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가 있고 당신이 와요»

“부제목 확인”

*마약성 약물의 오남용, 육체적 폭력에 대한 묘사와 여성혐오적인 비속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기된 모든 사건의 날짜는 답장을 전달 받은 트위터 내 시간을 기준으로 합니다.


0715

나는 총성과 함께 눈을 뜬다.


0703

“새로 얻어걸린 파트너는 어떤 사람이야?”

롭이 의사어로 물었다.

“연구 광인이고 좀 친절한 사람.”

영어로 대답하면서 편지에 튄 소스를 털어냈다. 그제야 롭이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변을 훑으며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앉아있는 일본인들은 고작해야 세 명이었고, 전부 1인용 칸에 몸을 욱여넣은 채 규동을 먹고 있었다.

바보. 이런 좁아터진 요시노야에 바퀴벌레들이 있었으면 내가 진작 알았을 거야. 널 놀리는 거라구. 그러나 롭은 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줘 봐.” 그가 영어로 말하며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나는 한 번은 모른 척한다.

“대단한 편지인가 봐?”

“10억 짜리야.”

“줘 봐.”

나는 롭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롭은 시큰둥하게 반쯤 읽다가 도로 돌려준다.

“연구 광인이고, 상당히 친절한 사람이네.”

“그렇지.”

“잘 됐네. 연구하느라 바빠서 편지도 뜸하겠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테이블 위에 편지를 올려놓았다. 손바닥으로 소스 얼룩을 덮고 심호흡을 하면 나의 힘이 아래로 짓눌리는 게 느껴진다. 믿어. 이것은 깨끗하다. 이럴 땐 내 마법이 꼭 모래시계 같다.

편지가 도착하는 순간을 너무 오랜만에 목격했다. 보통 편지는 이런 식으로 도착하지 않는다. 나는 지나치게 많이 움직이거나 지나치게 많이 잤고, 편지는 언제나 눈을 감거나 돌리고 있을 때 도착했다. 나는 파트너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는 편이 아니었다. 원래 파트너였던 바솔리니와 소나기와도 일주일에 겨우 한두 통씩 주고받았다.

마지막 편지에서 나에 대한 실망을 도무지 감추질 못하던 바솔리니. 네트워크 오류가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끝장이었으리라. 새 파트너와는 얼마나 갈까? 성격이 온유하니까 뭔가 의심스러워도 적당히 넘어가 주지 않으려나? 그런 다음에 깨닫는다. 제대로 믿지 않았다는걸. 황급히 손바닥을 떼어내자 소스로 새빨갛게 물든 처참한 편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기랄.”

“대단한데. 오늘 일은 제대로 할 수 있는 거야?”

롭이 비꼬듯 웃었다.

“숙취 때문에 그래.”

변명은 아니었다. 술에서 막 깰 쯤이 고비니까. 필요 없는 생각들은 언제나 너무 빨리 도착한다. 마법을 추월할 만큼 빠른 생각들은 나도 별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감정은 내 통제 바깥에 있었다.

집게손가락으로 편지를 들어 올렸다가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나는 목소리를 낮춘다.

“잠깐 집으로 가는 문 좀 열어줘. 답장 쓰기 전에 옥토한테 이 사람 누군지 좀 물어봐야겠어.”

“맨입으로?”

“방금 10억짜리 편지 보여줬잖아?”

“이거 계산하면.”

가증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는 롭을 흘기며 나는 한숨을 쉰다. “알겠어.”

“너 돈이 있었어?”

“어제 랩톱 팔았거든.”

“네… 유일한 재산을 팔았어?”

“고장 나서 어쩔 수 없었어.”

“고장이 났다고? 뭐 어떻게 썼길래? 너 어디 불법 다운로드한다고 이상한 사이트 들어가서 바이러스 영상이라도 다운 받았냐?”

나는 영수증을 확인한다. 620엔.

“어쩌다 보니.”

“팔지 말고 들고 오지 그랬어? 내가 어련히 고쳐줄 텐데.”

“음.”


0702

신경질적으로 랩톱을 닫았다가 있는 힘껏 바닥에 집어던졌다. 반으로 쩍 갈라진 랩톱에서 온갖 부품이 탄산처럼 폭발적으로 퉁겨져 올라온다.

“내내 처마시더니 이제 진짜 미쳤어?”

“입 닥쳐, 옥토.”


0703

나는 테이블에서 일어난다.

“620엔이라니. 도쿄는 역시 물가가 너무 비싸.”

“랩톱 팔고 얼마나 받았어?”

롭이 물었다.

기억이 안 난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진열대에 있는 술을 싹쓸이해 왔다. 이젠 그 돈의 절반도 안 남았을 것이다. 진지한 눈으로 대답했다.

“이제 아주아주 부자야.”

난 거짓말을 잘한다.


0704

나는 바닥에 누워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답장을 응시한다.

따듯한 뱅쇼에게. 뱅쇼 이거 몇 도짜리야?”

손에 치인 맥주병 하나가 커튼 아래로 굴러갔다. 난장판인 바닥을 더듬거려서 휴대폰을 찾았다. 검색해 본다.

“이 정도면 술도 아니고 음료수네.”

“넌 보드카라고 지어줬으면 딱인데.”

“입 다물어, 옥토.”

벌떡 일어났다.

“따듯하고 알코올 기운 하나 없는 답장 써야겠네.”

옥토가 우웩, 소리를 낸다.

“이 사람 원탁회일까? 말하는 게 바솔리니보다 지적이야. 학파 활동에 미친 아싸 사이코일 것 같지는 않아. 옥토, 너 진짜 이 사람 누군지 몰라? 학회에 매일 참석하는 패밀리어들 좀 떠올려봐. 신비생물 쪽으로.”

“흥. 수준 낮은 패밀리어들은 따로 기억하지 않아.”

“이런, 아싸 사이코는 너였다는 걸 잊고 있었네.”

옥토가 촉수로 내 손등을 빨아들이고, 그 힘은 내 손등에 새빨갛고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나는 주먹으로 거칠게 옥토를 밀쳐냈다.

“너 내가 등신 천치인 줄 알아? 나유타엔 학회 활동하는 애들이 없을 것 같아? 학회에서 네 평판이 어떤지 전해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 같냐고.”

“오. 그렇게 된 이유가 뭔지 생각 좀 해보지 그래.”

말문이 막혔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종이를 쏘아보며 답장을 쓰기 시작한다.

“쓰레기나 버려 베로니카. 이게 사람 사는 집안 꼴이야? 너 때문에 계속 떠있어야 하잖아. 불편해, 불편해, 너무 불편해.”

옥토가 내 시야를 가리며 흐느적거리지만 꿋꿋하게 없는 취급한다.

뱅쇼라. 좋아요. 음. 이 사람 원탁회냐고 물어볼까?”

“술독 오른 주정뱅이한테 과분한 별명이네.”

“그래. 재미있지?”

“쓰레기 좀 버려. 온 빌라에서 썩은 내가 나.”

나는 고개를 들어서 냄새를 맡아본다.

“안 나.”

“곧 나게 될걸.”

“네가 해. 그게 누구 일인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겨진 캔 하나를 내 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 맥주병 하나를 옥토 쪽으로 집어던졌다. 빗나간 병이 벽에 맞고 산산조각 난다.

“잘하는 짓이다. 이제 윗집 할머니가 내려올 차례군.” 옥토가 빈정거렸다.

천장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나 할멈의 지팡이 소리가 현관으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문이 쾅 닫혔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가 떼어냈다. 희미하게 두통이 있었고 새끼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날백수가 되고 일 년 내내 술만 퍼마셨더니 슬슬 몸이 맛이 가는 게 느껴진다. 자주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걸핏하면 식은땀이 난다. 입에 조금만 기름진 걸 집어넣어도 속이 뒤집어진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안 마시면 상태가 더 나빠졌다. 술없이 버티는 맨정신과 육신을 견딜 수 없었다.

“아…. 토할 것 같아.”

할멈 얼굴에 토하면 어떻게 될까.

토한 다음에 마법으로 기억을 손보면 되지 않을까?

“또 불순한 생각 중이군.”

“입 다물어, 옥토 폴포포.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손떨림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허우적거리며 테이블 위에서 반쯤 남은 맥주를 찾아냈다. 냅다 들이키는 동안 노크 소리가 났다.

“알겠어. 그런데 별명이 왜 애기장대? 뒤통수를 갈겨서 기절시킨 뒤 기억을 지우고 간밤에 보낸 답장을 회수해서 돌아오는 거지. 연구에 반쯤 돌아있는 원탁회 사람이니까 솔직히 나한테 쨉도 안 될 것 같아.”

“오, 그거 정말 기발하고 좋은 방법이다. 빨리 가서 실행하지 그래.”

“두 번째는, 답장으로 어떻게든 수습하는 거지.”

“진심으로, 난 첫 번째가 좋은 것 같아. 제발 빨리 가서 실행해 주라.”

“입 다물어, 옥토.”

쓰레기 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늘 하던 대로 해야겠어. 직장 애기를 좀 섞으면 되지 않을까. 바솔리니도 내가 직장 생활은 잘 하고 있는 줄 알았댔는데.”

“그런다고 걔가 믿겠냐?”

“안 믿을 건 또 뭔데?”

발로 쓰레기를 성의 없이 밀면서 테이블에 앉았다. 그가 보낸 답장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솔직히 말해서 한심한 짓이잖아. 현생 인류와 마법사들은 엄연히 다른 존재인데 아등바등 섞여서 살아가려는 걸 보면. 새 파트너의 성격을 잘 모르겠다. 자조하는 성격 같지는 않다.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할 것 같지는 않다. 이 사람에겐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나를 배려하는 문장이다. 아니, 폭탄을 돌리듯 문제를 저 멀리 치우려는 문장인지도…. 감이 좋은 타입일까, 아니면 그냥 눈치를 보는 멍청이일까.

턱을 괸 채 고개를 기울이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 사람 화가 난 걸까?”


0707

“오자마자 얼굴만 구기지 말고 새로 얻어걸린 파트너 얘기 좀 해봐.”

나는 총신을 문지르면서 블루스의 말을 모른 척한다.

“원탁회래.” 롭이 대신 대답했다.

블루스가 나를 향해 이죽였다. “정말? 안 됐다.”

홍콩은 이탈리아보다 살짝 서늘하지만 공기가 습윤한 탓에 환기가 잘되지 않는 음식점에 앉아있으면 곰팡이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블루스가 밥을 샀지만 반도 못 먹고 남겼다. 난 홍콩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국물은 짜고 면은 하나같이 가늘다. 특히 국수 고기는 죄다 있는 힘껏 소금에 절인 것 같다.

“깐깐한 원탁회 파트너 생각을 했더니 입맛이 다 달아났나 봐?”

“깐깐하진 않아.” 탄창을 열면서 대답했다.

“그럼 머리가 꽃밭인 쪽인가?”

“음.”

공포탄을 집어넣으며 천천히 탄창을 돌렸다. 손안으로 탄피를 굴리다 보니 그가 보내준 씨앗 생각이 났다. 돌아가면 화분을 사야 되는데. 내가 그걸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까.

역시 새 파트너의 성격을 모르겠다. 이 사람은 원래 편지 파트너들한테 이렇게 친절한 편인가?

“머리가 꽃밭이니까 원탁회 같은 걸 하고 있는 거겠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블루스가 낄낄대며 내 쪽으로 실탄을 밀었다.

“왜? 필요 없어.”

“이젠 필요해.”

이유가 궁금하지 않다. 그런데도 결국 묻는다.

“왜?”

“힘이 약해지고 있으니까.”

나는 실탄을 한 번 쏘아본다. 탄창을 닫는다.

“사양할게.”

블루스도 두 번 권하지 않는다.

“그 원탁회 파트너한테 네가 나유타란 거 말했어?” 롭이 물었다.

나는 총신을 문지르듯 그가 편지에 적었던 문장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본다. 그 집단이 떠오르네. 이름이… 아! 그래. 나유타. 그쪽 소속인 걸까? 그가 쓰는 물음표는 갈고리 같고 말 줄임표는 시선처럼 느껴진다. 편지를 읽고 있는 것뿐인데도 그와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는 답장이 너무 빠르다. 우리는 벌써 매일 같이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 탁월한 학자분, 정답이에요. 저는 당신이 짐작하는 그 단체에서 일하고 있어요. 괜히 씨앗을 받았다. 그게 아니었으면 그렇게 순순히 말하지는 않았을 텐데.

“할 거면 제대로 해.” 대답하지 않는 나의 얼굴을 롭이 똑바로 쳐다본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한다. “뭘?”

“이번에도 파트너한테 거짓말을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네 알 바는 아니지.”

“구야사.” 그는 아주 오래된 나의 이름을 부른다.

“넌 네가 거짓말을 아주 잘한다고 생각하지. 뭐, 일부는 사실이긴 해.”

나는 면전 앞에서 창문을 쾅 닫아버리는 것처럼 표정을 감춘다.

롭은 그런 나를 보고 묘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취하면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야 되는데.”

“난 항상 취한 상태야.”

“넌 어쩔 수 없이 솔직한 부분이 있어. 그건 인정해야 해.”

그건 꼭 내가 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힐난하는 것처럼 들린다.

“시비 거는 거야?”

롭은 어깨를 으쓱이곤 담배를 입에 물었다. “10분 뒤에 나갈 거야.”

나는 총을 챙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너네들이 싫다.”

대답 대신 블루스가 중지를 내밀었다.


0708

술이 간절한데 룸서비스도 없고 프런트와 연결된 전화기도 구비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술을 사러 멘션 밖으로 뛰어나갈 수도 없었다. 하루 종일 뛰어다닌 탓에 아직까지 관절이 얼얼하고 근육통이 있었다. 목이 타서 찢어질 것 같다.

옆자리에 누워 있는 롭의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가방에 롭이 챙겨온 대마가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버릇이었는데, 어딜 가든 몇 그램씩은 꼭 챙겨 다녔다.

약을 처음 해본 건 이십 대 초반이었지만 그땐 담배처럼 하는 정도였다. 롭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는 나유타 내에서 사람들의 신분을 세탁해 주다가 본격적으로 ‘꼬리 잡기’로 역할을 바꾼 참이었다. 롭은 이미 그 일을 일 년째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난 그보다 세 살 어렸다. 그는 내 마법에 대해 전해 듣더니 이렇게 충고했다. “넌 남들 생각을 훔쳐보는 것보다도 네 생각을 죽이는 게 중요하겠다.”

그땐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다. 그러다 서서히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서른두 살이고 나는 임무에 나가기 전에 가볍게 음주를 하고 일이 끝난 뒤엔 약을 피우는 버릇이 들었다. 임무 중에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면 믿음이 흔들렸다. 나의 마법은 타인의 세계에 간섭하는 것만큼이나 나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라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튀면 치명적으로 돌변했다. 갈수록 취하지 않고서는 마법을 쓸 수 없었다. 나는 감각적으로 기민하게 곤두설 때만 강력해졌다. 아프지 않다고 믿으면 칼을 맞고도 똑바로 걸을 수 있었다. 애꿎은 허공에다 총을 연발해도 총성만 듣게 한다면 원하는 누구든 내 총에 맞았다고 믿게 만들었다. 죽이지 않고도 죽은 것처럼 만들 수 있었다.

마약을 하는 주제에 중독의 기미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한동안은 정말로 잘 조절했다. 대마 정도는 담배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런 건 언제든 끊을 수 있어.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얇은 종이에 말린 대마를 둘둘 말아서 불을 붙이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한껏 허리를 젖히며 연기를 내뿜자 천장이 녹아내리듯 흐릿해졌다. 서서히 지나치게 선명해졌다. 동공이 활짝 열리면서 천장에 진 희미한 갈색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 만한 실거미가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피가 아래로 내리꽂히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쿵쿵대는 세계 저편에서 편지가 도착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법이 작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마법이 내 앞으로 배달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곤 얼굴을 찡그렸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한 편지가 놓여 있었다.

그가 내게 답장을 보냈구나.

야단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도 모르게 황급히 대를 지져서 껐다가, 내 행동에 깜짝 놀랐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람? 다시 입술에 대를 끼워 넣고는 편지를 읽었다.

한참을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타들어간 대 끝에서 재가 뚝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이 편지 네트워크가 정말 좋아.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인물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 과정에서 당신을 만나기도 했고. 그는 편지 속에서 천진난만하고 나는 우울하다.

당신은 운도 나쁘지. 새 파트너로 하필 나를 만나다니. 나는 세상이 징글징글하다. 살아가는 게 지겨워. 그런데도 그렇지 않은 척을 해. 매번 청소를 했다고 쓰지만 내 빌라는 쓰레기장이다. 직장에 다닌다고 말하지만 작년에 잘렸다. 연구에 도전하겠다고 쓰지만 이미 그쪽으론 흥미를 잃은지 오래되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모든 게 끝날 날을 기다린다.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게 겸연쩍다.

한땐 모든 것에 진실했다. 당신이 몇 년 전에 나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거야. 그러면 당신이 읽는 내가 곧 나였을 테니까. 학회에 나가는 게 즐겁고 활기차게 살아갈 때에는 삶 속에서 생명을 느꼈다. 아마도 그때 나는 그에게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때였다면 그에게 더욱 따뜻하고 솔직할 수 있었으리라.

씨앗은 심지 말아야겠다. 죽일 게 뻔하다. 그에게 돌려주자. 나도 마법을 사랑해. 세상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 그렇기에 현실을 보는 거야. 답장을 쓰는 내내 그가 내게 돌려준 문장을 노려보았다. 연기를 뿜는 숨이 흐느끼듯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나는 용서를 구하듯 내가 쓴 문장을 대마 끝으로 짓누른다. 아무래도 당신을 위해서 쓰자면, 절 그렇게 좋게 봐줄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머리가 꽃밭이니까….” 주술을 외우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대를 지져 껐다.


0709

술 코너 끝에서부터 천천히 카트를 밀며 기계처럼 술병을 잡아다 던져 넣었다. 마음 같아선 보드카로 가득 채우고 싶은데 코로나 이후로 가격이 올랐다. 랩톱을 판 돈은 앳저녁에 바닥난지 오래다. 홍콩 건으로 돈을 받긴 했지만 늘 그렇듯 보수가 짜다.

멍한 표정으로 맥주를 쓸어 담다가 열 살쯤 돼 보이는 꼬맹이랑 눈이 마주쳤다. 어쩐 일로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갑자기 장난기가 돌아서 그 애와 본격적으로 눈싸움을 했다. 히죽 웃으며 카트에 몸을 기대자 아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입술을 씰룩인다. 우리 둘은 잠깐이지만 긴장감이 감도는 특별한 기류를 형성한다. 맞은편 코너에서 소스 라벨을 살펴보던 중년 여자가 아이를 끌어당겨 자기 품에 감출 때까지.

백일몽에서 깨어나듯 눈을 깜빡이자 겁에 질린 여자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 카트 속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내가 금방이라도 아이를 잡아먹을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머쓱하게 시선을 돌리곤 아무 일도 없던 척한다.

머리카락을 넘기면서 카트를 끌어 자리를 벗어났다. 셔츠 주머니 속에서 옥토가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창녀. 머저리. 인간쓰레기.”

나는 대답 대신 묵묵히 카트를 끌고, 옥토는 신이 났다. “방금 일이 정말 안타깝다, 베로니카.”

“입 닥쳐, 옥토.” 하지만 화를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잡화 코너에 시선을 빼앗긴다.

카트를 끌어서 안으로 진입하자 플라스틱으로 된 작달만한 화분부터 품에 가득 들어오는 대형 자기 화분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그러지 않기로 했는데도 나는 벌써 내 화분을 고른다. 두 손으로 있는 힘껏 감싸도 조금 공간이 남는 청화백자를 들어 올렸다. 공포탄보다도 작고 단단하고 매끄러운 씨앗이 떠올랐다. 4m나 키우려면 얼마나 되는 공간이 필요할까. 나는 뭔가를 키워본 적이 없었다. 반면에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키워보았을 텐데 말이다.

“키우게?” 어느새 말이 없어진 옥토가 넌지시 물어왔다.

나는 화분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다.

“아니.”


0709

계산대에서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돈이 부족하시네요.” 직원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뭘 빼실지 결정하셔야겠어요.”

“음.”

당황해서 내 뒤로 선 줄을 돌아보다가 계산대 화면을 들여다보다가를 반복했다.

보다 못한 직원이 나를 도와준다.

“화분을 빼실래요?”

“그게 얼만데요?”

“4.52 유로.”

“음.”

나는 헛기침을 한다. “네, 빼주세요.”

직원이 화분을 꺼내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뇨, 아뇨… 잠시만요.”

허둥대며 맥주 두 캔을 꺼내서 내밀었다.

“그냥 이걸로 빼주세요….”

잠시 후 두 개를 더 꺼냈다. “음, 이것까지.”

직원은 잠시 나를 쳐다본다. 곧이어 다시 화분을 찍는다.

“40.08 유로입니다.”

계산하는 동안 나는 가판대 밑에서 브로슈어 하나를 슬쩍한다.


0709

나는 대체 뭘 하는 걸까.

멍하니 영수증에 낙서를 그리고 또 그린다.

…….

“아.”

“젠장.”


0709

초조하게 왔다갔다 하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벌써 두 번째야. 설마 영수증을 보진 않겠지?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잖아.”

옥토 폴포포는 테이블 위에서 뒹굴거리며 내가 펼쳐 둔 브로슈어를 성의없이 들여다본다. 옥토의 가장 큰 촉수가 에베레스트 산 위에 얹어져 있다.

“넌 이제 폼도 하나 제대로 못 잡는군. 뇌가 알코올에 절여진 탓이야.”

“잠을 너무 자서 그래. 머리가 좀 멍했었어.”

“아니. 넌 원래 그랬어. 사소한 것에 집착하다가 중요한 걸 꼭 하나씩 잊어버려. 여태껏 내가 도와줘서 망정이지, 나 아니었으면 넌 학회 준비 한 번 할 때마다 엉엉 울었을걸.”

“아, 그래? 그 학회에 발표할 연구는 누가 하는지 잊었나 봐?”

“스물세 살 여름 학회 기억 안나? 네가 유인물 세 번째 단락을 통째로 빠뜨려서 내가 즉석으로 대처했었지.”

“…….”

허공을 쏘아보았더니 옥토가 비웃는다.

“인정해. 원래부터 넌 덜렁거렸어. 네 생활 마법도 좀 엉성해.”

“허. 그 마법 덕에 만들어진 게 누구라고 생각해?”

“시치미 떼는 모습은 언제 봐도 정말 놀랍다니까. 최근에도 분명 이런 일 있었는데 말야.”

“내가 언제?”

“잘 생각해 봐.”


0702

“아.”

“보내졌네….”


0709

나는 눈을 굴리다 새침하게 대꾸한다.

“그런 적 없어.”

“정말 갈수록 뻔뻔하군. 네 ‘사과나무’님도 빨리 ‘뱅쇼’가 사기꾼이란 걸 알았음 좋겠다.”

“안타깝게도 그분께선 연구하느라 바빠서 그런 쪽으론 영 눈치가 둔하거든.”

“그냥 모른 척해 준단 생각은 안 해봤어?”

허리를 젖혀 천장을 쳐다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음. 전혀.”


0710

나는 번역기를 돌리다 말고 휴대폰을 떨어뜨린다.

“변태….”

벌떡 일어나서 논문을 향해 소리쳤다.

“이 변태 한국인!”


0711

그와 거의 매일 편지한다. 때때로 쪽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편지를 배구공처럼 던지고 그가 보내는 쪽지는 배드민턴 공처럼 빠르다.

갈수록 활기차게 답장을 쓰는 게 힘겨워진다. 그래선 안 되는데 자꾸만 시비를 걸고 싶다. 그가 하는 모든 생각과 의견에 반기를 들지 않고는 못배기겠다. 그야 당연하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니까. 그는 세계를 사랑하고 나는 세계를 증오한다. 그는 살아가는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난 내 삶 하나 유지하는 것조차 귀찮다. 온실 속에서 자란 사과나무 같으니라고. 분명 마법사 부모 밑에서 별 고민도 없이 쑥쑥 자랐겠지. 남의 악의 같은 것도 모르고. 남한테 악의를 가질 줄도 모르고. 사람을 쉽게 믿고 쉽게 좋아하겠지. 그런 삶이란… 그런 삶이란.

테이블에 놓인 그의 편지 위로 엎드려 눈을 감는다.

당신은 윗집 할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슬퍼하는 사람이겠지? 당신은 술도 한 모금 안 마시고 내내 맨정신이잖아.

학교 다닐 땐 어땠어? 난 친구를 사귀는 게 참 힘들더라. 사람들이 내게서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 하지만 전부 상관없었는데… 왜냐하면 난 마법사니까. 당신은 마법사면서 인간으로서도 잘 해나가니까 그런 거 모를까? 당신은 내내 친구가 많았을까? 세상이 끝나는 게 무서워. 인간으로서의 나는 해낸 것도 해나갈 것도 없는데 그에 비해 마법사인 나는 가진 것도 해낸 것도 너무 많거든. 그 낙차를 견딜 수 있을까?

아. 정말로 우울하다.

“옥토, 나 약국 다녀올게… 튜브형 정도면 편지에 같이 보낼 수 있겠지….”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0712

요란한 음악 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동안 기분이 점점 고조된다. 내 왼손엔 맥주병이 들려 있고 내 오른손엔 대마가 들려있다. 신경안정제를 세 알씩 집어먹고 맥주를 거꾸로 뒤집어 목구멍에 쏟어부었다. 그의 편지를 읽고 또 읽는다.

“아아, 우울한 얘기를 하네. 이 사람이 우울한 얘기를 하네. 당신도 우울한 얘기를 다 하는군요….”

“베로니카. 음악 좀 줄여, 좀!”

“아아아, 옥토 폴포포. 애기장대가 어릴 때 고양이를 죽일 뻔했대. 충격이 컸을 거야, 그렇지. 우울했을까? 슬펐을까? 우울해? 슬퍼? 화났어? 내가 비꼬아서? 결국 알아차린 걸까? 아니아니, 그저 내가 당신에게서 공통점을 찾고 싶은 걸까?”

옥토가 테이블에 놓인 신경안정제 통을 뒤적이다 바닥으로 집어던진다.

“제기랄, 베로니카. 또 한 움큼씩 처먹었구나.”

“기분이 너무 좋단 말이야. 매일 당신 편지가 오는 게 좋아요. 당신도 제 편지를 기다리시지요. 당신이 제 편지를 기다리시는 걸 안답니다.”

노래하듯 흥얼거리면서 빈 맥주병을 들이키다가, 얼굴을 찌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정신이 고장 난 전등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주저앉아 웅크렸다.

당신이 산 술 리스트는 가지고 있으니 맛있으면 말해줘.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니면 바보인 걸까? 확실한 건 그가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부드럽게 휘는 사람이라는 거다. 꼭 사과를 매달고 있는 말랑말랑한 가지처럼. 당신은 나랑 싸우기 싫어해. 그렇지? 쾅쾅대는 소리가 들린다. 쾅쾅 두들기는 소리가 아득한 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베로니카.”

당신은 그냥 나랑 싸우기 싫은 거야. 그렇지?

“베로니카!”

나도 당신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 당신이 밉지 않아.

“베로니카!!”

번쩍 고개를 들자 옥토의 촉수가 날카롭게 내 뺨을 때리고 지나간다.

“거지 같은 계집애! 창녀! 쓰레기! 요물! 개새끼! 밖에 사람이 왔는데 내 말을 무시해. 넌 항상 내 말을 무시해!”

“아아. 소리 좀 지르지 마, 옥토…. 귀가 울린단 말이야….”

“밖에 누가 왔단 말이야. 다 네 탓이야. 음악 좀 줄이라고 했는데. 이럴 줄 알고 음악 좀 줄이라고 했는데 넌 내 말을 항상 무시해. 넌 날 항상 무시한다고!”

“토할 것 같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쓰레기를 겅중겅중 넘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옆집 여자는 나를 거의 죽일 듯한 표정이다. “미쳤어요? 어제 밤새 근무하고 돌아왔다고요.”

나는 문을 쾅 닫고 다시 거실로 돌아온다. 쿵쿵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볼륨을 높이면서 맥주캔을 하나 땄다. 음악에 저항하듯 큰소리로 중얼거려 보았다. “불행한 척하는 걸 그만두자.”

우리의 환경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자기 연민을 벗어나자. 나는 특별히 고통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려 깊은 사람이고 나는 그보다 조금 약할 뿐이다. 그게 잘못인가? 우리가 다른 게 그의 잘못인가? 그럴 리가.

그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 왜나하면…. 왜냐하면 그는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

“사과하자. 사과하자…. 솔직하게 말하자. 미안하다고. 씨앗 죽여버렸다고….”

아니, 역시 미워.


0709

왜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걸까.


0713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맥주를 들이켜며 쪽지를 내려다본다. 오늘도 집 들어가면 술 마시는 거야? 시선을 고정시키고 문장을 노려보는 동안 병과 입술 틈으로 술이 줄줄 새는 게 느껴진다.


0714

“좋아. 이제부터 똑바로 하자.”

천장을 노려보며 허공에다 글자를 썼다.

“이름을 확실히 정해두자고. 안 그러면 쓸 때 헷갈릴 거야. 저번에 상사 이름을 뭐라고 소개했었더라? 로렌초? 마리오? 아마 전자였던 것 같아. 전자가 맞을 거야. 빌라 경비원 이름이 그거거든.”

“베로니카, 솔직히 말해서, 그래봤자 곧 알아차릴걸.”

나는 옥토의 말을 무시한다.

“흠. 내 뒷담 까던 걔 이름은 뭐였더라?”

“기억 안 나.”

“그럼 옆집 여자 이름으로 하자.”

“애기장대가 바보도 아니고. 솔직히 가망 없어. 너한테 뭔가 문제가 있단 것 정도는 그 사람도 알고 있어.”

나는 결국 성질을 못 이겨 벌떡 일어난다.

“너 날 도와줄 생각이 있긴 한 거야?”

옥포 폴포포는 촉수를 허공으로 들어 올리며 으쓱 포즈를 취한다.

“아아 됐어. 무능한 패밀리어 같으니.”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까 그놈의 허술한 거짓말 말고 시드 벙커인지 거기 가서 애기장대 뒤통수 후리고 답장 훔쳐 오면 안 되는 거야?”

“음. 안 돼.” 나는 시선을 흘긴다.

“이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단 말이야….”

“내 말이 그거야.”

옥토가 툴툴댄다.

“그러니까 거짓말을 그만하라고….”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0715

죽상으로 의자에 반쯤 웅크려 있었더니 블루스가 혀를 찼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적당히 취한 거지. 안 그럼 집중이 안 되거든.”

“퍽이나.”

맥주 캔을 하나 까고 있으니 코스모가 히죽대며 물었다.

“당신 새 파트너 원탁회라며?”

맥주를 들이켜자 몸에 활기가 도는 것 같다. 갑작스럽게 정신이 번쩍 든다. 입맛을 다시며 얼굴을 찌푸렸다.

“너희는 할 일 없어? 왜 이렇게 내 파트너한테 관심이 많아?”

“넌 네 파트너에 대해 거의 말을 안 하잖아. 우린 때마침 심심하고.”

블루스가 코스모를 향해 덧붙였다. “참, 머리가 완전 꽃밭이래.”

“오. 어린 마법사인가 보네. 그렇지?” 코스모가 키득대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십자말풀이를 꺼내들었다. 코스모가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원탁회 놈들은 두 종류야. 나이가 너무 들어서 다 잊어버리고 포기한 놈들이랑, 고리타분한 원칙주의자들.”

말은 저렇게 해도 우리 모두 원탁회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안다.

“편지 쓸 때 조심해. 뒤에서 신고하고 당신을 연행해갈 수도 있잖아.” 코스모가 눈을 빛낸다.

가로 11번. 식물형 신비생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국제 종자 은행 내부의 마법사 집단. 나는 안경을 그려 넣는다. “그럴 사람은 아니야.”

놀란 블루스와 코스모가 동시에 나를 쳐다본다. 모른 척 십자말풀이를 풀며 시선을 피했다. 나 역시 그를 두둔한 나 자신에게 혼란을 느낀다. 블루스와 코스모가 눈을 마주치고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종말이 다가오긴 하나 봐. 그렇지?”

두 사람을 무시하며 휴대폰을 확인한다. 롭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십자말풀이를 가방 안에 쑤셔 박고 일어났다.

“20분 뒤 몽생미셸이야.”

“이번엔 챙겨.”

블루스가 내 손에 실탄을 쥐여주고, 나는 그를 노려보다가 결국 그것을 챙겨 넣는다.

“진짜 너네들이 싫다.”

나는 거짓말을 잘한다.


0712

십 대 시절 나는 학회를 나가는 건 옥포 폴포포인데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머리를 단장하고 서류 가방을 챙겼다. 멀리 떠날 사람처럼 구는 게 좋았다.

학교엔 전부 바보들뿐이다. 현생 인류가 치르는 시험은 지나치게 쉽거나 지나치게 쓸모없다. 좋아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 하지만 괜찮았다. 마법사로서 잘 해내면 그만이었으니까. 너희 같은 거 다 필요 없어. 나는 내 마법을 사랑해. 마법사가 되기로 한 건 오로지 내 선택이었어. 그리고 나는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0629

너 요즘 이상해.

대체 뭐하고 사는 거야?


0715

성당의 첨탑 너머로 총성이 울렸다. 관광객 틈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블루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곁을 스쳐가는 여자가 그의 옆구리를 쓰다듬듯 손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총을 꺼내드는 순간 너무 늦었다는 걸 직감했다.

누군가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0704

<인식하는 것이 곧 세계>


0713

결국 모든 게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빠를 잃고 죽을 만큼 외로웠지만 결국은 괜찮아졌다. 동료를 잃을 때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슬픔이 닥쳐왔지만 결국은 무감해졌다. 영원히 잘해줄 자신이 있던 사람이 이젠 꼴도 보기 싫다. 좋아하는 게 싫어진다. 싫어하는 게 좋아진다. 인간이 미웠지만 결국은 사랑하게 되었다. 세상을 증오하지만 계속 기대한다. 죽고 싶다고 하면서 결국은 살려고 아등바등한다. 변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원히 증오할 수만 있다면 용서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영원히 분노할 수 있다면 순결하게 추모할 수 있을 텐데. 영원히 마법사라면 내 다른 인생을 책임지지 않아도 될 텐데.


0701

뭐 어쩌란 건가요? 아니에요. 전 잘 지내고 있어요.


0707

“넌 어쩔 수 없이 솔직한 부분이 있어. 그건 인정해야 해.”


0712

그거 알아? 난 당신의 술 버릇이 꽤 마음에 들어.


0701

퍼마시고, 퍼마시고, 퍼마셨다. 마시는 일은 지루하지만 결코 지치지도 않는다.

그러면… 마시는 건 사실 즐거운 일인가?


0715

바닥에 무릎을 접고 쓰러지는 순간 이명이 왔다. 흐느끼듯 숨을 몰아쉬었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옆구리를 움켜쥔 블루스가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 소리쳐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다음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0710

왜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걸까.


0715

아득한 정신 속에서 더듬어본다. 이거 주마등인가?

이번에야말로 내 차례인가?


0711

온실 속에서 자란 사과나무 같으니라고.

당신이 미워.


0703

난 거짓말을 잘한다.


0715

촉감부터 돌아온다. 차가운 바닥. 뒤통수에 고인 피. 건조하고 미적지근한 공기.

그다음에 소리다. 뜀박질. 비명. 작은 속삭임들.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다. 누군가 나를 소리쳐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나.”

살아 돌아가면…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술도 끊고 약도 하지 말아야지.

“일어나, 얼른!”

당신한테 거짓말도 그만해야겠다.

“일어나, 뱅 샷!”

그런데, 그런데…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0715

“일어나, 뱅 샷!”


0715

어디선가 총성이 울린다.


0703

“새로 얻어걸린 파트너는 어떤 사람이야?”


0712

좋은 사람.


0714

어차피 다 잃어버리는데.

왜 자꾸 소중한 게 늘어나는 걸까….


0712

나는 원래부터

자존심이 아주 아주 강한 사람이야.

얕보일 바에야 죽는 게 나아.

내가 변했다는 거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 금방 일어날 수 있단 말이야. 언제든 다시 바꿀 수 있어. 약도 끊고 잘할게. 술도 그만 마실게. 조금만 기다려봐. 조금만 기다려봐. 조금만 기다려봐. 거의 다 왔으니까….


0715

나는 총을 움켜쥐고 일어난다.

내 손엔 실탄이 들려있고 내 귀는 누구보다 밝다.

나는 마법사고 당신들을 찾아낼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마법사고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다.

허공을 향해 총을 쏘면 내 소리가 당신들을 찾아낼 거야.

어디를 향해 쏘던 당신들은 내 손아귀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0715

“뱅 샷!”


0715

이 총성은 나의 것.

복사되었습니다!
BAN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