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그리 «색깔의 역사(1)»
1.
레드가 은빛산을 내려오기로 결심한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 흐른 뒤였다.
그로부터라는 것은 그린과의 싸움 이후를 의미한다. 이전에도 둘은 걸핏하면 다투곤 했지만 그런 류의 싸움이 정말로 심각해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만남이 끝난 후 레드는 자신들의 관계가, 그 어떤 외부의 개입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로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질 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받았다. 레드는 굳이 애쓰지 않고도 그 날 자신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그린의 얼굴, 찡그린 눈가, 자신을 이해해보고자 애쓰던 눈동자,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굳게 다물린 입술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이미지들은 제각각 파편적이었지만 하나의 정보를 담고 있었는데, 바로 그린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레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한 두려움, 한없이 낯설어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상처가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레드는 어린 시절 처음으로 배틀에서 패배했을 때보다 더 큰 패닉상태가 되어 도망치듯 상록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입구에서 리자몽을 꺼내려 할 때, 뒤따라 나온 그린이 레드를 불러 세웠다.
“레드.” 그린의 목소리는 공기 빠진 풍선처럼 맥없었다.
레드는 뒤돌아보지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히듯 멈추어 섰다. 주변이 끔찍할 만큼 조용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우주의 빈 공간이 사실 알 수 없는 암흑물질로 가득 차있듯,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 투명한 물질은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고, 촉수처럼 그린을 향해 가닥가닥 뻗어나가 그의 모든 상태를 레드에게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레드는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그의 온몸은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하여 바싹 곤두서있었다. 그리고 그린의 숨소리, 작은 떨림과 동요의 기색을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깨닫게 될까 봐, 그로인해 상처받은 그린을 다시금 느끼게 될까봐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린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 했다. 레드가 뒤돌아보지 않아서 그 등을 오래 응시했던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린은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내뱉었다.
“지금 가지 마.”
레드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적당한 말을, 그린의 상처에 걸맞는 말을 찾으려 애썼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다면 그린의 표정을 바꿀 수 없었으므로, 그린과 마주볼 수도 없었다. 레드는 모자챙을 잡아 누르며 몇 걸음 앞으로 몬스터볼을 던졌다. 그린이 뒤에서 레드를 불렀던 것 같지만 빛 무리와 함께 튀어나온 리자몽의 울음소리 때문에 확실치는 않다. 레드는 자신에게 기다렸다는 듯 등을 내어주는 리자몽에 올라탄 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은빛산으로 돌아간 지난 두 달 간 단 한 번도 상록시티를 찾지 않았다.
두 달 동안 한 번도 마을을 찾지 않고 산에 은거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전에 세 달 가까이 은빛산 정상의 동굴에 머무른 적이 있긴 했지만 그 땐 심향이나 금선이 그린의 등쌀에 못 이겨 생필품을 이것저것 조달하러 왔었다. 그린은 리더로서 짐을 지킬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고, 일상의 대부분을 짐 배틀이나 운영 업무에 할애하고 있었다. 직접 레드를 찾아 은빛산으로 올라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심향과 금선, 다른 짐 트레이너를 보내 레드에게 여러 방식으로 도움을 주고는 했다. 그린은 레드가 은빛산에서 어떤 몰골로 지내고 있으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치약을 다 쓸 즈음 찾아온 심향의 배낭에는 꼭 그린이 챙겨준 몇 개의 칫솔과 치약이 들어있었고, 당근과 감자 따위가 떨어지면 짐 트레이너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식료품 가방을 들고 찾아왔다. 덕분에 그린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드와 가까이 붙어있고, 심지어는 함께 생활하고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지난 수년 간 함께 해온 소꿉친구의 버릇과 생활습관 쯤이야 보지 않아도 빤하다는 게 그린의 말버릇이었다.
도망치듯 은빛산으로 돌아온 이후, 레드는 심향과 금선 혹은 상록시티의 짐 트레이너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이곳을 찾을지, 또 그들이 자신에게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지, 그렇다면 자신은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고민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두 번째로 찾아온 큰 충격이었다. 그들의 부재는 그린이 레드의 삶에 일정 부분 관여하기를 포기했다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레드는 당장 상록시티에 내려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욕망과 그린으로부터 영원히 달아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한 달을 보냈다. 6월의 눈발은 거세지 않아서 은빛산 정상에는 눈 폭풍 대신 싸라기눈이 내렸다. 레드는 필요할 때만 눈을 녹여 물을 만들어 썼다. 식료품을 아끼기 위해 끼니를 몇 번 걸렀고, 치약도 아껴서 조금씩 사용했다. 그리고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생필품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심향이 찾아왔다.
은빛산 정상을 찾아온 손님의 기척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대체로 피카츄였다. 무료한 듯 평화롭게 동굴 어귀에 엎드려 있던 피카츄의 왼쪽 귀가 불쑥 공중으로 치솟으면, 레드는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음을 깨닫곤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날 심향의 방문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단언컨대 야부엉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레드였을 것이다. 깜짝 놀란 피카츄가 초조함과 흥분으로 물든 자신의 파트너 얼굴을 올려다보았으나, 레드는 평소와 달리 그 시선을 받아주지 못 하고 곧장 동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심향은 야부엉에서 막 내리던 참이었다. 레드가 마중을 나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심향은 그의 등장을 놀라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드의 얼굴을 보고 무엇인가 짐작한 듯싶었다. 혹은 레드가 평상시와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온 거야?”
레드는 궁금한 것부터 묻기 위해 많은 정보를 생략했다. 다행스럽게도 심향은 그의 의도를 알아들었다.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이것저것 챙겨왔어요.”
심향은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묵직한 백팩의 끈을 쥐어보였다. 레드는 도리질을 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정말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한 질문을 던지지는 못 하고 있었다. 심향이 그의 속을 꿰뚫어본 듯 덧붙였다.
“그린 선배가 보내서 온 게 아니에요.”
심향은 레드의 어깨가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선배는 요즘 무척 바빠요.”
심향은 위로보다 동정에 가까운 투로 이야기했다.
“그래서 저와 하려던 이론 실습도 미루고 있는걸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의 약속이 밀려났어요. 하지만 그린 선배가 지금 누구 하나 신경 쓸 여유가 아닌 걸 알기 때문에 모두 마음에 크게 담아두지 않아요.”
레드는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 했거나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상 무언가를 물어볼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레드는 싸라기눈을 맞으며 말없이 서있다 말고 동굴로 돌아갔다. 심향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유독 깊게 꺼지는 연약한 눈이 쌓인 대지를 푹푹 밟아가며 그 뒤를 따랐다.
동굴 상황은 심향이 염려했던 것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이부자리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피카츄의 상태도 건강해보였으며, 동굴 한쪽에는 깨끗하게 닦인 주전자와 사발이 놓여 있었다. 물이 부족해 종종 눈을 녹인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동굴은 전체적으로 방구석 폐인의 보금자리보다 성실한 소년의 캠핑장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다. 틈만 나면 ‘레드는 자신 없인 안 된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린의 말이 무색할 만큼 레드는 제대로 생활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린의 말을 줄곧 들어온 심향이 그 이상으로 걱정하고 있던 걸 수도 있었다. 심향은 입구 근처에 주저앉아 묵직한 백팩을 열어젖히고 자신이 가져온 식료품과 생필품을 풀기 시작했다.
식료품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평소 가지고 오는 양의 얼추 두 배는 돼보였고, 그 식료품들은 심향이 내려간 후엔 정상을 방문할 사람이 마땅히 존재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린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걸핏하면 자신에게 무언가를 보내곤 하던, 눈을 감아도 네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꼴인지 훤하게 그려진다고 자신하던 소꿉친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레드는 심향의 백팩이 가벼워지다 못 해 쭈글쭈글해지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심향은 레드가 멍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레드는 그 이상으로 생각을 확장하지 않고, 오히려 아무 고민도 하지 않은 채 사고를 버려두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심향이 물었다.
“뭘?”
레드가 희미하게 얼굴을 찌푸리자, 심향은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에요.”
배낭을 비운 심향은 앞주머니에서 꺼낸 포켓몬 간식과 응급처치용 열매 여분까지 살뜰하게 챙겨준 후에야 야부엉을 꺼냈다. 레드는 갑자기 다급한 사람처럼 굴었다. 심향이 야부엉 위에 올라타 공중날기를 사용하기 직전, 레드가 동굴 바깥으로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그린은?”
레드가 물었다. 질문은 힘겹게 참았기에 오히려 지나치게 짧고, 그렇기 때문에 무척이나 명확했다. 사용된 명사가 단 하나뿐이었다.
심향은 그 어느 때보다 난처한 표정으로 레드를 내려다보았다. 레드의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잠시 침묵이 있은 후, 심향이 머뭇머뭇 대꾸했다.
“…선배가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어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 심향은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미소 지은 후 공중날기하는 야부엉에 매달려 창공으로 사라졌다.
레드는 맥없이 몇 걸음 걷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싸라기눈을 맞으며 아주 오래 그곳에 서있었다.


2.
레드는 그린이 짐 리더가 되었다는 소식을 가장 마지막으로 접한 사람이다.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식통은 오히려 관동지방 곳곳에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레드가 그린의 소식을 가장 마지막으로 접한 건, 그들 중 누구도 레드의 행방을 알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레드는 지난 3년 동안 관동지방을 떠나있었다.
축하할 만한 소식을 가장 마지막에 접했다고 특별히 안타깝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레드보단 오히려 그린이 레드의 소식을 더 궁금해 했을 것이다. 관동으로 돌아온 레드가 포켓몬센터 다음으로 찾은 곳이 상록시티 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린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한 레드와의 만남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지 그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진정이 된 후에도 연락 한 통 없던 레드의 부재를 서운해 하는 기색만 언뜻 내비추었다. 그린은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버리는데 능숙한 듯 구는 일을 잘하는 편에 속했다. 3년 만에 만났음에도 그런 부분은 변하지 않았기에 그 사실은 레드에게 남모를 안도감을 주었다. 그린은 괴로움을 숨기기 위하여 자꾸만 즐거운 톤으로 이야기했다. 자신이 레드 없는 3년 간 무척이나 잘해왔음을 거듭 강조했다. 오히려 레드야말로 자신이 없어 미련하게 굴었을 거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그래도 어디서 객사한 것보단 낫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린이 장난스럽게 말하는 동안, 레드는 신중하게 그린의 빨갛고 축축한 눈가를 들여다보았다. 결국 그 시선을 의식하고 만 그린이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이제 울지 않아.” 그린이 말했다.
레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린이 레드를 보며 울음을 터뜨렸을 때, 레드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연락 한 통이나, 하다못해 메일 한 줄이라도 보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3년은 화살처럼 빠르게 그들을 가로질렀지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레드는, 그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린조차 그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린에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떠나와 있으며 어디쯤에 있는지 정도는 말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둘은 서로를 마주본 바로 그 순간 이번의 이별이 줄곧 있어왔던 많은 이별과는 달랐으며, 이번의 재회가 줄곧 겪어왔던 많은 재회와는 다른 것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린이 눈물을 보인 건 다름 아닌 그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리라.
둘은 서로를 알게 된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헤어짐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외로움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같이 있을 땐 자석처럼 붙어 다니면서도 떨어지면 그것에 납득하고 별개로 행동했다. 둘 사이에 필연적인 인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린의 할아버지도 나리누나도 레드의 엄마도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레드는 그것이야말로 그린과 자신의 특별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로가 헤어짐과 동시에 재회를 보장받는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린도 비슷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레드에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레드, 너 내가 보고 싶다고 엉엉 울어도 소용없다고! …돌아올 거니까 소용없다는 소리야!”
그린의 화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을 흘려듣고 뒤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으스대거나 허풍을 떨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린의 본성은 아니었다. 그린은 진심을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이야기 했다. 그리고 그 마음들은 반드시 상냥한 구석을 가지고 있었다.
칼로스 유학이 결정되었을 때, 그린은 레드에게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레드의 집을 찾아왔다. 새로운 언어와 이국적인 문화, 거대한 빌딩과 도시, 길거리 곳곳을 흘러 다니는 다른 인종의 군중들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며, 그린은 레드가 가보지 못 한 아득한 곳에 먼저 도달할 자신의 예고된 업적을 벌써부터 전부 겪고 온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레드는 한껏 부풀려 터져버릴 것 같은 그린의 허풍 속에서 아주 단단한 씨앗과도 같은, 어떤 작은 불안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실제 그 날 그린은 무척 흥분한 기색이었음에도 어딘지 한 구석은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는데, 레드는 그린의 길고 긴 으스댐을 드문드문 흘려들은 후에야 그 그늘의 정체가 무엇인지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칼로스 지방은 오키도 부부가 젊은 시절 머무른 신혼지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5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후 하나지방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거기서 그린을 낳았다.
그린은 자신이 너무 어렸을 때 부모님과 헤어졌기 때문에, 부모님을 떠올려도 별로 슬프지 않다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린의 부모님이 그린에게 남겨준 유일한 유품은 펜던트 형식의 목걸이로, 안에는 사진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그 안에 정말 사진이 들어있지는 않았다. 원한다면 그린은 할아버지께 부탁을 하거나, 나리누나에게 물어봄으로써 그 안에 사진을 채워 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키도 부부의 생전 사진이 가족들에게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러나 그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 목걸이를 걸고 있기는 했지만, 그 안에 사진을 채워 넣을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 한 것 같았다. 목걸이를 거는 행위도 부모님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가 아닌 어떤 관성, 이전부터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유지될 습관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린의 부모님은 그린의 삶에 최소한의 흔적을 남길 수는 있어도, 어떤 힘을 발휘하지는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린이 칼로스 지방의 유학이 결정된 순간, 가장 먼저 레드에게 달려와 털어놓은 진심이 바로 부모님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 이야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린이 들였던 허풍의 몸집은 지금까지 레드가 들어온 그 어떤 것보다 비대했다.
“우리 부모님은 말이야, 계속 떠돌아다녔대.”
조심스럽게 자신의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는 그린은 무척 낯설어 보였다. 레드는 어쩐지 묘한 기분으로 응, 하고 대꾸했다.
“그런데 칼로스 지방에선 5년이나 머물렀단 말이야. 그렇게 오래 머무른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할아버지가 그랬어.”

레드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린은 거기까지 말한 후 신중한 눈으로 레드를 마주보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레드. 평생 여행을 다니면서 멋진 곳을 잔뜩 봤을 우리 부모님이 5년 동안이나 머무른 그 칼로스 지방은 얼마나 살기 좋고 멋진 도시로 가득할까.”
그린은 자신이 칼로스 지방 중에서도 높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세워진 미르시티에 머무르게 됐으며, 부모님이 사용하던 4층 빌라 방을 그대로 얻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짧게나마 빌라에 머물렀던 나리 누나가 그곳의 기억을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빌라의 1층에는 빵집이 있고 그곳의 빵은 아주 특색 있어 명물이었다. 설탕과자 같은 바삭바삭한 껍데기 속에 촉촉한 카스테라와 크림을 채워 넣은 디저트라고 했다. ‘칼로스 시절’을 보내던 그린의 부모님은 그곳의 단골이었다.
“빵집 주인이 그대로라면 좋겠어.” 그린은 진지했다.
레드는 그게 주인이 한때 자신의 단골손님이었던 오키도 부부의 아들인 그린을 알아보고 말을 걸어, 그린에게 그가 모르는 부모의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주길 바라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명물의 맛을 재현할 사람이 여전히 그 가게를 지키고 있기를 바라고 하는 말인지는 알지 못 했지만, 그린이 원하는 대답을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거야.”
그러자 그린은 무엇인가를 무척이나 염려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별다른 대꾸 없이 입을 다물었다.
그린의 불안은 출국 당일까지 이어졌다. 레드는 그린을 배웅하기 위해 새벽부터 깨어있었는데, 사실은 깬 것이 아니라 거의 한숨도 자지 않은 것이었다. 제때 일어나지 못 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레드는 새벽녘이 어스름하게 터 오르는 지평선의 빛 무리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두트리오가 울부짖을 무렵 옷을 챙겨 입고 집밖으로 나왔다. 그린은 캐리어를 끌고 나리 누나와 함께 막 집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 그린은 레드를 보곤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출국 시간이 너무 이른 탓에 레드가 자신을 배웅할 수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뭐야, 레드! 너 깨어있었냐!” 그린은 입을 삐죽이며 기쁨을 숨기려 애썼다. “늦잠쟁이가 웬일이래. 나 혼자 좋은 곳으로 가는 게 그렇게 배 아팠나보지?”
레드는 대답 대신 그린을 마주보았고, 그린이 여전히 불안해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린은 레드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한 번 툴툴거렸다.
“안 됐지만 넌 못 간다고! 뭐, 촌구석에 박혀있는 촌뜨기 레드를 위해 이 몸이 특별히 미르시티의 명물 빵을 가지고 돌아올 수는 있어.”
그린이 자꾸만 시선을 피해서 레드는 그린의 마음을 포착할 수가 없었다.
레드가 불쑥 물었다. “너 불안해?”
그러자 그린이 고개를 획 돌리고 레드를 마주보았다. 크게 뜨인 눈에 당혹과 놀라움이 가득 차 있었다. 무어라 할 말을 찾는 듯 그린이 입을 뻐끔거리자, 레드가 한 번 더 물었다.
“뭐가 불안해?”
레드의 질문은 확실히 그린을 몰아붙인 듯했다. 그린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허둥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레드는 그린이 마음을 정리하고 할 말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렸다. 그건 레드가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린의 손이 캐리어 손잡이를 붙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시선은 다시 레드를 빗겨가 있었다. 몇 번 불안한 기색으로 레드 쪽을 흘끔거리곤 했지만 시선이 닿을 것 같으면 금세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이어졌다.
마침내 그린이 레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약에 칼로스가 너무 좋으면 어떡하지?”
그린의 목소리는 자신이 저지를 수도 있는 끔찍한 잘못을 가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부모님이 살던 곳이니까?”
레드가 반문하자, 그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5년씩이나 거기서 살고 싶어 하면 어떡해?”
레드는 그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거기 쭉 있고 싶어 하면?”
그린은 비약적인 말을 했다.
“만약에 다시 여기 돌아오고 싶지 않으면 어떡해?”
불안이 그린을 어디까지 떠밀었던 것일까? 확실한 건 그린이 부모님의 흔적을 마주하는 일 때문에 심란했던 것은 분명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린의 부모님, 레드는 알지 못 했고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그린을 구성하는 그 유일한 부분은 여전히 그린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 했을 뿐더러 고려의 대상조차 되고 있지 않았다. 그린이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기억도 못 하는 아득한 과거가 아니라 오로지 태초마을을 벗어난 이후에도 레드와 함께 공유하게 될 미래뿐이었다. 레드는 어딘지 묘한 안도감에 휩싸여 그린의 목걸이를, 이제는 흔적밖에 남지 않은 그 미약한 세력의 영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린 못지않게 자신 역시 불안해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럴 일은 없어.”
레드가 힘주어 말했다. 그것은 사실상 레드 자신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그린이 레드를 바라보자, 레드는 그 시선을 받아치며 또박또박 다시 읊었다.
“거기는 좋은 곳이겠지만 넌 혼자잖아.”
레드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풀어보자면, 오키도 부부는 그 완벽한 장소에서 서로 붙어있기까지 했기 때문에 5년이란 일상에 부족함을 찾을 수 없었겠지만, 그린은 홀로 그곳에 갈 몸이므로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되는 간절한 순간이 찾아오면 태초마을로 돌아올 수밖엔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레드는 이 부분에 언제나 서툴렀다), 그린은 알아들었음이 분명했다(이것은 그린이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린의 눈동자가 일순 안정감을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그린은 다시 시선을 피했지만, 이번에는 불안해서가 아니었다. 다음 순간 레드를 향한 그린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허풍으로 으스대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보자 레드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뭐야, 레드. 그렇게 자신하기는. 이 촌구석에 비하면 칼로스는 완전 천국일 텐데.”
그린이 입을 삐쭉였다. 레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린도 참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나리 누나가 현관문을 잠그고 레드의 등 뒤에서 그린을 부를 때까지, 둘은 마주보고 서서 서로의 불안이 맥도 추리지 못 하고 사라진 것을 웃음으로 축복하였다. 마침내 그린은 한손으로는 캐리어 손잡이를 힘주어 움켜쥐고, 나머지 한손으로는 나리 누나의 손을 움켜쥔 채 연구소로 이어지는 평지의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지면높이에 반 토막 나기 전에 뒤돌아서서 나리누나의 손을 놓고 레드를 향해 흔들었다.
“레드, 너 내가 보고 싶다고 엉엉 울어도 소용없다고! …돌아올 거니까 소용없다는 소리야!”
레드는 그린이 팔 흔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작게 손을 흔들며 그에 응했다. 그린은 그것에 만족했고, 그 뒤로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날, 그린이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가던 그 때, 그 애가 자꾸만 멀어지던 그 순간에, 레드는 확신했다. 그린은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와 자신과 재회할 것이라고. 그 확신은 시야에서 그린이 점점 작아질수록 더 단단해져만 갔다. 서로에게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서로의 안에는 ‘우리’를 지탱할 보이지 않는 힘이 발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드는 그러한 확신이 한계까지 단단해져 마침내 껍질을 얻을 수 있도록,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린이 연구소 앞에 세워진 못 보던 차량에 짐을 싣고 도로를 따라 사라지는 모습을 아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구구가 울고, 맑은 햇살이 레드의 밝은 갈색머리카락을 눈부시게 만들 때까지.
그 뒤로는 레드도 그린도 서로가 떨어지는 일에 대하여 더 이상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린의 칼로스 유학은 두 사람이 겪어야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불안이었다.
칼로스에 머무는 1년간, 그린은 잊지 않고 레드에게 메일을 보냈다. 대체로 이틀 간격이었지만 때때로 매일같이 메일박스를 채우기도 했다. 이따금 몇 시간 간격으로 세 통을 연달아 보낸 적도 있었다. 메일을 통해 묘사되는 칼로스는 그린의 실제 경험과 특유의 풍부한 감성으로 인해 더욱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이미지화되어있었다. 그러다보니 메일을 읽어도 이것이 그린의 허풍인지, 아니면 정말 칼로스에서 있던 이국적이고 마법 같은 일인지를 제대로 판별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레드는 그린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애썼고, 그린의 우쭐대는 목소리를 머릿속에 재생한 채 메일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그렇게 하면 신기하게도 그린이 허풍 끝에 내뱉고야 마는 상냥한 진심이 어느 단락에 숨어있는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린의 진심은 대체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레드 너도 왔더라면 좋았을 걸.
그린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에도 떨어져 지낼 일은 종종 생겨났지만, 열 살의 레드가 챔피언 자리를 내려와 홀연히 행방을 감추기 전까지는 둘의 ‘칼로스 시절’이야말로 서로의 가장 오래된 공백기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칼로스 시절’에는 매일같이 주고받은 메일과 안부전화가 있었으므로, 따지자면 그것은 공백기조차 아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열 살의 레드가 연락도 없이, 그 어떤 흔적도 남기거나 남길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사라져버린 지난 3년이야말로 그린이 겪어야했던 가장 최초의 공백기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레드는 자신을 보자마자 눈물을 보인 그린의 표정을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이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일이었음을, 자신 역시 그린과 너무 오래 떨어져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3.
그린이 태초마을에 살게 된 것은 레드가 세 살 때, 그러니까 그린 역시 세 살 때의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다음 날이 생일이었던 레드에게 그린의 존재는 어쩐지 자신의 생일선물, 혹은 개연성 있게 맞이한 좋은 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태초마을은 가구 수가 적고 집끼리 드문드문 떨어진 산지벽촌이었다. 개척되지 않은 숲과 대지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고, 수로의 물은 무척이나 깨끗해서 수면이 얕은 곳에 앉아있으면 잉어킹이나 콘치, 별가사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때때로 바위 근처에 야돈이 나와 앉아있기도 했다. 숲에는 구구와 꼬렛, 캐터피가 번성했는데, 먹이사슬의 최하층인 야생포켓몬들의 개체수가 많다는 사실은 곧 먹이사슬의 균형이 잘 잡혀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어린 레드가 풀숲을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난 어른이 반드시 그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어린 레드는 구구와 꼬렛, 캐터피보다도 약한 존재였다.
레드는 숲이나 물속에 포켓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정체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대신 태초마을에는 이 풍요로운 환경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오키도 박사의 포켓몬 연구소가 있었다. 태초마을의 실거주자들 대다수는 이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과 그 직원들이었다. 이 환경은 레드에게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태초마을에는 레드 또래의 아이가 드물었고, 사실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포켓몬을 만나볼 기회도 마땅치 않고, 마음을 부딪칠 상대도 없었던 레드는 연구소 직원으로부터 포켓몬 도감을 얻은 후 거기에 빠르게 매료되었다. 레드는 아침이 되면 숲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울음소리들의 주인이 궁금했다. 수면 아래로 보이는 우아한 지느러미의 주인도 궁금했고, 수로의 바위 위에 엎어져 있는 향기 나는 꼬리의 주인도 궁금했다. 이따금 비가 세차게 퍼붓는 밤, 수로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아주 무시무시한 울음소리의 주인도 궁금했다. 그 시절, 레드를 둘러싼 세상은 익명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레드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짚어가며 이름을 읽고, 그 아름다움의 정체를 이해하여 자신의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으로부터 재미와 기쁨을 찾았다. 얼마 가지 않아 레드는 도감에 기록된 포켓몬 이름들을 줄줄 읊고 다니게 되었는데, 이를 알게 된 오키도 박사가 하루는 레드를 불러 세운 후 정수리를 힘차게 눌러 좌우로 쓱쓱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너는 포켓몬에 소질이 있구나.”
그런 뒤 오키도 박사는 세 살 먹은 레드에게 보다 두꺼운 도감 그림책을 선물해주었다.
그러나 오키도 박사가 한 달 뒤 태초마을에 데리고 온 것은 두꺼운 도감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좋은 것이었다. 그 존재는 여태까지 마주한 그 모든 것보다 압도적이어서 레드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바로 동갑내기 남자아이의 등장이었다.
그린의 가정사를 아무도 대놓고 떠들지는 않았지만, 다들 어렴풋이 그린의 부모가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키도 박사의 가장 가까운 연구원들만이 자세한 정황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이 또한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든 그린은 오키도 박사의 거처, 그러니까 레드의 바로 옆집으로 그의 누나 남나리와 함께 이사를 왔고, 레드의 이웃사촌이 되었다. 레드는 그것마저도 일종의 정해진 수순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린과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나리 누나가 인사를 하기 위하여 문을 두드렸을 때, 레드의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리 누나는 얇은 재질의 녹색 원피스를 입고, 챙이 우아한 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전까지 그런 차림의 사람을 태초마을에서 본 적이 있던가? 그녀는 정말 외부에서 막 도착한 사람으로 보였고, 실제 그랬다. 그녀는 이방인이었고 그렇기에 완벽히 매력적이었다. 그린은 바로 그 나리 누나의 등 뒤에, 그곳이 아니고선 자신을 숨길 마땅한 곳이 없다는 것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다. 레드는 현관에 서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발견하곤 엄마의 등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레드의 두 눈은 호기심과 충격으로 크게 뜨여있었고, 그 애가 순순히 자신처럼 등 뒤에서 걸어 나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결코 시선을 돌리지 않을 것처럼 결연해보였다. 레드의 관심을 눈치 챈 나리 누나가 얘, 그린, 하고 등 뒤에 선 자신의 동생을 불렀다. 그러자 그린이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등 뒤에서 빠져나왔다.
둘은 거울처럼 마주보고 서서 탐색적인 시선으로 서로를 샅샅이 훑어댔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하여 세계의 부분들을 유심히 관찰할 기회를 갖지 못 한 것이고, 그 의도적인 배척 덕에 억눌러 온 관찰의 욕망을 모조리 쏟아 부어 눈앞의 상대를 면밀히 인식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시선을 먼저 돌린 쪽은 그린이었다. 레드와 달리 그린의 눈빛은 그렇게 반짝반짝하지도, 흥분으로 가득 차있지도 않았다. 그 애는 피로해보이고 어딘지 지쳐있었다. 레드는 나중에 저 아이가 자신보다 더 수다쟁이가 되어 한껏 허풍을 떨고, 자신의 이것저것을 참견하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그린은 때때로 레드보다 더 과묵하게 굴고는 했다. 훗날의 그린이 “사실, 그 때는 잘 기억 안 나.”라고 얼버무리곤 하는, 그린의 가장 조용한 시기가 바로 이 때였다.
레드의 엄마는 나리 누나와 그린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나리 누나는 그것에 아주 기쁘게 응했다. 저녁에 나타난 나리 누나는 낮에 보았을 때와 다른 옷을 입고 등장했다. 반면 그린은 낮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레드의 엄마는 꼬리 찜에 샐러드를 곁들어 내놓았고, 바게트를 썰어 감자수프와 함께 대접했다. 나리 누나는 음식이 아주 맛있다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레드의 엄마는 누군가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오랜만이라 걱정했는데, 입맛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이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동안, 그린은 나리 누나의 옆에 앉아 감자수프를 조금씩 떠먹고 있었다. 레드는 꼬리 찜을 포크로 눌러 뭉갠 후, 입으로 조금씩 떠 넣으며 그린이 먹는 것을 구경했다. 그린은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고개를 들어 레드를 흘끔거렸지만, 이내 수프로 얼굴을 처박곤 조금씩 양을 줄여나갔다. 결국 저녁을 먼저 비운 레드가 의자에서 내려와 그린에게 다가갔다. 그린은 스푼을 내려놓곤 레드를 바라보았다.
“내 방에 갈래?” 레드가 물었다.
“다 못 먹었어.” 그린이 대답했다.
“더 먹고 싶어?”
레드가 되묻자, 그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레드는 그린의 손을 잡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린은 방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레드가 책장 근처에 쭈그리고 앉자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레드는 그린에게 게임보이를 보여줄 계획이었는데 그게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역동적인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 뒤로 다가온 그린이 책장의 두 번째 칸, 연구원과 오키도 박사가 건네준 두 개의 관동도감이 꽂힌 칸을 보며 눈을 빛내던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다.
레드는 방 한가운데에 앉아 오키도 박사에게 받은 도감 그림책을 펼쳤다. 그리고 첫 장을 펼친 후 손가락으로 포켓몬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상해씨.”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린이 다음 장을 넘기곤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상해풀.”
레드는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린은 이번에도 손가락으로 그림을 짚으며 말했다.
“이건 이상해꽃.”
그린은 레드 앞에 주저앉아 직접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음 장의 그림이 나오는 순간, 이번에는 레드가 먼저 재빨리 말했다.
“파이리.”
그린이 고개를 들어 레드를 바라보았다. 레드는 책장을 넘기곤 손가락으로 그림을 짚었다.
“리자드.”
레드는 다시 책장을 넘겼다.
“리자몽.”
바로 그 순간부터, 도감을 둘러싼 둘 사이의 기묘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린과 레드는 책장을 번갈아 넘기며 재빨리 이름을 외치곤, 누가 먼저였던 간에 시선을 주고받았다. 거의 동시에 이름을 외친 페이지도 있었다. 오답을 외치거나 머뭇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출중했고, 같은 책을 받아 분명 닳을 때까지 보고 또 봐온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오키도 박사가 그린에게도 도감 그림책을 주었음이 틀림없었다. 레드가 가진 것을 그린도 가지고 있었다. 빠짐없이 가지고 있었다.
그린 역시 동일한 것을 느꼈음이 분명했다. 흥분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그린의 얼굴은 더 이상 저녁식사 시간 내내 수프를 떠먹던 시큰둥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갈색머리의 남자아이가 누구인지 비로소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 같았다. 다시는 현관 앞에 선 레드를 응시하다 말고 먼저 시선을 돌려버릴 것 같지가 않았다.
온몸의 에너지를 끌어올려 번갈아 이름을 외치고 책장을 넘기던 둘의 승부는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당시 관동도감의 많은 부분이 비어있었기 때문에 그림책 역시 지금만 못 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두께였던 까닭이다. 아쉬운 듯 표지를 덮는 레드의 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린이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나는 여기 없는 포켓몬도 알아.”
레드는 그린이 하나지방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레드가 물었다. “뭔데?”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린은 레드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포켓몬들의 이름을 조금 우쭐한 기색으로 줄줄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리비안, 샤비, 샤로다, 뚜꾸리, 차오꿀, 염무왕…. 눈동자가 어느새 반짝반짝해져 있었고, 두 뺨은 잔뜩 들떠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쁨을 느끼는 또래아이의 얼굴을 그 때 레드는 처음으로 엿본 것이다. 그리고 그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레드는 눈앞의 소년이 앞으로 자신의 소중한 친구이자 그 이상의 무엇이 될 것임을 직감하였다. 정말이었다. 그 순간부터 그린은 줄곧 레드의 대등한 라이벌이었으니.

《이 글의 레퍼런스 목록》
- FRLG 엔딩 이후 레드의 3년 간의 잠적 (HGSS)
- 은빛산 정상에서 재등장한 레드 (HGSS)
- 미르시티의 NPC가 언급한 그린의 칼로스 유학 (XY)
외에는 전부 공식설정이 아닙니다.

201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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