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거리»
P가 박상선을 처음 본 건 2018년 컵스카우트 하계 캠프에서였다. 상선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캠핑도구를 꺼내고 있었다. 당시 박상선은 어정쩡한 길이의 중단발이었고 앞머리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혼자 잔디밭에 앉아 느긋하게 코펠을 꺼내고 뚜껑을 닦는 박상선은 또래아이들에 비해 답답하고 일머리가 없어보였다.
‘쟨 다른 애들이 조 짤 때 안 데려가려고 하겠다.’
P가 텐트 지지대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을 무렵, 박상선은 코펠을 전부 닦아서 한 데 쌓아놓곤 설렁설렁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몇 분 뒤엔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해먹을 묶고 있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무리가 만들어졌다. 얼마 뒤 상선은 아이들과 함께 돌아오더니 아직까지 텐트 설치에 매달려 있는 P를 발견하곤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그 시선을 눈치 챈 여자아이들이 저들끼리 뭐라고 쑥덕거리면서 팔을 걷어붙이고 다가왔다.
“야, 우리가 도와줄게.”
“그… 럴래?”
P는 얼떨떨하게 봉에서 떨어졌다. 잠시 후 P는 텐트를 에워싼 초면의 여자아이들이 오렌지색 방수 천을 사방으로 잡아당기며 모양을 만들고, 말뚝을 박고, 지지대를 세우는 것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지켜보게 되었다. 박상선은 유심히 카탈로그를 읽으면서 이것저것 훈수를 두며 텐트의 상태를 점검했다. 은연중에 상선을 얕잡아보고 있던 P는 여자아이들이 큰 반발심을 드러내지 않고 상선의 지시를 따르면서 친근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모든 일이 끝난 뒤에 P가 말했다.
“저기, 고마워.”
“뭐가?”
“애들한테 나 도와주자고 한 거….”
상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냥 애들이 너 발견하고 도와주자고 해서 따라온 건데?”
“어… 그래?”
‘사람 되게 민망하게 하네….’
상선은 흠, 소리를 내면서 P를 쳐다보았다.
“너도 6학년이지?”
“으응.”
“오, 그럼 우리 같은 조겠네. 6학년은 네 명밖에 안 와서 다 같이 자기로 했거든.”
그 날 저녁 다른 조원들이 코펠을 씻고 뚜껑을 닦고 있을 때, 상선의 조는 밥을 앉혀놓고 가장 먼저 카레를 끓여 배불리 먹고 잠들었다.

몇 달 뒤 P는 가을 단체 봉사활동 캠프에서 박상선을 다시 만났다. 파란색 스카우트 유니폼을 입은 상선은 조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P에게 먼저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왔다. 앞머리를 막 기르기 시작한 상선은 어정쩡하게 가르마를 타고 있었다.
“오, P. 너도 왔네.”
“난 너 스카우트 관둔 줄 알았어.”
“왜?”
“지역교류 캠프 땐 안 왔잖아.”
“흠.” 상선은 느긋하게 하품을 하더니 기지개를 켰다.
“중학교 올라가면 관두긴 해야지. 우리 엄마도 그냥 한 번쯤 해보라고 넣어준 거거덩.”
P는 녹색 치마를 입고 쓰레받기를 든 채 돌아다니는 여자아이들을 구경하며 말했다.
“걸스카우트에 들어갈걸 그랬어. 이렇게 섞여있으니까 우리 꺼보다 단복이 훨씬 예뻐 보이지 않냐?”
“걸카는 치마가 너무 좁잖아. 좀 불편할 것 같지 않아?”
P는 발끈했다.
“그게 섹시한 거라구.”
“엑, 섹시….”
상선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런 것도 같다”며 인정했다.
“아무튼 나 간다. 레크리에이션 준비 도와주기로 했거든.”
“누구?”
“어….” 상선은 눈을 굴려 무대 위를 바쁘게 오가는 아이들 중 몇몇을 지목했다. “쟤랑… 쟤?”
“아는 사이 아니야?”
상선은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몇 분 뒤 무대를 오르내리며 아이들과 함께 의자를 나르던 상선은 P가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강당 구석으로 이동해서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선배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지나가던 걸스카우트 아이들이 상선에게 아는 체를 하자, 상선은 작게 손을 흔드는 것으로 화답했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되었을 무렵 상선은 또다시 바람같이 사라졌다가, 무대 위에서 난처한 표정으로 백댄서를 하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상선은 식은땀을 흘리며 P에게 돌아와선 “하, 정말 죽고 싶었다”고 했다.
그 날 레크리에이션에선 스타가 탄생했다.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들이 결성한 아마추어 밴드가 엄청난 환호성을 받으며 무대를 내려왔다. 특히 메인보컬로 섰던 태호는 벌써 2차 성징이 시작되어 또래들보다 훨씬 키도 크고 목소리도 허스키했는데, 수건을 두른 태호가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향해 손 흔들자 모든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얼굴이 빨개질 수밖에 없었다. P는 상선을 부추겼다.
“야, 가서 말 좀 걸어봐.”
박상선은 마지못해 움직이는가 싶더니 기죽은 똥개처럼 태호 곁을 소심하게 맴돌다 돌아왔다. 그러더니 단복이며 앞머리가 신경 쓰여서 도무지 안 되겠다고 했다.
“걸카에 들었어야했는데….”
상선은 심각하게 말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며 다시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재고 떠보는 새 학기에도 상선은 여전히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기를 써가며 서로 뭉쳐있는 여자아이들과 대조적으로 주변을 살피며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는 상선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같은 학원 친구들과 뭉쳐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고 있던 P는 하계 캠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상선을 제 무리에 끼워주기로 마음먹었다.
“야. 너 우리랑 밥 먹을래?”
상선은 화들짝 놀랐다가 P를 알아보았다. 옆으로 넘기기에도 너무 자라버린 앞머리를 삔으로 고정시켜놓은 상선은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헐….”
“아, 먹을 거야 말 거야 빨리 말해.”
“완전 좋지.”
박상선은 금방 무리에 녹아들었다. 이제보니 상선은 제법 웃긴 애였다. 억지로 웃기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생활 자체에 골 때리는 지점이 있었다.
“너 왜 대답을 그렇게 해?”
“아, 진심 얘 말하는 꼬라지 봐….”
급식을 먹고 돌아오는 동안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며 창문 닦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자지러졌다. P는 찐따 같은 박상선이 어째서 그렇게 발이 넓은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았다. 특히 P의 단짝친구인 K는 박상선이 몹시 마음에 든 눈치였다.
얼마 뒤 P는 복잡한 심경이 됐다. K가 P 대신 박상선을 찾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상선을 K의 짝꿍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K가 보이지 않으면 아이들은 가장 먼저 상선에게 물어보러 갔고, 상선이 없을 때만 P에게 물어보았다. 주말에 아이들을 끌고 외출하고 싶을 때면 K는 상선의 스케줄부터 확인했다.
“아, 맞다. 쌍선아, 우리 토요일에 프라자 가서 영화 볼래?”
“헐, 난 좋지. 애들 다 데리고 가자.”
“좋아. 니네 갈 거지?”
극장을 나오면서 K는 상선에게 팔을 두르며 매달렸다.
“재밌었다, 그치?”
그러면 상선은 언제나 장난스러우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K를 떼어냈다.
“야, 무거워.”
P는 K가 비굴해보이기까지 하는 부드러운 말투로 누군가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여자아이가 될 수 있단 것에 내심 놀랐다. 그리고 예쁜 여자아이가 또래들 틈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낮추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애정이 얼마나 값진 동시에 날카로운 위험을 감추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박상선이 안타까우면서도 미웠다.
어느 날 박상선은 4교시 내내 돌아오지 않더니 급식시간에 단복을 입고 나타났다. 그때서야 P는 상선이 여전히 컵스카우트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교실 문에 반쯤 몸을 내민 상선은 두리번거리며 아이들을 찾더니 P를 발견하곤 다급하게 말했다.
“나 바로 나가봐야하는데 애들한테 나 오늘 급식 같이 못 먹는다고 말해줄래?”
“어디 가는데?”
“외부활동. 하계 행사 준비한대.”
P는 상선을 빤히 바라봤다. 상선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남청색 띠에 프로그램을 마칠 때마다 하나씩 받는 자수 배지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중학교 올라가면 관둘 거라더니….’
“K 방금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울다가 화장실 갔어. 애들 다 화장실에 있어.”
박상선은 P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헐, 그래?”하고 대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말 좀 전해줘.”
“쌍 후배~ 가자~”
“앗, 네!”
P는 중앙계단에서 기다리고 있는 태호 선배 무리를 향해 달려가는 상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음날 박상선이 학교에 돌아왔을 때 아이들 분위기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아이들은 철옹성처럼 K를 둘러싼 채 추궁하는 눈빛을 던져댔고, K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P는 K가 박상선에 대한 애정을 헌신짝처럼 바닥에 내팽겨 치고 그 속에서 날카로운 비수를 꺼내드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여태까지 상선에게 비굴했으니 그 비굴함을 보답 받지 못한 만큼 상선을 찔러 죽일 작정인 듯싶었다.
‘내가 말한 거 아니다? 네가 남자 선배들하고 학교 나가는 걸 다른 애가 본 것뿐이라고….’
그 날부로 P와 친구들은 상선과 함께 급식을 먹지 않았다. 상선은 어쩔 줄 모르며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이내 체념한 것처럼 한동안 혼자 밥을 먹는가 싶더니, 곧 다른 무리의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복도를 걷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상선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가 아이들 틈에 섞여 사라졌다.

K는 학원 고등학교 예비수학 반에서 상선을 다시 만났다. 중학교 3학년 때였고,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스카우트 활동을 하고 있냐고 묻자, 상선은 우물쭈물하더니 그렇다고 했다.
“너 태호 선배 때문에 계속하는 거지?”
“으응….”
“태호 선배도 징하다. 보통 그 나이쯤엔 다 관두고 공부하지 않냐?”
“아냐, 우리 단원 중에 고등학생도 많아. 대학생도 있어….”
“그래서 너도 대학생 때까지 계속 하겠다고?”
상선은 헉, 소리를 냈다.
“그러게. 태호 선배가 대학생 때까지 스카우트 활동하면 어떡하지?!”
P는 관두자고 중얼거렸다.
“고백은 했어?”
상선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아니….”
“번호는 교환했지?”
“엥, 당연하지. 가끔 카톡도 해!”
두 사람은 몇 달 동안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했다. 상선은 수학을 잘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이과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국어와 영어는 질색이라고 했다. 예비수학 반 마지막 날, P는 상선과 꼬치를 사먹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야, 미안해.”
“뭐가?”
“그 때….”
“언제?” 상선은 한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
“아, 그때.”
상선은 양념꼬치 위에 머스타드를 뿌리며 말했다.
“그때 좀 상처긴 했지. 근데 내가 애들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게 있더라구. 지금은 이해해. 어쩔 수 없지.”
“여자애들 비위 맞추기 너무 힘들지 않냐.”
“개힘들어!”
두 사람은 그것으로 화해했고 다신 만날 일 없는 사람처럼 웃고 떠들다가 헤어졌다.

그 뒤에도 P는 종종 인스타로 박상선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베이스를 멘 상선을 누군가 찍어준 구도의 사진, 아이들과 노래방에서 브이를 그리는 셀카, 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태호 선배 곁에서 웃고 있는 단체사진… 가끔 모르는 대학생들이 상선에게 댓글을 남기기도 했는데(‘ㅂㅅㅇ ㄷㅅ?’ ‘박상아 동생?’), 박상선의 언니가 무척 예뻤기 때문으로, 본인은 이런 댓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ㅋㅋㅋㅋ네 맞아여’ / ‘흠. 별로 안 닮았네요;’ / ‘ㅋㅋㅋㅋㅋ’ / 그 뒤로 댓글은 달리지 않았다…). 중간에 남자친구도 사귀었던 것 같은데, 태호 선배가 축하한다고 남긴 댓글에 박상선이 아무 말 없이 ‘ㅋ’를 정확히 다섯 번 쳤다는 걸 P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봄방학에 박상선을 다시 만났다. 거의 2년 만이었다. P가 이 만남을 기억하는 건 너무 오랜만에 그녀를 다시 보는 것이기도 했고, 박상선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길거리에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밤늦은 시간이었으므로 P는 눈앞의 여자아이가 나쁜 일을 당한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냐고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P는 박상선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야, 야 일어나 봐. 쌍, 쌍. 너 왜 그래. 혹시 맞았어…?”
상선은 후들거리며 일어나더니 P를 붙잡고 늘어졌다.
“나, 나 지금 살아있는 거 맞지?”
“야, 너 무릎에 멍… 너 진짜 누구한테 맞았어?”
상선은 팔뚝과 무릎에 멍과 까진 상처를 달고 있었고, 입술엔 붕 뜬 색깔의 립스틱이 번져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식은땀이 흘러서 이마가 온통 축축했다. 심지어는 P의 얼굴을 한참 뒤에야 알아보았다. 상선은 뭐에 홀린 표정으로 아스팔트를 구르는 립스틱을 줍더니 흠칫, 하고 놀라선 코를 훌쩍거렸다. “언니 립스틱 몰래 써서 벌 받았나 봐.” 상선이 웅얼거렸지만 P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P는 우선 박상선을 근처 24시간 커피빈에 데리고 가서 자초지종을 들을 생각이었지만, 상선은 너무 충격이 컸던 탓인지 헛소리만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아까 버려진 도시를 봤단 말이야. 그, 왜 아포칼립스 영화 같은데서 나오는 거 있잖아. 담쟁이덩굴들 막 기둥 타고 올라가고 창문 다 깨져있고….”
“알겠으니까 일단 여기서 기다려. 이 시간에 약국 연 데 있나?”
“진짜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갔었다니까!”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주변에서 진짜 화이트홀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하려고?”
P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으로 재난문자가 왔는지 확인한 후, 상선에게 진동 벨을 넘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나오면 받아. 어디 나가지 말고 있어. 생각 정리되면 바로 말해. 이거 경찰에 신고해야 돼.”
P가 바깥으로 나왔을 때 시간은 거의 10시에 가까웠다. 당연하지만 가까운 약국은 모조리 문을 닫은 상태였다. P가 커피빈으로 돌아왔을 때, 상선은 자리에 없고 진동벨만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카카오톡을 보냈지만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P는 2주 뒤에 상선을 다시 만났다. 박상선은 부모님과 함께 프라자에서 옷을 고르고 있었는데, 등이 파인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사건 당시 보랏빛이었던 무릎의 멍은 누렇게 뜬 모양새로 아직 남아있었고, P는 그날의 일이 과연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궁금했다. 상선은 P를 보곤 머뭇거리더니 부모님이 아닌 옆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언니의 눈치를 보았다.
“나 잠깐 친구 좀.”
상선의 언니는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건성으로 “어”하고 대답했다.
상선이 다가오자 P는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은 탁한 공기 속에서 은은하게 담배 냄새가 나는 비상계단을 따라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날씨가 흐려서 굳이 그늘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 두 사람은 서늘한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던 거냐고 묻자, 상선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독서실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9시 반쯤이었을 거야.”
“주변에 사람 없었어?”
“흠… 다행히 아무도 없었지.”
‘다행히?’
“어. 그날따라 아무도 없더라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상선은 이 부분에서 조금 버벅거렸다.
“그 일이 벌어졌지.”
상선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휘적거렸다.
“갑자기 뒤에서 누가 팍 치고 도망가지 뭐야?! 당황해서 소리 질렀는데 아무도 없으니까 당연히 아무도 안 오고… 너무 아파서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있는데 네가 오더라구.”
P는 더 캐묻고 싶었지만 상선은 그 이상으로 설명해줄 게 없는 눈치였다.
“누가 널 때린 건지 기억나?”
“아니….”
상선은 P를 흘끔거리다 냅다 덧붙였다.
“지, 진짜야.”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시내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신고해. CCTV 있잖아. 그거 확인해보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으럴게.”
P는 어쩐지 상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다.
헤어지기 전, P는 우스갯소리처럼 던졌다.
“너 인스타 보니까 결국 밴드부 합격한 모양이더라? 고3에 데뷔라도 노리는 거야?”
P는 2년 전 상선이 밴드부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어….” 상선은 뺨을 긁적거리면서 우물쭈물했다.
“밴드부 부장한테 나의 능력을… 들켜… 버렸다고 해야 하나?”
상선이 하하, 하고 웃더니 시선을 피했다.
“그래서 밴드부 권유를 받았다고 해야 할 지….”
상선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지었다. 난처할 때 습관처럼 나오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짓는 바로 그 미소였다. P는 문득 상선과 자신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상선과 한 번도 친한 관계로 있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네가 베이스를 어지간히 잘 쳤나 봐.”
P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말을 던져보았다.
“너 지금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
상선은 눈을 끔뻑거렸다.
“엥? 뚱딴지같은 소리를… 갑자기 왜?”
“그냥.”
상선은 심각한 얼굴로 P를 살펴보았다.
“너 설마… 뒤늦게 내 베스트 프렌드 자리가 탐나는 거야?”
“푸하하.” P는 눈물을 닦았다. “넌 진짜 골 때리는 애야.”
상선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헉, 나 이제 가야겠다.”
“응, 수능 파이팅이다.”
“엉, 너도.”
상선은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연락해.”
두 사람은 조만간 만날 사람처럼 인사하고 헤어졌지만 아마 더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P도 상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의미 있는 인사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상선의 뒷모습에 대고 P는 “잘 살아라”라고 했다. 상선은 알아듣지 못했다. 면전에 대고 했더라도 알아듣진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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