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대한 도끼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베로니카는 몸을 들썩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테이블 모서리에 간신히 걸쳐져 있던 맥주캔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그녀는 잠자코 엎드려 있었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팠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께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상하게 치통이 있었다. 아니, 누군가 강제로 입안에 손을 집어넣고 입천장을 있는 힘껏 젖힌 듯 목 안쪽을 송곳처럼 꿰뚫는 통증이었다.
아무래도 역시 죽고 싶다고 베로니카는 생각했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낮인지 밤인지, 자신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저녁 5시 이후로는 필름이 끊긴 듯했다. 그 뒤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술만 퍼마신 것이다.
“이 정도면 기네스북에 도전해 보지 그래.”
롭의 목소리가 들렸다. 베로니카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멀끔하게 생긴 키 큰 남자였다. 면도를 했고 얇은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막 안방 문을 열고 이곳에 들어서려는 참이었다. 스콜을 맞이한 산페르난도의 풍경이 열린 문 너머로 얼핏 펼쳐져 있었다. 롭은 문을 닫은 뒤 스웨터에 맺힌 물기를 털면서, 곧장 베로니카 쪽으로 다가오는 대신 거실을 건성으로 둘러보았다.
“뭐야, 치웠네?”
빈 술병 몇 개와 찌그러진 맥주캔이 굴러다니는, 담배와 마리화나의 흔적이 남은 거실을 보고도 그가 말했다.
“…얼마 전에.”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서 쇳소리처럼 들렸다.
“기특하네. 어쩐 일로?”
“이런저런 일로.” 다시 테이블에 엎드린 베로니카가 지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어디야?”
“필리핀.”
“또?”
얼마 전에 그들은 필리핀 서비사야 지방에 다녀왔다. 엘로엘로라고 불리는 도시에 싼값에 어학연수를 온 학생들과 교사들이 살고 있었다. 지난 몇 달간 그들은 한 명의 교사를 주시했고, 확실한 정황이 포착되자마자 롭의 ‘문’을 통해 두 명의 마법사를 보냈다. 베로니카도 그곳에 있었다. 블루스는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베로니카는 다치지 않았고, 다음날 이 소식은 원탁일보에 고스란히 올라갔다.
“지난번엔 뉴욕에 진을 치고 있더니. 이젠 필리핀이 자기네들 둥지라도 되는 모양이지.”
베로니카가 조소했지만, 롭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 건은 아니고. 다 같이 얘기 좀 하려고.”
“뭐?” 그제야 그녀는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전에 얘기 끝났잖아.”
“너 같은 고집불통들이 아무리 우겨도 종말 전까지는 결정을 내려야지.”
베로니카가 다시 입을 다물자 롭은 팔짱을 끼고 거실과 부엌을 왔다 갔다 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구야사. 이… 키위 건조대 미니어처 같은 건 뭐냐?” 천장에 매달린 모빌을 발견한 롭이 얼굴을 찌푸렸다.
“선물.”
“흠.” 롭이 바닥에서 집게손가락으로 딸랑이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 베로니카는 말했다.
“그건 쓰레기야.”
“왜 안 버렸어?”
“선물이라서.”
“쓰레기인데?”
“쓰레기긴 하지. 쓸데가 없잖아.”
그 뒤에도 롭은 팔짱을 낀 채 온 집안을 서성이면서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흙이 담긴 작은 화분, 소스가 지저분하게 튄 가스레인지 옆에 덩그러니 놓인 빨간색 가루 통, 테이블 위를 은은하게 비추는 아름다운 이파리 같은 것을 느긋하게 훑어보았다. 마치 고집을 부리고 싶거든 끝까지 부려보라는 듯이 말이다.
결국 베로니카가 졌다. 신음하며 몸을 일으킨 그녀가 흘러내린 속옷 끈을 바로 하면서 마른 세수를 했다. 하품을 하는데도 골이 울려 죽을 것 같았다. 술이 간절했지만 롭이 더 마시게 해줄 것 같진 않았다. 나폴리 사투리로 젠장맞을, 하고 중얼거렸다.
“알겠어. 준비한다고.”
“진작 그럴 것이지. 15분 줄게.”
내 말이 맞지? 역시 마실 시간은 안 준다니까.
2
중형 호텔방에 둘러앉은 여섯 명의 남자와 네 명의 여자가 테이블 위로 쌓여가는 종이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필리핀 특유의 스콜 빗방울이 세상 기물을 때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베로니카는 희미하게 경련하는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부여잡았다. 숙취는 가시지 않았지만 깨질듯한 두통과 함께 정신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이럴 바에야 그냥 참석할 것이지.”
마침내 블루스가 입을 열었다. 옆에 앉아있던 애쉬가 손을 뻗어 실시간으로 도착하는 편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다곤이야.”
블루스가 툴툴거렸다. “뭐래?”
“반대한대.”
“그럼 참석하지 그랬어?”
애쉬가 어깨를 으쓱이자, 블루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지금까지 몇 명이 찬성한댔지?”
테이블에 앉아있던 대부분이 손을 들었다. 베로니카와 블루스, 벨제붑만이 예외였다. 롭은 손을 든 채 베로니카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되네. 지난번하고 너무 다르잖아. 그땐 반대가 더 많지 않았나?”
블루스가 투덜거렸다.
“이봐들. 종말 온다고 다 끝날 것 같아? 우리야 새장 속 카나리아나 다를 게 없지만, 성전 기사단들이 뭘 안다고? 걔네가 이 모든 게 끝난 뒤에도 일찌감치 마법사로 점찍어둔 사람들 추격하는 걸 멈출 것 같아?”
“그들도 아주 얼간이는 아니지. 철저하게 마법의 흔적을 찾아냈던 놈들이 현생 인류와 마법사를 구분 못 할 리가 없어. 피차 뭔가 이상이 생겼단 걸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야.”
애쉬가 말했다.
블루스가 베로니카를 돌아보았다.
“넌 롭한테 할 말 없어? 저놈은 배신자야. 어떻게 우리 셋을 두고.”
그 말에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베로니카를 쳐다봤다.
그녀는 이 테이블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멤버였고, 세 번째로 오래 살아남았다. 그렇다, 베로니카는 이곳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인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고픈 말이 없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세 번째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한 것을 느끼며, 마침내 베로니카가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프랑스에서 코스모가 죽었잖아. 고작 2주 전에….”
스스로를 위한 말이었던 건지, 다음 목소리에 느닷없이 힘이 실렸다.
“너희 다 지옥에나 떨어져.”
“그전에 지옥에 떨어뜨릴 놈이 하나 도착했네.”
편지 틈으로 도착한 서류를 집어 든 애쉬가 고개를 들었다.
“브라질이야. 마지막 일이겠네. 누가 갈래?”
롭이 말없이 일어났다.
애쉬가 베로니카를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다녀와.”
“아니, 세 시간 뒤에 출발할 거야. 너희들 전부한테 문을 열어줬잖아. 당장 열면 내일이나 모레로 날아가거나, 어디 바다 한가운데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투덜거리던 롭이 베로니카를 향해 말했다.
“구야사. 세 시간 동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해. 옆방 비었으니까.”
자, 여기서부터 선택지다. 뭘 하고 싶니?
‘편지, 담배, 술, 그리고 마리화나.’
롭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베로니카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한다.
“펜 있는 사람?”
네 시간 뒤에 그녀는 생각할 것이다.
술이나 마실걸.
3
2주 전이었다면 호텔방에는 코스모와 타티아나가 앉아있었을 것이다. 6주 전이었다면 퍼시발의 손 역시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10주 전이었다면 이언이, 세 달 전이었다면 로이고르가, 반 년 전이었다면 해던과 임프가 함께 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나유타의 해체를 반대했을 것이다. 아니,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이 과연 베로니카의 편이 되어줬을까?
롭의 문이 아무리 오작동을 일으켜도 아주 약간의 미래로만 이동할 수 있듯, 죽은 자를 되살리거나 추모를 위해 영원히 감정을 불태우는 마법 같은 건 없는 모양이다. 아무도 그런 마법을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삶을 배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신비롭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였다. 삶의 이면을 지키고 세상의 비밀을 간직하기에 신비가 곧 신비神祕가 되는 거라면, 그것을 배반하기 위해 사용되는 걸 마법이라 부를 수는 없는 거라고 베로니카는 생각했다. 그러나 동료들을 기억하는 건 갈수록 어려워졌다. 사 년 전으로 돌아가면 과연 몇 명이나 이 호텔방에 앉아있게 되는지조차 헷갈렸다. 베로니카는 더는 그것이 슬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스스로가 두려웠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런 마법이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왜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걸까. 블루스의 말이 맞다. 새장에 앉은 카나리아처럼 입을 벌리고 탄광 속으로 끌려가는 기분이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종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데도 앉아있는 것 말고 다른 일이 없었다.
끝없이 시간이 반복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사백 살쯤 먹는다면 베로니카는 완전히 고장나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보호되는 무언가도 있지 않을까?
편지를 쓰느라 몸을 기울이고 있던 베로니카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문간에 롭이 기대어 서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그러다 롭이 방으로 걸어들어오면서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모호하게 조율된 어떤 것의 리듬이 깨지고 말았다. 가까이 다가온 롭에게서 샴푸 냄새와 뒤엉킨 남성적인 체취가 끼쳐왔고, 베로니카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잠시 방황했다. 마침내 베로니카는 일부러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아직 시간 남았어.”
“알아.” 롭은 그녀의 팔 밑에 깔린 편지지를 내려다보았다.
“어쩐 일로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하네. 왜 이렇게 기특해진 거야?”
“구야사는 원래 편지 쓰는 거 좋아하잖아.”
부엌으로 향하던 이엘리가 베로니카를 향해 이죽였다.
베로니카가 종이뭉치를 던지자, 이엘리는 자지러질 듯 웃으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다 쓰고나서 마시려고 했어.” 그녀가 볼멘소리로 작게 얘기했다.
“취하기 시작하면 내용이 아예 기억이 안 나니까.”
최근에는 거의 취한 상태로 답장을 썼다. 베로니카는 한 번 읽은 글의 맥락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지나온 길은 헷갈리지 않았지만, 머리 회전이 병적으로 빨랐고 중요한 순간에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어하고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하기 시작하면 기분이 들떴다. 주정뱅이 상태로는 간단한 문장을 쓰는 것조차 힘들어 조사를 다섯 번이나 고쳤다가 다음에 쓰려던 단어를 잊어버리기 일쑤였지만, 손바닥 뒤집듯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골목에선 무적이 되었다.
어느새 베로니카는 자기도 모르게 ‘두렵고, 두렵고, 두렵고…’라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다 쓰면 나와서 뭐라도 좀 먹어. 벨제붑이 샌드위치를 사 왔더라고.”
롭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건드렸다.
“먹고 나서 출발한다. 술은 마시지 말고. 어차피 마실 것도 없어. 벨제붑이 기특하게도 진토닉 사 오는 걸 깜빡 잊었더라.”
“여긴 룸서비스도 없어?”
투덜거렸지만 답을 바란 게 아니었으므로 롭도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4
이번에 롭은 선반 문을 이용했다. 손바닥을 펼쳐 몇 차례 비빈 다음 문고리를 돌리자 야자수가 늘어진 인적 드문 공원이 나타났다. 빵빵대는 경적 소리와 횡단보도 신호등 안내음이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베로니카와 롭은 트리아농 공원의 남자 화장실 문을 빠져나와 파울리스타 거리로 들어섰다. 목적지까지 조금 걸어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비가 사라지기 시작한 후부터 롭의 문은 예전보다 정확도가 떨어졌다. 목적지와 30분 넘게 떨어진 골목 구석이나 폐업한 가게의 뒷문, 한창 상영 중인 영화관과 연결되는 바람에 곤란해질 뻔한 적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천장에서 떨어지거나 호수 한가운데 있는 인공섬에 도착하기도 했다. 시간도 조금씩 어긋났다. 10분이나 20분 뒤, 가끔씩 5시간 뒤의 미래로 떨어질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롭의 문은 여전히 유용했다. 지난 팔 년 동안 나유타 사람들이 수십 번도 넘게 그가 열어주는 ‘문’을 넘었다.
“생각 좀 더 해봐.”
대로변을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가려는데 롭이 말했다.
베로니카는 그가 꺼내는 주제를 모른 체했다.
“뭘?”
“이 일을 계속하는 거 말이야.” 롭이 베로니카를 돌아보았다.
“종말 후에도 정말로 이 짓을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은 코너를 돌아 상점가로 빠져나왔다. 재래시장 특유의 강렬한 향신료 냄새와 구운 견과류 냄새 때문에 롭의 체취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몇 주 전엔 너도 계속하겠다고 했어. 갑자기 말을 바꾼 건 넌데 왜 내가 고집부리는 것처럼 말해?”
목이 타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손목을 움켜쥐었다가 뒤로 감추었다.
“넌 이 일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래서?”
“간단하잖아?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지.”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구야사. 나랑 방주에 탈래?”
베로니카는 걸음을 멈추었다. 롭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베로니카는 오로지 자신의 상상에 기대야만 했다. 그렇지만.
‘당신 딸은 어쩌고?’
희망인지 미래인지 알 수 없는 상상 속에서 롭은 언제나 베로니카를 끌어당기고 침대 속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베로니카는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그의 딸에게 보낼 카드를 고르고, 롭은 이따금 예고도 없이 빌라로 찾아와 잠든 척하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사라졌다.
이것도 늘 있던 그런 일 중 하나일까? 잠깐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뭔가가 오고 있었다. 고개를 꺾은 채 인파 사이를 살피던 베로니카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셋.”
“셋?”
품속에서 총을 꺼내며 베로니카가 창백하게 질렸다.
“어떻게 이렇게 가까운데도 몰랐지?”
손이 경련으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베로니카는 깨달았다. 생각을 너무 했다고. 술을 마실 걸 그랬다. 그녀는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제기랄, 블루스가 왔어야 했는데.” 슬라이드를 당겨 장전하며 말했다.
“따돌리고 아까 그 골목에서 만나. 15분이면 돼.”
롭은 대답하는 대신 수어를 썼고 베로니카는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갈라졌다. 인파 속으로 롭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뛰기 시작했다.
5
베로니카는 일곱 살에 성전 기사단으로부터 아빠를 잃었다. 이 정도는 마법사 사회에서 그렇게까지 유별난 비극도 아니다. 불행으로 줄 세우기를 한다면 베로니카는 아마 중간쯤 위치할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아래일 수도 있다.
이곳은 포옹과 입맞춤, 다정한 눈빛, 낯선 인파 틈에서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을 포기해야만 지켜낼 수 있는 사회다. 사랑을 보호하기 위해 사랑으로 행할 수 있는 몇 가지를 포기할 때 비로소 서로의 행복과 안녕을 빌어줄 수 있었다.
대마법 이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래 산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베로니카는 나이를 아주 오래 먹은 마법사들이 궁금했다. 결코 아빠를 잊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어느 순간에는 아무렇지 않아졌다. 동료의 죽음을 기억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어느 순간에는 화내는 것조차 지겨웠다.
이런 순간을 끝없이 반복하다 보면 결국은 ‘잘못되고’ 마는 걸까? 무엇부터 포기하게 된 걸까? 슬픔에 무감해졌기 때문에 즐거움을 잃은 걸까, 아니면 즐겁지 않게 되었으므로 슬플 일도 없게 된 걸까?
인파 속을 헤집고 달리면서 베로니카는 결국 다른 생각에 사로잡혔다. 술도 약도 하지 않은 또렷한 정신은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오히려 낱낱이 감지되는 세계가 고통스럽고 버겁게 다가왔다. 지나치게 강렬한 빛, 폭력적으로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역시 술을 마시고 나왔어야 했다. 목구멍이 타는 듯하다 못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수십 개의 문장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마시지 않을 때면 늘 그러하듯이. 어느 순간 그녀는 고통을 몰아내기 위해 그것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나유타에서는 소속 마법사에게 출장비도 지원해 주나요?’
그럴 리가. 출장비를 줬으면 술값으로 다 털어버렸겠지.
‘내가 서부 드라마의 보안관이면 당신은 뭡니까? 말라빠진 회전초?’
보안관 정도면 잘 쳐준 건데 왜 난 회전초?
‘비확정성에 기대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래서 당신이 바보라는 거야.
‘혹시 휘파람은 불 줄 아세요?’
그럼 못 부는 사람도 있나?
‘당신은 전혀 귀엽지 않습니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아닐 텐데.
“셋이 아니야.”
누군가 헐떡이며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붙잡았다. 베로니카는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두 사람은 어지러운 재래시장 골목 구석에 서 있었다. 롭이 복부를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움켜쥔 부위에서 한눈에 봐도 짙은 피가 흥건하게 번지고 있었다.
“적어도 다섯 이상이야. 마법사도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그런 것 같아. 마법이 있어.”
“너….”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습관적으로 슬라이더를 당기려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었다. 총을 쥔 손이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이동하자. 부축해 줄게.”
그러나 롭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손을 빼내려는 베로니카의 손을 억지로 붙들어 쥔 다음, 손바닥을 붙이고 다급하게 비벼댔다. 피로 흥건한 손바닥이 삽시간에 베로니카의 손을 끈적끈적하게 만들었다.
“하지 마. 씨발, 하지 마!”
“구야사. 잘 들어.” 롭이 두 손으로 그녀의 손을 꽉 쥔 채 말했다.
“찢어지자. 저 녀석들이 나를 알아.”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냉정하게 생각해. 누가 와도 못 해.”
베로니카가 그의 손을 뿌리치자 롭이 다시 붙잡았다.
“문을 열어줄게. 잘 안될 수도 있어. 그래도 어떻게든 해볼게.”
“블루스를 데려올게.”
“이게 최선인 거 알잖아.”
롭이 얼굴을 찡그렸다. “기억해, 사방이 막힌 문이어야 해.”
베로니카가 결국 그를 뿌리쳤다.
“난 방주 같은 거 안 타.”
“알아.”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롭이 솜씨 좋게 이죽였다.
“그래도 여기 남으면 넌 계속하려고 들 테니까….”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죽어라 달려. 나도 그럴 테니까.”
“당신 딸은 어쩌고?”
결국 베로니카가 말했다.
롭은 이제 웃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가서, 좀 벗어났다 싶으면 죽어라 달리는 거야.”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자, 이제 가. 총은 쓰지 마.”
골목에서 한 여자가 빠져나왔다. 창백한 얼굴로 주먹을 쥔 채. 움켜쥔 손안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핏자국. 여자가 인파 속으로 몸을 감추려 하면, 등 뒤로 털썩 쓰러지는 소리 들린다. 우르르 몰려오던 발소리들 멈춘다.
여자는 앞을 쏘아보며 걷는다. 뒤돌아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이제는 신화가 되어버린 불행한 음악가 흉내를 내본다. 저승의 대스승과 거래하여 죽은 아내를 되찾아오려던 남자인 척을. 그런데, 그런 일이 진짜로 있긴 했던가?
베로니카, 그 이야기의 끝을 잊어버린 거니?
‘정말이지 연기엔 재주가 없는 모양입니다.’
돌아보는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쓰러진 롭을 둘러싸고 있던 한 무리의 성전 기사단이 고개를 들었다.
베로니카는 가까운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6
씬1. 카쿠페, 실외. 낮.
여자는 문고리를 비틀어 연다. 강렬한 빛. 달리는 동안 서서히 시야가 돌아온다. 오른쪽은 주차장, 왼쪽은 빌딩. 어디로 갈래? 여자는 오른쪽으로 달린다. 등 뒤로 따라붙는 발소리들. 따라잡히기 전 여자는 새로운 문을 찾아낸다.
또 시작이다. 곤란하면 시나리오 속으로 도망치는 버릇.
씬2. 산티아고, 실내. 낮.
백화점 비상구가 벌컥 열린다. 뛰어 들어온 여자를 이상한 눈으로 곁눈질하는 사람들. 두리번거리던 여자, 달리기 시작한다. 벌컥 열린 비상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 쏟아진다. 곧장 여자를 뒤쫓는다. 꺅! 뭐야! 사방에서 터지는 불만스러운 비명. 여자, 매장으로 뛰어든다. 마네킹을 밀치면서 거칠게 탈의실 문 열어젖힌다.
인식하는 것이 곧 당신의 세계.
씬3. 로사리오, 실외. 낮.
여자, 상점가 밖으로 정신없이 빠져나온다. 형형한 눈동자.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 빠져나온 건물에서 우르르 발소리 들려온다. 미친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던 여자, 건너편 상가로 달려 들어간다. 화장실 문고리를 비틀어 연다. 철컥철컥. 열리지 않는다. 헉헉대던 여자, 계단을 달려 오르기 시작한다.
베로니카의 마법은 사람의 인식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얼마나 편리한가? 간단하게 사람의 생각을 듣고 조율할 수 있다면 삶을 꾸리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다.
씬4. 조지타운, 실외. 저녁.
도서관 뒷문이 벌컥 열리고 여자 비틀대며 빠져나온다. 와, 사실 답장이 다시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프란시스 하 같은 영화의 각본을 써서 방송사에라도 투고하십시오. 제 처지가 안타깝긴 해도 별로 미안하지는 않으신… 좋아요, 새로운 걸 하나 더 알아냈어요. 대답을 중얼대며 허공을 쏘아보는 여자. 이때 등 뒤로 벌컥 열리는 문. 이 악물고 다시 달리는 여자 뒤로 한 무리의 사람들 따라붙는다. 여자, 행인을 밀치고 관공서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삶은 잘 짜인 하나의 각본과 같다. 불행도 행운도 알맞은 타이밍에 닥쳐오니까. ‘사는 건 원래 마음대로 안 된다’고 말하는 것마저 대본의 일부다. 삶이 불우하다면 스스로가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너무 멀리 왔다고 느껴진다면 스스로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씬5. 벨리즈시티, 실외. 저녁.
쏟아지는 비. 낡은 철문이 벌컥 열린다. 비틀대며 빠져나온 여자. 삽시간에 머리카락이 축축해진다. 도로를 달리다가 미끄러져 데굴데굴 구른다. 벌떡 일어나는 순간 등 뒤에서 손아귀가 덮쳐온다. 악 소리를 내며 다시 쓰러지는 여자. 바닥을 더듬거리면 손에 낡은 우산 잡힌다. 제 마법이 잘 먹힌 거라면 좋겠네요. 휙 몸을 비튼 여자, 우산대로 등 뒤에 매달린 남자를 거칠게 후려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휘청거리며 일어난다. 다시 뛰기 시작한다.
이 마법은 어디까지 조율하는 걸까? 그 자신의 삶에는 얼마만큼 관여하고 있는가?
씬6. 티후아나, 실외. 밤.
불 꺼진 수영장.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느닷없이 벌컥 문이 열린다. 천장에서 조명 추락하듯 떨어지는 몸뚱이. 풍덩 소리와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튄다. 잠시 후 수면 위로 고개를 치켜드는 여자. 허우적대며 간신히 뭍으로 올라오면, 열린 문으로 두 명의 사람 떨어진다. 여자, 물을 뚝뚝 흘리며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이 삶은 마법의 것인가, 베로니카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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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땐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베로니카는 계속해서 문을 열었다. 오슬로, 말라카, 쾨벤하운, 나고야, 제노바의 거리를 내달렸다. 보이는 문마다 열어젖혔다. 경계를 넘을 때마다 풍경도 시간도 바뀌었다.
베로니카가 마침내 멈추어 선 것은 카페 뒷문으로 달려갔을 때였다. 벌컥 열자마자 파트타임 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청록색 앞치마를 두른 어린 백인 여성들이 커피를 내리고 주문을 받다 말고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동작을 멈추었다. 하나같이 당혹스러운 표정들이었다. 베로니카는 뒷걸음질 치다 말고 문을 쾅 닫았다.
거리로 나온 베로니카는 신경질적으로 걷다가 다시 카페로 돌아갔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베로니카는 건너편 테이블에 코스모와 타티아나가 앉아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트럼프 카드를 신중하게 섞고 있었다.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퍼시발의 손이 베로니카를 알아보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맞은편 테이블에는 로이고르와 이언, 해던이 앉아있었다. 임프는 커튼 옆 테이블에 앉아서 휴대폰을 충전하고 있었다. 특유의 찡그리듯 집중하는 표정이 기억 속과 똑같았다. 베로니카는 문을 열어준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롭이 그녀를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안 들어가시나요?”
그는 그것을 노르스크로 말했고, 의사어를 쓰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테이블 쪽을 훑어보았다. 환상이 끝나고 현실이 남았다.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 누구도 베로니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닮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문을 붙잡고 있는 낯선 청년에게 영어로 말했다.
“아뇨.”
카페로 들어서자마자 문 근처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베로니카가 입은 옷이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축축한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넘기면서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롭이 틀렸다. 베로니카는 언젠가 그를 잊어버릴 것이다. 시간은 영원한 슬픔과 고통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시무시하게 공평한 치유의 감각이 그의 죽음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결국은 껍데기만 남겨놓을 것이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을까. 마법으로도 할 수 없는 게 있다니.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삶은 매 순간 강렬했다. 삶은 언제나 마법을 추월해 그녀를 쓰러뜨린다.
그 감각이 싫어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약을 했는데.
정작 이 삶을 빚지는 건 포옹과 입맞춤, 다정한 눈빛, 낯선 인파 틈에서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조차 없는 관계라니.
왜 오늘 술을 마시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마리화나라도. 그러나 사백 년을 산대도 베로니카는 편지를 쓸 것이다. 고통 속에서 중얼거릴 수 있는 문장을 불러내는 건 술도 약도 담배도 아닌 고작 몇 장의 편지였으니까.
베로니카는 낯선 언어로 적힌 메뉴판을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카운터 직원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카운터 직원이 영어로 말을 걸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얼굴을 찡그리고 그녀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카운터 직원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베로니카에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베로니카는 인중을 더듬거렸다가 자신의 왼쪽 뺨이 축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커피 머신이 윙윙거리며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있었다. 입안으로 혀를 굴리던 베로니카가 마침내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 펜 있나요?”
눈물을 흘리며 그녀가 물었다. ■ 2022.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