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로그»
세상에 사람이 나고, 또 많이 죽는 시대였다. 인간들은 지붕 아래서든 다리 밑에서든 나무 그늘에서든 가리지 않고 교미했고, 닥치는 대로 아이를 낳았다가 겨울이면 하나같이 굶어죽거나 얼어 죽었다. 거리마다 그 조로한 운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거지들은 발에 채이는 돌멩이보다 흔했으며, 아이들은 빨리 늙었고, 강도들은 살인을 했다. 북쪽 땅에선 독립군 전쟁의 연기가, 동쪽 바다에선 전염병이 흘러 다녔다. 오죽하면 사신의 옷자락이 닳아서 짧아지고 있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한편 인간들의 신은 인간들의 고난 앞에서 더욱 단단해지는 법이다. 그것은 불변의 법칙일 것인데, 대륙 이베르타도 다르지 않았다. 에스더 12년, 지리멸렬한 영토전쟁이 끝나고 하나로 뭉친 대륙을 통치하기 위하여 영리하고 게으른 왕이 한 가지 묘책을 냈으니, 바로 신을 섬기고 말씀을 설파하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바야흐로 창과 칼만으로는 권력을 쥘 수 없는 법. 그리하여 신 “에온”이 그들의 새로운 날붙이가 되었다.
우리가 중세의 어두컴컴한 시대를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무지와 뻔뻔함의 시대였고, 동시에 격동과 치열함의 시대였다. 성가대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면 주교들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마을에서 가장 큰 길을 골라 걸어 다녔다. 그렇게 해야만 골목마다 누워있는 시체를 보지 않아도 괜찮았기에. 죽음이 찾아온다면 신의 은총을 받지 못 했기 때문인데, 신의 은총을 받지 못 한 것은 삶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므로, 주교들은 죄인들을 보살필 의무가 없었다. 이 얼마나 고결한 변명인가! 신의 이름을 빌려 많은 일들이 행해졌는데, 주교를 욕되게 한 자, 세상에 의문을 품은 자,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한 자들 모두가 에온의 이름하에 바다에 수장되었다. 이단(異端)들은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으며, 동시에 그 죽음으로 하여금 누군가에게 질문을 남김으로써 영영 살아남았다. 말했지만 죽음만큼이나 삶이 차고 넘치던 시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이 시대가 그저 캄캄한 밤이라고만 불려서는 안 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폐된 공격’이 이면에서 치열하게 지속되어 온 한, 던져진 무수한 질문이 세상에 남겨진 한, 이 암흑은 정체된 ‘상태’가 아닌 새벽을 앞둔 ‘상황’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잼은 일생동안 새벽을 기다렸다.

운명은 대체로 잼의 편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고로, 운명은 원래부터 자신을 지배할 사람에게는 관대하지 못 한 것이다. 잼은 탄생의 과정부터 그러하였다. 모든 이야기는 아이다 카르스텐이 미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이다 W.카르스텐은 카르스텐 가문의 가주 클라딘의 여동생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이 신분제 사회의 꼭대기를 차지한 운 좋은 여인이다. 그녀는 열다섯 살에 자신의 삼촌 자일스 M.카르스텐과 결혼식을 올린 이례로 무려 삼 년 동안 세 명의 아이를 연달아 낳았다. 딸 한 명과 아들 둘을 고작 일 년의 간격을 두고 출산한 것이다. 아이를 그렇게 낳다보면 기가 빠진다. 아이다는 결혼 이전까지 그 나름의 이상과 꿈이 있었으나, 쉬지 않고 뱃속에 돌덩어리를 담갔다 꺼낸 이후에는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리지 못 하고 죽어갔다. 그 무렵 아이다의 영혼 속에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것은 육아와 결혼생활에 형편없이 무심하던 자일스에 대한 분노만은 아니었다. 무어라 일컬을 수도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 무시무시했다. 불이었다. 화마(火魔)였다. 그리고 아이다는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아이다는 이제 분노에 몸을 던지기를 희망하였으나, 네 번째 임신을 맞이했을 때쯤엔 도무지 그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마침내 저항하기를 그만두었고, 백기를 들었으며, 천천히 미쳐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 뒤 그녀가 겪게 될 무기력함과 기나긴 임신우울증을 단지 패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결국 아이다가 선택한 또 하나의 저항이었으니, 갈 곳을 잃은 그녀의 분노는 뱃속을 떠돌다 말고 탯줄을 타고 네 번째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고, 이것이 운명이 아이다에게 준 마지막 축복이자 비극이다. 아이다는 지독한 우울증에 빠져 임신사실을 부정하였고, 마침내 출산의 사실조차 망각하였다. 그녀는 축복을 손에 넣자마자 영영 상실해버렸다. 넷째 아이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은폐될 준비를 마쳤다.
자일스는 아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당시에는 임신스트레스라던가, 우울증이라던가, 여타 마음의 병이라고 불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광기로 치부되었다. 신에 대한 신실한 믿음만이 오로지 인간을 구원하고 보살필 수 있었다. 의사의 개념이 존재할 리 만무했으며, 이발사가 남의 머리도 깎고 목숨도 깎아주었다. 아이다가 미쳤다면 그녀의 믿음이 부족한 탓일 테고, 에온의 축복이 그녀를 떠난 탓일 테다. 그것을 가문에 알려 좋을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나 이 역시 편리한 변명. 자일스는 네 번째 아이가 출산되자마자 말과 포대기를 준비하였다. 새롭게 태어난 생명을 성 밖으로 투기할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것이다. 마침내 자일스가 출산을 마치고 기진한 아이다의 곁에서 막내딸을 들어올렸다. 거기 횃불을 가져오라! 사용인이 달려와 불을 내미니 어두컴컴한 방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빛. 불꽃. 일순 세상의 윤곽을 낱낱이 고발하는 성질이 그 좁고 어둑한 방을 밝히던 순간. 두 남자는 숨을 멈추고 손안의 핏덩어리를 들여다보았다. 막내 아이의 눈. 횃불을 비추는 그 눈이 찬란한 태양의 빛으로, 타오르는 여름의 광채 안에서 익어가는 탠저린의 껍질처럼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자일스가 입을 열었으니, “아이의 눈이 붉지 않군.” 어리석은 자일스는 불꽃을 눈앞에 두고도 그것이 태양인지 탠저린인지 구분조차 못 하는 까막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두 눈을 가리고 살아갔으므로, 이것은 자일스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리하여 잼 카르스텐은 세상에 투기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신분제의 꼭대기에서 떨어진 아이가 밤새 말을 달리는 사용인의 품에서 울지도 않고 안겨있었다. 잼이 흘러간 곳은 동쪽 항만의 영지 성인데, 그곳에는 자일스의 친인척 일가가 살고 있었다. 상업에 종사하며 본가와 멀리 떨어져 지내는 노부부였다. 원래부터 자일스를 탐탁찮게 여기던 이 둘은 오밤중에 찾아온 이 갓난아이를 몹시 떨떠름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웬 놈이래?” 그러자 사용인이 밤안개로 쫄딱 젖은 외투 안에서 불쑥 망토에 싸인 아이를 내밀었다. 두 부부는 그 망토를 슬쩍 들춰본 후 이렇게 정정했다. “놈이 아니고 년이군 그래.” 아이의 이름은 그 아내가 지어주었다.
이 카르스텐 친인척 노부부에게는 이미 성년을 맞이한 두 딸이 있을 뿐으로, 오밤중에 들이닥친 핏덩이 불청객에게 가족의 정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들 노부부는 직접 두 눈으로 유아기를 맞이한 아이가 만들 젊음의 힘, 젊음에 대한 공포와 갈망을 목격하고 체험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곧 영지성에 젖먹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다시 한 번 세상에 투기되었다. 때마침 영지 성 근처에서 살고 있던 소작농 부부의 아내가 젖이 나왔으므로, 잼이 최종적으로 떨어진 곳은 이 신분제 사회의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작고 냄새나고 후진 소작농의 집이었던 것이다. 카르스텐 노부부는 소작농 집안에 아이의 육아를 전적으로 맡기는 대신 달마다 걷어가는 세금을 반으로 삭감해주는 것으로 최소한의 의무를 다했다. 그리하여 잼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이름. 그 이름과 잃어버린 카르스텐의 성을 상징하는 망토 한 벌뿐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졌으나 살아남았으니, 아이가 앞으로 할 일은 다시 올라가거나 그 하늘을 비웃는 일이었다.

*
소작농 집안은 아이들이 빌어먹게 많았으므로 잼에게 별다른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잼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바라났는데, 본인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니 그것을 안타까워 할 필요는 없다. 제 때 젖만 먹이면 알아서 쑥쑥 컸다. 제일 못 먹었는데도 가장 빨리 컸고, 가장 빨리 배웠고, 가장 빨리 말했다. 마치 그것이 정해진 순리였던 것처럼. 이쯤에는 두 발로 걸을 줄 알아야 하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존재처럼. 실로 그러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하튼 잼은 죽지 않았다. 죽지 않고 살아서 여섯 살이 되었고, 소작농 집안 아이들과 함께 주일마다 교회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주교와 성가대가 있었고, 에온의 석상과 높은 천장이 있었다. 잼은 그 때 처음으로 인간들이 만든 신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에온의 상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자애롭게 웃고 있었는데, 그것은 무척이나 인간을, 인간의 마음을 닮아있었다. 저것이 신의 얼굴이란 말인가? 잼은 반문하였다. 저것이 신의 얼굴이라면 말과 소, 돼지와 토끼, 들쥐와 양들의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인간들의 교리가 지목하는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제외되어 있었다. 에온은 변함없이 자애롭게 웃고 있으나 거리에는 거지들이, 가장 좁은 방 한 칸에는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에온의 석상이 높은 첨탑 아래에서 수백 년의 안전을 보장받고 있을 때, 사람들의 육신은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잼은 생각하였다. 신이란 무엇인가? 잼은 질문하였다. 정녕 신이란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신앙에서 우러나온 의문이 아닌 이단의 의심에 가까웠으니, 잼의 반문을 들은 주교는 설교를 마친 후 그녀를 데려다 독방에 가두어두었다. 일주일 동안 그 좁고 캄캄한 어둠속에 틀어박힌 채, 잼은 철창 바깥으로 펼쳐진 거대한 하늘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태어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가. 神에 대한 의심이 身에 대한 의심으로 나아가던 순간이었다. 신神을 의심하는 일이 자신自身을 의심하는 일과 동일하다는 것을 잼은 그때 깨달았다.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면 신이 아닌 생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삶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쟁취해야만 한다. 그것이 잼의 교리였고, 잼의 삶이었으며, 잼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때 철창 너머로 별이 우수수 떨어졌는데, 독방은 천장이 낮아서 벌떡 일어났다가 머리를 쾅 박게 되었다. 아야야. 정수리를 감싸 쥔 채 입을 벌리고 별똥별을 보았다. 하늘이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축복하기 위하여 별이 쏟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그러나 그것이 자신은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잼은 막 이단이 된 참이었으므로. 신의 존재를 인간인 자신의 앞으로 끌어내린 참이었으므로. 그럼에도 잼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철창 너머로 새어 들어온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흔들어 주었다. 잼은 청금석처럼 깊고, 어두컴컴하지만 결코 어둠으로만 채워지지 않은 천체의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별들을, 그 별들의 소나기를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목격하였고, 마침내는 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는, 결코 떨어질 일이 없어 보이는 불변의 별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황금색이네.” 라고 여섯 살의 잼이 중얼거렸다. 그 날은 한 소년의 탄신일. 이후 이 소년은 시대와 함께 저물어간 인물이라 불리게 된다. 축복이라는 글자를 얇게 살라 영혼의 틈과 틈 속에 잘 개어 넣은 존재, 오랜 시간이 지금도 우리는 과거의 그들 모두가 그러했듯, 그런 자들을 천재라 부른다. 그렇다, 천재의 탄신일이었다.
그 소년이 잼과 만나게 되는 것은 조금 뒤의 일이다.

*
시간이 흘러 잼은 열 살이 되었고, 길거리를 떠돌던 거지를 선택하여 자신의 스승으로 만들었다. 그의 이름은 이곤으로, 패잔병이었는데, 잼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고 일 년 만에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잼은 그를 항만의 가장 높은 언덕에 묻어주었다. 스승이 그녀에게 남긴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창술을 가르칠 때 사용하던 단단하고 긴 나무작대고, 또 하나는 낡아빠진 구두 한 짝이다. 잼은 나무작대를 골랐고, 구두 한 짝은 거리에 마저 버려두었다. 그리하여 스승의 명예는 계승되고 그의 공복과 굴종의 시간은 영영 사람들의 발에 채인 채 잊혀 지게 되었다. 그 뒤로도 종종 언덕에 올라간 잼은 틈만 나면 작대를 들고 놀았는데, 주로 하는 것은 작대를 공중에 던졌다가 정확히 중앙을 노리고 받는 것이었다. 잼은 그것을 아주 잘했는데, 이후에는 눈을 감고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눈을 감고도 긴 작대를 무기처럼 다룰 수 있었다. 잼은 그 때, 전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전사가 되려면 말이 필요하겠지, 라고 먼 바다를 보며 잼은 생각하였다. 그런 후 잼은 공중으로 힘껏 나무작대를 던졌고, 작대는 정확히 직각으로 솟아올라 세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다. 던져진 작대의 너머로 거대한 바다를 가로지르며 선박들이 항구로 속속들이 들어오고, 파도가 밀려오면서 바람을 실어 날랐다. 둥근 수평선을 가로지르면 에흐놀의 동쪽으로 광활한 사막이 펼쳐지는데, 그 위로 낙타들이 천천히 발자국을 남기며 이동하고 있었다. 작대가 최고점의 허공에서 잠시 멈추었을 때, 그 사막의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대양, 태평양의 지각판이 몸을 뒤척였고, 그 바람에 온 바다가 출렁거렸으며,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 물살은 수십 마일을 건너 다시 이베르타로 돌격해올 것인데, 그쯤엔 기세가 죽어 보통의 파도처럼 보이리라. 마침내 작대가 중력의 법칙에 따라 무거운 방향으로 천천히 기울어졌고, 잼은 눈을 감은 채 번쩍 손을 뻗었다. 작대는 정확히 솟아올랐던 각도 그대로 잼의 손을 향하여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작대를 다시 받았을 때, 잼은 열두 살이 되어있었다. 시간은 눈 감았다 뜨면 흐르는 것이다.
유리아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이십대의 청년이 일대에서 가장 거대한 상단을 부린다. 능숙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자신의 앞길에 대한 한 치 불안감 하나 비추지 않는 여유로운 미소를 달고 있다. 열두 살에 잼은 바로 그런 청년의 상단을 쳐들어간 것이다. 트라이즈가 발칵 뒤집혀졌다. 소란을 듣고 나온 유리아가 사병 사이에 가로막힌 소녀를 발견하였다. 소녀는 호기로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루비처럼 투명하고 붉었으니, 카르스텐 일지도. 그러나 소녀가 말하였다. “당신이 트리아즈의 상단주 유리아죠?” 소녀의 얼굴 아래로 태양이 떨어졌는데,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반짝반짝하여 오렌지색처럼 보였다. 혹은 탠저린의 색이라던가. “내게 말 한 필을 주시죠.” 그런 후에 소녀는 웃었다.
유리아는 어리다고 내쫓고 돈이 없다고 귀를 닫아버리는 자가 아니었는데, 그리하여 그는 잼을 만나게 되었고, 잼 역시 유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천막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짧게 독대를 가졌는데, 잼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네가 나라면 너한테 말을 주겠니? 아뇨, 담보가 없다면 문전박대하겠죠, 그건 사기꾼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담보로 걸 게 있거든요. 잼은 스스로를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상해요. 일단 어린애인 절 여기 앉혀 놓으셨다는 것부터 거래의 의지가 있던 게 아닌가요? 난 우리가 이제부터 뭘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유리아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다, 너와 거래를 하지. 하지만 꼬맹아, 담보를 걸기 전에 이름과 신분을 밝히는 게 먼저지 않을까? 상품가치를 판단해야 하거든. 유리아는 마음에 드는 상대에겐 장단을 잘 맞춰주는 청년이었다. 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난 카르스텐 영지의 소작농 집안에서 나고 자란 평민 계집애. 창을 귀신같이 잘 쓴다고 소문이 났으니 나를 모르는 사람이 항만에 있겠어요? 그래서 유리아는 사용인을 불렀다.
“한 번 휘둘러보지 그래?” 유리아가 웃었고, 잼은 사용인이 지고 온 창을 묵직하게 들어올렸다. 창은 거의 그녀의 키만 했다. 잼은 날카롭게 벼린 창의 칼과 섬세하게 새겨진 장식을 들여다보았고, 시험 삼아 공중에 던져보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무거웠으므로, 잼은 유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좋은 창이네요.” 잼은 사용인에게 창을 돌려주곤 천막에 세워두었던 나무 작대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난 이걸로 충분해요.” 그리하여 사용인이 창을, 잼이 작대를 들었다. 승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잼은 유리아와의 거래에서 자신을 증명했다. 유리아는 약속을 지켰다.
그 마구간에는 열여섯 필의 말과 한 마리의 당나귀가 있었다. 잼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귀가 늘어지고 성질이 고약한, 단단하고 다부진 어린 당나귀가 잼의 무엇을 사로잡았는지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이미 그 때부터 잼은 어떤 선택을 해버린 걸지도 몰랐다. 벌판을 달리고 전장을 누비는 말이 아니라, 험준한 산맥과 좁은 시장골목을 걷는 나귀가 잼의 동반자가 되었으니. 당나귀는 말보다 오래 산다. 잼은 앞으로 일생 동안 무엇을 할 것인데, 그것이 결코 전쟁터에서 사람을 베고 죽이는 것만으론 완성될 수가 없는 일이었으므로, 험난한 고난 길을 함께 하려면 그만한 인내를 가진 짐승이 필요하다. 요컨대 유리아는 잼에게 생을 걸어 나아갈 신발 하나를 선물해준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사실 유리아는 앞으로 쭉 그런 존재가 될 참이었다. 잼은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 한 채로 인생에서 주요한 선택의 순간을 몇 차례 지나게 되는데, 그 때마다 유리아가 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쥐어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리아가 첫 번째로 잼에게 준 것은 나귀 “과과”였다.
열세 살의 잼은, 항구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가장 높은 곳에 앉아 바다를, 아무리 나아가도 끝나지 않을 대양을 상상했고, 마침내 생각하였다.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것 같아. 그 업이 뭘까. 잼은 그 언덕에서 작대를 던지며 자꾸만 생각하였다. 내 과업이 뭘까. 작대는 두 바퀴도 세 바퀴도 네 바퀴도 돌아 잼에게 되돌아왔지만, 잼은 자꾸만 던지며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이뤄야만 하는, 일생일대의 그 업이 뭘까.
그 해에는 항구에서 많은 청년들이 죽었다. 시대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몸을 떨고 있었기 때문인데, 별이 떨어지고 천재가 탄생한 것이 그 증명이었다. 이단자들이 늘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젊고 예민한 사람들이 시대의 흐름을 소리 내어 부르짖고 있었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굳건하였다. 그들은 이단자를 묶어 바다로 내보냈다. 구멍 난 쪽배는 언제나 수평선에 닿기도 전에 가라앉았다. 바다의 끝을 증명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한 인간들의 무덤이 그 바다를 채우고 있었고, 그리하여 에온은 여전히 바다 끝에서 도사렸다. 말했지만 인간들의 신이 입을 벌리고 그 많은 젊음과 생명을 빨아먹던 시대. 그러나 질문, 질문들. 그 무수한 질문들 역시 여전하였다. 정녕 신이란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벼락을 맞은 것처럼 잼은 벌떡 언덕에서 일어나 수평선을 마주보았다. 인간들이여, 하늘을 보라. 별이 떨어졌으니 시대가 변할 것이다! 바다에 있는 신을 끌어내릴 때가 왔으니 잼은 눈을 감고 바람을 맞았다. 바람을 맞으며 바다 아래에 매장된 무수한 영혼들을 상상했다. 시대가 전복되는 것을 상상하였다. 세상이 뒤집어지고 바다가 거꾸로 엎어지는 것을. 그 속에서, 물보라와 함께 수십 명의 이단자들이 솟구쳐 오르고 에온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고발되었다. 이단자들이 바다로 떠나 바다로부터 돌아온다. 요컨대 시대의 바람이 바다로부터 돌아오게 될 것이니. 인간이 인간을 보살피고 인간이 인간의 이름으로 인간을 정의할 날이 올 것이라고. 인간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하였다. 잼 역시 인간이었으므로.
그러나 시대의 이상을 담기에 인간의 몸은 무척이나 유한한 것이 아닌가.
잼은 그것에 처음으로 깊은 분노와 허무를 느꼈다.

*
시간은 흐른다. 작대가 높이 치솟아 다시 되돌아온다. 잼이 손을 뻗어 그 작대를 잡는다. 정확히 정중앙이다. 잼은 이제 열여섯 살이 되었다.
당시 항구는 잼의 영역이었다. 패권을 잡고 놈팽이들을 쥐어 패면서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골목에서 삥을 뜯기던 아이들을 구해주거나, 혹은 무시하고 지나가는 삶을 살았다. 당시의 잼은 긴 권태에 빠져있었다. 무엇이든 하고 싶었으나, 무엇도 이룰 수 없다는 막연함에 빠져서 누군가를 쥐어 패거나 구해주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다. 그 때, 잼은 한 소년을 만났다. 소년은 여느 아이들처럼 골목 구석에 몰려 삥을 뜯기던 참이었는데, 잼은 한눈에 그가 귀족출신임을 알아보았다. 첫째로 눈이 붉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눈에 몹시 띄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치렁치렁한 장신구를 매달고 있었는데, 빛을 받을 때마다 황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게 꼭 별 가루를 묻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몰골로 시장을 돌아다니는 것이 퍽이나 띨띨하다고 생각했다. 잼은 소년을 구해주자마자 한 대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얘, 이런 곳에서 그런 복장으로 돌아다니면 어쩌잔 거니?” 후에 잼 역시 알게 되지만, 이 소년이 바로 이베르타의 황금별. 시대와 함께 저물어 가는 천재 오셀로였다.
그러나 열여섯의 잼은 아직 황금별을 만날 때가 아니다. 잼은 아직 자신이 정말 무엇을 하게 될지 몰랐으니, 중세의 모든 사람이 그러했듯, 잼 역시 깨닫지 못 한 자들이 스스로 눈을 가리던 시대를 살아가던 인간으로서 눈앞에 별을 두고도 그것이 별인 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을 불인 줄도 모르고 투기한 자일스나 잼은 맞닿는 부분이 있었다. 혈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접촉”하게 되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로부터 육 년이 흐르는 동안, 잼은 오셀로와 함께 시장을 돌거나 바다를 내려다보며 어떤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여전히 작대를 돌리며 인생의 과업을 고민했으며, 속수무책으로 나이를 먹어갔다. 잼의 삶을 여러 갈래의 시대로 나누자면 바로 이 시기가 잼의 중세였다.
작대가 던져지고 다시 돌아온다. 열일곱 살의 잼이 작대를 붙잡아 땅에 내리꽂는다. 이곳은 항만이 아니라 전쟁터. 잼은 그녀가 계획한 대로 전사가 되었다. 험준하고 척박한 북부의 땅을 돌아다니며 용병을 뛰기 시작했다. 잼이 그곳에서 목격한 것들을 길게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잼은 사람을 베거나 찌르거나 넘어뜨려서 죽였고, 상대 역시 잼을 베거나 찌르거나 넘어뜨려서 죽이려고 들었는데, 어쨌든 잼은 살아남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살아남았다는 것. 그리고 잼은 어떤 여인을 한 명 만나게 되는데, 그것에 관해서도 길게 서술할 것은 없을 것이다. 여인은 뱃속에 혹을 품고 죽었는데, 죽기 직전에 잼에게 고하기를, “나는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남아왔는데, 고작 이런 것으로 죽게 되는구나. 내가 무엇으로 죽는지도 모르고 죽고 있구나, 얘야.” 그래서 잼은 그녀를 위하여, 그녀를 죽게 만든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자 하였다. 이것이 잼이 해부학에 눈을 뜨게 된 계기다.
첫 해부의 순간을 떠올려본다. 천막에는 등불이 다섯 개가 있었는데 잼은 그중 단 하나만을 밝혀놓았다. 천막 한가운데에 긴 나무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시신을 얹었다. 여자는 죽을 때까지만 해도 말랑거리거나 부드러웠는데 다시 만졌을 땐 몹시 딱딱했다. 피부가 누렇게 올라오고 있었는데, 잼은 사람을 죽여본 적은 있어도 죽은 이를 오래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부패의 과정이 막 시작되기 전이었다. 잼은 단도를 불에 지져서 배를 갈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창도 칼도 채찍으로도 죽일 수 없던 여자를 쓰러뜨린 그 무언가를, 잼은 아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새벽의 풀벌레들이 은밀하게 울어댔다.
잼은 그 짓을 그 후로도 수십 번은 더 했다. 남자, 여자, 아이, 노인을 가리지 않고 테이블에 올렸다. 구할 수 있는 시체라면 무엇이든 갈라보았다. 머리가 깨졌다면 두개골을 열어젖히고 잿빛으로 축축하게 젖은 뇌를, 배가 갈라졌다면 비틀린 창자를 들여다보았으며, 팔이 부러지면 튀어나온 뼈를, 웅크리고 있다면 심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하여 잼은 곧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관됨이었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몸을 열어보면 그것을 구성하는 장기와 뼈와 근육이 있었고, 살아있을 적엔 그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며 제자리에서 작동했다. 피가 돌고 살이 움직이며, 모든 부분 하나하나가 제대로 동작하면서 생명을 이루고 생명을 돌리고 생명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경이로운 규칙이자 질서였다.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고 바다로부터 바람과 파도가 밀려들 듯. 겨울이 지나면 양이 새끼를 낳고 아침마다 닭이 우는 것과 동일한 성질이 인간에게도 있었다. 인간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자연 그 자체였다. 잼은 이단자로서 불경不經을 위하여 인간을 해부하기 시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행위가 잼에게 단단한 믿음을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그 무수한 인간들을 거치며 목격한 것은 잘 계획된 하나의 거대한 질서였다. 그것은 곧 자연이자 신. 그 모든 것들 그 자체에 대한 증명이었다. 잼은 신을 욕되기 위해 시작한 일로부터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얻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얻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깨달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평생을, 무엇을 하며 살게 될 것인가… 신神에 대한 의심이 곧 신身에 대한 의심이었던 자에게 찾아온 일대一大의 과업課業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뿐이다. 이스마이어 성에서 느닷없이 편지를 받은 잼의 행보에 관한 서술은 이 글에서 불필요하다.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고, 또 모두에 의하여 각각의 개별적 이야기로 기억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차를 타고 이스마이어 성으로 향하던 스물두 살의 잼은 때마침 하늘 위로 높게 떠오른 별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떴는데, 마침 추워서 마차 안에서도 입김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루아침에 귀족이 된 잼은 망토를 두른 채 누군가를, 자신의 일생일대의 과업을 도와줄 그 누군가를 만날 수 있기를 기다렸다.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릴 어마어마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운명이 마땅히 그런 사람을 제 앞에 데려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자 문득, 자신은 아주 오래 전부터 바로 그 사람을 기다리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후에 다시 하늘을 보니 무수한 별들 틈바구니에서도 결코 떨어지지 않을, 실제로 무수한 별들이 떨어지던 밤하늘에서도 굳건하게 빛나던 황금별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잼은 다시 생각하기를, ‘어찌되었던 나는 무엇이든 이곳에서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잼은 가주쟁탈전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는 그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잼은 이스마이어 성에 당도하고 나서야 자신의 곁에 있었던 이가 바로 이베르타의 황금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격동하는 시대의 움직임을 감지할 만큼 예민하고, 싱그럽게 젊고, 만물을 사랑할 힘을 가진 천재가 잼의 곁에 있었다. 잼은 평생을 기다려 마침내 오셀로를 발견했다. 그리하여 잼의 중세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

*
잼은 평생을, 신身을 사랑하고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랐으나, 실제로 운명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녀의 남은 생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그녀 자신이 스스로 깨닫고 움직여 쟁취한 것들뿐이다. 잼은 그것이 운명이 가져다준 것임을 믿었고, 결국 그것이 잼의 운명이 되었다.
성기사들이 빈손으로-엄밀히 말하자면 빈손은 아니었다, 그들에겐 유리아가 쥐어준 돈이 있었다-수도를 향해 되돌아갈 때, 잼은 언덕을 지나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혁명은 실패했고 노래는 땅으로 떨어졌으나 잼은 여전히 ‘무사하였다.’ 그녀는 나귀를 끌고 언덕을 넘었고, 벌판에 들어섰을 때부터는 그 위에 올라타 몇 마일 정도를 달렸다. 마을을 방문하지 않고 다리 밑에서 잠을 청했고, 아침이 오기 전에 망토를 벗어던지고 머리를 풀어서 다시 땋았다. 서너 일을 그렇게 지냈다. 눈을 붙일 때마다 자신의 오랜 동무를 생각하였다. 홀로 마차에 오를 소년을 생각하였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머리 위로 별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꿈속에선 바다가 뒤집히고 벌거벗은 신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이단자들의 영혼이 뭍으로 되돌아 와 불꽃을 피워 올렸다. 잼은 그 위에서 춤을 추거나 하늘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변하지 않는 별을 가리키며 황금별이라고 말했다. 시대가 몸을 떨면 박수를 치면서 신을 조롱했다. 그러니까, 인간들의 마음을 닮은, 인간들을 위한, 그러나 결국 소수의 인간들을 위한 에온을.
이베르타여! 잼은 꿈속에서 두 팔을 벌렸다. 나는 인간에 불과하나, 내 자신이 인간임을 깨달은 자로서 이 물살이 결코 두렵지 않아. 잡을 수 있다면 잡아보시지. 휩쓸 수 있다면 휩쓸어보시지. 나에겐 이름이 없으니. 너희는 나를 무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에게 이름을 붙여줄 만큼 너희가 치열하게 사고해왔단 말인가?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애석하게도 나는 밤의 끝자락에 멈추어 섰구나. 새 시대의 시작점에 서고 싶었으나 이 시대의 막을 닫는 사람이 되었으니! 꿈속의 잼은 불꽃이 되어서 하늘로 높이 솟구쳤다. 그것은 먼 옛날, 그러니까 그녀가 탄생하기 전에 한 여인이 심어놓은 어떤 울분이자 분노였고, 시대의 흐름 속에서 말살된 무수한 사람들의 목소리였으며, 바다 속에 수장된 이단자들의 염원이었고 이름을 붙이지 못 한 모든 존재의 세상에 대한 고발이었다. 잼은 도주의 밤마다 무시무시하고 어마어마한 분노에 휩싸여 그런 꿈들을 꾸었고, 마침내 모든 것을 태운 채 새벽이면 눈을 떴다. 그러면 무어라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대한 공허가 남았다. 잼은 제 가슴 한켠에 남은 그 공허 속으로 흐르는 바람의 결들을 느끼며 나귀를 끌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잼이 완전히 떠나기 전에 들린 곳이 두 곳 있다. 한 곳은 동쪽의 항만이고, 또 한 곳은 수도에 위치한 세드릭 상인조합 건물이다.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그녀의 벗들과 작별인사를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잼은 유리아와 알랑을 만날 수 있었지만, 오셀로는 끝내 만나지 못 했다. 그녀는 동쪽항만의 그 골목에서, 오셀로와 늘 만나곤 하던 그곳에서 아주 오래도록 그 애를 기다렸다. 그러나 잼이 정말로 오셀로를 만날 것을 기대하고 그곳에 서있던 것은 아니므로, 마침내 노을이 지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것은 황금별이 황금별인 줄도 모르고 거리를 떠돌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잼은 종종 그 골목으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오셀로가 평생 알지 못 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잼의 그 오랜 그리움이었다.

또 보자. 네가 너무나 그리워질 테지, 나의 오랜 동무. 그러나 네 말대로, 우리가 늘 그러했듯,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변하지 않는 별이 떠오르면 그걸 황금별이라 부를게. 별이 쏟아질 때마다 네 생각을 할 거야. 건강해.

그리하여 잼의 아주 긴 여정길이 시작되었다. 북쪽을 향하여 여인은 나아갔다. 척박하고 험준한 산맥과 차갑고 강인한 땅으로. 전쟁과 질병이 웅크리고 있는 먼 이북으로. 그곳에서 잼이 하게 될 일들을 우리는 기록하거나 기술할 수가 없을 것인데, 그것 역시 잼의 운명이다. 별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으나 바람은 그럴 수가 없는 법이다. 무지가 저물어가는 가장 캄캄한 시대였다. 잼이 북쪽으로 향하던 다섯 번째 밤이야말로 과연 그러했다. 그렇게 깜깜한 밤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노래를 불렀다. 눈을 감아도 떠도 캄캄한 시대의 마지막 길이었다. 새벽이 오지 않는 몹시 서늘하고 긴 밤이었다. 잼은 시대를 치며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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