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가타리 3»
시마이부 오컬트 AU «신리神籬 어지럽히기»
6
시마는 서재 서랍을 열었다. 먼지가 쌓여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물건들은 비교적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각종 도장과 직사각형의 넓은 인주, 기한이 지난 자질구레한 서류 같은 걸 손으로 밀치며 뒤적이고 있으니 넷째가 기웃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카즈미 형, 뭐 찾아?”
“부적. 지난 해에 다 썼던가?”
“할아버지 건 몇 장 남아있을 걸?”
넷째는 시마를 슬쩍 밀치면서 서랍 깊은 곳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냈다. 시마가 열어보니 누렇게 변색된 부적 서너 장이 들어있었다. 얼추 그 위에 쓴 글자를 가늠해본 시마는 부적을 전부 꺼내서 교복 마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거면 되겠네. 고맙다.”
“집에 뭐가 왔어? 난 잘 모르겠는데….”
“아니, 따로 쓸데가 있어.”
“그럼 부적은 이제 다 쓴 거야? 아빠 돌아오면 새로 써달라고 해야겠네.”
“다음 주에 오시니까 그때 부탁해봐.”
불안했던 건지 넷째는 신발장 앞까지 따라 내려왔다.
“나도 따라갈까?”
시마는 신발을 신었다.
“됐어. 유우키는?”
“친구 집. 마사미 형은 오늘 부활동 때문에 늦는대.”
“알아. 걔 심부름 가는 거야.”
“에, 마사미 형 또 이상한 꿈 꿨구나. 이번엔 어느 신사야?”
“미츠유비. 금방 돌아올게.”
시마가 부적을 챙겨 연못 쪽 샛길로 빠지고 있을 무렵, 이부키는 계단을 전부 올라가 토리이를 막 지나친 참이었다. 뒤돌아보니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까마득한 계단 아래서 카스가가 이부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부키는 손을 한 번 크게 흔들어준 뒤 신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숲이 울창해서 경내는 바람이 잘 불지 않고 무척 고요했다. 배전도 작은 규모였는데, 그래서인지 밧줄도 하나만 내려와 있었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긴 하는 듯 세전함 입구가 반들반들하게 손때를 탄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밧줄 끝에 큰 방울인 와니구치鰐口가 양쪽으로 한 쌍을 이루며 매달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처마에 가려져 그늘져 있긴 했지만 아름다운 방울이었다. 이부키가 밧줄을 붙잡고 와니구치를 흔들자 짤랑짤랑 맑은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여긴 운치가 좋은 곳이었다.
이부키는 두 손을 모아 짝짝 박수를 치곤 신사의 주인에게 인사를 올린 뒤 가져온 목상을 만지작거리며 배전을 빠져나왔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석등롱 몇 개가 규칙성 없이 덩그러니 세워진 숲길이 나왔다. 샛길로 빠지는 길목인 듯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석등롱을 더 구경할 수 있을 듯했으나 본전으로 가는 길은 아닌 것 같았다. 이부키는 가던 길을 돌아와서 배전 뒤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별채처럼 딸려 있는 건물 한 채가 나왔다. 본전이었다.
본전은 배전보다 살짝 경사진 곳에 지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배전과 거의 비슷한 크기였지만 상대적으로 지붕이 높아보였다. 문이 슬쩍 열려 있는 걸 확인한 이부키는 창호지를 바른 분합문을 조심스레 밀고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본전은 생각보다 어두침침하지 않았다. 얇은 창호지를 뚫고 햇빛이 새어 들어와 본전 안쪽에 놓인 불단이 고요 속에서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부키는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온 뒤 다시 한 번 두 손을 모아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마음이 무척 평온해졌다.
불단 좌우로는 길고 넓은 상이 펼쳐져 있었다. 위쪽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이부키는 본래의 목적도 잊어버리곤 불단 앞으로 다가서서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부처일까? 부처는 아닌 것 같기도. 그럼 누구의 얼굴? 평온하기보다 슬퍼 보이고, 절망했다기보단 인내하는 듯한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아서 기도를 올리는 그림 속 청년은 쓸쓸하게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거 혹시 기사님이 말해준 그 히어로 장남?’
콰득,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유심히 그림을 뜯어보던 이부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풀을 밟고 서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뚝 끊어졌다. 갑자기 오감이 곤두섰다. 이부키는 바짝 긴장한 채로 소리가 난 쪽을 응시했다. 창호지 너머에서 분명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까마귀가 울면서 날아올랐다. 침묵이 계속됐다. 햇빛이 일렁이며 본전 안으로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이부키는 귀를 기울였지만 더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근대던 심장도 어느새 차분하게 맥박치고 있었다. 그때 이부키는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떠올렸다.
‘맞다, 잊어버릴 뻔했네.’
그는 불단을 슥 훑어보면서 물건이 빠져나왔을 법한 공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딱히 빈 곳이 없었다. 고민하던 이부키는 “어딘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여기 두고 갈게요. 미안합니다~”하고 불단 양쪽으로 펼쳐진 상 위에 목상을 얹어두었다. 그러고는 “카스가를 대신해서 사과드릴게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부디 용서해주세요. 천벌이 떨어진다면 타이세이 녀석들에게 부탁드립니다.”하고 인사를 드린 뒤 밖으로 나왔다.
이부키가 본전 문을 조심조심 닫고 있을 때, 시마는 연못 위쪽으로 뻗은 샛길을 따라 석등롱이 세워진 참도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이끼 낀 석등롱들이 드문드문해질 무렵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미츠유비 신사의 본전 지붕이 어렴풋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시마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깊은 짜증을 느끼며 샛길을 빠져나왔다.
시마는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했지만 실제로 그러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건 상식이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쪽이 어느 정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닐까? 게다가 시마는 사람을 잘못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첫인상이 나쁘면 보통은 다 나빴다.
본전을 떠나려는 가쿠란 차림의 전학생을 시마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순간, 그는 오늘 학교를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므로 분명하게 고려 중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신경 쓰고 있는 것도 아니었던 일련의 소문들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함부로 본전을 들락거린 전학생의 경솔함에 화가 났다.
시마가 경내에서 소리치며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건 전학생에게 있어 굉장한 행운이었다. 시마는 벌써부터 어느 정도는 전학생을 깔보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은 있어서 약간의 반성과 죄책감으로 그 못된 심보를 단단히 붙들어 놓고 있긴 했지만, 마음 한편은 부글부글 끓어서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눈앞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갈기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시마는 전학생을 그저 조용히 불러 세웠다.
“야.”
그러자 전학생이 홱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방금 너 본전에 들어간 거냐?”
“오?”
전학생은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방금까지 뻔뻔하게 본전을 들락거려놓고선.
“너 제정신이야? 여긴 장난으로 들락거리면 안 되는 곳이야.”
“에, 장난이라니. 제대로 인사 드렸다고.”
“아니, 넌 본전에 들어갔잖아.”
갑자기 침침한 공기가 주변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시마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멈추어 섰다. 눈을 의심하며 시선을 가늘게 뜨자 ‘그것’이 보였다.
그렇다, ‘보였다.’ 시마는 전학생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뿜어져 나오는 온갖 액의 갈래를 보았다.
시마는 살면서 여러 종류의 인간들을 봐왔다. 개중에는 곁에 서면 기분 좋을 만큼 맑고 깨끗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가서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피로해지고 분노가 끓어오르는 기운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보통 남의 팔자를 망치거나 죄 짓고 살아온 경우가 그러했다. 여태껏 시마가 겪은 것 중 가장 역겹고 끔찍한 기운은 이년 전 전철에서 여중생을 추행하던 오십대 남성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그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전학생은 그것보다도 더 나빴다. 얼마나 나쁘냐면, 시마의 눈에 ‘보일 정도로’ 나빴다.
시마는 당혹스러운 나머지 조금 전의 분노가 깔끔하게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모든 감정이 위로 붕 떠오른 것만 같았다. 영적인 사건사고에 둔한 상태로 살아온 그에게 거의 처음으로 영혼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진 듯했다.
이 자식 대체 뭐야?
신사에… 불이라도 지른 건가? 아니면 지장보살님한테 껌이라도 붙였나? 남의 인생을 망쳤나? 여러 사람한테 사기라도 친 거야? 그래서 저주라도 받고 있나?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잖아. 시마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너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냐?”
“하? 갑자기 뭔데. 그거 시비?”
“본전은 왜 들어간 거야. 너 뭐라도 훔쳤어?”
“어이.”
전학생이 얼굴을 굳혔지만 시마는 말할수록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들어가면 안 되는 걸 몰랐을 린 없고. 너 여태까지 늘 이런 식으로 경내를 엉망으로 만든 거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 최소한의 자각이라도 있긴 해?”
“너, 나 알아?”
전학생이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를 내자 시마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사는지 알게 뭐야. 그래도 네가 대강 어떤 짓을 하고 다녔는진 알아. 너 경내에서 사고 친 게 이번 한 번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까 제대로 인사드렸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전학생은 주먹을 쥔 상태이긴 했지만 당장 덤벼들 것 같지는 않았다.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긴 했다. 노려보는 눈이 매서웠다. ‘그 전학생, 완전 머리가 이거라니까.’ 그래서 어쩌라고? 시마는 두렵지 않았다. 덤비면 이쪽에서 두 배로 받아쳐주겠어. 머리 한쪽에서 이성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경내에서 소란을 피울 순 없으니까 싸움을 걸면 멱살을 쥐고 토리이 바깥으로 끌고 나가는 거야.
팽팽한 대치가 계속되는가 싶더니 전학생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서 싸움의 전조는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젠장.”
전학생은 분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말했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너 같은 녀석 따위 엉망진창으로 쳐부수는 것 정돈 식은 죽 먹기지만, 오늘 치 싸움은 관두기로 스스로와 약속했으니까.”
허. 시마는 기가 찼다. 이 새끼 날 얼마나 얕보고 있는 거야?
그러나 무언가 받아치기도 전에 다음 말이 시마를 완전히 맥 빠지게 했다.
“아~ 정말! 경내라서 싸울 수도 없고. 그냥 확 토리이 바깥으로 끌고 나가버릴까?”
“…….”
“어떻게 생각해?”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전학생은 방금 말에 도발의 목적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반응하지 않은 시마의 판단력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순간적으로 눈을 빛내며 시마를 빤히 응시하는가 싶더니… 금방 ‘포기해버렸다.’ 시마는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바이바이.”
여전히 조금 아연한 기분에 잠겨 있던 시마는 곧 정신을 차렸다. 전학생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전학생을 따라잡기 위해 잠깐 달려야 했다. 거리를 좁히자 예의 그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시마는 본전에 들락거린 사람을, 심지어 보통의 사람도 아니고 저런 흉흉한 기운을 두르고 다니는 사람을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른 체 둘 순 없는 노릇이므로 시마는 전학생을 돕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가 누군가를 돕기로 결심하는 순간은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야, 너 이거 가지고 가.”
“뭔데… 에?”
시마가 떠밀듯 부적을 쥐어주자 전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버퍼링에 걸려 같은 행동을 끝없이 반복하는 기계처럼 그와 부적을 번갈아 바라보던 전학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신사 기념품? 아, 주변에 기프트숍 같은 거 있던가?”
시마는 어이가 없었다.
“있겠냐?”
“그럼 인테리어?”
“부적이잖아, 부적.”
전학생은 펄쩍 뛰었다.
“에에에. 진짜 부적이야?”
“보면 알잖아.”
“아니. 보통은 가짜라고 생각하지, 평범하게.”
“보통은 보자마자 안다고. 인테리어 소품이라 생각하는 쪽이 이상하지 않아?”
시마는 대화에 말려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이번 주말 동안은 갖고 다녀… 어이, 듣고 있냐?”
전학생은 부적을 들어 올리고 나뭇잎 사이로 드는 햇빛에 비추어 보거나 양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내구성을 실험하고 있었다. 듣는 척도 하지 않는 불량한 태도 때문에 시마는 다시 열이 뻗치려고 했다. 그러나 전학생은 기묘할 정도로 타이밍이 정확했다.
“샤워할 때도?”
시마가 막 입을 벌리던 참이었다. 전학생이 부적을 잡아당기는 채로 물었다.
“전라의 상태로도 부적은 꼭 쥐고 있어야 하는 거야?”
“하?”
“아니, 보통 이럴 때 말이야. 제대로 지령을 안 들은 주인공이 샤워 중에 무서운 일을 겪거나 하잖아? 왜, 공포영화 같은 데서.”
시마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전학생은 부적에서 시선을 떼더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너 영능력자 같은 거야? 이거, 진짜로 효과 있어?”
시마는 한심하단 눈으로 전학생을 응시하더니 뒤돌아섰다.
몇 발짝 걸어갔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 나쁜 짓 같은 거 안 했어.”
시마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돌아보지 않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들어가선 안 되는 장소라는 걸 알면서도 들어갔잖아.”
“…….”
“그게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짓’이야.”
시마는 경내로 돌아갔다. 전학생은 따라오지 않았다. 걷는 동안 그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제길, 짜증나는 녀석이었어. 대체 뭐냐고. 하루에 몇 명이나 여길 드나드는 거야?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저지르고 보는 심리를 전-혀 모르겠어. 보통 하지 말라고 하는 덴 이유가 있는 거잖아? 뒤는 생각하지 않는 거야? 금기를 깨는 재미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럴 거면 적어도 누울 장소는 보고 발을 뻗어야 하지 않겠냐고.
본전 문은 슬쩍 열려 있었다. 제대로 닫지도 않았군. 시마는 조용히 본전 문을 열고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난장판을 예상했던 것치고 본전은 평소와 같았다. 한 달 전 정리 정돈 차 방문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분명 렌지는 카스가가 ‘뒤적뒤적해 대’다가 무언가를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지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을 때도 불단에 손을 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뒤질 만한 곳이라면 이곳뿐인데.
“응?”
상을 살펴보던 시마는 끄트머리에 덩그러니 놓인 나무 조각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시마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왜 이게 여기에….”
벼락처럼 깨달은 바가 있었다.
황급히 본전을 뛰쳐나온 시마가 토리이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입구는 텅 비어있었다. 계단과 내리막길 부근에도 전학생은 없었다.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한편 이때, 이부키는 카스가와 함께 미기테의 가운뎃손가락을 벗어나 주택가 쪽으로 걷고 있었다. 흥분한 이부키가 아까 만난 재수 없고 이상한 녀석에 대해 떠드는 동안 카스가는 간간히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카스가의 낯빛은 아까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창백한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에에, 뭐야 이 녀석.’하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녀석이 그러는 거야. ‘너…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냐?’”
이부키는 ‘그 녀석’의 흉내를 낼 때 목소리를 한껏 깔았다.
“아, 걔도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같은 학교겠지? 카스가, 알아? 머리는 뭐랄까 이렇게 후와후와해서 키는 요만한 녀석인데 말이야. 눈이 엄청 냉랭했단 말이지… 아, 아아. 맞다, 점. 여기에 이따만 한 점이 있었어.”
이부키가 입술 위를 가리켰다.
“시마 카즈미야.”
앞을 보는 채로 카스가가 말했다.
“아. 역시 아는 사람?”
“…….”
“아니, 그보다 그 녀석. 자기도 본전 근처에 있었으면서 남한테 엄청 뭐라 해대고 말이지.”
“걔네 집이 관리하는 신사라서 그래.”
카스가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당연한 것처럼 여기저기 끼어드는 게 걔네 집안 특기야. 마을의 해결사 같은 거라고 다들 찾거든. 정작 본인들은 엄청나게 평범한 사람인 양 굴지만.”
“에에. 집안 전부가 영능력자인 거였어?”
“아니, 전혀. 내가 보기엔 평범해.”
갑자기 카스가가 화를 냈다.
“그 녀석 완전 거짓말쟁이라고. 전혀 안 보이는 주제에 자기 내킬 때만 마치 보이는 것처럼 행동한다니까. 가끔 오싹한 소리나 하면서 남의 주의란 주의는 다 끌어놓곤, 정작 본인은 엄청 귀찮은 것처럼 투덜대질 않나. 그럴 거면 왜 보이는 척하면서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그래? 농담하는 것 같진 않던데.”
“막상 만나면 그런 생각 같은 거 안 들 정도로 그럴싸하게 굴긴 해. 분명 마을 사람들이 만든 분위기 때문도 있겠지. 이 마을 사람들 조금 이상해. 아닌 척해도 그 집안사람들이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거든. 타이세이들도 그 녀석만큼은 특별 취급해준다니까. ‘신과 인연을 맺은 이의 자손들은 어쩔 수 없이 여기 있을 뿐’인 거랬나? 뭐냐고 그거.”
“에에에, 그거 혹시 그건가, 그거? 오로치와 싸운 히어로 장남 얘긴가?”
“무슨 소리야?”
이부키는 택시기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끝에 가서는 혼자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거의 의성어와 몸짓으로만 이야기 대부분이 전개되었고, 그 바람에 카스가는 곧 흥미를 잃어버렸다.
“결국 지역 신화잖아. 21세기에 그런 걸 믿는 바보가 있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스가는 어딘지 초조해보였다. 이 마을에 뿌리내린 신화를 믿지 못하는 쪽이라기보단 시마 카즈미에 대한 적대감으로 그 전부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부키는 카스가가 갈수록 우울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서 다른 얘기로 새는 바람에 미처 하지 못했던 좋은 소식을 들려주기로 했다.
“어쨌든 안심해. 아까 그건 내가 본전 안에 돌려놓고 왔으니까. 아, 사과도 제대로 드렸다구?”
카스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어라, 이거 아닌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려던 이부키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카스가, 아까부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카스가는 잠깐 머뭇거렸다.
“진짜로 본전 안에 두고 온 거야…?”
이부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리를 몰라서 그냥 그 위에 두고 오긴 했지만.”
카스가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쯤 되자 이부키도 걱정스러운 듯 멈추어 섰다. 카스가는 시선을 피하다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카스가, 너 진-짜로 괜찮은 거 맞지? 너 지금 일주일은 화장실 못 간 사람 같아.”
“…응.”
“혹시 불안해?” 이부키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대신 놔둔 것 때문에?”
카스가는 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모르겠어. 나 대체 뭘하고 있는 걸까.”
카스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면서 자조적으로 말했다.
“이게 천벌이라도 받는 건가 봐.”
“에, 걱정하지 마. 카스가가 훔치고 싶어서 훔친 것도 아니고! 원인은 따로 있으니까 천벌은 타이세이네한테 내려달라고 내가 제대로 부탁까지 했다고?”
카스가가 여전히 수심에 잠겨 있자 이부키는 안타까운 눈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카스가~ 힘 좀 내. 아, 아니면 이거 줄까?”
“…뭘?”
“역시 나보단 카스가 쪽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자, 여기 있습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부키가 부적을 꺼냈다. 카스가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자 이부키는 카스가의 손에 억지로 그것을 쥐어주었다.
“엉망진창인 하루이긴 했지만, 내일은 말이야,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구. 아, 학교에서 또 타이세이 녀석들이 괴롭히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스스로에게 좀 더 자신을 가져.”
이부키가 씩씩하게 말했다.
“방학식 때 타이세이 녀석들에게 그렇게 말한 거 말야. 그거 용기 있는 행동이야. 너 좋은 녀석이라구.”
어정쩡하게 부적을 쥔 카스가의 손이 동그랗게 말렸다. 카스가는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가 무언가 말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부키는 반대편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카스가, 우리 라인 교환하자!”
휴대폰과 함께 딸려 올라온 무언가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카스가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그 종이를 주웠고, 그 바람에 말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 고마워.”
이부키가 얼굴을 찡그리며 “뭐지 이게?”하고 구깃구깃한 종이를 펼쳤다. 그건 다름 아닌 야마구치 담임에게 받은 교칙 안내문이었다. 그 순간 이부키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리곤 아! 하고 카스가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쿨백 찾아가는 거 깜빡했다!”
7
타이세이는 양호실에 십 분 정도 누워 있었다. 코피는 금방 멎었지만 코 안이 얼얼하다는 이유로 그는 몇 분 정도 더 침대 위에서 뻐겨댔고, 도무지 더 뻐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조퇴를 해야겠다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타이세이는 아까 그 ‘정신 나간 가쿠란’이 얼마나 가혹하게 자신을 두들겨 팼는지 설명하면서 전학생에 대한 담임의 적대적인 감정을 부추겼다. 여러 가지 특수한 상황 덕에, 그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평소보다 한 시간은 일찍 교문을 나섰다. 그 즈음에는 몸 상태가 거의 나아져 있었다. 타이세이는 교문 근처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서 렌지와 와타루를 기다렸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합류한 렌지와 와타루는 음료를 시키지도 않고 타이세이에게 ‘아까 그 자식’ 얘길 하며 잔뜩 흥분했다. 세 사람은 신나게 전학생을 씹어대다가 곧이어 카페를 나섰다. 전철을 타고 근처 시가지로 이동할 무렵 그들의 흥분은 다소 잦아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카스가를 떠올렸다. 아침에 신사에서 있던 불미스러운 일과 체육관 근처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드문드문 얘기를 주고받던 그들은 다시 겁에 질렸다.
“미친 자식! 본전 물건은 대체 왜 훔친 거야.”
“있잖아, 타이세이. 우리까지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는 와타루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럴 리가 있겠냐. 우린 본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고.”
“얼굴은 들이밀었잖아. 그것도 들어간 걸로 치는 거 아냐?”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렌지. 너까지 그러면 아무리 나라도 조금 무섭거든?”
역을 나온 세 사람은 일부러 왁자지껄한 대로변을 쏘다니며 말을 아꼈다. 그러다 타이세이가 기가 막힌 농담을 했고, 두 사람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겨우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 녀석, 복수하던 걸까.”
“하?”
문득 와타루가 말했다.
“방학식 때 말이야. 그때 엄청 화냈지? 나 그 녀석이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어.”
타이세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였더라? 나 솔직히 그때 일 기억 안 나. 뭐랄까, 엄청난 기세로 화내긴 했는데.”
렌지가 우물쭈물했다.
“난 기억나. 네가 요시노야(*일본 규동 3대 체인점) 가자고 할 때였을걸? 저녁 메뉴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버럭 하더니 왜 언제나 타이세이 마음대로냐고 그랬잖아.”
“아. 아아. 맞다, 맞다.” 타이세이가 손뼉을 쳤다. “그래서 모두 당황했지.”
“아, 나도 기억나네.” 와타루가 말했다. “그럼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면서 펄펄 뛰었지. 아직도 이해 안 된다니까.”
렌지가 흥분했다.
“그때 시마가 말리지 않았으면 그 녀석, 한 대 칠 기세였다니까?”
“뭔가 불만이 많아 보이긴 했지.”
그렇게 말하는 타이세이는 어느 정도 시혜적인 태도였다. 어울려 다니는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해 준 것 때문에 쑥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기분은 맥락 없이 터져 나온 카스가의 분노를 손쉽게 받아들이고 간단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세 사람은 카스가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점점 그 분노의 전후 관계를 모호한 것으로 결정짓고는 마침내 카스가가 저지른 일에 대한 공포, 좀 더 구체적으로 콕 집어 말하자면 카스가가 그 일을 저지르게 된 원인을 어렴풋하게 짐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죄책감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 뒤로 대화의 주제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튀어서 유행가니 아이돌이니 떠들어 대다가 결국 노래방에 가자는 얘기에 도달했다. 타이세이의 의견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늘 그랬던 것처럼 반대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노래방에서 두 시간 정도 노래를 불러 재끼고 있을 즈음 날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저녁 6시 반쯤에 타이세이의 휴대폰으로 라인이 한 통 도착했지만 그때 타이세이네는 마이크 두 대로 락 스피릿을 뽐내느라 미처 알람을 듣지 못했다. 타이세이가 그 알람을 들은 건 그들이 체력을 거의 소진하고 발라드 타임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 띵동 ]
“타이세이, 너 라인 왔는데?”
“에엥~? 누구지.”
“여자 아냐? 얼른 확인해 봐.”
“바보냐!”
타이세이가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으며 낄낄거렸다.
다음 순간 세 사람의 휴대폰에서 동시에 알람이 울렸다.
[ 띵동 ]
“…뭐야?”
휴대폰을 집어든 타이세이는 라인을 확인하자마자 공포에 질렸다.
시마는 서재 서랍을 열었다. 먼지가 쌓여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물건들은 비교적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각종 도장과 직사각형의 넓은 인주, 기한이 지난 자질구레한 서류 같은 걸 손으로 밀치며 뒤적이고 있으니 넷째가 기웃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카즈미 형, 뭐 찾아?”
“부적. 지난 해에 다 썼던가?”
“할아버지 건 몇 장 남아있을 걸?”
넷째는 시마를 슬쩍 밀치면서 서랍 깊은 곳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냈다. 시마가 열어보니 누렇게 변색된 부적 서너 장이 들어있었다. 얼추 그 위에 쓴 글자를 가늠해본 시마는 부적을 전부 꺼내서 교복 마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거면 되겠네. 고맙다.”
“집에 뭐가 왔어? 난 잘 모르겠는데….”
“아니, 따로 쓸데가 있어.”
“그럼 부적은 이제 다 쓴 거야? 아빠 돌아오면 새로 써달라고 해야겠네.”
“다음 주에 오시니까 그때 부탁해봐.”
불안했던 건지 넷째는 신발장 앞까지 따라 내려왔다.
“나도 따라갈까?”
시마는 신발을 신었다.
“됐어. 유우키는?”
“친구 집. 마사미 형은 오늘 부활동 때문에 늦는대.”
“알아. 걔 심부름 가는 거야.”
“에, 마사미 형 또 이상한 꿈 꿨구나. 이번엔 어느 신사야?”
“미츠유비. 금방 돌아올게.”
시마가 부적을 챙겨 연못 쪽 샛길로 빠지고 있을 무렵, 이부키는 계단을 전부 올라가 토리이를 막 지나친 참이었다. 뒤돌아보니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까마득한 계단 아래서 카스가가 이부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부키는 손을 한 번 크게 흔들어준 뒤 신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숲이 울창해서 경내는 바람이 잘 불지 않고 무척 고요했다. 배전도 작은 규모였는데, 그래서인지 밧줄도 하나만 내려와 있었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긴 하는 듯 세전함 입구가 반들반들하게 손때를 탄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밧줄 끝에 큰 방울인 와니구치鰐口가 양쪽으로 한 쌍을 이루며 매달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처마에 가려져 그늘져 있긴 했지만 아름다운 방울이었다. 이부키가 밧줄을 붙잡고 와니구치를 흔들자 짤랑짤랑 맑은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여긴 운치가 좋은 곳이었다.
이부키는 두 손을 모아 짝짝 박수를 치곤 신사의 주인에게 인사를 올린 뒤 가져온 목상을 만지작거리며 배전을 빠져나왔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석등롱 몇 개가 규칙성 없이 덩그러니 세워진 숲길이 나왔다. 샛길로 빠지는 길목인 듯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석등롱을 더 구경할 수 있을 듯했으나 본전으로 가는 길은 아닌 것 같았다. 이부키는 가던 길을 돌아와서 배전 뒤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별채처럼 딸려 있는 건물 한 채가 나왔다. 본전이었다.
본전은 배전보다 살짝 경사진 곳에 지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배전과 거의 비슷한 크기였지만 상대적으로 지붕이 높아보였다. 문이 슬쩍 열려 있는 걸 확인한 이부키는 창호지를 바른 분합문을 조심스레 밀고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본전은 생각보다 어두침침하지 않았다. 얇은 창호지를 뚫고 햇빛이 새어 들어와 본전 안쪽에 놓인 불단이 고요 속에서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부키는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온 뒤 다시 한 번 두 손을 모아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마음이 무척 평온해졌다.
불단 좌우로는 길고 넓은 상이 펼쳐져 있었다. 위쪽에는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이부키는 본래의 목적도 잊어버리곤 불단 앞으로 다가서서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부처일까? 부처는 아닌 것 같기도. 그럼 누구의 얼굴? 평온하기보다 슬퍼 보이고, 절망했다기보단 인내하는 듯한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아서 기도를 올리는 그림 속 청년은 쓸쓸하게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거 혹시 기사님이 말해준 그 히어로 장남?’
콰득,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유심히 그림을 뜯어보던 이부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풀을 밟고 서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뚝 끊어졌다. 갑자기 오감이 곤두섰다. 이부키는 바짝 긴장한 채로 소리가 난 쪽을 응시했다. 창호지 너머에서 분명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까마귀가 울면서 날아올랐다. 침묵이 계속됐다. 햇빛이 일렁이며 본전 안으로 따뜻하게 스며들었다. 이부키는 귀를 기울였지만 더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근대던 심장도 어느새 차분하게 맥박치고 있었다. 그때 이부키는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떠올렸다.
‘맞다, 잊어버릴 뻔했네.’
그는 불단을 슥 훑어보면서 물건이 빠져나왔을 법한 공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딱히 빈 곳이 없었다. 고민하던 이부키는 “어딘지 전혀 모르겠으니까 여기 두고 갈게요. 미안합니다~”하고 불단 양쪽으로 펼쳐진 상 위에 목상을 얹어두었다. 그러고는 “카스가를 대신해서 사과드릴게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부디 용서해주세요. 천벌이 떨어진다면 타이세이 녀석들에게 부탁드립니다.”하고 인사를 드린 뒤 밖으로 나왔다.
이부키가 본전 문을 조심조심 닫고 있을 때, 시마는 연못 위쪽으로 뻗은 샛길을 따라 석등롱이 세워진 참도를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이끼 낀 석등롱들이 드문드문해질 무렵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미츠유비 신사의 본전 지붕이 어렴풋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시마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곤 깊은 짜증을 느끼며 샛길을 빠져나왔다.
시마는 사람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긴 했지만 실제로 그러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건 상식이고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걸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쪽이 어느 정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닐까? 게다가 시마는 사람을 잘못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첫인상이 나쁘면 보통은 다 나빴다.
본전을 떠나려는 가쿠란 차림의 전학생을 시마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순간, 그는 오늘 학교를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므로 분명하게 고려 중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신경 쓰고 있는 것도 아니었던 일련의 소문들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함부로 본전을 들락거린 전학생의 경솔함에 화가 났다.
시마가 경내에서 소리치며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건 전학생에게 있어 굉장한 행운이었다. 시마는 벌써부터 어느 정도는 전학생을 깔보고 있었다. 그런 스스로에 대한 최소한의 자각은 있어서 약간의 반성과 죄책감으로 그 못된 심보를 단단히 붙들어 놓고 있긴 했지만, 마음 한편은 부글부글 끓어서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눈앞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갈기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시마는 전학생을 그저 조용히 불러 세웠다.
“야.”
그러자 전학생이 홱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방금 너 본전에 들어간 거냐?”
“오?”
전학생은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방금까지 뻔뻔하게 본전을 들락거려놓고선.
“너 제정신이야? 여긴 장난으로 들락거리면 안 되는 곳이야.”
“에, 장난이라니. 제대로 인사 드렸다고.”
“아니, 넌 본전에 들어갔잖아.”
갑자기 침침한 공기가 주변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시마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 멈추어 섰다. 눈을 의심하며 시선을 가늘게 뜨자 ‘그것’이 보였다.
그렇다, ‘보였다.’ 시마는 전학생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듯 뿜어져 나오는 온갖 액의 갈래를 보았다.
시마는 살면서 여러 종류의 인간들을 봐왔다. 개중에는 곁에 서면 기분 좋을 만큼 맑고 깨끗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가서기만 해도 숨이 막히고 피로해지고 분노가 끓어오르는 기운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보통 남의 팔자를 망치거나 죄 짓고 살아온 경우가 그러했다. 여태껏 시마가 겪은 것 중 가장 역겹고 끔찍한 기운은 이년 전 전철에서 여중생을 추행하던 오십대 남성과 마주쳤을 때 느꼈던 그것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전학생은 그것보다도 더 나빴다. 얼마나 나쁘냐면, 시마의 눈에 ‘보일 정도로’ 나빴다.
시마는 당혹스러운 나머지 조금 전의 분노가 깔끔하게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아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모든 감정이 위로 붕 떠오른 것만 같았다. 영적인 사건사고에 둔한 상태로 살아온 그에게 거의 처음으로 영혼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진 듯했다.
이 자식 대체 뭐야?
신사에… 불이라도 지른 건가? 아니면 지장보살님한테 껌이라도 붙였나? 남의 인생을 망쳤나? 여러 사람한테 사기라도 친 거야? 그래서 저주라도 받고 있나?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잖아. 시마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너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냐?”
“하? 갑자기 뭔데. 그거 시비?”
“본전은 왜 들어간 거야. 너 뭐라도 훔쳤어?”
“어이.”
전학생이 얼굴을 굳혔지만 시마는 말할수록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들어가면 안 되는 걸 몰랐을 린 없고. 너 여태까지 늘 이런 식으로 경내를 엉망으로 만든 거냐?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스스로가 어떤 상태인지 최소한의 자각이라도 있긴 해?”
“너, 나 알아?”
전학생이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를 내자 시마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사는지 알게 뭐야. 그래도 네가 대강 어떤 짓을 하고 다녔는진 알아. 너 경내에서 사고 친 게 이번 한 번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아까 제대로 인사드렸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전학생은 주먹을 쥔 상태이긴 했지만 당장 덤벼들 것 같지는 않았다. 화를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긴 했다. 노려보는 눈이 매서웠다. ‘그 전학생, 완전 머리가 이거라니까.’ 그래서 어쩌라고? 시마는 두렵지 않았다. 덤비면 이쪽에서 두 배로 받아쳐주겠어. 머리 한쪽에서 이성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경내에서 소란을 피울 순 없으니까 싸움을 걸면 멱살을 쥐고 토리이 바깥으로 끌고 나가는 거야.
팽팽한 대치가 계속되는가 싶더니 전학생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서 싸움의 전조는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젠장.”
전학생은 분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말했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너 같은 녀석 따위 엉망진창으로 쳐부수는 것 정돈 식은 죽 먹기지만, 오늘 치 싸움은 관두기로 스스로와 약속했으니까.”
허. 시마는 기가 찼다. 이 새끼 날 얼마나 얕보고 있는 거야?
그러나 무언가 받아치기도 전에 다음 말이 시마를 완전히 맥 빠지게 했다.
“아~ 정말! 경내라서 싸울 수도 없고. 그냥 확 토리이 바깥으로 끌고 나가버릴까?”
“…….”
“어떻게 생각해?”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전학생은 방금 말에 도발의 목적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반응하지 않은 시마의 판단력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순간적으로 눈을 빛내며 시마를 빤히 응시하는가 싶더니… 금방 ‘포기해버렸다.’ 시마는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바이바이.”
여전히 조금 아연한 기분에 잠겨 있던 시마는 곧 정신을 차렸다. 전학생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전학생을 따라잡기 위해 잠깐 달려야 했다. 거리를 좁히자 예의 그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시마는 본전에 들락거린 사람을, 심지어 보통의 사람도 아니고 저런 흉흉한 기운을 두르고 다니는 사람을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모른 체 둘 순 없는 노릇이므로 시마는 전학생을 돕기로 결정했다. 사실, 그가 누군가를 돕기로 결심하는 순간은 늘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야, 너 이거 가지고 가.”
“뭔데… 에?”
시마가 떠밀듯 부적을 쥐어주자 전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버퍼링에 걸려 같은 행동을 끝없이 반복하는 기계처럼 그와 부적을 번갈아 바라보던 전학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신사 기념품? 아, 주변에 기프트숍 같은 거 있던가?”
시마는 어이가 없었다.
“있겠냐?”
“그럼 인테리어?”
“부적이잖아, 부적.”
전학생은 펄쩍 뛰었다.
“에에에. 진짜 부적이야?”
“보면 알잖아.”
“아니. 보통은 가짜라고 생각하지, 평범하게.”
“보통은 보자마자 안다고. 인테리어 소품이라 생각하는 쪽이 이상하지 않아?”
시마는 대화에 말려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이번 주말 동안은 갖고 다녀… 어이, 듣고 있냐?”
전학생은 부적을 들어 올리고 나뭇잎 사이로 드는 햇빛에 비추어 보거나 양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내구성을 실험하고 있었다. 듣는 척도 하지 않는 불량한 태도 때문에 시마는 다시 열이 뻗치려고 했다. 그러나 전학생은 기묘할 정도로 타이밍이 정확했다.
“샤워할 때도?”
시마가 막 입을 벌리던 참이었다. 전학생이 부적을 잡아당기는 채로 물었다.
“전라의 상태로도 부적은 꼭 쥐고 있어야 하는 거야?”
“하?”
“아니, 보통 이럴 때 말이야. 제대로 지령을 안 들은 주인공이 샤워 중에 무서운 일을 겪거나 하잖아? 왜, 공포영화 같은 데서.”
시마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전학생은 부적에서 시선을 떼더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너 영능력자 같은 거야? 이거, 진짜로 효과 있어?”
시마는 한심하단 눈으로 전학생을 응시하더니 뒤돌아섰다.
몇 발짝 걸어갔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 나쁜 짓 같은 거 안 했어.”
시마는 멈추어 섰다. 그리고는 돌아보지 않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들어가선 안 되는 장소라는 걸 알면서도 들어갔잖아.”
“…….”
“그게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나쁜 짓’이야.”
시마는 경내로 돌아갔다. 전학생은 따라오지 않았다. 걷는 동안 그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제길, 짜증나는 녀석이었어. 대체 뭐냐고. 하루에 몇 명이나 여길 드나드는 거야?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저지르고 보는 심리를 전-혀 모르겠어. 보통 하지 말라고 하는 덴 이유가 있는 거잖아? 뒤는 생각하지 않는 거야? 금기를 깨는 재미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럴 거면 적어도 누울 장소는 보고 발을 뻗어야 하지 않겠냐고.
본전 문은 슬쩍 열려 있었다. 제대로 닫지도 않았군. 시마는 조용히 본전 문을 열고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난장판을 예상했던 것치고 본전은 평소와 같았다. 한 달 전 정리 정돈 차 방문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분명 렌지는 카스가가 ‘뒤적뒤적해 대’다가 무언가를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지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봤을 때도 불단에 손을 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뒤질 만한 곳이라면 이곳뿐인데.
“응?”
상을 살펴보던 시마는 끄트머리에 덩그러니 놓인 나무 조각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시마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왜 이게 여기에….”
벼락처럼 깨달은 바가 있었다.
황급히 본전을 뛰쳐나온 시마가 토리이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입구는 텅 비어있었다. 계단과 내리막길 부근에도 전학생은 없었다.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한편 이때, 이부키는 카스가와 함께 미기테의 가운뎃손가락을 벗어나 주택가 쪽으로 걷고 있었다. 흥분한 이부키가 아까 만난 재수 없고 이상한 녀석에 대해 떠드는 동안 카스가는 간간히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카스가의 낯빛은 아까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창백한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에에, 뭐야 이 녀석.’하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녀석이 그러는 거야. ‘너…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냐?’”
이부키는 ‘그 녀석’의 흉내를 낼 때 목소리를 한껏 깔았다.
“아, 걔도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같은 학교겠지? 카스가, 알아? 머리는 뭐랄까 이렇게 후와후와해서 키는 요만한 녀석인데 말이야. 눈이 엄청 냉랭했단 말이지… 아, 아아. 맞다, 점. 여기에 이따만 한 점이 있었어.”
이부키가 입술 위를 가리켰다.
“시마 카즈미야.”
앞을 보는 채로 카스가가 말했다.
“아. 역시 아는 사람?”
“…….”
“아니, 그보다 그 녀석. 자기도 본전 근처에 있었으면서 남한테 엄청 뭐라 해대고 말이지.”
“걔네 집이 관리하는 신사라서 그래.”
카스가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당연한 것처럼 여기저기 끼어드는 게 걔네 집안 특기야. 마을의 해결사 같은 거라고 다들 찾거든. 정작 본인들은 엄청나게 평범한 사람인 양 굴지만.”
“에에. 집안 전부가 영능력자인 거였어?”
“아니, 전혀. 내가 보기엔 평범해.”
갑자기 카스가가 화를 냈다.
“그 녀석 완전 거짓말쟁이라고. 전혀 안 보이는 주제에 자기 내킬 때만 마치 보이는 것처럼 행동한다니까. 가끔 오싹한 소리나 하면서 남의 주의란 주의는 다 끌어놓곤, 정작 본인은 엄청 귀찮은 것처럼 투덜대질 않나. 그럴 거면 왜 보이는 척하면서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그래? 농담하는 것 같진 않던데.”
“막상 만나면 그런 생각 같은 거 안 들 정도로 그럴싸하게 굴긴 해. 분명 마을 사람들이 만든 분위기 때문도 있겠지. 이 마을 사람들 조금 이상해. 아닌 척해도 그 집안사람들이 뭔가 대단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거든. 타이세이들도 그 녀석만큼은 특별 취급해준다니까. ‘신과 인연을 맺은 이의 자손들은 어쩔 수 없이 여기 있을 뿐’인 거랬나? 뭐냐고 그거.”
“에에에, 그거 혹시 그건가, 그거? 오로치와 싸운 히어로 장남 얘긴가?”
“무슨 소리야?”
이부키는 택시기사가 들려준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끝에 가서는 혼자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거의 의성어와 몸짓으로만 이야기 대부분이 전개되었고, 그 바람에 카스가는 곧 흥미를 잃어버렸다.
“결국 지역 신화잖아. 21세기에 그런 걸 믿는 바보가 있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스가는 어딘지 초조해보였다. 이 마을에 뿌리내린 신화를 믿지 못하는 쪽이라기보단 시마 카즈미에 대한 적대감으로 그 전부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부키는 카스가가 갈수록 우울해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서 다른 얘기로 새는 바람에 미처 하지 못했던 좋은 소식을 들려주기로 했다.
“어쨌든 안심해. 아까 그건 내가 본전 안에 돌려놓고 왔으니까. 아, 사과도 제대로 드렸다구?”
카스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어라, 이거 아닌가?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려던 이부키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카스가, 아까부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카스가는 잠깐 머뭇거렸다.
“진짜로 본전 안에 두고 온 거야…?”
이부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리를 몰라서 그냥 그 위에 두고 오긴 했지만.”
카스가는 안절부절 못했다. 그쯤 되자 이부키도 걱정스러운 듯 멈추어 섰다. 카스가는 시선을 피하다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카스가, 너 진-짜로 괜찮은 거 맞지? 너 지금 일주일은 화장실 못 간 사람 같아.”
“…응.”
“혹시 불안해?” 이부키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대신 놔둔 것 때문에?”
카스가는 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냥… 모르겠어. 나 대체 뭘하고 있는 걸까.”
카스가는 억지로 미소 지으면서 자조적으로 말했다.
“이게 천벌이라도 받는 건가 봐.”
“에, 걱정하지 마. 카스가가 훔치고 싶어서 훔친 것도 아니고! 원인은 따로 있으니까 천벌은 타이세이네한테 내려달라고 내가 제대로 부탁까지 했다고?”
카스가가 여전히 수심에 잠겨 있자 이부키는 안타까운 눈으로 입을 삐죽거렸다.
“카스가~ 힘 좀 내. 아, 아니면 이거 줄까?”
“…뭘?”
“역시 나보단 카스가 쪽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자, 여기 있습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부키가 부적을 꺼냈다. 카스가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자 이부키는 카스가의 손에 억지로 그것을 쥐어주었다.
“엉망진창인 하루이긴 했지만, 내일은 말이야, 내일의 태양이 뜰 거라구. 아, 학교에서 또 타이세이 녀석들이 괴롭히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스스로에게 좀 더 자신을 가져.”
이부키가 씩씩하게 말했다.
“방학식 때 타이세이 녀석들에게 그렇게 말한 거 말야. 그거 용기 있는 행동이야. 너 좋은 녀석이라구.”
어정쩡하게 부적을 쥔 카스가의 손이 동그랗게 말렸다. 카스가는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가 무언가 말하기 위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이부키는 반대편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카스가, 우리 라인 교환하자!”
휴대폰과 함께 딸려 올라온 무언가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카스가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혀 그 종이를 주웠고, 그 바람에 말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쳐버리고 말았다.
“아, 고마워.”
이부키가 얼굴을 찡그리며 “뭐지 이게?”하고 구깃구깃한 종이를 펼쳤다. 그건 다름 아닌 야마구치 담임에게 받은 교칙 안내문이었다. 그 순간 이부키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리곤 아! 하고 카스가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쿨백 찾아가는 거 깜빡했다!”
7
타이세이는 양호실에 십 분 정도 누워 있었다. 코피는 금방 멎었지만 코 안이 얼얼하다는 이유로 그는 몇 분 정도 더 침대 위에서 뻐겨댔고, 도무지 더 뻐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조퇴를 해야겠다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타이세이는 아까 그 ‘정신 나간 가쿠란’이 얼마나 가혹하게 자신을 두들겨 팼는지 설명하면서 전학생에 대한 담임의 적대적인 감정을 부추겼다. 여러 가지 특수한 상황 덕에, 그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평소보다 한 시간은 일찍 교문을 나섰다. 그 즈음에는 몸 상태가 거의 나아져 있었다. 타이세이는 교문 근처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서 렌지와 와타루를 기다렸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합류한 렌지와 와타루는 음료를 시키지도 않고 타이세이에게 ‘아까 그 자식’ 얘길 하며 잔뜩 흥분했다. 세 사람은 신나게 전학생을 씹어대다가 곧이어 카페를 나섰다. 전철을 타고 근처 시가지로 이동할 무렵 그들의 흥분은 다소 잦아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카스가를 떠올렸다. 아침에 신사에서 있던 불미스러운 일과 체육관 근처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드문드문 얘기를 주고받던 그들은 다시 겁에 질렸다.
“미친 자식! 본전 물건은 대체 왜 훔친 거야.”
“있잖아, 타이세이. 우리까지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는 와타루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럴 리가 있겠냐. 우린 본전에 들어가지도 않았다고.”
“얼굴은 들이밀었잖아. 그것도 들어간 걸로 치는 거 아냐?”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렌지. 너까지 그러면 아무리 나라도 조금 무섭거든?”
역을 나온 세 사람은 일부러 왁자지껄한 대로변을 쏘다니며 말을 아꼈다. 그러다 타이세이가 기가 막힌 농담을 했고, 두 사람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리면서 겨우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 녀석, 복수하던 걸까.”
“하?”
문득 와타루가 말했다.
“방학식 때 말이야. 그때 엄청 화냈지? 나 그 녀석이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봤어.”
타이세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였더라? 나 솔직히 그때 일 기억 안 나. 뭐랄까, 엄청난 기세로 화내긴 했는데.”
렌지가 우물쭈물했다.
“난 기억나. 네가 요시노야(*일본 규동 3대 체인점) 가자고 할 때였을걸? 저녁 메뉴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버럭 하더니 왜 언제나 타이세이 마음대로냐고 그랬잖아.”
“아. 아아. 맞다, 맞다.” 타이세이가 손뼉을 쳤다. “그래서 모두 당황했지.”
“아, 나도 기억나네.” 와타루가 말했다. “그럼 어디 가고 싶냐고 물어봤더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면서 펄펄 뛰었지. 아직도 이해 안 된다니까.”
렌지가 흥분했다.
“그때 시마가 말리지 않았으면 그 녀석, 한 대 칠 기세였다니까?”
“뭔가 불만이 많아 보이긴 했지.”
그렇게 말하는 타이세이는 어느 정도 시혜적인 태도였다. 어울려 다니는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해 준 것 때문에 쑥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기분은 맥락 없이 터져 나온 카스가의 분노를 손쉽게 받아들이고 간단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세 사람은 카스가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점점 그 분노의 전후 관계를 모호한 것으로 결정짓고는 마침내 카스가가 저지른 일에 대한 공포, 좀 더 구체적으로 콕 집어 말하자면 카스가가 그 일을 저지르게 된 원인을 어렴풋하게 짐작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죄책감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 뒤로 대화의 주제는 완전히 다른 쪽으로 튀어서 유행가니 아이돌이니 떠들어 대다가 결국 노래방에 가자는 얘기에 도달했다. 타이세이의 의견이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늘 그랬던 것처럼 반대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노래방에서 두 시간 정도 노래를 불러 재끼고 있을 즈음 날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저녁 6시 반쯤에 타이세이의 휴대폰으로 라인이 한 통 도착했지만 그때 타이세이네는 마이크 두 대로 락 스피릿을 뽐내느라 미처 알람을 듣지 못했다. 타이세이가 그 알람을 들은 건 그들이 체력을 거의 소진하고 발라드 타임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 띵동 ]
“타이세이, 너 라인 왔는데?”
“에엥~? 누구지.”
“여자 아냐? 얼른 확인해 봐.”
“바보냐!”
타이세이가 테이블 쪽으로 손을 뻗으며 낄낄거렸다.
다음 순간 세 사람의 휴대폰에서 동시에 알람이 울렸다.
[ 띵동 ]
“…뭐야?”
휴대폰을 집어든 타이세이는 라인을 확인하자마자 공포에 질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