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위»
밴드부 합숙 소식을 들은 엄마는 영 탐탁찮은 눈치였다.
“꼭 가야되겠니?”
“음…,” 상선은 죄책감을 덜어보려고 시선을 피했다. “엉….”
“공부는 하고 있지?”
“당연하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상선도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었다. 어쨌든 인서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얼른 연습 끝내고 조금이라도 공부해야지…!’
그런 연유로, 민박집으로 향하는 상선의 베이스 케이스에는 단어장과 오답노트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미약한 죄책감을 덜어줄 임시방편에 불과했고, 막상 숙소에 도착하면 공책은커녕 단어장조차 펼쳐보지도 않을 것임을 상선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악보를 들여다보면서 <달이 차오른다, 가자>를 치고 있었더니 종이만 봐도 신물이 올라왔던 것이다. 상선은 지금이라도 베이스를 그만두고 ‘미미 시스터즈’로 역할을 옮기고 싶었다. 보컬 곁에 서서 팔을 휘적거리며 춤을 추는 선글라스의 여인이 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악마는 상선이의 영혼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상선은 이른 밤 시간에 가장 먼저 잠이 들었다. 그동안 상선은 꿈을 꾸었다. 그곳에는 도시가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기묘한 도시였다. 무너진 시멘트 안으로 녹슬어가는 철골이 보였고, 베란다에는 구정물이 말라붙은 플라스틱 의자가 나와 있었다. 상선은 생각했다. 저렇게나 창문이 많은데 왜 사람이 없는 걸까.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누군가 상선을 흔들어 깨웠다. 선배, 선배.
“일어나요, 선배.”
나은이었다. 상선은 몽롱한 상태로 나은을 끌어당기면서 물었다.
“응?”
“마수가 나타났어요.”
“왜?” 그렇게 말하면서 상선은 잠에서 깨어났다.
상선은 다시 물었다.
“몇 마리?”
“많아요.”
나은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잔뜩 졸아들어 있었다. 어두워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겁에 질린 얼굴일 거라고 상선은 생각했다.
“괜찮을 거야. 우리도 많잖아.”
숙소엔 적어도 스무 명이 있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마수가 다구리 당하는 수준 아닐까?!’
상선이 나은과 함께 밖으로 나왔을 때 부원 대부분은 이미 운동화를 신고 출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선은 사람들 근처를 서성거리다가 합주조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대부분의 내용을 전달받았다. 파완은 언제나 이런 방면으로 빠릿빠릿하고 수완이 좋았다. 순식간에 도시 동쪽으로 향할 팀이 꾸려지자 상선을 포함한 운결과 파완, 서하, 나은 다섯 사람은 작전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익숙하게 변신했다. 상선은 주머니에서 한때 언니 것이었던 디올 립스틱을 꺼내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차가운 빛 무리가 상선이 입은 후드티의 형체를 허물고 맨살에 달라붙었다. 머리 위로 손을 뻗자 공중에서 회전 중인 립스틱 바가 길고 늘씬한 배턴이 되었고, 떨어지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낚아채자마자 팡 소리와 몸을 감싼 빛 무리가 터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느새 상선은 명품을 두른 거인이 되어있었다. 시야가 높아지자 남자아이들의 정수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변신을 마친 운결과 파완이 상선을 한 번 올려다보곤 서하와 나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지난번보다 키가 작은 것 같기도… 하고?’
자다 깨서 그럴지도. 변신 후 상선의 키는 기분에 따라 180cm까지 쪼그라들었다가 190cm를 훌쩍 넘겼다가를 반복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공부도 안 하고 자버린 죄책감이 상선의 정수리를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고3은 그냥 살아만 있어도 괴로운 시기인 것이다.
‘역시 베이스 말고 미미시스터즈나 할 걸 그랬어…(말도 안 되는 소리임).’
상선이 이런 쓸모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을 무렵, 다섯 사람은 어느덧 동쪽 구역에 진입했다. 파완이 기합 좋게 주변에 사람이 없나 둘러보는 동안, 상선 곁에 선 나은은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로 상황을 훑어보았다.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한 건 운결 쪽이었다. (아니, 어쩌면 서하였을지도.) 어쨌든 상선은 운결이 고개를 젖힌 채 인상을 슬쩍 찌푸리는 것을 보았고, 그 시선을 따라 시원하게 쭉 뻗은 마천루를 올려다보면서 ‘그것’과 대면하게 되었다. 이미 마수에 대한 정보를 대략적으로 입수한 상태에서도 막상 눈앞에서 적의 규모를 파악하고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고 끝없이 길게 늘어져, 어디서부터 온 건지 도무지 짐작조차 안 되는 검푸른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높은 빌딩들을 지렛대 삼아 겅중겅중 늘어진 머리카락의 풍경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상선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저게 뭐야….”
저게 머리카락이라면 우린 대체 얼마나 큰 놈하고 싸워야 하는 거야?! 저 주인은 어디 있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 마수가 그 육중한 손을 휘둘러 다섯 명을 손쉽게 찌그러뜨리는 모습이 벌써부터 상선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야자 끝나고 사먹는 밥버거처럼 그들은 찌그러지고 말 것이다….
‘다구리 당하는 건 우리였나 봐….’
하지만 상선의 믿음직스러운 팀은 손쉽게 밥버거가 되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코드네임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치’는 고개를 돌려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아스팔트로 나와 도로의 풍경을 훑어보는 ‘조립’을 제외한 세 사람은 의견을 주고받으며 대략적인 전략을 수정했다. ‘젤리’의 보호막으로 안전한 지대를 끝없이 갱신해나가며 ‘풍선껌’과 ‘속박’이 머리카락을 잘라보자는 게 주요한 의견이었다. 공격형 마법으로 길을 터내면서 보조형 마법이 뒤를 받쳐주는 셈이다.
상선이 ‘젤리’에게 걸어줄 적절한 시간을 머릿속으로 분배해보는 동안, 나름대로 생각을 마치고 팀으로 돌아온 ‘조립’은 조리개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표정이 크게 한 탕을 칠 준비가 끝난 도박꾼 같았다.
“아래서 말고, 위에서 볼래? 저 마수 말이야.”
‘조립’이 어깨 너머의 자동차들을 가리키자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지점에 내리꽂혔다.
“비행기는 항공 엔진이 없어서 못 만들겠지만, 비슷한 걸 만들 수 있을 거야. 아, 조종은 어, 무면허긴 한데! 걱정 마! 게임에서 해본 적 있어!”
상선은 어수선한 마음으로 ‘조립’을 바라보았는데, 들뜬 얼굴은 더없이 파완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처럼 보였다. ‘사치’는 박상선의 기분으로 그를 믿고 싶어졌다.
“마침 저기 조립 재료도 많고, 어때? 신속하고 정확한 배달을 약속할게!”
상선은 주먹을 쥐어보였다.
“가자!”
선수입장!

잠시 후 상선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수십 미터 높이의 상공에 떠있었다. ‘조립’이 만든 호버보드의 기능은 훌륭했지만 아래가 뻥 뚫려있다는 치명적인 특징이 있었다. 그 말은 즉 몸을 뒤척이거나 중심을 잃으면 떨어져 죽음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발 아래로 아찔한 도시의 풍경이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고, 거센 바람이 상선의 얼굴을 끊임없이 때려왔다. 다리가 절로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상선은 ‘조립’이든 파완이든 이 호버보드를 만든 주인을 믿어보는 건 할 수 있어도 스스로의 균형감각만큼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머지 멤버들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기, 사람 아냐?”
“새도 있는 것 같아.”
발아래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은 검푸른 비단을 두른 전신주처럼 보였다. 바람소리를 뚫고 빵빵거리는 차 소음과 비명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일부 빌딩은 정전으로 캄캄했고, 머리카락이 걸린 빌딩 유리창 너머로 난잡한 사무실 풍경과 혼비백산하게 대피하는 회사원들이 보였다. 상선은 눈을 가늘게 떴다. 5층 높이에서 거미줄에 걸린 듯 머리카락에 휘감긴 비둘기 몇 마리가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곁에서 축 늘어진 사람을 발견한 순간,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주, 죽은 거 아냐?”
등 뒤에서 자세를 숙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니, 살아있어. 걸리면 바로 죽는 게 아니란 건가?”
“명확한 건, 잡히면 기분과 건강부터 잡치게 되나 본데? 맞아, 바로 죽진 않는가봐.”
‘조립’이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아무튼 구해야 해!”
호버보드가 흔들리며 고도를 낮췄고, 상선은 다시 한 번 속으로 짧은 비명을 질러야했다. 그 순간 재빠른 속도로 머리카락에 접근한 ‘속박’이 온힘을 실어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조금의 찔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느릿느릿 지지부진한 속도로 떨어져나간 머리카락이 사람과 비둘기를 뱉어내듯 놓아주었다. 다음 순간 ‘젤리’가 손을 휘둘러 이들을 젤리 속에 주워 넣었다. 상선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눈빛이 일순 침착해지면서 울리는 목소리로 상선이 <선언>했다.
“지금부터 <젤리>에게…,”
시계바늘이 이동하고, 초침소리가 귓가를 때리면서 일순 침묵이 있었다.
“<15분>.”
마법이 시작되었다.
상선은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조금씩 혼란을 경험했다. 매순간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상대의 감정을 구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낯선 감정은 멋대로 쑤셔 넣은 주사바늘처럼 몸에 물길을 만들면서 머릿속으로 솟구쳐 오르곤 했다. 상선은 입에 사탕을 물리면 침이 고이는 것과 같은 이치로 남의 남정도 자신의 것처럼 동화되어 이리저리 휘둘리곤 했는데, 가끔은 이것이 심각해져 파편적인 이미지가 환각처럼 일렁거릴 때도 있었다. 그 장면들이 상대방이 전투 순간순간마다 떠올리는 사적인 기억들임을 모르지는 않았기에, 상선은 이런 사실을 남들에게 가급적이면 밝히지 않으려고 애써왔다. 그야, 능력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불온하게 느끼면 곤란하니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제법 긍정적인 전개로 흘러가는 듯했다. 두근거리며 바짝 긴장해있던 상선은 침착하고 평이한 마음을 유지하는 서하의 상태에 큰 위안을 받았다. 상선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서하의 침착함을 밀어내거나 잘라낼 생각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로 했고, 곧이어 무척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딱. 풍선껌을 터뜨리는 소리와 함께 3m 아래서 도로 한쪽 면이 폭발했다. 상선은 운결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미끄러지듯 손가락을 튕기며 새로운 풍선을 부는 모습을 보았다. 서하는 호버보드에 꼿꼿하게 선 자세로 채를 쥔 채 폭발 지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기가 걷히자 거대한 막처럼 폭발 주위를 감싼 젤리가 눈에 들어왔다. 상선은 서하가 폭발과 동시에 한 지점을 젤리로 감싸는 순발력 있는 센스를 발휘했다는 걸 깨닫곤 기분이 좋아졌다.
“서ㅎ…아니, ‘젤리’야! 너 정말 많이 늘었구나!”
“그런가요.”
“그렇다니까!”
사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나은이 제 몸처럼 거대한 낫을 휘둘러 머리카락 틈을 종횡무진 움직이는 동안, 도로에선 몇 차례의 폭발이 더 일어났다. 잘려나간 머리카락 무더기들은 땅바닥에 닿기도 전에 공중으로 부스러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나 어디에든 검푸른 머리카락이 걸려 있었다. 공격적으로 대응하던 운결과 나은이 재차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 본체를 찾아야했다. 상선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나은에게 걸린 <사치>의 능력도 끝나가고 있었다. 10분 이하로 마법에 제한을 걸고 좀 더 강력한 방법으로 증폭시켰다면, 나은은 몇 분 전에 호버보드에서 비틀거리며 떨어질 만큼 기운이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은 게 다행이었다.
‘다행히 제대로 판단했구나….’
“‘사치’, 머리카락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응?”
파완이 동쪽 끝을 흘끔거렸지만 그 너머는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호버보드의 방향이 조금 수정되면서 이제 다섯 사람은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인파는 줄어들고 검푸른 머리카락만 빽빽하게 늘어지면서 분위기가 뒤집혔다.
“어?”
도심의 풍경이 한순간 바뀌고 연구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선은 당황했다. 수십 개의 굵고 기분 나쁜 머리카락 다발이 연구소로부터 빽빽하게 뻗어져 나오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웬 연구소?
“아무리 봐도 저기 맞지?”
네 명의 침묵은 동의를 의미했다.
다섯 사람은 호버보드에서 내려와 입구를 찾았다. 상선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머리카락이 미처 선수를 치지 못해 온전히 보존된 문 하나를 발견했다. 문고리를 돌려보았지만 당연하게도 굳게 잠겨 있었다. 이때 마음속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며 두려움을 몰아내던 서하의 감정이 꺼지면서 상선은 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연구소가 조금씩 오싹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둘을 하나로 묶어놓던 <사치>의 능력이 끝나버린 것이다.
“헉, 안 되겠어. 빠, 빨리 들어가자, 얘들아.”
상선은 품에서 배턴 봉을 꺼내 휘리릭 돌리면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이 배턴은 디올 립스틱 바 특유의 물빛 은색과 홀로그램 처리가 은은하게 남아있는 멋진 무기였다. 양쪽에 달린 하얀색 고무 추 덕에 던지는 힘과 속도에 따라 제법 세세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는데, 살상 능력은 없어도 잘만 던지면 가위바위보에서 3연속으로 진 사람이 간신히 따낸 1승에 포효하며 때리는 딱밤과 같은 위력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겠지? 딱밤 맞은 마수들아, 어땠니? 아팠니?) 후, 숨을 몰아쉰 상선이 문고리에 조준하고 가볍게 배턴 봉을 던지자 꽝 소리와 함께 문이 우그러졌다. (그래, 아팠겠구나.) 서하의 몸 상태를 확인한 후 다시 한 번 선언으로 <사치>의 상태를 만들어준 상선은 거대한 젤리가 연구소를 감싸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베리어 설치가 끝나자마자 앞장서서 뛰어들었다.
“가자!”
다섯 사람은 연구소에 진입하자마자 본체를 찾기 위해 뿔뿔이 갈라졌다. 머리카락이 사방에 늘어져 있었으므로 밟지 않으면서 안을 수색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했다. 상선은 갈수록 캄캄하고 을씨년스러워지는 연구소 내부에서 퀴퀴한 곰팡이 냄새를 맡았다.
‘귀신의 집에 들어가면 이런 느낌인 걸까…’
머리 위에서 묵직한 머리카락의 무게를 못 이겨 주저앉기 일보직전인 파이프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힘주어 유리를 닦을 때나 나는 소리였는데, 제법 오싹해서 어깨에 힘이 실리면서도 한편으론 이 정도의 분위기라면 견딜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지? 나 제법 담력 있는 편이었나?’
불현듯 상선의 머릿속으로 용기의 발상이 번뜩이며 스쳐지나갔다.
‘다음번엔 에버랜드 귀신의 집, 도전해볼 수 있을 지도!’
상선은 방을 이동하면서 바닥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폴짝 뛰어넘었다.
‘수능 끝나면… 에버랜드에!’
캄캄한 복도에 구불구불 늘어진 머리카락은 한눈에 보기에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지만 상선은 자신이 귀신의 집을 손쉽게 마스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단 사실에 지나치게 고무된 나머지 DDR 고수처럼 겅중겅중 화려한 스텝으로 바닥 타일을 건너뛰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꿈과 희망의 나라… 에버랜드!’
그리고 무언가가 상선의 발목을 휘감았다.
“엥?”
상선이 돌아보기도 전에 ‘그것들’이 움직였다. 끈적끈적하면서도 서늘한 촉감이 상선의 허벅지를 타고 허리를 휘감으며 올라왔다. 가슴을 압박하는 물리적인 압력이 느껴지면서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상선의 몸이 공중으로 들어 올려 지기 시작했다.
“에, 엥?! 잠깐만. 엑?!”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려고 했지만, 느닷없이 졸음이 밀려오며 모든 게 귀찮아졌다. 상선은 자기도 모르게 하품을 하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거, 거짓말. 에에에에엥?”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잠시 후 본체를 찾았다는 누군가의 외침이 캄캄한 복도를 타고 왕왕 울리며 상선에게 도달했다. 이 목소리, 누구더라?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도무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상선은 끙끙거리다가 다시 한 번 길게 하품을 하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도와줘!!!!”
퉁. 등에 차갑고 딱딱한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늘어진 팔 다리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고, 자꾸만 눈이 감겼다. 상선은 천장에 뒤집힌 채 매달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상선은 자신이 발버둥을 치고 있다고 믿었다.
어느새 상선은 도심 한복판을 걷고 있었다. 여전히 그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 아래서 피부가 벗겨진 건물은 페인트 가루를 흩날리며 삭아가고 있고, 사이사이 용수철마냥 솟구친 철골들은 빌딩이 입은 치명적인 상처처럼 보였다. 깨진 창문 틈새로 무성한 식물들이 손을 뻗어가며 마천루를 향해 기어오르는 것도 보였다. 언젠가 상선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삭아버린다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도시는 언제쯤 버려진 걸까? 비교적 최근에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건 아닐까? 아니다, 어쩐지 이 도시는 버림받지 않은 것만 같다. 왜일까? 거기까지 되짚어보던 상선은 이 꿈이 언젠가 블랙홀 너머에서 경험한 바로 그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는 상선은 눈을 감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 일은 벌어졌다.
태양이 일순 마지막 빛을 번쩍이며 지평선으로 떨어지려는 그 순간, 빌딩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면서 황금빛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 빛은 공격적으로 사방을 감싸더니 버려진 유리와 철골, 가구와 썩지 않는 플라스틱에 반사되며 수십 개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어느덧 도시는 사라졌다. 이제 상선은 거대한 손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여인이 엎드린 채 상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인은 천천히 한 손을 뒤집어 상선이 얹어진 손바닥 위에 기둥처럼 자신의 다섯 손가락을 세웠다. 그녀의 눈에 상선은 꼭 느슨한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상선은 자신을 닮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조금도 닮지 않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무력하게 올려다보았다.
‘아, 조금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키가 조금 더 컸거나….’
왜 언니는 언제나 상선보다 커보였는지 모르겠다. 마음먹은 대로 잘 해내지 못할 때마다 박상아의 존재감이 정수리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내려다보는 황금빛의 여인이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상선을 부르고 있었다. 선배, 선배. 상선은 눈을 떴다.
“일어나요, 선배.”
펑, 소리와 함께 중력이 아래로 쏠렸다. 누군가 상선을 받는 게 느껴졌다.
“본체를 찾았어요. 괜찮아요?”
운결이었다. 상선은 숨을 들이키며 벌떡 일어났다.
“헉, 미안….”
땅으로 내려오자 운결은 상선의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어주면서 다시 한 번 괜찮냐고 물었다. 상선은 어쩐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어쩌다 이런 실수를 한 건 진 절대 말하지 말아야지…. (에버랜드.)
“고, 고마워.”
인사하는 동안 상선은 운결이 등 뒤로 향하는 동시에 엄지와 검지로 고상한 집게손가락을 만들어 찝찝하고 더러운 것을 옮기는 듯 상선의 어깨에 걸린 검푸른 머리카락 한 줌을 떼어내 재빨리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상선의 시선을 눈치 챈 운결이 이쪽을 바라보자 상선은 재빨리 바닥을 쳐다봤다.
“…….”
“…….”
‘ㅠㅠ.’
“선배, 갈까요?”
“으, 응!”
파완과 서하, 나은 세 사람은 이미 본체로 추정되는 모니터 앞에 모여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다. 네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어야 맞다. 상선이 딴 생각에 잠기지만 않았어도 운결은 되돌아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박상선은 공부에나 집중할 고3의 신분으로 벌써부터 에버랜드 갈 생각부터해서 벌을 받은 모양이었다.
‘역시 돌아가면 단어 공부 꼭 해야지, 꼭! 꼭!’
“저기서 머리카락을 끊어내 볼까?”
운결의 시선이 모니터에서 출력되는 엄청난 분량의 머리카락을 훑었다.
“그래, 쟤는 위생을 위해서라도 머리 좀 잘라야 해. 엉킨 거 봐.”
파완이 농담처럼 던졌지만 우스갯소리는 아니었다. 이 머리카락은 좀 관리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저… 여기 뭔가 기분 나쁘게 생긴 게 있어.”
모든 일이 끝나고, 머리카락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저 난잡한 연구실이 되어버린 방을 훑어보는데 구석에서 나은이 조심스럽게 모두를 불렀다. 모니터에서 쏟아지는 빛이 나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네 사람이 다가와 모니터를 확인하려하자 나은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뒤로 조금 물러났다.
“백지도?”
“이거… 성화시잖아?”
하얀 지도 위에 누가 봐도 성화시인 땅덩어리가 그려져 있고, 특정 지역에 붉은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주변을 가득 채운 선명한 ‘NULL’이란 글씨는 어딘지 조금 섬뜩해보였다. 상선은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멍해졌다.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진 지점은 바로 성화고등학교였다!
“…인구 밀집 통계 같은 건가? 마법 청소년판?”
파완이 중얼거리자, 상선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 학교에 마법 청소년들이 모여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 학교가 꼭 목표라는 뜻처럼 보여….”
서하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웜홀을 열고, 성화고에 마법 청소년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 같아요.”
나은은 겁에 질린 것 같았다.
“학교… 만 표시되어 있어. 왠지 위험할 것 같아.”
파완이 앞으로 나섰다.
“이거 누가 만든 걸까? 파일정보 확인해보자. 배후가 있다면 무슨 정보라도 남아있을지 몰라.”
파완이 파일 정보를 확인하고 실시간으로 정보를 나누는 동안, 네 사람 역시 진지해졌다. 파일에는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미지가 생성된 날짜는 마법청소년이 탄생하기도 전인 3년 전 6월 초로 추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만든 이의 제대로 된 정보를 확인할 수도, 파일의 확장자나 크기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미지를 기기로 옮겨 가져갈 수조차 없어 파완이 직접 능력을 사용해 마법으로 만든 USB를 조립해야만 했다. 결국 상선은 이 모든 일에 배후가 있다고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떡하지? 뭘 어쩌면 될까?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만약 모든 일이 계획되어 있던 거라면, 그렇다면 상대는 블랙홀도, 화이트홀도, 웜홀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게다가 마수를 불러들이는….
“자자, 여기 있습니다.”
“엥?”
파완이 내민 USB를 엉겁결에 받아든 상선이 당혹스러운 눈으로 파완과 USB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파완은 대답 대신 엄지를 척 들어보였다.
“맡길게!”
“엑!”
“그럼, 승객 여러분. 얼른 탑승하세요. 시간 없으니까!”
“잠깐, 잠깐만….”
호버보드에 올라탄 파완이 다시 한 번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상선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자신의 루이비통 백에 얌전히 그 USB를 욱여넣었다.
“운전, 너무 높게 올라가지 말고 살살해줘….”
두 번째로 오르는 거지만 역시 호버보드는 무서웠다.
돌아오는 길에 동이 텄다. 출근길로 북적이는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동안 시민들은 웅성거리며 멍하니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휴대폰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상선은 결국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호버보드가 조금 더 높게 날아오르도록 파완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었다. 상선은 시민들의 카메라에 찍히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상선의 얼굴을 보고 상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고 지목한다면… 그러니까 혹시라도 그 누군가를 떠올린다면 상선은 정말이지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릴 테니.
‘아, 돌아가면 단어 다섯 개만 외우고 자기로 했는데….’
하지만 박상선은 박상아가 아니므로 인생을 치열하게 살 마음이 없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므로, 돌아가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가 느지막이 깨어나 베이스를 챙겨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약간의 죄책감은 박상선의 정수리를 누르겠지만 그 정도쯤으로는 불행해질 수 없으니 상관없을 테다. 박상아는 언제나 그런 박상선을 한심한 눈으로 흘겨보곤 했다. 감히 그 정도의 행복만으로 행복해지는 동생을 손바닥에 얹어놓고 내려다보려고만 했다. 아름다운 명품을 두른 채로. 그저 아름답기만 한 명품을 갑옷처럼 두른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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