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그리 «색깔의 역사(2)»
4.
어쩌면 그린은 처음부터 레드의 라이벌로서 태초마을에 나타난 걸지도 모르겠다. 도감을 펼쳐두고 누가 더 많은 포켓몬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지를 경쟁할 때, 두 사람은 아직 통성명을 마친 사이도 아니었다. 물론 레드도 그린도 서로의 이름을 알고는 있었다. 그린은 레드의 엄마로부터, 레드는 나리누나로부터 상대의 이름을 들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두 사람은 친구가 되기 전부터 라이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레드의 생일 날 그린이 두꺼운 도감을 들고 나타나면서부터 하나의 확고한 법칙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린이 레드에게 그 책을 선물로 주었다. 지금도 그 책은 레드의 방 책장에 잘 꽂혀있다. 그린은 그 책을 통해 포켓몬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린은 그 날 아침 일찍부터 레드의 집을 찾아왔다. 나리누나 없이 혼자였다. 레드는 2층 방에 엎드려 있다 말고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레드의 엄마가 문을 열어주자, 그린은 조심스럽게 안을 살피면서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러다 층계를 내려오는 레드와 눈이 마주쳤다. 레드는 그린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드는 거의 달리다시피 계단을 내려왔다.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서둘러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생일파티는 아직이야.” 레드가 말했다.
“알아.”
그린은 들고 있던 책을 내밀었다.
“파티 전까지 이걸 읽자.”
“도감이야?”
“응.”
그린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슬그머니 덧붙였다.
“네 것보다 훨씬 좋아.”
레드는 그린의 책 표지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관동도감이었고 표지에 큼지막하게 리자몽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레드도 관동도감 그림책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린이 가지고 온 것은 레드의 책보다 더 두껍고 컸다.
“내가 가진 거랑 똑같은데.”
레드는 부러움을 숨기기 위해 짐짓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아니야.” 그린이 발끈했다.
“올라가서 확인해봐.”
“좋아.”
두 사람은 층계를 올라가 방 한가운데에 펼쳐진 카페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린이 가지고 온 책을 펼쳐보았다.
아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 전까지 레드는 포켓몬과 관련된 서적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태초마을에는 상점이나 서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을 중고로 얻거나, 외부로 나갔다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드가 가진 포켓몬 서적들은 전부 연구원과 오키도 박사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사실 그린의 책도 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미 제법 손을 탄 흔적이 역력했다. 하지만 레드의 책들과는 달리 오래 된 종이 냄새가 나지 않았고, 페이지를 넘길 때면 예리하고 신선한 소리가 났다. 하드커버로 만들어진 단단한 표지는 광택이 났고, 주먹으로 두들기면 마치 문에 노크를 하는 것처럼 똑똑 소리가 났다. 그린의 책은 미래에서 온 신문물이었고 단숨에 레드가 가진 것을 유물로 만들었다. 책의 외관뿐만이 아니었다. 그린이 책을 펼쳐 내용을 보여주는 순간, 레드는 자신이 이때까지 한 번도 이런 책을 가져본 적이 없음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포켓몬의 그림 옆에 붙은 깨알 같은 글씨들이 레드를 압도했던 것이다. 대체 이름과 종 이외에 포켓몬에 대해 무엇을 더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림이 많지 않은 책이었다. 포켓몬의 그림 하나를 두고 방대한 분량의 설명문이 쓰여 있었다. 도감이 두꺼운 이유는 수록된 포켓몬의 가짓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한 포켓몬을 설명하는 내용이 기본적으로 네 페이지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린은 레드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가락으로 도감의 단어 하나하나를 짚은 뒤 과시적인 면이 없잖아 있는 투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 만남 때는 포켓몬의 이름을 호명하기 위해서였지만 이번에는 레드를 위해서였다. 그린은 자신이 읽는 내용을 레드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 그랬다. 레드는 그린이 읽어주는 단어와 개념을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타입, 분류, 특성, 기술, 레벨의 개념과 포켓몬이 성장함에 따라 가질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들…. 그것들은 인간이 포켓몬을 이해하기 위해 주의 깊게 관찰하고 신중하게 분류해 개념화한 내용들이었다. 도감 속 포켓몬들은 인간들이 만든 질서와 체계를 통해 하나의 표본으로 낱낱이 분석되어 있었다. 레드는 포켓몬이 조밀하게 해체되어 학문적으로 전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린은 이 책의 내용을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단지 개념만 알고 있는 게 좋을 거라고 덧붙였다. 레드가 그 이유를 묻자, 그린은 아직 도감이 미완성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부분 포켓몬을 직접 잡아서 확인한 정보가 아니야.”
그린은 포켓몬을 직접 포획하는 일만이 포켓몬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포켓몬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몹시 위험하기 때문에 도감에 적힌 대부분의 내용은 연구가들이 포켓몬들과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관찰한 것들이고 그래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또 기술이 가진 위력을 수치화하기 위해선 해당 포켓몬과 직접 맞서 싸워보는 수밖엔 없는데, 강한 포켓몬일수록 그것이 힘들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린은 모든 포켓몬 박사들이 연구에 협조할 트레이너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며 자신 역시 트레이너가 될 거라고 덧붙였다. 그린은 오키도 박사의 손자니까 그에게 있어서는 할아버지의 연구를 돕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일을 하게 될 테니까.” 그린은 마치 과업처럼 그것을 이야기했다.
“트레이너가 되면 포켓몬과 함께 다니는 거지?”
레드는 자신의 방 서랍장에 얹어진 몬스터볼 모형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모형은 레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존재하던 것으로,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 레드의 아빠가 두고 간 것이 분명한 물건이었다.
그린은 도감을 넘기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혼자 다니면 죽어.”
“그렇구나.” 레드는 빠르게 수긍했다.
찬찬히 뜯어서 들여다보면, 레드와 그린을 둘러싼 세계는 절대적이고 완강한, 어떤 파괴적인 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인간과 포켓몬은 똑같이 세계를 구성하는 생명체였지만 포켓몬의 쪽이 월등하게 강력했다. 포켓몬은 자연의 힘이 육화(肉化)된 존재였다. 자연의 힘이 형태를 갖추어 인간들의 앞에 제각각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들에게 맨몸으로 달려든 인간은 찢겨죽거나, 불타죽거나, 토막 나 죽거나, 감전되어 죽거나, 독에 감염되어 죽었다. 심지어는 정신력을 모조리 소모하고 죽는 경우도 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대체 무슨 수로 이런 위험천만한 세계에서 살아남아 어른이 될 수 있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포켓몬에게 죽임을 당한 트레이너들의 사연은 지천에 널려 있었으며, 온전한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가구가 드물었다. 일부 지식인들은 그 파괴적인 힘의 근원을 찾기 위하여, 그리하여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제압해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가족과 연인과 친구들이 보다 안전하게 걷고 마시고 떠들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연구에 뛰어들었다. 포켓몬을 이해하는 일은 생존을 도모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을 연구하는 일은 위험한 야생의 세계와 문명화된 인간의 세계를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이 세계에는 죽음이 너무 가까운 일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린의 부모님도 레드의 아빠도 모두 어딘가에서 죽었다. 레드는 태어난 순간부터 아빠의 죽음에 노출되었고, 자라면서 가족의 일원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자신 역시 언젠가 훌쩍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염두하고 있었다. 트레이너가 된다는 것은 나고 자란 안전한 마을을 떠나는 일이고 긴 여행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품고 세계를 원처럼 둘러싼 그 파괴적인 힘의 근원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태초의 자연을 향하여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레드도 언젠가는 세계의 근원을 향해 걸어 나가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계를 굴리는 거대한 질서와 맞닥뜨리게 될 운명이었다.
그것은 비단 레드뿐 아니라 이 세계에 태어나 여행을 떠나게 될 운명을 타고난 모든 아이들이 어렴풋하게나마 가지고 있는 예감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린이 도감을 펼친 순간, 레드는 도감 전체를 가득 메우는 문장의 향연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공포와 그 공포로부터 맞서고자 몸부림치는 광경을 처음으로 목격한 순간이었다. 레드는 그전까지 어렴풋하고 희미하게만 느껴지던 예감이 갑자기 뚜렷한 사실로 증명된 것을 느꼈다. 레드는 그린의 두 부모와 자신의 아빠가 포켓몬에 의해 죽었음을 깨달았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포켓몬은 그것의 정체를 일부 드러내는 존재일 뿐이다. 포켓몬은 그것의 발가락, 혹은 손가락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포켓몬이라는 존재를 포괄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더 거대하고 파괴적인 고리가 있었다. 그 미지의 힘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그린은 그 힘의 정체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같다.
레드는 나중에 그린으로부터 받은 그 도감을 혼자 펼쳐보았다. 그것을 꼼꼼하게 읽지는 않았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보이는 그린의 흔적들, 문장 옆에 달린 낙서만큼은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낙서들은 대체로 반박을 가하고 있었고 물음표가 난무했다. 그린은 단순히 도감을 읽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공부해 자신의 지식으로 습득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을 내제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은 과감하게 버리거나 비난을 가했다. 고작 세 살을 먹었고 이제 막 네 살을 먹으려던 참이었는데도 말이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시시한 낙서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까이서 뜯어보면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레드는 그린의 낙서를 탐독하며 그린이 어떤 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지를 느껴보려고 했다.
그린은 도감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은 것 같았다. 서로 더 가까워지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 이후에도 그린이 레드에게 그것을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레드는 그린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힘의 정체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린은 그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의 힘이 가장 강력했다. 그것이 그린을 지배했다.
그것은 그린의 부모님 때문일 것이다. 레드의 아빠는 레드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존재였기 때문에 레드에게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레드의 엄마는 레드에게 아빠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에 남겨진 빈방을 굳이 치우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레드의 아빠가 사용하던 방 안에는 트레이너가 들고 다닐 법한 캠핑 도구 몇 개와 어느 마을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낯선 경품들이 굴러다녔다. 오키도 박사에게 도감을 받은 날, 레드는 그곳에 들어가 책상 위에 놓여있던 몬스터볼 모형을 집어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몬스터볼 위에는 뽀얗게 먼지가 쌓여있었다. 아빠의 존재는 그런 것이었다. 먼지가 쌓여 누구도 돌보지 않는 방 한 칸과 같은 것. 죽음은 빈 공간의 발생이었다. 레드는 공간의 개념을 확장하여 죽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린의 경우는 달랐다. 그린의 부모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니다. 적어도 그린이 태어날 때부터 걸음마를 뗄 때까지는 함께 있었다. 그린은 자신의 부모를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함께 밥을 먹고,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갔던 아주 가까운 존재들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부모는 분명하게 존재했다가 느닷없이 그린의 삶에서 퇴장해버렸다. 그 결과 그린은 나리누나와 단둘이 하나지방에 남겨지게 되었다. 그린은 하나지방에서부터 태초마을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부모의 죽음에 따른 하나의 상황으로 이해했다. 그 상황에는 부모님과 함께했던 과거, 부모님이 사라진 현재, 그리고 앞으로 부모님 없이 살게 될 나리누나와 자신의 미래가 나란히 압축되어 있었다. 죽음은 그린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언제나 같은 모습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린의 내부로 침투해 영속성에 대한 믿음을 파괴했다. 죽음은 그린에게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물리적이고도 관념적인 구성품들이 하나의 힘 앞에서 유한하며, 그 힘으로부터 비롯된 절대적인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그랬다. 그린은 시간의 힘을 알았다.
그러니까 그린은 항상 무언가를 기다리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과거에서 현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현재에 도착한 무엇인가가 방향을 바꾸어 미래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고 기다리는 운명 말이다. 그린은 아마 그 일련의 흐름 속에서 벌어질 필연적인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일이 현재에 도착했을 때 모든 일들이 더 나아지기를, 현재의 일들이 미래에 더 발전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레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린이었다. 그러니까 레드는 매순간 발전해야만 했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그린을 실망시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5.
새 이웃의 등장과 함께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사람은 레드의 엄마였다. 그전까지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제외한 누군가와 함께 기념일을 보낼 일이 거의 없었다. 태초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과 알고 지냈지만, 파티에 초대하거나 함께 나들이를 나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아들하고만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태초마을을 떠날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정을 붙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누군가를 잃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고, 이제 가능하면 우울과 고통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과 육아에 집중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녀를 고립된 상태로 이끌었다. 그녀의 아들이 또래아이 하나 없는 태초마을에 심심함을 느끼고 있었다면 그녀는 말동무 하나 없는 자신의 고향마을에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나리누나의 등장은 여러모로 레드의 엄마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나이 차가 크지 않았다. 나리누나는 그린과 나이 차가 많이 났고, 레드의 엄마는 무척 젊은 축에 속했다. 나리누나는 고작해야 레드의 엄마의 어린 동생뻘 정도였다. 혹은 먼 친척으로 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리누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나리누나는 레드의 엄마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어쩐지 가족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태초마을에 온 첫날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한 레드의 엄마가 분명 좋은 인상으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레드의 생일날을 기점으로 자매처럼 가까워졌고, 그 뒤로 나리누나는 레드의 엄마를 자신의 언니처럼 여기게 되었다.
레드는 아침부터 일어난 엄마가 부산히 부엌과 거실을 번갈아 돌아다니며 접시를 내놓고 냄비에 불을 올리고 무엇인가를 썰기 위하여 끊임없이 도마를 두들기던 모습을 기억한다. 레드의 엄마는 바로 요리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점심에 쓸 접시를 정리하고, 음식을 간단하게 손질만 해놓은 후에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박스를 창고에서 꺼냈다. 그 안에는 벽에 부착할 장식품 몇 개와 폭죽이 들어있었다. 레드의 엄마는 마치 화려한 거리 전면에 붙은 연예인 포스터처럼 포즈를 취하고, 벽에 걸어놓는 반짝반짝한 장식품을 목에 두른 채 레드의 앞에서 박수를 쳤다. 그 때의 모습이 무척이나 젊어보였다. 나리 누나보다 고작 몇 살밖에 많아 보이지 않았다. 레드는 소파에 앉아 들뜬 엄마의 모습을 신기한 듯 구경하며 이따금씩 반응을 보였다. 좋아, 괜찮아, 예쁜 것 같아 등을 늘어놓자 레드의 엄마는 만족한 것 같았고, 곧 방을 꾸미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않아 누군가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에 장식물을 달다 말고 의자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린이 도착했던 것이다.
그린은 나리누나가 예정대로 늦은 점심 무렵에 올 거라고 말했다. 레드의 엄마는 그 전까지 음식을 준비해놓겠다고 대답하며 다정하게 그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다시 장식에 심취했다. 레드와 그린이 위층에서 도감을 읽고 있을 무렵, 그녀는 부산히 집안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준비하고 장식을 위쪽으로 달았다가 다시 아래쪽으로 끌어당기기를 반복했다. 나리누나가 도착했을 땐 모든 게 완벽했다. 나리누나를 맞이하기 위해 함께 층계를 내려왔던 레드와 그린은 갑자기 달라진 집안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상태로 흥분했다. 특히 레드는 벽에 줄줄이 매달린 포켓몬 종이 모형에 넋을 잃었다. 이런 것들이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레드의 엄마는 문간에 수줍게 서있는 나리누나를 힘껏 끌어안아주었다. 그리고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며 재빨리 현관에서 물러나 최대한 집안의 모습이 잘 보이게끔 서있었다. 나리누나는 집안 분위기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레드의 엄마를 무척 행복하게 했다. 그녀는 부모님을 잃은 이후로는 이런 기념일이나 축제에 참여하지 못 했는데, 다시금 특별한 날에만 얻을 수 있는 설렘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그러고 보면 그린의 집안사람들은 낯선 상대에게도 감정을 숨김없이 내보이고 직설적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리누나는 레드의 엄마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편이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린도 나리누나도 그 무렵에는 그런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에는 접시가 끊임없이 채워지고 빠져나갔다. 레드의 엄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조리해서 내놓은 것 같았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메뉴가 등장했다가 각자의 입으로 사라졌다. 남는 음식이 없었다.
유독 인기 있던 메뉴 하나가 기억난다. 콘치의 부드러운 지느러미를 따뜻한 물에 반쯤 끓인 뒤 찬물에 씻어낸 찜이었다. 거기에 고소하고 시원한 양념을 쳐서 씹을 때마다 감칠맛이 났는데, 식감이 꼬들꼬들해서 씹을 때마다 작게 오독오독 소리가 났다. 레드의 엄마는 그린과 레드의 접시에 지느러미를 덜어, 그것으로 구운 감자를 곁들인 야채샐러드를 싸먹게 도와주었다. 반투명한 지느러미 안으로 비치는 샐러드의 색깔은 식욕을 돋우기 충분했다. 그린이 지느러미 쌈을 먹는 것을 본 나리누나는 무척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는 잘 먹지 않았거든요.”
하나지방에서의 그린은 말수도 적었고, 또래아이들과 만나도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모르는 사람처럼 방을 서성이다가 몇 시간 동안 포켓몬 서적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때때로 이유 없이 나리누나의 등 뒤에 숨어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안전지대를 찾는 것 같았다고 나리누나가 회상하는 투로 말했다.
“이곳에 오길 잘한 것 같아요. 할아버지 연구소도 가까이 있고, 무엇보다 이웃이 생겨서요. 그린에게 친구가 없어서 무척 걱정했어요.”
레드의 엄마는 그녀의 말에 깊이 공감해주었다.
“혼자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은 힘들지. 이웃에 레드 또래의 아이가 와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이곳에 오도록 해. 얼마든지 도와줄게.”
그런 후 레드의 엄마는 그린에게도 말을 걸었다.
“레드가 보고 싶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단다.”
그린은 접시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아.” 그린 대신 레드가 대답했다.
그린이 레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레드는 기다렸다는 듯 그린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럴 거지?” 레드가 진지하게 물었다.
“응.” 그린이 대답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레드의 엄마는 나리누나에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드에게 친구가 생겨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간직해온 걱정을 털어놓았다. 레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말수가 무척 적다는 것, 누군가와 활달히 놀아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포켓몬을 찾아 풀숲에 종종 뛰어드는 것도 다 함께 놀 또래친구가 없어서인 것 같았다고 했다. 레드는 어떻게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보기에 이 마을에 계속 머무는 것은 레드를 고립시키는 일 같았다고, 마을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레드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는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만약 나리누나와 그린이 이사를 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몇 년 안에 좀 더 큰 마을이나 도시로 이사를 가리라 결심했을 것이다. 교육 시설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레드가 또래 아이들과 만날 기회가 많을 테니까.
나리누나는 그녀의 고민거리를 진지하게 들었다.
“어쩌면 레드는 원래부터 과묵한 아이인 걸지도 몰라요.”
나리누나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고 쾌활하게 말했다. 자신이 보기에 레드는 말수가 적기는 하지만 여느 아이 못지않게 활달하고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것이다. 하나지방에서 만난 그린 또래의 아이들은 레드처럼 마을 근처의 풀숲을 어슬렁거리다 어른들에게 혼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레드는 아무 문제없어요.”
그 말은 레드의 엄마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두 사람은 그 날 저녁 진중한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레드와 그린이 다시 방으로 올라간 뒤에도 식탁에 남아 차를 마시며 오래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었다. 갑작스럽게 홀로 남겨져 한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었던 두 여자는 비슷한 서로의 처지에 큰 위안을 받았다.
나리누나는 거의 10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녀가 위층에서 그린을 부르자 레드가 먼저 층계를 내려왔다. 그린은 그보다 한 박자 늦게 나타났다. 나리누나는 그린의 빈손을 보더니 그린이 책을 챙기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거 레드에게 줬어.” 그린이 대답했다.
“아끼는 책 아니었니?” 나리누나가 다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레드는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난간을 붙잡은 채 그린을 돌아보았다.
그린은 레드를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아.”
그런 후 그린은 다소 우쭐한 투로 덧붙였다.
“그런 거 집에도 많고, 필요하면 할아버지한테 또 달라고 하면 돼.”
레드는 현관에서 엄마와 함께 나리누나와 그린을 배웅했다. 두 사람이 떠나기 전에 레드는 그린에게 내일도 집에 놀라오라고 말했다. 그린은 레드가 도감을 다 외우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만나서 얼마나 외우고 있는지 알아볼 건데 아무래도 본인이 이길 것 같으니까 열심히 하는 게 좋겠다고 심각하게 충고하기도 했다. 레드는 그린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에 기꺼이 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저 애가 원하는 대로 경쟁하면서 때에 따라 쫓거나 추월하는 것이다.
“우리는 라이벌구나.”
레드가 진지하게 중얼거리자,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나랑 계속 비슷해져야해.”
그린이 말했다.

6.
그때 그린의 말은 자신을 따라잡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닮아가자는 말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행동거지나 외모부터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닮은 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보였다. 보색관계에 놓인 색깔에서 비롯된 두 사람의 이름조차 그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한동안 레드와 그린은 만났다하면 약속이나 한 듯 누가 더 뛰어나고 용감한지를 겨루었다. 도감을 펼쳐 포켓몬 이름을 외우고, 울타리가 둘러진 언덕에서부터 오르막이 있는 언덕까지 내달리고, 더 높은 나무에 올라가 경치를 보았다. 그린이 이길 때도 있었고 레드가 이길 때도 있었다. 포켓몬 지식에 관해서는 언제나 그린이 이겼다. 레드가 그린에게 이길 수 있는 것은 달리기나 나무 오르기밖에는 없었다. 의외로 그린은 도시에서 왔다면서 체력도 좋고 나무도 잘 탔다. 그린의 피부는 때때로 아픈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창백했는데, 정작 그린은 레드만큼이나 건강하고 쌩쌩한 아이였다. 레드는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부분에서조차 그린에게 이따금 뒤처지자 자못 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면 다음 판에서는 죽어라 달리거나 재치를 번뜩여 나뭇가지에 재빨리 올라타 보란 듯이 그린을 내려다보곤 했다. 그린은 레드가 자신을 이길 때마다 우습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쳐들었지만, 레드는 그 표정 뒤편에 분명 초조함과 분함이 숨겨져 있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드의 감이 맞았다. 그 다음 판이 되면 그린은 아까보다 더 재빠른 속도로, 너무 빠른 나머지 대체 이전의 판에서는 왜 그런 실력을 내지 못 했는지 의뭉스러울 정도의 속력으로 레드를 앞질렀다. 그러면 다음 판에서는 또 레드가 죽어라 달렸고, 그러다 그 다음 판에서는 그린이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태초마을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그 당시에는 경쟁이 하나의 놀이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두 사람에게 있어 경쟁은 놀이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맞서 쟁쟁한 적수가 되는 일이야말로 최고로 짜릿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레드도 그린도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성격은 아주 달랐는데 기본적으로 두 사람에게는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두 사람 다 포켓몬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을 알아가는 일에 지대한 흥미가 있었다. 여행을 떠나는 일, 트레이너가 되는 일, 배지를 따는 일, 배틀에서 이기는 일… 모든 것들이 두 사람의 흥미범주에 있었다. 트레이너가 될 운명을 자연스럽게 타고난 존재들 같았다. 언젠가부터 그것은 두 사람의 기정사실이 되었고, 특히 그린은 트레이너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이전보다 더 강렬히 사로잡혔다. 칼로스 유학을 냉큼 받아들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린은 칼로스 지방에서 무려 일 년여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레드는 훗날에도 마치 영상처럼 펼쳐지곤 하는 그 날의 풍경, 막 공항에서 태초마을로 돌아온 그린의 얼굴과 조금 자란 키, 자신을 보며 빛내던 눈을 기억한다. 그 뒤로 그린은 조금 변했다. 두 사람이 멀어졌다거나, 그린이 갑자기 레드에게 냉담해졌다는 말이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언제가 되었든 똑같았다. 하지만 레드는, 무언가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그린의 무엇인가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린의 어떤 면이 새로운 일면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기존부터 레드와는 달랐지만 너무 미약해서 미처 눈치 채지 못 한 어떤 면이 그린을 이루는 하나의 개념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그린이 정말로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너무 가깝게 와 닿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레드에게는 구체적으로 뭐라 일컬을 수 없는 초조함이 생겼다.

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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