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혁독자 «제목 미정 2»
3.
나는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든 감각이 빳빳하게 곤두선 채로 굳어있었다. 시각과 청각, 촉각과 후각이 한계까지 벌어져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이상의 정보를 받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는데, 문가에 서있는 줄 알았던 유중혁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는 순간 온몸의 털이 위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뒤통수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패닉 상태로 유중혁을 밀어내려 애쓰자, 유중혁이 다시 나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유중혁이 내 볼을 감싸 쥐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감각이 불현듯 살아나 얼굴 전체로 뜨끈하게 번져나갔다.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리는데, 그 틈으로 혀가 밀고 들어왔다.
유중혁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이 자식이 나에게 키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온힘을 다해 반항했다. 하지만 ‘그 유중혁’에게 반항이라니, 택도 없었다. 붙잡힌 뺨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몇 번 더 몸부림을 치다가 혀가 들어오는 순간 전의를 상실했다. 정신이 아연해져 실시간으로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유중혁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유중혁은 나를 거의 침대 헤드에 처박다시피 했다. 입술을 빨며 연거푸 쪽쪽거리던 유중혁이 혼비백산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주무르면서 입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등허리로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마땅히 반항하지도 못 한 채 눈을 바짝 감았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날아간 것만 기억난다. 입을 벌리고 연거푸 헐떡이며 유중혁의 움직임에 휩쓸렸다. 녀석은 미친 듯이 잘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오래 키스하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나와 유중혁은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아차렸다. 유중혁은 내가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주는 자비를 보였지만 그딴 자비는 필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유중혁을 보았다. 그 녀석은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심지어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지구로 돌아가자, 김독자.”
“…….”
“너를 원해.”
“…….”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침으로 범벅된 입술을 수습한 뒤, 유중혁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침대 헤드에 등을 바짝 붙이는 정도였다. 등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자 조금 전의 상황이 떠올라 절로 몸이 뻣뻣해졌다.
유중혁은 내 반응을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내 표정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벌어진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유중혁이 나에게, 뭘 했다고? 저 자식이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충격과 공포로 몸이 벌벌 떨리는 가운데 어느 정도 돌아온 정신이 자동적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켰다. 다음 순간, 나는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유중혁의 생각에 아연실색했다.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거지?」
「나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나.」
「동정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군.」
「과연… 그렇다면 아까의 반응도 이해가 간다.」
「그나저나….」
「멍청한 얼굴이군.」
아니 중혁아…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떨어져있는 동안 구체적으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좋을지 모를 아주 심각하고 끔찍한 오해가 발생한 것 같았다. 유중혁이 내가 자신을 ‘원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유중혁이 필요했다.
나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 녀석이 죽은 줄로만 알고 괴로움에 잠겨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막막하던 순간을 생각하면 가능한 한 다신 이 녀석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유중혁이 치료실에 들이닥쳤을 때 느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안도감이 떠올랐다. 포괄적으로 전개한다면, 이와 같은 감정들 역시 ‘원한다’는 말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중혁의 ‘원한다’와 나의 ‘원한다’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우선 이 자식은 나에게 키스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나는 유중혁과 다시는 키스하고 싶지 않았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고, 상상해서도 안 될 말이었다. 당연했다! 나는 게이가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나는 게이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여자를 좋아했다. 지난 이십팔 년의 세월동안 남자를 보고 설레 본 적은 맹세컨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성적으로 끌려본 적도 전무했다. 사춘기 시절 몰래 야동을 다운받다가 실수로 게이AV를 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도 질겁하며 화면을 꺼버리고 파일을 휴지통에 처박아버렸다. 이것이 내가 동성애와 연관된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나는 제대로 연애해본 적도 없고, 성적인 경험도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모를 만큼 둔한 것도 아니었다. 단언컨대, 나는 게이가 아니었다.
유중혁이 다시 다가오려고 하자,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오, 오지 마!”
“…….”
“아니. 잠시만… 잠시만, 중혁아.”
나는 허둥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팔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댄 채로 다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행여나 유중혁이 나를 붙잡을까봐, 그래서 아까의 일이 반복될까봐 두려워서 유중혁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중혁은 묵묵히 내 시선을 받으며 서있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생각… 생각 좀 하자.”
“…….”
지난 시나리오를 달성하는 동안 발생한 몇 가지 오해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항간에서 떠도는 소문들에 따르면, 몇몇 사람들은 진지하게 나를 게이로 여기고 있었다. 귀찮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는데, 방금 전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진작부터 강경하게 나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우리엘의 입김이 컸을 것이다. 그녀는 종종 전우애를 이상한 방식으로 포장해 코인을 뿌려대거나 성좌들 사이에 소문을 퍼 나르곤 했으니까.
…우리엘?
“…유중혁, 혹시 우리엘 인형 가져왔냐?”
유중혁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품속에서 우리엘의 상징체를 꺼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무릎에 올려놓았다.
인형은 갈가리 찢겨져 솜이 반쯤 빠져나와있었다.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저 정도라면 아무리 상징체인들 본체에도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고고한 대천사가 마계에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나는 복잡한 얼굴로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유중혁이 73번째 마계를 들쑤시고 다니는 동안 우리엘이 어떤 말이든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해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유중혁이 그 헛소리를 믿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놈이라 단 한 번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한 적이 없었는데, 내 판단미스였다. 아무래도 내 소문에 힘을 실어주는 어떤 일이 발생한 것 같기는 한데, 대체 그게 뭐지?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
유중혁의 고백에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유중혁은 가장 필요한 정보가 생략되어 있는 나의 대답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곧이어 유중혁이 납득하는 투로 말했다.
“그렇군. 마왕 선발전에 참가할 생각이겠지?”
“…맞아. 일행들에겐 미안하지만, 여기서 나는 거대 설화를 얻어야만 해.”
유중혁이 무어라 입을 더 열기 전에 내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래야 앞으로 있을 대멸망 시나리오들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
유중혁은 잠시 침묵한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찢어진 우리엘의 팔을 조심스레 붙이고 있자, 머리 위로 목소리가 떨어졌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그런 후 유중혁이 덧붙였다.
“그래서, 대답은?”
나는 또다시 회피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어쩔 거냐?”
이번에 유중혁은 불만스럽게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매서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꿋꿋하게 우리엘의 나머지 팔을 이어 붙이는데 집중했다. 물론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아득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 녀석이 대체 어디까지 진심인 건지도 알아야했다(물론 진중하다고해서 뭔가 해볼 마음 같은 건 죽어도 없었다). 잠시 후, 머릿속으로 유중혁의 진심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피하는군.」
「…혼란스러울 일이었던가.」
「직접 입으로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려줬어야 했는지도 모르겠군.」
「여기까지 와서?」
「짜증나게 구는군, 김독자.」
오해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유중혁은 나를 연거푸 충격에 빠뜨릴 생각을 하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당분간은 마계에 머무를 거다. 이곳에 개인 시나리오가 있어서 당장은 떠날 수도 없다.”
“그래? 괜찮으면 나 좀 도와주지 그래.”
“돕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겠지.”
“…설마 너도 ‘마왕 선발전’에 참가할 셈이냐?”
“당연한 얘기를 하는군.”
“설마 너 아까 지구로 돌아가자고 한 게 고백 때문이 아니라….”
말실수였다. 고백이라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유중혁이 미간을 좁혔다. 재빠르게 입을 다물기도 전에 유중혁이 다가왔다. 망했다. 끝까지 모르는 척 했어야 했는데. 지구로 돌아가자는 말에 받은 감동이 달아나는 것이 서러워 내뱉은 게 그만….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입을 벌리는데, 갑자기 유중혁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너머에서부터 스산한 기운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유중혁이 창가로 다가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석양이 드리운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순간적으로 멍을 때리고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치료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마르크와 아일렌이 사색이 되어 들어왔다. 품속의 비유가 부르르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유중혁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묵묵히 말했다.
“왔군.”
[성좌, ‘인류의 시조’가 ‘유중혁 공단’을 노려봅니다.]
[성좌, ‘최후의 파라오’가 ‘유중혁 공단’을 노려봅니다.]
[특정 성운의 성좌들이 ‘유중혁 공단’을 노려봅니다.]
순식간에 나타난 수십 개의 별이 하늘을 덮었다. 스파크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꽂혔다. 공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벼락이 떨어진 장소에서 몇 번 더 스파크가 일더니, 곧 육중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모래먼지와 함께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미라의 형상이 성벽을 붙잡은 채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파피루스>에 소속된 성좌였다. 나는 그들이 공단 [베르칸]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짓씹듯 내뱉었다.
“…시위라도 하러 온 모양이군.”
[이 공단의… 새로운 지배자는… 누구냐.]
우리는 미라의 입술 근처에서 튀는 무수한 스파크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유중혁이… 누구지?]
“유중혁, 이길 수 있겠냐?”
“지금은 무리다. 곧 그 시간이라서.”
“아까 그 패널티 말하는 거냐? 하루에 10분씩 사라진다는?”
“…….”
“그럼 저 녀석을 어쩐다….”
“놈은 아무것도 못 할 거다.”
“왜?”
“아직 ‘마왕 선발전’은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야, 아스모데우스한테 당한 거 벌써 잊었어?”
“누구나 아스모데우스처럼 굴 수 있는 건 아니야.”
“클레오파트라는 <파피루스>소속이잖아? 성운의 개연성을 빌려와서 난장을 놓으면….”
그 순간, 유중혁의 시선이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김독자, 벌써 네놈이 한 짓을 잊은 모양이군.”
“뭐?”
나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유중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으로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바깥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무어라 진언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 나의 신경은 온통 유중혁에게 쏠려있었다. 유중혁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마르크와 아일렌이 그제야 우리 쪽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언을 터뜨리다 말고 붕괴하는 클레오파트라의 화신체와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말고 머쓱하게 방을 나가버렸다. 아일렌은 나가기 전에 탁자에 놓인 빈 찻잔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치료실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유중혁의 눈에 노기가 돈 것은 그 때였다. 그 눈이 어찌나 원망으로 가득 차있던지, 아무 잘못도 없는 내가 사과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유중혁은 복잡한 감정을 한 번에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내뱉었다.
“잊었나? 놈들은 너에게 [운명]을 강제했었다.”
“…….”
나는 그 말을 두 박자 후에나 이해했다.
“…아.”
잠시 후 내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야 임마, 그런 거 아니야!”
비로소 사건의 전말이 낱낱이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유중혁은 예언의 내용을 토대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본인이라고 판단하고는 이 마계까지 찾아와서 내 낯짝을 보려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나? 내가 유중혁을 사랑하는 거지, 유중혁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좋다니까 갑자기 덩달아 좋아진 건가? 하지만 그건 캐붕이다. 우리 중혁이는 그런 개방적인 쉬운 놈이 아니다.
유중혁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우선 모든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미치겠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켜볼까 궁리했지만 이 타이밍에 녀석의 속마음을 더 듣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유중혁이 혀를 찼다.
“[예언]은 정확하다.”
“…….”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김독자.”
“…….”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 제발 중혁아!”
벌떡 일어났다가 몸 상태 때문에 다시 주르륵 미끄러졌다. 나는 끙끙거리며 한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네 말이 맞아. 다 맞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 정말로.”
“내가 너를 사…랑 하긴 하는데.”
“너랑 막 키스하고, 그러고 싶은 게 절대로 아니거든.”
“아, 미치겠네. 그러니까… 전우애 같은 거지.”
“야, 너는 동료끼리 키스하는 거 봤냐?”
당황한 나머지 말이 횡설수설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왜 이렇게까지 당황한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키스 이야기를 할 때에는 기분 탓인가 얼굴이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유중혁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런 의미의 사랑이 아니란 것쯤은 안다.”
나는 절망적으로 두 손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렇지… 알지, 나도 알지….”
“…….”
갑자기 유중혁 쪽에서 말이 없어졌다. 불안해져서 고개를 드니, 녀석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초조해진 나는 결국 다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켰다. 머릿속으로 유중혁의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나쳤나?」
「하긴. 환자니.」
「이번엔 내 쪽이 배려가 없었다.」
「횡설수설하는군.」
「앞뒤가 맞지 않는데다가 짜증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줘야 하지?」
「여기까지 와서 또 사기를 칠 셈인가.」
「키스가 어땠다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어디까지를 원하고 있는 거지?」
「확인해보면 되겠군.」
「저놈의 주둥이를 닥치게 하려면 더더욱.」
“김독자, 고개 들어라.”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유중혁이 다가왔다.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침대 헤드 쪽으로 바짝 붙었다. 그 이상으로 도망갈 곳이 없었기에 나는 거의 껌딱지처럼 그곳에 붙어있었다. 유중혁이 침대 봉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진중했고 시선으로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비상벨을 울렸다. 또? 또야?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내가 너한테 뭘 했는데 갑자기 이러는 건데?!
유중혁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나는 애원했다.
“아 중혁아… 자비 좀!”
“네놈의 헛소리를 닥치게 하려면 이보다 더 좋은 수가 없지.”
“악!”
인중에 닿는 유중혁의 숨이 느껴졌다. 일순 들이닥치는 녀석의 체취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제 아무리 게이가 아니라고 해도 저런 잘생긴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건 부담스럽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내가 허둥지둥 외쳤다.
“알겠어!”
“…….”
“알겠어! 내가 졌다니까!”
유중혁이 멈췄다. 나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눈치를 보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꾸했다.
“…근데 지금 당장은, 내가 복잡해서, 힘들거든?”
“…….”
“…시간을 좀 줘.”
“…….”
“생각 좀 정리하고 말해줄게.”
유중혁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기다려달라는 뜻인가?”
‘멸살법’의 현실화 이후 내 자신에 대해 새롭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 내가 곤란한 일을 미루는 데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냉큼 대답했다.
“응.”
*
한동안 나는 유중혁을 피해 다녔다. 유중혁도 특별히 나를 붙잡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10분간 사라진다는 그 패널티 때문인지 녀석은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유중혁이 없는 틈을 타 공단거리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기분을 풀기 위해 애를 썼다. 장하영이 이따금 공단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일렌은 내가 공단을 돌아다니는 걸 못마땅해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적어도 2주간은 침대 신세를 져야하는 몸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나는 여전히 비틀거릴 때가 있었다. 몸을 구성하는 설화들이 헐겁게 붙어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치료실로 돌아갔다간 유중혁과 단둘이 있게 될 가능성이 컸으므로 나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려고 했고, 어쩌다 소란이 벌어지면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 치안유지에 힘썼다. 운이 좋으면 ‘징벌자’와 마주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극적인 첫 만남 이후로는 그녀와 마주칠 수 없었다. 나를 그렇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려보고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유중혁은 뭐가 그렇게 불만스러운지 창밖을 쏘아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몇 번 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캐묻다가 그만두었다. 유중혁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가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유중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고, 유중혁도 내 뜻을 눈치 챈 것인지 별다른 말없이 그 거리를 유지해주고 있었다. 유중혁은 기다려달라는 내 말에 응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사실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정말로 기다려줄 줄은 몰랐다. 언젠가는 이 일을 수습해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이 없는 쪽에 가까웠다. 그냥 기다리다보면, 저절로 묻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유중혁 주변에는 미인들이 넘쳐나니까. 게다가 녀석은 ‘징벌자’와도 아는 사이니, 어쩌면 차후 시나리오에서 ‘징벌자’와 러브라인이 생길 지도 모르잖아? 말하지만 치사하게 구는 게 절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유중혁을 위한 것이니까. 나 같은 놈하고 대체 뭘 하겠다는 말인가. 애초에 난 유중혁이랑 뭔가 하고 싶지 않다고! 게다가 ‘마왕 선발전’을 앞두고 더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어영부영 고백 건을 미뤄둔 것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유중혁과 나는 금세 원래 그랬던 사이로 되돌아왔다. 바라던 바였다. 무척 긍정적인 전개였다. 나는 이따금 유중혁의 눈치를 보며 앞으로의 일을 도모했다. <제1 무림>에 가겠다는 말을 꺼내자 어느 정도 반발하기는 했지만, 녀석도 결국 내 의견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일행은 금방 꾸려졌다. 나는 아일렌과 마르크에게 각각 [유중혁 공단]과 [김독자 공단]을 맡겼다. 배웅을 하러 나온 아일렌은 잠시 고개를 숙여보라는 듯 손짓하더니, 내가 고개를 숙여주자 주의 깊게 이마를 살폈다. 그녀의 손가락이 이마 언저리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아직 덜 붙었어요. 조심해요.”
“괜찮아질 거야.”
실제로 [스킬 ‘라마르크의 기린’의 효과] 때문에 내 몸의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보다 활발히 작동되는 중이었다. 이이상 무리하지 않는다면 일주일 만에 회복기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무리를 할 예정이었다.
고개를 들다가 유중혁과 눈이 마주쳤다. 유중혁은 내 이마를 만지는 아일렌의 손을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유도 없이 당황했다. 급하게 아일렌으로부터 떨어지자, 그녀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공단을 잘 부탁해.”
“너무 오래 비워 두진 말아요.”
“노력할게.”
비유가 포탈을 열자 일행들이 차례로 그 앞에 섰다. 네 사람이 건너가기에 무리가 없는 크기였는데도 다들 한 사람씩 건너갈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한 발짝 물러나 팔짱을 낀 채 한명오와 장하영을 불만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한명오가 앞서가며 뭐라고 떠들어대자, 장하영이 불안한 목소리로 조용히 좀 하라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포탈로 들어갔다. 입자 단위로 부서지던 두 사람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소용돌이치며 포탈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포탈 앞으로 다가섰다. 유중혁이 내 손을 잡은 건 그때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의심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흥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5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5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500코인을 후원합니다.]
…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왜?”
“…….”
“문제 있어?”
“같이 가자.”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려고 애썼다.
“임마, 갑자기 왜 그래….”
유중혁은 대답 대신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시선이 내 어깨 너머를 향해있었다. 녀석의 시선대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포탈밖에 없었다. 아득한 구멍 너머로 <스타 스트림>의 별빛들이 희미하게 흘러가는 게 보였다.
“야, 이럴 때가 아니거든? 너무 늦으면 쟤네랑 갈려서….”
“김독자.”
유중혁의 얼굴이 일순 괴로움으로 물들었다. 말문이 막혔다. 잡은 손에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팔이 저릴 지경이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유중혁은 시선을 내리깐 채 생각을 정리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두 번은 싫다.”
“…….”
그제야 나는 녀석의 말뜻을 이해했다. 포탈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뒤늦게 떠올랐다. 이동방식부터 생김새까지 그건 블랙홀을 닮아있었다.
…짜식,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힘들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니까, 유중혁이라면 금방 털어낼 줄 알았다. 마지막 순간에 내 이름을 제법 애절하게 불렀었는데, 누가 개복치 아니랄까봐 그 상황을 완전히 털어내지는 못한 듯싶었다. 갑자기 조금 미안해졌다.
“…….”
나는 머쓱한 얼굴로 유중혁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어색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녀석의 손을 마주잡았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머릿속으로 우리엘의 간접메시지가 폭발적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간접메시지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유중혁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포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됐지? 가자.”
유중혁의 손을 잡아끌자 그가 순순히 딸려왔다.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중혁이 내 손에 깍지를 끼는 순간, 나는 다시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맞물린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귀엽다는 말은 취소다.
한없는 어색함을 느끼며, 나는 유중혁과 함께 포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4.
<제1 무림>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유중혁은 무심히 장내를 훑으며 지붕 위에 앉아있었다. 손에는 뜨뜻미지근한 무림만두가 들려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만두를 베어 물었다.
달빛이 어스름하게 깔린 풍경은 고요함에 싸여있었다. 푸른 기와집들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골목이 드문드문 보였다. 불을 밝힌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을 꺼놓고 잠이 든 상태였다. 반면 서쪽 구역에는 야간장터가 열려 인근이 온통 환했다. 형형색색의 호롱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유중혁은 큰길로 이어지는 골목에서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하곤 얼굴을 찌푸렸다.
환자 주제에 대체 뭘 저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유중혁은 골목을 돌며 기와집 사이로 사라지는 김독자를 내려다보다가 남은 무림만두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시야가 높아진 탓에 사라졌던 김독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김독자는 야간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지붕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공중에서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자 일순 바람이 멈추었다. 그는 먼지 한 점 없이 착지했다. 유중혁은 자신이 뛰어내린 4층 높이의 기와집을 한 번 흘끔거리다 뒤돌았다. 다리를 움직이자 발아래 풍경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그는 넓은 지붕과 지붕 사이를 한 걸음으로 뛰어넘었다.
골목으로 뛰어내렸을 때 김독자는 코너를 돌던 참이었다. 유중혁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그의 뒤를 밟았다. 어스름한 달빛이 서늘하게 골목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구름이 흘러갈 때마다 거리 전체가 어두컴컴해졌다가 밝아졌다. 김독자는 코트 때문인지 무척 환해보였다. 푸른 기와, 흙벽과 돌로 쌓은 담벼락은 주변의 어둠에 반응해 그림자가 져있었지만 김독자는 외떨어진 존재처럼 희부옇게 떠있었다.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뒷덜미였다. 걷는 동안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김독자의 목을 응시했다. 가느다랗고 허여멀건해서 맥없어 보이는 게 딱 김독자였다. 점 한 개 없는 뽀얀 피부가 눈에 그린 듯 선명했다. 당장 한 손에 쥐면 누구라도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독자는 바로 뒤까지 따라붙은 유중혁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저렇게 부주의할 줄이야. 유중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경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건가? 죽은 게 몇 번인데 저토록 안일하게 구는 건지. 몸이 성해도 성치 않은 것과 별반 차이도 없는 주제에 정말이지 저 무신경함에는 짜증이 난다.
골목을 한 번 더 꺾기 직전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김독자.”
김독자는 거의 튀어 올랐다. 화들짝 놀라 돌아본 얼굴에 미처 지우지 못한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유중혁을 보며 애써 태연한 투로 대꾸했다.
“깜… 짝이야. 인기척 좀 내, 짜샤.”
“…….”
유중혁은 아까부터 줄곧 인기척을 내고 있었다.
잠시 후, 김독자의 표정이 평소의 태연자약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짐짓 밝게 말했다.
“웬일이냐. 밤 산책이라도 나온 거야?”
“널 쫓아왔다.”
“아 그래….”
김독자는 잠깐 먼 곳을 보더니 말을 돌렸다.
“난 지금 야간장터로 가는데.”
“알고 있다.”
“닭 국물에 말아주는 국수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
“히든 피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러 가는 거 아니었나?”
“…아니거든? 들어가서 쉬기나 해.”
“그거라면 이미 구했다.”
“뭐?”
김독자가 멈추어 섰다.
“언제?”
“지난밤에.”
“야,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그것 때문에 가는 게 아니라면서?”
“…….”
김독자는 몇 번 입을 뻐끔거리다 다물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렁설렁 발걸음을 옮겼다. 알만 했다. 비록 허우대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구석이 많았지만, 김독자는 기본적으로 시나리오를 위한 일이 아니면 쓸모없이 움직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는 일도 적었고, 다른 동료들이 쉬고 있을 때에도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나타나고는 했다. 나중에 알고 보면 혼자서 히든피스나 서브 시나리오를 해치우러 다녀온 것이었다. 정말 최악일 때에는, 그렇게 사라진 후에 혼자 죽어버렸다. 몇 번이고 그렇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김독자의 특기였다.
물론 김독자가 죽을 수 있는 건 다시 되살아난다는 강력한 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여러 스킬이 대비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시나리오 바깥으로 추방된 후에도 제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기까지 하는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은 김독자에게 있어 무척이나 흔한 것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건 이제 하나의 선택지였다. 김독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부분이 가장 겸연쩍었다. 유중혁은 ‘선택지’에 함의된 의미를 지나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죽음을 선택지로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선택되는 것은 언제나 수동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목숨이 수단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김독자는 스스로의 존재를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하지만.
하지만, 뭔가가 더 있었다.
유중혁은 회귀자였고 죽음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담보했다. 죽음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생겨난 선택지였다. 하지만 김독자는? 김독자 역시 그와 동일한가? 김독자의 ‘선택지’와 유중혁의 ‘선택지’는 동일한 사고에서 발생한 것이 맞는가? 유중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불확실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이 겸연쩍음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김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다.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회피하고, 도망치는 존재. 그리고 지금도 도망치고 있었다.
코너를 한 번 더 돌자 골목이 끝나고 장이 나타났다. 허공에 매달린 호롱이 색색들이 거리를 밝히며 밤을 화려하게 물들였다. 두 사람은 어두운 골목의 출구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빛과 어둠의 대비로 인해 골목과 대로변은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김독자가 머뭇거리다 그대로 돌아섰다. 유중혁이 그를 붙잡았다. 이번에 김독자는 놀라긴 했어도 펄쩍 뛰지는 않았다.
“…왜 또?”
“볼일이 있는 거 아니었나.”
“무슨 볼일?”
“먹고 싶은 게 있다며?”
유중혁이 김독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종잇장처럼 그대로 딸려왔다. 뜨악한 표정이 볼만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팔을 놓아주고는 눈짓으로 대로변을 가리켰다. 김독자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야간장터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호롱불 아래에 상점들이 쭉 늘어져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음식점도 몇 군데 보였다.
“잘하는 곳을 안다.”
“…….”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김독자는 제법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떼어놓으려고 아무렇게나 만든 변명거리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장터음식이 먹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김독자가 결단을 내린 듯 짐짓 비장하게 말했다.
“좋아. 먹자.”
유중혁이 조건을 걸었다.
“같이.”
“…알겠어.”
거리로 나온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의식적으로 유중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종종 앞서갔지만, 그럴 때마다 유중혁이 따라붙었다. 얼마 뒤 김독자는 거리 벌리는 것을 포기했다. 두 사람 옆으로 사탕을 든 아이 넷이 깔깔거리며 지나쳤다. 나란히 걷던 유중혁이 김독자를 불렀다.
“김독자.”
“응?”
“이쪽이다.”
김독자는 이상하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는 앞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한 번 바라보더니 유중혁을 쫓아왔다.
“두 블록 뒤에 있는 곳으로 가려는 거 아니었어?”
“아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그야… 네 단골집 같아서…?”
유중혁이 멈추어 섰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캐묻기도 전에 김독자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달고 황급히 수습했다.
“아니, 너 무림만두 좋아하는 것 같길래. 그 가게 무림만두 잘하잖아. 나도 낮에 근처 지나가다가 봤거든.”
“…….”
또 이런 순간이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이따금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물론 이전 회차에서 자신이 겪어야했던 큼지막한 사건들을 알고 있는 건 다소 수상쩍기는 해도 납득할 수 있었다. 김독자는 예언자였고, 그렇다면 미래시와 동시에 과거시 역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제아무리 과거시라고 해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마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때때로 무서울 만큼 정확했다. 그는 유중혁의 버릇, 사소한 습관과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모조리 캐치해냈다. 처음에는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지극히 사소하고 온건한 기억들, <제1 무림>에는 유독 그런 기억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지난 회차에서 겪었던 부드럽고 따뜻한 경험들, 그래서 버리기로 결심한 과거. 김독자는 그런 것들까지도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건 유중혁으로부터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김독자는 예상했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유중혁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는 김독자. 그래서 그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해하는 김독자. 언제든 이해받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김독자.
그래도 김독자가 모르는 유중혁도 있었다.
좁다란 골목길을 앞서나가던 유중혁이 마침내 멈추어 섰다. 뒤따라오던 김독자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유중혁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머쓱하게 뒤로 물러났다. 유중혁은 일순 등 뒤로 닥쳤던 김독자의 냄새를 감지하곤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햇빛에 잘 말린 종이냄새 사이로 미묘한 잉크냄새가 났다.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중혁아… 도착한 거야?”
유중혁은 고개를 들고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무려 7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층마다 겹겹이 기와가 올려져있었다. 3층과 5층을 제외한 모든 층의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안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유중혁은 꼭대기층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네놈은 모르는 곳이지.”
*
그 가게는 <제1 무림>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상가건물 꼭대기층에 위치한 국수집이었다. 상가건물인 만큼 한 가게가 한 층을 전부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꼭대기층만 해도 일곱 점포가 입점해있었다. 내부가 좁은 탓에 국수집은 주방을 제외하면 서너 명 남짓이 앉을 만한 공간이 남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홀을 따로 두는 대신 지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상가 층층이 쌓인 지붕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서빙을 담당하는 직원이 주방에서 주문받은 국수를 들고 태연하게 미끄러운 기와를 밟고 뛰어다녔다. 높은 곳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 국수집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국수집은 무림인들, 그 중에서도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인 고수들을 위한 단골 음식점이었다.
김독자는 꼭대기층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흐트러뜨렸다. 유중혁이 그에게 김이 피어오르는 육수가 담긴 사발을 내밀었다. 김독자가 고맙다고 대답하면서 그릇을 받았다. 김독자는 젓가락을 면 사이에 걸쳐놓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운치 있네.”
“식기 전에 먹어라.”
김독자는 잠깐 그릇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식혀서 먹을게. 나 뜨거운 거 잘 못 먹어서.”
두 사람은 말없이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붕 아래 주방에서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육수를 끓이고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는 소리, 주문을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이면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의 희미한 호객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아래층 곳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면을 흡입 중인 고수들이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가장 높은 지붕에 단둘이 앉아있었고, 모든 소음은 일정 이상 커지지 않고 아래 세계에 머물렀다. 그래서 결국 주변은 조용했다. 달빛이 떨어지는 <제1 무림>의 풍경은 평온하고 안온했다.
침묵을 지키던 김독자가 입을 연 것도 그 때였다.
“진짜 좋다.”
“…….”
“네가 왜 여길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유중혁이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김독자가 씨익 웃었다.
“고맙다, 이런 곳 데려와줘서. 난 이런 곳 있는 줄도 몰랐는데.”
김독자가 허공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 아니다… 묘사에 있었던 것 같기도….”
“너도 <제1 무림계>에 와본 적 있는 모양이지?”
“아니, 뭐어. 그건 아니고.”
김독자는 말을 흐렸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무림계 소설 보면 비슷한 풍경묘사 많잖아. 그런 거 읽을 때마다 종종 상상했거든. 이런 데도 있겠지, 하면서.”
“책을 자주 읽나?”
유중혁은 일전에 맡았던 김독자의 체향을 떠올랐다. 그건 기묘할 정도로… 정말이지 기묘할 정도로….
김독자가 민망한 듯 웃었다.
“책… 인가? 아니다, 책을 자주 읽지는 않았지. 내가 읽은 건 책이라기보다… 아무튼.”
“소설을 읽는 것 외에는 뭘 좋아하지?”
그러고 보면 유중혁은 세계의 멸망이 시작되기 이전의 김독자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 유중혁은 프로게이머였고 인지도가 높았으며 종종 리그에 나갔다. 전광판에 얼굴이 걸린 적도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의 팬을 자처했으니 그런 것들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군, 이 부분에서조차 김독자는 알고 유중혁은 몰랐다.
김독자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가 불확실한 톤으로 말했다.
“그냥 소설 읽는 거 말곤 딱히 좋아하는 건 없는데….”
“무림 소설을 좋아했나?”
“아니, 나는 판타지 좋아했어. 그, 왜 있잖냐. 갑자기 지구멸망하고 괴수 나오고 그런 거…. 갑자기 다 죽어버리고 다 무너지는 거. 뭐라고 하더라, 그런 걸? 아, 아포칼립스.”
“팔자 좋은 말이군.”
“하하, 그러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렇게 말하는 김독자는 별로 슬퍼보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런 장르물 중에서도 꾸준히 챙겨보는 게 있었거든…. 거기 나오는 주인공이 미친놈인데 또 미워하긴 좀 그래서,”
거기까지 말하던 김독자가 문득 말을 멈췄다. 그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김독자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유중혁을 훑어보다가 피식 웃었다. 유중혁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얼굴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독자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자꾸만 웃음을 흘렸다.
“아이고, 우리 중혁이.”
“그렇게 부르지 마라.”
“우리 중혁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우리 중혁이 무지막지하게 세고.”
“김독자.”
“우리 중혁이 인기도 많고….”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다.”
유중혁이 진지하게 김독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실실거리던 김독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걷히더니 침묵이 찾아왔다. 유중혁은 슬슬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답은 생각해봤나?”
물론 차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김독자가 허둥거리는 면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든 게 뚜렷해진 지금 바보가 아닌 이상 김독자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는 건 불가능했다. 가까운 스킨십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건 경험이 없기 때문이겠지. 뭐가 마음에 걸려서 그렇게 질질 끄는 건지 좀체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만하면 많이 기다렸다. 이 이상 놔두면 이 녀석은 평생 도망 다닐 것이다.
유중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김독자, 대답해. 나를 사랑하나?”
김독자는 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사랑하지….”
“확실히.”
“…….”
김독자는 유중혁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 그가 아까보다 뚜렷한 어투로 대답했다.
“사랑해.”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
“뭐가 끝나, 이 자식아….”
“넌 뭐가 그렇게 복잡하지?”
“사랑은 원래 복잡한 거야.”
“난 널 원한다.”
돌직구를 던지자 김독자가 뜻밖에 난처한 듯 웃었다.
“음….”
김독자는 잠시 손안에 든 사발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야, 유중혁. 너 나 좋아해?”
“여태까지 뭘 들었지?”
“진지하게.”
“이런 일에 가볍게 굴지 않는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냐?”
예상 외로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유중혁이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자, 김독자가 그의 얼굴을 살피곤 미지근하게 웃었다. 옅은 김이 올라오는 사발을 한쪽으로 밀어놓은 김독자가 유중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달빛이 비스듬하게 떨어지며 김독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하얗고 붕 뜬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마를 가리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어이없게도 김독자가 너무 야해보였다.
김독자는 시선과 시선이 그 어떤 방해 없이 교환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유중혁의 얼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한동안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김독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삼 진짜 잘났다.”
“…….”
“네가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놈을 좋아하냐?”
김독자의 얼굴을 훑느라 유중혁은 그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중혁의 시선이 김독자의 입술로 내리꽂혔다. 다음 순간 김독자가 마치 그의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는 머쓱한 태도를 취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유중혁이 시선을 들어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유중혁이 뒤늦게 물었다.
“…무슨 뜻이지?”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렇잖아. 너도 그렇고 주변도 그렇고 다들 잘났는데 왜 하필 나냐고. 그 왜, 공단에서 만난 ‘징벌자’도 엄청 미인이잖아. 내 생각엔 너랑 ‘징벌자’랑 잘 어울릴 것….”
“그 이야긴 그만해라.”
유중혁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고, 지금 궁금한 건 네 마음이다.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김독자. 참아주는 것도 한계다. 진지한 고백에 말장난하는 게 네놈의 예의인가?”
김독자가 속모를 얼굴로 웃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독자는 짧게 한숨을 쉬곤 잠깐 생각에 잠긴 것처럼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미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보였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행동하는 게 일종의 연출처럼 느껴졌다.
김독자가 대답했다.
“안 될 것 같아.”
“…….”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김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남자라서?”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김독자는 불확실한 투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상관있나? 음, 아니 딱히 여자라고 해도 다를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문제는 아니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듯 김독자가 실실 웃었다. 순간 울화통이 치밀었다. 유중혁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김독자에게 다가갔다. 김독자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김독자는 피하지 않았다. 얼굴이 천천히 떨어지자 김독자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유중혁이 원하는 미소는 아니었다.
유중혁이 얼굴을 찡그렸다.
“널 모르겠다.”
“…싫은 건 아니니까 하고 싶으면 해.”
유중혁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고통과 의아함으로 물들어있었다. 김독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숙맥처럼 굴더니 이제는 여우같다. 어느 쪽이 진짜고 어느 쪽이 진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알고 싶은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술래잡기를 그만두겠다면 이쪽도 더는 추격하지 않을 것이었다.
김독자를 내려다보던 유중혁이 짓씹듯 경멸스럽게 뱉었다.
“…그딴 건 필요 없다.”
그런 후 그는 떠났다. 매끄러운 기와에 가볍게 내려앉는 발걸음이 두어 번 이어지다가 뚝 끊어졌다. 잠시 뒤 유중혁은 장터의 인파 속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는 능숙하게 미끄러지듯 걸어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사라져버렸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사라지는 것을 시선으로 쫓다가 천천히 사발을 집어 들었다. 그릇이 미지근했다. 그는 두 손으로 사발을 받치고 천천히 국물을 마셨다. 뽀얀 국물에 뜬 기름에서 감칠맛이 났다. 짭조름한 국물 맛이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켜주었다. 김독자는 젓가락으로 몇 번 그릇을 뒤적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 불었네….”
꼭대기층에 홀로 앉아 김독자는 천천히 국수를 먹었다. 후루룩 소리가 침묵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드문드문 이어졌다. 혼자 먹을 때는 무엇이든 큰 소리로 들리고, 그는 그것이 아주 익숙했다.
*
다음 날 김독자는 ‘미식협’으로 떠났고, 얼마 뒤에 멸망 시나리오를 불러왔다.
나는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든 감각이 빳빳하게 곤두선 채로 굳어있었다. 시각과 청각, 촉각과 후각이 한계까지 벌어져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 이상의 정보를 받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는데, 문가에 서있는 줄 알았던 유중혁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닿는 순간 온몸의 털이 위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뒤통수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패닉 상태로 유중혁을 밀어내려 애쓰자, 유중혁이 다시 나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유중혁이 내 볼을 감싸 쥐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감각이 불현듯 살아나 얼굴 전체로 뜨끈하게 번져나갔다.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리는데, 그 틈으로 혀가 밀고 들어왔다.
유중혁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이 자식이 나에게 키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온힘을 다해 반항했다. 하지만 ‘그 유중혁’에게 반항이라니, 택도 없었다. 붙잡힌 뺨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몇 번 더 몸부림을 치다가 혀가 들어오는 순간 전의를 상실했다. 정신이 아연해져 실시간으로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는 유중혁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유중혁은 나를 거의 침대 헤드에 처박다시피 했다. 입술을 빨며 연거푸 쪽쪽거리던 유중혁이 혼비백산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주무르면서 입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등허리로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마땅히 반항하지도 못 한 채 눈을 바짝 감았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날아간 것만 기억난다. 입을 벌리고 연거푸 헐떡이며 유중혁의 움직임에 휩쓸렸다. 녀석은 미친 듯이 잘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오래 키스하고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나와 유중혁은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아차렸다. 유중혁은 내가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주는 자비를 보였지만 그딴 자비는 필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유중혁을 보았다. 그 녀석은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고, 심지어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지구로 돌아가자, 김독자.”
“…….”
“너를 원해.”
“…….”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침으로 범벅된 입술을 수습한 뒤, 유중혁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봤자 침대 헤드에 등을 바짝 붙이는 정도였다. 등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자 조금 전의 상황이 떠올라 절로 몸이 뻣뻣해졌다.
유중혁은 내 반응을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내 표정을 가늠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벌어진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유중혁이 나에게, 뭘 했다고? 저 자식이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충격과 공포로 몸이 벌벌 떨리는 가운데 어느 정도 돌아온 정신이 자동적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켰다. 다음 순간, 나는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유중혁의 생각에 아연실색했다.
「왜 저렇게 당황하는 거지?」
「나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나.」
「동정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군.」
「과연… 그렇다면 아까의 반응도 이해가 간다.」
「그나저나….」
「멍청한 얼굴이군.」
아니 중혁아…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떨어져있는 동안 구체적으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좋을지 모를 아주 심각하고 끔찍한 오해가 발생한 것 같았다. 유중혁이 내가 자신을 ‘원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유중혁이 필요했다.
나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 녀석이 죽은 줄로만 알고 괴로움에 잠겨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막막하던 순간을 생각하면 가능한 한 다신 이 녀석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유중혁이 치료실에 들이닥쳤을 때 느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안도감이 떠올랐다. 포괄적으로 전개한다면, 이와 같은 감정들 역시 ‘원한다’는 말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중혁의 ‘원한다’와 나의 ‘원한다’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했다. 우선 이 자식은 나에게 키스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나는 유중혁과 다시는 키스하고 싶지 않았다.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고, 상상해서도 안 될 말이었다. 당연했다! 나는 게이가 아니었으니까.
정말로, 나는 게이가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여자를 좋아했다. 지난 이십팔 년의 세월동안 남자를 보고 설레 본 적은 맹세컨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성적으로 끌려본 적도 전무했다. 사춘기 시절 몰래 야동을 다운받다가 실수로 게이AV를 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도 질겁하며 화면을 꺼버리고 파일을 휴지통에 처박아버렸다. 이것이 내가 동성애와 연관된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나는 제대로 연애해본 적도 없고, 성적인 경험도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모를 만큼 둔한 것도 아니었다. 단언컨대, 나는 게이가 아니었다.
유중혁이 다시 다가오려고 하자,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오, 오지 마!”
“…….”
“아니. 잠시만… 잠시만, 중혁아.”
나는 허둥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팔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댄 채로 다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행여나 유중혁이 나를 붙잡을까봐, 그래서 아까의 일이 반복될까봐 두려워서 유중혁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중혁은 묵묵히 내 시선을 받으며 서있었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생각… 생각 좀 하자.”
“…….”
지난 시나리오를 달성하는 동안 발생한 몇 가지 오해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항간에서 떠도는 소문들에 따르면, 몇몇 사람들은 진지하게 나를 게이로 여기고 있었다. 귀찮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는데, 방금 전 참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진작부터 강경하게 나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우리엘의 입김이 컸을 것이다. 그녀는 종종 전우애를 이상한 방식으로 포장해 코인을 뿌려대거나 성좌들 사이에 소문을 퍼 나르곤 했으니까.
…우리엘?
“…유중혁, 혹시 우리엘 인형 가져왔냐?”
유중혁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품속에서 우리엘의 상징체를 꺼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 무릎에 올려놓았다.
인형은 갈가리 찢겨져 솜이 반쯤 빠져나와있었다. 생각보다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저 정도라면 아무리 상징체인들 본체에도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고고한 대천사가 마계에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나는 복잡한 얼굴로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유중혁이 73번째 마계를 들쑤시고 다니는 동안 우리엘이 어떤 말이든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오해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유중혁이 그 헛소리를 믿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까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놈이라 단 한 번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한 적이 없었는데, 내 판단미스였다. 아무래도 내 소문에 힘을 실어주는 어떤 일이 발생한 것 같기는 한데, 대체 그게 뭐지?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
유중혁의 고백에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유중혁은 가장 필요한 정보가 생략되어 있는 나의 대답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곧이어 유중혁이 납득하는 투로 말했다.
“그렇군. 마왕 선발전에 참가할 생각이겠지?”
“…맞아. 일행들에겐 미안하지만, 여기서 나는 거대 설화를 얻어야만 해.”
유중혁이 무어라 입을 더 열기 전에 내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래야 앞으로 있을 대멸망 시나리오들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
유중혁은 잠시 침묵한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찢어진 우리엘의 팔을 조심스레 붙이고 있자, 머리 위로 목소리가 떨어졌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그런 후 유중혁이 덧붙였다.
“그래서, 대답은?”
나는 또다시 회피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어쩔 거냐?”
이번에 유중혁은 불만스럽게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매서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꿋꿋하게 우리엘의 나머지 팔을 이어 붙이는데 집중했다. 물론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아득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 녀석이 대체 어디까지 진심인 건지도 알아야했다(물론 진중하다고해서 뭔가 해볼 마음 같은 건 죽어도 없었다). 잠시 후, 머릿속으로 유중혁의 진심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피하는군.」
「…혼란스러울 일이었던가.」
「직접 입으로 이야기할 때까지 기다려줬어야 했는지도 모르겠군.」
「여기까지 와서?」
「짜증나게 구는군, 김독자.」
오해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유중혁은 나를 연거푸 충격에 빠뜨릴 생각을 하면서도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도 당분간은 마계에 머무를 거다. 이곳에 개인 시나리오가 있어서 당장은 떠날 수도 없다.”
“그래? 괜찮으면 나 좀 도와주지 그래.”
“돕는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겠지.”
“…설마 너도 ‘마왕 선발전’에 참가할 셈이냐?”
“당연한 얘기를 하는군.”
“설마 너 아까 지구로 돌아가자고 한 게 고백 때문이 아니라….”
말실수였다. 고백이라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유중혁이 미간을 좁혔다. 재빠르게 입을 다물기도 전에 유중혁이 다가왔다. 망했다. 끝까지 모르는 척 했어야 했는데. 지구로 돌아가자는 말에 받은 감동이 달아나는 것이 서러워 내뱉은 게 그만….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입을 벌리는데, 갑자기 유중혁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 너머에서부터 스산한 기운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유중혁이 창가로 다가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석양이 드리운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순간적으로 멍을 때리고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치료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마르크와 아일렌이 사색이 되어 들어왔다. 품속의 비유가 부르르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나는 게 느껴졌다. 유중혁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묵묵히 말했다.
“왔군.”
[성좌, ‘인류의 시조’가 ‘유중혁 공단’을 노려봅니다.]
[성좌, ‘최후의 파라오’가 ‘유중혁 공단’을 노려봅니다.]
[특정 성운의 성좌들이 ‘유중혁 공단’을 노려봅니다.]
순식간에 나타난 수십 개의 별이 하늘을 덮었다. 스파크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꽂혔다. 공단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벼락이 떨어진 장소에서 몇 번 더 스파크가 일더니, 곧 육중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모래먼지와 함께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미라의 형상이 성벽을 붙잡은 채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파피루스>에 소속된 성좌였다. 나는 그들이 공단 [베르칸]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짓씹듯 내뱉었다.
“…시위라도 하러 온 모양이군.”
[이 공단의… 새로운 지배자는… 누구냐.]
우리는 미라의 입술 근처에서 튀는 무수한 스파크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유중혁이… 누구지?]
“유중혁, 이길 수 있겠냐?”
“지금은 무리다. 곧 그 시간이라서.”
“아까 그 패널티 말하는 거냐? 하루에 10분씩 사라진다는?”
“…….”
“그럼 저 녀석을 어쩐다….”
“놈은 아무것도 못 할 거다.”
“왜?”
“아직 ‘마왕 선발전’은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야, 아스모데우스한테 당한 거 벌써 잊었어?”
“누구나 아스모데우스처럼 굴 수 있는 건 아니야.”
“클레오파트라는 <파피루스>소속이잖아? 성운의 개연성을 빌려와서 난장을 놓으면….”
그 순간, 유중혁의 시선이 나를 향해 내리꽂혔다.
“김독자, 벌써 네놈이 한 짓을 잊은 모양이군.”
“뭐?”
나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유중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으로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바깥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무어라 진언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제 나의 신경은 온통 유중혁에게 쏠려있었다. 유중혁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마르크와 아일렌이 그제야 우리 쪽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언을 터뜨리다 말고 붕괴하는 클레오파트라의 화신체와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말고 머쓱하게 방을 나가버렸다. 아일렌은 나가기 전에 탁자에 놓인 빈 찻잔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치료실은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유중혁의 눈에 노기가 돈 것은 그 때였다. 그 눈이 어찌나 원망으로 가득 차있던지, 아무 잘못도 없는 내가 사과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유중혁은 복잡한 감정을 한 번에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내뱉었다.
“잊었나? 놈들은 너에게 [운명]을 강제했었다.”
“…….”
나는 그 말을 두 박자 후에나 이해했다.
“…아.”
잠시 후 내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야 임마, 그런 거 아니야!”
비로소 사건의 전말이 낱낱이 이해되었다. 그러니까 유중혁은 예언의 내용을 토대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본인이라고 판단하고는 이 마계까지 찾아와서 내 낯짝을 보려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렇지만 뭔가 이상하지 않나? 내가 유중혁을 사랑하는 거지, 유중혁이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잖아? 내가 좋다니까 갑자기 덩달아 좋아진 건가? 하지만 그건 캐붕이다. 우리 중혁이는 그런 개방적인 쉬운 놈이 아니다.
유중혁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우선 모든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미치겠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켜볼까 궁리했지만 이 타이밍에 녀석의 속마음을 더 듣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유중혁이 혀를 찼다.
“[예언]은 정확하다.”
“…….”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김독자.”
“…….”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 제발 중혁아!”
벌떡 일어났다가 몸 상태 때문에 다시 주르륵 미끄러졌다. 나는 끙끙거리며 한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네 말이 맞아. 다 맞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 정말로.”
“내가 너를 사…랑 하긴 하는데.”
“너랑 막 키스하고, 그러고 싶은 게 절대로 아니거든.”
“아, 미치겠네. 그러니까… 전우애 같은 거지.”
“야, 너는 동료끼리 키스하는 거 봤냐?”
당황한 나머지 말이 횡설수설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왜 이렇게까지 당황한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키스 이야기를 할 때에는 기분 탓인가 얼굴이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유중혁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런 의미의 사랑이 아니란 것쯤은 안다.”
나는 절망적으로 두 손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렇지… 알지, 나도 알지….”
“…….”
갑자기 유중혁 쪽에서 말이 없어졌다. 불안해져서 고개를 드니, 녀석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초조해진 나는 결국 다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켰다. 머릿속으로 유중혁의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나쳤나?」
「하긴. 환자니.」
「이번엔 내 쪽이 배려가 없었다.」
「횡설수설하는군.」
「앞뒤가 맞지 않는데다가 짜증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줘야 하지?」
「여기까지 와서 또 사기를 칠 셈인가.」
「키스가 어땠다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는데.」
「어디까지를 원하고 있는 거지?」
「확인해보면 되겠군.」
「저놈의 주둥이를 닥치게 하려면 더더욱.」
“김독자, 고개 들어라.”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유중혁이 다가왔다.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침대 헤드 쪽으로 바짝 붙었다. 그 이상으로 도망갈 곳이 없었기에 나는 거의 껌딱지처럼 그곳에 붙어있었다. 유중혁이 침대 봉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진중했고 시선으로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비상벨을 울렸다. 또? 또야?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내가 너한테 뭘 했는데 갑자기 이러는 건데?!
유중혁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나는 애원했다.
“아 중혁아… 자비 좀!”
“네놈의 헛소리를 닥치게 하려면 이보다 더 좋은 수가 없지.”
“악!”
인중에 닿는 유중혁의 숨이 느껴졌다. 일순 들이닥치는 녀석의 체취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제 아무리 게이가 아니라고 해도 저런 잘생긴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건 부담스럽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내가 허둥지둥 외쳤다.
“알겠어!”
“…….”
“알겠어! 내가 졌다니까!”
유중혁이 멈췄다. 나는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 눈치를 보다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꾸했다.
“…근데 지금 당장은, 내가 복잡해서, 힘들거든?”
“…….”
“…시간을 좀 줘.”
“…….”
“생각 좀 정리하고 말해줄게.”
유중혁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기다려달라는 뜻인가?”
‘멸살법’의 현실화 이후 내 자신에 대해 새롭게 깨달은 점이 있다면 내가 곤란한 일을 미루는 데에는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는 어색한 얼굴로 냉큼 대답했다.
“응.”
*
한동안 나는 유중혁을 피해 다녔다. 유중혁도 특별히 나를 붙잡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10분간 사라진다는 그 패널티 때문인지 녀석은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유중혁이 없는 틈을 타 공단거리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기분을 풀기 위해 애를 썼다. 장하영이 이따금 공단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일렌은 내가 공단을 돌아다니는 걸 못마땅해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적어도 2주간은 침대 신세를 져야하는 몸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나는 여전히 비틀거릴 때가 있었다. 몸을 구성하는 설화들이 헐겁게 붙어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치료실로 돌아갔다간 유중혁과 단둘이 있게 될 가능성이 컸으므로 나는 가능한 한 외출을 하려고 했고, 어쩌다 소란이 벌어지면 골목으로 뛰어 들어가 치안유지에 힘썼다. 운이 좋으면 ‘징벌자’와 마주칠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극적인 첫 만남 이후로는 그녀와 마주칠 수 없었다. 나를 그렇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려보고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유중혁은 뭐가 그렇게 불만스러운지 창밖을 쏘아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는 몇 번 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캐묻다가 그만두었다. 유중혁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가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유중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고, 유중혁도 내 뜻을 눈치 챈 것인지 별다른 말없이 그 거리를 유지해주고 있었다. 유중혁은 기다려달라는 내 말에 응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사실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정말로 기다려줄 줄은 몰랐다. 언젠가는 이 일을 수습해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생각이 없는 쪽에 가까웠다. 그냥 기다리다보면, 저절로 묻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유중혁 주변에는 미인들이 넘쳐나니까. 게다가 녀석은 ‘징벌자’와도 아는 사이니, 어쩌면 차후 시나리오에서 ‘징벌자’와 러브라인이 생길 지도 모르잖아? 말하지만 치사하게 구는 게 절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유중혁을 위한 것이니까. 나 같은 놈하고 대체 뭘 하겠다는 말인가. 애초에 난 유중혁이랑 뭔가 하고 싶지 않다고! 게다가 ‘마왕 선발전’을 앞두고 더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어영부영 고백 건을 미뤄둔 것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유중혁과 나는 금세 원래 그랬던 사이로 되돌아왔다. 바라던 바였다. 무척 긍정적인 전개였다. 나는 이따금 유중혁의 눈치를 보며 앞으로의 일을 도모했다. <제1 무림>에 가겠다는 말을 꺼내자 어느 정도 반발하기는 했지만, 녀석도 결국 내 의견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일행은 금방 꾸려졌다. 나는 아일렌과 마르크에게 각각 [유중혁 공단]과 [김독자 공단]을 맡겼다. 배웅을 하러 나온 아일렌은 잠시 고개를 숙여보라는 듯 손짓하더니, 내가 고개를 숙여주자 주의 깊게 이마를 살폈다. 그녀의 손가락이 이마 언저리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아직 덜 붙었어요. 조심해요.”
“괜찮아질 거야.”
실제로 [스킬 ‘라마르크의 기린’의 효과] 때문에 내 몸의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보다 활발히 작동되는 중이었다. 이이상 무리하지 않는다면 일주일 만에 회복기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무리를 할 예정이었다.
고개를 들다가 유중혁과 눈이 마주쳤다. 유중혁은 내 이마를 만지는 아일렌의 손을 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유도 없이 당황했다. 급하게 아일렌으로부터 떨어지자, 그녀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공단을 잘 부탁해.”
“너무 오래 비워 두진 말아요.”
“노력할게.”
비유가 포탈을 열자 일행들이 차례로 그 앞에 섰다. 네 사람이 건너가기에 무리가 없는 크기였는데도 다들 한 사람씩 건너갈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한 발짝 물러나 팔짱을 낀 채 한명오와 장하영을 불만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한명오가 앞서가며 뭐라고 떠들어대자, 장하영이 불안한 목소리로 조용히 좀 하라고 대꾸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포탈로 들어갔다. 입자 단위로 부서지던 두 사람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소용돌이치며 포탈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포탈 앞으로 다가섰다. 유중혁이 내 손을 잡은 건 그때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눈을 의심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흥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5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500코인을 후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500코인을 후원합니다.]
…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왜?”
“…….”
“문제 있어?”
“같이 가자.”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려고 애썼다.
“임마, 갑자기 왜 그래….”
유중혁은 대답 대신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시선이 내 어깨 너머를 향해있었다. 녀석의 시선대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포탈밖에 없었다. 아득한 구멍 너머로 <스타 스트림>의 별빛들이 희미하게 흘러가는 게 보였다.
“야, 이럴 때가 아니거든? 너무 늦으면 쟤네랑 갈려서….”
“김독자.”
유중혁의 얼굴이 일순 괴로움으로 물들었다. 말문이 막혔다. 잡은 손에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팔이 저릴 지경이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유중혁은 시선을 내리깐 채 생각을 정리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두 번은 싫다.”
“…….”
그제야 나는 녀석의 말뜻을 이해했다. 포탈이 무엇을 연상시키는지 뒤늦게 떠올랐다. 이동방식부터 생김새까지 그건 블랙홀을 닮아있었다.
…짜식,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힘들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니까, 유중혁이라면 금방 털어낼 줄 알았다. 마지막 순간에 내 이름을 제법 애절하게 불렀었는데, 누가 개복치 아니랄까봐 그 상황을 완전히 털어내지는 못한 듯싶었다. 갑자기 조금 미안해졌다.
“…….”
나는 머쓱한 얼굴로 유중혁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어색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녀석의 손을 마주잡았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머릿속으로 우리엘의 간접메시지가 폭발적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간접메시지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유중혁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포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됐지? 가자.”
유중혁의 손을 잡아끌자 그가 순순히 딸려왔다.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중혁이 내 손에 깍지를 끼는 순간, 나는 다시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맞물린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귀엽다는 말은 취소다.
한없는 어색함을 느끼며, 나는 유중혁과 함께 포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4.
<제1 무림>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유중혁은 무심히 장내를 훑으며 지붕 위에 앉아있었다. 손에는 뜨뜻미지근한 무림만두가 들려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만두를 베어 물었다.
달빛이 어스름하게 깔린 풍경은 고요함에 싸여있었다. 푸른 기와집들 사이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골목이 드문드문 보였다. 불을 밝힌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을 꺼놓고 잠이 든 상태였다. 반면 서쪽 구역에는 야간장터가 열려 인근이 온통 환했다. 형형색색의 호롱이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유중혁은 큰길로 이어지는 골목에서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하곤 얼굴을 찌푸렸다.
환자 주제에 대체 뭘 저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유중혁은 골목을 돌며 기와집 사이로 사라지는 김독자를 내려다보다가 남은 무림만두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시야가 높아진 탓에 사라졌던 김독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김독자는 야간장터로 향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지붕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공중에서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자 일순 바람이 멈추었다. 그는 먼지 한 점 없이 착지했다. 유중혁은 자신이 뛰어내린 4층 높이의 기와집을 한 번 흘끔거리다 뒤돌았다. 다리를 움직이자 발아래 풍경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그는 넓은 지붕과 지붕 사이를 한 걸음으로 뛰어넘었다.
골목으로 뛰어내렸을 때 김독자는 코너를 돌던 참이었다. 유중혁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그의 뒤를 밟았다. 어스름한 달빛이 서늘하게 골목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구름이 흘러갈 때마다 거리 전체가 어두컴컴해졌다가 밝아졌다. 김독자는 코트 때문인지 무척 환해보였다. 푸른 기와, 흙벽과 돌로 쌓은 담벼락은 주변의 어둠에 반응해 그림자가 져있었지만 김독자는 외떨어진 존재처럼 희부옇게 떠있었다.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뒷덜미였다. 걷는 동안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김독자의 목을 응시했다. 가느다랗고 허여멀건해서 맥없어 보이는 게 딱 김독자였다. 점 한 개 없는 뽀얀 피부가 눈에 그린 듯 선명했다. 당장 한 손에 쥐면 누구라도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독자는 바로 뒤까지 따라붙은 유중혁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저렇게 부주의할 줄이야. 유중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경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건가? 죽은 게 몇 번인데 저토록 안일하게 구는 건지. 몸이 성해도 성치 않은 것과 별반 차이도 없는 주제에 정말이지 저 무신경함에는 짜증이 난다.
골목을 한 번 더 꺾기 직전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김독자.”
김독자는 거의 튀어 올랐다. 화들짝 놀라 돌아본 얼굴에 미처 지우지 못한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유중혁을 보며 애써 태연한 투로 대꾸했다.
“깜… 짝이야. 인기척 좀 내, 짜샤.”
“…….”
유중혁은 아까부터 줄곧 인기척을 내고 있었다.
잠시 후, 김독자의 표정이 평소의 태연자약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짐짓 밝게 말했다.
“웬일이냐. 밤 산책이라도 나온 거야?”
“널 쫓아왔다.”
“아 그래….”
김독자는 잠깐 먼 곳을 보더니 말을 돌렸다.
“난 지금 야간장터로 가는데.”
“알고 있다.”
“닭 국물에 말아주는 국수가 그렇게 먹고 싶더라고.”
“히든 피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러 가는 거 아니었나?”
“…아니거든? 들어가서 쉬기나 해.”
“그거라면 이미 구했다.”
“뭐?”
김독자가 멈추어 섰다.
“언제?”
“지난밤에.”
“야,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그것 때문에 가는 게 아니라면서?”
“…….”
김독자는 몇 번 입을 뻐끔거리다 다물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설렁설렁 발걸음을 옮겼다. 알만 했다. 비록 허우대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구석이 많았지만, 김독자는 기본적으로 시나리오를 위한 일이 아니면 쓸모없이 움직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는 일도 적었고, 다른 동료들이 쉬고 있을 때에도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나타나고는 했다. 나중에 알고 보면 혼자서 히든피스나 서브 시나리오를 해치우러 다녀온 것이었다. 정말 최악일 때에는, 그렇게 사라진 후에 혼자 죽어버렸다. 몇 번이고 그렇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김독자의 특기였다.
물론 김독자가 죽을 수 있는 건 다시 되살아난다는 강력한 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여러 스킬이 대비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시나리오 바깥으로 추방된 후에도 제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기까지 하는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죽음은 김독자에게 있어 무척이나 흔한 것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건 이제 하나의 선택지였다. 김독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부분이 가장 겸연쩍었다. 유중혁은 ‘선택지’에 함의된 의미를 지나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죽음을 선택지로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선택되는 것은 언제나 수동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목숨이 수단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김독자는 스스로의 존재를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하지만.
하지만, 뭔가가 더 있었다.
유중혁은 회귀자였고 죽음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담보했다. 죽음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생겨난 선택지였다. 하지만 김독자는? 김독자 역시 그와 동일한가? 김독자의 ‘선택지’와 유중혁의 ‘선택지’는 동일한 사고에서 발생한 것이 맞는가? 유중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불확실함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이 겸연쩍음을 뭐라고 부를 것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면 김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었다.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회피하고, 도망치는 존재. 그리고 지금도 도망치고 있었다.
코너를 한 번 더 돌자 골목이 끝나고 장이 나타났다. 허공에 매달린 호롱이 색색들이 거리를 밝히며 밤을 화려하게 물들였다. 두 사람은 어두운 골목의 출구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빛과 어둠의 대비로 인해 골목과 대로변은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김독자가 머뭇거리다 그대로 돌아섰다. 유중혁이 그를 붙잡았다. 이번에 김독자는 놀라긴 했어도 펄쩍 뛰지는 않았다.
“…왜 또?”
“볼일이 있는 거 아니었나.”
“무슨 볼일?”
“먹고 싶은 게 있다며?”
유중혁이 김독자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종잇장처럼 그대로 딸려왔다. 뜨악한 표정이 볼만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팔을 놓아주고는 눈짓으로 대로변을 가리켰다. 김독자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야간장터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호롱불 아래에 상점들이 쭉 늘어져있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음식점도 몇 군데 보였다.
“잘하는 곳을 안다.”
“…….”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김독자는 제법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떼어놓으려고 아무렇게나 만든 변명거리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장터음식이 먹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김독자가 결단을 내린 듯 짐짓 비장하게 말했다.
“좋아. 먹자.”
유중혁이 조건을 걸었다.
“같이.”
“…알겠어.”
거리로 나온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의식적으로 유중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종종 앞서갔지만, 그럴 때마다 유중혁이 따라붙었다. 얼마 뒤 김독자는 거리 벌리는 것을 포기했다. 두 사람 옆으로 사탕을 든 아이 넷이 깔깔거리며 지나쳤다. 나란히 걷던 유중혁이 김독자를 불렀다.
“김독자.”
“응?”
“이쪽이다.”
김독자는 이상하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는 앞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한 번 바라보더니 유중혁을 쫓아왔다.
“두 블록 뒤에 있는 곳으로 가려는 거 아니었어?”
“아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그야… 네 단골집 같아서…?”
유중혁이 멈추어 섰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캐묻기도 전에 김독자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달고 황급히 수습했다.
“아니, 너 무림만두 좋아하는 것 같길래. 그 가게 무림만두 잘하잖아. 나도 낮에 근처 지나가다가 봤거든.”
“…….”
또 이런 순간이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이따금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물론 이전 회차에서 자신이 겪어야했던 큼지막한 사건들을 알고 있는 건 다소 수상쩍기는 해도 납득할 수 있었다. 김독자는 예언자였고, 그렇다면 미래시와 동시에 과거시 역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제아무리 과거시라고 해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마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때때로 무서울 만큼 정확했다. 그는 유중혁의 버릇, 사소한 습관과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모조리 캐치해냈다. 처음에는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지극히 사소하고 온건한 기억들, <제1 무림>에는 유독 그런 기억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지난 회차에서 겪었던 부드럽고 따뜻한 경험들, 그래서 버리기로 결심한 과거. 김독자는 그런 것들까지도 전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건 유중혁으로부터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슨 짓을 저질러도 김독자는 예상했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유중혁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는 김독자. 그래서 그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해하는 김독자. 언제든 이해받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김독자.
그래도 김독자가 모르는 유중혁도 있었다.
좁다란 골목길을 앞서나가던 유중혁이 마침내 멈추어 섰다. 뒤따라오던 김독자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유중혁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며 머쓱하게 뒤로 물러났다. 유중혁은 일순 등 뒤로 닥쳤던 김독자의 냄새를 감지하곤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햇빛에 잘 말린 종이냄새 사이로 미묘한 잉크냄새가 났다. …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중혁아… 도착한 거야?”
유중혁은 고개를 들고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무려 7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층마다 겹겹이 기와가 올려져있었다. 3층과 5층을 제외한 모든 층의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안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유중혁은 꼭대기층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 네놈은 모르는 곳이지.”
*
그 가게는 <제1 무림>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상가건물 꼭대기층에 위치한 국수집이었다. 상가건물인 만큼 한 가게가 한 층을 전부 쓰는 경우는 드물었다. 꼭대기층만 해도 일곱 점포가 입점해있었다. 내부가 좁은 탓에 국수집은 주방을 제외하면 서너 명 남짓이 앉을 만한 공간이 남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홀을 따로 두는 대신 지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상가 층층이 쌓인 지붕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서빙을 담당하는 직원이 주방에서 주문받은 국수를 들고 태연하게 미끄러운 기와를 밟고 뛰어다녔다. 높은 곳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 국수집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국수집은 무림인들, 그 중에서도 어느 정도 내공이 쌓인 고수들을 위한 단골 음식점이었다.
김독자는 꼭대기층에 앉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흐트러뜨렸다. 유중혁이 그에게 김이 피어오르는 육수가 담긴 사발을 내밀었다. 김독자가 고맙다고 대답하면서 그릇을 받았다. 김독자는 젓가락을 면 사이에 걸쳐놓으며 중얼거렸다.
“여기 운치 있네.”
“식기 전에 먹어라.”
김독자는 잠깐 그릇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식혀서 먹을게. 나 뜨거운 거 잘 못 먹어서.”
두 사람은 말없이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지붕 아래 주방에서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육수를 끓이고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는 소리, 주문을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이면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의 희미한 호객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아래층 곳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면을 흡입 중인 고수들이 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가장 높은 지붕에 단둘이 앉아있었고, 모든 소음은 일정 이상 커지지 않고 아래 세계에 머물렀다. 그래서 결국 주변은 조용했다. 달빛이 떨어지는 <제1 무림>의 풍경은 평온하고 안온했다.
침묵을 지키던 김독자가 입을 연 것도 그 때였다.
“진짜 좋다.”
“…….”
“네가 왜 여길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유중혁이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김독자가 씨익 웃었다.
“고맙다, 이런 곳 데려와줘서. 난 이런 곳 있는 줄도 몰랐는데.”
김독자가 허공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 아니다… 묘사에 있었던 것 같기도….”
“너도 <제1 무림계>에 와본 적 있는 모양이지?”
“아니, 뭐어. 그건 아니고.”
김독자는 말을 흐렸다.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무림계 소설 보면 비슷한 풍경묘사 많잖아. 그런 거 읽을 때마다 종종 상상했거든. 이런 데도 있겠지, 하면서.”
“책을 자주 읽나?”
유중혁은 일전에 맡았던 김독자의 체향을 떠올랐다. 그건 기묘할 정도로… 정말이지 기묘할 정도로….
김독자가 민망한 듯 웃었다.
“책… 인가? 아니다, 책을 자주 읽지는 않았지. 내가 읽은 건 책이라기보다… 아무튼.”
“소설을 읽는 것 외에는 뭘 좋아하지?”
그러고 보면 유중혁은 세계의 멸망이 시작되기 이전의 김독자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인지. 유중혁은 프로게이머였고 인지도가 높았으며 종종 리그에 나갔다. 전광판에 얼굴이 걸린 적도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의 팬을 자처했으니 그런 것들을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군, 이 부분에서조차 김독자는 알고 유중혁은 몰랐다.
김독자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가 불확실한 톤으로 말했다.
“그냥 소설 읽는 거 말곤 딱히 좋아하는 건 없는데….”
“무림 소설을 좋아했나?”
“아니, 나는 판타지 좋아했어. 그, 왜 있잖냐. 갑자기 지구멸망하고 괴수 나오고 그런 거…. 갑자기 다 죽어버리고 다 무너지는 거. 뭐라고 하더라, 그런 걸? 아, 아포칼립스.”
“팔자 좋은 말이군.”
“하하, 그러게.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그렇게 말하는 김독자는 별로 슬퍼보이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런 장르물 중에서도 꾸준히 챙겨보는 게 있었거든…. 거기 나오는 주인공이 미친놈인데 또 미워하긴 좀 그래서,”
거기까지 말하던 김독자가 문득 말을 멈췄다. 그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김독자는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유중혁을 훑어보다가 피식 웃었다. 유중혁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얼굴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독자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자꾸만 웃음을 흘렸다.
“아이고, 우리 중혁이.”
“그렇게 부르지 마라.”
“우리 중혁이 세상에서 제일 잘났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우리 중혁이 무지막지하게 세고.”
“김독자.”
“우리 중혁이 인기도 많고….”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다.”
유중혁이 진지하게 김독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 실실거리던 김독자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걷히더니 침묵이 찾아왔다. 유중혁은 슬슬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답은 생각해봤나?”
물론 차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김독자가 허둥거리는 면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든 게 뚜렷해진 지금 바보가 아닌 이상 김독자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는 건 불가능했다. 가까운 스킨십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건 경험이 없기 때문이겠지. 뭐가 마음에 걸려서 그렇게 질질 끄는 건지 좀체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만하면 많이 기다렸다. 이 이상 놔두면 이 녀석은 평생 도망 다닐 것이다.
유중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김독자, 대답해. 나를 사랑하나?”
김독자는 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사랑하지….”
“확실히.”
“…….”
김독자는 유중혁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 그가 아까보다 뚜렷한 어투로 대답했다.
“사랑해.”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
“뭐가 끝나, 이 자식아….”
“넌 뭐가 그렇게 복잡하지?”
“사랑은 원래 복잡한 거야.”
“난 널 원한다.”
돌직구를 던지자 김독자가 뜻밖에 난처한 듯 웃었다.
“음….”
김독자는 잠시 손안에 든 사발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야, 유중혁. 너 나 좋아해?”
“여태까지 뭘 들었지?”
“진지하게.”
“이런 일에 가볍게 굴지 않는다.”
“내 어디가 그렇게 좋냐?”
예상 외로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유중혁이 눈을 크게 뜬 채로 굳자, 김독자가 그의 얼굴을 살피곤 미지근하게 웃었다. 옅은 김이 올라오는 사발을 한쪽으로 밀어놓은 김독자가 유중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달빛이 비스듬하게 떨어지며 김독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하얗고 붕 뜬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마를 가리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어이없게도 김독자가 너무 야해보였다.
김독자는 시선과 시선이 그 어떤 방해 없이 교환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유중혁의 얼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한동안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김독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삼 진짜 잘났다.”
“…….”
“네가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놈을 좋아하냐?”
김독자의 얼굴을 훑느라 유중혁은 그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중혁의 시선이 김독자의 입술로 내리꽂혔다. 다음 순간 김독자가 마치 그의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뒤로 물러났다. 그는 머쓱한 태도를 취했다가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유중혁이 시선을 들어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유중혁이 뒤늦게 물었다.
“…무슨 뜻이지?”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렇잖아. 너도 그렇고 주변도 그렇고 다들 잘났는데 왜 하필 나냐고. 그 왜, 공단에서 만난 ‘징벌자’도 엄청 미인이잖아. 내 생각엔 너랑 ‘징벌자’랑 잘 어울릴 것….”
“그 이야긴 그만해라.”
유중혁이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고, 지금 궁금한 건 네 마음이다.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대답해, 김독자. 참아주는 것도 한계다. 진지한 고백에 말장난하는 게 네놈의 예의인가?”
김독자가 속모를 얼굴로 웃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독자는 짧게 한숨을 쉬곤 잠깐 생각에 잠긴 것처럼 허공을 응시했다. 그러나 이미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보였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행동하는 게 일종의 연출처럼 느껴졌다.
김독자가 대답했다.
“안 될 것 같아.”
“…….”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김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남자라서?”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김독자는 불확실한 투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상관있나? 음, 아니 딱히 여자라고 해도 다를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문제는 아니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듯 김독자가 실실 웃었다. 순간 울화통이 치밀었다. 유중혁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김독자에게 다가갔다. 김독자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가 떨어졌다. 김독자는 피하지 않았다. 얼굴이 천천히 떨어지자 김독자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유중혁이 원하는 미소는 아니었다.
유중혁이 얼굴을 찡그렸다.
“널 모르겠다.”
“…싫은 건 아니니까 하고 싶으면 해.”
유중혁이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고통과 의아함으로 물들어있었다. 김독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숙맥처럼 굴더니 이제는 여우같다. 어느 쪽이 진짜고 어느 쪽이 진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알고 싶은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술래잡기를 그만두겠다면 이쪽도 더는 추격하지 않을 것이었다.
김독자를 내려다보던 유중혁이 짓씹듯 경멸스럽게 뱉었다.
“…그딴 건 필요 없다.”
그런 후 그는 떠났다. 매끄러운 기와에 가볍게 내려앉는 발걸음이 두어 번 이어지다가 뚝 끊어졌다. 잠시 뒤 유중혁은 장터의 인파 속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는 능숙하게 미끄러지듯 걸어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사라져버렸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사라지는 것을 시선으로 쫓다가 천천히 사발을 집어 들었다. 그릇이 미지근했다. 그는 두 손으로 사발을 받치고 천천히 국물을 마셨다. 뽀얀 국물에 뜬 기름에서 감칠맛이 났다. 짭조름한 국물 맛이 몸을 부드럽게 이완시켜주었다. 김독자는 젓가락으로 몇 번 그릇을 뒤적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다 불었네….”
꼭대기층에 홀로 앉아 김독자는 천천히 국수를 먹었다. 후루룩 소리가 침묵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드문드문 이어졌다. 혼자 먹을 때는 무엇이든 큰 소리로 들리고, 그는 그것이 아주 익숙했다.
*
다음 날 김독자는 ‘미식협’으로 떠났고, 얼마 뒤에 멸망 시나리오를 불러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