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돌을 쥐고 사는 삶

마법사 제브릭의 저택은 엘리오피에서도 부촌으로 손꼽히는 수도 번화가에 지어져 있었다. 오색빛깔 벽돌로 장식되어, 거리 모퉁이에 꼭 맞는 퍼즐처럼 지어진 4층짜리 건물이었다.
제브릭은 이 저택을 이십대 중반에 사들였는데, 정작 그가 그곳에서 지내는 날은 손에 꼽았다. 몇 년 후 제브릭은 첫 제자를 들였고,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어린 제자 역시 저택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제브릭은 워커 홀릭이었다. 무역과 항만 사업으로 세를 불려온 부르주아들은 전통 귀족들과 달리 진보적이고 모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부르주아들은 제브릭의 변화무쌍한 변신 마법을 좋아했다. 그들에게 있어 마법은 돈으로 유지할 수 있는 취미 생활 중에서도 가장 고급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제브릭은 ‘마법’이 그렇게 심각하게 취급될 필요는 없다고 얘기하곤 했다. 결국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면,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에 놓인 건 마법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치완카는 제브릭의 생각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에 관심이 있었다. 마법의 진정한 의미나 마법사로서의 의무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 골몰하며 시간을 보내는 쪽을 선호했다.
열다섯 살 전까지 치완카는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에서 보냈다. 혼자서 지내는 게 쓸쓸하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스승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저택을 쓸고 닦고 서재의 책을 읽거나 정리한 다음, 마법의 문을 통해 ‘드레아사사’의 둥지로 가서 용의 비늘을 골라주고 노래를 들려주는 일만으로 충분히 바빴기 때문이다. 치완카는 혼자인 걸 좋아했고, 혼자일 때만 할 수 있는 일들에서 쉽게 가치를 발견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자기 인생에 큰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아빠와 살 때도 처지는 비슷했다. 마법사가 되었다고 해서 뭔가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할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하다 보면 어느새 한 달이 흐르고, 반 년이 흐르고, 나이를 먹는 것이 바로 인생인 것이다.
물론 치완카에게도 소소한 기쁨은 있었다. 이를테면, 치완카는 자신의 변덕스러운 스승이 불현듯 현관문을 열고 들이닥쳐, 꼭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순간을 좋아했다. 제브릭은 항상 치완카의 머리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 어디 한 번 볼까. 우리-토끼(혹은 염소-생쥐-도마뱀-기니피그-사슴-그 외에도 동물은 언제나 달라졌다)공주님. 왕자님이 건 저주를 잘 풀었는지 한 번 볼까요?” 스승이 낸 숙제(라기엔 장난이었지만)를 푼 날도, 아닌 날도 있었다. 어쨌든 제브릭은 항상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그는 멋졌고, 솜씨가 좋았으며, 경박한 쇼맨십을 뽐내는 와중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고, 언제나 아름다웠다.
치완카는 때때로 제브릭에게 입을 맞추거나 깊게 포옹한 다음, “내일도 저를 보러 오세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게 존경과는 다른 특별한 감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승에게 요구하기엔 다소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열다섯 살이 되자마자 다른 할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새로운 계획에 스승의 용 ‘드레아사사’를 꾀어 들이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제브릭의 제자가 된 열두 살 이래로, 치완카는 이 거대한 용의 곁에서 매일 같이 노래를 들려주었다. 용은 짐승처럼 날카로운 눈동자를 번뜩이며 이빨을 보이다가도 부드러운 노랫소리를 들으면 금세 졸린 듯한 눈으로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런 때 ‘드레아사사’는 누군가가 자신의 배나 목덜미에 기대어 기타를 퉁기던 말던 신경 쓰지 않았다.
치완카는 종종 반수면 상태에 빠진 ‘드레아사사’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비밀까진 아닌데, 누구에게 말하기도 뭐해서 딱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그런 속얘기들 말이다. 그녀는 점점 ‘드레아사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서방국을 벗어나 괴물들이 득시글대는 위험천만한 최북단 국가를 돌면서 용병으로 먹고 살자는 이야기를, 다소 치밀한 계획 없이 안일하게 늘어놓다 말고 “일주일 뒤 나랑 같이 거기 가는 거야”하고 약속할 때도 ‘드레아사사’는 호의적이었다. 용은 치완카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말고 ‘알겠다’는 것처럼 눈을 한 번 깜빡인 다음, 몸을 몇 번 뒤척일 뿐이었던 것이다.
열다섯 살에 그녀는 최북단에 위치한 나라 곳곳을 돌면서 용병 일을 시작했다. ‘드레아사사’는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이 있었다. 치완카는 용병 치고 굉장히 어린 편이었지만, 마법사의 제자인 데다 용을 다룰 줄 아는 전력이라는 사실만으로 금방 인정을 받았다. 치완카는 용의 등에 올라 타, 공중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랫말을 지어내 부르는 것만으로 모든 일을 간편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노랫소리를 들은 괴물들은 화가 나 애꿎은 절벽으로 내달리거나, 혹은 일순 멍한 상태로 자리에 주저앉고는 했다. 그러면 이번에 치완카는 자신의 용을 부추겨, 괴물들을 향해 불꽃을 내뿜도록 만들었다. 괴물들은 늘 쉽게 죽었다.
치완카는 땅에 붙어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잔인한 광경은 몇 번이고 목격했지만 그것은 전부 그녀와 무관한 곳에서 벌어졌다. 무엇도 그녀를 상처 입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설령 그녀가 똑바로 땅에 붙어 있었더라도, 용이 없었더라도 치완카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금처럼 시큰둥한 얼굴로 전장을 쏘다니면서 별로 어렵지도 않게 모든 일을 해냈을 것이라고 조셉은 말했다.
“넌 뭐든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
조셉은 치완카보다 몇 달 앞서 용병 일을 시작한 또래 남자아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치완카와 붙어 다니며 식사를 함께 하더니 어느새 휴식 시간에도 함께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치완카는 그와 사귀는 관계가 되었다. 조셉과 처음 입을 맞춘 날, 치완카는 스승님 생각을 하면서, ‘여전히 스승님을 좋아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하고 생각했다.
조셉과 사귀는 동안 치완카는 종종 그를 엘리오피에 있는 스승님의 저택으로 데리고 갔다. 넓은 거실을 뒹굴면서, 함께 담요를 두른 자세로 두툼한 책을 펼쳐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셉은 인간이라 제브릭의 책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종종 괴상한 그림을 가리키며 그 내용을 추측했다. 그러면 치완카는 고개를 젖히고 저택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조셉이 이별을 고한 건 그로부터 몇 달 후였다. 그는 종종 치완카와 교제하는 동안에도 영문 모를 초조함이나 고통을 호소하곤 했는데, 그게 심화된 것 같았다. 그는 치완카에게, “넌 날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넌 이 관계가 아쉽지 않잖아.”하고 말했다.
“내가 떠나도 넌 그냥 그대로일 거야. 그렇지? 넌 마음 아파하지 않을 거잖아.”
그는 그렇게 얘기해놓고 자기가 내뱉은 말에 스스로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치완카는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조셉은 그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그는 고개를 몇 번 주억이곤, 울음을 참는 듯하다 결국 비참한 표정으로 뒤돌아 떠났다. 두 사람은 그렇게 끝났다.
한동안 치완카는 저택에 혼자 있을 때면 조셉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했을지 고민하곤 했다. 그러면 웃음소리가, 넓고 텅 빈 거실을 가득 채웠던 조셉의 활기찬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저택이 그렇게 넓고 낯설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치완카는 조셉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난 지 오래였고, 치완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또한 그건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당장의 할 일들을-저택의 서고를 정리하고 카펫을 털고 빨래를 했다. 그러는 동안 그리움은 서서히 옅어졌고 저택은 다시 치완카에게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런 일들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그녀의 여자친구나 남자친구는 어느 순간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에서 속상해 했고, 때로는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화를 내기도 하고 온화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면서 이 주제에 관해 대화하려고 했다. 그들은 저마다 치완카의 무언가 때문에 자신이 손상되었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치완카가 이따금은 먼저 연락하거나 찾아와주기를, 자신을 궁금해 하기를 바랐다. 자신들이 치완카에게 하듯이. 하지만 치완카는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 그들과 함께 할 때 느끼는 사랑과 즐거움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지만, 애인들은 별로 설득되지 않았다. 그들은 치완카가 상처 받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매번 저택을 떠났고, 그러면 치완카는 홀로 앉아서 그들이 남기고 간 말에 골몰하다가 가구를 제자리에 놓고 물건을 치우고 빨래를 하기 위해 일어났다.
제브릭이 ‘드레아사사’ 얘길 꺼낸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치완카가 용병 일로 제법 수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면서 눈을 찡긋거렸다. “그 용은 이제 네 거란다.” 삼십대 중반에 들어섰는데도 그는 여전히 철없는 이십대 젊은이처럼 보였다. 칼 같은 단발을 윤기 나게 유지하면서, 두꺼운 눈썹으로 아름다운 얼굴에 여러 가지 감정을 만들어 냈다. 그 얼굴은 자신과 좀 닮은 것도 같아서, ‘아, 스승님이 가족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치완카는 생각했다. 가족이라면 헤어질 필요도 없을 텐데.
하지만 제브릭은 가족이 아니다. 게다가 가족에게 혀를 쓰는 입맞춤을 할 수는 없는 법.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좋은 점도 있다.
“감사해요, 스승님. 계속 드레아사사를 아껴줄게요.”
그런 다음 까치발을 들고 입을 맞추었다. 혀는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그게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북방국으로 돌아온 치완카는 자신의 것이 된 용을 데리고 곳곳을 떠돌았다.
이따금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답장을 기다리는 일은 스승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일만큼 즐거웠다. 저택에 있을 적에는 답장을 놓치는 일이 드물었는데, 갈수록 제때 편지를 쓰는 일이 어려워졌다. 점점 바빠졌고, 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마력 실종 사건이 도래한 이후 ‘아직 마법사’인 이들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였다.
키아론 친구들로부터의 편지도 점점 뜸해졌다. 대다수의 친구들이 어린 시절에 만났다가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관계로 남게 되었다.
이따금 등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기는 했다. 어느 날 내게도 마법이 사라진다면? 더는 제브릭의 저택에 드나들 명분이 사라지고, 그의 제자가 아니게 된다면. 마법 외에는 마땅한 재주를 계발해놓지 않았는데, 갑자기 다른 일로 먹고 살아야 할 처지가 되면 그땐 어떡하지?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서 닥쳐왔다.
그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치완카는 불을 지키고 있었다. 남은 용병들이 식량을 찾아 마을로 내려간 까닭에 베이스캠프를 지킬 인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치완카 곁에는 용이 길게 누워 있었고, 그녀는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쑤시며 늘 그렇듯 용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별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지는 않았다. 적어도 치완카가 생각하기엔. 그런데 불현듯 ‘드레아사사’가 번쩍 고개를 들더니 눈을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어느새 ‘사사’의 눈동자는 칼날처럼 가느다래졌고 비늘은 위로 바짝 솟구쳐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드레아사사’가 그토록 야생적인 모습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사사. 주변에 뭔가 있는 거야?”
용은 대답하지 않았다. 콧김을 뿜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느닷없이 치완카를 노려보았는데, 마치 그곳에 치완카가 있는 줄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용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두 날개를 쭉 펼치더니, 잠시 후 재채기를 하며 공중으로 천천히 떠올랐다. 치완카가 벌떡 일어났다.
“너 왜 그래? 왜 그러는 거야?”
그러나 '드레아사사'는 더 이상 '드레아사사'가 아닌 것 같았다… 공중으로 떠오른 용은 마침내 날개를 움직여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깜짝 놀란 치완카가 고함을 치며 쫓아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용은 포효와 함께 서쪽 하늘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사사!”
눈보라 속에서 치완카가 소리쳤다.
“사사!”
그제야 마법을 써야 했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드레아사사’ 가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부터 노래를 불렀어야 했다. 마법으로 용의 야생성을 잠재우고 자신의 마법사를 돕도록 합의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들은 친구 관계가 아니었다. 치완카는 자신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드레아사사’가 자신과 있는 걸 즐거워하는 줄 알고 마법을 쓰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하지만 그게 실수였다면? 용은 망설임도 없이 떠났으니. 쌍방으로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면?
실은 용이 그녀의 친구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면?
“사사!”
용이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고 더는 노래를 부르지 않은 건 실수일까?
조셉이 그리울 때 그에게 달려가지 않은 건? 친구들로부터 답장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나 찾아가보거나 재차 편지하지 않은 건? 무언가를 구태여 끊어 내거나 보채는 일 없이 그저 벌어진 일을 흘러가게 두면서, 거절하거나 제안하는 법 없이 살아가는 일. 손 안에 쥔 조약돌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채로….
‘내가 떠나도 넌 그냥 그대로일 거야. 그렇지? 넌 마음 아파하지 않을 거잖아.’
지금 이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막막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치완카는 잠시 후 발길을 돌렸다.
그러고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갔다.
복사되었습니다!
BAN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