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마음 먹기와 선물 받기»

크리스마스 기념 로그

“메리 크리스마스이브야, 아가씨.”
에번스가 코를 찡긋거렸다. 케니스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던 참이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얇은 유리그릇의 가장자리를 손가락 끝으로 리듬감 있게 잡아 올리면서. 이 그릇에 담겨져 나오는 아이스크림은 자두와 말린 베리를 곁들인 신 메뉴로 최근 이 레스토랑을 먹여 살리는 일등 공신이었다. 가격은 케니스의 한 달 봉급의 3분의 1 정도 되었다. 그릇까지 포함하면 세 달치 봉급 정도 되려나?
에번스는 행색으로만 따지면 이곳과 ‘그렇게까지’ 잘 어울리는 인간은 아니었지만―케니스는 그가 옷 서너 벌을 돌려가며 입는다는 걸 눈치 챈지 오래였기 때문에―종종 이곳에 얼굴을 비추는 걸 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으로는 버는 모양이었다.
또한 그는 케니스에게 저질스러운 눈짓을 보내는 쪽도 아니었다. 에번스에게 장난스럽게 받아칠 마음을 먹은 건 전적으로 그 때문이었다. 케니스는 연극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얹어놓고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띠웠다.
“어디보자, 술에 취한 건 아닌 것 같고.”
케니스가 고개를 치켜 올리자 머리카락이 휙 하고 뒤로 넘어갔다.
“어쩐 일로 말을 다 걸었군요?”
“이브니까.”
“흐음.”
“끝나고 뭐 할 거야?”
“뭐, 바네사네랑 있겠죠.”
“모여서 하는 일이 너무 뻔한데. 사거리 뒤쪽으로 해서 골목 구경이나 하러 가지 그래.”
“거기 볼 게 있던가?”
“내 가게가 있지.”
에번스가 킬킬거리고는 말을 덧붙였다.
“2번가 골목에 누가 큰 나무를 잘라서 가져다 놨더군. 일단 그게 거기 있으니 다들 오며가며 뭐라도 하나씩 달아놓던데 말이야. 지금쯤 제법 구색이 갖춰져서 볼만할 거야.”
“어린애들이 좋아하겠네요.”
“이런, 아가씨는 이제 그럴 나이가 아닌가?”
“아무래도.”
하지만 에번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는 얼굴이었다.


바네사의 집은 레스토랑에서 도보로 이십여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환복을 마친 케니스는 몇 안 되는 짐을 챙겨 그곳으로 돌아갔다. 사거리에서 마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 고개를 숙인 케니스의 시야 사각지대로 건물 틈새의 어둠이 들이닥치는 일이 있기는 했다. 건물 사이로 걸어 들어가다 보면 에번스의 가게를 시작으로 뒷골목의 풍경이 펼쳐졌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케니스도 이따금 여러 가지 물건을 구하기 위해 그곳을 이용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순간일 뿐이었다. 충동은 케니스의 오기를 이기지 못했다. 아직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듯 하는 에번스의 눈빛,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웃던 얼굴이 남아 있었다. 케니스는 허리를 꼿꼿하게 펼치고 빠르게 사거리를 벗어났다.
바네사는 어쩐 일로 맨 정신이었다. 대신 요리를 하겠다고 나섰다가 한 차례 콩을 태운 참이었다. 케니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식물성 단백질이 타면서 내뿜는 특유의 기묘한 악취가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약 냄새보다 이쪽이 더 지독했다. 케니스는 창문을 모조리 열어젖힌 다음 바네사를 데리고 나왔다. 냄새가 빠지길 기다리는 동안 두 사람은 현관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바네사는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고 했다. “왜?” 케니스가 얼굴을 찌푸리자 바네사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웅얼거렸다. “크리스마스이브잖아, 케니.”
‘그게 뭐가 대수라고.’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하지만 케니스는 평소 흡연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손님에게 슬쩍 얻어온 몇 개비는 진작 써버린 지 오래였다. 바네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다 썼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면…,” 정작 바네사는 이 결정에 얽힌 이야기를 알지 못하는데도―케니스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는 에번스에 가야겠군.”
“간 김에 캐러멜도.”
바네사가 덧붙였다.


두 사람이 2번가 골목으로 들어섰을 쯤에는 해가 슬슬 기울고 있었다. 햇빛은 강렬한 오렌지 빛을 내뿜으며 거리의 그림자를 길쭉하게 만들었고 바람은 싸늘한 손을 꺼내어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성에가 어려 뿌옇게 샌 창문 너머에는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따듯한 실내가 존재하겠지만 손가락 끝에 세 달치 봉급 만 한 유리그릇을 매달고 일하는 케니스는 무감한 눈으로 담비 털을 두르고 거리를 걷는 신사들을 곁눈질하다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오히려 약간의 수치심과 겸연쩍은 머쓱함을 느낀 건 에번스를 마주했을 때였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케니스를 바라보며 가판대에서 담배와 캐러멜을 꺼내주었다.
“트리는 봤어?”
“전 담배를 사러 온 건데요.”
“트리가 있다고?”
바네사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반문했다.
“그래, 약쟁이 아가씨가 심드렁한 친구를 대신해서 기분 좀 내지 그러나?”
“케니, 왜 진작 말 안 했어?”
바네사가 웃음기 어린 투로 물었다.
“가는 길에 보여줄 생각이었으니까.”
에번스를 곁눈질하던 케니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에번스는 속아 넘어가주겠다는 선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가 두 사람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왜요?”
“소원이라도 쓰라고.”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케니스가 툴툴거렸지만 이번에 에번스는 어깨를 으쓱이지조차 않았다.
“펜은 반납하도록.”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트리는 2번가 골목 중간지대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골목에서 트리만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트리 아래에 세워진 조그마한 촛불들 때문이었다.
가지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매달려 있었다. 다 헤진 헝겊인형과 찌그러진 양철 캔, 색깔 있는 실 몇 가닥을 동그랗게 뭉쳐서 꿰맨 실타래와 솜씨 좋게 리본을 만들어 묶은 신발 끈 따위가 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케니스는 에번스가 카드를 준 이유를 깨달았다. 곳곳에 사람들이 카드를 매달아 놨던 것이다. 사람들이 쓴 카드를 찬찬히 읽어보던 케니스가 허리를 펼쳤다. 바네사는 벌써 카드에 무언가 휘갈기고 있었다.
“이거 봐, 케니. 카드 옆에 붙은 물건은 가져가도 되나 봐. 오, 이건 크리스라고 하는 녀석이 쓴 카드야. 기특하네. 자기가 아끼는 공인데 이젠 갖고 놀지 않으니까 마음에 드는 아이에게 ‘양보’하겠대. 난 이걸로 할래.”
바네사가 킬킬대며 실을 뭉쳐서 만든 알록달록한 공을 떼어내 주머니에 넣었다. “뭐에 쓰려고?” 기가 막힌다는 듯 반문했지만 그쯤엔 케니스도 키득대고 있었다. “어딘가에는 쓰겠지.” 바네사가 히죽 웃었다.
바네사가 카드를 매달기 위해 트리와 씨름하는 동안 케니스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이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 차례가 왔다.
케니스는 펜을 들었다. 그건 정말이지 오랜만의 일이어서 순간 케니스는 자신이 알파벳을 다 잊어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는 것이었다.
잠시 후 케니스의 손이 오랜 습관 속에서 몇 가지 기억을 건져 올렸다. 허영심과 열정, 꿈, 빛바랜 희망과 약간의 그리움, 슬픔 따위가 싸구려 잉크에 조금 묻어났다. 케니스의 손은 멋들어진 필기체로, 슬쩍 감추어져 있지만 결국 우쭐대고 마는 자신감으로 이렇게 휘갈겼다. ‘메리 크리스마스, 눈썰미 좋은 사람에게 행운 있으라.’ 그리고 카드에 작은 홈을 만든 다음, 그곳에 담배 한 개비를 끼워놓고 트리 깊은 곳에 매달았다.
“이제 가자.”
“저 담배 내가 가져도 돼?”
케니스는 대답 대신 바네사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내리쳤다.
얼마 후 두 여자아이는 낄낄거리며 골목을 벗어났다.


클락과 아이들이 골목을 찾은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노을을 소진한 하늘에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에번스네에서 거래를 마친 네 사람은 트리 이야기를 주워듣고 2번가 골목 중간지대까지 어슬렁대며 몰려갔다. 몇몇 카드가 선물을 매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아이들은 곧바로 흥분했다. 일행이 왁자하게 떠들며 사탕 따위를 찾아 헤매는 동안 트리 구석을 살피던 클락은 무릎을 쭈그리고 앉았다가 안쪽 깊숙한 곳에 감추어진 카드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손을 뻗어서 카드를 꺼냈다.
그는 카드에 휘갈긴 문장을 대체로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그 문장을 이해했다.
이것은 문장 그 자체의 의미일 수도 혹은 잉크에 묻어난 것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렇다,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법.
그러므로 홈에 끼워진 담배는 클락의 선물이었다. 행운은 그의 것이었다.
클락은 카드를 뒤집은 다음 홈에 끼워진 담배를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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