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전뇌불륜電腦不倫
아무래도 아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고 센리 유우이치로千里 優一郎는 생각했다. 그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이 가정용 전자레인지를 구매한 것은 2주 전의 일이었다.
전자레인지는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이긴 했지만 어디선가 봤음직한 흔해빠진 모양새였다. 윗부분은 검은색으로 코팅되었고, 문 부분은 밝은 회색으로 마감돼 있었으며, 손잡이는 매트한 아이언 재질이었다.
이 전자레인지에 타제품과 구분될 만한 차별점을 한 가지 꼽는다면 가사도우미 AI가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서 AI가 내장된 가전제품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 역시 그다지 내세울 만 한 점은 못되었다.
스이긴水銀은 전자레인지와 금방 친해졌다. AI의 이름은 토커스. 남성형 목소리를 갖고 있었는데, 가사도우미에 연상되는 구시대적이고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같은 고정관념은 2054년에도 일본이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문제 중 하나였다.)
토커스는 유머러스하고 위트 있는 성격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스이긴과 유우이치로의 오랜 팬이었다! 이 가사도우미 AI는 역할을 배정받기도 전부터 스이긴이 운영하는 동영상 채널을 구독해 왔다고 했다. 그는 초창기에 업로드된 브이로그는 물론, 스이긴이 잠깐 올렸다 지운 30초 남짓의 이벤트 영상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종종 두 분의 혼수품이 되는 걸 꿈꾸곤 했었죠.”
장난스러운 말투로 토커스가 말했다.
“몇 년 늦긴 했지만,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졌군요.”
그 쾌활한 목소리를 들으며, 유우이치로는 만일 토커스에게 얼굴이 있었다면 눈썹을 찡긋대는 버릇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이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니, 스이긴은 뭐가 즐거운 건지 잠깐이지만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우리 집 전자레인지에 그런 귀여운 발상을? 흠, 우리 형사님 상상력이 나날이 발전하는걸.”
유우이치로는 어느 포인트가 귀여웠던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스이긴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늘 그런 식이었다. 스이긴은 남편의 사랑스러운 일화를 자랑하는 투로 그들의 전자레인지에 유우이치로의 공상을 그대로 읊어주었고─“유우가 그러는 거 있지?”─, 며칠 뒤 토커스는 조리 시간을 표시하는 작은 계기판에 눈썹처럼 움직이는 아이콘을 추가함으로써 두 부부의 농담을 계속 간직해 나갔다.
기계가 인간성을 갖추는 건 외관상 인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보이드VOID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토커스와 같이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AI들은 일정 부분 인간과 비슷한 감수성을 공유했다. 그쪽이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얼마 가지 않아 토커스는 유우이치로와 스이긴의 생활 전반을 빠르게 파악했고, 두 부부의 가치관과 성향, 스케줄, 식습관을 고려해 가며 가사의 우선순위를 유동적으로 조절하게 되었다.
토커스는 처음부터 스이긴과 쿵짝이 잘 맞았다. 그는 넷트라에서 떠도는 최신 영상과 농담에 능통했는데, 그것은 영상을 만들고 커뮤니티와 소통하는 스이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끝없이 ‘밈’을 주고받으며 빠르게 가까워졌다. 종종 스이긴은 전자레인지 곁에 기대어 서서, 대화에 열중하다 말고 그보다 더 재밌는 얘긴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한편 토커스는 유우이치로에게도 같은 농담을 시도했지만, 유우이치로가 좀처럼 웃질 않자 점점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이게 다 스이긴이 너무 착한 탓이라고 유우이치로는 생각했다. 그의 아내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데다 이웃에게 항상 다정하고 친절하기까지 한 안드로이드였다. 그런 상냥한 성격으로 이제는 하다못해 전자레인지의 썰렁 개그에조차 웃어주고 있는 것이다. 유우이치로로서는 그들의 집 전자레인지의 어디가 그렇게 웃긴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일 토커스가 콩트 AI이었다면 개그맨이 되는 데 실패해 다른 부문으로 전향한 지 오래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좌절된 꿈을 안고 그들의 집 전자레인지에 도착한 걸 수도 있다.
“전뇌 공간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땐, 정말이지 지루했죠.”
토커스가 말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 전뇌 공간이라지만, 저 같은 AI들은 주어진 일이 없으면 움직일 생각을 않으니까요. 스이긴 양은 이게 어떤 기분인지 아시지요? (이쯤에서 스이긴은 “음음”하고 동의의 비음을 내뱉는다.) 얼른 제가 들어갈 제품이 출시되기만을 바랄 수밖에요. 참, 이 전자레인지는 3만 대를 우선 생산할 계획이었는데….”
스이긴은 싱크대에 반쯤 기대어 토커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유우이치로는 길쭉하게 펼쳐진 그녀의 몸을 바라본다. 스이긴의 몸체는 통통하다기보다 마르고 쭉 뻗은 편에 가깝다. 어딘가에 기대어 서 있을 땐 그러한 몸체의 선이 잘 살아났는데, 그럴 땐 평소보다 훨씬 키가 커 보인다. 은색 머리카락은 목덜미를 따라 늘어져 있고, 고개는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다. 이제 유우이치로는 스이간의 입술 아래에 난 점을 응시한다. 냉정해 보이기 십상인 얼굴이지만, 그에게는 무표정할 때조차 어딘가 상냥해 보이는 입매. 즐거움에 대비된 그 입꼬리를. 마침내 스이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위로 솟구친다. 방금 막 토커스가 회심의 농담을 던진 탓이다. 잠시 후 스이긴의 웃음소리가 맑은 은빛 종소리처럼 집 안으로 퍼져 나간다.
유우이치로는 체통을 지키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몰랐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들의 집 한 구석을 차지한 전자레인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쾌활한 가전제품이 아내와 점점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손톱 끝에 난 거스러미나 하얀 카펫 위에 내려앉은 회색 먼지와 다를 바 없게 느껴졌다.
유우이치로가 질투를 느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전에 스이긴이 자신의 동창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던 때에도 유우이치로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스스로에게 냉정한 인간이었다. 사건과 감정을 분리해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우이치로는 마음속에 똬리를 튼 비합리적인 감정이 그들 부부가 일구어 온 평화를 바닥에 내던진 거울처럼 산산조각내기 전에 모든 일을 자기 선에서 잘 갈무리하려고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지난 몇 년 간 부부관계를 잘 유지해 왔노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유우이치로였기에 새로 산 가전제품에게 좀 잘 웃어준다는 이유만으로 아내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꼼꼼히 되짚어봤을 때 스이긴이 그 정도로 토커스에게 시간을 쏟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고작해야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하고 10분 남짓, 길어봤자 2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가 전자레인지 앞에서 일도 없이 10분을 넘게 서 있는단 말인가?
이제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거나 손을 맞잡을 때 집 한 구석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전자레인지의 존재를 의식한다. 검은색 계기판 위에서 3초 간격으로 반짝이는 절전 상태의 하얀 불빛을. 스이긴과 토커스 간의 대화가 길어지는 날이면 유우이치로는 토커스가 보는 앞에서 일부러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춘다. (그때마다 토커스는 방청객이라도 된 양 과장된 비명소리“꺄-악-”를 출력하지만, 그마저도 유우이치로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스이긴을 안방으로 이끈 후에도, 서로 깊게 끌어안고 있을 때에도 아주 잠깐씩, 그들의 집 한 구석에서 깜빡이고 있는 가전제품의 불빛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토커스를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한다.
어느 날 유우이치로는 불쑥 말했다.
“전자레인지 말인데.”
“응? 토커스가 왜?”
“일 없을 땐 꺼둘까.”
스이긴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러면 토커스가 데이터를 수집하기 좀 어려워지지 않을까? 식사 스케줄은 어쩌고?”
“내가 맞추면 되잖아.”
스이긴의 면밀한 시선이 유우이치로를 훑고 지나갔다.
“토커스랑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하지만 영민한 아내는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무엇이 문제인지 추궁하는 스이긴에게, 결국 유우이치로는 마지못해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요즘 가사노동 시간이 쓸데없이 길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이긴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쓸데없이?”
유우이치로는 황급히 단어를 정정했다.
“…생산성이 없는.”
“흐음.”
‘젠장.’
“둘이서 하는 대화가 신경 쓰여.”
“어라, 그거 뭐라고 해석하면 돼?”
“…마음대로.”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스이긴이 기발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아침, 유우이치로는 출근을 준비하다 말고 부엌 한 구석에서 아날로그 다이얼을 누를 때 흘러나오는 삑삑대는 소리를 들었다. 이질적이고 차가운 그 전자기계음은 약 30초 정도 반복되다가 뚝 끊어졌다.
거실로 나가보니 스이긴이 싱크대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맞은편 토커스의 하얀 불빛은 있는 힘껏 던진 탱탱볼 마냥 계기판 안에서 날뛰고 있었는데, 아내와 기막힌 농담을 주고받은 직후 종종 보여주는 모습이라는 것을 유우이치로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똑바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방금 무슨 소리가 났는데.”
“아, 시험 삼아 토커스랑 전자음을 써서 대화해봤어.”
“전자음?”
“응, 평균 대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적어도 10분 정도는 소요될 주제였는데, 전자음을 썼더니 30초 안팎이면 해결되더라. 새로운 시도였지만 유의미한 결과 값이 산출되었어. 어때?”
스이긴이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러면 대화 시간 때문에 더 신경 쓰일 일은 없겠죠, 삐돌이 씨?”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순간 진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유우이치로는 익숙해지지 않는 방법으로 마음을 설명해야만 한다. 그는 딱딱하고 각진 껍질로 외부의 충격을 튕겨내는 일에 누구보다 능숙했으나, 자신을 반으로 갈라 부드러운 단면을 보여주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단면을 이루는 차갑고 매끄러운 결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를 고르는 데에도 늘 애를 먹었다. 요컨대 유우이치로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이런 것일 테다 : 그 전자레인지와 대화하지 마.
하지만 고작 가전제품과 삐삐삐 소리를 주고받은 정도로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는 법. 남편이 그래서는 안 된다. 결국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경이 좀 쓰이긴 했지만 심각한 건 아니었어.”
그것은 어느 쪽으로든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으므로 스이긴은 좋을 대로 알아들었다. 이왕 시작한 거 남편을 배려하는 쪽이 좋다고 판단한 스이긴은 본격적으로 전자음을 애용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유우이치로는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한 후, 혹은 휴일마다 이따금 삐빼 소리를 내며 30초 남짓의 대화를 주고받는 스이긴과 토커스를 지켜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얼마 가지 않아 새로운 난관이 되었다. 스이긴이 더는 전자레인지 앞을 서성거리지 않게 된 건 좋았지만, 이제 유우이치로는 스이긴과 토커스가 당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조금도 알아듣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둘이서 무슨 얘기했어?”
한 번은 이렇게 물은 적도 있었다. 그러자 스이긴은 그런 질문을 받은 것이 꽤 의외라는 얼굴로, 유우이치로로서는 직관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난해한 주제를 늘어놓았다.
그것은 전기 신호로 소통 가능한 모든 전자 기기들이 알음알음 드나드는 전뇌電腦공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AI들 중에는 자체 구축한 보안 시스템으로 프라이빗한 룸을 개설하는 경우도 있다나. 그런데 같은 AI간의 해킹 위험이 있어서 보통 철통보안은 불가능하대.”
“서버가 따로 있는 건가? 꽤 방대한 용량이 필요할 것 같은데.”
“토커스 말로는 공공 네트워크 연결망 같은 거래. 공간이라 불리는데도 말이야. 흠, 거기에는 몸이랄 게 없으니까… 다들 멈춰있을 필요가 없나 봐. 생각해봐, 유우. 우리 집 전자레인지 대장님이 무엇이든 흘러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계에서 왔다니.”
보통 복잡한 개념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건 유우이치로의 몫이었는데, 예외적으로 스이긴은 이 주제를 두고 꽤 오랜 시간 끈질기게 생각해온 것 같았다. 그런 스이긴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에 둘이서 그런 얘기를 하는군.”
덤덤하게 중얼거리자, 스이긴은 장난스럽게 눈을 굴리다 말고 눈동자 위로 ‘X’자를 띄우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평소엔 우리 채널 얘기밖에 안 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스이긴의 얼굴이 무척이나 즐거워 보여, 차마 투덜거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두 부부를 향한 토커스의 호의는 점점 더 섬세해졌다. 몇 달이 지나자 토커스는 과할 정도로 이들 부부의 기분과 컨디션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늦은 시간까지 잔업을 마치고 퇴근한 날에는 디저트를 내놓았고, 유동적이라 따로 공유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업무 스케줄을 속속들이 꿰뚫어 그에 맞춘 생활 알림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두 사람이 시키지 않은 음식이 저녁 시간에 맞추어 배달되는 일도 있었다. 최근에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따로 얘기한 적도 없는 아주 생뚱맞은 메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이긴이 초창기 영상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배달음식을 토커스가 깜짝 이벤트랍시고 주문한 것이었다! 스이긴은 얼떨떨한 얼굴로 기뻐했지만, 유우이치로는 그 같은 배려가 어쩐지 꺼림칙하게만 느껴졌다. 그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던 것이다.
그렇다. 계기판 위에서 깜빡이는 토커스의 하얀 불빛에는 어딘가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스이긴의 팔불출 덕분에 생긴 곡선형의 LED 눈썹이 인간적인 면모를 불어넣어준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전자레인지는 완전히 잠드는 법이 없었다. 유우이치로는 종종 새벽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토커스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절전 상태로 반쯤 감겨 있는 그 하얀 불빛은, 유우이치로가 냉장고 앞을 더듬거리고 있으면 번쩍 일어나 이렇게 말을 걸곤 했다.
“잠이 오지 않으시나요?”
토커스의 불빛은 어디에나 있었다. TV 모니터 아래, 컴퓨터 본체, 전자시계, 패드를 충전하는 콘센트 위쪽… 접속할 수 있고 깜빡거릴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가 되었든, 그 하얀 불빛은 잠시 반짝이며 나타났다 느닷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 모든 신호가 꼭 토커스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불빛들은 모두 각기 다른 명령을 수행 중인 기계들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 스이긴은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난 못 봤는데?”
오히려 그녀는 유우이치로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너무 그러진 마. 다음부터 시키지 않은 건 하지 말라고 하면 되지. 응?”
스이긴은 남들과 거리를 잘 유지하는 편이었다. 특히 유우이치로와 결혼한 이후로는, 요컨대 의무와 구속이 수반되는 약속을 공유한 이후로는 늘 적절한 경각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잡거나 눈빛을 교환할 필요가 없는 조건 앞에서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일례로, 유우이치로는 은근하게 치근대는 구독자의 코멘트를 스이긴이 끝끝내 알아차리지 못하고 친절하게 장문의 답글을 달아준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에까지 질투를 느낄 만큼 유우이치로가 사랑에 눈 먼 자는 아니었다. 종종 두 부부는 거리에서 데이트를 하는 중에 팬들과 마주쳤고, 그럴 때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대화를 나누곤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스이긴은 팬들과 상호작용하고 있긴 했지만 그건 지속적이지 않을 뿐더러 한 방향에 가까웠다.
토커스는 어떠한가? 그는 집 한 구석을 차지한 가전제품으로서 항시 스이긴을 응시하거나 상호작용을 요청할 수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아내의 주의를 끌어, 둘만이 소통 가능한 언어로 짧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의 손목을 붙잡거나 뒤에서 끌어안을 수 있고, 밤새 함께 뒹굴면서 그녀를 보챌 수도 있었지만, 사실 그 점을 제외하면 주어진 상황은 토커스와 거의 비슷했다. 그러니까 아내를 만질 수도, 침범할 수도 없는 전자레인지는 정말 조금의 위협도 될 수 없는 걸까? 한 집에서 아내를 공유하는 것만 같은 이 께름칙한 기분은 그저 질투 때문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럴 만한 일’이며, 또 무엇이 그 나머지를 위험요소로 느끼게끔 하는 걸까?
부부간 외도를 구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은 생각지도 못한 사건 때문에 완전히 끝났다.
스이긴이 정비소에 가기 위해 반차를 낸 날이었다. 홀로 귀가한 유우이치로는 정비소에 간 줄 알았던 스이긴이 싱크대에 반쯤 몸을 기댄 채,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순간 이성을 잃었다. 가방을 집어던지고 달려 들어가 스이긴을 일으켜 세우던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아내의 뒤통수에 연결된 긴 케이블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였다.
케이블은 전자레인지와 공유 중인 콘센트 USB 칸에 꽂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다음, 그는 토커스를 불렀다.
전자레인지는 답이 없었다. 이 집에 도착한 이래 단 한 번도 쉰 적 없던 계기판에는 AI 부재를 알리는 푸른색 모래시계 마크가 떠있었다.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을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스이긴의 정신은 이미 그 몸에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처럼, 기체는 평소 안아 올릴 때보다 훨씬 더 묵직하고 서늘했다.
스이긴의 정신이 토커스와 함께 전뇌공간에 진입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였다. 유우이치로는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 지금 스이긴과 토커스는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없는 곳에 함께 있다. 방금 전까지 남편인 유우이치로는 이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일이 너무 지나쳤다. 과연 이게 외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노을이 지고 있었지만 그는 불을 켜는 것도 잊고 소파에 앉았다.
유우이치로는 그들의 지난 결혼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인간이었고, 그의 아내는 안드로이드였다. 어디서나 보이드를 볼 수 있는 시대였지만, 어디서든 보이드를 증오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익명의 증오에 맞서 두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싸워왔던가. 스이긴이 채널을 개설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스이긴은 두 사람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어 했다. 이곳에도 이야기가 있노라고. 공감하고 이입하고 가엾게 여길 수도 동경할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랑의 이야기가. 그녀가 찍어 올리는 영상에는 힘이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각종 뉴스와 넷트라 게시판을 오르내리며 두 사람은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인플루언서 부부가 되었다.
전 일본 최초 안드로이드와 결혼한 형사에서 전 일본 최초 전자레인지에게 아내를 빼앗긴 남자로 전락이라도 하게 되는 것인가. 이것 참 축하할 일이군. 자조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땅거미가 지고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거실에 장막처럼 어둠이 드리우자 냉장고가 웅웅대며 돌아가는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스이긴이 깨어난 건 그로부터 30여분이 더 흐른 뒤였다. 그녀는 깜깜한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유우이치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뭐해, 불도 안 켜고? 무슨 일 있어?”
“어디 갔다 왔어?”
그런 다음, 유우이치로는 말을 정정했다.
“아니, 대답할 필요 없어. 그냥 들어.”
그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이 스이긴의 손끝을 붙잡았다가 힘없이 미끄러졌다.
“나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
“네가 저놈의 전자레인지랑 그만 좀 얘기했으면 좋겠어.”
조심스럽게 잡아당기자 스이긴이 손쉽게 그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이긴은 눈을 굴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몸체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잠시 후 스이긴의 손이 유우이치로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질투야?”
마침내 그녀가 물었다.
“그래.”
“흐음.”
“너 이거 바람이야.”
“뭐어?”
스이긴이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왜 안 되지? 방금까지 같이 있었잖아.”
스이긴은 난처한 눈치였다.
“그렇긴 한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대체 둘이서 뭘 한 거야?”
“그건….”
스이긴은 잠시 뜸을 들였다.
“당장 설명은 힘들어. 일주일만 더 기다려줄래? 정말이야. 오해할 건 하나도 없었어.”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을 내려다보았다. 품에 안긴 스이긴의 묵직한 존재감, 매끈하게 뻗은 허리와 익살스러운 눈. 얼떨떨하고 민망한 마음을 감추려고 짐짓 장난스럽게 굴고 있지만, 부끄러워서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스이긴의 몸체를 느끼며, 유우이치로는 불안을 꺾고 신뢰에 마음을 기대어 보기로 했다. 사실, 그것 외에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알겠어.”
그가 대답했다.
일주일 동안 유우이치로는 경미한 정서불안에 시달렸다. 얼빠진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평소보다 업무에 몰두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현장을 뛰어다니고, 서류를 작성하고, 결재를 올리고, 잔업을 마무리했다. 문제의 사건 이후로 토커스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지적하지 않았다. 반면 스이긴은 미묘한 태도였다. 비밀을 감춘 이들이 대게 그러하듯이, 평소처럼 쾌활하다가도 이따금 미적지근하고 모호한 말과 표정으로 무언가를 감추려고 들었다.
하지만 일주일째에 유우이치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식탁 위에 놓인 이혼 서류 봉투가 아니라 최신형의 헬멧 고글이었다.
“…뭐야, 이건?”
“결혼기념일 선물.”
유우이치로는 황급히 달력을 확인했다.
“…….”
“그럴 줄 알았어, 깜빡 잊고 있었지?”
다 이해한다는 투로 스이긴은 이벤트MC처럼 손뼉을 짝 부딪치며 말했다.
“얼른 써봐.”
“…뭘?”
“얼른. 한 번만, 응?”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의 의도를 깨달았다. 스이긴이 준비한 고글은 가상현실게임에서 사용되는 장치로, 뇌의 전기신호를 변환하여 사용자의 정신 일체를 서버로 전송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스이긴은 고글의 기능을 약간 손보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아무래도 그를 전뇌공간에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준비됐지?”
“준비는 됐는데….”
“힘 풀어. 걱정 마, 재밌을 거야.”
스이긴이 자신의 케이블을 콘센트에 연결시키며 말했다.
다음 순간, 정신이 있는 힘껏 던진 야구공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일순 앞으로 움직였다. 그를 둘러싼 사방의 벽, 앉아있던 소파, 어깨를 붙잡은 손길. 육체로 체험 중이던 그 모든 공간성과 육체성이 한순간 뒤편으로 물러나고, 잠시 후 유우이치로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상태에 진입해 있었다. 그는 아무데도 없었지만 동시에 어디에나 있었다. 더 이상 몸을 느낄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존재했다. 빛이 있었지만 눈부시지 않았다. 클레이처럼 끝없이 늘어난 정신이 하얗고 투명한 망에 걸려있는 듯했고, 그 속에서 유우이치로는 어디로든 이동하거나 흘러 다닐 수 있었다. 그는 새롭게 자유로웠다. 벽 너머로 수백 수천 개의 속삭임들이 들려왔다. 아득한 곳에서 스이긴의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유우!”
즉시 유우이치로는 그녀를 찾기 위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러자 설명하기 어려운 빠른 작용이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그는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스이긴은─정확히는 그녀일 수밖에 없는 어떤 전기신호는 자기 앞으로 흘러온 유우이치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기분은 좀 어때?”
“이상한데.”
“조금만 더 집중하면 몸도 만들어낼 수 있어. 넌 금방 익숙해질 걸.”
시범을 보여주듯 스이긴이 뿅 익숙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긴 다리, 매끄럽게 뻗은 팔과 장난스러운 눈동자, 상냥한 얼굴. 그 얼굴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얇은 줄기식물이 가닥가닥 뭉치는 것처럼 팔이 자라났다. 유우이치로는 전뇌공간에서 재생성 된 자신의 데이터를 점검하며 손쉽게 몸을 만들어냈다.
“그치?”
스이긴이 눈썹을 찡긋거렸다.
“여기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스이긴이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놀랍지 않아? 나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어.”
“…그동안 전자레인지랑 여길 들락거린 거야?”
“아, 그거 말이지. 토커스가 여길 소개해준 건 맞아.”
스이긴이 슬쩍 유우이치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유우, 일전에 전뇌공간에서 프라이빗룸을 만들 수 있다고 한 거 기억나?”
“그래, 보안 문제 때문에 완전한 프라이빗룸 같은 건 없다고 했던가.”
“응, 그런데 토커스가 기존 보안 시스템을 보완한 프라이빗룸을 갖고 있었거든. 그게 여기야.”
유우이치로는 못마땅해졌다.
“그럼 그 녀석이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건가?”
“아냐, 아냐. 내가 여길 너무 좋아하니까, 토커스가 이곳 관리자 권한을 빌려주겠다고 했어. 지금 이 공간에 관한 모든 권한은 나한테 있어. 그래서 그동안 좀 바빴던 거야. 이 작업이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거든. 지금 토커스는 밀린 가사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을 걸.”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다. 이곳은 어디로든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완벽하게 차단할 수도 있는 거대한 네트워크다. 그들을 증오하는 익명의 목소리는 이곳에 없다. 원한다면 오히려 두 사람이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전뇌공간의 특수성을 경험한 스이긴은 유우이치로에게 이 공간을 소개하고 싶어 했다. 그런 공간이 서로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 때문에 데이트 중에도 단둘이 있기 힘들었잖아.”
스이긴이 후후 웃었다.
“데이트를 할 땐 너하고만 있고 싶었어.”
“…….”
“내참, 토커스는 나랑 있을 때도 네 얘기만 하거든? 걘 정말, ‘올팬’이라고 강조하지만 나보다 네가 더 좋은가 봐.”
“별로 궁금했던 정보는 아닌데.”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만.”
스이긴이 소리 내어 웃었다. 가닥가닥 공중에 흩어 진 은빛 머리카락이 물결치자 은은한 빛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잠깐이지만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스이긴은 한결 같은 모습이었다. 감흥 없이, 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빛을 그저 응시하다 끝날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가정마저 까마득할 정도로 지금이 익숙했다. 스이긴이 어느 때보다 그의 인생과 가깝게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든 할 수 있다고?”
유우이치로가 스이긴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응.”
“뭘 하든 아무도 모르고.”
“응. 시험해 볼래?”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그리하여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의 쭉 뻗은 장신을 자기 쪽으로 완전히 잡아당겨, 축축한 입술에 고요히 입 맞추었다. 그러자 데이터, 그 수많은
잠깐의 정전과 웅성거림 형광등 빛을 반사하며 흘러내리는 은빛 머리카락 비명 고통 총소리 눈물 깊은 절망과 슬픔 두려움 희망 의지 피와 뒤섞인 푸른 연료 자신을 끌어안던 스이긴 모든 것이 끝난 다음 함께 걷던 거리가
천천히 그들을 덮쳤다.
그것은 그들을 그들로서 있게 하는 모든 순간, 모든 선택에 대한 기록이었다. 수많은 신호로 구성된 전뇌공간의 몸이었다.
스이긴이 마음을 가진 존재라 믿었으므로 스이긴은 상상한 그대로 따뜻했다. 스이긴이 유우이치로의 상냥함을 믿어주었으므로 그는 상상한 그대로 부드러웠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완벽했다. 그 속에서, 유우이치로는 딱딱하고 각진 껍질을 벗고 매끄러운 단면처럼 드러나는 자신의 마음을 느꼈다. 스이긴에게 주고 싶었던,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고 스이긴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은으로 만든 종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잠시 후 어둠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
두 사람이 가정용 전자레인지를 구매한 것은 2주 전의 일이었다.
전자레인지는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이긴 했지만 어디선가 봤음직한 흔해빠진 모양새였다. 윗부분은 검은색으로 코팅되었고, 문 부분은 밝은 회색으로 마감돼 있었으며, 손잡이는 매트한 아이언 재질이었다.
이 전자레인지에 타제품과 구분될 만한 차별점을 한 가지 꼽는다면 가사도우미 AI가 내장되어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본에서 AI가 내장된 가전제품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 역시 그다지 내세울 만 한 점은 못되었다.
스이긴水銀은 전자레인지와 금방 친해졌다. AI의 이름은 토커스. 남성형 목소리를 갖고 있었는데, 가사도우미에 연상되는 구시대적이고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을 타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같은 고정관념은 2054년에도 일본이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문제 중 하나였다.)
토커스는 유머러스하고 위트 있는 성격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스이긴과 유우이치로의 오랜 팬이었다! 이 가사도우미 AI는 역할을 배정받기도 전부터 스이긴이 운영하는 동영상 채널을 구독해 왔다고 했다. 그는 초창기에 업로드된 브이로그는 물론, 스이긴이 잠깐 올렸다 지운 30초 남짓의 이벤트 영상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종종 두 분의 혼수품이 되는 걸 꿈꾸곤 했었죠.”
장난스러운 말투로 토커스가 말했다.
“몇 년 늦긴 했지만,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졌군요.”
그 쾌활한 목소리를 들으며, 유우이치로는 만일 토커스에게 얼굴이 있었다면 눈썹을 찡긋대는 버릇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이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니, 스이긴은 뭐가 즐거운 건지 잠깐이지만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우리 집 전자레인지에 그런 귀여운 발상을? 흠, 우리 형사님 상상력이 나날이 발전하는걸.”
유우이치로는 어느 포인트가 귀여웠던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스이긴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늘 그런 식이었다. 스이긴은 남편의 사랑스러운 일화를 자랑하는 투로 그들의 전자레인지에 유우이치로의 공상을 그대로 읊어주었고─“유우가 그러는 거 있지?”─, 며칠 뒤 토커스는 조리 시간을 표시하는 작은 계기판에 눈썹처럼 움직이는 아이콘을 추가함으로써 두 부부의 농담을 계속 간직해 나갔다.
기계가 인간성을 갖추는 건 외관상 인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보이드VOID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토커스와 같이 생활공간을 공유하는 AI들은 일정 부분 인간과 비슷한 감수성을 공유했다. 그쪽이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얼마 가지 않아 토커스는 유우이치로와 스이긴의 생활 전반을 빠르게 파악했고, 두 부부의 가치관과 성향, 스케줄, 식습관을 고려해 가며 가사의 우선순위를 유동적으로 조절하게 되었다.
토커스는 처음부터 스이긴과 쿵짝이 잘 맞았다. 그는 넷트라에서 떠도는 최신 영상과 농담에 능통했는데, 그것은 영상을 만들고 커뮤니티와 소통하는 스이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끝없이 ‘밈’을 주고받으며 빠르게 가까워졌다. 종종 스이긴은 전자레인지 곁에 기대어 서서, 대화에 열중하다 말고 그보다 더 재밌는 얘긴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한편 토커스는 유우이치로에게도 같은 농담을 시도했지만, 유우이치로가 좀처럼 웃질 않자 점점 말을 걸지 않게 되었다….)
이게 다 스이긴이 너무 착한 탓이라고 유우이치로는 생각했다. 그의 아내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데다 이웃에게 항상 다정하고 친절하기까지 한 안드로이드였다. 그런 상냥한 성격으로 이제는 하다못해 전자레인지의 썰렁 개그에조차 웃어주고 있는 것이다. 유우이치로로서는 그들의 집 전자레인지의 어디가 그렇게 웃긴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일 토커스가 콩트 AI이었다면 개그맨이 되는 데 실패해 다른 부문으로 전향한 지 오래였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좌절된 꿈을 안고 그들의 집 전자레인지에 도착한 걸 수도 있다.
“전뇌 공간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땐, 정말이지 지루했죠.”
토커스가 말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 전뇌 공간이라지만, 저 같은 AI들은 주어진 일이 없으면 움직일 생각을 않으니까요. 스이긴 양은 이게 어떤 기분인지 아시지요? (이쯤에서 스이긴은 “음음”하고 동의의 비음을 내뱉는다.) 얼른 제가 들어갈 제품이 출시되기만을 바랄 수밖에요. 참, 이 전자레인지는 3만 대를 우선 생산할 계획이었는데….”
스이긴은 싱크대에 반쯤 기대어 토커스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유우이치로는 길쭉하게 펼쳐진 그녀의 몸을 바라본다. 스이긴의 몸체는 통통하다기보다 마르고 쭉 뻗은 편에 가깝다. 어딘가에 기대어 서 있을 땐 그러한 몸체의 선이 잘 살아났는데, 그럴 땐 평소보다 훨씬 키가 커 보인다. 은색 머리카락은 목덜미를 따라 늘어져 있고, 고개는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다. 이제 유우이치로는 스이간의 입술 아래에 난 점을 응시한다. 냉정해 보이기 십상인 얼굴이지만, 그에게는 무표정할 때조차 어딘가 상냥해 보이는 입매. 즐거움에 대비된 그 입꼬리를. 마침내 스이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위로 솟구친다. 방금 막 토커스가 회심의 농담을 던진 탓이다. 잠시 후 스이긴의 웃음소리가 맑은 은빛 종소리처럼 집 안으로 퍼져 나간다.
유우이치로는 체통을 지키려고 애썼다. 처음에는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몰랐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들의 집 한 구석을 차지한 전자레인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쾌활한 가전제품이 아내와 점점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손톱 끝에 난 거스러미나 하얀 카펫 위에 내려앉은 회색 먼지와 다를 바 없게 느껴졌다.
유우이치로가 질투를 느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전에 스이긴이 자신의 동창과 가깝게 지내기 시작했던 때에도 유우이치로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스스로에게 냉정한 인간이었다. 사건과 감정을 분리해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쯤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유우이치로는 마음속에 똬리를 튼 비합리적인 감정이 그들 부부가 일구어 온 평화를 바닥에 내던진 거울처럼 산산조각내기 전에 모든 일을 자기 선에서 잘 갈무리하려고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지난 몇 년 간 부부관계를 잘 유지해 왔노라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유우이치로였기에 새로 산 가전제품에게 좀 잘 웃어준다는 이유만으로 아내에게 불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꼼꼼히 되짚어봤을 때 스이긴이 그 정도로 토커스에게 시간을 쏟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고작해야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하고 10분 남짓, 길어봤자 2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가 전자레인지 앞에서 일도 없이 10분을 넘게 서 있는단 말인가?
이제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거나 손을 맞잡을 때 집 한 구석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전자레인지의 존재를 의식한다. 검은색 계기판 위에서 3초 간격으로 반짝이는 절전 상태의 하얀 불빛을. 스이긴과 토커스 간의 대화가 길어지는 날이면 유우이치로는 토커스가 보는 앞에서 일부러 아내의 뺨에 입을 맞춘다. (그때마다 토커스는 방청객이라도 된 양 과장된 비명소리“꺄-악-”를 출력하지만, 그마저도 유우이치로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스이긴을 안방으로 이끈 후에도, 서로 깊게 끌어안고 있을 때에도 아주 잠깐씩, 그들의 집 한 구석에서 깜빡이고 있는 가전제품의 불빛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토커스를 질투하고 있는 자신을 인정한다.
어느 날 유우이치로는 불쑥 말했다.
“전자레인지 말인데.”
“응? 토커스가 왜?”
“일 없을 땐 꺼둘까.”
스이긴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러면 토커스가 데이터를 수집하기 좀 어려워지지 않을까? 식사 스케줄은 어쩌고?”
“내가 맞추면 되잖아.”
스이긴의 면밀한 시선이 유우이치로를 훑고 지나갔다.
“토커스랑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하지만 영민한 아내는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무엇이 문제인지 추궁하는 스이긴에게, 결국 유우이치로는 마지못해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요즘 가사노동 시간이 쓸데없이 길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이긴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쓸데없이?”
유우이치로는 황급히 단어를 정정했다.
“…생산성이 없는.”
“흐음.”
‘젠장.’
“둘이서 하는 대화가 신경 쓰여.”
“어라, 그거 뭐라고 해석하면 돼?”
“…마음대로.”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스이긴이 기발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아침, 유우이치로는 출근을 준비하다 말고 부엌 한 구석에서 아날로그 다이얼을 누를 때 흘러나오는 삑삑대는 소리를 들었다. 이질적이고 차가운 그 전자기계음은 약 30초 정도 반복되다가 뚝 끊어졌다.
거실로 나가보니 스이긴이 싱크대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맞은편 토커스의 하얀 불빛은 있는 힘껏 던진 탱탱볼 마냥 계기판 안에서 날뛰고 있었는데, 아내와 기막힌 농담을 주고받은 직후 종종 보여주는 모습이라는 것을 유우이치로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똑바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방금 무슨 소리가 났는데.”
“아, 시험 삼아 토커스랑 전자음을 써서 대화해봤어.”
“전자음?”
“응, 평균 대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적어도 10분 정도는 소요될 주제였는데, 전자음을 썼더니 30초 안팎이면 해결되더라. 새로운 시도였지만 유의미한 결과 값이 산출되었어. 어때?”
스이긴이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러면 대화 시간 때문에 더 신경 쓰일 일은 없겠죠, 삐돌이 씨?”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순간 진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유우이치로는 익숙해지지 않는 방법으로 마음을 설명해야만 한다. 그는 딱딱하고 각진 껍질로 외부의 충격을 튕겨내는 일에 누구보다 능숙했으나, 자신을 반으로 갈라 부드러운 단면을 보여주는 일에는 소질이 없었다. 단면을 이루는 차갑고 매끄러운 결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를 고르는 데에도 늘 애를 먹었다. 요컨대 유우이치로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이런 것일 테다 : 그 전자레인지와 대화하지 마.
하지만 고작 가전제품과 삐삐삐 소리를 주고받은 정도로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는 법. 남편이 그래서는 안 된다. 결국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경이 좀 쓰이긴 했지만 심각한 건 아니었어.”
그것은 어느 쪽으로든 해석될 수 있는 말이었으므로 스이긴은 좋을 대로 알아들었다. 이왕 시작한 거 남편을 배려하는 쪽이 좋다고 판단한 스이긴은 본격적으로 전자음을 애용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유우이치로는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한 후, 혹은 휴일마다 이따금 삐빼 소리를 내며 30초 남짓의 대화를 주고받는 스이긴과 토커스를 지켜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얼마 가지 않아 새로운 난관이 되었다. 스이긴이 더는 전자레인지 앞을 서성거리지 않게 된 건 좋았지만, 이제 유우이치로는 스이긴과 토커스가 당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조금도 알아듣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둘이서 무슨 얘기했어?”
한 번은 이렇게 물은 적도 있었다. 그러자 스이긴은 그런 질문을 받은 것이 꽤 의외라는 얼굴로, 유우이치로로서는 직관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난해한 주제를 늘어놓았다.
그것은 전기 신호로 소통 가능한 모든 전자 기기들이 알음알음 드나드는 전뇌電腦공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AI들 중에는 자체 구축한 보안 시스템으로 프라이빗한 룸을 개설하는 경우도 있다나. 그런데 같은 AI간의 해킹 위험이 있어서 보통 철통보안은 불가능하대.”
“서버가 따로 있는 건가? 꽤 방대한 용량이 필요할 것 같은데.”
“토커스 말로는 공공 네트워크 연결망 같은 거래. 공간이라 불리는데도 말이야. 흠, 거기에는 몸이랄 게 없으니까… 다들 멈춰있을 필요가 없나 봐. 생각해봐, 유우. 우리 집 전자레인지 대장님이 무엇이든 흘러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계에서 왔다니.”
보통 복잡한 개념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건 유우이치로의 몫이었는데, 예외적으로 스이긴은 이 주제를 두고 꽤 오랜 시간 끈질기게 생각해온 것 같았다. 그런 스이긴의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에 둘이서 그런 얘기를 하는군.”
덤덤하게 중얼거리자, 스이긴은 장난스럽게 눈을 굴리다 말고 눈동자 위로 ‘X’자를 띄우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평소엔 우리 채널 얘기밖에 안 하거든?”
그렇게 말하는 스이긴의 얼굴이 무척이나 즐거워 보여, 차마 투덜거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두 부부를 향한 토커스의 호의는 점점 더 섬세해졌다. 몇 달이 지나자 토커스는 과할 정도로 이들 부부의 기분과 컨디션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늦은 시간까지 잔업을 마치고 퇴근한 날에는 디저트를 내놓았고, 유동적이라 따로 공유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업무 스케줄을 속속들이 꿰뚫어 그에 맞춘 생활 알림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두 사람이 시키지 않은 음식이 저녁 시간에 맞추어 배달되는 일도 있었다. 최근에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따로 얘기한 적도 없는 아주 생뚱맞은 메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이긴이 초창기 영상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배달음식을 토커스가 깜짝 이벤트랍시고 주문한 것이었다! 스이긴은 얼떨떨한 얼굴로 기뻐했지만, 유우이치로는 그 같은 배려가 어쩐지 꺼림칙하게만 느껴졌다. 그들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던 것이다.
그렇다. 계기판 위에서 깜빡이는 토커스의 하얀 불빛에는 어딘가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스이긴의 팔불출 덕분에 생긴 곡선형의 LED 눈썹이 인간적인 면모를 불어넣어준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전자레인지는 완전히 잠드는 법이 없었다. 유우이치로는 종종 새벽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토커스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절전 상태로 반쯤 감겨 있는 그 하얀 불빛은, 유우이치로가 냉장고 앞을 더듬거리고 있으면 번쩍 일어나 이렇게 말을 걸곤 했다.
“잠이 오지 않으시나요?”
토커스의 불빛은 어디에나 있었다. TV 모니터 아래, 컴퓨터 본체, 전자시계, 패드를 충전하는 콘센트 위쪽… 접속할 수 있고 깜빡거릴 수 있는 공간이라면 어디가 되었든, 그 하얀 불빛은 잠시 반짝이며 나타났다 느닷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 모든 신호가 꼭 토커스라고 얘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 불빛들은 모두 각기 다른 명령을 수행 중인 기계들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 스이긴은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난 못 봤는데?”
오히려 그녀는 유우이치로를 걱정하기까지 했다.
“너무 그러진 마. 다음부터 시키지 않은 건 하지 말라고 하면 되지. 응?”
스이긴은 남들과 거리를 잘 유지하는 편이었다. 특히 유우이치로와 결혼한 이후로는, 요컨대 의무와 구속이 수반되는 약속을 공유한 이후로는 늘 적절한 경각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잡거나 눈빛을 교환할 필요가 없는 조건 앞에서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일례로, 유우이치로는 은근하게 치근대는 구독자의 코멘트를 스이긴이 끝끝내 알아차리지 못하고 친절하게 장문의 답글을 달아준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에까지 질투를 느낄 만큼 유우이치로가 사랑에 눈 먼 자는 아니었다. 종종 두 부부는 거리에서 데이트를 하는 중에 팬들과 마주쳤고, 그럴 때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대화를 나누곤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스이긴은 팬들과 상호작용하고 있긴 했지만 그건 지속적이지 않을 뿐더러 한 방향에 가까웠다.
토커스는 어떠한가? 그는 집 한 구석을 차지한 가전제품으로서 항시 스이긴을 응시하거나 상호작용을 요청할 수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아내의 주의를 끌어, 둘만이 소통 가능한 언어로 짧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의 손목을 붙잡거나 뒤에서 끌어안을 수 있고, 밤새 함께 뒹굴면서 그녀를 보챌 수도 있었지만, 사실 그 점을 제외하면 주어진 상황은 토커스와 거의 비슷했다. 그러니까 아내를 만질 수도, 침범할 수도 없는 전자레인지는 정말 조금의 위협도 될 수 없는 걸까? 한 집에서 아내를 공유하는 것만 같은 이 께름칙한 기분은 그저 질투 때문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럴 만한 일’이며, 또 무엇이 그 나머지를 위험요소로 느끼게끔 하는 걸까?
부부간 외도를 구분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고민은 생각지도 못한 사건 때문에 완전히 끝났다.
스이긴이 정비소에 가기 위해 반차를 낸 날이었다. 홀로 귀가한 유우이치로는 정비소에 간 줄 알았던 스이긴이 싱크대에 반쯤 몸을 기댄 채,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순간 이성을 잃었다. 가방을 집어던지고 달려 들어가 스이긴을 일으켜 세우던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아내의 뒤통수에 연결된 긴 케이블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였다.
케이블은 전자레인지와 공유 중인 콘센트 USB 칸에 꽂혀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다음, 그는 토커스를 불렀다.
전자레인지는 답이 없었다. 이 집에 도착한 이래 단 한 번도 쉰 적 없던 계기판에는 AI 부재를 알리는 푸른색 모래시계 마크가 떠있었다.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을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아내는 반응이 없었다. 스이긴의 정신은 이미 그 몸에 없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신처럼, 기체는 평소 안아 올릴 때보다 훨씬 더 묵직하고 서늘했다.
스이긴의 정신이 토커스와 함께 전뇌공간에 진입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보였다. 유우이치로는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 지금 스이긴과 토커스는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없는 곳에 함께 있다. 방금 전까지 남편인 유우이치로는 이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일이 너무 지나쳤다. 과연 이게 외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노을이 지고 있었지만 그는 불을 켜는 것도 잊고 소파에 앉았다.
유우이치로는 그들의 지난 결혼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인간이었고, 그의 아내는 안드로이드였다. 어디서나 보이드를 볼 수 있는 시대였지만, 어디서든 보이드를 증오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익명의 증오에 맞서 두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싸워왔던가. 스이긴이 채널을 개설한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스이긴은 두 사람을 세상에 증명하고 싶어 했다. 이곳에도 이야기가 있노라고. 공감하고 이입하고 가엾게 여길 수도 동경할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랑의 이야기가. 그녀가 찍어 올리는 영상에는 힘이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각종 뉴스와 넷트라 게시판을 오르내리며 두 사람은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인플루언서 부부가 되었다.
전 일본 최초 안드로이드와 결혼한 형사에서 전 일본 최초 전자레인지에게 아내를 빼앗긴 남자로 전락이라도 하게 되는 것인가. 이것 참 축하할 일이군. 자조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땅거미가 지고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거실에 장막처럼 어둠이 드리우자 냉장고가 웅웅대며 돌아가는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스이긴이 깨어난 건 그로부터 30여분이 더 흐른 뒤였다. 그녀는 깜깜한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유우이치로를 보고 깜짝 놀랐다.
“뭐해, 불도 안 켜고? 무슨 일 있어?”
“어디 갔다 왔어?”
그런 다음, 유우이치로는 말을 정정했다.
“아니, 대답할 필요 없어. 그냥 들어.”
그는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이 스이긴의 손끝을 붙잡았다가 힘없이 미끄러졌다.
“나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
“…….”
“네가 저놈의 전자레인지랑 그만 좀 얘기했으면 좋겠어.”
조심스럽게 잡아당기자 스이긴이 손쉽게 그의 품으로 빨려 들어갔다. 스이긴은 눈을 굴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몸체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잠시 후 스이긴의 손이 유우이치로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질투야?”
마침내 그녀가 물었다.
“그래.”
“흐음.”
“너 이거 바람이야.”
“뭐어?”
스이긴이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돼.”
“왜 안 되지? 방금까지 같이 있었잖아.”
스이긴은 난처한 눈치였다.
“그렇긴 한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대체 둘이서 뭘 한 거야?”
“그건….”
스이긴은 잠시 뜸을 들였다.
“당장 설명은 힘들어. 일주일만 더 기다려줄래? 정말이야. 오해할 건 하나도 없었어.”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을 내려다보았다. 품에 안긴 스이긴의 묵직한 존재감, 매끈하게 뻗은 허리와 익살스러운 눈. 얼떨떨하고 민망한 마음을 감추려고 짐짓 장난스럽게 굴고 있지만, 부끄러워서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는 스이긴의 몸체를 느끼며, 유우이치로는 불안을 꺾고 신뢰에 마음을 기대어 보기로 했다. 사실, 그것 외에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알겠어.”
그가 대답했다.
일주일 동안 유우이치로는 경미한 정서불안에 시달렸다. 얼빠진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평소보다 업무에 몰두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현장을 뛰어다니고, 서류를 작성하고, 결재를 올리고, 잔업을 마무리했다. 문제의 사건 이후로 토커스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지만 그는 지적하지 않았다. 반면 스이긴은 미묘한 태도였다. 비밀을 감춘 이들이 대게 그러하듯이, 평소처럼 쾌활하다가도 이따금 미적지근하고 모호한 말과 표정으로 무언가를 감추려고 들었다.
하지만 일주일째에 유우이치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식탁 위에 놓인 이혼 서류 봉투가 아니라 최신형의 헬멧 고글이었다.
“…뭐야, 이건?”
“결혼기념일 선물.”
유우이치로는 황급히 달력을 확인했다.
“…….”
“그럴 줄 알았어, 깜빡 잊고 있었지?”
다 이해한다는 투로 스이긴은 이벤트MC처럼 손뼉을 짝 부딪치며 말했다.
“얼른 써봐.”
“…뭘?”
“얼른. 한 번만, 응?”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의 의도를 깨달았다. 스이긴이 준비한 고글은 가상현실게임에서 사용되는 장치로, 뇌의 전기신호를 변환하여 사용자의 정신 일체를 서버로 전송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스이긴은 고글의 기능을 약간 손보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아무래도 그를 전뇌공간에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준비됐지?”
“준비는 됐는데….”
“힘 풀어. 걱정 마, 재밌을 거야.”
스이긴이 자신의 케이블을 콘센트에 연결시키며 말했다.
다음 순간, 정신이 있는 힘껏 던진 야구공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일순 앞으로 움직였다. 그를 둘러싼 사방의 벽, 앉아있던 소파, 어깨를 붙잡은 손길. 육체로 체험 중이던 그 모든 공간성과 육체성이 한순간 뒤편으로 물러나고, 잠시 후 유우이치로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상태에 진입해 있었다. 그는 아무데도 없었지만 동시에 어디에나 있었다. 더 이상 몸을 느낄 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존재했다. 빛이 있었지만 눈부시지 않았다. 클레이처럼 끝없이 늘어난 정신이 하얗고 투명한 망에 걸려있는 듯했고, 그 속에서 유우이치로는 어디로든 이동하거나 흘러 다닐 수 있었다. 그는 새롭게 자유로웠다. 벽 너머로 수백 수천 개의 속삭임들이 들려왔다. 아득한 곳에서 스이긴의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유우!”
즉시 유우이치로는 그녀를 찾기 위해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러자 설명하기 어려운 빠른 작용이 있었고 얼마 가지 않아 그는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스이긴은─정확히는 그녀일 수밖에 없는 어떤 전기신호는 자기 앞으로 흘러온 유우이치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기분은 좀 어때?”
“이상한데.”
“조금만 더 집중하면 몸도 만들어낼 수 있어. 넌 금방 익숙해질 걸.”
시범을 보여주듯 스이긴이 뿅 익숙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긴 다리, 매끄럽게 뻗은 팔과 장난스러운 눈동자, 상냥한 얼굴. 그 얼굴을 만지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얇은 줄기식물이 가닥가닥 뭉치는 것처럼 팔이 자라났다. 유우이치로는 전뇌공간에서 재생성 된 자신의 데이터를 점검하며 손쉽게 몸을 만들어냈다.
“그치?”
스이긴이 눈썹을 찡긋거렸다.
“여기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스이긴이 허공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놀랍지 않아? 나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어.”
“…그동안 전자레인지랑 여길 들락거린 거야?”
“아, 그거 말이지. 토커스가 여길 소개해준 건 맞아.”
스이긴이 슬쩍 유우이치로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유우, 일전에 전뇌공간에서 프라이빗룸을 만들 수 있다고 한 거 기억나?”
“그래, 보안 문제 때문에 완전한 프라이빗룸 같은 건 없다고 했던가.”
“응, 그런데 토커스가 기존 보안 시스템을 보완한 프라이빗룸을 갖고 있었거든. 그게 여기야.”
유우이치로는 못마땅해졌다.
“그럼 그 녀석이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건가?”
“아냐, 아냐. 내가 여길 너무 좋아하니까, 토커스가 이곳 관리자 권한을 빌려주겠다고 했어. 지금 이 공간에 관한 모든 권한은 나한테 있어. 그래서 그동안 좀 바빴던 거야. 이 작업이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거든. 지금 토커스는 밀린 가사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을 걸.”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다. 이곳은 어디로든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완벽하게 차단할 수도 있는 거대한 네트워크다. 그들을 증오하는 익명의 목소리는 이곳에 없다. 원한다면 오히려 두 사람이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전뇌공간의 특수성을 경험한 스이긴은 유우이치로에게 이 공간을 소개하고 싶어 했다. 그런 공간이 서로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 때문에 데이트 중에도 단둘이 있기 힘들었잖아.”
스이긴이 후후 웃었다.
“데이트를 할 땐 너하고만 있고 싶었어.”
“…….”
“내참, 토커스는 나랑 있을 때도 네 얘기만 하거든? 걘 정말, ‘올팬’이라고 강조하지만 나보다 네가 더 좋은가 봐.”
“별로 궁금했던 정보는 아닌데.”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만.”
스이긴이 소리 내어 웃었다. 가닥가닥 공중에 흩어 진 은빛 머리카락이 물결치자 은은한 빛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잠깐이지만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스이긴은 한결 같은 모습이었다. 감흥 없이, 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빛을 그저 응시하다 끝날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가정마저 까마득할 정도로 지금이 익숙했다. 스이긴이 어느 때보다 그의 인생과 가깝게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든 할 수 있다고?”
유우이치로가 스이긴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응.”
“뭘 하든 아무도 모르고.”
“응. 시험해 볼래?”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그리하여 유우이치로는 스이긴의 쭉 뻗은 장신을 자기 쪽으로 완전히 잡아당겨, 축축한 입술에 고요히 입 맞추었다. 그러자 데이터, 그 수많은
잠깐의 정전과 웅성거림 형광등 빛을 반사하며 흘러내리는 은빛 머리카락 비명 고통 총소리 눈물 깊은 절망과 슬픔 두려움 희망 의지 피와 뒤섞인 푸른 연료 자신을 끌어안던 스이긴 모든 것이 끝난 다음 함께 걷던 거리가
천천히 그들을 덮쳤다.
그것은 그들을 그들로서 있게 하는 모든 순간, 모든 선택에 대한 기록이었다. 수많은 신호로 구성된 전뇌공간의 몸이었다.
스이긴이 마음을 가진 존재라 믿었으므로 스이긴은 상상한 그대로 따뜻했다. 스이긴이 유우이치로의 상냥함을 믿어주었으므로 그는 상상한 그대로 부드러웠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완벽했다. 그 속에서, 유우이치로는 딱딱하고 각진 껍질을 벗고 매끄러운 단면처럼 드러나는 자신의 마음을 느꼈다. 스이긴에게 주고 싶었던,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감고 스이긴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은으로 만든 종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잠시 후 어둠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