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혁독자 «제목 미정 1»
※ “유중혁이 김독자의 예언을 실현시킨 장본인이 자신임을 알았다면? (잊지 않았다면?)”의 가정에서 시작된 글입니다. 73번째 마계에서 재회한 후의 이야기(226화)를 모조리 날조하며 진행됩니다.

1.
김독자는 못생겼다.
이제 유중혁은 어느 정도 김독자에 대해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서울 돔 시나리오를 헤쳐 온 이들 중에서 자신만큼 김독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논리적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자신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김독자에 대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몇 가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명제였다. 김독자는 못생겼다.
우선 김독자는 키가 작았다. 아주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평균보다 간신히 큰 정도였다. 아마 170대 중반 언저리쯤 될 것이다. 체격도 나쁜 편이었다. 어깨는 적당히 벌어져있었지만 살도 근육도 제대로 붙어있지 않아 허약했다. 코인을 투자해 몸을 단단하게 만들고, 화신체를 버리고 성좌로 승격한 이후에는 제법 나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를 기본적으로 구성하던 선천적인 체형은 남아있었다. 그래서 김독자의 손목은 단단하고 튼튼한 동시에 유려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중혁은 종종 그의 손목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게다가 김독자는 안색도 나빴다. 좀처럼 건강한 혈색이 돌 기미가 없는 허여멀건한 얼굴로 맥없이 웃는 걸 보고 있자면 짜증이 절로 치솟았다. 시나리오 초반에 곧잘 헐떡거리던 걸 고려해보았을 때, 김독자는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시체만도 못 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유중혁은 평범한 일상을 살던 김독자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어쨌든 안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여기까지가 김독자의 외관에 대한 유중혁의 짧은 평가였다.
물론 못생겼다는 말에는 기본적으로 얼굴에 대한 평가가 함축되어 있어야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유중혁은 김독자의 얼굴에 대해서만큼은 별로 말하고 싶은 게 없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례로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김독자의 외모를 비하하는데 앞 다투어 열을 올렸지만, 막상 이들 개개인에게 김독자의 어디가 그렇게 못생겼냐고 질문해보면 한결같이 말을 더듬거리곤 했던 것이다. 하다못해 눈이 쳐졌다던가, 코가 내려앉았다던가 하는 식의 막무가내로 트집을 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단 한 사람도 구체적으로 김독자의 얼굴의 어떤 점이 추한지, 어느 부분이 미적 기준에 미흡한지 대답하지 못 했다. 그건 모든 사람들이 김독자의 외모를 정확하게 머릿속에 상기시켜 자신의 기준으로 특정 짓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김독자의 얼굴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심지어는 다소 이상할 정도로 인상이 흐릿하다는 소리였다. 결국 김독자가 못생겼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외모를 성급하게 판단한 뒤, 더 이상 사고하지 않고 무의식 한 구석으로 치워버리는데 쓰이고 있었다. 유중혁 역시 그 말을 바로 그 이유로 사용했다. 그는 김독자의 얼굴에 대해 깊게 생각하길 원하지 않았다. 어쨌든 모든 이들은 김독자가 못생겼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그걸 부정하거나 긍정한다고 해서 당장의 중요한 사실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김독자는 흐릿한 인상 외에도 비실비실한 허우대며, 맥없는 웃음소리며, 하나하나 따져보면 잘난 구석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유중혁은 김독자가 못생겼다고 단언할 수 있던 것이다.
유중혁이 김독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두 번째 사실은, 김독자가 빌어먹을 정도로 제멋대로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김독자는 지난 시나리오 내내 서울시의 사방팔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래시를 가졌다는 자신감 때문인진 몰라도 김독자의 행보에는 지나치게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회귀자인 유중혁 역시 알고 있는 미래를 담보로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의 무분별한 단독행동은 어디까지나 히든 피스를 얻어 전 회차보다 빠르게 성장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김독자는 뻔히 알고 있는 결말을 바꾸기 위해 불필요하게 움직였다.
처음에 유중혁은 김독자가 대체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걸쳐 생사를 따로 한 이후에는 어느 정도 그의 행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김독자는 주로 큰 흐름에 개입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존재를 살리거나 구원했으며, 한 세계를 구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그 결과 과거의 신유승은 살아남았고, 41회차 신유승은 다시 태어났으며, 피스랜드는 이제 김독자의 이름을 끊임없이 회자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김독자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큰 흐름에 개입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죽었는지는 굳이 세어보고 싶지 않다. 그것을 ‘몇 번’이라고 축약할 수는 없었다. 희생의 순간이 너무 많았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죽음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했다.
유중혁이 김독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세 번째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반드시 살아남을 거란 것이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김독자는 기지를 발휘해 생존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았다. 유중혁이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방식을 이용해서라도 돌아왔다. 그 증거로 유중혁은 지금 73번째 마계의 세이스비츠 공단 치료실에 누워있는 김독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김독자가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것인지, 왜 73번째 마계에 있는 것인지, 어째서 아스모데우스와 거래한 것인지 많은 것들이 의문이었지만 당장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길로바트 공단에서 세이스비츠 공단으로 넘어오는 동안 유중혁은 김독자가 그의 자아를 누르고 몸의 통제권을 가져가던 순간을 곱씹었다. 머릿속으로 울려 퍼지던 김독자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뻔뻔스럽고 자신감에 차있었다. 김독자는 바로 그런 말투로 아스모데우스에게 그를 자신의 화신이라고 소개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유중혁이 반발하자마자 김독자는 마치 팔꿈치로 어떤 것을 찍어 누르듯 그의 자아를 잠재웠다. 기억은 거기서 드문드문 뭉개져있었다. 김독자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우리엘의 상징체가 망가진 이후, 그러니까 다시 말해 김독자가 늘 그렇듯 상황을 개판으로 만든 후에야 유중혁은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붕괴해가는 화신체를 수습하자마자 세이스비츠 공단까지 거의 날아가다시피 달려왔다.
세이스비츠 공단은 한 차례의 혁명과 (아마도 김독자로 인한)깽판으로 엉망이었다. 병원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시설이 급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마르크는 유중혁을 치료실까지 안내하는 동안 김독자가 73번째 마계에서 이룬 업적(깽판)에 대해 떠들어댔다. 물론 김독자의 사칭으로 인해 그 모든 업적은 다름 아닌 ‘유중혁’의 것이 되어있었다.
치료실에는 아일렌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중혁을 맞았다. 김독자는 좁다란 침대에 눕혀져 있었고, 손목에 카테터를 꼽고 있었다. 설화 팩에서 흘러나온 설화들이 천천히 김독자를 향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유중혁이 아일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일렌은 기다렸다는 듯 김독자의 진단결과를 통보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김독자의 현재 상태는 꽤 위중했다. 그는 벌써 닷새째 기절한 상태였다. 그 말은 유중혁과의 연결이 끊어진 직후부터 김독자가 쭉 이 상태였다는 뜻이었다. 아마 빙의와 관련된 그 스킬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유중혁은 몇 번인가 해당 스킬을 사용했을 거라고 짐작되는 김독자가 가사상태에 빠지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일렌은 김독자가 의식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녀의 눈에는 유중혁의 행색이 영 못미더웠던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일렌이 지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만만찮게 막무가내군요. 자리를 비켜드릴 테니 용건이 있다면 알아서 해결하시길. 어차피 의식이 없는 사람과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아일렌은 유중혁을 병실에 내버려둔 채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잠시 후 바깥에서 그녀가 복도 사람들을 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바탕 불평소리가 있는가 싶더니 주변이 금세 조용해졌다.
유중혁은 정적이 들어찬 치료실 입구에 서서 누워있는 김독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설화 팩에서 흘러나온 설화조각들이 느리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숨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유중혁은 숨을 죽이고 눈을 부릅떴다. 발끝이 뻣뻣해졌다가 곧 온몸이 곤두섰다. 그는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독자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독자가 살아있었다.
물론 유중혁은 바로 그 이유 하나로 73번째 마계에 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바로 눈앞에서 체감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김독자가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는 것, 화신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어떤 목소리나 정신적 형태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유중혁이 기억하는 바로 그 형태로서 온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유중혁은 당장에 누워있는 김독자에게 다가가 얼굴을 낱낱이 확인하고 싶은 욕망과 그냥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유중혁은 마침내 손에서 힘을 빼고 천천히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잊지 못 했던, 모두가 입을 모아 못생겼다고 말하며 인식하기를 거부하던 그 흐리멍텅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유중혁은 잊고 있던 아주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
그 날이란 김독자의 최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유중혁은 그 순간을 여러 번 곱씹어야만 했다. 마왕이 된 김독자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은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었다. 유중혁은 자신을 바라보던 김독자의 모든 표정과 목소리를 기억했다. 천천히 쓰러지는 김독자를 붙잡고 어떤 말이든 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 했을 때, 김독자는 그런 그를 이해한다는 것처럼 올려다보았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유중혁은 그에게 이해받는 기분을 느껴야했다. 김독자는 시선을 들어 그들의 머리 위로 떠오른 무수한 별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 후 동요도 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멋진 이야기잖아, 안 그래?
또한 유중혁은 <스타스트림>의 모든 인과가 자신으로부터 김독자를 빼앗던 순간을 기억했다. 죽어가는 김독자의 몸에서 시시각각 떨어지던 피와 설화들이 바닥에 고이던 모양새를, 자신의 손 안에서 점점 가벼워지던 그의 무게를 기억했다. 머리 위에서 성좌들이 눈을 감고 침음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 어떤 성좌도 이에 개입할 수 없었다. 절대적인 개연성이 김독자의 죽음을 확정했다. 김독자는 시나리오 바깥으로 추방될 운명이었다.
운명.
그 순간 어떤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김독자의 운명을 강제하는 절대적인 힘,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의 결말을 결정한 권력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사고가 아니라 만행이었다. 유중혁은 <올림포스>의 농간을 기억해냈다. 예언이 실행된다면 지금이었다.
「화신 김독자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죽게 될 것이다.」
설마…. 시선이 김독자의 심장에 꽂힌 칼을 향했다. 결론이 내려졌지만 유중혁은 판단을 유보했다. 김독자가 인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웃고 있었다.
“다시 만나자, 유중혁.”
기다렸다는 듯 김독자의 몸이 빠른 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유중혁이 다급하게 그의 멱살을 붙잡았지만 모든 것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김독자! 안 된다! 블랙홀이 김독자의 육신을 조각내 모조리 빨아들였다. 유중혁이 아득한 심연 속으로 사라지는 김독자를 보며 소리 질렀다. 김독자! 성좌들이 빠르게 간접 메시지를 남겼다. 유중혁이 앞으로 내달리며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블랙홀이 소멸했다. 그는 망연한 얼굴로 천천히 멈추어 섰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있었다. 머리 위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스타스트림>이 아직 이름이 없는 한 성좌의 수식언을 공표합니다.]
[그의 수식언은 ‘구원의 마왕’입니다.]
그리고 유중혁은 깨달았다. <스타스트림>은 여전히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방금 그 방법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을.

*
아일렌은 설화팩을 갈기 위해 치료실의 문을 열다가 멈추어 섰다. 길로바트 공단주라는 남자가 침대에 누운 ‘유중혁’의 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는 아일렌의 기척을 느꼈음에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그 순간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가 시선을 들고 아일렌을 쳐다보았다. 반사적으로 아일렌이 문고리를 쥐었다. 그러나 그는 아일렌의 손에 들린 설화팩을 보곤 그대로 치료실을 나가버렸다.
2.
김독자는 그로부터 이틀이나 더 잠들어 있었다. 유중혁은 세이스비츠 공단 근처를 몇 번 훑어보고 돌아와선 자신의 치료에 집중했다. 급한 상황만 수습하고 세이스비츠까지 달려오느라 그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초인적인 회복력 덕에 모든 문제는 몇 시간 내로 해결되었다. 몸이 회복기에 접어들자 유중혁이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김독자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이틀 동안 유중혁은 종종 김독자의 곁에 우두커니 서서 잠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곤 했다. 어떤 질문을 던지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고, 이미 답을 구해놓고 그것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표정을 지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방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아일렌이 설화팩과 카테터를 갈기 위해 치료실로 들어오면, 그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자리를 떠나버렸다. 아일렌은 그가 꼭 초조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는데,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격 때문에 가까이 있기만 해도 피로가 배가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편 유중혁은 좀 복잡한 상황이었다. 극적인 이별과 마계에서 벌어진 골칫거리로 인해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김독자가 궁극적으로 이곳에 떨어지게 된 건 예언이 실현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간접적인 고백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고백으로 칠 수 있을지가 의문이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이제 김독자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죽은 듯 잠을 자고 있는 김독자의 허여멀건한 낯짝을 볼 때마다 되살아나 유중혁에게 거듭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처음에 유중혁은 복잡해하는 자신에게 당혹감을 느꼈다. 그는 시나리오 이전은 물론이고 시나리오를 시작한 이후에도 많은 고백을 받아보았다. 전부 여자로부터 받은 고백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거나 사랑을 고백하는 건 전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상대가 남자였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컨대 고백 자체는 그에게 큰 충격거리가 되지 못 했다. 게다가 그는 지난 생을 정리하며 누군가의 마음에 응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심지어는 성의 있게 거절하는 것조차 관뒀다. 그 후로 유중혁은 감정이 무거워질 수 있는 일말의 상황도 허용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따라서 김독자가 유중혁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유중혁에게는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해 세상을 구하겠다는 대의가 있었다. 김독자의 대의도 이와 동일했다. 둘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설령 김독자가 유중혁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들 두 사람은 대의를 위해 감정적인 문제를 정리할 것이었다.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그의 마음을 모조리 알게 되었다고 해도 별로 놀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없던 일처럼 수습하려고 들거나 덮어놓으려고 전전긍긍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것이다. 아무렴 상관없다는 것처럼. 유중혁은 예언자가 아니었지만 김독자가 눈을 뜬 이후 자신을 보며 하게 될 첫 마디가 적어도 예언에 대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김독자의 몇 가지를 확신하듯, 김독자 역시 유중혁에 대한 몇 가지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실 김독자는 대체로 유중혁의 모든 것을 확신해왔다. 그리고 김독자가 평소 유중혁에 대해 내리던 판단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는 어렵지 않게 유중혁이 예언과 관한 문제를 가능한 빨리 정리하고 싶어 할 거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럼 김독자는 그 어떤 짓도 하지 않고 마음을 수습해버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독자가 틀렸다. 유중혁은 정리하길 원하지 않았다.
유중혁은 가능하면 계속해서 이 상황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었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동요하는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킨 뒤, 유중혁은 몇 가지를 마음속으로 간추려보았다. 확실한 사실 첫 번째, 그는 지금 상황을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확실한 사실 두 번째, 그는 김독자 역시 이 상황을 정리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럼 다시 그 질문이 남는다. 유중혁은 앞으로 김독자와 어떻게 할 것인가.
이틀 동안 유중혁은 기절한 김독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와 같은 고민 대부분에 나름의 답을 내리려 애썼다. 그런 후에는 김독자가 대체 어느 시점부터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했는지를 고민해보았다. 그러자 그가 불필요하게 나서서 자신과 관련된 사람을 구하려 들던 불가해한 순간들이 모두 이해되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헛짓거리를 한 것이었다. 어디서부터였을까. 확실한 건 동호대교에서 어룡 아가리에 그를 던져 넣었을 때는 아닐 거란 것이었다. 아마 그 일이 있고 좀 더 지난 후일 것이다. 그렇다면 충무로에서일까? 하지만 돌이켜볼수록 과거의 자신이 김독자에게 개차반으로 굴었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졌다. 여태까지 유중혁은 그게 여간 수상쩍은 게 아니었던 김독자의 탓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모든 걸 알게 된 지금은 눈앞에서 알짱거리던 과거의 김독자가 제법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분기점이 없었기에 대체 언제부터 김독자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된 건지 도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마침내 유중혁은 그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후 잠든 김독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며 그 사실을 곱씹어보았다.
김독자가 나를 사랑한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김독자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을 줄은 정말이지 예상조차 하지 못 했다. 문득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김독자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세? 헌신? 동반? 혹은 섹스일지도 모른다. 유중혁은 얼굴을 구겼다. 김독자는 여전히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며 누워있었다. 유중혁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있었고, 이마 위쪽엔 희미하게 금이 가있었다. 아일렌의 말에 따르면 마계에 떨어진 직후 김독자는 화신체의 붕괴를 막기 위해 격에 맞지 않은 조잡한 설화를 무작위로 주워 이식수술을 감행했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 과정에서 생긴 균열일 지도 몰랐다. 유중혁의 시선이 신중하게 이마에 머물렀다가 콧대를 타고 미끄러지듯 눈으로 내려왔다. 이제 보니 김독자는 속눈썹이 긴 편이었다. 숱이 적어서 그렇게 티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피부가 하얀 탓에 까만색이 유독 도드라져보였다. 콧대를 타고 마저 내려온 시선이 인중과 그 아래를 훑었다. 늘 맥없이 웃고 다니던 입술은 길고 얇았는데, 입을 다물고 있는 지금은 의외로 차갑고 폐쇄적인 인상으로 변해있었다. 턱선은 얇지도 두껍지도 않게 빠져있었고, 콧망울은 좁았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피부였다. 하얀 얼굴에 그 흔한 점 한 개 없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얼굴을 처음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렇게 생겼었나. 그전까지 김독자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이 못생겼다고 판단하자 그도 딱히 반발하지 않고 그 의견에 따라왔는데, 이렇게 보면 썩 나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최소한의 봐줄만한 외적 기준을 갖추었다고 해서 갑자기 유중혁이 그와 사랑 놀음을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유중혁은 빠른 판단을 내렸다. 김독자의 마음을 인정해줄 수는 있어도 받아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결정한 후에도 유중혁은 쉽사리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다시 시선이 김독자의 얼굴을 훑었다. 생채기가 가득하지만 정작 점은 없는 허연 얼굴, 길고 숱 적은 까만 속눈썹, 얇은 입술과 낯설 만큼 폐쇄적이고 고집스럽게 보이는 인상… 시선이 턱 끝까지 훑고 나면 다시 이마로 미끄러지듯 올라가 그 일을 반복했다. 어느 샌가 유중혁은 천천히 손을 뻗고 있었다. 긴 손가락이 김독자의 속눈썹 끄트머리를 건드렸다가 이내 뺨을 훑었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차가웠다. 바로 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유중혁은 손을 천천히 거두곤 고개를 들었다. 아일렌이 한손에 설화팩과 카테터를 들고 다른 한손으로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유중혁이 뭘 하고 있었는지는 충분히 알아차린 것 같았다. 유중혁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한 번 훑어보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김독자로부터 떨어졌다. 잠시 뒤, 유중혁은 문을 열고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버렸다.
김독자는 그로부터 대략 4시간 뒤에 깨어났다. 의식을 되찾을 징후가 보이자 아일렌은 호들갑을 떠는 마르크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서 그녀를 노려보는 유중혁을 치료실에서 쫓아냈다. 마르크는 볼멘소리를 하며 슬그머니 사라지는가 싶더니 아일렌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나타나 머쓱한 얼굴을 했다. 유중혁은 복도에 서있다 말고 마르크가 치료실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미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방 안에서 음성이 들렸다.
“무슨 일이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일순 아득해졌다. 유중혁은 다급하게 마르크가 주절거리는 것을 밀치고 치료실 안으로 들어왔다. 좀 전까지 이어지던 대화가 뚝 끊어지더니, 긴 침묵이 있었다.
김독자는 완전 얼빠진 얼굴이었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응시하고 있었다. 유중혁이 다가가자 김독자가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림자가 진 김독자의 얼굴은 이틀 내리 보던 것보다 훨씬 안색이 나빠 보였다. 설화팩에서 흘러내린 설화가 뚝 뚝 떨어지는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표정이 천천히 경악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김독자는 순간 무너졌다가 되돌아왔다. 그 다음에 떠오른 표정은 안도였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유중혁이 죽은 줄 알고 있던 것이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더니 향긋한 냄새가 들이닥쳤다. 아일렌이 차를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다 테이블보를 정리하고 다시 나가버렸다. 그녀는 나가기 전에 문 앞에 멍청하게 서있던 마르크에게 눈치를 주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복도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일렌은 현명하게도 마르크를 포함한 복도의 모든 이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
얼마 뒤 김독자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침묵을 지키며 생각을 정리한 후 물었다.
“여긴 언제 온 거냐?”
“이틀 전.”
김독자는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며 혼란스러워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다시 생각을 정리하는 눈치였다가 연거푸 물었다.
“…어떻게 살아난 거냐? 도저히 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도움을 좀 받았다.”
유중혁은 대화 내내 김독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그건 김독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부터 시작해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상태를 확인했다. 마지막에 그런 식으로 연결이 끊어졌으니 알만했다. 유중혁은 자신의 행색을 살피다 안심하는 김독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김독자는 눈꼬리에서 시작해 안쪽으로 들어간 속 쌍꺼풀이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쌍꺼풀이었다. 입술은 잠들어 있을 때보다는 혈색이 도는 것 같았다. 이틀 내내 뜯어보던 얼굴이 움직이며 시시각각 표정을 만들어냈다. 신중하게 김독자의 얼굴을 훑어 내리던 유중혁은 대화가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방안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유중혁은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찻잔을 들어올렸다. 김독자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지내냐?”
그건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해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독자가 사라진 세계에 남겨진 이들에 대한 근황 보고서였다. 의외로 유중혁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꽤 많았다. 그는 서울에서 경기권으로 넘어간 김독자의 동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김독자가 천천히 그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맞장구를 치거나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잠시 곱씹어 생각하는 부분도 있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젓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김독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채로운 표정 변화 때문인지 김독자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그런 얼굴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니다, 처음 보았다. 일종의 선연한 광채. 낯익은 얼굴 위로 떠오른 아주 낯선 특징들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중혁은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이토록 누군가의 얼굴에 집중한 적이 있던가? 심지어 그는 김독자가 더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김독자가 웃는 것을 곁에 두고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김독자의 얼굴에서 점차 웃음기가 사라졌다. 외로움과 고통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숨길 수 없는 감정이 드러났다. 그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듯 김독자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유중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초조함을 느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네 이야기를 한다.”
김독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은 그 표정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많이 한다. 네 이야기를.”
김독자의 눈이 천천히 커지는가 싶더니 곧 일그러졌다. 유중혁은 바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김독자가 두 손을 들어 눈을 가린 채 억지로 입 꼬리를 당겼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그의 앞에 다가섰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는데도 김독자는 그가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씩 들썩이다 가라앉는 어깨를 내려다보던 유중혁이 김독자의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김독자는 울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새까맣게 반들거리는 눈꺼풀 아래로 지친 눈동자가 보였다. 그 순간 유중혁은 알 수 없는 거대한 분노와 슬픔과 고통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답을 내렸다.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그러자 김독자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남았다. 당황한 김독자가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유중ㅎ…,”
유중혁이 김독자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앞으로 숙였다. 큼지막한 손이 그의 얼굴을 감싸더니 벌어진 입술 위로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김독자가 황급히 몸을 뒤로 빼는 게 느껴졌다. 유중혁이 그를 다시 앞으로 당겼다. 입술을 핥아 올리며 부드럽게 입술을 머금자 김독자가 몸부림쳤다. 유중혁은 고개를 틀며 얼굴을 밀착했다.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자 품 안에 들어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김독자의 손이 몇 번 허공을 허우적거리다 유중혁의 등을 붙잡고 늘어졌다. 입천장을 쓸어 올리며 혀를 움직이자 그가 헐떡이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혀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눈을 꽉 감고 있었다. 고개를 비틀려는 김독자의 턱을 붙잡아 자신을 보게 하자 애처로운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
유중혁이 입술을 붙인 채 밀어붙이자 김독자가 손쉽게 밀려나 침대 헤드에 가볍게 머리를 박았다. 그는 어느 순간 상황을 포기한 것 같았다. 등을 붙잡던 손이 주르륵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유중혁은 그대로 김독자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쪽쪽거리며 입술을 빨아 당겼다 놓아주자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입술을 비비며 혀를 밀어 넣자 김독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게 미친 듯이 좋았다. 유중혁은 취한 것처럼 김독자의 입안을 유린하고 취했다. 헐떡이는 소리가 병실의 침묵을 추월했다. 두 사람의 타액이 교환되는 소리가 방을 적나라하게 울렸다. 잠시 후 유중혁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품 안에 가두었던 김독자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축축한 두 입술에 타액이 가느다랗게 늘어지다 끊어졌다. 김독자가 숨을 고르며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유중혁은 잠시 기다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구로 돌아가자, 김독자.”
너를 원해.
다음 순간 김독자의 낯빛이 경악과 충격으로 창백하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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