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그리 «색깔의 역사(3)»
7.
다시 돌이켜봐도 그린은 정말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아이였다. 그린의 세상에는 이미 시도해본 것과 아직 시도해보지 않은 것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 애가 잘하는 것과 잘할 자신이 있는 것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린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본인이 예감한 그대로의 실적을 내서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특히 학문적인 분야에서 그 두각을 드러냈는데, 한 번 그렇게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어른들조차 그린에게 절절매거나 곤란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린은 또래아이보다 두 배는 빨리 읽었고, 활자를 이해하고 흡수하는 속도도 월등했다. 도감을 읽은 뒤에 수많은 포켓몬을 손쉽게 타입 별로 분류하거나 책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야생 포켓몬의 서식지를 예상하고 알아맞힐 수도 있었다. 심지어 그린은 그런 일들을 재미있게 생각했다. 아마 무엇이든 잘했기 때문에 더욱 흥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레드는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린이 특별한 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것이 그린의 능력 때문은 아니었다. 레드가 그린을 특별한 존재로 여긴 것은 아주 개인적인 이유에서였다. 그린은 레드가 살면서 처음 만난 또래아이였다.
그전까지 놀이상대라고는 멀리서 움직이는 야생 포켓몬의 그림자를 토대로 만든 상상의 괴물과 한손에 들어오는 게임보이가 전부였는데, 갑자기 그것도 자신의 생일 전날 또래아이가 도착했다고 상상해보라.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레드는 현관 앞에 서서 그린을 마주보던 그 순간, 자신이 모르고 있던 세상의 비밀이 자신의 앞에 막 모습을 드러낸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하려고 이때까지 그린을 잘 숨겨놓았다가, 자신이 성장하는 동안 몰래 자기가 먹는 음식을 그린에게도 먹이고 자기가 입는 옷을 그린에게도 입혀서 자신과 최대한 비슷한 나이를 먹고 비슷한 몸집을 가지도록 계획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린은 엄마가 숨겨놓은 깜짝 선물이 아니라 태초마을에 막 도착한 도회지의 아이였다.
그린은 첫날부터 그러했듯 모든 부분에서 레드를 손쉽게 앞질렀다. 레드가 들어본 적도 없는 포켓몬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레드보다 더 많은 도감을 가지고 있던 데다가 원한다면 언제든 다른 책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린의 할아버지인 오키도 박사는 연구나 강연 때문에 무척 바빠서 그린을 자주 돌봐주지는 못 했지만 그린이 어떤 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대체로 짧은 시일 내에 그것을 구해다주었다. 오키도 박사는 그린이 자신의 서재를 들락거리는 것도 눈감아주었다. 어차피 그린이 너무 어리기 때문에 그 책들을 다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린이 책을 찢거나 낙서를 할 만큼 말썽을 부리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레드의 눈에도 그린이 정말 오키도 박사의 논문이나 두꺼운 서적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린은 어려운 책을 읽을 때면 진지한 표정으로 아주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마치 그렇게 하면 답이 튀어나와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기라도 할 것처럼 문장 하나하나를 노려보곤 했다.
오키도 박사가 그린을 어떤 아이로 생각했는지는 다시 생각해봐도 무척 어려운 문제다. 우선 그가 자신의 손자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 같기는 하다. 그린은 너무 어린 나이에 두 부모님을 잃은 데다가 하나지방에서 지낼 당시에는 또래아이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오키도 박사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나리누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부를 묻고 몇 가지 소식을 전한 뒤, 생활비를 송금해주면서 필요하다면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을 구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런 뒤에는 항상 그린을 바꿔달라고 했다. 그린은 나리누나가 오키도 박사와 통화를 하는 내내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토씨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정작 오키도 박사가 자신을 찾으면 화들짝 놀라서 딴청을 피우는 척 고개를 돌렸다.
오키도 박사는 손자에게 많은 것을 묻곤 했는데, 질문의 레퍼토리는 항상 똑같았다. 오키도 박사는 그린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건강한지, 이번 주에는 무엇을 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최근에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학교에 다닐 마음은 없는지를 차례로 물었다. 그린은 언제나 대답이 짧았다. 응,이나 아니,로 대답하고 가끔 모르겠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오키도 박사는 그린이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다기보다는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더는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손자의 상태가 걱정되었던 그는 자신의 손주들을 태초마을로 데려가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얼마 뒤 오키도 박사의 뜻에 따라 두 오누이가 관동지방에 도착했다. 오키도 박사는 공항에서 두 손주를 기다렸다가 있는 힘껏 포옹해준 후 두 사람을 태우고 태초마을까지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오키도 박사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손주들을 지척에 두고 그들의 인생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나리누나는 그린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아직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였다. 그런 나리누나에게 어린 그린의 양육을 모두 떠맡기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만약 둘 중 한 사람이 아프거나 갑작스럽게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오키도 박사가 꼭 곁에 있어줘야 했고 그것이 응당 옳은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 손주는 걸어서 15분이면 할아버지의 연구소로 찾아갈 수 있는 물리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어른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오키도 박사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하지만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오키도 박사가 항상 두 사람과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포켓몬 학계의 권위자였기 때문에 걸핏하면 다른 지방으로 출장을 가거나 연계 연구소의 연구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관동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렇다보니 이 가족은 두 손주가 하나지방에 있을 때와 비교했을 때 고작 서너 번 정도의 만남만을 더 가질 수 있었다. 나리누나와 그린에게 있어 오키도 박사는 여전히 화상통화 속 얼굴로서 더 친숙했고, 생활비 대신 용돈을 보내주는 것이 달랐을 뿐 세 사람 모두 전과 다를 바 없는 관계를 유지할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오키도 박사는 두 아이들에게 가능한 한 시간을 내려고 노력했고, 나리누나와 그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리누나는 어떤 곤란한 일이 발생했을 때 수화기만 들면 연구소 직원에게 연결되는 직통전화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키도 박사가 준 것이었다. 나리누나가 그걸 한 번도 쓴 적은 없었지만 위급한 상황이 오면 분명 그 전화를 통해 당장의 문제를 수습할 수 있을 테였다.
오키도 박사에게 있어 두 손주들은 각각 나무와 새싹이었는데, 서로 다른 성장속도에 대한 은유였다. 이를테면 나리누나는 이미 왕성한 성장 시기를 지났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에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그린은 하루가 멀다 하고 키가 자라고 풍부한 어휘를 갖추고 발음도 더욱 또렷해졌다. 오키도 박사가 출장에서 돌아올 때면 그린은 매번 그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자란 모습으로 현관 앞에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맞이했다. 그때마다 아마 오키도 박사는 손자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그 아이의 왕성한 성장에 아무런 직접적인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부재가 너무 잦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을 수도 있고, 그린의 극적인 성장이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입증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오키도 박사는 적어도 교육적인 면에서만큼은 그린에게 가능한 한 많은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손주가 부탁하는 책을 잊지 않고 메모해두었다가 조수에게 부탁해서 반드시 구해다주었다. 그린이 연구소 서재를 들락거리는 일을 알게 된 후에도 다소 고민하기는 했지만 자유롭게 놔두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린의 이런 행동들은 또래아이가 할 법한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원래 그 나이 대에는 모름지기 게임과 놀이에 푹 빠져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오키도 박사 역시 남달리 영특한 유년시절을 보낸 까닭에 그린의 이런 행동에서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포켓몬 강좌를 진행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린을 다른 아이들의 수준과 비교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키도 박사가 가장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던 태초마을의 유일한 그린 또래의 아이 레드는 포켓몬 학문에 관심을 가졌을 뿐더러 두각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오키도 박사의 주변에는 보통 이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오키도 스스로가 뛰어난 사람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린의 능력은 특별히 그를 감화시키지 못 했던 것 같다. 오키도 박사는 아이의 남다른 탐구심과 경쟁심을 칭찬하고 북돋아 주기보다는 아이가 무언가를 잘못하거나 혹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잘못된 길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는 사고를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교육적인 의무를 다하려고 들었다.
그린 역시 오키도 박사와 비슷한 이유로 한동안은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 한 채 지냈다. 레드는 첫날부터 그린이 자신을 손쉽게 앞질렀다고 생각했지만, 그린은 그때까지 관동도감을 외우는 아이를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레드의 능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린은 비록 또래아이들과 자주 교류하지 않아 정확히 비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연중에는 자신이 보통 아이들보다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초마을에서 만난 유일한 또래아이는 그린과 다를 바 없이 도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나오는 포켓몬들의 이름을 모조리 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포켓몬 자체에도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그린은 레드를 세상의 평균이라고 굳게 믿어버렸다. 비범한 아이가 비범한 아이를 첫 비교대상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때마침 할아버지의 본격적인 훈육이 시작되었다. 오키도 박사는 결코 그린을 찬탄하거나 북돋아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그린이 깜짝 놀랄만한 능력을 발휘해 책을 모조리 외우거나 개념을 응용한 새로운 가설을 내놓아도 동요 한 번 없이 차분하고 일상적인 어조를 유지했다. 그리고 지식을 가진 자들(오키도 박사는 이 때 항상 ‘우리는’이라는 주어를 사용했다)이 언제나 조심하고 유념해야할 사항과 마땅히 가져야할 태도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사실 오키도 박사가 그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그게 다였다. 그린은 이미 필요한 것을 전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어떻게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줄 필요만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 도리가 없던 그린은 자신이 보통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통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저토록 태연한 것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린은 도감을 독파하고 포켓몬 지식을 방대하게 쌓는 일이야말로 할아버지는 물론 그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럴 필요도 없이 그린은 이미 엘리트였는데도 말이다.
오키도 박사는 레드에게 죄책감이나 의무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동일한 능력이라도 레드 쪽을 더욱 칭찬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박사의 이런 태도가 종종 그린의 경쟁심을 부추겼다. 그린은 걸핏하면 레드를 걸고넘어지며 경쟁을 자처하고 승부를 가리고자 했다. 그러고는 이기기 위해 정말이지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해냈다. 그린은 레드를 이기는데 그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통틀어 자신이 가장 잘난 사람이고자 했다. 제일 잘나지 않으면 포켓몬 학계의 최고 권위자인 자신의 할아버지를 도무지 감동시킬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린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오키도 박사가 자신의 능력에 지나치게 압도된 나머지 충격에 빠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빠른 시일 내에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린은 자신의 능력을 가장 잘 활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항상 머리를 굴리고 있었고, 그 지점을 모두에게 강조해서 자신이 준비된 뛰어난 사람임을 알리려했다. 갑자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해 거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거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허풍에 가까운 자기어필을 늘어놓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레드는 그린의 이런 노력마저도 겸손치 못 한 행동으로만 취급받는 오키도 집안의 분위기를 다소 안타깝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린이 뛰어난 아이라는 것에는 정말 티끌만큼의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특히 포켓몬에 관해서라면 과연 오키도 박사의 손자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내곤 했다. 그에 비하면 레드는 그린보다 잘 하는 게 많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는 성장도 그린보다 더딘 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린이 벌써 늘씬하고 길쭉한 팔다리를 마구 움직이고 있을 때 레드는 땅딸막한 작은 체구로 그를 쫓으려 애써야했다. 체력은 비등비등했는데, 어쩌다 자신이 달리기를 이기는 날에도 그린이 좀 더 필사적이었다면 본인이 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불쾌함이 레드를 사로잡았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바로 레드의 경쟁심이었다.
그 무렵의 레드는, 그러니까 이제 막 그린을 만났을 때의 레드는 첫 친구와 첫 라이벌이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 그린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 종종 갈팡질팡했다. 함께 놀자고 손을 잡아끌다가도 그린이 먼저 앞서가면 잡던 손을 내팽겨 치고 추월해 달려 나갔다. 하지만 정말로 그린이 미워서 그렇게 한 적은 없었다. 레드는 단지 그린을 이기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은 레드의 개인적인 욕망이었다.
레드는 자신의 능력을 그린과 동등한 선에서, 아니 그 이상으로 발휘해서 그린에게 숨겨진 최고이자 최선의 잠재력을 끌어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최상의 상태로 무장한 그린과 겨루어 승리를 거두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하면 더는 기분 나빠질 일도 없고 그린의 손을 내팽겨 치고 앞서서 걸어갈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린이 세계 최고를 목표로 잡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정말 개인적인 욕망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레드의 경쟁심은 결과적으로는 레드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린이 너무 월등했기 때문에 레드는 그 애 앞에서 온힘을 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린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최선을 깨달아야만 했다. 레드는 자신의 최고의 순간을 매순간 그린과의 경쟁을 통해 경험했다.
그린도 레드의 성장을 흥미진진한 경쟁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두 사람 모두 경쟁을 놀이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첫 친구이자 첫 라이벌이라는 정체성은 결국 분리되지 않고 바로 그런 방식으로써 통합되었다. 만약 두 사람을 지탱하는 두 정체성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 했더라면 두 사람은 어느 순간 무너지거나 멀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레드에게 있어 그린은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그린이 최고를 목표로 하고, 레드가 그린의 위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다시 말하자면 그린이 있었기 때문에 레드는 지금에 이를 수 있던 것이다.

8.
생일파티가 끝난 다음 날 레드의 엄마는 레드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외출을 감행했다.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가 아들과 함께 먼 곳을 쏘다니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레드의 엄마는 구태여 아들이 마을을 들쑤시며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두는 것보다는 집에 붙잡아놓고 도감을 읽히는 편이 훨씬 교육적이라고 생각해왔다.
레드가 깨끗한 옷을 입은 채 엄마의 손을 잡고 언덕을 반쯤 내려갔을 즈음, 갑자기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언덕 아래에 나리누나가 그린의 손을 잡고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드는 갑자기 이 외출이 즐거워졌다. 레드가 언덕을 쏜살같이 달려 내려가는 동안 그린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레드가 다가오는 것을 기다렸다.
“흙먼지 날려.” 그린이 퉁명스럽게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응.” 레드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뒤늦게 언덕을 따라 내려온 레드의 엄마는 나리누나와 포옹했다. 두 사람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레드와 그린은 그들을 앞서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린은 심각하게 물었다.
“도감 읽었어?”
적어도 그린에게 그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인 듯했다.
“조금.”
레드는 두 페이지를 생각하며 대답했는데, 그린은 레드의 조금을 적어도 스무 페이지 정도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금방 읽겠네.”
그린은 흡족해했고 레드는 그 반응에 어리둥절해했다.
레드의 엄마와 나리누나는 태초마을의 수로 뒤쪽으로 이어진 작은 호수까지 아이들을 이끌었다. 레드는 그곳이 얼마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인지를 알고 있었다. 혼자 마을을 쏘다니며 몇 번 가보았던 장소였다. 호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을 안쪽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지나야했는데,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레드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알지 못 하는 장소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이곳을 알고 있다니 신기할 다름이었다.
두 여자는 풀밭에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너무 멀리까지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건 두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자유를 준다는 말로 들렸다. 야생포켓몬이 나올 수 있다느니 다칠 위험이 있다느니 덧붙이는 소리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레드는 이 부근의 풀숲에 야생포켓몬이 출몰할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다시 나리누나에게 주의를 돌리자마자 레드는 마치 보호자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지령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호수의 반대편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릴 때는 시야가 좁아진다. 처음에는 시야의 사각지대를 채우는 녹색의 풍경도 달리기에 속력이 붙는 순간 형체를 알 수 없는 일그러진 모양새가 되고 만다. 주의를 기울일 만큼의 가치가 없는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호수의 중간지점에 도달했을 무렵 레드의 시야에는 점점 가까워지는 목적지점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레드 옆으로 무엇인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레드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러자 시야가 열리고 주변의 풍경이 시선의 사각지대로 침입했다. 풀내음과 호숫가의 희미한 물비린내가 들이닥쳤다. 레드는 자신을 스쳐간 사람의 등을 쳐다보았다. 그린이 레드를 앞질러 호수의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레드보다 늦게 출발했을 텐데도 단숨에 따라잡은 것이다. 그린은 레드보다 달리기가 더 빨랐다. 갑자기 분한 느낌이 레드를 엄습했다.
포켓몬에 대한 지식에 뒤지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레드에게는 고작 몇 권의 책뿐이었다. 레드는 그런 것들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그린은 오키드 박사의 손자였고, 다른 지방에서 살다 온 경험도 있었다. 그린이 레드보다 포켓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호숫가에 먼저 도달하는 것, 요컨대 태초마을의 영역을 레드보다 빠르게 점유하는 것은 적어도 이방인인 그린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레드의 영역이었다. 이 마을 출신자가 아닌 어느 누구도 레드보다 먼저 태초마을의 어딘가에 도달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레드는 달리기에 어느 정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존심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레드는 자신이 인적이 드문 호수를 은밀히 탐사한 경험에 지위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린에게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레드의 마음속에 그전까지 느끼지 못 한 큰 경쟁심이 솟구쳤다. 레드는 또래아이에게 무엇이든 양보하거나 기다리거나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레드는 자신에게 중요하다 판단한 것에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에게도 욕심이 있었다. 레드는 그린에게 달리기로 뒤쳐지던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욕망을 구체화했다. 그린을 이기고 싶었다.
다음 순간, 막 형태를 갖춘 욕망이 활활 타올라 레드의 다리에 동력을 불어넣었다. 레드는 쏜살같이 팔다리를 움직여 다시 그린을 추월했다. 스쳐가는 순간 레드는 그린이 고개를 쳐드는 것을 보았다. 등 뒤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매섭게 들려왔다. 레드는 그린이 자신을 맹렬히 추격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누가 이기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지만 정작 그 이유는 중요치 않은 게 되었다.
두 아이들은 이마로 끊임없이 바람을 때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 아이들이 밟고 지나간 곳을 따라 수면 위로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호수의 빛이 파동을 따라 수십 개의 파편으로 튀어 올랐다. 풀을 헤치고 나아가는 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레드가 이겼다. 거의 간발의 차로. 레드는 호숫가에 도달하자마자 헐떡이며 무릎을 짚고 땀을 닦아냈다. 그린은 아예 풀밭 위에 드러누웠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없이 그저 헉헉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메꿨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후, 레드가 먼저 헐떡이며 말을 걸었다.
“내가 이겼어.”
그린은 대답 대신 씩씩거리며 숨을 골랐다.
레드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내가 이겼어.”
그린은 다소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알아.”
그린은 벌떡 일어나 호숫가까지 설렁설렁 걸었다가 지친 기색으로 다시 근처에 주저앉았다. 레드는 그린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린은 멍하니 호수 너머를 보고 있었다. 호수 반대편에 앉아있는 나리누나와 레드의 엄마가 보였다. 두 사람은 아이들이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시선으로 쫓은 후, 그들이 아무런 말썽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레드는 그린의 옆에 주저앉았다.
잔잔한 바람이 불자 마치 부드러운 이불처럼 호수의 수면에 주름이 잡혔다. 물은 조금씩 두 아이들이 앉은 곳까지 떠밀려왔다가 찰팍거리며 물방울을 튀겼다. 그린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렸다. 레드는 그린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엄마가 앉아있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긴 사람이 잘 안 와.”
“그런 것 같아.”
“항상 그래.”
레드는 손가락을 들어 호수 뒤쪽으로 펼쳐진 숲을 대충 훑는 듯하다가 어떤 나무를 정확히 짚었다. 그린이 도감을 펼칠 때 그렇게 하듯이.
“저기까지 가면 다시 시끄러워져. 하지만 여긴 포켓몬도 많이 안 나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호수 한가운데에서 새끼 잉어킹이 튀어 올랐다. 고작해야 레드의 발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잉어킹의 비늘에 반사된 햇빛이 짧은 순간 빨간색으로 반짝였다. 잉어킹은 온몸을 비틀며 지느러미를 힘차게 펄떡이다가 다시 물속으로 풍덩 빠져 큰 파동을 만들었다. 그런 후 한동안 정말 조용해졌다.
그린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했으나 이내 대답했다.
“어쨌든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
“여기보다 좋은 곳도 많아.”
레드는 자신이 으스댄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그린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레드를 응시하다가 그에 거역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잘 됐네. 네가 안내 좀 해.”
호수 반대편에서 레드의 엄마가 샌드위치를 먹자고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아이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갈 때도 그 암묵적인 달리기 시합이 진행되었다. 그린은 이번에는 지지 않을 거란 듯이 아까보다 더 재빠르게 달렸고 결국 레드를 이겼다.

9.
다음 날부터 태초마을 관광이 시작되었다. 레드의 엄마와 나리누나의 외출은 잦아졌다. 두 여자는 아이들을 이끌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갔다. 간식시간이 오기 전까지 레드와 그린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어디까지나 두 여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 한에서였지만 레드나 그린이 그것을 정말 신경 쓴 적은 없었다.
레드는 그린에게 자신이 자주 쏘다니던 장소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발을 잘 디딜 수 있는 나무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그 위에 올라가서 함께 경치를 감상하거나 오키드 박사의 연구소가 잘 보이는 작은 언덕에 올라가 정오가 되도록 앉아있기도 했다. 그린은 도감을 펼칠 때보다 훨씬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레드가 질문을 던지면 성의껏 대답해주었다. 주로 레드는 그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면 그린은 레드가 데려온 곳이 마음에 든다거나 혹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레드가 이유를 물으면 고심하여 다시 대답했다. 레드는 태초마을에 한해서는 평소보다 말수가 많아졌다. 그린에게 으스대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지만 점차 이야기 속에서 고향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왔다. 레드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말했다. 아침마다 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울음소리들, 수면 아래로 보이는 우아한 지느러미의 빛깔, 수로의 바위 위에 엎어진 향기 나는 꼬리의 포켓몬… 이따금 비가 세차게 퍼붓는 밤이면 수로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리는 무시무시한 울음소리의 정체까지. 레드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알고자 도감을 읽어온 아이였고, 이제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이해하고자 도감을 읽어온 아이를 만나 무엇인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레드는 그린 역시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혹은 이미 이해하고 있는 그린이 그에 대한 공감을 자신과 나눠주기를 바랐다.
레드가 그 모든 감정과 느낌을 그린에게 일목요연하게 전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레드는 자신의 무언가를 말하는 데 서툴렀다. 레드는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비유와 미사어구를 쓰는데 능숙하지 않았다. 레드는 반드시 필요한 단어로만 구성된 담백한 언어를 구사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감정을 이야기했다.
만약 그린이 만약 그린이 레드의 입장이었더라면 훨씬 능숙하게, 혹은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그것을 전달했을 것이다. 그린에게는 변화무쌍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다채로운 언어양식이 있었다. 어쩌면 은근하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레드를 끌어들이고 움직이려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드는 그린이 아니었으므로 이렇게밖에는 이야기하지 못 했다.
“어쨌든 난 그린이 좋아.”
그린이 레드의 말에 내포된 의미를 모두 알아들었는지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린은 레드가 태초마을에 대해 설명하거나 묘사할 때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주의를 기울였다. 레드가 손으로 짚은 풍경이나 사물이나 건물 따위를 유심히 응시하기도 했다. 가끔 눈을 반짝이며 서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레드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린에게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레드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린은 모두의 예상보다 더 빠르게 태초마을에 동화되었다. 이사를 온 지 한 달이 갓 넘었을 무렵인데도 종종 혼자 마을을 쏘다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레드는 창가에서 우연히 그린을 보기라도 하면 마당까지 단숨에 내달렸다.
“어디가?”
그럼 그린은 항상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생각 중이었으니까 방해하지 마.”
레드가 그린의 화법에 익숙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우선 그린은 진심으로 레드를 쫓아내거나 모욕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린은 단지 날카롭게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린은 레드가 자신을 쫓아오면 저리 가라고 말하는 대신 방해하지 말라며 거듭 당부하곤 했는데, 그 속에는 자신을 따라와도 좋다는 뜻이 일축되어 있었다.
처음에 레드는 그린이 정말로 방해받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소극적인 동행을 바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린의 태도를 보고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린은 정작 그런 식으로 내뱉어 놓고는 정말 레드가 쫓아오고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뒤를 흘끔거리곤 했던 것이다. 그린은 진심을 이야기하는 데 서툴렀다. 레드보다 능숙하고 능청스러운 화법을 구사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지금 원하는 것을 전달하는 데에는 서툴렀다. 레드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는 서투를 지라도 지금 원하는 것을 전달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사실 그것을 제일 잘했다. 그러니까 레드는 그린이 대체 왜 저렇게까지 에둘러 말하고 퉁명스럽게 구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언제나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린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린이 어떤 감정인지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지만.
반면에 그린은 레드의 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처럼 레드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재빨리 눈치 챘다. 레드가 아무리 숨기려고 들어도 자신에게 졌을 때 느끼는 분함과 자신에게 이겼을 때 느끼는 우월감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레드 스스로가 느끼지 못 하는 감정도 본인만큼은 알아차렸다는 듯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다. 그럴 때면 당혹스러워졌다. 자신도 모르는 것을 그린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린의 말이 마치 암시처럼 들렸다. 그린으로부터 “너 분하구나” 혹은 “너 지금 우쭐하지?”라는 말을 들으면, 레드는 설령 자신이 당장 그렇게 느끼고 있지 않더라도 집으로 돌아갈 즈음에는 정말 자신이 아까 그런 상태였다고 믿게 되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그린이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몇 분을 기다려도 그린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레드는 그린의 집으로 찾아갔다. 원래 한 사람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을 때면 다른 한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상대의 집을 찾아가곤 했다. 약속장소에 없으면 대체로는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태초마을이 좁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레드는 문 앞에 멈추어 서서 고개를 들고 그린의 방에 인기척이 있는지를 확인한 후,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린은 침대에 엎어진 채 게임보이를 만지고 있었다. 분명 레드가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린.”
레드가 부르자, 그린은 게임보이를 꾹 꾹 누르며 대꾸했다.
“남의 집에 그렇게 막 들어와서야 쓰겠냐, 레드?”
“놀자.”
“나가기 싫어.”
“그럼 여기 있을래.”
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레드는 그린의 책장에서 두꺼운 도감을 꺼내 바닥에 펼쳐놓고 엎드렸다. 그린은 말없이 게임보이를 만지다말고 도감을 흘끔거렸다가 다시 게임보이를 두들겼다. 버튼을 거칠게 짓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레드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방안이 온통 분노와 슬픔으로 짓눌려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가득 들어차서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침대에 누워있는 그린은 게임보이를 좀 세게 두들기고 있기는 하지만 더없이 평온해보였다. 레드는 그린의 얼굴을 살피려 했지만 그린의 옆모습만으로는 그린의 변화를 감지하기가 어려웠다.
갑자기 그린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게임보이를 침대에 내팽겨 치고는 양말을 바로 신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드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린은 여전히 레드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책상에 엎어져있는 벌레스프레이를 챙기고 스타팅 포켓몬 모형과 삐삐인형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옷장을 열어서 여분의 스웨터를 챙기고 바닥을 굴러다니던 초콜릿 바도 주워 넣었다. 그린은 결연한 표정으로 방 안을 매섭게 훑어보며 물건을 정리하고 챙겨 넣었다. 이미 넣은 물건을 망설이며 제외하거나 챙겨 넣을 물건 앞에서 머뭇거리는 일도 없었다. 그린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드는 당황해서 방 안 살림살이를 하나씩 가방에 욱여넣는 그린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레드의 목소리는 다소 겁에 질려있었다.
“보면 모르냐? 여길 나갈 거야.”
그린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나가서 살 거야?”
“그래.”
“왜?” 레드가 외쳤다.
“그럼 나는 어떡해?”
그러자 그린이 가득 찬 가방의 지퍼를 올리다 말고 레드를 돌아보았다. 그린은 제 아무리 타인의 마음을 짐작하는데 서툰 레드마저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것에 질렸다는 얼굴로 레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지친 눈이었다. 동시에 분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감정도 숨기지 못 하고 있었다. 레드는 그린이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방금까지 두들기던 게임보이 속 전설의 포켓몬을 놓친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대체 뭐가 문제지? 말도 안 되는 생각과 가능성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느 것 하나 정답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그린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욕망만이 강렬했다. 레드는 혼란스러웠다.
그때 그린이 레드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레드를 지나쳐 레드가 바닥에 펼쳐놓았던 도감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린은 그걸 걷어찼다. 두꺼운 도감이 반동에 펄럭이다 말고 뒤집어졌다.
“오늘 새로운 도감 책이 가지고 싶어서 할아버지 연구소에 갔었어.”
오키도 박사가 때마침 연구소에 있었다. 그린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괜히 연구소 서재를 들락거리다 말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자신이 정말 이곳에 온 용무를 이야기했다. 연구에 매진 중이던 오키도 박사는 다소 정신없는 상태에서 손자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조바심이 들었던 그린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할아버지, 빨리! 레드에게 이겨야해. 그러자 오키도 박사가 갑자기 매섭게 돌변했다.
“누군가를 이기는 수단으로써 포켓몬이나 포켓몬의 지식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일렀거늘 너는 아직도 할애비 말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 같구나.”
그린은 잔뜩 비꼬는 투로 오키도 박사의 낮은 목소리를 따라했다.
레드는 잠자코 듣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과시가 뭐지?”
“자랑하는 거야.”
“뭘?”
“내가 누구보다 더 낫다는 걸.”
“네가 나에게 과시하는 거야?”
“아니.”
그린은 그 어느 때보다 쌀쌀맞은 투로, 그러나 분명하고 확실한 어조로 단언했다.
“넌 나보다 못 하지 않아.”
그건 드물게 그린이 에두르지 않고 진심을 이야기한 순간이었다.
그린은 가방을 챙겨 멨다. 이것저것 쑤셔 넣어서 제법 묵직했는데도 그린의 등에 얹어놓으니 그럴싸한 여행 가방처럼 보였다. 어쩌면 오래 전부터 그린은 이 순간을 계획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디로 갈 건데?”
레드가 물었다.
“우선 할아버지 연구소로는 안 갈 거야.”
그린은 나가려다 말고 서랍에 얹어진 자명종 시계를 마저 챙겨 넣었다.
“아침에 제때 일어나야 되니까 이것도 가져가야겠어.”
“언제 돌아올 거야?”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러더니 그린은 문고리를 잡았다. 레드가 다급하게 그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레드 스스로도 방금 행동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린은 자신을 붙잡은 레드의 팔을 따라 레드의 얼굴까지 시선을 옮겼다. 그린의 눈에서 조금의 반짝임과 비웃음이 스쳐지나갔다. 레드는 당장 떠오르는 말을 뱉었다.
“가지마.”
“아니야, 레드.”
그린이 기분 나쁜 상태에서도 한껏 들뜬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는 나랑 같이 가야해.”
“왜?”
“너는 지금 나를 걱정하고 있으니까.”
그린이 말했다.
“하지만 레드 네가 걱정하던 말던 상관없어.”
레드는 본능적으로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린이 언제나 진심을 뒤에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복사되었습니다!
BAN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