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케이 «세습 (世襲)»
현대au 의사가 된 케이와 재회한 카이의 이야기

1
에리코는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있는 카이토의 모습을 오랫동안 잊지 못 했다. 기억 속의 카이토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헐렁한 나시를 걸쳐 입은 카이토의 왼팔과 오른팔이 뜨거운 여름 햇발 아래에서 번갈아 타 까무잡잡했다. 손에는 잠자리채를 들고 있었다. 카이토는 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당시의 에리코는, “카이 오빠,”하고 그를 부르다 말고 멈추어 선다. 기억은 이때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에리코의 죄책감 때문이다. 에리코가 구체적으로 어떤 순간에 카이토에게 그 뒤의 말을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순간이었든, 중요한 것은 에리코가 반드시 그에게, “오늘은… 케이 오빠가 아마 나오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순간을 곱씹을 때마다 카이토가 고개를 돌리고 “그래, 어제 전화 받았어.”라고 중얼거린 것, 그리고 연이어 고개를 쳐들고 눈물을 삼키던 것을 상기했고, 그 눈물이 흘러내리던 뺨과 비극적인 상황에 무색하게도 빽빽 울어대던 매미소리의 잔상을, 카이토의 울음소리를 추월한 여름의 순환적 요소들을 필연적으로 떠올렸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때를 골라야만 한다면, 이렇게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2
나가이 케이는 시계를 보며 사망시간을 읊었다.
“2018년 7월 2일 오후 5시 21분.”
방금 사망한 환자의 몸뚱이를 붙잡고 남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거짓말입니다. 그는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케이는 심전도 모니터에 떠오른 한 줄의 녹색 선을 응시하는 것으로 그 말에 대처했다. 사망소식을 전달하는 목소리는 인간보다 기계 쪽이 더 요란하다. 심정지를 의미하는 삐-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우며 남자의 흐느낌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죽게 되는데, 죽음의 마지막 과정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가장 먼저 벌어지는 일은 왼쪽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근육질의 순환 기관이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 결과 성인 기준 약 팔만 km에 달하는 구불구불한 혈관을 달리던 혈액이 일순 정지되고,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던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서 세포들이 죽기 시작한다. 뇌 역시 이 때 사망한다. 죽음은 심장이 기능을 상실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 삶을 압도하거나 후퇴하며 온다.
나가이 케이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읊고 흰 가운을 입은 순간부터 삶이 죽음과의 레이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로지 심장이 기능할 때까지 이어지는 과정에 불과하며, 죽음은 어느 날 느닷없이 이를 추월해 산 자를 죽은 자로 돌려놓는다. 병원은 시각적으로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거대한 장례식장이다. 의사들은 잘 정돈된 시스템처럼 복도를 흘러 다니며 곳곳에서 누군가의 사형선고를 읊었다. 그것이 사람을 살리거나 살리는데 실패한 사람들의 업무였다. 달리고 있던 생의 등을 떠밀어 가까스로 죽음으로부터 추월하게끔 도와주거나, 혹은 방금 막 추월당했다고 선고하는 것. 나가이 케이는 마치 달리기의 중계방송대본을 읊듯이 그 사실을 읊었다. 2018년 7월 2일 오후 5시 12분. 그 이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환자의 시신으로써 육화(肉化)되어 나타난 죽음의 진부한 형태를 내려다보는 것뿐이었다. 가족들의 비탄과 통곡소리는 개인의 불행이며, 그가 해줄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었다. 환자 가족과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도 병원 시스템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틀이다.
케이가 가운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병실을 나왔을 때, 등 뒤에서 남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 만요! 잠시 만요, 의사 선생님. 케이는 그대로 뒤를 돌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환자의 침대 봉을 붙잡은 채 반쯤 고꾸라져 있었다. 그의 얼굴이 눈물과 고통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케이는 눈을 내리깔고 속으로 남자와 자신 간의 거리를 셌다. 케이와 남자는 일곱 발자국 정도 떨어져있었다.
선생님, 정말로, 죽은 겁니까? 라고 남자는 물었다. 선생님, 드라마에서 보면, 전기충격으로 이미 멈춘 심장을 어떻게 살리던데, 우리 어머니는 그게 안 됩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죽은 겁니까? 봉을 잡은 채 무너져 내린 남자의 나머지 한 손이 필사적으로 바닥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나가이 케이는 그의 오른손이 붙잡을 수 있는 다른 봉을 자신의 어떤 말로부터 찾고 있음을 알았다.
케이가 대답했다. “네, 사망하셨습니다.”
케이는 그를 지탱할 그 어떤 봉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남자가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므로 케이는 그를 버려둔 채 재빨리 복도를 벗어났다. 링겔대를 끌고 천천히 복도를 걷던 환자들이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기는 하였으나, 곧 익숙한 듯 가던 길을 마저 걸어 나갔다. 케이를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간호조무사 한 명만이 케이의 얼굴을 무감하게 훑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3
케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발생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매미가 빈틈없이 울고 그림자가 울창해지는 계절의 어느 날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거실에 앉아있다 말고 그를 불러 세웠다. 케이, 휴대폰 줘봐. 그 명령조에서 부정적 징후를 읽어낸 케이는 어머니에게 휴대폰을 내밀던 순간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을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케이는 앞으로의 일들을 알 수는 없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신이 가능하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카이토하고 놀면 못 쓴다.”라고 그의 어머니가 말했을 때, 케이는 “왜?”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해.” 케이가 요구하자,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카이토는 범죄자의 자식이야.” 그런 후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 날 케이는 어머니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어머니는 케이의 휴대폰에서 카이토의 번호를 지웠다.
케이는 방으로 돌아온 후에 휴대폰을 책상 위에 뒤집어놓고 오랫동안 문제집을 풀었다. 해가 지고 그림자가 식별되지 않는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까지 수학 문제를 풀고, 빨간 색연필로 채점을 했다. 한 개를 제외한 모든 문제가 정답이었다. 단 한 개의 오답을 내려다보면서, 케이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속으로 읊어보았다. 카이는 알고 있었을 거야. 케이는 자신이 카이토를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달아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를 모두 맞췄더라면 카이토가 생각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답이 발생했으므로 케이는 카이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케이는 자신이 카이토를 생각했기 때문에 오답이 나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속수무책으로. 케이는 문제집을 덮었다.
창밖은 음지와 양지의 구분이 사라진 어둠의 세계였다. 그 어둠은 케이에게 일종의 계시감을 안겨주었다. 무엇을 느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이었다. 이를테면 배신감이나 분노, 괴로움과 슬픔 같은 것들. 그것들은 어둠, 그 깊은 것을 닮아있었고, 형체가 없는 대신 날카로웠기 때문에 케이의 가장 연약한 지점을 꿰뚫어버릴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케이는 자신이 곧 끔찍할 만큼 슬프거나 괴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둠이 깊어지는 동안 케이는 미동도 없이 의자에 앉아 오지도 않을 심판의 시간을 기다렸다.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 상태로 한 시간이 훌쩍 지났을 즈음이었다. 케이는 스탠드를 켜고 시계를 확인한 후에야 자신이 아무 성과도 내지 못 하고 한 시간을 무용하게 흘려보냈음을 알았다. 마당의 나뭇가지가 세찬 바람에 흔들리며 케이의 이층 창문을 툭 툭 두드렸다. 케이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 한 시간 동안 무엇을 곱씹었냐고 묻는다면, 케이는 오답을 곱씹고 있었노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자신의 오답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공식을 써넣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상상 속의 케이는 반드시 오답을 극복한다. 죽 그어진 빨간 빗금에 두 변을 더해 삼각형을 만드는 장면은 어딘지 강박적인 부분이 있었다. 빗금은 동그라미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삼각형으로 수복된다. 한 번 틀렸다고 판별 받은 것은 올바르게 고쳐져도 흔적이 남는다는 이야기였다. 케이는 어머니의 색연필이 카이토의 존재 위로 커다란 빗금을 그었음을 깨달았다. 카이토의 번호가 잘못된 답안을 지우듯 그렇게 삭제되었다. 오늘 케이는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숙제처럼 어머니에게 건넸다가 막 돌려받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캄캄한 방 안에 앉아 보낸 이 한 시간가량의 공백은 오답을 수복하기 위해 정답을 골몰한 과정이 된다. 케이는 어머니가 그어놓은 빗금을 삼각형으로 만들기 위하여, 올바른 답을 찾았다는 확신을 위하여 카이토와 완전히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케이는 카이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4
쥰페이는 탕비실에 들어오는 케이를 한 박자 느리게 알아차렸다. 그는 잘못된 일을 하다 발각된 사람 특유의 몸짓을 숨기지 못 하고 화들짝 놀랐다.
“깜짝이야. 나가이, 인기척 좀 내라….”
케이는 무관심한 얼굴로 인스턴트 커피봉투를 뜯었다. 쥰페이의 앞에는 물이 담긴 종이컵과 빈 주사기, 그리고 액상 약을 보관하는 플라스틱 약통 몇 개가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쥰페이는 주사기를 통해 약을 나누어 담고 빈 부분에 물을 타고 있었을 것이다. 약의 용량을 늘이기 위한 불법행위였다. 양성종양 수술을 받은 환자들에게 투입되는 사후 관리용 의약품은 시중가가 몹시 비쌌다. 병원 내부의 운영과 유지비용 절감을 위해 물밑에서 진행되는 범법행위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양성종양 사후관리 약품에 물을 타 양을 조금씩 늘리는 것도 이에 속했다. 대학병원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니. 처음 쥰페이의 범법행위를 목격했을 때, 케이는 이 행위를 고발하지 않았을 때 추후 자신이 부담할 지도 모를 위험과 이를 고발했을 때 당장 자신에게 떨어질 피해를 저울질했다. 당시 케이는 인턴이었고, 병원은 두 명의 교수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케이는 사수 쥰페이가 어느 줄을 붙잡고 있는지 고려했다. 쥰페이는 병원장의 사촌에게 빌붙어 살길을 도모하는 여우같은 놈이었다. 저울이 후자로 기울어졌다. 케이는 침묵함으로써 공모에 가담했다. 그리고 방관자가 되었다.
“너도 내일 수술실 들어가던가?”
쥰페이가 슬그머니 약품을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화제를 돌렸다.
케이는 커피를 마시며 대꾸했다. “아뇨, 쉬어요.”
“그러냐.” 쥰페이는 케이의 눈치를 보며 주사기를 마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럴 거면 대체 왜 탕비실에서 저 지랄인데? 케이는 쥰페이의 허술함과 안일함이 짜증났다. 애초에 네가 잘만 숨겼으면 병원에서 이런 짓거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 했을 텐데. 물론 사수에게 이런 소리를 늘어놓을 만큼 케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케이가 말없이 커피를 홀짝이자, 쥰페이는 다시 한 번 화제를 돌렸다.
“아까 시끄럽던데?”
“아,” 케이는 종이컵에서 입을 떼어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304호 환자 사망했어요.”
많은 정보가 함축되어 있었지만 쥰페이는 일련의 소란스러움이 누구로부터 기인했는지 제대로 알아듣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드님분이 좀 극진하시긴 했지.”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케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뭐, 안 된 일이긴 하지만.”
“이번에 내가 수술 들어가는 502호 환자도 아들 한 명 있잖아, 그 왜. 극진한.”
쥰페이는 커피를 타며 중얼거렸다.
“세 달 입원했는데 종양 때문에 돈이 꽤 들었다지? 입원초기에 수술 받았는데 이번에 재수술 들어가서 비용이 장난 아닐 거야. 남편이 죽었나, 해서 아들 한 명뿐인데 그 아들 혼자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 뛰면서 병원비를 다 대고 있단다.”
“아… 그 사람이요.”
케이는 오며가며 그 아들을 멀리서 어렴풋하게나마 본 적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간호사들이 그를 두고 양아치라고 언급하던 것을 제외하면 아는 바가 없었다. 케이는 무미건조하게 의례적인 태도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안 됐네요.”
쥰페이는 커피를 후루룩 마시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제 엄마 챙기는 걸 보면 싹수는 나가이 너보다 낫다.”
“시비 걸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케이는 별로 열 받지 않은 얼굴이었다.
쥰페이가 낄낄거리며 케이의 어깨를 쳤다. “왜, 넌 네 동생 제대로 찾아가지도 않잖아.”
“바쁜데다가 에리코가 절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에요.”
“변명은.”
쥰페이는 코웃음을 치곤 한 모금 남은 커피를 털어 넣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케이의 어깨를 쳤는데, 이번엔 힘 조절이 잘못됐다. 장난이라기엔 지나치게 큰 소리가 났다. 케이는 악, 소리를 내려다 말고 입술을 다물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쥰페이를 쏘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쥰페이는 케이의 어깨를 성의 없이 몇 번 주무르다 말고 이죽거렸다.
“나중에 보자, 나가이.”
“…….”
쥰페이가 탕비실을 나간 뒤, 케이는 그가 버려두고 간 종이컵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5
그 해 여름에는 카이토만이 삭제된 것이 아니었다.
나가이 케이의 아버지는 그 해 초여름 대서특필되었다. 신문에 실린 사진 속의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경찰차로 향하고 있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뽑혔다. 기증, 장기매매, 의사, 대학병원, 외도…. 케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희미하게 기억한다. 그는 흰 가운을 입고 정갈하게 머리를 빗어 올린 단정한 남자다. 외과의였던 아버지는 환자들의 개인사와 친족교우간의 관계를 전공지식처럼 읊어대며 곧잘 웃곤 했는데, 그 얼굴이 에리코와 똑같았다. 에리코가 아버지를 닮은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정이 많고 눈물도 잦았다. 그러나 케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대체로 이중적이다. 그는 케이의 만점짜리 시험지를 보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케이를 끌어안다 말고 받은 병원전화 한 통에 표정이 돌변하는 남자였다. 가정은 갑자기 붕괴되지 않고, 영리한 아들과 딸은 지나치게 건강하고 왕성해서 일주일 단위로 1mm씩 키를 키우지만, 그를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들은 눈을 뗀 순간 갑자기 쇼크를 일으키며 죽어버릴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그가 가정보다 직장을 중시한 이유였다. 케이의 아버지는 7월에 접어든 어느 여름 장기기증을 8개월 째 기다리며 방치된 25살의 대학생을 위하여 장기매매에 손을 댔다. 그리고 몰락했다. 언론은 그에게 장기매매 의사라는 딱지를 붙였다가 떼어내곤, 곧이어 외도라는 낙인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케이조차 그 사실을 궁금해 했다. 젊은 여성 환자를 위하여 장기매매에까지 손을 댄 남의사. 그것은 모로 보나 외도 이외의 어떤 것으로 읽히기는 어려웠다. 언론의 세계에서 개인과 개인 간의 고차원적인 감정은 사랑 혹은 증오 이 두 가지로 축약되었고, 이 이분법적인 시각 속에서 케이의 아버지가 환자에게 가졌던 극단적 책임감과 직업의 숭고함은 오독되었다. 언론은 케이 아버지의 선택을 외도로 확신했다. 케이는 신문과 뉴스를 번갈아보며 아버지가 살리고자 했던 여자가 그래서, 살아남기는 했는지, 그렇다면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궁금해 했다. 가능하다면 살아남은 소감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냐고도.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케이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아버지의 외도로 축소되거나 교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버지의 선택은 오로지 아버지의 구질구질한 인간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 인간을 그렇게도 추하고 어리석게 만드는 인간성을 어느 정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사랑을 해선 안 된다거나,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케이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 아버지가 케이에게 남겨준 그의 유산을 제거해야만 한다고 강력하게 예감했다. 그리고 앞으로 누구를 만나게 되던, 혹은 이미 관계 맺고 있는 누군가들이라도, 그 유산을 건드리거나 종속하게끔 만드는 욕망을 부추기는 존재들이라면 기꺼이 지우겠노라고 결심했다. 그러니까 자신을 인간으로 만드는 모든 인간을 잘라내고야 말겠다고,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가이 케이는 결심해버렸던 것이다.
그 해 여름, 기자들은 곧잘 나가이 집안의 현관을 두들기거나 새벽 내내 전화를 걸어댔다. 한 말씀만 해주시죠. 남편 분과 평소 사이는 어땠죠. 남편 분이 이전에도 해당 환자 분을 언급한 적이 있었나요. 그 때 어떤 기분이셨죠. 어머니를 앉혀놓고 반강제에 가까운 인터뷰를 따낸 인터뷰어들은 방송국으로 돌아가 입맛에 맞는 짜깁기 기사를 내보냈고, 거리에서 케이와 에리코를 알아본 사람들은 둘의 팔을 붙잡고 힐난에 가까운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니.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니. 너희가 아버지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니. 그 때마다 케이는 에리코를 자신의 등 뒤에 숨겨놓고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속으로 그 질문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다만 아버지를 증오할 필요성에 대해 거듭 고민했다. 한 번쯤은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죽여 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정말 죽이지는 못 했다. 상상 속 아버지는 증오하기에는 너무 모자라고 동정하기에는 무척 추한 사람이다. 케이는 아버지를 증오하기 시작하면 인간이 될까봐 두려웠다. 그래서 증오하지 않았다.

6
오전 1시 12분 무렵 수술복을 입은 의사 한 명이 피로한 얼굴로 병원 복도를 가로질렀다. 낯빛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두 손은 찬물로 박박 씻어내 뻣뻣했다.
케이는 가운을 벗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갑작스럽게 교대를 부탁하여 미안하다고, 나이트 쉬프트 담당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케이는 그녀의 낯빛을 살피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당직실 가서 좀 쉬세요. 그녀는 수술 도중 코피를 쏟고 허겁지겁 밖으로 나온 참이었던 것이다.
케이는 팔뚝까지 세정제로 박박 씻어내고 수술실로 들어섰다. 장장 3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서있던 쇼우-병원장 사촌 그놈-와 쥰페이, 그리고 두 명의 간호사들은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고개조차 들지 않고 하던 일을 기계적으로 계속했다. 케이는 원래부터 이 수술실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미끄러지듯 들어와 일에 합류했다. 쇼우는 수술담당의고, 쥰페이와 케이는 보조의사였다. 케이를 제외한 그곳의 네 사람은 체력적으로 몹시 버거운 상태에 들어서 있었다. 침묵 속에서 석션기가 돌아가는 소리, 매스와 매스가 부딪히는 소리, 간간히 쇼우가 매스 종류를 읊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케이는 쇼우가 절개를 앞두고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드는 것을 목격했다. 선생님, 하고 쥰페이가 눈치를 주면 쇼우는 그제야 눈을 치켜뜨며 애꿎은 천장을 노려보았다. 위험한데. 케이는 불길함을 느꼈다. 차라리 절개는 쥰이나 내가 하는 편이….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 만큼 케이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단지 보조를 맞추며 이따금 쇼우를, 아니 보다 자주 쇼우를 흘끔거릴 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케이가 수술에 합류한지 12분이 지났을 때, 갑자기 심전도 모니터에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규칙적으로 뛰던 심장이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극심한 변화폭을 보였다. 석션, 석션부터. 석션부터. 쇼우가 중얼거리듯 명령했다. 잠이 다 깬 얼굴이었다. 케이는 쇼우가 환자의 복부에서 천천히 가위를 빼내는 것을 보았다. 장갑이 손가락 두 마디 아래부터 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쥰페이가 심전도 모니터와 환자의 상태를 번갈아 바라보며 환자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보고했다. 환자의 복부 안쪽에서부터 발생한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석션기를 들이대며 혈액 팩을 매달았지만 심전도 모니터의 오싹한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다. 환자의 심박 수가 급박하게 추락했다. 환자의 다리가 작게 경련을 일으켰다. 케이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다 말고 절개부위로부터 솟구쳐 오른 혈액을 정통으로 뒤집어썼다. 쥰페이가 작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드레싱 카트가 쥰페이에게 밀려 뒤쪽으로 굴러가다 말고 벽에 부딪혔다. 쇼우가 쥰페이에게 고함을 쳤다. 케이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이를 악물며 환자에게 매달렸다. 간호사 한 명이 혈액 팩을 수송하기 위해 수술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나머지 한 명은 쥰페이가 밀친 드레싱 카트를 끌어와 쇼우의 지시를 기다렸다. 쇼우는 지시 없이 모스키토(*Mosquito Frcep : 혈관을 잡아 지혈하는 홀딩 도구)를 들고 환자에게 달려들었다. 수술실 바깥에서 간호사가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혈액 RH+B형, 혈액 RH+B형 세 팩 준비해주세요, 혈액 추가청구 바랍니다. RH+B형 혈액 팩 세 팩 준비해주세요! 간호사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다 말고 뚝 끊어졌다. 그러자 석션기가 맹렬하게 분출하여 고이기 시작한 혈액을 빨아들이며 돌아가는 소리만이 남았다. 그들은 잠시 침묵하며 취하던 모션 그대로 굳어있었다. 어떤 싸늘한 공기가 순간적으로 수술실 내부를 꿰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그들은 심전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 떠오른 녹색의 평행선을 확인했다. 그제야 그곳에 있던 모두가 불현 듯 아까부터 귓가에 어떤 소리가 지속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죽음을 선고하는 소리였다. 삐-소리가 방의 모든 소리를 압도했다.
케이는 숨을 몰아쉬며 환자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혈액을 피가 비교적 덜 튀긴 장갑의 왼 손등으로 훔쳐냈다. 쥰페이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간호사는 매스를 내려놓았다. 케이를 포함한 세 명의 의료인이 쇼우를 바라보았다. 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2018년,”이라고 쇼우가 말했다. “2018년 7월 3일 오전 1시 38분.”

7
오빠는 쓰레기야. 에리코가 처음으로 그 말을 내뱉었을 때, 케이는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오후 4시 무렵의 방은 밝고 깨끗한 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마당의 나무 그림자가 케이의 방을 반쯤 둘러싸고 있었고, 케이는 스탠드를 켜지 않은 채 어제 풀다 만 수학문제집을 팔락팔락 넘기고 있었다. 케이는 긴팔 셔츠차림이었다. 에리코는 케이의 방문 앞에 서서 케이를 매서운 기세로 쏘아보았다. 케이는 에리코가 잠자리채를 들고 나갔다가 도로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챘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에리코가 카이토와 만나고 돌아왔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빠는 카이 오빠를 배신했어.” 에리코가 주먹을 쥐었다. “카이 오빠가 나무그늘에 앉아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에리코의 눈가는 이미 눈물이 한 번 고였다 빠져나간 흔적 때문에 새빨갰다.
“오빠는 오지 않았어.”
“카이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게 아니야.” 케이는 문제집을 넘기면서 대꾸했다.
“그래, 전화했다며?” 에리코가 씩씩거렸다. “그런 식으로 카이 오빠를 취급해놓고 번호는 기억하고 있다는 거, 치사해.”
케이는 빨간 색연필을 들고 문제집을 채점하기 시작했다.
“어찌되었든 카이는 내가 오늘 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만 기다리고 있었어.”
“알고 있었으니까 기다린 게 아니야.”
“기다리고 있었어!” 에리코가 소리를 질렀다. “알고 있었지만 기다리고 있었어!”
문제집을 채점하던 손이 멈추었다. 케이는 시선을 들어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에리코는 쥐고 있던 주먹을 놓고 헐떡이며 눈물을 닦아냈다. 에리코는 다시 울고 있었다.
“오빠는… 오빠는 몰라.” 에리코가 훌쩍였다. “알고 있어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때가 있어.”
“에리코.” 케이가 의자에서 내려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의무적인 몸짓처럼 보였다.
“진정하고 숨 쉬어. 흥분하면 몸에 무리가 와.”
“치워.” 에리코가 역겹다는 듯 뒷걸음질 쳐 케이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오빠가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 이 위선자. 쓰레기.”
“화내지마, 에리코. 몸에 좋지 않아.”
“오빠는 지금도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잖아!”
에리코는 분통을 터뜨렸다.
“오빠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이고, 세상에서 제일 큰 벌을 받을 거야. 오빠는 오빠가 배신한 사람들 마음 그거 다 돌려받게 될 거야. 카이 오빠 얼굴을 오빠가 봤어야 했는데. 카이 오빠 표정을 오빠가 봤어야 했는데. 이 못된 놈, 그 얼굴을 봤어도 아무렇지 않게 굴었겠지? 오빤 쓰레기니까.”
“에리코.”
“오빠는 카이 오빠를 죽인 거야. 카이 오빠가 언젠가 죽거나 다치면, 그건 전부 오빠 때문이야. 오빠는 한 번 카이 오빠를 죽인 거야. 카이 오빠를 버려놓고 갔으니까 그 책임은 전부 오빠 거야.”
거기까지 말하던 에리코가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케이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에리코의 낯빛이 창백했다. 에리코의 숨소리는 시큰거림에 가까워져 있었다.
케이는 에리코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에리코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케이의 손을 밀어냈다. 케이는 에리코의 의사를 무시했다. 그는 강압적으로 에리코의 이마에 다시 손을 얹었다. 에리코가 케이의 품에서 발버둥 쳤다.
“죽어버려,” 에리코가 헐떡이며 저주를 퍼부었다. “저리 꺼져버려.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
“에리코, 진정하라니까!”
케이가 에리코의 어깨를 붙들었다. 에리코는 케이의 팔을 붙잡아 있는 힘껏 밀었다. 케이는 제대로 밀리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가 되돌아왔다. 에리코와 케이 간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에리코는 케이의 손목을 붙잡아 반대쪽으로 밀어내려 애쓰고, 케이는 그것을 막기 위해 애썼다. 케이는 에리코의 분노에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는 단지 에리코가 진정하지 않으면 곤란한 일이 생길 거라고 염려하는 것 같았다. 에리코는 자신의 몸에 손대는 케이보다 자신의 마음에 손대지 않는 케이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케이를 두들겨 패고 싶었다. 케이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서 그가 사과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카이가 슬퍼할 것을 알면서도, “오늘은 케이 오빠가 아마 나오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야만 했던 자신의 괴로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에리코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리코의 몸은 물먹은 종이처럼 쓸모없고 약했다. 그녀의 주먹은 누군가를 물리적으로 상처 입힐 만큼 위협적이지 못 했다. 그 사실이 에리코는 몹시도 분했다.
있는 힘껏 케이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에리코의 손아귀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그 바람에 뒤로 밀리지 않으려 애쓰던 케이와 밀기 위해 애쓰던 에리코 간의 균형이 무너졌다. 에리코의 손이 케이의 와이셔츠 손목 단추에 걸려 앞으로 미끄러지면서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팔이 훤히 드러나자마자 케이는 에리코를 밀쳐내고 황급히 셔츠소매를 내렸다. 그 짧은 순간, 에리코는 케이의 팔에 난 작은 생채기와 멍 자국을 보았다. 어제는 없었던 것이다. 에리코는 오늘 나무에 기대어 있던 카이토의 종아리를 떠올렸다. 그늘 아래로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보였던 작은 생채기와 멍 자국들. 케이와 카이토는 각각 팔과 다리에 엇비슷한 상처를 달고 있었다. 둘 다 어제는 없었던 것.
“뭘 한 거야?” 에리코가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카이 오빠랑 뭘 한 거야?”
“아무 것도.” 케이는 시선을 피하며 방으로 물러났다.
“거짓말 하지 마.”
“이제 끝난 일이야.”
“어제 카이 오빠랑 만난 거지?”
“이제 돌아가.” 케이는 대답 대신 에리코를 밀어냈다.
“오빠!”
“너도 언젠간 내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알게 될 거야.”
케이는 에리코의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8
이건 명백한 의료 과실 사고였다. 간호사가 시신을 봉합하고 위에 흰 천을 덮어씌우는 동안 쇼우와 쥰페이와 케이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절개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 마취과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환자에게 쇼크가 왔으므로. 혈액의 추가청구가 늦어진 탓도 있었다. 복합적으로 여러 문제가 존재하던 수술이었다. 사방에 지뢰가 깔려 있었는데 쇼우가 그곳에 불씨를 던져 넣은 꼴이었다. 케이는 쇼우가 가위를 꺼내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피로 축축하게 젖어있던 장갑, 귀를 후벼 파던 심정지를 알리는 삐-소리. 죽지 않을 수도 있었던 환자가 죽었다. 수술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침묵을 깨고 말을 꺼낸 건 쥰페이였다.
“…아무 말도 안 하겠습니다.”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쥰페이는 뚫린 입으로 여러 번 반복했다. 아무 말도 안 하겠습니다. 선배, 저희 입 닫고 있겠습니다. 약속해요. 쥰페이의 ‘저희’에는 케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케이는 이미 그들의 공범자가 되어있었다. 원하던 원치 않던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쥰페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앵무새처럼 거듭 중얼거렸다.
“저희만 믿으세요. 나중에 병원장님이 아시더라도 외부 노출만 안 되면 넘어가주실 겁니다.”
떨리던 목소리에 차츰 안정감이 실렸다. 쥰페이가 말했다.
“솔직히 선배가 절개하다 실수한 것만 문제는 아닙니다. 아까 수술 들어가기 전에 마취과에서….”
그 때였다. 쇼우가 쥰페이에게 주먹을 날렸다. 케이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 하고 흠칫 뒤로 물러났다. 쥰페이는 바닥에 나동그라져 신음을 내뱉다 말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쇼우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왜 맞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쇼우는 주먹을 털면서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진짜….”
쇼우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내뱉었다. “선배? 저희?”
“…….”
“너 구분 확실하게 한다. 절개한 건 나고, 니네는 눈감아주고?”
쇼우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야, 수술 나 혼자 해? 니네가 옆에서 잘했어야 할 거 아냐, 이 새끼들아. 이제 와서 잘못한 건 나 혼자고 너희는 빠져서 입 닫아주겠다, 나한테 베풀어주겠다. 지금 이러는 거 아냐.”
“아닙니다.” 쥰페이가 벌벌 떨며 일어났다. 자신이 한 말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쇼우가 위협적으로 쥰페이를 노려보다 말고 케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케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니네 잘 들어. 이 수술 들어온 사람들 내가 전부 기억하고 있어.”
쇼우의 목소리는 회유와 협박을 쉴 새 없이 넘나들었다.
“이거 내가 손쓸 수 있으니까 여기서 어떻게 더 될 거란 생각 절대 하지 마. 괜히 겁먹고 떠들면 다 골로 가는 거야. 알겠어?”
“알겠습니다.” 쥰페이가 대답했다.
쇼우는 고개를 돌려 케이를 응시했다. 케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젠장.’
케이 역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쇼우 선생님, 바깥에서 환자 가족 분 기다리십니다.”
간호사가 수술실 문을 열다 말고 냉랭한 분위기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케이 앞에 서있는 쇼우와 케이의 뒤통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좀 더 기다리라고 할까요?”
“아니, 됐어. 갈게.” 쇼우가 케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갔다. 쇼우는 케이에게 명령했다.
“네가 다녀와.”
케이는 쇼우의 시선을 피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전 담당의가 아닌데요.”
“내가 지금 상황이 안 되잖아. 옷 갈아입고 가서 수술경위 설명해.”
알아서 잘 둘러대란 소리였다. 케이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어떤 말을 더 얹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는 일은 무용한 짓이다. 케이는 쇼우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케이가 우리, 혹은 저희, 라는 집단어를 쓰지 않았던 데다가 침묵하겠노라 자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케이가 그에게 내비친 것이라곤 마지못한 “알겠습니다.”뿐이었다. 쇼우는 방금 명령으로 케이를 이 일과 어떻게든 더 엮어놓겠다는 의지를 은근하게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케이는 이번에도 마지못해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쇼우가 칭찬하듯 케이의 뺨을 두들겼다.

9
오후 9시 49분, 창밖이 온통 어두컴컴한 여름의 밤.
그 때, 케이는 완전히 끝내기 위하여 카이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카이토가 받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알고 있었던 거지?”

10
케이는 대기실 복도에 앉아있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늦은 새벽이었으므로 복도에는 케이와 남자를 제외하곤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케이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대기실로 다가갈수록 남자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멀리서 본 남자는 밝은 금발이었지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본 남자는 금발이라기보다 탈색물이 빠져나간 브루넷으로 보였다. 어두컴컴한 머리뿌리가 뒤통수를 타고 자라고 있었다. 남자는 피어싱도 했다. 양아치라고 했지. 양아치지만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위해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양아치. 그게 양아치인가. 케이는 속으로 생각하다 말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머니에서 케이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한동안 침묵이 있었다. 케이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었는지를 궁금해 했다. 숨을 의식적으로 쉬지 않고선 곤란할 만큼 몸이 뜻밖의 자극에 놀라 잔뜩 움츠린 채 뻣뻣하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말문을 잃은 케이를 올려다보며, 카이토는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케이.”
한 박자를 쉰 후, 카이토가 말했다.
“…정말로 의사가 됐구나.”
케이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케이의 손이 동그랗게 말리다 말고 맥없이 늘어졌다. 케이는 카이, 하고 입을 열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옷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냄새를 카이토가 맡게 될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카이와 케이는 고작 두발자국 정도밖엔 떨어져 있지 않았다. 원한다면 카이토는 어머니의 피가 튀겼다 급하게 씻겨나간 어떤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케이가 들어갔던 수술실에서 카이토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하여 케이는 카이토의 앞에 당도한 것이다.
쥰페이는 수술실을 빠져나오다 말고 대기실 복도에 서있는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는데, 스르르 빼내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앞에 금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환자의 아들이었다. 수술이 들어갈 땐 없었는데 연락을 받고 중간에 도착하여 지금까지 대기실에 앉아있었던 모양이었다. 남자가 먼저 케이에게 말을 걸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대화 직후 케이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가 이내 숙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케이가 남자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남자는 케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케이는 시선을 피했다. 대화가 몇 번 더 오고 갔으나 케이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 말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케이가 그 뒷모습을 응시하며 서있었다. 남자는 곧 복도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쥰페이는 케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야.”
“…….”
쥰페이는 고개를 기울여 케이의 표정을 확인했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케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쥰페이를 응시했다. 표정이 무감했다.
“아뇨,” 라고 케이가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인두겁을 벗어던진다고 해도 그런 표정은 못 지을 것 같았다.

11
처음에 카이토에게는 휴대폰이 없었다. 케이는 그에게 휴대폰 번호를 물었다가 그 사실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휴대폰이 없는 사람도 있구나. 그러나 곧 잘 교육된 사람의 얼굴로 그렇구나, 라고 대답했다. 그 어투에는 나는 너의 가난을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은근한 메시지가 숨어있었다. 그러나 카이토가 가난하기 때문에 휴대폰이 없다고 단정한 자신의 판단부터가 오답이라는 걸 케이는 알지 못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이토는 이미 허공을 올려다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 필요할까? 카이토가 묻자 케이는 어정쩡하게 눈을 굴리다 말고 카이토가 보고 있는 허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둘이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데, 멀리 떨어져있으면 곤란하지 않을까. 케이가 대답했다. 카이토는 흐음, 소리를 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오기 한 달 전의 일이다.
어쨌든 휴대폰은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가깝지는 않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걸어서 20분이면 서로의 집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집과 집 사이에는 작은 신사가 지어진 산이 있었고, 그 뒤로는 숲이 펼쳐졌다. 카이토와 케이가 곧잘 그곳에서 놀았다. 10분이면 서로를 만났다. 그러니까 그 여름에는, 카이토도 케이도, 설령 당장 전해야만 하는 간절한 말이 떠오르더라도 난처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대폰에 대한 화제를 꺼낸 지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케이의 휴대폰으로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막 하교하여 옷을 갈아입고 있던 케이가 옷을 벗은 것도 입은 것도 아닌 채의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그러자 휴대폰 너머에서 웃음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누군가 케이, 하고 그를 불렀다. 케이는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 카이?
“응!”
“휴대폰이 생긴 거야?”
“아니, 하지만 내일부터 생길 거야.”
“그럼 이 번호는….”
“이건 우리 아빠 것. 잠깐 빌렸어. 케이한테 얼른 말해주고 싶어서….”
“학교에서 해도 되잖아.”
“당장 말하고 싶었어.”
카이토는 몹시 즐거운 기색이었다. 휴대폰을 뺨과 어깨에 붙이고 옷을 고쳐 입던 케이의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카이토의 기쁨이 고스란히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케이는 그 전까지 사적으로 만나는 친구와 전화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런 경험은 케이에게도 처음이었던 셈이다. 잘 됐네, 라고 케이가 대답했다.
“그럼 이제 밤에도 전화 할 수 있겠다.”
“그렇겠네.” 카이토가 대답했다.
“밤에도 언제든 케이의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휴대폰을 늘 가지고 있어야겠다.”
전화를 끊은 후, 케이는 옷을 주섬주섬 꿰입곤 휴대폰을 열어 통화목록을 확인했다. 번호는 080으로도 090으로도 시작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덟 자리인 것도 아니었다. 통화목록에 찍힌 것은 휴대폰 번호도 집 전화도 아니었다. 이상한 번호, 라고 케이는 생각했다.
다음 날 카이토는 정말로 휴대폰을 들고 학교에 왔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은 채, 케이는 카이토와 번호를 교환했다. 케이의 휴대폰 번호가 카이토의 새 휴대폰에 가장 먼저 저장되었다. 카이토는 그 사실을 무척 기뻐하였다.
“케이는?”
“음… 나는 에리코의 번호랑 부모님 번호가 있어. 아, 선생님 번호도.”
“다른 아이들은?”
“음… 얼마 전에 숙제 때문에 겐이 전화했었는데… 저장은 안 했으니까.”
케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친구를 저장한 건 카이가 처음이야.”
첫 번째에 의미를 붙이는 건 어떤 의미의 행동일까. 케이는 궁금해하면서도 처음을 고민해주었고 카이토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하필 카이토가 가져가서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여름방학에도 언제든 불러서 놀 수 있겠다. 그건 분명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12
카이토와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하루 뒤의 일이었다. 카이토는 502호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유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5층 순회 진찰을 마치고 돌아오던 케이가 그를 발견하곤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눈이 마주쳤다.
케이의 입이 벌어지다 말고 다물렸다. 카이토는 케이가 주변을 곁눈질하곤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케이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연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케이는 적어도 병원에서 자신과 아는 사이임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카이토는 시선으로 인사하곤 고개를 돌렸다. 케이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속히 케이로부터 멀어져 엘리베이터를 탔다.
병원 로비를 나설 때,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카이! 머뭇거리다 말고 황급히 내뱉은 목소리였다. 카이토는 케이를 돌아보며 멈추어 섰다. 이번에는 카이토가 먼저 주변을 곁눈질했다. 케이와 자신을 의식하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케이는 더 이상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막 에스컬레이터를 달려 내려온 참이었기에 오직 숨이 가빴을 뿐이었다. 케이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어떤 혼탁함으로 가득 차있었다. 저기, 라고 케이는 입을 열다 말고 다시 빠끔거렸다. 카이토는 케이가 어떤 감정을 정리하고 말을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저기….”
“…….”
“저기, 그러니까….”
케이는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였다가, 침을 삼키곤 고개를 들었다.
“잠깐 이야기 좀, 괜찮을까?”
카이토는 천천히 대답했다.
“응, 괜찮아.”
그런 후 덧붙였다. “언제든.”
병원 근처의 카페는 환자와 환자 가족들, 병원의 방문객들과 의사들로 붐볐다. 케이는 흰 가운에 손을 집어넣은 채, 카페 출구에 위치한 작은 기둥에 몸을 기대고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보도블록 틈새로 솟은 잡초와 작은 풀꽃이 보였다. 케이는 블록의 개수를 세고 또 셌다. 그리고 카페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시선을 들어 누가 나왔는지 확인했다. 카이토가 아니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블록을 셌다. 그것 외엔 달리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기다릴 때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카이토는 카페에서 커피 두 개를 테이크아웃 주문한 후 밖으로 나왔다. 기둥에 서있던 케이가 고개를 들다 말고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흘렸다. 케이는 기둥에서 몸을 떼어냈다.
둘은 병원 인근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햇볕은 따뜻하고 청정해서 다소 버거웠다. 산책로는 나무 그늘이 져있어서 괜찮았지만 그럼에도 조금 덥게 느껴지는, 초여름이 끝나고 한여름이 들어서기 일보직전의 날씨였다. 일주일 뒤면 더 무더워질 것이다. 여름이었다. 공원을 걷던 두 사람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카이토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여름이구나.”
케이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게.”
그런 후 둘은 침묵했다. 둘의 곁으로 반팔 운동복 차림의 한 여자가 조깅하며 지나쳤다. 이어폰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가 일순 가까워졌다가 차츰 멀어졌다.
잠시 뒤 케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어제, 놀랐어.”
케이는 카이토 대신 다른 곳을 보았다.
“그 환자가 카이의 어머니인 줄 몰랐거든….”
“아.” 카이토는 어떤 감정을 포착하기 어려운 투로 느릿하게 대답했다. “알아. 우리 엄마, 케이는 본 적 없으니까.”
“성이 똑같았는데, 왜 몰랐을까.”
“내 성은 흔하니까.” 카이토는 신경 쓰지 말라는 투였다.
“케이, 어제 설명해줘서 고마워. 나는 그런 건 잘 모르니까… 사실 설명을 들어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어. 그래도 케이가 설명해줘서 조금 편했던 것 같아. 전에 수술하고 다른 의사로부터 설명을 들었을 땐, 정말 하나도 알아듣지 못 했거든.”
케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응….”
카이토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케이는 예전부터 나에게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어서 알려주곤 했었지…. 어제 수술에 케이가 있었던 거,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나는 케이가 알려준 덕분에 엄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적어도 이유를 알 수는 있었으니까.”
“저기,” 케이가 고개를 들다 말고 입을 빠끔거렸다. “…카이는, 괜찮아?”
카이토는 케이를 바라보았다. “뭐가?”
“어머니가….” 케이는 머뭇거렸다. “돌아가셨잖아.”
바람이 불어서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무척… 안 된 일이라고 생각해.”
“…….”
카이토는 시선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옆으로 아까 조깅하던 여자가 여전히 음악소리를 단 채 지나갔다.
잠시 뒤, 카이토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해도, 이미 돌아가셨는걸.”
“…카이는, 슬프지 않아?”
케이의 물음에, 카이토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슬프지만, 어떻게 울어도 돌아오지 않아.”
그것은 슬픔을 포기했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둘은 몇 분 더 실없는 대화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어떻게 지냈으며 어떻게 지내고 있고 앞으로는 어떻게 지낼 것인지. 그런 말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둘은 과거 혹은 과거의 줄기를 건드릴 수도 있을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의식적으로 기피했다. 사실 케이가 기피하려고 노력했고, 카이토가 그것을 눈치 채고 입을 다물었던 걸지도 몰랐다. 케이는 그 날 카이토가 쥐어준 커피를 단 한 모금도 마시지 못 한 채, 오로지 갑갑한 기분으로, 바싹 타는 목마름으로 병원까지 혼자 돌아왔다. 그리고 로비에 들어섰을 땐 이미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로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13
카이토의 아버지는 싹수가 노란 놈이었다.
카이토는 싹수가 무슨 말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 했으나, 카이토의 할아버지가 곧잘 그런 말을 뱉어 아버지를 일컬을 때마다 그것이 부정적인 말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정평이었다. 큐슈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는 12가구 모두가 카이토의 아버지를 이루마 시에 사는 싹수가 노란 그놈이라고 불렀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번듯한 직업도 없는데 어디선가 느닷없이 꽤 큰돈을 벌어오는 수상한 남자였다. 카이토의 어머니는 그가 하는 일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따금 두 사람은 카이토의 방문을 닫아놓고 말싸움을 벌였다. 그 때마다 카이토는 방 안에 앉아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들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카이토는 단지 문밖의 세계가 격양되어 있다는 것, 아버지가 어머니를 겁쟁이로 취급하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불안을 토로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라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어느 날 카이토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식탁 위에는 카이토 몫의 밥과 국과 반찬이 준비되어 있었다. 밥그릇 위에 쪽지 한 장에 붙어있었다. 카이토는 쪽지를 떼어내 읽은 후 안방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어머니의 옷이 한 벌도 보이지 않았다. 카이토는 서랍과 장식장을 모조리 열어보았다.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카이토의 어머니는 쪽지 한 장을 남겨둔 채 그렇게 집을 떠났다. 카이토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나는 공모자가 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쪽지에 그렇게 썼다.
아버지는 크게 격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굴었다. 카이토에게 분풀이를 하거나 어머니로부터 무언가를 듣지는 않았냐고 캐묻거나 다그치는 일도 없었다. 그는 원래부터 카이토에게 관심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기분이 좋을 때, 그러니까 느닷없이 많은 돈을 벌어온 날이면 아버지는 카이토를 상 앞에 앉혀두고 고기만두나 비싼 생선을 구워주기도 하고, 사탕이나 과자를 사먹으라고 천 엔짜리 지폐를 몇 장씩 쥐어주기도 했다. 어머니가 제외된 카이토의 인생은 그 수상쩍은 공백을 제외하곤 별다른 문제없이 굴러갔다. 카이토는 아버지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았으므로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기에 아버지는 태연한 것이라고. 그리고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어머니가 없어지더라도, 그건 슬프겠지만 괜찮을 것이라고. 빈자리가 발생해도 문제는 없다는 것을 아버지가 카이토에게 알려주었다. 이런 빈자리쯤은 괜찮다고 알려준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알려준 건 그게 고작이었다. 카이토의 할아버지 말따마다 싹수가 노란 놈이었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1년 365일 중 320일 정도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근방 시내로 나가 빠칭코를 돌거나 낯선 이들과 술을 나누어 마셨다. 때때로는 집안을 뒹굴며 TV를 보았고, 밤에는 편의점에 나가 술과 담배를 샀다. 낮에까지만 해도 집안에 있었던 아버지가 늦게까지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카이토는 반드시 편의점으로 나갔다. 그러면 편의점 테라스에 기대어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던 아버지가 여어, 카이토, 하고 그를 불러주었다. 그럼 카이토는 아, 아버지는 역시 사라지지 않는 거지, 하고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날 때까지 이불 속에 드러누워 청각을 곤두세우다, 밤잠에 쏟아질 무렵 희미하게 들려오는 현관문 소리를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카이토가 케이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의 일로, 그전까지 카이토는 특별히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학교의 아이들은 카이토를 불쌍하게 여기거나 다소 껄끄럽게 여겼다. 한량 아버지로 인해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한 소문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카이토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문을 날랐다. 카이토는 그 모든 것을 해명하지 않았는데, 이미 사라진 어머니에 대해 무엇을 변명해주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의적이고도 타의적인 따돌림 속에 익숙해져 있을 무렵, 나가이 케이가 카이토의 인생을 방문했다. 그 때 케이는 카이토와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고, 공교롭게도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둘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카이토는 나중에, 케이가 카이토의 옆에 앉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단지 또래들과 어울리지 못 하는 자신을 신경 쓴 담임의 조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아무렴 어떤가 생각하게 됐다. 케이가 카이토와 노는 것을 지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자리로 남아 껍데기조차 유지하지 못 하고 사라져버린 어머니보다 단단한 껍데기를 가지고 자신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케이 쪽이 카이토에게 훨씬 이로웠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고,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존재를 되찾는다는 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카이토는 그 때 알게 되었다. 케이, 하고 부르면 응, 하고 케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카이, 하고 되돌려 호명해주었다. 카이토는 그 주고받음에 금방 매료되었다.
학교가 끝나면 둘은 항상 붙어서 놀았다. 케이는 아는 것이 많아 때때로 카이토의 수학숙제를 도와주기도 했다. 어려운 공식을 풀어놓고 참을성 있게 카이토에게 설명해주면, 카이토는 케이의 눈치를 보며 답을 적었다. 하지만 대체로 틀렸다. 그러나 케이가 풀죽은 표정을 지으며 역시 안 되나, 라고 중얼거릴 즈음에는 제대로 풀 수 있게 되었다. 숙제가 끝나면 그들은 햇볕 아래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마룻바닥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카이토의 용돈으로 과자나 음료수를 사먹었다. 여름이 오면 카이토의 집에서 자주 놀았다. 대체로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카이토는 냉장고에 요구르트를 얼려놓고 케이와 함께 커피 수저로 그것을 퍼먹었다. 케이가 돌아가고 나면 카이토는 집안을 치우고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면, 오늘 하루 케이가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떠들어 댔다. 카이토의 아버지는 그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건성으로, 그래그래, 그렇구나, 하고 성의 없이 대꾸해주었다. 첫 친구를 사귀어 들뜬 아들의 기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야말로 싹수가 노란 아버지였다.

14
다음 날에는 병원에 짧은 소동이 있었다. 로비에서 대기표를 뽑지 않은 남자가 한 손에 12L 플라스틱 통을, 다른 한 손에 라이터를 들고 유유히 복도를 가로질렀다. 남자는 구깃구깃한 트레이닝 복 차림이었고 표정은 딱딱하고 비장했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한 바퀴 돌다가 이내 로비로 되돌아 왔다. 대기 중인 무수한 환자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는 의료인들, 그리고 실무처리에 여념이 없는 프론트 직원들로 들어찬 로비는 남자가 들어올 때나 돌아왔을 때나 똑같이 혼잡했다. 아무도 남자에게 집중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기대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남자는 그 앞에서 12L 플라스틱 통 뚜껑을 열고 머리 위로 뒤집어엎었다. 바닥을 타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쏟아졌다. 비명소리와 함께 시선이 집중되었다.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군가 기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얼어붙었다. 남자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다 말고 라이터를 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넋이 나가있었다. 이봐! 라고 남자가 고함을 내질렀다. 잘들 지내고 계셨는가? 남의 아픔에 좆도 관심 없는 이 빌어먹을 사람들아.
나가이 케이는 4층 당직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말고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았다. 로비에서 누군가 케이를 찾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수술실에서 2시간 내내 서있었던 케이는 당직실에 엉덩이를 붙인지 3분 만에 일어나 1층 로비까지 전속력으로 내달려야만 했다. 남자분이시래요. 누구요? 그, 이번 주에 사망한 304호 환자분 아드님이요. 케이는 정확한 소식은 듣지 못 했으나 그가 난동을 부리고 있음은 알았고 그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는 정보를 전해들을 수는 있었다. 케이는 그가 칼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 엇비슷한 날붙이를 들고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간호사를 인질로 잡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당연하지만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고민했다. 아마 의료 과실을 운운할 것이다. 사망한 환자의 가족들이 이따금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 항의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의학 드라마의 폐해라고 볼 수 있었는데 실제 드라마와는 달리 병원에서 진행되는 응급 기술들은 매체에서 보여 지는 것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비교적 간단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드라마가 심어준 환상일 뿐 의료인들의 게으름의 문제는 아니다. 당연하지만 의료과실이 될 수도 없다. 케이는 자신이 로비로 내려가기도 전에 어쩌면 상황이 끝나있을 지도 모른다고, 경찰이 케이보다 먼저 도착해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 그런 상황을 기대했으나 그가 로비로 내려갔을 때 상황은 눈곱만큼도 진전되어 있지 않았다. 케이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로비 한복판을 적신 휘발유와, 축축하게 젖은 채 불붙지 않은 라이터를 들고 서서 숨을 시큰거리며 내쉬고 있는 남자를 응시하며 멈추어 섰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남자는 눈을 부라리며 케이를 향해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로비의 모두가 빳빳하게 굳은 채 케이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케이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리고 곧 평정을 되찾은 냉랭한 얼굴을 했다.
“진정하세요.”
케이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저를 찾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무슨 용건이시죠?”
“너…,” 남자가 헐떡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름으로 푹 젖은 남자는 한 발짝씩 걸음을 뗄 때마다 질척질척한 소리가 났다.
“너, 이 자식,”
케이의 몸이 긴장과 경계로 바싹 곤두섰다. 케이는 차분한 얼굴로도 뻣뻣하게 굳은 어깨를 숨기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케이가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자, 남자가 라이터를 눈앞으로 들이대며 으르렁거렸다.
“움직이면 다 태워버릴 거야.”
“…….”
케이는 숨을 들이쉬면서 그대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시선으로 빠르게 로비를 훑자 병원 입구에 서있는 경찰차 두 대가 눈에 들어왔다. 경찰들이 문 근처에 서서 상황을 살피며 무전을 교환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고를 받았으나 남자의 방화 문제로 인하여 쉽사리 병원 내부로 접근하지 못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케이는 남자의 손에서 라이터를 빼앗을 방법을 궁리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때, 남자가 격분한 듯 손을 뻗어 무서운 기세로 케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케이는 흑, 소리를 내며 손길에 따라 난폭하게 앞으로 떠밀렸다. 케이는 성인남자의 몸집이 무색할 만큼 가볍게 남자의 한손아귀에 들려 공중으로 떠올랐다. 발버둥 칠수록 멱살을 틀어쥔 남자의 주먹이 단단해졌다. 케이는 컥컥거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나는 오늘 사과를 받으러 왔어.” 남자가 중얼거렸다.
“알겠어, 선생? 나는 오늘 당신에게 사과를 받으러 왔다고.”
케이는 대답 대신 헐떡이면서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가 케이를 제 얼굴 앞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케이는 끌려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다 말고 늘어졌다. 남자는 케이한테 다시 한 번 말했다.
“당신, 나한테 사과해.”
무엇을 사과하란 것일까? 케이는 알지 못 했다. 당신 어머니에게 제세동기를 쓰지 않은 점? 더 빠르게 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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