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가타리 1»
시마이부 오컬트 AU «신리神籬 어지럽히기»
해당 글에 등장하는 사건과 지명은 모두 허구임을 밝힙니다.
1
라이오카정町의 명물은 언덕을 타고 핏줄기처럼 흐르는 해안도로였다. 이 해안도로는 약 25km 정도로 상당히 애매한 길이에 속했지만 국도와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웃구区를 모조리 잇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국도는 주오구를 지나 히가시구까지 북쪽으로 쭉 이어졌고, 라이오카 주민들에게 있어 ‘해안도로’라는 것은 이 국도를 포함해 약 한 시간가량 동해의 냉혹한 파도와 절벽을 감상할 수 있는 도로 전반을 의미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얘기고, 주민들 입장에서 해안도로가 명물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라이오카정은 산세가 험하고 언덕이 많았는데, 해안도로 역시 약 10분마다 나타나는 네 개의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명물이라는 건 바로 그 언덕마다 끼고 있는 크고 작은 신사들을 말하는 거였다. 이 구간을 ‘오카미사마노미기테(신님의 오른손)’, 줄여서 ‘미기테’라고 불렀다.
차를 몰아 미기테를 넘다 보면 우측으로 펼쳐진 숲과 나무에 가려진 토리이, 그리고 작은 배전拝殿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오싹하기보다 무수한 연잎 사이로 피어난 연꽃 한 송이를 찾아내는 것처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일으키는 풍경이었다. 토박이 주민들 사이에선 미기테를 넘어갈 즈음 신사의 주인인 토지신을 향해 짧게 인사를 드리는 풍습이 내려져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를 알 리가 없는 이부키 아이는 언덕을 넘는 동안 택시기사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인사말을 듣곤 깜짝 놀랐다.
“에에에, 뭐야. 방금 뭐에요?”
이부키는 택시기사가 흘끔거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둥글게 솟아오른 가파른 언덕 위에 붉은 토리이가 언뜻 보인 것도 같았다. 제대로 보려고 고개를 홱 틀었지만 택시는 벌써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속력을 줄이며 택시기사가 말했다.
“이 마을에서 내려오는 풍습이야. 신에게 인사드리는 거지.”
“신?”
이부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지었다.
“아, 혹시 아까 본 게 신사?”
“맞아. 학생 눈이 좋네. 엄청 빨리 스쳐갔는데 말이야.”
택시기사가 감탄하며 설명했다.
“저 신사는 이 라이오카 일대를 누르고 있는 토지신님을 모시는 곳이야.”
“헤에~ 토지신이구나.”
“도쿄엔 없던가?”
“없어요, 없어. 음~ 아니다, 있나?”
이부키는 끙끙거리다 결론지었다.
“없음!”
“아마 구석진 곳엔 있을 지도 몰라. 오래된 나무가 있거나 산을 메우지 않은 장소에는 어디든 토지신이 있으니까.”
가드레일 너머로 깎아지른 절벽과 바다가 나타나자 이부키의 기분도 들뜨기 시작했다. 도쿄 출신인 그는 살면서 이런 종류의 바다를 볼 일이 별로 없었다. 남청색 파도가 암벽에 부딪쳐 소용돌이 치고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광경에서 강력한 자연의 힘이 느껴졌다.
“라이오카 좋구만~”
“이삿짐은 도착했니?”
“엉, 어제 도착했다고 할머니한테 연락 받았어요.”
“그럼 앞으로 쭉 할머님하고 지내는 거야?”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좁아터진 조수석에 다리를 구겨 앉으며 이부키가 씩 웃었다.
“딱 2년 8개월 출장이니까. 초-의젓한 아이짱 덕분에 엄마도 안심!”
눈치 빠른 택시기사는 이부키가 슬쩍 생략한 아버지 얘길 캐묻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곧 언덕을 지나는데, 거기에도 신사가 있어. 아직 우린 미기테右手 위거든. 보고 싶다면 천천히 지나갈게.”
“오른손右手?”
“신님의 오른손大神様の右手이야. 저기 보이니?”
택시기사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에 듬성듬성 솟아오른 언덕이 나타났다. 아직 신사는 보이지 않았다.
“미기테를 완전히 지나려면 방금 지나온 것부터 앞으로 언덕 세 개는 더 넘어야 해. 두 번째 것이 가장 가팔라서 그야말로 중지中指란다.”
“에에, 잠깐만. 하나, 둘, 셋… 아, 맞네. 봐봐, 그래봤자 네 개잖아요? 손가락 하나는 어디로 간 거야?”
택시기사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주먹을 쥐어 봐. 언덕이 몇 개지?”
이부키는 주먹을 쥐어보려다 무릎을 때리며 박수를 쳤다.
“아, 이해했다, 이해했다.”
“뭐, 그런 이유도 있고 실제로 이곳 토지신에겐 손가락 하나가 없거든.”
택시가 커브 길을 돌면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택시기사는 꺾어놓은 핸들을 풀면서 얘기를 이어나갔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마을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일대는 거대한 바다뱀이 다스리는 영역이었다는 거야. 마을을 세우고 싶어도 부락만 들어섰다하면 그 요괴가 파도를 보내 쑥대밭을 만들어 버리니 다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대. 그때 그 요괴가 조건을 걸었는데, 보름마다 젊은 청년을 한 명씩, 총 다섯 명을 산 제물로 바치면 해안을 평화롭게 해준다는 거였어. 횡포에 지친 마을 사람들은 그러겠다고 약속했지. 지금이야 끔찍한 얘기지만, 그땐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야. 바닷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벼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토사가 쓸려가는 바람에 지붕을 올려도 모조리 무너지니 분명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얼어 죽었겠지.”
“모두를 위해 죽을 녀석을 뽑자! 는 전개인가. 너무하네.”
“그렇지? 그래도 사람들은 그걸 선택했어. 약속대로 보름마다 젊은 청년을 한 명씩 붙잡아 산 제물로서 해안가 깊숙한 동굴에 두고 돌아왔대. 그렇게 제물을 올리는 것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지막 보름날만 남겨놓고 있을 때였어. 이런 짓을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문이 나타났어. 요괴와 한 약속 같은 건 지켜선 안 된다면서. 그 가문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
가드레일 너머로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제물을 바친다는 건 말이야, 섬기겠다는 약속 같은 거야. 마을 전체가 그 요괴를 오로치オロチ신으로 섬기겠다는 약속이었던 거지. 그 가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반대했어. 마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런 짓은 그만둬야한다고, 그런 약속을 이유로 더는 죄 없는 청년을 죽여선 안 된다면서. ‘이제 와서 어쩔 거냐?’ 마을 사람들이 묻자 그 집 장남이 대답했어. ‘토지신을 일으켜 세우자. 우리 가문이 신사를 짓겠다.’ 당시엔 신이 자리 잡을 만한 터가 없었거든. 파도가 산을 쓸면 나무가 쓰러지고 오래된 바위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곤 했으니까, 당연하지만 신사도 짓지 못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걸 그 가문이 하겠다고 나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신사를 짓겠다. 집안 재산을 전부 털어서라도, 그로 인해 설령 가문이 망하게 될 지라도.’”
이부키가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헤에, 히어로구만.”
“그 결연한 각오에 마침내 마을 사람들도 설득되었어. 그러자 그 가문은 집안사람들을 전부 불러 모아, 마지막 보름 동안 신사를 지을 자재들을 준비하기 시작했어. 그 가문은 정말로 마을과의 약속을 지켰어. 온 재산을 쏟아 부어서 파도가 닿지 않을 만큼 높은 지대에 신사 다섯 채를 세울 토대를 닦았다고 해. 그 의지에 감화된 마을 젊은이들이 공사를 돕기 시작해, 마침내 그 보름 동안 해안을 굽이 보는 네 언덕 위에 각각 신사가 지어졌어. 신사가 완공된 후, 사람들은 제물이 된 청년들의 넋을 기리는 불단을 세우고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다고 해.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다섯 번째 신사가 완성되기 전에 그만 보름이 되고 만 거야.”
완전히 빠져든 이부키가 택시기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 가문의 장남이 다섯 번째 신사에 들어갔어.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신사에 말이야. 거기서 밤을 새우며 그 뱀 요괴를 기다렸어. 내 생각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을 땐 그가 대신 산 제물로서 죽을 생각을 한 건 아닌가 싶어. 어쨌든,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한참을 기다렸을까, 갑자기 잠이 쏟아졌어. 이상한 일이었어. 깊은 밤이라고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입장이니까. 바짝 긴장해있었는데도 눈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서, 결국 장남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남은 낯선 구릉 위에 서 있었대. 눈앞엔 아주 작은 신사 한 채가 들어서있었어. 어쩐지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 것만 같아, 장남은 문을 열고 신사 안으로 들어갔어.
그 안에선 하얀 옷감으로 지은 기모노에 새까만 오비를 두른 소녀가 앉아서 실을 잣고 있었어. 일어서봤자 장남의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을 것처럼 작은 소녀였어. 그런데도 그는 소녀가 신이라는 걸 바로 알아보았다고 해. 장남이 무릎을 꿇자 소녀가 말했어. ‘너는 오늘 오로치와 싸우다 죽는다. 그것이 가여워 내가 너를 돕겠다. 그러나 나는 여기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내쫓을 만큼의 신통력이 없다. 너 역시 나를 도와라.’ 장남은 그러겠다고 했어. 그러자 소녀는 잣고 있던 실로 장남의 새끼손가락을 묶고 말했어. ‘술을 네 통으로 나누어 담아라. 오로치가 그걸 전부 마실 때까지 절대 바깥으로 나오지 마라. 오로치가 잠들면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눈앞에 누가 가져다 놨는지도 모를 큰 술통이 세워져 있었어. 장남은 그 술을 네 통으로 나누어 담은 뒤 나머지 일은 하늘에 맡겼어. 그리고 마침내 오로치가 왔지.”
촛불이 꺼지고 공기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가 창호지 너머로 일렁이는 거대한 뱀의 그림자를 보았으리라. 그러면 그는 결연한 얼굴로 옆에 놓인 칼을 붙잡았을 것이다.
이부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장남은 조용히 칼을 뽑았어. 어떻게든 오로치를 죽여 볼 생각이었던 거야. 맞서 싸우려고 한 거지. 오로치는 한참을 바깥에서 서성거리다가 술통을 뒤적이기 시작했어. 창호지 너머로 네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술통 안으로 미끄러졌어. 오로치는 머리를 네 개나 갖고 있던 거야! 머리들이 게걸스럽게 술을 들이키는 소리가 꼭 파도가 소용돌이치며 일으키는 굉음처럼 울려 퍼졌어. 정말로 무시무시한 소리였어. 용감하게 맞서 싸우려던 장남마저 칼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술통을 통째로 들이킨 오로치의 머리들이 하나 둘 곯아떨어지기 시작했어. 한 놈 한 놈의 숨소리가 달랐어. 장남은 네 개의 코골이가 울려 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왔어. 그래,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오로치가 잠들면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라는 신의 말씀을 그만 깜빡하고 만 거야.
장남이 밖으로 나온 순간, 오로치와 성인 남자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신사의 마루가 무너지면서 문짝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어. 장남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어. 어둠 속에서 드러난 오로치는 정말이지 끔찍한 모습이었어. 배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고 곯아떨어진 네 개의 머리는 다름 아닌 마을 사람들이 제물로 바친 네 명의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 머리들 사이에서, 새까만 목을 가진 뱀의 머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어. 그 모습을 본 장남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어. 그 머리는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뱀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만약 장남이 죽게 되면 그곳에 그의 얼굴이 매달리게 될 거였지. 뱀의 두 눈이 새빨갛게 이글거리고 있었어. 그때 누군가가 장남의 머릿속으로 들어왔어. 그러자 불가사이 할 만큼 정신이 맑아지고 온몸에서 힘이 솟구쳤어. 마침 오로치의 다섯 번째 머리가 덤벼들어왔어. 장남은 칼을 휘둘러 오로치의 왼눈을 찔렀어. 검은 피가 솟구치면서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산을 뒤흔들었어. 오로치가 온몸을 꿈틀거리며 머리를 흔들어대자 장남은 필사적으로 칼에 매달렸어.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더니 어느새 장남은 아까 꿈에서 본 그 신사에 앉아 있었어. 소녀는 엄지에 실을 친친 감고 있었어. 그러고는 말했어. ‘너를 살렸으니 이곳에는 신사를 세우지 마라.’ 그러더니 동여매던 실을 양쪽으로 잡아당겨 오른손 엄지를 끊어버렸어.
정신을 차렸을 때 장남은 언덕과 조금 떨어진 편평한 바위에 누워있었대. 다섯 번째 신사는 언덕과 함께 통째로 무너져 내려,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어. 토사가 모조리 해변으로 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그 부근은 평지가 되었어. 장남은 신의 뜻을 받들어 그곳에 신사를 세우지 않았어. 대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마침내 오랜 염원대로 마을이 이루어졌어.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라이오카정이지. 그리고 나머지 네 언덕이….”
“미-기-테右手!”
이부키가 신나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 앞에 보이는 언덕이 신님의 가운뎃손가락인 거구나, 맞죠?”
“그래. 저기가 신사야. 보이니?”
“으으음~”
가파른 도로 우측으로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이부키는 손차양을 만들어 전면을 기웃거리다 꼭대기에 세워진 토리이와 신사의 지붕을 발견하곤 소리쳤다.
“아, 있다, 있다!”
“인사를 드리고 싶다면 해도 돼.”
“좋았어, 나도 인사나 드려볼까!”
택시가 언덕 꼭대기에 도달했을 즈음,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신사 계단을 뛰어내려오다 이부키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낄낄거리며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오더니 서로를 발로 걷어차면서 큰 소리로 고래고래 질러댔다.
“젠장!”
“최악이지~”
“그냥 죽어라!”
택시기사가 창문을 내렸다.
“어이, 너희들! 신사에서 장난치면 안 된다는 거 몰라?”
가까이서 보니 학생들은 인근 고등학교 출신인 듯했다. 이부키 또래거나 혹은 그보다 더 앳돼보였고, 모두 블레이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개중에 제대로 교복을 갖춰 입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우왁, 나타났다.”
“시끄러워, 할배!”
“신사에서 장난친 건 우리가 아니라고~”
남학생들은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어대더니 반대편 길로 우르르 들어섰다. 그러고는 택시 쪽을 뒤돌아보면서 손가락으로 욕을 날리는 것이었다. 발끈한 이부키가 벌떡 일어나자 택시기사가 말렸다.
“무시해.”
“그렇지만 저 녀석들이….”
“괜찮아, 괜찮아.”
택시가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택시기사는 속도를 줄이면서 말했다.
“가끔 있어. 신사를 돌아다니는 젊은 애들 말이야.”
“저 녀석들, 방금 엄청나게 쓰레기 같이 굴었다고요?”
“뭐,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들은 아니야. 이해해주렴. 시골 마을이니까 다들 좀이 쑤시는 거겠지. 특히 고교생이면 한창 피가 끓어오를 시기니까.”
이부키는 불만스럽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 기댔다.
“차 안만 아니었어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갈겨주는 건데!”
택시기사가 껄껄 웃어댔다.
“그러면 안 되지, 라이오카는 생각보다 소문이 빨리 퍼지는 곳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교사들한테 찍히면 고교생활이 괴로워질 걸?”
“아아, 도쿄에서든 라이오카에서든 교사들이란 건 다 거기서 거기구만.”
잠깐이지만 이부키는 말이 없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쓸하게 흔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주변은 다 블레이저에요?”
“응?”
“교복이요, 교복.”
“아아, 그렇지. 블레이저야.”
“가쿠란은?”
택시기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없는 것 같은데….”
“아, 망했다! 나 가쿠란 뿐인데!”
택시가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한 인영이 신사 뒤쪽에서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흙투성이 발을 질질 끌면서 토리이까지 걸어오다가 멈추어 섰다. 멀어지는 택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한동안 흐느끼더니 이내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택시의 엔진소리가 멀어졌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숲속에서 풀벌레가 울기 시작했다.
2
시마 카즈미는 잠을 설쳤다. 새벽 내내 이유 없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는 누군가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당기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오른손을 확인해보았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 그냥 시마의 기분 탓이었던 거다.
시마는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는 꿈자리가 사나워 종종 잠을 설치곤 했다. 주로 악몽 때문이었다. 다시 잠들어봤자 몇 시간 만에 헐떡이며 일어날 게 뻔했으므로 이런 때 시마는 그냥 잠드는 걸 포기하고 새벽 내내 공부를 하거나 게임을 했다. 이유 없이 잠을 설치는 건 드문 일이긴 했지만, 어차피 숙면하긴 글렀단 걸 직감한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시간 정도만 시간을 보내면 거실에서 밥 냄새가 올라올 테고, 그럼 교복을 입고 등교 준비를 하면 될 터였다.
시마가 교복을 입고 거실로 내려왔을 땐 셋째를 제외한 두 동생이 먼저 일어나 식탁에 앉아 있었다. 셋째는 아침잠이 많아서 오히려 앉아 있는 일이 드물었다.
“카즈미 꼴찌!”
“오늘은 카즈미 형이 붕어 밥 줘.”
시마가 넥타이를 뒤적이며 투덜댔다.
“왜 나까지만 순위로 치는 거야. 마사미 있잖아.”
“마사미는 언제나 지각이라서 논외야.”
“셋째 형은 붕어한테 밥 주는 거 너무 자주 까먹어.”
된장국을 만들던 엄마가 큰 소리로 외쳤다.
“카즈미! 올라가서 마사미 좀 깨우고 오렴.”
윽, 시마는 성가셔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네에.”
계단을 올라가고 있으니 엄마가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즈미도 참, 그냥 깨워서 같이 내려오면 좋을 텐데….”
‘그 녀석 잠버릇이 얼마나 고약한데요!’
장남인 마사카즈가 독립하기 전까지 시마는 세 동생들과 같은 방을 썼다. 자신만의 방을 갖게 된 건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형이 쓰던 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곳곳에 형의 취향이 묻어 있었다. 벽에 큼지막하게 붙은 락스타 포스터도 마사카즈의 것이었다. 시마는 포스터를 뗄까 하다가 오히려 벽지가 뜯어질 것 같아서 관두었고, 대신 그 위에 벽걸이를 부착해서 옷을 걸어두었다.
동생들 방을 열자 사내아이들 방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세 배로 진하게 풍겨져 왔다. 옷걸이는 텅 비어있는 대신 침대 헤드마다 온갖 옷이 산만하게 걸려 있었다.
셋째인 마사미는 벽에 얼굴을 박고 이불을 둘둘 만 채로 자고 있었다. 시마가 흔들어 깨우자 마사미는 얼굴을 한껏 구긴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고, 다시 한 번 흔들자 그 못된 잠버릇으로 시마의 손을 쳐내면서 성질을 부려대더니 결국 마지못해 실눈을 떴다.
“뭐냐고. 카즈미 형이야?”
“벌써 10분거든? 엄마가 내려와서 아침 먹으래.”
“왜 깨우는 거야. 왜 일어나야 되는 거야.”
“학교 가기 싫으면 다시 자던가. 난 깨웠다?”
마사미는 칭얼거리면서 흐느끼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꿈질거리며 일어났다.
“사는 거 어려워….”
“세상에 쉬운 일이 있겠냐? 얼른 일어나.”
마사미가 멍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동안 시마는 다시 넥타이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중학생 땐 매듭 자체에 박음질이 되어 있어 그냥 잡아당기기만 하면 됐는데 고등학교 교복은 직접 매듭을 묶어야하니 손에 익을 때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간신히 그럴싸한 구멍을 찾아 아래로 쭉 잡아당겼지만 매듭을 채 다 조이기도 전에 어딘지 엉성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정말로 세상에 쉬운 일이라곤 없네.
“카즈미 형….”
“뭐.”
“오늘 수업 끝나고 미츠유비 신사 좀 보고 오면 안 돼?”
넥타이를 풀면서 시마가 고개를 들었다.
“왜?”
“꿈에서 잉어가 그랬어. 난 부 활동 때문에 못 간단 말이야.”
“카즈미! 마사미!”
엄마 목소리에 두 아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알겠어.”
“부탁해. 잉어가 엄청나게 짜증냈단 말이야.”
“그거 그냥 개꿈 아냐? 신의 사자가 짜증내면 어쩌잔 거야.”
“아니거든! 원래 이런 꿈 꾸고 나면 아침에 무지막지하게 피곤하니까 확실해.”
시마가 방문을 나서며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넌 언제나 피곤하잖아!”
아침을 먹는 동안에도 소란은 계속됐다. 부산을 떨면서 네 아들들의 접시에 양배추 샐러드를 세 번이나 리필 한 엄마는 야채를 잘 먹어야 튼튼해진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행동은 막내를 절망케 했다. 넷째 아들은 겨우 야채를 해치웠는데 또 야채를 먹어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고, 마사미는 드레싱을 다섯 바퀴째 둘러대다가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었다. 이 소란 속에서 시마는 꿋꿋하게 자기 몫을 어떻게든 해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얘, 카즈미. 잠깐만!”
엄마는 시마의 엉성한 매듭을 풀곤 재빠른 솜씨로 넥타이를 고쳐주었다.
“정말, 나 없이 이 집이 어떻게 돌아가련지!”
불평하는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나는 걸 알아차린 시마는 별 다른 변명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시마는 누구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신발장 위에 놓인 붕어 밥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걷다가 연못에 가까워지자 조금 빨리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흐려서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수면에 비친 하늘이 잿빛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연못 분위기가 숙연했다. 시마는 밥을 까서 거꾸로 들고 서너 번 정도 탈탈 털어낸 뒤 잉어들이 몰려드는 걸 구경했다. 잠시 후 다리 너머에서 비단 잉어 떼가 나타났다. 퉁퉁한 몸과 부드러운 비늘의 자태를 드러내며 헤엄쳐 오는 이 잉어들은 산에서 사는 녀석들로, 아침이면 인근 주택가 연못까지 내려왔다가 저녁이 되면 숲으로 올라가는 습성이 있었다. 주민들은 토지신이 돌보는 물고기라 하여 이 잉어들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사실 그건 핑계에 가깝고 그냥 관상용으로 좋았기 때문인 이유가 컸다.
시마네 집안은 예로부터 신과 통하는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 걸 보거나 예지몽을 꾸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과거에는 신을 모시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일반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고, 시마 역시 영감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다만 할아버지 대代는 유난히 신통력이 강해 귀신을 물리치거나 액을 막는 일을 했었는데, 특히 시마의 할아버지가 마을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역사 속으로 잊혀가던 시마 가의 이력이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일으켜 세워진 듯했다. 덕분에 시마네 형제들은 어릴 적에 한 번씩은 길을 가던 주민들에게 터무니없는 부탁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집안에 액막이를 해달라던가, 요즘 꿈자리가 사나운데 해몽을 해달라던가, 죽은 아버지와 소통하게 해달라던가 하는 식이었다. 당연하지만 시마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시마는 이런 부탁에 오히려 능청을 떠는 처세술을 익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어나기 힘든 일도 몇 가지 존재했다. 이를테면 마쓰리에서 토지신의 가마를 짊어지는 선봉장 역할을 맡거나 잉어 밥을 주는 일이 그러했다. 뭐가 됐던 신을 모시던 집안이긴 하니까 그런 일만큼은 도맡아야 자연스러운 게 아니겠냐는 거였다. 하지만 그냥 달리 할 사람이 없으니 떠맡길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와선 주민들도 그저 습관처럼 농을 치며 시마 형제들에게 꿈자리니 액막이 얘길 꺼내는 것에 가까웠으므로, 연못에 서있던 시마에게 이웃집 아키코 할머니가 말을 건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매일 다른 색깔의 가디건을 입는 아키코 할머니는 오늘은 연두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연못을 지나가면서 반갑게 말했다.
“아아, 오늘은 둘째 아들이구나. 꼴찌로 일어났던?”
“늦잠 잔 녀석은 따로 있지만, 일단은요.”
밤잠을 설쳐서 내내 깨어 있다가 일부러 늦게 내려온 것뿐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제 꿈에서 황금색 시바 견을 봤는데 말이야, 이거 돈 들어온다는 징조겠지?”
아키코 할머니가 음흉하게 후후 웃자 시마가 능청맞게 대꾸했다.
“길다가 돈 줍는 꿈이네요. 산책하면서 잘 찾아보세요.”
“그래그래, 그렇게 해야지.”
시마는 연못 바위에서 뛰어내려와 가방을 주워들었다.
“가니?”
“가요!”
연못을 빠져나갈 때도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등굣길에 들어서자 다시 느긋해졌다.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서 서쪽 계단으로 빠진 뒤 다시 주택가를 걷다보면 학생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입학식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으므로 교복이 유달리 어색해 보이는 학생들은 죄다 1학년이었다. 시마는 자기도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교문을 막 넘었을 때, 뒤쪽에서 여러 명이 우다다 달려오더니 누군가 가방을 휙 잡아당겼다. 시마는 은은한 짜증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었다.
“시마!”
시마의 중학교 동창들이었다. 점심시간이면 같이 운동장에 모여 공을 차거나 방과후에 자연스럽게 섞여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으므로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시마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같은 주택가에 살고 있어서 좀 더 어릴 적부터 서로 알고 지낸 역사가 깊었다.
중학교 생활 내내 어울려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시마와 이들 사이에는 언제나 묘한 벽이 있었다. 시마 역시 이런 상황에서 소속감을 느끼려고 애쓰는 건 애석한 에너지 낭비일 뿐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괘념치 않고 그들이 자신을 찾을 때만 어울려 다녔다.
세 사람은 키 순서대로 렌지, 타이세이, 와타루라는 이름으로, 렌지는 겉으로 좀 늙어 보이는 데가 있어서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고교생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지만 셋 중에 철이 가장 덜 들었다. 타이세이는 엄청나게 웃긴 녀석이었지만 제 흥에 취하면 가끔 도가 지나쳤고, 와타루는 리액션이 좋았지만 분위기에 잘 휩쓸려서 사리분별을 못 하고 휘둘릴 때가 있었다. 따라서 중학생 시절 이들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건 언제나 시마의 몫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카스가라는 녀석이 합세했는데, 성격이 소심한 듯해도 성깔이 있고 충동적이라 이들 무리와 잘 어울려 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카스가가 보이질 않았다.
“카스가는?”
시마가 시선으로 뒤를 살펴보자 타이세이가 거칠게 말했다.
“몰라, 알아서 오겠지!”
“있지, 시마. 그보다 우리 액막이 좀 해주라!”
렌지가 조르듯이 시마의 가방을 흔들었다.
시마는 렌지를 떨쳐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또 무슨 일인데?”
“이 녀석들 신사 본전本殿에 들어갔어.”
와타루가 낄낄거리자 렌지와 타이세이가 불평했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야, 임마. 시마한테 혼나잖아.”
시마가 설명하라는 얼굴로 이들을 번갈아 보자 타이세이는 조금 죄책감을 느낀 듯했다.
“아니, 우리도 말이야. 일부러 들어간 건 아니라고?”
‘마사미가 말한 게 이거였나 보네.’
“장난으로라도 거긴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얼굴만 잠깐 넣었다 뺀 건데 그 정돈 괜찮지 않아?”
렌지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멀뚱멀뚱 서서 자신만 내려다보는 세 사람을 앞에 두고 시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츠유비엔 무슨 일로 간 건데?”
“오, 단번에 알아맞히다니 역시 ‘시마 가의 시마’인 거네요, 영감이란 거 무섭구만.”
“바보냐. 근처에 다녀올 수 있는 데가 거기밖에 더 돼?”
툴툴거린 시마가 아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거기서 뭘 했는데?”
와타루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있잖아, 시마. 너 카스가가 방학 동안 영감 개발한 거 알고 있었어?”
“하?”
“역시 너한텐 말 안했구나. 하긴, 너한텐 말해봤자 쓸데없는 짓 그만하라고 혼나기나 했을 테니까. 카스가 녀석, 방학 중에 갑자기 영감이 개발되었다면서 우리한테 시시콜콜 보고해댔단 말이지. 집에 혼자 있는데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일어났다는 둥, 거울에 이상한 그림자 같은 게 비친다는 둥… 처음엔 재밌어서 다들 엄청 호들갑 떨어댔는데, 점점 장난이 지나쳐선 오싹한 라인을 보내는 거야. 그런 거 있잖아? 넷에서 떠돌아다니는 귀짤 같은 거 연달아 보내기. 그때부터 답장하기 좀 그래서 몇 번 장단 맞추다 말았거든.”
와타루가 타이세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타이세이가 씩씩거리며 끼어들었다.
“그 녀석, 이제 그만하자고 했더니 그날 밤에 나한테 엄청나게 기분 나쁜 라인을 보냈다니까?”
타이세이가 카스가와의 일대일 라인 방을 눈앞에 내밀었다. 한 줄짜리 라인을 몇 번 주고받은 끝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겨 있었다.
‘이와키시 타이세이는 입학식 후 일주일 안에 차에 치이게 된다.’
‘하? 지금 싸우자는 거?’
‘예지몽이야. 개학하고 일주일 동안은 조심해.’
‘장난하지 마, 진짜로 기분 나쁘니까.’
“그래서 전화로 막 따졌더니 말이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면서, 그런데 자긴 장난치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진짜라는 거야. 나한테 엄청 나쁜 기운이 붙었다나. 그러면서 잘 될지 모르겠지만 제령을 해보겠다고 떠들어 대는 거 있지? 이 녀석 진짜 돌았네, 싶어서 ‘그럼 어디 해봐’라고 했더니 또 횡설수설하면서 영기를 담을 특별한 물건이 필요하는 둥 그게 없으면 역시 안 된다는 둥 하는 거야. 그럼 미츠유비에 있는 ‘키라키라겐’ 가지고 해보자고 했더니 그 녀석이 먼저 오케이 했다니까?”
시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키라키라겐’이라니….”
“왜, 있잖아. 오로치랑 싸울 때 썼다는 검 말이야. 진짜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그거 엄청 강한 신리神籬* 아니야?”
(*신도에서 신사나 신붕 이외의 장소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 임시로 신을 맞이하기 위한 빙대(憑代)가 되는 것)
시마는 어이없다는 듯 타이세이를 쳐다봤다.
“그런 게 있겠냐?”
“없어? 그럼 역시 아까 거기 텅 비어있던 거구나.”
시마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 타이세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민망하게 웃었다.
렌지가 말했다.
“우리들 오늘 카스가가 불러서 아침 일찍 미츠유비에 갔거든. 그랬더니 그 녀석이 본전 안으로 들어가려는 거야. 말리려고 했는데 도무지 듣질 않더라고. ‘보여준다니까, 이거 아니면 안 돼, 보여준다니까’라고 중얼중얼하는데 우와, 솔직히 좀 미친 놈 같았어! 그러더니 본전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쑥 들어가는 거야. 그런데 밖에서 봐도 안이 텅 비어 있길래 그만 나오라고 했더니 ‘아니야, 찾았어!’하고 뒤적뒤적해대. ‘봐, 봐! 여기 있잖아, 봐!’ 하길래 어쩔 수 없이 나랑 타이세이가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살펴봤는데 역시 아무것도 없잖아? 그 녀석 끝까지 거짓말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그만큼 어울려줬으면 그만해야 하는 거 아냐? 최악이다 싶었어. 어차피 본전 들어간 건 그 녀석뿐이고, 우린 거기 더 서 있다가 벌 받기 싫어서 그냥 뛰쳐나온 거야.”
시마가 놀라서 물었다.
“카스가는 아직 신사에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냐? 알아서 나왔겠지.”
타이세이가 코웃음을 치며 투덜거렸다.
“아까 메일 받았어. 혼자 두고 갔다고 엄청 뭐라고 해대던데!”
렌지가 발끈했다.
“뭐야, 그 녀석 양심 없네. 누구 때문에 신사 안쪽까지 들어간 건데?”
와타루는 조금 불안해보였다.
“나는 아까부터 어깨 무겁다고. 엄청 무섭다니까. 역시 재수 없는 짓을 해서 그런가? 어른들이 신사에서 장난치지 말라고 하는 게 괜히 하는 말이 아닌가봐.”
와타루가 두 손을 모았다.
“아무튼, 그러니까 액막이 좀 해주라 시마. 그거 있잖아? 그거.”
시마가 투덜거렸다.
“그거 효력 없다니까? 단순히 플라시보 효과 같은 거라고.”
와타루가 매달렸다.
“안 해주면 우리 오늘 큰일 날지도 몰라. 응?”
“한 번만 봐주라. 와타루 녀석 엄청 쫀 거 보이지? 렌지 녀석도 아까부터 어깨가 무겁다는 둥해서 나까지 찝찝하다고.”
타이세이가 말했다.
“앞으로 본전 근처는 얼씬도 안 할 테니까 부탁 좀 할게.”
시마가 세 사람을 못마땅한 듯 훑었다.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는 힐난의 눈빛이었다. 세 사람은 풀이 죽은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해줄 거지? 해주라. 해줄 거잖아, 응? 이들 세 사람은 시마가 ‘자긴 아무 힘도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누군가가 그가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힘을 필요로 할 때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연기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시마가 말했다.
“알겠으니까 여기 서봐.”
와타루가 활짝 웃었다.
“앗싸.”
“해줄 테니까 앞으로 그런 터무니없는 짓은 그만해.”
그러면서 시마는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대나무대 하나를 쑥 뽑아들었다.
이 대나무대는 야쿠오도시厄威し라고 불렀고, 상당히 나이를 먹은 대나무 세 마디를 잘라 만든 일종의 부적 대였다. 길이는 사십 센티미터 정도로 시마의 한 손에 간신히 감길 정도의 굵기였는데, 몸통은 누렇고 끝에는 전통 방식으로 매듭을 묶어 만든 붉은 노리개를 달고 있었다.
이 대나무대의 특징은 정중앙에 방울마냥 주둥이부터 전체 길이의 3분의 2 정도 되는 깊은 일자 홈이 파여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마가 대를 휘두르면 그 사이로 날카롭게 바람이 꼬집히고, 그것으로 바닥을 두드리면 타악기처럼 딱딱거리는 소음이 일어났다.
시마가 대나무대를 꺼내들자 세 사람이 기대에 찬 눈을 했다. 시마는 길게 한숨을 쉬며 세 사람을 흘겨보았다.
“뭔가 만지진 않았지?”
세 사람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시마가 대나무대를 휘둘러 세 사람의 양 어깨와 허리를 차례대로 가볍게 때리고 두들겼다. 야쿠오도시의 정중앙에 난 홈은 때릴 때마다 서로 맞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끝에 가서는 맑은 타악기 소리를 냈다.
렌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이거 하고나면 어깨가 가벼워지는 기분이라니까.”
“플라시보 효과라고 했잖아.”
학생들이 교문을 넘다말고 네 사람을 흘끔거리며 지나쳤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마가 방망이를 들고 키 큰 동급생 세 명을 훈육하는 모양새로 보였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이 마을 토박이인 이곳 학생들은 시마네가 가진 특수한 역사나 시마 형제들이 겪어온 지난 이력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광경을 일종의 만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 증거로 네 사람을 아무도 이상한 눈으로 흘끔거리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학교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
“옛썰.”
“땡큐 시마!”
“바이바이. 다음에 같이 축구하자!”
세 사람이 손을 흔들며 우르르 멀어졌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로 뛰는 세 사람의 어깨는 아까보다 훨씬 가볍고 편안해보였다. 시마는 손에 쥔 야쿠오도시를 한 번 탁탁 털어내다가 동작을 멈췄다. 카스가가 교문을 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거였다.
시마가 큰 소리로 불렀다.
“카스가!”
카스가는 흠칫 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결연한 의지처럼 보였다. 잠시 후 카스가가 운동장 반대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시마는 멀어지는 카스가의 등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야쿠오도시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1
라이오카정町의 명물은 언덕을 타고 핏줄기처럼 흐르는 해안도로였다. 이 해안도로는 약 25km 정도로 상당히 애매한 길이에 속했지만 국도와 연결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웃구区를 모조리 잇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국도는 주오구를 지나 히가시구까지 북쪽으로 쭉 이어졌고, 라이오카 주민들에게 있어 ‘해안도로’라는 것은 이 국도를 포함해 약 한 시간가량 동해의 냉혹한 파도와 절벽을 감상할 수 있는 도로 전반을 의미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얘기고, 주민들 입장에서 해안도로가 명물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라이오카정은 산세가 험하고 언덕이 많았는데, 해안도로 역시 약 10분마다 나타나는 네 개의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명물이라는 건 바로 그 언덕마다 끼고 있는 크고 작은 신사들을 말하는 거였다. 이 구간을 ‘오카미사마노미기테(신님의 오른손)’, 줄여서 ‘미기테’라고 불렀다.
차를 몰아 미기테를 넘다 보면 우측으로 펼쳐진 숲과 나무에 가려진 토리이, 그리고 작은 배전拝殿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오싹하기보다 무수한 연잎 사이로 피어난 연꽃 한 송이를 찾아내는 것처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일으키는 풍경이었다. 토박이 주민들 사이에선 미기테를 넘어갈 즈음 신사의 주인인 토지신을 향해 짧게 인사를 드리는 풍습이 내려져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역사를 알 리가 없는 이부키 아이는 언덕을 넘는 동안 택시기사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인사말을 듣곤 깜짝 놀랐다.
“에에에, 뭐야. 방금 뭐에요?”
이부키는 택시기사가 흘끔거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둥글게 솟아오른 가파른 언덕 위에 붉은 토리이가 언뜻 보인 것도 같았다. 제대로 보려고 고개를 홱 틀었지만 택시는 벌써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속력을 줄이며 택시기사가 말했다.
“이 마을에서 내려오는 풍습이야. 신에게 인사드리는 거지.”
“신?”
이부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지었다.
“아, 혹시 아까 본 게 신사?”
“맞아. 학생 눈이 좋네. 엄청 빨리 스쳐갔는데 말이야.”
택시기사가 감탄하며 설명했다.
“저 신사는 이 라이오카 일대를 누르고 있는 토지신님을 모시는 곳이야.”
“헤에~ 토지신이구나.”
“도쿄엔 없던가?”
“없어요, 없어. 음~ 아니다, 있나?”
이부키는 끙끙거리다 결론지었다.
“없음!”
“아마 구석진 곳엔 있을 지도 몰라. 오래된 나무가 있거나 산을 메우지 않은 장소에는 어디든 토지신이 있으니까.”
가드레일 너머로 깎아지른 절벽과 바다가 나타나자 이부키의 기분도 들뜨기 시작했다. 도쿄 출신인 그는 살면서 이런 종류의 바다를 볼 일이 별로 없었다. 남청색 파도가 암벽에 부딪쳐 소용돌이 치고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광경에서 강력한 자연의 힘이 느껴졌다.
“라이오카 좋구만~”
“이삿짐은 도착했니?”
“엉, 어제 도착했다고 할머니한테 연락 받았어요.”
“그럼 앞으로 쭉 할머님하고 지내는 거야?”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좁아터진 조수석에 다리를 구겨 앉으며 이부키가 씩 웃었다.
“딱 2년 8개월 출장이니까. 초-의젓한 아이짱 덕분에 엄마도 안심!”
눈치 빠른 택시기사는 이부키가 슬쩍 생략한 아버지 얘길 캐묻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곧 언덕을 지나는데, 거기에도 신사가 있어. 아직 우린 미기테右手 위거든. 보고 싶다면 천천히 지나갈게.”
“오른손右手?”
“신님의 오른손大神様の右手이야. 저기 보이니?”
택시기사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에 듬성듬성 솟아오른 언덕이 나타났다. 아직 신사는 보이지 않았다.
“미기테를 완전히 지나려면 방금 지나온 것부터 앞으로 언덕 세 개는 더 넘어야 해. 두 번째 것이 가장 가팔라서 그야말로 중지中指란다.”
“에에, 잠깐만. 하나, 둘, 셋… 아, 맞네. 봐봐, 그래봤자 네 개잖아요? 손가락 하나는 어디로 간 거야?”
택시기사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주먹을 쥐어 봐. 언덕이 몇 개지?”
이부키는 주먹을 쥐어보려다 무릎을 때리며 박수를 쳤다.
“아, 이해했다, 이해했다.”
“뭐, 그런 이유도 있고 실제로 이곳 토지신에겐 손가락 하나가 없거든.”
택시가 커브 길을 돌면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택시기사는 꺾어놓은 핸들을 풀면서 얘기를 이어나갔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마을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일대는 거대한 바다뱀이 다스리는 영역이었다는 거야. 마을을 세우고 싶어도 부락만 들어섰다하면 그 요괴가 파도를 보내 쑥대밭을 만들어 버리니 다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대. 그때 그 요괴가 조건을 걸었는데, 보름마다 젊은 청년을 한 명씩, 총 다섯 명을 산 제물로 바치면 해안을 평화롭게 해준다는 거였어. 횡포에 지친 마을 사람들은 그러겠다고 약속했지. 지금이야 끔찍한 얘기지만, 그땐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을 거야. 바닷물이 들어오는 바람에 벼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토사가 쓸려가는 바람에 지붕을 올려도 모조리 무너지니 분명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굶거나 얼어 죽었겠지.”
“모두를 위해 죽을 녀석을 뽑자! 는 전개인가. 너무하네.”
“그렇지? 그래도 사람들은 그걸 선택했어. 약속대로 보름마다 젊은 청년을 한 명씩 붙잡아 산 제물로서 해안가 깊숙한 동굴에 두고 돌아왔대. 그렇게 제물을 올리는 것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지막 보름날만 남겨놓고 있을 때였어. 이런 짓을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문이 나타났어. 요괴와 한 약속 같은 건 지켜선 안 된다면서. 그 가문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어.”
가드레일 너머로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제물을 바친다는 건 말이야, 섬기겠다는 약속 같은 거야. 마을 전체가 그 요괴를 오로치オロチ신으로 섬기겠다는 약속이었던 거지. 그 가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반대했어. 마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런 짓은 그만둬야한다고, 그런 약속을 이유로 더는 죄 없는 청년을 죽여선 안 된다면서. ‘이제 와서 어쩔 거냐?’ 마을 사람들이 묻자 그 집 장남이 대답했어. ‘토지신을 일으켜 세우자. 우리 가문이 신사를 짓겠다.’ 당시엔 신이 자리 잡을 만한 터가 없었거든. 파도가 산을 쓸면 나무가 쓰러지고 오래된 바위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곤 했으니까, 당연하지만 신사도 짓지 못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걸 그 가문이 하겠다고 나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신사를 짓겠다. 집안 재산을 전부 털어서라도, 그로 인해 설령 가문이 망하게 될 지라도.’”
이부키가 흡족하게 중얼거렸다.
“헤에, 히어로구만.”
“그 결연한 각오에 마침내 마을 사람들도 설득되었어. 그러자 그 가문은 집안사람들을 전부 불러 모아, 마지막 보름 동안 신사를 지을 자재들을 준비하기 시작했어. 그 가문은 정말로 마을과의 약속을 지켰어. 온 재산을 쏟아 부어서 파도가 닿지 않을 만큼 높은 지대에 신사 다섯 채를 세울 토대를 닦았다고 해. 그 의지에 감화된 마을 젊은이들이 공사를 돕기 시작해, 마침내 그 보름 동안 해안을 굽이 보는 네 언덕 위에 각각 신사가 지어졌어. 신사가 완공된 후, 사람들은 제물이 된 청년들의 넋을 기리는 불단을 세우고 오랫동안 기도를 올렸다고 해.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다섯 번째 신사가 완성되기 전에 그만 보름이 되고 만 거야.”
완전히 빠져든 이부키가 택시기사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 가문의 장남이 다섯 번째 신사에 들어갔어.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신사에 말이야. 거기서 밤을 새우며 그 뱀 요괴를 기다렸어. 내 생각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을 땐 그가 대신 산 제물로서 죽을 생각을 한 건 아닌가 싶어. 어쨌든, 그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 한참을 기다렸을까, 갑자기 잠이 쏟아졌어. 이상한 일이었어. 깊은 밤이라고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입장이니까. 바짝 긴장해있었는데도 눈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서, 결국 장남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남은 낯선 구릉 위에 서 있었대. 눈앞엔 아주 작은 신사 한 채가 들어서있었어. 어쩐지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 것만 같아, 장남은 문을 열고 신사 안으로 들어갔어.
그 안에선 하얀 옷감으로 지은 기모노에 새까만 오비를 두른 소녀가 앉아서 실을 잣고 있었어. 일어서봤자 장남의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을 것처럼 작은 소녀였어. 그런데도 그는 소녀가 신이라는 걸 바로 알아보았다고 해. 장남이 무릎을 꿇자 소녀가 말했어. ‘너는 오늘 오로치와 싸우다 죽는다. 그것이 가여워 내가 너를 돕겠다. 그러나 나는 여기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내쫓을 만큼의 신통력이 없다. 너 역시 나를 도와라.’ 장남은 그러겠다고 했어. 그러자 소녀는 잣고 있던 실로 장남의 새끼손가락을 묶고 말했어. ‘술을 네 통으로 나누어 담아라. 오로치가 그걸 전부 마실 때까지 절대 바깥으로 나오지 마라. 오로치가 잠들면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눈앞에 누가 가져다 놨는지도 모를 큰 술통이 세워져 있었어. 장남은 그 술을 네 통으로 나누어 담은 뒤 나머지 일은 하늘에 맡겼어. 그리고 마침내 오로치가 왔지.”
촛불이 꺼지고 공기가 갑자기 서늘해졌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가 창호지 너머로 일렁이는 거대한 뱀의 그림자를 보았으리라. 그러면 그는 결연한 얼굴로 옆에 놓인 칼을 붙잡았을 것이다.
이부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장남은 조용히 칼을 뽑았어. 어떻게든 오로치를 죽여 볼 생각이었던 거야. 맞서 싸우려고 한 거지. 오로치는 한참을 바깥에서 서성거리다가 술통을 뒤적이기 시작했어. 창호지 너머로 네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가 술통 안으로 미끄러졌어. 오로치는 머리를 네 개나 갖고 있던 거야! 머리들이 게걸스럽게 술을 들이키는 소리가 꼭 파도가 소용돌이치며 일으키는 굉음처럼 울려 퍼졌어. 정말로 무시무시한 소리였어. 용감하게 맞서 싸우려던 장남마저 칼을 쥔 손을 바들바들 떨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술통을 통째로 들이킨 오로치의 머리들이 하나 둘 곯아떨어지기 시작했어. 한 놈 한 놈의 숨소리가 달랐어. 장남은 네 개의 코골이가 울려 퍼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왔어. 그래,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오로치가 잠들면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라는 신의 말씀을 그만 깜빡하고 만 거야.
장남이 밖으로 나온 순간, 오로치와 성인 남자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신사의 마루가 무너지면서 문짝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어. 장남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어. 어둠 속에서 드러난 오로치는 정말이지 끔찍한 모습이었어. 배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고 곯아떨어진 네 개의 머리는 다름 아닌 마을 사람들이 제물로 바친 네 명의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리고 그 머리들 사이에서, 새까만 목을 가진 뱀의 머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어. 그 모습을 본 장남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어. 그 머리는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뱀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만약 장남이 죽게 되면 그곳에 그의 얼굴이 매달리게 될 거였지. 뱀의 두 눈이 새빨갛게 이글거리고 있었어. 그때 누군가가 장남의 머릿속으로 들어왔어. 그러자 불가사이 할 만큼 정신이 맑아지고 온몸에서 힘이 솟구쳤어. 마침 오로치의 다섯 번째 머리가 덤벼들어왔어. 장남은 칼을 휘둘러 오로치의 왼눈을 찔렀어. 검은 피가 솟구치면서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산을 뒤흔들었어. 오로치가 온몸을 꿈틀거리며 머리를 흔들어대자 장남은 필사적으로 칼에 매달렸어.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더니 어느새 장남은 아까 꿈에서 본 그 신사에 앉아 있었어. 소녀는 엄지에 실을 친친 감고 있었어. 그러고는 말했어. ‘너를 살렸으니 이곳에는 신사를 세우지 마라.’ 그러더니 동여매던 실을 양쪽으로 잡아당겨 오른손 엄지를 끊어버렸어.
정신을 차렸을 때 장남은 언덕과 조금 떨어진 편평한 바위에 누워있었대. 다섯 번째 신사는 언덕과 함께 통째로 무너져 내려, 흔적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어. 토사가 모조리 해변으로 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그 부근은 평지가 되었어. 장남은 신의 뜻을 받들어 그곳에 신사를 세우지 않았어. 대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마침내 오랜 염원대로 마을이 이루어졌어. 그곳이 바로 오늘날의 라이오카정이지. 그리고 나머지 네 언덕이….”
“미-기-테右手!”
이부키가 신나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저 앞에 보이는 언덕이 신님의 가운뎃손가락인 거구나, 맞죠?”
“그래. 저기가 신사야. 보이니?”
“으으음~”
가파른 도로 우측으로 울창한 숲이 나타났다. 이부키는 손차양을 만들어 전면을 기웃거리다 꼭대기에 세워진 토리이와 신사의 지붕을 발견하곤 소리쳤다.
“아, 있다, 있다!”
“인사를 드리고 싶다면 해도 돼.”
“좋았어, 나도 인사나 드려볼까!”
택시가 언덕 꼭대기에 도달했을 즈음,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신사 계단을 뛰어내려오다 이부키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낄낄거리며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오더니 서로를 발로 걷어차면서 큰 소리로 고래고래 질러댔다.
“젠장!”
“최악이지~”
“그냥 죽어라!”
택시기사가 창문을 내렸다.
“어이, 너희들! 신사에서 장난치면 안 된다는 거 몰라?”
가까이서 보니 학생들은 인근 고등학교 출신인 듯했다. 이부키 또래거나 혹은 그보다 더 앳돼보였고, 모두 블레이저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개중에 제대로 교복을 갖춰 입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우왁, 나타났다.”
“시끄러워, 할배!”
“신사에서 장난친 건 우리가 아니라고~”
남학생들은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어대더니 반대편 길로 우르르 들어섰다. 그러고는 택시 쪽을 뒤돌아보면서 손가락으로 욕을 날리는 것이었다. 발끈한 이부키가 벌떡 일어나자 택시기사가 말렸다.
“무시해.”
“그렇지만 저 녀석들이….”
“괜찮아, 괜찮아.”
택시가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택시기사는 속도를 줄이면서 말했다.
“가끔 있어. 신사를 돌아다니는 젊은 애들 말이야.”
“저 녀석들, 방금 엄청나게 쓰레기 같이 굴었다고요?”
“뭐,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들은 아니야. 이해해주렴. 시골 마을이니까 다들 좀이 쑤시는 거겠지. 특히 고교생이면 한창 피가 끓어오를 시기니까.”
이부키는 불만스럽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의자에 기댔다.
“차 안만 아니었어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갈겨주는 건데!”
택시기사가 껄껄 웃어댔다.
“그러면 안 되지, 라이오카는 생각보다 소문이 빨리 퍼지는 곳이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교사들한테 찍히면 고교생활이 괴로워질 걸?”
“아아, 도쿄에서든 라이오카에서든 교사들이란 건 다 거기서 거기구만.”
잠깐이지만 이부키는 말이 없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쓸하게 흔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주변은 다 블레이저에요?”
“응?”
“교복이요, 교복.”
“아아, 그렇지. 블레이저야.”
“가쿠란은?”
택시기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없는 것 같은데….”
“아, 망했다! 나 가쿠란 뿐인데!”
택시가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한 인영이 신사 뒤쪽에서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흙투성이 발을 질질 끌면서 토리이까지 걸어오다가 멈추어 섰다. 멀어지는 택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한동안 흐느끼더니 이내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택시의 엔진소리가 멀어졌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숲속에서 풀벌레가 울기 시작했다.
2
시마 카즈미는 잠을 설쳤다. 새벽 내내 이유 없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 때는 누군가가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당기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오른손을 확인해보았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 그냥 시마의 기분 탓이었던 거다.
시마는 이런 일이 낯설지 않았다. 평소에도 그는 꿈자리가 사나워 종종 잠을 설치곤 했다. 주로 악몽 때문이었다. 다시 잠들어봤자 몇 시간 만에 헐떡이며 일어날 게 뻔했으므로 이런 때 시마는 그냥 잠드는 걸 포기하고 새벽 내내 공부를 하거나 게임을 했다. 이유 없이 잠을 설치는 건 드문 일이긴 했지만, 어차피 숙면하긴 글렀단 걸 직감한 그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시간 정도만 시간을 보내면 거실에서 밥 냄새가 올라올 테고, 그럼 교복을 입고 등교 준비를 하면 될 터였다.
시마가 교복을 입고 거실로 내려왔을 땐 셋째를 제외한 두 동생이 먼저 일어나 식탁에 앉아 있었다. 셋째는 아침잠이 많아서 오히려 앉아 있는 일이 드물었다.
“카즈미 꼴찌!”
“오늘은 카즈미 형이 붕어 밥 줘.”
시마가 넥타이를 뒤적이며 투덜댔다.
“왜 나까지만 순위로 치는 거야. 마사미 있잖아.”
“마사미는 언제나 지각이라서 논외야.”
“셋째 형은 붕어한테 밥 주는 거 너무 자주 까먹어.”
된장국을 만들던 엄마가 큰 소리로 외쳤다.
“카즈미! 올라가서 마사미 좀 깨우고 오렴.”
윽, 시마는 성가셔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네에.”
계단을 올라가고 있으니 엄마가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즈미도 참, 그냥 깨워서 같이 내려오면 좋을 텐데….”
‘그 녀석 잠버릇이 얼마나 고약한데요!’
장남인 마사카즈가 독립하기 전까지 시마는 세 동생들과 같은 방을 썼다. 자신만의 방을 갖게 된 건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형이 쓰던 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곳곳에 형의 취향이 묻어 있었다. 벽에 큼지막하게 붙은 락스타 포스터도 마사카즈의 것이었다. 시마는 포스터를 뗄까 하다가 오히려 벽지가 뜯어질 것 같아서 관두었고, 대신 그 위에 벽걸이를 부착해서 옷을 걸어두었다.
동생들 방을 열자 사내아이들 방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세 배로 진하게 풍겨져 왔다. 옷걸이는 텅 비어있는 대신 침대 헤드마다 온갖 옷이 산만하게 걸려 있었다.
셋째인 마사미는 벽에 얼굴을 박고 이불을 둘둘 만 채로 자고 있었다. 시마가 흔들어 깨우자 마사미는 얼굴을 한껏 구긴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고, 다시 한 번 흔들자 그 못된 잠버릇으로 시마의 손을 쳐내면서 성질을 부려대더니 결국 마지못해 실눈을 떴다.
“뭐냐고. 카즈미 형이야?”
“벌써 10분거든? 엄마가 내려와서 아침 먹으래.”
“왜 깨우는 거야. 왜 일어나야 되는 거야.”
“학교 가기 싫으면 다시 자던가. 난 깨웠다?”
마사미는 칭얼거리면서 흐느끼는 소리를 내더니 결국 꿈질거리며 일어났다.
“사는 거 어려워….”
“세상에 쉬운 일이 있겠냐? 얼른 일어나.”
마사미가 멍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동안 시마는 다시 넥타이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중학생 땐 매듭 자체에 박음질이 되어 있어 그냥 잡아당기기만 하면 됐는데 고등학교 교복은 직접 매듭을 묶어야하니 손에 익을 때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간신히 그럴싸한 구멍을 찾아 아래로 쭉 잡아당겼지만 매듭을 채 다 조이기도 전에 어딘지 엉성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 정말로 세상에 쉬운 일이라곤 없네.
“카즈미 형….”
“뭐.”
“오늘 수업 끝나고 미츠유비 신사 좀 보고 오면 안 돼?”
넥타이를 풀면서 시마가 고개를 들었다.
“왜?”
“꿈에서 잉어가 그랬어. 난 부 활동 때문에 못 간단 말이야.”
“카즈미! 마사미!”
엄마 목소리에 두 아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알겠어.”
“부탁해. 잉어가 엄청나게 짜증냈단 말이야.”
“그거 그냥 개꿈 아냐? 신의 사자가 짜증내면 어쩌잔 거야.”
“아니거든! 원래 이런 꿈 꾸고 나면 아침에 무지막지하게 피곤하니까 확실해.”
시마가 방문을 나서며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넌 언제나 피곤하잖아!”
아침을 먹는 동안에도 소란은 계속됐다. 부산을 떨면서 네 아들들의 접시에 양배추 샐러드를 세 번이나 리필 한 엄마는 야채를 잘 먹어야 튼튼해진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행동은 막내를 절망케 했다. 넷째 아들은 겨우 야채를 해치웠는데 또 야채를 먹어야 하는 건 부당하다고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고, 마사미는 드레싱을 다섯 바퀴째 둘러대다가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었다. 이 소란 속에서 시마는 꿋꿋하게 자기 몫을 어떻게든 해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얘, 카즈미. 잠깐만!”
엄마는 시마의 엉성한 매듭을 풀곤 재빠른 솜씨로 넥타이를 고쳐주었다.
“정말, 나 없이 이 집이 어떻게 돌아가련지!”
불평하는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나는 걸 알아차린 시마는 별 다른 변명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시마는 누구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신발장 위에 놓인 붕어 밥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걷다가 연못에 가까워지자 조금 빨리 걷기 시작했다. 날씨가 흐려서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수면에 비친 하늘이 잿빛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연못 분위기가 숙연했다. 시마는 밥을 까서 거꾸로 들고 서너 번 정도 탈탈 털어낸 뒤 잉어들이 몰려드는 걸 구경했다. 잠시 후 다리 너머에서 비단 잉어 떼가 나타났다. 퉁퉁한 몸과 부드러운 비늘의 자태를 드러내며 헤엄쳐 오는 이 잉어들은 산에서 사는 녀석들로, 아침이면 인근 주택가 연못까지 내려왔다가 저녁이 되면 숲으로 올라가는 습성이 있었다. 주민들은 토지신이 돌보는 물고기라 하여 이 잉어들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사실 그건 핑계에 가깝고 그냥 관상용으로 좋았기 때문인 이유가 컸다.
시마네 집안은 예로부터 신과 통하는 힘이 있어 보이지 않는 걸 보거나 예지몽을 꾸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과거에는 신을 모시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일반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고, 시마 역시 영감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다만 할아버지 대代는 유난히 신통력이 강해 귀신을 물리치거나 액을 막는 일을 했었는데, 특히 시마의 할아버지가 마을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역사 속으로 잊혀가던 시마 가의 이력이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 일으켜 세워진 듯했다. 덕분에 시마네 형제들은 어릴 적에 한 번씩은 길을 가던 주민들에게 터무니없는 부탁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집안에 액막이를 해달라던가, 요즘 꿈자리가 사나운데 해몽을 해달라던가, 죽은 아버지와 소통하게 해달라던가 하는 식이었다. 당연하지만 시마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시마는 이런 부탁에 오히려 능청을 떠는 처세술을 익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어나기 힘든 일도 몇 가지 존재했다. 이를테면 마쓰리에서 토지신의 가마를 짊어지는 선봉장 역할을 맡거나 잉어 밥을 주는 일이 그러했다. 뭐가 됐던 신을 모시던 집안이긴 하니까 그런 일만큼은 도맡아야 자연스러운 게 아니겠냐는 거였다. 하지만 그냥 달리 할 사람이 없으니 떠맡길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와선 주민들도 그저 습관처럼 농을 치며 시마 형제들에게 꿈자리니 액막이 얘길 꺼내는 것에 가까웠으므로, 연못에 서있던 시마에게 이웃집 아키코 할머니가 말을 건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매일 다른 색깔의 가디건을 입는 아키코 할머니는 오늘은 연두색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연못을 지나가면서 반갑게 말했다.
“아아, 오늘은 둘째 아들이구나. 꼴찌로 일어났던?”
“늦잠 잔 녀석은 따로 있지만, 일단은요.”
밤잠을 설쳐서 내내 깨어 있다가 일부러 늦게 내려온 것뿐이라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제 꿈에서 황금색 시바 견을 봤는데 말이야, 이거 돈 들어온다는 징조겠지?”
아키코 할머니가 음흉하게 후후 웃자 시마가 능청맞게 대꾸했다.
“길다가 돈 줍는 꿈이네요. 산책하면서 잘 찾아보세요.”
“그래그래, 그렇게 해야지.”
시마는 연못 바위에서 뛰어내려와 가방을 주워들었다.
“가니?”
“가요!”
연못을 빠져나갈 때도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등굣길에 들어서자 다시 느긋해졌다.
경사가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서 서쪽 계단으로 빠진 뒤 다시 주택가를 걷다보면 학생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입학식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으므로 교복이 유달리 어색해 보이는 학생들은 죄다 1학년이었다. 시마는 자기도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교문을 막 넘었을 때, 뒤쪽에서 여러 명이 우다다 달려오더니 누군가 가방을 휙 잡아당겼다. 시마는 은은한 짜증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었다.
“시마!”
시마의 중학교 동창들이었다. 점심시간이면 같이 운동장에 모여 공을 차거나 방과후에 자연스럽게 섞여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으므로 친한 사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시마를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같은 주택가에 살고 있어서 좀 더 어릴 적부터 서로 알고 지낸 역사가 깊었다.
중학교 생활 내내 어울려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시마와 이들 사이에는 언제나 묘한 벽이 있었다. 시마 역시 이런 상황에서 소속감을 느끼려고 애쓰는 건 애석한 에너지 낭비일 뿐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괘념치 않고 그들이 자신을 찾을 때만 어울려 다녔다.
세 사람은 키 순서대로 렌지, 타이세이, 와타루라는 이름으로, 렌지는 겉으로 좀 늙어 보이는 데가 있어서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고교생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지만 셋 중에 철이 가장 덜 들었다. 타이세이는 엄청나게 웃긴 녀석이었지만 제 흥에 취하면 가끔 도가 지나쳤고, 와타루는 리액션이 좋았지만 분위기에 잘 휩쓸려서 사리분별을 못 하고 휘둘릴 때가 있었다. 따라서 중학생 시절 이들에게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건 언제나 시마의 몫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카스가라는 녀석이 합세했는데, 성격이 소심한 듯해도 성깔이 있고 충동적이라 이들 무리와 잘 어울려 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카스가가 보이질 않았다.
“카스가는?”
시마가 시선으로 뒤를 살펴보자 타이세이가 거칠게 말했다.
“몰라, 알아서 오겠지!”
“있지, 시마. 그보다 우리 액막이 좀 해주라!”
렌지가 조르듯이 시마의 가방을 흔들었다.
시마는 렌지를 떨쳐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또 무슨 일인데?”
“이 녀석들 신사 본전本殿에 들어갔어.”
와타루가 낄낄거리자 렌지와 타이세이가 불평했다.
“그걸 말하면 어떡해?”
“야, 임마. 시마한테 혼나잖아.”
시마가 설명하라는 얼굴로 이들을 번갈아 보자 타이세이는 조금 죄책감을 느낀 듯했다.
“아니, 우리도 말이야. 일부러 들어간 건 아니라고?”
‘마사미가 말한 게 이거였나 보네.’
“장난으로라도 거긴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
“얼굴만 잠깐 넣었다 뺀 건데 그 정돈 괜찮지 않아?”
렌지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멀뚱멀뚱 서서 자신만 내려다보는 세 사람을 앞에 두고 시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츠유비엔 무슨 일로 간 건데?”
“오, 단번에 알아맞히다니 역시 ‘시마 가의 시마’인 거네요, 영감이란 거 무섭구만.”
“바보냐. 근처에 다녀올 수 있는 데가 거기밖에 더 돼?”
툴툴거린 시마가 아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니까. 거기서 뭘 했는데?”
와타루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있잖아, 시마. 너 카스가가 방학 동안 영감 개발한 거 알고 있었어?”
“하?”
“역시 너한텐 말 안했구나. 하긴, 너한텐 말해봤자 쓸데없는 짓 그만하라고 혼나기나 했을 테니까. 카스가 녀석, 방학 중에 갑자기 영감이 개발되었다면서 우리한테 시시콜콜 보고해댔단 말이지. 집에 혼자 있는데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일어났다는 둥, 거울에 이상한 그림자 같은 게 비친다는 둥… 처음엔 재밌어서 다들 엄청 호들갑 떨어댔는데, 점점 장난이 지나쳐선 오싹한 라인을 보내는 거야. 그런 거 있잖아? 넷에서 떠돌아다니는 귀짤 같은 거 연달아 보내기. 그때부터 답장하기 좀 그래서 몇 번 장단 맞추다 말았거든.”
와타루가 타이세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타이세이가 씩씩거리며 끼어들었다.
“그 녀석, 이제 그만하자고 했더니 그날 밤에 나한테 엄청나게 기분 나쁜 라인을 보냈다니까?”
타이세이가 카스가와의 일대일 라인 방을 눈앞에 내밀었다. 한 줄짜리 라인을 몇 번 주고받은 끝에 두 사람의 대화는 끊겨 있었다.
‘이와키시 타이세이는 입학식 후 일주일 안에 차에 치이게 된다.’
‘하? 지금 싸우자는 거?’
‘예지몽이야. 개학하고 일주일 동안은 조심해.’
‘장난하지 마, 진짜로 기분 나쁘니까.’
“그래서 전화로 막 따졌더니 말이야.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면서, 그런데 자긴 장난치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진짜라는 거야. 나한테 엄청 나쁜 기운이 붙었다나. 그러면서 잘 될지 모르겠지만 제령을 해보겠다고 떠들어 대는 거 있지? 이 녀석 진짜 돌았네, 싶어서 ‘그럼 어디 해봐’라고 했더니 또 횡설수설하면서 영기를 담을 특별한 물건이 필요하는 둥 그게 없으면 역시 안 된다는 둥 하는 거야. 그럼 미츠유비에 있는 ‘키라키라겐’ 가지고 해보자고 했더니 그 녀석이 먼저 오케이 했다니까?”
시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키라키라겐’이라니….”
“왜, 있잖아. 오로치랑 싸울 때 썼다는 검 말이야. 진짜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그거 엄청 강한 신리神籬* 아니야?”
(*신도에서 신사나 신붕 이외의 장소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 임시로 신을 맞이하기 위한 빙대(憑代)가 되는 것)
시마는 어이없다는 듯 타이세이를 쳐다봤다.
“그런 게 있겠냐?”
“없어? 그럼 역시 아까 거기 텅 비어있던 거구나.”
시마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 타이세이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민망하게 웃었다.
렌지가 말했다.
“우리들 오늘 카스가가 불러서 아침 일찍 미츠유비에 갔거든. 그랬더니 그 녀석이 본전 안으로 들어가려는 거야. 말리려고 했는데 도무지 듣질 않더라고. ‘보여준다니까, 이거 아니면 안 돼, 보여준다니까’라고 중얼중얼하는데 우와, 솔직히 좀 미친 놈 같았어! 그러더니 본전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쑥 들어가는 거야. 그런데 밖에서 봐도 안이 텅 비어 있길래 그만 나오라고 했더니 ‘아니야, 찾았어!’하고 뒤적뒤적해대. ‘봐, 봐! 여기 있잖아, 봐!’ 하길래 어쩔 수 없이 나랑 타이세이가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살펴봤는데 역시 아무것도 없잖아? 그 녀석 끝까지 거짓말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그만큼 어울려줬으면 그만해야 하는 거 아냐? 최악이다 싶었어. 어차피 본전 들어간 건 그 녀석뿐이고, 우린 거기 더 서 있다가 벌 받기 싫어서 그냥 뛰쳐나온 거야.”
시마가 놀라서 물었다.
“카스가는 아직 신사에 있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냐? 알아서 나왔겠지.”
타이세이가 코웃음을 치며 투덜거렸다.
“아까 메일 받았어. 혼자 두고 갔다고 엄청 뭐라고 해대던데!”
렌지가 발끈했다.
“뭐야, 그 녀석 양심 없네. 누구 때문에 신사 안쪽까지 들어간 건데?”
와타루는 조금 불안해보였다.
“나는 아까부터 어깨 무겁다고. 엄청 무섭다니까. 역시 재수 없는 짓을 해서 그런가? 어른들이 신사에서 장난치지 말라고 하는 게 괜히 하는 말이 아닌가봐.”
와타루가 두 손을 모았다.
“아무튼, 그러니까 액막이 좀 해주라 시마. 그거 있잖아? 그거.”
시마가 투덜거렸다.
“그거 효력 없다니까? 단순히 플라시보 효과 같은 거라고.”
와타루가 매달렸다.
“안 해주면 우리 오늘 큰일 날지도 몰라. 응?”
“한 번만 봐주라. 와타루 녀석 엄청 쫀 거 보이지? 렌지 녀석도 아까부터 어깨가 무겁다는 둥해서 나까지 찝찝하다고.”
타이세이가 말했다.
“앞으로 본전 근처는 얼씬도 안 할 테니까 부탁 좀 할게.”
시마가 세 사람을 못마땅한 듯 훑었다.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는 힐난의 눈빛이었다. 세 사람은 풀이 죽은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해줄 거지? 해주라. 해줄 거잖아, 응? 이들 세 사람은 시마가 ‘자긴 아무 힘도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누군가가 그가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힘을 필요로 할 때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연기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시마가 말했다.
“알겠으니까 여기 서봐.”
와타루가 활짝 웃었다.
“앗싸.”
“해줄 테니까 앞으로 그런 터무니없는 짓은 그만해.”
그러면서 시마는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대나무대 하나를 쑥 뽑아들었다.
이 대나무대는 야쿠오도시厄威し라고 불렀고, 상당히 나이를 먹은 대나무 세 마디를 잘라 만든 일종의 부적 대였다. 길이는 사십 센티미터 정도로 시마의 한 손에 간신히 감길 정도의 굵기였는데, 몸통은 누렇고 끝에는 전통 방식으로 매듭을 묶어 만든 붉은 노리개를 달고 있었다.
이 대나무대의 특징은 정중앙에 방울마냥 주둥이부터 전체 길이의 3분의 2 정도 되는 깊은 일자 홈이 파여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마가 대를 휘두르면 그 사이로 날카롭게 바람이 꼬집히고, 그것으로 바닥을 두드리면 타악기처럼 딱딱거리는 소음이 일어났다.
시마가 대나무대를 꺼내들자 세 사람이 기대에 찬 눈을 했다. 시마는 길게 한숨을 쉬며 세 사람을 흘겨보았다.
“뭔가 만지진 않았지?”
세 사람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시마가 대나무대를 휘둘러 세 사람의 양 어깨와 허리를 차례대로 가볍게 때리고 두들겼다. 야쿠오도시의 정중앙에 난 홈은 때릴 때마다 서로 맞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끝에 가서는 맑은 타악기 소리를 냈다.
렌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역시 이거 하고나면 어깨가 가벼워지는 기분이라니까.”
“플라시보 효과라고 했잖아.”
학생들이 교문을 넘다말고 네 사람을 흘끔거리며 지나쳤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시마가 방망이를 들고 키 큰 동급생 세 명을 훈육하는 모양새로 보였을 것이다. 다만 대부분이 마을 토박이인 이곳 학생들은 시마네가 가진 특수한 역사나 시마 형제들이 겪어온 지난 이력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광경을 일종의 만담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 증거로 네 사람을 아무도 이상한 눈으로 흘끔거리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학교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
“옛썰.”
“땡큐 시마!”
“바이바이. 다음에 같이 축구하자!”
세 사람이 손을 흔들며 우르르 멀어졌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로 뛰는 세 사람의 어깨는 아까보다 훨씬 가볍고 편안해보였다. 시마는 손에 쥔 야쿠오도시를 한 번 탁탁 털어내다가 동작을 멈췄다. 카스가가 교문을 넘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거였다.
시마가 큰 소리로 불렀다.
“카스가!”
카스가는 흠칫 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결연한 의지처럼 보였다. 잠시 후 카스가가 운동장 반대쪽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시마는 멀어지는 카스가의 등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야쿠오도시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