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혁독자 «제목 미정 3»
5.
‘미식협’에서 귀환한 김독자는 못 보던 차 한 대를 끌고 있었다. 검은색으로 늘씬하게 잘 빠진 차체가 무척 고급스러워보였다. 요란하게 멋들어진 배기음 소리에 장하영과 한명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김독자는 장원 한쪽에 차를 대고 나왔다. 유중혁은 팔짱을 끼고 멀찍이 서있었다. 차에서 내리던 김독자가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짧지만 긴 순간이었다. 잠시 후, 김독자가 먼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다수의 성좌들이 차체에 감탄합니다.]
[소수의 성좌들이 콧방귀를 뀝니다.]
“웬 차야?”
은근하게 대회성적을 어필하고 싶어했던 장하영은 아까보다 조금 주눅이 든 기색이었다. 김독자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차문을 닫았다.
“[X급 페라르기니]야. 승차감이 좋더라고.”
“페라르기니?!”
한명오가 헐떡이며 차문 앞을 맴돌았다. 김독자는 그가 차를 구경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대놓고 우쭐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선망의 시선을 받는 게 특별히 나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김독자는 장하영과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뒤 곧장 유중혁 쪽으로 걸어오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고 그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올렸다.
“나 왔어.”
“…….”
유중혁이 고개를 까딱였다. 김독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히죽 웃었다. 뭐하자는 걸까. 유중혁은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독자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늘 그렇듯이. 그리고 돌아왔다. 늘 그렇듯이. 설화급 성좌들 중에서도 괴짜로 취급되는 성좌 수십 명이 모인 ‘미식협’에서, 김독자는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으로 무엇이든 저질러놓고 왔을 것이다.
유중혁은 실실 웃어대는 김독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제 김독자는 손을 내리고 유중혁의 허리춤에 찬 [흑천마도]를 보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뿌듯해하는 표정이었다. 막상 자기 일에는 그렇게 기뻐하지도 않으면서, 지금은 대체 뭐가 그렇게 자랑스럽고 행복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사람마냥 김독자가 과장되게 감탄했다.
“야, 칼 좋다.”
“…알고 있다.”
“몸은 좀 어때?”
대답 대신 입매를 비틀었더니 김독자가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네가 그런 쪽으로 걱정을 시키겠냐….”
늘 그렇듯 유중혁을 굉장히 잘 알고 있다는 투였다. 평상시였으면 그러려니 넘겼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유중혁은 더 이상 볼 일도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페라르기니에 달라붙은 한명오가 뭔가를 잘못 건드렸는지 쩌렁쩌렁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장하영이 한명오에게 무어라 한소리를 했지만, 경보음이 너무 요란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김독자가 상황을 수습했다. 경보음은 금방 그쳤다. 장원이 갑자기 무척 조용해진 것 같았다. 문제를 해결한 김독자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유중혁은 떠나고 없었다. 그곳은 텅 비어있었다.

*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유중혁은 대부분의 시간을 연무장에서 보냈다. [흑천마도]를 닦거나 무공을 쌓거나 명상을 했다. 가끔 파천검성과 만두를 먹었고, 또 가끔은 장원에서 몸을 풀었다. 김독자와 만날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건 아니었지만, 김독자도 그 나름대로 바쁜 것 같았다. 유중혁은 그를 내버려두었다.
며칠 간 유중혁은 김독자에 대한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거절당한 사실보다도 그 과정을 납득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여태까지 보여준 태도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렇다고 확실히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안 될 것 같다느니 잘 모르겠다느니 모호하게 둘러 대놓고선 유중혁과 입을 맞추는 걸 거부하지도 않았다. 이건 아니라며 펄쩍 뛸 때는 언제고 싫지 않으니 네가 원한다면 괜찮다고 말하는 김독자는 여느 때처럼 의뭉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김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유중혁은 김독자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단지 이 상황을 내버려두고 있을 뿐이었다. 그 증거로 김독자는 당장 껄끄러운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을 노골적으로든, 은근하게든, 피하기는커녕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밀어낸 건 처음 키스했을 때, 그리고 고백에 대답한 한순간뿐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돌아가있었다.
물론 이전과 달라진 점도 있었다. 장원에서 차를 대고 나오던 김독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비껴나가던 그 순간, 유중혁은 김독자가 앞으로 취할 태도를 손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는 직접적으로 거리두기를 ‘보여줄 것이다.’
그건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벽’을 이미 알고 있었다. 김독자는 원래부터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수상쩍은 놈이었다. 그는 유중혁의 동료로서 기꺼이 위험을 함께 했고, 앞으로도 그럴 의사가 뚜렷했으며, 당연한 듯 시나리오 격파에 힘썼지만, 동시에 그 행위를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정보만큼은 공유하지 않았다. 어떻게 시나리오의 허점을 모조리 알고 있는지, 어떻게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을 간파하는지, 어떻게 도깨비들을 엿 먹이고 성좌들을 혓바닥 하나로 농락하는지, 구체적으로 그 정보의 출처를 말해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김독자의 사랑은 ‘왜’의 이유가 될 수 있을 뿐 ‘어떻게’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예언자라는 이유로 어물쩍 넘겨온 순간이 너무 많았다. 김독자는 의도적으로 유중혁에게 비밀을 유지하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심지어는 두 사람이 동료가 되었기 때문에 그 거리가 유지되고 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의뭉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그를 믿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추궁하지 않았고, 캐묻지 않음으로써 김독자는 여전히 미지로 남아있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지껄이고, 전혀 겁먹지 않은 얼굴로 싱글벙글 다가와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던 김독자는 동시에 처음부터 가장 비밀스럽고 간파할 수 없는 존재였다. 동료였든 아니든 간에 처음부터 거리는 정해져있었다. 김독자가 정해둔 거리였다. 그 사이에는 벽이 있었다. 여태까지 그것은 보이지 않는 상태로 단지 두 사람 사이에 있었지만, 유중혁이 김독자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해서, 그러므로 암묵적으로 유지되던 이 거리감을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서, 없던 일로 할 수가 없어서 고백한 순간, 선명하고 뚜렷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벽은 유중혁을 향해 경고하고 있었다. 이이상은 안 돼. 왜냐하면…. 그러나 유중혁은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유중혁이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경과와 결과가 결국 여느 때처럼 김독자답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밀을 비밀로 남겨두고, 벽이 그곳에 있다고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결국 유중혁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김독자답게 흘러가는 과정의 결과가 최악을 불러오는 듯하면서도 종국에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 벽 앞에 서있는 수밖에는 없었다. 믿고, 그 녀석이 지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김독자다움에 마음을 싣는 수밖에는.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유중혁은 더는 상념에 빠지지 않고 제 나름의 평정을 되찾았다.

*
연무장을 독점한지 닷새째에 장하영이 들이닥쳤다. 사색이 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평소에는 마주치기만 해도 불편해하며 슬슬 피하던 녀석이 어쩐 일인지 유중혁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오더니, 격렬하게 더미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그를 내버려두었지만,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장하영은 신경에 거슬리는 소음을 유발하며 더미와 격렬한 한 판을 벌여댔다. 유중혁은 연무장을 비웠다.
나오던 도중에 김독자와 마주쳤다. 김독자는 연무장 인근을 맴돌며 안쪽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미식협’에서 돌아온 이후 거의 일주일 만이었다. 유중혁을 본 김독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눈을 반짝이며 함박웃음으로 다가왔다. 반가워하는 기색을 숨길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 김독자가 스스럼없이 유중혁의 어깨를 붙잡고 장난스럽게 흔들어댔다.
“임마,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왜 이렇게 보기 힘드냐. 그동안 연무장에만 처박혀 있었지?”
“…….”
유중혁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시선이 자신의 어깨를 짚은 손에 똑바로 내리꽂혀 있었다. 거리를… 두려던 게 아니었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며 올라가는 것을 본 김독자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손을 떼어냈다. 잠시 두 사람은 어색하게 서로 다른 곳을 보며 가깝게 붙어있었다. 침묵 속에서 장하영이 더미 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독자가 연무장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그, 많이 시끄럽냐?”
“…네놈만큼 골치 아프진 않다.”
김독자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야, 그럼 큰일 나지….”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유중혁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또 쓸데없는 짓을 한 모양이군 김독자.”
“…별 거 아냐.”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뒷목을 문질렀다. 두 사람은 짧은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더미 패는 소리가 갑자기 아득해졌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키스할까?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무 가까웠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속눈썹에 진 그림자를 볼 수도 있었다.
김독자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더미 패는 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고 담 너머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유중혁은 천천히 김독자로부터 시선을 떼어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가까웠다. 잠시 후, 김독자가 한 발짝 물러났다.
유중혁은 [흑천마도]로 바닥을 긁으며 자리를 떠났다.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유중혁은 장원으로 나온 후에야 자신의 입 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이가 없군. 김독자가 원하는 거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는데, 그건 너무 어려웠다. 김독자가 기본적인 처신 자체를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거면 왜 거절했지? 어이가 없었지만, 짜증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단숨에 경계태세를 취한 유중혁이 고개를 쳐들었다. 청룡성 일대로 불온한 기운이 밀려들고 있었다. 김독자와 파천검성이 장원으로 뛰쳐나왔다. 일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다음 순간, 유중혁은 보았다. 청룡성 일대로 밀려드는 잿빛의 구름을. 창공에서 응축되는 에너지를. 얼기설기 얽힌 구름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천히 개봉되는 깊은 중심부를. 모든 것을 박살낼 그 새까만 구멍을, 유중혁은 보았다. <제1 무림>의 멸망을.
그는 또다시 보았다.

6.
내가 유중혁을 거절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물론 여기서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무용한 말들일 뿐이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유중혁과 연인이 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겠다고 잠깐이지만 생각하기도 했다. 유중혁에게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늘어나면 향후 시나리오를 깰 때뿐만 아니라 그 다음 회차, 그러니까 내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유중혁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나는 녀석이 연애를 할 때 상대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유중혁은 이설화에게 그랬듯이 나를 최우선으로 두고 행동하게 될 것이다. 나를 애지중지하는 유중혁을 상상하는 일은 무척 어색했지만… 아마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손쉽게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내 기분을 좀 더 섬세하게 살필 테고, 무리시키지 않으려고 할 테고, 몸 상태를 수시로 점검하고, 음식을 해먹이거나, 가끔은 손도 잡고 입도 맞출 테였다. 유중혁은 이설화에게 그랬듯이 내가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다. 녀석이 정말로 좋은 연인이 될 거라는 데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중혁은 근본적으로 무척 좋은 놈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부분이었다. 나는 유중혁을 사랑하고, 또 녀석이 절망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녀석이 좋은 연인이 될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나 자신에 대한 불투명성이 너무 컸다. 남자와 뭔가를 한다는 게 거북해서는 아니었다. 사실 녀석의 고백을 받은 후에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는데, 생각보다 엄청 기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얘랑 사귄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유중혁이랑 사귀게 된다고 내가 갑자기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그 녀석과 연애를 하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았고, 고백을 받은 뒤에도 상상해보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튼지 간에 상상 속의 내 자신은 흐릿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군다면 유중혁에게 못할 짓이다. 안 그래도 멘탈도 개복치인 녀석이 연인이 하자가 많은 것도 모자라 현재 상황에 큰 감흥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그 문제를 본인에게서 찾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그건 내 문제라고 말해줘도 눈곱만큼도 듣지 않을 게 빤했다. 연애해서 행복해지는 상황 같은 건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는데, 연애해서 불행해지는 상황(게다가 언젠가 닥칠 게 불 보듯 뻔해보였다)만큼은 뚜렷하게 떠올랐다. 늘 그렇듯 그 모든 원흉은 나였는데, 불행히도 정작 그 타격을 입는 건 내가 아니라 유중혁이었다. 거기까지 가정해본 나는 그 이상의 상상을 그만두고 마음을 결정했다.
어쨌든 대답을 내놓기까지 내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다는 뜻이다. 난 유중혁이 나로 인해 더 복잡한 상황에 놓이는 걸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왕 선발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거대 설화를 얻은 이후에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야만 했다. 당장 유중혁의 제안을 거절해서 벌어질 일이 어느 정도 두렵긴 했지만, 녀석이 나랑 사귀게 되면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거라는 건 안 봐도 빤한 미래였다. 그 꼴을 내버려둘까 보냐. 난 유중혁이 가능하면 행복하기를 바랐고, 이번 일은 다행스럽게도 내게 선택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선택을 했고, 그것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믿었다.

*
[X급 페라르기니]를 타고 <제1 무림>을 탈출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너지는 <제1 무림>의 정경과 사람들의 아우성이 차츰 멀어지고, 마침내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모두가 멍하니 차창 밖으로 흐르는 <스타 스트림>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귓가에 아직도 파천검성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남아있었다. 포탈 속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73번째 마계’에 도착했습니다.]
[‘마왕 선발전’까지 사흘 남았습니다.]
…나는 감히 조수석을 바라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명오가 담배를 피우겠다며 가장 먼저 자리를 비웠다. 뒷좌석에서 파천신군이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미러로 웅크리고 있는 장하영의 뒤통수가 보였다. 나는 침착하게 숨을 몰아쉬며 그동안의 일을 정리해보려 애썼다. 메시지가 떴다.
[‘2차 수정본’의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왔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지만 빈번이 최악의 상황에 던져졌다. 앞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을 켜야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었다.
“김독자.”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에서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결이 느껴졌다. 그 분노와 슬픔으로부터 차마 눈 돌릴 수 없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유중혁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
무슨 대답이라도 찾기 위해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켰던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쏟아지는 거대한 감정의 응어리에 가슴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정적이 숨통을 조여 왔다. 유중혁은 가만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간신히 백미러 쪽으로 시선을 주니, 장하영이 파천신군을 껴안은 채 우리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장하영이 파천신군을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정적을 부수며 내 가슴을 쾅 때렸다. 용기를 내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입을 열면서도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또… 뭔가 해봐야지.”
“…….”
“발악하고, 싸우고, 뒤집어봐야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유중혁이 무감하게 읊조렸다.
“그런가.”
「네놈답지 않았다.」
동시에 말소리가 겹쳤다. 뒷목이 빳빳해졌다. 목구멍이 막힌 채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은 내 시선에 응답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이어졌다.
「…아니면, 나 때문인가.」
아니야.
「결국 말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지도 모르겠군.」
…아니야, 중혁아.
시선을 내리깐 채 묵묵히 문고리를 잡는 녀석의 손을 낚아챘다. 허튼 생각을 하며 자신을 찌르고 있는 유중혁의 얼굴을 붙잡아 돌렸다. 딱딱하게 몸을 굳힌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딴 건 언제고 말해줄 수 있다. 너의 실수는 도깨비 놈들의 농락 때문이고, 네가 시나리오를 실패한 건 비상식적인 난이도 때문이며, 이설화가 죽은 건 재앙 때문이고, 네가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그냥 세상이 미쳐 날뛰고 있기 때문이라고. 네가 엉망진창이 되고, 강대한 절망에 부딪혀 무너지고, 몇 번이고 회귀하고, 아무나 쳐 죽이는 사이코패스가 된다고 한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 네 탓이 될 만한 일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너는 매번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고, 모든 원인을 너로부터 찾아낸다. 너는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도전해 스스로를 압도한 절망을 추월한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선택한 관계에서조차 너로부터 문제의 원인을 찾는다.
유중혁은 내가 예상한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내가 예상한 결과가 아니었다.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최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유중혁은 여전히 나와의 관계에서 불행했고 그렇게 될 예정인 것처럼 보였다. 왜? 내가 너를 거부해서? 그 이상은 안 된다고 선을 그어서? 그렇지만, 그렇지만 날 그렇게 좋아해? 아직 그 정도는 아닌 거 아니었어? 여기서 끊어내면 괜찮아지는 거 아니었어? 어째서, 왜 너는 연거푸 불행해보이지? 왜 나는 너를 불행으로부터 차단할 수 없지? 제발 부탁이니 너를 불행하게 만들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내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것을 선택할게. 중혁아, 그러니까 나는.
“…가지 마.”
나는 유중혁을 사랑한다.
신음하듯 읊조리며 고개를 비틀어 유중혁에게 입을 맞췄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절로 눈이 감겼다. 부드러운 입술이 느껴졌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 이상으로 뭔가를 할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있었다.
유중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 손은 유중혁의 손등을 감싸고 있었고, 다른 한손은 유중혁의 뺨에 얹어져 있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도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인중에 내려앉는 깊은 숨을 느꼈다. 용기가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이미 거절했으니까. 싫어하는 걸지도 모른다. 천천히 몸을 떼어내려는 그때, 갑자기 억센 손아귀가 내 턱을 잡아챘다. 다음 순간, 유중혁이 입을 벌리고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읍…!”
나는 허우적거리다 유중혁의 팔을 붙잡았다. 성난 혀가 입술 사이로 파고 들어왔다. 입안은 금방 축축하고 뜨거워졌다. 너무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혀 때문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내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나는 헐떡이며 몸을 들썩였다. 유중혁이 내뱉는 숨소리가 너무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혀가 질척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머릿속을 통째로 울리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귀가 뜨거웠다. 유중혁이 손을 미끄러뜨려 내 뒤통수를 붙잡더니 그대로 밀어붙였다. 나는 떠밀려 선바이저에 머리를 박았다. 쿵 소리가 함께 입술이 잠깐 떨어졌다.
“허억… 헉….”
정신없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이는데, 유중혁이 손으로 내 턱을 추켜올렸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손에 턱을 맡겼다. 어둠속에서 유중혁의 눈이 내 얼굴을 꿰뚫는 게 느껴졌다. 번들거리는 시선이 내 이마, 콧대를 따라 미끄러져 눈과 코, 입술을 훑었다. 내 얼굴은 이미 엉망이었다. 눈물과 침 때문에 얼굴 곳곳이 축축했다. 숨이 막혀서 헐떡이는 동안 생리적인 눈물이 나온 것 같았다. 아무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유중혁이 턱을 으스러질 듯 붙잡아 다시 자길 보게 만들었다. 이번엔 너무 아파서 작게 악 소리가 나왔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힘없이 말했다.
“중혁아….”
내뱉고도 깜짝 놀랄 만큼 잠긴 목소리였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고 입에 고인 침을 삼켰다.
“나….”
갑자기 시야가 뒤집히는 바람에 말이 끊어졌다. 시트가 통째로 젖혀졌다. 깜짝 놀라 굳은 내 위로 유중혁이 올라탔다. 나를 내려다보는 유중혁의 얼굴이 보였다. 긴장한 표정으로 유중혁을 올려다보며 어떻게든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유중혁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탐욕스럽게 내 이마부터 턱 끝을 훑었다. 턱 끝에 닿으면 다시 시선을 들어 내 이마를 타고 내려왔다. 나는 몸을 떨며 누워있었다. 어둠이 눈에 익자 유중혁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녀석의 머리카락이 이마 부근에서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눈은 풀려있었다. 내리깐 시선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입을 맞추려고 그런 것이었지 벗어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유중혁이 돌변하더니 나를 그대로 시트에 처박았다. 그러고는 움직이지 못 하게 내 뺨을 단단히 쥐고 숨 막힐 듯이 키스했다. 나는 손을 허우적거리며 연거푸 녀석의 등허리를 긁다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유중혁은 칭찬이라도 하듯 쪽쪽거리며 내 입술을 가볍게 빨다가도 내가 헐떡이느라 조금이라도 바르작거리면 으르렁거리며 밀어붙였다.
“어흑….”
이 자식은 어떻게 키스조차 이렇게 황홀하고 못돼처먹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헐떡이다 못해 목구멍에서 묵직한 숨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체온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반사적으로 몸을 비비다가, 뒤늦게 이성적인 판단이 들면 몸을 꿈틀거려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유중혁은 어느 쪽이든 허용하지 않았다. 정신이 나간 듯 헐떡이며 무아지경으로 내 입술을 빨고 핥아댔다. 슬슬 무서워지려고 하는 그때, 유중혁이 갑자기 내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뜨거운 숨이 고스란히 목덜미에 퍼지는 게 느껴졌다. 척추를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김독자.”
나는 헉헉 숨을 뱉어내며 누워있었다.
유중혁이 내 목덜미에 뺨을 비비며 한숨을 쉬듯 연거푸 불러댔다.
“김독자. 김독자….”
“…….”
얌전히 녀석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갑자기 품에서 바르작거리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굳어있는데, 유중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당황했다. 아까의 무아지경이던 넋 나간 표정은 어디로 가고, 유중혁은 그새 냉정하고 이성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정도가 아니라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 같았다. 황급히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킨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이유가 무엇이지.」
「내가 원한다고 했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린 건 사실이지만.」
「…이딴 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
어안이 벙벙해서 유중혁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유중혁의 시선에 다시 불이 붙었다. 그러나 그 불길은 곧 사그라들고, 얼굴이 천천히 구겨졌다.
「…….」
「…젠장.」
천천히, 유중혁이 나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가벼워졌다. 유중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고 녀석이 멀어지는 동안에도 나는 멍하니 누워있었다. 유중혁이 떠난 자리에 단 한 줄의 심상이 남아있었고, 그건 너무 무거웠다.
「…정말, 이딴 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 뭔데?
[‘제 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유중혁의 진심은 나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었다.

7.
유중혁은 김독자를 쥐어 패고 싶었다.
이왕이면 공들여 힘을 실은 뒤, 죽지는 않되 끔찍한 고통을 느낄 만큼의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너무 허약하고 약해빠진 화신체를 가지고 있어서 힘을 실을 때에도 무척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게다가 그런 솜방망이로는 자신의 분노를 절반도 채 담을 수 없다. 심지어 지금의 김독자는 환자였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주의해야만 했다. 유중혁은 세이스비츠 공단에 도착했을 당시 아일렌이 자신에게 몇 번이고 강조하던 김독자의 ‘절대안정’을 잊지 않았다. 녀석은 요 며칠 쉬지도 않고 너무 많이 움직였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이마를 가로지르는 희미한 금을 내려다볼 때마다 아일렌의 ‘절대안정’을 상기해야만 했다.
세이스비츠 공단에서 김독자 일행과 헤어진 이후, 한동안 유중혁은 진심으로 고통스러웠다. 무너져가던 <제1 무림>의 정경과 사람들의 비명소리, 파천검성의 격과 [그레이트홀]에서 내려온 다섯 개의 촉수들을 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정말로 힘들게 한 것은, 그림은 조금 달랐으나 이미 한 번 목격한 바 있던 <제1 무림>의 멸망의 순간을 다시 지켜봐야만 했던 것, 그리고 그의 스승을 그곳에 다시 한 번 두고 온 일이었다. 유중혁은 회귀를 거듭하며 같은 실수만큼은 저지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이번 일은 모두 김독자의 개입으로 인해 벌어진 재앙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김독자를 원망했다. 하지만 동시에 유중혁은 <제1 무림>건이 김독자가 원하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독자가 아등바등 움직여서 얻고자 했던 건 이와는 정반대의 그림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증오할 수 없었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에게 키스한 이유가 죄책감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책임을 지려고 했을 지도 모르고, 달리 그것을 행할 방도가 없자 심리적으로 접근한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바보 같은 일이었다. 김독자를 거절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찾아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유중혁은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김독자의 앞에서 통제권을 잃었다. 시트 위로 엎어진 김독자는 온몸으로 자신을 유혹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지난번처럼 밀어내지도 않았고, 입조차 제대로 벌리지 못 하고 딱딱하게 굳어있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등허리에 매달려 연거푸 손을 미끄러뜨리기까지 했다. 헐떡이면서 어떻게든 움직임에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김독자의 턱을 쥔 채로, 유중혁은 생각했다. 당장 부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약하다. 나는 지금 얼마큼의 힘을 주면 이 머리통이 산산조각이 날지 알 수 있다.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1 무림>에 대멸망 시나리오를 불러온 이 사내가 죽도록 원망스러운 동시에 미치도록 끌리기 때문에. 결국 어떻게든 용서할 방법을 찾고 싶어질 것이기 때문에. …아니다. 용서할 수는 없다. 유중혁은 감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넘어갈 수는 있다. 자기 자신에 한정된 면죄부를 발행할 수는 있다. 김독자를 여전히 동료로서 받아들이고 믿기로 결정할 수는 있다.
하지만 김독자가 자신의 몸에 짓눌려 몸부림치는 순간, 아연해졌던 정신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김독자가 학학 숨을 몰아쉴 때마다 떨리는 숨이 인중에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유중혁은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가장 먼저 하얗고 가느다란 목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든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조금만 힘을 주면 뚝 부러질 그 목덜미가. 유중혁은 끓어오르는 성욕을 억누르며 그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았다. 김독자. 이름을 부를 때마다 들끓는 욕망을 찍어 내렸다. 김독자. 너를 통째로 삼키고 싶고, 동시에 통째로 부숴버리고 싶다. 김독자. 하지만 어느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유지할 것이다. 이 관계의 그 모든 시도와 고백과 거리 속에서도 네가 너를 유지하듯이. 방금 두 사람은 한 세계의 멸망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유중혁은 그 이상의 멸망은 원하지 않았다.
던전과 시간 단층을 전전하며 ‘마왕 선발전’에 필요한 일시적인 버프와 설화, 무기와 스킬을 얻는 동안 유중혁은 김독자에 대한 생각 자체를 차단하려고 했고, 대체로 그 시도는 성공했다.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김독자가 없으니 예상 외로 그 일은 무척 순조로웠다. 우리엘이 연락을 취하지만 않았어도 그는 선발전 이전까지 그럭저럭 상념을 다스리며 할 일을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지평선의 악마’를 죽이고 신유승을 새장에서 꺼내는 동안, 유중혁은 머리 위로 꽂히는 무수한 보통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성좌들의 시선이었다. 증오스럽다 못해 익숙해져 보통이 되어버린 존재들. 그 속에서 보통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메시지를 띄웠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유중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리엘을 보낸 것도 결국 너겠지.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1 무림>건이 아니었더라도 김독자는 비슷한 방법을 썼을 거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땅에 붙은 자와 하늘에 매달린 자만큼의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김독자를 결국 용서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까? 한 세계의 멸망과 그 멸망 이전에 명백하게 주고받았던 감정들을.
유중혁이 천천히 얼굴을 구겼다.
“꺼져라, 김독자.”
그러자 정말로 별 하나가 꺼졌다.
“…김독자?”
대답이 없었다.

*
처음에 유중혁은 당황했다. 우선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하지만 꺼진 별이 다시 나타날 기미가 보이질 않자, 그는 ‘한낮의 밀회’를 열었다. 가장 먼저 보낸 건 상황에 대한 정보였다.
김독자, 비유는 ‘내가’ 구했다. 13:31
김독자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지자, 유중혁은 멜레돈으로 이동했다. ‘마왕 선발전’을 위해 대비해야만 하는 마지막 히든 피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작신보]를 발동해 빠르게 풍경을 건너뛰는 동안 유중혁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메시지 창을 열었다.
[도착한 메시지가 없습니다.]
“…….”
심지어는 읽었다는 표시조차 뜨지 않았다. 의도적인 무시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마왕 선발전’이 코앞이었고, 김독자는 유중혁이 좀 꺼지라고 했다고 꺼져주던 위인은 아니었다. 결국 메시지 하나를 더 보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라진 거지? 14:37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독자는 멍청해 보이긴 해도 명분 없이 움직이는 녀석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더러운 기분은 대체 뭐지?
네 유치한 장난에 어울려줄 여유는 없다. 14:52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죽이겠다. 16:13
농담이 아니다. 16:52
생각을 고쳤다. 평소의 김독자라면 모를까, 지금은 평상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와 상황에 놓여있었다. 지금은 김독자가 아득바득 거리를 유지하던 때와는 달랐다. 밀어내면 밀려날 시기였던 걸지도 몰랐다. 실수한 건가? 내가? 하지만 녀석의 거리두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 게 불만스러우면서도 이 이상 멀어지지도 않았기에 내버려둘 수 있었는데. 유중혁은 초조하게 연달아 메시지를 남겼다.
이번에도 내가 널 살려둘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7:02
아직 한 대 남았다. 17:09
짜증나게 굴지 마라. 17:15
나한테 맞아봤으니 알 텐데. 17:34
건방지게 나오는군. 17:46
언제까지 버틸 셈이지? 17:59
정말로 답장하지 않을 건가? 18:05
아직까지 무소식이라니, 간이 부었군. 18:17
네놈은 내가 무섭지 않은 모양이지. 18:22
각오해라. 18:31
바쁜가? 19:03
무슨 일이 있으면 점이라도 찍어 보내라. 19:11
도움이 필요하면 당장 말해라. 19:13
아무 일 없는 게 확실한가? 19:21
네놈은 더 이상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19:33
대답해라. 19:42
부탁한다. 19:50
김독자. 19:53
김독자. 20:05
.
.
[금일 제공된 메시지 할당량을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남은 몇 시간 동안 유중혁은 홀로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 해야만 했다. 만약 김독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답장이 없는 게 의도적인 무시가 아니라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라면? <73번째 마계>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있었다. 아스모데우스는 물론이고 다른 마왕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마왕 선발전’을 앞두고 벌어지는 성좌들의 신경전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돌발 상황의 가능성 중 하나였다. 유중혁은 종이쪼가리 같은 김독자가 쉽게 구겨지거나 찢겨나가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근심은 커져만 갔다. 밤이 깊어지자 주머니 속에서 비유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고쳐 잡고 ‘한낮의 밀회’ 창을 열었다.
[도착한 메시지가 없습니다.]
여전히 메시지 확인 표시조차 뜨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몇 시간동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가리를 잘못 놀려 개죽음을 당한 건 아닌지, 무리하게 움직여 설화를 질질 흘리고 다니는 중인 건 아닌지, 또 이상한 짓을 벌여 수습하느라 ‘마왕 선발전’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떨어져있던 지난 시간 동안 의도적으로 억눌러왔던 마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그를 심란하게 했다. 당장에 김독자를 찾아내 얼굴을 확인하고 몸 구석구석을 점검해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대체 왜 성좌까지나 되어서 화신체가 그 모양이란 말인가. 그놈의 하얀 코트는 그 허약한 이미지의 총체였다.
어처구니없군. 1:05
선발전에 참여하기 전에 코인이든 뭐든 써서 화신체를 수습하는 편이 좋을 거다. 1:06
참고로 이건 충고다. 1:31
동이 틀 무렵, 유중혁은 서브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마지막 히든 피스를 얻었다. 비유가 잠에서 깨어나 주머니 속에서 작게 울어댔다. 유중혁은 주머니 입구에 손등을 대고 가만히 서서 뜨뜻미지근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한동안 그곳에 머물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감동합니다.]
유중혁은 간접 메시지를 무시하고 ‘한낮의 밀회’를 열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사람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우리엘의 간접 메시지가 허공에서 반짝이다 사라졌다. 별들은 여전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73번째 마계>를.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무사한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개를 갸웃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무슨 소리냐고 묻습니다.]
“김독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냐고 묻는 거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갑자기 흥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필요 없다.”
유중혁은 시선을 거뒀다. 김독자가 무사하다면 그 이상 할 말은 없었다. 다행히도 간밤에 시뮬레이션 해보았던 모든 최악의 상황은 닥치지 않고 지나간 모양이었다. 안심이 되었다. 그제야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과열된 머리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눈앞에 열린 ‘한낮의 밀회’창을 마주하는 순간, 유중혁은 간밤에 자신이 전송한 엄청난 양의 참사를 마주하고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네놈에게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한다. 2:42
걱정하고 있다. 3:00
오해하지 마라. 3:39
어디까지나 전우애다. 3:43
묻고 싶은 게 있다. 4:04
일전에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4:16
네놈은 내게 ‘가지 말라고’ 했다. 4:23
대체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4:38
설마 그때 네놈을 버리고 가서 지금 복수하는 건가? 4:47
.
.
‘…주접을 떨어놨군.’
아주 진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메시지 확인 표시는 뜨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언제가 되었든 김독자가 이 메시지를 전부 읽게 될 거라는 건 예고된 비극이나 마찬가지였다. 메시지를 읽은 김독자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유중혁은 착잡한 심정으로 ‘한낮의 밀회’를 내려다보다 말고 새롭게 뜬 시스템 메시지에 고개를 들었다.
[‘마왕 선발전’의 시작까지 24시간 남았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은 당장 할 일이 있었다. 유중혁은 조용히 ‘한낮의 밀회’ 채팅창을 노려보며 메시지 하나를 더 보냈다.
가겠다. 14:17
변명거리는 가면서 생각해보면 되겠지. 안 되면 패서라도 납득시키면 그만이다. 흉흉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유중혁이 세이스비츠 공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8.
‘마왕 선발전’의 전장을 달리면서 나는 유중혁을 생각했다.
유중혁은 어쩌면 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나를 좋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한낮의 밀회’를 열어 눈앞에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나는 우리 관계를 없던 일로 만들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직감했다. 더 이상 밀어내거나 무시할 수는 없었다. 유중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이 관계유지에 타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 하필 나를 좋아하게 된 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유중혁은 마음을 준 상대에게 진중해지는 사람이었고, 비록 그런 면모가 ‘멸살법’에 크게 묘사된 건 아니지만, 아무튼지 간에 이 모습 역시 유중혁이라는 그 개연성만큼은 납득할 수 있었다.
[‘사명대사의 원혼’이 전장을 배회합니다.]
등 뒤에서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렸다. 일행들과 정신없이 내달리며 맵의 지형과 곳곳에 숨겨진 버프 효과의 몬스터들의 구체적인 위치를 계산했다. 유중혁이 그 위치들 중 하나에 있을 거라는 판단 하에 나는 방향을 틀었다.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더니 새의 울음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우레를 먹는 새’가 나와 일행을 바짝 뒤쫓고 있었다. 갑자기 공기의 흐름이 바뀌더니 날갯짓 소리가 아래로 내리꽂혔다. ‘우레를 먹는 새’의 부리가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오수가 방향을 틀어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자신의 몸을 던져 당신을 지킵니다!]
불길과 함께 오수의 울부짖음이 전장을 흔들었다. 일행들은 뒤돌아볼 틈도 없이 허겁지겁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오수의 상황을 확인했다. 다섯 명의 성좌들 틈바구니에서 오수의 애처로운 깽깽거림이 들리다 뚝 끊어졌다.
[조력자,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사망했습니다.]
…빌어먹을.
시스템 메시지에 위급함을 느낀 한명오가 다리를 자르더니 성흔을 써서 저만치 앞서나갔다. 그래, 도망이라도 잘 가는 게 낫다. 여전히 머릿속으로 유중혁의 위치를 계산하면서 나는 장하영을 붙들고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우레를 먹는 새’가 무시무시한 울음소리를 내며 우리가 숨은 풀숲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 때문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잠시 후, 오이디푸스의 개소리와 함께 성좌들이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폭연과 산성액이 인근을 뒤덮으며 진득하고 독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나는 목덜미와 손등, 발목에 튄 불꽃과 산성액을 느꼈다. 녹아내리는 살점의 고통을 [제 4의 벽]이 완화시켜주었다. 장하영이 헐떡이며 내 몸을 살폈지만 나는 장하영의 손목을 꽉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머릿속 지도 위에 찍힌 점이 깜빡이며 우리가 숨은 풀숲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이 온다. 우리를 찾는 성좌들을 향해 온다. 모든 걸 뒤엎기 위해 온다. 그리고 그 기다림에 보답하듯, 아주 긴 정적이 찾아왔다.
다음 순간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부터 성좌의 끔찍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
나는 피 냄새가 진동하는 전장에 서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1경기를 간단히 휩쓸어버린 유중혁이 눈을 번뜩이며 [흑천마도]를 쥐고 서있었다. 무려 일곱 명의 성좌들이 그를 향해 맹공을 퍼붓고 있었지만, 유중혁은 신음 한 번 없이 모든 공격을 받으며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 죽어가는 모양새이긴 했지만, 나는 우리에게 승산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불러온 지원군들이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성이 기합을 내지르며 마누를 향해 돌진하고, 유상아가 오이디푸스 왕에게 대적하며 전방을 지켰다. 머리 위로 키메라 드래곤이 긴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남은 성좌들을 향해 몸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유중혁에게 내달렸다. 위기의 순간임에도 그 어느 때보다 온몸에 힘이 감돌고 있었다.
“유중혁!”
유중혁이 지친 기색으로 눈을 감았다.
“김독자.”
잠시 후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작을 죽여. 놈이 문장을 가지고 있다.”
“알고 있어.”
나는 피로 축축한 유중혁의 뺨을 붙잡았다. 눈을 번쩍 뜬 유중혁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지만 더 이상 거북하지도, 공포스럽지도 않았다. 황홀하게 검을 휘두르고, 전장을 공포로 지배하고, 피를 뒤집어쓰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패왕. 초월좌. ‘유희의 지배자’. 회귀자. 하지만 동시에 나는 녀석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안다. 만성회귀우울증으로 바닥을 치고 떨어지는 게 무엇인지, 세계가 어떤 식으로 거듭하여 멸망해왔는지,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럼에도 세계의 수복을 위해 삶을 버리고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게 얼마큼의 각오를 필요로 하는지 빠짐없이 알고 있는 녀석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이 또다시 누군가를 욕망하기로 결심한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다. 함께하려고 한다. 가능하면 곁에 두려고 노력한다. 나는 너의 가장 부정적인 모습과 가장 긍정적인 모습을 매순간 통감하고 경험한다. 내게 있어 너의 새삼스러운 모습 같은 건 없다. 네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도, 상실하는 순간도, 찌질해지는 순간도, 비참해지는 순간도 결국 내가 읽어온 모든 행간에 소속된다.
그러므로 내 앞의 너 역시 결코 낯선 사람일 수 없었다. 나를 좋아하는 유중혁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무너지기 쉽고, 쉽게 불행해지지만, 동시에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인간. 눈을 감고도 네가 어떤 인간인지 그릴 수 있었다. 너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어떤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유중혁은 여전히 유중혁이었다.
“고맙다.”
천천히 유중혁의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와줘서 고마워. 날 여기 내버려두지 않아서, 기억해줘서. 나를 포기하지 않아줘서 고맙다.”
“…….”
“일단 이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그래, 네 말대로 해보자.”
유중혁이 천천히 한숨 같은 숨을 내쉬었다.
나는 축축한 유중혁의 뺨을 다정하게 감쌌다.
“그러니까 안 됐다, 유중혁. 너 이제 나랑 뭐가 되는 거냐.”
유중혁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간 것을 보았다.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등 뒤에서 성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천천히 떨어졌다.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상 몇 초에 불과했다. 우리는 겨우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유중혁은 시선을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뚫겠다.”
유중혁이 남은 마력을 짜내며 전방을 향해 [파천검도]를 휘둘렀다. 칼날이 번뜩이며 힘을 실은 채 허공을 갈라 젖혔다. 나는 녀석이 뚫은 길을 이용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성좌들이 달려들었지만 유중혁의 검격에 가로막혔다. 그 틈에 이현성을 향해 내달렸다. 등 뒤에서 창이 화신체를 꿰뚫는 질퍽한 소리가 들렸다.
「맡긴다, 김독자.」
[참가자, ‘유중혁’이 살해당했습니다!]
“독자 씨!”
이현성이 나를 붙잡아 업었다. 머리 위로 신유승을 태운 키메라 드래곤이 바짝 뒤따랐다.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눈동자, 강렬하게 내리쬐는 빛의 격이 등을 뜨겁게 만들었다. 드래곤이 울부짖는 소리와 수르야의 진언이 스파크와 불꽃을 튀기며 대지에 내리꽂혔다. 땅이 쩍쩍 갈라지며 흙을 튀겼다. 이현성이 기합을 내지르며 나를 내던졌다. 타이밍을 노리고 키메라 드래곤이 거대한 브래스를 내뿜자, 수르야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 틈으로 몸을 날리며 [전인화]를 발동했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눈앞으로 다가온 베르칸 공작이 겁에 질린 얼굴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순간,
모든 게 끝났다.
[참가자, ‘구원의 마왕’이 참가자 ‘베르칸 공작’을 살해했습니다!]
[당신은 살해당했습니다.]

9.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유중혁이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안개처럼 흐릿했고 일행들은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김독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자 어깨에서 흘러내린 설화가 우수수 떨어져 바닥에 고였다. 유중혁은 설화를 붙잡아 어깨에 고정시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신체가 붕괴하고 있었고, 동시에 일정한 속도로 수습되고 있었다. 아직은 붕괴되는 속도가 더 빨랐지만 이 정도 속도라면 조만간 출혈이 멎을 것이다. 전투 중에 입은 부상을 시스템 자체가 수리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1회전에선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아서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유중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풍경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비록 안개에 감싸여 사방이 희끄무레하고 두루뭉술하긴 했지만, 유중혁은 금방 이곳이 아까의 전장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김독자는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쓰러져 있는 걸 보면 그 역시 사망했던 것 같았다. 고개를 들고 <스타 스트림>의 메시지를 기다렸지만 아직 결과 발표는 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면 이곳은 결과를 발표하기 전까지 기다리는 일종의 대기장인 셈이었다. 도깨비들을, 하다못해 성좌들을 기다렸지만 사방은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가득 차있었고, 특별히 어떤 일이 벌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팀의 성좌들은, 화신들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안개 어딘가에 함께 있거나 아예 다른 공간에 분리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유중혁은 잠시 상황을 판단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정한 후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지만, 설화가 줄줄 흐르는 바람에 몇 걸음 못 가서 멈추어 서고 말았다.
‘젠장.’
일단 화신체가 어느 정도 수습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었다. 곁눈질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누워있는 김독자를 확인했지만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멀리서 볼 때 그의 화신체는 무사해보였으나 자신처럼 어딘가가 붕괴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가능하면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유중혁은 자리에 꼼짝 않고 멈추어 서서 몸의 회복을 위한 스킬을 쓰는데 집중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유중혁이 번쩍 고개를 들고 신경을 곤두세웠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발소리들이었다.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셋? 넷? 아니다, 그 이상이다. 다섯, 여섯… 적어도 일곱 명이 넘는 성좌들이 근처를 에워싸고 있었다. 유중혁은 다시 한 번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고 <스타 스트림>의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제2 경기의 결과는 아직도 판독 중이었다. 유중혁의 시선이 절로 김독자를 향해 돌아갔다. 그는 여전히 쓰러져 있었다. 일어날 기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유중혁은 자신의 몸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설화가 틈새로 새어나오고 있었고, 몸은 아직 회복 중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성좌들이 침묵을 지키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뿌연 안개를 가르며 등장한 이들의 얼굴을 유중혁은 차례로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경기는 끝났다.”
그가 조소했다.
“네놈들이 수작을 부려도 소용없다.”
성좌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어떤 지령이라도 받은 존재처럼 멍한 얼굴로 서서 유중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쓰러진 김독자를 번갈아 응시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유중혁이 비틀거리며 어떻게든 김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려 애썼다. 설화가 발 아래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는 그대로 멈추어 섰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좋지 않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는 무방비였다. 이대로 공격을 받으면 화신체가 붕괴할 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황도 좋지 않지만 김독자를 포함한 지구조 일행들은 현재 쓰러져 의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 하고 있었다. 부활 시스템에 어떤 과부화가 걸린 걸지도 몰랐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썬 성운에 의한 개연성의 농락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성좌들이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안 돼.”
유중혁이 힘을 쥐어짜내 검을 빼들었다. 서늘하게 칼날이 스치는 소리에 성좌들이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응시했다. 유중혁이 으르렁거렸다.
“이쪽이다.”
그때 갑자기 성좌 하나가 찢어져라 입을 벌려 웃었다.
“물론,”
성좌가 말했다.
“우린 너를 먹기 위해 온 거다.”
그 말을 신호로 모든 성좌들이 유중혁에게 덤벼들었다. 유중혁이 칼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났다. 위기감을 느낀 설화들이 속삭이며 유중혁의 몸에 달라붙었다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성좌 하나가 유중혁의 팔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쥐었다.
“너를 갈가리 찢기 위해서 우리가 왔다.”
성좌가 눈을 뒤집고 헐떡였다. 가까이서 본 성좌들 역시 곳곳의 설화가 뜯겨 온전한 화신체가 아니었다. 설화들이 일정 이상 새어나가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유중혁은 칼을 휘두르려다 애꿎은 허공을 몇 번 갈랐다. 그는 주먹을 휘둘러 목을 쥐어잡은 성좌의 얼굴에 한 방을 먹였다. 곧장 다른 손아귀가 그의 몸에 달려들었다. 무수한 손들이 스멀스멀 몸 위로 기어올라 왔다. 유중혁이 고개를 비틀며 욕지거리를 했다. 풀밭에 아무렇게나 버려져있던 김독자의 목이 유중혁 쪽으로 돌아간 건 그때였다. 다음 순간 김독자가 번쩍 눈을 떴다.
“안 돼.”
김독자는 정확히 유중혁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내뱉은 대사를 똑같이 읊었다.
“이 쪽 이 다.”
눈동자에 이체가 없었다. 유중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는데, 갑자기 김독자의 내부에서, 정확히는 말할 수 없었지만 어떤 장벽이 한순간 해제되었다. 마치 흐릿한 그래픽이 깨끗해지듯 김독자의 존재감이 그곳에 존재하던 모든 의식을 가진 존재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뚜렷하고 깨끗하게, 아주 강렬히 인식해본 적 있던가? 게걸스럽게 유중혁을 탐하던 성좌들이 홀린 듯 김독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다음 풍경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이 아주 느리게 전개되었다. 성좌들이 김독자를 향해 허겁지겁 내달렸고, 김독자 앞에 멈추어 섰고, 입을 벌리고 손을 뻗었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김독자의 주변을 ‘열어젖혔던’ 장벽이 단숨에 오므라들었다. 그러자 김독자를 뚜렷하게 인식하게끔 만들었던 어떤 존재감이 완전히 닫혀버림과 동시에, 주변에 서있던 모든 성좌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일그러지고 마구 해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유중혁의 손에서 천천히 [흑천마도]가 흘러내렸다. 그는 칼을 내팽겨 치고 김독자를 향해 내달렸다. 축축한 풀밭 위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은 유중혁이 김독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김독자!”
김독자의 화신체 속에서 어떤 격렬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얼기설기 얽힌 설화들이 맹렬하게 몸을 순환하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유중혁이 정신없이 김독자의 두 뺨을 더듬어 붙잡고 흔들었다.
“김독자, 정신 차려라. 김독자!”
김독자의 몸 내부를 타고 흐르던 설화들이 마치 분노하듯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유중혁은 불규칙적으로 호흡하며 얼어붙은 채 김독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설화들이, 설화들의 줄기가 서로 몸싸움을 벌이며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는 게 보였다. 김독자의 뺨이 작게 갈라지더니 그 속으로 허연 빛줄기가 일렁였다. 유중혁이 다급하게 갈라진 틈을 오므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김독자, 정신 차려라.”
그가 붙잡은 덕분에 화신체의 붕괴가 잠시나마 지체된 것 같았다. 으르렁거리던 소리가 잦아들더니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왔다. 유중혁이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김독자의 이마를 쓸어 올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땅을 향해 흩어져 내렸다. 그때 피부 아래에서 작게 쩍쩍 소리가 났다. 한순간에 김독자의 얼굴 위로 미세한 균열이 번졌다. 유중혁이 숨을 멈추었다가 다급하게 입을 벌렸다.
다음순간 김독자의 머리통이 폭발했다.

*
이명이 울렸다. 눈앞의 상황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대로 얼어붙은 채 숨을 몰아쉴 때마다 자신이 호흡하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울려 퍼졌다. 다른 세상에서 오는 소리 같았다. 이 상황 자체가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유중혁은 패닉 상태로 고개를 숙인 채 쉴 새 없이 눈을 움직였다. 누군가 끊임없이 안 된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그게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손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유중혁은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붙잡아 쥔 채 힘을 주었다. 경련이 조금 가시자마자 그는 숨을 고르려 애쓰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했다. 주변에 쏟아진 김독자의 설화 파편을 박박 긁어모았다. 손안에 잡히는 이물감이 유중혁의 손바닥에 달라붙어 무언가를 속삭이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김독자의 얼굴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목에서부터 올라온 일종의 뼈대만이 덩그러니 풀 위에 남겨져 있었다. 유중혁은 긁어모은 설화덩어리를 그 빼대에 붙이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얼굴을, 얼굴을 빚어야한다. 머리를. 눈을, 코와 입을 만들어야 한다. 화신체가 붕괴되었더라도 이곳은 <스타 스트림>의 시스템의 유예를 받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습해야 한다. 덜덜 떨리는 손의 공포감을 억누르며 유중혁이 김독자의 얼굴을 빚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멈추었다.
…김독자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중혁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건 말도 안 된다! 김독자가 어떻게 생겼었지? 분명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보았다. 최근에는 더 가까이에서, 심지어는 그 얼굴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었다. 손으로 주무르고 쥐어도 보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치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기억 속의 김독자 얼굴이 흐릿하고 모호했다. 그 이마, 눈썹, 눈, 코와 입술을 모조리 만져보았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수복할 수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었다. 그는 김독자의 존재로부터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된단 말이다. 이렇게 끝날 순 없어, 이렇게 끝나선 안 된다!”
설화를 덕지덕지 이어 붙이며 유중혁이 울부짖었다.
“부탁이니… 부탁이니 이러지 마라. 내게 이러지 마라, 김독자!”
「유 중 혁」
“김독자…, 안 된다.”
「유  중 혁」
“…!”
유중혁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손아귀에서 설화들이 마구 꿈틀거리며 저들끼리 엉겨 붙는 게 느껴졌다. 어떤 시선이 있었다. 그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중혁은 자신을 탐욕스럽게 내려다보는 강렬한 눈을 느꼈다. 김독자의 몸으로부터 서서히, 어떤 것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존재 같은 것이 빠져나왔다. 그건 완전히 김독자로부터 분리되지는 않았다. 간신히 그 끄트머리에 매달린 채 몸을 곧추세웠다. 그건 투명했고 오감으로 인식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지각되는 어떤 명백한 존재였다. 그게 말했다.
「김독 자 가 이상 한 거 먹였 다」
유중혁은 그것을 똑바로 응시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은 김독자를 살릴 수 있나?”
그것이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잠시 후 눈높이에 글자가 나타났다.
「가 능」
“말해라.”
그것이 즐거운 듯 마구 꿈틀거리며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유 중 혁 내 안으 로 들 어온 다」
「김독 자 를 구 해」
「네 가 구한 다아…」
“돕겠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것이 부피를 늘렸다. 허공으로 어떤 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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