니었다.
짝을 만난 두 손뼉이 마주쳐 박자를 만드는 것처럼 상호작용이 불러온 확신이 강력한 리듬을 만들었고 그의 감성을 뒤흔들었다. 코트 위에서 절체절명의 순간 서로 끝내주는 패스를 주고받을 때 닥쳐오는 흥분이나 고양감에 취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송태섭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그 순간에 아주 중요하게 느껴졌다. 명령어가 입력된 컴퓨터가 전산을 처리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재미없는 화면을 출력하는 것마냥 그는 수십 개의 캠코더 비디오를 반복해서 복사하고 또 복사했다.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그 일에 완전히 몰입했다. 정대만은 주말 내내 학교를 들락거렸다. 아침 일찍 차를 끌고 행정실로 가서 매번 똑같은 신청서를 작성한 뒤 먼지 쌓인 열람실에서 비디오를 쓸어와 하루 반나절을 시청각실에 처박혀 있었다. 그 주의 절반을 할애해 목표한 일을 완수한 후에야 꿈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해낸 일이 경이로워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녹화한 테이프에 하나하나 날짜를 베껴 쓰다 말고 정대만은 생각했다.
‘좀 과했나?’
포장하고 보니 상자가 전보다 훨씬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서 송태섭이 감동받기보단 놀랄 것 같을 정도로 무거웠다. 그는 아라에게 저녁을 사주고 얻어 온 송태섭의 대학 주소를 상자에 삐뚤빼뚤 따라 쓴 다음, 테이프를 잘 싸서 집어넣고 박스를 봉했다.
그는 살짝 머쓱해진 상태로 비디오에 관한 간단한 설명과 이를 복사하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정대만은 자신의 수고로움에 대한 생색을 내고 싶었다. 그가 생각해도 지난 주말 동안 해낸 일이 너무 대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점점 몰입해서 자기는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둥 비디오값으로 네 경기 영상이나 몇 개 보내달라는 둥 조던을 만나게 되면 전화해서 자랑 좀 하라는 둥 쓸데없는 얘길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우체국으로 택배를 부쳤고 한동안 들뜬 기분으로 돌아다녔다.
송태섭으로부터 답장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저번처럼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오거나. 어쩌면 전화를 받자마자 “이게 다 뭐예요?”하는 황당한 목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정대만은 그런 송태섭의 반응을 무척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다시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건 나쁘지 않았다. 송태섭하고 전화하는 건 재밌었으니까. 국제 전화는 비싸니까 매일은 무리겠지만 어쨌든 그 비슷한 일은 벌어지게 될 것이다.
몇 달 정도는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러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준호로부터 송태섭이 주전 멤버가 되어 리그 첫 경기를 마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낯선 땅에서 송태섭은 잘 해나가고 있었다. 정대만은 송태섭이 택배를 확인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잘 해나가고 있다면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쩌면 송태섭도 대학에서 계속 농구를 해나가는 그를 통해 비슷한 감상을 느낀 게 아닐까. 이번에야말로 전화나 한 번 줘야지 생각했지만 금방 리그가 시작되었다. 이 일은 결국 대만의 머릿속 저편으로 밀려났다. 그러고는 서서히 잊혀졌다.
그런데 무슨 사정이 있던 건지 몰라도 그 택배가 태평양을 건너는 대신 가나가와현의 아파트 단지에 처박힌 채로 몇 년을 보냈다는 건 알겠다. 그걸 몇 년 만에 지금의 일인 양 물어보는 송태섭이라니. 솔직히 그조차 내내 잊고 있던 것이었으므로 전화를 받은 당시에는 서운할 겨를도 없이 황당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비디오 같은 건 애초에 보지도 않았던 거로군.’
지금은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이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건지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민망했다. 특정한 시기 동안 사로잡혔던 일시적인 고양감으로부터 벗어난 지 오래였다. 결국 그런 게 있든 없든 송태섭은 알아서 잘 해나갔다. 정대만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지난 몇 년 동안 가끔씩 송태섭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특히 정우성과 매치업한 경기는 주간지에도 실렸다. 큼지막하게 나온 정우성의 사진의 귀퉁이에 반쯤 잘린 모습으로 흐릿하게 등장했지만 북산고 농구부 녀석들이라면 그게 송태섭이라는 걸 금방 알아봤다. 정대만도 단박에 그를 알아봤다.
키는 여전히 조그만 듯했고 몸은 좀 다부져진 것 같았지만 흐릿하고 멀게 찍혀 있어서 정확히 구분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조던을 만나거나 나이키에서 운동화를 협찬받거나 유명한 잡지 인터뷰를 따내지는 못했지만 송태섭은 농구를 관두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런 건 상관없었을 거다.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나가는 송태섭이야말로 강해 보였다. 무심코 약한 소리를 늘어놓을까 봐 허세를 부리는 송태섭이 정대만과 가장 가깝고 익숙했기에 그러한 강인함을 종종 잊어버릴 때가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송태섭에겐 정대만과 다른 종류의 끈질김이 있었다.
그는 농구를 계속할 것이다. 귀국한 이유가 어찌 됐던 오래 있을 생각이라면 송태섭은 결국 국내 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일전에 전화로 물어봤을 땐 미적지근하게 굴었지만 원체 자기 얘길 하지 않는 편이니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송태섭이 일본에서 농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둘은 빠른 시일 내에 맞붙을 것이다.
서태웅에게 면박을 주는 대신 이런 얘기나 해줄 걸 그랬다. 그 녀석이라면 송태섭이 귀국했는지도 모르고 있을 테니까. 미국 물을 먹은 송태섭의 실력이 궁금했다. 햄버거를 두 개째 해치운 대만이 소스로 축축한 포장지를 트레이 한쪽으로 치우며 콜라를 집어 들었다. 세계 멸망설에 관해 떠들던 팀원들은 이제 오는 길에 마주친 기묘한 형광색 머리카락을 한 고스로리 집단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가발이라니까.”
팀원 하나가 열과 성을 다해 주장했다.
“염색이죠. 머리가 푸스스했다고요.”
마지막 한 입을 삼키며 정대만이 끼어들었다.
“가발이죠. 특이한 머리색은 무조건 가발.”
팀원들이 술렁술렁했다.
“도쿄 토박이 증언 나왔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거봐, 가발이라니까.”
분위기가 과열됐다. 수종마저 적극적으로 얘기에 끼지 않을 뿐 적당히 리액션을 하고 있었고 팀원들은 이따금 두 사람에게 시선을 던지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들었다. 직전 경기에서 보여주었던 묘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대만은 자기도 모르게 왼쪽 무릎을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송태섭 선수 무슨 일 있어요?”
팀원 중 하나가 불쑥 물었다.
대만은 콜라를 쭉쭉 빨면서 되물었다.
“무슨 일이요?”
“엇. 못 들었어요?”
옆에 앉아있던 다른 팀원이 끼어들었다.
“송태섭 선수 농구 관둔다는데요.”
빨대를 타고 올라오던 콜라가 뚝 멈췄다.
“…예?”
“스카우트 다 거절했대요.”
컵에 맺힌 물방울이 미끄러지며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가 그래요?”
파워 포워드 임학규가 옆자리에 앉은 팀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녀석 애인이 구단 매니지먼트 사람이라 어지간한 건 다 알아요.”
힐난하듯 쳐다보자 옆자리 팀원이 꼭 대신 변명해 주듯 말했다.
“진짜래요. 스카우터들 사이에선 벌써 소문 다 퍼졌어요.”
팀원은 자신의 여자친구로부터 들은 이런저런 소식을 들려주었다. 찌라시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일화들이었다. 처음에 에둘러 거절하던 송태섭은 구단 하나가 끈질기게 연락하자 결국엔 기세에 못 이겨 단호하게 귀국한 이유를 털어놓았다고 했다. 농구를 관둘 생각은 미국에 있을 적부터 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대만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어느새 팀원들이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대만의 반응을 통해 진위여부를 가리고 싶은 것처럼 눈치를 살폈다. 정대만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괜히 콜라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은 다음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정쩡한 자세로 창가를 가리켰다.
“잠깐 이 앞에 좀.”
그는 맥도날드를 빠져나와 하라주쿠역 출구로 향했다. 그 앞에 전화부스가 세워져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도착해 보니 이미 누군가 쓰고 있었다. 그는 앞사람이 통화를 끝낼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했다. 거리에서 요란스러운 노래가 흘러나왔고 하늘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대학생들이 길거리 액세서리점 앞에서 귀걸이를 대보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거리의 풍경을 바라보며 정대만은 멍청하게 생각했다.
‘확실히 저건 가발은 아니네.’
일본에 아주 돌아온 거냐고 물었을 때 송태섭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기껏해야 국내 팀 이적을 두고 고민 중인 줄 알았다. 권준호는 뭐 들은 게 있나? 채치수는? 아니지, 걔한테 말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럼 이달재? 강백호는?
전화 부스에서 사람이 빠져나왔다. 부스로 들어가 송태섭네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한 번 더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달칵거리며 동전 배출구를 건드리는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삐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선을 힘껏 쥐었다 놓으면서 정대만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내가 좀 이상한 얘길 들었는데.”
농구를 관둔 게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귀국한 이유가 정말로 그것 때문일까. 역시 헛소문 아닐까. 뭘 어떻게 하고 다니면 그런 소문이 도는 거냐고 면박을 주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송태섭이 실소를 터뜨리며 무언가 다른 얘기를 들려줄 것 같았다. 그는 수화기를 든 채 언젠가처럼 횡설수설했다. 마음 한 구석으로 그는 의심하고 있었다.
설마 그 녀석이 농구를 관두겠는가. 그런 일이라면 뭔가 단서를 흘렸을 것이다. 한 번은 그에게 연락을 줬을 것이다. 그동안 전화를 주고받는 중에라도 조금은 얘기해 줬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남의 입을 통해 듣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 왜냐하면.
‘니가 나랑 보통 친했냐.’
서운했다.
그 순간 퍼뜩 떠올랐다. 멍청한 머리를 쪼개며 깨달음이 내리 꽂혔다. 지난 몇 주간의 대화를 단숨에 거슬러 올라간 정대만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내가 너한테 번호를 안 줬구나!”
‘뭐야. 그래서 연락이 없던 거였네.’
서운함이 쏙 들어갔다.
“지금 번호 불러줄게. 전화해라.”
실실 웃으며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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