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츠키 «없는 재난»
현대au 수영하는 두 사람, 근친 요소 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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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츠키시마 아키테루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관람석의 누구나가 숨죽이며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야외 수영장의 수면으로 여름의 태양이 지난하게 내리쬐고, 경기장보다 조금 높은 고도에 앉았던 사람들의 얼굴 위로 하얀 물그림자가 굵었다가 얇아졌다가 하며 일렁였다. 아키테루가 경기장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힘찬 발길질 때문에 수영장 전체의 물이 일순 술렁였다. 물그림자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멍청하게 입을 벌린 객석 응원단들의 얼굴을 마구 핥았다. 츠키시마 케이는 그들보다 두 칸 뒤에, 그러니까 객석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아키테루는 누구보다 먼저 수영장 끝에 닿았고, 수면 위로 한 번 크게 호흡을 뱉은 다음 부드럽게 몸을 웅크렸다. 일련의 과정은 아주 신속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푸른 타일이 촘촘히 박힌 벽을 차고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곤 눈 깜짝할 새에 스타트라인으로 돌아왔다. 100m의 수영장을 서너 번 왕복하는 동안 선수들의 움직임은 조금씩 느려지고 뒤쳐졌다. 오로지 아키테루의 속도만이 규칙적이고 줄어들지 않았다. 아키테루가 페이스 조절에 능하다는 것을 감독에게 들은 적이 있다. 츠키시마는 아키테루가 우승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실제로 그는 완만하게 해내고 있어 응원 봉을 들고 온 그의 동생을 민망하게 만들지 않았다. 마지막 바퀴에서 츠키시마는 마구 응원 봉을 흔들었다. 형, 계속 가줘. 형, 멈추지 마! 그 순간, 숙련으로 다져진 페이스를 유지하던 아키테루의 속도가 일순 아주 가팔라졌다. 경기장 골인 지점을 3m도 채 남겨두고 있지 않은, 말하자면 발길질 두 번이면 손끝에 단단한 벽이 닿는 거리였기 때문에 그 순간적인 속력은 객석에서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아키테루가 아주 짧은 순간 필요이상의 속도를 냈다고 생각했고―필요이상이라 서술한 건 순전히 아키테루가 명확한 일등이었기 때문이다―실제로 그러했던 것 같다. 아키테루가 골인한 후 몇 초 차이로 다른 선수들이 속속들이 들어왔지만 감독은 그것을 기뻐하기보다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스탠드에서 일어난 그는 물안경을 벗고 마구 물을 털어내는 아키테루 쪽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지적했고, 아키테루는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그리곤 얼떨떨한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서 있는 츠키시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
그가 소리 높여 츠키시마를 불렀다. 여름의 햇살은 물기로 축축한 아키테루의 몸 위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 수십 개의 파편으로 부서졌다. 객석의 모든 시선이 고작 아홉 살 남짓 되는 어린 남자아이, 그러니까 객석에서 유일하게 파란 색 풍선을 들고 온 타교 응원객 츠키시마 케이에게 집중됐다. 그 날 경기는 수영계 유망주 선수가 출전하여 전례 없이 뜨거운 환호를 받고 있었고 츠키시마 아키테루는 변방에서 올라온 이름 없는 학교의 이름 없는 선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아주 아름답고 여유롭게 가장 먼저 물속 마라톤을 끝냈다. 하지만 타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못내 그 질투어리고 호기심 깃든 시선들을 받아내는 과정은 츠키시마 케이에게 자랑스러움과는 아주 동떨어진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경기장 한복판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는 형의 축축한 몸을 보던 그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아주 외설적인 장면을 목격한 사람처럼 귓불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키테루는 손을 흔들다 말고 천천히 거둔 후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세상의 소리가 완전히 멈춘 것만 같았다고 츠키시마 케이는 아주 오랜 뒤에도 그 순간을 그렇게 회고하곤 했다. 지독하게 고요한 나머지 은밀하게 감춰둔 욕망이 몸을 뒤척이는, 그런 관념의 뒤틀림마저 발각될 것만 같았던 그 순간. 곧이어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아키테루는 객석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허겁지겁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 틈에서 어색하고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서두르지 않은 몸짓으로 물속에서 완전히 몸을 건져 올렸다. 감독이 아키테루의 몸 위로 길고 부드러운 수건을 얹어주었다. 그는 천천히 경기장 바깥으로 퇴장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지역 신문의 1면은 모두 츠키시마 아키테루가 장식하게 된다.
츠키시마 케이는 멍하니 객석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 해의 팔월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잊지 못 했다.
“츳키, 수영장 공사 끝났다더라.”
점심 도시락을 막 비웠을 때 야마구치가 반으로 찾아왔다. 츠키시마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린 채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울였다.
“그래서?”
“보러가지 않을래? 우리 부 활동… 슬슬 시작할 거라 빈 수영장을 보는 건 한밤중이 아니면 어려울 거야.”
야마구치 타다시는 고교 입학 후 곧장 수영부에 들어갔다. 츠키시마와는 소꿉친구였는데 어릴 적 아키테루의 시합을 본 후 쭉 수영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현립 아지가사와 고교에는 총 15개의 문화부 활동이 있었는데, 수영부는 그 중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 하는 클럽 활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올해 고교 임원이 교체되고 현 내 스포츠 고등학교 육성이 활발해지면서 수영부 개편과 수영장 내부 공사가 확정되었다. 야마구치가 아지가사와에 진학한 건 순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정식 선수도 아니고, 공식적인 활동 기록도 없이 막연한 동경만으로 수영을 뜨문뜨문 해온 야마구치로서는 수영부 하나를 위해 이사를 하거나 아키테루처럼 먼 학교로 진학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 결정은 꽤나 신중하고 적절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수영장 증축 소식에 가장 기뻐한 것도 야마구치였다. 반면 츠키시마는 흥미 없는 투로 “헤에, 그렇구나.”를 연발해 들뜬 야마구치의 기분을 폭삭 식어버리게 했다.
“츳키, 좀 더 들떠도 괜찮잖아.”
“난 수영부에 관심 없는 걸.”
“하지만 아지가사와에 진학하잖아?”
야마구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츳키는 수영장 때문에 진학하는 게 아니었어?”
“그렇다고 말한 적 없어.”
츠키시마는 냉담하게 말했다.
“야마구치, 넌 넘겨짚는 버릇 좀 고치는 게 좋겠다. 아지가사와에 진학하기로 한 건 우리 집에서 제일 교통편이 좋고 가깝기 때문이야.”
“츳키, 난 이해할 수 없어.”
그 때, 야마구치의 표정은 마치 힐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능숙한데 어째서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그 날 둘이 싸웠다거나 그 이후로 사이가 틀어졌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야마구치는 입학식 전까지 동네 수영장을 종종 들락거렸다. 유난히 추운 날엔 축축한 머리가 조금씩 얼어있었다. 츠키시마는 야마구치를 따라 수영장을 두어 번 정도 들락거리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풀장을 가로지르진 않았다. 대신 풀장 근처에 난 조그만 스탠드에 앉아 야마구치가 수영장 끝에서 끝으로 몇 바퀴고 도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야마구치의 실력은 솔직히 말해 좋지 않았다. 수영을 시작한 건 아키테루의 그 해 경기, 그러니까 츠키시마의 형이 지역 신문의 1면을 장식하던 여름이었지만 야마구치는 고교 진학을 앞둔 겨울까지도 페이스를 지키지 못 하고 수영장 끝자락에서 헐떡이며 멈춰 서곤 했다. 칠 년이나 했으면서. 형편없는 실력이란 소리는 아니었다. 야마구치도 초중반 페이스를 지킬 줄은 알았다. 하지만 막바지에 도달하면 몸에 기운이 달려 도중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러니까 발길질 두 번이면 손끝에 단단한 벽이 있는 거리에서. 아키테루가 ‘형, 계속 가줘. 형, 멈추지 마!’란 소리에 급작 스피드를 냈던 그 지점에서.
그쯤에서 츠키시마는 천천히 일어난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아주 짧게 건성으로 진행한 후 물속으로 점프한다. 미끄럽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수면 아래로 파고들어가는 모양새다. 그 상태로 오래도록 물위로 올라오지 않고 허리와 다리를 움직여 수영장 중간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파하…… 숨을 몰아쉬며 솟구친다.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 순식간에 반 바퀴를 돌고 몸을 웅크려 벽을 박차고 반대편 방향으로 튕겨 오른다. 턴은 부드럽고 군더더기가 없다. 야마구치는 벽에 손을 짚은 채로 츠키시마가 한 바퀴를 완주하는 것을 지켜본다. 츠키시마는 뭍에선 굼뜨고 비척거리지만 물속에선 아주 빠르고 정확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고, 그것 외엔 실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인답다. 츠키시마는 순식간에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고, 물속에서 솟구친 후 물방울을 털어내며 눈가의 물기를 닦아낸다. 츠키시마 케이는 물안경도, 제대로 된 준비운동도 없이 그렇게 빠르게 수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영 내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야마구치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음에도 수면 위로 솟아오른 직후엔 항상 수영장의 왼쪽, 조금 높은 고도를 바라본다. 동네 실내 수영장의 왼쪽 벽면엔 넓고 하얀 타일이 붙은 벽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매번 수면 위로 솟아오를 때마다 그곳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야마구치는 츠키시마 케이의 그 순간엔 그와 완전히 단절되어 어디론가 동떨어진 장소로 추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혹은 츠키시마가 너무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느 쪽이던 혼자 남겨지는 건 츠키시마 케이인 것 같았다. 야마구치는 떠밀리던 남겨지던 왁자한 소음과 사람들 속에 파묻히고, 츠키시마는 떠밀던 떠나던 외딴 곳에 고립될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이 야마구치를 못 견디게 무섭게 만들었다. 일방적으로 친구 관계를 자처하며 붙어 다니는 그의 처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야마구치는 풀을 헤치고 나아가 츠키시마의 팔을 붙잡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츳키, 있잖아… 나는 너랑 같은 고교에 가게 돼서 기뻐.” 그럼 츠키시마는 마치 “네가 성공적으로 숨을 쉬고 있어서 기뻐.” 따위의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야마구치를 흘겨보곤 풀 밖으로 빠져나왔다. 뚝 뚝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다시 스탠스 의자에 앉은 츠키시마가, “야마구치, 더 안 할 거야?”라고 물을 땐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응, 아니아니, 더 할 거야.” 야마구치는 그렇게 대답하곤 몇 번이고 풀장을 헤집고 다녔다.
츠키시마는 한 번 풀장에 들어가 그렇게 헤엄치고 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야마구치가 수영을 끝마칠 때까진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함께 샤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 내내 그들은 수영장과 집을 오가며 방학을 보냈다. 야마구치는 츠키시마가 수영을 분명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류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해.”라는 대답을 들었다. 형의 이야기를 꺼내도 마찬가지였다. “형과 나는 달라. 형은 재능이 있는 거고, 나는…….” 츠키시마가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나는 그저 두려움이 없는 거라고 형이 말했었어.” 야마구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해한 이후에도 여전히 마음으로 받아들이진 못 했다.
수영장에 고인 물은 아주 깨끗했고 소독약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은 초봄의 공기 속으로 온화한 햇빛이 투과하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교복 바지에 손을 욱여넣고 있자, 야마구치가 허둥대면서 마구 설명했다.
“츳키, 우리 학교는 근처 바닷가에서 물을 끌어올려서 쓴대. 정화조를 거치긴 하지만 소독약을 풀지 않을 때가 많댔어. 운영이 개편된다고 했으니 올해부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정화 해수를 받아놓은 모양이야.”
그는 깨끗하게 신축된 수영장과 스탠드를 들뜬 얼굴로 뛰어다니며 츠키시마가 느릿느릿 수영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 어때?”
“어떻냐니…….”
츠키시마가 시시하단 듯 중얼거렸다.
“깨끗하고 넓다는 것 외엔 다를 거 없잖아.”
“여기, 경기장 수영장이랑 구조가 똑같아.”
야마구치가 눈을 반짝였다.
“있잖아, 제대로 된 감독이 온다면… 좋겠다, 그렇지?”
츠키시마 아키테루가 재학하였던 중학교 시절엔 과거 올림픽 선수로 출전했던 선수가 코치로 들어와 있었다. 아키테루는 그의 감독 하에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수영에 익숙해졌다. 그 전까진 수영의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아본 적 없던 아키테루가 그 해 여름 이뤄낸 성과 뒤엔 제대로 된 감독의 지시와 전문화 된 훈련이 있었다. 츠키시마는 야마구치 타다시의 순진한 열정에 헛웃음이 났다.
“야마구치, 너 정말 선수라도 할 작정이야?”
“뭐어? 난 그냥 좀 더 제대로 된 수영이 해보고 싶을 뿐이야. 제대로 된 완주를 할 수 있다면 좋겠어.”
야마구치는 당치도 않는다는 듯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런 건 츳키가 더 어울려.”
잠시 말이 없어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풀장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자 잔잔한 수면 위로 물보라가 일었다. 깨끗하게 닦인 새 타일들은 반짝반짝 매끄러워 보였고 깊은 물속으로 수면의 출렁임이 그대로 비쳤다. 야마구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수영, 해볼까?”
“…….”
츠키시마가 한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떨쳐냈다.
“수영복 없잖아.”
“교복 입은 채로 하는 거야. 뭐 어때. 말리면 그만인 걸. 물도 깨끗해 보이고…….”
“무리야.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앞으로 10분도 안 남았어.”
츠키시마는 완강히 돌아섰다. 아이, 츳키. 한 번만, 이라고 매달리는 야마구치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가자. 그렇게 말하자 야마구치도 더는 조르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채 수영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충동이었고, 츠키시마를 따라 수영장을 등지자 그것이 충동이었다는 걸 순순히 깨달은 눈치였다. 둘은 점심시간 종이 치기 전 수영부실을 빠져나와 교실로 돌아왔다. 다음 교시에 야마구치는 입부 신청서 두 장을 구해왔다. 츠키시마는 그것을 받아들긴 했지만, 곧바로 접어서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방과 후 즈음엔 그것의 존재를 완전히 떨쳐내는데 성공했다. 하교 직전 야마구치에게 메일을 받았다. 「츳키, 후회하지 않을 결정하기 o(≧▽≦)o」 츠키시마는 그 메일에 답장하지 않고 느릿하게 홀드를 내렸다.
츠키시마는 모두가 교실을 빠져나간 뒤에야 가방을 챙겨 나왔다. 복도는 아주 조용하고 보송보송한 기운으로 가득 차있었다. 봄의 햇살엔 응당 그런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다. 축축함과는 거리가 먼 건조한 감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불길하지 않은 느낌이다. 불길하지 않다는 것은 요컨대 건조한 땅과 메마른 풀 따위와는 다른, 진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봄에는 축축하고 차가운 것들을 쓸고 지나간 후에 남는 깔끔한 감각이 있었다. 흘린 물을 닦아낸 직후 보송보송하고 깨끗해진 유리의 표면처럼. 겨우내 쌓였던 눈을 녹이다 못해 지층 아래로 몰아낸 햇살, 싹을 키우는 건조한 흙, 가지 속에서 움츠리던 꽃이 망울을 터뜨리는… 그런 생명력이 봄엔 있었다. 사람들 역시 너나할 것 없이 그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새로운 것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계절에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고 일 년치 예산을 짜고 진도 예습을 하거나 수영부에 입부한다. 야마구치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츠키시마 케이는 봄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가을과 겨울 그 언저리가 어울렸다. 꿈틀거리는 생명력보다는 익다 못해 고개를 숙여 추락할 것을 기다리는 열매, 혹은 이미 추락이 끝난 이후 말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쨌든 츠키시마 케이가 수영부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것을 갈망하지도 않았다. 설령 입부한다한들 수영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느낄 수 있는 것은 성취감, 뿌듯함이 아니라 붕 뜬 느낌이리라. 자신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예감과 함께 그 해 여름이 떠오르는 것이다. 케이! 그렇게 부르며 손을 흔들던 아키테루의 축축한 몸.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이 숨을 죽이는 바람에 세상 모든 외설이 밖으로 몸을 비집고 튀어나오던 그 순간. 자신의 욕망이 적확하게 아키테루의 시선에 포착되었던, 츠키시마 케이 자신조차 깨닫지 못 한 그것을.
츠키시마의 발걸음이 멈췄다. 복도를 지나 수영장을 돌아가던 구간에서였다. 계단통을 몇 발자국 앞둔 오른쪽 복도의 벽면은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2층이었고 수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물그림자가 바닥에서 일렁거렸다. 유리 너머의 수영장 안쪽에 누군가 교복차림으로 서있었다. 츠키시마가 걸음을 멈춘 건 수영장에 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교복이 아지가사와 고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셔츠는 반팔이었고, 바지는 청색이었다(아지가사와 고교는 회색이다). 츠키시마가 잠시 고민했을 때, 수영장에 멀거니 선 소년은 두 손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더니 몸을 한 번 쭈욱 펼쳤다. 스트레칭은 아주 짧았지만 정확했고, 그것이 츠키시마를 사로잡았다. 그건 수영선수들이 경기장에서 흔히 선보이는 다섯 가지의 순서(목-어깨-허리-무릎-손목 발목)를 정확히 지키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무성의하고 무기력해보였다. 그는 발목까지 두어 바퀴를 돌린 후 스타트 라인에 섰다. 그리곤 아주 우아한 자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츠키시마는 아예 몸을 틀어 수영장 쪽을 보고 있었다. 소년은 오래도록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수영장 중간, 정확히 말하자면 중간보다 좀 더 간 지점에서 조용히 떠올랐다. 파하, 숨을 뱉은 후 능숙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츠키시마가 놀란 건, 그가 벽에 손을 짚기도 전에 턴 자세를 잡았다는 것이다. 몸을 웅크린 채 발을 반쯤 펼쳤을 때의 거리를 계산하고, 발바닥이 벽에 닿자마자 그대로 차고 튀어나갔다. 물살은 갑자기 바뀐 흐름을 견디지 못 하고 파도가 되어 출렁거렸다. 츠키시마의 발목 아래로 고인 물그림자가 마구 발등을 핥아댔다. 소년은 쉬지 않고 세 바퀴를 돌았고, 네 바퀴가 되어서도 흐트러짐 없는 속도를 유지했다. 풀장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순간 겨울 내내 야마구치를 보아온 츠키시마는 순간적으로 호흡을 무너뜨리고 수면 위로 헐떡이며 올라오는 장면을 떠올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끝까지 그 페이스 그대로 완주해냈고, 서두르지 않고 수면 위로 천천히 솟구쳤다. 햇빛 아래에서 축축한 은색 머리카락이 윤기 있게 반짝였다. 물에 젖은 얇은 교복이 등판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아, 하고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어깨가 한 번 들썩이더니, 곧 고개가 움직였다. 그제야 츠키시마는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본인은 걷고 있었으며 그저 지나가는 행인으로서 계속해서 복도를 걸어 나가야 하는 존재였음을 자각했다. 시선이 마주치기 전 츠키시마는 바닥을 보며 재빠르게 통유리로 된 복도를 지나쳤다. 어깨 너머로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교문을 빠져나온 후에야 ‘수영부인가.’라고 겨우 질문해보았다. 하지만 타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전학생일까? 수영부 개편 소식을 듣고 온 교외 학생일 지도 모른다. 그럴 이유도 없었으면서 츠키시마는 괜히 바지에서 휴대폰을 꺼내 야마구치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야마, 구치, 넌, 정말로……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이유 없이 조금 후들거렸다. 변명거리를 찾지 못 해 불안해하는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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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시마 아키테루가 국대 수영 선수를 배출한 고교 진학을 결심한 건 중학교 2학년 겨울 무렵이었다. 사실상 3학년이 되기도 전에 진학 사실을 결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주변에서 우려를 살 법도 한데, 아무도 그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그 해 여름 아키테루가 이룩한 눈부신 성과야말로 그의 전도유망한 미래에 대한 예고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부모는 아키테루를 위해 유명 수영부가 존재하는 현 내 고등학교를 물색한 장본인들이었다. 츠키시마 케이도 그의 형이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의심하지 않고 지지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아주 먼 곳, 신칸센으로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했을 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는 아키테루의 경기를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 컸기 때문이고 아키테루가 기숙사 생활을 결정했으므로 방학 이외엔 그를 볼 수 없었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축하해, 형. 그렇게 말하는 츠키시마의 표정이 어지간히 서운해보였던 모양인지 아키테루도 조금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케이, 언제든 놀러와.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말 츠키시마가 찾아올 거라 기대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아직 일 년이 남아 있으니까, 경기도 몇 번 더 할 테고. 그 땐 비디오를 들고 와.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녹화해두면 네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돌려볼 수 있잖아.”
그래서 츠키시마는 그렇게 했다. 다음 해 중학교 3학년이 된 아키테루는 춘분 현내 수영대회에서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올렸다. 작년 하계 대회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어 한 번의 예선조차 건너뛴 아키테루를 모두가 경계했다. 이름 없는 고등학교가 배출한―아키테루의 우승 이후 낙후된 교내 수영장 시설과 깨진 타일들은 종종 신문사의 화젯거리가 되어 지역 기사에 실렸다. 이후 재학 중학교는 수영장에 보수공사를 실시했다―천재 수영선수라는 이미지는 강렬했고 결코 추락하지 않았다. 아키테루는 그 해 팔월에 그러했듯 아름답고 완강하게 물속에서 유영하였다. 츠키시마는 언제나 경기장을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고도가 조금 높은 곳에 지어진 객석에 앉아 아키테루의 환상적인 수영을 지켜보았다. 한 손에 비디오카메라를 든 채였지만 생각보다 촬영은 어려운 일이었다. 걸핏하면 화면은 조금씩 흔들리거나 각도가 어긋나거나 응원을 나온 다른 객석의 풍선 봉에 가려져 초점이 나가거나 했다. 집에 와서 돌려보면 초짜의 티가 팍팍 나는 경기용 촬영 비디오물이 완성되어 있었다. 한 가지 만큼은 프로다운 면이 있었는데, 츠키시마가 평정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흥분하는 기색 없이 자리에 침착하게 앉아 있었기 때문에 화면은 조금 흔들리기도, 각도가 기울어지기도, 흐릿해지기도 했지만 마구 뒤틀리는 법은 없었다. 아키테루가 반드시 일등으로 들어올 거라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이 충족되었을 때의 안도감만이 화면 안에 미세한 떨림으로(그것은 순전히 한숨 때문이었다) 전달될 뿐이었다. 아키테루는 그 해 춘분 대회에서도 순조로운 성적을 냈고, 하계 대회를 쉬는 대신 감독의 영향 하에 계속해서 개인적인 연습을 해나갔다. 아키테루의 페이스가 흐트러지는 법은 없었다. 그 해 팔 월,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눈부시게 물살을 가르다 말고 급작 날카롭게 앞으로 나아갔던 그 순간이 다시 오는 일은 없었다. 츠키시마는 춘분 대회의 모든 경기에 참석해 비디오를 찍었지만, 화면 속 아키테루는 일정한 속도로 물살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그 마법 같은 순간이 다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츠키시마 케이는 안도했다. 둘은 여전히 사이좋은 형제였고 아키테루는 연습을 마치고 귀가한 밤이면 욕조에 츠키시마를 앉혀놓고 등을 씻겨 주었다. 츠키시마도 아키테루의 등을 씻겨 주었다. 넓고 판판한 등판에 거품이 부드럽게 벤 타올을 문지르며 손가락으로 위에서 중간까지 더듬어 보기도 했다. 승모근, 날개 뼈, 소원근, 견갑골……. 그런 후에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 형은 수영이 좋아? 응 좋아하는 것 같아. 그렇구나 괴롭지 않아서 다행이야. 가끔 아키테루는 낄낄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츠키시마의 등에 바싹 붙은 아키테루의 가슴이 마구 웅웅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키테루의 목소리 혹은 웃음소리는 언제나 가벼운 느낌으로 츠키시마의 척추를 두드렸다. 아키테루는 크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조근하고 다정하게 습윤한 욕실을 울리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있잖아, 형. 나도… 형이 있는 중학교에 갈까 봐.”
츠키시마가 중얼거렸을 때, 아키테루의 손이 축축한 그의 등을 쓸어주다 말고 잠시 멈추어 섰다.
“너도 수영하려고?”
“응…… 그렇지만 형처럼 되는 게 목표는 아니야.”
츠키시마가 웅얼거렸다.
“나는 그런 거 못 하니까…….”
“무슨 소리야.”
아키테루가 제법 엄격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 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케이.”
얼마 뒤 아키테루는 츠키시마를 데리고 동네에 있는 실내 수영장으로 갔다. 야마구치도 함께였다. 아키테루는 킥보드를 야마구치와 츠키시마의 손에 들려주곤 풀에 들어가 발차기 시범을 보였다. 야마구치는 물에 떠있는 게 힘든지 연거푸 가라앉았다가 바닥에서 콩 콩 튀어 올랐다. 츠키시마는 킥보드 손잡이 부분을 소극적으로 주물거리다가 구석으로 치워놓았다. 거추장스럽다는 느낌이 들었고 오로지 몸과 그것의 움직임으로만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츠키시마는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내고 풀에 섰다. 몸은 생각처럼 붕 떠주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잡을수록 무겁게 가라앉았다. 야마구치의 자세를 봐주고 있던 아키테루가 재빨리 다가와 츠키시마를 건져 올렸다.
“케이, 힘을 빼봐.”
의기소침한 츠키시마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두드리며, 아키테루가 덧붙였다.
“내가 처음 물에 들어갔을 땐 더 꼴사나웠어.”
츠키시마는 아키테루가 다시 야마구치를 봐주기 위해 수영장 중간까지 나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손을 올려 아키테루가 두드렸던 뺨에 가져다 댔다가 곧 떼어냈다. 그리곤 다시 풀 안으로 내려와 몸을 움직여보았다. 나아지지 않았다. 가라앉던 몸이 일순 삐끗해 중심을 잃었다. 츠키시마는 눈을 감아버렸다. 둥실 떠오른 발끝이 빙그르르 돌았다. 흡, 숨이 절로 막혔다. 아키테루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케이, 힘을 빼봐. 목소리는 아주 가까이 있었다. 아까 분명 바싹 붙어서 속삭였던 것 같았다. 귀에 달라붙은 상냥하고 온화하며 은근한 목소리. 척추를 두드리는 가벼운… 크게 말하는 법이 없는 아키테루. 츠키시마의 척추를 타고 찌르르 소름이 돋더니, 이내 항복한 것처럼 축 늘어졌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이 붕 떠올랐다. 축축한 물은 아까까지 갈퀴처럼 츠키시마의 발끝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는데 일순 태도를 달리했다. 부드럽고 고요하게 츠키시마 케이의 몸을 감싸고 출렁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츠키시마는 기묘한 행복을 느꼈다. 발끝에서부터 오금이 저리고, 몸 한가운데를 아주 부드럽고 연약한 감각이 관통한 것 같은 감각이었다. 츠키시마는 언젠가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다고, 그러니까 매일 밤 좁은 욕조에 몸을 욱여넣은 아키테루가 웃음을 터뜨리며 츠키시마의 등을 꼭 껴안을 때마다 느끼던 우애(友愛)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또 그 감각은 최초의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 그 해 여름, 아키테루가 츠키시마를 향해 손을 흔들던 그 눈부신 순간을 끄집어 올렸다. 그 때, 왜 츠키시마는 불현 듯 아키테루를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만 것일까?
순간 모든 게 깜깜했던 공간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처럼 일순 주변의 공기와 질감이 뒤바뀌었다. 츠키시마가 기침을 하며 눈꺼풀을 열자 공포에 질린 야마구치의 얼굴이 보였다. 츠키시마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눈앞에 바싹 붙은 아키테루가 뚜렷해졌다.
“케이, 괜찮아?”
아키테루가 츠키시마를 흔들었다. 츠키시마가 몸을 움츠렸다.
“괜찮아, 그냥 떠있었을 뿐이야.”
“츳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야마구치가 이를 딱딱거렸다.
“막, 영화 속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처럼 등만 둥그렇게 떠있었다고!”
“야마구치가 비명을 질러서 나도… 큰일 난 줄 알았어.”
아키테루가 멋쩍게 웃으며 츠키시마를 물속에 내려놓았다. 츠키시마는 이제 허우적거리거나 콩콩 뛰지 않고도 물에 둥둥 떠 있었다. 아키테루는 감탄했다.
“금방 하는 구나. 역시 내 동생은 대단해.”
고작 물에 둥둥 떠있는 걸 성공한 것뿐이었는데. 유망주이자 수영 천재로 불리던 아키테루가 감흥에 차서 중얼거릴 만한 류의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조금 기뻤다. 사실 아주 많이 기뻤다. 들뜬 츠키시마는 그 날 아키테루에게 자유형을 배웠다. 야마구치는 킥보드를 잡고 발차기를 하며 그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저녁 무렵엔 야마구치도 킥보드를 뗐지만, 숨을 고르지 못 해 곧잘 헉헉거렸다. 반면 츠키시마는 처음부터 호흡 따윈 문제도 아니었다는 듯 물속을 유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야마구치가 “역시 재능은 유전인 걸까.”라고 푸념하자, 츠키시마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키테루가 먼저 “재능이 있다면 케이 쪽이 아닐까, 난 물에 익숙해지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거든. 난 재능이랄까, 그냥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몰라. 노력한 것의 성과일 지도.”라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키테루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3
아, 스가와라 선배다! 그렇게 외치자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에 붙었다. 누군가 창문을 열어 바람이 마구 들어왔다. 펼쳐놓은 교과서 페이지가 마구 흩날리자 츠키시마는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 의자를 두고 거꾸로 앉아있던 야마구치가 재빨리 손을 뻗어 츠키시마가 펼쳐놓은 페이지에 자를 끼워두었다.
“야마구치, 애쓰지 마.”
츠키시마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야마구치는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삼학년이 전학을 오는 건 드문 일이니까… 다들 신기한가 봐.”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도 아니잖아.”
바람이 세게 불어서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츠키시마가 혀를 차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마구치는 허둥지둥 뒤따랐는데, 츠키시마가 창가에 가까이 다가섰을 땐 저도 모르게 팔을 덥석 붙잡았다. “창, 창문 닫으면 다들 기분 상하지 않을까?” “바보냐.” 츠키시마가 면박을 주었다. “그렇게 눈치 없진 않아.” 둘은 왁자한 아이들 틈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점심시간마다 이학년 삼학년이 나와 공을 차거나 뒹굴었다. 축구부가 섞여 있기도 해서 지루하지 않았다. 운동장 한가운데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삼학년이 보였다. 공이 패스되자 발 옆에 능숙하게 붙인 채 골대 구역까지 뛰었다.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삼학년은 따라붙은 축구 부 이학년을 능숙하게 재치고 곧장 발을 쭉 뻗었다. 공은 골대 안으로 미끄러지듯 골인했다. 힘차고 강력한 슛은 아니었지만 걸릴 게 없는 깔끔하고 정확한 각도였다. 스가와라 선배! 누군가 이름을 부르자 삼학년이 고개를 돌려 츠키시마네 반 창가를 바라보았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무어라 말했지만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스가와라는 츠키시마의 교실 쪽으로 말하는 게 아닐 지도 몰랐다. 그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대자마자, “네에? 네? 뭐라고요?” 하고 아래쪽 층계에서도 아이들이 한 무더기로 빽빽거렸기 때문이다.
“시끄럽네.”
츠키시마가 중얼거렸지만 야마구치는 창가에 얼굴을 붙인 채 스가와라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금방 경기로 돌아가 아이들 틈에 섞여 운동장을 뛰었다. 야마구치의 시선이 반짝이는 은발을 쫓아 조금씩 이동했다. 야마구치가 불쑥 말했다.
“츳키, 있잖아. 스가와라 선배는 어쩐지 미움을 받아선 안 될 것 같아.”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지만 그런 건 잘 알 수 없었다.
“그런 게 어디 있냐.”
“잘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든달까.”
야마구치는 츠키시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어물어물, 그러나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어쨌든 상냥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라서. 그래서 그대로 돌려줘야 할 것만 같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야마구치가 스가와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 학교의 모두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상냥했다. 입학식이 있고 일주일 뒤 전학을 왔다는 소문의 삼학년은 잘생겼다기 보단 섬세하게 예뻤고, 그런 류의 외모는 또래 학생들이 가지기 흔치 않은 우아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상냥하고 누구에게나 쉽게 말을 걸었으며 또 쉽게 받아주었다. 맡은 일을 척척 해내고 교사들과도 완만했다. 스가와라 선배, 스가와라 선배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츠키시마는 무심한 눈으로 운동장의 은빛 점을 쫓았다. 한 번 더 골을 넣어서 아이들이 꺅꺅거렸다. 이번엔 야마구치도 오,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기쁜 듯 주먹을 쥐었다. 츠키시마는 정말 바보 같아, 하고 생각했다.
4
「츳키, 후회하지 않을 결정하기 o(≧▽≦)o」
「야마구치 너는 정말로 끈질기구나.」
5
그 날도 혼자 귀가했다. 야마구치는 부 활동이 시작한 수영장을 보고 싶다며 헐레벌떡 가방을 챙겨 나갔다. 츠키시마는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2층 복도에서 멈춰 섰다. 통유리 너머로 수영장 물이 마구 출렁이고 있었다. 여섯 줄에 각각 한 명씩 들어가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야마구치는 스탠드에 앉아 타이머를 쥐고 있었다. 수영부 활동이 시작된 수영장은 일사분란 했고 사람이 많았다. 물은 잠시도 잔잔하지 못 하고 끊임없이 물방울을 튀기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물그림자가 바닥에 넘실거렸다. 츠키시마는 눈으로 은발머리의, 그 날의 뒤통수를 찾았다. 그러니까… 스가와라 코우시를. 그 날의 스가와라 코우시를 찾았지만 그는 없었다. 어쩌면 오늘 오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볼 만한 광경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스가와라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을 것이고, 교복을 입었더라도 그 날의 교복은 아니니까. 츠키시마는 느릿느릿 복도를 가로질러 층계를 따라 내려갔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교문 뒤편에 있었다. 츠키시마는 제법 놀랐는데, 더 놀란 건 스가와라 쪽인 것 같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화단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츠키시마가 고개를 숙이자 손사래를 쳤다.
“아, 괜찮아 괜찮아. 내가 주울게.”
하지만 츠키시마의 팔이 더 길었고 스가와라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수국 가지 사이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을 땐 츠키시마 쪽이 오히려 좀 당황했다. 스가와라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고마워, 하고 그의 손에서 담배 갑을 받아들었다.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담배 때문에 화들짝 놀란 것이라 생각했는데 들키자마자 뻔뻔해지는 게 이상했다. 스가와라는 가방 안에 담배 갑을 쑤셔 넣곤 츠키시마 쪽을 보며 씨익 웃었다.
“갈까?”
둘은 버스정류장까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력으로 걸었다. 교문을 나서자 해안도로, 그리고 옆으로 난 보행자 길이 펼쳐졌다. 푹신푹신한 고무바닥을 걸으며 스가와라가 먼저 이것저것 물었다.
“이름이 뭐야?”
알 거 없잖아요, 라고 대답하려다가 순순히 말했다.
“츠키시마 케이(月島 蛍)요.”
“아, 츠키시마인가. 달인가, 역시 그렇네.”
딱히 대꾸할 만한 감탄사는 아니라서 츠키시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둘 옆으로 버스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도로는 한산했고 가드레일 너머론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잠시 후, 스가와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집은 여기서 가까워?”
“여기서 세 정거장 정도…….”
“아, 가깝구나. 가깝네, 응.”
스가와라는 츠키시마가 들고 있는 새 가방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
“일학년?”
“예에, 뭐.”
“일찍 하교하네.”
“그런가요.”
“츠키시마는 부 활동 같은 거 안 하는 걸까~”
“저기.”
츠키시마가 멈춰 섰다. 앞서나가던 스가와라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츠키시마가 말했다.
“말 안 할 테니까 그렇게 애쓸 필요 없어요.”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의 머리가 부드럽게 흩날렸다. 스가와라가 잠시 눈을 크게 떴는데, 아주 한순간이었기 때문에 츠키시마는 순간 헛것을 본 건 아닐까 생각했다. 잠시 뒤 스가와라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 그런가.”
아까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상큼하다거나 말랑말랑하지 않았다. 아까 같았지만 분명 조금은 달랐다. 츠키시마가 다시 앞으로 걸어가려고 하는데, 츠키시마, 있잖아, 하고 스가와라가 재차 말을 꺼냈다.
“수업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를 보고 있었지?”
츠키시마가 멈추어 섰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제 무언가 ‘발각’되었고 ‘포착한 순간’을 ‘쥐고 흔드는’건 츠키시마의 영역만이 아니게 됐다. 스가와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있지, 츠키시마.
“나 교복 입은 채로 수영한 것도 비밀로 해줄래?”
“…….”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어서. 별 말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리고 그는 다시 앞서서 걸어갔다. 츠키시마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 등을 바라보았다. 비밀로 지켜달라고 말한다는 건 구라 뻥이고, 그러니까 방금 저 선배는 순전 날강도처럼 협박한 것이다. 분명 그런 의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츠키시마가 엉거주춤 서있기만 하자, 스가와라가 앞서 가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츠키시마, 가자. 버스 오겠다.”
그리고 다시 예의 그 상큼한 웃음이다.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의 웃음 속에서 일종의 배설감과 후련함을 읽어냈고 완전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됐다.
‘와. 성격 나빠…….’
야마구치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스가와라의 뒤를 쫓아가면서 츠키시마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정말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스가와라를 대화의 바운더리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뭔가, 스가와라가 ‘상큼하고 멋진 3학년의 그 선배’로만 축약되는 것 같았고 성격이 나쁘다던가, 수영을 했다던가 하는 일은 어딘가로 소실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둘은 그 날 같은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츠키시마가 먼저 내렸다.
6
츠키시마가 촬영할 수 있던 아키테루의 경기는 3학년 춘분 현내 대회가 마지막이었다. 하계 대회를 건너뛴 아키테루는 개인 실적을 올리는데 매진하였고 겨울 무렵 현 대회보다 큰 규모의 시합에서 금상을 탔다. 토너먼트가 아닌 단일 경기였고 경기장이 너무 멀어서 츠키시마는 찾아갈 수가 없었다. 신칸센으로 두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에서 열린 시합이었는데, 아키테루가 굳이 그곳까지 찾아간 것은 순전 고교 스포츠 장학생 입학을 위해서였다. 수업시간이 겹쳐 경기를 보진 못 했지만 츠키시마는 하교 후 시간을 맞춰 아키테루를 역까지 마중 나갔다. 아키테루는 물기가 조금 남은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을 문지르다 말고 츠키시마를 보자 두 팔을 벌렸다. 츠키시마가 안겼다.
“케이, 너 키가 컸구나.”
품에서 츠키시마가 떨어지자, 아키테루가 새삼 말했다. 츠키시마는 해실거리며 웃었다.
“일등 했어?”
“당연하지.”
둘은 저녁노을을 등지고 역을 빠져나와 계속해서 걸었다. 겨울의 해는 빨리 졌기 때문에 노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길은 금세 깜깜해졌다. 도로를 지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추수가 끝나 텅 빈 논두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평선으로 땅거미가 사라질 무렵 츠키시마는 아득히 먼 곳에서 깜빡이는 붉은 점을 보았다.
“형, 저게 뭘까?”
아키테루는 츠키시마가 가리킨 지점에서 깜빡거리고 있는 붉은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글쎄, 아마 송전탑에서 오는 걸 거야. 왜 빛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과연 그렇구나. 츠키시마는 빠르게 납득했다. 까만 산등성이 위로 듬성듬성 세워진 철제 송전탑은 아오모리 현에 아주 많았고, 빨간 불빛은 그들 중 하나가 전송하는 신호인 것이다. 전기를 잘 운송하고 있다. 당신들의 마을을 밝혀줄 전기가 내 몸을 관통하고 있다. 츠키시마는 궁금해졌다.
“저기 가보고 싶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
“그럴래?”
둘은 방향을 꺾어 산등성이 쪽으로 나아갔다. 논두렁이 넓어졌고 외곽 도로에 드문드문 세워진 가로등이 깜빡이다가 팡 하고 빛을 내며 켜졌다. 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불빛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귀뚜라미조차 울지 않는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둘은 그 침묵에 맞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시합 이야기, 수영하며 나아가는 순간에 대한 것, 야마구치, 엄격한 감독, 진학할 고교의 현대적이고 전문적인 시설들…… 문득 아키테루가 시간을 보곤 뒤를 돌아 지나온 길을 확인했다. 제법 많이 걸어왔음에도 둘은 송전탑 실루엣조차 보지 못 한 상태였다.
“케이, 너무 늦었다.”
아키테루가 메일 알림이 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저녁 밥 다 됐대. 너무 기다리시기 전에 돌아가자.”
츠키시마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지만 돌아오는 동안 흘끔거리며 깜빡이는 빨간 불빛을 두어 번 정도 돌아보았다. 종국엔 아키테루가 달래듯이 약속했다.
“다음에는 꼭 저기 가보는 거야.”
하지만 그 말투는 언젠가 케이, 언제든 놀러와, 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가자고 한다면 가겠지만 당장의 일은 아니야.’라는 것처럼. 츠키시마는 그것이 조금 서글펐던 것 같다.
7
스가와라는 예상치 못 한 곳에서 나타났다. 1학년 교실의 뒤편, 연식 야구장과 맞은편엔 야트막한 화단이 있었다. 올해부터 경식으로 바뀐 야구부가 경기장 보강 공사가 끝날 때까지 현 내에 있는 체육관 야구장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다른 이유가 없으면 그곳에서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츠키시마가 화단까지 화분을 옮겨달라는 번거로운 부탁을 받아들인 건 순전 그런 이유 탓이었는데, 그곳에 스가와라가 있던 것이다.
“아, 또 마주쳤네.”
“아…….”
츠키시마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스가와라는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어깨를 으쓱하곤 말았다. 그리곤 츠키시마의 품에 들린 화분을 턱짓으로 까딱였다.
“뭐야?”
“화분이요…….”
“그거 물어본 거 아니란 거 알잖아.”
심술부리지마, 라는 말투였으므로 츠키시마는 잠시 한숨을 쉬며 인상을 찡그리다가 대답했다.
“1학년 B반 교사의 심부름이요.”
“음, 그러니까 츠키시마는 1학년 B반이라는 거지?”
스가와라가 웃었다.
“츠키시마는 담임을 담임(擔任)이라 말하지 않는구나.”
“별로, 담임이라고 아주 안 하는 것도 아니에요.”
츠키시마가 대꾸하곤 화분을 내려놓은 후 긴 다리를 접어 쭈그리고 앉았다. 스가와라는 음, 하고 즐거운 기색이었다.
“숨기고 싶었는데 단박에 알아차려서 싫구나?”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츠키시마는 얼굴에서 티가 나니까.”
츠키시마가 삽을 주워들다 말고 흙더미 속으로 푹 꽂아 넣었다. 스가와라를 올려다보자 시선이 마주쳤다. 스가와라는 피하지 않았고 그 이상 웃지도 않았다.
“지금 나 귀여워하는 거야.”
웃기고 있네! 순전 화풀이면서. 츠키시마 케이는 실수를 했다. 그 날 그렇게 말해선 안 되는 거였다. 한순간이었지만 츠키시마는 스가와라가 수비하는 선을 넘었고,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요”라는 말은 애쓰고 있는 스가와라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를 전면 앞으로 내보냄으로서 치부를 노출시킨 꼴이 됐다. 사실 츠키시마는 그게 치부인지 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스가와라는 명백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기.”
츠키시마가 먼저 화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다시 삽을 주워들었다. 푹 푹 흙을 쑤시며 말했다.
“제가…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건가요?”
어쩐지 그 말을 하는 동안 스가와라의 표정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츠키시마는 애꿎은 흙을 떠서 한쪽으로 꾹 꾹 눌러 담았다. 스가와라는 평소보다 더 오래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 틈이 ‘정적’으로 인식되기 직전 다시 입을 열었다.
“담배 피워도 되지?”
화분에서 자갈을 떠내던 츠키시마의 손이 멈칫했다.
“피운다, 츠키시마. 망 좀 봐줘. 응?”
아, 이 사람 피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추격하고 싶진 않았다. 츠키시마는 모종삽으로 흙을 통째로 떠내서 화분에 있는 식물을 구덩이 안으로 흘려보냈다.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라이터 부싯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머리 위로 연기 냄새가 났다. 츠키시마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스가와라는 정말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들키면 저도 혼나요.”
“들킬 일이 없잖아.”
스가와라가 연기를 뱉으며 입 꼬리를 올렸다.
“여긴 사람이 오지 않으니까. 별관이고, 옆은 공사 중이고.”
“…….”
아까는 망을 봐달라고 했으면서. 츠키시마가 대답하지 않자 스가와라 쪽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곤 상큼한 얼굴을 했다.
“너도 그래서 온 거 아니야? 번거롭게 식물까지 데리고.”
스가와라가 츠키시마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츠키시마는 순간 불쾌함을 느꼈다. 원초적인 부분을 공격받은 기분이고, 웅크린 채 덮고 있던 이불을 예고 없이 열어젖혀진 기분이고, 잘 싸맨 보자기를 통째로 쥐어뜯긴 기분이다. 하지만 고의는 아니었다.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의 선을 넘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스가와라는 명백히 고의였지만 츠키시마는 이런 전개를 원하지 않았다. 수습하고 싶었지만 방도를 몰라서 억울해졌다.
“스가와라 선배.”
“응.”
스가와라는 츠키시마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 낯선 학생들이 스가와라 선배 혹은 스가와라, 라고 부르고, 그리고 몇 가지 인사와 동경을 나눈 후 들뜬 표정으로 떠나간다. 그러니까 스가와라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들.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와아, 박수를 치다 떠나갈 아주 먼 세계의 구성원들. 츠키시마 케이는 그 세계의 가장 바깥쪽에 있었고 심지어 스가와라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스가와라가 아주 좋아하는 부류에 속한다. 하지만 첫 대면이 고약했다. 츠키시마는 사실 세계 가장 바깥쪽을 걷는 게 아닐 지도 모른다.
“츠키시마, 불렀으면 말을 해.”
“……아니에요.”
츠키시마는 화분 옮기는 것을 끝내고 천천히 일어났다. 흙먼지가 회색 교복 바지에서 뿌옇게 떨어졌다.
“담배 같은 거, 왜 하는 건가요?”
뜬금없는 질문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물어보고 싶었다. 츠키시마가 스가와라의 얼굴을 살폈다. 스가와라는 금방 눈치 채고 웃음으로 덮었다. 젠장. 츠키시마는 치밀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동족혐오.
“그런 게 궁금했어?”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연기가 자욱해질수록 색채가 희박한 스가와라의 모습이 햇살 속에서 점차 흐려졌다. 담배를 피우는 스가와라는 명확한 색채와 대비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홀로 투명도 낮은 수채화로 그려진 것 같다. 사라지기 위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을까? 츠키시마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면 스가와라 선배는, 어쩐지 잘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서서히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몸에 좋지 않잖아요.”
“걱정해주는 거야?”
“선배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헤에,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선배는…….”
츠키시마는 스가와라가 벽에 손을 짚기도 전에 턴 자세를 잡았던 순간, 몸을 웅크린 채 발을 반쯤 펼쳤을 때의 거리를 계산하고 발바닥이 벽에 닿자마자 그대로 차고 튀어나간 그 순간을 떠올렸다.
“수영부… 잖아요.”
잠깐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스가와라가 몹시 즐거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반응을 이해하지 못 한 츠키시마가 머뭇거렸다. 스가와라는 손등으로 성마른 이마를 닦으며 나머지 한 손으로 반쯤 태운 담배를 등지고 있는 건물 위로 지졌다. 바람이 불어 응축되어 있던 하얀 연기가 날아갔다.
“아하하… 츠키시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츠키시마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아닌가요?”
“아닌데.”
스가와라는 힘 빠진 웃음소리를 몇 번이고 더 싱겁게 뱉어냈다가 그만두었다.
“그럼 축구부인가요?”
“아니!”
“배구부?”
“우리 학교에 배구부가 있었나?”
“테니스부?”
“땡.”
“배드민턴부?”
“츠키시마.”
스가와라가 말했다.
“난 귀가부(歸家部)야.”
츠키시마의 뒤통수가 다시 한 번 얼얼해졌다.
“예?”
“너랑 같아.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부 활동 없이.”
스가와라는 대수롭지 않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리곤 발치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몇 번 실내화로 꾹 눌러 밟은 후 화단을 넘어서 무성히 사라기 시작한 수국의 줄기 아래로 굴려버렸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
“그야…….”
당신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다뤄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라고 말한다면 변태로 낙인찍힐 것이다. 운동부만 골라 물어본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일단 명제자체부터 맘에 들지 않았지만 만약)스가와라가 수영부가 아니라면, 그는 몸을 쓰는 다른 부에라도 들어가야 한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종이 쳤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며 운동장 쪽을 돌아보았다.
“아차, 까먹고 있었네.”
스가와라가 낭패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 시합에 내 이름도 있었을 텐데.”
“큰일 난 거 아닌가요.”
츠키시마는 조금 비꼬았다.
“평판에 문제가 생길 지도.”
“츠키시마는 그런 거 신경 쓰는 타입이야?”
이번에도 스가와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츠키시마는 조금 비꼬려 했던 꼭 그만큼의 수치심을 느꼈다.
“아니…….”
“난 아무렴 상관없어.”
스가와라가 대답했다.
“…아마도.”
그런 후 대답도 듣지 않고 화단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츠키시마가 허리를 굽혀 그가 버린 꽁초를 주워들었다. 아마도, 라니……. 츠키시마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스가와라는 중앙 현관에 도달해 있었다. 멀어져가는 스가와라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건 돌이켜보면 아주 이상한 대답이었다.
신발장에 낯익고도 낯선 신발 한 쌍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츠키시마는 부리나케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형.”
“케이. 왔어?”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움직이던 아키테루가 고개를 돌렸다. 츠키시마의 안면근육이 흐물흐물해졌다. 식탁엔 돈까스와 양배추 샐러드가 얹어져 있고, 거실엔 TV가 켜져 있었다. 그 말은 즉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있을 것이고 어머니는 2층에서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키테루의 귀가는 이런 식으로 가족들을 불러 모으게 했다. 아키테루의 고교 시절, 그가 방학 동안의 연습 기간을 마치고 귀가하는 날이면 온 가족이 집에 모였다. 아버지는 일찍 퇴근하고 어머니는 음식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어머니가 직접 아키테루가 좋아하는 것들을 튀겼다. 츠키시마도 다른 약속을 잡지 않고 곧장 집으로 왔다. 온 가족이 그랬다. 고작 일주일 동안인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고작 일주일이었기에 모두가 아득바득 집에 모였던 걸지도 모른다. 아키테루가 대학에 간 이후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고교 때보다 드문 일이 되었지만 현관문 앞에 그 낯설고도 낯익은―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그가 매번 새 운동화를 신었기 때문이다, 보지 못 한 신발의 익숙한 사이즈를 마주하는 건 늘 낯설고도 낯익은 일이었다―신발 한 쌍이 놓인 순간 가족들은 집으로 들어와 각자의 할 일을 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각자의 포지션을 지키며 집에서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그렇게 일상적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다 집안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아키테루를 마주치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몸은 좀 어때?”
츠키시마가 입을 흐물거리며 물었다.
“형, 몸은 좀 어때?”
“나야 늘 좋지.”
아키테루가 쾌청하게 웃으며 맞은편 의자를 발로 밀어냈다.
“케이, 밥 안 먹었지? 같이 저녁 먹자. 네 몫도 있어.”
츠키시마는 접시를 덮어놓은 밥과 여분의 돈까스를 들고 아키테루가 밀어놓은 의자에 앉았다. 아키테루는 빠르게 먹었고 츠키시마는 느리게 먹었다. 학교는 좀 어때? 야마구치는? 너도 몸은 괜찮아? 아키테루가 물으면 츠키시마는 모든 질문에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것 외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수영은 좀 어때?”
아키테루가 그렇게 물었을 때, 츠키시마는 잠깐 젓가락질을 멈췄다.
“그냥…….”
츠키시마가 반찬을 내려다보았다.
“그럭저럭이야.”
“그래도 계속하고 있구나, 다행이다.”
츠키시마는 대꾸 없어 밥알을 마구 씹어서 조금씩 삼켰다. 아키테루가 들뜬 목소리로 몇 가지 일들에 대해 말했다. 국대와 선수촌, 선수단 스카우트 제의와 자퇴 고민에 대한 것이다. 고교 동창이 최근 모교에 돌아가 감독을 뛴다는 이야기를 할 땐 새삼스럽다는 말투를 했다.
“그 녀석, 선생이라던가 감독 같은 일은 질색했던 주제에 잘도 돌아갔단 말이야.”
“사실은 그런 일 좋아했던 게 아닐까.”
“진심으로 질색했었다니까?”
“잘 숨기는 사람이었나 봐.”
츠키시마가 말했다.
“아니면 정말로 마음이 바뀌었거나.”
“그럴 지도.”
아키테루가 웃었다.
“어쨌든 깜짝 놀랐어. 벌써 3년째라는 소릴 들었을 땐 와 장난 아니잖아, 라고 생각했다니까. 천재가 있냐고 물어봤거니, 올해 대단한 녀석이 들어왔다고 하더라. 재능도 있는데 의욕도 있다고.”
“헤에.”
츠키시마는 감흥 없이, 그러나 아키테루의 이야기가 지루해서는 아니라는 것처럼 그렇게 감탄했다.
“형의 화신 같은 건가.”
“케이도 참, 난 천재가 아니었다니까.”
아키테루가 민망한 듯 웃었다.
“여하튼 레귤러 멤버였던 삼학년이 별 불만도 없이 자릴 내줄 정도였다고 하더라. 그 소릴 듣는데 내 학창시절이 떠올랐어. 나도 삼학년 때, 대단한 녀석이 한 학년 아래에 있어서 바로 팀에서 나오겠다고 했거든.”
“형은… 국대 준비 때문에 그런 거였잖아.”
아키테루의 말투가 꼭 도망쳐 나왔다는 것처럼 들려서 츠키시마가 변호했다.
“대학도 있었고, 입시 준비도 해야 했고.”
“뭐, 그것도 있었지.”
아키테루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완전히 긍정하지도 않았다.
“압박감도 있었고 피곤하기도 했어. 어쨌든 졸업을 목전에 두고 재능이라던가 천재성이라던가 그런 걸로 경쟁하고 싶진 않았거든. 무엇보다 좋아하는 걸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웠어.”
츠키시마는 말문이 막혔다. 좋아하는 걸 싫어하게 될까 봐. 이번에 츠키시마는 아무 것도 변호해줄 수 없었다.
“뭐, 여하튼 지난 일이니까.”
아키테루는 돈까스를 털어 넣고 우물거렸다.
“밥 다 먹고 수영장 보러 갈래?”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가자 시가지와 넓은 현립 실내 체육관이 나왔다. 두 정거장 앞이 아쿠아리움이라 아이들이 우르르 탔다가 우르르 내렸다. 둘은 정류장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 나갔다. 현립 체육관 근처엔 넓은 잔디장이 있었고 봄의 햇살을 즐기며 뒹굴거나 앉아 있는 사람이 많았다. 아키테루와 츠키시마는 분수대와 유리문을 지나쳐 지하로 내려갔다. 수영장은 아주 넓고 깨끗했다. 100m와 500m 풀장이 둘로 나뉘어 있고 양쪽마다 스탠드가 비치되어 있었다. 아키테루와 츠키시마는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그저 2층 유리 너머로 그 거대한 공간을 지켜보기만 했다. 둘은 정말 수영장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풀의 시작점에서 도착점으로, 그리고 다시 도착점에서 시작점으로 수영하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키테루가 말했다.
“케이, 나 여름방학엔 집에 올 거야.”
츠키시마가 고개를 돌려 아키테루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대학 문제도 결정하고, 네가 방학인 동안엔 같이 여기서 수영이나 해볼까하고.”
아키테루가 고개를 돌려 츠키시마와 눈을 마주치곤 씩 입 꼬리를 올렸다.
“어때?”
츠키시마는 달리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면서도 대답했다.
“그럭저럭…….”
아니,
“좋아.”
“좋다니 다행이다. 부담 주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키테루가 한숨을 쉬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부담을 준다는 건 무슨 뜻일까. 만약 츠키시마가 아키테루를 만나기 위
아름다운 츠키시마 아키테루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관람석의 누구나가 숨죽이며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야외 수영장의 수면으로 여름의 태양이 지난하게 내리쬐고, 경기장보다 조금 높은 고도에 앉았던 사람들의 얼굴 위로 하얀 물그림자가 굵었다가 얇아졌다가 하며 일렁였다. 아키테루가 경기장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힘찬 발길질 때문에 수영장 전체의 물이 일순 술렁였다. 물그림자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멍청하게 입을 벌린 객석 응원단들의 얼굴을 마구 핥았다. 츠키시마 케이는 그들보다 두 칸 뒤에, 그러니까 객석의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아키테루는 누구보다 먼저 수영장 끝에 닿았고, 수면 위로 한 번 크게 호흡을 뱉은 다음 부드럽게 몸을 웅크렸다. 일련의 과정은 아주 신속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푸른 타일이 촘촘히 박힌 벽을 차고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곤 눈 깜짝할 새에 스타트라인으로 돌아왔다. 100m의 수영장을 서너 번 왕복하는 동안 선수들의 움직임은 조금씩 느려지고 뒤쳐졌다. 오로지 아키테루의 속도만이 규칙적이고 줄어들지 않았다. 아키테루가 페이스 조절에 능하다는 것을 감독에게 들은 적이 있다. 츠키시마는 아키테루가 우승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실제로 그는 완만하게 해내고 있어 응원 봉을 들고 온 그의 동생을 민망하게 만들지 않았다. 마지막 바퀴에서 츠키시마는 마구 응원 봉을 흔들었다. 형, 계속 가줘. 형, 멈추지 마! 그 순간, 숙련으로 다져진 페이스를 유지하던 아키테루의 속도가 일순 아주 가팔라졌다. 경기장 골인 지점을 3m도 채 남겨두고 있지 않은, 말하자면 발길질 두 번이면 손끝에 단단한 벽이 닿는 거리였기 때문에 그 순간적인 속력은 객석에서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아키테루가 아주 짧은 순간 필요이상의 속도를 냈다고 생각했고―필요이상이라 서술한 건 순전히 아키테루가 명확한 일등이었기 때문이다―실제로 그러했던 것 같다. 아키테루가 골인한 후 몇 초 차이로 다른 선수들이 속속들이 들어왔지만 감독은 그것을 기뻐하기보다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스탠드에서 일어난 그는 물안경을 벗고 마구 물을 털어내는 아키테루 쪽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지적했고, 아키테루는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한 쪽 입 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그리곤 얼떨떨한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서 있는 츠키시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케이!”
그가 소리 높여 츠키시마를 불렀다. 여름의 햇살은 물기로 축축한 아키테루의 몸 위로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려 수십 개의 파편으로 부서졌다. 객석의 모든 시선이 고작 아홉 살 남짓 되는 어린 남자아이, 그러니까 객석에서 유일하게 파란 색 풍선을 들고 온 타교 응원객 츠키시마 케이에게 집중됐다. 그 날 경기는 수영계 유망주 선수가 출전하여 전례 없이 뜨거운 환호를 받고 있었고 츠키시마 아키테루는 변방에서 올라온 이름 없는 학교의 이름 없는 선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아주 아름답고 여유롭게 가장 먼저 물속 마라톤을 끝냈다. 하지만 타교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못내 그 질투어리고 호기심 깃든 시선들을 받아내는 과정은 츠키시마 케이에게 자랑스러움과는 아주 동떨어진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경기장 한복판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는 형의 축축한 몸을 보던 그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아주 외설적인 장면을 목격한 사람처럼 귓불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아키테루는 손을 흔들다 말고 천천히 거둔 후 그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세상의 소리가 완전히 멈춘 것만 같았다고 츠키시마 케이는 아주 오랜 뒤에도 그 순간을 그렇게 회고하곤 했다. 지독하게 고요한 나머지 은밀하게 감춰둔 욕망이 몸을 뒤척이는, 그런 관념의 뒤틀림마저 발각될 것만 같았던 그 순간. 곧이어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아키테루는 객석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허겁지겁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 틈에서 어색하고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서두르지 않은 몸짓으로 물속에서 완전히 몸을 건져 올렸다. 감독이 아키테루의 몸 위로 길고 부드러운 수건을 얹어주었다. 그는 천천히 경기장 바깥으로 퇴장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지역 신문의 1면은 모두 츠키시마 아키테루가 장식하게 된다.
츠키시마 케이는 멍하니 객석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 해의 팔월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잊지 못 했다.
“츳키, 수영장 공사 끝났다더라.”
점심 도시락을 막 비웠을 때 야마구치가 반으로 찾아왔다. 츠키시마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린 채 의자 등받이로 몸을 기울였다.
“그래서?”
“보러가지 않을래? 우리 부 활동… 슬슬 시작할 거라 빈 수영장을 보는 건 한밤중이 아니면 어려울 거야.”
야마구치 타다시는 고교 입학 후 곧장 수영부에 들어갔다. 츠키시마와는 소꿉친구였는데 어릴 적 아키테루의 시합을 본 후 쭉 수영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현립 아지가사와 고교에는 총 15개의 문화부 활동이 있었는데, 수영부는 그 중에서 별로 주목을 받지 못 하는 클럽 활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올해 고교 임원이 교체되고 현 내 스포츠 고등학교 육성이 활발해지면서 수영부 개편과 수영장 내부 공사가 확정되었다. 야마구치가 아지가사와에 진학한 건 순전 그런 이유에서였다. 정식 선수도 아니고, 공식적인 활동 기록도 없이 막연한 동경만으로 수영을 뜨문뜨문 해온 야마구치로서는 수영부 하나를 위해 이사를 하거나 아키테루처럼 먼 학교로 진학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 결정은 꽤나 신중하고 적절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수영장 증축 소식에 가장 기뻐한 것도 야마구치였다. 반면 츠키시마는 흥미 없는 투로 “헤에, 그렇구나.”를 연발해 들뜬 야마구치의 기분을 폭삭 식어버리게 했다.
“츳키, 좀 더 들떠도 괜찮잖아.”
“난 수영부에 관심 없는 걸.”
“하지만 아지가사와에 진학하잖아?”
야마구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츳키는 수영장 때문에 진학하는 게 아니었어?”
“그렇다고 말한 적 없어.”
츠키시마는 냉담하게 말했다.
“야마구치, 넌 넘겨짚는 버릇 좀 고치는 게 좋겠다. 아지가사와에 진학하기로 한 건 우리 집에서 제일 교통편이 좋고 가깝기 때문이야.”
“츳키, 난 이해할 수 없어.”
그 때, 야마구치의 표정은 마치 힐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능숙한데 어째서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
그 날 둘이 싸웠다거나 그 이후로 사이가 틀어졌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야마구치는 입학식 전까지 동네 수영장을 종종 들락거렸다. 유난히 추운 날엔 축축한 머리가 조금씩 얼어있었다. 츠키시마는 야마구치를 따라 수영장을 두어 번 정도 들락거리긴 했지만 적극적으로 풀장을 가로지르진 않았다. 대신 풀장 근처에 난 조그만 스탠드에 앉아 야마구치가 수영장 끝에서 끝으로 몇 바퀴고 도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야마구치의 실력은 솔직히 말해 좋지 않았다. 수영을 시작한 건 아키테루의 그 해 경기, 그러니까 츠키시마의 형이 지역 신문의 1면을 장식하던 여름이었지만 야마구치는 고교 진학을 앞둔 겨울까지도 페이스를 지키지 못 하고 수영장 끝자락에서 헐떡이며 멈춰 서곤 했다. 칠 년이나 했으면서. 형편없는 실력이란 소리는 아니었다. 야마구치도 초중반 페이스를 지킬 줄은 알았다. 하지만 막바지에 도달하면 몸에 기운이 달려 도중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러니까 발길질 두 번이면 손끝에 단단한 벽이 있는 거리에서. 아키테루가 ‘형, 계속 가줘. 형, 멈추지 마!’란 소리에 급작 스피드를 냈던 그 지점에서.
그쯤에서 츠키시마는 천천히 일어난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아주 짧게 건성으로 진행한 후 물속으로 점프한다. 미끄럽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수면 아래로 파고들어가는 모양새다. 그 상태로 오래도록 물위로 올라오지 않고 허리와 다리를 움직여 수영장 중간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파하…… 숨을 몰아쉬며 솟구친다.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 순식간에 반 바퀴를 돌고 몸을 웅크려 벽을 박차고 반대편 방향으로 튕겨 오른다. 턴은 부드럽고 군더더기가 없다. 야마구치는 벽에 손을 짚은 채로 츠키시마가 한 바퀴를 완주하는 것을 지켜본다. 츠키시마는 뭍에선 굼뜨고 비척거리지만 물속에선 아주 빠르고 정확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고, 그것 외엔 실행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인답다. 츠키시마는 순식간에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고, 물속에서 솟구친 후 물방울을 털어내며 눈가의 물기를 닦아낸다. 츠키시마 케이는 물안경도, 제대로 된 준비운동도 없이 그렇게 빠르게 수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영 내내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야마구치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음에도 수면 위로 솟아오른 직후엔 항상 수영장의 왼쪽, 조금 높은 고도를 바라본다. 동네 실내 수영장의 왼쪽 벽면엔 넓고 하얀 타일이 붙은 벽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매번 수면 위로 솟아오를 때마다 그곳을 바라본다. 그 시선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야마구치는 츠키시마 케이의 그 순간엔 그와 완전히 단절되어 어디론가 동떨어진 장소로 추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혹은 츠키시마가 너무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느 쪽이던 혼자 남겨지는 건 츠키시마 케이인 것 같았다. 야마구치는 떠밀리던 남겨지던 왁자한 소음과 사람들 속에 파묻히고, 츠키시마는 떠밀던 떠나던 외딴 곳에 고립될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이 야마구치를 못 견디게 무섭게 만들었다. 일방적으로 친구 관계를 자처하며 붙어 다니는 그의 처지를 더욱 부각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야마구치는 풀을 헤치고 나아가 츠키시마의 팔을 붙잡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츳키, 있잖아… 나는 너랑 같은 고교에 가게 돼서 기뻐.” 그럼 츠키시마는 마치 “네가 성공적으로 숨을 쉬고 있어서 기뻐.” 따위의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야마구치를 흘겨보곤 풀 밖으로 빠져나왔다. 뚝 뚝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다시 스탠스 의자에 앉은 츠키시마가, “야마구치, 더 안 할 거야?”라고 물을 땐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응, 아니아니, 더 할 거야.” 야마구치는 그렇게 대답하곤 몇 번이고 풀장을 헤집고 다녔다.
츠키시마는 한 번 풀장에 들어가 그렇게 헤엄치고 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야마구치가 수영을 끝마칠 때까진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함께 샤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 내내 그들은 수영장과 집을 오가며 방학을 보냈다. 야마구치는 츠키시마가 수영을 분명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류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별로…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노력해.”라는 대답을 들었다. 형의 이야기를 꺼내도 마찬가지였다. “형과 나는 달라. 형은 재능이 있는 거고, 나는…….” 츠키시마가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나는 그저 두려움이 없는 거라고 형이 말했었어.” 야마구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해한 이후에도 여전히 마음으로 받아들이진 못 했다.
수영장에 고인 물은 아주 깨끗했고 소독약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은 초봄의 공기 속으로 온화한 햇빛이 투과하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교복 바지에 손을 욱여넣고 있자, 야마구치가 허둥대면서 마구 설명했다.
“츳키, 우리 학교는 근처 바닷가에서 물을 끌어올려서 쓴대. 정화조를 거치긴 하지만 소독약을 풀지 않을 때가 많댔어. 운영이 개편된다고 했으니 올해부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정화 해수를 받아놓은 모양이야.”
그는 깨끗하게 신축된 수영장과 스탠드를 들뜬 얼굴로 뛰어다니며 츠키시마가 느릿느릿 수영장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 어때?”
“어떻냐니…….”
츠키시마가 시시하단 듯 중얼거렸다.
“깨끗하고 넓다는 것 외엔 다를 거 없잖아.”
“여기, 경기장 수영장이랑 구조가 똑같아.”
야마구치가 눈을 반짝였다.
“있잖아, 제대로 된 감독이 온다면… 좋겠다, 그렇지?”
츠키시마 아키테루가 재학하였던 중학교 시절엔 과거 올림픽 선수로 출전했던 선수가 코치로 들어와 있었다. 아키테루는 그의 감독 하에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수영에 익숙해졌다. 그 전까진 수영의 정규 교육 과정을 밟아본 적 없던 아키테루가 그 해 여름 이뤄낸 성과 뒤엔 제대로 된 감독의 지시와 전문화 된 훈련이 있었다. 츠키시마는 야마구치 타다시의 순진한 열정에 헛웃음이 났다.
“야마구치, 너 정말 선수라도 할 작정이야?”
“뭐어? 난 그냥 좀 더 제대로 된 수영이 해보고 싶을 뿐이야. 제대로 된 완주를 할 수 있다면 좋겠어.”
야마구치는 당치도 않는다는 듯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런 건 츳키가 더 어울려.”
잠시 말이 없어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풀장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자 잔잔한 수면 위로 물보라가 일었다. 깨끗하게 닦인 새 타일들은 반짝반짝 매끄러워 보였고 깊은 물속으로 수면의 출렁임이 그대로 비쳤다. 야마구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수영, 해볼까?”
“…….”
츠키시마가 한순간 망설였다. 하지만 떨쳐냈다.
“수영복 없잖아.”
“교복 입은 채로 하는 거야. 뭐 어때. 말리면 그만인 걸. 물도 깨끗해 보이고…….”
“무리야. 점심시간 끝날 때까지 앞으로 10분도 안 남았어.”
츠키시마는 완강히 돌아섰다. 아이, 츳키. 한 번만, 이라고 매달리는 야마구치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가자. 그렇게 말하자 야마구치도 더는 조르지 않았다. 교복을 입은 채 수영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충동이었고, 츠키시마를 따라 수영장을 등지자 그것이 충동이었다는 걸 순순히 깨달은 눈치였다. 둘은 점심시간 종이 치기 전 수영부실을 빠져나와 교실로 돌아왔다. 다음 교시에 야마구치는 입부 신청서 두 장을 구해왔다. 츠키시마는 그것을 받아들긴 했지만, 곧바로 접어서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방과 후 즈음엔 그것의 존재를 완전히 떨쳐내는데 성공했다. 하교 직전 야마구치에게 메일을 받았다. 「츳키, 후회하지 않을 결정하기 o(≧▽≦)o」 츠키시마는 그 메일에 답장하지 않고 느릿하게 홀드를 내렸다.
츠키시마는 모두가 교실을 빠져나간 뒤에야 가방을 챙겨 나왔다. 복도는 아주 조용하고 보송보송한 기운으로 가득 차있었다. 봄의 햇살엔 응당 그런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다. 축축함과는 거리가 먼 건조한 감각,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불길하지 않은 느낌이다. 불길하지 않다는 것은 요컨대 건조한 땅과 메마른 풀 따위와는 다른, 진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봄에는 축축하고 차가운 것들을 쓸고 지나간 후에 남는 깔끔한 감각이 있었다. 흘린 물을 닦아낸 직후 보송보송하고 깨끗해진 유리의 표면처럼. 겨우내 쌓였던 눈을 녹이다 못해 지층 아래로 몰아낸 햇살, 싹을 키우는 건조한 흙, 가지 속에서 움츠리던 꽃이 망울을 터뜨리는… 그런 생명력이 봄엔 있었다. 사람들 역시 너나할 것 없이 그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새로운 것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계절에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고 일 년치 예산을 짜고 진도 예습을 하거나 수영부에 입부한다. 야마구치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츠키시마 케이는 봄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가을과 겨울 그 언저리가 어울렸다. 꿈틀거리는 생명력보다는 익다 못해 고개를 숙여 추락할 것을 기다리는 열매, 혹은 이미 추락이 끝난 이후 말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감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어쨌든 츠키시마 케이가 수영부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그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것을 갈망하지도 않았다. 설령 입부한다한들 수영장을 가로지르는 동안 느낄 수 있는 것은 성취감, 뿌듯함이 아니라 붕 뜬 느낌이리라. 자신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예감과 함께 그 해 여름이 떠오르는 것이다. 케이! 그렇게 부르며 손을 흔들던 아키테루의 축축한 몸.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이 숨을 죽이는 바람에 세상 모든 외설이 밖으로 몸을 비집고 튀어나오던 그 순간. 자신의 욕망이 적확하게 아키테루의 시선에 포착되었던, 츠키시마 케이 자신조차 깨닫지 못 한 그것을.
츠키시마의 발걸음이 멈췄다. 복도를 지나 수영장을 돌아가던 구간에서였다. 계단통을 몇 발자국 앞둔 오른쪽 복도의 벽면은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2층이었고 수영장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물그림자가 바닥에서 일렁거렸다. 유리 너머의 수영장 안쪽에 누군가 교복차림으로 서있었다. 츠키시마가 걸음을 멈춘 건 수영장에 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교복이 아지가사와 고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셔츠는 반팔이었고, 바지는 청색이었다(아지가사와 고교는 회색이다). 츠키시마가 잠시 고민했을 때, 수영장에 멀거니 선 소년은 두 손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더니 몸을 한 번 쭈욱 펼쳤다. 스트레칭은 아주 짧았지만 정확했고, 그것이 츠키시마를 사로잡았다. 그건 수영선수들이 경기장에서 흔히 선보이는 다섯 가지의 순서(목-어깨-허리-무릎-손목 발목)를 정확히 지키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무성의하고 무기력해보였다. 그는 발목까지 두어 바퀴를 돌린 후 스타트 라인에 섰다. 그리곤 아주 우아한 자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츠키시마는 아예 몸을 틀어 수영장 쪽을 보고 있었다. 소년은 오래도록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수영장 중간, 정확히 말하자면 중간보다 좀 더 간 지점에서 조용히 떠올랐다. 파하, 숨을 뱉은 후 능숙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츠키시마가 놀란 건, 그가 벽에 손을 짚기도 전에 턴 자세를 잡았다는 것이다. 몸을 웅크린 채 발을 반쯤 펼쳤을 때의 거리를 계산하고, 발바닥이 벽에 닿자마자 그대로 차고 튀어나갔다. 물살은 갑자기 바뀐 흐름을 견디지 못 하고 파도가 되어 출렁거렸다. 츠키시마의 발목 아래로 고인 물그림자가 마구 발등을 핥아댔다. 소년은 쉬지 않고 세 바퀴를 돌았고, 네 바퀴가 되어서도 흐트러짐 없는 속도를 유지했다. 풀장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순간 겨울 내내 야마구치를 보아온 츠키시마는 순간적으로 호흡을 무너뜨리고 수면 위로 헐떡이며 올라오는 장면을 떠올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끝까지 그 페이스 그대로 완주해냈고, 서두르지 않고 수면 위로 천천히 솟구쳤다. 햇빛 아래에서 축축한 은색 머리카락이 윤기 있게 반짝였다. 물에 젖은 얇은 교복이 등판에 달라붙어 있었다. 하아, 하고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어깨가 한 번 들썩이더니, 곧 고개가 움직였다. 그제야 츠키시마는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본인은 걷고 있었으며 그저 지나가는 행인으로서 계속해서 복도를 걸어 나가야 하는 존재였음을 자각했다. 시선이 마주치기 전 츠키시마는 바닥을 보며 재빠르게 통유리로 된 복도를 지나쳤다. 어깨 너머로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교문을 빠져나온 후에야 ‘수영부인가.’라고 겨우 질문해보았다. 하지만 타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전학생일까? 수영부 개편 소식을 듣고 온 교외 학생일 지도 모른다. 그럴 이유도 없었으면서 츠키시마는 괜히 바지에서 휴대폰을 꺼내 야마구치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야마, 구치, 넌, 정말로……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이유 없이 조금 후들거렸다. 변명거리를 찾지 못 해 불안해하는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2
츠키시마 아키테루가 국대 수영 선수를 배출한 고교 진학을 결심한 건 중학교 2학년 겨울 무렵이었다. 사실상 3학년이 되기도 전에 진학 사실을 결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주변에서 우려를 살 법도 한데, 아무도 그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주변인들은 그 해 여름 아키테루가 이룩한 눈부신 성과야말로 그의 전도유망한 미래에 대한 예고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부모는 아키테루를 위해 유명 수영부가 존재하는 현 내 고등학교를 물색한 장본인들이었다. 츠키시마 케이도 그의 형이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의심하지 않고 지지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아주 먼 곳, 신칸센으로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했을 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더는 아키테루의 경기를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섭섭함이 컸기 때문이고 아키테루가 기숙사 생활을 결정했으므로 방학 이외엔 그를 볼 수 없었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축하해, 형. 그렇게 말하는 츠키시마의 표정이 어지간히 서운해보였던 모양인지 아키테루도 조금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케이, 언제든 놀러와.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말 츠키시마가 찾아올 거라 기대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아직 일 년이 남아 있으니까, 경기도 몇 번 더 할 테고. 그 땐 비디오를 들고 와. 조금 쑥스럽긴 하지만 녹화해두면 네가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돌려볼 수 있잖아.”
그래서 츠키시마는 그렇게 했다. 다음 해 중학교 3학년이 된 아키테루는 춘분 현내 수영대회에서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올렸다. 작년 하계 대회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어 한 번의 예선조차 건너뛴 아키테루를 모두가 경계했다. 이름 없는 고등학교가 배출한―아키테루의 우승 이후 낙후된 교내 수영장 시설과 깨진 타일들은 종종 신문사의 화젯거리가 되어 지역 기사에 실렸다. 이후 재학 중학교는 수영장에 보수공사를 실시했다―천재 수영선수라는 이미지는 강렬했고 결코 추락하지 않았다. 아키테루는 그 해 팔월에 그러했듯 아름답고 완강하게 물속에서 유영하였다. 츠키시마는 언제나 경기장을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고도가 조금 높은 곳에 지어진 객석에 앉아 아키테루의 환상적인 수영을 지켜보았다. 한 손에 비디오카메라를 든 채였지만 생각보다 촬영은 어려운 일이었다. 걸핏하면 화면은 조금씩 흔들리거나 각도가 어긋나거나 응원을 나온 다른 객석의 풍선 봉에 가려져 초점이 나가거나 했다. 집에 와서 돌려보면 초짜의 티가 팍팍 나는 경기용 촬영 비디오물이 완성되어 있었다. 한 가지 만큼은 프로다운 면이 있었는데, 츠키시마가 평정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흥분하는 기색 없이 자리에 침착하게 앉아 있었기 때문에 화면은 조금 흔들리기도, 각도가 기울어지기도, 흐릿해지기도 했지만 마구 뒤틀리는 법은 없었다. 아키테루가 반드시 일등으로 들어올 거라는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이 충족되었을 때의 안도감만이 화면 안에 미세한 떨림으로(그것은 순전히 한숨 때문이었다) 전달될 뿐이었다. 아키테루는 그 해 춘분 대회에서도 순조로운 성적을 냈고, 하계 대회를 쉬는 대신 감독의 영향 하에 계속해서 개인적인 연습을 해나갔다. 아키테루의 페이스가 흐트러지는 법은 없었다. 그 해 팔 월, 찌는 듯한 무더위 속에서 눈부시게 물살을 가르다 말고 급작 날카롭게 앞으로 나아갔던 그 순간이 다시 오는 일은 없었다. 츠키시마는 춘분 대회의 모든 경기에 참석해 비디오를 찍었지만, 화면 속 아키테루는 일정한 속도로 물살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그 마법 같은 순간이 다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츠키시마 케이는 안도했다. 둘은 여전히 사이좋은 형제였고 아키테루는 연습을 마치고 귀가한 밤이면 욕조에 츠키시마를 앉혀놓고 등을 씻겨 주었다. 츠키시마도 아키테루의 등을 씻겨 주었다. 넓고 판판한 등판에 거품이 부드럽게 벤 타올을 문지르며 손가락으로 위에서 중간까지 더듬어 보기도 했다. 승모근, 날개 뼈, 소원근, 견갑골……. 그런 후에 일상적인 대화를 했다. 형은 수영이 좋아? 응 좋아하는 것 같아. 그렇구나 괴롭지 않아서 다행이야. 가끔 아키테루는 낄낄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츠키시마의 등에 바싹 붙은 아키테루의 가슴이 마구 웅웅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키테루의 목소리 혹은 웃음소리는 언제나 가벼운 느낌으로 츠키시마의 척추를 두드렸다. 아키테루는 크게 말하는 법이 없었다. 조근하고 다정하게 습윤한 욕실을 울리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있잖아, 형. 나도… 형이 있는 중학교에 갈까 봐.”
츠키시마가 중얼거렸을 때, 아키테루의 손이 축축한 그의 등을 쓸어주다 말고 잠시 멈추어 섰다.
“너도 수영하려고?”
“응…… 그렇지만 형처럼 되는 게 목표는 아니야.”
츠키시마가 웅얼거렸다.
“나는 그런 거 못 하니까…….”
“무슨 소리야.”
아키테루가 제법 엄격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 건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케이.”
얼마 뒤 아키테루는 츠키시마를 데리고 동네에 있는 실내 수영장으로 갔다. 야마구치도 함께였다. 아키테루는 킥보드를 야마구치와 츠키시마의 손에 들려주곤 풀에 들어가 발차기 시범을 보였다. 야마구치는 물에 떠있는 게 힘든지 연거푸 가라앉았다가 바닥에서 콩 콩 튀어 올랐다. 츠키시마는 킥보드 손잡이 부분을 소극적으로 주물거리다가 구석으로 치워놓았다. 거추장스럽다는 느낌이 들었고 오로지 몸과 그것의 움직임으로만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츠키시마는 조심스럽게 손을 떼어내고 풀에 섰다. 몸은 생각처럼 붕 떠주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며 중심을 잡을수록 무겁게 가라앉았다. 야마구치의 자세를 봐주고 있던 아키테루가 재빨리 다가와 츠키시마를 건져 올렸다.
“케이, 힘을 빼봐.”
의기소침한 츠키시마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두드리며, 아키테루가 덧붙였다.
“내가 처음 물에 들어갔을 땐 더 꼴사나웠어.”
츠키시마는 아키테루가 다시 야마구치를 봐주기 위해 수영장 중간까지 나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손을 올려 아키테루가 두드렸던 뺨에 가져다 댔다가 곧 떼어냈다. 그리곤 다시 풀 안으로 내려와 몸을 움직여보았다. 나아지지 않았다. 가라앉던 몸이 일순 삐끗해 중심을 잃었다. 츠키시마는 눈을 감아버렸다. 둥실 떠오른 발끝이 빙그르르 돌았다. 흡, 숨이 절로 막혔다. 아키테루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케이, 힘을 빼봐. 목소리는 아주 가까이 있었다. 아까 분명 바싹 붙어서 속삭였던 것 같았다. 귀에 달라붙은 상냥하고 온화하며 은근한 목소리. 척추를 두드리는 가벼운… 크게 말하는 법이 없는 아키테루. 츠키시마의 척추를 타고 찌르르 소름이 돋더니, 이내 항복한 것처럼 축 늘어졌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몸이 붕 떠올랐다. 축축한 물은 아까까지 갈퀴처럼 츠키시마의 발끝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는데 일순 태도를 달리했다. 부드럽고 고요하게 츠키시마 케이의 몸을 감싸고 출렁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츠키시마는 기묘한 행복을 느꼈다. 발끝에서부터 오금이 저리고, 몸 한가운데를 아주 부드럽고 연약한 감각이 관통한 것 같은 감각이었다. 츠키시마는 언젠가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다고, 그러니까 매일 밤 좁은 욕조에 몸을 욱여넣은 아키테루가 웃음을 터뜨리며 츠키시마의 등을 꼭 껴안을 때마다 느끼던 우애(友愛)와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또 그 감각은 최초의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 그 해 여름, 아키테루가 츠키시마를 향해 손을 흔들던 그 눈부신 순간을 끄집어 올렸다. 그 때, 왜 츠키시마는 불현 듯 아키테루를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만 것일까?
순간 모든 게 깜깜했던 공간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처럼 일순 주변의 공기와 질감이 뒤바뀌었다. 츠키시마가 기침을 하며 눈꺼풀을 열자 공포에 질린 야마구치의 얼굴이 보였다. 츠키시마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눈앞에 바싹 붙은 아키테루가 뚜렷해졌다.
“케이, 괜찮아?”
아키테루가 츠키시마를 흔들었다. 츠키시마가 몸을 움츠렸다.
“괜찮아, 그냥 떠있었을 뿐이야.”
“츳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야마구치가 이를 딱딱거렸다.
“막, 영화 속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처럼 등만 둥그렇게 떠있었다고!”
“야마구치가 비명을 질러서 나도… 큰일 난 줄 알았어.”
아키테루가 멋쩍게 웃으며 츠키시마를 물속에 내려놓았다. 츠키시마는 이제 허우적거리거나 콩콩 뛰지 않고도 물에 둥둥 떠 있었다. 아키테루는 감탄했다.
“금방 하는 구나. 역시 내 동생은 대단해.”
고작 물에 둥둥 떠있는 걸 성공한 것뿐이었는데. 유망주이자 수영 천재로 불리던 아키테루가 감흥에 차서 중얼거릴 만한 류의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데도 조금 기뻤다. 사실 아주 많이 기뻤다. 들뜬 츠키시마는 그 날 아키테루에게 자유형을 배웠다. 야마구치는 킥보드를 잡고 발차기를 하며 그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저녁 무렵엔 야마구치도 킥보드를 뗐지만, 숨을 고르지 못 해 곧잘 헉헉거렸다. 반면 츠키시마는 처음부터 호흡 따윈 문제도 아니었다는 듯 물속을 유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야마구치가 “역시 재능은 유전인 걸까.”라고 푸념하자, 츠키시마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키테루가 먼저 “재능이 있다면 케이 쪽이 아닐까, 난 물에 익숙해지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거든. 난 재능이랄까, 그냥 운이 좋았던 걸지도 몰라. 노력한 것의 성과일 지도.”라고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츠키시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키테루의 손을 힘주어 붙잡았다.
3
아, 스가와라 선배다! 그렇게 외치자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에 붙었다. 누군가 창문을 열어 바람이 마구 들어왔다. 펼쳐놓은 교과서 페이지가 마구 흩날리자 츠키시마는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에 의자를 두고 거꾸로 앉아있던 야마구치가 재빨리 손을 뻗어 츠키시마가 펼쳐놓은 페이지에 자를 끼워두었다.
“야마구치, 애쓰지 마.”
츠키시마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야마구치는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삼학년이 전학을 오는 건 드문 일이니까… 다들 신기한가 봐.”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일도 아니잖아.”
바람이 세게 불어서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츠키시마가 혀를 차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마구치는 허둥지둥 뒤따랐는데, 츠키시마가 창가에 가까이 다가섰을 땐 저도 모르게 팔을 덥석 붙잡았다. “창, 창문 닫으면 다들 기분 상하지 않을까?” “바보냐.” 츠키시마가 면박을 주었다. “그렇게 눈치 없진 않아.” 둘은 왁자한 아이들 틈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봤다. 점심시간마다 이학년 삼학년이 나와 공을 차거나 뒹굴었다. 축구부가 섞여 있기도 해서 지루하지 않았다. 운동장 한가운데를 빠르게 가로지르는 삼학년이 보였다. 공이 패스되자 발 옆에 능숙하게 붙인 채 골대 구역까지 뛰었다.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삼학년은 따라붙은 축구 부 이학년을 능숙하게 재치고 곧장 발을 쭉 뻗었다. 공은 골대 안으로 미끄러지듯 골인했다. 힘차고 강력한 슛은 아니었지만 걸릴 게 없는 깔끔하고 정확한 각도였다. 스가와라 선배! 누군가 이름을 부르자 삼학년이 고개를 돌려 츠키시마네 반 창가를 바라보았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무어라 말했지만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스가와라는 츠키시마의 교실 쪽으로 말하는 게 아닐 지도 몰랐다. 그가 입가에 손을 가져다대자마자, “네에? 네? 뭐라고요?” 하고 아래쪽 층계에서도 아이들이 한 무더기로 빽빽거렸기 때문이다.
“시끄럽네.”
츠키시마가 중얼거렸지만 야마구치는 창가에 얼굴을 붙인 채 스가와라를 집중해서 보고 있었다. 스가와라는 금방 경기로 돌아가 아이들 틈에 섞여 운동장을 뛰었다. 야마구치의 시선이 반짝이는 은발을 쫓아 조금씩 이동했다. 야마구치가 불쑥 말했다.
“츳키, 있잖아. 스가와라 선배는 어쩐지 미움을 받아선 안 될 것 같아.”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지만 그런 건 잘 알 수 없었다.
“그런 게 어디 있냐.”
“잘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이 든달까.”
야마구치는 츠키시마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어물어물, 그러나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어쨌든 상냥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라서. 그래서 그대로 돌려줘야 할 것만 같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야마구치가 스가와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이 학교의 모두가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상냥했다. 입학식이 있고 일주일 뒤 전학을 왔다는 소문의 삼학년은 잘생겼다기 보단 섬세하게 예뻤고, 그런 류의 외모는 또래 학생들이 가지기 흔치 않은 우아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상냥하고 누구에게나 쉽게 말을 걸었으며 또 쉽게 받아주었다. 맡은 일을 척척 해내고 교사들과도 완만했다. 스가와라 선배, 스가와라 선배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츠키시마는 무심한 눈으로 운동장의 은빛 점을 쫓았다. 한 번 더 골을 넣어서 아이들이 꺅꺅거렸다. 이번엔 야마구치도 오,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지르며 기쁜 듯 주먹을 쥐었다. 츠키시마는 정말 바보 같아, 하고 생각했다.
4
「츳키, 후회하지 않을 결정하기 o(≧▽≦)o」
「야마구치 너는 정말로 끈질기구나.」
5
그 날도 혼자 귀가했다. 야마구치는 부 활동이 시작한 수영장을 보고 싶다며 헐레벌떡 가방을 챙겨 나갔다. 츠키시마는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2층 복도에서 멈춰 섰다. 통유리 너머로 수영장 물이 마구 출렁이고 있었다. 여섯 줄에 각각 한 명씩 들어가 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야마구치는 스탠드에 앉아 타이머를 쥐고 있었다. 수영부 활동이 시작된 수영장은 일사분란 했고 사람이 많았다. 물은 잠시도 잔잔하지 못 하고 끊임없이 물방울을 튀기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물그림자가 바닥에 넘실거렸다. 츠키시마는 눈으로 은발머리의, 그 날의 뒤통수를 찾았다. 그러니까… 스가와라 코우시를. 그 날의 스가와라 코우시를 찾았지만 그는 없었다. 어쩌면 오늘 오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볼 만한 광경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스가와라는 수영복을 입고 있었을 것이고, 교복을 입었더라도 그 날의 교복은 아니니까. 츠키시마는 느릿느릿 복도를 가로질러 층계를 따라 내려갔다.
하지만 스가와라는 교문 뒤편에 있었다. 츠키시마는 제법 놀랐는데, 더 놀란 건 스가와라 쪽인 것 같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화단에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츠키시마가 고개를 숙이자 손사래를 쳤다.
“아, 괜찮아 괜찮아. 내가 주울게.”
하지만 츠키시마의 팔이 더 길었고 스가와라가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수국 가지 사이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을 땐 츠키시마 쪽이 오히려 좀 당황했다. 스가와라는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고마워, 하고 그의 손에서 담배 갑을 받아들었다.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담배 때문에 화들짝 놀란 것이라 생각했는데 들키자마자 뻔뻔해지는 게 이상했다. 스가와라는 가방 안에 담배 갑을 쑤셔 넣곤 츠키시마 쪽을 보며 씨익 웃었다.
“갈까?”
둘은 버스정류장까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력으로 걸었다. 교문을 나서자 해안도로, 그리고 옆으로 난 보행자 길이 펼쳐졌다. 푹신푹신한 고무바닥을 걸으며 스가와라가 먼저 이것저것 물었다.
“이름이 뭐야?”
알 거 없잖아요, 라고 대답하려다가 순순히 말했다.
“츠키시마 케이(月島 蛍)요.”
“아, 츠키시마인가. 달인가, 역시 그렇네.”
딱히 대꾸할 만한 감탄사는 아니라서 츠키시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둘 옆으로 버스 한 대가 천천히 지나갔다. 도로는 한산했고 가드레일 너머론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잠시 후, 스가와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집은 여기서 가까워?”
“여기서 세 정거장 정도…….”
“아, 가깝구나. 가깝네, 응.”
스가와라는 츠키시마가 들고 있는 새 가방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
“일학년?”
“예에, 뭐.”
“일찍 하교하네.”
“그런가요.”
“츠키시마는 부 활동 같은 거 안 하는 걸까~”
“저기.”
츠키시마가 멈춰 섰다. 앞서나가던 스가와라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츠키시마가 말했다.
“말 안 할 테니까 그렇게 애쓸 필요 없어요.”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의 머리가 부드럽게 흩날렸다. 스가와라가 잠시 눈을 크게 떴는데, 아주 한순간이었기 때문에 츠키시마는 순간 헛것을 본 건 아닐까 생각했다. 잠시 뒤 스가와라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 그런가.”
아까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상큼하다거나 말랑말랑하지 않았다. 아까 같았지만 분명 조금은 달랐다. 츠키시마가 다시 앞으로 걸어가려고 하는데, 츠키시마, 있잖아, 하고 스가와라가 재차 말을 꺼냈다.
“수업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를 보고 있었지?”
츠키시마가 멈추어 섰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이제 무언가 ‘발각’되었고 ‘포착한 순간’을 ‘쥐고 흔드는’건 츠키시마의 영역만이 아니게 됐다. 스가와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있지, 츠키시마.
“나 교복 입은 채로 수영한 것도 비밀로 해줄래?”
“…….”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어서. 별 말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리고 그는 다시 앞서서 걸어갔다. 츠키시마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 등을 바라보았다. 비밀로 지켜달라고 말한다는 건 구라 뻥이고, 그러니까 방금 저 선배는 순전 날강도처럼 협박한 것이다. 분명 그런 의도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츠키시마가 엉거주춤 서있기만 하자, 스가와라가 앞서 가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츠키시마, 가자. 버스 오겠다.”
그리고 다시 예의 그 상큼한 웃음이다.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의 웃음 속에서 일종의 배설감과 후련함을 읽어냈고 완전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됐다.
‘와. 성격 나빠…….’
야마구치에게 이 일에 대해 말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스가와라의 뒤를 쫓아가면서 츠키시마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정말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스가와라를 대화의 바운더리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뭔가, 스가와라가 ‘상큼하고 멋진 3학년의 그 선배’로만 축약되는 것 같았고 성격이 나쁘다던가, 수영을 했다던가 하는 일은 어딘가로 소실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둘은 그 날 같은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츠키시마가 먼저 내렸다.
6
츠키시마가 촬영할 수 있던 아키테루의 경기는 3학년 춘분 현내 대회가 마지막이었다. 하계 대회를 건너뛴 아키테루는 개인 실적을 올리는데 매진하였고 겨울 무렵 현 대회보다 큰 규모의 시합에서 금상을 탔다. 토너먼트가 아닌 단일 경기였고 경기장이 너무 멀어서 츠키시마는 찾아갈 수가 없었다. 신칸센으로 두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에서 열린 시합이었는데, 아키테루가 굳이 그곳까지 찾아간 것은 순전 고교 스포츠 장학생 입학을 위해서였다. 수업시간이 겹쳐 경기를 보진 못 했지만 츠키시마는 하교 후 시간을 맞춰 아키테루를 역까지 마중 나갔다. 아키테루는 물기가 조금 남은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을 문지르다 말고 츠키시마를 보자 두 팔을 벌렸다. 츠키시마가 안겼다.
“케이, 너 키가 컸구나.”
품에서 츠키시마가 떨어지자, 아키테루가 새삼 말했다. 츠키시마는 해실거리며 웃었다.
“일등 했어?”
“당연하지.”
둘은 저녁노을을 등지고 역을 빠져나와 계속해서 걸었다. 겨울의 해는 빨리 졌기 때문에 노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길은 금세 깜깜해졌다. 도로를 지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추수가 끝나 텅 빈 논두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평선으로 땅거미가 사라질 무렵 츠키시마는 아득히 먼 곳에서 깜빡이는 붉은 점을 보았다.
“형, 저게 뭘까?”
아키테루는 츠키시마가 가리킨 지점에서 깜빡거리고 있는 붉은 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글쎄, 아마 송전탑에서 오는 걸 거야. 왜 빛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과연 그렇구나. 츠키시마는 빠르게 납득했다. 까만 산등성이 위로 듬성듬성 세워진 철제 송전탑은 아오모리 현에 아주 많았고, 빨간 불빛은 그들 중 하나가 전송하는 신호인 것이다. 전기를 잘 운송하고 있다. 당신들의 마을을 밝혀줄 전기가 내 몸을 관통하고 있다. 츠키시마는 궁금해졌다.
“저기 가보고 싶다. 가까이서 보고 싶어.”
“그럴래?”
둘은 방향을 꺾어 산등성이 쪽으로 나아갔다. 논두렁이 넓어졌고 외곽 도로에 드문드문 세워진 가로등이 깜빡이다가 팡 하고 빛을 내며 켜졌다. 길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불빛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귀뚜라미조차 울지 않는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둘은 그 침묵에 맞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시합 이야기, 수영하며 나아가는 순간에 대한 것, 야마구치, 엄격한 감독, 진학할 고교의 현대적이고 전문적인 시설들…… 문득 아키테루가 시간을 보곤 뒤를 돌아 지나온 길을 확인했다. 제법 많이 걸어왔음에도 둘은 송전탑 실루엣조차 보지 못 한 상태였다.
“케이, 너무 늦었다.”
아키테루가 메일 알림이 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저녁 밥 다 됐대. 너무 기다리시기 전에 돌아가자.”
츠키시마는 순순히 그 말에 따랐지만 돌아오는 동안 흘끔거리며 깜빡이는 빨간 불빛을 두어 번 정도 돌아보았다. 종국엔 아키테루가 달래듯이 약속했다.
“다음에는 꼭 저기 가보는 거야.”
하지만 그 말투는 언젠가 케이, 언제든 놀러와, 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가자고 한다면 가겠지만 당장의 일은 아니야.’라는 것처럼. 츠키시마는 그것이 조금 서글펐던 것 같다.
7
스가와라는 예상치 못 한 곳에서 나타났다. 1학년 교실의 뒤편, 연식 야구장과 맞은편엔 야트막한 화단이 있었다. 올해부터 경식으로 바뀐 야구부가 경기장 보강 공사가 끝날 때까지 현 내에 있는 체육관 야구장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다른 이유가 없으면 그곳에서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츠키시마가 화단까지 화분을 옮겨달라는 번거로운 부탁을 받아들인 건 순전 그런 이유 탓이었는데, 그곳에 스가와라가 있던 것이다.
“아, 또 마주쳤네.”
“아…….”
츠키시마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스가와라는 크게 놀라는 기색 없이 어깨를 으쓱하곤 말았다. 그리곤 츠키시마의 품에 들린 화분을 턱짓으로 까딱였다.
“뭐야?”
“화분이요…….”
“그거 물어본 거 아니란 거 알잖아.”
심술부리지마, 라는 말투였으므로 츠키시마는 잠시 한숨을 쉬며 인상을 찡그리다가 대답했다.
“1학년 B반 교사의 심부름이요.”
“음, 그러니까 츠키시마는 1학년 B반이라는 거지?”
스가와라가 웃었다.
“츠키시마는 담임을 담임(擔任)이라 말하지 않는구나.”
“별로, 담임이라고 아주 안 하는 것도 아니에요.”
츠키시마가 대꾸하곤 화분을 내려놓은 후 긴 다리를 접어 쭈그리고 앉았다. 스가와라는 음, 하고 즐거운 기색이었다.
“숨기고 싶었는데 단박에 알아차려서 싫구나?”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츠키시마는 얼굴에서 티가 나니까.”
츠키시마가 삽을 주워들다 말고 흙더미 속으로 푹 꽂아 넣었다. 스가와라를 올려다보자 시선이 마주쳤다. 스가와라는 피하지 않았고 그 이상 웃지도 않았다.
“지금 나 귀여워하는 거야.”
웃기고 있네! 순전 화풀이면서. 츠키시마 케이는 실수를 했다. 그 날 그렇게 말해선 안 되는 거였다. 한순간이었지만 츠키시마는 스가와라가 수비하는 선을 넘었고,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요”라는 말은 애쓰고 있는 스가와라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를 전면 앞으로 내보냄으로서 치부를 노출시킨 꼴이 됐다. 사실 츠키시마는 그게 치부인지 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스가와라는 명백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기.”
츠키시마가 먼저 화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다시 삽을 주워들었다. 푹 푹 흙을 쑤시며 말했다.
“제가…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건가요?”
어쩐지 그 말을 하는 동안 스가와라의 표정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츠키시마는 애꿎은 흙을 떠서 한쪽으로 꾹 꾹 눌러 담았다. 스가와라는 평소보다 더 오래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 틈이 ‘정적’으로 인식되기 직전 다시 입을 열었다.
“담배 피워도 되지?”
화분에서 자갈을 떠내던 츠키시마의 손이 멈칫했다.
“피운다, 츠키시마. 망 좀 봐줘. 응?”
아, 이 사람 피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추격하고 싶진 않았다. 츠키시마는 모종삽으로 흙을 통째로 떠내서 화분에 있는 식물을 구덩이 안으로 흘려보냈다.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라이터 부싯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머리 위로 연기 냄새가 났다. 츠키시마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스가와라는 정말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들키면 저도 혼나요.”
“들킬 일이 없잖아.”
스가와라가 연기를 뱉으며 입 꼬리를 올렸다.
“여긴 사람이 오지 않으니까. 별관이고, 옆은 공사 중이고.”
“…….”
아까는 망을 봐달라고 했으면서. 츠키시마가 대답하지 않자 스가와라 쪽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곤 상큼한 얼굴을 했다.
“너도 그래서 온 거 아니야? 번거롭게 식물까지 데리고.”
스가와라가 츠키시마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츠키시마는 순간 불쾌함을 느꼈다. 원초적인 부분을 공격받은 기분이고, 웅크린 채 덮고 있던 이불을 예고 없이 열어젖혀진 기분이고, 잘 싸맨 보자기를 통째로 쥐어뜯긴 기분이다. 하지만 고의는 아니었다. 츠키시마는 스가와라의 선을 넘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스가와라는 명백히 고의였지만 츠키시마는 이런 전개를 원하지 않았다. 수습하고 싶었지만 방도를 몰라서 억울해졌다.
“스가와라 선배.”
“응.”
스가와라는 츠키시마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런 일이 많았으니까. 낯선 학생들이 스가와라 선배 혹은 스가와라, 라고 부르고, 그리고 몇 가지 인사와 동경을 나눈 후 들뜬 표정으로 떠나간다. 그러니까 스가와라에게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들.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와아, 박수를 치다 떠나갈 아주 먼 세계의 구성원들. 츠키시마 케이는 그 세계의 가장 바깥쪽에 있었고 심지어 스가와라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스가와라가 아주 좋아하는 부류에 속한다. 하지만 첫 대면이 고약했다. 츠키시마는 사실 세계 가장 바깥쪽을 걷는 게 아닐 지도 모른다.
“츠키시마, 불렀으면 말을 해.”
“……아니에요.”
츠키시마는 화분 옮기는 것을 끝내고 천천히 일어났다. 흙먼지가 회색 교복 바지에서 뿌옇게 떨어졌다.
“담배 같은 거, 왜 하는 건가요?”
뜬금없는 질문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물어보고 싶었다. 츠키시마가 스가와라의 얼굴을 살폈다. 스가와라는 금방 눈치 채고 웃음으로 덮었다. 젠장. 츠키시마는 치밀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동족혐오.
“그런 게 궁금했어?”
마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연기가 자욱해질수록 색채가 희박한 스가와라의 모습이 햇살 속에서 점차 흐려졌다. 담배를 피우는 스가와라는 명확한 색채와 대비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홀로 투명도 낮은 수채화로 그려진 것 같다. 사라지기 위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을까? 츠키시마는 문득 생각했다. 그렇다면 스가와라 선배는, 어쩐지 잘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서서히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몸에 좋지 않잖아요.”
“걱정해주는 거야?”
“선배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헤에,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선배는…….”
츠키시마는 스가와라가 벽에 손을 짚기도 전에 턴 자세를 잡았던 순간, 몸을 웅크린 채 발을 반쯤 펼쳤을 때의 거리를 계산하고 발바닥이 벽에 닿자마자 그대로 차고 튀어나간 그 순간을 떠올렸다.
“수영부… 잖아요.”
잠깐 정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스가와라가 몹시 즐거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반응을 이해하지 못 한 츠키시마가 머뭇거렸다. 스가와라는 손등으로 성마른 이마를 닦으며 나머지 한 손으로 반쯤 태운 담배를 등지고 있는 건물 위로 지졌다. 바람이 불어 응축되어 있던 하얀 연기가 날아갔다.
“아하하… 츠키시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츠키시마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아닌가요?”
“아닌데.”
스가와라는 힘 빠진 웃음소리를 몇 번이고 더 싱겁게 뱉어냈다가 그만두었다.
“그럼 축구부인가요?”
“아니!”
“배구부?”
“우리 학교에 배구부가 있었나?”
“테니스부?”
“땡.”
“배드민턴부?”
“츠키시마.”
스가와라가 말했다.
“난 귀가부(歸家部)야.”
츠키시마의 뒤통수가 다시 한 번 얼얼해졌다.
“예?”
“너랑 같아.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부 활동 없이.”
스가와라는 대수롭지 않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리곤 발치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몇 번 실내화로 꾹 눌러 밟은 후 화단을 넘어서 무성히 사라기 시작한 수국의 줄기 아래로 굴려버렸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
“그야…….”
당신은 어떻게 자신의 몸을 다뤄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라고 말한다면 변태로 낙인찍힐 것이다. 운동부만 골라 물어본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일단 명제자체부터 맘에 들지 않았지만 만약)스가와라가 수영부가 아니라면, 그는 몸을 쓰는 다른 부에라도 들어가야 한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종이 쳤다. 스가와라는 눈을 깜빡이며 운동장 쪽을 돌아보았다.
“아차, 까먹고 있었네.”
스가와라가 낭패란 표정을 지었다.
“오늘 시합에 내 이름도 있었을 텐데.”
“큰일 난 거 아닌가요.”
츠키시마는 조금 비꼬았다.
“평판에 문제가 생길 지도.”
“츠키시마는 그런 거 신경 쓰는 타입이야?”
이번에도 스가와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츠키시마는 조금 비꼬려 했던 꼭 그만큼의 수치심을 느꼈다.
“아니…….”
“난 아무렴 상관없어.”
스가와라가 대답했다.
“…아마도.”
그런 후 대답도 듣지 않고 화단을 빠져나갔다.
남겨진 츠키시마가 허리를 굽혀 그가 버린 꽁초를 주워들었다. 아마도, 라니……. 츠키시마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스가와라는 중앙 현관에 도달해 있었다. 멀어져가는 스가와라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건 돌이켜보면 아주 이상한 대답이었다.
신발장에 낯익고도 낯선 신발 한 쌍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츠키시마는 부리나케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형.”
“케이. 왔어?”
식탁에 앉아 젓가락을 움직이던 아키테루가 고개를 돌렸다. 츠키시마의 안면근육이 흐물흐물해졌다. 식탁엔 돈까스와 양배추 샐러드가 얹어져 있고, 거실엔 TV가 켜져 있었다. 그 말은 즉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있을 것이고 어머니는 2층에서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키테루의 귀가는 이런 식으로 가족들을 불러 모으게 했다. 아키테루의 고교 시절, 그가 방학 동안의 연습 기간을 마치고 귀가하는 날이면 온 가족이 집에 모였다. 아버지는 일찍 퇴근하고 어머니는 음식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할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어머니가 직접 아키테루가 좋아하는 것들을 튀겼다. 츠키시마도 다른 약속을 잡지 않고 곧장 집으로 왔다. 온 가족이 그랬다. 고작 일주일 동안인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고작 일주일이었기에 모두가 아득바득 집에 모였던 걸지도 모른다. 아키테루가 대학에 간 이후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고교 때보다 드문 일이 되었지만 현관문 앞에 그 낯설고도 낯익은―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그가 매번 새 운동화를 신었기 때문이다, 보지 못 한 신발의 익숙한 사이즈를 마주하는 건 늘 낯설고도 낯익은 일이었다―신발 한 쌍이 놓인 순간 가족들은 집으로 들어와 각자의 할 일을 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각자의 포지션을 지키며 집에서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그렇게 일상적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다 집안 어딘가에 머물고 있는 아키테루를 마주치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몸은 좀 어때?”
츠키시마가 입을 흐물거리며 물었다.
“형, 몸은 좀 어때?”
“나야 늘 좋지.”
아키테루가 쾌청하게 웃으며 맞은편 의자를 발로 밀어냈다.
“케이, 밥 안 먹었지? 같이 저녁 먹자. 네 몫도 있어.”
츠키시마는 접시를 덮어놓은 밥과 여분의 돈까스를 들고 아키테루가 밀어놓은 의자에 앉았다. 아키테루는 빠르게 먹었고 츠키시마는 느리게 먹었다. 학교는 좀 어때? 야마구치는? 너도 몸은 괜찮아? 아키테루가 물으면 츠키시마는 모든 질문에 그럭저럭이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것 외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수영은 좀 어때?”
아키테루가 그렇게 물었을 때, 츠키시마는 잠깐 젓가락질을 멈췄다.
“그냥…….”
츠키시마가 반찬을 내려다보았다.
“그럭저럭이야.”
“그래도 계속하고 있구나, 다행이다.”
츠키시마는 대꾸 없어 밥알을 마구 씹어서 조금씩 삼켰다. 아키테루가 들뜬 목소리로 몇 가지 일들에 대해 말했다. 국대와 선수촌, 선수단 스카우트 제의와 자퇴 고민에 대한 것이다. 고교 동창이 최근 모교에 돌아가 감독을 뛴다는 이야기를 할 땐 새삼스럽다는 말투를 했다.
“그 녀석, 선생이라던가 감독 같은 일은 질색했던 주제에 잘도 돌아갔단 말이야.”
“사실은 그런 일 좋아했던 게 아닐까.”
“진심으로 질색했었다니까?”
“잘 숨기는 사람이었나 봐.”
츠키시마가 말했다.
“아니면 정말로 마음이 바뀌었거나.”
“그럴 지도.”
아키테루가 웃었다.
“어쨌든 깜짝 놀랐어. 벌써 3년째라는 소릴 들었을 땐 와 장난 아니잖아, 라고 생각했다니까. 천재가 있냐고 물어봤거니, 올해 대단한 녀석이 들어왔다고 하더라. 재능도 있는데 의욕도 있다고.”
“헤에.”
츠키시마는 감흥 없이, 그러나 아키테루의 이야기가 지루해서는 아니라는 것처럼 그렇게 감탄했다.
“형의 화신 같은 건가.”
“케이도 참, 난 천재가 아니었다니까.”
아키테루가 민망한 듯 웃었다.
“여하튼 레귤러 멤버였던 삼학년이 별 불만도 없이 자릴 내줄 정도였다고 하더라. 그 소릴 듣는데 내 학창시절이 떠올랐어. 나도 삼학년 때, 대단한 녀석이 한 학년 아래에 있어서 바로 팀에서 나오겠다고 했거든.”
“형은… 국대 준비 때문에 그런 거였잖아.”
아키테루의 말투가 꼭 도망쳐 나왔다는 것처럼 들려서 츠키시마가 변호했다.
“대학도 있었고, 입시 준비도 해야 했고.”
“뭐, 그것도 있었지.”
아키테루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완전히 긍정하지도 않았다.
“압박감도 있었고 피곤하기도 했어. 어쨌든 졸업을 목전에 두고 재능이라던가 천재성이라던가 그런 걸로 경쟁하고 싶진 않았거든. 무엇보다 좋아하는 걸 싫어하게 될까 봐 무서웠어.”
츠키시마는 말문이 막혔다. 좋아하는 걸 싫어하게 될까 봐. 이번에 츠키시마는 아무 것도 변호해줄 수 없었다.
“뭐, 여하튼 지난 일이니까.”
아키테루는 돈까스를 털어 넣고 우물거렸다.
“밥 다 먹고 수영장 보러 갈래?”
버스를 타고 30여분을 가자 시가지와 넓은 현립 실내 체육관이 나왔다. 두 정거장 앞이 아쿠아리움이라 아이들이 우르르 탔다가 우르르 내렸다. 둘은 정류장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 나갔다. 현립 체육관 근처엔 넓은 잔디장이 있었고 봄의 햇살을 즐기며 뒹굴거나 앉아 있는 사람이 많았다. 아키테루와 츠키시마는 분수대와 유리문을 지나쳐 지하로 내려갔다. 수영장은 아주 넓고 깨끗했다. 100m와 500m 풀장이 둘로 나뉘어 있고 양쪽마다 스탠드가 비치되어 있었다. 아키테루와 츠키시마는 수영복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그저 2층 유리 너머로 그 거대한 공간을 지켜보기만 했다. 둘은 정말 수영장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풀의 시작점에서 도착점으로, 그리고 다시 도착점에서 시작점으로 수영하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아키테루가 말했다.
“케이, 나 여름방학엔 집에 올 거야.”
츠키시마가 고개를 돌려 아키테루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대학 문제도 결정하고, 네가 방학인 동안엔 같이 여기서 수영이나 해볼까하고.”
아키테루가 고개를 돌려 츠키시마와 눈을 마주치곤 씩 입 꼬리를 올렸다.
“어때?”
츠키시마는 달리 어떤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면서도 대답했다.
“그럭저럭…….”
아니,
“좋아.”
“좋다니 다행이다. 부담 주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아키테루가 한숨을 쉬며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부담을 준다는 건 무슨 뜻일까. 만약 츠키시마가 아키테루를 만나기 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