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

영원하지 않더라도 영원한 것처럼

1
클락 캄벨은 케니스의 마지막 상대였다.
그 날 케니스는 고아원 바닥에 죽치고 앉아 카드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몇 차례에 걸쳐 같은 룰을 반복해서 설명해주느라 조금 질려있었다. 참을성 있게 끝까지 설명을 듣고 신중하게 카드를 뽑아보는 아이들도 더러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게임이 진행될수록 흥미를 잃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두려워하면서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케니스는 시몬이나 조지를 찾아가볼까 했다. 케니스가 아는 한 시몬은 또래아이들 중에 가장 머리회전이 빨랐고 조지는 가장 인내심 있는 친구였으니까. 그들이라면 케니스가 하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거나, 아니면 알아차릴 때까지 충분히 설명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엔 그 두 사람이야말로 케니스가 생각하기에 스프링필드에서 가장 조숙한 아이들이었다…. 본인이랑 맞먹는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 ‘케이트’ 시절에 무지한 케니스 리드는 무척 오만했다.)
케니스는 조지를 먼저 찾아갔다가 방에 없는 걸 확인하곤 층계를 내려왔다. 이 때 계단참 아래서 무언가 뜯겨져 나가는 소리가 나더니 먼지가 훅 끼쳐 올라왔고, 놀란 케니스는 계단을 도로 올라간 다음 난간에 매달려 상체를 거꾸로 뒤집었다. 그러자 막혀 있는 줄로만 알았던 계단 아래쪽에서 새까만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클락은 케니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귀찮은 것을 발견한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가 곧이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마치 그러한 표정이 그가 방금 빠져나온 곳이 하찮고 가치 없는 공간임을 증명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지나치게 허술한 술수에 불과했다. 씨씨에게 그 순간에 대해 들려준다면 그는 입매를 비틀며 그 시절의 자신을 비웃으리라.
케니스 역시 클락이 비밀을 감추려고 술수를 부리는 중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계단 아래에 숨겨진 수상쩍은 공간에서 방금 막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온 주제에 케니스를 속이려고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하고 있는 거였다. 뻔뻔스럽기도 하지.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케니스는 클락이 부리는 그 어수룩한 술수가, 단지 순발력이 좋았을 뿐 보통의 남자아이들이 충분히 꾸며낼 수 있는 종류의 것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케니스는 클락의 술수를 간파한 자신의 능력에 권능을 부여하는 데에만 머리를 다 쓰고 말았다. 어느새 케니스는 비스듬히 미소 지은 채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오만한 목소리로 케니스가 물었다.
“거기서 뭐해?”
클락은 건들거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네 알 바는 아니지.”
“너 거기에 뭔가 숨겼지?”
“궁금해? 어디 한 번 내려와서 보던가.”
케니스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기 원래 막혀 있잖아. 그렇게 마구 잡아 뜯어도 되는 거야?”
“엉엉 울면서 일러바치지 그래? 볼만하겠는걸.”
“그렇게 허세 부리면서 속으론 떨고 있지?”
“엉엉 우는 케니스 리드가 벌써부터 기대되는데.”
케니스는 몸을 바로 하고 난간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클락은 비꼬는 미소를 지어보였고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다시피 하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진짜 내려가서 볼 거야. 원장 선생님한테 얘기할 테니까 후회하지 마.”
클락은 대답 대신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케니스는 도도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온 뒤 계단 아래에 덧댄 나무판자를 슬쩍 들춰보았다. 캄캄해서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케니스는 끙끙거리며 판자 틈을 벌린 뒤 햇빛이 들어오도록 뒤로 조금 물러섰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유리구슬 두어 개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들거렸다. 안쪽에 무언가 더 있는 것도 같았지만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곳은 그냥 먼지투성이에 불과했다.
등 뒤에서 클락이 투덜거렸다.
“다 봤냐? 너도 참….”
순간, 케니스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런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시해.”
그러나 클락은 더는 이 주제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뭐가 있을 거라 기대한 네가 바보 아냐?”
그는 케니스의 도발에 응답하지 않기로 결정한 대답을 심드렁하게 내놓았다. 케니스는 김이 새기도 했고 마음이 상하기도 해서 거기에 대꾸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대체로 그래왔던 것처럼 이런 식으로 돌아서는 듯했다. 클락이 케니스의 손에 쥔 카드 패에 관심을 가진 건 아주 우연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케니스의 도발이 유치하다는 걸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 얘기를 꺼냈을 것이다. 어쨌든, 클락은 이렇게 말했다.
“가서 혼자 카드놀이나 계속 하지 그래?”
기분상한 티를 감추지 못하고 케니스가 쏘아붙였다.
“너 카드 볼 줄도 몰라? 트럼프 카드는 다인용이야.”
“다인용이라고 무조건 사람 모아서 해야 하냐? 아까 아침에 보니까 바닥에 퍼질러져서 혼자 잘만 놀던데.”
“혼자?”
“그런 얼간이들을 앉혀두고 하는 거면 혼자서 치는 거나 마찬가지지.”
“솔직히 말해서,” 홱 돌아선 케니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말했다. “넌 그 얼간이들만도 못해.”
도발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순간엔 정말로 클락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 그러셔?”
어느새 카드 패는 클락의 손에 들려있었다. “이게 그렇게 대단한가?”
케니스는 내심 당황했지만 클락에게 카드를 빼앗긴 게 자신의 실책이 아니라 원래부터 의도되었던 것처럼 굴기로 했고, 그래서 가만히 선 채로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포커는 그 카드로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어려운 룰이거든.”
“넌 할 수 있고?”
케니스가 우아하게 거드름을 피웠다.
“뭐, 넌 못 하겠지만.”
클락이 카드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한 번 보기나 하자. 뭐 얼마나 어려운지.”
“싫어. 내가 왜?”
“자신 없어?”
흥. 이번에 케니스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귀찮아.”
“야, 그러지 말고.”
클락이 한 수를 접고 들어가자 케니스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궁금해?”
클락은 어깨를 으쓱였다.
“얼마나 어려운지 한 번 들어나 보자니까.”
케니스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흘끔 클락을 살펴보았다.
“알았어, 그럼.”
두 사람은 2층 복도 끝에 있는 빈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겨울이라 모든 게 무척 차갑고 추웠다. 마룻바닥에 한 장씩 카드를 까는 동안 케니스의 손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케니스는 하나씩 짚으며 설명했다.
“포커는 자기 패를 보면서 배팅을 하는 게임이야. 가장 높은 가치의 카드 조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겨. 자기가 받은 카드를 바꿀 수도 있고 못 바꾸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가 할 건 바꿀 수도 있는 드로우 포커야. 여기까지 알아듣겠어?”
“뭐야, 그냥 도박이네. 그래서 뭐가 제일 비싼 조합인데?”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
케니스가 차례로 10, 잭, 퀸, 킹, 에이스 카드를 짚었다.
“같은 색깔로 이 다섯 장이 연속되는 게 가장 좋은 거야.”
클락이 투덜거렸다.
“실제 게임에서 나오는 조합이긴 하냐?”
케니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다음은?”
“포카드.”
케니스가 손으로 카드를 짚고 설명을 시작하자, 클락은 설렁설렁 살펴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제대로 듣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제대로 이해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케니스는 중간부터 다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너 제대로 듣고 있긴 한 거야? 못 외우겠지? 포기할 거면 빨리 말해.”
“잘 듣고 있는데.”
“그럼 제일 좋은 패가 뭔지 나한테 설명해봐.”
“정말 귀찮게 하네.”
클락은 한숨을 쉬더니 킹, 퀸, 10, 잭, 에이스를 눈에 보이는 대로 짚었다.
“이거 같은 색깔로 나오면 이기는 거라며?”
케니스가 미심쩍은 눈으로 물었다.
“포카드는?”
클락은 같은 색깔의 에이스를 두 쌍씩 조합해서 보여주었다.
“풀 하우스는?”
클락은 개중 에이스 한 장을 빼내곤 같은 숫자 카드 한 쌍을 조합해서 보여주었다.
“…….”
“뭐, 틀린 거 있어?”
케니스는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 손끝을 녹이면서 대답했다.
“아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클락 캄벨은 사실 케니스가 생각한 것보다 똑똑한 남자애였던가? 만약 그렇다면 왜 평소엔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않는 거지? 케니스는 클락이 의도적으로 능력을 감추고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아까 층계참 아래서 벌어진 순간을 포함해 그가 여태껏 케니스에게 보여주었던 몇몇 의미심장한 태도들이 그 증거로 다시 수집되면서 하나의 뚜렷한 징후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는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 똑똑한 케니스조차 발견하지 못하도록 능숙하게 감추는 능력마저 가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클락은 케니스보다 한 수 위였다!
케니스는 클락이 계단 아래에 무언가 숨겼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케니스는 바짝 긴장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자신보다 우월한 아이와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은 줄곧 그런 상대와 게임하고 싶어 했던 것 같기도 했다. 만약 클락에게 진다면 그 뒤엔 어떻게 될까? 클락 캄벨은 방금 막 포커를, 그것도 케니스에게 배운 초짜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케니스는 정말로 상처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클락이 정말로 우월한 아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케니스는 기분이 이상했다. 클락이 정말로 능력을 감춘 특별한 아이라면,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름 아닌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면, 자신 역시 제법 특별한 아이가 아니겠는가. 케니스는 이기고 싶은 동시에 지고 싶었다. 그러자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졌다.
어찌되었든 두 사람은 포커를 쳤다. 의외로 케니스의 예상과 달리 게임은 순조롭게 굴러가지 않았다. 무엇이든 익숙한 몸짓으로 재빠르게 처리할 것만 같던 클락은 패를 오래 들여다보았고, 때때로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긴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다. 클락은 마룻바닥에 성의 없이 카드를 던지면서 멋대로 패배를 선언했다.
“재미없다. 그만할래.”
“뭐?”
케니스는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이렇게 그만두겠다고?”
“복잡해서 재미없어. 게다가 이거 순 운이잖아?”
잠깐이지만 케니스는 무척 혼란스러워하며 입을 다물었다. 방금 무언가로 인해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째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클락이 물었다.
“이거 말고 다른 거 없냐?”
케니스가 반 박자 느리게 되물었다.
“…뭘?”
목소리에 묘하게 기운이 없었다.
클락이 케니스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쉬운 거 있잖아. 좀 재밌는 걸로 해보자고. 딴 거 몰라?”
케니스는 포커 말고 제대로 아는 룰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아주 간단한 게임이 떠올랐다. 부모님에게 카드를 배울 때 맨 처음 배운 게임이었다.
“도둑잡기 하자.”
케니스가 의기소침하게 덧붙였다. “네가 알아듣는다면.”
클락이 투덜거렸다.
“네가 설명을 잘해야지.”
케니스는 조커를 클락 눈앞에 들이밀었다.
“카드를 반으로 나눠 갖고, 차례대로 서로의 카드를 한 장씩 뽑아서 마지막에 이걸 뽑는 사람이 지는 거야.”
“조커도 두 장인데 두 개 다 뽑으면 결국 누가 뽑았는지 못 찾는 거 아니냐?”
“조커는 한 장 빼고 할 거야. 53장 중에 한 장이야.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는 거야.”
“언제까지 하는데?”
“본인 패에 숫자나 글자가 같은 짝이 있으면 한 쌍씩 버려야 해. 그렇게 계속 버려서… 손에 한 장만 남을 때까지.”
“훨씬 쉽네. 애들한테도 이걸로 가르쳐주지 그랬냐?”
케니스가 대답 없이 카드를 섞자, 클락도 더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이번에 두 사람은 도둑잡기를 했다. 침묵 속에서 카드를 뽑는 소리만 들렸다.
몇 차례 카드를 버리던 클락이 아, 하고 말했다.
“아까 왜 지루했는지 알겠어.”
케니스는 짐짓 궁금하지 않은 척하며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왜?”
“도박인데 아무것도 안 걸었잖아. 원래가 그런 게임인데 아무것도 안 걸었으니 재미가 없지. 너 바보냐? 게임 시작하면서 배팅을 했었어야지.”
케니스가 딱딱거렸다.
“그럼 지금이라도 걸어.”
클락이 코웃음을 쳤다.
“걸 게 있긴 하고?”
그럼 왜 트집을 잡은 거야? 어이없다는 눈으로 클락을 흘겨보던 케니스가 제안했다.
“그럼 진 사람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해.”
클락이 투덜거렸다.
“그거 정말 안 끌린다. 너한테 뭘 시키냐?”
케니스는 카드를 버리면서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난 도둑잡기하면서 져본 적 없거든. 네가 나한테 뭘 시킬지 고민하는 일 같은 게 벌어지기야 하겠니?”
클락이 신기하다는 투로 물었다.
“너 나한테 뭐 바라는 게 있어?”
케니스는 카드에서 눈을 떼어냈다. 탁, 한 쌍의 카드가 마룻바닥 위로 떨어졌다.
“내가 이기면….”
케니스는 말을 고르느라 잠깐 침묵했다.
“아까 거기에 뭐 숨겼는지 말해줘.”
“흐음.” 클락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뭐, 계속해보자고.”
그래서 두 사람은 게임을 계속했다. 카드를 버리고 또 버리다보니 세 장이 남았다. 두 장은 클락의 손에, 한 장은 케니스의 손에 있었다. 추위로 클락의 손끝 역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케니스는 몸을 뒤척여 클락과 똑바로 마주보는 자세로 앉았다.
클락의 손에 들린 두 장의 카드 쪽으로 손을 뻗으면서, 케니스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고는 주술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넌 특별한 아이가 아니야. 사람의 얼굴에서 비밀을 읽어내는 건 케니스의 특기였다. 케니스는 언제나 누군가 감추고 싶어 하는 이면의 얼굴을 알아차렸고, 진실과 거짓말을 구분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도둑잡기 같은 건 식은 죽 먹기였다. 허풍을 떤 게 아니었다. 케니스는 클락을 읽을 수 있었다.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겨버린 뒤에 보란 듯이 그를 두고 방을 나가버리고 싶었다.
카드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신중하게 움직이던 케니스의 손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클락은 눈썹을 비틀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지어보였고, 케니스는 자신이 승리했음을 깨달았다.
“너 사실 애들이랑 포커를 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잘난 척하고 싶었던 거지?”
자리에서 일어나며 클락이 말했다.
“너 네가 이 고아원에서 제법 똑똑하다고 믿고 있잖아.”
케니스는 눈을 깜빡였다. 손에 조커가 들려있었다.
클락이 비웃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시시해.”
그러고는 그 얼어 죽을 것처럼 차가운 방을 나가버렸다.


2
그러고 나서 몇 번의 계절이 더 흘렀고, 두 사람이 카드를 주고받았던 빈 방은 지나치게 추워지거나 따뜻해지거나 하면서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종종 선문답을 주고받고 쿠키를 빌미로 글을 가르쳐주거나 하면서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엔 모든 게 끝났다. 케니스의 카드 역시 그 날의 화재에 몽땅 다 타버렸을 것이다. 스프링필드가 끝장나고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모든 추억은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카드 같은 건 잊어버렸다.
케니스는 스프링필드의 아이들과 다신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살았다. 마약을 해보기도 하고 엄청나게 살을 찌우기도 해보았다. 풍선 같은 몸으로 난동을 부리면서 길에서 칼부림을 해보기도 하고 동거하는 약쟁이 친구와 낄낄거리며 뒹굴기도 해보았다. 어느 날은 모든 게 질려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식은땀을 흘리며 거리를 달리기도 했다. 케니스는 자신이 운이 무척 좋은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델이 되었을 뿐더러 모델이 되기 직전에 시몬을 다시 만났으니 말이다. 비록 웨이트리스 일을 하며 번 한 달 치 봉급을 그의 주머니에 털어주긴 했지만.
시몬이 그녀에게 행운을 빌어준다고 했던가?
여전히 그녀를 동생처럼 여겨주었던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케니스는 그 뒤로 최선을 다해 잘 살았다.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편지를 받고 스프링필드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도 그녀는 제법 잘 살고 있었다. 클락 캄벨도 비슷한 사정인 듯했다. 그가 케니스의 빌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가게를 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스프링필드의 아이들은 영국 각지로 흩어져 버렸지만 동시에 런던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살고 있는 듯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영원히 스프링필드에 걸터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먹는다는 건 변화의 순간을 켜켜이 몸으로 통과해가는 경이로운 일이다. 케니스는 어쩌다보니 클락 캄벨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제법 친구라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 있었다. 돈과 시간은 썩어 넘치게 많고 즐거움은 부족했던 케니스는 때때로 영국 어딘가로 뿔뿔이 흩어진 스프링필드의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잔뜩 멋을 부린 채 홀로 레스토랑에 앉아있거나 너무 사치스러운 나머지 되려 공허해 보이는 쇼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그런 일들마저 질리게 되자 클락의 가게로 가서 죽치고 앉아있었다.
클락이 케니스를 쫓아내지 않았으므로 그곳은 곧 케니스가 이따금씩 들이닥치는 심심풀이용 공간이 되었다. 소파에 다리를 접고 앉거나 쭉 뻗고 누워서 하릴없이 책을 읽거나 오래된 농담을 하다보면 시간이 잘 갔다. 어느 날에는 그것마저 질려서 외출을 하자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구정물이 흐르는 런던의 뒷골목을 걸으면서 노을을 감상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값비싸고 고급 진 레스토랑이었다. 조명이 너무 눈부셔서 클락의 옷차림은 꼭 빈털터리이거나 부랑자처럼 보였고, 케니스는 부유하지만 불행한 여편네처럼 보였다. 자리를 안내받을 때부터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앉은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다. 만약 케니스가 그 레스토랑의 단골이 아니었더라면 웨이터는 진작 두 사람을 내쫓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스프링필드 출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게 식기를 고르고 고기를 썰었다. 홀에선 작은 무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클락은 고기를 씹으면서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춤추는 아름다운 백인들을 지켜보았고 케니스는 지루해서 턱을 괬다. 턱시도를 입고 왁스를 발라 머리를 넘긴 남자들과 치맛단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인들은 미소를 짓는 데 몰두하기 위해서만 평생을 보낸 것처럼 웃고 있었다. 어느덧 와인도 맛이 없었고 스테이크도 질기게만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와서 일부러 불빛을 등지고 걸었다. 클락은 익숙하게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둠과 완벽하게 어울려서 눈을 몇 번만 깜빡여도 어디론가 능숙히 사라져 버릴 것처럼 보였다. 노을 진 하늘이 짙은 푸른빛으로 서서히 점멸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주변은 고요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 경쾌한 발소리…. 빛 아래서 벌어져야 마땅하게 느껴지는 모든 활기는 별세계 소리처럼 건물 너머로부터 아득하게 들려왔다. 두 사람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걷다가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왈츠 소리에 잠깐 멈추어 섰다.
케니스가 조금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이젠 하다하다 길거리에서도 춤을 추는 모양이네.”
클락이 킬킬거렸다.
“왜? 듣기 좋은데.”
“춤은 이제 질렸어.”
“난 음악을 말한 건데?”
클락이 가볍게 툭 던졌다. “너 사실 춤추고 싶지?”
“뭐래?” 케니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아까 머리 올린 신사들 봤지? 번드르르해선 춤추는 동안 여자들 허리나 더듬어대더라니까.”
클락은 대답이 없었고 케니스는 웃다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침묵이 흐르자 왈츠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 침묵은 케니스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왜 클락이 받아치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만 더 던져주면 그 말을 디딤돌 삼아 어떤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굴 수 있을 텐데. 왜 클락은 케니스가 달아날 기회를 주지 않는 걸까? 침묵은 길면 길어질수록 깔때기에 널린 뜨거운 사탕덩어리처럼 날카롭고 끈적끈적해졌고 마침내는 케니스의 여유를 찔러댔다. 결국 케니스는 입을 삐죽이며 클락에게 말을 걸었다.
“너 춤 출 줄은 알아?”
“혼자 추는 거 아니었어?”
옆구리에 주먹을 날리자 그가 낄낄거렸다.
“그래, 네 솜씨나 한 번 보자고.”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클락은 케니스보다 먼저 술기운이 올라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섰다가 반 발짝 다가섰다. 케니스가 짓궂게 비웃었다.
“너 사실 춤 못 추니까 뺀 거지? 지금이라도 모른다고 하면 달아날 기회를 줄게.”
클락의 손이 능숙하게 케니스의 허리를 감고 들어왔다. 그가 말했다.
“춤을 배워야 출 수 있는 사람도 있어?”
케니스가 클락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감시하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클락은 왈츠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설렁설렁이긴 해도 상류층의 예절규범까지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 케니스는 놀랐다. 클락 캄벨은 이런 춤을 몇 번이나 춰본 건가? 뒷골목의 규칙을 체화하는 일과 상류층의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일에는 길고 긴 계단이 존재했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난간을 넘나드는 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클락은 어쩌면 케니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대단한 무언가를 손에 넣고 있는 건 아닐까? 레스토랑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모습은 허풍이 아니라 습관에서 비롯됨이 아니었을까?
그는 여전히 그의 계단 아래에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순간 클락이 케니스의 발을 밟았다.
“아, 실수.”
흥, 케니스가 코웃음을 쳤다.
“숙녀의 발을 밟는 신사도 있나?”
“오. 날 신사로 상상하고 있었어?” 클락이 조롱조로 능글거렸다. “이거 참 영광인데.”
다음 순간 클락이 다시 한 번 케니스의 발을 밟아버렸고, 그가 고의로 그런 거라 생각한 케니스는 반격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고의가 아니었다. 클락은 그 실수를 끝으로 무언가 유지하는 걸 그만 ‘포기해버린 것 같았다.’ 스텝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춤의 형태가 허물어졌다. 두 사람이 놓친 리듬이 벌써 두 마디를 넘게 흘러가고 있을 때, 클락은 케니스를 보며 민망하단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 보통의 청년 같아서 케니스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그에게 권능을 부여하려던 케니스의 감각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고 두 사람은 서로 떨어졌다.
“왈츠…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는 케니스는 조금 얼빠진 얼굴이었다.
뒷덜미를 쓸면서 클락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 레스토랑에서 추던 것 좀 흉내내봤지.”
케니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럼 너 한 번도 춰보지 않았어?”
그 말투는 꼭 클락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클락은 바보를 보는 눈으로 케니스를 내려다보며 투덜거렸다.
“너도 참…. 내가 그런 춤을 출 것 같냐?”
언제나 그래왔듯 그는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아니, 어쩌면 방금 말에 감추어진 것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클락이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불성실해서가 아니라 무능해서인 것이다. 이 대화는 오로지 케니스만의 것이었던 걸 수도 있었다. 그 짐작에 닿는 순간, 케니스는 자신이 그 생각으로부터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클락이 그저 불성실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케니스는 자신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의 성실을 종용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는데 사실 그가 무능했던 것뿐이라면 케니스가 이 관계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부터 그녀가 혼잣말을 하고 있던 것뿐이라면 말이다…. 단지 케니스가 고독해서 만들어낸 상상이라면. 케니스는 자신의 공허를 외면하는 권능을 잃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에 상처를 받고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우뚝 섰다.
“난 네가…,”하고 케니스가 더듬거렸다.
“네가 원래부터 그런 춤을 출 줄 아는 줄 알았어.”
케니스는 평소의 분별력이 사라지는 바람에 혼란스러워하며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그러한 시도가 자신을 더욱 바보 같고 가치 없는 인간으로 보이도록 한다는 걸 알면서도. 평소라면 죽어도 하지 않을 짓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골라보려고 했지만 무엇도 제대로 꺼낼 수 없었다. 간신히 말을 만들어보았지만 너무 가볍고 유치한 단어들로밖엔 구성되지 않았다.
“난 네가 뭐든 알고 있는 줄 알았다고!”
클락이 황당해하며 말했다.
“춤 잘 춰놓고 왜 갑자기 성질이야?”
그러면서도 그는 케니스의 안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한 듯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거나 이유로 삼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사실, 바로 이것이 클락의 불성실이었다.) 대신 그는 케니스가 더 귀찮은 상태에 빠지기 전에 능숙하게 반대편으로 옮겨놓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클락의 재능이었다.)
“넌 지금 안 취해서 그래. 몸 좀 움직여.”
그가 다시 케니스를 잡아당겼고, 케니스는 흐느적거리면서 딸려왔다가 눈 깜빡할 사이에 휘리릭 한 바퀴를 돌고 말았다. 클락이 손을 홱 놓아버리자 케니스는 비틀대다 말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클락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구경거리를 봤다는 것처럼 입매를 비틀며 웃음을 터뜨렸다.
“잘 하네. 혼자 추는 춤에도 소질이 있는데?”
“시시해.”
그러나 그 말에는 공격성이 없었다.
“그래, 시시하겠지. 왈츠 같은 거나 추니까 그래. 잘 좀 움직여 봐.”
그래서 두 사람은 이번에는 아주 다른 춤을 추었다. 왈츠를 흉내 내는 듯하다 결국 리듬에 따라 아무렇게나 몸을 움직였다. 클락의 말이 맞았다. 케니스는 다만 취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이 사건은 너무나 단순했다. 권능이고 자시고 할 게 아니라 그저 케니스의 흥이 늦게 올랐을 뿐인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음악에 맞추어 팔과 옷을 휘두르며 큰 동작을 만들어냈다. 종국에는 둘 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평소보다 조금씩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즐거운 저녁이야.”
케니스가 말했고,
“즐거운 저녁이지.”
클락이 대답했다. 그는 더는 케니스가 두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곳으로 가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두 사람은 가게로 돌아왔다. 케니스는 빌라로 걸어가기 귀찮았고 시간도 너무 늦었기 때문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잠이 없는 편이었고 원한다면 게임을 하면서 밤을 샐 수 있었다. 클락이 서랍에서 트럼프 카드를 꺼내왔을 때 케니스는 서서히 술에서 깨어나는 상태였으므로 또다시 바보 같은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클락이 카드를 가지고 돌아온 게 일종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케니스는 마지막으로 그를 시험해 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뭐 할래?”
“도둑잡기.”
케니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클락이 씩 웃었다.
“클래식이네.”
카드를 섞고 나누는 동안 케니스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 게임에서 누가 이기는 편이 둘 다에게 이득일까? 클락이 패를 나누었고 케니스는 자신의 패를 들어 올렸다. 조커는 그녀의 손에 있었다.
“아.” 케니스는 마치 방금 막 떠오른 것처럼 말했다.
“아주 예전에 너랑 했던 카드 게임이 생각났어.”
“아. 네가 혼자 놀아서 내가 잠깐 놀아준 거?”
그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케니스는 카드 너머로 클락을 훔쳐보았다.
“넌 그때… 정말로 싸가지가 없었어.”
클락이 웃었다.
“네가 어려운 것만 욕심냈잖아.”
“그런 것치고 넌 포커를 잘 했어.”
클락의 패에서 에이스를 뽑으며 담담하게 회고했다.
“게임을 이해한 건 너뿐이었어.”
“그랬나?”
그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케니스의 패에서 다이아3을 뽑았다.
“뭐, 잠깐 외웠을 수는 있겠지.”
“아, 그럼 넌 그때도 그냥 그런 ‘척’ 한 건가?”
“…….”
클락이 한 쌍의 카드를 버리면서 대꾸했다.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야? 아. 그때 정말 재미없었던 기억이 나네. 그런데 네가 자꾸 검사했잖아. 원장 선생님처럼.”
“너 정말로 그때가 처음이었어? 포커 배우는 거 말이야.”
“이런, 기억 속의 내가 어지간히 솜씨가 좋았나 봐.”
클락이 낄낄거렸다.
“난 아무것도 몰랐거든. 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거 구경하는 재미로 해본 것뿐이야.”
케니스는 카드를 버렸다.
“그걸 들킬까봐 중간에 관둔 거였어?”
“뭐, 남자애들은 원래 좀 멍청해.”
클락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고 이번에 케니스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웃음에는 거짓이 없고 그림자도 없고 어둠도 없었으므로 비밀을 감춘 거라고는 도무지 상상되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보통의 청년 같아서 오히려 그를 어떤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던 케니스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제야 케니스는 그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차원적인 밀고 당기기 이전에 그저 카드를 가지고 놀 뿐인 어린아이 둘이 있었다. 클락은 지기 싫어하는 말썽꾸러기 사내아이였을 뿐이고 케니스는 오만하고 과시적인 계집아이였을 뿐이다. 두 사람이 했던 카드게임은 즐거웠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는 만들어낸 생각이 아니라 명징한 진실을 볼 때였다.
케니스가 생각하는 클락 캄벨이 아니라 그의 친구로서 이곳에 앉아있는 씨씨를 생각할 때였다. 누군가에게 권능을 부여해 그 자신의 권능을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공허를 채울 수 없었다. 그런 방법으로는 영원히 누군가에게 도달하기나 곁을 내줄 수 없을 터였다. 진실한 삶을 살아갈 수 없을 터였다…. 케니스는 자신이 그저 외롭고 오만한 인간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씨씨를 특별해 보이도록 만든 건 그의 비밀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스스로의 외로움이었음을. 그러자 공허가 다가와 그녀의 것이 되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씨씨와 자신을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려놓는 대신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을 케니스는 깨달았다. 오판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초라함에 대한 두려움은 그렇게 케니스의 것이 된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부터 케니스는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도 결국은 자라나고 말았다. 이제부터 케니스는 어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여전히 도둑잡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덧 카드는 세 장이 남았다. 두 장은 케니스의 손에, 한 장은 씨씨의 손에 있었다. 조커는 돌고 돌아 다시 케니스의 손으로 돌아와 있었고, 씨씨의 차례였다. 케니스의 패로 손을 뻗으면서 씨씨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탐색하는 눈빛이 정면으로 도전하듯 부딪쳤고 케니스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카드가 난간처럼 시선을 투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한동안 말없이 다투고 비웃고 도발하면서 엎치락뒤치락했다. 마침내 씨씨가 선택했다. 그는 손을 뻗어서 케니스의 카드 한 장을 가져갔다. 그 순간 케니스는 언젠가의 일을 떠올렸다. 기억 속의 씨씨가 계단 아래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나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 아래로 나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케니스는 읽을 수 있다. 언제나 읽을 수 있었음을 방금 막 깨달았다.
씨씨는 자신이 뽑은 조커를 바라보았다.
“…졌네.”
고개를 기울인 채 케니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시시해?”
씨씨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뒤에, 케니스는 어른이 된다는 것의 좋은 점을 발견해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생각으로 만들어낸 진실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구분해내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의미했다. 그 능력을 획득하면 더는 꿈꾸듯 살아갈 수 없었다. 재미없기에 안정적인 삶만이 그곳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씨씨가 그녀를 꿰뚫어볼 만큼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구분하게 되었으므로, 케니스는 여전히 난간에 매달린 채 그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케니스는 비밀을 감추는 능력을 되돌려 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씨씨에게 얼마든지 영악하고 영리해질 수 있었다. 아니, 아마 그에게는 언제나 그래왔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간은 그런 시선과 시선의 교환으로 이루어져왔을 것이다.
관계의 저울이 수평으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케니스는 씨씨가 자신의 좋은 친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와의 카드게임은 어떤 의미를 상실한 상태로도 여전히 재미있었다.


3
몇 달 뒤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있었다. 불행히도 씨씨의 가게 지붕은 보수가 필요한 상태였다. 케니스가 가게에 들어섰을 땐 이미 삼분의 일 정도의 면적이 물바다가 되어있었다. 씨씨는 얼굴을 찌푸린 채 케니스를 반겨주었다. 이미 한바탕 전투를 치른 건지 작업복이 축축했고 머리카락은 뺨에 달라붙은 채였다. 손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젖지 않은 부분인 것으로 보아 방금 막 감은 듯했다. 씨씨는 비바람이 너무 세서 사다리가 넘어지는 바람에 벽을 타고 내려오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다. 손은 그때 다친 모양이었다.
“그래서 보수는 했어?”
“거의? 다락 쪽으로 연결되는 부분만 남았어. 마침 올라가려던 참이야.”
“사다리 잡아줄게. 같이 가자.”
“아, 바람의 역할을 대신해 주겠다 이건가?”
“사다리를 들고 도망가는 수가 있어.”
씨씨가 낄낄거렸다.
“네 비싼 옷이 물에 흠뻑 젖을걸?”
“빨리 나가기나 해.”
“금방 끝날 거야.”
씨씨가 은근하게 경고한 대로 그 일은 제법 곤혹스러웠다. 비바람은 케니스가 가게로 향할 때보다 훨씬 거세져 있었다. 코트라도 입고 나올걸. 대신 케니스에겐 씨씨가 넘겨준 장갑이 있었다. 그녀는 사다리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지붕 위를 올려다보았다.
씨씨의 ‘금방’은 제법 긴 시간이었다. 케니스는 어쩌면 씨씨가 지붕에서 미끄러져 반대편으로 떨어졌거나 어디선가 날아온 파편을 맞고 기절이라도 한 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심이 염려로 번질 무렵, 비바람에 푹 젖어서 모든 게 달라붙는 바람에 전체적인 면적이 줄어든 씨씨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씨씨는 얼굴을 찌푸린 채 사다리를 옆구리에 끼우고 고갯짓을 했다. 케니스는 그를 따라 가게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양동이를 세우고 바닥의 물을 닦아내고 물건들을 건조한 곳으로 옮기면서 분주하게 굴었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는 두 사람 다 기운이 쪽 빠져있었다. 씨씨가 차를 끓이러 사라진 동안 케니스는 물기로부터 무사한 담요나 옷가지를 골라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케니스는 낡고 두툼한 코트를 걸친 채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읽던 책이 다 젖었어.”
“도로 말리면 되지.”
“이 옷에서 이상한 냄새 나.”
“안 빨았거든.” 질색한 표정으로 케니스가 코트를 슬그머니 벗으려고 하자 씨씨가 낄낄거렸다. “농담이야. 안감으로 댄 가죽 냄새겠지.”
두 사람은 각자 소파 끝을 차지하고 다리를 길게 뻗었다. 케니스는 축축한 머리카락을 쭉 짜내면서 말했다.
“계획이 틀어져서 하루가 통으로 심심해졌네.”
“날을 잘못 고른 네 탓이지.”
“이렇게 순식간에 거세질 줄 누가 알았겠어?”
씨씨는 차를 마시면서 협탁에 시선을 주었다.
“그칠 때까지 카드 게임이나 하자고.”
“음, 그래. 찬성.”
케니스가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잔 아래에 코를 박고 코끝을 녹이면서 대답했다.
“질릴 때까지 도둑잡기나 하지 뭐.”
그렇게 해서 몇 달 만에 두 사람은 다시 카드를 잡았다. 도둑잡기였으므로 테이블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조커를 한 장 제외하고 53장을 반으로 나눈 다음 남는 마지막 한 장을 케니스가 가져갔다. 조커는 케니스의 손에 있었다. 클락은 케니스의 패에서 한 장을 고른 다음 자신의 패에서 한 쌍을 이루는 두 장의 에이스를 소파 위에 버렸다.
“이제 포커 칠 줄 알아?”
케니스가 불쑥 물었다.
“조금.” 씨씨가 되물었다. “넌?”
“나?” 케니스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너한테 포커 가르쳐준 게 누군지 잊었어?”
카드를 뽑는 케니스의 손을 시선으로 쫓던 씨씨가 말했다.
“너도 정확히 할 줄 몰랐잖아.”
“도박이 뭔지 몰랐을 뿐이지.” 케니스가 정정했다. “게임 자체는 알고 있었어.”
“포커는 도박이지.”
“우린 그때 아무것도 걸 게 없었어.”
“그래, 그런데 넌 중간부터 나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말하면서 씨씨는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너 이제 나한테 시시하단 소리 안 하네.”
차례가 돌아왔으므로 씨씨는 케니스의 패에서 카드를 뽑았다. 카드를 확인한 그는 미소를 거두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제 조커는 그의 손에 있었다.
“이제 너랑 있으면 편하거든.” 케니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게 중요해?”
“넌 나랑 있으면 갑자기 안달복달할 때가 있었잖아.”
케니스는 씨씨를 바라보았다. 씨씨는 케니스가 자신의 패에서 가져가는 카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뭐….” 클락은 소파 위로 카드를 버렸다. “잘 된 일이지.”
누구에게? 어느새 소파 위로 두 사람이 버린 카드가 어지럽게 늘어져 있었다. 다리를 뒤척이던 케니스는 씨씨와 살갗이 닿자 잠깐 동작을 멈추었다. 비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가게를 울리고, 양동이를 댄 천장에서 뚝 뚝 물이 떨어졌다. 케니스의 마음은 곧 평온해졌다. 그녀는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대면서 노련한 표정을 지었다.
“말 안 했는데, 넌 나한테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야.”
“영광인데. 눈물이 다 나는 걸.”
“그래봤자 너도 날 그렇게 생각한단 거 알아, 클락 캄벨.”
케니스는 몇 장 남지 않은 패를 바라보며 허공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는 지나치게 어른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적이 있긴 했냐?”
“아니.”
케니스는 낄낄거리다 나른하게 소파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하지만 정말로… 그래.”
카드는 어느새 세 장 남았다. 결국 조커를 빼앗아오지 못한 케니스에게는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다시 케니스의 차례였다. 케니스는 몸을 일으켜 씨씨와 마주보고 앉았다.
“있잖아….”
케니스가 느릿느릿 말했다.
“사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지?”
“글쎄?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 안 나.”
이상한 일이었다. 설명하지 않았는데 씨씨는 케니스가 말하는 ‘거기’가 어떤 시절의 어느 곳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케니스가 눈을 좁히자 씨씨가 킬킬거렸다.
“그래, 별거 없었어. 니콜이 거길 발견했거든. 그래서 쓸 만 한지 직접 보고 나오는 길이었는데 딱 너한테 걸린 거지.”
케니스가 씨씨의 카드 중 하나를 손끝으로 붙잡았다.
“결국 비밀은 없는 거였네.”
그러나 그 사실은 더는 케니스를 상처주지 못했다.
카드를 뽑아가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씨씨가 말끝을 흐렸다.
“글쎄….”
계단 아래에 고인 비밀스러운 어둠처럼 느껴지는 아주 짧은 침묵이 있었다. 케니스는 자신이 뽑은 카드를 확인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시선이 마주쳤다. 씨씨는 웃고 있었다. 케니스는 그의 손끝이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새 두 사람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줄어들어 있었다. 한순간 아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네가 알면 그게 비밀이냐?”
다음 순간 씨씨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소파 위로 널브러진 카드뭉치가 한바탕 출렁이며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리를 떠나는 대신, 바닥에 떨어진 카드를 주워 다시 하나의 패로 만들었다. 케니스는 자신이 뽑은 조커를 내밀었고, 씨씨는 그것을 맨 밑에 깔고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케니스는 씨씨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서였다.
“이제 슬슬 포커를 칠 때가 온 것 같아.” 케니스가 말했고,
“그래, 그럴 생각이었어.” 씨씨가 대답했다.
“참고로, 난 꽤 잘해.”
그렇게 말하면서 씨씨는 너무도 클락 캄벨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너무나 빤한 술수를 순발력 있게 발휘하는 소년의 미소였고, 자존심 강한 어린아이의 미소였고, 빛나는 가치와 비밀을 감춘 어둠이 깃든 미소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친구의, 우정의 시간이 길들여 익숙하고 친근해진 미소였다. 그 미소를 읽으며, 케니스는 방금의 말이 선언과도 같았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 더 보여주거나 감출 수 있었다. 그에게도 비밀을 지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케니스에게 얼마든지 영악하고 영리해질 수 있었다. 케니스가 그를 내려다볼 난간을 소유하고 있다면 씨씨에게는 케니스가 결코 알아내지 못할 어둠을 감춘 계단 아래의 공간이 있었다. 씨씨 역시 어른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케니스에게 있어 여전히 일부분은 클락 캄벨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언제나 동등했다. 서로를 증오하거나 의심할 가능성을 품은 관계는 고통스러운 만큼이나 환희를 준다는 역설을 이제 케니스는 이해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다시 앉았다. 패를 감추거나 속이는 법을 알고 무엇을 걸고 잃는지 알고 삶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때문에 카드는 제대로 분배된다. 비로소 포커였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두 사람은 느릿느릿 또 하나의 시절을 통과해나갔다. 그리고 다음 게임이, 그 다음 게임이, 그게 끝나면 또 다음 게임이 남아있었다…. ■ <2021.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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