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즈스콧 «본즈와 스코티가 짝사랑을 할뿐인 이야기»

넌 항상 짐의 이야기를 해


제임스 T 커크는 돌연 나타났다가 돌연 사라질 수 있는 사람이다. 금발과 푸른 눈은 그의 영웅적 행보에 비논리적인 신빙성을 심어준다. 천사 같아요. 혹은 신이나. 말도 안 되는 일들도 그럭저럭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레너드 맥코이가 제임스 T 커크를 처음 봤을 때, 그는 엉망진창이고 볼품없었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리버사이드 쉽은 스타플릿으로 향하는 예비 생도들을 빽빽하게 수용했고 생도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그와 커크뿐이었다. 아침의 햇살 아래서 군데군데 부식한 쉽의 표면은 한껏 도드라져 보였다. 그게 레너드 맥코이를 불안하게 했다. 쉽의 갈라진 틈 사이로 들어온 무중력 상태의 각종 바이러스와 질병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불안감은 털털거리며 이륙 준비를 하는 쉽의 바닥을 밟았을 때 현실감으로 가중되었다. 화장실에 앉아서 갈게요. 안절부절 못 하는 그를 생도는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의사에게 가보세요. 가긴, 내가 의산데. 레너드가 허우적거리자 생도는 그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앉으세요. 화장실에 가있겠다니까요! 실랑이를 하는 동안 생도가 그를 빈자리로 익숙하게 밀어 넣었다. 제가 비행공포증이 있어서……. 레너드가 포기하지 않고 의자 앞에서 어물거리자 생도는 눈을 부릅떴다. 곱게 앉지 않으면 제가 직접 앉혀드리죠.
“……알겠어요.”
“고맙군요.”
의자는 엉덩이보다 조금 좁았다. 레너드는 몸을 욱여넣다시피 했다. 어깨에 벨트를 두르고 고개를 드니 금발의 청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레너드가 그의 얼굴, 자잘한 흉터와 기껏해야 어제 혹은 그제 튄 혈흔, 피멍과 찢어진 입술을 훑었다. 스타플릿의 숭고한 임무수행을 준비하기로 다짐한 사람보단 뒷골목에서 병나발을 불다 덜미를 잡힌 갱단 끄나풀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회색 맨투맨 목덜미에 튄 핏자국이 그 가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레너드는 그제야 쉽 안에서 평상복을 입은 사람이 저와 눈앞의 청년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구토감이 솟았다.
“토할 지도 몰라.”
레너드가 경고했다. 청년이 얼굴을 희미하게 찡그렸다.
“이거 안전할 걸요.”
확신에 찬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길 희망하는 사람의 것과 비슷했다. 이 놈은 비행경험이 없는 거야. 사천 미터 상공에서 요동치는 기내를 경험한 적도 없겠지. 트라우마 없는 자들이 고통에 대하여 넘겨짚듯이. 레너드 맥코이는 전혀 위안 받지 못 했다.
“함선에 슬쩍 금만 가도 우린 타죽어. 눈 깜짝할 사이에 통닭 신세가 되고 말지. 온몸이 지글대고 압력으로 눈동자가 터져나갔을 때도 지금처럼 태연할 수 있나 보자고.”
그는 정말로 함선이 추락하거나, 혹은 녹아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훈련소에 정박된 쉽에 탑승하기 전 레너드 맥코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함선의 표면을 확인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확신이 서지 않으면 그대로 내려올 생각이었다. 스타플릿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은 많았다. 다음 정거장을 기약하며 트럭을 타고 사흘 밤낮으로 달려 나갈 수도 있었다. 생도가 그를 끌어당기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까 레너드는 정말 함선 바깥쪽으로 반쯤 몸을 빼놓고 있었다.
“우주는 질병과 위험, 어둠과 끔찍한 침묵의 온상이야.”
레너드가 퍼붓자 청년은 좀 질린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스타플릿 함선이 우주를 떠날 수는 없잖아요. (달리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레너드는 고개를 숙여 제 몸을 조이는 벨트가 단단한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험 삼아 당겨보고 마구 흔들었다.
“하긴, 달리 갈 데도 없어.”
안전으로부터 확신을 얻은 레너드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마누라가 이혼하면서 행성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한 금액을 청구했거든. 뼈만 남겨놓고 다 털어간 셈이지.”
주머니에 들어있던 브랜디를 목구멍으로 넘기자 울렁거리던 위장이 주춤거렸다. 알코올은 목구멍을 덥히며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줬다. 발밑이 진동했다. 함선이 출발하는 동안 레너드 맥코이는 죽음, 금 간 함선, 녹아내리는 시체들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옆 자리 청년에게 브랜디를 넘겨주자 그는 거절하지 않고 남김없이 마셨다.
“제임스 커크에요.”
“레너드 맥코이야.”
그 다음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누군가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그렇게 푸르게 빛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함선은 최대 속력을 출력하며 부드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몇 마디 대화를 더 했지만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구토감이 치솟은 레너드가 입을 다물었던 탓이다-그래도 토하진 않았다. 그들은 생도가 됐고 스타플릿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함선에 탑승했다. 그리고 우주로 나가게 됐다. 이혼이니 행성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금액이니 뼈밖에 남지 않았다느니 떠들어 댔던 게 인상 깊었던 모양인지 제임스 T 커크는 첫 만남 이례로 쭉 레너드 맥코이를 본즈라 불렀는데, 그 호칭은 함선에 탄 이후에도 함장석에 앉은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고 언젠가부터는 주변 사람들도 그를 하나 둘 본즈라 부르기 시작했다. 별명은 애칭에 가까워졌다가 어느 순간 호칭으로 바뀌었다.
“닥터 맥코이.”
이야기가 거기까지 도달했을 때, 스콧이 조용히 잔을 채워주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출렁이는 잔을 기울여 테이블 한가운데에 놓인 주인 없는 잔에 건배했다. 스콧이 따라 잔을 들어올렸다.
“함장을 위하여(For our captain.).”
쨍, 하고 잔이 부딪쳤다. 둘은 말없이 위스키를 반 모금씩 머금었다가 잔을 흔들며 내려놓았다.
말하자면 짝사랑 클럽 첫날이었지만 평소와 별반 다른 건 없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침묵하고, 잔이 비면 채우고 건배사를 읊은 후 제임스 T 커크에 대해 이야기한다. 테이블 가운데엔 언제나 주인 없는 잔이 있다. 술잔의 주인은 9시까지 브리지 교대를 기다리다 개인실로 들어가자마자 뻗을 것이며, 메디베이 혹은 기관실로 내려올 일이 없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면 제임스 커크는 비실거리며 아침부터 칭얼거렸기 때문이고, 그가 한밤중에 예고도 없이 메디베이로 들이닥친다면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기 분명한데-섹스, 혹은 플러팅-그럴 일은 전무한데다가 비슷한 이유로 그가 기관실에 내려갈 일은 만일에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레너드 맥코이와 몽고메리 스콧이 제임스 커크를 위해 술자리를 물린 적은 없었다. 테이블 사이엔 늘 커크가 마시지 못 할 그의 잔이 준비되어 있고, 레너드와 스콧은 자리 없는 잔의 주인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것이다. 커크의 잔은 술이 바닥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규칙은 아니었지만 둘은 항상 그 몫의 잔을 남겼다가, 그대로 버렸다.
둘은 대체로 기관실에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는 일 자체도 종종 있는 일은 아니다. 질병과 부상은 엔터프라이즈호에 탑승한 수백 명의 대원들처럼 쉬지 않고 쉬프트 근무를 하기 때문에 메디베이의 침대가 비는 일은 천운에 가까울 지경이고, 메디베이가 비지 않으면 레너드 역시 술 생각은 진작부터 접는 게 좋았다. 몽고메리 스콧의 사정도 다를 건 없어서 대체로 야간근무에 시달렸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얌전한 아가씨처럼 보이지만 속은 깐깐하고 섬세해서 걸핏하면 안전지대를 벗어난 수치로 기관실을 앵앵 울리는가 하면 워프코어의 에너지가 마구 뒤섞이고 있다고 모니터 가득 경고문을 띄웠다. 진땀을 빼며 밤낮으로 거기 매달려 있다가 바닥 혹은 개인실 근처에 엎어져서 잠이 들면 삭신이 쑤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건 손으로 꼽아봐야 한 달에 서너 번 정도였다. 직책의 문제는 아니다. 함선은 넓었고 일은 많았다. 대원들은 누구나 공평하게 바빴다. 그래도 시간이 나면 다들 꾸역꾸역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몇 명은 섹스를 하고 몇 명은 키스를 하고 몇 명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거나 토론을 하거나 가상현실에 빠져 있거나 그리고 레너드 맥코이와 몽고메리 스콧은 잔을 든다. 술을 마시고 잡담을 한다. 대게 제임스 커크의 이야기다. 이따금 조지 커크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고 금방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메디베이가 비는 날엔 그곳에서 마시고 그게 아니면 기관실에서 마셨지만 전자는 드물게 벌어졌으므로 대게 후자였다.
처음 기관실에 내려갔을 때, 요란한 엔진소리를 막연히 상상하던 닥터 맥코이는 조용한 충격을 받았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대원들은 말이 없고 침착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직책을 수행하느라 기계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거의 그랬던 것 같다. 바닥과 기계, 파이프와 엔진을 타고 울리던 규칙적이고 부드러운 진동소리는 물 위로 잔잔하게 퍼지는 파동, 혹은 작게 자맥질하는 심장을 닮아 있었다. 그곳에 존재하는 소리들은 하나같이 폭력성이 없어서 그 어떤 것도 소음으로 취급되어선 안 된다고 느껴졌다.
스콧은 그를 기관실 안쪽, 코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개인실로 안내했다.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은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하나는 낮고 작았다. 킨저의 것으로 보였다), 벽면에는 찬장과 책이 두세 권 놓여 있었다. 책 표지마다 둥근 물 자국이 남아있어서 레너드는 두꺼운 전공서적과 얇은 시집 두 권으로 물기 있는 무언가를 받치고 있을 스콧과 킨저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물 자국이 없는 건 엔터프라이즈 도면이 그려진, 그렇게 두툼하지도 그렇다고 얇지도 않은 책 한 권뿐이었다(쏟으면 곤란하기 때문이겠지, 라고 그는 넘겨짚었다). 스콧은 찬장에서 위스키와 잔 두 개를 꺼냈다. 슬쩍 열린 찬장 문틈으로 장미가 보였다. 레너드는 눈을 의심했다. 가만 보니 가지런히 놓인 찻잔들이었다. 화려하고 섬세한, 꽃잎 하나하나의…… 더 자세히 보기도 전에 찬장 문이 닫혔다.
스콧은 잔을 두고 그를 앉힌 후 위스키 마개를 퐁 소리 나게 빼냈다. 청량한 소리와 함께 꿀렁꿀렁 술이 잔 안으로 쏟아졌다. 레너드는 킨저의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불편했지만 술맛이 좋아서 금세 엉덩이를 잘 오므리고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취할 때가 걱정됐지만 아무렴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술은 지상에서도 요크타운에서도 심지어는 함선에서도 마셔본 적이 있지만 몽고메리 스콧과 잔을 들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둘은 제임스 커크와 가깝게 붙어있는 와중에도 정작 서로에게 거리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이에 낀 커크가 빠지면 그 몫의 빈자리를 남겨두고 더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마땅한 타이밍이 없어서기도 했고 같은 근무지의 아주 다른 환경에 놓여 있던 데다가 연령 차이도 나고 아카데미 졸업 날짜도 다르고 첫 만남 이후 커크가 제대로 소개할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유(핑계)는 많았다. 인간관계를 좁힐 기회를 놓친 중년들은 보통 어떤 노력을 하려 들지 않는다. 젊고 좀 더 힘이 넘치던 시절엔 달려가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보다 수동적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아니어도 내달리는 때가 있었지. 레너드 맥코이 최후의 노력은 제임스 커크에서 끝났다. 아카데미에서 지대하게 관심을 가지고 친밀감으로 구애하여(마땅한 대체 용어를 찾지 못 했다) 성공적으로 좁혀진 관계 말이다. 그 뒤론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좁혀진 거리감과 관계성만 남았다. 몽고메리 스콧도 다를 건 없어서, 그리고 심지어 그는 노력 하나 없이 제임스 커크의 가까운 관계가 되어서(그래서 그 관계성은 급한 만큼이나 엉성했다) 한동안 커크와 연결된 엔터프라이즈호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얼떨떨한 위치를 고수했다. 돌이켜보자면 첫 등장부터 그런 위치였다. 물에 젖은 잠바와 뒷덜미에 착 달라붙은 탁한 금발 뒤통수가 기억난다. 워프 코어의 사고가 있다는 건 나중에 들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브리지에서 말다툼이 있은 직후 스팍이 임시 함장 직을 내려놓고 떠났다. 스콧은 엉거주춤 서있다 말고 활짝 웃었다. 여기 난장판이네! 이 함선 맘에 들어. 능청스러운 중얼거림이었다. 분위기 한 번 더럽게 못 읽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둔하고 무신경하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찻잔들이라니. 섬세한 장미와 아름다운 컵받침, 극도의 미감이 끌어올려진 잔 손잡이와 우아한 곡선을 그린 사치품들은 무신경함과 제멋대로의 품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 안목으로 꼽을 수 있는 류의 것도 아닌 것 같다. 깨지기 쉬울 텐데 어떻게 보관하는 걸까. 미세한 고정 장치로 움직이지 않게 조여 놓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다. 찬장엔 그런 찻잔이 들어 있는데 책꽂이에 꽂힌 책의 표지엔 하나같이 물 얼룩이 졌다. 섬세한 사람은 책 위에 물기 있는 잔을 얹어두지 않는다. 깨지기 쉬운 찻잔 옆에 유리로 된 병속에서 찰랑거리는 위스키를 두지도 않는다.
몽고메리 스콧의 내부엔 양극의 성향이 존재하는 것 같다. 레너드는 그것들에 대해 묻고 싶어졌지만,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았다. 몽고메리 스콧과의 거리감을 실감한 것은 그 때였다. 내가 눈앞의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 좁혀야 할 거리감이 보이는 것. 그래서 레너드 맥코이는 무엇이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잔씩 비우는 동안 둘은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물거리고 있었다. 너무 딴 생각에 빠져 있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그는 시선을 옮겨 개인실 창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코어로 시선을 돌렸다.
넌 저런 걸 보면서 술이 넘어갈 수 있단 말이지. 레너드의 말에 스콧이 고개를 돌려 코어를 마주보았다. 어휴, 근사하지 않아? 아니, 끔찍해. 왜? 내 목숨이 걸려있는 기계의 중심부가 너무 거대해서. 스콧은 레너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거대한 함선을 돌아가게 하려면 내부의 것도 커지기 마련이야, 닥터. 내부가 크기 때문에 함선이 크단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레너드는 위스키를 두 잔이나 더 마셨고 그럼에도 충분치 않았으므로 길게 손을 뻗었다. 스콧이 병을 기울여 잔을 채워줬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너머의 접합부들을, 코어와 기계 사이를 잇는 파이프와 그 속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몇 갤런 어치의 물들을 내려다보았다.
난 저기서 빠져죽을 뻔 했지. 스콧이 중얼거리자 이번엔 레너드가 시선을 돌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나타난 커크와 스콧, 얼음장 같이 차갑던 브리지가 떠오른다. 축축하게 젖은 뒤통수와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혼자 해맑던 얼굴, 낡아빠진 점퍼와 브리지 바닥으로 고여 조금씩 흐르던 물. 그건 너무 강렬한 장면이어서 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의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니까. 숨은 막히고, 그 금발머리는 밖에서 뭐라고 소리치며 벽이나 두들기고 있지… 압력 때문에 귀가 터질 것처럼 아팠어. 그러다 별안간 바닥이 쑥 꺼졌지. 짐이 비상 개폐구 밸브를 열어버린 거였어. 떨어질 때 분명 관절 몇 개가 망가졌을 거야. 당시엔 몰랐는데 브리지를 벗어나고 나니 삭신이 쑤셨거든……. 스콧이 입을 다물자 개인실이 기관실의 고요한 진동으로 가득 찼다. 레너드는 반쯤 남은 위스키 병을 흔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의 도움은 결정적이지만 늘 엉망진창이야. 딱히 위안하려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 녀석이 내 멀미를 없애겠다고 뭘 했는지 알아? 남은 브랜디를 전부 마셨어. 스타플릿 쉽에 타고 있었는데… 내 주머니에 그게 있었거든. 우리의 첫 만남은 나중에 말할게. 여하튼 술기운을 빌어 우주선을 타는 건 멀미의 지름길이라고 하더군. 짐이 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길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난 금시초문이었어. 사실 알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망할, 난 의사였고 그건 마지막 브랜디였다고.
워프 코어 이야기를 할 땐 어물거리던 둘의 대화가 갑자기 물살을 탔다. 제임스 커크의 이야기가 나오고부터다. 둘 사이에 존재하던 커크의 빈자리가 갑자기 채워진 것처럼, 그리하여 실상 둘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음에도 가깝게 느껴지는 것처럼, 둘은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 낄낄거리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들이 아는 커크에 대한 이야기였고 서로가 기억하고 이해하는 그의 존재는 아주 달랐기 때문에 흥미로운 텐션을 유지했다. 스콧은 커크가 델타베가의 눈을 뚫고 나타난 순간에 대해 지겨울 정도로 반복하였다. 레너드는 아카데미 시절 커크가 얼마나 사고뭉치였는지에 대한 일화를 스무 개 정도 풀어놓았다. 그들은 밤새 그 이야기들을 떠들어대다가 각자의 근무지로 돌아갔다. 레너드는 커크와 자신의 첫 만남을 ‘나중에 말해주겠다며’며 미뤘지만 그 나중은 두 달 후에나 이뤄졌다. 그러니까 몽고메리 스콧이 어느 날 갑자기, 꼭 짝사랑 클럽 같고만. 이렇게 말한 후 가지게 된 첫 술자리에서다. 이야기가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간다. 둘은 위스키를 마시며 방금 막 레너드 맥코이가 본즈가 된 경위를 들었다. 스콧이 잔을 채웠고 그들 사이엔 브리지에 있을 제임스 T 커크 몫의 잔이 채워져 있다. 이 잔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좀 더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짝사랑 클럽 이야기가 나오던 날보다 조금 전이다.
“이게 뭔가 싶다. 제기랄…… 청승맞은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레너드가 신경질적으로 잔을 비웠다. 그들은 드물게 메디베이에 앉아 있고 바깥으로 펼쳐진 우주가 쏜살같이 지나간다. 함선이 워프를 하고 있다. 기관실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기에 스콧은 잠깐 동안 그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레너드의 잔을 채워준다.
“늘 하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 뭘 새삼스럽게…….”
스콧이 킬킬거리자 레너드가 너 취했다, 라고 면박한다.
“네 차례가 되면 너도 이렇게 생각할 거야. 오, 제기랄, 이게 뭐하는 짓이지? 그리곤 빌어먹을 이야기를 얼른 때려 치고 술이나 걸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 하는 이야기야 늘 뻔하지.”
“귀에서 진물이 나올 지경이긴 해.”
“난 그것 말곤 짐에 대해 할 이야기가 별로 없어.”
스콧이 솔직히 고백한다.
“넌 짐에 대해 늘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나는… 그러니까 기관실장과 캡틴 커크는 그럴 수 없단 말이야. 사적인 장소에서 풀어내기엔 너무 사무적인 일화들뿐이랄까. 그런 셈이지.”
“오, 그래? 니들 첫 만남이 하도 드라마틱해서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건 줄로만 알았지. 생각보다 현실적이고 빈약한 이유였군.”
레너드는 커크의 금발머리와 푸른 눈을 아주 가까이서 본 적 있다. 아카데미 생도 시절 침대 위에서다. 둘은 룸메이트였는데 당연하게도 각자의 침대가 있었지만 술에 취한 날엔 커크가 꼭 레너드의 침대로 올라왔다. 본즈… 신세 좀 지자. 그렇게 말한 후 까무룩 잠이 든다. 레너드는 한숨도 잘 수 없다. 망할 짐. 속삭인 후에 이불을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크의 침대로 갈 수도 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못 박힌 듯 누워 눈앞의 청년을 시선으로 더듬어야 했다. 커크의 눈꺼풀은 단단히 감겨 있었지만 레너드는 손쉽게 첫 만남, 그러니까 스타플릿 쉽 안에서 마주쳤던 빛나는 파란 눈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걸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브리지에 짠 하고 나타난 몽고메리 스콧과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한 쌍의 파란 눈과…… 그러니까 갑작스럽게 인생 안으로 던져진 좀 기이한 풍경들.
아카데미 시절 날씨는 평온하고 대체로 온화했다. 다시 말해 눈이 온 적은 없었다. 커크의 금발머리는 햇빛 아래서 산뜻하게 빛을 났지만 눈 속에선 어떨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레너드는 한 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지구와는 몇 광년 정도 동떨어진 행성에 버려져서, 비타민 블록을 먹으며 추위에 달달 떨다가 갑자기 나타난 금발미남과 조우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것도 미래에서 온 이성적인 외계종족과 함께. 눈에 젖은 짐의 머리카락이 그 때도 빛나고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설령 빛나지 않았더라도 스콧은 일종의 광채를 보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찾아온 존재가 어떤 것인지 깨닫는 순간 경험할 수 있는 종류의 광채를. 그것에 비하면 자신과 짐의 첫 만남은 좀 구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멀미 타령을 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브랜디는 운치 있었지만 커크가 다 마셔버렸다. 레너드 맥코이는, 그런 종류의 감정은 좀처럼 느끼지 않는 사람임에도 스콧의 입에서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드라마틱한 첫 만남에 관해선 질투를 느꼈다. 그 감정은 착잡함에 가까운, 그러니까 불이라기 보단 진흙탕 혹은 비온 날 습하게 눅눅해진 바닥과 같은 온도였다.
“Ah, 별로 드라마틱하지도 않았어.”
스콧이 손을 내젓는다. 좀 부끄러운 눈치다. 지난 두 달 간 함께 술자리를 가지며 알게 된 몇 가지 버릇이 있는데, 몽고메리 스콧은 말을 돌리고 싶을 때나 부끄러울 때 손을 내젓는다. 그리고 애꿎은 술을 아주 조금씩 들이키며 입맛을 다신다. 쩝. 이렇게.
“드라마틱한 걸로 따지면 너지, 의사 양반. 첫 만남의 대화가 평생의 호칭으로 굳어질 줄 누가 알았겠수?”
“본즈가 드라마틱하다는 걸 보니 감성은 다 죽었구만. 뼈밖에 안남았단 소리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다들 그렇게 부르잖어.”
“모르니까 부르는 거겠지. 짐이 하도 불러대니 내 이름이 정말 본즈인줄 아는 녀석도 있어.”
“지구인은 아니지?”
“아니지.”
스콧이 낄낄거린다.
“그럼 내가 유일하겠군. 고백하자면 난 한동안은 정말 닥터의 이름이 본즈인 줄 알았거든.”
“진심이냐?”
레너드는 믿지 않는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 납득하고 있다. 브리지에서 혼자 씩 웃고 있던 스콧의 이미지는 양가적이고 이상한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것은 찬장에 나란히 놓인 술병과 찻잔 같은 것. 통상적인 불가능함을 적용하면 가능한 사건으로 도출될 것 같은 것.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무딘지 섬세한지 알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스콧이라면 정말로, 어딜 봐도 남부에서 올라온 억양을 쓰는 남자의 이름이 ‘본즈’일 지도 모른다고 착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짜라니까 그러네!”
남의 이름을 착각했다는 고백을 부정당하니 펄쩍 뛰는 스콧은 웃기다. 특히 표정이 진심으로 억울해하고 있다.
“그렇겠지.”
레너드는 크게 반박하지 않고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싱거운 반응에 스콧도 곧 시들해진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잔을 채우고 가운데 놓인 잔에 짠, 하고 부딪친다. 함선은 여전히 워프 중이다.
“우린 왜 항상 짐의 이야기를 할까.”
레너드가 뜬금없이 던지자 스콧이 조용히 잔을 내려놓곤 고개를 숙인다. 그리곤 몸을 기울인 채로 레너드를 올려다본다. 잔 안의 얼음이 녹다 말고 부서져 쨍하는 소리가 난다.
“새삼스럽네.”
스콧이 읊조린다.
“넌 늘 짐의 이야기를 했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처 제독의 비글이 기억난다. 등허리에 난 점이 아주 크고 멋진 갈색이었다.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축축한 혓바닥이 스콧의 손바닥을 마구 핥았다. 비글은 예로부터 인간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콧은 애틋함을 느낄 사람은 아니었기에 축축해진 손바닥을 얼른 떼어내곤 선배를 돌아보았다.
어디 한 번 보시라고요.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곤 모니터에 손가락을 얹어놓았다. 지금 스타플릿 아카데미 상공에 시범운행을 하고 있는 함선 모델이 있어요.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새 녀석이죠. 이제 저 비글을 그 녀석의 몸으로 이동시킬 겁니다. 비글 이름을 따서 함선 이름을 지어도 좋아요. 선배는 틀려먹었으니 증명하는 건 아주 손쉬울 거라니까요. 그리고 그는 버튼을 눌렀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황금색 빛 가닥이 비글을 조각조각 감싸더니 이윽고 빛 무리와 함께 삼켜버렸다.
그들은 아카데미 뒤뜰로 나갔다. 입을 벌린 채 상공을 가득 채운 거대한 함선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마구 불었다. 스콧, 난 네가 이 내기에서 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오, 그래요? 바람소리 때문에 선배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전 선배가 바득바득 제게 대들기에 제 이론을 완벽히 무시한 줄 알았어요. 스콧, 내가 화를 낸 건 네 이론 때문이 아니라 너의 그 말버릇 때문이야. 뭐라고요? 네 그 빌어먹을 성격 때문이라고……. 예? 함선이 내뿜는 열기가 풀과 나무, 대지 위에 선 둘을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었다. 바람소리가 더 거세지더니 이윽고 함선이 착륙했다. 스콧은 제대로 듣지 못 했기 때문에 두 번이나 되물었지만 선배는 그 이상 대답하지 않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스콧은 우두커니 남겨졌다.
아처 제독이 함선에서 내리자 선배가 다가가 무언가를 물었다. 비글에 관한 것이다. 아처 제독은 발끈하는 눈치였다. 주변에 서있던 생도 몇 명을 손짓으로 마구 부르더니 노발대발하며 함선 안으로 되돌아갔다. 생도들이 허우적거리며 뒤를 따랐다. 선배는 따라 들어가지 않고 뒷짐을 진 채로 고개를 돌려 스콧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네가 틀린 적은 없었으니까 아무렴 어떻게든 되겠지. 그 시선엔 그런 능청스러움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틀렸다. 스콧은 실패했다.
발견되지 않은 비글로 인한 아처 제독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필 스콧은 그에게 몇 번 대들어서 눈 밖에 난 경험이 있었다. 그 무렵의 스콧은 성질 더럽고 비좁은 자기 세계를 고수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젊은이였고 모두에게 건방졌으며 모두를 제쳐 우수했다. 그 천재성이 그의 성질머리를 지탱했지만 사라진 비글마저 수습해주진 못 했다.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고메리 스콧은 아카데미 졸업생으로서 함선에 오를 자격을 박탈당한 채(그런데도 그는 심지어 기관실을 만질 수 있는 최연소 장교였다) 델타베가로 보내졌다. 우주엔 그런 혹독하고 차가운 행성도 있었다. 누군가를 벌하기 위해 그야말로 안성맞춤인 곳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흉포해진 거대한 짐승들이 밤마다 울어대고 눈은 쉼 없이 쏟아졌다. 아처 제독이 비글의 목숨 값으로 그의 목숨을 원하고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 그러자 어느 날 제임스 커크를 만났다. 모든 것은 그 날을 기점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내부와 외부가 뒤집혀져버린 것처럼.
하지만 스콧의 내부와 외부가 뒤바뀌었다고 표현하는 건 충분치 않다. 능청스러움이라던가, 해맑거나 낙천적이거나 하는 일들은 내부 세계에서도 외부 세계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성정이다. 그럼 여태까지의 몽고메리 스콧은 대체 어떤 꼴이었는가? 무엇이 스콧을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집어 옮겨놓은 것인가? 그럼 스콧은 끊임없이, 눈 속을 뚫고 제게 찾아온 제임스 커크의 이야기를 지겹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순간이 얼마나 멀고도 느리게 느껴졌는지. 다 나간 형광등이 음침한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어째서 그 금발머리만큼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는지. 빛나지 않는 공간 속에서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는지. 스콧은 그런 존재를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구원자가 항상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달리 대체할 말을 찾지 못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사랑이었다.
“넌 늘 짐의 이야기를 했어.”
레너드는 잠시 침묵하고, 스콧은 잔을 기울여 조금 비워낸다. 그들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두 달 전이고 스콧은 그 때 레너드를 기관실 한쪽에 딸린 개인실로 데려갔는데, 레너드는 그곳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엉덩이는 레너드가 더 컸기에 킨저의 의자 대신 자신의 의자를 양보해줄 의사도 있었는데 그것을 권하기도 전에 레너드가 먼저 좁아터진 킨저의 의자에 앉아버렸다. 그리고 얼빠진 얼굴로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시작했다. 워프 코어의 거대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런 류의 이야기였다. 스콧도 몇 마디를 꺼내긴 했다. 파이프의 물속에서 질식사할 뻔한 일화였기에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레너드는 트랜스포트 사고를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가 브리지에서 꺼냈던 말도 기억했다. 놀랄 틈도 없이 레너드가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해 스콧은 속수무책으로 듣는 입장이 됐다. 그는 스콧이 몇 갤런의 물에 짓눌려 허우적거리다 말고 구출된 것보다 ‘누가 구해냈는가’에 집중하고 싶은 듯 했다. 얼렁뚱땅 이상한 방식으로 저를 멀미로부터 건져낸 제임스 커크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쁜 주제는 아니었고 오히려 일부는 정말 즐거웠기에 술잔을 기울이는 내내 스콧은 웃음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레너드는 신이 나서 몇 가지 일화를 더 풀어놓았다. 아카데미에서의 일들이고 스콧은 모르는 시절의 이야기다. 대화가 진행되는 내내 스콧은 레너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짐과의 첫 만남을 회상할 때 저런 눈이었겠군. 이상한 감이었지만 그런 감이야말로 대체로 맞아 떨어진다.
그 날, 레너드는 메디베이로 돌아가기 전 개인실 문을 벌컥 열고 쩌렁쩌렁 외쳤다. 너, 앞으로 삭신이 쑤시면 위로 올라와서 하이포 맞고 가! 어째 코빼기도 안 보이길래 보기완 다르게 쌩쌩한갑다 싶더니……. 스콧이 박장대소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 뒤로 그는 종종 메디베이로 올라가 검진을 받고 잔소리를 듣는다. 오늘? 혹은 내일? 따위를 물어 술 약속을 잡는다. 일정이 비면 성사되고 아니면 미뤄지는 약속이다. 가끔 파벨 체콥의 로커를 뒤지지만 허탕을 치는 일이 잦다. 보드카가 없으면 위스키, 진토닉과 드라이진을 마신다. 어색한, 틈이 있는, 마땅히 좁혀질 기회를 가지지 못 한 둘은 꼭 마주 보고 있는 자석의 극과 극 같다.
하지만 제임스 커크의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제법 괜찮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첫 날 경험한 거리감, 그리고 그를 순식간에 메우던 커크의 존재를 잊지 못 한 둘은 술자리를 잡게 되면 늘 똑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떠들어댄다. 지겹도록 떠들어대지만 누구 하나 입에 올리지 않는 단어가 있다. 사랑.
“내가 그랬어?”
“그래, 넌 항상 짐의 이야기를 한다니까.”
넌 짐을 사랑하고 있어, 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신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스콧은 확신하는 것들을 더는 말하거나 기반하여 행동하지 않게 되었다. 개인의 확신이 세상에 어떤 형태로 튀어나온 순간, 불확실성이란 종자가 붙어 마구 포자를 뿌리고 결국 그를 실패하게 만들 것 같았다. 눈앞에서 사라진 아처 제독의 비글이 돌아오지 않았듯이. 델타 베가가 만든 기억은 그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이 역시도 좋은 방향성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이젠 그 어떤 확신도 그를 안정시킬 순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레너드가 반쯤 남은 스콧의 잔에 술을 채워준다.
“구질거릴 일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지.”
“아카데미에선 어땠는데?”
“빌어먹을 짐. 사고뭉치였댔잖아.”
“아니, 너 말이야.”
“나?”
생각지도 못 한 화살이라 레너드는 헛웃음을 터뜨린다.
“난 예나지금이나 똑같아.”
“그래?”
그 이상 캐묻지 않고 스콧은 잔을 비운다.
함선이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그들은 이제 메디베이의 창 너머로 흐르는 무수한 운성들을 볼 수 있다. 부딪히지 않고 섬세하게 이동하기 위함일 것이다. 조타수에 술루가 앉아 있었나? 스콧은 반사적으로 시계를 확인한다. 술루는 교대 후 개인실에 들어갔을 시간이다. 흔들릴 지도 모르겠군. 생각하자마자 운석과 작게 충돌한 함선이 위 아래로 조금씩 흔들린다. 어이쿠. 레너드가 작게 중얼거린다. 거의 녹아버린 작은 얼음 알갱이들이 잔속에서 마구 출렁인다. 진동은 잠시 후 가라앉는다. 완전히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던 레너드가 입을 연다. 시선이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잔을 향해있다. 한 번도 비우지 않았고, 꽉 채워져 있다.
“네가 왜 이 잔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어. 청승맞잖아.”
“당사자 없는 자리에서 당사자 이야기만 늘어놓기에 민망해서.”
스콧이 담백하게 늘어놓는다. 그는 일주일 전 우스갯소리처럼 짝사랑 클럽 같네, 라고 던져보았는데 레너드는 그 이후로 짐의 이야길 늘어놓을 때마다 괜한 의식을 하고 있다. 가운데 잔을 놓았던 건 짝사랑 클럽 이야기가 나오기보다 전의 일이지만 그 땐 아무 태클도 걸지 않았다. 이제 와서 바보같이 청승이니 어쩌니 하고 있는 것이 우스울 뿐이다. 사랑이란 단어를 꺼내면 레너드 맥코이는 민감하게 굴고 지나치게 의식한다. 스콧은 민감하지 않는다. 수식을 쓰고 공식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처럼 대하면 그만이다. 감정을 늘어놓고 들여다보고 검증하고 결정한다. 이것은 슬픔, 이것은 분노, 이것은 경멸, 이것은 사랑…… 하지만 정말 그게 알맞은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스콧은 자신의 내부를 긴밀히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다. 나고 자랄 때부터 머릿속은 너무 많은 숫자와 이론과 기계의 맞물림으로 끔찍하게 혼잡해서, 마음의 혼잡함 쯤은 별 거 아닌 취급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 지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사랑은 이전에도 바람처럼 스쳐갔을 수 있지만 그가 이름을 붙일 만큼 강렬한 건 거의 없었고, 굳이 따지자면 커크가 처음이었다는 소리다. 강렬하고, 아주 강렬한, 그것을 달리 사랑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스콧은 그 이전까지 사랑이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인지 몰랐으며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짐의 존재 유무와는 상관없이 그의 인생에 놓인 감정들은 앞으로도 막연할 것만 같다.
“레너드.”
스콧이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킨다. 술병엔 이제 술이 거의 남지 않았다. 레너드가 잔을 채워주려고 하자 스콧이 손을 저어 거절한다.
“사랑이란 뭐지?”
레너드는 웃지 않고 스콧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시선이 마주친다. 그의 시선은 환자를 대할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사무적인 한 쌍의 눈이 스콧의 문제점을 찾는다.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열이 나는 건 아닌지, 드디어 노망이 난 건지. 스콧이 발끈한다.
“아, 모르면 말고!”
“네 입으로 짝사랑 클럽이라고 청승을 떨어놓고 뜬금없이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 지금? 너 장난해?”
“내참…….”
스콧이 입을 빼죽이면서 손을 내젓는다. 잔을 들어 올리지만 아까 레너드를 거절해서 비어있다. 채울까 하다가 그만둔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한 게 틀림없다. 헛소리를 해버렸다. 취하면 비틀거리며 기관실로 돌아가다 말고 엎어질 것이니 그만 마시는 게 좋다. 사랑이라니…… 왜 이제 와서 그런 걸 말해보려 드는 걸까. 레너드 맥코이와 몽고메리 스콧은 잘 하고 있었다. 사랑을 말하지 않고도 짝사랑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술을 나누고 비슷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할 수도 있었는데.
“사랑이라…….”
레너드가 고개를 기울이며 잔의 입구를 매만진다.
“그걸 경험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그의 말투는 꼭 이제와선 사랑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들린다.
“난 이제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그래?”
“그래. 그리고 네가 지금 나한테 물어본 것처럼, 나도 네게…….”
그 때, 함선이 마구 흔들린다. 레너드가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문다. 스콧이 벌떡 일어난다. 테이블 위에 얹어진 잔들이 마구 흔들리다 하나가 넘어진다. 텅 비어서 가벼운 스콧의 잔이다. 엎어져 데굴데굴 구른다. 둘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테이블 끄트머리로 떨어지는 그것을 잡는다. 놀란 서로의 손이 꽉 맞물려 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틈조차 없다.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시선이 교차하다 옆으로 흐른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미묘한 긴장이 있었다. 둘은 곧 자리로 돌아온다. 함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고 조용하게 유영하고 있다. 호흡을 고른 레너드가 마저 대답한다.
“……그러니까 나도 네게 물어보고 싶었어.”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이오와주엔 거대한 옥수수 밭이 있다


아이오와주엔 거대한 옥수수 밭이 있다. 야드를 넘어 헥타르 단위에 육박하는 평당 수십 제곱센티미터의 땅이다. 이십대 시절 아내가 될 애인과 함께 낡은 자동차를 타고 그곳을 가로지른 적이 있다. 누가 먼저 가자고 졸랐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아내 쪽일 것이다. 레너드 맥코이는 옥수수 밭을 드라이브 하자고 제안하기엔 무드가 없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그보다 더 무드가 없었지만 로망은 가지고 있었다.
레너드는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는 덜덜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고 사방으로 흙먼지가 날려서 앞이 희뿌옇게 물들었다. 가도 가도 옥수수 밭이 나왔다. 여긴 전부 옥수수 밭이래. 헥타르 단위라고 하더라. 레너드, 헥타르를 상상해본 적 있어? 사방이 옥수수 밭이라면서 아내는, 그러니까 아직 아내이기 전엔 애인이었던 아내는 지도를 붙들었다. 그를 향해 끊임없이 물었다. 레너드, 이곳이 끝날 때까지 밟을 수 있을까? 우리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그 때 어떤 대답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렇게 해보자고 했을 것이다. 레너드는 그 때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고 정말 그랬다. 가속페달을 있는 힘껏 밟자 낡은 자동차가 총알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들의 몸이 일순 앞으로 쏠렸다가 뒤로 당겨졌다. 그러더니 등받이에 딱 붙여졌다. 미치광이 같은 드라이브였다. 아내의 말처럼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사방은 옥수수였다. 수확하기 전의 계절이라 밭은 온통 푸르렀다. 바람이 불면 옆으로 심하게 누웠고 레너드는 어째서 저렇게 키 큰 식물이 약하기 짝이 없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와 자신은 바람을 맞서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약해빠졌단 인상은 주지 않을 것이다. 정말 끝까지 갈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럼 지나온 옥수수 밭을 등지고 서서 아내에게 무릎을 꿇을 생각이었다. 그런 청혼이라면 정말 괜찮은 장면이 될 것 같았다. 멋진 시작이 아닌가. 그래서 레너드는 계속 밟았다. 아내가 흥분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 옥수수 전경은 차창에서 자꾸만 뭉개지다가 마침내 녹색 덩어리처럼 보이게 됐다. 차가 털털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이렌 소리만 아니었어도 레너드는 정말 끊임없이 밟아댔을 것이다. 지정속도를 위반한 그들은 종국엔 옥수수 밭 한가운데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이런 광활하고 막연한 장소에서조차 법적으로 지켜야 할 속도를 규정하는 것을 보면 교통법을 만든 국가는 빌어먹을 정도로 끔찍하게 섬세하고 지루하고 집요하다. 황무지처럼 보이는 아이오와주에도 그런 국가의 시스템에 따라는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다니. 사실 당연한 일이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일이었는데도 일탈을 종친 양아치들이 괜히 바닥에 침을 내뱉는 것처럼 레너드 역시 한순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그래선 안 되는 거였지만 자기부상 스쿠터에서 내려와 이름을 묻는 경찰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Damn it! 괜히 발길질을 하기도 했는데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저흰 신혼여행 중이에요. 부인분의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사실 저흰 결혼 안 했고, 지금은 연인 관계에요. 신분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런 걸 꼭 대답해야 합니까? 대화는 도돌이표였고 레너드는 진땀을 뺐다. 방금 전까지 옆 좌석에서 아이처럼 신나게 소리를 지르던 아내는 굳은 표정으로 바닥과 레너드, 그리고 눈앞의 경찰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유쾌한 꿈에서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건져 올려 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레너드는 조급해졌다. 아직 끝까지 가지도 못 했는데. 무릎을 꿇고 읊을 그럴싸한 대사를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청혼하지 못 했고 최대 속력으로 달려보지도 못 했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절실해서 차라리 이대로 도망쳐 범법자가 되는 편을 택하고 싶었다. 경찰관의 발목을 차고 도망친다면…… 레너드는 사람의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힘을 주어 찰 수 있었다. 요령껏 한다면 가능했다. 그리고 정말 실행했다는 점에서, 레너드의 그 순간은 사랑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 순간을 사랑이라 부르는 건 레너드뿐이다. 그건 단지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비겁한 행동이라 봐도 좋았기 때문인데 확실히 그 날 그의 행동은 아내의 머릿속에 아주 다른 방식으로 각인되었다.
시큰거리며 거세게 허벅지를 찬 후에도 경찰이 꿈쩍하지 않자 레너드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그는 마구 후려치고 욕지거리를 했다. 경찰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어느 순간엔 정말 이성을 잃었다. 레너드는 열에 들뜬 약쟁이처럼 속사포로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아내가 마구 흔드는 바람에 겨우 깨어났다. 이성을 찾았을 때 아내는 조용히 그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레너드. 레너드 진정해. 아내가 말했다. 이거 로봇이야.
가로질렀던 길을 돌아가는 동안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고 청명했던 옥수수의 빛깔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새빨간 하늘 아래서 새 몇 마리가 날아갔다. 그들이 끝까지 가지 못 한 옥수수 밭은 돌아가기에도 한참 걸렸다. 레너드는 흘끔 아내의 눈치를 살폈다. 아내는 말없이 창문에 얼굴을 기댄 채 하염없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레너드는 이유 없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뭐가? 아내가 레너드 쪽을 보지 않아서 그는 다시 조급해졌다. 아까. 아까 뭐? 그렇게… 한 거. 아니야, 난 화나지 않았어. 그래? 그래. 잠깐 침묵이 이어지다가, 아내가 말을 꺼냈다. 레너드, 차를 세워줘. 우리 잠깐 구경하자. 목소리가 아주 가느다랬다. 해가 지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아…….
둘은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 노을이 덮어버린 광활한 옥수수 밭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대지였고 거센 바람으로 옥수수 가지들이 전부 이리저리 꺾여 있거나 줄기가 누워 있거나 했다. 아내는 말없이 지평선 너머를 응시하며 서있었다. 레너드는 보닛에 기댄 채 그녀의 옆머리가 바람에 어떻게 흩날리는지, 노을 아래에서 갈색 머리가 얼마나 눈부시게 빛날 수 있는지를 지켜보았다. 그 순간 아내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레너드는 깜짝 놀랐다.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막연해졌고 두려움을 느꼈다.
파멜라, 왜 그래. 파멜라, 이유를 말해 줘. 하지만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자꾸만 흐느꼈다. 레너드는 엉거주춤 서있다 말고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았다. 아내가 고개를 숙여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 아내는 옥수수 밭을 등지고 레너드가 옥수수 밭을 향하여 서있게 됐다. 비로소 그녀가 직전까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볼 수 있었다. 점차 어두워지던 옥수수 밭이 까맣게 물들어 마침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깜깜해지고 말았다. 광활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끝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남았다. 흐느끼기만 하는 아내를 품에 안은 채 그 텅 빈 풍경을 보며, 레너드는 분명하고 단순한 공포를 느꼈다. 압도적이었다.
그들은 동거 중이었기에 남부 행 쉽 정거장까지 계속해서 차를 몰았다. 정거장에서 쉽을 기다리는 동안 벽면에 붙은 모니터로 넷에 접속해 몇 가지를 검색해보았다. 헥타르가 평당 몇 제곱미터이며 얼마만큼의 옥수수를 수용할 수 있는지. 옥수수는 수십이 아니라 수백도 아니라 수천도 아니라 수만이었다. 수백만 아니 수천만. 십만 제곱 피트가 넘었고 만 제곱 야드가 넘었고 그 땅에 수십만에 옥수수를 심는다. 그러니까 중간에 도로교통법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끝까지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경찰로봇을 걷어차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늦은 일이었다.
집으로 가는 도중 몇 천 미터 상공까지 날아오르던 쉽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그대로 십 미터 가량 추락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내가 마구잡이로 흔들려 잠에서 깨어난 승객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고 아내는 밸트를 풀자마자 복도를 뛰쳐나갔다. 레너드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달려 나가다 말고 엎어졌다. 흔들리는 바닥에 배가 바싹 붙었다. 장기가 마구 요동치는 느낌과 함께 구토감이 솟았다. 그 순간 기내가 출렁이며 아래로 훅 잡아당겨졌다.
추락하는 순간은 짧았고 쉽은 이내 중심을 잡고 상공으로 추진했지만 레너드는 아주 오랫동안 바닥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는 헐떡이면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주 공허하고 광활한 어둠이 펼쳐졌다. 알고 보니 레너드는 눈꺼풀 아래에 옥수수 밭 따위를 키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공허하고 광활한…… 그 끔찍한 느낌은 복도에서 돌아온 아내가 레너드를 일으켜 세우며 종식되었다.
레너드, 일어나. 괜찮아? 레너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그듬 해 시월에 결혼했지만 잘 되진 않았고 종국에 그는 뼈만 남긴 채로 모든 걸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결혼을 지속하는 동안 이따금 꿈에는 그 날의 쉽, 그러니까 비행기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조그만 운송수단이 나왔다. 레너드는 떨어지는 쉽 안에서 도망치다 말고 엎어진다. 아내는 보이지 않고 누군가 그를 일으켜 세우곤 이렇게 묻는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생사가 오고 가는데 이름을 묻는 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레너드는 그렇게 대답하려고 입을 벌리지만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릴 수밖엔 없다. 레너드! 아내가 복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사랑과 비겁함을 구분하지 못 하는 네가 창피해 죽겠어! 그리고 악몽은 끝난다.
이혼 소송은 싱거웠고 레너드는 굳이 맞서지 않았다. 그녀와 최악의 모습으로 바닥을 보인 채 끝내고 싶지 않았고 그 무렵엔 모든 것에 무기력해져 있었다. 짐을 싸서 집을 나올 때 레너드는 신발장 위에 얹어진 액자를 충동적으로 들고 나왔다. 이십대 중반의 레너드 맥코이와 파멜라가 활짝 웃으며 서로에게 기댄 채 앞을 보고 있는 사진이다. 그는 그 날 바에서 데킬라를 원샷하고 비틀거리며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싸구려 여관에 짐을 맡겨놓은 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술김에 액자를 얹어둔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액자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레너드는 사진 속 두 남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곤 질문해보았다. 우리가 끝까지 갔다면……. 옥수수 밭의 끝에서 청혼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끝까지 갈 수 없을 게 분명했던 그 광활하고 광활한 들판을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끝까지 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것일까. 그런 것들이 사랑이라면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 아닌가.
레너드 맥코이는 짐을 싸서 여관을 나왔고 아주 오래도록 사진을 꺼내 보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기 위해선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였지만 종국엔 실패했다. 결혼 이후 그가 다짐한 게 있다면 첫째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다신 쉽을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둘 다 지켜질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는 스타플릿행 쉽에 탑승하여 시시각각 닥쳐오는 공포와 멀미를 참아내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 옆 좌석에 앉은 제임스 T 커크의 푸른 눈동자를 끊임없이 곱씹어야 했던 것이다. 눈을 감으면 예의 그 푸르고 형형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제 옥수수 밭은 거기 없었다. 공허하거나 광활하거나 했던 일들은 먼 일처럼 느껴졌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지상에 남아 센터에서 근무를 하고 싶었지만 커크는 그를 함선으로 데리고 갔다. 공허함 그 자체인 우주를 가로지르며 몇 년 간의 탐사 임무를 맡아야 한다고 했다. 거절하려는 순간 시선이 마주쳤고 커크는 빙긋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레너드는 깊고 푸른 그의 눈동자를 보며 옥수수 밭의 연장선이 될 것이 자명한 우주의 공허함 속에서도, 눈을 감았다 뜨면 존재할 제임스 커크로부터 기인한 위안이 있다면 괜찮을 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판단을 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그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아대던 젊은 날의 자신과 똑같은 꼴이었다. 그러니까 그걸 사랑이라 부르지 못 한다면 달리 무엇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넌 늘 짐의 이야기를 했어. 스콧이 말했을 때 레너드가 되물었던 건 다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그랬어? 스콧, 왜일까. 나는 예전의 나를 아주 먼 과거로 치워버리기 위해 이 빌어먹을 함선에 탑승했지만 결국 비슷한 일을 만들고 있어. 난 끔찍하게도 사랑으로 실패할 관계만을 반복하는 모양이야. 그런데 스콧, 내가 사랑에 빠져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달려가는 거잖아. 그러니까 끝을 모르는 곳까지 설령 도달할 수 없음을 막연하게 알고 있다고 해도…… 하지만 짐을 보고 있자면 달려갈 수 없게 돼. 그 녀석이 데려다 달라고 해도 그 옥수수 밭을 달릴 수는 없어. 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무모해지고 싶지 않은 거야. 짐은 그 광활함을 모르니까. 젊고 무모하니까. 아직 능청스러울 수 있는 나이니까. 난 그것을 지키고 싶었어. 좁아터진 내 침대 위에서 잠든 짐을 한 번도 깨우지 않았어. 흔들어 깨워서 질문하지도 않았어. 짐은 조수석에 탄 채 누군가에 의해 끝없는 것들을 가로지르다 좌절해서는 안 돼. 누군가를 태우고 끝없는 것들을 가로지르다 좌절해야만 해…… 그런 느낌이 들어.
스콧, 오, 스콧. 이걸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이 감정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사랑 말곤 붙일 말이 없어, 스콧. 그래, 나도 묻고 싶다. 사랑은 대체 뭔데? 네가 물었던 것에 좀처럼 대답할 수 없어. 대답하는 순간 추락할 것 같아. 끝없는 공허로. 푸른 눈이 사라진 옥수수 밭으로. 내가 버리고 도망쳤기에 돌아갈 수 없는 그곳으로.


조타수 술루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근무를 맡은 에인슐러가 몇 가지 실수를 하는 바람에 함선 전체가 적색 불에 휩싸였고, 레너드 맥코이와 몽고메리 스콧은 즉각 자리로 돌아갔다. 기관실장이 워프 코어를 점검하는 동안 레너드 맥코이는 술잔을 한 구석으로 치워버리고 흔들린 함선에서 데굴데굴 굴러 떨어진 대원 몇 명을 침대로 옮겼다. 골절이 없어서 응급처치는 빨리 끝났지만 다리 인대를 삐끗한 대원 둘은 새벽 내내 메디베이 침대에 남아 있어야 했다. 걸을 수 있는 부상자들을 개인실로 돌려보낸 후 레너드는 탁자 한 구석에 치워놓은 브랜디 병과 세 잔의 컵을 들어 서랍에 쑤셔 넣었다. 커크의 잔이 비지 않아서 딱 한 잔만큼의 술이 남았다. 레너드는 고민 없이 그것을 화장실 변기에 쏟아버렸다. 그리고 메디베이로 돌아와 근무를 계속했다.
다음 날 레너드와 스콧은 퀭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쳤다. 엔터프라이즈 호의 개인실을 연결하는 덱의 복도에서다.
얼굴 꼴이 말이 아니구만! 스콧이 먼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레너드는 반사적으로 스콧의 발목과 무릎, 어깨와 손목을 확인한다. 어제 메디베이로 찾아온 부상자들이 감싸 쥐고 있던 부위다. 다친 곳은 없냐? 레너드는 그렇게 내뱉어놓고도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자신의 말투에 제법 놀란다. 스콧은 아랑곳 않고 이죽거렸다. 의사 양반도 참 새삼스럽게. 다쳤다는 뜻이지? 다리를 좀 삐끗하긴 했어.
하긴, 네가 그렇지. 레너드가 몸을 숙여 스콧의 발목을 부드럽게 감싸 쥔다. 가까이서 직접 쥐어본 발목은 한 손에 조금 감기다 마는 정도로 얇다. 어디가 아픈데? 그가 힘주어 복숭아 뼈를 누르자 스콧이 몸을 비틀었다. 힘 좀 빼! 척 봐도 안으로 삐끗했구만. 알겠으니까 일단 놓고 말하라니까 그러네! 발이 허우적거리면서 얼굴을 찼다. 레너드는 발목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쯧, 따라와. 스콧의 손목은 발목보다 얇아서 손에 알맞게 감겨든다. 엉거주춤 끌려간 스콧이 허우적거리다 기울어졌다. 레너드가 고개를 돌린다. 스콧은 절뚝거리고 있다. 미치겠구만. 레너드가 마른세수를 하곤 몸을 돌려 스콧의 허리를 붙잡는다. 스콧이 기겁한다. 뭐 하는 거야!
“이대로 쭉 옮겨볼까 생각 중이다, 어쩔래. 메디베이까진 너무 멀고… 내 개인실로 가자. 거기에도 의료품이 있어.”
보기보다 퍽 가볍지 않은 스콧이 바둥거려서 레너드는 순간 욕지거리를 한다. 내려놓을까 고민하다가 이내 마구 달리기 시작한다. 허리를 붙잡은 손이 미끄러지자 아예 몸을 어깨에 얹어놓았다. 스콧은 짐짝처럼 들린 채로 꽥 꽥 소리를 지른다. 복도를 지나던 대원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둘을 바라보고 있다.
레너드는 개인실 침대 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헉헉거리며 멈춰 선다. 스콧을 거의 던져놓다시피 했다. 하지만 다시 발목을 삐끗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 팔에 힘을 줘 몸에 부담되지 않는 선을 지키는 걸 잊지는 않는다. 스콧이 벌떡 일어나다 말고 발목의 고통 때문에 몸을 움츠린다. 끙, 소리가 절로 새어나온다. 잠깐만 기다려. 레너드는 허리를 숙여 개인실 서랍을 마구 뒤진다. 등 너머로 스콧의 시선이 느껴진다. 레너드는 괜히 어깨에 힘을 준다. 알싸한 기운이 도는 압박붕대는 서랍 안쪽에 얌전히 처박혀 있었다.
그가 붕대를 꺼냈을 때, 스콧은 침대 헤드 쪽으로 엉덩이를 옮겨놓고 서랍 위에 엎어놓은 액자를 보고 있다. 레너드는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또 무엇을 궁금해 할지 깨달았지만 짐짓 모른 척을 하며 스콧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발목에 붕대를 힘주어 감고 있을 무렵 머리 위로 스콧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거 결혼사진이지? 레너드는 붕대를 다 감을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는다. 스콧은 혼자 떠들어댄다. 야, 지금이랑 이미지가 너무 다른데? 얼굴은 똑같은데 분위기가 말이야, 그러니까 분위기가. 전이 훨씬 더 낫다. 레너드는 붕대를 서랍 안에 쑤셔 박곤 몸을 일으켰다. 액자를 쥔 채로 스콧이 인사한다. 고마워.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었어.
“전이 더 낫다는 건 무슨 뜻이냐?”
스콧이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더 잘생겼다는 이야기로 알아들어주시면 고맙겠수.”
“호오, 지금의 나는 쉰내 나는 아저씨다, 이 말씀?”
“닥터는 너무 부정적이라니까.”
스콧이 낄낄댄다. 그는 힘주어 문을 열지만 열리지 않는다. 레너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청아, 내 개인실 문은 당기는 게 아니야.”
레너드가 스콧 뒤에 섰다. 레너드의 가슴과 스콧의 등이 잠시 맞닿는다. 의료적인 공간에서 맡을 수 있는 소독약과 깔끔한 냄새가 낯선 체향과 뒤섞인다. 스콧의 몸에선 아저씨 쉰내가 날 것 같았는데(꼴을 보면 그러했다) 의외로 처음 맡아보는 산뜻한 향이 났다. 레너드는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다. 고개를 숙이고 그 냄새를 더 자세히 맡기 전에, 스콧이 허겁지겁 떨어져 앞으로 나아간다. 밀려나간 문이 활짝 열리자 중심을 잡지 못 하고 허우적거린다. 스콧이 놀라서 반사적으로 레너드의 팔을 쥔다. 순간 레너드는 섬짓한 기분을 느낀다. 스콧이 황급히 레너드로부터 떨어져 어색하게 웃는다.
“아이구, 말로 해달라고, 말로. 당기고 미는 거 구분 못 한다고 문 여는 법도 모를까 봐.”
레너드는 그대로 문 앞에 서서 스콧을 바라보고 있다. 스콧은 몇 번 더 어물어물 웃다가 그만둔다. 이상한 침묵이다. 어젯밤 굴러 떨어지던 컵을 동시에 잡았을 때와 비슷하다. 이번엔 스콧이 먼저 침묵을 깬다.
“그 뭐시기, 어제 일 때문에 기관실 한쪽 벽면의 쉴드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는데 말이야.”
스콧은 허공에 손을 내젓곤 쩝, 입맛을 다셨다.
“거기로 와, 내일 말이야. 메디베이 비어도 거기로 내려와. 멋진 걸 보여주지. 실망할 순 없을 걸.”
마치 엄청난 파티를 준비해놓고 시치미를 떼는 사람처럼 보인다. 좀 멍하게 있던 레너드가 대답한다.
“그래, 좋아.”
한 번 더 대답한다.
“그래… 그때 봐.”
스콧은 절룩거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빠르게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카모마일


몽고메리 스콧의 아카데미 선배는 그보다 두 살 위의 연상으로, 영국에서 왔고 억양이 셌다. 스콧은 스코틀랜드 억양을 쓰고 그의 영국인 발음을 재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열등감으로부터 기인한 것은 아니었고 선배가 그의 스코틀랜드 식 발음을 곧잘 귀엽다고 말했기 때문인데 여하튼 당시의 스콧은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리하여 그 말은 썩 좋게 들리지 않았다. 걸핏하면 기숙사에 처박혀 룸메이트를 들이지 않거나, 혹은 룸메이트 옆에서 밤새도록 땜질이며 조립을 일삼거나, 먹지도 씻지도 않고 공식 하나에만 매달려 있거나. 스콧의 생도시절은 그렇게 유지되었고 인간관계는 헐겁고도 좁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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