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자산»
파사의 수레바퀴│신청미션
1.
장위江煜는 면도를 마치고 거울 앞에서 진지한 얼굴을 해 보였다. 비장한 면모가 돋보였으며, 제법 사내다운 듯했다. 이만하면 괜찮은 인상 아닌가? 그는 오늘 자기 자신의 모습에 90점을 매겼다.
서랍을 열어 신중하게 시계를 고르고, 상쾌한 잔향이 남는 데일리 향수를 뿌린 뒤 코트를 걸치자 어느덧 출근 시간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에어리어 8의 현황―날씨, 습도, 기온, 경제 성장 지표, 각 구역별 범죄 발생률이 실시간으로 카운팅 되는 전광판을 바라보다가 신호가 바뀌자마자 익숙하게 사거리를 빠져나왔다. 어머니에게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오늘 7시 류광루琉光楼, 가족 모임 잊지 말 것.’ 내비게이션 AI가 친절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문자를 읽어주었다. 장위는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레이도 와요?”
“촬영이 일찍 끝나면 참석한다고 했다. 너도 늦지 마라.”
장위는 깜빡이를 켜면서 차선에 안전하게 끼어들었다.
“일찍 갈게요.”
“저번처럼 늦지 말고.”
“일이 바빠서 그래요.”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지만 어머니는 다소 무뚝뚝한 투였다.
“저번에도 늦었잖니.”
그러고는 전화가 뚝 끊어졌다.
장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가족은 매달 셋째 주 금요일마다 함께 저녁을 먹는 가풍이 있었다. 가족 모임이라고는 했지만 반드시 가족 구성원만 참석하는 건 아니어서, 때에 따라 연예인이나 유력한 사업가, 비즈니스 관계자들이 여럿 참석했다. 아버지는 장위에게 늘 좋은 길을 제시하려고 했다. ‘좋은 길’이란 성공 가도를 벗어나지 않는 황금빛 테두리를 의미한다.
장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을 선언하고 자기 발로 골든레인을 걸어 나왔다. 그는 다른 길을 원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비전을 보고 있는지 누구에게도 명쾌히 설명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반면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명쾌하게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장위의 대학 동기는 만사에 확신을 가진 타입이었다. 강한 열정과 구체적인 목표 의식이 있었고, 큰소리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매일 같이 떠들고 다녔다. 동기는 젊은 엘리트들 특유의 순진한 오만함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니, ‘자치정부의 유명무실한 복지’따위를 운운하면서 자랑스럽게 중얼거리곤 했다. “우리 어머니가 허슬턴 출신이라서 잘 알아.”
허슬턴이라! 장위가 그 지역에 대해 알게 된 순간이었다. 물론 그는 이전부터 허슬턴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전까지 그곳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존재하는 구역에 불과했다. 범죄율이 도통 떨어지질 않는 지역,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지역, 빈부격차를 이야기할 때 오르내리는 숫자와 관념으로서만 존재하던 슬럼가였다.
이제 장위에게 있어 허슬턴은 새로운 지역이 되었다. 명확한 인생 목표 없이, 제시된 길을 따라 걸어오는 과정에서 불현듯 닥쳐오던 질문, ‘이대로 괜찮겠지?’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공간. 그는 동기의 피 튀기는 연설에 따라 계급의식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자기가 꽤 잘난 자리에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장위, 넌 더 유용해질 수 있어.” 주먹을 불끈 쥐고 동기는 외쳤다.
그리하여 장위는 대학 생활 내내 동기들과 함께 허슬턴 외곽 지대에 세워진 공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다 함께 우르르 허슬턴 공장으로 몰려가선 주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컨베이너밸트 앞에서 반복노동을 하다가 녹초가 된 채 퇴근했다. 동기들은 곧잘 ‘투쟁을 위해서는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직접 노동자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허슬턴 주민들의 고충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당한 말이었다.
단지 이 젊은 대학생들이 깨우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같은 라인에서 근무를 마친 허슬턴 주민들은 어둠속으로 황급히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 자신은 주말이 끝나는 즉시 빛과 향락으로 점철된 골든레인 그 어드메로 돌아오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경험은 결코 인생의 자산으로 취급될 수 없었다.
장위의 진정한 자산은, 그가 주말마다 근무하는 바로 그 공장에서 공화空華가 피어나는 순간 발견되었다. 컨베이터밸트가 젤리처럼 녹아내리고, 물건을 만들던 대여섯 명의 동기가 한순간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장위는 겨우 한 사람만을 구해낼 수 있었다. 동기도 아니고, 같은 라인에서 근무하던 사람도 아니고, 반 년 동안 장위와 동기들에게 인사 한 번 하지 않았던 사십대 남자였다. 나중에 듣기로는 허슬턴 외곽 지대에서 다섯 살짜리 딸과 단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다친 팔을 몇 번이고 쓸다가, 먹먹한 목소리로 장위에게 말했다. “고맙다.” 그 말이 장위의 마음 깊이 박혔다. 여태껏 살면서 그런 무게를 가진 말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마 후 장위는 결계업체에 들어갔다. 컨페더레이션에 소속되지 않은 비영리단체였다. 장위는 동기의 말대로 정말 유용해진 것을 느꼈다. 알고 보니 그의 자질은 꽤나 출중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장위는 적은 보수를 받고 주로 허슬턴에서 발생하는 공화를 처리해 나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들을 보았지만, 장위는 한결같았다. 그는 주말마다 공장에 나가 컨베이너벨트 앞에 서 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
정해진 공간에서 멸균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장위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얼굴을 똑바로 식별할 수 없다. 가까이 붙어서 있는데도 개인이 아니라 군중으로, 개체로 느껴진다. 유의미한 상호작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어진 일을 하는 동안에는 모두가 공평한 존재지만, 존중받아야 할 개개인으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왜 못 사는 동네에는 말썽이 끊이질 않을까? 컨베이너벨트에서 찍어나오는 속도로 범죄가, 공화가 끊어질 않는 것만 같다. 그런 와중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이 끊겼다. 더는 기다려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대로 된 직장을 잡도록 해라.” 아버지가 말했다.
월세가 세 달 가까이 밀리고 카드빚을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장위는 현실과 타협했다. 때마침 직장 동료들이 그의 등을 밀어주었다. 그들은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면서, 어디로 가든 장위는 잘 해낼 것이라고 했다. “우리를 위해 일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넌 더 큰 물에서 놀아야지. 월세도 내고 말이야.” 장위는 그들에게 자신이 몇 주 전 이미 KS에 이력서를 넣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장위는 이제 스물세 살이고, 카르마 소사이어티 근속 1년을 채운 신입사원이다. 하지만 프로스페리티에 자가가 있고, 최신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쉽게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가진 진짜 자산임을 장위는 모른다.
하지만 알든 모르든, 그는 잘 해낼 것이다. 물론 오늘 가족 모임에 늦어서도 안 될 것이다. KS로 이직한 후 벌써 몇 번째 그는 가족 모임을 불참하고 있었다. 오늘 지각이라도 했다간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사옥 근처까지 왔을 즈음 전화가 걸려왔다. 대리였다.
“장위 씨. 출근 중인가?”
“옙! 대리님, 가고 있습니다.”
“바로 현장으로 올 수 있나?”
“엇, 공화인가요? 등급은요?”
“일반이야. 지도 찍을 테니 이쪽으로 와.”
현장으로 달려갔더니, 프로스페리티 상업 지구에 공화가 피어 있었다. 평소보다 빠르게 인력이 투입된 걸로 미루어 보아 상가에 입점한 레스토랑 중에 KS와 제휴를 맺은 업체가 있는 모양이었다. 장위는 손 차양을 하고 입구에 서서 공화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전광판이 사람의 눈 모양으로 기괴하게 왜곡되어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었고, 사혼수들로 추정되는 사람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까르르 들려왔다. 음식점 테이블이 꿈틀거리며 아스팔트 위를 왔다 갔다 걸어 다니면서 무언가 먹는 시늉을 반복하고 있었다.
“싸울 일은 없어보이는데요.”
장위가 소감을 내놓았다.
“여기 입점한 가게 대부분이 오전 11시부터 영업 시작이야. 그전에 끝내자고.” 팀 대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여기 3층에 트웰브 누들스가 있거든. 혹시 알아? 잘 끝나면 식권이라도 줄지.”
“하하… 그거 회사에서 문제 삼지 않을까요?”
“그럼 포스터라도.”
“그게 본심이시죠?”
대리가 말하는 포스터란 면 요리 체인점인 ‘트웰브 누들스’에서 이벤트 배포 중인 전속 모델 포스터를 의미했다. 현재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남배우 레이가 젓가락을 들고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는 포스터로, 우측 상단에는 홀로그램으로 반짝이는 사인이 인쇄되어 있었다.
장위의 팀 대리는 레이의 오랜 팬이었다. 휴대폰 배경화면도, 업무용 랩톱 대기화면도, 마우스패드도 전부 레이의 화보집과 굿즈였다. 장위는 구태여 레이가 자신의 사촌임을 밝히지 않았다. 사실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고, 어느 날 대리가 “그러고 보니, 장위 씨 레이 좀 닮은 것 같다.”고 문득 말을 꺼내면 “하하, 사실은…”하고 모든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는데, 그런 날이 좀처럼 오질 않는 것뿐이었다.
“장위 씨, 진입 안 하고 뭐 해?”
“아, 넵!”
그래도 오늘 가족 모임에 레이가 참석하면 사인이라도 하나 얻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모든 진실을 밝힐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장위 씨….”를 듣기 전에 일이 그렇게 되는 건 아쉽게 됐지만 말이다.
2.
공화는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사방에서 햄버거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무래도 이 공화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비롯된 듯했다. 도시 한복판, 상점가에서 피어난 일반 등급 공화라고 긴장이 풀어져 있던 두 사람은 느닷없이 등장한 사혼수에게 공격을 당해 경미한 부상까지 입었다.
“팔뚝만 한 것들이 이빨 한 번 날카롭네.”
대리는 질색을 하며 피를 털어내더니, 가로로 주욱 찢어진 왼팔의 상처를 살피다 혀를 찼다. 살짝만 벌려도 분홍빛 속살이 다 드러났다.
벌써 장위는 슬그머니 대리 곁에 와 있었다.
“에이씨.”
대리는 질색팔색을 하는가 싶더니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손짓했다.
“장위 씨, 부탁 좀 할게.”
“넵!”
장위는 대리의 팔을 붙잡고 상처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지혈을 하듯 손끝으로 꾹 꾹 누르면서 사건을 중계하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큰 상처는 아니네요.”
“뭐… 그렇지.”
“저번 상처보단 나은데요. 지혈도 금방 되고. 저번엔 찢어진 부위가 너무 커서 피가 멎는 데 10초는 걸렸잖아요. 지금은 벌써 멎고 있고요. 절단면도 깔끔해서 흉도 안 질 것 같아요. 아프진 않으시죠?”
“그렇게 누르면 누구라도 아프지 않겠어?”
“부드럽게 만졌는데? 안 아프시면서. 지금도 아프세요?”
“그래. 사실 안 아파.” 대리가 애써 기분 나쁘단 투로 중얼거렸다.
“젠장.”
“대리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치료의 일환인 걸요. 자, 다 됐어요. 오늘 건 8초네요.”
“…….”
“…….”
“… 장위 씨,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아 줄래?”
“네?”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대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대리로부터 몇 발짝 물러났다. 잠시 후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헛기침을 하며 손바닥을 바지 옆단에 문지르고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됐어. 이제 그만 꽃이나 꺾자고.”
“옙.”
공화를 꺾고 나오는 길, 뒤늦게 전파가 터진 듯 휴대폰으로 부재중 기록이 쏟아졌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문자가 와 있었다. ‘장위님연락부탁ㄷ합니다꼭’ ‘장위님안녕하세요소개받고연락드립니다’ 뒤죽박죽 한 순서로 연달아 도착하는 문자를 하나하나 읽다가 전화를 걸었다.
“장위입니다. 문자 남기셨더라고요.”
“아…! 안녕하세요. 저, 바이칭 씨 소개받고 연락드렸습니다.”
휴대폰 너머의 상대는 횡설수설했다.
“집 근처에 공화가 피어서요. 이미 관두신 건 알지만, 저, 꼭 도움이 필요해서….”
“아… 바이칭이 소개를. 치료계 결계술사가 필요하신 건가요? TT쪽 결계술사랑 연결시켜 드릴까요?”
“아, 그래주시면…, TT 사무소랑 연락이 안 돼서…. 저, 근데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면 되는 게 아니라서요. 그, 저, 우선 와서 봐주시면 안 될까요.”
가끔 이런 식으로 과거 직장 인맥을 통해 그에게 직접 연락하는 허슬턴 주민들이 있었다. 자금난으로 운영이 어려워지자 사무소를 닫는 날이 잦아지면서 생긴 일이었는데, 관성처럼 장위를 찾는 주민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체계적인 것보다는 익숙한 것, 낯익은 것, 친근한 것을 선호했다. 장위의 스킬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돈 문제 때문에 장위를 찾았다. 입사 초창기,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몇 번의 의뢰를 받은 게 화근이었다. TT를 그만둔 뒤에도 개인적으로 부탁하면 몰래 공화를 처리해 준다는 소문이 퍼진 건지 종종 이런 식으로 매달리는 주민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실상 장위는 혼자 공화를 처리하는 일이 무척 드물었으며, 회사나 컨페더레이션 소속 업체가 언젠가 처리할 거라 판단되는 공화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사서 고생하거나 앞뒤 생각 않고 일을 벌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어, 제가 사실 새로 취직을 해서요. 시간을 내기가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선생님, 부탁 좀 드릴게요.”
주민은 울적한 목소리로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제 동생이 미쳐버렸단 말이에요. 그 공화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도 오늘은 어려운데….’
장위는 스케줄 어플로 일정을 확인했다.
“음, 내일 저녁이라면 잠깐 방문 가능할 것 같습니다. 주소 찍어주시면 퇴근 후에 찾아뵐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통화를 끝내고 나니 대리가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손에는 식권이 들려있었다.
“포스터 재고가 없대.”
대리가 말했다.
돌아오는 길, 사옥 앞에서 대리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장위 씨.”
“뭐, 뭘요?”
“공화 안에서 벌어지는 일 말이야. 사실 즐기지?”
“네에?”
“스킬 부작용 말이야.”
장위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옆 부서 주임은 공화 안에서 장위 씨한테 아예 뽀뽀도 했다더라?”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느라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진 얼굴로 장위가 대답했다.
“즐기면… 안 되죠.”
하지만 솔직히 가끔은 좀 즐기긴 한다.
“…….”
“…….”
“… 그으래. 지켜보겠어.”
“하하, 하하하, 하하….”
“공사 구분 잘하자고. 응?”
“당연하죠, 대리님.”
고개를 저은 대리가 조수석에서 내렸다. 장위는 벨트를 풀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화끈거리는 낯을 진정시키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멘탈 관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진무구한 뻔뻔스러움이었다. 그는 부끄러움은 알지만 수치는 몰랐다.
아픔은 알지만 고통은 모른다. 슬픔은 알지만 절망은 모른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모두에게 들키고도 어색하게 웃으며 털어낼 수 있는 건, 그가 이런 방면으로는 도통 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직접적인 페널티가 될 수 있다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쉬웠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공화 속에서조차 장위는 무엇이든 쉽다고 느낀다. 동기들이 무참히 빨려 들어갔던 공화 속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서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확신하던 동기들이 마침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게 되었을 때, 무너진 발판 위에서 장위만이 홀로 공화를 읽었다. 그는 자신이 공화를 읽고 있는 줄도 몰랐다. 공화 속에서 말하고 걷는 일쯤은 누구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이제 그는 KS에 있었고, 공화 속에서 말하고 걷는 일쯤은 이 회사의 누구나가 할 줄 안다.
그는 운이 좋았고, 그의 주변엔 언제나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진짜 자산임을 장위는 영영 모를 테다.
장위江煜는 면도를 마치고 거울 앞에서 진지한 얼굴을 해 보였다. 비장한 면모가 돋보였으며, 제법 사내다운 듯했다. 이만하면 괜찮은 인상 아닌가? 그는 오늘 자기 자신의 모습에 90점을 매겼다.
서랍을 열어 신중하게 시계를 고르고, 상쾌한 잔향이 남는 데일리 향수를 뿌린 뒤 코트를 걸치자 어느덧 출근 시간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에어리어 8의 현황―날씨, 습도, 기온, 경제 성장 지표, 각 구역별 범죄 발생률이 실시간으로 카운팅 되는 전광판을 바라보다가 신호가 바뀌자마자 익숙하게 사거리를 빠져나왔다. 어머니에게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오늘 7시 류광루琉光楼, 가족 모임 잊지 말 것.’ 내비게이션 AI가 친절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문자를 읽어주었다. 장위는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레이도 와요?”
“촬영이 일찍 끝나면 참석한다고 했다. 너도 늦지 마라.”
장위는 깜빡이를 켜면서 차선에 안전하게 끼어들었다.
“일찍 갈게요.”
“저번처럼 늦지 말고.”
“일이 바빠서 그래요.”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지만 어머니는 다소 무뚝뚝한 투였다.
“저번에도 늦었잖니.”
그러고는 전화가 뚝 끊어졌다.
장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가족은 매달 셋째 주 금요일마다 함께 저녁을 먹는 가풍이 있었다. 가족 모임이라고는 했지만 반드시 가족 구성원만 참석하는 건 아니어서, 때에 따라 연예인이나 유력한 사업가, 비즈니스 관계자들이 여럿 참석했다. 아버지는 장위에게 늘 좋은 길을 제시하려고 했다. ‘좋은 길’이란 성공 가도를 벗어나지 않는 황금빛 테두리를 의미한다.
장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독립을 선언하고 자기 발로 골든레인을 걸어 나왔다. 그는 다른 길을 원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비전을 보고 있는지 누구에게도 명쾌히 설명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반면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명쾌하게 살고 있는 듯 보인다. 장위의 대학 동기는 만사에 확신을 가진 타입이었다. 강한 열정과 구체적인 목표 의식이 있었고, 큰소리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매일 같이 떠들고 다녔다. 동기는 젊은 엘리트들 특유의 순진한 오만함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니, ‘자치정부의 유명무실한 복지’따위를 운운하면서 자랑스럽게 중얼거리곤 했다. “우리 어머니가 허슬턴 출신이라서 잘 알아.”
허슬턴이라! 장위가 그 지역에 대해 알게 된 순간이었다. 물론 그는 이전부터 허슬턴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전까지 그곳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 존재하는 구역에 불과했다. 범죄율이 도통 떨어지질 않는 지역,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지역, 빈부격차를 이야기할 때 오르내리는 숫자와 관념으로서만 존재하던 슬럼가였다.
이제 장위에게 있어 허슬턴은 새로운 지역이 되었다. 명확한 인생 목표 없이, 제시된 길을 따라 걸어오는 과정에서 불현듯 닥쳐오던 질문, ‘이대로 괜찮겠지?’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공간. 그는 동기의 피 튀기는 연설에 따라 계급의식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다. 자기가 꽤 잘난 자리에 있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장위, 넌 더 유용해질 수 있어.” 주먹을 불끈 쥐고 동기는 외쳤다.
그리하여 장위는 대학 생활 내내 동기들과 함께 허슬턴 외곽 지대에 세워진 공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다 함께 우르르 허슬턴 공장으로 몰려가선 주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컨베이너밸트 앞에서 반복노동을 하다가 녹초가 된 채 퇴근했다. 동기들은 곧잘 ‘투쟁을 위해서는 일심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직접 노동자가 되어보지 않고서는 허슬턴 주민들의 고충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당한 말이었다.
단지 이 젊은 대학생들이 깨우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같은 라인에서 근무를 마친 허슬턴 주민들은 어둠속으로 황급히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 자신은 주말이 끝나는 즉시 빛과 향락으로 점철된 골든레인 그 어드메로 돌아오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어떤 경험은 결코 인생의 자산으로 취급될 수 없었다.
장위의 진정한 자산은, 그가 주말마다 근무하는 바로 그 공장에서 공화空華가 피어나는 순간 발견되었다. 컨베이터밸트가 젤리처럼 녹아내리고, 물건을 만들던 대여섯 명의 동기가 한순간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장위는 겨우 한 사람만을 구해낼 수 있었다. 동기도 아니고, 같은 라인에서 근무하던 사람도 아니고, 반 년 동안 장위와 동기들에게 인사 한 번 하지 않았던 사십대 남자였다. 나중에 듣기로는 허슬턴 외곽 지대에서 다섯 살짜리 딸과 단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다친 팔을 몇 번이고 쓸다가, 먹먹한 목소리로 장위에게 말했다. “고맙다.” 그 말이 장위의 마음 깊이 박혔다. 여태껏 살면서 그런 무게를 가진 말을 들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얼마 후 장위는 결계업체에 들어갔다. 컨페더레이션에 소속되지 않은 비영리단체였다. 장위는 동기의 말대로 정말 유용해진 것을 느꼈다. 알고 보니 그의 자질은 꽤나 출중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장위는 적은 보수를 받고 주로 허슬턴에서 발생하는 공화를 처리해 나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것들을 보았지만, 장위는 한결같았다. 그는 주말마다 공장에 나가 컨베이너벨트 앞에 서 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
정해진 공간에서 멸균복을 입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장위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마스크를 썼기 때문에 얼굴을 똑바로 식별할 수 없다. 가까이 붙어서 있는데도 개인이 아니라 군중으로, 개체로 느껴진다. 유의미한 상호작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어진 일을 하는 동안에는 모두가 공평한 존재지만, 존중받아야 할 개개인으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왜 못 사는 동네에는 말썽이 끊이질 않을까? 컨베이너벨트에서 찍어나오는 속도로 범죄가, 공화가 끊어질 않는 것만 같다. 그런 와중 부모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이 끊겼다. 더는 기다려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대로 된 직장을 잡도록 해라.” 아버지가 말했다.
월세가 세 달 가까이 밀리고 카드빚을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장위는 현실과 타협했다. 때마침 직장 동료들이 그의 등을 밀어주었다. 그들은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면서, 어디로 가든 장위는 잘 해낼 것이라고 했다. “우리를 위해 일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넌 더 큰 물에서 놀아야지. 월세도 내고 말이야.” 장위는 그들에게 자신이 몇 주 전 이미 KS에 이력서를 넣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장위는 이제 스물세 살이고, 카르마 소사이어티 근속 1년을 채운 신입사원이다. 하지만 프로스페리티에 자가가 있고, 최신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쉽게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것이 그가 가진 진짜 자산임을 장위는 모른다.
하지만 알든 모르든, 그는 잘 해낼 것이다. 물론 오늘 가족 모임에 늦어서도 안 될 것이다. KS로 이직한 후 벌써 몇 번째 그는 가족 모임을 불참하고 있었다. 오늘 지각이라도 했다간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사옥 근처까지 왔을 즈음 전화가 걸려왔다. 대리였다.
“장위 씨. 출근 중인가?”
“옙! 대리님, 가고 있습니다.”
“바로 현장으로 올 수 있나?”
“엇, 공화인가요? 등급은요?”
“일반이야. 지도 찍을 테니 이쪽으로 와.”
현장으로 달려갔더니, 프로스페리티 상업 지구에 공화가 피어 있었다. 평소보다 빠르게 인력이 투입된 걸로 미루어 보아 상가에 입점한 레스토랑 중에 KS와 제휴를 맺은 업체가 있는 모양이었다. 장위는 손 차양을 하고 입구에 서서 공화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전광판이 사람의 눈 모양으로 기괴하게 왜곡되어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었고, 사혼수들로 추정되는 사람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까르르 들려왔다. 음식점 테이블이 꿈틀거리며 아스팔트 위를 왔다 갔다 걸어 다니면서 무언가 먹는 시늉을 반복하고 있었다.
“싸울 일은 없어보이는데요.”
장위가 소감을 내놓았다.
“여기 입점한 가게 대부분이 오전 11시부터 영업 시작이야. 그전에 끝내자고.” 팀 대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여기 3층에 트웰브 누들스가 있거든. 혹시 알아? 잘 끝나면 식권이라도 줄지.”
“하하… 그거 회사에서 문제 삼지 않을까요?”
“그럼 포스터라도.”
“그게 본심이시죠?”
대리가 말하는 포스터란 면 요리 체인점인 ‘트웰브 누들스’에서 이벤트 배포 중인 전속 모델 포스터를 의미했다. 현재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남배우 레이가 젓가락을 들고 상큼한 미소를 짓고 있는 포스터로, 우측 상단에는 홀로그램으로 반짝이는 사인이 인쇄되어 있었다.
장위의 팀 대리는 레이의 오랜 팬이었다. 휴대폰 배경화면도, 업무용 랩톱 대기화면도, 마우스패드도 전부 레이의 화보집과 굿즈였다. 장위는 구태여 레이가 자신의 사촌임을 밝히지 않았다. 사실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었고, 어느 날 대리가 “그러고 보니, 장위 씨 레이 좀 닮은 것 같다.”고 문득 말을 꺼내면 “하하, 사실은…”하고 모든 진실을 밝힐 생각이었는데, 그런 날이 좀처럼 오질 않는 것뿐이었다.
“장위 씨, 진입 안 하고 뭐 해?”
“아, 넵!”
그래도 오늘 가족 모임에 레이가 참석하면 사인이라도 하나 얻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모든 진실을 밝힐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장위 씨….”를 듣기 전에 일이 그렇게 되는 건 아쉽게 됐지만 말이다.
2.
공화는 요란하기 짝이 없었다. 사방에서 햄버거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무래도 이 공화는 패스트푸드점에서 비롯된 듯했다. 도시 한복판, 상점가에서 피어난 일반 등급 공화라고 긴장이 풀어져 있던 두 사람은 느닷없이 등장한 사혼수에게 공격을 당해 경미한 부상까지 입었다.
“팔뚝만 한 것들이 이빨 한 번 날카롭네.”
대리는 질색을 하며 피를 털어내더니, 가로로 주욱 찢어진 왼팔의 상처를 살피다 혀를 찼다. 살짝만 벌려도 분홍빛 속살이 다 드러났다.
벌써 장위는 슬그머니 대리 곁에 와 있었다.
“에이씨.”
대리는 질색팔색을 하는가 싶더니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손짓했다.
“장위 씨, 부탁 좀 할게.”
“넵!”
장위는 대리의 팔을 붙잡고 상처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지혈을 하듯 손끝으로 꾹 꾹 누르면서 사건을 중계하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큰 상처는 아니네요.”
“뭐… 그렇지.”
“저번 상처보단 나은데요. 지혈도 금방 되고. 저번엔 찢어진 부위가 너무 커서 피가 멎는 데 10초는 걸렸잖아요. 지금은 벌써 멎고 있고요. 절단면도 깔끔해서 흉도 안 질 것 같아요. 아프진 않으시죠?”
“그렇게 누르면 누구라도 아프지 않겠어?”
“부드럽게 만졌는데? 안 아프시면서. 지금도 아프세요?”
“그래. 사실 안 아파.” 대리가 애써 기분 나쁘단 투로 중얼거렸다.
“젠장.”
“대리님, 너무 그러지 마세요. 치료의 일환인 걸요. 자, 다 됐어요. 오늘 건 8초네요.”
“…….”
“…….”
“… 장위 씨,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아 줄래?”
“네?”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대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대리로부터 몇 발짝 물러났다. 잠시 후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헛기침을 하며 손바닥을 바지 옆단에 문지르고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됐어. 이제 그만 꽃이나 꺾자고.”
“옙.”
공화를 꺾고 나오는 길, 뒤늦게 전파가 터진 듯 휴대폰으로 부재중 기록이 쏟아졌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문자가 와 있었다. ‘장위님연락부탁ㄷ합니다꼭’ ‘장위님안녕하세요소개받고연락드립니다’ 뒤죽박죽 한 순서로 연달아 도착하는 문자를 하나하나 읽다가 전화를 걸었다.
“장위입니다. 문자 남기셨더라고요.”
“아…! 안녕하세요. 저, 바이칭 씨 소개받고 연락드렸습니다.”
휴대폰 너머의 상대는 횡설수설했다.
“집 근처에 공화가 피어서요. 이미 관두신 건 알지만, 저, 꼭 도움이 필요해서….”
“아… 바이칭이 소개를. 치료계 결계술사가 필요하신 건가요? TT쪽 결계술사랑 연결시켜 드릴까요?”
“아, 그래주시면…, TT 사무소랑 연락이 안 돼서…. 저, 근데 단순히 상처를 치료하면 되는 게 아니라서요. 그, 저, 우선 와서 봐주시면 안 될까요.”
가끔 이런 식으로 과거 직장 인맥을 통해 그에게 직접 연락하는 허슬턴 주민들이 있었다. 자금난으로 운영이 어려워지자 사무소를 닫는 날이 잦아지면서 생긴 일이었는데, 관성처럼 장위를 찾는 주민들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체계적인 것보다는 익숙한 것, 낯익은 것, 친근한 것을 선호했다. 장위의 스킬이 아니면 안 된다고 믿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돈 문제 때문에 장위를 찾았다. 입사 초창기,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몇 번의 의뢰를 받은 게 화근이었다. TT를 그만둔 뒤에도 개인적으로 부탁하면 몰래 공화를 처리해 준다는 소문이 퍼진 건지 종종 이런 식으로 매달리는 주민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실상 장위는 혼자 공화를 처리하는 일이 무척 드물었으며, 회사나 컨페더레이션 소속 업체가 언젠가 처리할 거라 판단되는 공화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사서 고생하거나 앞뒤 생각 않고 일을 벌이는 타입이 아니었다.
“어, 제가 사실 새로 취직을 해서요. 시간을 내기가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선생님, 부탁 좀 드릴게요.”
주민은 울적한 목소리로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제 동생이 미쳐버렸단 말이에요. 그 공화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도 오늘은 어려운데….’
장위는 스케줄 어플로 일정을 확인했다.
“음, 내일 저녁이라면 잠깐 방문 가능할 것 같습니다. 주소 찍어주시면 퇴근 후에 찾아뵐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통화를 끝내고 나니 대리가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손에는 식권이 들려있었다.
“포스터 재고가 없대.”
대리가 말했다.
돌아오는 길, 사옥 앞에서 대리가 물었다.
“솔직히 말해 봐, 장위 씨.”
“뭐, 뭘요?”
“공화 안에서 벌어지는 일 말이야. 사실 즐기지?”
“네에?”
“스킬 부작용 말이야.”
장위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옆 부서 주임은 공화 안에서 장위 씨한테 아예 뽀뽀도 했다더라?”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하느라 오히려 우스꽝스러워진 얼굴로 장위가 대답했다.
“즐기면… 안 되죠.”
하지만 솔직히 가끔은 좀 즐기긴 한다.
“…….”
“…….”
“… 그으래. 지켜보겠어.”
“하하, 하하하, 하하….”
“공사 구분 잘하자고. 응?”
“당연하죠, 대리님.”
고개를 저은 대리가 조수석에서 내렸다. 장위는 벨트를 풀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화끈거리는 낯을 진정시키는 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멘탈 관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순진무구한 뻔뻔스러움이었다. 그는 부끄러움은 알지만 수치는 몰랐다.
아픔은 알지만 고통은 모른다. 슬픔은 알지만 절망은 모른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모두에게 들키고도 어색하게 웃으며 털어낼 수 있는 건, 그가 이런 방면으로는 도통 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인간 대 인간으로서 직접적인 페널티가 될 수 있다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쉬웠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공화 속에서조차 장위는 무엇이든 쉽다고 느낀다. 동기들이 무참히 빨려 들어갔던 공화 속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서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확신하던 동기들이 마침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게 되었을 때, 무너진 발판 위에서 장위만이 홀로 공화를 읽었다. 그는 자신이 공화를 읽고 있는 줄도 몰랐다. 공화 속에서 말하고 걷는 일쯤은 누구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이제 그는 KS에 있었고, 공화 속에서 말하고 걷는 일쯤은 이 회사의 누구나가 할 줄 안다.
그는 운이 좋았고, 그의 주변엔 언제나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그가 가진 진짜 자산임을 장위는 영영 모를 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