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가타리 4»
시마이부 오컬트 AU «신리神籬 어지럽히기»
8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메시지 남겨주시면 가능한 한 신속히 전화드리겠습니다….
시마는 전화를 끊었다. 할아버지가 제때 전화를 받을 리 만무했지만 부재중 기록을 남겨놓고 며칠 뒤에 뒤늦은 답신을 받기엔 시간이 조금 촉박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처음이었고 시마는 이 사건이 어떤 전개로 뻗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예로부터 신사와 관련된 사고는 대부분 할아버지가 처리해왔고, 지난 몇 년 간 신사에서 벌어진 말썽은 하잘것없는 종류였다. 몇 차례 통화 연결에 실패한 끝에, 시마는 어쩌면 이 일이 여태까지 그래왔듯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시마는 만약이라는 걸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가 부주의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싶었다.
시마가 할아버지에게 전화 거는 걸 그만두기로 결정했을 때 그 라인이 도착했다. 처음엔 한 통이었다. 시간 차를 두고 서너 통이 더 도착했다. 시마는 자신이 초대되어 있는 타이세이네 단체 대화방에서 온 라인임을 깨달았다. 그가 메시지를 확인하려는 순간 대화방이 미친 듯이 위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 띵동 ]
[ 띵동 ]
[ 띵동 ]
[ 띵동 ]
카스가가 수십 장의 사진을 실시간으로 찍어 대화방에 올리고 있었다. 로딩이 끝나지 않은 회색 사진들이 끝없이 전송되면서 알람이 너무 밀린 나머지 소리가 끊기고 진동만 요란하게 울려댔다. 잠시 후 메시지가 뚝 멈추고 대화방에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사진 옆에 붙은 숫자가 짧은 시간 차를 두고 전부 사라졌다.
시마는 수십 장의 사진을 거슬러 올라가던 도중 전화를 받았다.
“시마, 봤어?”
타이세이가 헐떡이며 물었다.
“보고 있어.”
시마는 사진을 확인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어렴풋한 하늘과 깜깜한 나무 형체들. 어딘가로 걷고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화면. 옆으로 넘기자 지붕이 나타났고 점점 가까워졌다. 미츠유비 신사였다. 풍경은 세전함을 지나친 뒤 뒤쪽으로 이동했다. 주변을 지나치는 동안 배전 지붕 아래로 와니구치의 희끄무레한 빛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은 굳게 닫힌 분합문 앞이었다. 손잡이를 중심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던 사진은 거기서 끊어져 있었다.
“시마….” 잔뜩 겁에 질린 타이세이가 물었다. “저거… 본전 문이지?”
“타이세이, 지금 어디야?”
“애, 애들이랑 시내….”
“오늘은 일찍 들어가라고 했잖아.”
“미안. 지금 들어가려고… 지금 들어갈게!”
“오늘은 가능하면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모두에게 전해줘.”
전화를 끊은 시마는 야쿠오도시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연못 샛길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숲은 저녁 무렵만 되어도 금방 캄캄해진다. 노을 지는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가 서서히 저물어갔다. 시마가 연못 사이에 놓인 가교를 넘어갈 무렵 잉어떼가 산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퉁퉁한 물고기 떼가 일으킨 물살이 숲의 적요를 요동치며 뒤흔드는 듯했다. 이 숲에 무언가 들어왔다. 이 숲에 무언가 침입했다. 그것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초대하지 않았다. 우리가 초대하지 않았다.
석등롱이 늘어선 참도를 지나 미츠유비 쪽으로 내려가자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경내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시마는 바짝 곤두선 채 경내에 들어섰다. 본전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마는 문이 열려있는지 확인했다.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분절문을 열었다. 안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있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홱 몸을 돌리고 야쿠오도시를 빼들자 상대 쪽이 펄쩍 뛰었다.
“우왓, 깜… 짝이야!”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상대를 확인한 시마가 야쿠오도시를 내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왜…?”
“갑자기 들이대구~ 엄청 놀랐다고, 정말이지.”
전학생이 투덜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아. 키가 비슷해서 착각했네. 분명 여기쯤이었는데.”
“당장 여기서 나가.”
“하? 누구 맘대로?”
“넌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잠… 어이! 이거 놔, 놓으라니까!”
전학생은 마구 몸부림치며 시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씩씩거리며 몸집을 부풀린 그가 소리쳤다.
“나는 카스가를 찾으러 왔단 말이야!”
시마가 멈칫했다.
“카스가? 너 그 녀석이랑 연락됐어?”
“엉? 아니, 아까 말이야. 카스가한테 라인을 엄청나게 받았거든. 너도 받은 거야? 그런데 난 전부 사진이더란 말이지. 에에, 뭐지? 하고 열어봤더니 여기잖아. 카스가, 분명 아깐 신사 근처에만 가도 무서워서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싫어했는데… 날도 어두워지고 있는데 갑자기 대체 무슨 일인가 싶고. 점점 걱정되는 거야. 그래서 전화해봤더니 전혀 받질 않고. 메일도 안 보고 라인 답장도 읽질 않아. 뭔가 받을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방금의 사진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낸 SOS인 걸 수도 있잖아. 가족 연락처 같은 건 모르니까 따로 연락할 수 없어. 경찰에 연락해 보니 실종이 아니라서 출동은 안 된대. 그렇다고 친구로서 가만있을 수도 없으니까 여기 온 거야.”
잠깐 말이 없던 시마가 물었다.
“너 카스가랑 원래부터 아는 사이야?”
전학생이 멀뚱멀뚱 시마를 쳐다봤다.
“아니. 왜?”
“넌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녀석을 친구라고 불러?”
“에, 너 엄청 빡빡한 스타일이구나.”
“지금 6시가 훨씬 넘었어. 보다시피 배전 근처에 켜진 등만 제외하면 여긴 암흑 그 자체야. 숲 한복판이라고. 그리고 넌 여기 온 지 하루도 안 됐어.”
“그래서?”
“너 혼자 여기서 사람 하나 찾는 게 가당키나 할 것 같아? 게다가 넌…,”
“그렇다고 모른 체 둘 순 없잖아!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지도 몰라.”
이부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있지, 나는 느껴져. 카스가한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단 말이야. 카스가 녀석, 아까 엄청나게 겁먹었었어. 그런데 이렇게 깜깜해지고 있는데 혼자 여기 있는 거라면, 만약 그런 거라면, 난 여길 전부 뒤져볼 거야. 그리고 말이지, 아까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야… 여기가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너야말로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난….” 시마는 정직하게 대답할 뻔하고 말문이 막혔다. “나는 이 신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야. 설령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더라도.”
“그래서 혼자서 카스가를 찾으러 온 거야?”
“그래.” 시마가 대답했다. “그리고 너도 내 책임에 포함되거든.”
“헤에.”
“알아들었으면 여기서 나가. 부탁이니까.”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명령조였다.
“싫어.”
“아니, 이건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니야. 너, 아까 본전에 들어갔었지? 물건 놓고 온 것도 너야?”
“왜?”
“왜 그걸 본전에 두고 온 거야?”
“본전 거니까.”
시마가 주머니에서 목상을 꺼냈다. 아! 하고 가리킨 전학생이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냐는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봤다.
“이건 본전 물건이 아니야.”
“엥? 그렇지만 카스가가….”
“카스가가 그렇게 말했어? 걘 본전 물건에 손도 안 댔어.”
“아니 아니 아니. 네가 뭘 몰라서 그래. 그 녀석, 억지로 본전에서 그걸 갖고 와야 했단 말이지. 그거 때문에 아까 엄청 신경쓰면서 걱정했다고.”
“이거 돌려놓을 장소 발견 못 했지? 그래서 아무 데나 두고 간 거잖아.”
전학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마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역 앞 골동품 가게에서 파는 목상이야.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제품이라고. 봐.”
시마는 목상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래쪽에 네모난 얼룩 보이지? 택이 붙어있던 자리야. 카스가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사실대로 털어놓진 않았겠지. 넌 속은 거야. 대체 왜 너더러 이걸 본전에 두고 오라고 했는지 모르겠네.”
전학생이 목상을 탁 낚아챘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없이 손안에서 목상을 굴려댔다. 그걸 보고 있자니 시마는 묘하게 기분이 불편했다.
“굳이 네가 카스가를 찾을 필요는 없어. 더 늦기 전에 돌아가.”
“…….”
“어서.”
“…뭔가 팟 오지 않아.”
고개를 번쩍 들고 전학생이 말했다.
“아니, 감이 와. 그 녀석은 거짓말 안 했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마가 뒤돌아서자 전학생이 따라붙었다.
“어이, 영능력자 씨. 뭔가 느껴지는 건 따로 없는 거야?”
“뭐가.”
“숨겨진 사연이라던가. 이거 만졌을 때 팟 하고 눈앞에 카스가 시점으로 회상 장면이 지나간다던가.”
“없어. 이게 무슨 영화 같은 건 줄 알아? 제기랄, 완전히 어두워졌잖아.”
시마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보다 왜 은근슬쩍 따라오는 거야? 난 돌아가라고 말했어.”
“에. 토리이까지 가는 길 너무 어둡다고. 혼자서 돌아가는 거 절대로 무리.”
“아니, 전혀 쫄고 있는 표정이 아니잖아. 돌아가. 돌아가라고. 집에서 부모님이 걱정 안 하시냐?”
“우리 할머니는 늦은 귀가 전혀 간섭 안 하는 스타일~”
전학생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다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손을 떼어냈을 땐 전혀 다른 표정이 되어있었다. 입매를 비틀고 미소를 짓는 씁쓸한 얼굴. 시마는 그 예고 없는 변화가 당혹스러워 받아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대로 오해한 채 돌아가긴 싫어. 직접 만나서 제대로 얘기를 듣고 싶어.”
전학생이 덥석 시마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 자. 같이 찾아보자고. 솔직히 한 명보단 둘이 낫잖아?”
시마가 대답하지 않자 전학생은 기웃거리며 눈을 마주치려고 들었다. 결국 시마는 대놓고 짜증을 냈다.
“아, 정말 성가시네. 알겠으니까 좀 떨어져.”
전학생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시마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구시렁거렸다.
“겁이 없는 건지 바보인 건지.”
어느새 전학생은 휴대폰을 꺼내 라인 대화방을 빠르게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숲이 쏴아아 흔들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대화방 맨 꼭대기에 도달하자 전학생은 최초 사진부터 하나씩 넘기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본전 서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가리켰다.
“시작은 저기였어. 맞지? 그리고 저 길을 따라서 배전 주변을 돌다가… 여기, 본전 앞까지.”
“본전은 아까 내가 확인했어. 비어 있었어.”
“그럼 돌아간 걸까? 다시 저 길을 통해서?”
“알 수 없지만….” 시마는 본전 뒤쪽으로 이어지는 그 좁다란 길을 곁눈질했다. 주택가로 이어지는 그 산책로는 오후 4시쯤엔 좌우로 나무가 드리운 무척이나 운치 있는 장소로 통했지만 밤에는 등불 하나 없이 캄캄해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오후 7시가 훌쩍 넘은 지금 길목은 배전 양쪽으로 세워진 등에 의해 어느 정도의 시야가 겨우 확보되어 있을 뿐 불과 몇 미터 너머는 완전한 암흑에 싸여 있었다. “가급적 들어가고 싶지 않다.”
시마는 전학생을 돌아보았다.
“너 카스가랑 아직도 연락 안 돼?”
“응. 내가 보낸 라인 읽지도 않았어.”
“내 것도야. 제길, 전화도 안 받아.”
“어이, 잠깐만.”
전학생이 시마의 휴대폰을 잡아내렸다. 통화연결음이 멀어지자마자 경내의 조용함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전학생이 점점 곤두섰다. 두 눈이 긴장으로 한껏 조여져 있었다. 시마는 천천히 그 시선을 따라갔다. 산책로 너머의 어둠속에 무언가 있었다.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두 사람 모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벨 소리잖아.”
시마는 간신히 숨을 내쉬듯 그 말을 뱉어냈다.
9
칸바라 야요이는 오늘 일진이 장난 아니게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회사 밑에서 꼬박 2년 반을 일했다. 그 정도면 밥 먹듯 직장을 바꿔대는 이 바닥에서 제법 오래 살아남은 편이다.
원한다면 그는 이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전에 회사가 먼저 선수를 치지만 않았더라면.
졸업하자마자 자길 거둬준 선배는 연차가 쌓일수록 만사에 무심해지더니 마침내는 칸바라와 했던 약속까지 잊어버린 듯했다. 철밥통이라며? 씩씩거리며 운전대를 붙잡은 그는 신호에 걸리자마자 결국 분에 못 이겨 양손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제길!”
집에 가자마자 맥주를 들이켜던가 해야지. 아니, 그전에 다 관두고 싶다. 이미 관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늘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해고를 통보한 젊은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서 미칠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그는 화가 난다고 해서 과속운전을 하거나 화풀이를 찾아야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가 상식을 갖춘 시민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한 일을 직접적으로 벌일 담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위험에 처하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당장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리를 뜰 준비부터 하는 안전주의자였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서로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고 그것을 자신의 손해로 취급하지도 않는 법이다. 하지만 죽어도 손해 보기 싫어하는 부류들은 당장 감수해야 할 게 끔찍하게 두려운 나머지 언젠가 치르게 될 대가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거나 혹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칸바라는 자신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잘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설령 알았다고 할지라도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든 손해 보며 사는 것만큼 바보 같은 게 없기 때문이다.
파란불과 함께 출발하려던 칸바라는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교복을 입은 세 학생이 눈짓으로 사과하며 허겁지겁 길을 건넜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저 녀석들은 방금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뻔뻔스럽게 길을 건너려다 자신의 차에 치일 뻔했다!
장난해? 눈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그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쭉 빼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황급히 역사로 뛰어가는 세 학생들의 등 뒤로 무언가 천천히 온몸을 비틀면서 이동하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칸바라는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사람처럼 생겼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걷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런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했다. 반투명하고 캄캄했으며 형체가 뚜렷하지 않아 끝없이 몸을 비틀면서 이글이글 주변 풍경을 뭉개고 있었다. 그 주변은 물에 번진 것처럼 탁하고 흐릿했다. 이때 다리 위로 전철이 들어왔다. 그러자 그것은 잠깐 멈추어 서서 다리 위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것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어느새 다리 위로 이동해 있었다.
칸바라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것이 전철 차량 한쪽에 달라붙는 걸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는 정신을 차렸다. 전철이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칸바라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정신없이 주머니를 뒤지다가 백미러를 보고 뒷좌석에 실어놓은 박스의 존재를 깨달았다. 등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황급히 뒷좌석으로 몸을 틀고 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10
산책로는 끔찍할 만큼 조용하고 캄캄했다. 두 사람은 귀를 기울였지만 휴대폰 벨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어둠 한가운데에 들어서자 시마는 걷는 속도를 늦췄다.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고 발밑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전학생은 시마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큰소리로 “카스가아아아!”하고 질렀다가 시마의 면박을 받곤 그 미련한 짓을 그만두었다.
시마는 어느 정도 긴장한 상태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손발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전학생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제지하지 않은 건 침묵 속에 있는 것보단 누군가 실없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는 편이 긴장을 푸는데 훨씬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주택가.”
“헤에. 그럼 카스가는 집으로 돌아간 걸까?”
“모르지.”
“전화돼?”
시마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니, 안 돼.”
“차라리 집으로 무사히 돌아간 거라면 좋겠다. 여기 좀 으스스하지 않아? 얼마나 더 걸어야 돼?”
“몰라.”
“에에. 모른다고?”
“어두워서 전혀 안 보이니까.”
풀벌레 우는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변은 조용했고 이따금 희미한 바람이 불면서 나뭇가지를 스산하게 흔들었다. 전학생이 입을 다물자 제법 긴 침묵이 이어졌다. 고요 속에서 어둠이 더욱 생경하게 느껴졌다. 산책로의 나무들은 키가 너무 커서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카스가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응?”
“아니, 그 녀석 어쨌든 뭔가 말했을 거 아냐.”
“아~”
전학생이 짧게 탄식했다.
“타이세이네 얘기. 방학식 전날 싸운 거랑, 그래서 방학 중에 그 녀석들한테 이지메 당한 얘기 해줬어.”
“이지메?”
“엉. 오늘도 그 녀석들 말이야, 비품 창고 뒤쪽에서 카스가를 위협하고 있었다구!”
“걔네가 좀 막 나가는 구석이 있긴 해도 그런 짓을 할 녀석들은 아닌데.”
시마는 생각에 잠겼다.
“오해 아냐?”
“에. 그치만 카스가가 그랬는걸, 이지메 당하고 있다고. 아! 처음엔 말이 좀 달랐지만? 삥 뜯기고 있던 거냐고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자긴 오히려 타이세이네랑 친구라면서.”
“그런데 갑자기 말을 바꿨다?”
“아니. 그치만 보통 남자애들은 그렇잖아? 본인이 이지메 당하고 있다고 바로 인정하는 녀석들은 드물잖아.”
시마는 고민했다.
“처음에 했던 말이 진짜일 거야. 그 녀석, 타이세이네 중 하나거든.”
“헤에. 그렇구나, 제대로 ‘타이세이네’로 취급해주는구나.”
전학생이 말했다.
“그런데 말야, 카스가는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았어.”
시마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방학식 날의 사건을 떠올렸다. 학교가 일찍 끝나고 간만에 다섯 명이 뭉친 날이었다. 타이세이, 렌지, 와타루. 그리고 시마와 카스가. 그들은 전철을 타고 시가지로 건너가서 저녁까지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배고파서 저녁 메뉴를 정하고 있을 때 카스가가 갑자기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또 이런 식이네. 여과 없이 비꼬는 어조에 모두가 절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카스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더듬거렸다. 나만 또 혼자 따로 걷고 있잖아.
그랬던가, 라고 그 순간 시마는 생각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지금도 우리는 둘씩 맞춰서 걷고 있지 않나? 그러나 카스가의 그 말은 ‘남자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뭐냐, 카스가. 기집애냐? 무안한 분위기를 짓누르기 위해 타이세이가 습관처럼 낄낄거렸고, 그러자 렌지와 와타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네 머리로 이해가 되긴 하냐?’
그때 시마는 웃었던가?
‘모르겠지? 넌 그딴 건 전혀 신경 안 쓰니까.’
시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것도 이지메라고 할 수 있을까.”
시마는 방학 동안 세 사람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타이세이네는 방학이 되면 시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들과 어울린 지난 몇 년 간 그건 당연한 일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세 사람이 지난 방학 내내 카스가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얘길 들었을 때, 내색하지 않았지만 시마는 놀랐다.
“카스가는 방학 내내 자기가 이지메 당했다고 말했어. 뭐, 만나서 때리고 그런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봐, 이지메란 건 결국 그런 거잖아? 무시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하면서 외롭게 하는 거잖아. 나, 카스가가 자기 기분에 대해서만큼은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 녀석 그런 얘기를 할 때 엄청 쓸쓸해 보였거든. 나 그런 기분 알아.”
아, 또 나왔다. 저 목소리. 뒤돌아 있어도 시마는 전학생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싸운 거냐?”
“엉?”
“너, 타이세이 녀석들 두들겨 팼다며. 그거, 진짜야?”
“아~…. 응.”
“너 오지랖이 너무 넓은 거 아냐? 그래봤자 남의 일이라고.”
“아니, 그러는 너도 카스가를 찾으려고 여기 왔잖아?!”
“아까 말했지만 나는…,”
“네에, 네. 변명은 스톱.”
전학생이 말했다.
“책임이니 뭐니 해도 어쨌든 너도 걱정이 되니까 여기 온 거잖아. 타이세이네가 그 녀석을 찾으러 여기 오진 않을 테니까… 나도 말야, 똑같은 마음이야. 너도 정말로 카스가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 아냐. 뭔가 사정이 있다고 믿고 싶은 거잖아. 그러니까 그 녀석을 내버려 둘 수 없는 거잖아.”
가만히 듣던 시마가 말했다.
“너 그냥 바보인 줄 알았더니 엄청난 바보네.”
“뭣….”
“난 그 녀석을 믿어서 여기 온 게 아니야. 당연한 거 아냐? 난 그 녀석이 여기서 엉뚱한 짓을 할까 봐 온 거야. 경내를 지키는 목적 외에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어.”
“에. 차갑네.”
“애초에 보통의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이에 부탁 좀 받았다고 본전을 들락거리는 짓 같은 거 안 한다고. 경내에서 뭘 하면 안 된다거나 하는 상식은 없다 치더라도 보통은 천벌이 무서워서라도 그런 부탁은 거절하지 않냐?”
“괜찮아, 괜찮아. 들어갈 때랑 나올 때 제대로 인사드렸으니까. 그런 걸로 천벌받을 거였으면 난 진작 받았을걸? 저번에도 말이야, 이사가기 전날이었는데. 같은 반 녀석들한테 부탁받아서 말이지, 대신 물건 돌려놓고 온 적 있는걸.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 완전 무사하다고?”
“하?”
“아니, 그치만 걔네들… 내 앞에서 울었단 말이지. 훌쩍, 훌쩍하면서. 그걸 보니까 아, 어쩔 수 없네~ 같은 생각이 들잖아.”
시마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두 사람이 발걸음을 멈췄다. 오른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학생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빼들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풀을 헤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 가까웠다. 길게 끌렸다가 규칙적으로 뚝 멈추어 섰다. 질질 끌리는 소리. 이건 바람이 만드는 게 아니었다. 풀대를 꺾고 움직이는 무언가가 만드는 소리였다.
점점 감각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면서 뱃속 깊은 곳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시마는 평소와는 다른 감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시마는 생각했다. 저건 카스가가 아니다. 허공에서 솟아나 갑자기 짜 맞춰지는 뼛조각처럼 단단하고 형태를 갖춘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신기神氣였다.
그때, 소리가 멈췄다.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쫙 돋아났다. 시마는 깨달았다.
눈치챘다.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귀 기울이는 것을 저것이 눈치챈 것이다!
긴 침묵이 흘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캄캄한 산책로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두 사람을 눈치챘다.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이 끝없는 어둠 속에.
[ 띵동 ]
그 소리가 무엇인지 깨닫기까진 시간이 좀 필요했다.
시마는 멍하니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발신자 : 카스가 (사진)
다음 순간 소리가 들이닥쳤다.
[ 띵동 ]
[ 띵동 ]
[ 띵동 ]
[ 띵동 ]
[ 띵동 ]
고개를 들었을 땐 흙냄새가 코앞에 닥쳐 있었다. 그게… 서 있었다. 두 사람 앞에.
확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달리는 중이었다. 전학생이었다. 전학생이 시마의 손을 잡아채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흙냄새가 멀어졌다. 헐떡이는 소리 때문에 그것이 쫓아오는지 쫓아오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전학생은 놀랍도록 빨랐다. 그는 바람처럼 달리면서 시마를 잡아끌었고 두 사람은 거의 어둠 속에서 퉁겨져 나오듯 산책로를 빠져나와 본전 쪽으로 내달렸다. 시마는 뒤돌아 산책로 입구를 확인했지만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학생이 헐떡이며 불렀다.
“시마.”
시마는 한 박자 늦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본전 안이네.”
전학생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카스가에게 온 사진 수십 장이 눈에 들어왔다. 캄캄한 본전 안, 불단 앞에 걸린 그림 속 청년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평온하기보다 슬퍼 보이고, 절망했다기보단 인내하는 듯한 얼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하던 카메라 앵글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다 추락했다.
“본전 안이네, 그렇지?”
시마는 대답 대신 시선을 교환했다.
“카스가!”
전학생이 거칠게 문을 열고 본전 안으로 뛰어들었다. 시마가 그 뒤를 따랐다. 문지방을 넘던 시마는 바깥쪽 문고리에 진흙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카스가, 어이! 눈을 떠. 정신 차려!”
전학생이 정신을 잃은 카스가를 마구 흔들었다. 불단 아래에 휴대폰이 떨어져 있었다. 카스가가 움찔하더니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전학생을 알아보지 못하고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 그 뒤에 서 있는 시마를 발견하곤 겁에 질렸다.
“시마! 나는….”
시마는 본전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냈다.
“카스가, 너 대체 경내로 뭘 데리고 들어온 거냐?”
문틈 위에 부적을 붙인 시마가 시험 삼아 문을 잡아 흔들었다. 낡아빠진 경첩이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배전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빛이 본전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시마는 두 사람에게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풀벌레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시마가 조용히 말했다.
“영감을 개발했다며?”
“…….”
“뭘 했어?”
“…아무것, 도.”
카스가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글쎄, 무슨 일인지 난 잘 모르겠는데.”
“시마.”
그의 이름을 부른 전학생이 바짝 곤두섰다.
바깥에서 무언가가 발을 질질 끌며 움직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무엇인진 몰라도 바깥의 그것이 그들을 찾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시마는 자기도 모르게 야쿠오도시를 왼손으로 쥐었다. 발소리는 비틀거리며 본전 옆을 지나 배전 쪽으로 멀어져 갔다.
“방학 동안 네가 타이세이네한테 귀신이 보이는 척하고 다녔단 얘기 들었어.”
그 말에 전학생이 고개를 돌려 카스가를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문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시마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시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카스가, 너 이 마을이 어떤 곳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이곳은 토지신이 앉아있는 땅이야. 신이 깃든 땅엔 신만 살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냐?”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어. 난 영감 같은 거 없으니까 그깟 거 몇 번 거짓말한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 생각 안 했어. 너도… 너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살았잖아.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잖아. 너도 사실은 영감 같은 거 없으니까.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시마는 잠깐 눈에 힘이 풀렸다. 그랬다, 카스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다.
“그래… 난 우리 할아버지와는 달라. 난 죽은 사람이랑 꿈속에서 대화할 수 없고 유령을 보지도 않아. 부적을 쓰는 법도 배우지 않았어.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아. 설령 할 수 있는 사람이어도, 평생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믿을 거야. 왜냐고? ‘그것들’이 들을 테니까.”
야쿠오도시를 쥔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보이는 척하면 언젠가 보이게 돼.”
시마가 나지막이 죄를 고백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척하면 언젠가 보이지 않게 돼.”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영감을 개발한다고? 틀렸어. 그건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같아. 넌 너도 모르게 뜬눈으로 무언가한테 말을 걸어버린 거야. 그게 너를 따라오도록 허락한 거야. 고작 본전에서 무언가를 훔친 척하려고 신리神籬가 될만한 걸 경내로 가지고 들어온 거야. 그걸 어떤 바보한테 두고 와달라는 터무니없는 부탁까지 해가면서.”
배전 쪽에서 희미하게 사사사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고 경쾌한 소리였다. 방울소리였다. 와니구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밧줄을 잡고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어느새 풀벌레들이 연주를 멈추었다. 침묵은 경내에 납작하게 엎어졌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스가는 울음을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질질 끌리는 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이 배전을 돌아 본전으로 오고 있었다. 문 앞에 멈추어 섰다.
길고 긴 실루엣이었다. 그것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창호지 너머로 새까만 그림자가 일렁였다. 마치 사람 같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것이 손을 들어 올렸다. 시마는 야쿠오도시를 들어 올리고 숨을 죽였다. 덜컹. 문이 흔들렸다. 덜컹. …. 덜컹덜컹덜컹덜컹!
카스가가 나지막이 비명을 질렀다. 벌어진 문짝 틈으로 새하얀 손이 쑥 들어왔다. 손가락마다 진흙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것이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시마가 붙여둔 부적이 있었다. 그것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며 바깥으로 황급히 손을 빼냈다. 쾅!! 화가 난 것처럼 문에 주먹질을 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고저 없이 바람에 스러지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왔다.
“타이세이….”
벨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입으로 내고 있었다.
“타이세이, 내 라인 읽었어? 렌지는 벌써 난리야.”
“와타루가 소름 돋는대.”
“방금 보낸 메시지는 내가 보낸 게 아니야.”
“사진 무서웠어?”
“타이세이 라인 좀 봐줘.”
“오늘 셋이 어디 가?”
“타이세이, 내가 보낸 사진 봤어?”
“내가 보낸 사진.”
“사진.”
그것은 중얼중얼하면서 점점 카스가의 목소리에 가까워졌다. 마침내 그것은 만족한 듯 기쁘게 한숨 쉬었다. 카스가아아아아.
“시마가 너 거짓말쟁이인 거 다 알았대.”
카스가가 창백한 얼굴로 입 벌리는 순간 시마가 황급히 마이를 벗었다. 카스가의 얼굴에 마이를 덮어 씌우고 전학생을 바라보자 전학생은 눈빛만으로 시마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카스가를 엎드리게 한 뒤 더는 듣지 못하도록 말을 걸었다. 카스가, 이따 여기서 나가면 꼬치 집에 가자. 나 꼬치 좋아하거든. 주변에 괜찮은 꼬치 집 좀 알려줘. 카스가, 듣고 있지?
카스가가 듣고 있는지 기절한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시마는 어떻게든 이 사태를 헤쳐나가야 했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고 여전히 손발이 차가웠지만 무언가 하겠다고 결심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자 반 년 전에 할아버지로부터 받아놓은 불경이 떠올랐다. 잠들기 힘들 때마다 읊으라고 보내주신 거였다. 지금 이 순간에 효과를 발휘할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마는 휴대폰을 앞에 두고 메모장을 열었다. 넥타이가 자꾸 흘러내려 액정을 가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어깨너머로 넘겨버린 뒤 교복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야쿠오도시를 바닥에 두들기면서 조용히 불경을 읽기 시작했다. 마음은 침착한데도 어째선지 손은 식은땀으로 미끈거렸다. 그도 떨고 있었다.
아이신수我以神手 사등방편四等方便 내가 이제 신의 손 네 가지 방편 쓰되
신승정결身乘淨潔 반월풍륜半月風輪 몸을 정결히 하고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여
소여무명燒汝無明 소적지신所積之身 빛 없이 쌓여 이루어진 너의 몸을 태우리라
야쿠오도시에서 탁한 소리가 났다. 지나치게 탁한 나머지 홈에 천이 끼워져 있는 것처럼 먹먹한 소리였다. 마치 무언가가 틀어막는 듯… 그것이 문을 박박 긁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마가 멈추지 않고 불경을 읊으면서 뚫어져라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순간 시마의 두 눈은 불경한 것이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눈이었다. 통제하는 눈이었다. 지배하는 눈이었다. 시마의 안에서 무언가 대신해 말하고 있었다.
차칙천상且勅天上 공중지하空中地下 또한 천상 허공 땅속 모든 세계 신칙하여
소유일체所有一切 작제난장作諸難障 있는 바 모든 장애와 어려움을 없애리니
불선심자不善心者 개래호궤皆來胡跪 착하지 않은 자여, 모두 와서 무릎 꿇으라
야쿠오도시의 소리가 탁해졌다가 조금씩 깨끗해졌다를 반복하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시마는 야쿠오도시로 바닥을 두들기며 정신이 하나로 모이고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어느새 그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문을 감시하는 육신인 동시에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는 영혼이었다. 야쿠오도시의 소리가 점점 뚜렷해지면서 마침내 평소와 같이 맑은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쩡, 하고 공기가 갈라지면서 어떤 가냘픈 서늘함이 허공을 쪼갰다. 모든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마가 천천히 일어나자 전학생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전학생은 카스가를 덮고 있는 마이를 걷어내곤 그를 부축하면서 시마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긴 거야?”
카스가는 눈물 콧물로 얼굴이 온통 엉망이었다. 시마는 야쿠오도시를 쥐고 있던 손을 쥐었다 펼쳤다 해보았다. 저릿저릿한 와중에도 식은땀 때문에 서늘하고 축축했다. 그는 자신이 야쿠오도시를 왼손으로 사용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 이제 경내에 없어.”
시마는 본전 문 안쪽에 붙여둔 부적을 하나씩 떼어냈다. 문고리에 붙인 부적은 한쪽이 온통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그는 부적을 반으로 찢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두 사람을 데리고 본전을 나왔다. 문을 닫기 전 문틈 사이로 보이는 불단에 작게 감사 인사를 올렸는데, 시마가 추측하기로 전학생도 비슷한 인사를 올렸던 것 같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리이가 보이자 다리에 힘이 빠진 카스가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기둥에 등을 대고 캄캄한 밤바다를 바라보는 표정이 멍했다. 시마와 전학생은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카스가가 두려운 눈으로 전학생을 올려다보았다.
“이부키….”
전학생은 대꾸하는 대신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미안.”
마개처럼 뽑혀져 나간 말을 뱉으며 카스가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네가 믿어줘서, 그런데, 그런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리려고 했는데, 벌써 계단 올라가버려서… 그래서….”
카스가는 서럽게 울었다.
“그래서 도로 가지고 오려고 했어, 그런데, 산책로에서부터 기억이 안 나, 그래도 나, 가지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목상은 내가 갖고 나왔어.”
시마가 말했다.
카스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복받쳐오르는 울음 때문에 딸꾹질을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어. 그냥, 흉내만 낸 거니까, 그러니까….”
카스가의 고백을 듣는 내내 전학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카스가의 울음이 거세질수록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카스가가 침을 삼키면서 불규칙적으로 숨을 뱉어냈다. 전학생이 그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카스가.”
“…응.”
다음 말이 이어지기까지 틈이 있었다. 음, 하고 말을 끌던 전학생이 물었다.
“뭔가 다른 사정이 있던 거지?”
시마는 전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느새 전학생은 답을 구하는 눈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면에선 굉장히 절박해보였다. 시마는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뭔가 다른 사정이 있던 거지? 너, 나쁜 마음 먹고 나한테 그런 건 아니었잖아. 응?”
“…….”
전학생의 입매가 고통스럽게 올라갔다.
“카스가, 뭔가 변명이라도 해 봐. 방학 동안 이지메 당한 거 진짜로 거짓말이야?”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맞다, 맞다. 아까 말한대로 꼬치 집 가자. 이 동네 맛집 소개해줘. 아, 뭣하면 얘도 데려갈까? 아까 이 자식 엄청나게 무서웠지?! 불경 중얼중얼 외면서 이렇게…,”
카스가가 천천히 고개 숙이자 전학생의 입이 다물렸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것처럼 손을 휘적거리던 전학생이 결국 뒤통수를 박박 긁었다.
“음, 잘 안 되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삐죽이던 전학생이 읏쌰, 하고 몸을 일으켰다.
“난 원래 이런 놈이야.”
카스가가 바닥을 보는 채로 말했다.
“지바에서도, 여기서도. 그냥 난 이런 놈이었던 거야.”
“…….”
“…미안.”
전학생의 주먹이 동그랗게 말렸다. 잠깐이지만 시마는 그가 카스가를 한 대 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전학생은 그저 주먹을 쥔 채 한동안 그렇게 서있을 뿐이었다. 전학생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고개를 젖히곤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전학생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눈가를 찡긋거렸다.
“그럼 바이바이.”
그러고는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팔을 휘적이고 있었지만 어깨가 축 내려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따라나서려던 시마는 카스가의 말에 멈추어 섰다.
“시마.”
그제야 시마는 자신이 아직 못다한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선 그는 카스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자신을 불러 세운 건지 들어보려고 기다렸다. 카스가는 막상 불러놓고 시마가 자신을 예상 외로 너무 똑바로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웠던지 눈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오늘 일은… 미안.”
고작 그런 말이나 하려고 부른 거였나. 시마는 기가 찼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마지막 부적을 꺼내 카스가에게 내밀었다.
“받아. 얌전히 주말내내 달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자기도 모르게 덧붙였다.
“샤워할 땐 화장실 문앞에 붙여놓던가.”
카스가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부적을 건네받았다. 한동안 손 안에서 부적을 만지작거리던 카스가가 물었다.
“이거… 효과가 뭐야?”
시마가 눈을 치뜨자 카스가는 우물쭈물했다.
“아니… 그냥.”
“부적이 다 액막이지 뭐겠냐. 너한테 붙은 나쁜 기운이 더 나쁜 걸 끌고 오는 걸 막아주는 거야.”
“네가 쓴 거야?”
“난 못쓴다고 아까 말했잖아.”
시마가 투덜거렸다.
“너, 본전에 누워있기 전에 뭐했는진 전혀 기억 안 나?”
“응….”
“넌 우리 아버지 오시면 잠깐 보여드려야겠다.”
두 사람은 잠깐 침묵했다. 밤바다의 거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토리이 너머에선 다시 풀벌레들이 울고 있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한밤의 소리였다.
“…우리랑 어울리는 거 힘들었어?”
시마가 물었다.
“모르겠어.”
카스가는 캄캄한 밤바다를 응시하며 말했다.
“여름방학 동안은 나한테 연락 한 번 없었잖아. 걔네들끼린 연락 주고받고 있던 거 방학 끝나고 학교에 돌아와서 알았어.”
카스가가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시마 넌 필요할 때 타이세이가 끼고 다녔잖아.”
“난 그냥 악세서리 같은 거야.”
시마가 말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당연하게 사용하는 역할인 거야, 나는.”
“그래도 부러웠어.”
카스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거라도 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전학생은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간 상태였다. 시마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전학생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다가 말했다.
“너, 나중에 저 녀석에게 다시 제대로 사과해.”
“…….”
“아, 정말. 신경쓰이게 하네.”
시마는 머리카락을 털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부적은 제대로 갖고 다녀야 할 텐데.”
“…부적?”
“그래, 저 녀석한테도 한 장 줬는데….”
카스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급히 주머니를 더듬거린 카스가가 그 안에서 꼬깃꼬깃한 부적을 꺼내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시마. 이거, 이부키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길한 기운이 시마의 척추를 훑고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새끼손가락이 홱 잡아당겨지는 느낌과 동시에 시마는 어느새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메시지 남겨주시면 가능한 한 신속히 전화드리겠습니다….
시마는 전화를 끊었다. 할아버지가 제때 전화를 받을 리 만무했지만 부재중 기록을 남겨놓고 며칠 뒤에 뒤늦은 답신을 받기엔 시간이 조금 촉박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처음이었고 시마는 이 사건이 어떤 전개로 뻗어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예로부터 신사와 관련된 사고는 대부분 할아버지가 처리해왔고, 지난 몇 년 간 신사에서 벌어진 말썽은 하잘것없는 종류였다. 몇 차례 통화 연결에 실패한 끝에, 시마는 어쩌면 이 일이 여태까지 그래왔듯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시마는 만약이라는 걸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가 부주의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싶었다.
시마가 할아버지에게 전화 거는 걸 그만두기로 결정했을 때 그 라인이 도착했다. 처음엔 한 통이었다. 시간 차를 두고 서너 통이 더 도착했다. 시마는 자신이 초대되어 있는 타이세이네 단체 대화방에서 온 라인임을 깨달았다. 그가 메시지를 확인하려는 순간 대화방이 미친 듯이 위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 띵동 ]
[ 띵동 ]
[ 띵동 ]
[ 띵동 ]
카스가가 수십 장의 사진을 실시간으로 찍어 대화방에 올리고 있었다. 로딩이 끝나지 않은 회색 사진들이 끝없이 전송되면서 알람이 너무 밀린 나머지 소리가 끊기고 진동만 요란하게 울려댔다. 잠시 후 메시지가 뚝 멈추고 대화방에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사진 옆에 붙은 숫자가 짧은 시간 차를 두고 전부 사라졌다.
시마는 수십 장의 사진을 거슬러 올라가던 도중 전화를 받았다.
“시마, 봤어?”
타이세이가 헐떡이며 물었다.
“보고 있어.”
시마는 사진을 확인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어렴풋한 하늘과 깜깜한 나무 형체들. 어딘가로 걷고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화면. 옆으로 넘기자 지붕이 나타났고 점점 가까워졌다. 미츠유비 신사였다. 풍경은 세전함을 지나친 뒤 뒤쪽으로 이동했다. 주변을 지나치는 동안 배전 지붕 아래로 와니구치의 희끄무레한 빛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은 굳게 닫힌 분합문 앞이었다. 손잡이를 중심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던 사진은 거기서 끊어져 있었다.
“시마….” 잔뜩 겁에 질린 타이세이가 물었다. “저거… 본전 문이지?”
“타이세이, 지금 어디야?”
“애, 애들이랑 시내….”
“오늘은 일찍 들어가라고 했잖아.”
“미안. 지금 들어가려고… 지금 들어갈게!”
“오늘은 가능하면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모두에게 전해줘.”
전화를 끊은 시마는 야쿠오도시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연못 샛길은 지독하게 어두웠다. 숲은 저녁 무렵만 되어도 금방 캄캄해진다. 노을 지는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가 서서히 저물어갔다. 시마가 연못 사이에 놓인 가교를 넘어갈 무렵 잉어떼가 산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퉁퉁한 물고기 떼가 일으킨 물살이 숲의 적요를 요동치며 뒤흔드는 듯했다. 이 숲에 무언가 들어왔다. 이 숲에 무언가 침입했다. 그것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초대하지 않았다. 우리가 초대하지 않았다.
석등롱이 늘어선 참도를 지나 미츠유비 쪽으로 내려가자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경내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시마는 바짝 곤두선 채 경내에 들어섰다. 본전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마는 문이 열려있는지 확인했다. 굳게 닫혀 있었다. 그는 분절문을 열었다. 안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있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홱 몸을 돌리고 야쿠오도시를 빼들자 상대 쪽이 펄쩍 뛰었다.
“우왓, 깜… 짝이야!”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눈앞의 상대를 확인한 시마가 야쿠오도시를 내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왜…?”
“갑자기 들이대구~ 엄청 놀랐다고, 정말이지.”
전학생이 투덜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아. 키가 비슷해서 착각했네. 분명 여기쯤이었는데.”
“당장 여기서 나가.”
“하? 누구 맘대로?”
“넌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잠… 어이! 이거 놔, 놓으라니까!”
전학생은 마구 몸부림치며 시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씩씩거리며 몸집을 부풀린 그가 소리쳤다.
“나는 카스가를 찾으러 왔단 말이야!”
시마가 멈칫했다.
“카스가? 너 그 녀석이랑 연락됐어?”
“엉? 아니, 아까 말이야. 카스가한테 라인을 엄청나게 받았거든. 너도 받은 거야? 그런데 난 전부 사진이더란 말이지. 에에, 뭐지? 하고 열어봤더니 여기잖아. 카스가, 분명 아깐 신사 근처에만 가도 무서워서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싫어했는데… 날도 어두워지고 있는데 갑자기 대체 무슨 일인가 싶고. 점점 걱정되는 거야. 그래서 전화해봤더니 전혀 받질 않고. 메일도 안 보고 라인 답장도 읽질 않아. 뭔가 받을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방금의 사진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낸 SOS인 걸 수도 있잖아. 가족 연락처 같은 건 모르니까 따로 연락할 수 없어. 경찰에 연락해 보니 실종이 아니라서 출동은 안 된대. 그렇다고 친구로서 가만있을 수도 없으니까 여기 온 거야.”
잠깐 말이 없던 시마가 물었다.
“너 카스가랑 원래부터 아는 사이야?”
전학생이 멀뚱멀뚱 시마를 쳐다봤다.
“아니. 왜?”
“넌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녀석을 친구라고 불러?”
“에, 너 엄청 빡빡한 스타일이구나.”
“지금 6시가 훨씬 넘었어. 보다시피 배전 근처에 켜진 등만 제외하면 여긴 암흑 그 자체야. 숲 한복판이라고. 그리고 넌 여기 온 지 하루도 안 됐어.”
“그래서?”
“너 혼자 여기서 사람 하나 찾는 게 가당키나 할 것 같아? 게다가 넌…,”
“그렇다고 모른 체 둘 순 없잖아!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지도 몰라.”
이부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있지, 나는 느껴져. 카스가한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것 같단 말이야. 카스가 녀석, 아까 엄청나게 겁먹었었어. 그런데 이렇게 깜깜해지고 있는데 혼자 여기 있는 거라면, 만약 그런 거라면, 난 여길 전부 뒤져볼 거야. 그리고 말이지, 아까 만났을 때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야… 여기가 그렇게 위험한 곳이라면 너야말로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야?”
“난….” 시마는 정직하게 대답할 뻔하고 말문이 막혔다. “나는 이 신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이야. 설령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더라도.”
“그래서 혼자서 카스가를 찾으러 온 거야?”
“그래.” 시마가 대답했다. “그리고 너도 내 책임에 포함되거든.”
“헤에.”
“알아들었으면 여기서 나가. 부탁이니까.”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명령조였다.
“싫어.”
“아니, 이건 좋다 싫다의 문제가 아니야. 너, 아까 본전에 들어갔었지? 물건 놓고 온 것도 너야?”
“왜?”
“왜 그걸 본전에 두고 온 거야?”
“본전 거니까.”
시마가 주머니에서 목상을 꺼냈다. 아! 하고 가리킨 전학생이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냐는 눈으로 멀뚱멀뚱 쳐다봤다.
“이건 본전 물건이 아니야.”
“엥? 그렇지만 카스가가….”
“카스가가 그렇게 말했어? 걘 본전 물건에 손도 안 댔어.”
“아니 아니 아니. 네가 뭘 몰라서 그래. 그 녀석, 억지로 본전에서 그걸 갖고 와야 했단 말이지. 그거 때문에 아까 엄청 신경쓰면서 걱정했다고.”
“이거 돌려놓을 장소 발견 못 했지? 그래서 아무 데나 두고 간 거잖아.”
전학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마는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역 앞 골동품 가게에서 파는 목상이야.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제품이라고. 봐.”
시마는 목상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래쪽에 네모난 얼룩 보이지? 택이 붙어있던 자리야. 카스가가 뭐라고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사실대로 털어놓진 않았겠지. 넌 속은 거야. 대체 왜 너더러 이걸 본전에 두고 오라고 했는지 모르겠네.”
전학생이 목상을 탁 낚아챘다. 그러고는 한동안 말없이 손안에서 목상을 굴려댔다. 그걸 보고 있자니 시마는 묘하게 기분이 불편했다.
“굳이 네가 카스가를 찾을 필요는 없어. 더 늦기 전에 돌아가.”
“…….”
“어서.”
“…뭔가 팟 오지 않아.”
고개를 번쩍 들고 전학생이 말했다.
“아니, 감이 와. 그 녀석은 거짓말 안 했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마가 뒤돌아서자 전학생이 따라붙었다.
“어이, 영능력자 씨. 뭔가 느껴지는 건 따로 없는 거야?”
“뭐가.”
“숨겨진 사연이라던가. 이거 만졌을 때 팟 하고 눈앞에 카스가 시점으로 회상 장면이 지나간다던가.”
“없어. 이게 무슨 영화 같은 건 줄 알아? 제기랄, 완전히 어두워졌잖아.”
시마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홱 돌렸다.
“그보다 왜 은근슬쩍 따라오는 거야? 난 돌아가라고 말했어.”
“에. 토리이까지 가는 길 너무 어둡다고. 혼자서 돌아가는 거 절대로 무리.”
“아니, 전혀 쫄고 있는 표정이 아니잖아. 돌아가. 돌아가라고. 집에서 부모님이 걱정 안 하시냐?”
“우리 할머니는 늦은 귀가 전혀 간섭 안 하는 스타일~”
전학생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다 두 손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손을 떼어냈을 땐 전혀 다른 표정이 되어있었다. 입매를 비틀고 미소를 짓는 씁쓸한 얼굴. 시마는 그 예고 없는 변화가 당혹스러워 받아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대로 오해한 채 돌아가긴 싫어. 직접 만나서 제대로 얘기를 듣고 싶어.”
전학생이 덥석 시마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 자. 같이 찾아보자고. 솔직히 한 명보단 둘이 낫잖아?”
시마가 대답하지 않자 전학생은 기웃거리며 눈을 마주치려고 들었다. 결국 시마는 대놓고 짜증을 냈다.
“아, 정말 성가시네. 알겠으니까 좀 떨어져.”
전학생의 입꼬리가 활짝 올라갔다. 시마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구시렁거렸다.
“겁이 없는 건지 바보인 건지.”
어느새 전학생은 휴대폰을 꺼내 라인 대화방을 빠르게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먼 곳에서부터 숲이 쏴아아 흔들리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대화방 맨 꼭대기에 도달하자 전학생은 최초 사진부터 하나씩 넘기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본전 서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가리켰다.
“시작은 저기였어. 맞지? 그리고 저 길을 따라서 배전 주변을 돌다가… 여기, 본전 앞까지.”
“본전은 아까 내가 확인했어. 비어 있었어.”
“그럼 돌아간 걸까? 다시 저 길을 통해서?”
“알 수 없지만….” 시마는 본전 뒤쪽으로 이어지는 그 좁다란 길을 곁눈질했다. 주택가로 이어지는 그 산책로는 오후 4시쯤엔 좌우로 나무가 드리운 무척이나 운치 있는 장소로 통했지만 밤에는 등불 하나 없이 캄캄해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오후 7시가 훌쩍 넘은 지금 길목은 배전 양쪽으로 세워진 등에 의해 어느 정도의 시야가 겨우 확보되어 있을 뿐 불과 몇 미터 너머는 완전한 암흑에 싸여 있었다. “가급적 들어가고 싶지 않다.”
시마는 전학생을 돌아보았다.
“너 카스가랑 아직도 연락 안 돼?”
“응. 내가 보낸 라인 읽지도 않았어.”
“내 것도야. 제길, 전화도 안 받아.”
“어이, 잠깐만.”
전학생이 시마의 휴대폰을 잡아내렸다. 통화연결음이 멀어지자마자 경내의 조용함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전학생이 점점 곤두섰다. 두 눈이 긴장으로 한껏 조여져 있었다. 시마는 천천히 그 시선을 따라갔다. 산책로 너머의 어둠속에 무언가 있었다. 희미하게,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두 사람 모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벨 소리잖아.”
시마는 간신히 숨을 내쉬듯 그 말을 뱉어냈다.
9
칸바라 야요이는 오늘 일진이 장난 아니게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는 회사 밑에서 꼬박 2년 반을 일했다. 그 정도면 밥 먹듯 직장을 바꿔대는 이 바닥에서 제법 오래 살아남은 편이다.
원한다면 그는 이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전에 회사가 먼저 선수를 치지만 않았더라면.
졸업하자마자 자길 거둬준 선배는 연차가 쌓일수록 만사에 무심해지더니 마침내는 칸바라와 했던 약속까지 잊어버린 듯했다. 철밥통이라며? 씩씩거리며 운전대를 붙잡은 그는 신호에 걸리자마자 결국 분에 못 이겨 양손으로 핸들을 내리쳤다.
“제길!”
집에 가자마자 맥주를 들이켜던가 해야지. 아니, 그전에 다 관두고 싶다. 이미 관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늘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해고를 통보한 젊은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서 미칠 것 같았다.
애석하게도 그는 화가 난다고 해서 과속운전을 하거나 화풀이를 찾아야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가 상식을 갖춘 시민이라서가 아니라 그만한 일을 직접적으로 벌일 담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위험에 처하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당장에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리를 뜰 준비부터 하는 안전주의자였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선 서로가 감수해야 할 부분이 있고 그것을 자신의 손해로 취급하지도 않는 법이다. 하지만 죽어도 손해 보기 싫어하는 부류들은 당장 감수해야 할 게 끔찍하게 두려운 나머지 언젠가 치르게 될 대가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거나 혹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칸바라는 자신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잘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설령 알았다고 할지라도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어떤 식으로든 손해 보며 사는 것만큼 바보 같은 게 없기 때문이다.
파란불과 함께 출발하려던 칸바라는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교복을 입은 세 학생이 눈짓으로 사과하며 허겁지겁 길을 건넜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다. 저 녀석들은 방금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뻔뻔스럽게 길을 건너려다 자신의 차에 치일 뻔했다!
장난해? 눈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그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쭉 빼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황급히 역사로 뛰어가는 세 학생들의 등 뒤로 무언가 천천히 온몸을 비틀면서 이동하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칸바라는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걷고 있었다. 사람처럼 생겼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걷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그런 흉내를 내는 것에 불과했다. 반투명하고 캄캄했으며 형체가 뚜렷하지 않아 끝없이 몸을 비틀면서 이글이글 주변 풍경을 뭉개고 있었다. 그 주변은 물에 번진 것처럼 탁하고 흐릿했다. 이때 다리 위로 전철이 들어왔다. 그러자 그것은 잠깐 멈추어 서서 다리 위쪽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것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다가, 어느새 다리 위로 이동해 있었다.
칸바라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그것이 전철 차량 한쪽에 달라붙는 걸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는 정신을 차렸다. 전철이 막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칸바라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그는 정신없이 주머니를 뒤지다가 백미러를 보고 뒷좌석에 실어놓은 박스의 존재를 깨달았다. 등 뒤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황급히 뒷좌석으로 몸을 틀고 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10
산책로는 끔찍할 만큼 조용하고 캄캄했다. 두 사람은 귀를 기울였지만 휴대폰 벨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어둠 한가운데에 들어서자 시마는 걷는 속도를 늦췄다.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고 발밑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전학생은 시마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는 큰소리로 “카스가아아아!”하고 질렀다가 시마의 면박을 받곤 그 미련한 짓을 그만두었다.
시마는 어느 정도 긴장한 상태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었지만 벌써부터 손발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전학생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제지하지 않은 건 침묵 속에 있는 것보단 누군가 실없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는 편이 긴장을 푸는데 훨씬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주택가.”
“헤에. 그럼 카스가는 집으로 돌아간 걸까?”
“모르지.”
“전화돼?”
시마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니, 안 돼.”
“차라리 집으로 무사히 돌아간 거라면 좋겠다. 여기 좀 으스스하지 않아? 얼마나 더 걸어야 돼?”
“몰라.”
“에에. 모른다고?”
“어두워서 전혀 안 보이니까.”
풀벌레 우는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변은 조용했고 이따금 희미한 바람이 불면서 나뭇가지를 스산하게 흔들었다. 전학생이 입을 다물자 제법 긴 침묵이 이어졌다. 고요 속에서 어둠이 더욱 생경하게 느껴졌다. 산책로의 나무들은 키가 너무 커서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카스가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응?”
“아니, 그 녀석 어쨌든 뭔가 말했을 거 아냐.”
“아~”
전학생이 짧게 탄식했다.
“타이세이네 얘기. 방학식 전날 싸운 거랑, 그래서 방학 중에 그 녀석들한테 이지메 당한 얘기 해줬어.”
“이지메?”
“엉. 오늘도 그 녀석들 말이야, 비품 창고 뒤쪽에서 카스가를 위협하고 있었다구!”
“걔네가 좀 막 나가는 구석이 있긴 해도 그런 짓을 할 녀석들은 아닌데.”
시마는 생각에 잠겼다.
“오해 아냐?”
“에. 그치만 카스가가 그랬는걸, 이지메 당하고 있다고. 아! 처음엔 말이 좀 달랐지만? 삥 뜯기고 있던 거냐고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자긴 오히려 타이세이네랑 친구라면서.”
“그런데 갑자기 말을 바꿨다?”
“아니. 그치만 보통 남자애들은 그렇잖아? 본인이 이지메 당하고 있다고 바로 인정하는 녀석들은 드물잖아.”
시마는 고민했다.
“처음에 했던 말이 진짜일 거야. 그 녀석, 타이세이네 중 하나거든.”
“헤에. 그렇구나, 제대로 ‘타이세이네’로 취급해주는구나.”
전학생이 말했다.
“그런데 말야, 카스가는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았어.”
시마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방학식 날의 사건을 떠올렸다. 학교가 일찍 끝나고 간만에 다섯 명이 뭉친 날이었다. 타이세이, 렌지, 와타루. 그리고 시마와 카스가. 그들은 전철을 타고 시가지로 건너가서 저녁까지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배고파서 저녁 메뉴를 정하고 있을 때 카스가가 갑자기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또 이런 식이네. 여과 없이 비꼬는 어조에 모두가 절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카스가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더듬거렸다. 나만 또 혼자 따로 걷고 있잖아.
그랬던가, 라고 그 순간 시마는 생각했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지금도 우리는 둘씩 맞춰서 걷고 있지 않나? 그러나 카스가의 그 말은 ‘남자답지 않은 말’이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뭐냐, 카스가. 기집애냐? 무안한 분위기를 짓누르기 위해 타이세이가 습관처럼 낄낄거렸고, 그러자 렌지와 와타루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네 머리로 이해가 되긴 하냐?’
그때 시마는 웃었던가?
‘모르겠지? 넌 그딴 건 전혀 신경 안 쓰니까.’
시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것도 이지메라고 할 수 있을까.”
시마는 방학 동안 세 사람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타이세이네는 방학이 되면 시마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들과 어울린 지난 몇 년 간 그건 당연한 일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세 사람이 지난 방학 내내 카스가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얘길 들었을 때, 내색하지 않았지만 시마는 놀랐다.
“카스가는 방학 내내 자기가 이지메 당했다고 말했어. 뭐, 만나서 때리고 그런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봐, 이지메란 건 결국 그런 거잖아? 무시하거나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하면서 외롭게 하는 거잖아. 나, 카스가가 자기 기분에 대해서만큼은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그 녀석 그런 얘기를 할 때 엄청 쓸쓸해 보였거든. 나 그런 기분 알아.”
아, 또 나왔다. 저 목소리. 뒤돌아 있어도 시마는 전학생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싸운 거냐?”
“엉?”
“너, 타이세이 녀석들 두들겨 팼다며. 그거, 진짜야?”
“아~…. 응.”
“너 오지랖이 너무 넓은 거 아냐? 그래봤자 남의 일이라고.”
“아니, 그러는 너도 카스가를 찾으려고 여기 왔잖아?!”
“아까 말했지만 나는…,”
“네에, 네. 변명은 스톱.”
전학생이 말했다.
“책임이니 뭐니 해도 어쨌든 너도 걱정이 되니까 여기 온 거잖아. 타이세이네가 그 녀석을 찾으러 여기 오진 않을 테니까… 나도 말야, 똑같은 마음이야. 너도 정말로 카스가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 아냐. 뭔가 사정이 있다고 믿고 싶은 거잖아. 그러니까 그 녀석을 내버려 둘 수 없는 거잖아.”
가만히 듣던 시마가 말했다.
“너 그냥 바보인 줄 알았더니 엄청난 바보네.”
“뭣….”
“난 그 녀석을 믿어서 여기 온 게 아니야. 당연한 거 아냐? 난 그 녀석이 여기서 엉뚱한 짓을 할까 봐 온 거야. 경내를 지키는 목적 외에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어.”
“에. 차갑네.”
“애초에 보통의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이에 부탁 좀 받았다고 본전을 들락거리는 짓 같은 거 안 한다고. 경내에서 뭘 하면 안 된다거나 하는 상식은 없다 치더라도 보통은 천벌이 무서워서라도 그런 부탁은 거절하지 않냐?”
“괜찮아, 괜찮아. 들어갈 때랑 나올 때 제대로 인사드렸으니까. 그런 걸로 천벌받을 거였으면 난 진작 받았을걸? 저번에도 말이야, 이사가기 전날이었는데. 같은 반 녀석들한테 부탁받아서 말이지, 대신 물건 돌려놓고 온 적 있는걸.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 완전 무사하다고?”
“하?”
“아니, 그치만 걔네들… 내 앞에서 울었단 말이지. 훌쩍, 훌쩍하면서. 그걸 보니까 아, 어쩔 수 없네~ 같은 생각이 들잖아.”
시마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두 사람이 발걸음을 멈췄다. 오른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학생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빼들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곧이어 풀을 헤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 가까웠다. 길게 끌렸다가 규칙적으로 뚝 멈추어 섰다. 질질 끌리는 소리. 이건 바람이 만드는 게 아니었다. 풀대를 꺾고 움직이는 무언가가 만드는 소리였다.
점점 감각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면서 뱃속 깊은 곳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시마는 평소와는 다른 감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저건 사람이 아니다. 시마는 생각했다. 저건 카스가가 아니다. 허공에서 솟아나 갑자기 짜 맞춰지는 뼛조각처럼 단단하고 형태를 갖춘 확신이 그를 사로잡았다. 신기神氣였다.
그때, 소리가 멈췄다.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쫙 돋아났다. 시마는 깨달았다.
눈치챘다.
두 사람이 대화를 멈추고 귀 기울이는 것을 저것이 눈치챈 것이다!
긴 침묵이 흘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캄캄한 산책로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두 사람을 눈치챘다.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이 끝없는 어둠 속에.
[ 띵동 ]
그 소리가 무엇인지 깨닫기까진 시간이 좀 필요했다.
시마는 멍하니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발신자 : 카스가 (사진)
다음 순간 소리가 들이닥쳤다.
[ 띵동 ]
[ 띵동 ]
[ 띵동 ]
[ 띵동 ]
[ 띵동 ]
고개를 들었을 땐 흙냄새가 코앞에 닥쳐 있었다. 그게… 서 있었다. 두 사람 앞에.
확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달리는 중이었다. 전학생이었다. 전학생이 시마의 손을 잡아채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흙냄새가 멀어졌다. 헐떡이는 소리 때문에 그것이 쫓아오는지 쫓아오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전학생은 놀랍도록 빨랐다. 그는 바람처럼 달리면서 시마를 잡아끌었고 두 사람은 거의 어둠 속에서 퉁겨져 나오듯 산책로를 빠져나와 본전 쪽으로 내달렸다. 시마는 뒤돌아 산책로 입구를 확인했지만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학생이 헐떡이며 불렀다.
“시마.”
시마는 한 박자 늦게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거 본전 안이네.”
전학생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카스가에게 온 사진 수십 장이 눈에 들어왔다. 캄캄한 본전 안, 불단 앞에 걸린 그림 속 청년이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평온하기보다 슬퍼 보이고, 절망했다기보단 인내하는 듯한 얼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하던 카메라 앵글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다 추락했다.
“본전 안이네, 그렇지?”
시마는 대답 대신 시선을 교환했다.
“카스가!”
전학생이 거칠게 문을 열고 본전 안으로 뛰어들었다. 시마가 그 뒤를 따랐다. 문지방을 넘던 시마는 바깥쪽 문고리에 진흙이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
“카스가, 어이! 눈을 떠. 정신 차려!”
전학생이 정신을 잃은 카스가를 마구 흔들었다. 불단 아래에 휴대폰이 떨어져 있었다. 카스가가 움찔하더니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전학생을 알아보지 못하고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 그 뒤에 서 있는 시마를 발견하곤 겁에 질렸다.
“시마! 나는….”
시마는 본전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냈다.
“카스가, 너 대체 경내로 뭘 데리고 들어온 거냐?”
문틈 위에 부적을 붙인 시마가 시험 삼아 문을 잡아 흔들었다. 낡아빠진 경첩이 요란하게 덜컹거렸다. 배전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빛이 본전 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시마는 두 사람에게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풀벌레 우는소리가 들려왔다.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시마가 조용히 말했다.
“영감을 개발했다며?”
“…….”
“뭘 했어?”
“…아무것, 도.”
카스가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글쎄, 무슨 일인지 난 잘 모르겠는데.”
“시마.”
그의 이름을 부른 전학생이 바짝 곤두섰다.
바깥에서 무언가가 발을 질질 끌며 움직이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무엇인진 몰라도 바깥의 그것이 그들을 찾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시마는 자기도 모르게 야쿠오도시를 왼손으로 쥐었다. 발소리는 비틀거리며 본전 옆을 지나 배전 쪽으로 멀어져 갔다.
“방학 동안 네가 타이세이네한테 귀신이 보이는 척하고 다녔단 얘기 들었어.”
그 말에 전학생이 고개를 돌려 카스가를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문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시마는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시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카스가, 너 이 마을이 어떤 곳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네. 이곳은 토지신이 앉아있는 땅이야. 신이 깃든 땅엔 신만 살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냐?”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어. 난 영감 같은 거 없으니까 그깟 거 몇 번 거짓말한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 생각 안 했어. 너도… 너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살았잖아.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잖아. 너도 사실은 영감 같은 거 없으니까.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시마는 잠깐 눈에 힘이 풀렸다. 그랬다, 카스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다.
“그래… 난 우리 할아버지와는 달라. 난 죽은 사람이랑 꿈속에서 대화할 수 없고 유령을 보지도 않아. 부적을 쓰는 법도 배우지 않았어.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아. 설령 할 수 있는 사람이어도, 평생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믿을 거야. 왜냐고? ‘그것들’이 들을 테니까.”
야쿠오도시를 쥔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보이는 척하면 언젠가 보이게 돼.”
시마가 나지막이 죄를 고백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척하면 언젠가 보이지 않게 돼.”
공기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영감을 개발한다고? 틀렸어. 그건 눈을 뜨거나 감는 것과 같아. 넌 너도 모르게 뜬눈으로 무언가한테 말을 걸어버린 거야. 그게 너를 따라오도록 허락한 거야. 고작 본전에서 무언가를 훔친 척하려고 신리神籬가 될만한 걸 경내로 가지고 들어온 거야. 그걸 어떤 바보한테 두고 와달라는 터무니없는 부탁까지 해가면서.”
배전 쪽에서 희미하게 사사사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르고 경쾌한 소리였다. 방울소리였다. 와니구치가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밧줄을 잡고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어느새 풀벌레들이 연주를 멈추었다. 침묵은 경내에 납작하게 엎어졌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스가는 울음을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질질 끌리는 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이 배전을 돌아 본전으로 오고 있었다. 문 앞에 멈추어 섰다.
길고 긴 실루엣이었다. 그것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창호지 너머로 새까만 그림자가 일렁였다. 마치 사람 같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것이 손을 들어 올렸다. 시마는 야쿠오도시를 들어 올리고 숨을 죽였다. 덜컹. 문이 흔들렸다. 덜컹. …. 덜컹덜컹덜컹덜컹!
카스가가 나지막이 비명을 질렀다. 벌어진 문짝 틈으로 새하얀 손이 쑥 들어왔다. 손가락마다 진흙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것이 더듬거리며 문고리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시마가 붙여둔 부적이 있었다. 그것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며 바깥으로 황급히 손을 빼냈다. 쾅!! 화가 난 것처럼 문에 주먹질을 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고저 없이 바람에 스러지듯 가느다란 목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려왔다.
“타이세이….”
벨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입으로 내고 있었다.
“타이세이, 내 라인 읽었어? 렌지는 벌써 난리야.”
“와타루가 소름 돋는대.”
“방금 보낸 메시지는 내가 보낸 게 아니야.”
“사진 무서웠어?”
“타이세이 라인 좀 봐줘.”
“오늘 셋이 어디 가?”
“타이세이, 내가 보낸 사진 봤어?”
“내가 보낸 사진.”
“사진.”
그것은 중얼중얼하면서 점점 카스가의 목소리에 가까워졌다. 마침내 그것은 만족한 듯 기쁘게 한숨 쉬었다. 카스가아아아아.
“시마가 너 거짓말쟁이인 거 다 알았대.”
카스가가 창백한 얼굴로 입 벌리는 순간 시마가 황급히 마이를 벗었다. 카스가의 얼굴에 마이를 덮어 씌우고 전학생을 바라보자 전학생은 눈빛만으로 시마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카스가를 엎드리게 한 뒤 더는 듣지 못하도록 말을 걸었다. 카스가, 이따 여기서 나가면 꼬치 집에 가자. 나 꼬치 좋아하거든. 주변에 괜찮은 꼬치 집 좀 알려줘. 카스가, 듣고 있지?
카스가가 듣고 있는지 기절한 건진 알 수 없었지만 시마는 어떻게든 이 사태를 헤쳐나가야 했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고 여전히 손발이 차가웠지만 무언가 하겠다고 결심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자 반 년 전에 할아버지로부터 받아놓은 불경이 떠올랐다. 잠들기 힘들 때마다 읊으라고 보내주신 거였다. 지금 이 순간에 효과를 발휘할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방도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마는 휴대폰을 앞에 두고 메모장을 열었다. 넥타이가 자꾸 흘러내려 액정을 가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어깨너머로 넘겨버린 뒤 교복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고는 야쿠오도시를 바닥에 두들기면서 조용히 불경을 읽기 시작했다. 마음은 침착한데도 어째선지 손은 식은땀으로 미끈거렸다. 그도 떨고 있었다.
아이신수我以神手 사등방편四等方便 내가 이제 신의 손 네 가지 방편 쓰되
신승정결身乘淨潔 반월풍륜半月風輪 몸을 정결히 하고 마음을 허공과 같이 하여
소여무명燒汝無明 소적지신所積之身 빛 없이 쌓여 이루어진 너의 몸을 태우리라
야쿠오도시에서 탁한 소리가 났다. 지나치게 탁한 나머지 홈에 천이 끼워져 있는 것처럼 먹먹한 소리였다. 마치 무언가가 틀어막는 듯… 그것이 문을 박박 긁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마가 멈추지 않고 불경을 읊으면서 뚫어져라 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순간 시마의 두 눈은 불경한 것이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눈이었다. 통제하는 눈이었다. 지배하는 눈이었다. 시마의 안에서 무언가 대신해 말하고 있었다.
차칙천상且勅天上 공중지하空中地下 또한 천상 허공 땅속 모든 세계 신칙하여
소유일체所有一切 작제난장作諸難障 있는 바 모든 장애와 어려움을 없애리니
불선심자不善心者 개래호궤皆來胡跪 착하지 않은 자여, 모두 와서 무릎 꿇으라
야쿠오도시의 소리가 탁해졌다가 조금씩 깨끗해졌다를 반복하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시마는 야쿠오도시로 바닥을 두들기며 정신이 하나로 모이고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어느새 그는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 그는 문을 감시하는 육신인 동시에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는 영혼이었다. 야쿠오도시의 소리가 점점 뚜렷해지면서 마침내 평소와 같이 맑은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쩡, 하고 공기가 갈라지면서 어떤 가냘픈 서늘함이 허공을 쪼갰다. 모든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마가 천천히 일어나자 전학생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전학생은 카스가를 덮고 있는 마이를 걷어내곤 그를 부축하면서 시마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긴 거야?”
카스가는 눈물 콧물로 얼굴이 온통 엉망이었다. 시마는 야쿠오도시를 쥐고 있던 손을 쥐었다 펼쳤다 해보았다. 저릿저릿한 와중에도 식은땀 때문에 서늘하고 축축했다. 그는 자신이 야쿠오도시를 왼손으로 사용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 이제 경내에 없어.”
시마는 본전 문 안쪽에 붙여둔 부적을 하나씩 떼어냈다. 문고리에 붙인 부적은 한쪽이 온통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그는 부적을 반으로 찢어서 주머니에 집어넣은 후 두 사람을 데리고 본전을 나왔다. 문을 닫기 전 문틈 사이로 보이는 불단에 작게 감사 인사를 올렸는데, 시마가 추측하기로 전학생도 비슷한 인사를 올렸던 것 같다.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리이가 보이자 다리에 힘이 빠진 카스가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기둥에 등을 대고 캄캄한 밤바다를 바라보는 표정이 멍했다. 시마와 전학생은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카스가가 두려운 눈으로 전학생을 올려다보았다.
“이부키….”
전학생은 대꾸하는 대신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미안.”
마개처럼 뽑혀져 나간 말을 뱉으며 카스가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네가 믿어줘서, 그런데, 그런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서…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리려고 했는데, 벌써 계단 올라가버려서… 그래서….”
카스가는 서럽게 울었다.
“그래서 도로 가지고 오려고 했어, 그런데, 산책로에서부터 기억이 안 나, 그래도 나, 가지고 돌아오려고 했는데….”
“목상은 내가 갖고 나왔어.”
시마가 말했다.
카스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복받쳐오르는 울음 때문에 딸꾹질을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어. 그냥, 흉내만 낸 거니까, 그러니까….”
카스가의 고백을 듣는 내내 전학생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카스가의 울음이 거세질수록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카스가가 침을 삼키면서 불규칙적으로 숨을 뱉어냈다. 전학생이 그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카스가.”
“…응.”
다음 말이 이어지기까지 틈이 있었다. 음, 하고 말을 끌던 전학생이 물었다.
“뭔가 다른 사정이 있던 거지?”
시마는 전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느새 전학생은 답을 구하는 눈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면에선 굉장히 절박해보였다. 시마는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그러니까 말이야. 뭔가 다른 사정이 있던 거지? 너, 나쁜 마음 먹고 나한테 그런 건 아니었잖아. 응?”
“…….”
전학생의 입매가 고통스럽게 올라갔다.
“카스가, 뭔가 변명이라도 해 봐. 방학 동안 이지메 당한 거 진짜로 거짓말이야?”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맞다, 맞다. 아까 말한대로 꼬치 집 가자. 이 동네 맛집 소개해줘. 아, 뭣하면 얘도 데려갈까? 아까 이 자식 엄청나게 무서웠지?! 불경 중얼중얼 외면서 이렇게…,”
카스가가 천천히 고개 숙이자 전학생의 입이 다물렸다.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것처럼 손을 휘적거리던 전학생이 결국 뒤통수를 박박 긁었다.
“음, 잘 안 되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삐죽이던 전학생이 읏쌰, 하고 몸을 일으켰다.
“난 원래 이런 놈이야.”
카스가가 바닥을 보는 채로 말했다.
“지바에서도, 여기서도. 그냥 난 이런 놈이었던 거야.”
“…….”
“…미안.”
전학생의 주먹이 동그랗게 말렸다. 잠깐이지만 시마는 그가 카스가를 한 대 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전학생은 그저 주먹을 쥔 채 한동안 그렇게 서있을 뿐이었다. 전학생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 고개를 젖히곤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전학생이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눈가를 찡긋거렸다.
“그럼 바이바이.”
그러고는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팔을 휘적이고 있었지만 어깨가 축 내려가 있었다. 저도 모르게 따라나서려던 시마는 카스가의 말에 멈추어 섰다.
“시마.”
그제야 시마는 자신이 아직 못다한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선 그는 카스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자신을 불러 세운 건지 들어보려고 기다렸다. 카스가는 막상 불러놓고 시마가 자신을 예상 외로 너무 똑바로 쳐다보는 게 부담스러웠던지 눈을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오늘 일은… 미안.”
고작 그런 말이나 하려고 부른 거였나. 시마는 기가 찼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마지막 부적을 꺼내 카스가에게 내밀었다.
“받아. 얌전히 주말내내 달고 다니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자기도 모르게 덧붙였다.
“샤워할 땐 화장실 문앞에 붙여놓던가.”
카스가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부적을 건네받았다. 한동안 손 안에서 부적을 만지작거리던 카스가가 물었다.
“이거… 효과가 뭐야?”
시마가 눈을 치뜨자 카스가는 우물쭈물했다.
“아니… 그냥.”
“부적이 다 액막이지 뭐겠냐. 너한테 붙은 나쁜 기운이 더 나쁜 걸 끌고 오는 걸 막아주는 거야.”
“네가 쓴 거야?”
“난 못쓴다고 아까 말했잖아.”
시마가 투덜거렸다.
“너, 본전에 누워있기 전에 뭐했는진 전혀 기억 안 나?”
“응….”
“넌 우리 아버지 오시면 잠깐 보여드려야겠다.”
두 사람은 잠깐 침묵했다. 밤바다의 거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토리이 너머에선 다시 풀벌레들이 울고 있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한밤의 소리였다.
“…우리랑 어울리는 거 힘들었어?”
시마가 물었다.
“모르겠어.”
카스가는 캄캄한 밤바다를 응시하며 말했다.
“여름방학 동안은 나한테 연락 한 번 없었잖아. 걔네들끼린 연락 주고받고 있던 거 방학 끝나고 학교에 돌아와서 알았어.”
카스가가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시마 넌 필요할 때 타이세이가 끼고 다녔잖아.”
“난 그냥 악세서리 같은 거야.”
시마가 말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당연하게 사용하는 역할인 거야, 나는.”
“그래도 부러웠어.”
카스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거라도 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전학생은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간 상태였다. 시마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전학생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다가 말했다.
“너, 나중에 저 녀석에게 다시 제대로 사과해.”
“…….”
“아, 정말. 신경쓰이게 하네.”
시마는 머리카락을 털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건 몰라도 부적은 제대로 갖고 다녀야 할 텐데.”
“…부적?”
“그래, 저 녀석한테도 한 장 줬는데….”
카스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급히 주머니를 더듬거린 카스가가 그 안에서 꼬깃꼬깃한 부적을 꺼내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시마. 이거, 이부키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길한 기운이 시마의 척추를 훑고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새끼손가락이 홱 잡아당겨지는 느낌과 동시에 시마는 어느새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