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혁독자 «제목 미정 4»
※ 강압적인 폭력, 학대의 구체적 묘사가 존재합니다.

10.
한바탕 누군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일대가 아수라장이었다. 수많은 등잔들이 바닥에 깨져 나뒹굴고 있었고, 책장 몇 개는 아예 쓰러져 있었다. 유리파편과 찢겨진 책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상태였다. 주변은 비교적 어두웠고, 어딘가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희미하고 차가운 푸른빛이 공간을 간신히 밝히고 있었다. 바깥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이 공간의 바깥은 새벽인 것 같았다.
유중혁은 이번에도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곳은 어디지? 김독자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잡아먹혔지만’, 이런 공간 따위를 예상하고 온 건 아니었다. 도서관을 방문하는 건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는 이 공간을 오래 전부터 잊고 살았다. 세상이 멸망하고 시나리오가 시작되었으므로.
그는 가까운 서재로 다가갔다. 대부분의 책들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눈높이에 쓰러진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백지였다. 글자가 나올 때까지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겼다. 거의 앞장에 다다라서야 문장 몇 줄이 나왔다. 그건 쓰여 지고 있었다. 문장들은 꿈틀거리며 몇 자를 앞서 적었다가, 주춤거리며 지워버리기를 반복했다. 유중혁은 그것을 읽었다.
「김독자는 폐허가 된 광화문에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잘 된 거 맞아?’」
「(그걸 다 읽을 시간은 없을 거다.)」
유중혁은 고개를 들었다. 기울어진 책장 위에 니르바나 뫼비우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가 유중혁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만나 반갑군. 유중혁.)」
“…네놈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유중혁이 으르렁거리며 검에 손을 가져다댔다. 니르바나는 그의 경계태세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유중혁에게 그 어떤 관심조차 없어보였다. 니르바나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다시 유중혁을 내려다보았다. 등에서 뻗어 나온 여러 개의 팔이 그의 무릎을, 그 무릎을 짚은 팔의 팔꿈치를, 그 팔꿈치를 붙잡은 팔의 팔꿈치를 잡았다. 니르바나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그의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 대한 설명을 할 시간은 없다. 넌 아해를 구하러 온 게 아니었던가?)」
“…방법을 아나?”
「(나는 그저 ‘벽’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 뿐.)」
니르바나는 몸을 움직여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팔락팔락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중혁이 경계심을 풀지 않은 얼굴로 니르바나를 노려보며 검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냈다. 자신에게 집착하던 니르바나가 초탈한 태도를 고수하는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시선을 책에 고정한 채로 니르바나가 물었다.
「(유중혁, 너는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나?)」
“…김독자의 안이 아닌가?”
「(원래대로라면, 아니지.)」
“다른 주인이 있다는 뜻인가?”
「(‘벽’에 대해선 네게 해줄 말이 없다.)」
“네놈이 말하는 그 ‘벽’은 대체 뭐지? 그 ‘벽’이 이곳의 주인인가? 날 먹은 그 녀석이 네놈이 말하는 그 ‘벽’인가?”
페이지가 팔락팔락 넘어갔다. 니르바나가 조용히 책을 들여다보았다. 문장이 꿈틀거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동시에 영원히 그 자리에 멈춰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많지 않군. 아까도 말했지만 네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
“…어떻게 된 일인지도 말해줄 수 없나?”
「(흠.)」
니르바나가 허락을 구하는 얼굴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침묵이 있었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니르바나는 다시 유중혁을 내려다보았다.
「(잠들었군. 좋아, 대답해주지.)」
니르바나가 탁, 책을 덮었다.
「(조금 전까지 아해는 이곳에 있었다. 영혼체가 위험해서 ‘벽’이 안으로 불러들였지. 아해는 이곳에서 책으로 너를 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유중혁이 얼굴을 찌푸리자 니르바나가 들고 있던 책을 던졌다. 유중혁이 그것을 펼쳤다. 아까와 비슷한 문장이 꿈틀거리며 쓰여 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과거로 돌아오게 된 것 같다.’ 김독자가 고개를 들고 눈앞의 절대왕좌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거지. 아해는 이곳에서 바깥에 있는 네가 위험에 처한 걸 ‘읽었다.’ 하지만 당장은 움직일 수 없었지. 그래서 그는 ‘벽’을 이용하기로 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일대를 감싸던 장막이 한순간 해제되던 광경을 떠올렸다. 그것이 ‘벽’이었다면, 그는 자신을 보호하던 어떤 스킬을 해체한 것이 틀림없었다. ‘벽’은 강력한 정신방벽 스킬 같은 것일까? 하지만 그건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뭐, 말했다시피 ‘벽’에 대해선 네게 해줄 말이 없다.)」
니르바나가 말했다.
「(어쨌든 아해는 널 노리던 성좌들을 전부 이곳으로 끌어들였지. 보통 때였으면 성공했을 거야. 하지만 말했다시피, 아해의 영혼체가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독자가 실패했다는 뜻인가?”
「(목적은 달성했다. 네가 살아있으니까.)」
니르바나는 어딘가 불만이 있어보였지만, 동시에 그 시선은 어쩐지 유중혁을 동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놈들은 오염된 이야기였거든. ‘벽’은 성좌들을 별로 먹고 싶어 하지 않았어. 그래서 씹다 말았지. 거의 삼켜지다시피 해서 이곳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바로 너처럼.)」
“…….”
「(음. 그래, 경우가 다르군. ‘벽’은 널 먹을 수 없었지. 아해 때문에 널 남겨둬야 했으니까.)」
“이곳이 난장판이 된 건, 그들 때문인가?”
「(그래. 말했잖나. ‘우리’는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불청객들이 한바탕 난장을 부렸지.)」
“…김독자는, 그놈들은 지금 어디 있지? 여기 어딘가에 있나? 이 책 안에 있는 건 뭐지? 김독자가 지금 책 안에 있는 건가?”
「(아해와 그들은 아해의 ‘안’에 있다.)」
니르바나가 유중혁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켰다.
「(원래는 다른 내용이 적혀있었지. 너에 대한 기록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군. 괜찮다, 곧 이해하게 될 거야. 전부 보게 될 테니까. 조금 혼란스러워도 결국 받아들이게 되겠지. 우리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니까.)」
유중혁이 책을 내려다보았다. 문장이 꿈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주춤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기록이 매순간 쓰여 지고 말소되었다. 김독자는 활자 속에서, 서울에 있었다. 절대 왕좌 시나리오. 그가 왕좌를 파괴하기 직전이었다.
「(유중혁, 넌 이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해.)」
“김독자를 데리고 오면 되는 건가?”
「(그래. 아해와 너만이 돌아와야 한다.)」
갑자기 문장들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페이지가 저절로 정신없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팔락거리는 페이지 사이로 거대한 울부짖음과 비웃음, 헐떡이는 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몸이 절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페이지가 한곳에 멈추더니 빠르게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시간이 거의 다 됐군. 성좌들이 아해를 찾아냈다. 그들은 아해를 붕괴시키려 하지. 그러면 아해의 ‘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안’이라는 건 결국 그 주인을 제외하고선 감옥이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놈들이 망치는 건 아해의 기록에 불과해.)」
“그럼 이건 침식 중인 김독자의 기억인가.”
「(아해는 잘 버티고 있어. 더 깊고 오래된 곳으로 도망칠 거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해도 성좌들도 그 자신이 누구였고, 뭘 하고 있었는지조차 망각하고 그곳에 동화되겠지. 그럼 아해는 단지 안전한 상태를 유지할 뿐, 그 자신 역시 ‘안’에서 나올 수 없는 몸이 된다. 넌 아해를 깨워서 데리고 와야 해.)」
“그 ‘벽’이 성좌들을 먹으면 끝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럼 아해도 함께 먹히고 말아. 지금 그들은 기록 내에서 한 덩어리거든. 그러니까 분리가 필요하다는 거다. 설명은 이쯤하지.)」
유중혁이 마구 흩날리는 페이지를 붙잡았다. 비명이 그쳤다. 흰 페이지 위로 정신없이 뒤틀리고 뭉개진 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문장이 나타났다. 그것은 더 이상 주춤거리며 도망치려고 하지도, 기록을 말소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단지 어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김독자가 문장으로 만들어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유중혁의 손바닥이 다급하게 그 위를 쓸었다. 텍스트가 손바닥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유중혁의 몸이, 이야기가, 그를 이루는 모든 문장과 단어가 그것에 호응하는 게 느껴졌다. 화신체가 조각조각 분해되며 책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벽’이 너를 도울 거다.)」
니르바나의 목소리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울렸다.
「(잠시나마 그 권능에 익숙해지도록 해.)」
이윽고 새까만 어둠이 시야를 덮었다. 유중혁은 눈을 감았다. 조각난 채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선명해지면서 니르바나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머리통이 늘어났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아득한 감각 속에서 유중혁은 희미하게 반복되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점차 뚜렷해지더니 마침내 그것이 누군가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선명해졌다. 그건 김독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주문처럼 무언가를 끊임없이, 간절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11.
나는 하늘 높이 치솟은 절대 왕좌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중급 도깨비가 둥둥 떠 있었다. 그놈이 내게 절대 왕좌가 무엇인지 설명해주고 있었다. 주변에 서있던 시민들이 부러운 눈으로 나를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품속에 들어있는 묵직한 검 한 자루를 느꼈다.
금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 골치 아픈 상황에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던 아주 적절한 시기에 떨어진 것이다.
중급 도깨비가 명령했다.
[자, 어서 왕좌에 앉으세요. 한 번만 더 헛소릴 하면 ‘절대 왕좌’를 부숴버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때 어떤 대사를 했더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왕좌에 앉기를 거부하기만 하면 된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급한 일을 해결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면 그만이다.
입을 벌리고 대답을 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비명소리가 들렸다.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고개를 돌려 시민들 쪽을 살폈다. 잠깐, 이런 일이 있었나? 조금 혼란스러웠다. 시민들이 웅성이며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천둥이 쳤다. 나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언가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중급 도깨비에게 말했다.
“일단… 난 절대 왕좌에 앉지 않겠다.”
굵은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절대 왕좌에서 솟아난 빛이 천공을 꿰뚫었다. 빛을 중심으로 먹구름이 휘몰아치며 천천히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나는 뺨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냈다. 시선을 여전히 시민들 쪽으로 고정한 채였다.
“그리고 이 왕좌에 다른 누군가가 앉기를 허락하지도 않겠다.”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시민들이 갑자기 욕지거리를 하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품에서 사인참사검을 꺼내들었다. 왕좌를 부수겠다고 선언하기도 전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과거가 어떤 연유로 비틀렸음이 틀림없었다. 어째서?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곧이어 시민들 틈에서 등장한 그들이 내 의문을 풀어주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베르칸 공작의 얼굴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그는 피를 뒤집어 쓴 채 흐리멍텅한 얼굴로 절대 왕좌 앞에 서서 경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상하게도 베르칸은 공단주 복장이 아니라 서울 시민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다시 천둥이 쳤다.
심호흡을 했다. 성좌들. 성좌들이 따라온 것이다. 아니다. 따라온 게 아니었다. 내가 빨아들인 것이다. 이건 과거가 아니었다. 나는 모든 일을 기억해냈다. 제 2경기에서 사망하던 순간, 제 4의 벽이 나를 불러들였다. 영혼체가 위험했기 때문이라고 제 4의 벽은 설명했다. 나는 ‘멸살법’이 가득한 도서관에서 니르바나 뫼비우스와 만났다. 그가 유중혁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곳의 책 몇 권을 읽으며 그와 대화했다. 그러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감지했다. 책을 통해서 나를 부르는 유중혁의 목소리를 들었다. 유중혁이 위험에 처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내 화신체는 불능이었고, 난 정신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상황이 급박했다. 이전에 했던 그 방법 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제 4의 벽을 일시적으로 해제하고, 유중혁을 집어삼키려는 성좌들을 모두 내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런 후 정신을 잃었다.
도서관의 차가운 바닥과 가까워지던 그 짧은 순간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일종의 정신방벽이라고 할 수 있는 제 4의 벽 안에서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건 대체 어떤 상태인 걸까. 가사상태일 지도 모른다. 정신세계에서 다시 길을 잃는 일이니까.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도박이었다. 유중혁을 구하기 위해서. 하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굴리다보면 돌파구를 찾겠지.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었다.
과거로 돌아간 것이라면 분명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에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마계에서 전송된 성좌들이 대거 등장했으니 이 상황을 관전하던 구독좌들이 가만있을 리도 만무했다. 간접 메시지든, 도깨비에게 압박을 넣든, 무엇이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간접 메시지들은 잠잠하기만 했다. 그리고 성좌들. 그들의 복장은 달아나고 있는 시민들의 복장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완벽히 이 상황에 융화되어 있었다. 내 안으로 빨려 들어온 존재들이 나와 함께 있고, 과거의 상황 속에 융화된 채고, 주변 인물들과 비슷하게 재현되었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온 게 아니었다. 여기는 내 기억 속이었다.
주도권이 나에게 있음은 명백했다. 게다가 내 손에는 사인참사검이 있었다. 이 과거는 나의 것이었다. 주머니를 뒤지자 예상했던 것처럼 간평의가 들어있었다. 한 손에 사인참사검을 쥔 채 간평의를 집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성좌들을 내려다보며 똑바로 호명했다.
[‘간평의’의 특수 옵션, ‘별의 메아리’를 발동합니다.]
[‘별의 메아리’를 통해 당신은 위인급 성좌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성좌를 호명하겠다.”
[별들의 흐름 속에 위인급 성좌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탐랑 성군, 거문 성군, 녹존 성군과 문곡 성군, 염정 성군과 무곡 성군을 차례로 불렀다. 다음에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찬반의 모든 별자리가 사라지자, 손에 들린 간평의가 부들부들 떨렸다. 간평의가 아니라 내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이었다. 강한 현기증이 일면서 코와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여섯 개의 성좌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왕좌를 파괴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건 이미 파괴되었으니까. 여긴 내 기억 속이었다. 어떤 일을 저질러도 시간 선에 균열이 가거나 앞으로의 전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사인참사검으로 저놈들을 처리할 것이다.
검을 쥔 채로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다스리려고 애썼다. 기억 속으로 들어온 탓에 덩달아 상황에 맞는 화신체로 하향된 것 같았다. 신체적 능력치가 서울 시나리오 초반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호명된 성좌들이 머릿속으로 접촉하는 게 느껴졌다. 북두의 성군들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그렇게 우리 모두를 부르면.]
[그대의 정신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 것이다.]
[왜 우릴 부른 거지?]
훅 훅 숨을 뱉어내며 피를 닦아냈다. 성좌들이 좀비처럼 다가왔다. 거의 발밑에 있었다. 베르칸 공작이 공허한 얼굴로 내 발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저놈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먼저 베어버려야 한다. 저놈들이 왜 저렇게까지 맛이 가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불안정한 설화 때문일 것이다. 아까 근처에 있던 시민들을 뜯어먹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 그러나 고작해야 내 기억의 엑스트라일 뿐이다. 게다가 당시 서울 시민들은 설화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었다. 먹어봤자 피만 뒤집어쓰는 꼴이 될 것이다. 베르칸 공작의 피 칠갑 된 셔츠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용존]을 꺼내 간평의의 소모횟수를 재생했다.
“나는 ‘북두칠성의 일곱 번째 성군’을 원한다.”
파군성군이 허공의 마지막 별자리를 수놓았다. 스파크가 미미하게 튀다가 잠잠해졌다. 한 사람이 더 머릿속으로 침투하는 게 느껴졌다. 일곱 개의 별이 동시에 말을 걸었다.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북두성군들이여, 눈앞의 성좌들을 베도록 당신들의 검을 빌려주십시오.”
[그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역시. 기억의 주요한 부분은 과거와 다른 말을 하거나 행동해도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발밑에서 성좌들이 이곳으로 기어오르기 위해 손톱으로 벽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 하늘의 성좌들조차 왕좌의 창시자를 꺼린다.]
[그런데 한낱 인간인 그대가, 저 물건의 주인에게 도전하려 하는가?]
“…여기선 뭐라고 했더라? 이제 시작하죠.”
[그것은 그대가 감당할 수 없는 개연성이다.]
“음.”
[그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아, 대사가 몇 개 남았었구나. 그래도 슬슬 사인참사검이 발동할 때가 되었을 텐데. 베르칸 공작의 손이 허우적거리며 내 발목을 붙잡았다 놓쳐 미끄러졌다. 몇 개의 손이 내 발끝을 스치거나 잠시 붙잡았다가 떨어져나갔다.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피를 마저 닦아냈다. 하늘에서 북두칠성이 환하게 타올랐다. 검에 새겨진 별자리가 불을 밝히듯 하나둘 빛을 뿜기 시작했다. 나는 사인참사검을 아래로 향하며 고개를 저었다.
“알겠으니까 빨리 하자고.”
[그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쳐들었다. 허공에는 여전히 일곱 개의 별자리가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별들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그들이 입을 모아 반복했다.
[그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누군가 발목을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황급히 떨쳐내려고 하는데, 아래쪽에서 비명 같은 웃음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어마어마한 힘이 그대로 나를 끌어내렸다. 시야가 뒤집히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성좌들이 아우성을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뒤통수에 아득한 고통이 몰려왔다. 목소리들이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그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당황한 내가 사인참사검을 휘둘렀으나 제대로 발동되지 않았다. 검 위의 별자리 대부분이 빛을 잃은 상태였다. 성좌들의 손이 내 몸을 더듬고 헤집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힘이 내 셔츠와 옷을 반으로 찢었다. 몸부림을 치다가 사인참사검을 떨어뜨렸다.
“제길, 어떻게. 손… 대지마!”
[그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하지 마… 만지지 말라고. 아. 하지 마!”
단단한 손이 내 목덜미를 붙잡아 바닥에 고정시켰다. 몸을 버둥거리며 다리로 성좌들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다른 손이 발목을 잡아챘다. 곧이어 누군가가 양 손목을 결박했다. 순식간에 온몸이 붙잡혀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온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없었다. 공포가 조금씩 밀려오고 있었다. 뒤늦게 제 4의 벽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머릿속을 차지하는 목소리는 오로지 불길한 말만을 반복하는 일곱 개의 별들뿐이었다.
[그대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빌어먹을! 하필 이런 때. 하필 이런 순간에. 어째서. 왜 기억을 주도할 수 없지? 대체 왜?
입 안으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고개를 흔들려고 했지만, 목덜미를 붙잡은 성좌가 손에 힘을 주자 숨이 막혀 그대로 컥컥거렸다. 네 개의 손가락이 그대로 입안을 밀고 들어와 거칠게 혓바닥과 입 속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뭔가를 뒤지는 것처럼 사방을 헤집었다. 손톱들이 혓바닥을 긁고 입천장에 상처를 내는 게 느껴졌다. 피 맛이 났다. 한껏 벌어진 입술 틈을 손가락이 빡빡하게 메우고 있어 침조차 제대로 흐르지 못했다. 입안에 고인 침이 목구멍으로 넘쳐흘렀지만, 목이 젖혀져 있어서 제대로 삼키지도 못 했다. 사례가 들려서 자꾸 기침이 나왔다. 기침을 하기 위해 몸을 꿈틀거리자 목을 조이는 손에 더 힘이 실렸다. 고통으로 눈물이 고였다. 줄줄 눈물과 콧물을 흘리면서 간신히 코로 숨을 들이키려고 애썼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입을 헤집는 손아귀의 힘에 따라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잠시 후, 손가락들이 빠져나갔다. 다홍색 침이 손가락에 붙어 늘어졌다.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내고 그대로 헛구역질 했다.
“커흑, 헉…, 학….”
전신이 벌벌 떨렸다.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렸다.
“없다.”
“없어?”
“없다. 설화가.”
“뒤지면 나올 거야.”
“죽이면 안 돼?”
“먹으면 돼.”
“주인이야.”
“이곳의?”
“이곳의 주인이야.”
손들이 내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들어올렸다. 힘없이 늘어진 채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어 시야가 흐릿했다. 갑자기 어깨에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신음을 내지르며 미약하게 몸을 뒤틀었다. 누군가가 나를 물고 있는 것이다. 이 미친 개자식들이 나를 먹으려 하고 있었다!
‘제길, 제 4의 벽. 듣고 있으면 대답해. 제발. 제발. 제발….’
잠시 후 어깨를 물던 누군가가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처음에는 화끈거리는 감각만이 느껴졌다. 어깨가 저릿저릿했다. 곧이어 어마어마한 고통이 나를 덮쳤다. 수만 개의 바늘이 어깨를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온몸의 열이 어깨로 몰리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깨가 삽시간에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성좌가 내 살점을 게걸스럽게 씹는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엄청난 통증과 더불어 방금의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몸은 완벽히 기억 속의 과거 시점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화신체의 대부분이 피와 살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내가 이 모든 상황에 직접적인 고통과 정신적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 4의 벽이 잠들어 있다고 해도 기본적인 스킬조차 제대로 발동되지 않다니 이건 말이 안 됐다. 이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모든 고통이 현실처럼 생생했다! 끔찍한 공포가 나를 그대로 내팽겨 쳤다. 턱이 덜덜 떨렸다. 상황이 파악되자 입안에서 감도는 피 맛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성좌들이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게걸스럽게 핥아댔다. 축축한 혓바닥들이 찢겨진 어깨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그들이 다시 나를 바닥에 눕혔지만 반항할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채 눈동자만 움직여 성좌들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공포가 너무 낯설었다. 무수한 시선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흐리멍텅했던 눈동자에 조금씩 이체가 돌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알아보았다. 베르칸 공작의 입 꼬리가 천천히 벌어졌다.
“이런, 아까는 실례가 많았어. 잘 싸우더군.”
다른 목소리가 낄낄거렸다.
“자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지. 밟기 직전의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 모양새던데.”
“패왕 덕이지. 유중혁이라고 했나?”
“<스타 스트림>이 너를 막을 거다.”
“네 설화 속에 우릴 가둬놓다니, 이 치욕은 되갚아주마.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알게 해주지.”
성좌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그들은 바닥에 눕혀진 내 모습을 조롱하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발끝으로 허리와 뒤통수를 툭툭 걷어찼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운을 차리려 애썼다. 어떻게든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이상 당황하지 말자.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이곳은 내 기억 안이다. 제 4의 벽이 응답하지 않는 것도, 제 4의 벽의 스킬이 무력화된 것도 전부 그것과 연관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호흡이 고르게 변하고 머리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성좌가 내 허리에 조준하고 왼쪽 발을 힘껏 뒤로 젖혔다. 나는 그대로 몸을 웅크리며 다가오는 발을 두 손으로 막았다. 위에서 환호소리와 조롱과 욕지거리가 들렸다. 몸을 굴려 좌측으로 피했다. 손들이 따라왔다.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내달렸다. 내 덜미를 잡으려던 성좌들의 손이 미끄러졌다. 비틀거리던 발걸음이 곧 중심을 잡았다. 나는 온힘을 다해 뛰었다. 풍경이 상하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시민들도, 일행들도, 중급 도깨비도 보이지 않았다. 광화문은 텅 빈 폐허였고, 어느 순간부터 이곳에는 나와 내가 흡수한 성좌들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비가 쉴 새 없이 내려 머리카락이 축축했다. 거칠게 숨을 토할 때마다 입김이 나왔다. 등 뒤에서 젖은 도로를 밟고 뛰어오는 수많은 발소리가 들렸다. 성좌들이 폭주족처럼 열에 들뜬 비명을 내질렀다. 내 이름을 호명하는 자들도 있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어느 순간 어떤 말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뭐라고 중얼거렸는지도 모르겠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자살하면 될지도 모른다. 기억을 체감하는 일은 꿈속을 맨 정신으로 걸어 다니는 일과 비슷했다. 꿈에서 깨어나려면 죽어버리면 된다.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럼 도서관으로 나가게 되는 건가. 꿈을 먹는 자나 니르바나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제 4의 벽과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죽어버렸을 때, 도서관으로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영원히 기억 속을 헤매게 되는 거라면?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해야만. 나는 어떻게 하면.
누군가 내 뒷덜미를 붙잡아 바닥에 처박았다. 축축한 아스팔트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뺨이 화끈거렸다. 발소리들이 몰려오는 게 들렸다. 안 돼. 나는 눈을 감고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벗어나야 돼. 여기서.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그들이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시기라면 어디든. 갑자기 공기가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거짓말처럼 몸이 가뿐해졌다. 성좌들이 헐떡이는 소리와 젖은 발소리들이 점점 멀어졌다. 곧이어 사방이 완벽히 조용해졌다. 잠시간 세상이 진공 상태에 놓인 것 같았다. 무대가 장면을 바꾸어 급하게 풍경이 재조립되는 것처럼. 나는 건조한 공기 속에서 먼지와 가구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어디선가 무언가를 거칠게 후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유리로 된 무언가가 떨어져 박살나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와 숨죽인 비명 소리가 점차 뚜렷해졌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내 손가락에 맞아 튕겨져 나갔다. 나는 웅크린 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었다. 공포와 분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들끓기 시작했다. 천천히 손을 떼어내고 눈을 떴다. 마룻바닥을 손으로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엄마는 바닥에 내던져져 있었다. 아빠가 주먹을 들고 윽박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계집년아, 네깟 게 뭔데 제 때 제 때 밥 하나 못 차리고 명령 질이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명백한 분노였다. 엄마의 인중에서 피가 흘렀다. 엄마는 방문 앞에 서있는 나를 보지 못 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건 엄마의 방어 자세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아빠의 주먹에 허물어지지도 않는 요새 같은 자세. 아빠가 발로 엄마를 마구 짓밟았다. 아빠가 엄마를 벌레처럼 짓밟았다. 하지만 엄마는 벌레가 아니고, 꿈틀거리지도 않는다. 아빠의 주먹이 엄마를 강타할 때마다 모래주머니를 두들길 때나 들을 수 있는 묵직한 구타음이 들렸다. 숨을 죽인 엄마의 몸뚱이에서 흡, 흡, 소리만 간신히 새어나갔다. 나는 손과 발을 심하게 떨면서 부엌으로 숨어들었다. 거실에서 들리는 참혹한 소리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그건 이미 이전에 많이 해보았다. 이제는 그런 걸로는 이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깨진 유리컵 파편을 피해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고개를 들자 도마에 걸쳐진 칼자루가 보였다. 이 고통을 끝낼 방법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팔과 다리를 거칠게 휘두르며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엄마를 죽이려고 하는 아빠에게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술 냄새가 지독해졌다. 일을 실행하기 전에 양손을 번갈아 바지에 문질렀다. 그리고 단단히 칼자루를 쥐었다. 나는 강해졌다. 무장했고, 문제가 무엇인지 뚜렷이 알고, 앞으로 그것을 제거할 것이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대로 달려들었다. 아빠의 몸뚱이가 점차 비대하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술 냄새가 모든 감각을 추월했다. 아빠의 등이 산처럼 솟아올랐다. 그때 아빠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당황해서 그대로 멈추어 섰다. 아빠의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아빠는 웃고 있었고, 눈동자는 녹색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우리 아빠가 아니었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는데 등 뒤에 뭔가가 닿았다. 단단한 팔이 나를 붙잡아 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부엌에 서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못 보던 사람들이 부엌에 서서 나와 엄마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아빠, 아니 나의 아빠였던 누군가가 코앞에 있었다. 그가 말했다.
“구-원-의-마-왕.”
그는 모든 음절을 그런 식으로 늘려서 발음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 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남자는 자신이 대체 왜 이런 말을 뱉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독자야.”
그가 아빠 목소리를 흉내 냈다. 벌어진 입에서 지독한 술 냄새가 끼쳤다.
“아빠는 부끄럽다. 아빠는 이게 부끄럽다. 그거 내려놔, 그거 내려놓고 이야기하자. 아빠가 설명해줄게. 그거 어떻게 쓰는지 다 설명해줄게.”
 그가 내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순순히 빼앗길 수 없어서 달려들었다. 뒤에서 뻗어 나온 손들이 나를 잡아챘다. 몸부림을 치자 손들은 더욱 단단하게 내 허리를 틀어쥐었다. 비명을 질렀다. 엄마를 불렀다. 엎드려 있던 엄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남자가 칼을 들고 엄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엄마의 시선이 나에게서 남자 쪽으로 이동했다. 남자의 등에 가려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손들이 나를 바닥에 잡아 눌렀다. 헐떡일 때마다 마룻바닥에 축축하고 뜨거운 김이 서렸다. 엄마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무서웠다. 울면서 엄마를 불렀다. 눈을 꾹 감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내 턱을 쥐고 들어올렸다. 엄마의 비명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아빠의 옷을 걸친 낯선 남자가 쓰러진 엄마 앞에 서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칼날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덜덜 떨며 엄마의 이름을 불렀지만 엄마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거실의 풍경이 남자의 등에 가려져 반 토막이 나있었다. 바닥은 축축했고, 가구에 피가 튀겨 지저분해져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온몸을 비틀면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다. 안 된다고 말했다. 잘못했다고 말했다. 엄마를 불렀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피 냄새가 났다. 그대로 얼굴을 처박고 마룻바닥에 헛구역질을 했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쓰러진 엄마를 제외한 모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왜 나는 엄마를 지키지 못 했지? 이상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해내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주 먼 옛날에 이미 비슷한 일을 해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능숙했고 해야 할 일을 전부 알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일이 뒤틀리고 만 거지? 왜 엄마는 저기 누워있지? 어째서 나는 또다시 실패하고 마는 거지? 이건 거짓말이다. 이건 모두 꿈이야. 이건 전부 거짓말이야.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토하고 싶어. 무서워. 살려줘. 도망가고 싶어.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갑자기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이 붕 뜨더니 술 냄새와 피비린내가 희미해졌다. 나를 붙잡던 손들이 사라지고 몸이 자유로워졌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더니 깜깜해졌다. 토할 것 같아서 몸을 옹송그리고 눈을 꽉 감았다. 어딘가로 이동되고 있었다. 빗소리가 가까워졌다. 축축한 공기가 와 닿았다. 헐떡이며 눈을 떴다. 나는 젖은 아스팔트 위에 있었다.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누군가가 내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나를 들어올렸다. 고개를 꺾어 간신히 올려다보자,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베르칸 공작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가 헐떡이며 나를 옮기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간접 메시지가 떠있었다.

+
<서브 시나리오─강제 계승식>
분류 : 서브
난이도 : B
클리어 조건 : 왕좌에 앉지 않으려는 화신 ‘김독자’를 제압해, 그를 왕좌에 앉히십시오.
제한시간 : 30분
보상 : 6000코인
실패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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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칸 공작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잡았어! 내가 왕을 잡았다!”
근처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임마, 빨리 와! 딴 놈들에게 뺏기기 전에!”
더 많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나를 옮기는 손이 늘어났다. 질질 발이 끌리는 채로 옮겨지던 몸이 허공이 붕 떴다. 누군가 내 다리를 붙잡아 어깨에 둘렀다. 헹가래를 하듯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들어올렸다. 텅 빈 광화문의 잿빛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빗물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도깨비들이 또 배신 때릴 수도 있어. 말 바꾸기 전에 저놈 당장 앉혀야 돼.”
“도망가면 어떡해?”
“앉혀놓기 전에 작업을 해야지.”
“야, 김진수. 너 임마 똑바로 들어.”
광화문이 가까워졌다. 절대왕좌에서 치솟은 빛이 여전히 하늘을 꿰뚫고 있는 게 보였다. 시민들이 비를 맞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좌 근처에 둥둥 떠 있던 중급 도깨비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를 옮기던 사람 한 명이 도깨비를 향해 무어라 말을 거는 게 들렸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멍한 상태였고,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간 것 같았다. 기억의 시간을 넘나드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지만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새삼 내 인생의 대부분의 순간들이 트라우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이동하던지 간에 그들은 나를 쫓아와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방식의 전개로 나를 박살내려고 할 것이다. 나를 괴롭게 하던 인물들은 너무 많았다. 성좌들이 맡을 역할은 차고 넘쳤다. 지친 몸에서 마지막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기억이 혼잡했다. 나를 옮기는 자들의 얼굴 절반이 낯설었고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들이 성좌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서울 시민들인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이 왕좌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이 나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빗물로 축축해진 몸이 바닥에 늘어졌다. 죽은 듯이 숨을 쉬며 간신히 실눈을 떴다.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을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기억나지 않았다. 그들 역시도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시나리오 보상에 대해 토론했다. 내 어깨 근처에 서있던 남자가 맞은편 남자에게 손짓을 했다. 맞은편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꺼내들었다. 사람들이 그를 진수라고 불렀다. 진수 이 개자식아, 서둘러. 진수는 녹색 눈을 가진 남자였다. 그가 내 위에 올라타더니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날카로운 통증이 양 다리에 차례로 느껴졌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허벅지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입에서 거품이 나왔다. 끔찍한 고통 때문에 허리가 절로 휘었다.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손들이 나를 짓눌러 움직이지 못 하게 했다. 진수라는 남자가 허벅다리로 내 손목을 짓누르며 올라탄 자세를 조금 바꾸었다. 잠시 후 양 손목에도 비슷한 통증이 차례로 찾아왔다. 나는 고개를 쳐들고 비명을 질렀다. 침을 튀기며 사지를 비틀었다. 이상하게도 팔과 다리가 돌덩이 같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피가 줄줄 새는 게 느껴졌다. 삽시간에 온몸이 차가워졌다. 손들이 다시 내 몸을 들어올렸다. 그들이 나를 질질 끌어 왕좌에 앉혔다. 축 늘어진 몸은 어딘가에 앉았다기보다 걸쳐져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들이 내 몸에 어떤 짓을 했는지 알아차렸다. 그들이 내 팔 다리의 힘줄을 끊어놓았던 것이다.
공포와 경악 속에서 헐떡이며 몸부림 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다. 몸은 꼼짝없이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진수라는 남자가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도깨비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했다. 코인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동전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나를 둘러싼 인간들의 간접 메시지로 흘러들어왔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잔뜩 흥분한 인간들이 왕좌를 붙잡고 흔들었다. 나는 눈동자만을 움직여 상황을 토막토막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더니 그대로 꿇어앉았다. 누군가 내 머리 위에 묵직한 왕관을 씌웠다. 사람들은 나를 조롱하면서 동시에 경의를 표했다. 왕이 탄생했노라고 도깨비가 박수를 치며 시민들을 향해 공표했다. 진수라는 남자가 내 왼발을 붙잡아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다른 남자가 내 손등을 붙잡아 입을 맞췄다. 또 다른 남자가 내 오른발을 쓰다듬었다. 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왕을 받듭니다.”
그들이 입을 모아 중얼거렸다.
“우리는 당신에게 충성합니다.”
서울의 모든 시민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비가 잦아들면서 해가 들기 시작했다. 황금으로 만든 절대 왕좌에서 아름다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그곳에 아무렇게나 널려있었다. 모든 이들이 나를 경배했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는 절대왕에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입 꼬리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꺽꺽거리며 웃음 비슷한 것을 터뜨리다 말고 폭발했다. 비명을 지르려고 애쓰면서 흉하게 몸을 뒤틀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앉아있었다. 영원히 그곳에 앉아있어야 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나는. 분명히. 이런 전개가 아니었던 것 같아. 나는 이걸 파괴했던 것 같은데. 어째서 난 또다시 실패하고 마는 거지?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여기서 벗어나게 해줘. 여기서 벗어나면. 제발. 그러면 나는….
“허윽, 헉….”
몸이 차가워지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주변의 소리들이 뭉개지면서 하나로 뒤섞여 웅웅거렸다. 사람들의 환호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아득한 곳에서 누군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웅성거리다 말고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왕좌 앞에서 홍해처럼 갈라져 나를 두고 달아났다. 발소리, 호흡, 끊임없이 고함을 치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마치 물속에서 듣는 바깥의 소리처럼 아득했다. 나는 왕좌에 늘어진 채 멍하니 앞을 보았다. 시야가 탁 트여 텅 빈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광화문 광장에서부터 누군가 인파를 뚫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였다. 그는 오로지 나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멈추지 않고 거리를 좁혀왔다. 점점 눈이 감겼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였다. 마침내 그가 내 앞에 멈추어 섰지만, 나는 고개를 들 힘조차 없어 시야를 떨구고 있었다. 그의 낯익은 부츠와 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손이 다가오는가 싶더니 그가 나를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익숙한 체향이 훅 끼쳤다. 다른 의미로 몸에서 완전히 기운이 빠져나갔다. 나는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신음했다.
“아파….”
너는 누구였지. 널 알고 있었는데. 잊어버릴 수가 없는데.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감쌌다.
“그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괜찮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시야가 아득해지더니 그대로 어둠이 몰려왔다. 공기가 뒤바뀌고, 사물이 재배치되는 감각. 어딘가로 도망치듯 이동하는 감각. 나는 또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남자가 누구였는지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 한 채,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12.
유중혁은 기절한 김독자를 안아 올렸다. 품에 늘어진 김독자의 팔과 다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가 앉았던 왕좌에 피가 고여 있었다. 유중혁은 시선을 내리깔고 그것을 참담하게 내려다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김독자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새하얀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새까만 속눈썹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이가 절로 부득부득 갈렸다. 힘이 빠져 늘어져있음에도 품에 들어온 몸은 너무 가벼웠고 너무 약했다. 명백히 학대받은 육신을 내려다보며 유중혁은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좀 더 서둘렀어야 했다. 이런 꼴이 되기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이곳에 들어와야만 했다. 도서관에서 니르바나와 오래 대화하는 게 아니었다. 진작 들어와 모조리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이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페이지에 끊임없이 쓰여 졌다 지워진 김독자의 문장들. 그가 저항하고 도망친 흔적들. 문장이 보여준 모든 장면 장면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유중혁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김독자의 트라우마를 들쑤시는 성좌들의 개 같은 짓거리를 보았다. 김독자가 어린 아이로 돌아가는 것을, 살해당하는 어머니를 보며 무력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을 보았다. 광화문에서 벌어진 강제 계승식의 모든 과정을 낱낱이 보았다. 성좌들이 김독자에게 해를 입혔을 때, 김독자가 선명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을 눈으로 보았을 때, 유중혁은 말할 수 없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당장에 저놈들의 손과 발을 잘라내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모든 참상의 관전자였다. 그는 거기 개입할 수 없었다. 이미 쓰여 진 문장이었기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기록된, 이미 벌어진, 이미 침식된 기억을 끊임없이 따라잡는 동안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감정적 반응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따라잡아 이곳에 있었다.
유중혁은 자신이 그렇게 깊게 분노할 수 있음에 새삼 놀랐다. 너무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자신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불길이 바닥에서부터 절절 끓고 있었다. 감정이 자신을 압도하는 게 느껴졌다. 광화문에 소환되자마자 유중혁은 눈에 보이는 존재를 닥치는 대로 베어죽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동안 유중혁은 눈앞에 놓인 절대 왕좌를 올려다보았다. 김독자가 의식을 잃어가며 그곳에 앉아있었다. 김독자. 그는 입으로 불렀다. 김독자. 나다. 김독자. 김독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럴 힘조차 없어보였다. 들리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들리지 않을 것이다. 유중혁은 그가 어떤 참상을 겪었는지 방금 전까지 눈으로 보았다.
유중혁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왕좌 앞에 섰다. 축축한 뒤통수가 피가 고인 왕좌 아래를 향해 가라앉아 있었다. 새하얗고 축축한 목덜미가 훤히 보였다. 그 목덜미를 보는 순간 타오르던 분노가 한순간에 고통으로 뒤바뀌었다. 칼을 내려놓고 그대로 김독자를 껴안으며, 유중혁은 그의 체온, 그의 체향, 그의 축축한 피부와 떨림을 고스란히 느꼈고, 분노와 동시에 슬픔을, 슬픔과 동시에 절망을 느꼈다. 너는 왜 항상 내가 구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감당해버리지? 왜 고통을 체감하지? 왜 죽음과 가까운 상태를 넘나드는 거지? 내가 널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게 명백한 상황에서,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왜 너는 매번 이런 상태로 내 앞에 있는가.
어째서 나는 항상 너를 구하지 못하고 구함 받는 위치에 있는가.
김독자가 유중혁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신음했다. 아파…. 축축한 김독자의 머리카락이 유중혁의 뺨에 붙었다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유중혁의 손이 김독자의 등과 어깨 위를 배회했다. 잠시 후 그가 조심스럽게 김독자의 뒤통수를 감쌌다. 축축한 머리를 품안으로 당기자, 김독자가 한숨 같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유중혁은 눈을 내리깔았다. 빗방울이 그의 눈가에 맺혔다 뚝뚝 떨어졌다. 잠시간 어떤 생각도, 어떤 상념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금 분노가 치솟았다. 유중혁은 왕좌에 걸쳐놓았던 [흑천마도]를 집어 들었다. 한손으로 김독자를 안아들고, 다른 한손으로 검을 쥐었다. 살기에 찬 눈동자가 광화문 일대를 훑었다. 죽여 버리겠다. 너를 이렇게 만든 이들을 모조리 죽여주겠다. 서늘한 칼날을 시꺼먼 마력이 휘감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성좌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했다. 우선 베르칸 공작부터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녹색 눈동자를 후벼 파고 머리통을 터뜨려 주리라. 그대로 돌려주리라. 필요하다면 이곳을 모조리 박살내리라.
갑자기 바닥이 푹 가라앉은 건 그때였다. 팔에서 김독자가 미끄러졌다. 유중혁은 칼을 놓고 두 팔로 김독자를 끌어당겨 안았다. 한순간 광화문 일대의 풍경이 저 멀리 밀려나더니, 새까만 어둠이 솟구쳐 올랐다. 순식간에 사방이 깜깜해졌다. 無의 공간. 정신이 조각조각 나며 빨려 들어가는 감각. 끝없이 떨어지는 감각. 유중혁은 이미 이 감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이동하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김독자의 기억이 뒤죽박죽 움직이고 있었다. 유중혁이 김독자의 등을 쓸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독자. 김독자, 정신 차려라.”
유중혁이 김독자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속삭였다.
“이제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 더 깊게 들어가지 마. 넌 방법을 알고 있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빠르게 몸이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화신체가 엿가락처럼 양쪽으로 늘려지는 감각이었다. 유중혁이 김독자의 몸을 흔들었다.
“김독자. 김독자!”
그러나 김독자는 거기 없었다. 껴안고 있던 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유중혁의 존재 자체가 소실된 것이었다. 그는 그곳에 없었다. 새까만 어둠이 끊임없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고, 그는 뚜렷한 몸이나 가시적인 형체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되어 있었다. 어떤 정신적이고 비물질적인 것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페이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가 팔락팔락 빠른 속도로 넘어가고 있었다. 점점 빨라졌다. 더 늘어났다. 유중혁은 점차 다가오는 어떤 사각형의 빛을 보았다. 흐느낌을 눌러 참는 소리. 유리가 박살나고 남자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 묵직한 구타음이 점차 가까워졌다. 오래된 싸구려 가죽 냄새가 났다. 가정집의 공기가 느껴졌다. 눈앞에 다시 그 장면이 펼쳐졌다. 유중혁은 아연한 감정으로 그것을 보았다.
어린 김독자가 화면 너머에서 웅크린 채 두 귀를 막고 있었다. 떨고 있는 어깨가 보였다. 아버지가 김독자의 뒷덜미를 잡아채 거실 테이블 위로 집어던졌다. 몸이 목재에 부딪혀 구르는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김독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엎어져 있었다. 곧이어 거대한 몸이 그를 짓눌렀다. 구타음이 연거푸 이어졌다. 소리 죽인 신음소리가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졌다. 김독자가 울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가해지고 또 가해졌다.
장면이 바뀌었다. 김독자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손에서 피 묻은 칼이 천천히 떨어졌다. 김독자는 떨고 있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어머니의 어깨 너머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거실에 모로 쓰러져 있었다. 김독자는 아버지의 허리춤에서 흘러나온 피가 마룻바닥을 축축하게 적시는 것을, 눈을 뜬 채 누워있는 그 시체가 굳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장면은 또다시 바뀌었다. 김독자가 경찰 두 명과 함께 경찰서를 나오고 있었다. 일대가 번쩍이더니 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수많은 빛이 연달아 쉴 새 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뜨리며 앞으로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김독자를 보호하며 두 팔을 세웠지만 대열은 금방 세 명을 휩쓸었다. 김독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인파에 파묻혔다. 마이크 몇 대가 딱딱하게 굳은 아이의 턱을 부딪치고 지나갔다. 기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김독자의 이름을 불렀다가 김독자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에 아버지가 너를 때렸니? 평소에 아버지가 너를 어떻게 했니? 평소에 아버지가 어머니를 어떻게 했니?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찔렀니? 어머니가 아버지를 찌를 거라고 너에게 말했니? 김독자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쳐들었다. 떠밀고 휩쓸고 짓누르는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려고 애쓰며. 하지만 울지 않았다. 김독자는 그곳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김독자는 낯선 가정집에 있었다. 그가 문을 미세하게 열고 그 틈으로 거실의 풍경을 훔쳐보고 있었다. 방은 어두컴컴했지만 거실은 불을 켜놔서 거실의 밝은 빛이 방문 틈으로 스며들어와 어둠 속에서 선명한 금을 만들었다. 거실에 앉은 부부와 아이가 TV를 보며 무언가를 떠들고 있었다. 걔는 자나 봐요? 그 애는 안 자. 그래도 걔가 뭘 어쩌겠어? 엄마, 걔는 왜 우리 집에 있어요? 불쌍해서. 걔가 TV에 나와서 애들이 다들 걔가 보고 싶대요. 내일 데려와도 돼요? 안 돼. 김독자가 천천히 방문에서 떨어졌다. 그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하지만 잠을 자지는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보며 누워있었다. 죽은 듯이. 그 상태로 잠들지 못 하고 누워있었다.
장면은 연거푸 바뀌었다. 그러나 유중혁은 편집된 장면과 장면 사이에 소실된 사소한 장면들, 김독자의 일상까지도 전부 느끼고 인지할 수 있었다. 마치 몰입한 책을 읽을 때, 문장과 단어를 읽었다는 뚜렷한 자각 없이도 장면을 구축하며 페이지 하나하나를 스쳐지나갈 수 있을 때처럼. 김독자는 이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강당에 서서 그는 단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근거림이 들렸다. 모두가 앞을 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모두가 김독자를 알고 있었다. 모두가 김독자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단상 앞에 줄지어 앉은 교사들까지도 그를 알고 있었다. 김독자는 무표정하게 서서 교장의 입을 쳐다보았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주먹이 동그랗게 말려 작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순간, 화면은 모든 사람을 지워버리고 김독자만을 남겼다. 그 넓은 강당에는 오로지 김독자만이 홀로 서있었다. 그는 시선이 아니라 고독을 견디고 있었다. 혼자의 상태를.
장면은 계속 바뀌었다. 김독자의 학창시절이 빠짐없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언제나 교실 끝에 있었고,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다니려고 애썼지만, 동시에 모두에게 보여 졌다. 그를 보기 위해 때때로 다른 반 아이들이 창문 너머를 흘끔거렸다. 모두가 그를 의식했다. 그는 혼자였지만 동시에 가장 유명했다.
하지만 다음 학기가 되자 학생들은 김독자에게 흥미를 잃었다. 그는 더는 화젯거리가 되지 못했다. 가끔 한두 명의 아이들이 그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계절이 바뀌고 반이 교체되었지만 김독자는 여전히 교실 끄트머리에, 창가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교과서를 내려다보거나 칠판을 응시하면서. 그는 놀랄 만큼 조용했고 단조로웠다.
그러다 교실 전체의 풍경이 바뀌었다. 김독자는 다른 교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교복을 입은 아이들 틈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런 후 아까와는 다른 풍경의 거리를 지나 아까와는 다른 가정집으로 돌아갔다. 거실의 풍경도 달랐다. 거실은 텅 비어있었고 방도 아까보다 좁았다. 신발장에 놓인 신발은 고작 두 켤레였다. 김독자는 가방을 방에 내려놓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냉장고를 열고, 잠시 그렇게 서있었다. 냉기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김독자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냉장고 문을 천천히 닫았다. 침묵이 있었다. 갑자기 김독자가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김독자는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장면이 쉴 새 없이 바뀌었다. 이제 그는 교도소 면회실에 앉아 있었다. 김독자의 맞은편에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어머니가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독자가 주머니에서 작은 초콜릿 바를 꺼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오독오독 아몬드 씹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렸다. 김독자가 고개를 떨궜다.
장면은 시시각각 바뀌며 김독자의 매순간을, 그가 삶을 살아나가는 모습을 전시했다. 김독자는 지리멸렬하게, 단조롭게, 무감하게, 다만 꾸준히 살아갔다. 끊임없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투기되었고, 비슷한 자리에 앉아 비슷하게 잊혀 지려고 애썼고,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고독에 차츰 익숙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주 조금씩 키가 자랐다. 김독자는 중학교 삼학년이 되었고 다시 한 번 전학 절차를 밟았다. 다섯 번째 입는 다른 교복이었다.
그 지점에서부터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
김독자가 못 박힌 듯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화면은 그 장면을 아주 공들여, 오래 비추었다. 마치 그게 하이라이트라도 된다는 것처럼. 장면이 바뀌었지만 김독자는 여전히 비슷한 자세로 모니터 앞에 앉아있었다. 그가 무언가를 읽고 있는 게 보였다. 웹 소설 사이트였다. 유중혁은 그 소설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순간 알 수 없는 이유로 유중혁의 존재가 사방으로 뒤틀렸다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텍스트가 유중혁의 정신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단어가, 문장이, 문단이, 한 편이, 이야기가 흘러들어오면서 수만 개, 수억 개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들이 다시 유중혁의 몸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희미한 형체가 차츰 촉각을 되살렸다. 차가운 공기, 깜깜한 어둠의 질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유중혁은 모든 걸 느끼고 알 수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끊임없이 회귀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과거를. 현재를. 미래를. 모든 것을.
충격적이게도, 하지만 정말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유중혁은 한 편의 이야기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그 바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자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김독자 역시 이야기였으므로.
삶을 살아가는 한 우리는 결국 한 편의 이야기였으므로.
‘지금 유중혁은 김독자를 읽고 있었다.’
허공에 쓰여 진 문장이 반짝거렸다. 그건 유중혁의 몸으로 스며들면서 그의 존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유중혁은 침묵한 채 장면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단단해지고 호흡하는 몸이 더욱 생경하게 느껴졌다. 화면이 다시 바뀌었다. 쉼 없이 김독자를 비추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조금씩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잃어버린 표정을 되찾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모니터 앞에서 다리를 떨며 텍스트를 읽고 또 읽는 김독자. 학교에 가면 김독자는 다시 사람들 틈에서 표정을 잃었다. 종종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이 그를 끌고 뒤쪽으로 나갔다. 폭력은 언제나 김독자의 곁에 있었다. 김독자의 삶은 유중혁이 겪어온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더욱 적나라하게 파괴되는 중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그의 폐허가, 짓밟힌 분노가, 고통이, 슬픔과 비참함이 있었다.
그럼에도 욕망 역시 그곳에 있었다.
김독자는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히죽거리거나, 열중해서 자판을 두들기거나, 턱을 괸 채 웃고 있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계속해서 살아갔다.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동급생에게 구타를 당하고, 코피를 쏟고, 졸업하고, 교도소에 가서 어머니의 퇴소 소식을 듣고 되돌아오고, 대입에 실패하고, 최전방에 배치되고, 대학에 입학하고, 소문이 퍼져 다시 혼자 다닐 때, 그때에 김독자는 허공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마치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처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유중혁이다.
김독자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동안 쉼 없이 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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